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발심시변정각
법보신문
2013.02.13 17:48
부처되려 마음낸 순간
깨달음 정각 기약한것
범부·부처는 차이없어
초심에 돌아가면 성불
원문: 初發心時便正覺이요
生死涅槃常共和이네 (화엄일승법계도)
번역: 부처를 이루고자 처음 발심할 때의 그 마음이 곧바로 깨달음이요, 생사의 고통과 열반의 즐거움이 항상 함께 하네.
신라 때 해동 화엄종조인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 (원제목), 줄여서 ‘법성게(法性偈)’라고 부르는 7언 30구 210자 게송의 일부이다. ‘법성게’는 ‘화엄경’의 내용과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책으로 유명하다.
최치원이 쓴 ‘의상전’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대사에게 ‘화엄경’을 배우던 어느 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주었다. 이에 분발하여 ‘대승장’ 10권을 편집하여 스승에게 바치니, 다시 쓰라고 하였다. 의상대사가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맞는다면 이 책이 불에 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책을 불속에 던졌는데, 그 중에서 210자가 타지 않은 기적이 일어났다. 의상대사는 타지 않은 210자의 순서를 배열하여 게송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법성게’이다.
‘화엄경’ 초발심공덕품에 부처가 되고자 처음 발심하는 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석천왕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내면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법혜보살이 말하였다. ‘이 이치가 깊고 깊어서 말하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 보살이 처음 발심한 공덕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무량한 공덕이 있느니라.’”
처음 시작하는 마음이 굳건해야 마침내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첫 걸음의 방향이 바르게 되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첫 걸음이 호리라도 차이가 나면 천지간에 차이가 난다.
‘화엄경’에서는 삼라만상의 현상세계를 여래성기(如來性起), 즉 부처가 출현한 모습이라고 한다. 화엄세계이고, 우주광불(宇宙光佛)이다. 이 땅의 한 생명이 존재하기까지 억겁의 인연연기와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었던 것이고, 결국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중생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事法界)만 이해하고 살아간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모든 존재가 실체와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의 세계,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본체계(理法界)까지도 이해하고 살아간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현상계와 본체계가 걸림이 없는 이사무애(理事無)이고, 현상계가 그대로 완벽한 부처의 세계인 사사무애법계이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중생이 부처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고, 초발심이 깨달음이다.
2월 4일이 입춘이고, 10일이 설날이다. 계사년 새해가 열리는 순간이다. 시작이 곧 성공이다. 부처가 되겠다고 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 깨달음의 정각을 기약한 것이다. 범부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이다. 범부와 부처의 차이는 차이가 없다. 다만 범부는 스스로 부처임을 모르고 중생심으로 사는 것이고, 부처는 스스로 부처임을 알고 부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함께 긴밀하게 관계가 있어 그 인 안에 과가 들어있는 인과불이(因果不二)이고, 인과교철(因果交徹)이다. 이것이 여래장이고, 불성이다.
▲김형중 법사
우리 불자도 처음 불문에 입문할 때 견성성불과 중생구제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수행하면 성불하지 못할 이가 어디 있으며, 불국토를 이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법사·문학박사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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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2016-11-25 10:15:09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우리 수미정사가 위치한 이곳은 본래 인천의 중심지였습니다. 승학산을 중심으로 인천도호부 청사와 인천 향교 등이 자리한 곳으로 수미정사는 명당에 위치한 정법도량입니다. 학이 알을 품은 명당입니다.
학이 알을 품었으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어미가 부리로 살짝 알을 쪼아주듯 이곳이 바로 ‘줄탁’의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줄탁’이란 수승한 깨달음을 이루는 곳의 의미로 경인불교대학을 말합니다.
