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선(禪) 이야기 100가지
제1장 공(空) - 不立文字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컨대 사제(師弟) 간의 생명의 접촉이 선(禪)의 말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것만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선종(禪宗)에 관한 책이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 생각됩니다. 어떤 불교 학자는 "불립문자(不立文字)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면 많은 글자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어느 노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은 듣거나 읽고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래의 뜻을 먼저 파악하고 나서 그 뜻을 생각해야 한다."
글자를 글자로만 읽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션窩� 있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을 체험하고 글자나 문구를 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실유불성(悉有佛性)―만물에 부처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본래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고 나서 언어나 문자에 접해야 정확하게 이해할 � 있습니다. 《불문(不文)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면 "하늘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느냐, 네 계절이 바뀌는 사이에 만물이 생겨난다."고 보고 도가(道歌)에서는 "소리도 없이 향기도 없이 언제나 천지는 쓰여 있지 않은 경(經)을 펼쳐 보인다"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옛날부터 있었던 천지간의 진리라"하여 "마음의 눈을 열고 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자(禪者)가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꽃이 빨갛고 잎사귀가 푸른 것도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있으므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새도 꽃도 그 나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들과 접하면 자연히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나 새에 의해 인간 속에서 꽃과 새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말속에는 체험에서 오는 것이 적으므로 표현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꽃은 말없이 피어납니다. 그래도 인간은 거기서 뭔가를 느낍니다. 그야말로 유마(維摩-《維摩經》의 주인공으로 불교의 진리를 깨친 부호라고 함)의 "침묵이 우레와 같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레소리와 같은 큰 음성이 침묵이라는 것은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사실은 무언(無言)이 아니라 진실의 목소리지만, 음계(音階)가 다르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에 투철해야 비로소 무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어떤 수행자(修行者)가 산 속에 스승을 찾아와서 선(禪)을 묻습니다. 스승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자네가 이곳에 올 때 골짜기에서 개울을 건넜지?"
"네 건넜습니다."
"그 개울의 물소리가 들렸나?"
"네 들렸습니다."
"그럼 그 개울물 소리가 들린 곳에서 선(禪)에 들어가게."
개울물 소리를 듣는 것이 선의 첫 걸음입니다.
도원(道元) 선사(禪師)는 《법화경(法華經)》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봉우리의 색깔이며 개울물 소리는
모두가 우리 석가모니 목소리와 모습이어라.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인도하는 진리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이해하는 생활태도입니다. 백은(白隱) 선사(17세기의 선의 고승)가 "한 손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손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다고 말하지 말고 들어 보세요, 반드시 들립니다.
대인(對人)관계에서도 역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쪽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어느 여자 대학교의 교수는 빈의 어느 유치원 벽에 쓰여 있던 작자 불명의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한 권의 책이다
그 책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고
그 책에 우리는 무언가를 써나가야 한다
나는 이 장(章)의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 공(空)을 읽고자 합니다. 당신도 자기를 한 권의 책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라는 책에 뭔가를 써넣어야 합니다.
001. 유록화홍(柳綠花紅)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蘇東坡)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 ―아름다운 봄의 풍경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진리를 말하고 있는 데 놀란 소동파(11세기의 송나라 시인)는 숨을 죽이고 말했습니다.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고.
당연한 것을 고마운 사실로 실감하려면, 엄한 수련이 필요합니다.
도원(道元) 선사(1200∼1253, 저술에 《正法眼藏》이 있음)가 중국에서 선을 배우고 귀국했을 때 인터뷰에 대답한 첫마디가 "눈이 옆으로 나고, 코가 세로로 달려 있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빈 손으로 돌아왔어요."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웃음소리의 공허함을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눈은 옆으로 코는 세로로(眼橫鼻直)"의 사실은 오직 한 사람이 오직 한 번인 인생의 엄숙함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고마움을 알기까지는 도원선사도 외국에서 1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을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을 것입니다.
눈과 코와 귀와 입이 갖춰진 얼굴을
내가 갖고 있음을 깨달았노라
하고 어느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깨달았노라"는 구절은 헤아릴 수 없는 무게로 가슴속에 떨어져 내립니다. 그것은 도원선사의 10년 수행의 무게입니다.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 ―버드나무도 꽃도 명명백백하여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꽃이나 버드나무가 애써 자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체득하는 것이 진실의 "불망어계(不忘語戒)"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부정(否定)하고 있으므로 "참말"이 됩니다. 모든 존재가 그대로 진실을 나에게 말해 주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만 "불망어계(不忘語戒)"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002. 자생이모위(子生而母危)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가 위태롭다
《채근담》 원문에는 "자생이모위(子生而母危) 강적이도규 하희비우야(何喜非憂也)"―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가 위태롭고, 돈이 쌓이면 도적이 노린다. 어찌 기쁨이 걱정이 아닐까 보냐―로 되어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에는 모자(母子)에게 모두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출산에는 불안이 따릅니다. 강은 지금은 죽은 말이 되었지만, 돈을 꿰는 끈입니다. 옛날 통화에는 구멍이 뚫리고 끈으로 그 구멍을 꿰어 보관했습니다. 이 끈이 곧 "강"입니다.
"강을 쌓는다"는 것은 재산을 모았다는 뜻입니다. 재산을 모으면 도적이 노리므로 도난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에는 반드시 걱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 불안과 공허함을 경전에는 "논이 있으면 논을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을 걱정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난과 질병 속의 역경에도 인생의 의미를 실감하면 마음은 평안해집니다. 어느 영화 배우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지탱하게 한 한마디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가난을 많이 체험하라. 괴로움을 겪어라. 벽에 부딪혀 또 괴로움을 겪어라. 가난과 고생을 이기고 살면 그 인품을 훌륭하게 만든다. 가난을 체험하라. 참고 견디어라."
반규 선사는 백은(白隱) 선사(1685-1768)와 쌍벽을 이루는 17세기 선의 고승이지만, 젊었을 때에는 백은 선사와 마찬가지로 폐결핵과 치질로 몹시 시달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이 점점 심해 몸이 쇠약하여 나중에는 담을 뱉기만 하면 엄지손가락 만한 혈담 덩어리가 나왔어요. 한번은 담을 벽에 뱉었더니 혈담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어요."
(《지불홍제선사법화(知佛弘濟禪師法話)》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엉덩이가 벗겨져 너무 아파서 종이를 많이 접어서 갈아대고 앉았어요. 엉덩이에서 피가 나와"(同上書)
그래도 반규 선사는 수행과 양생(養生)에 노력하여 고승으로 72세까지 살았습니다. 인생이 공허하다는 말은 길흉(吉凶)의 교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기쁨이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어떤 슬픔이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반대로 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자(禪者)는 슬픔과 기쁨, 빛과 어두움, 순경과 역경의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고하고, 양자의 가치를 공평하게 보는 눈을 기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순경과 역경이 양자를 대립시키는 데서 편견이 생기게 됩니다. 양자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 어느 한쪽에도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양망(兩忘)"이라고 하여 수행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003. 방하착(放下着)
-버리라
이 제목에 들어 있는 착(著)은 어조사(語助辭)로 뜻이 없습니다. 명령형인 "방하(放下)"를 강화하기 위한 글자로 의미상으로는 제로입니다. "방하"란 "버리라!"는 뜻입니다.
석존께서는 29세 때에 사회적인 지위도 처자도 버리고 고행(苦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35세 때에 이 고행도 버립니다. 그것은, 괴로움과 즐거움, 미망(迷妄)과 깨달음의 대립 관념 위에 선 고행의 상대적인 지식을 버린 것입니다. 자기와 타인의 구별을 초월한 수행이 보리수 아래서의 좌선이었습니다.
어느 소설가는 "지식에 치중하면 모가 나고, 정에 매이면 걷잡을 수 없으며, 의지를 관통하려면 답답하다"고 했는데, 이 상대적인 것을 버리지 않으면 마음의 자유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옛날 중국의 엄존자(嚴尊者)라는 수행자가 조주(趙州)스님(779-897)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손에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조주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버려야 하네."
그래서 엄존자는 버리라고 하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데 하고 "모든 것을 버렸는데 더 무엇을 버리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조주는 "그렇다면 그것을 버리고 가게"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의식 자체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선자는 이것을 알기쉬운 말로 "짐을 메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습니다. 어느 시인은 "무거운 짐을 앞뒤에 메었나니"하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짐을 메고 있습니다.
명함의 직함은 그 사람의 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직함을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쓸모없는 변변치 못한 사람입니다"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꼬리가 보입니다.
선자(禪者)는 이것을 자기 비하(卑下)의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비하라는 이름의 교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주 스님이 버리라고 거듭 말한 까닭은 여기 있습니다.
직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유무(有無)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여행에는 으레 짐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에 계속해서 만들어낸 몸과 입과 마음의 짐은 좋든 나쁘든 인생의 종착역까지 자기가 짊어져야 합니다. 아무도 분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004. 진공불공(眞空不空)
-참된 공은 공이 아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색(色), 즉 물질적인 현상은 모두 실체가 없는 공(공허)이며, 실체가 없는 공허라는 것이 물질적인 현상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비치는 만물은, 모두 실체는 공허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여러 가지 요소가 각각 작용하면서 모여 물체를 형성하고 그렇게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많은 요소가 어떤 이류로 분산하면 ―모인 것은 반드시 분산합니다―공허해집니다. 그래서 "존재한다는 것은 공허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공(空)이나 색(色)이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집니다. 공에 기울어지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고, 색에 기울어지면 현실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진공(眞空)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공은 세상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공"을 가리킵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에 기울어지면 참된 공이 아닙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에 기울어지면 참된 공이 아닙니다. 약사사(藥師寺) 한 스님께서 언제나 "기울어지지 않은 마음·기울어지지 않은 마음·기울어지지 않은 마음"하고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래 실체가 없는 물질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자진해서 고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무상한 점에만 구애되고 욕심을 버리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란 단지 "중간쯤"이나 "적당히"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 그대로가 중도입니다.
선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불을 가까이 해도 데이지 않고, 불을 멀리 해도 얼지 않고, 불을 잘 이용하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을 수도(修道)하는 쪽으로 돌리라"고.
005. 불유화유락 무풍서자비(不雨花猶落 無風絮自飛)
-비가 오지 않아도 꽃은 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버드나무가지는 저절로 흔들린다
8월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나팔꽃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오동나무 잎사귀는 이미 가을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인생의 진실을 체득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스승 조주(趙州)가 대답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꽃은 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버드나무 가지는 흔들리네"이것도 눈앞의 풍경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禪語6 참조)가 생각납니다.
"무상(無常)"이라고 하면, 흔히 꽃이 지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비바람의 탓으로 돌리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꽃은 피었을 때 이미 지는 첫걸음을 내어 딛고 있습니다. 지는 원인이 안에 있으므로 비바람은 간접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어구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꽃은 피었으니 반드시 지게 마련입니다. 인간도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는다"고 쓸쓸함과 슬픔에 초연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득도(得道)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꽃은 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버드나무 가지는 저절로 흔들린다"는 말을 가슴으로 실감해야 스승의 가르침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행법사(西行法師: 1118-1190)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봄바람이 꽃을 날리는 꿈을 꾸면
깨어나도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시인은 피는 꽃 자신이 이미 지는 필연성을 갖고 있으므로 봄바람이 꽃을 지게 한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것입니다. 이 "깨어나도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가 귀한 것입니다.
백은(白隱) 선사의 가르침으로 도를 깨친 여장부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반 여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으므로, 동문인 불자들이 "도를 깨쳤을 텐데"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을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득도(得道)란 무엇인가?
그것은 "깨어나도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비가 오지 않아도 꽃이 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이치를 깨달아, 슬플 때에는 울기도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인간성을 초월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006. 산화개사금 간수잠여람(山花開似錦 澗水湛如籃)
-산에는 꽃이 피어 비단을 짠 것 같고,
골짜기의 개울물이 넘쳐서 남빛을 띠네(《碧巖錄》 第82則)
어떤 수행승(修行僧)이 대룡(大龍) 선사(달마 대상에서 14대의 고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형태가 있는 것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없는 것일까요?(色身敗壞 如何是堅固法身)"
대룡선사가 대답했습니다. "저 산에 만발하고 있는 꽃을 보라. 꼭 비단으로 산을 덮은 것과 같이 보이고 있지 않는가. 또 저 골짜기에 잠잠(湛湛)히 있는 물을 보라. 꼭 남빛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격조가 높고 그림 같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산에는 꽃이 피어 비단을 짠 것 같지만 며칠 못 가서 그 꽃은 지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지 않았더니 벚꽃이 다 지고 말았네"라는 말과 같습니다.
"골짜기의 개울물이 넘쳐서 남빛을 띠네"―산골짜기의 개울물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산에 핀 꽃과 산골짜기의 개울물 사이에는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으나 움직여 옮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행(移行)이야말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라고 대룡선사는 말씀한 것입니다.
이 대구(對句)는 멸망해 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도자기의 매력은 깨지는 데 있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도자기는 가마에서 나왔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깨지기 쉬우므로 조심해서 사용하는 동안에 그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기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리고 지기 쉬운 꽃은 무심히 힘껏 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진실을 느끼게 됩니다.
이 구절은 선(禪)의 무상감(無常感)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무상감이 없이는 좌선을 할 수 없습니다. 만물이 무상하며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빨리 지나가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 비로소 진지한 마음으로 좌선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상의 한복판에 있는 인생의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대룡 선사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다음의 시(詩) "가녀린 꽃"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아침에 피는 나팔꽃은 낮에는 시들어 버립니다.
점심에 피는 메꽃은 저녁에 시들어 버립니다.
저녁에 피는 밤메꽃은 아침에는 시들어 버립니다.
모두 오래 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시간은 지킵니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사라집니다.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시간은 지킵니다"는 말은 모두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일찌감치 사라집니다"는 말은 선자(禪者)가 "일을 마치면 일찌감치 사라진다"는 말과 통합니다.
007.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에 한 번의 만남(井伊直弼)
상송당문유수죽(相送當門有修竹) 위군엽엽기청풍(爲君葉葉起淸風)―서로 만나 문에 서면 대나무숲이 있네. 자네를 위해 잎사귀마다 선선한 바람이 이네―즉, 친구를 대문까지 전송하면 옆에 대나무 잎사귀가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바람도 자네를 전송하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짙은 우정에 시정(詩情)을 느끼게 됩니다. 옛사람은 "군자는 청순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 어구 속에서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엄한 만남을 느낍니다.
일기(一期)는 인간의 일생이고, 일회(一會)는 단 한번의 만남입니다. 이처럼 "일(一)"에 숙연한 모습을 느끼게 하는 말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기일회(一期一會)"를 체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는 불교의 진리를 선자는 "친구를 대문까지 전송하면"하고 행동으로 표현하고, "자네를 위해 대나무 잎사귀에 산들바람이 이네"하고 눈으로 실감하게 합니다.
나는 조래(祖來) 스님으로부터 "만났을 때가 작별"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만났을 때가 작별이라면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라는 것입니다. 다인(茶人)이 친구를 전송하고 돌아와 남은 차를 혼자서 마실 때, 다(茶)와 선(禪)과 인생(人生)에 상통되는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2차 대전 이후에 잠시 시골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시골 역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나무젓갈을 손에 들었더니 포장지에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쓰여 있었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지만,
결국은 들에 불어오는 가을 바람과 같아라.
일생에 한 번만의 만남이어라.
가을바람이 불어올 적마다 풀 이삭이 작별과 만남을 되풀이하지만 그것이 번번이 한 번만의 만남이며, 같은 만남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인(茶人), 이이 나오스게(井伊直弼)는,
"다회(茶會)는 일생에 한 번만의 만남이다. 설사 여러 번 같은 주객(主客)이 만나더라도 오늘의 만남은 다시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하고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선자로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자기가 참된 자기와 만나는 것의 어려움을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것은 타인과의 만남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하고 헤어짐은 만남을 기약합니다.
008. 풍래소죽 풍과이죽불유성(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
-바람이 대나무에 불어온다.
바람이 지나가면 대나무에 바람소리도 남기지 않는다(《菜根譚》)
이런 말이 실려 있는 《채근담》이라는 책은 중국의 명나라 말엽의 유학자인 홍응명(洪應明)이 쓴 것입니다. 유교의 사상을 중심으로 노장(老莊)과 선학(禪學)을 가미하여 인생관을 말한 350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성긴 대나무숲에 불어오면 대나무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면 벌써 대나무에는 그 소리가 남아 있지 않다."
즉 덕이 높은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마음이 움직여 이에 대응하지만, 그 일이 끝나면 마음을 비워 언제까지나 그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 일에 집착하여 언제까지나 정신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미 대사를 지낸 외교 평론가 한 분이 외국과의 회담에 통역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상관이 상대방의 장광설(長廣舌)을 귓밖으로 흘려 보내고,
"바람이 대나무 숲에 불어왔다. 바람이 지나가니 대나무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만 통역해 주게"하고 말했으므로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외교 교섭의 발언으로서는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도 그는 어떤 믿는 데가 있기 때문에 《채근담》의 이 구절을 인용했을 테지만, 그의 최후를 생각할 때 이 구절은 특히 인상에 남습니다. 《채근담》에는 이 구절 다음에,
"안도한담(雁度寒潭) 안거이담불유영(雁去而潭不留影) 고군자사래이심시현(故君子事來而心始現) 사거이심수공(事去而心隨空)―기러기가 깊은 연못 위를 날아갔다. 기러기가 사라지니 연못에 기러기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비로소 마음이 움직여 이에 대응한다. 일이 끝나면 마음을 비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009. 죽영소개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고 있지만 먼지는 움직이지 않는다(《槐安國語》5)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대나무에 바람이 불어오는지, 그 그림자가 움직여 계단 위를 휩쓸고 지나지만, 그림자이므로 계단의 먼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구(對句)로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 달이 연못 속에 비추지만 물에는 흔적이 없다)"―즉 달빛은 깊은 연못의 밑바닥까지 비추고 있으나 물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잊은 자유로운 활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채근담》에는 유교의 입장에서 "오유운 수류임급경상정(吾儒云 水流任急境常靜) 화락수빈의자간(花落雖頻意自間) 인상지차의 이응사접물(人常持此意 以應事接物) 신심하등자재(身心何等自在)―우리 유교에서도 물은 급하게 흘러가도 주위는 조용하다. 꽃이 자주 떨어져도 내 마음은 조용하다. 인간은 이런 마음을 잊지 말고 일에 대처하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휩쓸고 지나가지만 계단의 먼지가 움직이지 않는다"와 "물이 급하게 흘러가도 소리가 나지 않고 주위는 종용하다"는 모두가 "달이 연못 속을 비추지만 물이 흔적이 없는" 동중정(動中靜)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자는 집착이 없고 마음을 비운 자유의 표상(表象)으로 사용합니다.
010. 양두구절단일검기천한(兩頭俱截斷一劍倚天寒)
-모든 상대적인 인식을 단칼에 베어 버리라(《槐安國語》1)
양두(兩頭)란 상대적인 인식 방법을 가리킵니다. 상대적인 인식이 성립되려면 적어도 두 개의 사물의 대립과 비교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선(善)을 생각할 때에는 악(惡)과 비교하지 않으면 분명치 않습니다. 그 차이의 느낌이 인식(認識)이 됩니다.
그리고 그 차별을 정확히 알려면 거기 대립되는 것을 내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3단 논법 추리(推理)의 기본이 됩니다. 그 관계는 상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삼대적(三對的)이며 대단히 복잡합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점점 복잡해집니다. 그 결과 흔히 개념적(槪念的)이 됩니다. 그리고 비교하여 얻은 지식이므로 양자택일(兩者擇一)의 경우에 망설이게 됩니다. 인텔리가 판단이 서지 않아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그 한 사례일 것입니다.
이것을 타개하는 인식 방법이 선적(禪的)인 사색입니다. 상대적인 지식의 결점이 상대적인 데 있으므로, 이 인식 방법과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비운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죽여라"고 엄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죽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상대적인 인식이나 관념을 없애고 마음을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인 지식을 없애는 것은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절대라면 역시 상대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내가 꽃을 보는 것은 네가 꽃을 상대하여 꽃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그 꽃의 색깔이나 향기나 미추(美醜)는 다시 그와 대립되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지식입니다.
"내"가 "꽃"을 본다고 하면, 나와 꽃이 대립됩니다. 이 경우에 절대적인 지식이란 내가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꽃 자체가 되어 꽃을 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단논법(一段論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의 진수를 파악한 어느 이학박사의 말입니다.
선을 깨친 사람들은 저마다 사물을 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을 기쁜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입장에서 규정된 시각을 벗어났다"는 뜻일 것입니다. 도가(道歌- 불교의 진수를 읊은 노래)에 나오는 "달도 옛날의 달이고 꽃도 옛날의 꽃이지만 어디까지나 보는 자의 것이로다"는 일단논법의 인식 방법과 그 결과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산은 산, 길도 옛날과 같건만, 변한 것은 내 마음이로다."
하고 읊은 노래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인식을 일단논법의 칼로 베어 버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인식을 해체한 공(空)의 경지입니다.
011. 양망(兩忘)
-생사를 잊는다
상대적인 인식 방법을 공(空)으로 돌리고, 모든 대립개념을 버리는 것을 앞에서 "양두구절단 일검기천한(兩頭俱截斷 一劍倚天寒)"이라고 말했지만 같은 뜻을 지닌 구절에 "양두공좌단 팔면기청풍(兩頭共坐斷 八面起淸風)―상대적인 인식을 버리면 사방에 시원한 바람이 불게 된다"―이 있습니다.
"양망(兩忘)"도 상대적인 이원적(二元的)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심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양자(兩者)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유무와 생사(有無生死)를 떠나 살면 고마운지도,
이 몸은 이대로 살아갈 뿐이로세
하고 어느 종교 단체의 교주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有)와 무(無), 삶과 죽음의 양두(兩頭)를 절단하고, 양두를 잊어버린 경지입니다. 부유와 가난, 삶과 죽음을 대립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즐거움과 고통의 양두가 생기게 됩니다. 살 때에는 힘껏 살고, 죽어야 할 때에는 부처님께 맡기는 것을 생사를 잊는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삶과 죽음은 사실이면서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살아갈 때에는 삶과 죽음을 대립시키지 말고, 살아간다고도 말하지 말고, 살고 있다고도 생각지 말며, 단지 삶 하나만의 일단논법(一段論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삶으로 일관합니다. 힘껏 삽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죽을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병들었을 때에도, 같은 일단논법에 투철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삶에서 삶을 잊고, 죽음에서 죽음을 잊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삶에만 충실한 댓가입니다. 나는 여기서,
죽으면 죽고 살면 살라
만물은 죽어도 죽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나니
라는 노래를 상기합니다. 삶에서 삶을 잊고, 죽음에서 죽음을 잊어, 마음을 비워 공(空)으로 돌아갈 때 충실한 삶과 죽음을 맞게 되며, 유연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10년 동안 구치소에서 사형수들에게 단가(短歌)를 가르치던 시인(詩人)이 있었습니다. 내일 자기 목숨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형수들이 열심히 노래를 짓고 훌륭한 작품을 써내는 것을 보고 그는 감탄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식과 도덕, 이상 등을 모두 머리 속에서 말살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것이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하고 강의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강의를 들은 사형수가 이튿날 자기가 지은 단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밤에 파리를 쫓는 독방은 너무 넓구나
날아드는 파리를 손으로 쫓아내니 좁은 독방이 매우 넓어 보였다는 그의 마음에 감탄했던 것입니다. 선어(禪語)에 "마음이 평안하면 잠자리가 넓어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이것과 상통됩니다.
012. 부과단교수 반귀무월촌(扶過斷橋水 伴歸無月村)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다리 없는 개울을 건너고
달이 없는 마을로 돌아간다(《無門關》 44則)
중국의 파초산(芭蕉山)에 살던 파초(芭蕉) 스님(백제 사람으로 일찍이 중국에 들어간 앙산 선사의 법손이며, 혜청 선사라고도 함)이 수행자에게 "너희들이 지팡이를 갖고 있으면 나는 너희들에게 지팡이를 주고, 만일 갖고 있지 않으면 나는 너희들에게서 지팡이를 빼앗을 테다"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무문(無門- 중국 송나라의 선승) 스님이 한말을 여기 인용한 것입니다.
