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世界(세계)는
조물주가 창조 한 것도 아니고
원자와 같은 불변의 실체가 모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부처님께서 깨닫은 세계의 실상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깨닫으셨나?
불교는 깨닫음의 종교다,
부처님은 깨닫으신 분이다,
그러면 깨닫으신 내용이 무엇인가?
나와 세계의 실상을 깨닫으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도대체 근본이 무엇이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나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을 있는 그대로 깨닫으신 분이다.
존재론적인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해 묻고
정당한 답을 주시는 부처님이시다.
세상에 모든 종교, 철학, 과학까지 포함을 해서
존재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해서 이 세상이 나타났다,
과학에서는 여러 가지 원자가 존재하고 있다
원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빅뱅, 블랙홀 이론도 존재에 대한 이론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는가?
모든 존재론의 근거는 무엇일까?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진 것을 토대로 말한다.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근거가 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요?
모든 존재론의 근거는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진 것을 배제하고
존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브라만은 일체는 브라만이라 한다,
부처는 일체를 어떻게 보느냐?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는 12입처다”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떠나서 이야기 하면 낭설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 나지 않고 맛이 안 나고
만져지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그 이야기는 허망한 이야기다,
나와 세계는 분리돼 있는가? 연관돼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나 없이도
세상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나 없이도 존재하는 세상이 있으니까
내가 그 세상에 태어나는 겁니다.
나 없이도 존재하는 세상이 있으니까
내가 그 세상에서 죽는 거 에요,
나는 죽어도 세상은 있죠?
그런데 나만 죽는 게 서운해?
그러니까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도 다음 세상으로 간다,
이게 來世(내세)에요,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생사를 윤회하고 있다는 말씀은
나와 세계를 분리해 가지고
“나 밖에 세계가 따로 있다” 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無明(무명)으로부터 生死(생사)가 연기한다 말하는 겁니다.
불교는 생사 윤회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나요?
無智(무지)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무지가 어떤 무지입니까?
나와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나 없으면 세계가 없고
세계가 없으면 나도 없어서
나와 세계는 둘이 아닌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꼭 나 없이도 있는 세상에 태어난 거 같고
죽으면 나는 없어도 세상은 있을 거 같고
죽은 나는 또 다른 세상에 갈 거만 같은 생각을 하는 거 에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이제 우리의 삶이 진실에서 벗어나니까
진실한 삶에 충실하지 못하니까
고통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이라 하고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에게 가르침을 펴신 거 에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도리가
곧 고집멸도, 四聖諦(사성제)입니다.
불교의 존재론을 바르게 이해를 한다는 것은
사실은 부처님의 깨닫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묻기를
일체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일체는 12입처다~!!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法(법), 다르마,
다르마는 法(법)입니다.
다르마의 의미 =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르마라 부릅니다.
부처님은 법을 왜 다르마라 그랬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 하죠?
불법 = 부처님의 가르침
다르마 = 법칙, 룰, 규범 의무의 의미
일체의 존재라 표현하시지 않고
일체의 다르마~!!
萬法歸一(만법귀일), 諸法皆空(제법개공)
제법 = 모든 존재
諸法無我(제법무아) = 모든 존재의 실체는 없다
모든 존재는 안에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아트만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법을 존재라고 해버리면.....가르침이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세상을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존재들이죠?
존재론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사실은 존재론이 쉬운 거 같죠?
보이는 것이 다~ 존재니까,
철학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존재론입니다.
존재론에서는 무엇을 다루는가 하면
눈 앞에 있는 것은 있다는 겁니다.
“있음”이 항상 지각 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이
존재들이죠?
우리는 늘 “있다”는 말을 쓰죠?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존재론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있으니까 보이는 것이고
들리니까 듣는 것이다 생각하죠?
세상 사람들이 있다하면 같이 있다하고 살았지..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니죠?
자기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시나요?
아무도 없어요, 전부가 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있는 나는 누구인데?
이렇게 물으면
이것이 나라고 내놓을 만한 게 있어요?
없어요,
우리 스스로가 나와 세계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름대로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물을 생각도 안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문제시 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들이 “있다” 라고 하는 사실들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고
우리가 이렇게 있다고 하는
애매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있다고 하는 생각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부처님은 다 살피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애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라는 것을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13;38)
부처님이 말씀 하신 法(법), 다르마,
다르마는 法(법)입니다.
다르마의 의미 =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르마라 부릅니다.
부처님은 법을 왜 다르마라 그랬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 하죠?
불법 = 부처님의 가르침
다르마 = 법칙, 룰, 규범 의무의 의미
일체의 존재라 표현하시지 않고
일체의 다르마~!!
萬法歸一(만법귀일), 諸法皆空(제법개공)
제법 = 모든 존재
諸法無我(제법무아) = 모든 존재의 실체는 없다
모든 존재는 안에 실체라 할만한 것이 없다,
아트만이라 할만한 것이 없다,
법을 존재라고 해버리면
우리는 세상을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존재들이죠?
존재론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사실은 존재론이 쉬운 거 같죠?
보이는 것이 다~ 존재니까,
철학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존재론입니다.
존재론에서는 무엇을 다루는가 하면
눔 앞에 있는 것은 있다는 겁니다.
“있음”이 항상 지긱 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이
존재들이죠?
우리는 늘 “있다”는 말을 쓰죠?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존재론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있으니까 보이는 것이고
들리니까 듣는 것이다 생각하죠?
세상 사람들이 있다하면 같이 있다하고 살았지..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니죠?
자기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시나요?
아무도 없어요, 전부가 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있는 나는 누구인데?
이렇게 물으면
이것이 나라고 내놓을 만한 게 있어요?
없어요,
우리 스스로가 나와 세계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름대로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물을 생각도 안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문제시 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들이 “있다” 라고 하는 사실들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고
우리가 이렇게 있다고 하는 애매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있다고 하는 생각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부처님은 다 살피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애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13;38)
일부 불교인들이 하는 말 가운데
불교의 철학적 접근에 대한 거부감,
불교는 수행을 통한 깨닫음일 뿐이다.
그래요 깨닫기 위해서 따지고 묻는 겁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를 따지고 묻는 겁니다.
부처님게서는 왜?
우리들에게 존재라고 부르는 것들을
다르마라고 불렀을까?
인도에서 존재라는 말을 규정하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하나는 싸트(sat, 순수존재)라는 개념이고
하나는 브하바(bhava)라는 개념입니다.
싸트는 있음 있는 그 자체인데
이것은 절대 안 없어지는 본질적으로 있는 겁니다.
있는 것은 없어질 수가 없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죠?
없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것이 될 수가 없죠,
생각 좀 해봅시다,
불교는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따지고 물으면 죄가 됩니다.
부처님은 맹목적으로 믿으려 하면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말조차도 생각해보고 이치에 맞는가 네가 따져보고
네가 바르게 이해해서 네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도
제자들이 “부처님 돌아가시면 우리는 뭘 믿고 삽니까?”
너 자신을 스스로 의지하고 남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은 불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공부해야 합니다.