1300여명이 이곳에서 공부하시고 졸업했으며, 깨달으려면 눈 밝은 스승을 만나야합니다. 알을 깨고 나올 병아리와 어미닭의 관계처럼 ‘줄탁동시(踤啄同時)’를 이룰 수 있도록 스승은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 주어야합니다. 수미정사의 경인불교대학은 많은 스승이 오셔서 의문을 풀어 주는 동시에 많은 성과를 내었고 지금 25기에서 26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성게’의 한 구절입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경의 요체인 법계연기론으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첫 마음 낼 때인 그 마음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어날 때 업장과 사랑을 지니고 태어났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이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며 오직 여래장불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 봅니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종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으로 ‘초발심(初發心)’이 곧 깨달음의 첫 마음입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 배우는 게 사랑,자비가 아닙니다. 사랑은 갖고 나오는 것도 밖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엄마의 젖을 빨 때 아기가 엄마의 눈을 처음 바라보며 느끼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초심이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을 머리로 분별해서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본래 존재했다면 태어나면서 사랑을 알아야하고 선(善)과 악(惡)이 본래 존재했다면 태어나면서 선(善)과 악(惡)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알지 못하고 사랑을 지식으로 분별하고 지식을 통해서 사랑을 깨달으려하기에 경인불교대학을 설립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엄마의 젖을 처음 먹으며 알았던 사랑을 잊고 왜 혼탁해 질까요?
이 몸이 내거라는 탐욕으로 가득차서 뭔가 구하려는 욕심이 사랑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모든 것의 가치와 기준, 사고(思考)가 돈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사랑도 없고 무상한 업(業)만 짓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가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무관심 한 것이 현대인의 죄로 남편에게 아들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거기에 물질이 중심에 있다면 관심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가진 자도 마음이 가난해야 하며 사찰도 가난해야 하며 마음도 육체도 가난하게 살아야 가난한 자를 돌 볼 수 있는 마음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을 알게 됩니다. 많이 가진 자를 우러러 보기에 많이 가지려 애쓰며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구조가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는 바로 가난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빌려 쓰다가 놓고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초발심(初發心)’을 잃지 않으면 4대 폭력(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불량식품 폭력)인 악(惡)의 근원을 척결하자는 응신이 자기도 모르게 올라오게 됩니다.
불교 공부해서 지혜 종자를 끊는 술과 담배 끊으시고 사랑을 되찾는 공부를 하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예수와 부처를 닮아가게 됩니다. 닮아가지 않는다면 공부하는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고통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는 둘이 아니므로 중생의 세계를 떠나 부처가 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려고 공부하는 순간 죽은 것 이므로 내가 부처임을 발견해야합니다.
부처를 발견하려 오셨는데 뭔가를 빌거나 구하러 왔다면 이율배반적으로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오늘 뭔가 구하러 왔다면 여러분 모두 마구니입니다.
입학하신 신입생 여러분! 사랑은 밖에 있거나 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며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서 커지는 겁니다.
오늘 가서 내 남편의 발을 닦아주고 내 아들에게 존칭을 붙여주면 사랑은 법계 연기합니다. 아들에게 딸에게 이웃에게 칭찬하고 좋은 말 한마디 해주면 그것으로 연해서 사랑이 연기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높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받거나 주는 것도 아닙니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불이(不二), 둘이 아니듯, 사랑은 오직 모를 뿐입니다. 달라이라마도 부처님 말씀을 한 번 곱씹어보라고 했습니다.
‘불상은 불상일 뿐’이라고 달라이라마가 말 한 것입니다. 이 말뜻을 새겨보면 여러분 두뇌가 가라는 데로 가지 말고 불교공부해서 마음 맑게 하고 가난하게 사시며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한 생명이 내 앞에 보여주는 것도 억겁의 공덕을 지었듯이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분이 남이 아니며 상당히 형용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무관심하게 살지 마시고 헐벗고 힘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때가 아니고 행함으로 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복지사업도 해야 하고 미혼모센터도 지어야하고 다문화인들도 함께 가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교 공부 열심히 해서 혼자 갖지 말고 두루 두루 나누어서 이웃이 부강하고 이 나라가 부강 하는 삶을 사는 참 불자 되기를 바랍니다.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2016.12.21 21:28
그렇게 되니까 화엄경은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요 생사열반이 상공화라.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이라.
처음 불심을 일으키는 그때가 바로 성불하는 때다. 이게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에요. 一念일념이 즉시 無量遠 무량겁이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연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디 이상한 세계에 지금 들어와 있는 거 같죠? 이상한 세계에. 이게 화엄법계에요.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 불교에서는 화엄법계를 믿으니까 기도하는 그 자체가 소원 성취하는 것이고 염불하는 그때 바로 극락 가는 거구요, 참선하는 그때 바로 도통하는 이게 불교입니다.
이게 圓融二원융무이라는거에요. 원융무이. 원인이 좋으면 결과는 저절로 좋은 거예요.