"이 한 개의 지팡이를 의지하면 다리가 없는 개울도 건널 수 있고 또 어두운 마을에도 갈 수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지팡이가 있으면 지팡이를 주고, 너희들에게 지팡이가 없으면 너희들에게서 지팡이를 빼앗을 것이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대해 어느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가 기독교의 깊은 뜻을 전한 말에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든 정신 생활의 발전 원리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선자(禪者)와 예수가 본 종교적인 진수에 공통점이 있는 데 놀라게 된다…… 있는 자는 얻게 되고 없는 자는 빼앗긴다. 이것은 모순의 극으로 생각된다. 이 모순 속에서 참된 생명의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절대자의 활동은 창조적인 삶의 흐름이다."
아무튼 모순이 모순이 아닌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 인식의 극한까지 추구한 것입니다. 선의 진수를 깨친 고승 아래서 참선하여 그 깊은 이치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깊은 뜻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안에 또 한 사람의 자기가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라"는 말도 있듯이 감정적이고 상식적인 자기 이외의 영원한 자기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살아가는 보람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하거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기회를 얻기까지, 나는 이 지팡이에 관한 말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생명의 지팡이"라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다리가 없는 개천이나 달이 뜨지 않는 마을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개울을 건너가려고 해도 다리가 없고, 눈앞이 캄캄한 절망에 가끔 직면하게 됩니다.
그때 자기를 지탱하고, 자기를 인도해 주는 "생명의 지팡이"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013.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선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2장에서 자세히 말하겠지만, 혜능(慧能)이 홍인(弘忍-달마에서 5번째 고승. 675년 입적)의 선의 진수를 터득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홍인의 문하생들은 놀랐습니다. 무식한 방앗간 사나이가 선의 진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홍인은 경박한 자들이 혜능을 해칠까 두려워 진작 멀리 남방 지방으로 떠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홍인의 제자들은 혜능의 뒤를 추적하여 드디어 따라잡았습니다. 혜능은 스승으로부터 선의 진수를 깨친 것을 증명하는 옷과 밥그릇을 옆의 돌 위에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갖고 가려고 했으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옷이나 밥그릇은 단지 물체가 아니라 선법(禪法)의 전승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완력이나 지성으로 소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추격자들 속에 끼어 있던 혜명(慧明)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무인(武人)의 출신이었으나, 수행도 많이 하여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추격자에서 겸허한 구도자로 돌아가, 모든 사념(邪念)을 버리고 혜능에게 사과하고 가르침을 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혜능은 그에게 "선이라고도 생각지 않고 악이라고도 생각지 않을 때 그대의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선이라고도 생각지 않고 악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만 상대적인 인식을 하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 상대적인 인식은 모든 것을 선악(善惡)·시비(是非)·좌우(左右)라는 식으로 대립시켜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다른 쪽을 버리려고 합니다. 이 대립에서 여러 가지 미망(迷妄)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자(禪者)는 상대적인 인식을 하지말고 절대적인 인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상대적인 대립을 없애는 말이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입니다. 같은 말에 "부모미생이전(父母未生以前)"이니 "천지미분이전(天地未分以前)"이니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미생이전(部譜未生以前)"의 부모는 자기를 낳은 부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지식이 생기기 전의 절대경지입니다. "천지미분이전(天地未分以前)"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천지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하늘과 땅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말을 빌어 모든 의미에서 상대적인 인식이 생기기 전의 절대경지입니다.
014.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면목(《六祖壇經》에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혜능(慧能)은 "선이라고도 생각지 않고 악이라고도 생각지 않을 때 그대의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하고 혜명(慧明)에게 물었습니다.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인식이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 혜명의 본래의 모습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래의 모습"이란 본래의 자기, 참된 자기,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니까 태어날 때에 자기 속에 묻혀 있던 순수한 인간성, 다시 말해서 자기 속의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본지(本地)의 풍광(風光)", "주인공" 또는 "무위(無爲)의 진인(眞人)"이라고도 말합니다. 일휴(一休) 선사(1394-1481)는 경쾌한 어조로
본래의 모습은 첫눈에 반하게 되나니
하고 노래했습니다. 즉 본래의 모습을 미남(美男)으로 상정하고 첫눈에 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적인 지식을 갖고 인텔리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무식합니다. 이 무식 때문에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입장에서 떠난 절대적인 지식에서 비롯되는 지혜를 재빨리 개발할 수 있습니다.
혜능이 홍인(弘忍)의 법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의미의 무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 순결한 절대의 미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백은 선사는,
안개 옷을 벗은 후지산(富土山)의
눈에 덮힌 살결을 보고 싶어라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굉지(宏智) 선사(송나라의 선승. 1157년 입적)는 좌선을 계속하여 자기의 내면적인 자유의 경지를 획득하는 선법(禪法)을 주장했습니다. 이 선사는 "삼라만상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도 말했습니다. 도원선사가,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새, 가을에는 달,
겨울에는 눈이 내려 서늘하도다.
하고 노래한 것도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禪)만이 아닙니다. 유교에서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중용(中庸)"이라고 합니다. 희노애락의 감정은 각각 대립적입니다. 그것이 발생하기 이전, 즉 부모가 아직 태어나기 이전의 공(空)이 중용입니다. 본래의 모습에 대한 유교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015. 화경청적(和敬淸寂)
- 화목하고 존중하며 맑고 조용하다(利休)
화경청적(和敬淸寂)은 다도(茶道)의 진수입니다. 근경청적(謹敬淸寂)이라고도 다도(茶道)의 시조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휴(利休)는 한 글자를 고쳐서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고 말했습니다. "화(和)"는 화목이나 화평이라고만 해석해서는 충분치 못합니다.
사람들이 개인 플레이만 해서는 사회도 단체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각자 다른 개성을 조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개성을 살리면서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제 3의 성격이 조성되어야 비로소 인간의 화합이 성립됩니다. 불교 교단의 원어(原語)는 산가로서 "화합"을 뜻합니다. 이 말을 음역(音譯)하여 "승가(僧家)"라고 씁니다.
"화(和)"는 평화와 통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하지 않는 데 그치는 평화에서는 곤란합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미움, 분노, 원망 등의 화평으로 바뀌어야 비로소 인간의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분노나 증오를 몰래 키우면서 평화를 부르짖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선자나 다인(茶人)이 "마음의 평화"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유네스코 헌장의 "각자의 마음이 평화로워지지 않으면 참된 세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네스코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도(道)"나 행동으로서 평화의 실천을 요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을 독립된 항목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일관된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화목을 느끼게 되면 자연히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해야 화목해집니다. 그리고 화목하여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면 누구나 마음이 맑아지고 자기의 주위도 깨끗이 정리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화목하지만 동화되지 않고, 소인은 동화되어도 화목하지 않는다"고 유교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이 구별이 중요합니다. 개성을 살리면서 화목하고, 화목하여도 동화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적(寂)", 즉 마음의 고요입니다.
"적(寂)"은 번뇌의 불길이 가라앉은 상태입니다. 그것은 마치 짚을 태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지만, 다 타면 온기를 남긴 재의 상태가 "적(寂)"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주 꺼진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온기가 마음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사람을 녹이는 자비와 지혜의 작용을 합니다.
번뇌가 지혜로 승화되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 선(禪)의 마음, 다도의 마음입니다.
016. 막망상(莫妄想)
-망상에 빠지지 말라(無業)
이 말은 무업(無業)이라는 스님이 언제나 입버릇처럼 한 말입니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의 일생을 "막망상(莫妄想)"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망상을 경계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망(妄)"이란 헛된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실제와는 다른 헛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실에서 떠나 현실의 발판을 갖지 못한 자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현시점을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걱정하는 것도 망상입니다. 이 망상은 특히 병들었을 때 그 힘이 강해져서 올바른 사고 능력을 해칩니다. 백은 선사는 "병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사람을 죽인다"고 경고했습니다.
같은 말에 "막번뇌(莫煩惱)"가 있습니다. 원나라가 침공했을 때(1274-1281) 무학조원(無學祖元) 선사는 당시의 집권자에게 "번뇌하지 말라(莫煩惱)"고 타일렀습니다. 이 한 마디에 그는 자기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소설가로도 유명한 한 군의관(軍醫官)이 있었습니다.
그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당국의 오해를 받아 지방으로 절망적으로 좌천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기생은 라이벌은 영전했던 것입니다. 이때의 일을 지켜본 어느 은행의 이사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가는 그때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도 사표를 내야겠다고 썼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 주색에 빠져 화풀이를 하여 몸을 망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서도 이런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설가는 번민에서 벗어나 작품도 쓰고 번역도 하고 독일어 공부도 했다. 그것은 이윽고 그에게 커다란 보람이 되었다."
그 소설가는 그 역경의 시절에 불후의 역작인 《즉흥시인》을 완성했습니다. 역경이 인간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역경에 대한 망상과 번뇌가 백은 선사가 말한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소리내어 "망상을 버리라"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타이를 필요가 있습니다. 석존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 언제까지나 번뇌하거나 아직 찾아오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면 인간은 마른풀처럼 될 것이다."
《한산시(寒山詩)》에도, "인세불만백상괴천재우(人世不滿百常懷千載憂)―인간은 세상에 100세도 살지 못하면서 언제나 1000년 뒤의 일을 우려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017. 파초혜(破草鞋)
- 망가진 짚신(《碧巖錄》제19칙)
오래 신어서 망가진 짚신으로 아무 소용도 없게 된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미개인이 아닌 이상 인간에게는 신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필요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발이나 지식도 낡아지면 쓸모가 없게 되지만, 새 것도 때로는 소용이 없게 됩니다.
선의 수행을 시작한 초기에는 지식은 망가진 짚신과 같습니다. 인간이 참된 의미에서 알몸이 되어야 할 때에는 아무리 높은 수준의 지식도, 아니 수준이 높은 지식일수록 망가진 짚신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장신구(裝身具)가 됩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실을 알게 되면 망가진 짚신을 다시 주워 올립니다. 옛날의 선자는 망가진 짚신을 다시 고쳐 신기도 하고 그대로 썩혀 퇴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짚신뿐만 아니라 인간은 높은 수준의 지식도 자기 마음의 밑걸음으로 삼거나 인간답게 살기 위한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 삼기도 합니다.
《아침의 소리》라는 수필집에 다음의 《짚신》이라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짚신이여, 너도 드디어 망가지려고 하느냐.
오늘과 어제와 그저께 사흘 동안 신었다.
내가 너와 둘이서 넘어온 산과 들을 생각하면
버리기가 아깝구나, 그리운 짚신이여.
이 <짚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것은 독자의 자유입니다.
이 시를 선적(禪的)으로 생각하여, 버린 지식을 아쉬워하여 다시 주워보는 심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강지처와 영원히 작별했을 때 문득 느끼게 되는 애정과 회한과도 상통될 것입니다. 망가진 짚신에서 향수를 느끼며 그녀의 행복을 생각하여 불심(菩提心)으로 승화되면, 영원히 망가지지 않는 인생의 필수품이 될 것입니다.
018. 묵묵여천어 묵묵여천행(默默與天語 默默與天行)
-묵묵히 하늘과 함께 말하고 묵묵히 하늘과 함께 간다
일본인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씨의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철학자는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현재의 과제를 갖지 않은 자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나는 죽음의 신과 겨루면서 일을 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자신의 생애를 저술과 연구에 몰두하여 동서 문화교류를 위해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박사는 "인간은 잘나지 않아도 정직한 사람이 되어 남들이 신용하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햇빛에 검게 타서 날마다 묵묵히 일하다가 때가 되면 '안녕!'하고 사라질 일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잘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평범한 한 시민의 말이다. 이 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하고 묵묵히 사는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산혜현(關山慧玄) 스님은 한평생 설법(說法)이나 문필에 종사하지 않고 "묵묵히" 몸으로 선(禪)을 행한 고승입니다. 그래서 선사의 설법이나 필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출생지인 나가노현에서 오직 "묵(默-침묵)"이라는 한 글자만 발견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막스 피커트는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비롯되어 침묵으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선은 말에 대한 침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침묵의 대립을 없앤 데서 선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설명이 불필요한 진실입니다. 설명이 불필요한 명백한 진실을 설명하면, 점점 진실에서 멀어져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석존 시대의 부호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깊은 이치를 깨달은 유명한 유마 거사(維摩居士)가 "일묵여외(一默女雷-침묵은 우레와 같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삼론종(三論宗)의 시조인 수나라의 가상(嘉祥) 대사(623년 입적)는 침묵에 대해 "말이면서 말이 아니고, 말이 아니면서 말"이라고 했습니다. 침묵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가치판단과는 전혀 다른 가치입니다.
문제는 말과 침묵의 대립에 구애되지 말고 말과 침묵을 초월한 데에 머물지 않고 말과 침묵의 상대성(相對性)을 자유롭게 다루는 또 하나의 차원 높은 공(空)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웅변이라도 진실이 결여되면 말하나마나한 것입니다. 잠자코 있어도 진실을 느낄 수 있으면 훌륭한 웅변이 아니겠습니까.
영가(永嘉) 대사(중국 당나라의 선승으로 713년 입적)는 《증도가(證道歌)》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선이고 앉아 있는 것도 선이며, 말하고 침묵하는 데 구애받지 않는 데 선이 숨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019. 실상무상(實相無相)
-실상은 무상이다(《法華經》)
실상(實相)의 본래 어의는 본체·실체·진상·본성 등이라고 불교의 사전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역자 쿠모라쥬(중국 최대의 번역가. 409년 입적)에 의하면 실상에는 공(空)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현상(現象)으로 존재하는 것의 토대에는 참된 실재(實在)가 있다는 것이 《법화경》이 주장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존재는, 사실은 현상으로서 "있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현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고 파괴되고 멸망해갑니다. 이 불안정한 밑바닥에 안정되고 변치 않는 참된 실재가 있습니다.
"꽃잎은 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는 꽃잎은 현상적인 존재이며, 이 꽃잎의 기반(基盤)에 있는 변치 않는 참된 실재가 "꽃"의 생명입니다. 변하기 쉬운 현상의 밑바닥에 이 변치 않는 실재를 믿어야 비로소 인간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법화경(法華經)》입니다.
이 실상을 없앤 것이 "실상무상(實相無相)"입니다.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의 밑바닥에 있는 변치 않는 실상은 본래 무상(無相)입니다. 꽃이나 새와 같은 현상적인 존재는 색깔을 갖고 형태를 지닌 그대로가 무상이며, 무상인 채 평안을 얻는 것이 "실상무상(實相無相)"입니다.
무상은 오도(悟道)의 경지를 표시하는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하나로, "특징지을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현상적인 존재를 그대로 인식하면서 그것에 구애되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모습(相)을 초월한 모습이 없는 모습, 즉 무일물(無一物)이 진상(眞相)입니다.
그러나 무감각은 아닙니다. 순순히 느끼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추우면 춥다, 슬프면 슬프다고 순순히 있는 그대로 실감합니다. 그러면서도 거기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제법실상(諸法實相)에도 구애받지 않고, 실상무상에도 정체하지 않는 것이 참된 실상무상입니다. 그러나 개념(槪念)으로서가 아니라 실감하고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이 필요합니다.
020. 백마입호화(白馬入芦花)
-흰 꽃 속에 백마가 들어간다(《碧巖錄》)
호화(芦花)는 흰 꽃입니다. 그 흰 꽃 속에 백마가 들어가면 색깔이 같기 때문에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흰 꽃과 백마는 백색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평등합니다. 그러나 흰 꽃과 백마는 질(質)이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차별됩니다. 평등 속에서 차별을, 차별 속에서 평등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허하다고 보는 견해의 기반이 되는 것이 이 평등에서의 차별관(差別觀)이며, 차별에서의 평등관입니다. 이 양자를 별개로 보지 않고, 평등이 곧 차별이고, 차별이 곧 평등으로 하나에 응결됩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이 "백마입호화(白馬入芦花)"입니다.
같은 말에 "설복호화(雪覆芦花-눈이 흰 꽃을 덮는다)"가 있습니다.
수학에서 말하는 "동등"과 "동일"의 정의를 빌어서 생각해 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고 그 의미도 깊어집니다. 동등은 A=B입니다. 평등은 여기에 해당됩니다. 둘 이상의 것을 비교하여 생기는 가치입니다.
"동일"은 비교하여 생기는 가치가 아니라, 사물 자체를 말합니다.
예컨대 나는 지금 몽블랑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만년필과 같은 상품은 많이 제작되어 어디서나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쓰고 있는 만년필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 하나의 만년필뿐입니다. 즉 차별에 의해 존재가 명확해집니다.
돈을 내면 '동등한' 만년필은 몇 개라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만년필을 잃어버리면 '동일한' 만년필은 어디 가서도 구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닮은 사람은 있어도 자기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평등이 곧 차별이고, 차별이 곧 평등은 절대 "일(一)"의 존엄성에까지 고양됩니다.
백마도 흰 꽃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흰 꽃과 백마는 유일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을 일상생활에 옮겨서 생각해 보면, 백마라는 이름의 자기를 직장이라는 이름의 흰 꽃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와 일이 동호되어, 즉 주객(主客)이 하나가 되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된 경지입니다. 마술(馬術)의 명인을 칭찬하여 "안장 위에 사람 없고, 안장 아래 사람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안장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며 안장에 대한 생각도 비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평등이 곧 차별이고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생각도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021.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은그릇 속에 눈을 담는다(《碧巖錄》 제 13칙)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한 점의 녹(청)도 슬지 않은 은그릇에 깨끗한 눈을 담는다.
파릉(巴陵) 선사는 중국 초기의 선승(禪僧)으로 호남성 파릉현의 신개원(新開院)에 살면서 선(禪)을 크게 고양한 고승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파릉 선사에게 한 수행자가 찾아와서 "선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대답한 것이 "은그릇에 눈을 담는 것이지"라는 짤막한 말입니다.
흰 은그릇에 흰 눈을 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선(禪)을 하는 마음"이 될까요. 논리적인 해설은 이니 옛사람이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고, 섞이지만 구별된다"는 말로 대변됩니다. "사이비(似而非)"나 "물과 기름은 섞여도 곧 알 수 있다"는 말이 이것을 가리킵니다. 같은 말에 "명월장로(明月藏鷺-밝은 달빛으로 백로를 감춘다)"와 앞에서 말한 "백마입호화(白馬入芦花)"가 있습니다.
은그릇과 흰눈은 모두 깨끗합니다. 그런데 이 "깨끗함"은 "깨끗하지 못함"을 염두에 둔 대비적(對比的)인 가치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아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벽암록(碧巖錄)》의 원오(환오) 선사(1135년 입적)는 "칠화팔력(七花八裂)"이라는 간단한 말로 평을 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해가 없게 했습니다. "칠화팔력(七花八裂)"이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을 정도로 파괴하고 분해하라는 뜻입니다. 깨끗하다는 생각도 분해하는 것입니다.
흰색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색깔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적인 인식입니다. 흰색을 흰색 자체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否定)을 부정하면 뒤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뜻을 전하는 말에 "산호지지탱착월(珊瑚枝枝撑著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이 밝은 밤에 산호의 가지들이 이슬을 머금고 있는데, 그 이슬을 달이 비추고 있다는―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집착하지 않는 심정,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 심정도 고집하지 않는 텅 빈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022. 불풍류처야풍류(不風流處也風流)
-풍류가 없는 것이 풍류이다(《碧巖錄》제67칙)
풍류(風流)가 없는 것 같지만, 거기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풍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파격(破格)의 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규격화되는 것을 막아야 비로소 풍류가 되는 것입니다. 아류(我流)는 풍류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에서 말한다면, 깊은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가능한 무궤도(無軌道)의 궤도입니다. 선승이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면서도 자제할 것을 자제하는 것이 곧 풍류가 없는 것이 풍류가 되는 경지입니다. 그것은 모방이 불가능합니다.
다도(茶道)에서도 일부러 찌그러진 찻잔을 좋아하는 것은 차라리 나쁜 취미입니다. 정확하게 다도를 배우고, 올바른 눈을 기른 다음에 버려야 할 모양새가 좋지 않은 찻잔에서 참된 것을 찾아내어야 풍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차에서는 풍류의 도(道)를 특히 "수기(數奇)"라고 말합니다. 수기는 기수(寄數)를 거꾸로 한 말입니다. 기수는 나눠지지 않는 숫자로 무한히 많습니다. 나눠지지 않는 데에 풍류가 있고 또 멋도 있습니다.
인생에도 모두 나눠지는 합리성(合理性)뿐이라면 멋이 없을 것입니다. 불합리나 모순이 있기 때문에 풍류가 있는 것입니다. 근대 종교철학의 대가였던 스즈키 다이세쓰 박사는 자기가 살고 있는 방의 이름을 "야풍류암(也風流庵)"이라고 불렀습니다. 박사의 풍모가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풍류는 찾아 풍류에 집착하면 오히려 풍류를 잃게 됩니다. 풍류를 찾는 풍류에 구애되지 않는 데서 풍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야(也)"는 집착을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찾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것은 큰 사랑의 작용입니다. 볼품 없는 찻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랑이 작용해야 버린 찻잔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찻잔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도 풍류가 있어야 합니다.
023. 관(關)
-좁은 문(雲門大師)
선에 "운문(雲門-중국의 선승, 949년 입적)의 관(關)"이라고 하여, 쉽사리 통과할 수 없는 관문의 하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큰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90일 동안의 여름 수행이 끝났을 때, 취암이라는 고승이 말했습니다.
"나는 90일 동안에 설법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법해왔다. 그래서 벌을 받아 눈썹이 빠진다고 한다. 나한테 눈썹이 있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보복(保福)과 장경(長慶)이라는 수행자가 그 동안의 설법이 매우 유익했다고 입을 모아 대답하자, 선승 운문(雲門)이, "관(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운문 스님의 오도(悟道)의 경지가 이 한 마디에 압축되어 운문이라고 하면 "관(關)", "관"이라고 하면 운문을 상기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이 말에는 선(禪)의 진수이자 오의(奧義)가 깃들어 있으므로, 쉽사리 알기 어려운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선만이 아닙니다. 어느 도(道)에나 관(關)이라는 좁은 문이 있습니다. 지상에도 옛날에는 관소(關所)가 있었습니다. 현관이란 현묘한 길로 들어서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쉽사리 지나가지 못합니다.
어찌 그 너머를 알 수 있으랴,
모지(門司)의 관문도 지나가지 않은 길손이어늘
이 시는 선의 한 도가(道歌)입니다. 큐슈(九州)에서 혼슈(本州)로 건너가려면 모지의 관소를 지나야 하는데, 모지의 관소도 지나지 않은 자는 어찌 그 너머의 넓은 지역의 형편을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선뿐만 아니라, 예도(藝道)나 무도(武道)에서도 이른바 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도에는 자기를 내세워서는 지나갈 수 없는 관소가 있습니다.
관(關)은 또한 미망(迷妄)에서 오도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인 인식에서 절대적인 인식에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전에 교외의 한 사찰에서 좌선회에 참석했던 한 젊은 여성의 참선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한 수의 노래로 읊어 나한테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문 하나를 지나가면 또 문이 있으니
사색하는 자여, 들어오지 말지어다
024. 무(無)
-(《無門關》 제1칙)
어느 날 한 사람의 수행승이 조주(趙州) 스님(778-897)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부처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교는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을 주장합니다. 즉 만유에 부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행승은 이 점에 착안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질문에는 모르기 때문에 가르침을 요구하는 소박한 것도 있습니다. 또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실력을 시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론을 시도하려는 것도 있는데, 이 수행승의 질문은 후자의 경우로 생각됩니다.
수행승의 질문을 받은 조주 선사는 중국 산등성 태생이라고 합니다. 한평생 선(禪)을 하면서 살아간 고승입니다. 60세 때에 "3세의 어린아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그에게 물어볼 것이다. 100세의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그에게 가르쳐 주리라"는 생각에서 전국 각처의 유명한 스님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하면서 수행에 힘쓴지 20년이 지난 80세 때에 하북성에 있는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조주 선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40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선법(禪法)을 가르치다가 120세에 세상을 떠난, 당대 선계(禪界)의 거물이었습니다.
