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部派佛敎)의 이해
(eighteen schools)
The cause even of a single eye in the feather of peacock cannot be understood in all its aspects by non-omniscient ones. For it is the knowledge which might be the power of the omnicient (the Buddha).
- Rahura -
공작 깃털 속 작은 눈동자 하나 조차도 [깨달아] 완전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원인들을 두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앎이 아마도 부처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 라후라 (구사론 파아품) -
머 리 말
초기불교가 태동하던 시대는 석가세존에 의하여 직접 가르침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가르침이 더욱 다양해지고 교화 영역이 넓어지게 되므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가섭존자 등 부처님의 제자에 의한 가르침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의 전파는 주로 중인도 일대로 확산되어졌다. 석존 입멸 후에도 전도 사업은 왕성하게 이루어져 불교는 중인도 전체에 퍼져 나갔고 특히 서·남방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불교를 신봉하는 교단들이 여러 곳에 형성되고 교화목적으로 인도의 윤회사상이 채용되어 석존의 전생이야기인 자타카[本生譚]가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석존과 그 제자들의 유골과 유품을 모시는 스투파 즉, 탑(塔) 숭배가 일어나 아름다운 불교조각 예술을 꽃피우는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불교가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평등주의와 자비사상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인도의 성왕(聖王)이라 일컫는 아쇼카왕이 불교사상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교세의 확충과 함께 불교교단 역시 큰 변천을 거듭하고 있었다. 석존 입멸 후 계율 문제로 의견을 달리해 오던 장로들과 젊은 비구들의 이견이 제2차 결집 이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갈등을 빚던 두 계층은 보수적인 장로 중심의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비구 중심의 대중부(大衆部) 두 부파로 나누어졌다. 이것을 근본 2부 분열이라고 일컫는데 근본불교가 두 파로 분열된 이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에서 각각 말파(末派)가 생겨나고 곧 이어 20개 부파로 교단이 급속히 분열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결집에 의한 근본 불교에서 다양한 논(論)이 대두되는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부파불교 시대의 특징은 각 부파마다 교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활발하여 수많은 논(論)이 만들어졌다. 논이란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주석(註釋)인 셈이다. 이로써 근본불교의 경과 율에 각 부파들의 논이 포함되어 불교의 삼장(三藏)이 성립되었다. 교법에 대한 연구는 근본불교 시대에도 부분적으로 있었지만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특색있는 진전이 있었다. 장로중심의 상좌부와 젊은 비구 중심의 대중부로 나누어진 근본 2부의 분열은 계율의 해석과 수용에 관한 교단 내의 의견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부파분열은 시대와 지역을 잘 고려한 특성 있는 교법연구를 탄생시킨 셈이다.
불교의 전통 안에서 성장한 모든 사상들이 그러하지만, 아비달마불교(부파불교)도 공허한 이론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정치한 이론일지라도 그것은 실천을 위한 바탕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따름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비달마교학이 대개 사제(四諦)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사제는 현실의 확인(苦)과 그 원인의 분석(集), 그리고 이상의 달성(滅)과 그 방법의 모색(道)에 관한 진리이다.
여기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현실의 확인, 즉 개인이 실존적 반성일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그 원인의 분석이라는 일도, 고통으로서의 현실이 극복된 상태의 이상도, 이에 이르는 길의 모색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실천 또는 수행은 부정적인 현실을 전제하여서만 가능하다. 아비달마논사들은 이러한 점에 누구보다도 철저하였던 것 같다. 아비달마불교에서 정밀하게 발달한 달마(法)의 이론, 업의 이론도 이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 이 곳에 인용된 자료들은 한 학기동안 아비달마불교(부파불교)를 공부하면서 체계적으로 이해를 위하여 참고한 서적이나 자료들을 편집한 것이다.
Ⅰ. 부파불교(部派佛敎) 연구의 목적 : 최봉수 교수의 『부파불교원전의 이해』
Ⅱ. 아비달마불교의 전개 :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Ⅲ. 아비달마의 철학 : 上山春平,櫻部建 『아비달마의 哲學』
Ⅳ. 衆賢(Sa ghabhadra)의 {俱舍論本頌}의 개작과 삭제에 대하여 - 권오민
Ⅴ. 구사론 강독 : 한글대장경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이들 자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첨가하거나 부가하고, 빼버린 부분도 있다.
목 차
Ⅰ. 부파불교(部派佛敎) 연구의 목적 (6 Page)
1. 부파불교(部派佛敎)란?
2.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관계
1) 여설수행(如說修行)
2) 對法論書에 대한 批評적 접근
3) 조론(造論)의 자세
Ⅱ.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의 전개 (20 Page)
1. 발달의 개관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
3.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
Ⅲ. 아비달마의 철학 (43 Page)
서장
1장 우주
2장 인간
3장 달마의 체계
4장 물질
5장 마음
6장 선과 악
7장 번뇌
8장 도(道)
9장 아라한과 부처
10장 아가마에서 아비달마로
11장 세친의 전기
12장 구사론 이후
Ⅳ. 衆賢(Sa ghabhadra)의 {俱舍論本頌}의 개작과 삭제에 대하여 - 권오민 (118 Page)
Ⅴ. 阿毘達磨의 敎學的 意義 - 허경구 (139 Page)
Ⅵ. 구사론(俱舍論) 강독(講讀)
구사론 해제
分別界品第一之一
分別界品第一之二
分別根品第二之一
分別根品第二之二
分別根品第二之三
分別根品第二之四
分別根品第二之五
Ⅰ. 부파불교(部派佛敎) 연구의 목적
1. 부파불교(部派佛敎)란?
2.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관계
1) 여설수행(如說修行)
2) 對法論書에 대한 批評적 접근
3) 조론(造論)의 자세
1. 부파불교(部派佛敎)란?
부파불교란 초기교단이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말한다. 불멸(佛滅) 100년 경에 초기교단은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려고 하는 보수파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上座部)와 승단의 규율에 있어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었는데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이 근본분열의 원인에 대해서 남방불교의 전통에 의하면 십사(十事)를 둘러싼 계율해석을 위해 바이샬리에서 모인 제2차 결집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며, 북방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아쇼카왕 때 마하데바라는 사람이 오사(五事) 즉 아라한의 권위를 격하시키는 다섯 가지 항목을 주창한 것을 계기로 하여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상좌부와 대중부 각각에서 다시 분열을 되풀이한 것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상좌부는 7회의 분열에 의해 11부로 나뉘었고, 대중부는 본말을 합해 9부이기 때문에 상좌부와 합해서 20부가 된다. 그래서 근본의 2부를 제외하고 18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부파 교단의 불교는 붓다의 직계제자인 대가섭과 아난 등에 의해 전해진 불교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계승되어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 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들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고 불렸다. 성문이란 불타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나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자는 국왕이나 장자들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교리연구와 수행생활을 해 나갔다.
다음으로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사원(寺院)불교이다. 승가(僧伽)가 점차 조직화되고 안정된 경계적 기반을 갖춤에 따라 출가자들은 재가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화하고 걸식하는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사원에 안주하며 명상과 열반의 적정(寂精)만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경제적 지원에 의해 승단은 유행걸식하지 않으면서 출세간주의(出世間主義)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법에 대한 연구) 불교이다.
+- 2. 一說部 -+
| 3. 說出世部 | (200年中)
| 4. 鷄胤部 -+
+- 1. 根本大衆部 | 5. 多聞部 (200年中)
| (100餘年) | 6. 說假部 (200年中)
| | 7. 制多山部 -+
| | 8. 西山住部 | (200年滿)
| +- 9. 北山住部 -+
| +- 4. 法上部 -+
| +- 3. 犢子部 +- 5. 賢胄部 |(300年中)
| +- 2. 說一切有部 | (300年中) +- 6. 正量部 |
| | (300年初) | +- 7. 密林山部 -+
| | |
| | +- 8. 化地部 - 9. 法藏部(300年中)
+- 1. 根本上座部 | | (300年中)
(100餘年) | +-10. 飮光部(300年末)
| +-11. 經量部(400年初)
|
|
|
+- 雪山部
2.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관계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의 대법논서들 중 유부와 남방상좌부의 것들이 유명하고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구사론(俱舍論)과 청정도론(淸淨道論)이다. 이들에 대해서 각각 비평적으로 접근해 가면서 부파불교의 특징과 그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대법론(對法論)에 대한 비평적 접근의 타당성을 경전을 통하여 정립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학에서 원시불교라는 영역이 독립한 것은 현대 불교학의 공로라고 할 만하다. 특히 P li성전협회의 발족과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서구의 불교학은 원시불교의 주 자료인 Nik ya의 편찬을 진행하면서 가능한한 니카야의 경설만을 중심으로 불교 이해의 한 분야를 정립해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의 경향은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서구나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학자들은 대개 니카야 안에서 원시불교를 정립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원시불교의 주자료인 아함이나 니카야에 대한 이해는 對法論들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한다. 아함 등이 매우 방대하고 비교적 잡다한 분위기이므로 우선 입문이나 요약을 먼저 대한다는 뜻에서 누구나 論書부터 살피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예를들어 4아함은 모두 183권 분량이라고 할 때 구사론이라는 논서는 30권 분량이므로 구사론을 먼저 대할 경우 아함에의 접근은 외견상 매우 용이한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한국이나 중국, 일본과 같은 경우 원시불교의 아함이나 니카야에 대한 이해가 논서 한 두 종류를 선행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함·니카야와, 그에 대한 논문인 여러 대법논서와의 관계를 살펴보게 된다. 그럴 때 3가지 정도의 관점이 자연히 제시된다.
첫째는 아함·니카야의 경설이 붓다의 뜻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아 일종의 부족분을 메꾸고 나아가 보다 자세한 설명을 베푼다는 관점이다. 이것은 아함·니카야에 대해 對法論書를 일종의 발전(敎理發達)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아함 등과 대법론 사이에 어떤 敎理나 思想의 발전 따위는 인정하지 않고, 대법론이란 아함 등의 단순한 정리라고 파악하는 입장이다. 사실 法蘊足論이나 集異門足論은 단순한 아함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셋째는 對法論을 오히려 아함·니카야의 수준에 비할 때 퇴보라고 보는 관점이다. 아함·니카야의 經說이 지닌 수승한 方便施設의 정신이 對法論師들의 沒理解로 오히려 훼손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論書를 전제하여 아함에 접근한다면 그는 주로 첫째의 입장이나 둘째의 입장에서 있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이미 원시불교라는 영역은 그에게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원시불교는 그 자체로 일단의 敎理의 始終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필자는 셋째의 관점에서 阿含과 對法論의 관계를 이해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과연 어떤 면에서 對法論은 阿含에 대한 일종의 편견인가를 진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부파불교라는 영역을 비로소 원시불교와 분리시켜 다시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즉 원시불교의 주 자료인 아함과 니카야의 가르침이 부파불교의 주자료인 대법론서의 논술과 전반적으로 서로 상이한 의미와 표현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의 분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 본 항목에서는 먼저 대법론서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그리고 특히 원시불교의 4니카야에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의미를 평가하고자 한다.
부파불교 원전 자료를 통해 부파불교의 전모의 일부라도 알려고 한다면 이러한 비평적 시각을 전제해야 한다. 그럴 때 부파불교라는 분야가 원시불교와 구별되는 것으로 비로소 의미를 지니기 때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1) 여설수행(如說修行)
對法論들이 불교인의 활동인 바에는 불교인의 활동 전반이 지녀야하는 어떤 원칙에 입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칙은 활동의 방향을 지적해주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면 모든 불교인이 붓다는 아직 아니어서 궁극적인 목표를 상세히 분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교인의 활동이 지녀야 할 원칙이나 방향은 如說修行이라는 요청 속에서 잘 나타난다고 본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후 최초로 다섯 비구에서 法을 설한다. 그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如來는 동등한자이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不死가 도달되었다. 나는 설하겠다. 法을 가르치겠다. 說한대로 修行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양가의 아들이 올바로 출가할 때 지녔던 목적인 梵行의 궁극을 現法에서 스스로 잘 알고 똑바로 보아 갖추어 지낼 것이다.
불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a-sam-boodhi)이고 그 목표는 修行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취된다. 그러한 수단과 목표가 여기서는 梵行의 窮極(brahmacariya-pariyos na)이라는 말로서 한꺼번에 표현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보다 구체적으로 說한대로 修行하는 자(yath nusi ham tath patipajjam na)'에 의해서만 성취됨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如說修行의 요청은 좀 다른 표현으로도 원시불교 자료들에 빈번히 나타난다. 즉 如法修行(dhamma-anudhamma-pa ipanna, anudhamma-carin)이라는 표현이다. 如法修行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기도 한다.
"비구들이여, 色의 싫어함·탐착을 떠남·滅함을 위하여 수행하는 자가 法에 있어 法에 따라 수행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오히려 五蘊의 滅을 강조하기 위하여, 如法修行이라는 말이 서술어적으로 채용된 것에 불과하다.
다음의 두 經說은 如法修行이 원시불교에서 대단히 강조되던 요청임을 보여준다.
"벗 사리풋타여, 이 法과 律에는 어떤 것이 행하기 어려운 것이오? 벗이여, 이 法과 律에는 出家하는 것이 행하기 어렵소.
다시 벗이여, 出家한 자에게는 어떤 것이 행하기 어렵소?
벗이여, 出家한 자에게는 즐거워하는 것이 행하기 어렵소?
다시 벗이여,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것이 행하기 어렵소?
벗이여,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如法修行이 행하기 어렵소.
다시 벗이여, 如法修行하는 비구는 얼마만에 아라한이 될 수 있소?
벗이여, 오래 걸리지 않소."
"리차비들아 다섯가지 보물은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여래·아라한·정등각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여래가 설한 法과 律을 가르치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여래가 설한 法과 律이 가르쳐지는 대로 이해하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여래가 설한 法과 律을, 가르쳐지고 이해한대로 如法修行하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은혜를 아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먼저 사리풋다의 대화에서는 修行은 결국 如法修行이어야함이 규정되고 있으며, 리차비들에 대하여 고타마 붓다는 원시불교의 이상적인 다섯가지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그중 하나로 如法修行을 들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如法修行(dhamma-anudhamma-pa ipatti)의 개념이 如說修行(yath nusi hamtath pa ipatti)의 그것과 동일한 것임은, 그 둘이 모두 梵行의 궁극이나 아라한을 이루는데 오래 걸리게 하지 않는 조건임이 선언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說한대로 修行해야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說한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규명해야할 것이다. 설한 바는 형식적으로 본다면 經說이 될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안계신 오늘날 우리가 의존할 佛說은 經說을 떠나서는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권위를 발견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如來가 말씀하신 經은 깊은 뜻을 지니고 出世間의 것이고 空性에 상응하는 것" 이다 한다. 그러한 經들이 아직 우리에게 충분한 質과 量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바로 이 經의 말씀인 經說에 일단 의지하고 그에 따라 수행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經說이, '설한 바' 형식적인 것이라면 그 내용적인 것은 무엇일까. 앞서 如法修行이라는 표현도 보았듯이 역시 法이라는 표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法이라는 술어를 떠올리면 먼저 法 중에서도 어떤 法에 초점을 둘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法(dhamma)과 義(attha)의 관계 속에서 이 술어를 생각해야하고, 또 法門(dhamma-pariy ya)이라는 개념 속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法은 고타마 붓다가 얻은 法이어야 하고 그에 의해 施設된 法이어야 한다. 고타마 붓다가 얻은 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적정하고 고매하고 思索과 思量을 떠났고 고상하고 賢者들이 알만한 法 이라 한다. 이러한 수식을 받는 法은 구체적으로 十二緣起 등 다양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法 하나 하나보다도, 위의 표현에 들어 있는 思索 思量을 떠났다(atakka-avac ra)라는 대목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비평하고 연구할 論書들은 결국 思索과 思量의 영역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말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색하고 사량한 뒤에 口行(v c -sa khara)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제로 삼는 法은 그것을 떠난 것이므로 묘한 관계를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붓다의 法도 일단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初ㆍ中ㆍ後가 善하고 뜻과 문장을 지니고 완전·청정한 梵行을 밝히는 法 "이다. 그리고 붓다의 法은 말로 표현되더라도 사색·사량을 떠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고타마 붓다의 독특한 方便施設(up ya-pa atti)에 말미암는다. "이것을 苦聖諦이다 라고 나(세존)에 의해 施設되었다. 그것에는 무량한 字(va a)와 무량한 文(bya jana)과 무량한 辯(sank sana)이 있다." 붓다가 시설한 法을 흔히 우리들이 하는 언어로 풀어쓸 경우 무량한 양이 될 것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붓다가 시설한 法이 단순한 個物의 설명이나 心적상태의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잘 인지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사색·사량이 있는 字·文·辯으로는 결코 닿지 않는 곳에 있음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둘째, 義(attha)와의 관계 속에서 法을 살펴보자. 義는, 설해진 法이 지니는 의미 내용을 뜻하기도 한다.
비구가 契經·應頌·記別·偈頌·自說·如是語·本生·未曾有法·廣說 등(九分敎)의 "法을 알아내기에 法을 아는 자(dhamma u)라고 한다..." 이것이 설한 바의 뜻이다. 저것이 설한 바의 뜻이다라고 하며 비구가(九分敎에) 설해진 바의 뜻을 알아내기에 "義를 아는 자(attha- )라고 한다."
여기서 볼 때 義라는 개념은 확실히 설해진 法의 意味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義에는 利益되는 것의 의미도 있다.
"非法과 法을 알고 非義와 義를 안 뒤 法과 義에 따라 수행해야만 한다.... 邪見이 非法이고 正見이 法이다. 邪見을 緣하여 여러가지 惡·不善法이 발생하거니와 이것이 非義이다. 正見을 연하여 여러가지 善法이 충분히 닦이게 되거니와 이것이 義이다."
즉 法을 통하여 일어나는 利益되는 바가 여기서는 義라는 술어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붓다의 法은 사색과 사량을 떠난 것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法의 이론적 意味가 곧 바로 수행자에게 실천적 '利益'으로 연결되는 성질을 지닌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法의 義는 利益을 동반하는 의미이기에 이미 法은 論議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셋째, 法은 궁극적으로 法門이라는 범주적 개념 속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우다인(ud yin)존자와 판차캉가라는 신자가 受(vedan )의 종류가 몇이냐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한쪽은 三受를 다른쪽은 二受만을 붓다가 설했노라고 다툰 것이다. 이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우다인의 좋은 (法)門(pariyaya)을 판차캉가가 기뻐하지 않았고 판차캉가의 좋은 (法)門을 우다인이 기뻐하지 않았구나, 나는 (法)門에 입각해 二受를 설하고 (法)門에 입각해 三受를 설하고 ...(法)門에 입각해 108受를 설한다. 이와같이 나의 法이란 門에 입각해 설해진 것이다. 門에 입각해 설해진 나의 法은 상호간에(도) 잘 설해진 것이다."
이외에도
"이와 같이 이 다섯 根(indriya)은 다섯이었다가 셋이 되기도 하고 셋이었다가 다섯이 되기도 하니 (法)門에 입각한 것이다."
"어떤 (法)門이 있으니 그 門에 입각하여 有學비구는 有學地에 서서 나는 有學이다라고 알아내고, 無學비구는 無學地에 서서 나는 無學이다라고 알아낸다."
