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1. 30년 만에 가야산으로 돌아가다 ~ 55. ‘가야산 호랑이의 사자후’ 백일동안 이어지다

수선님 2023. 7. 23. 13:05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1. 30년 만에 가야산으로 돌아가다 

 

『“성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패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정화란 모름지기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성철은 정화운동 초기에 15명으로 구성된 정화대책위원에 선임되었지만 이를 박차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종단은 ‘세 불리기’에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

▲ 1967년 7월 해인총림으로 격상된 대가람 해인사.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 스님은 총림 운영의 기본을 계정혜로 삼고 불교개혁을 외쳤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해인사 백련암에 들었다. 1966년 가을이었다. 해인사 주지 자운 스님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였다. 자운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김룡사에서 어렵게 지내신다 들었네. 백련암을 비워놓았으니 이제 그만 해인사로 오시라고 말씀드리게. 해인사는 성철 스님이 출가한 곳이니 법 고향이 아니겠는가.”

 

성철은 처음 삭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30년 동안 제방을 돌며 수행했고, 도를 이뤘다. 그리고 스승 동산 스님이 머물던 백련암에서 어느덧 스승이 되었다. 세수 55세였다. 스승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 가르침을 내려야 했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

 

해인사 일주문의 주련이다. 일천 겁(劫)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며, 일만 세(歲)를 뻗쳐도 언제나 지금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오로지 지금 뿐이요, 이는 달리 말하면 지금 속에는 과거의 일천 겁이 녹아 있고 미래의 만세(萬歲) 또한 들어있음이었다. 흘러간 것은 흘러갔지만 흘러간 것이 아니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음이었다. 성철은 옛날이 지은, 또 내일이 들어앉은 해인사 속으로 들어왔다.

 

가야산은 육산(肉山)이면서도 골산(骨山)이었다. 홍류동 계곡물은 변함없었고, 낙락장송의 기개도 옛날과 같았다.

 

“이산 저산 다녀봐도 가야산만큼 편한 산은 없더라. 지리산은 크지만 밋밋하고, 금강산은 삐죽삐죽 날이 서있지.”

 

성철은 가야산을 좋아했다. 제자 천제는 흥에 겨워 가야산을 예찬하는 성철의 시를 기억하고 있다.

 

‘伽倻山色 千古秀 紅流洞天 萬世明(가야산색 천고수 홍류동천 만세명)’

 

그 가야산 속 백련암은 해인사 내 암자 중에서 맨 꼭대기에 있었다. 주변은 기암절벽이 즐비해서 가야산 제일 승지로 꼽혔다. 성철은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는 진리를 본 산승으로서 한산이 천태산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가야산의 경치를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산은 수나라 말기와 당나라 초기의 난세에 살았다. 비승비속인 채로 천태산 한암(寒巖)이란 동굴에 기거하며 빼어난 선시 300여 편을 남겼다. 성철은 딸 불필에게도 ‘한산시’를 읽으라 권했다.

 

“한산이 숲속의 석벽이나 마을 인가의 마른 벽에 적은 300여 수의 시와 습득의 시 약간을 얻어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기 ‘한산시’야. 한번 읽어봐. 두 사람은 바보처럼 살면서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했지만 누구보다 쾌활하고 자유자재한 도인이었는기라.”

 

성철은 한산의 선시를 즐겨 암송했다. 

 

‘내 천태산의 경치 속으로 들어온 뒤로, 몇 겨울 봄을 어느새 지났던고. 산과 물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절로 늙나니, 뒤에 올 많은 사람 안타까워라.’

 

천태산이 성철에게는 가야산이었고, 한암이 곧 백련암이었다. 백련암은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 서산대사의 제자 소암 스님이 중창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련암 마당에 불면석(佛面石)이 있다. 부처님 얼굴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성철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바위처럼 백련암에 앉아 물소리가 되고 바람소리가 되었다. 스스로 자연이 되었다. 백련암 입구의 산죽 숲, 신선대 바위 위의 늙은 소나무, 홀연히 찾아드는 아침 햇살, 가야산을 덮고 있던 구름바다를 아꼈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했다. 총림이란 종합도량으로 세 가지를 갖춰야했다. 참선하는 선방, 교리를 가르치는 강원, 계율을 익히는 율원이 있어야 했다. 그 총림의 최고지도자가 방장이었다. 해인사는 1967년 7월 임시중앙종회에서 통과시킨 총림법에 의거하여 해인총림으로 격상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종정에 취임한 도반 청담의 역할이 컸다.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이 말했다.

 

“앞으로 불사 잘하라는 ‘보국대’로 징발당했다.”

 

보국대란 일제강점기 전쟁에 동원된 노동자들을 일컬었으니 억지로 떠맡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방장으로서 제대로 된 수행처를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내비쳤다.

 

“총림운영의 기본방침은 계(戒), 정(定), 혜(慧) 3학을 바탕으로 해서 엄격한 계율과 일관된 이론, 철저한 참선 정진으로 견성성불하는 것입니다.”

 

성철은 부단히 불교개혁을 외쳤다. 그것은 바른 인재를 양성함이었다. ‘중다운 중’을 키워야 불교가 살아나고, 승려가 신도들을 속이지 않고, 절집에서 귀신을 쫓을 수 있었다. 1954년 대통령 이승만의 유시로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1962년 통합종단 출범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는 외형상 매듭이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봉합에 불과했다. 권력에 의한 타율적 정화운동은 엄청난 부작용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화운동의 화신이랄 수 있는 청담조차 부패한 종단을 개탄했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의 무리가 들끓는 썩은 못이다.”

