성철스님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 50.“내 법어는 여러분 기도에 비하면 사족에 불과하다”

수선님 2023. 7. 16. 12:24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 10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했던 성전암에서의 성철 스님. 수많은 이들이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성전암을 찾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이라도 해 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같은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성철 인터뷰)

사람들은 큰절 파계사를 지나 작은 성전암으로 몰려왔다. 성철은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신도와 시자가 ‘점잖은 대치’를 했다.

“스님 좀 뵈러 왔습니다.”
“지금 정진중이십니다.”
“언제 뵐 수 있습니까?”
“오늘은 뵐 수 없습니다.”
“스님 뵈러 먼 길을 왔는데 어찌 안 되겠습니까?”

천제, 만수, 성일은 고개를 숙일 뿐 답을 할 수 없었다. 신도 거의가 서울이나 부산, 마산 등 큰 도시에서 성철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철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철조망 너머에서 서성거렸다.

성전암에는 신도들만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스님들도 계단 길을 올라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인홍 스님 또한 석남사 대중을 이끌고 성전암을 찾아왔다. 그 속에는 성철의 딸 불필도 있었다. 안거가 끝나는 전날이면 울진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대구에서 내려 걸어서 재를 넘었다. 무려 30리 길을 걸어 해가 진 뒤에야 성전암에 도착했다. 철조망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모두 큰방에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혹시 오늘은 큰스님이 말씀 하나 주실까.’

그러나 이내 “나가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성전암이 무너질 듯했다. 성철이 주장자를 휘두르며 대중을 내쫓았다.

“내 말 잘 들어. 나한테 속지 말라 이거야.”

인홍과 석남사 비구니들은 신발도 꿰지 못한 채 우르르 쫓겨났다. 겨울에는 성전암 주변이 온통 눈밭이었다. 언 발을 구르며 서 있으면 시자들이 소쿠리에 신발을 담아 내주었다.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어두운 산길을 서로 손을 잡고 내려갔다. 더듬더듬 뒤뚱뒤뚱 거리다 더러는 눈길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들은 큰 절 파계사에서 잠을 잤다.

법문은커녕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났지만 인홍과 석남사 대중은 철마다 성전암을 찾아갔다. 산을 오르는 30리 길은 그들만의 순례길이었다. 석남사 비구니들은 성전암 찾아가기와 쫓겨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석남사 안거는 성철에게 쫓겨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성철은 공부는 가르침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진해서 이뤄진다며 그들을 내쳤다. 분심을 일으켜 정진하라는 다그침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비구니들은 성철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사자 어미와 사자 새끼 같았다. 홀로 살아가라며 내치는 어미에게 달려드는 새끼들 같았다.

불필과 백졸도 출가한 이후에는 성전암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행자 시절에는 이것저것을 챙겨주었지만 삭발하자마자 성철의 태도가 돌변했다. 얼굴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암을 찾아갔을 때였다. 성철은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었다. 당황한 불필과 백졸은 무엇을 물었는지도 몰랐다. 쩔쩔매는 불필과 백졸에게 성철이 고함을 질렀다.

“저 가시나들 속가로 보내라. 절로 다시 가면 내가 그 절을 불사를 것이다.”

혼이 나간 불필과 백졸이 도망쳤다. 그 뒤통수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 법문노트 내놓고 가라!”

불필은 생명처럼 지니고 다녔던 법문노트를 내놓아야 했다. 수행의 지침이 없어지자 그간의 수행이 모두 빠져나간 듯 허전했다. 그렇다고 성철에게 다시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불필은 천제에게 법문노트를 찾아 달라 간청했다. 천제는 청을 뿌리칠 수 없어 법문노트 전체를 베껴서 전해주었다.

성전암에서 쫓겨난 사람 몇몇은 분을 참지 못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도인은 당신만 도인인가. 우리도 공부하면 도인이지.’

그렇게 분심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다. 성철이 무자비하게 내치면 시퍼렇게 눈을 뜨고 공부하는 사람이 나왔다.

“큰스님이 그 먼 길을 걸어갔어도 밥 한 술 주지 않고 내쫓은 것은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또 ‘왜 이렇게 쫓겨나야만 하는가’ 하는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혼자 걸어가라’는 뜻이다. 그렇다. 공부는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불필 ‘영원에서 영원으로’)

스님과 행자들은 그렇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면서도 다시 성전암이 그리웠다. 이 땅에 큰스님 계심이 그저 든든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공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느 날 고요한 성전암에 인기척이 났다. 제자 천제가 으레 내쫓으러 밖에 나가니 웬 부인이 홀로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부인은 꼭 성철을 만나봐야겠다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 그런 사람이 한 둘인가. 천제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해질녘이 되어 살펴보니 그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돌아갔겠지 여기고는 절집 식구끼리 저녁공양을 마쳤다. 성전암은 서서히 어둠을 빨아들이고 사위가 조용했다. 그때 밖에서 우당탕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본 바로 그 부인이 잠긴 문을 밀치고 들어온 것이었다. 부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성철이 소리쳤다.

“빨리 쫓아내! 빨리 쫓아내라니까.”

시자들이 부인을 붙잡았다. 부인은 끌려가면서도 성철을 노려봤다. 부인이 소리 질렀다.

