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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 권오민

수선님 2023. 6. 11. 13:08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권오민 교수(경상대 철학과)

오늘날 불교에 관한 일부 식자층의 이해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불교신자는 ‘어렵다’는 인식조차 갖지 않는다. 재일(齋日) 등 특정한 날 절에 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기도(기원)하는 것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을 불교의 모든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의례는 물론 교조에 대한 당연한 예배이고, 그의 가피력에 의해 구원(구제)받고자 하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종교적 염원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일요일 교회에 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그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혹자는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동일하며, 다만 정서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절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거나 “나는 선천적으로 향냄새가 싫다”고 하는 것과 같은. 그러나 불교는 분명 기독교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과 더불어 분명 세계종교의 하나로 분류되지만, 불교를 그러한 유일신교와 동일한 반열에 놓기에 ‘종교’라는 말의 뜻이 너무 협소하다. 인도 사유에 있어 신에 대한 믿음은 깊은 종교적 삶의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며 고도의 철학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불교가 철학인가 종교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온갖 구구한 변명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있어왔지만, 분명한 사실은 불교가 오로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절대자의 구원만을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며, 단지 이성적 탐구만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도 아니라는 점이다. 서구전통에서 종교와 철학은 각기 그리스와 히브리의 문화전통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그러한 대립관계가 성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를테면 인도의 종교는 철학적이며,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철학(philosophy)’이나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대개의 문화어들이 그러하듯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로서, 한문 전통에는 없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화 전통에서도 당연히 양자는 대립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철학이 단지 세계에 대한 지적 탐구만도 아니었고, 종교가 오로지 유일 절대자에 의한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유학(유교)의 실천도인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이 이를 말해준다.

인도에서 발행한 종교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앞서 말한 대로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다. 이 말은 곧 철학활동(지적 탐구)의 궁극목표인 정지(正智)를 통해 종교적 욕구인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불교에서의 종교적 구원은 다만 생천(生天), 즉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탈(解脫) 내지 열반(涅槃)이며, 이는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 즉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생천 역시 오로지 선업에 의해 가능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교는 불타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아니 불타(佛陀, Buddha)라는 말 자체가 각자(覺者), 즉 깨달은 자라는 뜻이니 ‘불타의 깨달음’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깨달았던가? 어떻게 깨달았던가? 왜 깨달았던가?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교의 종교에서라면 이 같은 물음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깨달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가 이 세계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 즉 여호와의 왕국이라는 신의 주체적 지향에 대한 깨달음이며, 그의 왕국을 소명하며 살아가는 그의 피조물(기독교인)로서의 자각으로, 이는 그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는 교조적인 절대성을 갖는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무엇보다 먼저 불타는 교조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세계가 그의 피조물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 또한 여호와의 말씀(성경)과는 유(類)가 다르며, 오로지 절대적 믿음에 근거하여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이해에 기초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예나 지금이나 ‘불교란 무엇인가’ ‘불법, 즉 불타 깨달음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불교법문의 핵심이 되어 왔다.

불교는 결코 믿기 쉬운 종교가 아니다. 더욱이 불타 깨달음에 대해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경론(經論)이 찬술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교파와 종파가 생겨나게 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믿기 쉬운 종교만이 능사는 아니다. 믿기 쉬운 종교로 말하자면 길흉화복을 점치고 사주팔자(운명)와 이를 주관한다고 여기는 천지신명을 믿는 것이리라. 불교가 믿기 어려운 종교인 것은 그만큼 고등종교이기 때문으로, 스스로의 이해와 통찰이 요구되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앎의 의미