조주의 선풍(禪風)은 "혀에서 빛을 낸다"고 하였습니다. 설법을 할 때에 혀끝에서 광채가 난다고 생각될 정도로 빛나는 진리를 설법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놀라운 혀끝으로 "없이(無)"하고 대답했습니다.
조주는 다른 수행승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고, 이번에는 "있어"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조주와 같은 고승의 입으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대답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어느 쪽도 마찬가지여서 조금도 지장이 없다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대답이 각각 다른 것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상식적인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없다(無) 혹은 있다(有)는 개념에 구애되는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상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주가 말한 유무(有無)는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는 카테고리(범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有)"란 무엇이며, "무(無)"란 무엇인가 하고 따지면 미로에 빠지게 됩니다. 있다고 생각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이 대립적인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유(有)나 무(無)가 한 자이기 때문에 문자의 개념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자는 이것을 일상 용어로 바꾸어서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대적인 개념을 제거하고 마음을 평안히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임제선(臨濟禪)의 수행 도량에서 수행자에게 처음에 제시하는 명제(命題)입니다. 이 명제에 의해 상대적인 지식을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애써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평안히 하는 인격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무(無)입니다. 공(空)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025. 무공덕(無功德)
-공덕이 없음(《五燈會元》)
선(禪)의 시조는 달마대사입니다.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을 바닷길로 건너가 선(禪)을 전했습니다. 서기 520년에서 527년 사이로 생각됩니다.
당시에 양(梁)의 무제(武帝)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여 달마를 금릉(남경)의 궁중에 초청하고,
"짐은 절을 세워 승려를 키웠소. 어떤 공덕이 있소?"
하고 달마에게 물었습니다.
무제는 전에 법의를 걸치고 《반야경》을 강론하고 수행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절을 세우고 승려를 많이 키웠으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숭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나 평범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어떤 공덕이 있느냐는 물음에 달마는,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하고 잘라서 대답했습니다.
공덕을 바라고 한다면 어떤 선행도 소용이 없습니다. 선은 돋보이는 것, 유명해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남 몰래 숨어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했다는 것이 판명되면 그 일은 안한 것과 같습니다.
남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기를 원하여 하는 선행은 마이너스가 됩니다.
그것은 요컨대 이기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행우를 신앙의 이름으로 미화시키려는 추한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선행을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선인선과(善因善果)의 법칙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두지 않고 원인과 결과를 한 점에 응결합니다. 즉 원인은 그대로 결과로, 결과는 그대로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일여(因果一如)"라고 합니다.
선행을 하고 나중에 좋을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는데 선을 행하게된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 아닙니까.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할 수 있는데도 악한 일을 한 것 자체가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달마는 이와 같은 인과일여관(因果一如觀)을 주장하여 무제(武帝)가 사로잡혀 있는 이기심을 뿌리 채 뽑아버린 것입니다.
공덕을 쌓았다는 생각이나 공덕이 없다는 의식은 모두 없애야 합니다. 사(私)를 버리고 묵묵히 선행을 쌓는 마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제2장 선(禪)을 전함- 敎外別傳
교외별전(敎外別傳)―선을 전할 때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사제(師弟)간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하는 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교습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전의 교학체계(敎學體系)라는 도그마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도그마에 구애되지 않고 진리를 직접 파악하려면 두뇌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전신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좌선이 필요하게 됩니다.
남선사(南禪寺)의 시산전경(柴山全慶) 선사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에 대해 "그것은 모든 개념적인 주장이나 교훈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교외(敎外)의 법(法)"이란 진리를 즉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는 달리 "교내의 법"이란 교의(敎義)나 교전(敎典)을 중심으로 언어나 문자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산 선사의 말대로 개념적인 지식을 버려야 비로소 부처님의 생명이 전달됩니다. 그리고 "교외별전"은 교리이외의 부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전한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고 있었던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전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기 때문에 그대로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체제가 먼저 마련되는 것입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도 1장의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마찬가지로 직선적으로 읽습니다. 그것은 교수(敎授)와 전수(傳授)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교수 자체가 전수입니다. 참된 교육은 이래야 합니다.
《어느 국민 학교장의 회상》이라는 글을 쓴 저자는 "교사라는 말이 없다면 교육이 얼마나 잘 될까"하고 한탄했습니다. 이 말에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달마 대사는 "교수란 전수이고 전수는 깨달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교(敎)=전(傳)=학(學)―교수=전수=깨달음―이 됩니다.
그런데 각(覺)에 '깨닫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에게 단지 익히고 외우게 하는 것으로 일관됩니다. 지식의 주입과 암기 위주가 됩니다. 마치 가마우지가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것처럼, 지식을 통째로 삼키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배우는 데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개념적인 도그마에 사로잡히면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선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도 참된 구도자나 수행자는 오늘의 합리주의, 공리주의(功利主義) 사회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스승과 생활을 함께 하면서 산 지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림물감을 물에 풀며 취사를 하면서 전신으로 스승과 접촉하여 알맹이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시간제(時間制)에서는 얻을 수 없는 공부가 됩니다.
선자의 생활은 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전해야 할 비전(秘傳)은 없습니다. 전하거나 받는 형태가 아니라, 말하자면 "부전(不傳)의 전(傳)"입니다. 전수를 의식하지 않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전해진다거나 전해지지 않는다고 의식하지 않은 채 전해지게 됩니다.
어떤 제자는 스승에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선의 진수를 전수 받으려고 이처럼 밤낮으로 모시고 있습니다."하고 탐나는 듯이 말합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자네에게 전하고 있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네. 그밖에 무슨 전수가 필요하겠나."
인간만이 스승이 아닙니다. 사과는 익으면 누구의 앞에서나 떨어집니다. 선생이 없어도 분명히 인력(引力)의 소재를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어째서 뉴턴만이 지구의 인력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사과에게는 가르치자, 전하자는 의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전의 전"을 "전(傳)"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진지하게 배우는 사람만이 이 힘을 빨리 개발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불교 학자가 쓴 《불교교육론》에서는 불교교육의 목적에 대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갖고 있는 최고 가치인 불성(佛性)을 실현하게 하여 최고의 문화적인 격이라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누구나 갖고 있는 삶의 근거―순수한 인간성―에 눈뜨게 하는 것이 전수입니다.
026. 줄탁동시(啐啄同時)
-마침 양자가 상응하는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碧巖錄》 제16칙)
"줄"은 양자 상응하는 좋은 기회를 뜻합니다.
새가 알에서 부화될 때 새끼가 안에서 주둥이로 알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것을 줄이라고 하고, 어미새가 내부의 활동을 즉각적으로 알고 알 껍질을 주둥이로 쪼음과 동시에 외부에서 깨뜨리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수행자의 기회가 성숙된 것을 보고 수행자를 지도하는 고승은 오도(悟道)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미묘하여 어미새와 새끼가 서로 쪼는 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생명이 계승되지 못합니다. 오도라는 영원한 부처님의 생명동 적합한 기회를 그르치면 전수되지 않습니다.
《벽암록》 제16칙에 "무릇 선의 수행자는 모름지기 오도의 호기를 분명히 알아야 참된 선승이라고 할 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줄탁동시"는 본래 중국의 민간에서 쓰던 말입니다.
이 말뿐만 아니라 이른바 속어(俗語)로 선이나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려는 데서 당시의 선자(禪者)의 서민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선자의 경우에 속어이기는 하지만, 선의 진수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때에는 깊은 뜻을 갖게 됩니다.
수행자의 번뇌 속에 숨어 있는 순수한 인간성을 수행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면, 수행자를 지도하는 고승이 순수한 인간성과 접촉하는 시기를 적절하게 잘 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각(自覺)과 타각(他覺)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마음의 심층에서 만나야 합니다.
다도를 즐기는 다인(茶人)이 있었는데 그는 은사의 어린 유아(遺兒)의 장래를 걱정하여 "줄탁재"라는 호(號)를 그 아이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글을 함께 보냈는데 그 속에는 "줄탁지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스승된 자는 이것을 가장 명심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확실히 스승된 자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능력입니다.
027.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
-산에 그름이 떠오르고 바다에 달이 떠오르듯이 주고받는 정담(《碧巖錄》 제53칙)
친구란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서로 그리워하게 마련인 것이 친구입니다. 만나면 그야말로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입니다. 즉 산봉우리 위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듯이 정담(情談)이 그치지 않고 바다에 달이 떠오르듯이 목소리도 정답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만나서 흉허물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처럼 흐뭇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예술이나 철학의 오의(奧義)를 터득한 사람들이 고차원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가리킵니다. 또한 선자(禪者)끼리 득도의 진수를 이야기하는 광경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선자는 이와 같이 인정의 극치(極致)에 대한 묘사를 더욱 심화시켜 산봉우리에 피어오른 구름도, 바다에 떠오르는 달도 그대로 자연의 운치를 나타내고 있다고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인 바쇼(芭蕉)가,
자연의 운행에 따라 네 계절을 친구로 삼는다
보는 것이 모두 꽃이요, 느끼는 것이 모두 달이로세
하고 읊은 것과 상통됩니다. 그리고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다음과 같은 시와도 상통됩니다.
계성편시광장설 산색기청정심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淸淨心
(시냇물 소리는 열변을 토하고
산의 모습은 그대로 맑은 마음이로세)
이 시를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산골짜기 여울물의 흘러내리는 소리는 열변을 토하며 진리를 논하고, 산은 그대로 맑고 깨끗한 불신(佛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원선사는 도가(道歌)에서,
산봉우리의 빛깔이며 여울 소리는
그대로 석가모니의 모습이요 목소리로세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울 소리는 석가여래께서 설법하는 목소리이고, 산빛은 부처님의 모습이라는 말은, 객체(客體)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여울 소리는 어디까지나 여울 소리이고, 산빛은 어디까지나 산빛입니다.
그것을 설법이나 청정심(淸淨心)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절묘한 느낌을 갖는 데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작용을 선자는 "불심(佛心-부처님의 생명)"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영성(靈性)" 또는 "창조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주어진 사실로, 이를테면 소재(素材)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것을 형상화(形象化)하는 작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고 형상화하는가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다"고 톨스토이도 말하고 있습니다.
028. 국수월재수 농화향의만(菊水月在手 弄花香衣滿)
-손바닥에 물을 떠 올리면 달이 손안에 있고, 꽃을 만지면 향기가 옷에 밴다(《春山夜月》)
이 말은 간량사(干良史)의 <춘산야월(春山夜月)>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며, 선서(禪書)인 《허당록(虛堂錄)》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은 언제 어디서나 곳곳에 있다(實在)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국수월재수(菊水月在手) 농화향의만(弄花香衣滿)"인 것입니다. 다음의 짤막한 시도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못물을 튀기면 그 위에 떠 있는 잎사귀마다
달밤이로세
9세기 초에 중국의 마곡산(麻谷山)에 보철(寶撤) 선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구도승이 찾아와서,
"나는, 바람이 언제 어디나 있다는 진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말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하고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구도승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부채질을 멈추고 듣고 있던 보철 선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부채질을 하기 시작할 뿐 하 마디의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채질을 하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바람이 언제 어디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라는 물음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여기서는 공기와 같은 뜻이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부채질을 하는 실천에 의해 그 존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감각의 대상으로 실감할 수 없는 부처님을 좌선이나 염불에 의해 경험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수행자는 어떤 의미에서 부채질을 하는 실천에 의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되어 크게 기뻐하면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땅 위를 내리비추는 달도 손바닥으로 물을 떠올리는 실천이 따라야 손바닥에서 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꽃을 만지는 실천에 의해서 꽃의 향기가 전해진 것입니다.
등잔불을 보니 바람이 부는구나, 눈 내리는 밤에
이 노래도 이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움직임은 등잔불이 하늘거리는 것으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움직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한한 것에 의해 무한한 생명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위의 노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029.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서나 주체성을 갖고 전력을 다하면 진실된 것을 느낄 수 있다(《臨濟錄》)
임제(臨濟) 선사(?-867, 중국 당나라의 선승, 임제종의 개조)가 어느 날 수행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부연해 말하자면 자기가 처한 곳에서 전심전력을 다하면 어디서나 참된 생명을 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 주체성을 가지라는 말을 하는데,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디서나 참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여기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 육상객(陸湘客)이 말하는 "육연(六然)"을 좌우명으로 하고 있는 대기업의 사장이 있었습니다.
"육연(六然)"이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고(自處超然), 타인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게 대하고(處人超然), 유사시에는 활기에 넘치고(有事斬然), 무사할 때에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無事超然), 성공했을 때에는 담담하고(得意澹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라(失意泰然)"는 것입니다.
분명히 "육연"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주처개진(住處皆眞)"에 포함되며, 이 말을 풀이하면 "육연(六然)"이 됩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교육학 교수께서 자기가 신봉하는 기독교의 교육이념이라면서 흑판에 "수인관미(隨人觀美)"라고 썼을 때의 인상은 지금도 내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隨人觀美-사람에 따라서 미를 본다)'이다."
이 미(美)는 당연히 진(眞)과 선(善)과 성(聖)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부처님의 소원을 아는 것이 됩니다. 나는 그 교육학 교수의 "수인관미(隨人觀美)에 "전인개신(全人皆神-모든 사람이 신이다)"을 첨가하여 '수처작주(隨處作主) 주처개진(主處皆眞)"과 "수인관미(隨人觀美) 전인개신(全人皆神)"을 대구(對句)로 하고 있습니다.
030. 세불가사진(勢不可使盡)
-힘을 다 쓰지 말라
불과(佛果) 선사(1063~1135)는《벽암록(碧巖錄)》을 대성한 중국 송나라의 선승 원오스님을 가리킵니다. 그가 태평사(太平寺)에 주지로 있을 때 그의 스승 오조법연(五祖法演)이 그에게 준 것이 이른바 "법연의 사계(四戒)"입니다.
그 초초의 두 가지가
"세불가사진(勢不可使盡-힘을 다 쓰지 말라)"과 "복불가수진(福不可受盡-복을 다 받지 말라)"입니다.
법연은 첫째, "세불가사진(勢不可使盡)"에 대해 해설하기를 "만일 힘을 다 쓰면 반드시 화가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확실히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면 기고만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때가 제일 두려운 것입니다. 행운일 때야말로 부지부식간에 파국(破局)의 씨가 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행할 때보다 오히려 행복할 때에 파국의 징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선자(禪者)는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언동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힘으로 이기는 사람은 힘으로 망하기 쉽습니다.
둘째, "복불가수진(福不可受盡)"에 대해서는 "만일 복을 다 받으면 반드시 궁하게 된다"고 번연선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운에 접하면 신이 나서 세상에 마냥 즐기게 됩니다. 그러면 복의 원천이 고갈하여 행복의 연줄이 끊기게 됩니다.
오계(悟溪) 선사는 전란 중에 생애를 마쳤으나 그의 인품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복오계(福悟溪)"·덕오계(德悟溪)"하며 애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 오계선사가 젊었을 때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행화는 중에, 어느 날 비와호(琵琶湖)에 이르렀습니다. 때가 마침 무더운 여름이라 수행자들은 목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계만은 옷을 벗지 않고 호숫가에서 수건에 물을 적셔 땀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동행한 수행승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이 호수에는 물은 많지만, 내가 쓸 몫은 한정되어 있네. 이 호수의 물에서 후세의 제자들이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남겨 두려는 것일세."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031. 규구불가행진(規矩不可行盡)
-규율을 다 지키지 말라(《大慧武庫》)
앞에서 말한 "법연사계(法演四戒)"의 제3계가 여기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법연의 해설에 의하면 "규율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조리 지키기를 강요하면 사람은 반드시 귀찮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규구(規矩)는 본보기나 규율을 의미합니다. 솔선수범하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본보기대로 하라고 성화를 하면 주위 사람들이 견디지 못합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번(繁)"이란 귀찮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관리직(管理職)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너무 빈틈이 없으면 부하가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딘가 숨구멍을 터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하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이 항목을 일을 적당히 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선에는 "치(痴-바보스러움)"나 "우(愚-어리석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선·미·성(眞善美聖)을 초월한 대범한 세계가 그것입니다. "다 알지만 알지 못하는, 다 배웠지만 배우지 못한, 다 행하였지만 행하지 않은" 경지가 그것입니다. 이 경지가 부하를 구제합니다.
다음은 "법연사계(法演四戒)"의 마지막인 "호어불가설진(好語不可說盡-좋은 말도 다하지 말라)"입니다.
법연의 해설에 의하면 "좋은 말이라고 해서 다하면, 들은 사람은 반드시 소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호어(好語), 즉 좋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말, 다정한 말, 아름다운 말, 진리의 말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너무 많이 하면 그 효과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 그대로이며 법연은 더욱 깊은 데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자는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여 말과 침묵, 움직이는 것과 잠자고 있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봅니다. 그것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하나(一如)입니다.
032. 불가급기우(不可及其愚)
-그 어리석음에는 미치지 못한다.
내가 처음으로 수행을 나섰을 때, 서암사의 고승으로 알려진 반룡(盤龍) 선사와 작별을 할 때 그가 손수 쓴 서화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愚)"라는 글자를 달마(達磨)의 좌상처럼 쓴 것으로 옆에 작은 글자로 "가급기지(可及其智) 불가급기우(不可及其愚)"―그 지혜는 미칠 수 있겠지만 그 어리석음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써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것을 방에 소중히 걸어놓고 있습니다. 그때 선사께서는 "사람이 영리해질 수는 있어도 어리석어지기는 힘들다. 그런 바보가 되어라"하고 작별의 인사를 한 것입니다.
현대인은 학력이 높아 대체로 영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영리한 것을 지양하고,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위대한 어리석음을 꼭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친란(親鸞) 대사는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중(愚禿)"이라고 말했습니다.
정토진종학(淨土眞宗學)의 석학자는 "어리석음은 겸손이 아니라 불도(佛道)를 닦아 득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자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승(禪僧)도 자기를 가리켜 대우(大愚-크게 어리석은 자)·무학(無學-무식한 자)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가장 크고 깊은 소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선자가 이 말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설사 득도의 경지에 도달해도 그것을 초월한 어리석음(愚)의 경지에는 쉽사리 도달하지 못해, 득도의 티를 벗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선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을 사랑하고 배우려면, 어리석음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인 찰즈 램은 "나는 어리석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학력은 보잘 것 없었으나 그가 쓴 《엘리아 수필집》은 세계 수필집 중에서 최고의 걸작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우(宇愚-어리석음을 지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리석음에 투철하는 것이야말로 현대가 상실한 가장 큰 미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결단과 용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재사(才士)는 재간을 의지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을 지킨다.
연소한 재사는 어리석은 자만 못하다
보라, 훗날에 알게 될 것이다
재사는 재사가 아니고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가 아님을.
033. 잠행밀용 여우여노(潛行密用 如愚如魯)
-몰래 행하고 은밀히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처럼 보인다(《寶銀三昧》)
동산양개(洞山良价) 선사(당나라의 고승, 808-869)가 쓴 《보경삼매(寶鏡三昧)》의 마지막에 이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능상속(只能相續) 명주중주(名主中主)"―꾸준히 계속하는 것을 참된 주체성이라고 한다―가 그 뒤에 이어집니다.
"잠행밀용(潛行密用)"은 몰래 행동하고 은밀히 사용하는 것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완전 범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말과 행실에서 자기 본분을 잘 지키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우여노(如愚如魯)"의 우(愚)와 노(魯)는 모두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잠행밀용(潛行密用) 몰종적"―흔적을 남기지 않는다―은 선자가 일상생활에서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언뜻 어리석은 듯이 보여도, 마치 음식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인생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태양은 동쪽에서 솟아오르고, 달은 서쪽에서 집니다. 여기에 우주의 묘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면 사소한 일이라도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누가 했는지 알지 못하게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름을 내거나 어떤 이욕(利慾)을 위해서가 아니라 숨어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할 수 있어야만 참으로 남을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야 비로소 "주중주(主中主)"―현대적으로 말하면, 주체성 중의 주체성,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서예가는 앞에서 말한 "잠행밀용(潛行密用) 여우여노(如愚如魯) 지능상속(只能相續) 명주중주(名主中主)"에 감동을 받아 서도(書道)에 전념하여 일생을 두고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남에게 바보라는 빈축을 사더라도 신념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참된 용기는 남을 이기지 않고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034. 노파친절(老婆親切)
-할머니의 친절(《碧巖錄》 제70칙)
선의 용어에 "억하지탁상(抑下之托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쓰인 글이나 말이 겉으로는 비난이나 냉소(冷笑)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마음 속으로 칭찬이나 애정을 나타낼 경우에 사용합니다. 그것을 일반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기 자식을 남에게 소개할 경우에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또는 "개구장이에요"라고 말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식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생에는 이와 같이 반대의 표현이 아니면 표시할 수 없는 진실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이 깊어지면 반대어를 사용하여 자기의 깊은 심정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선자(禪者)는 체험을 통해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노파친절(老婆親切)"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같은 말에 "노파철곤(老婆撤梱)"이 있습니다. "곤(梱)"은 진정을 뜻하며, "진정에 투철한 할머니"라는 뜻입니다. 도원 선사는 제자 의개(義价)에게 "자네는 노파심이 부족하니 조심하게"하고 가끔 훈계했습니다. 노파심이야말로 수행자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덕목(德目)입니다.
어느 실업가의 《수상집》에 "법(法)보다 친절(親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 "노파친절(老婆親切)"과 상통되므로 여기에 인용하려고 합니다.
"종전 직후에 우리 회사의 건물이 미군의 폭탄에 의해 불타버렸는데 그 자리에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무단으로 10여 채의 판자집이 세워졌다. 회사의 고문 변호사는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나중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아내는, '내가 가서 말하겠어요'하고 노점을 찾아갔다. 아내는 '여러 분 전쟁으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곳에서 돈을 벌어 옮겨갈 자리를 찾아 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새로 사옥을 지을 때에는 물러가 주셨으면 해요.'하고는 정성어린 위문품을 나눠주었다.
그리하여 사옥을 새로 지을 때에는 아무도 두말 않고 고마운 마음으로 떠나갔다. 지금도 잊지 못할 일이다."
035.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五燈會元三》)
이 말은 백장(百丈) 선사(당나라 고승. 720-814)의 유명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백장 선사는 <백장청규(百丈淸規)>라는 수행자의 생활규칙을 제정하여 선종사상(禪宗史上)에 획기적인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청규(淸規)"는 다도(茶道)는 물론이고 일반 예법이나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보청(普請)>만 해도 그렇습니다. <백장청규>에 "보청의 법은 상하에 힘을 고루 쓰는 데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늙은이나 젊은이가 모두 공평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청"이란 모든 사람이 힘을 다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비단 건축 공사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방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하여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모를 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청"입니다.
백장은 선(禪)의 수행자들이 육체 노동을 함으로써 현실에서 떠난 관념유희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청(普請)"의 제도를 정했던 것입니다.
이 육체 노동을 선문(禪門)에서는 "작무(作務)"라고 합니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스승은 육체 노동에 앞장섰다"고 쓰여 있는 것처럼, 80세가 넘어도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건강을 걱정하여 일을 그만두고 쉬라고 진언하지만,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제자들은 스승의 도구를 몰래 숨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을 그만뒀으나 그 후로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백장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아야지"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자기들의 얕은 생각을 뉘우쳤습니다.
그것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차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을 하는 것은 단지 생활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선자가 하는 일은 "불작불행(佛作佛行)"으로, 부처님의 소원을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작불행(佛作佛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입니다.
방광사에 살고 있던 노(老) 선사를 찾아갔더니 한 대의 궐련을 3분의 1로 잘라서 담뱃대에 끼워 피우면서, "나도 늙어서 남들처럼 일하지 못하니 한 대를 다 피워서는 염치가 없지"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036.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
-옮겨 놓는 걸음마다 도량이다 (《禪林類聚》)
인간은 두 다리로 걸어다닙니다. 한 걸음의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황당한 첫걸음을 내어 디디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고귀한 목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니 목적이 그 사람쪽으로 걸어오게 됩니다. 걸음만이 아닙니다. 날마다 말과 행동의 하나하나를 수행장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량(道場)은 범어(梵語)로 "보리만다"라고 합니다.