등 法門이, 諸法의 미묘한 최종적 관계를 決擇하는데 가장 중요한 입각지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門이란, 말 그대로 敎法의 어느 한 體系를 뜻한다. 개개의 法들이 모여 짜여진 한 무리의 法들로 성립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원시불교 내에 이러한 한 체계를 이루는 法의 무리인 法門을 몇 단계나 상정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또다시 그야말로 새로운 體系 및 목표를 동반하는 門 속에서나 그 규정이 가능하겠지만, 難解度에 바탕을 둔 여러 단계의 法門이 존재함은 당연하다. 결국 法門은 어떤 法의 직접적인 外延(extension)이 되는 셈이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經說이라는 형식은 法이라는 내용물을 담고 있고 다시 法은 利益을 갖춘 意味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法門이라는 범주와 체계속에서 개개의 法은 보다 진정한 意味內容을 우리에게 전달하게 될 것임을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法의 경설에 따라 우리는 修行해야 하는 것이다.
열반에 즈음하여 고타마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계하신다.
"아난다야, 비구승단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더 원하는가? 나에 의해 法은 안팎이 없이 이미 설해졌다. 如來의 法에는 師拳(acariya-mutthi)이 없다. 내가 비구승단을 보살핀다(pariharati)' 또는 비구승단은 나의 所關이다(uddesika)'라고 如來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비구승단에 대해 무언가 더 이야기할 것은 없다."
고타마 붓다는 분명 진리의 세계와 그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이 상세히 풀어 설명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양은 무한할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세계와 그에 이르는 길을 方便施設의 정신에 입각해 설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설하였음에 틀림없다. 설할 수 있는 法을 숨긴 것은 없다라고(師拳이란 없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붓다에 의해 필요한 法은 모두 제시되었으니 우리는 오직 그 法만을 분명히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修行해야 하는 것이다. 如說修行, 이것은 불교인의 좌우명이어야 한다.
2) 對法論書에 대한 批評적 접근
對法論은 佛法에 대한 論議이지만 붓다의 直說이라고는 아무래도 볼 수 없다. 佛法과 佛意를 선양하려 하지만 결국 佛敎學者들의 논술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학자들의 논술은 결코 완전무결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對法論에 대해서도 비평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량을 갖추고, 他心智를 갖춘 비구에 의해서, 如來가 正等覺者인지 아닌지가 마땅히 조사되어야만 한다....(以下 대략적인 뜻을 취함)....탐착이 제거되어 애욕에 빠진 것이 아닌지를 조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흠이 如來에게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된다. 여기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실과 근거는 如來야말로 좋고·나쁘고·善이고·惡인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승에게 가서 法을 듣는 것은 온당하다. 法을 듣고 잘 알아서 여러 法가운데 어떤 法에서 완전히 도달하여 믿음을 일으킨다. '세존은 正等覺者이다. 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승단은 훌륭한 修行에 전념한다'라고.
위와 같은 사실과 문구에 의하여 如來에게 믿음을 확실히 한 자는 뿌리로부터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잘 확립된 것이다. 사실을 갖춘 믿음은 見(dassana)의 뿌리이며, 견고하여 세간의 무엇에 의해서도 파괴될 리 없다. 이상과 같은 것이 如來를 法性에 입각해 잘 조사한 것이다(dhammat -susamanni ha)"
如來에 대한 信仰도 如來가 진정한 覺者인가를 조사해본 뒤에 가능하다. 아직 붓다를 이루기 전에는 아직 붓다를 모르는 것이고 붓다를 모르는 자는 마땅히 붓다의 경계가 참다운 종교적 이익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를 비평해봐야 한다는 취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붓다라고 하더라도 法性에 입각한 조사가 요청됨을 보고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붓다에 대해서도 비평적 조사가 요청되는 것이 원시불교의 정신이라면 對法論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長尼柯耶에서는 다음의 두 경우에 걸쳐 對法論 비평의 전제가 될만한 입장이 설해진다.
먼저 四大指示(cattaro mahapadesa)로 알려진 입장을 보자.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벗들이여,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한 것이 있소.-이것이 法이고 이것이 律이고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이요-라고.' 비구들이여 그 비구의 주장을 너희들은 기뻐해서도 안되고 꾸짖어서도 안 된다. 기뻐하지도 꾸짖지도 않은 채 그 귀절과 문장을 잘 가져와서 經에 맞지 않고 律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가 한 말은 진정 세존의 말씀이 아니다. 이 비구는 잘못 파악했다 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의 말을 파기해야 한다. 그리고 經에 맞추어 보고 律에서 찾아보았는데 經에 맞고 律에서 찾아진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가 한 말은 진정 세존의 말씀이다. 이 비구는 잘 파악했다 라고 비구들이여, 이러한 첫 번째 큰 지시를 받아들여라."
첫번째 指示는 위에서 보듯이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다는 法과 律과 가르침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두번째는 앞장선 장로 비구가 있는 어떤 곳의 승단(amukasmim v se sa gho viharati sathero sap mokkho)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다는 法과 律과 가르침에 대한 것이고, 세번째는 '多聞이고 阿含을 전하고 法을 지니고 律을 지니고 論母를 지닌 수많은 장로 비구들'(sambahula ther bhikkhu bahussuta g tagam dhammadhar vinayadhar m tik dhar )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法과 律과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多聞이고 阿含을 전하고 法을 지니고 律을 지니고 論母를 지닌 단 한명의 장로 비구'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노라고 주장하는 法과 律과 가르침에 대하여 검토하는 것으로 모두들 그 검토의 방법은 동일하다.
이상의 四大指示는 한마디로 모든 佛敎人의 주장은 經과 律을 바탕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취지이다. 좀더 부연하면 검토의 대상은, 세존의 면전에서 들었다고 해도 검토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닌 정도이다. 그리고 검토의 방법은 철저히 經에다 맞추어 보고 律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그럴때 對法論은 물론 검토의 대상에 들어가며, 또한 對法論 검토의 방법은 經과 律에다 일단 맞추어 보고 찾아보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四大指示가 經과 律을 근거로 한 검토·비평에 주안점이 두어진데 비해, 다음의 經說은 검토 후 참·거짓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화합하고 우애있고 싸우지 않는 너희들에게 승단의 어떤 俱足梵行者(sabrahmacarin)가 배워야할 法을 설할 것이다. 그때 너희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 존자는 의미를 잘못 파악했고, 문장을 잘못 일렀다'라고, 그때 너희들은 그의 말을 기뻐하지도 꾸짖지도 말고 그에게 이와같이 말해야한다. '벗이여 이 의미에는 이 문장과 저 문장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하오? 그리고 이 문장에는 이 의미와 저 의미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하오?'라고. 그가 만약 '벗들이여, 이 의미에는 이 문장이 합당하니 이 문장이 곧 저 문장이오. 그리고 이 문장에는 이 의미가 합당하니 이 의미가 곧 저 의미이오.'라고 (틀리게) 답한다면, 그를 칭찬하지도 무시하지도 말고, 그가 그 의미와 그 문장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두번째 구족범행자는 '의미를 잘못 파악했으나 문장은 바르게 일러주는 경우'(aya yasm attha micch ga hati, vya jan ni samm ropeti)이고, 세번째 구족범행자는 '의미는 바르게 파악했으나, 문장을 틀리게 일러주는 경우'이거니와 그 대처 요령은 틀린 것에 한하여 위에 준한다.
"승단의 또 다른 구족범행자가 法을 설할 것이다. 그때 너희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이 존자는 의미도 바르게 파악했고 문장도 바르게 일렀다'라고. 그때 너희들은 훌륭하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저희들이 존자와 같이 의미를 갖추고 문장을 갖춘 구족범행자를 뵙는다는 것은 저희들에게 매우 큰 이익이옵니다'라고"
이상의 經說로부터 우리는 우선 의미(attha)와 문장(vya jana)의 두가지 측면에서 검토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내용과 형식 두가지 면이 모두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의미도 모른 채 經文만 지니고 있는 것도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지만, 정확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경계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반드시 잘못된 의미나 문장은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향력이 큰 존재일수록 잘못된 경우 그 악영향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향력이 큰 對法論書일수록 더욱 면밀한 비평·검토가 필요한 것이고 개선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논술들을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對法論도 비평할 수 있고 또 비평해야 하며, 비평의 근거는 經과 律이며, 비평의 측면은 의미와 문장임을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좀더 자세히 비평의 방법론을 살펴보자.
우선 對法論을 비평하게 되는 目的을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그것은 길(magga)과 道(patipada)에 대한 是非를 寂靜시키기 위한 것이다.
"生活가 戒本(p timokkha)에 관한 是非는 작은 것이다. 그런데 길과 道에 관하여 是非가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 시비는 많은 生類의 이익을 막고 행복을 막으며, 天人의 이익과 도움됨을 막으며 괴로움만이 될 것이다...
①화냄과 적개심, ②위선과 심술, ③시기와 인색, ④교활함과 기만, ⑤악한 원함과 잘못된 견해, 그리고 ⑥보이는 것만 붙잡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파악하여 포기하지 못하는 것, 이들이 여섯가지 시비의 뿌리이다....
法과 律에 대해 시비가 일어나면 비구들이 모두 화합하게 모여 主된 法(dhamma - netti)을 철저하게 검토한 뒤(samanumajjitva) 일치하는 데서(semeti) 비로소 諍事를 적정 시켜야 한다"
우리는 비평을 위한 비평,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대중 속에 일어난 길과 도에 대한 異見대립, 法과 律에 관한 是非 거리를 적정 시킴으로서 모든 대중의 이익과 행복과 도움됨을 막지 않고 增長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 어떠한 對法論 또는 對法論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비평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凡夫는 涅槃을 열반이라고 생각한다(sa j n ti) ; 열반을 열반이라고 생각한 뒤 내가 열반이라고 사유한다(ma ati) 내가 열반 속에 있다고 사유한다. 열반을 나라고 사유한다. 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한다. 이어 열반을 기뻐한다. 그것은 왜냐? '범부는 그것을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나(世尊)는 설한다.
...有學 비구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잘 안다.(abhij n ti) : ... 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유학 비구는 그것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無學비구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잘 안다....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무학 비구는 그것을 완전히 알고,...탐착을 제거했고...화냄을 제거했고...愚痴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如來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잘 안다.... 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여래는 그것을 완전히 알고...잘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涅槃이라는 술어가 어느 對法論에 사용된다고 해서, 그 對法論이 진정 열반을 참되게 전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凡夫의 경우처럼 열반에 대한 이해가 완전치 못하여 단순한 생각과 사유에 그쳐있다면 이는 비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생각과 사유 차원의 논술을 지양하고 이들을 비평 비판해야 함은 이외에도,
"名目(adhivacana)과 名目의 길, 表現(nirutti)과 표현의 길, 施設과 시설의 길, 지혜(pa a)와 지혜의 사량(avac ra), 도는 일(va a)과 돌아감(va ati) 등을 비구는 잘 알고 해탈한다"
"보이고 들리고 사유되고 식별된 것에서 보이고 들리고 사유되고 식별된 것을 말하는 자가 있으나... 漏盡解說 비구는 이 보이고 들리고 사유되고 식별된 것에서 멀리도 가까이도 않고 의지하지도 매이지도 않은 뒤 벗어나고 결박을 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지낸다"
등의 經說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생각이나 사유는 넘어섰다 하더라도 믿음(saddha), 性向(ruci), 傳統(anussava), 樣相에 대한 사색( k ra-parivitakka), 見에 입각해 禪속에 들어 지속함(di hi-nijjhana-khanti)등에 바탕을 두고 논술한 對法論도 또한 비평·비판되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는 대개 초기불교 경전 같은 경우는 외도의 사상을 비판할 때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 내에서도 대법론서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매우 유익한 면이 또한 있습니다. 외도사상가만큼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대법론사들도 자신의 논문을 쓸 적에 이 아비달마 문헌을 작업할 적에 자신의 성향, 자신이 속한 종파, 또는 자기 종파의 전통 이런 것에 대단히 경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성향에 따라 종파를 찾게 되고 자기 종파의 전통에 따라 믿음을 갖게 되고 자기 종파의 견해에 입각해 결국 수행한 뒤에 그걸 바탕으로 논술할 것을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그 5가지 측면을 이 부파불교와 같은 경우에 적용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 않느냐 우린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대법론서들을 보게 되면 그 수가 상당하고 또 대개 서로 차이나는 견해들을 각각 지니고 있는데 그렇게 된 이유를 살피는 것도 비평의 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세상에 숱한 사상이 난무하는 것을 고타마 붓다는 각 사상가들이 견해(見解)가 서로 다르고 성향(性向)이 서로 다르고 수행(修行)이 서로 다르고 스승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보는 듯하다. 이 다섯가지는 사실 앞 단락의 다섯가지와 유사하다. 앞의 것이 실제 사상이 창출되는 근거를 제시하는데 초점이 주어졌다면, 뒤의 것은 단순히 각 사상의 횡적인 요소를 언급하는데 중점이 두어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견해는 어느 대법론이 속해 있는 종파의 이론체계로 대치할 수 있고 정인과 수행은 실천 체계로 대치해 볼만하다. 그리고 성향은 적절한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지만, 스승은 자종의 통시적 공시적 지도자들로 충분히 대치할만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스승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직 한 분, 고타마 붓다 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다음의 經說은 論書 상호간의 異見 대립에 대하여 좀더 근원적인 답변이 될 듯하다.
"모든 사문·바라문이 말(vada), 계율(sila), 욕심(chanda), 고집함(ajjhosana)이 서로 다른 이유는...世間에는 界(dhatu)가 많고 또 서로 다른 界가 있는데 각자가 관계하고 있는 界에만 완고하게 부딪치듯이 들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對法論 비평의 궁극적인 근거는 역시 그 論書의 論述대로 행할 경우 利益되는 바가 있는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여기서 利益되는 바는 최소한 不死의 法의 證得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종교적 이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는 어떤 말이 참되고 사실이고 다른 사람에게 뜻에 맞고 사랑스럽다해도 그 말이 利益을 갖추지 못한(an-attha-sa hita) 경우에는 말하지 않는다. 여래는 참되고 사실이고 남에게도 뜻에 맞고 사랑스러운 말이 利益을 갖추었을 경우 때(k la)를 알아 그 말(을 하고)대답도 한다. 여래는 중생을 동정하기 때문이다"
佛說이 佛說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까닭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진정 중생에게 실질적인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는 말씀만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리풋타는 四念處 七覺支 등을 통해 붓다의 수승함을 알게 된 것인지 붓다에 대하여 他心通을 지닌 까닭에 붓다의 수승함을 알아낸 것은 아니라고 표백한다. 四念處 등은 실천도이다. 실천도는 실질적인 과보를 예상케 한다. 즉 사리풋타는 四念處 등의 실천도를 바탕으로 한 修行의 과보가 있었기에 그 수승함을 안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결국 對法論의 어떤 論述이 맞느냐 틀리냐는 行者에게 실질적인 과보를 안겨주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항목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對法論이라도 비평의 대상이 됨을 살폈고, 그 비평의 일반적인 방법은 經과 律에 입각하여 의미와 문장의 양면을 살피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비평의 목적은 길과 道 및 法과 律에 대한 是非를 적정시키는데 두었고, 그 비평의 구체적인 방법은 단순한 사유에 입각한 논술 또는 믿음·성향·전통 등에 입각한 논술을 특히 비평하는데 주안점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對法論書가 다양한 것에 대한 이유의 일단을 살폈고, 비평을 통해 결국 내려야 하는 眞·假의 결정은 利益되는 果報의 有·無에 달려있음을 또한 살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 중 다시 한번 강조하기 싶은 것은 對法論을 비평할 때, "傳統(anussava)을 진리로 보는 입장에 서있는 자가, 소문(itihitiha)과 傳說(parampar )과 갖추어진 藏經(pi akasampad )을 통하여" 論述한 부분을 반드시 찾아서 비평해야 하며, 아울러 "사색하고 사량하는 자(takkin v mar sin)가 사색과 사량에 잡히어 스스로에게 해명되는 바를" 論述한 부분을 반드시 검토하여 비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평의 근거는 물론 經說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원시불교의 자료로써 일례를 들어 俱舍論이라는 論書를 비평한다면 이는 역으로 원시불교 그 자체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결과도 기대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한 外道가 '당신은 제자들에게 어떤 法을 가르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하지 않고 오히려 外道의 所說을 주제로 삼아 그에 대한 비판을 해나감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시키는 때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俱舍論의 논술에 잘못이 있을 경우 그것을 비판하면서 원시불교의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음을 가능케 한다.
3) 조론(造論)의 자세
대법론을 비평. 비판하는 논술도 결국 일종의 대법론이 되는 셈이다. 실제 현존하는 숱한 대법론서들은 모두 기존의 논서들에 대한 비평의 결과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기존 논서들을 비평한 후에 우리는 새로운 논문을 작성할 수밖에 없다. 비평만으로서 그친다면 그것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작업일 뿐이다. 즉 비평을 위한 비평에 그치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새로운 조론(造論)의 작업이 필요하거니와 그 새로운 조론(造論)은 가급적이면 경설(經說)에서 시사하는 방법론에 입각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對法論에 나타난 法과 律에 대한 시비를 經說에 입각하여 止息하고, 붓다의 설법이 지니는 목적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論述을 시도해야 한다. 단 가급적이면 그 새로운 논술도 철저히 經說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그리고 또 다른 쟁론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취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부파불교의 주자료인 대법론서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고타마 붓다에 의해, 건전한 방법론을 견지하는 한, 충분히 허용되고 또한 장려되는 것으로 결론할 수 있다.
Ⅱ.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의 전개
1. 발달의 개관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敎學)
3.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敎學)
1. 발달의 개관
⑴ 총설(總說)
세가지 단계
일반적으로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서(論書)에는 세 가지 발전단계가 있다. 그 첫째 단계에서는 경장(經藏) 가운데에서 이미 교법을 정리. 조직하기도 하고 해설이나 주석을 하기도 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비달마는 아니며 경장 가운데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발달하여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아비달마 장(藏, abhidharma pi aka) 즉 논장(論藏)으로서 경장에서 독립하는데, 거기에서는 교법의 조직이나 해석이 더욱 더 촉진되었다. 다름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촉진된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한 아함경설(阿含經說)의 해석이나 조직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아함경전의 내용은 즉흥적.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던 석존의 교설을 그가 입멸한 후 정리하여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제경(諸經)의 집성이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되어 흔히 학자들이 말하는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와 같은 교의체계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阿含속의 아비달마
아함 가운데 나타나는 아비달마적 요소로서는 대개 두 가지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교설 속의 어구(語句)에 대한 주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조직하는 것이다.
석존의 교법은 일반적으로 쉬운 말로 이야기되며 특이한 용어나 난해한 어구가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석존 자신이 청중을 위하여 그가 사용한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때에는 석존이 설법을 마친 후 청중 가운데 선배가 후배에게 스승의 말씀에 대하여 해설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석존이 입멸한 후 시대가 지남에 따라, 또 불교가 전파된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교설 속의 어떤 語句에 대해 주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더욱 더 많아지게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함경전에서는 석존 자신이 그러한 주석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를테면 사리풋타나 목갈라나)이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對論)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그렇게 이루어진 설명. 해석을 옆에서 듣고 있던 자(전설적으론는 석존의 시자였던 아난다)가 훗날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함경전의 원칙이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설명. 해석 모두가 석존 재세 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 부분은 석존 재세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부분은 석존이 입멸한 후 승단 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적 연구에 의해 부가되어진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가된 부분이 점점 더 증대하여 마침내 아함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아함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으며, 여기서 아비달마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설이 정리. 조직되었다고 한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방식으로서 두드러진 것은, 숫자와 관계 있는 교설을 그 수(數)대로 정리하여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교설을 내용에 따라 분류. 구별하여 동일한 주제를 가진 것들을 모아 한곳에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를 '법수(法數)'에 의한 정리라 하고 후자를 '상응(相應)'에 의한 정리라고 한다. 각각의 단경(單經) 가운데에는 법수에 의해 정리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몇 개의 단경을 모은 경군(經群)에다 그러한 방법을 적용시킨 것도 있다. 또 다수의 경군(經群)을 모아 동일한 방법으로 전체를 정리한 것이 증지부(增支部). 증일아함(增一阿含)이다. 상응(相應)에 의해 정리하는 방법은 단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군(經群)상에서 그것을 적용시킨 예는 많은데, 다수의 경군(經群)을 그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이 상응부(相應部). 잡아함(雜阿含)이다.