내 지혜를 가지고 내가 따져보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그런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으신 분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 = 누구나 깨닫음의 능력이 있다.
따지는 것을 싫다면 불자되기 싫은 사람이다.
우리들의 생각은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에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나하고 아무 상관없이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나하고 상관없이 없는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나하고 관계가 없다.
이것은 참 어려운 겁니다.
남악회양선사가 육조 혜능을 찾아갔는데
육조혜능이 “어떤 놈이 이렇게 왔는고?” 물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남악회양이 정신을 잃어버렸다,
남악회양선사가 와있는 놈이 어떤 놈인지 모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철퇴를 맞은 것처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7~8년을 그것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
다시 와서 대답이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붙여도 맞지 않는다.
사실은 그게 답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있다”, “없다”로 개념을 규정하고 싶은 중생이다,
개념으로 규정되는 실체는 없다,
사실은 세상에 모든 존재가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우리가 개념을 규정해 놓고 살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책이다 컵이다 책상이다.
이게 진짜 컵입니까?
내가 이것을 컵이라고 이름 붙이기 전에는 무엇입니까?
이름을 명명하기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가지고 나다 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모순은
있다, 없다 라고 하는 말이다.
그 모순 구조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세계를 보고 존재에 대한 모든 이론들은
두 구조 속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짓이 참으로 허망한 짓이다 라는 것을
깨닫으신 겁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연기를 설하신 겁니다.
중도에서 연기를 설하는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 존재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사트는 있음 그 자체입니다. 있는 것이죠, 세상에 존재들이죠,
존재 자체가 실제로는 있다가 없어집니다.
생겼다 없어지죠, 나도 태어났다 죽으면 없어집니다.
존재는 존재지만 있다 없어지니 사트라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Being이라고 합니다.
브아바(bhava/being) 생겼다 없어지는 존재,
Being/Bhava는 일정한 시간 동안은 존재합니다.
모든 존재는 우리에게는 일단 시간속에서 존재해야 돼,
일정한 시간 동안만 존재한다.
책상은 만든 후부터 없어질 때가지 존재하겠죠?
그 동안은 십년이 될지, 백 년이 될지 모르지만
이 책상은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트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브아바(being)는 책상처럼 일정한 시간 동안 존재하겠죠
이것이 Being이고 한자로 표기하면 有(유)에요,
12연기에서 有(유)가 있으니까 生(생) 老死(노사)가 있다.
할 때 有(유)다,
어떤 존재가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면
이 존재는 처음에 생길 때가 있었고
없어질 때가 있겠죠?
그 동안에 Being 하겠죠,
이런 것을 有(유) 라고 그럽니다.
이 책은 有(유)죠?
책이 생긴 때부터 없어질 때까지 Being으로 있겠죠
모든 존재들은 공간 속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을 해요,
어디에 인가 있어야 될 거 아니 에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 에요,
그리고 그 공간은 나하고 상관없이 밖에 있죠
시간도 나하고 상관 없이 밖에 있죠,
우리가 가진 존재론적 생각은
객관적 시간성 객관적 공간성을 가지고
그 안에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존재론적인 생각들이 에요,
이것이 사트(순수존재), 브아바(being)가 나오는 바탕이에요.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그런 것을 다르마라 불렀을까요?
다르마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24;37)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는다
혀로는 맛을 본다.
몸으로는 촉감을 느낀다.
마음으로는 법을 인식한다.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을 존재라고 하죠,
마하꼿티나와 싸리뿟따의 법담 중에
존자여~
다섯 가지 지각 활동
즉, 시각활동, 청각활동, 후각활동, 미각활동, 촉각활동은
대상이 다르고 활동영역이 달라서
다른 것들의 활동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존자여~
대상이 다르고 활동영역이 달라서
다른 것들의 활동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
다섯가지 지각활동의 의지처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것들의 활동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까?
존자여~
대상이 다르고 활동영역이 달라서
다른 것들의 활동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
다섯가지 지각 활동의 의지처는 마음(意)입니다.
그리고 마음(意)이 그것들의 활동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존자여~
다섯가지 지각활동
즉, 시각활동 청각활동, 후각활동, 미각활동, 촉각활동은
무엇을 의지하여 지속합니까?
존자여~
다섯가지 지각활동
즉, 시각활동, 청각활동, 후각활동 미각활동 촉각활동은
壽命(수명)을 의지하여 지속합니다.
지혜 제일 사리불 존자가 마하꼿티나의 질문에 대답이다.
눈으로 사과 모양만 보고도
코로 냄새를 안 맡아도 이것은 사과다 말하죠?
사실은 눈으로 색을 보지만
意(의)를 통해서 法(법)을 보는 겁니다.
意(의)가 통합을 해서 法(법)으로 인식을 한다.
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개별의 눈, 귀, 코, 입, 몸이 아닌 마음이 인식
왜 그런지 도 모르면서 그냥 살아왔습니다.
면밀하게 사과로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안이비설신 전체를 총괄해서
지각을 통합 총괄하는 마음(意)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르마(法)는 意(의)에 의해서 규정된 것입니다.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 지각된 내용을 마음이 총괄하고
그 대상(다르마 法)으로 만든 것들이 에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마음에 의해서 지각된 내용들을
우리가 종합해 가지고
마음으로 구성해 놓은 어떤 것들이다.
그 실체로서 뭐가 없는 겁니다.
눈 없으면 색 없지요
마음이 없으면 다르마도 없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다르마에 대한 이해를 시키려고 합니다.
다르마는 공간속에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규정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구조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유지되는 것은
壽命(수명)을 의지해서 지속합니다.
다섯가지 지각활동은 수명에 의해서 지속합니다.
살아아 있어야 보지 죽은 사람은 못 본다.(33;14)
불교는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해야지
우리 귀에 솔깃한 이야기 해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무리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실은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다음에
사실에 근거해서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거 에요,
분명히 우리는 죽으면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지각할 수 없다.
송장이 봤다는 이야기 들어봤어요?
사리불도 그 이야기 하는 거 에요,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지각활동은
수명에 의지해서 유지되고 있는 현상이다.
다섯가지 지각활동은 수명을 의지하여 지속합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무엇이 드러나요?
밖에 있는 것들이 그때 드러나
우리가 존재라고 말하는 것들인데
존재라는 것들은 알고 보면 다르마들입니다.
다르마들은 뭣 입니까?
다르마 = 존재
“다르마들은 연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다르마의 연기를 깨닫은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한 다르마를 깨닫으셨는데
이 다르마의 세계는 항상 있다는 겁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다르마의 세계는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 눈으로 보면 색의 세계는 항상 보이게 돼 있다,
여러분들이 죽어도 자손들이 인간 몸으로 살아가면
그들에게도 우리가 본 같은 세계가 나옵니다.
내 앞에 보이는 존재의 세계는 無常(무상)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겁니다.
동일한 조건 안에서는 동일한 현상이 나온다.
이것이 不變(불변)하는 常住(상주)하는 法界(법계)입니다.