원래는 석존께서 중부 인도의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득도하셨을 때의 그 나무 아래 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자가 수행하는 장소를 말하며, 널리 불도를 닦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은 따라서 우리들의 한 걸음 한 걸음, 말과 행동의 하나 하나가 모두 수행이며,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은 선사는 "지한장한(地限場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홍법(弘法) 대사는 "일족삼례(一足三禮)"라고 가르쳤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참배하는 심정으로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철도의 차장들은 객차 안을 몇 걸음으로 걸어야 가장 적합한가를 측정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너무 빨리 걸으면 승객에게 불안감을 주고, 너무 더디 걸으면 불편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백화점의 여러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자(禪者)는 자신의 호흡을 세면서 좌선(坐禪)에 들어갑니다. "걸음걸이와 호흡 방법"을 배우는 수련은 오늘의 인생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비슷한 말에 "보보청풍기(步步淸風起)"가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을 적마다 발치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진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입니다. 우리는 이상이 지나치게 높아 현실에서 떠나기 쉽습니다. 발을 땅에 대고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의 도량을 걸어가면 언제 어디서나 진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자(禪者)는 걸어갈 때에는 6척(약 2m) 앞을 잘 보고―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와 같은 눈으로 황소처럼 느릿느릿 걸어야 합니다.
037. 조원일적수(曹源一適水)
-조원의 물 한 방울(《碧巖錄》제7칙)
달마선사로부터 선법을 이어받은 6대째 조사(祖師)는 혜능(慧能) 대사(638-713)입니다. 혜능대사는 중국 고아동성의 조계(曹溪)에 살았기 때문에 때로는 그를 "조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조원(曹源)은 조계의 골짜기의 수원지이나, 혜능에 의해 선(禪)이 성했기 때문에 조원은 선법(禪法)의 원천, 즉 혜능대사를 가리킵니다.
이 혜능이 대성한 선(禪)은, 중국에서는 오가(五家-雲門·위앙·臨濟·曹洞·法眼의 五宗)와 임제(臨濟에서 갈라진 양기(楊岐)와 황용(黃龍)의 두 파를 합쳐서 칠종(七宗)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분화 발전하여 24가지의 선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조계"의 혜능을 원천으로 하여 전개했으므로, "조원(曹源)의 물 한 방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혜능의 근본 선심(禪心)·선의 진수·정전(正傳)의 선법을 "물 한 방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벽암록》제7칙에 법안(法眼-法眼宗의 시조. 885-958) 대사에게 한 수행승이 "조원의 물 한 방울은 무엇을 말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법안대사는 즉시 그 물음 그대로 "조원의 물 한 방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음이 그대로 대답이 되어 전달되는 데에 인생의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선(禪)의 깊은 이치는 별도로 하더라도 현대인이 명심해야 하는 "물 한 방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자가 풍부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물자를 소홀히 여기는 나쁜 버릇을 갖게 된 것입니다.
불상을 조각하는 한 선사는 아직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것은 "잔학한 행위"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불상 조각 선사가 되기 위해 사계의 권위자인 동운(東雲)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운은 불상 조각을 배우고 싶다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물을 긷는 그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던 동운은 다짜고짜 그를 크게 꾸짖고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그 날 밤을 함께 묵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밤중에 그를 깨워 선생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동운 선생은 나직한 목소리로,
"낮에 내가 책망한 까닭을 모르고 있을 것 같아 말하겠네. 불상은 사람들이 경배하는 것이라네. 그런 불상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경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네. 한 그릇의 물도 하늘과 땅의 선물이라네. 그런데 자네가 물을 긷는 것을 보니 물이 넘쳐도 태연한 태도였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상을 만들 수 있겠나." 하고 타일렀습니다.
그에게는 선생의 이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는 깊이 반성하고 선생의 제자가 되어 드디어 대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038. 수도거성(水到渠成)
-물이 흐르면 도량이 된다(《禪林類聚》19)
이 말은 본래 "학문의 뿌리가 깊어지면 도(道)가 굳어지고 공명(功名)의 물이 흘러 스스로 도랑을 이룬다"는 중국의 옛 시에서 "수도거성(水到渠成)"의 네 글자를 선어(禪語)로 인용한 것입니다. 원시(原詩)의 뜻은 "학문을 쌓으면 자연히 도를 닦게 되고 물이 흐르면 저절로 도랑이 생긴다"는 것으로 자연의 이치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거성(水到渠成)"을 실력이 있는 스승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가 모인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은 그 성질 때문에 많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이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선어(禪語)에도 자주 물(水)이 등장합니다. 이 "수도거성(水到渠成)"의 전개로 보아도 무방한 구절에 "물이 깊으면 물결이 조용하고, 학문이 깊으면 목소리가 낮아진다"가 있습니다.
물은 또한 "부처님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도가(道歌)의
비와 눈과 얼음으로 갈라져도
모두가 똑같은 개울물이도다
에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호(號)를 "여수(如水)"라고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격하고자 하는 성을 홍수 작전으로 공략하는가 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호를 "여수(如水)"라고 한 데에는 까닭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의 "수오칙(水五則)"에는 오늘날에도 많은 공감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합니다.
1. 스스로 활동하여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물이다.
2. 언제나 자기의 진로(進路)를 구하는 것은 물이다.
3. 장해에 부딪히게 되면 그 힘을 100배로 늘릴 수 있는 것은 물이다.
4. 자기는 깨끗하고 남의 더러움을 씻어 깨끗하고 더러움을 함께 용납하는 것은 물이다.
5. 망망 대해를 가득 채우고, 증발해서는 구름이 되고 비와 눈이 되고 이슬이 된다. 굳어지면 맑은 거울 같은 얼음이 되지만, 그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 물이다.
039. 긱다긱반수시과(喫茶喫飯隨時過)
-때에 따라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
차를 마실 때가 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는다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사람의 생활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같은 뜻의 말로 "긱다긱반(喫茶喫飯) 우착의(又着衣)"가 있습니다. 이것은 때가 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옷을 입을 뿐, 불법(佛法)에 다른 비결은 없다는 뜻으로 우당(愚堂) 대사(1661년 입적)의 말입니다.
상제(常濟) 대사(1325년 입적)가 "밥이 있으면 밥을 먹고, 차가 있으면 차를 마신다"고 한 말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말은 단지 마시고 싶으니까 마시고 먹고 싶으니까 먹는다는 것과는 내용적으로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먹고 마시는 행위에는 그 사람의 생활태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전체와 통하므로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다"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茶)이고 밥이고 옷이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아닌 부처님의 생명이 숨쉬고 있습니다.
조주(趙州) 대사에게 한 수행승이 찾아왔습니다. 대사는 그에게,
"자네가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나?"하고 물었습니다.
"네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차를 마시게."하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에 다른 수행승이 조주 대사를 찾아왔습니다.
대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
"아니요,"하고 수행승이 대답하자, 대사는 전과 같이
"차를 마시게."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절의 주지가 대사에게 물었습니다.
"대사는 전에 이곳에 왔던 자나 오지 않았던 자나 똑같이 차를 마시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조주는 말했습니다.
"주지 스님!"
"네."
"차를 마십시오!"
조주는 각각 입장이 다른 세 사람에게 어째서 한결같이 차를 마시라고 말했을까요?
이 물음에 해답을 찾는 하나의 힌트는 "이곳"이라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곳"은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위치의 부정, 즉 무위(無位)입니다. 차아(嵯峨) 천황의 단림(檀林) 황후는 선을 배워 득도했을 때,
산 너머 떠 있는 구름은
이곳에서 피우는 불의 연기이어라
하고 자기의 심경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경에 있는 한 사찰의 관음당(觀音堂) 기둥에는 "불신원만무배상시방래인좌대면(佛身円滿無背相十方來人坐對面)"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은 원만하므로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앉아서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이곳에 오건 말건,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이곳'에 무심히 앉아 있는 '마음'과 대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참으로 "차를 마시는 것(禪茶一味)"입니다.
040. 감미, 고미, 삽미(甘味, 苦味, 澁味)
-청춘은 달고, 중년은 쓰고, 노년은 떫다
지금까지는 가루차(抹茶)에 의한 다선(茶禪)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여기서는 달인차(煎茶)의 다선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엽차를 달여서 마시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어느 선승(禪僧)의 《전다훈(煎茶訓)》을 다음에 소개하겠습니다.
"첫잔은 달며, 두 번째 잔은 쓰며, 세 번째 잔은 떫다(시다). 이 차의 맛은 인생의 행로와 같아서 철학과도 상통된다."
전에 프랑스인 신부(神父) 칸두씨도 어느 다인(茶人)에게서 다도(茶道)를 배우고 나서 "인생과 통하는 맛"이라고 좋아했습니다.
확실히 희망에 불타는 청년기나 신혼 초의 인생은 달콤하고, 중년의 인생고(人生苦)나 사업고(事業苦)는 쓰디씁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인간에게서도 신맛이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의 이 세 가지 맛이 반드시 나이 순서대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고, 교착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음미하는 맛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은 이 세 가지 맛 중에서 어디에 해당됩니까?
흩어지면 가라앉는 단풍잎의 그림자는
골짜기를 흐르는 여울물에 비치나니
이 시(詩)는 생명의 명제(命題)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041. 긱다거(喫茶去)
-차를 마시라(《五燈會元》)
"긱다거(喫茶去)"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단지, "차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거(去)"는 이 명령을 강화시키는 글자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자(禪者)에게는 조주(趙州) 대사의 말이므로 옛날부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다도(茶道)로 유명한 주광(珠光: 1502년 입적)은 일휴(一休) 대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언제나 졸려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의사에게 치료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의사가 차를 마실 것을 권하여, 그대로 실행하니 그 덕택에 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차를 마셔도 예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시작한 것이 다도(茶道)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다도를 완성한 무렵에 일휴 대사가 그에게,
"무엇 때문에 차를 마셔야 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차를 처음으로 전한 영서(榮西) 선사의 《차의 양생기(量生記)》에 따라 건강을 위해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일휴 대사는 그에게
"조주 대사에게 어떤 수행승(雲水)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사는 "차를 마시는 것'이라고 대답했네, 이 말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광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휴 대사는 옆에 있는 수행승에게 일러 차 한 잔을 따라오게 했습니다.
주광이 그 찻잔을 손에 받아 들었을 때, 일휴 대사는 크게 책망하면서 그의 손을 흔들어 찻잔을 떨어뜨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에 일휴 대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때 일휴는,
"주광!"하고 불렀습니다.
"네"하고 대답하고 뒤돌아보았더니 일휴 대사가 물었습니다.
"아까는 자네에게 차를 마시는 마음가짐에 대해 물었는데, 만일 그런 마음가짐에서 떠나 무심코 차를 마시면 어떻게 되나?"
주광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습니다."
일휴대사는 이때 비로소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그 후부터 주광은 좌선하는 심정을 다도에 옮겨 이를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취미나 건강이나 그밖에 어떤 격식을 갖추어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선의 득도의 묘미가 가미되었기 때문입니다. "긱다거(喫茶去)"―거기에는 인간의 모든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042. 다미선미 미미일미(茶味禪味 味味一味)
-찻잔을 돌리는 데 선의 미(禪味)가 있다(默雷禪師)
이 말은 한 선사가 즐겨 하던 말이었습니다.
차와 선의 마음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각각 정취는 다르지만 뜻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찻잔을 잇따라 돌리는 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선미(禪味)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수행승(修行僧)들이 식사를 한 후나 피로를 느끼거나 또는 좌선을 하다가 졸릴 때 조용히 걸어다니면서 심신을 조절하는데, 이때 찻잔 하나를 서로 돌려가면서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방식도 제대로 지켜 흩어지지 말아야 하며, 선의 수행도 준엄합니다. 이 점에서도 서로 상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선자는 언제나 수행상의 규칙에 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차를 마시는 방법의 극치는 무법(無法)의 법입니다. 선의 수행도 참으로 완성되었을 때에는, 그 수행을 모두 잊어버립니다. 이른바 "풍류(風流) 아닌 곳에 풍류가 있는 것"입니다.
선자는 수행의 힘을, 다인(茶人)은 그 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도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여름에는 서늘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숯불은 물이 끓도록, 차는 마시기에 알맞게 하는 것이 비결이지."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했더니 선자는,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제자가 되어야겠소."하고 대답했습니다. 다도의 수련이나 선의 수행은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특별한 경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평상시의 행위의 하나입니다.―常心是道―.
특별한 비밀도 없는 "무일물(無一物)"의 경지로, 평범한 것 속에서 진실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깊이 개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도나 좌선은 "그 극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043. 적다갱막별사량(摘茶更莫別思量)
-차를 따면서 따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 (《聯頌集》)
차를 나무에서 따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대단히 평화롭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인들은 열심히 차를 따는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차를 따는 일에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를 따면서 따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구는 "처처분명시도량"-어디나 이치가 분명하며 그곳이 도량이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현재 있는곳이 어디든지간에 정신만 똑똑히 차리면 모두가 수행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선어 29에서 우리가 살펴온 "수처잦주 입처개진"과 선어36의 "보보시도량"과 상통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있을 때에 다른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진력을 다하면 자연히 즐거움을 느껴 사는 보람을 갖게 됩니다. 사는 보람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며, 남에게 물어보거나 책에서 배워서는 몸에 배지 않습니다. 사는 보람을 자기 피부로 느끼고 몸으로 이해하여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란츠는 나치스가 유태인을 무더기로 학살할 때 아우슈비츠의 감옥에 들어갔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지옥 속에서 인간이 극한에 몰렸을 때의 인간성을 전공인 정신의학으로 해명했습니다.
그 처참한 현장에서도 서로 얼마 되지 않는 빵을 나눠먹고 남을 감싸는 순수한 인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런 체험을 통하여 인간이 사는 보람은 "주는 것과 참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 깊숙이 이 순수한 생명이 숨어 있는 것을 "초월적 무의식(超越的無意識)"이라고 부릅니다. 이 무의식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떤 지옥도 도량(道場)이 됩니다.
직장에서도 딴 생각을 하지말고 매일 빈틈없이 일한다면 사고나 부상도 적어질 것입니다. 그의 사는 보람이 책상 위의 관념론(觀念論)에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무게가 있어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잠수함이 시드니만 깊숙이 잠입했습니다. 전사(戰死)를 앞두고 한 승무원이 몰래 갖고 온 분말차를 타서 동료에게 권하고 자기도 마셨습니다. 조국을 떠날 때 어머니가 준 한 개의 미실정과를 나눠 먹으면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차를 마셨으므로 그에게는 잠수함 안이 다석(茶席)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044.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간다(《無門關》 제46칙)
100척이라는 길이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계양탑(揭場塔) 같은 꼭대기가 곧 백척간두입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오도를 구하는 행상의 도정(道程)의 절대경으로 "고봉정상(高峰頂上)"이라고도 말합니다. 꾸준히 수행을 쌓지 않고서는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여기까지 이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사(長沙) 선사(당나라 고승. 866년 입적)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백척간두에 앉은 사람이 득도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다 된 것이 아니다"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석가도 달마도 현재 수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잘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진보합니다. 백척간두에서도 더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척간두에서도 더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영국 속담에 "사람은 여행을 하지만 나중에는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자(禪者)는, "산에 오르는 길은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높은 봉우리 위에서 홀로 근사한 기분으로 있지 않고 속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을 떼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고 가는 것이 동일한 경우라야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백척간두를 오르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그대로 남을 위해 아래로 내려가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등(大燈) 대사(1337년 입적)는 득도한 후 20년 동안이나 다리 밑에서 거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관산(關山) 대사(1360년 입적)도 득도한 후 8년 동안 산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입니다. 이 말에서 "상대를 부정하고 절대(絶對)로 나아가고, 다시 절대로 초월하라. 그러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천과 경험에 의해 다시 한 번 물로 느끼라"는 가르침을 찾아보게 됩니다.
세상을 위해 밭에 흘러들어 탁해지는 맑은 물이로세
깨끗한 물이 밭에 흘러가 탁한 물이 되는 자비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큰 한 걸음입니다.
045. 여천하인작음량(與天下人作陰凉)
-천하의 사람들을 위해 그늘이 되리라(《臨濟錄》)
임제(臨濟) 선사(당나라 선승)는 처음에 황벽(黃檗)선사(당나라 선승) 밑에서 수행했으나 좀처럼 도를 깨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임제는 자기의 무능력을 한탄하여 수행을 단념하고 스승의 곁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때 같은 제자인 목주(睦州)가 황벽 선사에게, "그는 순진한 청년으로 취할 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단련하여 성장하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의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하고 진언했습니다. 과연 그는 그 말대로 대선자(大禪者)가 되었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을 위해 그늘이 되리라"―나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한여름에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 큰 나무 그늘처럼 고마운 것은 없습니다. 큰 나무는 가지를 뻗어 태양의 직사광선을 막고 서늘한 바람을 가져다 줍니다. 자기의 더위를 마다 않고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이 큰 나무에 해당하는 말에 영어의 "nurse"가 있습니다. 보호수(保護樹)·포옹의 의미가 있으며, 보모(保姆)라고도 번역합니다. 큰 나무가 자기 아래 작은 화초의 성장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모는 아기를 보호하고 포옹합니다.
선자(禪者)의 엄격한 수행도, 나중에는 천하의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서늘한 휴식처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의 고뇌의 직사(直射)를 막아 마음에 평안한 그늘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석존께서는 만년에 자기의 모국인 석가족이 친족의 나라에 의해 멸망되는 비운을 당했습니다. 이때 석존은 침략군이 지나가는 길 옆 고목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진두에 서서 행군하던 침략국의 왕은 그 앞을 그냥 지나갈 수 없어 말에서 내려 물었습니다.
"석존, 무엇 때문에 고목 아래 앉아 있소?"
석존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왕이여, 친족의 그늘은 서늘하군요."
이 말을 듣고 그 왕은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되풀이되었는데, 네 번째의 진군에는 석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목의 그늘에 앉지 않았습니다. 잎사귀가 없는 고목은 아무리 큰 나무라도 그늘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잎사귀가 많은 큰 나무로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나무도 처음에는 한 알의 작은 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햇살과 비바람을 맞고 자라면서 비료를 흡수하여 점점 자라게 됩니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구도심(求道心)이 점점 크게 자라는 것입니다.
046. 암곡재송(巖谷栽松)
-바위 골짜기에 소나무를 심는다(《臨濟錄》)
이 말은 《임제록》의 "행록(行錄-임제 선사의 언행을 기록한 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임제(臨濟) 선사가 소나무를 심고 있을 때 황벽(黃檗) 선사가 "이 깊은 산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다시 나무를 심어서 무엇합니까?"하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임제록》의 서문에는 마방(馬防)이라는 사람이 "바위 골짜기에 소나무를 심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선(禪)이란 단지 좌선(坐禪)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하루하루 부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참된 선(禪)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백장(百丈) 선사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한 말도 이것과 맥락을 함께 합니다. 부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선(禪)에서는 "작무(作務)"라고 합니다.
임제 선사도 작무(作務)로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황벽 선사의 물음에 임제 선사는,
"첫째는 절(山寺)의 경치를 좋게 하고, 둘째는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평범한 행위는 나무를 심는 작업을 통하여 인생의 진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행록>에는 "깊은 산(深山裏)"으로 쓰여 있으나 서문에는 "바위 골짜기(巖谷)"로 나와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는 보람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것이지만, 남에게서 빌렸거나 배운 것으로는 무의미합니다. 임제 선사가 깊은 산에 나무를 심은 심정은 자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임제 선사는 스승에게 대답하고 나서 손에 잡고 있던 괭이로 계속해서 흙을 팠습니다. 나는 사찰에서 수행승들을 지도하는 한 노선사(老禪師)가 그린 <임제재송(臨濟裁松)>이라는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손에는 소나무 묘목을 들고 한 손에는 괭이를 든 임제 선사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노라면 첫째, 절의 경치를 좋게 하고, 둘째,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 나무를 심는다고 한 임제선사를 느낍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바위 골짜기에 소나무를 심는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다시 그것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047. 재도중 불리가사(在途中 不離家舍)
-도중에 있으면서 집을 떠나지 않는다(《臨濟錄》)
임제 선사의 말입니다.
"한 사람은 겁(劫)을 논하여 도중(途中)에 있으면서 집을 떠나지 않고, 한 사람은 집을 떠났으되 도중(途中)에도 있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의 공양(供養)을 받을만 하겠느냐?"
하고 임제 선사가 물은 것입니다.
여기서 겁(劫)은 범어로서 "무한의 시간"이라고 역하며, 겁을 논하는 것은 영원의 뜻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인식 방법에 익숙해 있으므로,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생각합니다. 목적과 수단, 결과와 방법―이렇게 둘러 나눠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노동도 살아가기 위해,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수단으로 간주하여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일하는 것은 "도중(途中)"―다시 말해서 일하는 것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 되지 않으면 인생은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일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달팽이가 집을 등에 업고 걸어가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도중에 목적이 뒤따라야 합니다.
"올림픽은 이기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말은 프랑스의 교육가이며 올림픽 대회의 공로자였던 쿠베르탱(1863-1937)의 유명한 말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성공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데 의미가 있다."라고.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노력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노력을 위한 노력이라고 말하는 것도 상대론(相對論)입니다. 그것도 초월하여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생활 태도가 앞에 인용한 말입니다. 선자(禪者)는 이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며, 일하는 것 자체가 선(禪)을 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활 속에서 선(禪)이 계승되어 가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것도 선(禪)이고, 앉아있는 것도 선(禪)"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달리 생각지 말고, 각각 자기를 깨닫게 하는 도량입니다.
048. 산하병대지전로법왕신(山河병大地全露法王身)
- 산과 강과 대지가 진리를 나타낸다 (《普燈錄》)
자연의 산과 강을 비롯하여 천지의 삼라만상에 진리가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법왕신(法王身)"은 절대성을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고 신의 계시(啓示)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자는 또한,
"쟁여착의긱반비외경무불조(爭如著衣喫飯比外更無佛祖)"―지금 자기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 말고 따로 참된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도(道)를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보는 눈이 빛나지 않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보고 있지만, 사실은 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면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쳐, 진리를 알았지만 그 진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만나고 있지만 사실은 만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전에 단칠(丹七)이라고 하는 두부 공장을 하는 집의 별채에 하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하숙집의 주인은 늙었으나 두부를 만드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 그 두부 공장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 손님의 식당에서 다른 상점에서 산 두부로 요리를 했더니 손님들이 "이건 '단칠'의 두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두부 공장의 늙은 주인은 "고마운 손님이군"하고 손뼉을 쳤습니다. 좋은 손님을 만나게 된 것이 그에게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늙었으므로 두부를 만드는 비법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훔치면 되는 거요"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은 드러내 놓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두부는 골방에서 몰래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비결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고 노인은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비법은 전할 수 없으므로 훔쳐 가야지. 그건 가르칠 수 없으므로 빼앗아 가야 해."
하고 말을 잇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말하는 훔치고 빼앗는 것은 형법에 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귀한 비정(非情)은 불도의 수행과도 통합니다. "신(神)은 아낌없이 준다"고 합니다. 산과 강과 대지를 다 주었는데도 그걸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자는 또 말합니다. "송수천년취불입시인의(松樹千年翠不入時人意)"―이 말은, 소나무는 천 년을 두고 언제나 푸르지만 사람이 예사로 보아 넘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꾸준히 설법을 해도 사람이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049. 할(喝)
-호통(馬祖道-禪師?)