“스님, 내가 할 말이 있어 왔소! 내 말 좀 들어주시오!”

성철은 그러나 쳐다보지 않았다. 부인은 바로 묵곡리에서 온 속가의 아내였다. 제자들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인을 파계사까지 끌고 내려갔다. 부인이 숨을 돌린 후 말했다.

“행자님들, 내 다시 올라가지 않을 테니 이제 올라가 보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전암을 찾아왔지만 이렇게 당차게 대든 경우는 없었다. 제자들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성철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내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데려가는 남편이 너무도 야속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담판을 지으려 성전암을 찾았던 것이다. 찾아가봐야 소용없는 줄 알았지만 찾아갔고, 헛걸음이라도 해서 속을 가라앉히려 했을 것이다.

1958년 초가을 아버지 이상언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9일장으로 치렀다. 성철은 부음을 듣고 묵곡리 속가에 제자 천제를 보냈다. 천제는 그때서야 그날 자신들이 쫓아낸 부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문상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소복을 입은 맏며느리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 거예요. 한참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얼마 전 억지로 쫓아낸 그 부인인 겁니다. 얼마나 무안하고 참담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남에게 굽힘없이 당당하게 살았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끌어온 삶을 77년 만에 내려놓았다. 유학자 이상언은 임종을 앞두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나는 성철 스님에게로 간다.”

사람들은 아버지 이상언이 자신을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에게 호통을 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남긴 말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도 불가에 들었음이었다.

아버지보다 한 해 먼저 어머니 강상봉이 세상을 떠났다. 1957년 봄이었다. 성철이 있는 곳이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다녔던 강상봉은 비록 세속에 있었지만 반듯하게 살았다. 큰스님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는지 늘 자신을 살폈다. 임종을 지키는 노스님에게 삭발을 부탁하고 어머니는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다음 생에는 출가하여 손녀(불필)의 상좌가 되고 싶다.”

떠나간 남편 영주를 기다리면서도 승려인 성철은 미워했던 아내 덕명도 결국 딸을 따라 출가했다. 훗날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가에 들었다.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세상을 버려서 얻은 참세상, 갇혀서 얻은 참자유, 그곳에는 세상보다 더 큰 법력과 희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량불사의 방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7. “절집 기왓장을 팔아서라도 승려교육을 해야 한다” 



『“종단 개혁을 구상하고, 도선사를 수행 정진도량으로 만들자는 데 마음을 같이했다. 성철과 청담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불사, 즉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승가대학을 세워보자는 염원을 담아 실달학원(悉達學園)이란 현판을 도선사에 걸었다. 실달이란 부처님 이름인 싯다르타에서 따왔다. 성철은 틈만 나면 승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도선사 실달학원 앞에 선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 두 스님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전암이 산자락 벼랑에 제비집처럼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그 안의 성철은 산보다 더 큰 존재였다. 법명이 누리를 덮었다. 그러자 성철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다. 파계사 한송 스님 상좌가 성전암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봤다. 파계사를 수행의 명찰로 만들고 싶었던 한송은 성철을 곁에 두려했고, 이를 알아차린 한송의 상좌는 성철을 극도로 경계했다. 성철이 파계사를 접수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성전암에 금은보화가 감춰져 있다.”

누가 퍼뜨렸는지 이런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보니 산 중 인심이 험했다. 한송의 상좌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성전암을 부수려고 모의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큰절에서 올라왔다. 성철이 군사정권에 협조하지 않자 파계사에 성철을 손보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말도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설(說)이었지만 성철의 제자들은 불안했다. 결국 성철은 산을 내려와야 했다. 상황이 다급해서 불서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 많은 불서들을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성전암을 떠나왔다. 헤아려보니 한 곳에서 10년이었다. 그 뒤를 천제와 만수가 뒤따랐다. 세 사람은 큰 절 쪽을 피해 반대편 방향으로 내려갔다. 산을 넘어야하는 30리 길이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성전암에 두고 온 불서였다. 흡사 볼모로 잡혀있는 듯했다. 천제는 나와서도 수시로 들러 불서가 ‘잘 계시는지’ 확인했다. 불서는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서 눈 먼 이들은 그것이 법계의 보물임을 알 수 없었다.

성철 일행은 갈 곳이 마땅찮았다. 부산으로 내려가 어느 대학총장의 별장에 머물렀다. 별장은 다대포에 있었다. 그 총장은 성철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려가 별장에 머물 수는 없었다. 산으로 가야했다. 그곳에서 여름을 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천제와 만수는 아직 스승을 모실만한 인연을 축적해 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철이 나서서 누구에게 청을 놓을 리도 없었다. 발 닿는 곳이 여수였다. 고찰 흥국사에 들었다. 주지에게 잠시 머물 방을 내줄 수 없냐고 사정했다. 주지는 빈 방이 없다고 단번에 거절했다. 성철이 들어갈 방 하나 없었다. 행색을 살피던 주지는 흥국사 위 암자에 가보라 했다. 세 사람이 다시 산길을 올라가 암자에 들었다. 홀로 암자에 머물던 노장이 반갑게 맞았다. 천제와 만수는 그 노장의 환대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암자에서 며칠 머물렀다.