불교를 어렵게 만드는 외적 요인 중의 하나는 불교술어이다. 대개는 한자어, 그것도 오늘의 한자어가 아닌 1400년도 훨씬 더 전의 한자어이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말만은 유독 우리말이다. ‘부처님 오신 날’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애매한 추상적인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꿈(미망)에서 깨어나 본래의 상태(진실)를 회복한다거나 그릇된 견해나 편견 선입견 등을 깨트려 본래의 참된 면목을 드러낸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에 대해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 깨달음의 대상과 내용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동아시아에서 발전한 선불교를 통해 신비화되고 초월적인 이미지를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마대사의 면벽(面壁) 9년이나 혜가대사의 단비(斷臂, 팔뚝 절단)의 신화를 통해, 혹은 해골 물을 마시고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원효대사의 신화를 통해 불교의 깨달음과 조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 깨달음은 대상화될 수도 없고, 어떠한 식으로든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다만 깨달음의 전기(轉機)만이 신화화되어 우리에게 부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원론적으로 말해 보자. 깨달음은 한자 각(覺)의 번역어이며, ‘각’은 보리(菩提, bodhi)라는 인도 말의 번역어이다. 이는 불타(Buddha)와 마찬가지로 ‘알다(budh)’는 뜻에서 파생한 말로, 지각(知覺)이나 생각(生覺)이라 할 때의 ‘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당연히 앎(이해)을 근본으로 삼는 종교이다. 물론 부처님의 깨달음에는 ‘정(正)’이나 ‘무상정등(無上正等)’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정각(正覺)’ 혹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으로 찬탄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앎’의 뜻을 다양한 술어로 나타낸다. 무명(無名)의 ‘명(vidya)’도, 세간해(世間解)의 ‘해(vid)’도 앎을 나타내며, 일체지(一切智, sarvajna,보통 살반야 薩般若로 음사)의 ‘지’도, 정견(正見)의 ‘견’도, 나아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인’도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명’과 ‘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존재에 대해, 세계에 대해, 혹은 학문에 대해 명료하게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명행족(明行足, vidya carana)의 ‘명’도 동일한 뜻이다.

‘지’의 원어는 즈냐(jnana)로, 여기에 ‘분리’ ‘분산’을 의미하는 접두사 비(vi)가 붙은 비즈냐나(vijnana)는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에 근거한 우리의 일상적 인식인 분별적인 앎[了別 혹은 識別]을 나타내기 때문에 옛 사람들은 이를 ‘식(識)’이라 번역하였다. 이에 반해 흔히 ‘지(智)’로 번역되는 즈냐나(jnana)는 대개 무분별의 절대적인 앎을 나타내며, 여기에 ‘앞서다’ ‘뛰어나다’를 의미하는 접두사 프라(pra)가 붙은 프라즈냐(prajna)는 비록 지혜의 뜻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지혜, 예컨대 슬기로움이나 총명한 정도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다만 음(音)으로 번역하여 ‘반야(般若)’라고 하였다.

한편 견(見)의 원어는 다르샤나(darsana)이다. 이는 ‘보다’는 뜻의 동사어근 √drs에서 파생된 말로서 다만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실상이나 존재본성에 대한 통찰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철학을 다르샤나라고 하였는데, 불교는 붓다(Buddha) 다르샤나, 자이나교는 자인(Jain) 다르샤나로 일컬어진다. 과연 불타는 무엇을 어떻게 보았던(통찰하였던) 것인가?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우리도 그가 갔던 길을 따라 그가 보았던(통찰하였던) 것을 본다면 그가 성취한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忍, ksanti)은 인가(忍可) 인지(認知)의 뜻으로, 확실하게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앎은 요컨대 그것을 진실로 인정할 때 비로소 확실한 앎이 된다. 어째서 참을 ‘인(忍)’인가? 진리에 대한 인가는 필시 고통을 감내해야하기 때문에 ‘인’이다. 진실을 인가하는 일은 세세생생 쌓아온 자기와 자기의 세계가 파기되는(깨어지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예컨대 암에 걸린 환자가 자신이 암에 걸렸으며, 그리하여 조만간 영원하리라 굳게 믿었던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일단 인정하고부터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깨침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사색의 결과로서 내리는 판단이나 결단과는 그 유(類)가 다르다. 그래서 ‘인’으로, 이는 6바라밀다의 인욕과 원어가 같다.

요컨대 깨달음[覺, 보리]이든, 지(智)든, 혹은 식(識)이든 반야(般若)든, 혹은 견(見)이든 인(忍)이든 비록 얕고 깊음의 단계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앎’을 의미한다. 불교는 앎의 종교이다.