경장(經藏)은 그것이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거기서 아비달마적 연구가 고조됨에 따라 점차 이 같은 부가. 증광이나 정리. 안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그 중에는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비달마적 경향이 진전되어 이제 거의 하나의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이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부분 있다. 이를테면 팔리 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 ya)'에 속하는 《닛데사, Niddesa》는 같은 소부에 수록된 《숫타니파타 Suttanip ta》의 일부분에 비해 매우 아비달마적인 주석이다. 또한 역시 '소부'에 속하는 《파티삼비다맛가 Pa isa bhid magga》는 실천수행의 덕목을 정리하여 해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내용을 지녀 실제로 때에 따라서는 논장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될 경우가 있을 정도이다.
아비달마 논서의 성립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경장(經藏) 안에서 점차 아비달마적 경향이 발달하여 마침내 독립된 아비달마 논서가 형성되었다. 즉 아비달마 발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즉 아비달마 발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최초기의 아비달마는 아함 속의 아비달마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주로 아함에 타나난 그러한 경향은 각 부파에서 그대로 연장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 파 사이의 공통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미 각 부파의 독특한 교의 학설을 반영한 특수한 용어나 특수한 해석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일단 독립한 아비달마 장(藏)은 순조롭게 발달하여 마침내 아함경전의 연장적인 입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서서히 새로운 형태의 논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부파적 색채는 점차 농후해지고 술어를 독특하게 해석. 정의하였으며,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극단적일 정도의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아비달마 발전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그러한 교설을 조직적으로 논술하는, 웅장한 구성을 지닌 논서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체계적인 논서의 출현
설일체유부에서는 뒤에서 설명할 《발지론(發智論)》(완전한 명칭은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서 교의 학설의 거의 모든 전모를 밝히고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에 이르면 그 학설을 정연하게 조직하는데, 체계적인 논서로서의 완성된 형태는 역시 《구사론(俱舍論)》(완전한 명칭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의 등장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한편 남방 상좌부에 있어서 그것에 상당하는 논서로서는 《비숫디맛가, Visuddhimagga(淸淨道論)》를 들 수 있다. 전자는 북전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승 가운데 한 사람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또는 天親) 의 저작이고 후자는 남전 팔리어 경론의 대 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저술이다. 양자가 서로 전후하여 세상에 나타난 것은 5세기 굽타 왕조의 중기 무렵이다. 물론 이 시대 인도불교의 주류는 이미 대승불교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미달마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⑵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논서(論書)의 발달
현존하는 설일체유부의 논서
한역(漢譯) 대장경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아비달마 논서는 매우 많아 크고 작은 신구(新舊)의 논서가 28부, 그 페이지 수로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의 간본(刊本)으로 실로 3,500 페이지를 넘는데, 그 대부분이 설일체유부에 속한 것이다(그리고 또한 그 반수 이상이 7세기 玄 에 의해 번역된 것임). 그러나 그 가운데 산스크리트어 원문이 남아 있는 것은 최근에 간행된 《구사론(俱舍論)》즉《아미다르마코싸, Abhidharmako a》를 제외한다면 약간의 단편만이 알려질 뿐 거의 말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한역에서는 전하고 있지 않은 상세한 《구사론주(俱舍論注)》(야쏘미트라 Ya omitra 지음) 하나와 《구사론(俱舍論)》보다 나중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아비다르마디파, Abhidharmadipa》라고 하는 제법 많은 분량의 논서(저자불명) 하나 (그렇지만 전체의 반밖에 남아있지 않음)가 원문 그대로 남아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티베트어 역 대장경 가운데에는 《구사론(俱舍論)》과 그것에 대한 크고 작은 주석류 몇 부(部)가 수록되어 있는 것 이외에 한역에서도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 《시설론(施設論)》이 완본으로 남아 있다. 또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과 그것의 주석 하나도 남아 있다. 티베트어 역 아비달마는 양으로 말한다면 거의 한역에 필적할 만한 방대한 것이지만 주로 구사론과 관계하는 논서에 두드러지게 편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논서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초기의 논서는 경장(經藏) 가운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아비달마적 경향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 중기의 논서는 그 뒤를 이어 이 부파의 독특한 교설을 점차 발전시킨 것, 후기의 논서는 그렇게 발전된 교설을 조직적이고도 일관된 체계로 논술한 것이다.
초기의 논서
초기의 논서로서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완전한 명칭은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 이하 品類足論까지 6論 모두 阿毘達磨란 말이 생략되었음)과 『법온족론(法蘊足論)』이 있다.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은 장아함(長部)에 속하는 經의 하나인 《상기티숫탄타, suttanta(衆集經, 大集法門經)》의 내용을 부연. 해석한 것이다. 《상기티숫탄타》는 여러 가지 불교술어를 1에서부터 10까지의 數에 따라 열거한 경전으로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색채가 농후한 경운데, 《論》에서는 그 경에 열거되고 있는 술어 하나하나에 주석적인 설명을 부가하고 있다. 이것은 아함 가운데 특정한 一經을 채택하여 그것에 釋義를 부가한 것이기 때문에 아함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볼 수 있으며, 論藏이 經藏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하나의원초적인 형태를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법온족론(法蘊足論)』은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처럼 특정한 한 經에 대해 주석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함에서 21가지 주요한 교설을 선정하여 교설 하나마다 하나의 章을 할애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그 교설을 담은 經文을 첫머리에 게재하고 난 다음 이에 대해 자세히 釋義하는 방법은 요컨대 최초기의 아비달마 논서의 특징적인 것이다. 각 장 첫머리에 게재되어 있는 경문에는 지극히 아비달마화한 것을 엿보인다. 이를테면 '雜事品" 첫머리에 등장하는78가지 번뇌를 열거한 경문이나 '根品' 첫머리에 게재된 二十二根을 언급한 경문 등은 현존하는 아함경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설일체유부가 전승한 經藏 중에 그 같은 經文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함으로서는 최후기 즉 아비달마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에 부가되고 증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78가지 번뇌나 二十二根을 종합. 정리하여 하나의 교설로 시설하는 방법을 일반적인 아함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번뇌나 根에 대한 각각의 교설은 모두 經藏 속의 여러 곳에서 散說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論은 아비달마 논서로서 성립하였지만 아직 經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經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論'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는 이미 설일체유부 특유의 용어나 사상도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여러 부파와 공통되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법온족론(法蘊足論)』의 경우 남방 상좌부에 속한 『비방가, Vibbha ga』나 소속부파가 확인되지 않은 『舍利弗阿毘曇論』등의 논서와 비교할 때 그 내용에 있어서나 전체의 구성에 있어서 서로 공통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論은 전통적으로 석존의 直弟子를 작자로 내세우고 있다.
중기의 논서
그 다음에 성립한 것으로 생각되는 『施設足論』에서부터 아함경전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스타일에 있어 아비달마 논서 특유의 색채가 짙게 나타난다. 『識身足論』이나 『界身足論』에 이르면 法數에 의해 종합. 정리된 술어(아함의 法數 이외에 이 부파 특유의 법수도 나타남)는 매우 복잡하게 해석되고, 각 술어간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일 정도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져 아비달마적 논의는 현저하게 정치해지고 번쇄해졌다. 『施設足論』은 아비달마적인 우주론. 세계론을, 『식신족론』은 마음(心)의 작용에 대한 분석을, 《계신족론》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 心所)에 대한 해석을 각각 크게 발전시켜 설일체유부 교학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바수미트라(Vasumitra, 世友라고 한역)가 지었다는 《품류족론》은 원래 몇 개의 작품을 한데 모아 하나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며, 혹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에서는 술어에 대한 분석적 고찰이 더욱더 발전되어 있으며, 동시에 '五位' 설이나 '九十八隨眠' 설 등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이론이 확실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논서이다.
카트야야니푸트라(K ty yan putra, 迦 延子 또는 迦多衍尼子라고 한역)가 저술한 《發智論》(《八 度論》은 別譯)의 출현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역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시설족론》에서부터 《품류족론》에 이르는 동안 여러 논들이 주로 각기 특정한 문제를 분담하여 고찰하고 있는데 반해 이 論에 이르면 비로소 설일체유부의 학설 전반에 걸쳐 조직적인 논술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이 論 이전의 立論(集異門足. 法蘊足. 施設足, 識身足, 界身足, 品類足)을 六足論이라 하고 이 論을 發智身論이라고도 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 부파의 대표적 논서로서 존중되었다. 다만 조직적인 논술이라 해도 8章으로 이루어진 이 論의 구성이 반드시 완전하고도 정연한 순서로 작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고작해야 관련이 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한곳에서 모아 논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또한 이 論보다 훨씬 적은 분량이고 설일체유부의 학통상 차지하는 위치도 물론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이 論과 비슷하게 구성되고 같은 발전단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으로는 《尊婆須蜜菩薩所集論》을 들 수 있다.
《발지론》에 대한 매우 방대한 주석서(玄 의 한역으로 200권)가 《대비파사론》(완전한 명칭은 《阿毘達磨大毘婆沙論》)이다. 이 논서가 나타남으로써 문제의 세분화는 한층 촉진되었고, 고찰 역시 더욱 더 정밀해졌다. 실제로 이것은 단순히 발지론의 주석일 뿐만 아니라, 만약 어떤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면 발지론에서 언급되지 않은 문제까지도 새롭게 채택하여 논의하고 있다. 또한 自派 내의 여러 가지 異論이나 다른 학파의 학설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어서 실로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가능한 한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주석 방법에 있어서도 반드시 발지론의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충실하게 해설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라고 인정되는 부분에서는 특별히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극히 간략하게 취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이 釋論은 실질적으로 發智本論의 한계를 뛰어넘어 분명히 독자적인 커다란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모두 발지론의 조직에 따라, 그 文意에 근거하여 주석하는 태도를 지키고 있다. 이 論은 전설에 의하면 카니시카 왕 치하 케시미르에서 파르스바(P r va, 脇尊者라고 한역)를 비롯한 500명의 논사가 모여 전후 20년에 걸쳐 편집하였다고 하는데, 기원후 100~150년 무렵 케시미르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尸陀槃尼가 지은 《毘婆沙論》은 未完의 漢譯 한 권만 남아 있다. 이것은 완역되었다고 할지라도 양적으로는 《大毘婆沙論》과 비교할 수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그것과 매우 가깝다.
《阿毘曇甘露味論》은 현존하는 논서 중 가장 먼저 漢譯(역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무렵 번역됨)된 것이다. 비록 小論이지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발지론에서 다음의 《阿毘曇心論》으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의 논서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중기논서에서 후기 논서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논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入阿毘達磨論》은 성립 연대로 말하자면 오히려 후기의 《구사론》과 같은 시대이든지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지어졌으나 독특한 구성을 지닌 要綱的 입문서로서, 역시 중기논서에서 후기논서로 이행해 가는 형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역에서는 그것을 塞建陀羅가 지었다고 하지만 티베트 어 역에서는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작자 불명이다. 대부분 술어의 정의만을 열거한, 간단한 내용의 論이지만 설일체유부 가운데 하나의 특이한 유파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節이 있으며 대승불교 唯識학파의 논서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후기의 논서
《阿毘曇心論》(法勝 지음, 僧伽提婆 역 4권) 역시 小論이지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조직화하는데 특이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이 論은 모두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7장(뒤의 3장 중 2장은 補遺, 1장은 부록)에서는 복잡하게 발달한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정연하게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발지론》에서 이루어진 8장의 조직에 비해 훨씬 진보한 것이다. 제1, 2장에서는 이 학파의 근본입장으로서 '法'의 이론(뒤에 설함)을 설하고 제3, 제4장에서는 미혹한 세계의 실상을 밝혔으며, 제5, 6, 7장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와 그것에 도달하는 길(道)을 논하였다. 이 같은 論의 구성방법은 이후 거의 모든 설일체유부 논서가 답습하는 바가 되었다(앞에서 설명한 《입아비달마론》만은 예외). 운문으로 학설을 간결하게 설하고 산문으로 그것을 주석하는 형식도 아비달마 논서로서는 이 論이 처음으로 채용한 것이며, 역시 이후 거의 모든 설일체유부 논서가 이를 답습한다(《입아비달마론》만은 예외). 그러한 이유로 이 논서 이후를 '후기의 논서'라고 한다.
《阿毘曇心論經》과 《雜阿毘曇心論》은 《아비담심론》을 다소 개량. 증보(《잡아비담심론》의 증보는 상당히 大部임)한 것으로, 대체로 그것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俱舍論》 역시 그것의 연장. 발전이지만 《아비담심론》 등에서 맨 마지막 3장에 포함된 보유나 부록을 정리하여 앞의 7장 가운데 적당한 곳에 수록하고, 다른 새로운 1장을 더하여 미혹한 세계의 현실을 밝히는 부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한층 더 정연한 조직이 되었다. 거기다 다시 論의 말미에 특별히 독립된 1장을 부가하여 無我의 문제를 노하고 있다. 《集異門足論》.《法蘊足論》에서 시작하여 《發智論》에서 학설의 대강의 전모를 드러내고 《阿毘曇心論》에서 그 조직적 논술의 정형을 갖춘 설일체유부 아비달마는 이 《구사론》에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체계적 논서의 완성태라고 할 수 있는데, 분량에 있어서도 《발지론》의 한 배 반, 《아비담심론》의 두 배나 되는 大著이다.
《구사론》의 저자는 인도 불교사상사에 있어 빛나는 별이라고도 할 만한 바수반두(Vasuvandhu)이다. 《구사론》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사상을 상세히 설하여 밝히고 있으며 특히 많은 불교술어에 대하여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후 불교사에 있어서 인도. 티베트. 중국.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불교교의의 기초가 되는 교과서로서 활발히 학습. 연구가 이루어져 수많은 주석서. 연구서. 해설서가 작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서는 모든 아비달마 논서 중에서 다른 것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사론》이 반드시 항상 설일체유부의 학설만을 충실히 粗述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때때로 저자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전통 학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異說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럴 경우 설일체유부의 정통설을 비판하는 저자의 입장이 경량부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구사론》을 단순히 설일체유부의 논서라고 단정짓는 데에는 실로 무리가 있으며 도리어 이것을 경량부의 논서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앞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구사론》은 전체적으로 형식과 내용의 모든 면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아비담심론》이래,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집이문족》.《법온족》 이래 설일체유부의 논서가 발전한 역사를 계승하여 작성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자 자신이 이 論을 논설하는 경우도 많지만 케시미르 毘婆沙師(Vaibh ika, 大毘婆沙論을 배우는 자의 뜻)의 교리에 따라 설명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주저 없이 설일체유부 논서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구사론》을 계승한 것으로 상가바드라(Sa ghabhadra, 衆賢이라 한역)의 《阿毘達磨順正理論》과 《阿毘達磨藏顯宗論》이 있다. 이 두 가지 논서는 운문의 부분에서는 구사론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지만 산문으로 된 注解의 부분에서는 바수반두의 학설을 엄격히 비판하여 정통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선양하려고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즉 기본골격은 구사론을 따르되 그 학설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順正理論》은 그 분량에 있어 구사론의 두 배 이상이 되며 《顯宗論》도 구사론보다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는데, 전자에서는 특히 그 예리한 비판과 상세한 반론이 두드러지며 후자에서는 비판보다 오히려 정통설의 천명에 중점을 주고 있다. 전설적으로 상가바드라는 바수반두와 동 시대 인물이다. 즉 文法學者 바수라타(Vasur ta)가 구사론의 語句에 대해 批義하다가 바수반두에게 반론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일체유부의 학승 상가바드라를 아요댜(Ayodya, 굽타왕조의 수도, 현재 라그노 동쪽 120kg 지점)로 불러 다시 반박하기 위해 이 두 論을 짓게하였는데, 바수반두는 상가바드라와의 대결을 피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상가바드라가 바수반두와 동시대이든지, 혹은 그 시대로부터 멀지 않은 시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작자는 알려지지 않지만 근래 그 산스크리트 원문이 간행된 《아비다르마디파, Abhidharmadipa》라고 하는 논서 역시 거의 구사론의 골격을 따르면서 구사론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고 있다. 《아비다르마디파》는 원래 운문의 텍스트에만 해당되는 명칭이고 그것에 대한 산문의 주석을 《비바샤프라바, Bibh prabh 》라고 한다. 운문의 부분이나 산문의 주석은 필시 같은 작자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편의상 두 가지를 모두 《아비다르마디파》란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논서는 오직 하나의 원문 사본만이 발견되었을 뿐 다른 어떠한 譯本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 사본마저 반 이상이 산일 된 不完本이지만,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구사론에 필적할 만한 분량을 가진 大部의 논서이다. 연대는 대개 구사론보다도 약간 下代일 것으로 추측된다. 구사론을 비판하는 책으로서는 《순정리론》에 비해 질적으로 훨씬 뒤떨어지지만, 다만 다 같이 구사론을 비판하면서도 그 학통을 《순정리론》의 그것과는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즉 《입아비달마론》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매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논서이다.
⑶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 논서(論書)의 발달
팔리어 칠론(七論)
팔리어 論藏의 七論은 그 성립 연대가 그다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그 순서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담마상가니(Dhammasa gani, 法聚論=法集論)
2) 비방가(Vibha ga, 分別論)
3) 다투카타(Dh tukath , 界說論)
4) 풋갈라판냣티(Puggalapa ati, 人施設論)
5) 카타밧투(Kath vatthu, 論事論)
6) 야마카(Yamaka, 雙對論)
7) 팟타나(Patthana, 發趣論)
⑴ 《담마상가니》 제1장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 心所)을 善. 惡. 無記(善도 아니고 惡도 아닌 것)의 三性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양하게 분석적으로 고찰한다. 이른바 八十九心이 여기서 설명되며 마음의 작용으로서 40가지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물질적 존재(色)를 한 가지 종류에서 11가지 종류로 분류하여 그것 역시 각각 다양하게 분석한다. 제3장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22가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100가지(이상 도합 122가지를 '아비달마의 論母'에 의한 분별이라고 함), 나아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 42가지(이를 '經의 論母'에 의한 분별이라고 함), 도합 百六十四門의 분별을 설하며, 제4장에서는 앞장의 그것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아비달마의 논모' 百二十二門에 의한 분별을 시도하고 있다. '경의 논모'라고 하는 이유는 경장 '장부경전'의 《상기티숫탄타, Sangitisuttanta》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 가운데 일부분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볼 때 北傳의 《集異門足論》과 관계하는 것이다.
⑵ 《비방가》는 역시 북전의 《法蘊足論》과 비슷한데, 아함 가운데 주요한 교설을 뽑아 그것을 종횡으로 분석 고찰한다. 먼저 그 교설을 나타내는 定型的(그 대다수는 아함에 그대로 나타남)를 언급하고 그것에 대해 正義的인 설명(그 것을 '經分別'이라고 함)을 부가한 다음, 다시 그것을 《담마상가니》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論母에 근거하여 다양하게 분류 고찰한(그것을 '아비달마 分別' 및 '물음'이라고 함) 것이다.