귀에 익은 말입니다. 선자(禪者)만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흔히 "야단을 맞았다"고 말하는데 그 야단이 곧 이 할(喝)입니다. 불교 사전에는 "질타하여 외치는 소리로, 중국의 당나라 이후에 선종(禪宗)의 승려가 참선자들을 인도할 때 사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임제록(臨濟錄)》에 "스승의 일할(一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임제 선사는 수행자들에게 자주 일할 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자(禪者)가 처음 사용한 것은 임제 선사보다 약 100년 전인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참선자를 지도할 때 일할을 서슴지 않은 것은 임제 선사입니다. "임제의 사할(四喝)"이라 하여 일할에는 때와 장소와 상대에 따라 네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요컨대 "일할"은 선의 오도를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할(喝)"이라는 글자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글자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도의 경지를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할(喝)"이라는 한 마디 말속에 그 사람의 오도의 전부가 깃들어 있으므로, 선자는 이 말을 소중히 여깁니다. 또한 옛 스승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할(一喝)을 하는 사람의 말을 모방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세계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지방의 절에서 전사자의 위령제가 열려, 스님이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탕 하는 한 방의 총소리를 들려주노라"하고 일할(一喝)을 토하고 끝냈습니다.
그런데 이 뜻밖의 말에 이 위령제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숙연해지면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스님은 그 날의 일에 감동을 받고 훗날 다른 곳에서 위령제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할 때 그 말을 그대로 모방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탕"하는 말이 훌륭하게 일할의 작용을 한 것은 어조나 어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선심(禪心)이 깊고 얕은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050. 염화미소(拈華微笑)
-꽃을 손에 들고 미소를 짓는다(《無門關》 제6칙)
석존께서는 영산(靈山)에서 자주 설법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대중의 한 사람이 석존에게 한 송이의 꽃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석존께서는 그 꽃을들어 대중들 앞에 보여 주시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중이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오직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尊者)만이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석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하셨습니다.
여기 석존의 마음에서 가섭 존자의 마음에 인생의 진실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염화미소(拈華微笑)"의 뜻입니다. "염화(拈華)"란 꽃을 손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꽃에 어떤 신비로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석존께서는 손에 꽃을 갖게 되어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꽃이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깨친 가섭 존자의 깊은 마음입니다.
석존에게는 "십대제자(十大弟子)"라는 베스트 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득도한 석존의 마음을 지혜(知慧)가 뛰어난 사리불(舍利佛)이나 "해공(解空)"에 대한 1인자인 수보리(須菩提)나, 설법에 능한 부루나(富樓那)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목련(目蓮)도, 석존의 설법을 누구보다도 많이들은 아난(阿難)도 알지 못했습니다.
석존께서는 결코 진리를 몰래 가섭에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산 꼭대기의 공개석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째서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을까요? 가섭도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며,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의 "두우타"를 음사한 것으로서, 의·식·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아(自我)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마음입니다. 이 무아(無我)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석존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3장 직지인심(直指人心)
직지인심(直指人心)―곧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한눈을 팔지 않고 자기 마음을 잘 바라보고 그것을 곧 파악하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하거나 분석해서는 자기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직접 잦기 마음 속 깊숙이 숨어 있는 순수한 인간성에 접해야 합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모두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지도했다 하여도 여전히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한 도저히 계승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직시(直視)와 같은 말에 "별전(別傳)"이 있습니다. 별전은 별개의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가슴속을 잘 들여다보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별전(別傳)"은 앞에서 나온 "불립문자(不立文字)"와도 통합니다.
나는 전에 프로 야구의 명투수였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선수들에게 야구 기술을 가르쳐 주면 실제로 해보지도 않고 '선배님, 왜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하고 까닭을 먼저 물어요. 그래서 나는 말하지요. '야구란 입으로 가르치고 귀로 들어서 아는 게 아냐. 몸으로 익혀야 해. 왜는 나한테 묻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묻게.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알 때가 오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에 배지 않네'하구요."
그의 이 한마디는 참으로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다만 나는 설득하는 것과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설득하는 노력은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모든 각도에서 설득하는 것이 선(禪)의 설법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본장의 제목인 "직지인심(直指人心)"인 것입니다.
그 설법은 짤막한 몇 마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길게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득하는 친절이 필요합니다. 이 친절이 상대방의 가슴에 곧 전해져서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원(禪院)의 창시자로서, 선종사상(禪宗史上)에 유명한 백장(百丈) 스님이 아직 운수(雲水)의 신분으로 마조산(馬祖山)에 안거하고 있던 어느 날, 스승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풀숲에 있던 두 오리가 스님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날아갔습니다. 그를 본 마조 스님이 백장에게 "저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백장은 정직하게 "저것은 오리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조 스님이, "어디로 날아갔는가?"
백장이, "어디라구요, 노스님. 새가 나는 데 행선(行先)이 예정되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다만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마조 스님은 백장의 말 많은 그 대답이 귀에 매우 거슬렸던 모양인지 갑자기 백장의 코를 꽉 잡아 비틀었습니다. 백장은 아픔을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이구, 아파!"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때 마조스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아니 날아가 버렸다고 했는데 여기 있었잖아! 지금 아이구, 아파, 하고 비명을 올리는 그가 아닌가."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벽암록(碧巖錄)》 제53칙의 이야기입니다. 선(禪)의 대화가 신변의 사실을 인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습니다. 자기 주위가 모두 스승이고, 가르침이라는 선(禪)의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백장은 오리를 오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오리와 제자를 같은 초점에 맞춰서 곧 가리키고(直指) 있습니다. 백장은 자기 코를 꼬집히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렸습니다. 오리와 백장이 한 점에 집약된 것입니다. 그것이 직지(直指)입니다.
선(禪)에는 2인칭도 없고 3인칭도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언제나 현재의 제1인칭입니다. 이것은 선(禪)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친란(親鸞) 한 사람뿐이로다 라는 단가(短歌)와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지되는 것의 본체는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051.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나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 (《五燈會元》15·雲門章)
석존께서 탄생된 것은 B.C. 463년이며, 동경 83도, 북위 27도인 가비라성에서였습니다. 그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물론 갓난아기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세의 사람이 석존의 탄생이야말로 불교의 탄생이라고 하여, 석존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라고, 탄생의 시점에 기탁한 "불교의 선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결코 골목대장은 나 하나뿐이라거나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부심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란 이 우주를 뜻합니다. 보편적인 존재의 의미입니다. "유아(唯我)"는 절대의 자아(自我), 즉 대아(大我)를 가리킵니다. 작은 자아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주의 본체로서의 유일절대(唯一絶對)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전체의 뜻은 "하늘 위에서부터 땅 속까지 무엇이나 부처님의 생명을 갖고 있으므로,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되면 "응애응애"하는 울음소리도 자기의 존귀함을 깨달아 외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인간만이 아닙니다. 개가 울고 새가 우는 소리도 모두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발성(發聲)입니다.
대응(大應) 선사(1308년 입적)에게 어떤 수행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구(字句)의 설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진리를 물은 것입니다. 선사는 "남들을 위해 힘 쓰는 것이야"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행자가 "석존께서 탄생한 사실(史實)은 별도로 하고 석존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즉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절실한 질문이었습니다. 선사는 곧 "자네 발치를 보게"하고 대답했습니다.
즉 자기에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 힘쓰라."는 부처님의 뜻을 행하려고 생각한 그때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석존의 생명과 직결된 때입니다.
석존의 탄생은 참된 의미에서 나 자신의 탄생이 됩니다.
어느 소설가는, 천상천하에 내가 있노라. 나 홀로 있노라
고 읊어 석존의 탄생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관에도 이어집니다.
052. 대재심호천지고불가극야이심호출천지상(大哉心乎天之高不可極也而心乎出天之上)
-마음은 위대하도다. 하늘은 지극히 높아 헤아릴 길이 없으나 마음은 하늘 위에 서도다
영서(榮西) 선사(1214년 입적)는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 여기 인용한 글은 《흥선호국론》의 머리말에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마음(心)"이란 감정에 움직이기 쉬운 마음이 아니라 감정적인 마음의 밑바닥에 묻혀 있는 종교적 무의식의 본성을 내용으로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마음은 부처님의 생명, 즉 불심(佛心) 또는 불성(佛性)을 뜻합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 마음은 자기의 주위에도 있고, 자기 속에도 무의식 상태에서 존재합니다. 그것을 영서선사는 "마음은 위대하도다. 하늘은 지극히 높아 헤아릴 길이 없으나 마음은 하늘 위에 서도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사는 이어서 "땅의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도다. 그러나 마음은 땅 아래 있도다."하고 공간의 무한성(無限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은 해와 달의 밖에 있다"고 말하고 시간적인 무한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의 마음을 선자(禪者)는 "반야실상(般若實相) 또는 열반묘심(涅槃妙心) 혹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애칭입니다. 애칭이 많은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증거입니다.
감정적인 마음은 언제나 변하기 쉬우므로 의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된 마음이 깃들어 있으므로 양자를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를 조절하여 고도를 유지하면 자연히 후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마음을 깊게, 마음을 넓게, 마음을 부드럽게"를 좌우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부연하여
"시끄러울 때, 골치 아픈 일을 할 때일수록 그것에 압도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할 때는 마음을 실험하는 좋은 기회이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053. 즉심즉불 즉심시불(卽心卽佛 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 (《無門關》 제30칙)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출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사람들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생각하는 마음 전체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부처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부처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 시심작불(是心作佛) 즉심시불(卽心是佛)]"의 1절입니다.
그리고 중국 북조의 재가 불자로 선을 깨친 부흡(溥翕)은 그의 저서 《심왕명(心王銘)》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 즉불즉심(卽佛卽心)"이라고 하여 다른 데서 부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조(馬祖) 선사도 "마음이 곧 부처님임을 믿으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조 선사의 제자인 법상(法常)은 스승의 "즉심즉불(卽心卽佛)"―마음이 곧 부처님이다―이라는 말 한 마디로 크게 깨달아(大悟) 득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깨달음이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어떤 계기가 주어져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 자아(自我)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법상은 이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대매산(大梅山)에 숨어살며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 한 마디가 법상의 일생에 큰 전환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등골에 사무치는 이 한 마디는 인간을 초월한 훨씬 깊은 데서 일어나는 소리 아닌 소리가 인간의 말이 되어 비로소 등골에 사무쳤던 것입니다. 선어(禪語)란 그런 것입니다. 후에 마조 선사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시험했습니다.
"법상, 당신은 마조 스님의 '마음이 곧 부처님[卽心是佛]'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했는데, 마조 스님은 요즘 와서 교법이 달라져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라[非心非佛]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하고 그에게 말했으나, 법상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법상은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전해 듣고 마조스님은 크게 기뻐하며 대중 앞에서 "매자(梅子:법상)가 이미 여물었다"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의 오도가 더욱 깊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선어(禪語)의 학습도 중요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해"하고 철저하게 믿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054.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無門關》 제33칙)
마조(馬祖) 선사에게 어떤 수행자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마조 선사가 대답하기를,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대답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즉심즉불(卽心卽佛) 즉심시불(卽心是佛)"과는 모순이지만, 사실 마조는 때로는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 혹은 "마음도 불도 아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은 경제 생활이 윤택해졌으나 "의식(衣食)이 넉넉하니 공허를 느껴" 언밸런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즉 경제면과는 다른 차원의 욕구불만으로 몸과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영원한 행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 영원한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라, 마음이 곧 부처님이니라"하고 마조 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지 않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입니다.
여기에서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마조의 의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는 말에 구애되면, 마조 스님은 논법(論法)을 바꾸어 다른 말을 할 것입니다.
대매산의 법상(法常)은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를 끝까지 고집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卽心是佛]"가 그대로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非心非佛]"이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이 바로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심경입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언뜻 보아 정반대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 두 가지 말을 교묘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원앙새냐 갈매기냐
파도 사이를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구나
"파도 사이를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은 원앙새인지 갈매기인지 알 수 없다. 원앙새라도 그만이고 갈매기라도 그만이다. 굳이 구분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부처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인간은 부처님도 될 수 있고 범부(凡夫)도 될 수 있습니다.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부처님이 아니다"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따질 것이 못됩니다. 우리는 다른 데 한눈을 팔지 말고 지금 이곳의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055. 직심시도량(直心是道場)
-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니라 (《維摩經》)
도량(道場)이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원래는 석존께서 도를 깨친 보리수 아래 마련되었던 자리를 가리킵니다. 그 후에 그곳은 수행하는 신성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떤 수행자가 어느 날 행길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를 만나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도량(道場)에서 오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량은 방금 그 수행자가 떠나온 성안(城內)에 있었으므로 방향부터가 정반대였습니다.
수행자는 수행을 위해 소란한 성안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려고 했으므로 "그 도량이 어디 있는데요?"하고 유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마는,
"곧은 마음이 있는 곳이 도량이지. 거짓이 없으니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도량(道場)은 건물이나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직심(直心)이란 흩어지지 않은 유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마음에는 거짓이나 에누리가 없으므로 도량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유마가 도량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오면서 "도량에서 오네"하고 말한 것은 뜻깊은 발언입니다.
수행자에게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라는 태도로 말한 것입니다.
"직심(直心)"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므로 "빈(空) 마음"과도 상통됩니다. 영가(永嘉) 대사(8세기의 중국 선승)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욕구에 불타 있으면 마음은 조용해진다. 다만 마음이 조용해지기만을 바라고 진리를 구하기를 잊으면 산 속도 소란스러워진다."
파도 소리가 듣기 싫어 산에 살면,
소나무에 불어오는 소란스러운 바람 소리
이 도가(道歌)도 같은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란한 가운데서도 태평스럽게 원고를 쓰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는 몹시 부럽습니다. 그것은 단지 습관 이상의 큰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를 잊고, 멀리 한적한 곳을 찾는 한, 아무데도 "도량(道場)"은 없습니다.
056. 오심사추월 벽담청교결(吾心似秋月 碧潭淸皎潔)
-내 마음은 가을 하늘의 달이 푸른 산여울에 비치는 것처럼 맑고 깨끗하다 (《寒山詩》)
한산(寒山)은 습득(拾得)과 함께 실재(實在) 인물인지 아닌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전부터8, 9세기경의 당나라의 선승이자 시인이라고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의 시집인 《한산시(寒山詩)》는 그가 살고 있었다는 천태산(天台山) 중의 바위벽 등에 새겨진 것을 후세 사람이 책으로 엮어 내었다고 합니다. 이 시편에 독특한 풍경과 선심(禪心)이 있어 오늘날에도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여기 인용한 구절에서도 격조 높은 정취를 느끼게 됩니다. 자기 마음은 한가을의 밝은 달이 푸른 계곡을 비추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처럼 변하기 쉬운 마음이 아니라, 그 변화 속에 깃들어 있는 본질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입니다.
한산이 말하는 내 마음(吾心)은 그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누구나 항상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심(佛心) 또는 불성(佛性), 즉 부처님의 생명으로 불리우는 실재(實在)입니다.
그러나 선자(禪者)는 부처님과 같은 신비적이고 초인격적인 말을 피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음을 상징하는 "가을 달"은 만인을 차별없이 비추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유일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어떤 계곡이나 연못에도 그림자를 나타내는 평등성은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순수한 인간성"입니다. 이 순수성이 "벽담청교결(碧潭淸皎潔-푸른 산여울에 비치는 것처럼 청결하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청결(淸潔)은 불결에 대한 청결이 아니라 불결과 청결을 포함하면서 양자를 초월한 청결입니다.
한산은 "이 마음과 비교할 수 있는 충분한 대상이 없으니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無物堪比喩 敎如何說)"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일(唯一)·절대·보편(普遍)·평등의 배반성(背反性)을 모순되지 않게 포함하는 존재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탄식을 맛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면서 이 "달(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백(李白)도 달에 대해 같은 내용의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은 옛날의 달을 보지 못한다.
오늘 보는 달은 전에 옛 사람을 비추었다.
옛사람과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보는
달은 이처럼 밝기도 하여라
또 어느 노스님은,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의 달빛이여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의 달빛이란, 상대적인 지식이 생기기 전의 절대적인 '마음'과 상통합니다.
057.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구름이 무심히 산의 바위 구멍에서 온다
이 말은 도연명(陶淵明-중국 진나라의 시인. 365-427)의 전원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들어 있습니다. 백은(白隱) 선사는 자기가 쓴 《괴안국어(槐安國語)》라는 책에 "새는 날다가 지쳐야 돌아올 줄 안다[鳥倦飛而知歸]"의 대구(對句)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위 구멍에서 구름이 나온다"는 말은 선어(禪語)로 사용할 때에는 자아에 사로잡히지 않은, 다시 말해서 아집(我執)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게 된 심경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선자는 "임운무작(任運無作)의 묘용(妙用)"이라고 합니다.
"임운(任運)"은 조금도 사심(私心)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진리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작(無作)"은 인간적인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 무심한 동작이 곧 "묘용(妙用)"입니다. 즉, 구름이 무심히 산의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雲無心以出岫]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또한 어느 시인의,
하늘을 구름이 조용히 흘러가누나
나도 이처럼 조용히 살아갈지어라
라는 시의 내용과 같은 경지입니다. 선자는 "자기를 잊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은 기억을 잊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잊는 것입니다. 무심(無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소아(小我)가 대아(大我)로 승화되어 작은 자기가 발전적으로 해소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구름이 산의 구멍을 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산시(寒山詩)의 "백운자거래(白雲自去來)"―흰 구름이 스스로 오간다―도 선자는 같은 의미의 말로 생각합니다. 흰 구름의 흰색은 모든 색깔을 잊어버린 색깔 아닌 색깔입니다. 희다는 의식을 잊어버린 무심(無心)의 색깔입니다.
"무심(無心)"은 흰 구름에 의해 잘 상징되며 흰 구름도 무심의 마음에 의해 잘 형용됩니다.
그리고 대구(對句)인 "조권비이지귀(鳥倦飛而知歸)"―새는 날다가 지쳐야 돌아올 줄 안다―에 자기를 움직이는 큰 힘이 배후에 무의식의 존재로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힘은 "지친다"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계기에 의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지치면 우리는 돌아갈 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 도연명의,
"이제 돌아가세(歸去來辭)라는 말은 지상의 집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선자는, 자기 속에서 또 하나의 자기가 "언제까지나 자기 욕구를 추구하는 방랑길을 청산하고 빨리 본심으로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라"고 이 현실의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058. 사난방견장부심(事難方見丈夫心)
-일이 어려워야 인간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다 (《虛堂錄》)
대구(對句)로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눈이 내려야 비로소 송백의 진가를 알 수 있다)"가 있습니다. 소나무나 잣나무는 따뜻한 날이나 개인 날에는 그 진가를 알 수 없으나 눈이 내리면 그 진가, 즉 강한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돋보이지 않던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면 비로소 그 역량(力量)을 발휘하게 됩니다.
눈이 오지 않는 날에, 눈을 머리에 이고 너끈히 견디는 송백의 존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풍설(風雪)이나 난관의 유무를 불구하고, 송백을 송백답게 하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그 속에 깊이 묻혀 있는 것을 알고, 또한 믿고 키워야 인재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같은 뜻을 가진 말에 "팔풍취부동천변월(八風吹不動天邊月-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지만 하늘가의 달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이 있습니다. "팔풍(八風)"이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덟 가지 장애(이득·손해·명예·수치·비난·칭찬·고통·줄거움)를 가리킵니다. 이런 것에 좌우되지 않는 송백과 같은 믿음직스러운 인재(人材)는 어느 사회나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어느 유학자의 좌우명을 애송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1. 사람의 장점을 처음부터 알려고 하지 말라. 그 사람을 써봐야 비로소 장점이 나타난다.
2. 사람은 그 장점만 취하면 된다. 단점은 알 필요가 없다.
3. 자기 마음에 맞는 사라만 쓰려고 하지 말라.
4. 작은 허물을 탓하지 말라. 다만 일을 소중히 알면 된다.
5. 사람을 쓸 때에는 일을 그에게 완전히 맡기라.
6. 위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과 재주를 겨루지 말라.
7. 인재에게는 반드시 나쁜 버릇이 있다. 그것을 각오하고 꺼리지 않는다.
8. 이렇게 하여 사람을 잘 쓰면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인물을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059. 멸각심두화자량(滅却心頭火自凉)
-마음을 조정하면 불 속도 그대로 서늘하다 (《碧巖錄》 제 43칙)
혜림사가 군사에 의해 불에 탔을 때, 쾌천(快川) 대사(1582년 입적)는 절의 누상에서, "좌선은 반드시 산이나 물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만 바로 잡으면 불소도 서늘하다"고 말하고 조용히 불 속에 몸을 던져 이 말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벽암록 제43칙·동산무한서(洞山無寒署)의 평창(評唱)을 보면 중국 6세기의 시인 두순학(杜荀鶴)의 다음과 같은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창 더울 때 오공(悟空) 선사는 문을 닫고,
한 벌의 헌 옷을 걸치고 있다.
방에는 그늘을 만들만한 소나무나 대나무 한 그루도 키우고 있지 않다.
좌선을 위해서는 조용한 산속이나 물가가 아니라도 좋다.
오공 선사처럼 몸과 마음을 교란하는 정신작용을 조정하면,
불 속 길은 더위도 괴로운 줄 모를 것이다."
고뇌를 피하기만 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자진하여 고뇌를 극복해야 합니다. 예컨대 추위나 더위를 고통과 즐거움의 어느 한쪽으로 정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쪽에 달려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눈이 쌓인 벌판에서 스키에 열중하거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운동장에서 야구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그 중의 좋은 예입니다.
추위나 더위(고뇌)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살아 있는 한 자기에게 닥치는 것입니다. 스키나 야구에 열중하는 동안에 추위나 더위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 것은 자기가 그 취위나 더위와 대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추위나 더위에 동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멸각심두(滅却心頭)"란 이와 같은 상대적인 인식(心)에 동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면 더워도 덥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은 마음이 개발됩니다.
울고 있지만 울고 있지 않는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불 속도 그대로 서늘하다(火自凉)―불 그대로, 뜨거운 그대로 서늘하다는 것입니다. 불을 차게 느낀다면 이상신경(異常神經)으로 선(禪)에는 이런 기적은 없습니다. 뜨거운 그대로, 뜨거움에 지배되지 않는, 동화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상대적인 마음이 없어지므로, "무심(無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 같은 추위와 더위도
마음이 없으면 고통도 없도다
시인의 이 노래에는 이런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060.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무슨 일에나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이 소중하다 (《金剛經》)
어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기뻐도 그 기쁨에 사로잡히지 않고, 슬퍼도 그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도 쓰여 있습니다.
"구도자는 이런 청정심(淸淨心-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소리나 향기, 맛이나 손에 만져지는 것이나 마음의 대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또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마음이 한 군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여기서 "주(住)"란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즉 집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집착은 미혹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것은 듣거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달마(達磨)의 선(禪)을 이어받은 6대 조사 혜능(慧能) 선사(713년 입적)는 중국 광동성의 시골 가난한 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글을 배울 처지가 되지 못하여 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심코 거리에서 스님이 "무슨 일에나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님으로부터 그 말이 《금강경》에 있으며 홍인(弘忍) 선사(당나라 고승 674 입적)가 이 경(經)을 강론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집을 나와 그 강론―견성성불(見性成佛)―을 듣고 싶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혼자 집에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웃에 살고 있는 친절한 사람이 노모를 돌봐 주겠다고 하여 안심하고 홍인 선사에게 가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홍인 선사가 어느 날 밤에 그를 방에 불러,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도 소용이 없고, 이 마음을 분명히 알면 부처님이 될 수 있네."하고 선법(禪法)을 전수했습니다. 그 후로 이 말을 선(禪)에서는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이 말을,
물새는 물 위를 헤엄쳐 가도 흔적이 없지만,
길은 잊지 않나니
하고 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은,
집착을 버리면 꽃은 다 내 것이어라
하고 노래했습니다.
061.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언제나 더러움을 타지 않게 닦고 훔치다
홍인(弘忍) 선사에게는 언제나 많은 제자들이 모여 선(禪)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홍인선사는 제자들에게, "누군가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려고 해. 누구라도 좋아. 자기가 깨달은 심경(心境)을 노래로 읊어봐. 선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에게 물려주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홍인의 제자들은 700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뜻 노래를 읊으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손꼽히는 제자 중에 신수(神秀:706년 입적)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도 정통하여 스승의 대리를 맡은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그가 노래를 읊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자기가 깨친 심경을 노래로 읊어, 스승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붙여 놓았습니다.
