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란, 이 법계(法界=우주, 세계)가 단순한 평면적 연기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중 삼중으로 얽히고설킨 연기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연이 겹치고 겹쳐 끝이 없다는 뜻이다.
<화엄경>에 인다라망(因陀羅網, Indrjala) 그물이란 말이 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이라 해서 제망(帝網)이라고도 한다. 제석천이 거주하는 궁정이 도리천(忉利天) 중앙에 있는 선견천(善見天)인데, 그 선견천 하늘이 그물로 덮여 있다. 그 그물을 인드라망이라 한다.
인드라(Indra, 因陀羅)란 ‘강력한’이라는 뜻이며,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다. 인도에 침입해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아인들의 수호신으로서, 천둥과 번개를 지휘하고 비를 관장하고, 그의 무기가 천둥과 번개라고 한다.
그러한 브라만의 인드라신이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제석천(帝釋天)이 돼, 불교를 보호하는 신이 됐다. 불교에서 신들의 주인인 제석천은 도리천(忉利天) 33천의 주인이다.
불교 우주관에서 볼 때 우주 중심에 수미산(須彌山, Sumeru)이 있고, 그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다. 도리천의 모양은 사각형을 이루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봉우리가 있으며, 네 봉우리마다 8천(八天)이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선견천(善見天)이라는 궁전이 있다. 선견천 안에는 도리천의 우두머리 제석천(帝釋天, Indra)이 머무르면서 사방 각 8천(天), 도합 32천(天)의 신(神)들을 지배한다. 32천에 선견천을 더해서 도리천은 33천(三十三天) 천상계(天上界)이다.
그 제석천의 궁전 선견천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보석그물을 인드라망 혹은 제망(帝網)이라 한다. 이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영롱한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그 수많은 보석 하나하나의 구슬마다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비치며, 구슬마다에서 나오는 빛들이 서로를 비추어 무수히 겹쳐 빛을 낸다.
그런 인드라망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인드라라는 그물은 한 없이 넓고 그 그물의 이음새마다, 구슬이 박혀있는데, 그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관계다.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물로서 서로 연결돼 있기도 한데, 그것이 바로 중중무진연기하는 인간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결돼 있으며 서로 비추고 있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일체제법도 서로서로 무진(無盡)하게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인드라망의 비유이다. 이는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인연이 겹치고 겹쳐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중무진연기란 <화엄경>의 핵심사상으로, 이 세계가 무한한 연기의 세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중무진연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평면적인 연기가 아닐 뿐만 아니라, 동⋅서⋅남⋅북⋅상⋅하의 3차원 세계로 펼쳐지는 연기만도 아니다. 이 연기는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계의 내면에까지도 펼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법계연기(法界緣起), 상즉상입(相卽相入)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우주의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해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끝없이 이어짐)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도 한다. 이 사상은 불교 연기론의 극치로서 우주연기의 주체를 어떤 한 사물이나 이체(理體)에 국한하지 않고 그 하나하나를 만유의 합당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의상(義湘) 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즉, 작은 티끌 속에도 시방세계는 물론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펼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티끌 속의 우주의 티끌에도 또 다시 다른 우주가 이어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우주는 무한해서 끝이 없다. 이와 같이 중중무진연기란 일미진중함시방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연기를 말한다.
불교는 어떤 한계를 경계(境界, boundary)라고 부른다.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뿐 아니라 느낌이나 생각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모두 경계가 있다. 생각이나 느낌도 다른 것과 차별돼야 식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계가 생기면 동시에 이쪽과 저쪽이 생긴다. 이쪽과 저쪽은 서로 붙어서 동시에 존재한다. 저쪽이 없는 이쪽은 상상할 수 없다. 어느 한 쪽만 독립해 따로 존재 할 수 없는 것을 ‘연기한다’고 말한다.
모든 경계는 연기하고, 연기하는 것은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다.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공(空, sunyata)하다고 한다.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無)는 뜻이 아니라 정해진 모양이 없이 늘 변한다는 뜻이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연에 따르지 않고 생겨나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空) 아닌 것이 없다(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이 세상의 법들 하나하나에 자성(自性)이 있다면 원인과 결과 등 모든 일은 있을 수 없다(諸法有定性 則無因果等諸事).」
자성(自性)이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독립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성이 있으면 당연히 연기도 없다. 하지만 이 우주에 그런 존재는 없다. 만물은 서로 원인과 결과로 맞물리면서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연기하므로 자성이 없고, 공하다. 공은 모습이 없으므로 어떠한 말이나 문자, 도형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고 잴 수도 없다. 그래서 방편(方便)을 쓴다.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眞如), 불법(佛法), 중도(中道), 불이(不二) 등은 모두 공(空)을 가리키는 가명(假名)들이다.
정의(定義)를 내리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정의가 모여 개념이 되고, 개념이 모여 지식이 되고, 지식이 모여 원리나 법칙이 된다.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개념이나 지식, 원리나 법칙 등에는 모두 경계가 있고, 경계가 있으므로 연기 하고, 연기하므로 자성이 없다.