이 세상은 시간적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 없어요,
Being으로서 존재하지 않아요, 無常(무상)해요,
잠시도 지속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들이 지 멋대로 있는 게 아니라
다르마에 의해서 있습니다.
법칙에 의해서 있습니다.
그 변치 않는 법칙을 안다면
행복도 다르마에요,
불행도 다르마에요,
행복이나 불행도 법칙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공연히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공연히 고통스러워지는 게 아니다.
내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반드시
그 고통이 일어날 수 있는 다르마를 가지고 있는 거 에요,
다르마를 올바로 깨닫으면
고통의 원인도 알고
행복의 원인도 아니까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행복의 원인을 찾아서 행복을 만들어 가야겠죠,
이게 불교 에요,
깨닫음을 통해서 우리들은
바른 삶을 영위하고
괴로움을 벗어나서
행복한 세계로 갈 수 있다.
이것을 깨닫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불교다,
이것이 존재론하고도 연결이 돼 있는 겁니다.
존재의 실상과 연결 돼 있다.
행, 불행 또한 존재의 실상에서 온다.
지난 시간에
여섯 가지 지각활동을 통해서
인식된 내용이 다르마다, 法(법)이다,
부처님이 깨닫으신 것은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것들은
다르마(法)가 있는 것들이 에요,
사트(순수존재)가 있거나 Being(브하바)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르마로서 있는 겁니다.
다르마란 무엇인가?
부처님게서는 다르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법(=다르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거 에요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다르마인 거죠,
부처님 가르침을 다르마라 한 것은
부처님은 이 다르마를 깨닫아서
우리에게 다르마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諸法無我 = 일체의 다르마는 다 無我다.
우리들에 의해서 지각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그 안에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객관적 실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설명을 드리면
우리가 認識(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意圖(의도)를 가지고 知覺(지각)한 것이고
이렇게 의도를 가진 마음(意)에 의해 인지된
모든 대상을 法(법)이라고 부른다.
안이비설신의 할 때
意(의)의 핵심은 意圖(의도)(=의지, 의욕)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지각활동은
우리들의 의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카메라처럼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카메라는 모든 빛을 받아들여 필름에 인화하지만
보았다는 인지가 눈을 뜨고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르마로서 규정하는 것들은
실제로 보면 우리들의 의도에 의해서 다르마가 규정이 됩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눈의 종류가 마흔 몇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에스키모인 들에게는 눈에 마흔 몇가지의 다르마가 있다는 겁니다.
에스키모인 눈에 대한 각각의 분별
의도에 의해-> 대상 -> 의미를 가지고 지각
다르마는 대상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삶에 의해서 나온다.
다르마는 대상을 대하는 삶에 의해 나온다.
지각은 수명이 있을 때만 유지된다.
수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 삶에 의해서
세계가 드러나는 겁니다.
삶에 의해서 세계가 드러난다.
내 삶이 없으면 내 세상도 없다.
이것이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입니다.
불교에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니까
내 안에 마음이 밖에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요?
마음을 가지고 살잖아요,
쉽게 말하면
수명이 있어여 마음이 작동하고
마음이 작동해야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낀다.
보고 듣고 맛보니까
보면 모이는 것이 나타나고
들으면 듣는 세게가 나타난다.
장미들 세계에는 빛이 없어요,
우리가 보고 있는 6가지 지각
안이비설신의만 전부일까요?
아니 에요,
지금 부처님이 인간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12처 이야기하셨지,
인간하고 다른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다른 세상을 보는 거 에요,
땅밑에 지렁이들 세상은 짐작도 못하지요,
땅밑에 컴컴한데 어찌 살까 싶지만
지렁이는 눈이 없어서 상관없습니다.
지렁이 세상은 지렁이가 살아서 활동하는
삶과 연결된 마음에서 열린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벌어집니다.
여러분이 현실이 괴롭다 해서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 세상을 펼쳐 두고 있는가?
밖에 대고 괴롭다는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내가 왜 괴로운 세상을 내놓고 있을까? 걱정해야겠어요,
불교는 문제 해결을 밖에서 구하지 않아요,
왜?
문제의 해결은 心外無法(심외무법)
“마음 밖에는 다르마가 없다.”
마음에 의해서 법이 드러날 뿐이니까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있지 않다.
명상에 주 목적은 편안한 마음입니다.
현대는 불안하고 고통이 많다 보니 우울증도 많이 생깁니다.
현대인에게 많은 질환이
우울증 같은 심리적불안정상태에서 오는 질병입니다.
심리치료를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느끼는 본인이 있고 밖에 세상이 있다고 보는
객관적세계 vs 주관적세계가 있는데
내가 객관적 세계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이런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누가 화내고 욕을 해도
그냥 받아들이고 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근본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못해요,
불교적으로 관찰해서 어떤 때 해결이 되는가 하면
“심외무법” 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때 해결이 됩니다.
심외무법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사실은 내 마음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어요,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심외무법,
내가 마음을 스스로 통찰하고 마음을 조절할 수 있으면
그런 힘들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사실은 불교수행만큼 훌륭한 명상이 없는 겁니다.
불교수행은 심외무법에 대한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수행법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수행법을 찾아 다닙니다.
위빠사나가 좋냐? 간화선이 좋냐?
형식적인 것을 가지고 근사한 포장만 보고 찾아다닌다.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에요,
부처님께서 열반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 뿐이라 했다,
열반에 이르는 길 팔정도 처음에 正見이 나옵니다.
정사유 정어 정업... 우리가 다 하는 겁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을 어떻게 하느냐?
정견을 가지고 하면 된다.
정견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사는 게 최고의 명상법이다.
정견이 없이는 어디에 가 앉아 있어도 안됩니다.
정견만 있으면 삶의 매순간이 명상이다.
불교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정견을 갖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정견(바른생각)을 심어주는 겁니다.
바른 생각을 심어주는 겁니다.
불교의 존재론 공부하는 것도 정견을 갖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겁니다.
내 마음 밖에 다른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밖에 怨讎(원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원수를 없애려고 했잖아요?
그 원수가 마음대로 없어집니까?
죽이려니 감방가야겠고
놔두려니 괴로워죽겠고
해결도 안되고
그러니까 더욱 정신적으로 불안해 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게 아니겠어요,
怨讎(원수)가 뭐 에요?
원망하는 내 마음의 投影(투영)이 에요,
지가 마음을 밖에다 던져 놓고 붙잡고 씨름하는 거 에요,
원망하는 마음을 거두어 들이면
원수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자기가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거두는 겁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여기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을 수행이라 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따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팔정도 수행을 하는데
身(신)受(수)心(심)法(법) 사념처 수행,
말이 신수심법이지 알고 보면 삶을 통찰하는 겁니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몸이 있죠,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을 무엇으로 합니까?
몸으로 하잖아요?