圓融無二相원융무이. 이게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이에요. 그러니까 현재 하는 거 자체가 좋으면 결과는 저절로 좋으니까, 결과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든지 두려움은 조금도 안 느끼는 게 이게 화엄경입니다. 그리고 生死般若常共和생사열반이 상공화라. 생사라고 하는 것도 인연에서 나오는 것이고, 열반이라고 하는 것도 인연에서 나오는 건데, 깨달은 지혜를 보면 생사 속에 바로 열반이 있다 이런 얘기에요.
또, 열반 속에 바로 생사가 있는데, 깨달은 지혜를 가지고 보면은 생사가 생사가 아니고 열반이 열반이 아니더라. 그러니까 생사 없는 열반이 없고 열반 없는 생사가 없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이 보면 바로 그게 불국토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보면 그게 바로 지옥이거든요. 그러니까 生死般若 생사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중생에게 보여지는 것이지 열반세계가 따로 정해져 있고 또, 생사세계가 따로 정해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을 常共和상공화라고 그래요.
항상 함께 이루어진다. 함께 화합돼서 나타난다. 함께 나타난다. 이게 상공화죠. 이렇게 되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의상대사가 신바람 나게 불렀을 때, 거참 음악 치고도 아주 좋은 음악이죠. 이런 게. 가사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되요. 노랫말입니다. 노랫말이 生死般若常共和생사열반상공화라든지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든지 九世十世互相卽구세십세호상즉이라든지.
이게 모두 화엄경에 나타나는 시간관이요, 현상관이요 인생관이요 종교관이거든요. 이런 문제가 있어요. 이것이 결국은 뭐냐? 화엄경에서 이야기 하는 가장 중심적인 하나의 핵심은 조화의 생명을 여기서 이야기해요. 조화. 조화에 있어요. 영원과 순간에 대한 조화, 부분과 전체에 대한 조화, 생사와 열반에 대한 조화, 또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조화. 이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 원리가 화엄철학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개혁과 조화인데, 개혁주의 조화주의가 있어요. 개혁, 뜯어 고치는 것. 개혁을 굉장히 부르짖죠. 그런데 결국은 인간이 어디로 돌아가야 되느냐? 조화로 돌아가야 되요. 개혁만 있고 조화가 없으면 실패요. 그런데 가장 어려운 건 조화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가장 아름다움은 조화에요. 조화만 잘 되면 그 세계가 불국토고, 그게 다 극락세계고 그게 행복입니다. 문제는 조화가 깨지는데 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흔히 인간 보면 개혁을 부르짖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개혁보다 조화가 더 어려운 겁니다. 그게 소련에 있는 막스레닌이라는 사람이 혁명을 했는데 혁명을 하고 나니까 조화가 되어야 되겠거든.
이게 참 조화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겁니다. (고루 調조, 화할 和화) 고루고루 화목이 되어야 되는데 이게 어려워요. 이게 젊을 때는 전부 개혁을 주장합니다. 어릴 때는 의존하기만 하고. 그게 어릴 때 유년기에는 그저 어머니 아버지한테 요구할 줄 밖에 몰라요. 이게 유년기에요. 의존, 평생 의존하다가 죽는 사람은 그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을 살고 가는 거예요.
의존만 하는 사람은 불평이 많아. 이건 유아기를 사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보면은. 그런데 평생 전부 때려 부수고 뜯어 고쳐야 된다. 이런 거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이게 개혁주의라는 거예요. 의존주의 개혁주의. 뜯어고쳐 싹 다 때려 부수고. 이거 다 그냥 놔둬서 안 된다. 개혁을 부르짖는데 청년기에는 개혁주의가 되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한테 의존하다 보니까 점점 성장하면서 배짱 안 맞거든. 그래서 아버지 하는 게 아주 못마땅해. 개혁주의. 제 자신도 우리아버지 하는 게 못 마땅해서 뛰쳐나와 버렸는데. 어머니는 자식 말을 잘 듣는데요, 아버지는 안 듣더라고. 그러니까 잘 못하면 싸우기만 하겠고, ‘에이 안 되겠다. 내가 나가야 되겠다.’ 이게 청년기라 그러고 나쁜 말로 하면 사춘기라 그러는데,
반드시 개혁욕구가 아주 강하게 일어나는 그 시기가 있습니다. 이게 개혁주의에요. 이게 청년기라고. 그 다음에 중년기쯤 되면 역시 조화를 시켜야 되겠다. 이 조화가 아주 완숙된 문화입니다. 조화. 어린아이들도 한대 때려서 혼내 키기는 쉬운데, 그 다음에 이 녀석을 어떻게 잘 달래서 어떻게 공부도 잘하게 하고 올바로 성장하게 하는가, 이게 조화입니다.