身是菩堤樹(몸은 보리수)
心如明鏡台(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다)
時時勤拂拭(언제나 부지런히 닦고 훔쳐서)
莫使惹塵埃(먼지가 끼지 않게 한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몸은 득도한 보리수와 같은 마음은 깨끗하여 맑은 거울과 같으므로 언제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닦고 훔쳐서 번뇌의 먼지와 티끌이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수는 이처럼 수행의 중요성을 4핼 20자로 노래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처럼 노력한 사람입니다. 이 수행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츄타판타카는 형과 함께 석존의 제자입니다. 형은 대단히 총명했는데 동생은 매우 어리석었기 때문에 "바보"라고 불리워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교단에서 추방되었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석존으로부터 "먼지와 티끌을 닦고 훔치라"는 가르침을 받고,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을 철저히 실행하여 오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도구를 가지고 청소한 것이 아니라, 청소 자체가 되어 여기에 동화하여 비로소 가능했던 것입니다. 눈썹에 붙은 하나의 먼지를 터는 것이 자기 마음 속의 먼지를 터는 일입니다. 흐트러진 신발을 정돈하는 것이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도가(道歌)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쓸면 또 다시 쌓이는 뜰 안의 낙엽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라
아무리 정교한 청소 도구를 사용해도 먼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환경도 사람의 마음도 영원히 계속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원히 청소를 계속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더러움과 영원한 청소가 대결하여 비로소 청정(淸淨)의 경지가 개발되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이와 같은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기에 신수의 선풍(禪風)이 있는 것입니다.
062.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다 (《六祖壇經》)
앞에서 인용한 신수의 노래를 들은 홍인 선사의 제자들은 저마다 그를 찬양했습니다. 사실 홍인 선사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전해들은 혜능(慧能)은,
"신수의 노래는 진실을 표현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비평했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이 선심(禪心)을 알 리가 없다고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날 밤에, 자기의 심경을 다른 사람에게 노래로 쓰게 하여 신수의 노래 옆에 붙였습니다.
菩提本無樹(보리수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台(밝은 거울도 있을 수 없다)
本來無一物(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何處惹塵埃(어디서 먼지를 닦겠는가)
좀 더 자세히 풀이하면, "보리수라는 나무도 없고,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없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먼지가 묻을 데도 없으니 털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홍인 선사의 문하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선의 절대성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홍인 선사는 이것을 보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홍인의 정통적인 선법(禪法)이 혜능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후에 혜능의 선풍(禪風)이 남방(南方)에서 성하였으므로 "남종선(南宗禪)"이라고 부르고, 신수의 선풍이 북방에서 성하였으므로 "북종선(北宗禪)"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도가(道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종선은 수행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점오(漸悟)"라고 부르고, 혜능의 남종선을 "돈오(頓悟)"라고 부릅니다. 수행을 쌓고 나서 다시 하나의 비약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수와 혜능은 홍인 선사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선(禪) 자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의 필요를 두 사람 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대응시키고, 미망과 오도를 적대시하고, 먼지와 불식을 구별하는 상대적인 인식을 보다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라고 부정(否定)한 것입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간성의 원점(原點)에서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실감은 더욱 깊어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려면 실제로는 차곡차곡 수행하는 신수(神秀)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정점에서 다시 비약하여 혜능(慧能)의 선심(禪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선자는 수행하고 있습니다.
063. 주인공(主人公)
-(《無門關》제12칙)
중국 서강성 서암사의 서암언(瑞巖彦) 스님(850-910)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덕산 스님의 법손이고 당나라의 선승(禪僧)으로 알려진 암두(巖頭) 선사(887년 입적)의 제자였다는 것과 다음의 일화가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 서암언은 바위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다만 말없이 앉아 있거나 혹은 마음 속으로서의 명제(命題)를 묵상하는 것이 상례이며,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암언은 미친 사람처럼 매일 밥 먹고 앉으나 서나 스스로 크게 소리내어 혼잣말처럼 "주인공"하고 부르고는 제 자신이 스스로 "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
"네."
"앞으로도 속지 말어."
"네."
하고 일련의 자문자답(自問自答)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무문(無門) 선사가 보다 높은 차원의 선의 심경에서 놀리는 듯한 말로, 사실은 감탄하여 말합니다.
"서암사의 할아범이 혼자서 장사를 하고 있네. 주인공이라고 부르는 한 사람과 여기 대답하는 한 사람,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한 사람과 여기 대답하는 한 사람……"
인간은 누구나 이 A, B 두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A는 상식적으로 말하는, 따라서 설명이 필요치 않는 자기로, 이것을 "일상적 자아(日常的自我)"라고 합니다.
B는 A에게 말을 거는 자기로, 이것을 "본질적인 자기"라고 합니다.
A는 외재적(外在的) 존재로 A속에 깊이 묻혀 있으므로 밖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요컨대 A와 B의 "동행이인(同行二人)"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길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가 많을수록 그 인품이 풍요로워지고, 대화가 적을수록 인품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A와 B는 때로는 나란히 걸어가고 때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갑니다.
이 A와 B가 겹쳐서 마치 같은 사람처럼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인공"하고 부르는 A와 "네"하고 대답하는 B가 하나로 융합되면 "주인공"이라는 물음이 그대로 "네"라는 대답이 됩니다.
즉 양자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주인공이 제대로 주인공의 구실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064.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
-무사함이 귀인이니라 (《臨濟錄》)
"일 없는 것이 곧 이 귀한 사람이니라. 다만 조작(造作)하지 말라."하고 임제 선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사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변함이 없는 것, 건강한 것, 평온한 것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나 선에서 말하는 "무사하다"는 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나 도(道)나 구원을 다른 데서 찾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임제 선사의 말을 빌면, "구심(求心)이 없는 것이 무사(無事)"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속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순수한 인간성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이론이 아니라, 실감하는 상태가 "무사"이며, 그런 사람이 "무사한 사람"입니다. 선은 부처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만나도록 힘쓰라고 가르칩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프란클이 인간의 심층의식(深層意識)을 탐구한 결과 종교적 무의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또 한 사람의 자기"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 안에 이 귀한 자기를 감춰 놓고 있으므로, 부처님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무사함" 자체입니다.
선에서는 이 "또 한 사람의 자기", 즉 "종교적인 무의식"을 "본래의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본래의 인간"을 만나야 귀인입니다. 귀인이란 "존귀한 사람"으로 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임제 선사는 "부처님"이라는 기성 개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싫어하여 대개 "사람(人)"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부처님은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귀히 여기는 것이 선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란 "무위진인(無位眞人-부처님은 어디나 있다)"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임제 선사의 "일 없는 것이 곧 이 귀한 사람이니라. 조작하지 말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손질을 하여 가공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065. 일무위진인(一無位眞人)
-부처님은 어디나 있다(《臨濟錄》)
어느 날 임제 선사가 설법을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에 어디나 한 지위없는 참사람(부처님)이 있다. 그는 너희 전시에서 출입하고 있나니 그를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은 빨리 보아라."
"무위(無位)"는 위치나 계급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공간적인 좌표의 부정으로 "어디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좌표도 부정하여 "언제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일(一)"입니다. "진인(眞人)은 참사람(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임제 선사는 부처님이라는 말을 신비스럽게 여기는 것을 배격하여 "진인(眞人)" 또는 단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의 육체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참된 인간성이 언제나 존재하며, 너희 전신에서 드나들고 있다. 아직 만나지 못했으면 빨리 만나 보라."
어느 철학자가 "선(禪)이란 보는 것이다"하고 말한 것은 임제 선사의 말과 상통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자기를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속의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려면,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들여다보는 자기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보는 자기와 자기 속의 한 사람의 자기가 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임제 선사는 제자들에게 큰 소리로, "언제 어디서나 자기 속에 잠들어 있는 또 한 사람의 자기를 깨달아야 한다." 하고 부처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을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것은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자기 안에 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늘 위의 신을 경배할 수 있겠는가"―이것은 자기 안에 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늘 위의 신을 인정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임제 선사의 말은 괴테의 말과 대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어디나 그리고 언제나 있는 부처님은 우리들의 털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의 존재는 감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경험을 초월하면서도 감각적인 경험에서 떠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경험(좌선)을 필요로 합니다.
066. 몽(夢)
-꿈(도원선사)
꿈은 상식적으로는 잠을 잘 때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착각이나 환각에 의한 시각의 심리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불교의 경론(經論)에서는 "꿈이란 잠을 잘 때에 정신과 그 작용이 대상에 따라 생기며, 잠에서 깬 후에도 기억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동시에 "꿈에도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현실계의 현상(現象)은 꿈과 같이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고도 말합니다.
선자는 한 걸음 나아가서 무상(無常)과 상주(常主-무상의 반대. 존재의 불변함)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꿈을 논하여 왔습니다.
선자(禪者)가 말하는 꿈은, 구애되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심경이나 동작을 뜻합니다. 꿈에 실체(實體)가 없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이 모두 실상(實相)이 아니다라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이 꿈입니다.
선에서는 오도에서 떠나지 않고 오도를 잊은 자유, 잊어야 하는 것은 잊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꿈으로 상징합니다.
꿈을 꾸려고도 하지 않고, 꾸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꿈이지만, 선(禪)에서는 자기의 의도를 잊어버린 무심한 상태를 꿈이라고 말합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꿈이지만, 선에서는 이 꿈에서 깨어나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평범한 결론을 내립니다.
도원선사는 "꿈속에서 꿈을 논하는 것이 부처님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시 노래로,
인생은 모두 거짓, 백발이 되도록 한낱 꿈이어라
하고 읊고 있습니다.
067. 시역몽비역몽(是亦夢非亦夢)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꿈,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꿈
택암(擇庵) 선사(1645년 입적)는 임종을 맞아, 제자들이 마지막 도가(偈)를 부탁받고 <몽(夢)>이라고 크게 한 글자를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시역몽비역몽(是亦夢非亦夢)"이라고 쓴 다음 73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시역몽비역몽(是亦夢非亦夢)"은 옳고 그른 상대적인 지식이나 판단의 집착에서 벗어나 오도나 학식이나 지위등을 잊어버린 경지를 뜻합니다.
선사는 인생 행로를 꿈으로 상징하고 꿈에 대해 설법했습니다.
전란에 시달리던 한 장군이 선사에게,
"싸우지 않고도 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은 꿈입니다. 꿈속에 있기 때문에, 꿈을 꿈인 줄 모르고, 이 세상을 진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싸우는 것도 꿈속에서의 싸움으로, 꿈을 깨면 상대방은 없습니다.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입니다. 그걸 알지 못하고 이겼다고 해서 기뻐하고, 패했다고 해서 슬퍼합니다. 자기와 남이 대립하여 꿈속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다만 이겼다고 기뻐하지 않고, 패했다고 슬퍼하지 말고, 꿈속에서의 싸움을 그만두고 승패가 없는 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택암선사는 《꿈의 노래 100편》을 남겼습니다. 그 중 "물새"라는 제목의 시를 아래에 옮깁니다.
꿈과 같은 한 세상을 꿈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더러
꿈을 깨라고 물새는 밤에 저리 우는구나
그리고 도원선사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케 하는 꿈에서 깨어날지니
이 노래는 꿈과 같은 인생에서 꿈을 실감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은 또한 서행(西行) 선사의,
바람이 불어와 꽃을 떨어뜨린다는 꿈은 깨어나도 여전히 가슴 설레인다
와 상통됩니다. 《나에게는 생(生)이 있다》의 작가 에른스트 톨러의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말을 무척 좋아했던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톨러는 후에 자살을 했습니다.
그를 좋아했던 소설가는 그 소식을 병상에서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 "나는 사는 것이 역작(力作)이야"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을 꿈으로 실감하고 구김살 없이 사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068. 미풍취유송 근청성유호(微風吹幽松 近聽聲愈好)
-미풍이 소나무에 불어와 가까이서 들으면 그 소리가 더욱 좋다 (《寒山詩》)
이 구절 앞에 "욕득안신처 한산가장보(欲得安身處 寒山可長保)"―마음이 평안한 곳을 찾으려면 영원히 한산이 제일일 것이다―의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풀이하면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고 하면 이곳 한산이야말로 영원히 으뜸일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한산(寒山)"은 지명(地名)인 동시에 인명(人名)이며,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순수한 마음을 응시하여 개발해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풍취유송 근청성유호(微風吹幽松 近聽聲愈好)"가 이어집니다.
산이라면 조용하고 나무 그늘도 있어서 서늘한 곳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이런 좋은 입지조건도 "한(寒)"이라는 글자로 부정하여 "한산(寒山)"으로서 상대적인 지식을 비웁니다. 그것이 "微風취유송)"입니다. "유(幽)"는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감각(五官)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소나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 일련의 시(詩)는 <한산시(寒山詩)>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며, 이 말에는 언어나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하여 옛날부터 선자들이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소나무에 미풍이 불어와 가까이서 들을수록 더욱 아름답게 들린다"는 것은 자기와 소나무와 미풍이 하나로 융화된 경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듣는 자와 들리는 자와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고 하여도 소나무는 소나무이고 자기는 자기입니다. 소나무와 자기는 동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거나 반발하지 않는 세계를 동양인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自我)를 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다 비운 것이 "유(幽)"입니다.
여기에는 다시 다음 구절이 이어집니다.
"하유반백인 남남독황노 십년귀불득 망각래시도(下有斑白人 남남讀黃老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그늘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소리내어 경전을 읽고 있다. 벌써 10년이나 돌아가지 않고 있으나 온 길도 잊어버렸다.
그는 마음의 고향인 "한산(寒山)"에 머물러서 계속해서 도를 깨치고 있었으므로, 그 득도마저도 잊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무집착(無執着)의 의식(意識)을 비운(空)것이 "망각래시도(忘却來時道-온 길을 잊어 버렸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순수 의지(意志)입니다.
069. 백운포유석(白雲抱幽石)
-흰구름이 바위를 안고 있다 (《寒山詩》)
이 시구만 읽어도 맑고 깨끗한 산의 정기(精氣)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백운포유석(白雲抱幽石)"은 중국 진나라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의 시에 나오는 구절인데, 한산이 자기 시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흰 구름이 이끼 낀 바위를 안고 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의 경관입니다. 정숙한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구절로써, 선자가 즐겨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상의 시끄러움을 떠난 산 속의 한적한 풍경뿐만 아니라, 시인 바교(芭蕉: 1644-1694)가 말하는 풍아(風雅)와도 상통합니다.
이 이끼 낀 바위는 완고한 인간의 마음을 상기하게 되며 그것을 안고 있는 흰 구름에 따스한 자비를 느낍니다. 또 다음의 서정시를 상기하게 됩니다.
긴 눈썹이 조용히 은빛의 작은 상자를 안고 있다
그 상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고뇌"라는 글자 하나가 들어 있을 뿐이다
여기 긴 눈썹이 흰 구름(白雲)이라면 은빛의 작은 상자는 유석(幽石)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幽)"에는 "숨긴다·숨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돌 속에 불(火)이 있으나 치지 않으면 발화되지 않는다. 마음 속에 불성(佛性)이 있으나 수행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는 옛글과 마찬가지로, 큰 가치가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유(幽)"입니다.
"구름은 바위가 토해 내는 입김이다"는 말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는 말입니다. 고뇌하는 인간이 토해 내는 입김이 구름이 된다면, 그 구름은 이윽고 한데 뭉쳐서 비가 되어 바위를 적시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이끼가 끼는 것은 오랜 바위뿐이 아닙니다. 인간도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마음이 더러워져서 본래의 아름다운 것·참된 것이 숨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숨겨져 있을 뿐이며,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순수한 인간성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070. 간각하(看脚下)
-발치를 잘 보라(佛果園悟)
어느 날 밤에 오조(五祖) 법연(法演) 선사가 세 사람의 제자와 함께 절에 돌아오는 도중에 바람이 불어와 손에 들고 있던 초롱불이 꺼졌습니다. 그러자 법연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두운 밤에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도 초롱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불이 지금 꺼졌으니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은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길을 가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팡이나 기둥으로 생각하여 의지하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의 심경을 물은 것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인생을 음미했습니다.
시인 바쇼(芭蕉)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구나
이 쓸쓸한 늦가을에
하고 읊었으며, 편조(遍照) 선사가,
내가 묵은 여인숙은 길까지 황폐했구나
무정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에
하고 읊은 것이 그 한 예입니다.
법연선사의 세 제자는 각각 자기의 의견을 말했는데 그 중에서 불과원오(佛果園悟-벽암록의 완성자)의 "발치를 잘 보라(看脚下)"는 말이, 스승 법연선사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간각하(看脚下)―그것은 평범한 말입니다. 초롱불이 꺼지면 발치를 잘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선도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도 자기를 똑바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풍요로운 일상생활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같은 말에 "조고각하(照顧脚下)"가 있습니다. 발치를 잘 비추라는 뜻입니다.
선사(禪寺)의 현관에는 흔히 "간각하(看脚下)"니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써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을 현실 생활에 응용하여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불도(佛道)는 발치에 있는 것부터 깨닫게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단속입니다.
설사 손에 든 초롱불은 꺼져도 마음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자기 안을 비추는 초롱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초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 어두운 밤을 두려워 말고 오직 초롱불 하나를 의지하라"고 한 어느 유학자는 말했습니다.
선은 자기 안에 초롱불을 갖는 것입니다. 추악한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 불을 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인간의 생명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라는 가르칩니다.
"석존께서 최후로 하신 설법이 무엇입니까?"하는 물음에 "의뢰심을 버리라는 것이었지"하고 대답하는 것도, 자기 속의 빛을 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07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 (《碧巖錄》 제6칙)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말은 벽암록 제 6칙에 있는 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백은(白隱) 선사도 대단히 중요시한 말로, 이것은 흔히 말하는 "날마다가 길일(吉日)"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일진(日辰)이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날씨나 계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떠나 환경 속에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개인 날에는 개인 것을 사랑하고, 비오는 날에는 비를 사랑한다. 즐거움이 있으면 즐기고, 즐거움이 없어도 즐긴다"는 어느 작가의 말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과 가까운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시선(唐詩選)》을 보면 "화발다풍우(花發多風雨) 인생별리족(人生別離足)"―꽃이 피니 비바람이 많고, 인생에는 이별의 슬픔이 많다―이라는 시가 들어 있습니다. 천무릉(千武陵)이라는 시인의 권주가(勸酒歌)의 한 구절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슬픔을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탄에 투철해지면 "그렇다, 그것이 진실이다"하고, 허망하면 허망할수록, 무상(無常)하면 무상할수록 꽃도 아름답고 인생도 귀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또한 선(禪)을 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천종단(千宗旦)은 시인 이휴(利休)의 손자입니다. 그는 깨끗하고 조용한 다실(茶室)을 지었으므로, 이름을 짓기 위해서 전부터 사사하던 청암(淸巖) 선사를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는 집을 비워야 하는 것을 사과하고 내일 뵙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제자에게 써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볼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집을 비운 동안에 찾아온 청암선사가 놓고 간 쪽지가 있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해태비구(解怠比丘) 불기명일(不期明日)"―게으른 중아,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이라는 단지 여덟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읽고 천종단은 곧 내덕사로 청암선사를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죄하는 뜻에서,
오늘 오늘하고 그 날을 살아갈지어다
내일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나니
하고 읊었습니다. 이런 일로 하여 다실(茶室)의 이름을 《금일암(今日巖)》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오늘이라는 지금뿐입니다. 우리는 이 오늘 하루를 소중히 알고 힘껏 살아가야 합니다.
072. 배려(配慮)
-마음을 쓴다(山本玄峯)
용택사의 산본현봉(山本玄峯) 스님(1961년 입적)은 근대 고승(高僧)의 한 사람입니다. 일화가 많은 선승(禪僧)으로 인생의 진수를 꿰뚫는 많은 말을 남겼습니다.
"심려는 하지 말라, 그러나 배려는 많이 하라."
심려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므로 무익한 일이지만, 배려는 마음을 쓰는 것이므로 유익한 말입니다.
선사는, "남에게는 친절히 대하고 자기에게는 차갑게 대하라"고도 말했습니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대하고 자기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대하라"는 어느 유학자의 말과도 비슷합니다.
진리에 접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마음을 세심하게 써야 합니다. 상심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소설가가 만년에 암 수술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병실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는 중에 소년이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도 뭔가를 남에게 배달하는 심정으로 오늘까지 살아왔으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뭔가를 배달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인데
이 소년처럼 열심히
나는 무엇을 배달하고 있을까
그는 절망의 병상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실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영자에게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관계는 원활하지 못하다. 우리 회장은 몸도 건강하고 통이 크지만, 여성적인 세심한 배려를 하는 사람이다.
내가 큰딸을 출가시킬 때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어느 날 밤에 회장이 일부러 나의 집에 찾아와서 '결혼 비용으로 쓰게'하고 신문지에 돈을 싸서 넘겨주었다. 아내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경영이라는 냉엄한 비즈니스 속에 이런 따스한 마음이 경영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급료를 지불하거나 복지시설을 훌륭히 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인간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갖고 있는 감정의 동물이다. 그 집단을 결합하여 이끌어 가려면 역시 인간적인 애정이 경영 속에 넘쳐 있어야 한다."
073. 청풍잡지유하극(淸風잡地有何極)
-어디서나 청풍이 거침없이 불어온다 (《碧巖錄》제1칙)
"잡"자는 잡의 속자로, 돌고 돈다는 뜻이며, "잡지"는 지구상 어디에나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풍은 어디서나 불어오므로, 특별히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하극(有何極)"은 한정(限定)도 차별(差別)도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의 집에나 평등하게 불어오고 있습니다. 진리는 아낌없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져 슬퍼할 때가 적지 않지만, 구도(求道)하는 마음의 눈만 있으면 언제나 진리의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원통해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멀리 느껴집니다.
예컨대 당신이 어느 거리에 살고 있다면 자기 집에서 50미터 정도라도 좋습니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의 종류를 말해 보십시오. O상점 다음 X상점, 그 옆은 △상점 하는 식으로―.
날마다 오가는 길이라도 일일이 헤아리기가 힘들 것입니다. 상점은 주의를 끌기 쉽도록 간판이 걸려 있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시각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점포는 바로 "잡지"와 같아서 거리의 어디서나 자기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담배 가게의 작은 간판이 눈에 잘 뜨입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국수집 간판이 곧 시선을 끕니다.
진리도 이 간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디나 무한(無限)히 무차별로 널려 있어 뭇사람들의 눈과 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로막는 원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자아의 인식―강한 자아(自我)가 그것입니다. 그런 건 알고도 남아, 아니 바빠서 거들떠볼 사이가 없어, 하는 거만한 아집(我執)이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극락(極樂)은 무한한 저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거리가 아니라, 아집의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무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이기도 합니다.
자아의 인식을 불식하면 최단거리가 됩니다. 이 최단거리에 부처님의 마음, 순수한 인간성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청풍이 불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에 티끌이 없는 것이 "청풍잡지유하극(淸風잡地有何極)"입니다.
074.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열반묘심(涅槃妙心)은 석존께서 제가 가섭(迦葉)에게 선을 전할 때 하신 말씀의 하나입니다. "열반(涅槃)"은 번뇌의 불길이 꺼진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열반 그대로가 득도로 이어집니다. 깨달은 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묘심(妙心)"이라고 합니다. "열반"의 경지가 그대로 "묘심"인 것입니다.
석존께서는 이 마음을 가섭 존자에게 전수하셨습니다. 그러나 몰래 전수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은 마음은 본래 가섭 존자의 마음 속에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섭 존자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파문을 일으켜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그대로 전수가 됩니다.
