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불교의 중국전래>>
인도불교가 인도 동북 쪽 항하(Ganga)유역의 지방 종교에서 탈피하여 인도전역은 물론 세계종교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쇼카왕(B.C.273~232)의 불교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쇼카왕은 지지하였던 목건련자티사(目建連子帝須)를 시켜 주변 각 나라에 8개조의 승려들을 파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에 중국까지 전교된 것 같지는 않으나, 대월지(大月氏) 등을 경유해 한(漢) 애제 때(B.C.2세기) 전교되었다는 기록이「삼국지」위지동이전에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한 애제 때 처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상 한 무제시대(BC.140 ~ 87)에 서역변방의 개척으로 말미암아 동서 교통로인 실크로드가 뚫리게 되었고, 불교 역시 실크로드를 오가는 서역상인을 따라 자연스럽게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서역의 대월지 왕조로부터 실크로드를 거치 전래된 중국의 불교는 처음에는 중국인에게 많은 주의를 끌지 못하였으며, 오직 서역으로부터 온 외국상인과 중국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였다고「진서」(晉書) 불도징전(佛圖澄傳)은 전한다. 당시 중국의 사상계는 도가(道家)가 유행하여 불교도 도가의 방술(方術)이나 선법(仙法)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배불론과 불교의 대응>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몇몇 유가와 도가 사람들의 심한 배척과 배불론(排佛論: 불교배척 이론)이 대두되었다. 이들 배불론은 동한(후한) 말년(3세기초)에 시작되어 위진남북조시대(220 ~ 589)에 성숙하였으며, 송명리학(宋明理學)이 성행하였던 시절(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교를 비판하였다. ①불교윤리는 중국고유의 윤리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 ②불교승려들이 왕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비판 ③불교는 오랑캐의 종교라는 비판 ④불교 승려들이 생산적인 작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비판 등이다.
(1) 불교윤리는 중국의 윤리에 맞지 않는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러 불교가 조금씩 받아들여지게 되고 출가 승려와 일반 신도들이 날이 갈수록 불어나게 되자, 사회 보수인사들은 불교의 윤리가 중국고유의 윤리와 맞지 않다는 배불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출가 승려들이 집을 버리고 삭발하는 것이 보수인사들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였다. 당시 중국 유가의 경전인「효경(孝經)」에는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손상해서는 안되며, 이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고 말하고 있다.
(2) 사문은 왕을 존경하지 않는다.
유가의 윤리관에 의하면 효(孝)와 충(忠)은 하나이며 나누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효경」에는 '효로써 임금을 섬기니 바로 충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항상 제왕이 승려를 향하여 예를 올리는 것으로 경전마다 전한다. 승려와 제왕과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여산혜원(廬山慧遠, 5세기 동진승려)은 당시 동진(東晉)의 재상 환현의 물음에 답하면서, 재가불교 신도는 세속에 살고 있으므로 충효의 도리를 다 해야 되지만, 출가 승려는 이미 세속을 벗어나 세속의 예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란 유명한 글을 남겼다.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되다가 원나라 이후부터는 승려들이 제왕들에게 예를 갖추게 되고, 명말에 이르러 연지대사(連池大師)는 부모와 출가한 아들 사이에도 서로 예배하여야 한다는 조화설을 제안하였다.
(3) 불교는 오랑캐의 종교이다.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해 온 외래종교이기 때문에 중국의 유가 위주의 민족주의자들의 배척은 피할 수 없었다.「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의하면, 공자가 '안에는 하(夏)가 있고, 밖에는 오랑캐가 있다'는 말을 한 이후부터 화하(華夏:漢민족을 말함)와 오랑캐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 또한 그들이 배척해야 할 여러 오랑캐문화의 하나일 뿐이었다.
중국 양나라 때 승우(僧祐, 445~518)가 불교수호 목적으로 쓴 「홍명집(弘明集)에 보면, 공자는 “오랑캐에는 설사 군주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에 군주가 없는 것만도 못하다”고 말하였고, 맹자는 “나는 중국의 방식으로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오랑캐의 방식으로 중국을 변화시켰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비난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동한시기부터 시작된 불교배척은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면서 불교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하지변(夷夏之辦: 오랑캐와 중화의 변론)이라는 주제로 도교까지 합세하여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유송(劉宋, 420~478)시대의 도사 고환(歡)이 지은「이하론」(夷夏論)과 제(齊,479 ~ 501)나라 때 도사 장융(張融)이 지었다고 전해지는「삼파론」(三破論)이 불교와 도교의 갈등을 보이는 대표적 논서이다. 처음에는 중국과 인도의 풍속습관상의 차이로 시작된 불교배척은 비교적 철학적 논쟁인 '이하지변’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삼파론」의 '삼파'란 국가를 파괴하고,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며, 몸을 파괴한다는 세 가지이다. 즉 승려들이 생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자녀를 생산하지 않아 대가 끊기는 등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신체를 훼손한다는 것 등이다.
당나라 때 도사 이중경(李仲卿)이 지은「십이구미」(十異九迷)에서는 '인도 오랑캐의 작은 장인(석가모니부처님을 가리킴)은 중국 천왕의 대사(天王之大師: 노자를 가리킴)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십이구미」에서는 음양오행의 이치로 보더라도 '양'인 동방의 중국이 '음'인 서방의 인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말한다. 배불의 이러한 철학적 풍수적 논리는 놀랍게도 뿌리가 깊어 송대와 명대를 거쳐 발전한 새로운 유가철학의 배불론의 근간이 되었다.
(4) 불교 승려들이 생산적인 작업에 종사하지 않는다.