사념처에서 身(신)으로하는 것은
보고 듣고 숨쉬는 몸으로 하는 행동들을 잘 통찰하고
거기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보는 거 에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다르마에요,
다르마를 계속 통찰하는 거 에요,
이것이 연기하고 있음을 보게 되요,
여러분들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것을 좀 더 깊이 통찰해 보면
그 뿌리까지를 찾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사념처 수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념처 수행도 원리를 제대로 알고 수행을 해야
통찰하는 법도 알게 되고
통찰 되는 대상도 바르게 보게 되고
대상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도 하게 되고
그 판단에 의거해서 올바른 행동도 하는 것이에요,
이런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의도를 가지고 지각한 것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죠?
이렇게 의도를 가진 마음에 의해서 인지된
모든 대상이 다르마입니다.
그러니까 다르마는 마음이 없으면 안 나타난다.
그러니까 심외무법이 맞죠?
이러한 사실을 대승불교에서 심외무법이라 표현한 겁니다.
이러한 공부를 잘 하다 보면 선사들의 뜻도 알 수 있다.
祖師西來意(조사서래의)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달마가 온 뜻을 묻겠어요?
말하자면 선법을 전하려고 했을 때
달마대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禪(선)의 근본 뭐요?
이런 이야기를 한 거 에요,
“부처님의 깨닫음에 대한 올바른 인지를
우리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겠어요?
부처님이 깨닫은 본자리가 무엇인가? 나
조사서래의나 똑같은 말입니다.
누구는 뜰 앞에 잣나무니라~!! 하면
그것은 또 무엇인고?
선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禪(선)의 핵심은 뭐냐?
심외무법(心外無法)이에요.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다, 분별을 끊어라~!!
네가 하는 이야기 전부가 다
네 생각으로 만들어 낸 분별이니 끊어~!!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온갖 화두가 다 등장하는 거 에요,
그 이치를 알고 공부를 해야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분별이 일어났으면
아~ 이거 내가 분별이구나 잘못 됐구나 하고 끊어가고
이런 게 수행입니다.
부처님이 깨닫은 것은
이와 같이 법이 연기 한다는 사실이 에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마음에서 연기하고 있구나~!!“
쌍윳다니까냐에 이런 말씀있죠,
비구들이여 연기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生(생)에 의존하여 老死(노사)가 있다오,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실로 그 界(계)
즉 法(법)의 고정성, 법의 순차성, 이 의존성은 상주한다오,
우리가 태어났다 생각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도
함께 할 수밖에 없어요,
태어나니까 죽는 겁니다.
우리는 생사의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죽는다는 생각 하지요?
죽는다는 생각은 어디에 근거해서 하고 있어요?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는다는 생각 하겠어요?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죽음이 인식되죠?
죽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지 않나요?
죽음이 인식되고 있는 거 에요,
죽음은 생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거 에요,
태어났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죽는다는 생각은 반드시 하게 돼 있습니다.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안 죽겠다 생각하니까
생겨난 내가 죽기가 싫어, 영생을 구해,
그러니까 영생을 약속하는 어떠한 말에 솔깃해,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는 겁니다.
태어난다는 생각은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을 수반하게 돼 있어요,
이 法(법)은 고정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변치 않는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하나하나 깨닫아 갑니다.
이것이 법의 순차성이고
늙어 죽는다는 법이 생에 의존하고 있다.
다르마라는 법은 이렇게 의존 관계가 있는 것이다.
서로 관계 속에서 일어나요,
생이 없으면 노사도 없겠죠,
내가 태어났다는 생각은 어디서 출발할까?
다시 물어가는 거 잖아요,
저 뒤에 가니까 뭐가 있어요? 無明(무명)이 있는 거 에요,
그 無明(무명)이 뭐 에요?
나와 세계가 따로 있다,
밖에 세상이 있고 안에는 내가 있다,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고
내가 그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에요,
나와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기본적으로 잘못 된 無智(무지)에요.
무명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갈 때
생사의 고통이 일어나게 돼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걱정하면서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지위가 높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없는 사람은 죽을 때도 편합니다.
가진 사람이 떠나려니 더 괴롭지,
놈은 자리에 있으면 더 죽기가 싫지,
있든 없든 죽음은 괴롭다는 거 에요,
죽음의 고통 앞에서는 빈부도 없다,
우리는 죽음이 어디에서 緣由(연유) 하는지 모르니까,
끊임없이 안 죽으려고만 하지,
죽음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안 죽으려는 거 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거 하고 차이가 있다,
불교 공부하면서 안 죽으려고 생각을 해,
생사 해탈은 벗어난다는 뜻이지
불로장생한다는 말은 없어요,
불교 공부하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거 에요,
죽을 때 벗어난다는 게 아니고
지금 살아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불교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자는 겁니다.
죽음의 실상을 알고 살자는 겁니다.
죽음 = 無明(무명)에서 연기한 망상입니다.
무명이 있으면 망상으로서 죽음이라는 법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았고
이게 다르마에요,
부처님은 무명이 사라지면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는 망상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
다르마는 연기하고 연멸하죠?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고
조건에 의해서 사라질 수 있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연기법은 반드시
부처님의 연기법은
생멸문하고 환멸문이라는 두 구조로 설해 져요,
무명이 있으면 생사가 연기하고
무명이 사라지면 생사가 멸한다.
무명이 있으면 노사가 있다는 이야기만 하지
무명이 사라지면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의 연구가 잘 안돼 있어,
12연기 이야기 하면
무명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다만 이야기 하죠
그것을 알아야
무명을 없애면 노사가 사라진다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데
우리는 지금 시작 부분만 공부하지
결론 부분은 공부 안 하고 있는 거 에요,
부처님의 깨닫음은 결론까지 봐야 됩니다.
생로병사의 현실이
중생의 세계에 존재의 현실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존재론 측면에서 공부할 것이고
이것들을 어떻게 소멸해서
행복한 삶의 세계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의 세계로 갈 것인가? 가
가치론적으로 논의가 될 겁니다.
이번에 공부는 불교의 존재론과 불교의 가치론이 되겠죠,
연기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도
연기에 대한 말씀이 중요합니다.
비구들이여
緣起(연기)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生(생)에 의존하여 老死(노사)가 있다오,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실로 그 界(계)
즉, 법의 고정성, 법의 순차성, 이 의존성은 상주한다오,
고정성은 정해져 있어요,
태어났다고 사는 사람한테
죽음이라는 생각이 안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딱~ 고정 돼 있습니다,
순차성은 늙어 죽으니까 생이 있구나~!! 가 아니라
내가 늙어 죽는다는 생각 앞에
내가 태어났다는 생각이 앞에 있고
그 생각 다음에 늙어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 에요,
이게 순차성이에요,
의존성은 내가 늙어 죽는다는 생각은
반드시 태어났다는 생각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생에 의존하지 않고는 늙어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상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법계에 변치 않고 항상 있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우주라는 말은 안 씁니다, 법계라 합니다.
宇宙(우주)라는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가진 개념이고
法界(법계)는 마음의 세계인 겁니다. 생명들이 살아가는 세계,
부처님이 깨닫은 세계는 살아있는 한 길 몸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불교의 세계는 어디에서 벌어집니까?
시공에서 벌어집니까? 마음에서 벌어집니까?