이것을 석종(釋宗) 선사(1919년 입적)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면
우는 새(鳥)도 되고 피는 꽃(花)도 되는구나
하고 읊었습니다. 형태가 없는 마음이 전해져서 꽃이나 새에게도 전수되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에는 또한 평등(平等)과 보편(普遍)의 의미도 있습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현재·미래·언제·어디에나 충만한 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열반묘심(涅槃妙心)"에 대해,
언제나 내(我) 고향의 꽃이 아닌 것이 없어라
예전 그대로 봄(春)을 보내노니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라는 말은 일할 때나 잠잘 때나, 선한 일을 할 때나 악한 일을 할 때나 한결같다는 뜻입니다. 선악(善惡)과 옳고 그름을 떠난 그 이전의 본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고향은 마음의 근원지를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여도 선에 집착하지 않고 악을 행하여도 악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므로 "예전 그대로 봄을 맞이하고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075. 정법안장(正法眼藏)
-올바른 부처님의 가르침(釋尊)
《무문관(無門關)》의 제6칙에 "염화미소(拈華微笑)"(禪語 50)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석존께서는 청중의 한 사람이 주는 꽃을 손에 들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이 도리를 가섭(迦葉)에게 전(傳)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올바른 불법(佛法)의 다른 호칭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지혜의 눈으로 비춥니다. 그리고 올바른 불법은 일체(一切)를 포함하고 수장(收藏)하고 있으므로 "장(藏)"이라고 합니다.
영봉(靈鳳) 선사는 "정(正)"은 정사(正邪)나 선악을 초월한 불편 부당한 부처님의 마음이고, "법(法)"은 이 부처님의 마음에 갖춰진 근원적인 진리이고, "안(眼)"은 이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장(藏)"은 부처님의 마음에는 모든 선한 불법(佛法)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말을 일찍이 사용한 것은 임제(臨濟) 선사입니다. 선사는 임종을 맞아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석목흥도(澤木興道) 선사(1965년 입적)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모든 불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원선사는 이 "정법안장"을 제목으로 하여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가라앉아 버린
조각배의 고요한 달밤이여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풍파가 사라져버린 조각배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은 그대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이 무심(無心)한 배를 비추는 달도 무심합니다. 버린 조각배이므로 그 안에는 사람도 없고 물건도 없습니다. 다만 달빛만 가득할 뿐입니다. 즉 배는 달빛으로 만선(滿船)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법안장"의 참된 모습입니다.
제4장 지혜(知慧)- 見性成佛
견성성불(見性成佛)―우리는 앞에서 이미 "불립문자(不立文字)"는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나타나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은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달마 선사가 말한 이 네 가지 구절은 각각 독립돈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상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직지(直指)된, 즉 곧바로 본 마음이야말로 본래 우리들의 가슴 깊이 묻혀있던 순수한 인간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선사는,
"모든 경(經)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좌선(坐禪)은 곧 부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므로 경전과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이나 사상에 사로잡히면 인식의 자유를 잃고, 자기 안에 부처님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이 자기의 존귀함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 쐐기를 박은 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네 글자입니다. "견성(見性)"이란 자기의 본성을 보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자기가 참된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참된 자기를 되찾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성불(成佛), 즉 부처님이 된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이란 참된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불(成佛)"이란,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순수한 인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수한 인간성이 본래의 인간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성(見性)"의 "성(性)"은 달마선사가 보여주는 마음입니다. 어느 불교학자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달마선사가 '마음'이라고 말한 것을 혜능(慧能) 선사는 '견성(見性)'이라고 말했다. 견성이란 '성(性)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견즉성(見卽性)이다. 마음을 보고 있는 것이야말로 마음이 아닌가. 좌선을 하며 자기 마음을 조정하기 위해 호흡의 수를 세는데(數息觀), 이것을 세는 것은 누구인가. 이 주체를 임제 선사는 '사람(人)'이라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단지 감정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로 포함한 절대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그 불교학자는 "마음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어느 철학자가 "선(禪)"이라 보는 것이다"라는 "보는 사람"과도 상통됩니다.
"본다"는 동사를 표시하는 많은 한문자 중에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견(見)"이라는 글자입니다. 이 글자에는 본다·만나다·안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입니다.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맛을 본다"·"만나 본다"고 말할 경우에는 "안다"와 같은 뜻의 말이며, "생각해 본다"고 말할 때에는 "생각하는 것"과 통합니다. 이리하여 "견(見)"은 "관(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관법(觀法-마음으로 진리를 보고 생각한다)"이나 "지관(止觀-마음을 바로잡아 올바른 지혜를 얻는다)"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관(觀)"에는 분명히 본다·관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배한다는 어감(語感)도 들어 있습니다. "관음(觀音)"은 본래는 빛을 경배한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불성(佛性)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선(禪)에서는 독경(讀經)을 "간경(看經)"이라고 합니다. "간(看)"은 간호(看護)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본다는 뜻입니다. "간각하(看脚下)"(禪語 70)는 자기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좀더 부연하여 말하면 자기 속에서, 그때까지는 깨닫지 못한 채, 숨어 있던 부처님의 생명이 점화되어 참된 자기가 환희 비춰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비춰지면 다른 사람의 발치를 비추어 추한 마음의 밑바닥에 꺼져 있는 촛불에 점화해야 참된 조고(照顧)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깨우치고 남도 깨우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傳)"은 "각(覺)"에 통합니다. "각(覺)"에는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깨닫게 하는 것은 예절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기억하기만 해서는 잊어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깨달아야 잊어버리지 않는 예절이 몸에 배게 됩니다. 그리고 예절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의 발달에 따라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은 만물에게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각종 공해(公害)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공해란 자아(自我)를 멋대로 작동시켜, 두려움을 모르는 공허한 마음이 쌓인 결과입니다. 정치적·사회적인 대처 방법과 함께 각자가 자기를 똑바로 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076.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신을 빛으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빛으로 삼으라 (釋尊)
어떤 외국 철학자가 불교 학자에게 "석존께서 임종 때 하신 마지막 설법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불교 학자는 거침없이,
"의뢰심을 버리라는 것이었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 학자의 도그마는 아닙니다.
석존께서는 80세에 병으로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언제나 석존의 곁에서 돌보고 있던 조카이자 제자이기도 한 아난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스승께서 돌아가시면 저는 앞으로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석존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빛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빛으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라. 이 밖의 어떤 것도 의지해서는 아니 된다."
그 불교 학자의 대답은 이 가르침에 의한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빛을 실감할 수 있게 되면 밖에서 우리를 비추는 빛이 있는 것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체내와 체외(體外)의 구별은 있어도 이 구별에 구애를 받지 않고 비추기 때문에 무애광(無碍光)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영원한 등불입니다. 무애광의 표상(表象)이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불은 계수(計數)를 초월한 무한을 의미합니다.
이 무애광을 빨리 깨닫게 하기 위해 "자신을 빛으로 삼으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빛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등불 하나를 들고 어두운 밤길을 간다. 어두운 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등불 하나를 의지하라"고 어느 유학자는 말했습니다. 또 어느 시인은,
빛은 소리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빛은 소리내어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
빛은 빛으로 사람을 부른다
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빛이 빛으로 사람을 부르기 때문에 어디나 빛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것이 "무애광"입니다. 선자(禪者)는 좌선을 하여 이 빛을 물과 마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077. 등하불절조(燈下不截爪)
-등불 아래서 손톱을 깍지 않는다 (白隱禪師)
"등불 아래서 손톱을 깍지 말라"는 말은 지금은 사라진 말이 되었으나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로부터 자주 들었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을 미신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유연한 마음이 생기면 언뜻 보아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말속에 진주가 묻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옛날처럼 어두운 등불 아래서 손톱을 깎으면 손가락을 벨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서민의 말을 선자가 선(禪)을 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인용하는 데에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상식적인 설명에 그치려고 합니다.
어두운 등불 아래서 손톱을 깎는 것은 자기 가위로 자기에게 상처를 내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설픈 지식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조명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조명이란 지혜(知慧)입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서 밝게 빛나는 빛을 깨닫게 되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비출 수 있습니다.
상처를 입기는커녕 자기와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등불 아래서 손톱을 깍지 말라―에서 출발하여 손톱을 깎아도 상하지 않고 자기와 남을 비추는 부처님의 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자는 지식을 관념적으로 배우는 것을 흙으로 떡을 만들어 소꿉장난을 하는 어린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다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처님의 지혜이며, 관념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은 부처님의 지혜를 깨치는 데 방해가 됩니다.
078. 대사저인(大死底人)
-상대적인 지식을 버린 사람 (《碧巖錄》 제41칙)
여기서 말하는 대사(大死)는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대적인 지식을 비워 인간적인 사색을 하지 않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기회가 있을 적마다 보고 듣고 배워서 얻은 후천적인 모든 지식을 토해 내고 죽은 사람처럼 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를 망각하고 무아(無我)가 된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무아(無我)도 다시 부정하여 부정(否定)의 부정을 하는 것을 선자(禪者)는 "대활(大活)"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말에 "대사일번(大死一番) 대활현성(大活現成)"이 있습니다. "대사(大死)"는 지식을 부정하고 "대활(大活)"은 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선(禪)을 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세계, 어느 사회에서나, 참되려면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관문입니다. 백은(白隱) 선사는,
"일단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무사(武士)는 싸움이 일어나면 도망칠 궁리부터 먼저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서(禪書)에 "상대적인 지식을 버린 사람은 오히려 활기에 넘쳐 있다"고 하였습니다. 버릴 것을 다 버리고 나면 버리는 것 자체가 얻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 버릴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가보(家寶)가 됩니다.
기성(碁聖) 사카다 에이단(坂田榮男)은 "대사일번(大死一番)"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한 수 한 수를 소중히 두고, 후에 손쓸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기를 맞으면 '대사일번'의 심경으로 돌아간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선자가 말하는 대사(大死)와는 다르지만, 재미있는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일편(一遍) 선사(1289년 입적)는 출가했을 무렵에,
몸을 버린 자는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은 자가 버리는구나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도가(道歌)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대사(大死)입니다.
079. 심수만경전 전처실능유(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마음은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 변하며, 변하는 것이 참으로 유현하다 (《景德傳道錄》3)
心隨萬境轉(마음은 만 가지 모습에 따라 느끼고)
轉處實能幽(그 느끼는 것은 참으로 유현하다)
隨流認得性(흐름(번뇌)에 따라 근원을 알게 되면)
無喜亦無憂(기쁨도 없고 걱정도 없다)
이것은 석존의 22대 후손인 인도의 고승 마누라의 도가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느낌이 정지되면 마음의 본성은 상실됩니다. 물의 본성은 흐르는 데 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한 군데 정체되면 썩어버립니다.
마음에는 모습이나 형체가 없습니다. 다만 감수작용(感受作用)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느끼는 데에 마음이 존재합니다.
"흐름에 따라[隨流]"의 흐름은 번뇌(煩惱-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정신작용)의 별명(別名)입니다. 이 흐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욕심과 무명(無明-진리에 어두운 것)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幽)"는 유현(幽玄)하고 미묘하여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禪語60)과 상통합니다.
바위도 있고 나무 뿌리도 있는데
물은 흐르고 또 흐르는구나
라고 어느 시인이 읊었듯이, 이 물이 무심(無心)히 흐르는 것이 "유(幽)"의 본체입니다.
무심히 만 가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그 아름다움과 추함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흐르는 데에 물의 유현하고 미묘한 맛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의 여러 가지 모습을 감수할 뿐,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선(禪)에서 말하는 득도의 무심의 경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번뇌의 근원을 분명히 알게 되면, 기쁠 때에는 기뻐하고 슬플 때에는 슬퍼하면서 조용히 흘려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심경에 유의하여 "흐름에 따르되 흐름에 맡기지 않는다"는 말을 음미해 볼 일입니다.
시간의 흐름의 본성을 알고, 시류(時流)에 몸을 내맡겨 마냥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면서 흘러가지 않는 "유(幽)"를 파악하는 지혜가 특히 오늘날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080. 잔심(殘心)
-대웅
잔심(殘心)이라는 말의 출처는 분명치 않으나 지금은 다도(茶道)나 검도, 궁도(弓道)에서 흔히 쓰는 말입니다. 그것은 미련이나 아쉬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궁도에서는 활을 쏜 다음의 반응에 대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검도에서는 일격을 가한 후에 상대방의 반격에 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야구 경기를 보았는데, 투수가 공을 던지자 곧 들어올린 다리를 땅에 내리고 몸을 똑바로 하여 타자가 치는 공에 대비하는 자세를 보고, 투수에게도 잔심(殘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도(茶道)에서는 차를 마시고 난 후에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일생에 다시 오지 않는 날임을 생각하고 혼자 차를 마신다. 주위는 쓸쓸하여 말상대로는 오직 차주전자 하나뿐이다. 스스로 깨달음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여기에 선과 다도의 상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혼자 차를 마시는 자기도 승화되어 차주전자가 되어 버리는 잔심(殘心)의 경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받아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지혜의 작용이 중요합니다.
다도(茶道)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소구(紹鷗)는 다도에서 "차 그릇을 만졌다가 놓을 때에는 그리운 사람과 이별하는 심정으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잔심(殘心)을 행동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선자는 이런 행동을 "면밀(綿密-세심한 행동)"이라 하여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죽을 때 부모는 자식의 일을 걱정하고, 스승은 제자의 일을 염려합니다. 이런 염원(念願)이 승화되었기 때문에, 자식이나 제자에 해당되는 우리가 지금 여기 제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잔심(殘心)"의 밑바닥에 부처님의 소원이 깃들어 있는 것은, 스스로 깨닫는 지혜가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산 속 깊숙이 묻혀 살면서 백은선사를 키운 쇼쥬(正受) 노인은 백은을 여행길에 떠나보낼 때,
만남이 곧 이별이어니 그림자처럼 따르는 우정
이라고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몸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우정이란 "잔심"을 말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까지나 깊숙이 남아 있는 것은, 인간적인 애정이 아니라, 지혜에서 오는 애정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작별하는 두 사람의 벗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선자(禪者)가 말하는 "잔심"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081. 신부기노아가견(新婦騎驢阿家牽)
-신부가 당나귀를 타고 시어머니가 고삐를 끈다
수산(首山) 선사(993년 입적)는 중국 송나라 때의 선(禪)의 고승입니다. 언제나 《법화경(法華經)》을 읽고 있었으므로 "염법화(念法華)"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이 수산선사에게 어느 날 한 수행승이 찾아와서 "부처님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즉 부처님의 정의(定意)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 수행승은 자기의 질문에 대해 수산선사가 어려운 학문적인, 혹은 철학적인 설명을 할 줄 알았는데,
"신부가 당나귀를 타고 시어머니가 고삐를 끈다"고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가(阿家)"란 신부가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신부를 당나귀에 태우고 시어머니가 고삐를 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님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며,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무심한 상태입니다. 이 무심(無心)이 곧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때로는 두 사람이 교대하여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당나귀에 올라타고 며느리가 고삐를 끌 것입니다. 당나귀가 지쳐 있다고 생각되면 두 사람 모두 걸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자비도 부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신부가 당나귀를 타고 시어머니가 고삐를 끈다"는 대답을 무심히 읽지 않으면 부처님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사랑이다, 자유다, 민주주의다 하고 이론적으로 정의를 내리면, 그 속에는 부처님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말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멍청한 사람들이군, 누가 타고 갈 것이지"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과연 그렇구나 하고 아버지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고삐를 끌었습니다. 한참 길을 갔는데 마주친 어떤 행인이 "아들이 가엾다"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말을 타고 아버지가 고삐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불효자식이군"하는 소리가 행인의 입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한 끝에 누구의 입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탔습니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데 곧, "말이 가엾군"하는 비난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하여 말에서 내려 이번에는 말을 함께 메고 걸어갔다고 합니다.
이 우화는 주체성(主體性)이 없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수산(首山)의 대답에는 주체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답을 단지 기계적으로 모방한다면 거기에는 부처님의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082. 지족(知足)
-족할 줄을 안다 (《遺敎經》)
석존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하신 마지막 설법이 수록된 《유교경(遺敎經)》에서 "팔대인각(八大人覺)"에 대해 설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원선사도 이 "팔대인각"을 최후로 설법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인(大人)"은 불도의 수행자를 뜻합니다. 그들이 굳게 지켜 수행하여 깨달아야 할 여덟 가지 항목으로 이 "지족(知足)"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팔대인각(八大人覺)"은,
소욕(小欲-탐내지 않는다)·적정(寂靜-조용한 곳에 산다)·정진(精進-애써 노력한다)·불망념(不忘念-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지킨다)·선정(禪定-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는다)·수지혜(修知慧-지혜를 배운다)·인식(認識-올바로 생각한다)의 일곱 가지에 지족(知足-족할 줄 안다)을 더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독립된 필수 항목인 동시에, 이것을 배워야 마지막에 "지족(知足)"이 몸에 배게 됩니다.
"지족(知足)"이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검소나 검약의 도덕율(道德律)과는 뜻이 조금 다릅니다. 도원선사도 생애의 마지막에 "팔대인각을 배워 도를 깨치고 중생을 위해 이를 설법하면 석가모니와 같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족(知足)"을 다도(茶道)에서 채택하여 "다도는 '지족'을 근본으로 한다. 다도는 족할 줄을 알기 위한 방편이다. 족할 줄 알게 되면 차를 부족하게 마시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차를 마시면서 족할 줄 아는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교토의 용안사 뜰에 "오유지족(吾唯知足-나는 단지 족할 줄 알 뿐이다)"이라는 현판이 새겨져 있습니다. 경제단체 연합회장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장 부자이다'라고 말한 교장 선생님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에게 소극적인 태도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詩)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笑而不含心自閑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나 마음이 스스로 조용하여라
083.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峯)
-대웅봉 앞에 홀로 앉는다 (《碧巖錄》 제26칙)
백장(百丈) 선사에게 한 수행승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을 하면 어떤 신기한 체험을 하거나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좌선을 하여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득이 무엇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해 백장선사는 다만 "대웅봉 앞에 홀로 앉는다"고만 대답했습니다. '대웅봉(大雄峯)"은 백장선사가 살던 중국 강서성 백장산의 별명입니다.
이 "독좌(獨坐-홀로 앉다)"는 고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獨)"에 대하여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禪語 51)의 "독(獨)"으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좌(坐)"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좌(坐)"는 "토(土)" 위에 사람(人) 둘이 나란히 서 있는 형태입니다. 이 두 사람은 부처님과 범부(凡夫)를 뜻합니다 .인간의 내부에는 부처님과 범부가 언제나 동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범동거(佛凡同居)"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부처님과 범부―의 대화가 많을수록 그의 마음은 풍부해집니다. 어떤 사형수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알몸 속에는 부처님과 악귀가 함께 살고 있도다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처형될 날을 기다리는 담담한 심경으로 돌아가면, 배우지 않아도 진실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범부 두 사람을 서로 배격하지 않고 함께 포용하는 절대적인 한 사람으로 지양된 것이 "독(獨)"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고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혼자이면서 자기 속에 두 사람의 자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이런 자기를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자기를 들여다b보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속에 지금 여기 자기가 혼자 있는 것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인간이 삶을 누리기는 어렵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윽고 죽어야 하지만,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이 말을 이해하면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峯)"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084. 무설무문 시진반야(無說無聞 是眞般若)
-설법도 없고 듣지도 않는 것이 참된 지혜를 얻는 길이다 (《碧巖錄》제6칙)
석존의 만년에, 그 가르침이 서방(西方)에 전해짐에 따라 성전(聖典) 용어가 된 것이 팔리어입니다. 이 팔리어인 "판냐"의 발음을 본 따서 음역(音譯)한 것이 "반야(般若)"로 중국에서는 지혜(知慧)라고 번역합니다. 상식적인 지식이나 상대적인 지혜와 구별하기 위해 특히 "반야(般若)의 지혜(知慧)"라고 하며, 공(空)을 아는 지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수보리(須菩提)는 석존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특히 "공(空)"을 깊이 이해한 일인자(一人者)로서 "해공제일(解空第一)", 또는 "공생(空生)"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바위 그늘에서 좌선을 하며, "일체공(一切空)"의 심경에 도달해 있을 때, "제석천(帝釋天-인도의 신의 이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칭찬하면서 꽃을 비오듯 쏟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까닭을 물었더니 제석천은,
"네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를 설법한 것이 기특해서 그런다"하고 말했습니다.
수보리가 어안이 벙벙하여
"저는 단지 앉아 있을 뿐이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하고 반문하자,
"너는 아무 설법도 하지 않고(無說), 나는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다(無聞). 이것이 바로 참된 지혜이니라."하고 천지를 진동시켜 더욱 아름다운 꽃을 비오듯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재석천의 말이 옳습니다. 한 마디라도 설법을 했다면 이미 공(空)이 아닙니다. 그 한 마디를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법도 하지 않고 듣지도 않았는데 알고, 아니 알지도 말아야 비로소 참으로 "공(空)"을 설법하고 "공(空)"을 듣고, "공(空)"이 전해진다는 뜻일 것입니다. 수보리는 "설법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공(空)"에 대해 지장이 되는 모든 것을 미연에 분쇄한 것입니다.
"공(空)"의 이치를 아무리 깊이 이해하여도, "공(空)"에서 태어난 듯한 사나이라고 불리웠던 수보리도 그 "공(空)"에 발목이 잡혀 있어서는, "공(空)"은 "공(空)"이 아니어서, 공허함만 남을 뿐이 아니겠습니까.
"공(空)"을 깨달으면 이 허망한 세상에서도 곳곳에서 자유롭게 주인이 되어(禪語 29)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수보리와 제석천의 대화는 픽션이겠지만, 그 깊은 뜻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085. 일화개오엽(一華開五葉)
-꽃 한 송이가 다섯 이파리를 열다 (《少室六門集》)
선의 시조인 달마선사가 혜가(慧可) 선사에게 한 말입니다. 한 송이의 꽃은 다섯 개의 꽃잎을 열고, 나중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부처님의 생명(순수한 인간성)을 개발하면 자연히 도를 깨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달마가 혜가에게 한 말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전부터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갈 길을 알지 못해 헤매는 사람들을 구원했다. 꽃 한 송이가 다섯 꽃잎을 폈으니 나중에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꽃 한 송이가 피었다는 말에는 꽃은 "마음의 꽃"을 가리킵니다. 마음의 꽃이 핀다는 것은, 자기가 본연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묻혀 있는 순수한 인간성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 속에 다섯 꽃잎으로 비유되는 다섯 가지 지혜의 꽃잎이 피게 됩니다.
첫째 꽃잎―인간이 배우거나 경험하여 알게 되는 지식 이전의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합니다. 크고 둥근 거울(大圓鏡)은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추지만, 거울 자체는 언제나 깨끗합니다. 선·악을 비추지만 거울은 별로 아름다워지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말은, 불순하고 더러운 데 대한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근본적인 지혜를 알게 됩니다.
둘째 꽃잎―근본적인 지혜의 꽃이 피면 귀여운 새 소리도 더러운 화장실의 걸레도 모두 "부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깨끗하고 더러운 구별이 없이 평등하게 "부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지혜이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라고 합니다.
셋째 꽃잎―평등성이 보이면 평등한 채 자연히 구별의 귀중성을 알게 됩니다. 같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성별, 산과 바다의 차이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차별 속의 평등에 진(眞)·선(善)·성(聖)을 느끼는 것을 "묘관찰지(妙觀察智)"라고 합니다. 이 말은 훌륭한 관찰력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넷째 꽃잎―"부처님의 손이 내 손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발이 내 발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모두 부처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언동도, 부처님의 뜻인 "남에게 잘하는" 지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성소작지(成所作智-하는 일이 모두 부처님의 지혜를 행한다)"입니다.
다섯째 꽃잎―이것은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지혜로, 위의 다섯 가지 지혜를 하나로 종합하면 한 송이의 꽃이 됩니다.