 

사실 불교정화운동은 제대로 된 승려가 없는 데서 비롯되었다. 불교가 세속화되어 절집이 굿집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하지만 정화불사가 ‘정화’를 내세운 절 뺏기 싸움으로 전개되었고, 이에 세를 불리는 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이때 승적은커녕 족보조차 희미한 자들이 머리를 깎고 비구를 자처했다. 

 

성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패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정화란 모름지기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성철은 정화운동 초기에 15명으로 구성된 정화대책위원에 선임되었지만 이를 박차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동구불출 했다. 그 후 종단은 ‘세 불리기’에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묵은 도둑 몰아낸다고 들어온 사람들이 도둑이 되어 종단을 능멸했다. 그들이 묵은 도둑이 되었음이었다. 그 폐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추이를 성철은 정확하게 예견했다. 성철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정화불사의 기승전결을 예측할 수 있었다. 조계종단은 대처승만 몰아냈지 수행승을 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경내에는 미신적 숭배물이 넘쳐나고, 승려들의 의식은 천박했다. 성철은 총림을 제대로 만들어 진정한 개혁을 이뤄보려 했다. 해인총림이 설치되고 첫 동안거를 맞았다. 선원에 60명, 강원에 70명 등 모두 160여 명이 안거에 들어갔다. 강원의 경전 강독은 지관, 율은 일타, 원시불교는 법정이 맡았다. 전국에서 선승들이 간절한 마음을 앞세우고 산문을 넘었지만 해인사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름만 총림이었다.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데는 공감했지만 종단의 지원은 미미했다. 성철은 방장 자격으로 ‘해인총림 계획안’을 보내 종단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해인총림 운영에 관한 건의문’은 사뭇 절절하다. 

 

‘정화운동 이래 200명 가까운 승려가 한 도량에 모여 정진하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대중이 한데 모였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승가정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장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가능성을 보이는 상서(祥瑞)이기도 합니다. (…) 해인총림은 해인사만의 총림일 수 없습니다. 어떤 특정인의 도량도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 종단의 염원이던 도량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수행해야 할 불제자의 사명인 동시에 우리들의 공동운명체입니다. 종회의원 여러 스님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원력 아래 거(擧)종단적인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을 호소하는 바이며, 우선적으로 제12교구에 한해서 본말사 중앙분금회 및 3대사업비 전부를 해인총림운영비 일부로 공제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물론 성철이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안을 보내도록 한 것은 성철이 얼마나 승려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지, 또 총림의 재정 확보가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지 알 수 있다. 승려교육이 곧 불교개혁의 길이었다. 

 

성철은 이와 더불어 ‘승가대학 설치 계획안’도 함께 보냈다. 계획안을 보면 재단은 ‘학교법인 해인총림’이며 정원은 100명(매 학년 25명)으로 4년제 대학을 세우려 했다. 이수해야할 필수교양과목으로 국어, 논리학, 법학통론, 심리학, 체육, 문화사, 문학개론, 정치학, 윤리학, 음악, 자연과학개론, 사회학, 경제원론, 생물학, 영어 등이 들어있다. 일반대학과 다름이 없으며 교직과목을 이수케 하여 졸업자는 정교사 자격증을 받도록 했다. 승가대학 설립은 ‘대한불교’ 사장 이한상(덕산) 씨가 앞장섰다. 덕산은 성철의 뜻을 받들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승가대학 인가는 나오지 않았다. 정부는 왜 승가대학 설립을 거부했을까. 이를 둘러싼 여러 설이 떠돌고 있다. 

 

결국 승가대학은 종단도 정부도 외면했다. 성철의 ‘교육을 통한 불교개혁’의 구상이 깨지고 말았다. 성철은 가야산에서 젊은이들이 포효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청정 도량에서 청정 승려를 배출하려는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6호 / 2016년 1월 6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2. 덕산거사와 함께 사라진 인재불사 원력 

 

『“성철과 덕산의 인재불사 발원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참된 시주와 불공은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던 성철이 덕산을 가까이 했음은 그에게서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철의 반대에도 권력에 맞선 것은 어쩌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

▲ 봉암사에서 자리를 함께 한 서경수 교수, 성철 스님, 숭산 스님, 덕산거사, 박성배 교수.(사진 왼쪽부터)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승려 정규대학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속에 또 아쉬운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재가불자 덕산 이한상(1917~1984)이다. 사람들은 덕산(德山)이란 그의 호를 따서 ‘덕산거사’라 불렀다.

 

절집에 처사는 많지만 거사는 드물다. 처사란 이름에서는 은둔 선비, 낭인 같은 체취가 풍겨 나온다. 하지만 거사란 호칭은 자못 무겁다. 비록 산문 밖에 있지만 오계를 지키고, 삼보에 보시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거사라 부른다. 인도에는 유마(維摩), 중국에는 방(龐), 한국에는 부설(浮雪)거사가 있었다. 이렇듯 엄중한 호칭을 왜 이한상에게 붙였을까. 성철은 왜 그를 아꼈을까.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덕산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단신 상경했다. 고학으로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덕산은 풍전산업과 대한진척공사를 창업하여 1960년대 초에는 3000명이 넘는 종업원을 거느린 최대의 토목건축회사로 키웠다. 정부종합청사, 조흥은행 본점, 섬진강댐, 팔당댐, 풍전상가 등을 지었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여 그가 세운 건물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덕산은 한마디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큰돈을 벌어 불교계에 아낌없이 썼다. 삼보장학회를 창립하여 미래의 인재들을 후원했고, 삼보학회를 설립하여 ‘한국불교 최근 백년사’를 편찬했다. 재가불자 모임인 ‘달마회’ 회장을 맡았고, 삼보법회를 만들어 당대 선지식을 모시고 정기법회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요법회였다. 이로써 도심의 대중법문시대가 열렸다. 그 밖에도 종립학교 교법수호회와 군 포교의 이정표를 세운 군법승 설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불교 교재 편찬 및 배포 등으로 불교교육의 전기를 마련했다.