마음이 어두우면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온갖 잘못된 분별을 일으켜 가지고
생로병사의 고통스러운 삶으로 세상을 보는 거 에요,
깨닫게 되면 생사가 본래 없는
진여 실상의 세계를 보고 살아갈 수가 있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래는 그것을 바르게 깨닫고 통달한다오,
여래는 이러한 법계에
상주하는 법계에 실상을 깨닫은 분,
존재의 실상을 깨닫은 분이 여래다,
부처님 명칭 가운데 여래라는 명칭이 있다,
그리하여 깨닫은 연기에 대해
알려주고, 보여주고, 선언하고, 확립하고,
공개하고, 해석하여, 천명한다 오,
그리고 보라고 말 한다 오, (1;05;09)
부처님이 우리에게 하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신이 깨닫은 연기에 대해서
알려주고, 보여주고, 선언하고, 확립하고, 공개하고,
해석하여, 천명한다 오,
그리고 “보라~!!” 고 말한다 오
부처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면 누가 봐야 됩니까?
우리가 봐야 돼,
부처님은 우리에게 보라고 가르쳐 줬어요,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잘 이해하고 스스로 우리의 마음을 통찰해서
무명으로부터 생로병사가 연기하고 있다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와서 보라~!! 하셨습니다.
나에게 와서 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마음 속에서
다르마가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보라~!!
이게 불교입니다,
불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연기를 볼 수 있는 도량입니다.
불경을 떠나서는 어디에 가서도 볼 수 없어요,
우리가 불경을 바르게 보고 성찰해서
알려주고, 보여주고, 선언하고, 확립하고, 공개하고,
해석하여, 천명한 연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부처님은 法界(법계)라고 불러요,
이 세상 = 법계 = 다르마의 세계 = 마음의 세계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다르마의 세계
다르마의 세계 = 마음의 세계입니다.
심외무법이니까,
다르마의 세계란 것은
우리 마음의 세계인 겁니다.
대승경전에 가면 화엄경에 일심법계 = 한마음이 법계
마음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니 마음 내 마음 몸속에 따로따로 하나씩
몸속에 마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죠?
그렇지 않아요?
니 마음은 니 한테 있고
내 마음은 내 한테 있지 뭐~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 그러잖아요?
내 마음은 나에게
상대의 마음은 상대에게 있는가?
그런데 이 마음을 잘 통찰하면
내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아,
여러분들이 쓰고 있는 마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러분 몸 속에 들어있는
개인의 마음이 아니어요,
잘 한 번 생각해보시면
지금까지 인류가 살면서
생각했던 여러 사유구조가
여러분한테 면면히 이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뿌리는
무량한 과거로부터
모든 생명들이 살면서 일으켰던
삶의 결과물들이
지금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거 에요,
또 여러분들이 살면서 쓰고 있는 이런 마음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영향을 줍니까? 안 줍니까?
나의 마음은 상대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 마음이 저리 가고 저 마음이 이리 오고
중중무진으로 뒤섞여 있는 겁니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여러분 마음도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마음은 내 안에 있나요? 안되요,
명상 한다면서 나는 나 혼자
내 안에 내 마음만 잘 닦으면 된다.
이런 명상은 엉터리 명상입니다.
진정한 명상은 제대로 알게 되면
이제는 일체 중생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하는 큰 원력을 일으키지 않으면
진정한 명상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사홍서원하죠?
대승불교의 근본이 되는 원이며,
모든 보살(菩薩)이 다 함께 일으키는 원이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다.
다 건지겠다,
중요한 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내 고통만 바라보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더 큰 고통을 바라보면 내 고통은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아~ 불쌍하다~!! 이 마음을 일으키면
벌써 여러분들의 마음은 고통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나라는 한 개인적인 생각에 집착하고
거기에 빠져드니까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조롱하는 것 같고
그러니까 괴롭고 이러잖아요?
그 나라는 놈을 쏙~ 빼보세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조롱 받을 나도 없고 괴로운 나도 없다,
무아를 깨닫는 거
그러면 우울한 나도 없는 겁니다.
연기를 올바로 보게 되면
우울한 나를 실체적으로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잘 깨닫아서
불교 공부는 반야~!! 지혜로 실상을 통찰하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지게 돼 있습니다.
이런 것을 진정한 수행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불교 공부 제대로 하면 수행은 제대로 하는 겁니다.
수행의 목적은 安心(안심)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수행이 없습니다.
법계에 연기하는 法(법)을 모르기 때문에
분별을 일으킵니다.
잡아함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意界(의계, 의도), 法界(법계, 다르마의 세계),
無明界(무명계, 중생계)가 있다,
안이비설신 意 -- 意界(의계)
색성향미촉 法 -- 法界(법계) =
意界(의계) =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다르마의 세계가 나타난다.
무명촉(연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보이면 “있다”
안 보이면 “없다”고 착각)에
所觸(소촉)된 어리석은 범부들
有(유)라고 말하고 無(무)라고 말하고
有無(유무)라고 말하고....
나는 알고(아는 나, 알려지는 대상)
나는 본다(보는 나 보여지는 대상)고 말한다.
---> 중생들의 존재론 (1;13;36)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명촉,
무명이라는 것은
연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밖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눈에 보이면 있다,
안 보이면 없다, 그러면서
그것이 실재한다고 보는 거 에요,
그러니까 있다 없다라는 有(유)에 모순된 구조 속에서
나는 알고 나는 본다,
아는 내가 있고 알려고 하는 대상이 있고
보는 내가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고
이렇게 계속 분별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러한 세계를 무명촉이라 했습니다.
무명촉에서 중생들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
중생들의 세계는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6촉입처에서
다문성제자는 (불교를 공부하는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
6촉입처는 (경험이 일어나는 자리, 안이비설신의)에 주하여
눈으로 보면 경험이 일어나죠
이것을 촉이라고 합니다.
일어나는 자리에서 수행을 한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처는 6촉입처에 머물면서 하는 겁니다.
6촉입처에서 머문다는 이야기는
눈에서 볼 때는 안촉입처에서
귀로 들을 때는 이촉입처에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경험이 일어난 자리에서
무명을 떠나서 명이 생기게 한다.
여러분들은 6촉입처 할 때 어던 생각을 하는가 하면
밖에 뭐가 보인다 하면
밖에는 저것이 있고 보는놈은 내가 있고
밖에 있는 저 놈이 내 맘에 안들면
내 마음에 안드는 놈이 저 밖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꾸 그런 삶을 살잖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던 삶은
밖에 좋은 거 나쁜 거 분별해 놓고
좋은 것은 찾아다니고 나쁜 것은 피해다녔죠,
이렇게 살았잖아요?(시비분별)
무지 무명에서 살면 그렇게 살아요,
이제는 그렇게 안 산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나만 보면 괴롭힌다는 겁니다.
괴로워 죽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자꾸 나타난다는 거 에요
그 사람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스트레스야~ 꿈에도 나타나~
저것만 없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없어지면 괜찮을까요?