깨달음의 내용과 대상

그렇다면 불타는 무엇을 깨달았던 것인가? 흔히들 ‘진리(진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답이 될 수 없다. 세상의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사상도 진리를 외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애석하게도 다른 뭇 종교와는 달리 이에 대한 불교의 답은 한결같지 않다. 일차적으로 부처님의 교법(敎法), 즉 말씀을 진리라고 하지만, 말씀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이다.

불타 말씀의 집성인 불교경전은 다른 종교처럼 그 자체로서 절대(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이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그의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깨달음이 피안이라면 말씀은 피안으로 건너가는 배, 깨달음이 달이라면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타 깨달음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종교에서는 결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경전이 결집되었고, 그에 따른 논서(이론서)들이 작성되었다.

초기불교시대에는 각 부파들에 의해 『아함경』과 같은 소승경전이 결집되었지만,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대승경전 이를테면 『반야경』 · 『법화경』 · 『화엄경』 혹은 정토관계 경전(『아미타경』 · 『무량수경』 등)이 결집되었고, 대승중기에는 『해심밀경』 · 『승만경』 · 『열반경』 · 『능가경』과 같은 경이, 대승후기에는 『대일경』 · 『금강정경』과 같은 밀교경전이 결집되었으며, 동아시아(중국)에 이르러서조차 여러 경전들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경전들의 사상적 계통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것으로 해석된 경전에 근거하여 각각의 불교종파, 예컨대 삼론종 · 천태종 · 법상종 · 화엄종 · 율종 · 진언종 · 정토종, 그리고 경전 밖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종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불타는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이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직접적으로 진리에 대응하는 술어는 4성제(聖諦)의 ‘제’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였다.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集]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소멸에 이르는 방법[苦滅道], 부처님은 이를 코끼리 발자국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숲 속에서 코끼리 발자국이 뭇 짐승의 발자국을 모두 포섭하듯이, 인간이 알고 추구해야 할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어째서 진리인가? 그것은 (현실)세계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병에 걸린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것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의 중관불교에서 반야바라밀다로 일컬어진 궁극의 진리[勝義諦]는 불이(不二)의 공성(空性)이었으며, 유식불교에서의 그것은 주객의 허망 분별이 제거된 마음의 완전한 상태[圓成實性, 혹은 眞實性]였다. 나아가 이러한 마음의 완전한 상태는 본래 청정한 자성인 진여 일심으로 이해되어 이것이 부처의 본성[法身]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며, 동아시아에 이르러 이게 근거한 그들의 통일적 불교관에 따라 3제원융(천태종)이나 사사무애(화엄종), 혹은 본래무일물(선종)을 세계의 실상, 즉 진리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권으로 서책으로도 부족하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불교 제(諸) 교파(혹은 종파)의 진리관은 모두 신과 같은 유일절대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도리어 그 같은 존재를 토끼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은 공허한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없을 뿐더러 그에 대한 앎 또한 실제적인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괴로움, 이는 인간의 당면한 현실이며, 괴로움의 소멸, 이는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절대의 이상이다.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일체의 괴로움은 원죄로써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실상이나 존재본성에 대한 무지(무명)와 그에 따른 업(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긴다. 따라서 오로지 무지의 극복(즉, 깨달음 내지 앎)에 의해서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초기불교에 있어 괴로움으로 표상되는 세계 현실의 진실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이다. 세계는 조물주나 숙명에 의해 주어진 필연적인 것도,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난 우연적인 것도 아니다. 다수의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해 생겨난(조작된) 것이며, 생겨난 이상 소멸한다. 이른바 무상이다. 세계 내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어떠한 논증도 필요하지 않은 경험적 사실이다.

우리가 세계를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항상 경험에 선행하는 주체, 혹은 세계의 토대로서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지, 나의 마음이라고 하였을 때, 몸 · 느낌 등을 배제한 ‘나’ 자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나’란 토끼 뿔처럼 다만 자아관념의 대상일 뿐으로 몸이나 느낌처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무아이다.