 

덕산은 종단의 강력한 권유로 경영난에 빠진 대한불교신문사(현재 ‘불교신문’)를 인수해야 했다. 그는 ‘대한불교’를 월간에서 주간신문으로 바꾸고 불교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소통의 매체로 육성시켰다. 또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봉은사에 수도원을 차려 학업과 수행을 겸하여 정진토록 배려했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대불련 총재를 맡아 수련대회와 구도행각에도 동참했다. 1968년 5월 덕산의 사재 헌납으로 장충단공원에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졌다. 제막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여 치사를 했다. 각계 인사, 스님과 신도 등 3만 여명이 참석했다. 덕산 생애의 찬란한 날이었다.

 

‘사명대사의 성상은 박대통령의 원력으로 세워지는 이충무공 동상과 김종필 씨에 의하여 덕수궁에 마련되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 등과 함께 애국선열조상건립 제1차년도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대한불교)

이처럼 덕산은 당대 최고 권력자들과 나란히 동상을 세우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1960년대 중후반은 덕산의 이름이 불교계를 풍미했다. 거의 모든 불사 뒤에는 덕산이 있었다.

 

덕산은 성철의 초전법륜이라 일컫는 운달산법회에서 법문을 들고 성철을 지극히 섬기게 된다. 덕산은 성철의 법문에 빨려 들어갔다. 그 후 성철이 정규 승가대학을 세우기 위해 지혜를 모을 때도 그 곁을 지켰다. 인재불사를 서두르는 큰스님의 발이 되고 손이 되었다.

 

“덕산거사가 성철 스님을 모시고 학교 터를 보러 다녔지요. 산속에 대학을 지어 불교를 바로 세우자는 데 뜻을 모은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서 덕산거사의 차가 수렁에 빠져 성철 스님이 고생한 적도 있었어요.” (조호정 전 삼보법회 회장)

 

그러던 덕산에게 불행이 다가왔다. 1969년 3월 덕산은 전국신도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불교 안팎의 신망이나 불심으로 볼 때 마땅히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출마자가 거물이었다. 바로 당대의 실력자인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소식을 듣고 성철이 덕산을 불렀다.

 

“이번 신도회장 자리는 덕산이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네.”

 

하지만 덕산은 성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큰스님, 제가 이만할 때 신도회장을 맡아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승가대학 세우시려는 큰스님 뜻도 따르고 불교신도회의 면목도 일신해 보고 싶습니다.”

“그 뜻은 알지만, 저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할 구석이 있을 것이야.”

 

그래도 출마를 강행했다. 하지만 권력의 비호를 받은 이후락의 위세 앞에 덕산은 너무나 작았다.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신심도, 그간의 보시도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어쩐 일인지 사업마저 기울었다. 그리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 1971년 7월 가족을 데리고 이 땅을 빠져나갔다.

 

덕산의 출국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권력의 견제가 날카로워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과 기계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다가 점점 인간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설(박성배 추측) 등이 나돌았다. 지금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황망히 재산을 처분하고 서둘러 미국으로 떠난 이면에는 덕산이 차마 밝히지 못한 뭔가가 있을 것이다. 실체를 알기위해 불을 밝히면 역시 권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덕산은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카멜 산정에 삼보사를 설립하고 수도원을 조성했다. ‘대한불교’(1973년 2월18일자)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에 삼보사가 건립됐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종단 전체의 사업으로서가 아니라 신도 개인의 힘으로 이룩된 사찰이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한상 거사의 원력으로 된 사찰. 아름다운 카멜계곡,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사찰. 삼보사의 창건을 계기로, 우리 불교가 좀 더 웅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길 바란다.’

 

새 신도회장인 이후락도 승려대학을 세워보려는 성철의 구상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백련암을 찾아가 성철에게 정규대학 설립에 앞장서겠으니 자신의 손을 잡아 달라 청했다. 그러나 성철은 답을 주지 않았다. 제자 원택 스님 또한 스승으로부터 덕산거사 얘기를 종종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 온 덕산이 성철을 찾아왔다. 백련암에 도착한 덕산은 성철과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누고 산을 내려갔다. 원택은 산 밑까지 배웅했다. 오솔길을 내려가던 덕산이 원택에게 말을 건넸다.

 

“스님, 스님은 제가 모르는 얼굴입니다.”