그러니까 부부생활도 마찬 가지에요. 처음에는 개혁을 하려고 그래요. 아내는 남편 뜯어 고치려고 그러고 남편은 아내 뜯어 고치려 그러고. 그래서 싸우는 거예요. 이게 개혁시대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내 멋대로 길들여야 된다. 다홍치마일 때 길 안들이면 평생 못 들인다. 이게 개혁욕구에서 나타나는 거거든. 그런데 개혁이 뭡니까?
나이가 좀 들면 개혁가지고 안 돼요. 서로 인정을 해야 되요. 아, 남편은 저런 사람이다. 아내는 저런 사람이다. 서로서로 인정을 해서 서로서로 조화를 시켜서 서로서로 협력하고 서로 이해하고 이래야 이게 되는데, 개혁으로만 계속 치닫다가 깨지는 수가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자기 뜻만 주장하다가 파탄되는 경우 많거든요.
그건 이 조화의 아름다움을 아직까지 체험을 못해서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고 개혁을 시켜 놨어도 마지막에는 조화가 형성 돼야 결실을 맺습니다. 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문제는 조화에요. 그런데 이 화엄에서는 조화의 원리를 아주 극치적으로 설명했다. 그것이 바로 10전법. 일전은 10전 안에 있고 바로 10전 속에 1전이 있다. 이게 아주 조화의 극치 아닙니까.
그러니까 조화가 되려면요, 다양한 것이 많아야 되요. 많은 것 속에 조화가 되는 거지, 똑같은 것만 있으면 조화가 안 됩니다. 이게 또 화엄경에 중중무진 무진법계입니다. 이 각자 다른 것이 전체 속에서 다 조화가 되는 것 이래야 되는 겁니다. 똑 같이 만들어 놓으면 불구자가 되요.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잘라내고 이러면 안 돼요.
길고 짧은 게 다 조화가 되어야 되지 긴 건 자르고 또 짧은 건 제비다리가 짧다 해서 이어내고 그러면 안 되거든. 그래서 그대로 가지고 각자 특성을 살리면서 조화를 해야 되거든. 이것이 바로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 격별성이라는 거예요. 따로따로 隔別成격별성이면서 互相卽호상즉이라. 이게 바로 조화의 극치입니다.
互相卽호상즉이면서 隔別成 격별성이 되어야 되지, 隔別成 격별성 떠나서 互相卽호상즉만 강조하면 전부 하나로 뭉쳐놓는 거지. 밀가루 덩어리처럼. 그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다 따로따로 있으면서 隔別격별하는 거. 그런데 이 조화가 되려면 역시 부처님이 되어야 조화가 됩니다. 자기하고 다른 주장을 한다든지 다른 모습을 보면 그 꼬라지를 못 봐요. 이게 조화는 개혁보다 더 높아야 되기 때문에 참 힘 든 겁니다.
아이들이나 누구도 후배들이 자기주장을 자꾸 세우면 그 주장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데, 감정이 뒤틀려서 참아내기 참 힘들어요. 참, 참아내기 힘듭니다. 일리가 있다는 건 알지만 기분 나쁘다. 이거에요.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옳은 건 안다. 그러나 기분 나쁘다. 그냥 안 둔다고.
그러니까 조화가 되려면 다 보살이 되어야 조화가 되는 거지, 보살 안 되고는 이게 조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불심을 일으켜서 자꾸 정진하고 기도하고 해서 지혜와 공덕이 자꾸 불어나면 조화가 되요. 그리 되면 바로 불국토 이루어지는 거죠.
28. ‘법성게’ 제16구 :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해주 스님 승인
2019.02.11 15:49
무명의 실제 성품이 불성이고 환화의 헛된 몸이 바로 법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니
동일상이라서 항상 함께 해
열반 머물 때는 생사 떠돌고
생사 떠돌 때는 열반 머물러
부처님은 세간에 안주하며
생사열반 집착이 없어 정각
생사와 열반 다르다 속임은
위없는 도를 알지 못한 까닭
의상 스님이 연기분의 진성으로 증분의 법성을 거듭 보여 수행인으로 하여금 법성을 증득하도록 방편을 시설하고 있는 가운데, 계위에 의거하여 다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를 설하고 있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는 ‘법성게’ 제16구이다.