⑶ 《다투카타》는 술어가 나타내는 개념의 內包. 外延을 엄격하고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것들 서로의 포섭. 彼포섭의 관계, 相伴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관계 등을 논하는, 극히 형식적이고도 번쇄한 논서이다.
⑷ 《풋갈라판냣티》는 한 가지 종류의 '人'에서부터 10가지 종류의 '人'까지를 각각 몇 가지 셋트로 열거, 도합 142가지 종류의 '人'에 대해 正義的으로 설명한다. 142가지의 명칭은 모두 경전에서 언급되는데, 그 대부분은 增支部의 〈二法 章〉에서부터 〈五法 章〉까지, 또한 長部의 《상기티숫탄타》에서 채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은 경전에 나타난 명칭을 정리. 안배하여 획일적이고도 정의적인 설명을 부가한 것으로, 七論 중 가장 초기에 성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⑸ 《카타밧투》는 七論 중 팟타나와 함께 가장 후대에 성립하였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전설적으로도 석존이 지었다고 하지 않았다. 즉 佛說에 의해 제시된 어떤 논제에 대해 장로 목라리풋타 팃사 Moggaliputtatissa가 아쇼카 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결집에서 이것을 설하였다고 한다. 전체는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독특한 내용을 갖고 있다.
⑹ 《야마카》는 두 가지 개념을 대비하여 논의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예컨대 'A가 모두 B인가. B가 모두 A인가'라든지 'A가 일어나는 곳에는 B가 일어나는가. B가 일어나는 곳에는 A가 일어나는가'라고 하는 식으로, 주요한 교설 가운데 나타난 용어의 의미.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대비하고 검토한다.
⑺ 《팟타나》는 七論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對論'이라고도 하며, 그 내용은 二十四緣에 대한 설명. 해석이다. 여러 가지의 '緣'은 아함경전 이래 여러 곳에서 散說되고 있지만 그것을 二十四緣으로서 정리하여 설한 것은 이 論이 처음이다. 또한 諸緣의 정의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서로 관계하는 모든 경우를 '아비달마 論母'에 따라 고찰하고 규정하려고 하였다.
특수한 세 가지 論典
연대적으로는 대개 七論 다음의 것(혹은 七論 중 그 성립 연대가 늦은 것보다는 조금 앞선 것인지도 모른다)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⑴ 《넷티파카라나, Nettippakara a(指導論)》, ⑵ 《페타코파데사, Pe akopadesa(藏釋論)》, ⑶《밀린다팡하, Milindapa ha(彌蘭陀王問經, 밀린다의 질문》등 세 가지 논서가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⑴은 서기 1세기 전후의 인물이라고 하는 캇차야나(Kacc yana)가 지은 것으로, 경전의 이해에 대한 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⑵는 ⑴의 補遺라고도 볼 수 있고, ⑶은 당시 서인도를 지배하던 그리이스 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 이름은 밀린다 Milinda)와 불교의 장로 나가세나(Nagasena)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교의에 관한 對論의 기록으로, 다른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서도 《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 팔리어 傳보다 오히려 더 오래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은 기원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일종의 교의 학습서이지만 七論처럼 번쇄하거나 형식적인 논의가 많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에 따른 풍부한 문답으로 매우 흥미 있는 문헌이다.
이상의 세 가지 논서는 經藏이나 論藏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이다. 특히 《밀린다팡하》가 거의 삼장에 속하는 正典과 같은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붓다고사의 주저 《비숫디맛가, Visuddhimagga》에서 이 문헌을 다루고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미얀마의 상좌부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七論의 주석
남방 상좌부는 三藏에 대하여 여러 가지 古注를 전하였는데, 그것을 붓다고사 계의 사람들이 집성하여 주석서로서 정리하였다.
七論에 대한 붓다고사의 주석은 현재 三部가 남아 있다. 즉 《담마상가니》에 대한 《앗타사리니 Atthasalini(義貞越論)》, 《비방가》에 대한 《삼모하비노다니 Sammohavinodani(除痴論)》, 그 밖의 五論에 대한 《판찻파카라나앗타카타 Pancappakaranatthakatha(五論注解)》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상당한 大部로서, 論書를 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七論 이후 발달한 학설까지 담고 있다. 그리고 앞의 두 가지는 특히 다음에 설명할 《비숫디맛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맛가 Visuddhimagga》 즉 《淸淨道論》은 七論 이래 전개되어 온 남방 상좌부의 모든 교리를 하나로 정리하여 조직적으로 설한, 바로 이 부파를 대표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서이다.
붓다고사 보다 2, 300년 앞선 인물인 우파팃사 Upatissa는 《비뭇티맛가, Vimuttimagga(解脫道論)》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붓다고사는 그것을 기초로 증보하여 이 논을 지었다. 《비뭇티맛가》의 원문은 알려지지 않지만, 다만 다소 변화를 받은 텍스트의 역본이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모두 2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戒. 定. 慧 '三學'의 순서에 따라 불타의 교법을 실천의 道로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하여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戒의 淸淨') 나아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의 수련을 거듭함('定의 淸淨')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깨끗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한다('慧의 淸淨')고 하는 道를 설하는 것이 이 論의 要綱이다. 그러면서 남방 상좌부 특유의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을 내포하여 다채로운 아비달마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經. 律. 論 三藏에서 많이 인용하는 것도 이 논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여러 가지 綱要書
《淸淨道論》이 大著이기도 하거니와 대단히 복잡. 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 남방 상좌부의 전통 중에는 간명하게 정리한 여러 가지 綱要書를 짓는 경향이 나타났다. ⑴ 《아비담마 아바타라, Abhidhamm vat ra(入阿毘達磨論)》와 ⑵ 《루파 아루파 비바가 R p rupavibh ga(色非色別論)》의 작자는 붓다닷타 Buddhadatta라고 한다. 그는 붓다고사와 동 시대의 선배라고 전해지지만, 이 이론이 실제로 성립한 것은 훨씬 후세의 일로 추측된다. ⑶《삿차 산케파, Saccasankhepa(諦要略論)》는 담마팔라 Dhammap la의 저작이다. 이 작자는 주석가로서 유명한 담마팔라 ('小部'의 여러 경전에 대한 주석 《파라맛타 디파니, Paramatthadipan 》등을 지음)와는 同名異人으로 그보다는 후대의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⑷《아비담맛타 상가하, Abhidhammatthasamgaha(攝阿毘達磨義論)》의 저자 아누룻다 Anuruddha는 9세기 이후의 인물로 추측된다.
⑴은 주로 마음(心) 즉 八十九심, 마음의 작용(心所) 즉 五十二心所, 물질적 존재 즉 四大種 및 二十四所造色, 열반에 대해 그 명의와 상호관계를 운문으로 해설한 것이다. ⑵는 초보적인 입문서로서 散文으로 씌어진 小論이고 ⑶은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小部로서 ⑴과 마찬가지로 色. 心. 心所. 열반에 대해 개설하였다. ⑷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 부파의 아비달마 학습 교과서가 되었던 것으로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즉 散文으로 서술하고 韻文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따라 八十九心, 五十二心所, 마음이 작용하는 14과정, 二十八色, 여러 가지 실천항목, 十二緣起, 二十四緣 등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의 주요 학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고도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이 논에 대해서는 그 뒤 여러 가지 주석서가 작성되어 새롭게 발전한 교리에 따른 해석도 부가되고 있다.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敎學)
⑴ '다르마(法)'의 이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아함경 이래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은 반복하여 설해지고 있다. 무릇 현실에 있어 인간의 삶에 관계하는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이한다. 어떠한 것도 시간을 초월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하거나 영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불교의 기본적 교설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연(緣)'하여 결과로서 '일어나고(起)'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만들어낸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한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常住不變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의 관계 위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견해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궁극적 원인 - 이를테면 전지전능한 절대자인 神 - 에서 유래한다'라는 견해나 '모든 것은 원인이 없이 우연히 혹은 아무렇게나 생겨난다'라는 견해에 대해 불교 자신이 취한 입장이다. 불교는 존재의 기초를 절대성. 所與性으로 보려고 하거나 불확정성. 우연성으로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논리성으로만 보려고 하였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 인간 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緣起'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한 '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 즉 涅槃.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無爲'이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는 또한 '유루(有漏)'이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는 '무루(無漏)'이다. 유루(有漏)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無漏)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정안(靜安)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有爲). 유루(有漏)의 세계로부터 무위(無爲). 무루(無漏)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제(四諦)에서 볼 때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이며 무위. 무루의 열반은 즉 멸제(滅諦)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道諦)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위(有爲)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 있는 도정(道程)에 있기 때문에 무루(無漏)이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미혹한 세계(현실)-苦. 集諦=有爲. 有漏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道=道諦=有爲. 無漏
깨달음(열반)=滅諦=無爲. 無漏
'다르마'라는 말
說一切有部(sarv stiv din)라는 명칭은 '모든 것(一切)은 존재(有)한다고 說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매우 기묘한 이름이지만 이 부파의 교학이 독특한 '다르마 dharma(法)의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부파는 이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논증하여 緣起 - 有爲 - 無常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다르마'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보통 '法'이라고 번역되지만 인도 사상 일반에 있어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불교의 경우에 한정시킨다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래 '지탱하다', '유지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비롯되어 일반적으로 질서. 규범. 법칙 등의 뜻을 나타내며, 나아가 도덕. 정의. 진실. 습관. 습성. 성질 등의 뜻도 의미하게 되었다. 佛敎語로서는 먼저 부처가 가르친 진리를, 또한 그 진리를 설한 부처의 가르침을 '法'이라고 하였다. 佛. 法. 僧이라고 할 때의 法이 그것이며, 法師. 說法. 法悅. 法要 등에서의 法은 모두 그러한 의미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용례가 있다. 이것 역시 불교어로서 매우 중요한데, 이를테면 '法'이 보편적인 사물이나 존재를 의미하는 경우이다. 필시 일체의 사물은 법칙. 軌範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씨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설일체유부의 '法의 이론'이라고 할 경우의 '法'도 원래 이러한 의미의 용례에서 나와, 이윽고 이 부파 교학의 독특한 술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 '法'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요소들이 한데 모여 존재를 구성하는 '존재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法'의 離合集散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 같은 '法의 이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의 요소로서 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그룹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이른바 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五位라는 것은 色法('물질'의 요소), 心法('마음'), 心所法(마음의 작용), 心不相應行法('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및 無爲法을 말한다. 그리고 色에 11法, 心에 1法, 心所에 46法, 心不相應行에 14法(이상 有爲法) 및 無爲法에 3法을 상정하여 모두 75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75가지의 '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같은 因果關係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적인 요소인 '法'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이 부파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게 하였던 문제이다. 그러나 실은 여기서 말하는 '모든'이라고 하는 것은 소박하게 사물.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존재의 기본적 요소인 '法'의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란이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法'도, 현재의 '法'도, 미래의 '法'도 모두 있다고 하는 것이 '一切有'의 의미이며, 그러한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法'이 고찰은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다는 견해와 모순되기는커녕 거꾸로 그와 같은 '法'의 고찰을 통해 비로소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삼세실유(三世實有)와 찰나멸(刹那滅)
'法'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法은 三世에 實有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모든 有爲法은 '刹那滅'이라고도 말한다. 찰나멸이라는 것은 순간에 소멸한다는 뜻으로,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法의 '三世實有' 性과 '刹那滅' 性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이 두 문제는 실제로 모순됨이 없이 함께 성립하며, 일체 존재의 무상성은 이로써 올바로 알려지게 된다고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은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法의 이론'에서 본다면 실은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有爲 諸 '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어떤 순간에 하나의 컵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이 컵의 둥글고 긴 형태(그것은 하나의 '法'이다)나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그것도 하나의 '法'이다)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法'이 그 순간, 거기에 함께 모여 生起함으로써 컵의 존재라고 하는 현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諸 '法'의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 버리는 刹那滅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諸法을 상속하여 그것과 同類의 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 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 순간 生滅的인 諸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生起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의 현상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法이 생기한다고 해도 無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라는 것은 '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顯現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法'은 三世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을 갖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三世에 實有한다. 이처럼 有爲의 法은 三世에 걸쳐 實有하지만, 그것이 生起하여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한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쌓여 경험적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순간에 生起하는 '法'은 처음부터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전. 후 순간을 서로 달리함으로써 경험적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화 유동하는 것이다. 즉 이 세계 모든 것은 이처럼 무상한 것이다.
인과(因果)
그렇다면 法이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현재로 生起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하는 有爲의 法은 무수하며 어떠한 순서나 차례도 없다. 그 중에서 어떤 순간에 어떠한 法이 현재에 生起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순간에 어떠한 法이 생기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因의 힘이다. 法으로 있으면서 바로 그 순간에 현재로 生起해야 할 因을 갖는 것만이 그러한 因의 결과로서 거기에 생기하는(즉 緣起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法이 생기하는 데 무엇이 因으로서 작용하는 것인가. 그것은 또 다른 法이다. 因果의 관계ㅡ 즉 緣起의 관계는 법과 법 사이에서만 성립한다. 법이 因이 되어 법을 果로 낳는 것이다. 어떠한 법이 원인이 되어 어떠한 법을 결과로 낳는 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인과의 관계는 결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설일체유부의 분류에서는 因을 6가지, 緣을 4가지, 果를 5가지로 나눔) 그것들은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하나의 법은 다른 무수한 법을 원인으로 삼아 생기하며, 또한 동시에 다른 무수한 법을 결과로서 생기시킨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떠한 법과는 어떠한 종류의 인과관계를 가지며, 다른 어떤 법과는 또 다른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
因과 果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因果關係도 있으며, 因이 선행하고 過가 뒤에 생기는 異時의 관계도 있다. 또한 서로 간에 因이 되기도 하고 果가 되기도 하는 상대적 관계도 있으며, 因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果를 낳고 그 果가 다시 因이 되고 또 같은 종류의 果를 낳기도 하는 연쇄적 관계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인과관계의 사슬은 무수한 '法'사이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 緣起 - 無常 - 有爲의 세계를 성립시킨다. 그러한 세계에는 한편으로는 번뇌로부터 그릇된 행위를 일으켜 괴로움에 빠지는 미혹의 생활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번뇌를 하나하나 끊음으로써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도의 생활이 있다.
⑵ 미혹한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
번뇌(煩惱). 업(業). 괴로움의 세계
미혹한 세계의 因. 果는 한마디로 말해 번뇌에 의해 業을 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윤회의 괴로움에 빠지는 세계이다.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서는 무수한 생명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는 무한한 과거이래 生과 死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한 살고 죽는 것, 생명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衆生 혹은 有情이라고 하는데,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중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생존의 방법을 三界. 五趣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三界라고 하는 것은 欲界. 色界. 無色界이다. 욕계. 색계는 물질적인 세계이고, 무색계는 물질이 아닌 세계 즉 순수한 생존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질적 세계 가운데 특히 욕망, 다시 말해 생물의 본능적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는 영역을 욕계라 하고, 욕망이 그다지 왕성하지 않은 영역을 단순히 색계라고 한다. 욕계보다는 색계가, 색계보다는 무색계가 위쪽에 위치한다. 즉 지하의 세계와 지표의 세계 그리고 공중의 세계(즉 天界) 중 하층이 욕계에 속하고, 天界의 상층이 색계에, 나아가 천계의 최상층이 무색계에 속한다.
지하의 세계에는 지옥의 생활이 있고, 지표의 세계에는 餓鬼. 畜生. 人間의 생활이, 天界에는 天(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것이 五趣(때에 따라 여기에 阿修羅를 더하여 '六趣'라 하기도 함)이다. 그리고 지옥. 아귀. 축생은 인간에 비해 열등하고 고뇌가 많으며 좋지 않은 경계이기 때문에 三惡趣(三惡道)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하늘(天)은 인간세계에 비하면 훨신 낫고 행복하며 좋은 경계이다. 그러나 천계도 결코 영원한 至福의 세계는 아니며, 유한한 세계이고 轉變이나 쇠망을 면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것 역시 윤회하는 경계인 것이다. 중생은 오취 어딘가에 속하여 살고 있다. 이미 죽었다면 그 어딘가에 다시 태어난다. 천계에서 살았던 자라고 할지라도 다음 생애에 아귀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중생은 오취 중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로의 끝없는 生死의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업(業)의 이론
이같은 三界. 五趣로 설명되는 윤회적 생존의 다양한 모습은 중생이 행한 善. 惡業의 결과이다. 과거의 선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좋고도 즐거운 신분을 결과로 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좋지 않고도 괴로운 신분을 결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業報는 엄격히 개별적인 것이다. 타인이 행한 선행의 좋은 결과를 자신이 받을 수 없으며, 자신이 행한 악행의 좋지 않은 결과를 타인에게 억지로 떠맡길 수 없다. 업의 문제는 나 한 사람의 문제이며, 하나의 행위적 주체의 문제이다.
業報의 필연과 自業自得,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중생의 생활 속에 선악의 근거가 성립하며 도덕의 근거가 성립한다. 業. 輪廻의 세계라는 것은 다시 말해 善. 惡의 세계, 세간적 도덕의 세계이다.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惡趣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善業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善業에 의해 善趣(즉 天界)에 태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불교가 목표로 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윤회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그것은 業報의 繫縛에서 행방됨으로써 顯現한다. 善趣에 태어나게 하는 善業은 여전히 세간적 도덕에서의 善 곧 有漏의 善이다. 따라서 번뇌를 떠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無漏의 지혜에 의한 無漏의 善業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간적 도덕을 초월한 '出世間'의 道, 곧 聖道이다.
성도(聖道)
無漏의 지혜에 의해 번뇌를 하나하나 끊고,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성도는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등 세 가지로 설명된다. 맨 마지막의 '無學道'는 道라고는 하지만 앞의 見道. 修道의 과정을 통해 모든 번뇌를 끊는 결과로써 얻어지기 때문에 道程이 아니라 그 목적이다. 無學이라는 것은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三道라고 해도 사실상 번뇌를 끊는 수행의 道는 見. 修 二道뿐이다. 그러나 보통 그에 앞서 오랜 예비적 수행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 즉 戒를 지켜 그 생활을 올바르고 청정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三昧를 닦아 산란한 마음을 점차 아주 맑은 安穩의 상태로 이끄는 道程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심신의 수련에 의해 수행자가 마침내 無漏의 지혜를 일으켜 번뇌를 끊게 될 때 그는 聖道에 들어간 것이며, 이제 더 이상 凡夫(평범한 사람의 뜻)가 아닌 聖者(존귀한 사람의 뜻)인 것이다.
성도의 첫 번째는 見道이다. '見'이라는 것은 四諦를 관한다는 의미이다. 見道는 苦. 集. 滅. 道인 四諦의 도리를 觀知함으로써 無漏의 道를 일으켜 바로 88가지 번뇌를 단절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번뇌는 수행자가 무지하고 도리에 어둡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가 일단 사제의 진리성을 인식한다면 망치로 돌을 깰 때 돌이 딱 갈라지는 것처럼 단번에 단절된다. 여기서 아는 것이 바로 끊는 것이다.
계속해서 수행자는 修道의 과정으로 향한다. 수도에 있어서 단절해야 할 번뇌는 10가지인데, 모두 情. 意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見道에서 끊어진 이지적 번뇌와는 달리 단순히 이성상의 了解만으로는 끊을 수 없다. 즉 여기서는 아는 것이 바로 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알아도 여전히 끊어지지 않는 것이 愛欲이라든지 증오와 같은 정의적인 번뇌의 공통된 성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도의 과정에서는 三昧의 수련을 거듭하고 四諦의 관찰을 반복함으로써, 또한 싫증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마음을 고양함으로써 끊기 어려운 번뇌가 점차 단절되는 것이다.