“예, 저도 거사를 처음 뵙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스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동생한테 ‘인천 월미도 땅을 큰스님께 드려서 원하시는 정규대학 만들도록 해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제 와 보니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큰스님 말씀 듣고 앞뒤 잘 살폈더라면 지금 해인사 강원이 정규대학이 되었을 것인데…. 그러면 큰스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원택은 그런 덕산이 안쓰러웠다.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 씨는 하산하는 길에 몇 번이나 말꼬리를 흐리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그 말끝마다엔 탄식과 회한, 그리고 큰스님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미국으로 돌아간 덕산은 1984년 8월23일 입적했다. 그가 세운 카멜 삼보사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덕산거사가 남긴 것들이 사라져가니 안타깝습니다. 달마회는 없어졌고, 정릉에 있는 삼보정사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장충단공원 사명대사 동상을 어디에서 관리하는지 찾아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에도 적(籍)이 없었습니다. 시청에서도, 구청에서도, 공원관리공단에서도 그저 모른다고만 합니다. 참으로 덕산거사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조호정 전 삼보법회 회장)

 

그 말을 듣고 문득 사명대사 동상의 안부가 궁금했다. 장충단공원에 막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공원에 내리는 겨울비는 쓸쓸했다. 동국대 후문 길옆에 서 있는 사명대사 동상은 천을 둘둘 감고 있었다. 아마 무슨 탈이 난 듯했다. 동상 앞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었다. 공원 내 다른 조형물마다에는 안내판이 있었다. 이한상은 시나브로 지워지고 있었다. 동상 제막식과 법요식에 참석한 스님과 신도들도 거의가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오직 사명대사 동상만 남아서 천을 둘러쓴 채 겨울비를 맞고 있었다.

 

성철과 덕산의 인재불사 발원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참된 시주와 불공은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던 성철이 덕산을 가까이 했음은 그에게서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철의 반대에도 권력에 맞선 것은 어쩌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성철이 그 욕심을 제어하지 못함도 운명 아니겠는가. 덕산거사의 섬광처럼 빛났던 불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7호 / 2016년 1월 13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3. “돈과 여자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이름병이야” 

 

 

『“옛 스님들도 늘 하신 말씀이다. ‘죄 중에 사람을 죽이는 죄가 가장 크지만, 공부니 수도니 한답시고 허송세월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하루에 만 명을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

▲ 수좌들에게 엄격한 수행을 요구한 성철 스님은 죽비를 들고 선방에 들이닥쳐 졸고 있는 선승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후려치곤 했다.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해인총림 방장 성철은 선방에서 참선 수행하는 수좌들을 아끼고 존중했다. 그러자니 절 살림을 꾸려가는 스님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대신 선방 수좌들에게는 엄격한 수행을 요구했다. 안거 후에는 필히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을 하도록 했다.

 

성철은 죽비를 들고 선방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졸고 있는 선승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밥값 내놔라, 이놈아!”

 

봉암사 결사 시절과 변함이 없었다. 성철이 이토록 밥값을 내놓으라 소리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의 총림에 가보면 ‘신도들이 보시한 한 톨의 쌀은 무겁기가 수미산과 같으니 여기서 도를 성취하지 못하면 반드시 축생으로 태어나 그 빚을 갚아야 하리라’는 문구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애써 농사지은 소중한 곡식과 재물을 여름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스님들에게 보시하는 까닭은, 부지런히 수행해 속히 도를 성취해서 지옥 같은 삶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하루 빨리 제도해 주십사 하는 바람 때문이다. 만일 이런 간절한 바람을 저버리고 깊은 산 높다란 누각에서 시원한 바람이나 쐬며 도화원(桃花園) 같은 풍경에 취해 한가로이 잡담이나 나누고, 목침을 높이 베고 누워 낮잠이나 즐기며 허송세월한다면 과연 그 죗값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결코 개나 소로 태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겁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옛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禪門正路’)

 

성철은 또 ‘사람 못된 것이 중 되고, 중 못된 것이 선원 수좌 되고, 수좌 못된 것이 도인 되는 것’이라며 선방 수좌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가장 못된 인간들이라고 일갈했다. 부디 부지런히 공부하라 일렀다.

 

“옛 스님들도 늘 하신 말씀이다. ‘죄 중에 사람을 죽이는 죄가 가장 크지만, 공부니 수도니 한답시고 허송세월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하루에 만 명을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

 

성철은 좌복 위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 그 속에 영원히 사는 길, 중생 제도의 길이 있었다. 수행을 돕는 소임자들에게는 일체 간섭하지 말고 외호(外護)나 잘하라고 일렀다.

 

“그래도 결제가 되면 부처님 혜명을 잇겠다며 좌복 위에 앉아있는 수좌들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저 속에서 그래도 한 개나 반 개나 되는 인물들이 나오는 거다. 그런 기대로 선방을 둘러보는 것 아닌가. 저들이 없으면 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좌들의 ‘수마(睡魔) 쫓기’는 실로 어려웠다. 큰스님이 지키고 있어도, 이를 악물어도, 허벅지를 꼬집어도 잠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었다.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도 해인사 선방에서 한겨울 21일간 용맹정진했던 당시를 잊지 못한다. 용맹정진에 들면 밥 먹고 화장실 다녀오는 것을 빼고는 24시간을 꼬박 앉아서 참선 정진을 해야 했다. 새벽 3시가 되면 성철이 경책에 나섰다. 물푸레나무 회초리를 세 개쯤 들고 선방에 들어왔다. 회초리를 한 손에 몰아 쥐고 수좌들을 살폈다. 조는 사람에게 다가가 회초리로 등짝을 후려갈겼다.