‘초발심시변정각’은 발심이 곧 불과를 원만히 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에 떠돌고 생사에 떠도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무르므로,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법기’)
유전즉생사(流轉則生死) 비전시열반(非轉是涅槃) 생사급열반(生死及涅槃) 이개불가득(二皆不可得). 허광망설자(虛誑妄說者) 생사열반이(生死涅槃異) 미혹현성법(迷惑賢聖法) 불식무상도(不識無上道). (‘보살운집묘승전상설게품’)
“유전하면 생사이고 유전하지 않음이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 생사와 열반이 다르다고 속여 망령되이 말하는 자는 현인과 성인의 법을 미혹하여 위없는 도를 알지 못한다.”
위 게송과 아울러 아래 경문은 “생사열반상공화”의 경증에 해당하는 예로 볼 수 있다.
불자(佛子) 차보살(此菩薩) 득여시삼매지력(得如是三昧智力) 이대방편(以大方便) 수시현생사(雖示現生死) 이항주열반(而恒住涅槃). (‘십지품’)
“불자여, 이 보살이 이와 같은 삼매의 지혜력을 얻고 대방편으로 비록 생사를 시현하되 항상 열반에 머무른다.”
불자(佛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유십종경계자재(有十種境界自在) 하등위십(何等為十) 소위(所謂) <중략> 재열반경계이불이생사경계(在涅槃境界而不離生死境界). (‘이세간품’)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경계에 자재함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열반경계에 있으면서 생사경계를 여의지 않는다.”
선남자(善男子) 보살약능근수십법(菩薩若能勤修十法) 즉능증득여시해탈(則能證得如是解脫) 하등위십(何等為十) <중략> 삼자(三者) 응이지혜(應以智慧) 평등관찰생사열반동일상고(平等觀察生死涅槃同一相故). (‘보현행원품’)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능히 열 가지 법을 부지런히 닦으면 능히 이와 같은 해탈을 증득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 셋째는 응당 지혜로써 생사와 열반이 동일한 모양임을 평등하게 관찰하는 까닭이다.”
수능요달생사열반무이무별(雖能了達生死涅槃無二無別) 이상선교요익중생(而常善巧饒益眾生). (‘보현행원품’)
“비록 능히 생사와 열반이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요달하나, 항상 선교로 중생을 요익케 한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역부여시(亦復如是) 부주생사(不住生死) 부주열반(不住涅槃) 역부부주생사중류(亦復不住生死中流) 이능운도차안중생(而能運度此岸眾生) 치어피안안은무외(置於彼岸安隱無畏) 무뇌처(無憂惱處). (‘십행품’)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한 다시 생사의 흐름에 머무르지 아니하면서 능히 이 언덕의 중생을 실어 건네서 저 언덕의 안온하고 두려움 없으며 근심과 고뇌가 없는 곳에 안치한다.”
생사란 중생들이 미혹 번뇌의 업력으로 여기서 죽어 저기서 태어나면서 육도에 떠돌며 뭇 고통을 받는 것이다. 반면 열반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다 꺼져 적정한 상락(常樂)의 경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는 뛰어 넘고 멀리 여의며, 생사 고통은 끊어지길 바란다. 수행의 목적도 일체 중생이 생사 고통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離生死苦 得涅槃樂]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생사 고통에서 중생을 건져주시려고 출현하신 것이다.
무렴족왕선지식(왼쪽 위) 화엄경 제66권변상도. 봉녕사 소장.
그런데 경에서는 또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으니 동일상이라서 항상 함께임을 설하고 있다. 의상 스님도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임을 깨달아 걸림 없고 자재하게 한다.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보살명란품’) 라는, 그 일승의 경계라 할 것이다.