스승을 모시고 이렇게 유랑할 수는 없었다. 천제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 스승 모실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천제는 먼저 석호(서옹) 스님을 떠올렸다. 서옹은 성철이 있던 천제굴에 자주 찾아왔다. 그래서 천제와 자주 대면했고 천제는 서옹의 온화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옹 스님(1912~2003)은 1932년 백양사 만암 대종사 문하에서 득도했다.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조실을 지내고 조계종 제5대 종정을 역임했다. 백양사를 고불총림으로 승격시키고 방장에 취임했다.

당시 서옹은 동국대학교 선원장을 맡고 있었다. 예상대로 서옹은 천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인자한 미소로 맞이했다.

“큰스님 모실 데가 마땅치 않습니다.”

순간 서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바로 천제와 함께 서울 외곽에 있는 절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대절해서 달려갔지만 군사지역이라 몇 번의 검문을 받았다. 갈 곳이 못되었다. 그런데 서옹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불현 듯 천제에게 말했다.

“이보게 천제, 도선사 청담 스님을 찾아가면 어떨까?”

이튿날 천제는 도선사를 찾아갔다. 도반이었지만 성철과 청담은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정화운동에 뛰어들어 동분서주했고, 한 사람은 한 곳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천제는 스승이 갈 데가 없다고 말했다. 청담이 놀라서 소리 질렀다.

“많고도 많은 절을 두고 어찌 성철 스님 갈 곳이 없단 말인가. 당장에 모셔 오거라.”

청담은 성철의 ‘미련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도 결코 얘기할 위인이 아니었다. 마침내 성철은 서울로 올라왔다. 여름의 끝자락에 도선사 일주문을 넘었다. 청담이 뛰쳐나와 성철을 부둥켜안았다. 이 광경을 보며 제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청담의 원력이 스며있는 도선사는 우람하면서도 정갈했다. 청담은 1961년 도선사 주지로 부임했다. 맨 먼저 한 일이 법당 정리였다. ‘부처’ 외에는 모두 산문 밖으로 쫓아냈다. 불상이 무속 탱화와 함께 모셔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내 뜯어냈다. 봉암사에서처럼 칠성탱화, 산신탱화, 용왕탱화 등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신도들의 항의가 거셌다.

“웬 마구니가 도선사에 나타났다.”

청담은 그들의 항의도 불구덩이에 집어넣어버렸다. 그랬더니 도선사에 인적이 끊겼다. 하지만 3년 후에는 신도들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청담은 야외법당, 법당, 석불전, 삼성각 등을 갖춘 중창불사를 회향했다.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성철과 청담은 북한산, 남한산성, 회암사 등을 찾아갔다. 성철은 청담과 서원문을 지었다. 육필로 번갈아 쓴 서원문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정진하여 청정비구의 길을 걷겠다는 맹서였다.

‘부처님과 조사님의 가르침을 중흥하고 말세에 정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삼가 삼보전에 천배 하옵고 다음의 서원을 올리니 만약 이 서원을 어길 때에는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겠습니다. (청담)
오직 삼보께옵서는 특별히 가호를 주시어 이 서원을 원만성취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성철)

1. 항상 산간벽지의 가람과 아란야에 머물고 도시 촌락의 사원과 속가에 머물지 않겠습니다. (성철)
2. 항상 고불고조의 가르침과 청규에 모범을 보이도록 실천하고 일체의 공직과 일체의 집회와 회의에 참석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성철)
3. 항상 부처님과 조사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 기타 어떠한 일에도 발언 또는 간여하지 않겠습니다.

갑진년(1964년) 9월 13일 삼각산 도선사 청정도량에서’

종단 개혁을 구상하고, 도선사를 수행 정진도량으로 만들자는 데 마음을 같이했다. 성철과 청담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불사, 즉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승가대학을 세워보자는 염원을 담아 실달학원(悉達學園)이란 현판을 도선사에 걸었다. 실달이란 부처님 이름인 싯다르타에서 따왔다. 성철은 틈만 나면 승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절집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교육을 해야 한다.”

도반의 마음을 섞은 실달학원은 실제로 1964년 11월 학인모집에 나섰다. 당시 ‘대한불교’에 실린 공고문의 ‘수학요강’은 다음과 같다.

1. 일상수행은 오직 불조유훈(佛祖遺訓)의 청규를 준수할 뿐이며, 개인의 사견과 망동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2.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계율(菩薩戒)의 수행을 다짐하며 단속(團束)한다.
3. 불전의 예는 아침에는 ‘대능엄주’를 외우며 저녁에는 ’대참회법‘으로 한다.
4. 불전에는 필히 사시중(巳時中)에만 마지를 올리고 기타 시간에는 불공을 봉행하지 않으며 삼보 이외의 잡신들에게 예배공양을 일절 엄금한다. 
5. 불공과 기도는 참회법으로 봉행하며 영가의 천도재 등은 전경(轉經)으로 행한다.
6. 잘 때와 대소변 시 및 특수한 시간 이외에는 항상 오조가사와 장삼(직탈) 법의를 입고 있을 것이며 외출 시에도 또한 그러하다. 
7. 공무 이외의 출타는 절대 불허한다(허용되는 특수사항에 관하여는 예외로 함).
8. 참선과 간경 과정은 원규(院規)의 정하는 바에 의한다. 
9. 의식과 금품 등의 시물(施物)은 공적 헌납에 한하고 개인 거래는 일체 불허한다.
10. 기타 세칙은 불조 청규 각 장에 의해 행한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다. 바로 봉암사결사 공주규약이다. 두 사람은 교육을 통해 한국불교를 바꿔보려 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르쳐보자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성철과 청담의 간절한 서원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2호 / 2015년 12월 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8. 최초의 사자후, 성철사상의 초전법륜 ‘운달산 법회’ 