초기불교에서의 무지란 우리에게 경험된 세계가 영원하고, 단일한 자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이러한 무지로 인해 탐욕과 증오가 일어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언어적 신체적 행위가 수반되며, 이러한 행위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이른바 인과업보(因果業報)의 윤회이다.

이렇듯 윤회의 원동력은 탐욕[貪]과 증오[嗔], 그리고 무지[癡]이며(이 세 가지는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不善根 혹은 三毒이라고 한다), 이는 무상과 무아에 대한 금강석보다 예리하고 견고한 통찰에 의해서만 타파된다. 그것이 열반이다. 열반이란 번뇌의 멸(滅), 나아가 괴로움의 멸로, 이는 행복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은 우리가 세간현실에서 욕망을 성취하여 얻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르다. 욕망을 성취하여 얻은 행복은 찰나적이기 때문에 성취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을 낳기 때문이다.

필자는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인간 삶 저편의 세계(혹은 배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고, 서양의 종교나 철학과는 달리 그러한 비전을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正見]과 올바른 앎[正智]을 통해 그 이상(열반/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의 수행

앞서 필자는 불교는 앎의 종교라고 하였다. 혹여 독자들께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어떻게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우리의 불교에서는 ‘앎’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과민반응을 보인다. 앎(알음알이)은 분별망상이며 타파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수행과 믿음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애호하고 집착한다. “수행도 해보지 않고 어떻게 불교를 안다고 하겠으며, 믿음 없이 어떻게 불교를 이해한다고 하겠는가?”하는 말은 오늘의 불교현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이는 아마도 불립문자(不立文字) ·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언어도단(言語道斷)을 내세우는 선불교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일체 사유분별(인식)을 망상으로 여기는 불교(예컨대 유식이나 여래장)에서조차 그 같은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언어를 사용하며, 언어를 통한 이상 사유분별의 인식은 필수적이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는 더 이상 언어가 아니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 아닌가? 여기서 무슨 진정한 믿음이 우러나올 것인가? 그것은 다만 종교의례이거나 초월적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말해보자. ‘수행하라’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라는 말인가? 여기에는 구체적인 내용도, 방법도, 목적도 결여되었다. 세간에서는 흔히들 예참(예불참회)이나 정근(기도)을 수행이라 여기지만, 이러한 행법으로써 무엇을 결여된 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혹은 보다 고차원적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 · 어묵동정(語黙動靜), 수행 아닌 것이 없다”는 다분히 선종적인 수행관을 자주 듣게 되지만, 이는 정직한 대답이 아니다. ‘행주좌와’는 일상이며, 일상의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는 뜻이겠지만,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라는 말인지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오늘 우리 불교에서 모든 수행에 가장 우선하는 최상승의 수행법으로 참선을 꼽지만, 이 때 참선은 필경 조사선(간화선)일 것이며, 이는 조사의 어록(화두)을 간(看)하는 것일 것인데, 예컨대 “무엇이 부처인가?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 막대기)이다”는 운문(雲門)의 격외도리의 참구가 어찌 일상의 수행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선종이라는 특수한 불교종파의 수행법이다. 그 밖의 염불 · 주력 · 간경 등도 열거하지만, 염불은 정토종, 주력은 진언종의 수행법으로, 거기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찾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진배없다. 간경(看經)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접한다는 점에서 그의 깨달음을 엿볼 수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 행해지는 간경 내지 독경은 다만 의례나 경전신앙 차원일 뿐 실제적인 이해(앎)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수행에 관한 이 같은 사정은 조선조 500년을 거치면서 굴절된 우리의 불교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읽고 탐구하는 교종의 각 파는 불교탄압이 극심하였던 조선 전기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교종’이라는 말 또한, ‘소승’이란 말이 대승에 의해 불려진 것이듯이 선종에 의해 주어진 것일 뿐이다.