 

“쫘~악”

 

맞는 사람은 물론이요 선방에 있던 모두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리에 산사의 새벽도 벌떡 일어났다. 용맹정진에 든 지 2, 3일이 지나면 잠이 쏟아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잠이 얼마나 무서운 업인지 절절이 느껴졌다. 잠 속에서 화두가 되느냐 하는 오매일여(寤寐一如)는 그냥 나온 말이 결코 아니었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가야산 해인사 도량에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한 스님이 한참 참선 정진을 하다가 살짝 일어나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쌓인 눈밭 속에서 슬그머니 드러눕는 겁니다. 그러더니 눈을 손으로 계속 가슴 위로 쓸어 올립니다. 눈이 이불인줄 알고 그러는 것이지요. 물론 성철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만큼 잠이란 고약한 마장입니다. 영하 20도 차가운 눈밭에서 눈을 이불이라 뒤집어쓰면 그게 제 정신이냐고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수행 중 잠과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혜국 스님 강설 ‘信心銘(신심명)’)

 

혜국은 그 후에도 제대로 잠을 쫓지 못했다. 도솔암에서 수행할 때도 잠이 문제였다.

 

‘성철 스님은 10년 동안 눕지 않았다는데 정말 졸지도 않았을까. 만일 그러셨다면 나는 중이 될 자질이 없다. 하근기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혜국은 약초를 팔러 장에 나왔다가 그 길로 백련암을 찾아갔다. 마침 성철은 제자와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혜국은 땅바닥에 엎드렸다.

 

“스님, 장좌불와하실 때 졸지 않으셨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성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아, 내가 목석이냐, 안 졸게!”

 

혜국은 그 소리에 환희심이 생겼다. 희망이 밀려들었다.

 

‘그렇구나, 스님도 졸았구나.’

 

벙글거리며 산길을 기운차게 내려가는 혜국을 보면서 성철은 ‘별 놈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 혜국은 조금씩 잠 쫓는 법을 터득해갔다.

 

성철은 또 ‘최잔고목(摧殘枯木)론’을 설파하며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썩고 부러지고 마른 나무막대기’가 되라 일렀다.

 

“부러지고 썩어 쓸데없는 나무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 땔 물건도 못 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 곳이 없는, 아주 못 쓰는 물건이다. 이러한 물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인이 되지 못한다.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은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 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하는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불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성철은 공부할 때 피해야할 세 가지를 제시했다. 바로 돈과 이성(異性), 그리고 명예욕이었다. 돈은 독사보다 무서워하고, 비상(砒霜)보다 겁을 내라 했다. 또 이성을 멀리 하라며 ‘여자 같은 장애물이 두 가지만 있어도 성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부처님 말씀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것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명예욕이라며 이름을 날리거나 남기려는 유혹의 실체를 발가벗겼다.

 

“실제로 재물병과 여자병은 결심만 단단히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병에 걸리면 남들이 더 칭찬해 주니, 그럴수록 이름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책을 좀 보아서 말주변이나 늘고 또 참선이라도 좀 해서 법문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 거기에 빠져 버리는데, 이것도 일종의 명예병입니다. 이리하여 평생 잘못된 생활이 굳어 버립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남도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속인이 들어도 탁견이다. 제 이름 하나 남기려고 세상에 나와 먼지를 피우는 중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철은 수좌 5계를 설파했다. 이는 지금도 제방의 선승들이 받들고 있다.

 

“잠 많이 자지 말라. 책 많이 보지 말라. 과식하거나 간식하지 말라. 말 많이 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모두 수행 체험에서 우러난 것들이었다. 또 수행자에게 납자10게(納子十偈)를 내렸다.

 

1. 무상(無常): 한조각 그믐달이 겨울 숲 비치니, 몇 개의 백골들이 쑥 사이로 흩어져. 옛날의 풍류는 어디에 있는가, 덧없이 윤회의 괴로움만 더해가는 데.

 

2. 안빈(安貧): 누더기 더벅머리로 올연히 앉았으니, 부귀니 영예니 구름 밖 꿈이로다. 쌀독에 양식은 없지만, 만고의 광명은 대천세계 비추네.

 

3. 정근(精勤):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은 옛날 스님 가풍이요, 텃밭 매고 주먹밥은 참 사는 소식이라. 한 밤에 송곳 찾아도 오히려 부끄러워, 깨닫지 못함을 한숨 지며 눈물로 적시네.

 

4. 정절(貞節): 몸 망쳐 도를 없애는 데는 여색이 으뜸이라, 천번만번 얽어 묶어 화탕지옥 들어가네. 차라리 독사를 가까이 할지언정 멀리 둘지니, 한 생각 잘 못 들어 무량고통 생기도다.

 

5. 신독(愼獨): 어둔 방에 혼자서 보는 이 없다 말라, 천신의 눈은 번개 같아 털끝도 못 속인다. 합장하고 정성껏 받들어 모시다가도, 갑자기 성을 내어 자취를 없애느니라.

 

6. 하심(下心): 법계가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인데, 어느 누가 현우와 귀천을 말하는가. 모두를 부처님처럼 애경하면, 언제나 적광전을 장엄하리라.

 

7. 이타(利他): 슬프다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중생이여, 가시덤불 심어놓고 천도복숭 바라도다. 나를 위해 남 해침은 죽는 길이고, 남을 위해 손해 봄이 사는 길이네.

 

8. 자성(自省): 내 옳은 것 찾아봐도 없을 때라야, 사해가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니라. 내 잘못만 찾아서 언제나 참회하면, 나를 향한 모욕도 갚기 힘든 은혜이니.

 

9. 회두(回頭): 꿈속의 쌀 한 톨 탐착하다가, 금대의 만겁 식량을 잃어버렸네. 무상은 찰나라 헤아리기도 힘든데, 한 생각 돌이켜서 용맹정진 않을 건가.