『“김룡사의 성철은 인재불사를 서둘렀다. 사람을 키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퍼뜨려야 했다. 성전암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나눠줘야 했다. 절문을 열어 사부대중을 맞았다. 성철은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 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중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그렇게 하심(下心)을 갖춘 이들에게 비로소 법문을 했다. 자신이 집대성한 중도사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다.”』

▲ 김룡사에 머물던 시절의 성철 스님이 산내 대중과 대학생 불자와 자리를 함께한 모습.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북한산 도선사에서 청담과 겨울을 났다. 청담과 성철은 당시에 많은 사진을 찍었다. 아마 행자나 신도가 줄곧 따라다니며 도반의 ‘행복한 시간’을 담았을 것이다. 사진을 보면 흡사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표정이 밝다. 차 안에서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사진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도반의 보살핌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성철은 1965년 이른 봄 김룡사 산문을 넘었다. 처음으로 ‘조실’이란 벼슬을 달았다.

김룡사는 588년(신라 진평왕 10) 운달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 이름은 운봉사였다. 조선 중기까지의 사적은 알 수 없고, 1624년(인조 2) 혜총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문경 부사 김 씨가 운달산에서 불공을 드려 아들을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용(龍)이라 지어서 절 이름을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꿨다고 한다. 운달산 금선대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 따서 금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수십 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에 말사로 거느렸던 직지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절도 윤회를 하고, 흥망성쇠의 언덕 어딘가에 앉아 있음 아니던가. 제행무상이다.

당시 김룡사는 비구니 사찰이었다. 김룡사에 가려면 점촌에서 거의 40리를 걸어가야 했다. 깊고도 외진 곳에 있으니 신도들 발걸음이 뜸했다. 절은 크고 보시는 적다보니 비구니들이 절 살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때 산내 암자인 양진암에 머물던 묘전 스님이 성철을 모셔오자는 의견을 냈다. 큰스님 가르침도 받고 절도 일으켜 보려 했다. 묘전은 묘엄 등과 더불어 성철사상을 깊이 받들고 있었다. ‘집도 절도 없던’ 성철은 제자들과 도선사를 나왔다.

성철은 김룡사에서도 수행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김룡사 대중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참선을 했다. 성철에게서는 고승의 위엄과 기운이 우러나왔다. 당시 김룡사 선방을 찾아갔던 대원 스님은 성철의 풍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위풍당당한 기가 느껴졌어요. 천하를 누르는 듯 고고한 기상이었지요.”

김룡사 경내에 봄이 찾아와 노닐 때였다. 스승 동산 스님이 입적했음을 알리는 부음(訃音)이 운달산 골짜기를 타고 올라왔다. 성철은 소쩍새 울음을 밟으며 산을 내려갔다. 천제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전국에서 몰려든 스님과 신도들로 범어사 경내는 장터처럼 붐볐다. 장례식에는 3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목탁소리가 계곡을 메웠다. 영결식에서 청담이 조사를 바쳤다.

“큰 법당이 무너졌구나!/ 어두운 밤에 횃불이 꺼졌구나!/ 어린 아이들만 남겨두시고/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구나!/ 동산이 물 위에 떠다니니/ 일월이 빛을 잃었도다/ 봄바람이 무르익어/ 꽃이 피고 새가 운다.”
동산 스님은 일생 동안 가람 불사와 포교 활동에 매진했다. 또한 승단의 계(戒)를 바로잡았다. 불교정화운동을 위해 두 번이나 산문을 나섰다. 갈 곳 없는 수행자를 내치지 않았고, ‘닭이 천 마리면 그 가운데서 봉황이 나온다’는 말로 대중을 품었다. 조계종 종정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동산은 1965년 이른 봄에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보살계를 설하고 대중에게 선언했다.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오르지 아니하리라.”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서 그 뜻을 새겨보았다. 동산은 입적하는 날에도 대중과 함께 도량을 정성스레 비질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해질 무렵 홀연 몸을 바꾸었다. 육신보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겠다며 의사의 칼을 내려놓고 목탁을 든 지 53년, 세수는 76세였다.

성철은 스승의 사리탑비 비문을 지었다. 끝부분은 이렇다.