성자(聖者)의 단계
성자(聖者)가 견도. 수도의 과정을 거쳐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렸을 때의 그를 阿羅漢(또는 줄여서 '羅漢', arahan)이라고 한다. 아라한은 원래 '[공양을 받는데]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로서 깨달음에 이른 불타를 그렇게 부르며, 또한 불타의 제자로서 모든 번뇌로부터 이탈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비달마에서 설해진 성자의 단계 중 가장 높은 계위를 가리킨다. 곧 아비달마에서는 아라한과 다시 말해 아라한의 계위를 얻는 것이 모든 출가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수행자가 수행 道의 예비적 단계를 마치고 난 후 비로소 見道에 들어와 88가지 번뇌를 단절하여 수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預流向이라 하고, 바야흐로 이 수도에 들어간 단계를 豫流果라고 한다. 예류과로부터 阿羅漢果 사이에 一來果. 不還果의 두 단계를 두며 예류과에서 일래과에 이르는 과정을 一來向, 일래과에서 불환과에 이르는 과정을 不還向, 불환과에서 아라한과에 이르는 과정을 阿羅漢向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든 계위를 합해 四向四果라고 하는데, 聖道에 있어서 번뇌를 단멸하는 정도에 따라 그 단계를 설정하였다. 預流(또는 須陀恒 srota- panna)라는 것은 '[佛法의] 흐름에 들어간 자'의 뜻이고 一來(또는 斯陀含 sak d- gamin)는 '이제 [인간과 하늘 사이를] 오직 한 번만 왕래하는 자'의 뜻이며, 不還(또는 阿那含 an- gamin)은 '[이제 더 이상 욕계에] 돌아옴이 없는 자'의 뜻이다.
우리는 이로써 佛法의 '흐름에 들어가' 면서부터 공양을 받기에 '어울리는' 깨달음의 인간이 되기까지에는 길고도 긴 정신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 수행자는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감으로써 그 정신적 경지는 점점 견고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타와 아라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아라한은 원래 불타를 의미하였다. 이 말(漢譯에서는 '阿羅漢'이라는 형태보다 오히려 '應供'이라고 하는 譯語의 형태로 쓰임)은 경전에서 불타의 다른 이름의 하나로서 잘 쓰이고 있어서 실제로 如來라든가 세존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아비달마 논서에 있어서 수행자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로서의 아라한과 불타의 경지는 분명히 구별되고 있다. 無漏의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모두 불타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범부로부터 성자로, 그리고 아라한으로의 道는 菩薩(곧 佛陀가 될 사람)로부터 불타로의 道와 동일하지 않다. 대개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道는 오로지 번뇌의 단절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의 道이지만 보살로부터 불타로의 道는 그 밖에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다. 즉 자비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法을 설하여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을 내용으로 함)는 利他行이 바로 그것이다.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道는 사람들에게 널리 개방되어 있지만 보살로부터 불타로의 道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보살로서 불타로의 道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과거의 무수한 생애에서 한량없는 德을 쌓고, 사람들을 위하여 '無給의 사용인'이 되며 자비를 베푸는 데 소홀함이 없는, 무한한 利他性과 자기 연마성을 갖춘 존재뿐이다. 이렇게 선택된 희유한 인간이 그 도를 성취하여 불타로서 출현하는 것은 실로 십억의 세계를 그 속에 포함한다는 전 우주를 통해 보더라도 동시에 두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비달마의 論師들은 師主 석존을 숭앙하는 깊은 마음에서 불타의 위대함을 극구 찬탄하면서 스스로 목적하는 바를 아라한과에 두어 아라한과 불타의 거리를 엄격히 유지함으로써 佛果를 엿보는 불손함을 결코 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3.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敎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의 비교
개설(槪說)
이상 설일체유부 학설의 전반을 개략적으로 설명하였다. 남방 상좌부의 아비달마도 아함경전 중의 교설을 조직하여 체계적인 학설로서 논술한다고 하는 점에서 설일체유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이 부파에는 처음부터 이 부파 특유의 이론을 발전시킨 면도 없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러한 특징적인 부분만을 간추려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이 부파의 논서 중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나타내는 《비숫디맛가》에 근거하여 그 교의 학설을 설명하는데, 그 이유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색법(色法)
아함경전 이래 色法(물질적 존재)은 '四大種 및 大種所造'로 정의되고 있다. 四大種이란 地. 修. 火. 風 네 가지 원소를 의미하고, 大種所造란 이러한 네가지 원소에 의해 합성된 諸물질을 의미한다. 大種所造의 色으로서 남전 아비달마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여근(如根). 남근(男根). 명근(命根). 심사(心事). 단식(段食). 신표(身表). 어표(語表). 허공계(虛空界). 색(色)의 가벼움. 색(色)이 부드러움. 색(色)의 적응성. 색(色)의 적집. 색(色)의 지속. 색(色)의 노성(老性). 색(色)의 무상성 등 24가지를 들고 있다.
처음 다섯 가지는 시각기관. 청각기관. 후각기관. 미각기관. 촉각기관('身'은 그것의 뜻(意), 단순한 '신체'의 의미는 아님)의 五官('五根'이라고도 함)이며 色(색채, 형태). 聲('목소리' 뿐만 아니라 '소리' 일반). 香. 味는 오관 중 앞의 네 가지의 대상이다. 남. 여근은 성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명근은 생명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 심사는 마음의 자리로 생각되는 심장이다. 단식이란 입으로 섭취하는 食物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 육체를 지탱. 유지하는 작용을 말한다. 신. 어표는 內心의 業(그것은 心. 心所의 작용)이 신체의 동작과 말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허공계란 공간을 의미한다. 다음의 세 가지는 色法이 공통적으로 갖는 變應性이며 마지막 네 가지는 '有爲'이고 '無常'인 色法이 공통적으로 갖는 성질(有爲四相이라고 함)로서, 즉 생기. 지속. 변화. 소멸의 성질이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색법의 속성이지만 그 자체를 바로 '色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설일체유부의 견해와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여. 남근을 '身'根(五根의 하나)에 포함시켜 따로 언급하지 않으며 명근이나 有爲四相 등은 '心不相應行法'에 속한다고 하였다. 또 신표. 어표를 身表業. 語表業이라 하여, 그것을 업이 나타내는 相이라 하지 않고 업 그 자체로 생각하였다.(남방 상좌부에서는 업 그 자체는 모두 心. 心所상에서만 나타난다고 함). 허공은 설일체유부에서 無爲法의 하나로 간주된다.
地. 水. 火. 風 四大에 대해서도 설일체유부에서는 그 본질을 각각 경(硬). 습(濕). 열(熱). 동(動)이라 하고 그 특징적인 작용을 각각 보지(保持). 포섭(包攝). 숙성(熟成), 증광(增廣)이라고(다만 風大의 경우 그 본질을 輕이라 하고 그 특징적인 작용을 流動이라고 하는 학설도 있음) 한 데 반해 , 남방 상좌부의 정의는 이보다 더욱 면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만큼 정연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그 명확성도 약간 결여되어 있다. 상좌부에서는 앞에서 든 여러 가지 성질뿐만 아니라 地大에는 建立이라고 하는 작용이, 水大에는 漏適이라고 하는 특성이나 확산 혹은 결합이라고 하는 작용이, 風大에서는 硬貨라고 하는 특성이 더 있다고 설한다. 설일체유부는 사대의 본질을 硬. 濕. 熱. 動으로 보기 때문에 사대는 모두 觸('만져지는 것' 의 뜻, 촉각 즉 身根의 대상) 즉 觸處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지만 상좌부에서는 水大를 法(여기서 法을 인식. 사고하는 감각기관인 '意'의 대상을 의미함), 즉 法處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것은 아마 水大의 濕潤性을 중시하지 않고 그 작용을 중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에서는 오직 觸處만이 四大와 所造色을 포함하고 다른 九色處(眼. 耳. 鼻. 舌. 身. 色. 聲. 香. 味)는 모두 所造로만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남방 상좌부에서는 觸處는 三大와 그 속성에 존재하고(所造를 포함하지 않음) 水大는 法處 일부에 포함되며 다른 九色處는 모두 所造色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大毘婆沙論》이후 설일체유부에서 설하고 있는 極微說(일종의 원자론)은 남방 상좌부의 아비달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교설이다.
89가지 마음과 心作用의 14과정
마음(心)을 89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완전히 남방 상좌부의 독자적인 교설방법이다. 먼저 마음을 善과 不善(즉 惡)과 無記(善도 惡도 아닌)로 나누어 보면 善心 21, 不善心 12, 無記心 56 가지이다. 또 善心으로서 欲界 善心 8, 色界 善心 5, 無色界 善心 4, 出世間 즉 三界를 떠난 無漏의 善心 4가지를 들고 있다. 不善心은 모두 欲界에 속하지만(色. 無色界에는 不善心이 존재하지 않음) 그것을 다시 貪心(탐욕스러움 마음) 8, 瞋心(증오하는 마음) 2, 癡心(어리석은 마음) 2가지로 나눈다. 無記心은 업의 결과인 '異熟'과 오직 작용일 뿐인 '唯作'등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異熟의 無記心은 욕계의 善異熟 16, 욕계의 不善異熟 7, 色界의 異熟 5, 無色界의 異熟 4, 出世間의 異熟 4 가지 등 모두 36가지이다. 그리고 唯作의 무기심은 욕계 11, 색계 5, 무색계 4 가지 등 모두 20 가지이다.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여 14가지 단계로 나누는 것 역시 이 부파의 독특한 교설이다. 14가지 단계에 대해서는 각기 특유의 술어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일단 그 譯語를 적어보면 ⑴ 결생(結生) ⑵ 유분(有分) ⑶ 전(轉) ⑷~⑻ 안식(眼識) 내지는 신식(身識) ⑼ 령수(領受) ⑽ 추도(推度) ⑾ 결정(決定) ⑿ 속행(速行) ⒀ 피소연(彼所緣) ⒁사(死)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⑴은 어떤 생애에 生을 받는 순간의 마음을 말하며 ⒁는 生을 마치고 죽을 때의 마음을 말한다. ⑴에서 시작하여 ⒁로 끝마치는 한 생애 동안 ⑵ 내지 ⒀의 순서로써 중생의 정신생활이 전개된다. ⒁에서 한 생애가 끝나면 계속해서 다음 생애의 ⑴이 일어나 끝없이 윤회가 되풀이된다.
⑵는 정신활동의 기반이 되는 잠재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지만 모든 정신작용은 여기에서 나와 여기로 돌아간다. ⑶ 은 안팎으로 자극을 주어 마음을 일으켜,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상태로부터 표면에 나타나는 상태로 향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眼識 내지 身識의 五識 가운데 어떤 하나를 일으키는 경우와 意識(第六識)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⑷~⑻은 眼識(시각작용). 耳識(청각작용). 鼻識(후각작용). 舌識(미각작용) 身識(촉각작용) 등 다섯 가지로 여섯 번째 意識(판단. 사고작용)에 대하여 前五識이라 한다. 이것들은 ⑶에 의해 일어나 ⑼로 이어진다.
⑼는 前五識을 통해 파악된 대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快 혹은 不快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다. ⑽은 ⑼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을 감각적으로 판단하여 기뻐하고 혹은 슬퍼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⑾에 이르러 비로소 감각이 아닌 지각인식의 작용이 일어난다. 감각작용으로부터 지각작용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⑾이며, ⑿는 지각. 인식. 판단. 의지 등이 정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⑾이며, ⑿는 지각. 인식. 판단. 의지 등의 정신작용이 완전히 발휘된 단계이다. 앞의 ⑶에서 의식(第六識)이 일어날 경우에는 ⑷~⑾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⑿로 들어간다. ⑶은 두 순간, ⑷~⑾은 모두 한 순간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작용이지만, ⑿는 가장 길 경우 7순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한다.
만약 ⑿의 대상이 강대하여 명확한 것일 경우 그것이 마음에 인상을 남겨 마음속에 保持하게 된다. 그러한 인상을 모아 保持하는 마음의 작용이 ⒀이다. 이렇게 하여 일련의 활동을 끝낸 마음은 다시 돌아와 ⑵ 有分識에 침잠한다.
그런데 14단계의 마음의 작용은 각기 89心의 한 가지에서, 혹은 두가지 내지 다섯가지에서 작용하게 된다. 모든 욕계의 善. 不善心 및 唯作無記心 중 8가지, 색계. 무색계의 선심 및 유작무기심, 그리고 모든 出世間心은 '速行' 만을 갖는다. '轉'은 욕계의 유작무기심 중 두 가지에 있으며, '決定'은 그 중 하나에만 있다. '眼識' 내지 '身識'은 욕계의 善 및 不善異熟無記心 중 각각 다섯 가지에 있다. '領受'도 욕계의 선심 및 불선이숙무기심 중 각각 한 가지에 있다. '結生'과 '有分'과 '死'는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9가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 색. 무색계의 이숙무기심 모두에 있다. '推度'는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두 가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에 있으며, '彼所緣'은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9가지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에 존재한다.
이처럼 복잡. 번쇄한 분석과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논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번삽함을 느끼게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비달마 논서의 본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십사연(二十四緣)
인(因). 과(果)의 분류로서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육인(六因). 사연(四緣). 오과(五果)를 주장하지만 남방 상좌부에서는 《팟타나》이래 이십사연(二十四緣)을 주장하고 있다. 그 명칭도 이 부파 특유의 것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번역어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 무간연(無間緣), 등무간연(等無間緣), 구생연(俱生緣), 상호연(相互緣), 의지연(依止緣), 친의지연(親依止緣), 전생연(前生緣), 후생연(後生緣), 수습연(修習緣), 업연(業緣), 이숙연(異熟緣), 식연(食緣), 근연(根緣), 정려연(靜慮緣), 도연(道緣), 상응연(相應緣), 불상응연(不相應緣), 유연(有緣), 무유연(無有緣), 거연(去緣), 불거연(不去緣)
이것은 너무나도 번삽하게 나열한 것이어서 명칭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것도 있는 등(無間緣, 等無間緣), 정연한 조직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복잡 다양한 인과관계를 가능한 한 극명하게 추구하려 했던 아비달마 논사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Ⅲ. 아비달마의 철학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俱舍論』은 산스크리트어로 『Abhidharmakosabhasya』 인데, 『아비다르마藏疏』의 뜻이며, 『對法藏論』이라고 번역한다. 산스크리트本과 漢譯本, 티벳譯本이 있다. 世親 또는 天親이라고 漢譯되는 바수반두(Vasubandhu)의 저작이다. 바수반두는 5세기경 서북인도에서 활약한 아비다르마論師로서 無著의 동생이기도 하며, 소승불교의 학승일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학승으로서 瑜伽唯識學의 창도자의 한사람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한역은 玄裝이 651년에 번역한 『阿毘達磨俱舍論』 30권이 있고, 偈頌만을 모은 『阿毘達磨俱舍論本頌』 1권(玄裝 번역)이 있으며, 또 眞諦가 564년에 번역한 『阿毘達磨俱舍釋論』 22권이 있다. 『俱舍論』은 인도, 중국, 티벳, 한국, 일본에서 널리 연구되어 훌륭한 註釋들이 남아있다. 『구사론』에서 세친은 說一切有部의 교학을 표준으로 삼아, 이것을 체계화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취급하여 經量部나 大衆部 등의 교설을 소개하고, 理에 뛰어남을 宗으로 삼는 입장(理長爲宗)에서 교리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大乘 經典이나 대승의 論書는 有部의 교학을 기초로 하고 혹은 그것을 破斥하기 위하여 작성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번잡한 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구사론』은 널리 대,소승의 학도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해제
30권. K-955(27-453). T-1558(29-1). 당(唐) 시대(A.D. 651∼654) 번역. [역] 현장(玄 ). [저] 세친(世親). [범] Abhidharmako a- stra. [장] Chos m on-pa i mdsod-kyi b ad-pa. [약] 구사론(俱舍論). [별] 대법장론(對法藏論), 신역구사(新譯俱舍). [이] 아비달마구사론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
소승 부파 불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논서이다. 3세(世) 실유론(實有論)에 입각하여 다른 부파의 교설 및 외도의 주장들을 낱낱이 논파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게송과 그에 대한 해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마지막 품인 제9 파집아품(破執我品)은 게송 없이 논술로만 이루어져 있다.
먼저 제1품과 제2품에서는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교법이라 할 수 있는 5위 75법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
제1 분별계품(分別界品)에서는 유루(有漏), 무루(無漏), 5온(蘊), 12처(處), 18계(界) 등을 중심으로 만유(萬有) 제법(諸法)의 체(體)를 분별하여 해석하고 있다.
제2 분별근품(分別根品)에서는 근(根)의 뜻을 비롯하여 22근, 6인(因) 4연(緣) 등 만유(萬有) 제법의 용(用)에 대해서 논의한다.
다음 여섯 품에서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과(果), 인(因), 연(緣) 등을 각각 설명한다. 즉 제3 분별세품(分別世品), 제4 분별업품(分別業品), 제5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 등은 유루에 대해서 논의하고, 제6 분별현성품(分別賢聖品), 제7 분별지품(分別智品), 제8 분별정품(分別定品) 등은 무루에 대해 논의한다.
제3 분별세품(分別世品)은 유루의 과(果)에 대해서 유정(有情) 세간(世間), 기세간(器世間), 12인연(因緣)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諦)의 고(苦)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4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는 유루의 인(因)에 대해서 신(身), 구(口), 의(意), 3업(業)이 선악에 미치는 것 등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4제의 집(集)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5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에서는 유루의 연(緣)에 대해서 수면(隨眠)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4제의 집(集)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6 분별현성품(分別賢聖品)에서는 무루의 과(果)에 대해서 7현성(賢聖)의 계위(階位)와 도법(道法)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의 멸(滅)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7 분별지품(分別智品)에서는 무루의 인(因)에 대해서 10지(智)와 18불공법(不共法)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의 도(道)에 해당한다.
제8 분별정품(分別定品)에서는 무루의 연(緣)에 대해서 선정(禪定)의 갖가지 상(相)과 용(用)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의 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9 파집아품(破執我品)에서는 별도의 게송은 없이 다른 부파와 외도의 견해를 논박하고 무아(無我)의 교법을 천명하고 있다.
저자인 세친이 아비달마구사론본송(阿毘達磨俱舍論本頌, K-954)을 먼저 짓고 나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고 그에 대한 해석을 붙여 상세히 논술한 것이 본 논서였다고 전한다. 후대에 이르러 본 논서를 중심으로 구사종(俱舍宗)이 형성되었을 만큼 불교사상 매우 중요한 논서이다.
上山春平,櫻部建 『아비달마의 哲學』 정호영 역, 민족사
본 내용은 구사론을 上山春平,櫻部建의 『아비달마의 哲學』( 정호영 역, 민족사) 제1부의 내용의 순서로 내용을 살펴보고자 정리한다.