북제(北齊)의 인지추(顔之推)의「가훈」(家訓)에 열거된 당시 배불론의 다섯가지 이론 중 네 번째가 '금은재화를 낭비하는데다 조세와 부역을 소모시키는 것으로 나라에 해가 된다'는 비판이다. 안지추는 당시 중국불교의 승려들의 일탈은 대각(大覺), 즉 석가모니부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라고 변호하면서, 반드시 출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절을 지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여 절충을 시도하였다.
<배불론에 대한 불교의 대응>
이상으로 각종 배불이론의 요점을 정리하였다. 이에 대한 불교의 대응은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효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출가승려도 불효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둘째는 총림제도(叢林制度)의 건립이다. 셋째는 격의불교(格義佛敎)와 삼교동원론(三敎同源論)의 유행이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1) 불교의 효경
중국인들은 유가의 영향으로 인해 '효'를 모든 윤리도덕의 기본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 불효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설명이 필요하게 되고 대안으로 불교의 효경을 번역하거나 만들어 냈다. 번역한 것으로는 ①「불설부모은난보경」(佛說父母恩難報經) ②「불승도리천 위모설법경」(佛昇物利天爲母說法經) ③「불설효자경」(佛說孝子經) ④「불설보살섬자경」(佛說菩薩陝子經) 등이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 낸 효경으로는 ①「불설우란분경」(佛說孟蘭盆經) ②「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이다. 이 두가지 효경은 세속문학의 재료가 되고 대중에게 익숙한 민간희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2) 총림제도의 건립
모든 배불론 중에서 출가 승려들이 생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병역과 조세를 회피한다는 비판이 가장 신랄한 질책이었다. 승려들이 늘어남에 따라 국가의 세입이 줄고 일부승려들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위화감이 조성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사원경제와 국가경제 사이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위와 같은 상황과 비판에 대해 불교가 내놓은 대응방법은 총림(叢林)제도로서, 출가승려 스스로가 사원경제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당나라의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 그의「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주장한 것으로서, 총림(사원)에 머무는 모든 승려들은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대표적인 청규이다.
이로써 사원경제는 사회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계기로 중국불교는 전혀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으니, 백장회해는 소승도 대승도 아닌 달마의 가르침에 근거한 선문을 독립시켜 선종의 기치를 높혔다. 송의 찬녕(贊寧)이 지은「송고승전」에서 백장회해를 묘사한 글을 정리하면, ①백장회해는 대승법을 수행하며, 소승(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아함경」을 수행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②백장회해는 「유가사지)론」,「영락경」 등에서 설하는 대승계율 또한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③백장회해는 소승과 대승을 절충하는 새로운 제도인 청규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 청규는 일반사원에서 따르는 계율과는 다르기 때문에 선종교단은 독립하게 되었다.
당시에 백장청규가 유행하게 된 많은 원인들 중에서도, 사원을 출가승들이 자기 집(家)으로 여기게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집이 지니는 의미는 출가승들에게 가족의 정을 느끼게 하였고, 사원의 경제적 독립은 승려들이 병역과 조세를 피하고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유가와 도가의 비판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3) 격의불교와 삼교동원론의 유행
불교는 유교와 도교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방법을 제안하였고, 이후에는 ‘유·불·도 삼교동원(三敎同源)'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동한(東漢) 말에 방술불교(方術佛敎)가 유행하였듯이 위진남북조시대에 유행한 격의불교는 유가와 도가(이중에서도 특히 도가)에서 사용하는 고유술어 또는 개념을 빌려 불교경전을 해석하던 풍조를 말한다. 격의불교의 형식은 대부분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불교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유가나 도가와 같은 불교밖의 사상을 빌려 불교의 이치를 설명하는 방편이었다.
불교는 유가와 도교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유·불·도 삼교동원론(三敎同源論)이라는 또 하나의 방편적 수단을 채택하였다. 대표적인 삼교동원론은 일종의 삼교협조론으로서 명말(明末)의 고승인 연지대사(蓮池大師,1535~1615)는「죽창이필」(竹窓二筆)에서 유불도 삼교는 서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교협조론은 진정한 삼교동원론이라 할 수 없으며, 삼교가 공동의 내용과 본질을 가진다는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삼교동원론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은 모두 다 착하게 살라는 것이고, 무엇을 믿든 본질은 마음이라는 식의 ’일원적 유심론'을 바탕으로 한다. 당 종밀(宗密)은 그의「원인론」(原因論)에서 종파와 관계없이 여래장 혹은 불성이라는 우주의 유일한 마음의 본체를 긍정하였고, 공자·노자·석가가 모두 지극한 성인이지만 때와 상대와 교법을 달리 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여러 가지 수행을 권장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면에서는 삼교가 같기 때문에 삼교를 모두가 따르고 행해야 하나, 만법을 추궁하여 이치를 국구하고 본질을 구명하여 본원의 진리에 도달하는 데는 불교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종밀의 삼교동원론이 다분히 불교 중심적이라면 명말의 고승인 감산덕청(鞍山德淸, 1543~1623)은 그의「관노장영향론」(觀老莊影響論)에서 ‘「춘추」를 모르면 세속에 이를 수 없고,「노자」와「장자」를 모르면 세속을 떠날 수가 없으며, 참선을 모르면 세속을 초월할 수가 없다. 이를 알아야 배운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의 글에서 삼교동원론은 삼계유심(여래장)과 만법유식(아뢰야식)의 이론을 기반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째든 삼교동원론은 삼교가 내용상 서로 교환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같은 원류를 가진다는 적극적인 해석을 내 놓은 것이다. 덕청은 나아가 '공자와 노자는 곧 부처의 화신이다' 라고까지 말했다.
* 출처 : 불교사상사, 진호 이광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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