‘송(頌)하기를 영골사리는 청정하고 찬연하니 부처님이 실색하고 달마가 점두(點頭)하도다. 한 여름에 서리 내리고 엄동에 꽃이 찬란하도다. 해는 푸른 산마루에 비추고, 달은 붉은 계수나무에 걸렸도다. 흰 구름은 하늘에 비껴가고, 붉은 안개는 바다에 잠기었으며 푸른 용은 웅비(雄飛)하고 표범은 용맹스럽게 달리도다. 날카로운 칼날은 감로수요, 비둘기 깃은 맑은 차(茶)로다. 어두운 밤의 보배구슬과 낭떠러지의 무지개 다리로다. 시체가 쌓이어 산이 높고 피가 흘러 폭포가 되었네. 향기로운 바람은 땅을 휩쓸고 꽃비는 하늘에 가득하네. 봉황은 예천(醴泉)을 마시고 기린은 경림(瓊林)에 들었도다. 성주(聖主)가 홀(笏)을 잡고 춤을 추니 시골 늙은이가 한껏 노래 부르네.’ -문인 성철이 울며 짓다.

성철은 은사스님의 입적에 새삼 인간의 짧은 생을 실감했다. 일각에서는 성철이 스승인 동산 스님에게 소홀했다는 얘기들도 했다. 하지만 성철은 스승을 가슴에 고이 품고 있었다. 단지 깨달음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것이 진정 스승을 섬기는 길이었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정진해야 했으며 홀로 ‘중의 길’을 가야했다.

“오해를 받을만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며 동산 스님이 종단 대표로 남방에 다녀오시더니 남방스님들의 노랑가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노란 옷을 입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성철 스님은 봉암사에서 괴색을 주장했지요. 괴라는 것은 무너질 ‘괴(壞)’자입니다. 단색을 입지 말고 색을 무너뜨려서 입으라는 것으로 율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색을 무너뜨리느냐, 바로 청, 백, 흑이지요. 그런데 불교계 어른들이 남방을 다녀오더니 ‘그쪽을 따라해야 한다, 세계추세가 그렇다’고 하며 노란 옷을 입고 와버렸습니다. 이래놨으니 성철 스님이 보통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언론들도 괴색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산 스님께서도 나중에는 그게 옳다고 했습니다. 일부러 괴색 가사를 지어 나에게 스님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하여 내가 괴색 가사를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사이가 좋네, 안 좋네 하면 안 되지요.” (천제 스님)

김룡사의 성철은 인재불사를 서둘렀다. 사람을 키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퍼뜨려야 했다. 성전암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나눠줘야 했다. 절문을 열어 사부대중을 맞았다. 성철은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 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중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그렇게 하심(下心)을 갖춘 이들에게 비로소 법문을 했다. 자신이 집대성한 중도사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다.

1966년 성철은 하안거 기간에 중도법문을 했다. 비구, 비구니, 신도들과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회원 등 모두 100여 명에게 ‘반야심경’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를 설했다. 대불련 소속 학생들은 성철이 도선사에 머물 때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덕산거사로 더 알려진 이한상 씨도 학생들과 함께 김룡사 법문을 들었다. 법문은 20일 동안 계속됐다. 성철의 법문은 자상하면서도 예리했다. 대중을 향해 처음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성철사상의 초전법륜이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며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불보살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법문에 빨려 들어갔다. 불교 이론은 정연했고 비유는 정치(精緻)했으며 과학적인 인용은 흥미로웠다. 성철을 엄격한 수행자, 괄괄한 선승으로만 알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해박하고도 유려한 법문은 일반 재가불자와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이한상 씨도 이때 감명을 받아 평생 성철을 받들고 성철의 불교개혁 구상을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불교핵심 사상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했다. 또 최면술의 이치로 육도윤회를 설명하고, 연기(緣起)법문에서는 시간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우주과학의 원리를 동원했다. 쉽고도 오묘했고 또 타당했다.

“운달산 법회가 해인사 백일법회의 모태입니다. 백일법문은 운달산 법회의 되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또한 백일법문은 초점이 흐려지고 좀 산만한 면이 있어 아쉬웠습니다. 운달산 법회는 참석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 분위기가 진지했습니다. 그때 반야심경 사상을 다 설명하셨는데 정작 백일법문에는 그 말이 빠졌습니다. 산중 법문에 감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천제 스님)

이 대중법회를 사람들은 ‘운달산 법회’라 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법회의 전체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성철은 녹음 같은 것을 일체 하지 못하게 했고, 제자 천제가 몰래 녹음한 테이프도 닳아서 재생시킬 수가 없다. 이제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띄엄띄엄 증언해 줄 뿐이다. 앞으로 그 사람들도 띄엄띄엄 사라질 것이다.

법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등) 또한 깊이 감동했다. 20일 간의 법회가 끝난 후 다시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으로 이어졌다. 김룡사에서 법문을 들었던 박성배 교수와 김금태, 이진두 학생은 출가해서 성철의 제자가 되었으니 바로 원조, 원공, 원기이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9. 삼천배 



『“중이 신도를 대하는 데 사람은 안 보고 돈과 지위만 본단 말입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난 이 대문을 들어올 때는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일주문 밖에 걸어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하지. 사람만 들어오라 이겁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내가 뭐 잘났다고 당신을 먼저 만날 수 있나?’ 하지요. 부처님을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절을 삼천 번은 해야지요.”』

▲ 성철 스님의 ‘삼천배 시키기’는 숱한 이야기를 남겼고, 이제는 불교의 유산이 되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절은 실상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어떤 상(像)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절을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비록 흙덩어리나 썩은 나무에 절을 했더라도 성심을 다했다면 그 간절한 마음이 자신을 정화시킨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나로 인해 그대들이 공경스럽게 되는 것이다.[因我禮汝]” (남회근 ‘금강경 강의’) 

부처에게 절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지은 삼업(三業)의 몸뚱이를 아래로 내던짐은 그 자체로 참회이다. 욕심과 분노를 앞세우고 세상을 활보하던 사람이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아만(我慢)의 숨을 죽임이다. 그래서 절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온다.