정직하게 말해 불교수행의 핵심은 계(戒) · 정(定) · 혜(慧) 3학(三學)이며, 지계와 선정은 본질적으로 통찰의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밀교 탄트라에서는 성적인 행법조차 반야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서 필자는 불교는 앎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였다. 깨달음 또한 앎의 뜻이라고 하였다. 후대 논서에 의하면 견(見)이든 지(智)든 인(忍)이든 일체의 앎은 혜(慧)를 본질로 한다. ‘혜’는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인식 판단의 능력, 즉 통찰력을 의미한다. 어떠한 앎도 인식 판단의 능력이 없다면 성취될 수 없다. 하물며 부처님의 깨달음은 말해 무엇할 것인가? 예로부터 부처님이 성도한 자리를 금강좌(金剛座)라고 하였고, 그의 정등각지(正等覺智)를 금강지(金剛智)라고 하였으며, 그것에 이르는 선정을 금강유정(金剛唯定, 혹은 금강삼매)라고 하였다. 이는 금강석(다이아몬드)처럼 어떠한 것도 깨트릴 수 없는 예리하고도 견고한 판단력, 그 무엇으로도 허물 수 없는 결정적 통찰력을 찬탄하는 말일 것이다.

불법(佛法)에 대한 앎에는 범부의 앎도 있고 성자의 앎도 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즉 범부의 앎에는 자아관념과 같은 번뇌가 수반되지만 성자의 앎에는 어떠한 번뇌도 수반되지 않으며, 범부의 앎이 언어를 통한 분별적 인식[識]이라면 성자의 앎은 즉각적인 통찰[見]의 직관[智]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앎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판단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현학적인 것 같지만, 인도의 사유는 우리보다 좀 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다). 불교용어로는 범부의 앎을 유루지(有漏智)라 하고 성자의 앎을 무루지(無漏智)라 하며, 이에 상응하는 판단력을 유루혜(有漏慧)와 무루혜(無漏慧)라고 한다. 나아가 각각의 ‘지’와 ‘혜’에도 불교 교파나 종파에 따라 여러 종류와 단계가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지혜를 고양시키는 세 단계에 대해 살펴보자.

아마도 자전거 타기의 예가 적합할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자전거에 관해 들은 적이 없는 이는 그것이 뭔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이는 먼저 이미 자전거에 관해 들은 이나 탈 줄 아는 이로부터 자전거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할 것이며, 들은 바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다고 해서 바로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실습, 즉 실제적인 습득이 필요하다. 그런데 습득의 기초에는 듣고 생각한 바를 떠올리게 될 것이지만, 그 순간 넘어지고 만다. 그러나 오랜 시간 반복하여 몸에 익혀 두 손을 놓고도 탈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제 더 이상 자전거에 관한 앎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가 자전거에 대해 무지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제 자전거와 하나가 된 것이다. 자전거에 올라타기만 하면 그것에 관한 생각(인식) 없이도 바로 달릴 수 있다. 그것은 상쾌함(즐거움)이자 자유이다.

마찬가지로 불문(佛門)에 들어선 초입자는 먼저 스승이나 친구로부터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들어야 하고, 들은 바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반복적으로 습득하여 몸에 익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이 실제 상황에 적용될 수 있고, 그럴 때 바야흐로 일상현실에서의 탐욕과 증오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열반이나 해탈이라 말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의 말로 하자면 행복이나 자유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지혜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들을 때 성취되는 지혜[聞所成慧]와, 그것을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사유할 때 성취되는 지혜[思所成慧]라는 세 단계가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지혜의 경우,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때에도 그러하지만, 마음이 그것에 대해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자전거에서도 넘어지듯이 부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되새길 수 없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불교용어로 心一境性, 즉 三昧)을 선정(禪定)이라 하며, 반복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기도 한다.

요컨대 계 · 정 · 혜 3학에서 지계(持戒)는 단지 도덕적 금계(禁戒)만을 의미한다기보다 통찰의 지혜에 이르는 예비적 수행[資糧位]이라 할 수 있으며, 선정은 통찰의 지혜를 고양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단계[加行位]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는 모두 통찰의 조건인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부처님의 말씀인 경(經)과 그 해설서인 논(論)을 읽고 주체적으로 반성 · 사유하고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첫걸음이자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경론에서 설해진 내용[眞實義]을 모른다면 무엇을 사유수(思惟修, 心一境性에 의한 반복적 통찰)한다고 할 것인가? 자전거의 존재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자전거 타는 소질[因力]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자전거에 대한 앎[緣力]이 없으면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없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청련(靑蓮)이라 할지라도 햇빛을 쬐지 못한다면 향기를 드날릴 수 없고, 어둠 속에 아무리 값진 보배가 있다 할지라도 등불이 없으면 끝내 그것을 드러낼 수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사유능력(혹은 作意, 주의집중력)을 갖추었을지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알지) 못하는 한 그것을 사유 · 통찰할 수 없다.