086. 읍로천반초 음풍일양송(泣露千般草 吟風一樣松)
-풀들이 이슬에 울고, 소나무가 바람에 소리를 낸다 (《寒山詩》)
한산자(寒山子)가 은거한 한산의 풍경을 노래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산에서 자라는 모든 풀들이 이슬에 함빡 젖어 있는 모습을 격조 높은 가락으로 "읍로천반초(泣露千般草)"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골짜기의 소나무가 불어오는 바람에 쏴 하고 소리를 내는 것을 "음풍일양송(吟風一樣松)"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시는 사실은 한산자 자신의 마음의 모습을 노래한 것으로, 선자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백은선사도 "이 아름다운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지만, 이 광경으로 상징된 오도의 마음에는 쉽사리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 시가 실려 있는 《한산시(寒山詩)》의 첫머리에,
한산의 길은 흥취에 넘쳐 있어서
길은 있어도 마차가 지나간 흔적이 없도다
산과 산, 골짜기와 골짜기가 몇 겹인지 헤아릴 수 없구나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한산의 험한 광경은 선자의 수행이 엄격한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이나,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길입니다. 마차나 말 같은 외부의 힘은 더욱 쓸모가 없습니다. 수행의 길이 어려운 것은, 그대로 인생의 길이 험난한 것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산 속의 모든 풀들이 이슬에 함빡 젖고, 산골짜기의 소나무가 바람에 소리내는 것은,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인 동시에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풀이 이슬에 젖고 소나무가 바람에 우는 광경은 그대로 "석가모니의 모습이고 목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한산자의 오도한 심경은 더욱 깊습니다. 섣불리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백은선사의 말대로 "오도의 마음에는 쉽사리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087. 명주재장(明珠在掌)
-명주가 손바닥에 있다 (《碧巖錄》제97칙)
명주(明珠)는 보옥으로, 반야의 지혜(금강반야)를 비유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손바닥에, 바로 자기 손바닥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보옥은 높은 곳이나 먼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손바닥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높은 곳이나 먼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돌 속에 불이 불어있으나, 그 돌을 부딪치지 않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부싯돌을 사용할 때, 돌과 돌을 부딪치면 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에는 불을 일으키는 작용이 있으나 부딪쳐야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부처님의 생명이 있으나―심중불성(心中佛性)―수행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명주재장(明珠在掌)"도 손바닥에 갖고 있는 보옥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알지 못하면 그 보옥을 썩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修行)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을 거듭하는 동안에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에 대해 《법화경》 4권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을 인용하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고관으로서 부유해진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그를 가엾게 여겨 후히 대접한다. 그는 맛좋은 술에 취해 그 자리에 쓰러져 잔다.
이때 친구는 갑자기 관청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아 그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의 윗도리 안에 값비싼 보옥을 꿰매 놓는다.
얼마 후에 잠에서 깨어난 그가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전히 방랑생활을 계속하다가 다시 그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그의 윗도리 안에 보옥을 꿰맨 사실을 밝힌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 비유에서 친구는 부처님이고 가난한 친구는 방황하는 사람입니다. "명주(明珠)"는 불평에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보옥으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허망한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미망(迷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손바닥에 들어있는 보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088. 무일물중무진장 유화유월유루대(無一物中無盡藏 有花有月有樓台)
-아무 것도 없으나 무진장 많다. 꽃이 있고 달이 있는 누대가 있다
혜능(慧能) 선사는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공(空)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선어(禪語)의 어감으로써는 이 "아무것도 없다(無一物)"도 다시 "아무것도 없다"고 부정합니다. 부정의 부정은 절대 무(無), 절대 공(空)의 회귀점(回歸點)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는 관점입니다.
여행길에 같은 코스로 왕복해도 갈 때 보지 못한 풍경이 올 때 보이기도 합니다. 왕복해야 비로소 경치를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절반으로 접은 나이, 즉 30대의 후반이 인생의 회귀지점입니다. 갈 때의 젊은 나이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생의 풍경을 돌아오는 늙은 여로에서 비로소 깊이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실적·상대적인 인식을 구하는 것이 가는 길이라면, 그것을 한 번 부정하고 회귀하는 지점에서 다시 긍정하는 것이 귀로(오는 길)입니다.
이 심경을 글로 표현한 것이 모두 14자의 말로,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 유화유월유루대(有花有月有樓台)"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철학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땅과 밀착한 인생의 생활태도를 가리킵니다.
절대공의 본래 무일물(無一物)을 실감한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작은 자아(自我)나 아집(我執)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버리면, 자기의 작은 소유물은 하나도 없고,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모두 자기 것입니다.
예컨대 피어 있는 꽃은 그것이 공원에 피어 있건, 이웃집에 피어 있건 모두 자기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꽃이 무진장 많은 것입니다.
누대(樓台), 즉 훌륭한 주택으로 상징되는 자기 재산은 한정되어 있으나 우주에서 받은 것은 무진장입니다. 무난(無難) 선사(1676년 입적)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몸이 죽고 나서 남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이로세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아집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공(空)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공(空)으로 돌린 것을 또 공으로 돌리고 나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진리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089. 석(石)
-돌 (中川宋淵)
선어(禪語)로서의 돌(石)은 대체로 지적인 인식에서 떠난 심경(心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돌을 딱딱하게만 보지 않고, "돌 위에 꽃을 심는다(石上華栽)" 또는 "돌 위에 자라는 나무가 가지를 뻗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지혜의 양자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높은 차원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리킵니다.
가을이 깊어 소곤거리는 돌의 목소리여
위의 단시가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엄종(華嚴宗)을 중흥한 명혜(明慧-1232년 입적) 대사는 인도에 있는 석존의 유적을 돌아보지 못한 것을 몹시 애석하게 여겨 바다에서 돌 두 개를 주워 신변에 두고 부처님처럼 모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유적을 씻어 내리는 물도
바다 속이 이 돌이라 생각하니 정답기만 하구나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마자와 타이(態澤泰) 선사는 다음과 같은 돌의 다섯 가지 교훈(石德五訓)을 사람들에게 곧잘 써 주었습니다.
1. 여러 가지 형상으로 무언(無言)으로 말하는 것은 돌이다.
2. 침착하고 끈덕지게 흙 속에 묻혀서 대지의 뼈가 된 것은 돌이다.
3. 비바람을 맞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부동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돌이다.
4. 견고하여 고층 건물의 기초가 되는 것은 돌이다.
5. 묵묵히 산악과 정원에 운치를 주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돌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동화 작가가 쓴 "돌"이라는 다음의 동요도 좋아합니다.
길가의 돌은
언제나 푸른 하늘 아래 몸을 웅크리고
밤에는 별의 꽃밭을 쳐다보고
비에 젖어도 바람이 쉬 말려 준다
그리고 첫째로 누구나가
앉아서 쉬었다 간다
여기서 노래한 돌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돌입니다. 석존께서 득도하셨을 때 "이상하여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모두 여래(부처)의 지혜가 배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지혜를 자기 안에 계발했기 때문입니다.
앉아 쉬고 간 돌에 절하고 나그네길에 오른다
이 짤막한 구절은 정토종(淨土宗)의 권위자가 노래한 것으로써 그의 지혜가 자비나 감사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090. 하엽단단단사경(荷葉團團團似鏡)
-연꽃 잎사귀는 둥굴어 마치 둥근 거울 같다 (《大慧書》)
이 대구(對句)는 "능각첨첨첨사추(稜角尖尖尖似錐)"―마름의 잎사귀가 뾰족하여 송곳 같다―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눈앞의 식물에 대해 표현했는데 그 이면에는 둥근 형태와 뾰족한 형태의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연꽃의 둥근 잎사귀나 마름의 뾰족한 잎사귀는 같은 수면에 사이좋게 떠 있습니다. 이 같은 수면은 평등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차별과 평등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편파적인 생각입니다. 차별만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등한 채 차별이 있고, 차별된 채 평등한 것입니다. 평등과 차별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이 양자를 지양한 모습을 이 칠언대구(七言對句)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어에는 "평등 즉 차별(平等卽差別)", "차별 즉 평등(差別卽平等)"을 눈앞의 풍경을 빌어 표현한 것이 많습니다. 시인이기도 한 어느 선승(禪僧)이
연꽃 잎사귀는 둥글고, 마름 잎사귀는 뾰족하여 연못물이 한결 향기롭구나
하고 격조 높은 노래를 읊고 있습니다. 물론 서두에 인용한 시구를 빌어 지은 시(詩)이지만 "연못물이 한결 향기롭구나"에서 평등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뾰족뾰족한 마음의 잎사귀 비 내리는 옛 연못에 조용히 떠 있어라
위 구절은 내가 젊었을 때 읊은 노래입니다. 옛 연못에 떠 있는 마름 잎사귀에 비가 축축이 내리는 광경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이 지금도 그립게 생각됩니다.
091. 파수공행(把手共行)
-손을 잡고 함께 가다 (《無門關》제1칙)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함께 손을 마주잡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료를 "동행(同行)" 또는 "동붕(同朋)"이라고 하여 그리워합니다. 그리하여 순례(巡禮)의 길에 오른 길손은 혼자라도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삿갓에 써 붙입니다.
선자에게 이 "동행"은 스승이 되고 선배가 되고 친구가 되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수행을 격려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만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인간이 함께 걸어갈 때도 손을 마주 잡고 여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수행자는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어갈 때도 있고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걸어갈 때도 있습니다. "동행"은 현실에서 함께 가는 친구만이 아닙니다. 고뇌에 시달리는 자아(自我)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또 한 사람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 이름을 "자기(自己)"라고 부릅니다.
인간이란 현실의 감성적(感性的)인 자아와 본래적인 자기의 "동행" 두 사람의 존재입니다. 감성적인 자아가 아무리 추악해도 그 마음 깊숙한 데서 순수한 "동행"인 본래적인 자기가 노려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 선의 인간관(人間觀)입니다. 그리고 이 "동행"을 만난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함께 손을 마주잡은 선량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믿는 "동행"이 있다는 것은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 부른 다음의 동요를 좋아합니다.
손에 손을 마주잡고 들길을 가면
모두가 귀여운 작은 새가 되어서
노래를 부르면 신발이 울려요
맑게 개인 하늘에 신발이 울려요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인생의 황야를 갑시다. 저마다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을 지닌 어린이로 돌아갑시다. 이때 부르는 노래와 추는 춤은 모두가 진리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공(空)의 세계입니다. "신발이 울린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도량(步步是道場)"이라는 뜻입니다.
092. 미기축물(迷己逐物)
-스스로 혼미하여 사물을 좇는다 (《碧巖錄》 제46칙)
이 말은 거꾸로 읽은 것이 알기 쉬울 것 같습니다. "사물을 좇아 스스로 혼미에 빠진다"고 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돈이나 물질, 명예나 레저 등을 좇으면서 자기를 잊고 잇는 것을 경계한 말입니다.
석존께서 한적한 숲 속에서 좌선을 하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멀리서 젊은 남녀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젊은 여성이 석존이 계신 것도 모르고 급히 숲 속으로 도망쳐 갔습니다. 얼마 후에 젊은 남자가 헐레벌떡 그녀의 뒤를 쫓아왔습니다. 그 남자는 석존에게 안타까운 듯이,
"방금 이곳으로 젊은 여자가 도망쳐 가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가 내 지갑을 훔쳤어요."하고 물었습니다.
석존은 조용한 말로 물으셨습니다.
"도망친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를 찾는 것 중 어느 쪽이 소중하냐?"
젊은 사나이는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석존께서는 다시,
"도망친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를 찾는 것 중 어느 쪽이 소중하냐?"하고 젊은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석존의 질문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혼미하여 사물을 쫓는"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앞에서 이 문장은 거꾸로 읽은 것이 알기 쉽다고 말했지만, 이상의 이야기를 음미해 보면 역시 올바로 "스스로 혼미하여 사물을 쫓는다"고 읽어야 하는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혼미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사물을 쫓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존재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부릅니다.
존재는 몇 가지 요소가 모여 조직된 물질적인 현상(現象)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상이므로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데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현상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애니멀(animal)입니다. 불교에서는 애니멀을 "축생(畜生)"이라고 부릅니다.
애니멀의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물질 일색입니다. 그리하여 "색(色)"을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는 "스스로 혼미하여 사물을 쫓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가장 귀여운 존재입니다. 귀여우면 귀여울수록,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도 자기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충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093. 니다불대 수장선고(泥多佛大 水長船高)
-진흙이 많으면 큰 불상을 만들 수 있고, 물이 불어나면 배는 높이 뜬다 (《普燈錄》30)
이 구절을 읽고 상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번뇌가 클수록 깨달음이 깊어질 수 있고, 얼음의 양이 많을수록 물의 양도 많다."
문제는 번뇌를 다루는 방법에 있습니다. 얼음이 녹은 것이 물입니다. 번뇌가 녹은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얼음과 물은 다르고 번뇌와 부처님은 다릅니다. 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미묘한 면이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번뇌가 그대로 오도이다)"입니다.
"신 감의 신맛이 그대로 달콤하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이 "그대로"를 실감하게 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의 훈련과 수행이 필요합니다.
신 감이 그대로 곶감이 됩니다. 이 작업은 신맛을 빼거나 단맛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껍질을 벗기고 비를 맞지 않도록 하여 정성껏 말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성은 번뇌에 대하여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처마 밑에 달아맨 감은 오랫동안 말리지 않으면 곶감이 되지 않습니다.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수행을 쌓아야 번뇌가 오도로 전환됩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불성(佛性)을 알려면 시간과 원인과 인연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원인과 인연(간접적인 원인)도 큰 자비입니다. 자주적인 수행만으로는 인간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 시간과 원인과 인연이 작용해야 비로소 번뇌의 신맛이 단맛으로 변합니다. 애써 수행을 쌓는 동시에 시간과 원인과 인연의 도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절과 같은 말에 "지비가대(地肥茄大-땅이 기름져야 가지가 크게 자란다)"가 있습니다(여기서 가지는 야채인 가지를 뜻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병의 그릇이고 약의 그릇(通身是病通身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이 완쾌할 날도 기대할 수 있고 부처님이 될 때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진리인 동시에 인간이 향상심(向上心)을 가질 필요를 말하고 있습니다.
094. 니불부도수 신광조천지(泥佛不渡水 神光照天地)
-진흙으로 된 불상은 물에 약하다. 마음의 빛만이 천지를 비춘다 (《碧巖錄》 제96칙)
동의어에 "목불부도화(木佛不渡火) 금불부도로(金佛不渡爐)"―나무로 된 불상은 불에 약하고, 쇠로 된 불상은 용광로에 약하다―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비난한 말입니다. 인간이 손으로 마든 불상에게 절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신광(神光)만이 천지 만물을 비춥니다. "신광"이란 신비로운 빛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자기 마음 속에 깊이 묻혀 있는 순수한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이 순수한 인간성은 불이나 물이 침범할 수 없고, 도적도 훔쳐가지 못하기 때문에 "신광(神光)"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마음의 빛, 즉 심광(心光)과 같은 말입니다.
석존께서는 우상숭배를 크게 경계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석상(石像)은 존중하면서도, 질(質)이 같은 개천가의 조약돌은 거들떠보지 않는 편견이나 기호(旗號)를 싫어하신 것입니다. 돌부처(石佛)를 경배하면 산속의 돌도 마찬가지로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석존께서 이루신 득도(得道)의 내용은,
"지금까지 미처 모르고 있었으나 만물이, 그러니까 초목도 조약돌도 모두 여래(如來)가 지닌 지혜의 모습이고 덕의 표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시에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서 우리는 어떤 계시(啓示)를 읽는 동시에 거기에 자기의 마음을 투입하는 것이 선(禪)의 태도입니다.
특별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만물을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모습으로 경배하고, 그 큰 마음을 체득하라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만물도 무심(無心), 경배하는 마음도 무심, 무심과 무심의 만남이 신광(神光)이 되어 자기의 안팎을 비추는 것입니다.
황벽(黃檗) 선사는 언제나 경배를 거듭하여 이마에 혹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는 부처님에 대해 구하지 않고, 불법(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구하지 않고, 승려에 대해 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불·법·승(佛法僧)은 불교의 삼보(三寶)라 하여 지고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상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경배하는 데서 "신광(심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경배에도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부처님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선천마(禪天魔-선에 집착하여 교만해진다)"란 이것을 뜻합니다. 선자는 경건한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진흙으로 만든 불상은 물에 약하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불상에 경배할 뿐이다"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095. 빈호소옥원무사(頻呼小玉元無事)
-소옥아, 하고 시녀의 이름을 자주 부르지만 별로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槐安國語》제4)
이 구절에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다만 그이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이다)"이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공주가 자기 시녀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것은, 그 시녀에게 어떤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 시녀에게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연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기미(幾微)를 나타낸 이 구절에서도 깊은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서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제3자에게는 쓴 웃음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능청스럽게 시녀를 부르고 있는 아름다운 공주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대상인 그이는 또 누구일까요.
그것은 우선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시녀의 이름을 부르고 잇는 아름다운 공주는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순수한 인간성입니다. "당신을 당신이 되게 하는 절대의 생명이 여기 있어요. 깊이 내려뜨린 장막에 숨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는 잘 보여요. 당신의 바로 옆에 있어요. 아직 모르시겠어요, 딱하군요." 하고 주의를 끌기 위해 용무도 없는데 시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일체성시불성 체색시불색(一切聲是佛聲 切色是佛色-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목소리이고, 모든 모습은 부처님의 모습이다)"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의 눈이 뜨이면 보고 듣는 것이 다 진리의 목소리이고, 진리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처럼 받아들이는 깊은 인식 작용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존엄합니다. "존재하는 것이 모두 부처님이다"하고 말하면 범신론(汎神論)이나 자연숭배가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단지 무심히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깊은 수신작용(受信作用)은 인간 쪽에 있습니다. 이 미세한 구별을 하지 못하면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이점과 관련하여 "파초엽상무수우 지시청시인단장(芭蕉葉上無愁雨 只是聽時人斷腸-파초 잎사귀 위에 걱정스러운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때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초 잎도 비도 모두가 무심한 상태에 있습니다. 다만 파초 잎사귀 위에 비가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빗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걱정스러운 비도 되고 단비도 되는 것입니다.
096. 가빈미시빈(家貧未是貧)
-집이 가난하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다
이 대구는 "도빈수살인(道貧愁殺人-도의심이 빈약하여 마음을 슬프게 한다)"입니다. 가난은 확실히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가난에 시달려 왔습니다.
목을 매어 죽을 밧줄도 없구나, 해(年)가 바뀌는데
그러나 이런 가난 속에서도 유미를 잃지 않고 사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몇 해 동안의 가난한 생활은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쓴 추억일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국토나 동료를 잃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도의심을 잃은 것은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경제력이 풍족해진 이 시점에서 가난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전쟁 후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고 집도 없어 무척 가난했으나 "그래도 가난하지 않은" 일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고 있으므로, 사실은 심각한 가난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도빈수살인(道貧愁殺人)"입니다. 인간답게 바르게 살자는 향상심(道念)이 없는 가난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이 가난을 현대인도 겨우 알아차리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백운단처가산묘(白雲斷處家山妙-흰 구름이 끊긴 곳에 가산이 신기하다)"입니다 흰 구름은 망상을 상징하며 육체적인 사고(思考)를 가리킵니다. 망상인 흰 구름이 끊기고 그 사이에 보이는 본래의 인간성이 가산(家山)입니다. 이 인간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깊은 지혜입니다.
진리의 길을 찾는 지혜가 풍부해지지 않으면 참된 의미에서 풍족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097. 신심탈락(身心脫落)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五法眼藏》)
"신심탈락(身心脫落)"은 도원선사가 중국 송나라의 여정(如淨) 선사(1228년 입적)의 밑에서 수행하여 득도했을 때의 문답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身)"은 육체를 뜻합니다.
선자는 육체와 신체를 일단 구별합니다. 육체는 동물로서의 모체(母體)에서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는 반성도 지성도 없이 본능 그대로 성장해 갈 뿐입니다. 인간 이전의 짐승과 같은 내용을 다분히 갖고 있습니다.
선자는 이것을 "낭생신(娘生身-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대로이다)"이라고 말합니다.
동물로서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이 육체입니다. 이 육체를 정성껏 키워 "인간"이 되었을 때 선자는 이 육체를 "신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호칭이 달라졌을 뿐 "모(體)"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육체에서 신체로 성장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육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체가 되었을 때의 정신을 일단 "마음"이라고 표시합니다. 이 마음은 순수한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육체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경지를 말합니다. 도원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선은 신심탈락(身心脫落)이다. 분향(焚香)도 경배도, 염불도, 참회도, 독경(讀經)도 하지 않고 오직 좌선하는 것이 신심탈락의 길이다."
여기서 탈락(脫落)의 "탈(脫)"은 해탈(解脫)을 의미합니다. 모든 속박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락(落)"은 몸과 마음이 아울러 상쾌한 경지를 말합니다.
098. 탈락신심(脫落身心)
-몸과 마음을 다 버린다 (《五法眼藏》)
앞에서 말한 "신심탈락(身心脫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탈락신심(脫落身心)"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이 자기 것이라는 본능적인 인식에서 벗어난 것이 "신심탈락(身心脫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심탈락(身心脫落)"에게 다시 벗어난 것이 "탈락신심(脫落身心)"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릴 것은 다 버리고, 버린다는 마음까지도 버려 아무것도 없는 "무일물(無一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단지 표현이 다를 뿐 선의 마음은 같습니다. 같은 것이, 도를 깨친 각자의 체험에 따라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적지에 일단 도착하면 출발지로 돌아와야 합니다. 도를 깨치면 이 시끄러운 사회를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청정(淸淨)의 경지에서 부정(不淨)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의 사회생활을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회생활에 매이지 않고, "흐름에 따르되 그 흐름에 맡기지 않는" 자주성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꾸준한 수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미망(迷妄)에 빠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도 신발 하나 벗는 데서도 은연중에 인간의 순수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선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발 하나 벗은 것을 보기만 해도 마음속으로 깊은 감동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때 부처님의 생명이 전해진 것입니다.
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언제 어디에 가 있으나 그 현장에서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 "신심탈락(身心脫落)"이고, 자기 자신을 잊는 망각에 동화되는 것이 "탈락신심(脫落身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099. 추가명월청풍(誰家無明月淸風)
-누구의 집엔들 명월과 청풍이 없겠는가 (《碧巖錄》 제6칙)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밝은 달이 비치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무리 죄가 크고, 배운 것도 없고 지위가 없더라도 부처님의 생명―순수한 인간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 집을 비추는 밝은 달과 자지 집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매화 향기여, 거지의 집도 저마다 기웃거리는구나
라는 짤막한 노래도 같은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지의 집이라도 몇 송이의 매화를 빈 병에 꽃아 두면 그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그 가난한 집에서 매화가 향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이 매화의 향기는 부처님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 부처님의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생명을 갖고 있는 데서 존재하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도원선사는 "실유불성(悉有佛性)"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실유즉불성(實有卽佛性)"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득도한 자기의 체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대로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도원의 선풍(禪風)이 있습니다.
명혜(明慧) 선사는 한 장의 휴지도 불법의 세계라고 하여 합장했습니다. 불법의 세계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밝은 달도 맑은 바람도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휴지 조각도 각각 부처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아니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도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명월청풍공일가(明月淸風共一家-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모두 한 집을 이루고 있다)"도 같은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00.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이다 (《無門關》)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禪僧) 조주(趙州)가 수행승으로 있을 때, 스승인 남천(南泉) 스님에게 "도(道)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선배인 마조(馬祖) 선사의 말대로,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하고 대답했습니다.
평상(平常)과 평생(平生)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평생"은 평소 그대로이고, "평상"은 "자연"의 의미를 더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인공(人工)을 가하지 않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는 현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본능대로 행동하거나 평소의 그대로가 "도(道)"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리 그대로의 자연이 도라는 것입니다. 진리 그대로의 자연을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고도 합니다.
조간 신문의 <생활란>에 "옛날에는 '할 수 있다'는 말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예컨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신불(神佛)이나 많은 사람들의 덕택이며 자기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심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바쇼(芭蕉)는 자연을 "조화(造化)"라고 말하고 이 조화로 돌아가는 것을 "풍아(風雅)의 도(道)"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보는 곳에는 어디나 꽃이 있고, 생각하는 곳에는 어디나 달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무문(無門)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봄에는 꽃이 있고, 가을에는 말이 있고, 여름에는 청풍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 만일 헛일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모두가 좋은 계절이다."
헛일, 그 중에서도 이기심에 집착하지 않으면 선(禪)뿐만 아니라 어떤 도(道)와도 통합니다.
중국 송나라의 백운(白雲) 선사(1072년 입적)는 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란 이것이다, 단지 이것, 이것이다. 어찌 통하지 않겠는가."
깊이 음미해 볼만한 말입니다. 도는 선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도(茶道), 검도(劍道) 등 어떤 도에도 통합니다. 연습할 때나 시합할 때나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어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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