성철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본격적으로 삼천배를 시킨 것은 천제굴에 있을 때부터였다. 성철에게 화두를 받기 위해 수백 리를 걸어 천제굴을 찾아온 사미, 사미니들은 삼천배부터 해야 했다. 성전암에서도, 김룡사에서도 ‘삼천배 후 화두 내리기’는 계속됐다. 성철의 ‘삼천배 시키기’는 숱한 이야기를 남겼고, 그 삼천배는 이제 불교의 유산이 되었으며, 그 유산은 지금도 일화들을 낳고 있다. 남겨진 이야기 중 하나를 펼쳐보자.

1965년 9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회원들이 김룡사를 찾아왔을 때였다. 그들은 전국의 사찰을 돌며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는, 이른바 구도 행각 중이었다. 성철은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학생들은 다른 절에서 했던 것처럼 대뜸 성철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성철은 수업료를 내라고 했다. 절에서 수업료를 받는다하니 학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성철이 껄껄 웃으며 절집의 수업료는 속가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 수업료라는 것이 대웅전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구도의 여정에 모두 지쳐있었고, 삼천배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삼천배는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성철이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나가거라. 너희들은 여기서 물 한 모금 얻어먹을 자격도 없는 놈들이다.”

성철의 벼락같은 외침에 학생들은 그만 얼어붙어버렸다. 성철은 그런 학생들이 안 돼보였는지 다시 목소리에 힘을 뺐다. 그리고 어느 병든 비구니가 삼천배를 해서 다시 살아난 사연을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폐병 말기로 죽음을 기다리는 비구니가 있었다. 비구니는 죽기 전에 성철 스님의 법문을 한번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어느 날 비구니는 성철이 머물고 있는 김룡사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겨우 절 근처에서 내렸지만 한 발을 떼기에도 너무 힘이 들었다. 성한 사람이라면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비구니에게는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한걸음 걷고 한참을 쉬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서 일주문을 넘어갔다. 비구니는 겨우 성철의 방 앞에 이르러서 한 말씀을 청했다. 성철은 병색이 완연한 비구니를 쳐다보더니 이내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먼저 삼천배를 하고 오거라.”

비구니는 원망을 섞어 성철을 바라봤다.

“할 수만 있으면 왜 안하겠습니까?”

그러자 성철이 고함을 질렀다.

“아니 그럼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고 있음이더냐?”

할 수 없이 비구니는 삼천배를 시작했다. 걷기도 힘든 몸이니 절은 더디고 더뎠다. 김룡사 대중은 차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몇 번의 해가 뜨고 졌다. 비구니는 어렵게 어렵게 삼천배를 마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비구니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웃음기를 머금었다. 환희심이 생긴 비구니는 다시 삼천배를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삼천배를 계속했고, 비구니는 마침내 몸에서 폐병을 떼어냈다.

비구니 이야기를 마치고 성철이 학생들을 두루 바라봤다. 이래도 피곤 따위를 핑계로 삼천배를 안할 것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학생들은 마침내 마음을 냈다. 삼천배를 시작했다. 그때를 지도교수였던 박성배 교수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드디어 삼천배의 시작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울렸다. 겨우 백배를 하고 나니 벌써 미칠 것 같았다. 바깥 열과 속의 열이 합쳐져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숨은 콱콱 막혔다. 그래도 삼백배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백배가 고비였다. 이미 우리의 옷은 물속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사람들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기진맥진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무릎은 깨져 피로 얼룩지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자 학생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자비문중이라 들었는데 이게 자비문중에서 하는 짓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학생들이 해주니 마음속으로는 기뻤지만 그래도 지도교수라고 큰 소리를 쳤다.

“잔소리마라. 사람이 한번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야. 자비문중인지 잔인문중인지는 다 하고 난 다음에 따지자.”

나중에는 헛소리를 하는 학생도 있었고 벌떡 드러누워 막무가내로 일어나지 않으려는 학생도 있었다. 그 다음 천배, 특히 마지막 천배는 어떻게 해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한 번도 쉬지 않고 8시간여 만에 우리는 모두 삼천배를 무사히 끝마쳤다. 오후 1시에 시작한 삼천배는 8시30분에 끝났다.’

삼천배를 하고 난 후에는 모두가 변했다. 계속되는 박성배의 증언이다.

“우리들은 변했다. 무엇보다도 조용해졌다. 그렇게도 말이 많고 밤낮 시비만 일삼던 학생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다. 그것은 커다란 변화였다.”

한 학생은 심경의 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몇 푼어치 안 되는 지식을 가지고서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생각해보면 참 우스워요.”