서장
제1장 우주 - 제3 세간품
제2장 인간 - 제3 세간품
제3장 달마의 체계 - 제1 계품, 제2 근품
제4장 물질 - 제1 계품, 제2 근품
제5장 마음 - 제1 계품, 제2 근품
제6장 선과 악 - 제4 업품
제7장 번뇌 - 제5 수면품
제8장 도(道) - 제7 지품, 제8 정품
제9장 아라한과 부처 -제6 현성품
제10장 아함에서 아비달마로
제11장 세친의 전기
제12장 구사론 이후
서 장
여기서 취급하는 것은 인도불교의 아비달마사상, 특히 사르바스티바딘(유부, Sarv stiv din) 학파의 사상으로서, 그 자료로서는 바스반두(Vasubandhu)의 명저 아비달마코샤(Abhidharmako a)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란 무엇인가? 그것은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을, 붓다의 사후 300~900년 경의 학승들의 연구, 해명, 조직하여 하나의 지적 체계로 정리한 지적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출현한 갖가지 저작 - 교의의 해설서, 강요서, 논술서 등도 마찬가지로 아비달마로 불린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아비달마. 샤스크라(아비달마론, 또는 아비달마 논서)로 불리워야 하지만, 줄여서 간단히 아비달마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샤키야무니의 서거 후 곧 그의 제자인 승려들이 모여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붓다 생전의 교설을 정리하고, 그 후로 승단에서 전승된 것을 가리킨다. 불교도들은 이를 아가마(가르침의 전승)라고 부른다. 보통 한자로 음사되어 아함 또는 아함경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가마에 대한 학습과 연구는 매우 오랜 옛날부터 승단 내부에서 행해졌다. 아가마의 내용은 물론 붓다가 가르친 진리에 다름 아니지만, 그 진리를 붓다 자신은 '달마' 법(法)이라는 말로 불렀다. '아비달마(對法)는 원래 달마에 대한[학습. 연구]의 의미이다. 이러한 원래의 뜻으로 말하면, 아비달마의 기원은 아마도 아가마 경전성립 이전, 샤키야무니 붓다 생전의 시대까지 소급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아비달마라고 하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보다 후대의 아가마 연구와 그 교의의 조직화를 가리킨다. 즉 불교승단의 당초의 통일을 잃고 기원전 3~1세기 경 많은 부파, 학파로 분열된 후, 이들 제학파, 적어도 그 중 유력한 몇 학파에서는 아가마경전에 대한 연구, 논의에 정열을 쏟는 경향이 현저히 높아져갔으며, 여기에 아비달마논서, 또는 단순히 아비달마로 불리는 대량의 교의학 문헌군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여러 학파 중, 아마도 가장 많은 논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그 중 많은 것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는 것은 서북인도에 큰 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르바스티바딘학파일 것이다. 그 이름은 문자 그대로는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의미하며, 보통 한역명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줄여서 '유부(有部)'로 알려져 있다. 이 기묘한 호칭이 유래는 다음에 이 학파의 교의학을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논서 다수가 세상에 나타난 이후, 그 업적을 계승하고 더욱 새롭게 발전시켜 아비달마논서의 하나의 완성태를 제시한 것이 바수반두의 아비달마코샤이다.
바수반두는 한역명 세친(世親) 또는 천친(天親)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불교의 중기에 서북인도에서 활약한, 불교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학자, 사상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아비달마의 학승(아비달마논사)으로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철학자로서는 유가유식학(瑜伽唯識學)의 창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히려 이 방면으로 이름이 더 높기도 하다. 그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5세기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아비달마코샤는 한자로 음사하여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라고 한다. 보통은 그 약칭인 구사론(俱舍論)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세친의 여러 저작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로서, 그의 폭넓고 다채로운 사상활동의 일면을 잘 대표한다. 즉 이 곳에서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불교사상을 정연히 조직화하여 서술한 아비달마적 교의학서의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본래 구사론은 꼭은 설일체유부 학설만을 충실히 기술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통적인 학설을 비판하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이설(異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이설부분에 나타난 세친이 사유방법은 교의해석상 오히려 설일체유부에 대립된 사우트란티카학파(S utr ntika) 보통은 경량부(經量部)로 알려진 학파의 사유방법과 통하는 바가 있으므로, 구사론을 단순히 설일체유부의 논서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따라서 이를 경량부의 논서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하였고 뒤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구사론이 전체로서는 형식, 내용 모두 선행하는 설일체유부의 논서를 계승. 발전시킨 것임은 명백하다. 또한 서술이 정연한 점, 인도. 중국. 한국. 일본불교를 통하여 오랫동안 불교인의 학습 대상이 되었던 점 등은 다른 아비달마논서에서는 그 예를 찾기 어렵다.
아비달마 또는 구사론이라고 하면, 이는 종종 불교의 번쇄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확실히 여기에는 번쇄하며 복잡한 교의학이 무성하다. 뛰어난 산스크리트어 학자이며 구사론 연구자로서도 저명한 오하라 운라이(荻原雲來 1869~1937)박사는 요컨대 구사론은 '학자의 유희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아무래도 구사론과 그 이외의 아비달마논서를 읽을 때,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무수한 난해한 술어의 나열에 접하게 되면, 아마도 승원의 깊숙이에서 세속의 고뇌를 떠나 오로지 경전의 석의와 교리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아비달마논사들의 사상적 노작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비현실적이고 한가한 갈등으로 생각되며, 본래 실천적이었던 불교의 본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본래 논사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진지한 구도의 고투(苦鬪)가 있었다. 이는 논서의 외형을 이루고 있는 번잡함에 현혹되지 않고,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곧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를 단순히 실천. 구도와 관계없는 공론(空論)으로 단정하여 버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를 논외로 할지라도 아비달마가 갖는 가장 큰 의의는 다른 곳에 있다. 즉 역사상 처음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체계적 사상으로 조직하였다는 점에 불교사상사에서의 아비달마의 중요한 위치가 있는 것이다. 아가마는 다양한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컨데 샤키야무니 붓다의 언행록이므로 그것은 대개 단편적이거나 짤막한 교설의 모음집이다. 집록되고 전승된 개개의 교설은 대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는 이 위대한 인류의 교사의 참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부분도 있다. 특히 간단하면서도 간절한 교훈은 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는 대개 단편적이며 삽화적이어서 필히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비체계적인 아가마경전의 내용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조직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운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논사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설. 유가유식학설 등의 대승불교 철학의 출현도 불가능하였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여 물론 아비달마 사상이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을 치우침이 없이 이해하고 계승. 발전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종종 비판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비달마는 아가마경전의 어구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전통적, 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사상의 청신함과 발랄함을 잃어버린 점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점이 붓다의 말에 집착하여 붓다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대승불교의 비판이 야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만 선입관을 버리고 아비달마사상의 장점과 결점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에서 아비달마사상이 갖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우주론은 구사론 제3장 분별세품(分別世品)에 나타나 있다. 이는 아비달마 철학에 있어 그다지 중요하거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물론 설일체유부 사상의 본령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만 일반독자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아비달마불교의 사유방법을 이해하는 실마리로서, 추상적인 술어가 비교적 적으며 구체적인 기술이 많은 이 우주론 부분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우주론은 아비달마불교가 낳은 아비달마 특유의 자연관. 우주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에 도입되어 불교사상의 이면을 이루는 고대인도의 그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선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구사론에 따르면, 이것은 'sattva-karman'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란 보통 유정(有情), 중생(衆生)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이 세상에 생명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만'은 보통 '업(業)'으로 번역되지만, 행위, 동작의 의미이다. 따라서 '사트바 카르만'은 생명있는 것의 행위, 생명체의 생활. 활동이라는 뜻이다.
상식적인 순서에 따라 이야기하면, 당연히 자연계가 앞서 존재하고, 다음으로 여기에 생명을 가지 것이 발생하여 행위, 동작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반대로 생명을 가진 것의 행위, 동작에 의해 자연계가 생겨난다고 한다. 그러면 자연계의 성립에 선행하여 생명을 가진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이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자연계를 상정함으로써 설명된다. 끝없이 광대한 우주공간 중에는 이 장소에 '이 하나의' 자연계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을 때에도, 다른 장소에는 '다른, 많은' 자연계가 현재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곳, 다른 자연계에 생존하고 있는 '유정(有情, sattva)'으로서 후에 이 자연계가 성립되면 여기에 태어나는 것이 있다. 그것의 '업(業, karman)'의 힘에 의해 이 자연계는 성립된다는 것이다.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자연계가 창출된다. 이는 모든 유정의,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살아 행위함, 이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창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우주를 생성하는 에너지와 하나의 개체, 한 인간이 살아 행위하고 동작하는 힘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우주의 형성은 구사론의 기술에 따르면 우선 아무런 존재도 없는 광대하고 텅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활동함으로써 '미풍(微風)'이 불면서 시작된다. 점차 이 바람은 공간 속에서 그 밀도를 더해가고, 급기야는 원반 모습의 견고한 '대기의 층'이 이루어진다.
이 대기층의 두께는 160만 요자나(yojana)에 이른다고 한다. 요자나라는 거리의 단위가 정확히 얼마만한 거리인가에 대한 논서의 기술은 없지만, 500심(尋) 1크로샤, 8크로샤가 1요자나라고 하고 있으므로 1심을 2미터라고 본다면 1요자나는 8키로미터가 된다. 그렇다면 이 대기층의 두께는 1280만 킬로미터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이르는 거리는 아상키야라고 한다. 아상키야(asamkhya)란 '무수'라는 의미이므로, 결국 대기층의 횡적인 거리는 무한하다. 그러나 이 아상키야라는 말은 수를 표현하는 단위의 하나로서도 사용된다. 이 경우에는 1059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기층의 주위가 아상키야라는 것은 이것이 1059요자나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막연히 '무수'라고 하기보다는 이 편이 명확하므로 우리는 아상키야라는 말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 대기층은 두께가 1280만 킬로미터이며, 주위가 8X1059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원반의 모습이 된다. 그리고 그 견고함은 "大力士 마하나그나가 바즈라로 쳐도 부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대기층 위에 '물의 층'이 형성된다. 이는 사트바 카르만의 활동에 의해 대기층의 중심부 상공에 점차로 구름이 응집되고, 그 구름이 장대비가 되어 대기층에 떨어지면, 이것이 쌓여 물의 층을 이루는 것이다.
그 두께는 896만 킬로미터로 산정된다. 물은 대기층 중심부에 집적될 따름으로 결코 옆으로 넘쳐흐르는 일이 없다.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이를 받쳐 넘치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또는 바람이 그 주위를 선회함으로써 바람의 압력이 담장을 둘러치듯이 물의 층을 지탱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의 층은 다시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끊인 우유의 표면에 막이 생기는 것 같이" 점차 응고되어, 상층의 7분의 2는 '황금의 층'이 된다. 나머지 7분의 5는 물의 층으로 남아있다. 앞에서 대기층의 중심부에 물의 층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물과 황금의 층의 넓이는 대기층에 비해 훨씬 작아 겨우 직경이 962만 7600킬로미터, 주위는 직경의 3배, 즉 28888만 2800킬로미터 정도로 생각되고 있다.
결국 무한하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는 광대한 원반에 펼쳐져 있는 대기층의 중심부에, 이에 비해서는 훨씬 작으나 동일한 원반 모습의 물과 황금의 층이 중첩되어 놓여 있다. 다만 층의 두께에 대해 말한다면, 대기층이 10이라면 물의 층은 5, 제일 위의 황금의 층은 2에 해당된다.
이 황금의 층의 표면이 대지이다. 그리고 대지 위에는 다시 순서에 따라 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산. 강 등이 형성되며, 이리하여 여기에 자연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계가 완성되면 여기에 생물 즉 유정(sattva)이 발생한다. 이 발생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어, 우선 천상의 세계부터 시작된다. 즉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신들(天人, 天女 등이 그것이다. 신들이라고 하여도 사트바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이다. 다음으로는 지표 세계에 인간. 동물 등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 즉 지옥에도 지옥의 사트바가 태어남으로써 세계 형성의 과정은 완료된다.
광대하고 텅 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작용하여 '미풍'이 부는 것으로부터 자연계가 완성되기까지, 1안타라칼파(antarakalpa, 中劫)의 시간, 자연계가 이루어진 다음부터는 19안타라칼파를 필요로 한다. 세계 형성의 전과정은 20안타라칼파라는 장구한 세월에 이른다. 1안타라칼파는 어느 정도의 긴 시간인가. 이에 대해서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산정법에 따르면 1599만 8천년이 된다. 그렇다면 세계형성과정의 전기간은 3억 2천만 년에 가깝다.
세계 형성의 과정에 계속하여 다음의 20안타라칼파 동안에는 형성된 세계가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세계 파멸의 과정이 따른다. 이것도 20안타라칼파 동안 계속되며, 세계 형성의 과정과 전혀 역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즉 우선 지옥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상의 세계, 천상의 세계라는 순서로 생물이 소멸해가며,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이 소멸할 때까지 19안타라칼파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나머지 1 안타라칼파 동안, 전혀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계는 "이를 성립시키는 사트바 카르만이 소진되어" 분해. 소멸되어 버린다. 그 때에는 "일곱의 해가 나타나" 산과 들을 태우고, 그 위에 수재(水災). 풍재(風災)가 겹쳐 이 자연계는 무로 돌아간다. 그런 다음에는 단지 광대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이로부터 20안타라칼파 동안은 텅빈 공간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무의 기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가면 다시 사트바 카르만이 미풍을 일으켜, 다음의 세계 생성의 기간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세계의 형성. 지속. 파멸. 공무의 네 과정이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대자연의 생멸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한의 과거로부터 무한의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된다. 그 반복의 주기는 4 X 20 안타라칼파이므로 약 12억 8천만 년에 이르며 이를 1 마하칼파(mah kalpa, 大劫)라고 한다.
3. 수메루의 세계
자연계의 구성을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기층. 물의 층. 황금의 층이 중첩된 그 위에 대지가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대지 중앙에는 수메루(Sumeru)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주위를 외륜산이 일곱 겹으로 에워싸고 있다.
가장 바깥의 외륜산 니민다라(Nimindhara)라고 하는데, 이 니민다라산의 바깥에 네 개의 대륙이 있다. 동쪽에 비데하(Videha)州, 서쪽은 고다니야(God niya)州, 남쪽에 잠부(Jambu)州, 북쪽에 쿠루(Kuru)州가 그것이다. 고다니야주는 직경 2만 킬로미터의 원형, 쿠루주는 한 변이 1만6천 킬로미터의 정방형, 잠부주는 한 변이 1만6천 킬로미터의 정삼각형에 가까운 형태, 비데하주는 잠부주 보다 조금 큰 반달모양이다. 이 네 개의 대륙 바깥을 차크라발라(Cakrav la)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외륜산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의 수메루산과 그 바깥을 둘러싼 일곱의 외륜산 사이에는 물이 가득차 있어 고리 모양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그 바깥 차크라발라산까지 촉 250킬로미터 이상의 고리 모양의 큰 바다가 있고, 네 대륙은 이 바다의 동서남북에 각각 둘출되어 있다. 수메루산의 높이는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64만 킬로미터, 수면 위에 솟아 있는 부분도 이와 같다. 수메루산 바로 옆에 있는 산은 수면으로부터의 높이가 수메루의 반, 그 바깥의 산은 다시 이의 반이라고 하여 수메루로부터 멀어질수록 낮아진다. 그리하여 가장 바깥의 차크라발라 외륜산은 그 높이가 2500킬로미터이다. 중심의 수메루로부터 차크라발라산의 외연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248만 5100킬로미터로 산정된다.
수메루산은 동서남북의 사면이 각각 은. 수정. 에메랄드. 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곱의 외륜산은 금으로, 차크라발라산은 쇠로 이루어져 있다. 수메루는 허리가 가늘어 모래시계와 같은 모습이며, 그 산정은 한 변이 64만 킬로미터의 정사각형의 평면이라고 한다.
해도 달도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형성된 바람에 의해 공중에 걸려있다. 해의 직경은 408킬로미터, 달의 직경은 400킬로미터로서, 모두 수메루산의 잘룩한 허리 주위를 일주하는 데에 24시간이 걸리는 속도로 선회하고 있다. 해가 수메루 북쪽을 돌 때, 쿠루주는 한낮이며, 잠부주는 한 밤중, 비데하주는 일출, 고다니야주는 일몰의 시간이다. 해는 항상 동일한 궤도를 선회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궤도를 남으로 이동하며, 겨울에는 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잠부주의 여름은 낮이 긴 데 비해 겨울에는 낮이 짧다. 해와 갈 사이의 거리가 멀고 가까움에 따라 달의 차고 기움이 생긴다고 한다.
수메루산과 일곱 외륜산의 허리와 산정은 천계(天界), 즉 신들의 세계의 일부이다. 수메루산의 허리 아래, 일곱의 외륜산 위, 그리고 해와 달 위에는 차투르마하라지카(Caturmah r jika, 四大天王 또는 四天王)로 불리는 최하급의 신들이 거주한다. 수메루 산정에는 트라야스트링샤(Tr yastrim a, 三十三天, 利天)라고 불리는 신들이 거주한다. 이들보다 상급의 신들은 더욱 높이 공중에 거주한다고 한다.
지하의 세계(지옥)는 어디에 있는가. 잠부주 아래 16만 킬로미터가 되는 곳에 넓이 16만 킬로미터에 걸쳐 아비치 지옥(Avici, 阿鼻地獄, 無間地獄)이 있다고 한다. 아비치지옥 자체의 깊이도 16만 킬로미터가 된다고 하므로, 이 지옥은 지표로부터 깊이 32만 킬로미터 속에 있는 셈이다. 아비치의 위쪽에 염열(炎熱). 대규환(大叫喚), 흑구(黑 +龜)등의 이름을 가진 지옥이 7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두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고 한다. 팔열지옥 하나 하나의 옆에 하나씩의 한냉한 지옥이 있으므로 '팔한지옥(八寒地獄)'이라고도 한다.
한 변이 겨우 1만 6천 킬로미터 정도 되는 삼각형의 자부주의 지하에 어떻게 이렇게 광대한 지옥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아비달마논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즉 육지는 "곡물의 산과 같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기 때문이며, 파도가 치는 곳에서 멀리 나갈수록 점차 깊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아비치의 상층을 이루고 있는 일곱 지옥의 각각의 깊이는 명시도어 있지 않으므로 여덟 지옥의 최상층이 지하의 어느 정도 깊이에 있는가는 명백하지 않지만, 잠부주 지하 4천 킬로미터 되는 곳에 사자(死者)의 왕 야마(Yama, 閻浮)가 거주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최상층의 지옥보다도 위에 있다고 생각되므로, 최상층의 지옥이라도 대개 지하 1만 킬로미터 이상의 깊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4. 우리가 사는 곳
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수메루산의 남쪽, 일곱 외륜산 바깥의 큰 바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잠부주이다. 이 곳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의 색이 푸른 것은 수메루산의 남쪽면을 이루는 에메랄드가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부주 북부에는 아홉의 검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이를 지나 더욱 북쪽으로 나아가면 '눈의 산'이 있으며, 눈의 산 저쪽에는 '향기로 가득찬 산'이 있다. 눈의 산과 향기로 가득찬 산 사이에는 '염열(炎熱)의 괴로움이 없는 연못'이 있고, 여기에는 강가. 신두. 쉬타. 바크슈의 4대하가 흘러 잠부대륙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연못은 가로. 세로 40키로미터로서 그 물은 차갑고 맑으며, 달고 촉감이 경쾌하며 냄새가 없고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특히 뭇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이 연못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한다.