‘대기’에서는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합해 생사라 하고, 대승의 네 열반과 ‘화엄경’의 열 열반을 합해 열반이라 한다. 분단생사는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하면서 겪는 생사이고, 변역생사란 성자들이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몸을 여읜 이후 중생 교화행으로 성불에 이르기 전까지 겪는 생사이다. 그리고 네 열반은 본래 청정한 열반·머무름 없는 열반·남음이 있는 열반·남음이 없는 열반 등이고, 열 열반은 ‘이세간품’에서 부처님께서 열 가지 뜻으로 나타내시는 대반열반이다. 이 생사와 열반은 서로 알지 못하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므로 항상 함께라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 또한 수즉수(須卽須)와 무측(無側)의 오척신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는 것은, 만약 계위에 의거하여 말하면 적멸한 열반의 체가 연을 좇아 생사를 이루니, 생사를 이루는 때가 곧 성품이 청정한 열반의 체이기 때문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생사와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연에 있다. 무엇인가? 생사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열반을 갖추고, 열반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생사를 갖추기 때문이다.
“문. 무엇이 생사이고 무엇이 열반인가?”
“답. 생사가 곧 그대의 몸이고, 열반이 곧 그대의 몸이다.” (‘진기’)
생사와 열반이 필요로 하고 구하는 대로 연을 따라 이루어지고, 하나를 들면 전체가 일어나는 무측이라서, 생사를 들면 열반을 갖추고 열반을 들면 생사를 갖추어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다시 말해서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이니, 생사에 떠도는 몸이 곧 열반의 오척신임을 알 수 있다.
제법은 필요로 하는 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수즉수와 하나를 들면 전체가 따라 일어나서 그 옆에 아무것도 없다는 무측 법문은, 의상 스님과 의상계 화엄교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모든 존재는 오척법성에 계합하여, 일체 법이 바로 나의 몸과 마음임도 누누이 강조된 바이다. 이러한 생사와 열반의 경계를 설잠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약론생사(若論生死) 즉시보현경계(即是普賢境界) 약론열반(若論涅槃) 즉시구박윤회(即是具縛輪廻) 차도(且道) 열반여윤회(涅槃與輪廻) 상거기하(相去幾何) 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即佛性)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即法身). (‘법계도주’)
“만약 생사를 논한다면 바로 이것이 보현의 경계이고, 만약 열반을 논한다면 바로 이것이 속박된 윤회이다. 자, 말해보라. 열반과 윤회가 서로 떨어진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무명의 실제 성품이 곧 불성이고, 환화의 헛된 몸이 곧 법신이다.”
생사가 바로 보현보살의 경계이고 열반이 바로 속박된 윤회로서, 열반과 윤회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 경계를 설잠 스님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의 ‘증도가’를 인용하여 ‘무명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공신이 곧 법신’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법성게과주’에서는 “생사열반상공화”를 염정무애의 연기문에 배대하고 있다. 진(眞)과 망(妄)이 하나이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없어서, 천 파도가 다투어 일어남이 보현행의 바다이고, 이것이 연기의 대용으로서 전수문(全收門)의 극치라 한다.
이러한 “생사열반상공화” 도리를 확연히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의문이 남을 수 있다. 생사는 허망하고 물든 범부세계이고 열반은 청정하고 진실한 성인의 해탈세계인데, 염오와 청정이 따로 없고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라면, 삼악도의 원인인 십악(十惡) 등의 업도 닦아야 할 대상이 되는가?
‘대기’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제시하고 “초발심시변정각”의 경우처럼 또 만족왕 선지식의 일을 예로 들어 풀어주고 있다. 만족왕 즉 무렴족왕이 참혹한 일을 벌인 것이 선지식의 실제 법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렴족왕 선지식의 법문을 환과 같은[如幻] 법문이라고 한 것은, 다만 삼승의 모습을 따라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일 뿐이다.
또 죄와 복이라 말한 것도 나와 남을 실제로 집착하는 지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 만약 이 집착을 여읜다면 일체의 죄와 복이 환과 같고 공과 같다는 것이다. 환화가 실제이고 또 실제가 환화임을 알 수 있다.
의상 스님은 생사와 열반에 집착하지 않음을 무착불(無著佛)이라 하고, 무착불을 안주세간성정각불(安住世間成正覺佛)이라고 부른다. 세간에 안주하면서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이다. 이 경계는 세간의 생사에 있으면서 열반에 머무르고 열반에 머물면서 생사를 따르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세간에 안주하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정각을 이루므로 생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부주생사(不住生死) 부주열반(不住涅槃)이니 생사와 열반을 둘 다 얻을 수 없다. 이 점은 무주(無住)가 바로 무착이고 무착의 무주 도리로, 태어나고 죽는 그것이 그대로 여여한 열반임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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