그렇게 삼천배를 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에 변화가 왔다. 교만과 위선이 빠져나간 마음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었다. 성철은 훗날 왜 삼천배를 시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중이 신도를 대하는 데 사람은 안 보고 돈과 지위만 본단 말입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난 이 대문을 들어올 때는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일주문 밖에 걸어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하지. 사람만 들어오라 이겁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내가 뭐 잘났다고 당신을 먼저 만날 수 있나?’ 하지요. 부처님을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절을 삼천 번은 해야지요.”

부처님을 뵙고 절을 하면 결국 자신이 보이고, 종국에는 다른 사람이 보였다. 미천하고 연약한 자신이 여기 이렇게 존재함이 고마웠다. 그 고마움은 고스란히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바쳐진다. 성철은 절을 하면서 일체중생을 위해 참회하라고 일렀다. 절을 통해 신심을 키우는 성철의 ‘절 수행’은 독특했다. 누구나 삼천배를 하고 나면 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절은 묘했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한 사람은 발심의 깊이가 다르다. 그리고 그들은 절을 하면서 신심을 키운다. 각각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개울물도 바다에 이르면 한 맛인 짠 맛이 되는 것처럼 절을 하고 나면 누구나 이치가 서고 목표가 뚜렷해진다. 기도 가운데 제일 큰 기도가 절이다. 절을 해보면 밑바닥부터 낱낱이 자기가 지은 허물이 드러나 참회가 안 될 수 없다. 그리고 무릎과 머리와 마음이 땅에 닿으면 무한한 힘과 지혜가 생긴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발원은 참회와 감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참회야말로 발원에 앞서는 수행이다. 그리고 그 참회는 절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성철은 누구에게든 절하라 일렀다.

“절하다 죽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다시 일렀다.

“남을 위해 절하시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하는 것이 잘 안 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아래 한 점도 안 되는 산에서, 그보다 작은 절에서, 그보다 작은 법당에서, 그보다 작은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그러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내가 ‘보였다’. 자신이 보이고 그리고 작은 자신을 있게 한 모든 존재가 보였다. 수없이 자신을 버리면 환희심이 물결처럼 일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는 가슴을 열고, 누구는 흐느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0.“내 법어는 여러분 기도에 비하면 사족에 불과하다” 



『“‘스님 절을 마쳤습니다.’ 


성철은 미리 끓여놓은 죽을 들게 하고 뒷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났을 때 여인이 집에 가봐야겠다며 인사를 올렸다. ‘더 쉬지 않고 벌써 가려 하시오.’ ‘아들이 집에 오는 꿈을 꿨습니다. 가봐야겠습니다.’” 』

▲ 성철 스님 사리탑 앞에서 삼천배를 하는 불자들. 삼천배는 백련암 불자들의 가장 일상적인 수행법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사람들은 절에서 기도드린다 함은 시주금과 공물을 바치고 소원을 비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소원을 빌 때도 본인보다는 스님이 대신해주기를 바라고 그래야 기도의 효험이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성철은 타력(他力)에 의해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다고 단언했다. 오직 자력에 의한 기도와 불공만을 하도록 했다. 또 기도는 참회부터 해야 한다고 일렀다. 억울할수록, 슬플수록, 아플수록 참회하여 삼업(三業)을 씻어야 한다고 일렀다.

“자신의 참회가 다 끝난 후에 남을 위해 기도하라.”

성철은 삼천배를 권하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줬다. 다음은 6·25전쟁 중에 일어난 일로, 성철이 삼천배를 시키며 신도들에게 종종 들려준 이야기이다.

성철이 청담과 함께 고성 문수암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전쟁은 전장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병사들만 죽거나 다치는 것이 아니었다.

온 마을이, 온 산하가 비명을 지르고 신음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산을 올라왔다.

어느 날 여인이 가파른 산길을 타고 무이산 문수암 경내로 들어섰다. 온 몸이 땀에 젖어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여인은 다짜고짜 성철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렸다.

“스님, 제발 제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성철이 연유를 묻자 여인은 한숨과 눈물을 섞어 얘기했다. 진주 묵실에 사는 여인에게는 금쪽같은 외동아들이 있었다. 그런 아들이 전쟁에 끌려가 3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백방으로 탐문했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아들이 속한 부대가 전장에서 몰살했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움켜쥐어야 했다.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천하 도인이 문수암에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달려온 것이다. 얘기를 이어가던 여인은 아예 방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스님 제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성철은 여인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나 같은 산 중이 어찌 전쟁에 나간 당신 아들을 살릴 수 있겠소.”

그러자 여인은 차고 있던 전대를 풀었다. 논밭을 모두 팔아 만들어 온 20만원이었다. 당시에는 거금이었다.

“이 돈으로 기도를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당신 아들이 20만 원 짜리란 말이요? 어찌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겠소?”
“스님,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성철은 엎드린 여인을 한참 굽어봤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하겠소?”
“시켜만 주시오. 아들만 살아온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럼 이 돈을 가지고 내려가 저 산 아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시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쌀 몇 되를 사서 아홉 번 찧고 손질하여 절로 가져오시오. 절대로 땅바닥에 놓지 말고 가져와 부처님께 올리시오.”