이제까지 기술한 잠부주란 고대 인도인의 두뇌에 비친 인도의 국토 그 자체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쪽으로 향해 바다 속에서 삼각형으로 돌출 된 대륙, 북부에 있는 산악지대, 그리고 '눈의 산(Himavat)' 즉 히말라야, 그리고 강가는 갠지스강, 신두는 인더스강의 인도 이름 그대로이다. 다만 쉬타와 바크슈는 모두 갠지스강의 지류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쉬르다리야, 아무다리야에 해당된다는 견해도 있어 결정하기가 어렵다. 두 산 사이에 있는 '뜨거움의 괴로움이 없는 연못'에 비유되는 차갑고 맑은 호수 등은 어디가지나 대평원의 혹서에 고통을 받는 인도인이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이상으로 기술한 바와 같이 대기. 물. 황금의 세 층의 기반 위에 서있는 수메루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둘러싼 네 개의 대륙, 해와 달, 천계. 지옥 등 모든 것이 포함된 자연계의 한 단위가 성립된다. 이를 임시로 수메루세계로 부르도록 하자. 이 수메루세계를 1천 개 합친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고 하며, 1천개의 소천세계를 합친 것을 이천세계(二千世界) 또는 중천세계(中千世界)라고 한다. 그리고 1천개의 중천세계를 합친 것을 삼천세계(三千世界)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에는 10억의 수메루세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삼천세계가 곧 우주의 총체인 바, 여기에는 10억 개의 수메루세계가 각각 12억8천만 년 정도의 주기로 그 생멸을 반복하고 있다. 1년여에 한 번 꼴로 광대한 우주의 어디에선가 하나의 수메루세계가 생겨나고, 하나의 수메루세계가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이 하나하나의 수메루세계를 지탱하는 최저변의 기반이 되는 대기층의 넓이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주위가 실로 8X1059킬로미터라고 하므로 그 직경은 약 25 X 1045 광년 정도가 된다. 이것이 10억 개! 근대과학이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태양에서 태양계의 가장 바깥에 있는 명왕성까지의 거리는 1만 분의 6 광년이라고 한다. 이와 비교해 볼 때, 고대 인도인이 상상한 대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에는 무수한 생명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이렇게 발생한 생명 하나하나는 또한 무한의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영구히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아비달마철학의 주요 관심은 물론 우주. 자연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관심은 그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명체, 즉 유정에 있다. 인간의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유정론 또는 인간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아비달마가 제시하는 유정 일반의 외면적. '생물적' 존재방식을, 그 다음에는 내면적. '정신적' 존재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비달마에서 이야기하는 유정의 외면적 존재방식은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옛부터 일상적인 말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삼계는 한역 불교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욕(欲)'이란 생물의 본능적 욕망으로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욕계는 그러한 본능적 욕망이 성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색(色)'은 색채가 아니라, 색깔과 형태를 갖는 물질적 존재의 의미이므로, 색계(色界)란 물질의 세계, 물질이 존재하는 세계가 된다. 물론 색계(色界)뿐만 아니라 욕계(欲界)도 물질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다같이 물질적 세계이지만, 특히 본능적 욕망이 치성한 곳을 욕계라고 부르며, 이와 같이 욕망이 치성하지 않은 곳을 단순히 색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색계는 문자 그대로 '색(色)'이 없는 세계,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혹은 여기에서 말하는 '색(色)'이라는 말을 물질 일반의 의미가 아니라, 특히 육체의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불전에서 '색'은 종종 이러한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색계는 육체의 세계 즉 육체를 갖고 생존하는 세계의 의미가 되며, 무색계는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적 생존의 세계가 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욕계보다는 색계가, 색계보다는 무색계가 훨씬 뛰어난 생존양식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 장소에 있어서도 욕계가 가장 아래에 있으며, 무색계가 가장 위쪽에 위치한다. 즉 지하의 세계. 지표의 세계. 공중의 세계(천계) 중의 하층은 욕계에, 천계에 상층은 색계에 속하며, 무색계는 그 위 천계의 최상층에 있다고 한다.
지하의 세계에는 (1) '지옥(地獄)'의 생활이 있다. 지표의 세계에는 (2) '아귀(餓鬼)', (3)'축생(畜生)', (4)'인간(人間)'의 생활이 있다. 천계에는 (5)'천(天)'(천인, 천녀. 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를 '오취(五趣)'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 다섯에 '아수라(阿修羅, 또는 수라)'를 더하여 육취(六趣) 또는 육도(六道)라는 쪽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중 지옥에서 인간까지의 4(또는 아수라를 더하여 5)취와 천 중의 최하급의 6종(六欲天)이 욕계에 속하며, 천 중의 중급의 것이 색계에, 상급이 것이 무색계에 속한다. 5(6)취의 하나하나는 그 어느 것이나 잘 알려져 있다. 온갖 고통을 겪는 지옥은 물론이고, 기갈의 고통을 받는 아귀이건, 약육강식의 축생(동물계)이건, (항상 싸움박질을 하는 아수라이건), 모두 인간의 생활에 비해 열등하며 고뇌가 많으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이다.(지옥. 아귀. 축생을 三惡趣, 三惡道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천계는 인간세계보다 훨씬 훌륭하고 행복하며 바람직스러운 경지이다.
그러나 천계는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영원한 행복의 세계는 아니다. 다른 4(5)취에 비하면 그 격이 높기는 하지만, 轉變과 쇠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 천계의 생존도 인간 및 지옥에서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유정은 오(육)취의 어느 하나에 속하여 살아간다. 죽으면 또한 오(육)취의 어느 하나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하늘의 신으로 태어나는 유정도 있을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다시 동일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천계에서 신들의 삶을 살던 자도 그 일생을 마치고(천신이라도 그 수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후에 아귀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오(육)취의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한다는 생사의 바퀴(輪)는 쉼 없이 돈다(廻). 이 윤회의 경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지옥의 바닥에서 고통을 겪는 자도 천계의 생활을 향수하는 신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사생'이란 이와 같이 유정이 윤회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로 태어날 때, 그 태어나는 방법의 종류를 분류한 것이다. 이는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넷을 말한다. 앞의 둘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습생은 습기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구더기, 장구벌레 등이 태어나는 방식을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화생은 별개의 의지되는 것이 없이 홀연히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태생, 아귀는 태생인 것과 화생인 것이 있으며, 천과 지옥은 화생, 축생은 태생인 것과 난생인 것, 그리고 습생인 것이 있다. 특수한 경우로서 축생에도 화생이 있으며, 인간에도 난생. 습생. 화생이 있다.
2. 업(業)의 이론
그러면 이러한 삼계(三界). 오(육)취. 사생(四生)이라는 유정의 윤회적 생존의 갖가지 모습은 무엇에 의해 생기는 것일까. 아비달마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명언하고 있다. 그것은 그 유정의 행위 Karman(業)에 따른 것이라고, 과거의 선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즐겁고 바람직스러운 생애를 초래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괴롭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생애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로 일반에 알려져 있는 것도 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말은 아비달마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부정확한 말이다. 정확하게는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고 해야 한다. 선한 행위가 원인이 되고 즐겁고 안락한 결과를 낳는다. 악한 행위가 원인이 되어 즐겁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원인은 도덕적으로 선이나 악이지만, 결과는 그 결과를 받는 자에게 있어 즐거움 또는 즐겁지 않음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말하면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이다. 따라서 '선과(善果), 악과(惡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업'의 이론, 인과응보의 사유방식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는 불교가 갖는 다양한 사상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의 정신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업의 인과의 사상이 널리 쓰이기가 어렵게 된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이는 과거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깊이 스며 있었음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를 반성없이, 그것도 원래의 뜻에서 벗어난 의미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숙명론. 결정론적인 이해이다. 즉 업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자기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의 존재방식이 이미 과거에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주어져 있어 현재로서는 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두운 인생관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인생관은 현재의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노력에의 의욕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불교의 긴 역사에서, 업의 이론이 이러한 숙명론적인 성격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다.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hnan)은 "불행하게도 업론(業論)은 마음이 약해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열정을 잃을 때, 운명론과 혼동되었다. 타락과 겁약이 구실이 되고, 절망의 말이 되었다. 결국 희망을 전하는 말을 잃어버렸던 것이다."라고 하였다(Hindu View of life). 그러나 이미 샤키야무니 붓다는 아가마에서 이러한 숙명론을 앞에서 언급한 비판, 즉 사람의 노력을 무화시키고 또 노력하고자 하는 의욕도 무화시키는 그릇된 견해라는 이유로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업을 생각하는 방식은 본래 숙명론과는 다른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아비달마는 업의 이론이 숙명론과 구별되는 논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첫째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경우가 과거의 우리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었음에 마음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장래의 경우가 현재의 우리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여 현재의 행위를 옳게 함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긴요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탄식하는 사람에게 업론은 운명론이 되지만,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에게 그것은 반대로 자신을 고무하여 밝은 미래를 개척하게끔 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업론을 운명론이라고 하여 어두운 인생관으로 간주할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 용기의 원천으로 간주할 것인가는 전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근거는 업이 유정의 존재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因). 과(果)의 관계는 다만 한 종류, 즉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 사이에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뒤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다양한 종류의 인과관계가 무수히 작용하여 순간 순간의 인간의 생존을 구성한다. 업과 그 결과라는 관계는 무수하고 다양한 인과관계 중에서 다만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중복되어 다시 그러한 업의 결과를 낳는 일은 없다. 현재 행하는 선악의 행위, 즉 업이 과거의 업이 초래한 결과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업의 과보는 한편으로는 결코 거부할 수 없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면을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3. 업(業)과 윤회(輪廻)
업의 이론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적 견해는 무아설(無我說)과 업론(業論)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불교는 무아(無我)를 설한다. '아(我)'라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회를 인정할 수가 없다. 업에 의한 윤회의 설은 불교의 본래의 입장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이러한 비판적 견해의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비달마도 결국 마찬가지로 생각하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비달마에서 설하는 업과 그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의 원칙은 삼계. 오(육)취. 사생이라는 유정의 윤회의 세계에 있어서만 타당하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를 하여(즉 악업을 지어) 그 결과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좋지 못한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본래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지만, 선한 행위를 하여(즉 선업을 닦아 또는 공덕을 쌓아) 그 결과 (천 등의) 보다 좋은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도 윤회의 세계 안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를 이탈할 수는 없다. 불교가 본래 지향하는 바, 윤회를 초월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대체 윤회의 세계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평상적인 삶의 세계이다. 즉 도덕적 선악의 세계이다. 평상의 인간(범부)은 선악의 세계에 산다. 이러한 인간의 선악적 존재를 지탱하는 지주는 아비달마논사에 의하면 업의 인과의 원칙이다. 선행이 이루어질 때에는 좋은 과보가 필연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 악의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가마에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전자의 신과 같은 자가 어디엔가 있어 사람의 선악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아비달마가 부여하고 있는 선의 정의는 '좋은 과보를 얻는 것'이며, 악의 정의는 '좋지 못한 과보를 얻는 것'이다). 좋거나 좋지 않은 과보를 얻는다고 하여도, 이를 부여하는 신이나 운명이 어디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는 원인인 행위와 결과인 응보 사이의 원칙으로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행위가 이루어진 다음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얼마만한 시간이 개재하는가는 각각의 행위에 따른 것으로 일정하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행위가 이루어진 직후에 과보가 나타나며(소매치기를 하여 현행범으로 수갑을 차는 것과 같이), 어떤 경우에는 상당한 시간을 경과하여 나타난다(10년전에 베푼 친절에 이제 와서 감사 받듯이).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생애에 과보가 나타나지 않고, 다음 생애(來世) 또는 그 다음 생애에서야 나타난다. "과거(의 생애)의 업에 의해 다음(의 생애)에 태어나는 경우가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행위는 필연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이것은 절대의 원칙이다.
이 과보는 또한 엄격히 개인적이라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업의 문제는 나 한 사람의 문제이다. 하나의 행위의 주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타인이 한 선행의 좋은 결과를 자신이 취하는 것도, 자신이 한 악행의 좋지 않은 결과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가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죄를 범한 사람은 그대이다. 벌을 받는 자는 그대이다." 이른바 자업자득이다.
업의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 이 두 원칙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선악의 근저가 성립된다. 즉 도덕의 심리적 근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의해 윤회의 세계가 성립된다. 업의 이론은 평상적 인간의 삶의 세계의 도덕적 질서 수립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평상적 인간의 세계, 선악의 세계 즉 업과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평상적 인간의 세계(범부의 세계)를 삶이 참으로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과, 선악의 원리가 평상적 인간의 세계를 성립시키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별개이다. 그리고 선악의 원리가 평상적 인간의 세계를 성립시킴을 인정하는 것과,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도 별개이다. 아비달마의 입장은 업과 윤회의 세계를 궁극적으로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는 생각치 않으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평상적 인간의 삶의 현실과 선악의 원리가 그 삶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도덕적 요구를 승인한다. 여기에 도덕율을 향한 외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한 샤키야무니 붓다의 입장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업이 윤회의 삶을 결과할 때에는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고 한다. 업. 윤회의 세계는 또한 번뇌의 세계이다.
번뇌는 본래 문자 그대로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것, 고뇌케 하는 것'의 의미이지만, '(마음의) 오염(汚染)'의 의미로도 이해된다. 평이하게는 인간의 마음이 갖는 악한 활동으로 생각하여도 좋다. 아비달마의 분석적 사유방법에 따르면, 필히 마음의 악한 작용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의 심작용(중성이지만 올바른 지혜가 일어나는 것을 방해한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번뇌가 선한 심작용인 경우는 없다. 그런데 업이 윤회의 결과를 야기하는 것은 악업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업의 경우에도 그러하다(惡因苦果 뿐만 아니라 善因樂果도 있으므로). 그렇다면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루(有漏)'라는 말이 갖는 사유방법을 알아야만 한다. 업. 윤회의 세계의 일체는 유루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루(有漏)'는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사스라바(s srava)이다. '아스라바( srava)를 지닌 것'이란 뜻이다. 아스라바는 본래 '흘러나옴, 유출된 것'을 의미하지만, 이를 불교는 번뇌의 동의어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왜 아스라바라는 말이 번뇌의 의미가 되었는가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보통은 "육근(5감각기관과 마음)으로부터 누출되기 때문에"라는 설명이 잘 알려져 있다. 한역자가 '누(漏)'로 번역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아스라바가 번뇌의 의미라면, 사르라바 즉 유루는 '번뇌를 지닌 자'라는 의미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범부의 세계, 업. 윤회의 세계에 있어 모든 존재는 유루이다. 즉 번뇌를 지닌 자이다. 그러면 번뇌를 지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설일체유부적으로 이를 표현하면, 범부의 세계에 있어 모든 존재는 "번뇌의 대상(엄밀하게 말하면 번뇌인 심작용을 수반하는 마음이 대상)이거나, 번뇌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아비달마논사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업. 윤회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 즉 깨달음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일지라도 번뇌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부처님은 '유루'의 존재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부처님은 두말할 나위 없이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다. 깨달음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무루(無漏)'이다. 부처님은 번뇌의 대상은 되지만, 유루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루는 그것이 번뇌의 대상이 되거나 번뇌를 수반함과 동시에, 번뇌가 그 위에 힘을 발휘하고 그것을 염오시키는 것이라고 정의되지 않으면 안된다(부처님은 번뇌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번뇌가 부처님에게 힘을 발휘하여 부처님을 염오시키는 일은 없다).
업. 윤회의 세계에 속하는 한 모든 존재는 선한 것. 중성의 것. 악한 것 모두 이러한 의미에서 유루이다. 즉 번뇌를 지닌 것이다. 업이 윤회하는 존재를 결과할 때에는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고 앞에서 말하였던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였다. 따라서 '유정'과 '(범부의)세계'와 '(욕. 색. 무색의) 삼(계에 윤회하는) 생존'과 '苦'는 동의어이다. 이것이 아비달마적으로표현된 평상적 인간의 삶의 세계이며, 선악의 세계이며, 미혹의 세계이다.
그러나 미혹의 세계는 인간이 취해야 할 모습은 아니다. 삼계. 오(육)취. 사생에 생사하는 윤회의 연쇄는 단절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 평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 즉 업과 번뇌에 지배되는 미혹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궁극적 진실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은 지혜로써 마음을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무루의 길이다. 이 실천도를 나아가는 자는 '성자'로 불린다. 모든 불교가 이를 설하는 바, 아비달마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경우, 이를 설명하는 기초로서 독특한 이론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밝혀지지 않고는 이 학파가 제시하고자 하는 실천도도 이해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다음으로는 이 이론의 대강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3장 달마(法)의 체계
무상(無相)이라는 것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아가마 경전에 반복되어 나타나있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무상'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변천해간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는 고(苦)다. 모든 존재는 무아이다(여기에서 말하는 我는 자기의 존재중심에 의식되는 나라는 관념, 나의 생존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 나아가 구체적으로는 신체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유일하고 불멸한 영혼을 의미한다. '무아(無我)'란 그러한 아(我)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는 오늘날 이 말이 사용되는 경우의 그것-자기를 주장하는 마음이 없는 것, 사심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일체(一切)는 무상(無常)이다', '고(苦)다', '무아(無我)이다'라는 주장은 아가마 경전중에 이와 같이 병렬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일체는 무상이다. 무상한 것은 고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라고 하여, 무상이 고. 무아를 근거 짓는 관계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⑴ 일체는 시간과 함께 전변하고 교체되어 항상됨이 없는 것이다. ⑵ 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에 집착하는 데에 그것이 고통으로 감수되는 이유가 있다. ⑶ 이와 같이 일체가 무상이며 고(苦)인 바, 상주불변(常住不變)한 '나'라는 생존의 주체를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일체는 무상이다'라는 최초의 명제 그 자체의 근거는 무엇인가. 경전은 이에 대해서는 그다지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어떠한 것이라도 모두 무상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한다. 무상한 것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상주불변할 것인가"라고 하고 있을 따름이다. 무상한 것을 원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것은 동어반복 (tautology)으로도 들린다. 그러나 이는 결코 무의미한 말은 아니다. 여기에 '일체는 무상하다'라는 명제의 근거는 '일체는 인과관계에서 생기한다'라는 사유방법이라고 하는 사실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독립하여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이 만들어낸 결과로서만 있는 것이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도 소멸된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나타나게끔 하는 원인여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주불변하지 않다. 즉 무상이라는 것이다.
'일체는 인과관계에서 생기한다'라는 사유방법을 '일체가 단지 하나의 궁극적 원인-예를 들어 전지전능한 신-에 유래한다'라는 사유방법, '일체는 원인이 없이, 우연히 또는 근거없이 생기한다'라는 사유방법과 다른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불교는 모든 존재의 기초에 절대성, 또는 불확정성. 우연성을 두지 않는다. 불교는 그 기초에 논리성을 둔다. 아가마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는 말로 표현한다. 연기는 '(A에) 의해 (B가) 생기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일체는 연기하여 존재한다. 즉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다양한 결과가 생기한다'라는 존재방식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상이며, 무아이다.
아가마에서 '일체는 무상이다'를 종종 '일체의 상스카라 sa sk ra는 무상이다(諸行無常)'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연기가 일체의 무상성을 근거 짓는 것임을 나타낸다. 상스카라는 본래 '만듦' 또는 '만드는 것'의 의미이지만, 이 경우에는 수동형 상스크리타 sa sk ta 즉 '만들어진 것(有爲)'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일체의 상스카라는 무상이다.'는 '일체의 만들어진 것은 무상이다'라는 말이 디는데, '만들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다양한 원인에 의해 결과로서)만들어진 것' 즉 '인과관계에 있는 것', '연기된 것'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일체는 무상이다'라는 사실의 근거가 연기의 원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비달마가 지향하는 것.