그 사람 떠나도 비슷한 사람이 또 니와
그러면 비슷한 상황은 또 생긴다.
왜 그럴까요?
자기 마음이 지금 그러한 생각을 계속 일으키는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마음에서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도리를 해야 돼,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내가 지금 이 생각을 일으키고 있구나~!!!”
“이 생각은 잘못 된 생각이구나~!!”
이게 통찰이에요,
그리고 미운 그사람에서 더 베푼다,
미움 생각이 날 때마다 떡을 하나씩 더 줘 봐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미웠던 놈이 예뻐집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는 줄 아세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내가 더 베푼사람을 사랑합니다.
부모가 왜 자식이 사랑스러운 줄 아세요?(1;17;46)
부모가 많이 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줄 아세요?
그러나 부모한테 많이 주고 마음을 많이 쓰는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부모를 섬기는 사람이 부모를 더 좋아합니다.
부모에게 받기만 하는 사람은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없다.
나누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가 제일 좋은 속담입니다.
그러면 내 세상에 미운 사람은 없어집니다.
간단한데 행하기가 어렵죠,
무명을 염리하여 明(명, 밝은 지혜)이 생기게 한다.
그가 무명에서 欲(욕)을 더나 明(명)이 생겨서
有(유)도 아니고 無(무)도 아니고
有無(유무)도 아니고 有無(유무) 아님도 아님을(중도를 깨닫다)....
이렇게 봤을 때
무명촉이 멸하여 명촉이 일어난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원리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지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거기에서 항상 내가 어릿럭은 생각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부처님 가르침의 밝은 생각으로 비추어서 바르게 하고 있는가를
항상 살펴보시고, 이게 통찰이에요,
통찰은 육촉입처 일상 삶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바르게 하고 있는가?
이것을 바라보는 힘을 반야라고 합니다.
통찰의 힘을 반야라 합니다.(1;21;00)
이렇게 통찰하는 것을 = 반야 바라밀이라 합니다.
이렇게 통찰 하게 되면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라밀이라고 그럽니다.
반야로써 바라밀을 하다 = 반야바라밀
육촉입처 = 일어나고 소멸되는 지점
불교에서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지점이 육촉입처입니다.
일으키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하는 자리가 육촉입처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은
일체의 모든 법이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다.
마음에서 연기한 구조 --> 불변, 변하지 않는다.
무명, 어두운 생각이 있으면
거기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생로병ㅅ라의 고통스러운 다르마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무명에 기초 --> 생로병사의 고통스러운 다르마
부처님 당시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명의 상태에 있으면
항상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무명이 사라지면 망상 고통 또한 사라진다.
이것은 확정적이고 고정적이고 변함이 없는 법칙이다.
붓다는 그것을 깨닫은 사람이고
그 깨닫음을 전하는 분을 여래라 부른다.
이와같이 우리가 “있다”고 하는 존재는
다르마로써 있다,
사트나 존재 有(유), Being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르마로써 존재한다.
조건에 의해서만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조건(마음의 상태)에 의해 나타나고
조건(마음의 상태)에 의해 사라진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마음의 상태(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분별된 현상들이다.
그러면 이러한 분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부처님게서 경전에 낱낱이 설명해 주셨다.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다르마의 5가지 종류가 있다,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5가지 다르마 = 오온(색수상행식)
오온을 일체법이라 말씀 하셨다,
모든 다르마를 총괄하면 5가지 부류가 있다,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5가지 다르마 = 색수상행식
색은 물질인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물질이란 자체가 상당히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아비달마의 불교에서
다르마들을 ; 색법(물질) vs 심법(정신)
둘로 나누어 보는 식이 시작됩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맞추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는 데
심외무법이라고 했죠?
모든 다르마는 마음에서 온다,
그렇다면 물질도 心(심)인가?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살아있는 한길 몸속의 세간을 이야기 한다.
그 세간의 일체법이 오온이다.
몸속에 세간 속에 물질이 들어 있나요?
이런 식의 해석은 왜곡된 해석입니다.
실제로 루빠라는 말이 색으로 번역이 되는데
이 루빠(色)라는 말 속에 물질의 개념으로 해석할 요인이 없다,
다만 루빠는 형태적인 요소
꿈속에서 나온 나무가 물질일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형태를 물질이라 말할 수 없겠죠?
데카르트라는 프랑스 사람이
세상을 물질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라는
두 실체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의하고
물질은 연장을 가진 실체다 그랬습니다.
시간과 공간속에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물질 개념은 나 밖에 세상에 시간과 공간이 전제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전제된 속에서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떠난 물질은 존재할 수 없다,
아비달마 불교, 물질은 심외에 있는 겁니다.
心法(심법)과 色法(색법) --> 심외의 사물로 외지화 시켜 버렸다,
밖에 색법 지수화풍 사대라고 하는 구성 개념을 삽입해야 되고
부처님은 사대를 실체라고 말씀 하시지 않았다,
인도 사람들은 지수화풍 4대를 실체라고 했는데
부처님은 사대도 무상하다 말씀 하셨다,
아비달마 불교는 사대를 실체라 할 수 없으니까
색법을 구성하는 근본이 극미라고 했다,
극미 이론을 만듭니다.
부처님은 극미 극자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아비달마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로부터
결국은 복잡한 이론으로 발전해 버린 겁니다.
이론이 복잡해지고 책이 많아지니까
복잡하고 치밀한 이론이 전개되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잘 설명한 이론처럼
오해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12처에서 연기한 법입니다.
색법도 12처에서 연기한 법입니다.
아비달마에서 제대로 된 색법을 설명하려고 했으면
사대나 극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12입처에서 18계를 걸쳐서 연기하는가?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이런한 연기적인 측면을 배제해 버리고
원자론으로 해석해 버린 겁니다.
현대인들은 원자론적 사고에 길들여 가지고
해석을 보면 공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5온, 12처, 18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5온, 12처, 18계는 일체법인가?
부처님은 일체법을 3가지로 분류
5가지로 분류 5온
12가지로 분류 12처
18가지로 분류 18계
이 3가지를 갖고 짝짓기를 합니다.
2천년전 아비달마 불교의 해석방식입니다.
후대 사람들은 옛날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니까
그대로 따라서 배우고 있는 것이죠,
불경 속에서 부처님도 그렇게 하는가 봤더니
부처님은 절대 그렇게 안합니다.
부처님은 12처를 일체라 하지 일체법이라 안 합니다.
일체와 일체법이란 말이 다르게 사용됩니다.
인도철학에서 일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통털어 지칭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일체는 브라만이다.
브라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죠?
당시 사대를 주장했던 유물론자들은
일체는 사대다, 지수화풍 네가지다,
부처님께서는 일체는 12입처다~!!
일체는 브라만이다, 일체는 4대다 말하는 것은
일체는 하나의 초월적 존재가 만들은 것, 브리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
과락자들은 일체는 원자다, 일체는 4대다 같은 말이다.
여러 요소가 모여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인도철학적으로 말하면 전변설, 적취설인 겁니다.