며칠 후 다시 여인이 산을 올라왔다. 아들 살릴 마음을 앞세우고 허겁지겁 달려와 기진맥진한 채 경내로 들어섰다.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공양미가 들어있는 보따리는 받쳐 들고 있었다. 이를 보고 절집 일을 하는 노인이 보따리를 들어주려 했다. 성철이 그 광경을 보고 막대기로 후려갈기며 고함을 질렀다.

“이 놈아, 남의 기도를 망치려 드느냐!”

여인은 성철이 시킨 대로 가져온 쌀을 탁자 위에 공손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법당과 절 마당을 깨끗이 쓸고 닦았다. 목욕까지 마친 여인에게 성철이 말했다.

“내 말 잘 들으시오. 당신 아들은 나 같은 중이 살리는 게 아니오. 당신이 직접 당신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말이오.”

그러자 여인이 두 손을 모았다. 얼굴에서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가져온 쌀로 공양을 지어 부처님께 올리고 삼천배를 하시오.”

여인이 삼천배를 시작했다. 아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하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새벽 3시경 성철의 방안으로 여인의 음성이 들어왔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성철이 문을 열었다. 여인이 땅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었다.

“스님 이천배까지는 했는데 죽으면 죽었지 더는 못하겠습니다.”

성철은 단호하게 나무랐다. 

“그럼 아들은 살지 못하겠네.”

목소리가 새벽공기보다 차가왔다.

“만약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 바로 뒤에 잃어버린 아들이 있어. 호랑이가 보살에게 네 다리를 하나 주겠느냐, 아니면 뒤에 있는 네 아들을 주겠느냐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 다리를 내놓아야 하겠지요. 알겠습니다, 스님. 계속 절하겠습니다.”

여인은 다시 법당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삼천배를 마치고 법당을 기어 나오자 햇살이 눈을 찔렀다. 눈물이 나왔다.

“스님 절을 마쳤습니다.”

성철은 미리 끓여놓은 죽을 들게 하고 뒷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났을 때 여인이 집에 가봐야겠다며 인사를 올렸다.

“더 쉬지 않고 벌써 가려 하시오.”
“아들이 집에 오는 꿈을 꿨습니다. 가봐야겠습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그대로 곯아떨어진 여인의 꿈속에 아들이 나타난 것이다. 절뚝거리며 산을 내려가는 여인의 모습을 성철은 오래 지켜보았다. 

여인은 10여일이 지나 다시 문수암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들을 앞세우고 느긋하게 산을 올라왔다. 여인이 진주 집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자 정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에게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들이 속한 부대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몰살을 당했고, 아들은 시체더미에 깔려 있었다. 송장 밑에서 죽어가고 있던 아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다. 그랬더니 시체더미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겨우 기운을 차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문득 강이 보였다.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강을 건너니 어떤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아들을 오두막으로 데리고 가서 군복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내주었다. 아들은 그렇게 살아 돌아왔다.

그렇게 여인은 스스로 아들을 구했다. 성철은 단지 안내만 했을 뿐이었다. 이렇듯 자신의 기도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무조건 스님들에게 복을 달라고 한다. 그들은 업장이 소멸돼야 복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성철은 삼천배를 통해 자신을 바로 보도록 했다. 극한 고통을 이겨내고 ‘불전 3천배’를 올린 신도들은 비로소 성철을 뵙고 ‘감격’한 채 법어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철은 둥근 원 하나를 그린 백지 한 장씩을 나눠주고는 한 마디 했다.

“날마다 이 ‘원’자 앞에 108배를 올리며 참회기도를 하라.”

커다란 가르침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면 성철은 웃음을 머금고 이렇게 일렀다.

“말세 중생은 자기 기도는 자기가 하는 거요. 내 법어는 여러분 기도에 비하면 사족에 불과합니다.”

신부나 수녀, 또 기독교 신자들도 삼천배를 하고 성철에게서 화두를 배워갔다. 삼천배를 시킬 때 성철은 그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다.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며 절 하시오.”

성철은 ‘참회’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아비라 기도’를 만들었다. 비로지나 법신진언인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를 염송하며 절을 올리도록 했다. ‘옴’은 우주생성 원리이고 ‘아비라 훔 캄’은 법신을, ‘스바하’는 회향을 뜻한다. 그래서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일이 뜻대로 되게 하소서’라는 의미이다. 아비라 기도는 성철이 남긴 유산이다.

“108배도 본래 있었고 장궤합장도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능엄주와 회향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요소들을 108배, 장궤합장 30분, 능엄주 독송, 회향게 이런 순서로 구성하신 분이 성철 스님이시다. 성철 스님께서 불교의 모든 염불, 기도, 수행 방법들을 살펴본 후, 중생들에게 아비라기도라는 최상승법을 내놓으신 것이다. 이런 순서로 기도를 하다보면 이 기도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졌는지를 체득하게 된다. 아비라기도는 우리 몸의 구성 원리와 특성, 우리 식(識)의 특성, 기의 흐름 등을 참작하며 완벽하게 만들어졌다.”(장성욱 ‘성철 스님과 아비라기도’)

성철이 이미 존재했던 수행방법을 활용하여 업장을 녹이는 가장 효율적인 기도방법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5호 / 2015년 1월 1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 50.“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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