 

10. 인과(因果): 콩 심어 콩 나고 그림자는 형상 따라, 삼세의 지은 인과 거울에 비추는 듯. 나를 돌아보며 부지런히 성찰한다면, 하늘이나 다른 사람을 어찌 원망하리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4. “내 묻겠으니, 오매일여하고 내외명철 하신가”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가 있다 하면 벌써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만 가지고 보아도 선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아무리 깨친 것 같고 지견이 분명하더라도 오매에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또한 무심의 경계를 체득했다 하더라도 그 곳에 머물면 마구니 경계가 됨을 알아 확연히 깨쳐 내외명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 성철 스님은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는지’를 화두 공부의 기준으로 설파했다. 숱한 법거량에서도 늘 오매일여 확인을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불은 마음의 눈을 떠서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며 이를 견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철은 불교를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난다’고 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心)자’ 한 자 위에 서 있다.”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관법(觀法)이나 주력(呪力)을 하고 또 경(經)을 읽기도 한다. 다라니를 외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이었다. 성철이 보기에 가장 수승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견성하기 위해선 ‘3단계 수행’을 거쳐야 한다고 일렀다.

 

처음 동정일여(動靜一如)에 들고 다음엔 오매일여(寤寐一如)인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에 이른 후 거기서 더 정진하여 참다운 깨달음을 얻으라 일렀다. 성철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은 참선이며 화두를 든 선승에게 동정, 몽중, 숙면일여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3關]임을 설파했다.

 

성철은 유발한 채 대원사에서 정진하여 동정일여에 든 바 있다.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을 때나 한결같다’는 동정일여는 깨어있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화두공부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걷거나 앉아있을 때에도, 말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에도, 세수하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한다.

 

깨어있는 일상의 동정일여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자나 깨나 일여한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른다. 오매일여에는 꿈꿀 때에도 한결같은 몽중일여와 잠이 깊이 들어도 화두가 떠나지 않는 숙면일여가 있다. 몽중일여에 들면 꿈속에서도 낮과 똑같이 화두가 들린다. 세속의 업장인 꿈은 없어지고 꿈이 생시나 다름이 없는 경지이다. 더 나아가 잠이 깊이 들었어도 공부가 한결 같으면 숙면일여라 한다. 

 

꿈꿀 때의 오매일여는 제6식이 사라진 단계로서 교가(敎家)에서 말하는 무상정(無相定)의 7지 보살에 해당하고, 잠이 깊이 든 때의 오매일여는 제8아뢰야식에 머무는 멸진정(滅盡定)인 8지 이상의 자재(自在)보살에 이른 것이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상태가 항상 밝아 조금도 변함이 없으면 이를 8지보살 이상, 즉 자재위(自在位)라 한다. 마음속에는 분별작용이 없는 세 가지 미세한 것[三細]과 분별작용이 있는 여섯 가지 거친 것[六麤]이 있어서 팔만 사천의 한없는 번뇌를 파생시킨다. ‘3세 번뇌’는 근본무명으로서 아뢰야, 또는 제8식 등으로 부르고 ‘6추 번뇌’는 지말 번뇌로서 의식, 또는 제6식이라 한다. 7지보살 이하의 모든 중생은 6추 속에 있고 8지이상의 자재보살은 3세 가운데 있다. 이 근본과 지말의 두 가지 무명, 즉 번뇌망상을 제거해야만 진여불성을 볼 수 있다.

 

견성은 제8아뢰야식인 3세의 무명까지를 끊어야 이뤄진다. 따라서 동정일여와 몽중일여가 되어도 숙면일여가 되지 않으면 이것은 6추의 영역이요, 숙면일여가 돼야만 비로소 가무심(假無心)인 3세의 미세망상에 이른 것이다. 그런 후에 이 미세번뇌마저 끊어야만 견성을 이루고 정안종사(正眼宗師)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참다운 구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숙면일여의 경계를 돌파해야만 했다. 그런 경계를 뚫고 나아가기 전에는 진정한 공부라 할 수 없다. 성철은 주장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조사스님, 조사스님 하면서도 과연 이 분들의 경계가 부처님과 같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5가 7종의 정맥으로 내려온 조사스님네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오매일여라는 경계를 지나서 깨친 사람들이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나지 않고 깨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가 있다 하면 벌써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만 가지고 보아도 선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성철 지음 ‘옛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禪門正路’)

 

공부하다 보면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고, 선객들은 이를 견성, 성불했다고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는 지를 살펴야 한다. 성철이 설파한 화두 공부의 기준은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느냐’이다. 숱한 법거량이나 ‘견성 인가’에서도 성철은 오매일여 확인을 빠뜨리지 않았다. 성철은 옛 선사의 예를 들며 바른 화두참선법을 제시했다. 고봉원묘(1238~1295) 스님이 설암 스님을 만났을 때 나눈 문답이다.

 

‘설암 스님이 고봉 스님에게 물었다.

“낮 동안 분주할 때도 한결 같으냐?”

“한결같습니다.”

“꿈속에서도 한결 같으냐?”

“한결같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는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말로써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펼 수가 없었다. 5년 후에 곧바로 의심덩어리를 두드려 부수니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조용하여서 한 생각도 함이 없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선요’) 

 

이미 거의 800년 전에 스님들이 이런 문답을 통해 화두를 확인했다. 그렇게 보면 성철의 화두 점검법은 ‘오래된 새길’이었다.

 

그렇다고 숙면일여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어쩌면 숙면일여에 든 순간부터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한 상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깨쳐야 한다. 오매일여가 된 자리에서 제8아뢰야식을 다 없애버리고 진여자성을 통견해야만 비로소 견성에 이른다.