전변설은 하나의 초월적 실체로부터
다양한 현실세계가 벌어져 나왔다(일원론)
적취설은 여러 가지 요소로 만들어 졌다,
여러 가지 요소가 모여 현실세계가 나온다.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가 모여 물질이 된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시 자연과학이죠,
그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아비달마입니다.
아비달마가 색법을 적취설 쪽으로 설명을 하는 겁니다.
緣起(연기)는 무엇인가요?
일체는 12입처다, 가 연기법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세상이 연기하다.
눈으로 보는 세계
귀로 듣는 세계
이런 마음으로부터 세상이 연기한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할게 아닙니까?
지금 부처님께서는 연기한다는 사실을 깨닫으셨잖아요?
부처님께서는 세계는 누가 만들었거나
무엇으로 만들어 진 게 아니고
살아 있는 우리들이 생명들이 세상을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가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인간 세계만 볼 수 있지
다른 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각기 다른 세계를 벌려 놓고 삽니다.
그런데 그 세계들이 서로 어울려져 있습니다.
식물들은 식물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녹색동물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식물들을 동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식물이라고 하면 수동적이고 思惟(사유)도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불교에서는 식물을 無情(무정)이라 하죠, 천만에 말씀입니다.
과연 식물은 수동적이며 사유하지 않는가?
식물들이 주변 환경에 적응해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대응하는 것은 동물을 능가 합니다.
생태계{의 최후의 승리자는 식물입니다.
동물은 다 죽어도 식물은 살아요,
식물이 그 만큼 생존하기 위한 전략을 쓰는 데
동물을 능가하는 생존 전략을 쓴다는 겁니다.
물가에 자라는 염주만드는 모감주라고 있습니다.
변산반도 주변에 모감주 군락지가 있습니다.
모감주 열매가 씨앗을 싸고 있는 껍질이
돛단배처럼 되서 씨앗을 안고 물 위에 떨어집니다.
돛단배 모양의 씨방에 물에 떠 다니며 물가에 종자를 퍼트립니다.
모감주는 물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종자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 돛단배 모양의 씨방이 필요한 겁니다.
어떤 분이 농사를 지으면서 하는 말이
잡초의 씨는 한 품목이라도 한 종류가 아니 더라는 겁니다.
처음에 풀을 뽑으면 뒤에 또 올라오고
또 올라온 놈을 뽑으면 뒤에 또 올라옵니다.
시기에 따라 성장속도가 다른 잡초라는 겁니다.
이 잡초가 시간을 알고 있는 겁니다.
씨 종류가 달라서 뽑아도 뽑아도 또 올라오는 게 잡초라는 겁니다.
결국은 풀한테 못 이긴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무가 염소를 죽였습니다.
어느 농장에 염소들이 몰살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나무가 죽인 겁니다.
나무가 어떻게 죽였을까요?
그 목장에는 다른 목장보다 염소를 2배나 많이 키웠던 겁니다.
나무들이 가만히 있다 가는 염소들한테 다 죽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나무들이 염소가 먹으면 죽는 물질을 독성물질을
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염소들이 다 죽은 겁니다.
옆에 목장은 안 죽었는데
처음에는 전염병이 도는 줄 알았다,
여러 가지 검사 끝에 결국 나무가 죽인 거 랍니다.
나무가 그렇게 변하게 된 원인은
많은 염소를 한곳에 방목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무하고 소통이 안되니까 알아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무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생각을 하고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은 환경을 인지합니다.
자기의 삶에 맞게 인지합니다.
나무는 나무가 사는데 필요한 인지를 하는 겁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면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인 겁니다.
세계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겁니다.
일체는 12입처라는 말은
인간들의 세계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느끼는
인지 구조속에서 우리들의 세계가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현대 과학도
결국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인지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우리가 인지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보기전에는 밖에 뭐가 있네 없네 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밖에 色(색)이 있다는 것은
내가 보니까 그 色(색)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일 겁니다.
너도 그렇게 보고 나도 그렇게 보면
세상이 그렇게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세계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고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연기하는 세계인 겁니다.
이게 붓다가 깨닫은 세계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우리 인간들이
존재로써 인식하는 종류가 5가지인데
그 5가지 종류가 어떻게 해서 형성 되는가 하면
우리 인간의 삶과 연결이 돼 있습니다.
신체적인 몸이 있죠
몸이 있으니까
몸에 상응하는 형태들을 色(색)이라 부릅니다,
불교에서 오온 가운데 색 그러면
신체적인 구조를 이야기 합니다.
몸을 물질이라 것은 잘못된 발언이다.
물질과 정신의 두 가지 세계?
객관화 시키며 나온 관념일 뿐이다.
실제로 세상은 물질과 정신으로 분리 돼 있지 않습니다.
물질을 실제화 시키고 정신을 실제화 시키면
물질과 정신 둘은 서로 상관이 없습니다.
각각 독립된 실체인 겁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라는 근세철학자가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를 이야기 하고
인간은 두 실체가 기계적으로 조립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 몸속에는 정신이 하나씩 들어 있어요,
몸 안에 정신이 우리 몸과
신경세포적으로 연결되어 가지고
우리 몸을 통제한다고 보는 겁니다.
매우 그럴듯하죠?
그런 생각을 하니가
몸은 죽어도 정신은 돌아다닐 거 같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윤회한다는 생각도 다 거기에 의존하는 거다,
물질과 정신이 이원화 되어 있는 세계관
부처님은 그것을 어리석은 생각이다는 것을
깨닫은신 분입니다.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다.
쉽게 증명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그 세계관을 가지고 수행을 하셨습니다.
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인도에 자이나교입니다.
자이나 교에서는 우리의 몸은 물질적인 푸드갈라로 돼 있고
우리의 정신은 지바라고 하는 영혼이에요,
이 두 가지가 결합돼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정신이 육체와 결합돼 있을 때 괴로워~!!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지바 영혼이 물질에서부터 벗어나야 돼,
그러니까 고행을 하면
몸으로부터 지바가 독림을 합니다.
이것을 보고 독존이라 합니다.
독존이 되면 해탈이 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돼,
그래서 부처님께서 고행을 하시죠?
당시 고행을 한 것은
고행주의 철학에 입각해서 하신 거 에요,
우리들의 모든 수행도
근본 철학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고 하고 있으면
제대로 수행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이나교 수행을 하려면 자이나교 교리를 알아 가지고
그 교리에 맞추어서 해야 되겠죠?
효과가 있고 없고는 다음 문제지만
부처님의 고행은
몸은 쇠약 해져도 몸은 맑아져야 되겠죠?
몸 때문에 마음이 구속되어 있는데
몸의 힘을 없애 버리면 마음은 더 맑아져야 되겠죠?
여러분 사흘 굶어 보세요,
몸에 힘이 없는데 정신이 말똥말똥 하든가요?
하루만 굶어도 정신은 오락가락하죠? 금방 알 수 있잖아요?
