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7. 대은소하
인간의 고락은 그림자 같이 따라다닌다
교단에서 임명한 최초의 포교사로 문서포교와 방송포교는 물론 처음으로 거리포교에 나섰던 대은소하(大隱素荷, 1894~1989)스님. 조선후기에 태어나 평생 전법의 최일선에 있던 대은스님의 수행일화를 서울 홍원사에서 펴낸 <대은대종사문집>과 조계종 어장(魚丈) 동주스님의 회고로 정리했다.
“인간의 고락은 그림자 같이 따라다닌다”
스무살에 강사 지낼 만큼 교학 ‘탁월’
동양대 일본대 동경대서 외전 ‘수학’
○…“이런 상품(上品)은 법사나 강사 같은 큰스님이나 입을 수 있지, 자네 같은 재(齋)바지 중은 못 입는다.” 대은스님이 14세 때 서울 화계사에서 봉행된 가사불사 회향법회에 참석해 범패의식을 한 후 가사 한 벌을 달라고 했다가 상궁(尙宮)에게 들은 말이다.
충격을 받은 대은스님은 그 길로 금강산 유점사로 달려가 교학을 연찬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점사 원주(院主)스님이 “3일 이상은 더 머물 수 없으니 그만 가라”며 내쫓을 기세였다. 당시만 해도 객(客)스님들은 3일이 지나면 스스로 양식을 마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때 한 노스님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개가 누룽지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은스님이 “그러면 저 개도 양식을 냅니까”라고 질문 했다. 이에 원주스님이 “개가 무슨 양식을 내느냐”고 답하자, 대은스님은 “그러면 제가 저 개만도 못합니까”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를 지켜본 노스님이 “네가 비록 나이는 어려도 말은 옳구나. 내가 양식을 대줄테니 너는 강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거라”며 후원을 약속해 유점사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유점사 강원에 입학한 대은스님은 하루에 경전을 150줄씩 외웠다고 한다. 한 줄에 보통 15자에서 20자가 있으니, 150줄이면 엄청난 양이었다. 총명함과 암기력에 놀란 강사스님이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절에서 공부하고 왔는가”라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유점사와 안성 청룡사, 문경 대승사에서 교학을 마친 스님은 보은 법주사의 대강백 진하(震河)스님 문하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전강까지 받았다. 이후 낮에는 강의를 했는데, 학인들이 스무 살의 젊은 강사를 못미더워했다. 이에 대은스님은 미진한 부분은 삼경(三更, 오후11시에서 오전1시 사이) 무렵 속리산 중사자암에 있는 진하스님을 찾아가 답을 듣고 내려왔을 정도로 밤을 아껴 공부했다.
○…일본에서 9년간 머물며 지낸 유학생활은 고학(苦學)의 연속이었다. 인력거꾼을 비롯해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손수 학비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뚱뚱한 몸매의 한 여인을 인력거에 태우고 고개를 올라가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어찌나 힘들던지 여인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참다 못한 스님은 “아이참. 무얼 먹고 저리 뚱뚱한고, 오르막길은 내려서 걸어가면 좋으련만…”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얼마뒤 목적지에 도착하자 여인은 조선어로 “수고했어요”라며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일본여인이라고 생각했던 대은스님은 깜짝 놀랐다. 여인은 “저도 조선인이에요”라며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춘원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으로 일본에 유학 중이었다.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유학을 마친 스님은 고국으로 돌아와 포교사가 되어 전법(傳法)에 나섰다. 경성 각황사(지금의 조계사)에서 불교청년단을 조직하여 그들과 함께 시내를 돌면서 ‘거리포교’를 했다. 청년들과 함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깃발을 세워놓고 시선을 끌었다.
스님이 목탁을 치고, 청년들이 북을 치면 오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고 생각하여 모여 들었다. 군중이 모이면 대은스님은 명설법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경성방송국에서 처음으로 라디오 설법을 하여 호응을 받기도 했다.
○…대은스님은 문서포교에도 적극 나섰다. 일제강점기 유학시절에는 <금강저>를 발간하고, 귀국 후에는 <불교> 주필을 역임했으며, <불교시보>를 창간하고 <금강산>을 발행하는 등 언론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특히 <불교시보>는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10년간 운영했다.
당시 불교를 소재로 글을 쓸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아, 원고의 30~40%는 대은스님이 직접 썼다. 법호.법명.속명 외에도 사불산인(四佛山人), 금화산인(金華山人), 보개산인(寶盖山人), 멱조산인(覓祖山人) 등 10여개의 필명을 사용했다.