 

우리나라 선문의 태고 스님도 20여년의 공부 끝에 40세 즈음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르고 그 후 확철히 깨쳤다. 그러데 자신의 공부를 알아주고 인가해줄 스님이 고려에는 없었다. 아마도 깨친 큰스님을 만날 수 없었던 듯하다. 할 수 없이 중국으로 건너간 태고는 그곳에서 임제정맥을 이어받고 돌아왔다. 태고 스님은 자신의 수행담을 이렇게 전했다.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점도오매일여시 漸到寤寐一如時 지요화두심불리 只要話頭心不離).’

 

태고 스님도 오매일여의 경계에서 더욱 정진하라 일렀다. 우리가 생각이나 분별이 끊겨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一念不生] 무심경지에 들어가면 과거 현재 미래 전체가 다 끊어져 버린다. 이를 전후제단(前後際斷)이라 한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3세의 미세망상이 남아있다. 여기서 다시 살아나 깨쳐야 한다.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 대무심지에 이르렀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大死底人]이라 한다. 그래서 ‘일념불생, 전후제단’의 경계에 머무는 경우를 선문에서는 “죽기는 했으나 살아나지 못했다[死了不得活]”며 철저히 배격한다. 죽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오매일여 경지에 들어 8지 이상의 자재보살위에 들었다 하더라도 이는 구경이 아니다. 선문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대무심의 경지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산속 귀신들이 사는 굴에 빠졌다[黑山鬼窟]’며 이를 경계했다. 아직은 제8아뢰야식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제8아뢰야식은 워낙 깨끗하고 미세해서 언뜻 보면 맑고 잔잔해 전혀 움직임이 없는 듯 보이나 깊이 관찰해보면 그 급박한 흐름이 조금도 쉬지 않았다. 따라서 성철은 이러한 오매일여가 도리어 수행인을 매몰시키는 마구니의 경계이며, 귀신의 소굴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다시 용맹심을 일으켜 근본무명을 끊고 무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이 경계에서 철저히 깨쳐 크게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야[死中得活] 한다고 일렀다.

 

‘사중득활’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화두, 즉 공안 참구를 통해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성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다. 화두란 예부터 암호밀령(暗號密令)이라고 했다. ‘뜰 앞의 잣나무’나 ‘삼 서 근’ 처럼 겉은 같을지 모르나 정작 속 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있어 깨쳐야만 알 수 있다. 화두의 생명은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또 설명될 수도 없다. 설명하는 즉시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죽어버린다. 눈을 뜬 자신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다. 8지 이상의 보살 경계에 들었어도 화두를 모르면 죽을 수밖에 없다.

 

크게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 진여무념을 성취한 것이 비로소 견성이며 그 견성이 대원경지(大圓鏡智)이다. ‘크고 둥근 거울 같은 지혜’인 대원경지는 일체망상의 근본이 되는 제8아뢰야식까지 완전 제거된 상태를 이름이었다.

 

“맑고 공적하며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대원경지이니라.” (성철 지음 ‘돈오입도요문론’)

 

견성을 하면 자성의 진여광명이 시방세계를 환히 비췄다. 이것은 지혜의 빛이니 내외가 명철(明徹)해진다.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품은 듯 안팎이 환해진다. 유리병 속에 촛불만 밝혀도 온 방이 환한데 거기에 보름달이 들어있으니 그 밝음은 시방법계를 비추고도 남는다. 그렇게 자신의 깨침이 내외명철하지 않으면 견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작은 변화에도 견성 운운하는 것은 공부하다 생긴 일종의 병에 불과했다. 성철은 간절하게 일렀다.

 

“아무리 깨친 것 같고 지견이 분명하더라도 오매에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또한 무심의 경계를 체득했다 하더라도 그 곳에 머물면 마구니 경계가 됨을 알아 확연히 깨쳐 내외명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달마 스님에서 육조스님으로 면면히 내려온 우리 종문의 가풍이다.”

 

성철이 견성했다는 이 땅의 선객들에게 지금도 묻고 있다.

 

“잠 꽉 든 숙면상태에서도 일여하신가?”

“예”라 대답하는 선승에게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외가 명철하신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9호 / 2016년 1월 27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5. ‘가야산 호랑이의 사자후’ 백일동안 이어지다 

 

 

『“누구든지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 속의 무진장 보물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 성철 스님은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강조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해인총림은 일약 선승들의 참선도량으로 솟아올랐다. 전국에서 수좌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가야산이 있었고, 가야산 바위를 닮은 성철이 있었다. 사람들은 성철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성철이 있는 곳에는 ‘적당히’가 없었다. 수좌들은 서릿발처럼 매서운 경책을 무서워하면서도 또 곁에 가고 싶어 했다. 모두 큰 가르침에 목이 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960년대 불교정화운동은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다. 겉으로는 비구사찰이 늘어 가시적인 성과를 냈지만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있었다. 종단의 분쟁은 무엇보다 자비문중의 청정수행 풍토를 앗아갔다. 승려들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납자들은 방황했다. 그러자 구도에 목마른 자들은 정신적 스승을 찾았고, 자연 해인총림 방장인 성철을 흠모했다.