정견(正見)은 두 가지 인연에서 생겨나니, 첫째는 외적인 것으로서 다른 이로부터 법음(법음)을 듣는 것이며, 둘째는 내적인 것으로서 참답게 사유(혹은 주의집중)하는 것이다.『중아함경』 211 『대구치라경』:『대비바사론』 권1

불교에서의 믿음

믿음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진실의 믿음을 낳을 수 없다.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을 맹신이라 한다. 맹신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이의 믿음이다. 그것은 예컨대 산하대지나 운명과 같은 초월적인 힘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제 불교에서의 믿음이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 때가 되었다. 불교의 믿음은 이제 더 이상 기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작복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누차 말한 대로 불교는 앎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입문의 첫 번째 조건은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한 귀의이다. 삼보에 대해서는 온갖 구구한 해석이 있지만 소박하게 말하면, 불(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혹은 설하신 말씀)이며, 승(승가)은 불법을 추구하는 불교공동체이다. 요컨대 삼보의 핵심은 진리이며, 진리는 탐구와 통찰의 대상이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믿음은 다른 유신교적인 종교의 믿음과는 다르다. ‘믿어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믿음으로써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 전통술어에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해(信解) 혹은 승해(勝解)로 번역되기도 하는 아디묵티(adhimukti)이다. 이는 인식대상에 대해 그것을 인가하고 결정하는 심리현상으로,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바로 ‘신(信)’으로 번역되는 슈라다(sradha)이다. 이는 마음이 청정하게 된 상태의 심리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진리(사성제)와 삼보 그리고 인과의 이치를 바로 믿게 된다. 이는 특히 마음이 순일(純一)해져 더 이상 외적 대상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 심사(尋伺)를 떠난 - 제2선에서 두드러진 심리작용으로, 진리에 대한 청정한 인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를 내등정(內等淨)이라고도 한다. 거울도 깨끗해야 사물을 비출 수 있듯이, 마음 또한 청정해야 진리를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타자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다른 이(절대자)가 ‘믿어라’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이러한 확신은 내적 체험(bhavana, 修習), 즉 앞서 말한 부처님 말씀에 대한 반복적 되새김에서 비롯된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수행, 즉 존재본성에 대한 통찰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내적 직관적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그것은 분명 절대적 권위에 의탁하여 어떠한 주체적 노력 없이 종교적 위안을 얻으려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믿음과는 다르다.

물론 ‘믿음’에 대한 이 같은 개념적 정의를 늘어놓는다고 해서 모든 이의 믿음이 이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불교에서의 믿음이 이와 같은 연원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대가 변하였으며, 불교가 처한 환경도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는 거의 없으며, 경 또한 구해보기 어려운 것도 아닐 뿐더러 인터넷상에도 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불교가 불타의 깨달음(무상정등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깨달음의 종교라는 것은 누구다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교도는 당연히 그 분이 남기신 말씀을 통해 그 분이 갔던 길을 가고자 발원한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불자에게 있어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경)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기는 것보다 더한 수행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그 분의 말씀을 확신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한 믿음이 어디 있을 것인가?

불타의 깨달음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다가설 수 없는 초월적 신비적 세계가 아니라 종교적 각성이며, 인식의 전환이다. 인식의 전환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바야흐로 그것은 갱생(更生)이다. 어느 심리학자도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이 바뀌었다면, 그리하여 행동과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을 통해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권오민 교수

경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공은 불교철학. 주요 저서로는 『유부 아비달마와 경량부 철학의 연구』, 『아비달마 불교』, 『인도철학과 불교』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아비담팔건도론』, 『발지론』, 『구사론』, 『현종론』, 『순정리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