부처님이 보니까 몸만 괴롭지
정신이 맑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은 거 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고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교 공부하면서 고행이니 참고 한다는 것은
공부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불교 공부는 처음도 재미 있고 중간도 재미 있고
마지막도 재미있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불교공부 처음 한 번 해보면
가면 갈수록 맛이 깊어집니다.
구차제정을 이야기 할 때
초선정에 처음 얻는 것이
이욕/불선법 --> 이생희락 --> 정생희락....
구국의 깨닫음 = 무한한 행복 = 열반
여기까지 우리는 가야 된다.
내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마지막도 좋다~!!
그러니 쓸데 없는 고행을 하지 마라~!!
말씀하십니다.
몸을 괴롭히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몸을 쾌락에 내 맡기는 것은 더 옳지 않다,(1;50;40)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고락과 쾌락을 멀리하라~!!
거기에 참된 수행이 있다, ---> 中道(중도)로서 팔정도다,
팔정도의 중심은 = 정견이다.
고행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데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5가지 존재가 있을 수 있다 말씀하신 것이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해 보세요,
몸을 가지고 살죠?
몸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하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감정이 일어납니다.
뭘 보면 좋다 나쁘다 이런 생각이 생기죠
몸을 가지고 살아갈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感情(감정)입니다.
즐거움 괴로움 감정들이 에요,
그런 감정에 의거해서 思惟(사유)를 하게 됩니다.
보고 듣고 나면 느낌이 일어나죠?
느끼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들을 정리해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따져보고 생각하죠?
따지고 생각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하는가 하면
나한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즐겁게 하면 좋다고 하고
괴로운 감정이 일어나면 나쁜 겁니다.
불교의 善惡(선악)은 별거 아니 에요,
고통을 주면 惡(악)이 에요,
기쁨이나 즐거움을 주면 善(선)이 에요,
보통 선악은 엄격한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극에 아니 에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좋다 vs 좋지 않다
기분이 좋다,
술이나 마약을 먹어도 기분이 좋죠
그런데 뒤가 안 좋아~
좋은 거 같지만 안 좋은 겁니다.
참으로 좋은 것과 사실은 좋지 안은 것
불교 공부하면서 좋은 것은 갈수록 좋은 겁니다.
선악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삶에 보탬이 되고 삶을 행복하게 해준다면 善(선)이다,
불법이 善(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우리들이 그 실천하는 순간부터
우리들의 삶이 행복해지니까 善(선)인 겁니다.
괴롭지만 죽어서 극락 가서 복을 받을 것이다,
지금이 좋아야 내일도 좋다~!!
지금이 좋지 않은데 내일이 좋을 수는 없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행동을 통하여 확실한 인식이 형성됩니다.
우리들의 의식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과정이
우리 몸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지긱활동을 하죠
12입처가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지각활동입니다.
이런 지각활동을 하게 되면 느낌이 일어나죠,
느낌이 일어나는 메카니즘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왜 느낌이 일어나는지 모르죠?
부처님께서는 그 느낌이 일어나는 바탕이 있다는 겁니다,
그 바탕에 18계가 있다는 겁니다.
18계를 연해서 촉이 발생합니다.
지각활동 12입처 --> 느낌이 일어난다,
느김이 일어나는 바탕에 18계 --> 촉이 발생한다.
경험을 한다는 것이 촉인데
이 촉은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 에요,
눈으로 컵을 보면 이게 촉입니다,
이게 컵이네 내가 알죠?
컵이 참 좋다, 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왜 이 컵을 보고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할 수 있을까요?
이 컵이 나를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나쁘게 할 수도 있겠죠?
장미꽃 보면 기분이 나쁘신 분 있나요?
기분이 좋죠,
그런데 다 그렇지 않아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환자 가운데 빨간 장미만 보면 구토가 나오고 소화가 안되고
이상한 증세가 벌어진데요,
왜 그럴까요? 사연이 있었답니다.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가 있었는데
빨간 장미 한 송이를 갖고 와서 프로포즈를 했어요,
나 한테 장미꽃 한 송이 가지고 프로포즈 했다고
서운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차 버렸답니다.
다른 남자는 백송이를 가지고 왔어 그 남자하고 결혼을 했다,
한 송이 가지고 왔던 남자는 자기하고 친한 친구하고 결혼을 했는데
자기 남편보다 그 남자가 잘 나가는 거야~
빨간 장미를 볼 적마다 속이 뒤틀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대상은
여러분들의 경험에 의해서 내용과 가치가 규정되는 겁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의식속에 界(계)로써
意識界(의식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형성되는 의식의 구조가 18가지 구조로 돼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으로 보고 의식한 세계가
귀로 듣고 의식한 세계
빨간 장미를 보는 의식계 속에는
우리가 보는 예쁜 장미가 아니라
자기의 아픈 추억을 연상시키는
의미가 자리잡고 있는 거 에요,
우리는 그 안에 그런 세계가 있는지 몰라~
나는 왜 저것만 보면 그런지 몰라
그런데 잘 보면 그게 界(계)에요,
18계를 기초로 해서 촉이 일어나요,
뭘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의 경험에 기초해서
항상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거 에요,
“자라보고 늘란 사람은 솥뚜껑 보고 놀란다,”
솥뚜껑이 놀라게 생겼습니까?
자라한테 놀란 사람이 솥뚜껑보고 놀라지
용봉탕 먹어본 사람은
솥뚜껑 보고 침 흘리지 놀랄 일이 없다,
여러분들이 일으키는 감정은
바깥에 있는 대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에 의해서 의식계에 형성되면
그것들이 작동을 해가지고 촉이 일어나는 거 에요,
촉입처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그랬죠?
촉의 그 자리를 잘 보고 있으면
빨간 장미가 문제가 아니고
과거의 내 선택이 문제지,
내가 선택했다면 내가 시기 질투를 해야 겠어요?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나의 삶을 좀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겠어요?
6입처에서 이런 것을 잘 통찰하면
연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도 열심히 내조를 해서 보다 잘 살아야지
장미꽃 때문에 속이 뒤틀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불교 수행을 잘하면
자기의 삶을 바꿀 수가 있는 겁니다.
안이비설신의 + 색성향미촉법
= 육식,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발생 ; 18界(계)
계를 연하여 촉이 발생 = 촉으로부터 느낌이 일어난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느낌은 우리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가 나의 의식을 통찰해야 한다.
자기가 자기 의식을 통찰해 가지고
거기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보고 수정하고 고치고
바르게 만들어 가는 게 수행이에요,
18계를 통해서 촉이 나오고
촉으로부터 느낌이 일어나고
느낀 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가지고 행동하고
행동을 한 것을 결과로서 의식이 형성됩니다.
識(식)은 계속해서 커 가겠지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오온이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식하는 게 5가지죠,
색수상행식 5가지가 이렇게 형성 된다는 이야기를
설명하신 거 에요,
이게 일체법이에요,
우리가 말하는 모든 존재에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 마음에서 삶을 통해 연기한 것들이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연기하면서 고통으로 몰고 가느냐?
어떤 식으로 연기하면 고통을 벗어나
우리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가느냐?
이 길이 보이는 거 에요,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불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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