 

1967년 겨울의 해인사는 특별했다. 선방 스님들의 정진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거기에 또 하나 한국 불교사에 기념비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성철의 백일 동안의 법문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백일법문’이라 불렀다. 어쩌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던 법회였다.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일대 법석이 펼쳐졌다. 12월4일부터 성철의 사자후가 산중에 메아리쳤다. 대중은 그 시간을 기다렸다. 해인사 대적광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선방 수좌, 강원의 학인, 절 살림을 하는 스님들도 모두 모였다. 인근의 다른 사찰에서도 찾아오고, 암자에서 정진하던 선객들까지 모여들었다.

 

성철은 먼저 자신의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님을 알고 들어야 한다’고 했다.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선문의 골수는 무엇인가. 선은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의 세계이다. 문자와 말은 깨달음의 방해물이었다. 그런데 조사선의 정맥을 이어받았다는 성철이 정작 지름길이 아닌 우회로를 선택했다. 교학과 언어의 길을 선택했다. 상근기를 지닌 자들을 경책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함에도 중생과 함께 느리게 가고자 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론과 언설을 동원하였는가. 바로 한국불교를 깨우기 위함이었다. 부처님 법을 잃어버린 한국불교는 깨달음보다 부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미 부처님 법대로 살아봤으니 그것이 왜 부처님의 혜명을 잇는 것인지 설명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성철의 법문은 대중보다는 승려들을 겨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불교사에 거의 유례가 없는 백일 동안의 법문은 초기불교, 중관, 유식, 열반, 천태, 화엄, 선종사상을 망라하고 있다. 백일에 걸친 장광설은 불교사 전반을 섭렵하여 불교사상의 핵심을 뽑아내고 있다. 어쩌면 당시 한국불교를 무지에서 깨우기 위해서는 말이 많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성철 스님은 ‘무식’을 자랑하던 시대에 백일법문으로 법을 밝히셨다. 무식을 타파했다. 대단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스님들 간에 논리경쟁도 촉발시키고, 선에 대한 참된 의식도 고취시켰다.” (적명 스님)

이론과 사상의 실체를 정확히 분석하고 이를 다시 통합해서 대중에게 설했다. 그렇다고 단순한 지식 묶음이나 나열이 아니었다. 성철의 법문에는 수행의 체험과 깨달음의 경지가 녹아 있다. 이론과 함께 실참을 설파했다. 그래서 건조하지 않다. 또 축축하지도 않다.

 

불교는 경전이 무수히 많았다. 그렇기에 팔만대장경의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 회교는 코란이면 되는데 불교는 경전이 복잡하고 어려워 접근하기 불편해했다. 성철은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 승가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불교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리기로 했다.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또 부처란 인도말로 붇다(Buddha)이고 이는 ‘깨친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불교는 근본이 깨달음에 있었다. 따라서 부처의 가르침[불교]이란 깨치는 길,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입니다.”

 

성철은 절집 식구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고 왜 우리가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답이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고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만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 하는구나.’ 부처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말씀은 인류 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 같이 명백하게 누구든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에 머물고 있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성철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우리 마음에 먼지가 잔뜩 끼어있어 마음의 먼지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참선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일렀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수좌들이 나에게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전 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갈 것입니까.”

 

성철은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했다. 화두를 붙들고 의심에 의심하여 마침내 활연히 깨치라고 일렀다.

 

성철은 문자와 말로 법문을 하면서도 곧바로 말과 문자를 멀리하라 일렀다. 정작 마음을 놔두고 문자를 더듬거리지 말라 했다. 양명학파인 왕양명의 말을 빌어 ‘자기 집 보화를 버리고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을 하지 말라 했다.

 

“누구든지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 속의 무진장 보물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그렇다면 해인총림을 무겁게 지키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왜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 곁에 수많은 경전들은 왜 있는가. 성철이 이렇게 비유했다.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좋은 금강산이 있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부처님은 언어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했다. 그래서 누구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을 따라 허공에 떠있는 달을 봐야 한다. 그런데 범부들은 손가락 끝만을 쳐다보며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팔만대장경은 곧 손가락질이니 그 손가락을 물고 빨아봐야 달은 볼 수 없음이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비록 억천만 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 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능력이 출중하여 좋은 법문을 달달 외운다 해도 그것은 안내문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언어문자란 처방전이다. 거기에 의거해서 약을 지어먹어야 병이 낫는 것이지 처방전만 열심히 외어보았자 병은 낫지 않는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필발라굴[七葉窟]에서 부처님의 생전 법문을 수집할 때였다. 그 자리엔 아난이 당연히 끼어 있었다. 아난은 총명하여 법문 수집에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난은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난은 마음을 닦지 못했다. 부처님 법을 이어받은 가섭존자가 이를 알아보고 아난을 굴 밖으로 내쳤다.

 

“여기는 사자굴이니 너 같이 마른 지해로 인하여 몹쓸 병이 든 여우가 어찌 이 사자굴에 들어 올수 있겠느냐.”

 

아난이 울면서 용서를 빌고 대중이 반대했어도 가섭은 아난을 쫓아냈다. 그 후 쫓겨난 아난이 법회를 여니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난은 다시 속세의 재미와 아만에 빠져 세월만 까먹었다. 그때 부처님 제자 발기(跋耆)비구가 타일렀다.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 마음은 열반에 들어 / 참선하고 게으르지 말라 / 말 많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난이 술 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열심히 선정을 닦아 마음을 깨쳤고 마침내 가섭의 인가를 받아 다시 필발라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 경전들을 지었다. 성철은 가섭과 아난의 사실(史實)을 예로 들며 불교의 생명이 마음을 깨치는 데 있음을 강조했다.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30호 / 2016년 2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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