연기는 모든 인류, 모든 상황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유법칙일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에 적용되는 존재원리이기도 하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인(因)이란 씨앗 같은 내부조건이고 연(緣)이란 물, 온도, 햇빛 같은 외부조건이다.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이다. 인이 연을 만나면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연쇄적으로 일으키며 삼천대천세계를 나타나게 만든다. 이를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 한다. 모든 과학의 토대가 되는 인과(因果)의 법칙도 연기에 속한다. 연기는 불교의 핵심교리이다.
우리가 눈을 돌려 우주만유가 전개돼 있는 현실적인 모습을 직관(直觀)할 땐 산하대지 그 모든 것이 서로 서로 끝없는 관계를 가지고 어떤 질서와 조화 속에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도 연기인 것이다.
또 연기의 정의(定義),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말을 되새겨 보더라도, 이 세상의 천지만물은 서로서로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면서 끝없이 생멸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만물은 그 어느 것도 홀로 생겨났다가 홀로 없어지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이런 모든 연기하는 것이 어떤 본체를 떠나 있는 별개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없다.
연기실상(緣起實相)을 사무쳐 봐서 본체적인 실상(實相)의 면과 현상적(現象的)인 연기 면을 구분하지 않고 일관해서 연기론으로 발전시킨 것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에서 말하는 법계연기론이고, 다른 말로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인 것이고, 이를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본 것이 ‘가이아(Gaia)의 이론’이다.
‘가이아(Gaia)의 이론’이란 영국의 제임스 러브록(James Ephraim Loveloc)이 창시한 지구 시스템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가이아로 보는 이론다. 즉, 가이아이론은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물리ㆍ화학적 환경을 유지하는데 전 지구의 생물권이 관여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가이아이론에 있어서 ‘지구생태계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설들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가이아는 스스로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따라서 인간이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가이아는 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둘째 가이아는 생물과 같은 중요한 기관들과 함께 부속기관을 가지고 있어 필요에 따라 신축⋅생장⋅소멸이 가능하고, 장소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리하여 자기 정화능력(자정능력)을 가지게 된다.
셋째 가이아는 매우 정교한 자기조절 체계처럼 스스로를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유지 복원력을 말한다.
가이아가설(Gaia假說)은 지구상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물리적ㆍ화학적 환경을 생명현상에 적합한 상태로 유지하는 최적조건을 유지하려고 언제나 자기제어기능을 갖추고 자기 스스로 조정하고 스스로 변화하며 연기한다는 것이다.
<화엄경> 핵심철학은 한마디로 ‘제망중중무진연기법(帝網重重無盡緣起法)’이다. 이 말은, 연기법 세계관으로 볼 때 세계는 본래 그물코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생명공동체라는 것이다. 즉, 세계가 마치 살아있는 그물이라면 낱낱의 존재들은 그물코 같이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다. 이렇듯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 한 생명의 생명공동체여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화엄경>을 처음 편찬할 당시 마치 2000년 후의 가이아이론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언설이다.
오늘날 개아(個我)를 초월한 트랜스퍼스널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 발달하고 있음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즉, 개인(person)을 초월(trans)해 가족, 이웃, 사회, 각종 생물, 자연, 지구, 우주 등 모든 존재는 서로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병들면 가족이 병들고, 연이어 이웃, 사회, 생물, 자연이 병들며, 지구가 병든다고 보는 포괄적 접근(holistic approach)의 시각이다. 마치 <화엄경>의 상의상관(相依相關), 중중무진(重重無盡)한 현상을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인류는 이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구의 다른 생물권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암적 존재였다. 따라서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이와 같은 가이아이론이 주는 암시는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사상의 가르침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불가결의 사상임을 가리키고 있다.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볼 때 세계는 본래 그물의 그물코처럼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생명 공동체이다. 즉, 세계가 마치 살아 있는 그물이라면 낱낱 존재들은 그물코와 같은 격이다. 이렇듯 세계는 본래부터 한몸 한생명의 인드라망 생명 공동체로서, 생명 공동체의 길에는 평화롭게 함께 사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진연기’란 말이 잘 두드러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 귀향하신 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거듭 선양해 새롭고 새로운 불국에 널리 이익케 하신다 하오니 기쁨이 더욱 큽니다. 이로써 여래께서 입멸한 후에 불일(佛日)이 휘황하게 빛나고 법륜이 다시 굴러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한 이가 오직 법사뿐임을 알았습니다.”
이 글은 의상(義湘) 스님과 함께 지엄(智儼) 대사 아래에서 동문수학했던 중국 화엄종의 3조 법장(賢首法藏) 스님이 신라 의상(義湘) 스님에게 보낸 편지글 <현수기해동서(賢首奇海東書)>의 일부이다. 중국 화엄종을 정립했다는 법장 스님이 더없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의상 스님의 덕화가 컸음을 의미하며, 무진연기 사상을 통찰했음을 의미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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