○…대은스님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의 교정(敎正)인 박한영 스님을 모시고 삼각산 태고사에서 열린 태고선사 제향(祭響)에 참석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때 육당 최남선도 동행했다고 한다. 대은스님은 이 글에서 박한영 스님을 선사(禪師)라고 칭하면서 “조선에 널려 있는 법손(法孫)을 대표하여 매년 태고선사 제향에 참배 봉행한다”고 적었다. 박한영 스님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당시 궁핍했던 태고사 전경을 대은스님은 이렇게 적었다. “풍마우세(風磨雨洗)에 볼 것 없이 낡았을 뿐더러 멀리서 듣던 태고사와는 아주 딴판이다. 불자로서는 차마 볼 수 없을 만치 황폐(荒廢)되었다. 3~4 칸에 불과한 법당도 불과 기년(幾年, 몇 해)이면 쓰러지게 되었고 요사(寮舍)라 하여도 어느 사원(寺院)에 객실(客室)만도 못하다.”
■ 대은소하 어록 ■
“영험은 있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의 최상 목표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고(苦)로부터 해탈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연히 욕심에 끌려서 아침이슬 같은 재리(財利)를 탐하여 허덕거린 것이 아니며
저녁연기와 같은 명예(名譽)를 위하여 돌아치고 만 것이 아닙니까.”
“불교는 자력교(自力敎)이니 처음에는 스승을 의지하되 뒤에는 스승에게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승을 등지고 자립하는 배사자립(背師自立)을 신조로 한다.”
“인간의 고락(苦樂)이라는 것은 그림자와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라…”
“누구든지 직심(直心)으로 염불만 잘하면
십악(十惡)을 끊고 십선(十善)을 이루어 견성성불까지도 할 수가 있으리라”
■ 행장 ■
거리 포교 등 ‘전법’
탁월한 문장 ‘명성’
1894년 4월4일 강화군 강화면 신문동에서 출생했다. 선친 김광현(金光賢) 선생이 4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어 마니산에 올라가 3일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린 후 태어났다. 모친 충주 지씨(池氏)가 108 염주를 목에 건 스님이 나타나는 태몽을 꾼후 였다. 속명은 김태흡(金泰洽)
부친은 ‘소년 태흡’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으며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했다. 외조모 보감(寶鑑)스님의 권유에 따라 철원 심원사로 출가했다. 이때가 1901년 2월7일이며, 은사는 계암(桂庵)스님. 같은 해 4월8일 심원사에서 청호(晴湖)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고, 1914년 5월1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02년 3월 심원사 강원 사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1907년까지 장단 화장사에서 응봉(應峰).우운(雨雲)스님에게 범패.어산작법 등을 이수했다.
1908년 3월 유점사 불교전문강원 사집과를 졸업하고, 1910년 문경 대승사 불교강원에서 사교과와 대교과를 졸업했다. 1914년 보은 법주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다시 졸업했고, 1915년 구례 화엄사 강원에서 진응(震應)스님에게 전등 염송을 수료했다. 1914년 7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선 안거이래 20안거를 성만했다. 1916년 문경 대승사에서 월운(月運)스님에게 수법건당(受法建幢)하고 대은이란 당호를 품수했다.
내전을 마친 뒤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양대 인도철학과(1917년)를 거쳐 일본대학 종교과(1923년)를 졸업하고, 동경대학 철학과(1923년)에서도 3년간 공부했다.
대은스님은 법주사 강원 강사(1915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전임강사(1931년), 전주 정혜사 강사(1959년), 서산 개심사 강원 강사(1962년), 용인 화운사 불교전문 강원 강사(1963년)로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조선불교 교무원 중앙포교사(1928년), 경성 대자유치원장(1929년), <불교시보> 창간(1935년), 팔만대장경 번역편찬위원(1961년),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위원(1968년)을 지냈다. <석가여래약전> <신앙의 등불> <금강신앙> 등 다수의 저서를 비롯해 논문, 수필, 산문, 희곡, 소설 등 수많은 글을 남겼다.
1989년 3월8일(음력) 서울 상도동 사자암에서 입적했다. 세수 96세. 법납 89세. 원적에 들기 하루 전 상좌 동주스님에게 “부지런히 정진해서 요익중생(饒益衆生)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은법상좌로는 금담(金潭).동주(東洲)스님. 전강제자로는 지현(智賢).묘순(妙洵)스님이 있다.
이성수 기자
[불교신문 2530호/ 2009년 6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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