이와 같이 아가마는 고. 무아가 무상에, 무상은 연기에 근거한다고 한다. 이 연기. 무상. 무아의 논리가 곧 아비달마 불교가 충실히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설일체유부 학설이 근간이 되는 소위 '달마의 이론'도 이를 아비달마적으로 엄밀히 설명하여, 업. 윤회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一切有(일체가 존재한다)'라는 말로 때로는 이 학파가 아가마 이래의 諸行無常의 사유방식을 부정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혀 그 반대임이 곧 밝혀질 것이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게, 무아인 것을 무아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올바른 지혜이다. 그런데 평상적인 인간은 무지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에 상주성(常住性)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날 때, 실망과 노여움을 느낀다. 무아인 것에 '나'를 의식하고 '나의 것'을 의식한다.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요구, 갈망이 생기고 고뇌한다. 이 경우 무지는 번뇌의 대표이다. 기대해서는 안될 것을 기대하고, 의식해서는 안될 것을 의식하는 곳에 번뇌에 의한 업이 있다. 그 결과는 고이다. 무지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된다. 이것이 곧 범부의 일상적인 상태를 타파하여 깨달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앞장에서 말한 업. 윤회의 세계라는 현실로부터 무루(無漏)의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행하는 불교의 실천체계는 이 간명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가마에는 다양한 가르침이 나타나 있으나, 모두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귀결된다. 이를 엄밀히 설명하는 것이 아비달마의 임무라고 아비달마논사들이 생각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경우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일체는 무상하다, 무아다'를 논증하고자 한 독특한 입장을 취하였다. 우리는 이 이론을 로젠베르크 O. Rosenberg(제정 러시아 말기의 동양학자, 1880 ? ~ 1919)의 명명에 따라 '달마의 이론'으로 부르도록 한다. '달마'란 무엇인가? 이 말은 보통 '법(法)'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인도사상 일반에 있어, 특히 불교의 경우에 한정하여 보아도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지탱하다', '유지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파생되어 일반적으로는 질서. 법칙. 규범 등을 나타내며, 나아가 도덕. 정의, 습관. 습성. 성질, 진실. 최고의 실재 등도 의미한다. 불교어로서는 특히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지칭하는 것이 가장 널리 보이는 용례이다. 불법, 불. 법. 승, 법사. 설법. 법열. 법요 등의 법이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의 불교어로서 독자적인 그리고 중요한 용례가 있다. 이는 법이 널리 일반적인 사물, 존재를 의미하는 경우이다. 아마도 일체의 것이 법칙. 규범에 따라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용법이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체는 무아이다'를 '일체의 달마는 무아이다(諸法無我)'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달마의 이론'에서의 달마라는 말도 본래는 이러한 용례로 출발하여, 후에 설일체유부에서 독특한 술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 달마는 단순히 어떤 것,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집적되어 존재를 구성하는 바의 '존재의 요소'로 생각되고 있다. 경험이 세계 속에 있는 일체의 것, 존재, 사물,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에 의한 무수한 달마의 이합집산에 의해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달마이론'의 기본적 사고이다.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달마의 이론'에서는 달마를 75종류로 헤아린다. 모든 현상적 존재는 이 75종의 달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75종의 달마에만 '실재성'을 인정하고, 이 이외에는 즉 현상적 존재 그 자체에는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만 스체르바츠키(Th. Stcherbatsky, 러시아의 동양학자, 1866~1940)가 다음과 같이 신중히 제기한 의문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설일체유부와 그 반대자 사이에 행해진 논쟁은 실재론과 관념론이라는 우리의 개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문제에 대해, 전혀 상이한 면에서 행해진 것이 아닐까"(The Central Conception of Buddhism and the Meaning of the Word Dharma)라고 하고 있는 점에 주의하여 이 '실재'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가마의 교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아가마경전의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일체가 무상, 고, 무아임을 아가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 중에는 후에 아비달마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서술을 간략하게 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역어로 이야기하면, '오온(五蘊)'에 의거한 것, '십이처(十二處)'에 의거한 것, '십팔계(十八界)'에 의거한 것이라는 세 가지이다. 온(蘊). 처(處). 계(界)에는 물론 각자의 의미가 있지만, 지금은 다만 모두가 존재의 종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일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5종류, 12종류, 또는 18종류를 열거하고, 이 다섯, 열둘, 열여덟 모두가 무상. 고. 무아라고 설하는 것이다.
첫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다섯 가지 하나하나가 무상(無常)이며, 고(苦)며, 무아(無我)이다. 아가마에 나타난 횟수로 보면 이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둘째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열둘 하나하나가 무상이며, 고며, 무아이다. 셋째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열여덟 하나하나가 무상이며, 고며, 무아이다.
여기에 거론되고 있는 '색(色)'으로부터 '식(識)'까지이 다섯, '안(眼)'으로부터 '법(法)'까지의 열둘, '안(眼)'으로부터 '의식(意識)'까지의 열여덟 가지 말은 샤키야무니 붓다가 가르침을 설하던 당시의 일상용어로서, 이것이 언급될 때 이를 듣는 사람들은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특수한 지식과 심원한 이해가 필요한 어려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붓다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말의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이 경우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마의 의도는 일체가 무상이며, 고이며, 무아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색(色)'으로부터 '식(識)'의 다섯은 이 다섯이 합쳐 '일체(一切)'를 언표함에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아가마에 종종 "색(色)은 무상(無常)이다, 수(受)는 무상이다, 상(想)은 무상이다, 행(行)은 무상이다, 식(識)은 무상이다, 일체는 무상이다, 색은 고다 ......일체는 고다, 색은 무아이다.....일체는 무아이다."라 하고 있듯이, 오온의 하나하나를 병렬한 다음 새삼스러이 '일체는 ....'이라는 구를 두고 있는 예도 보인다. '색' 및 '식'의 다섯 어휘는 항상 그 다섯을 한 조로 하여 일체의 무상. 고. 무아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다섯 중에 특정한 어느 하나 또는 둘 만을 예거하여 말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도 전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어디까지나 다섯 또는 열둘, 열여덟로 '일체'가 대표되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듣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를 용이하게 이해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점에서는 인식론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십이처. 십팔계가 현대의 우리에게도 쉽게 이해된다. 십이처에서 안. 이. 비. 설. 신. 의는 시간. 청각. 취각. 미각. 촉각의 5감각기관과 인식하고 사고하는 마음이다. 이들의 각각의 대상이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그러므로 '신(身)'은 단순히 신체가 아니라, 신체의 표면에 빠짐없이 촉각작용이 있으므로 촉각기관으로서의 신체를 의미한다. '색(色)'은 시각기관(안)의 대상이므로, 단순히 색깔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성(聲)'은 단순히 목소리가 아니라 이를 포함한 소리 일반을 의미한다. '촉(觸)'은 피부의 촉감, 손의 촉감등의 감촉이다. '법(法)'은 달마의 역어이지만, 이 경우에는 단지 '의'이 대상을 의미한다. 즉 마음의 모든 생각이다.
예컨대 십이처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사고하는 여섯 종류의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는 측과, 이것이 일어나는 대상 즉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아지는 것, 맛보아지는 것, 감촉되는 것, 알려지고 사고되는 것이다. 주관측의 5종의 기관(六根)과 객관측의 6종의 대상(六境)으로서 '一切'가 의미되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열둘의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십팔계도 동일한 인식론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는 십이처보다 더욱 자세히 분류하여 6종의 마음의 작용(六識)과 각각의 기관(六根)과 각각의 대상(六境)의 18종을 거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주관의 마음이 객관의 대상을 취함에는 각각의 기관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보는 마음(眼識)은 시각기관(眼)을 통하여 색깔과 모양(色)을 취한다. 듣는 마음(耳識)은 청각기관(耳)을 통하여 소리(聲)를 취한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 도식적으로 되어 있으므로 마지막의 생각하는 마음(意識)과 사고기관(意)이 구분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백히 구별되지 않아 아비달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여하튼 주관측의 六識. 六根과 객관측이 六境이라는 십팔계에 의해 '一切'가 의미되고 있음은 앞의 십이처의 경우와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십이처. 십팔계에 비해 오온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 하나하나의 말에도 알기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그 다섯으로써 '일체'가 의미된다는 것도 얼핏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붓다에 의해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에는 일반에게 용이하게 이해되는 말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아가마의 전승에서 볼 때, 그와 같이 반복하여 이르는 곳마다, 누구를 막론하고 설한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난해한 용어를 포함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色'에서부터 '識'의 다섯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나열하고, 이에 의해 인간의 생존 및 환경의 일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머리의 '色'은 단순히 색깔이 아니며, 색깔과 모양만도 아니다, 여기에서는 색깔과 모양을 가진 일체의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色'은 십이처. 십팔계 중의 '色'보다도 의미가 넓다. 이는 마지막의 '識'이 마음으로서 인간존재의 내적인 세계, 주관측을 나타냄에 대하여, 이 '色'은 그 대상 즉 인간존재의 외적 세계, 객관측(인간 자신의 육체도 포함하여)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셋, '受', '想', '行'은 '識'이 '色'과 즉 心과 物이, 내계와 외계가 접촉하여 생기는 심적 반응을 그 순서에 따라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受'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의 의미로서, 六識이 六根을 통해 六境과 접촉하여 이를 감수하는 것이다. '想'은 감수한 것을 표상하는 것이다. '行'은 표상에 의해 마음이 갖가지 동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行'은 상스카라로서, 넓게는 모든 유위법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협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오온은 마음(心), 마음의 대상인 物, 그리고 마음이 物로 향할 때 생기는 마음의 반응 3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로써 인간의 경험적 삶의 '일체'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체'라 할지라도 이것이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로 언급되는 한, 이는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한에서의 세계의 '일체(一切)'이다. 즉 한 인간의 경험적 삶의 '일체(一切)'로서, 인간의 삶과의 관계를 떠난 자연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한 일이다.
분석적 사고의 발전
이상과 같이 아가마는 때로는 오온에 의해, 때로는 십이처에 의해, 때로는 십팔계에 의해 인간의 삶에 관련된 '일체'의 무상. 고. 무아를 설한다. 이 '일체'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는 '유위(有爲)'의 존재이다. 동시에 이는 범부에 의해 욕망. 집착되는 '유루(有漏)'의 존재이다. 무상(無常)이며 유위(有爲)이고 또한 유루(有漏)이며 고(苦)인 현실의 삶의 일체는 그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유위를 유위로 알 때, 이에 대한 욕망. 집착이 소멸되어 그대로 적정하고 안락한 경지, 열반으로 전환된다. 현실의 삶이 '유위'이며 '유루'임에 대해, 열반의 경지는 '무위(無爲)'이며 '무루(無漏)'이다.
이 '유위. 유루'로부터 '무위. 무루'로의 전환은 본래 구도자의 내면적 체험의 사실로서, 현실적 삶의 바깥, 어디엔가 다른 곳에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위, 유루인 것과는 별도로 이와 병렬하여 무위, 무루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가마의 여기저기에 이미 나타나 있는 아비달마적인 분석의 경향은 유루. 무루, 유위. 무위를 병렬적 관계로 취급하고 있다. 결국 유위인 것(유위의 달마)과는 별도로 무위인 것(무위의 달마)이 있으며, 이들 유위. 무위를 합쳐 '일체의 달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루의 달마와는 별도로 무루의 달마가 있으며, 이들 유루. 무루를 합쳐 '일체의 달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체는 무상'이라고 할 때, 필히 '일체의 달마는 무아이다(諸法無我)'라고 하는 바와 같이, 상스카라와 달마를 구별하여 표현하는 사실에도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아'는 유위와 무위의 일체의 달마에 타당하지만, '무상'은 유위의 달마에만 타당하다고 하는 생각이 여기에 있다.
五蘊과 五取蘊이라는 말을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의 경험적 입장에 서면, 무상. 유위의 오온은 모두가 그대로 유루의 존재이다. 나의 삶의 유루적인 존재방식과는 별개로 오온은 상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온은 곧 '번뇌를 지닌 오온'(오취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후에 분석적인 고찰이 발전하면, 오취온이라는 유루적인 존재방식으로부터 유루성을 제거한 오온, 오취온이 아닌 무루의 오온이 상정되기에 이른다. 그럴 때, 오온이라면 유루. 무루를 모두 포함하며, 오취온이라면 유루의 오온만을 의미하게 된다.
有 +- 有
| 업. 번뇌의 세계 ------- 漏
爲 +- 道 -+
| 無
無 | 漏
爲 -- 깨달음의 영역 -+
아가마에 보이는 위와 같은 분석적 관찰의 경향은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 이르러 훨씬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평상적 인간의 세계, 업과 번뇌의 세계는 유위이며 유루이다. 깨달음의 영역에 속하는 열반은 무위이며 무루이다. 그리고 평상적 인간의 삶으로부터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道)은 유위이면서 무루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아직 깨달음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유위이며, 동시에 이는 번뇌를 떠나는 길이므로 무루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위와 같다.
아비달마는 오온으로 표현되는 '일체'와 십이처. 십팔계로 표현되는 '일체'도 명확히 구별한다. 오온은 그 어느 것도 무위인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나, 십이처. 십팔계 중의 '법'에는 무위인 것(무위의 달마)도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동일하게 '일체'라고 하여도, 오온에 의한 경우는 좁게 무위를 제외한 '일체의 유위'를 의미하지만, 십이처. 십팔계에 의한 경우에는 널리 유위. 무위를 합친 '일체의 달마'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옆과 같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온이 '색'과 십이처. 십팔계의 '색'은 동일한 말(원어로는 r pa)이지만, 그 의미에에는 광협의 차이가 있다. 오온의 '색(色蘊)'은 넓게 물질적 존재를 의미한다. 십이처. 십팔계의 '색(色處. 色界)'은 '안'의 대상에 한정된다. 색온은 5감각기관(五根)과 그것의 각각의 대상(五境) 즉 색(협의). 성. 향. 미. 촉이 물질적 존재임은 명백할 것이다. 여기에서 오근과 오경을 합친 것이 광의의 '색'이 되기 때문에, 五根. 五境은 十色處(十色界)라고 불린다.
'법 dharma'이라는 말은 광의로 사용되면 두말할 나위없이 일반적인 어떠한 것, 사물,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온 전체, 십이처. 십팔계 전체는 달마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이라도 협의로 사용하면, 법처. 법계에 한정되어 이는 '意'의 대상을 의미한다. 즉 인식. 판단, 사고, 기억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생각의 내용이다. 본래 '意'의 대상은 필히 법만은 아니다. 물질적 존재도, 동일한 '意'이라도 모두 생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이는 필히 법만은 아니다. 물질적 존재도, 동일한 '意'이라도 모두 생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法'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이는 필히 '意'의 대상이다. 이를 가장 넓은 의미를 갖는 '法'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모든 생각의 내용이라고 할 때 이것이 이르는 범위가 무한하므로 달마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온의 '行'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마음에 동기를 부여하는 마음의 작용, 즉 '思'를 의미하지만, 오온을 십이처. 십팔계와 대조하여 보면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처. 법계가 '의'의 대상으로서 매우 넓은 의미를 포함함에 반해, 이와 대응되는 수(受). 상(想). 행(行)의 삼온(三蘊) 중의 '수(受)'와 '상(想)'은 단지 한 종류의 마음의 작용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머지의 행온(行蘊)의 의미를 확장하면, '수(受)'와 '상(想)' 이외의 모든 심작용, 그 외에 법처. 법계에 포함되는 것은 모두 이 '행'안에 포함된다. '행 sa sk ra'이라는 말은 광의로 사용되면 일체의 유위의 달마를 의미하므로, 이와 같이 넓은 범위로 사용되면 일체의 유위의 달마를 의미하므로, 이와 같이 넓은 범위를 함의하기에 적당하다는 이유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온. 처. 계의 대응(앞의 그림이 나타내는 바)은 남방상좌부(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 타이, 인도네시아 등에 세력을 갖고 있는 불교)의 아비달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아마도 모든 학파에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그 독특한 사유방법으로 말미암아 색온의 일부이면서도 법처(법계)에 포함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는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5감각기관의 대상이 되지 않는 특수한 것으로서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행위(無表業)'로 불린다. 이러한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에서, 설일체유부의 경우는 특히 앞의 그림에 색온과 법처를 잇는 또 하나의 선을 그려 넣으면 완전한 그림이 될 것이다.
5위 75법 5온(蘊) 12처(處) 18계(界)
┌色 法(11) ─── 色 蘊 +-眼 根 處 ┐
│ | 耳 根 處 │
│ | 鼻 根 處 │ ──── 五 根 界
│心 法(1) 受 蘊 ┐ | 舌 根 處 │ (眼 根 界)
│ │ +-身 根 處 ┘
│ │ 識 根 處 ──── 意 根 界
│心所有法(46) ─── 想 蘊 │ +-色 處 ┐
│ │ | 聲 處 │
│ │ | 香 處 │ ──── 五 塵 界
│ 行 蘊 ┘ | 味 處 │ (色 塵 界)
│不相應法(14) +-觸 處 ┘
│ 無 表 色 ┐
│ 識 蘊 心 所 法 │法處 ── 法 界
│ 不相應法 │
└無 爲 法(3) ────────── 無 爲 法 ┘ 六 識 界
(眼 識 界)
5위(位) 75법(法)
1. 색법(色法) (11) +- 5근(根) -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 5경(境)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 무표색(無表色)
2. 심왕법(心王法)(1) - 육식(六識) :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식(意識)
3. 심소유법(心所有法) (46)
大 地 法(10) - 受, 想, 思, 觸, 欲, 慧, 作意, 勝解, 三摩地
大善地法(10) - 信, 勤, 捨, , 愧, 無貪, 無瞋, 不害, 輕安, 不放逸
大煩惱地法(6) - 無明, 放逸, 懈怠, 不信, 沈, 掉擧
大不善地法(2) - 無 , 無愧
小煩惱地法(10) - 忿, 覆, , 嫉, 惱, 害, 恨, 諂, ,
不定地法(8) - 惡作, 睡眠, 尋, 伺, 貪, 瞋, 慢, 疑
4.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14)
得, 非得, 衆同分, 無想果, 無想定, 滅盡定, 命根, 生, 住, 異, 滅, 名身, 句身, 文身
5. 무위법(無爲法)(3)
택멸(擇滅)
비택멸(非擇滅)
허공(虛空)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유위. 무위, 유루. 무루,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분류는 모두 아가마 이래의 것이지만, 이에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오위'의 범주가 부가되어 달마의 체계는 일단 정비된다. 이는 온. 처. 계의 분류 중에서 행온과 법처. 법계의 부분을 상세히 고찰한 결과이다.
우선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 행온(行蘊)을 둘로 대별한다. '마음에 수반되는(心相應)' 것과 '[특히]마음에 수반되는 [관계에 있지]않은(心不相應)'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심작용을 말하지만, 이 경우 '수' '상'의 둘은 별도의 온으로 정립되기 때문에 당연히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심작용을 의미하게 된다. 후자는 物도 心도 아닌, 이들 사이의 관계라든가 힘과 같은 특수한 것을 의미하며, 대부분은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마음에 수반되는 行'에 '受' '想'의 둘을 더하면, 심작용(이를 '心所'라고 부른다)의 전체이다. 이들은 '[특히] 마음에 수반되는 [관계에 있지]않은 행(이를 '心不相應行'이라고 부른다)'과 함께 法處(法界)에 포함된다. 그리고 법처(법계)는 앞에서 설명한 색온에 속하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行爲'와 오온의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는 무위의 달마도 포함한다. 色(광의의 色, 즉 色蘊), 心, 心所, 心不相應行, 無爲를 오위라고 한다. 오위와 오온 그리고 십팔계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리면 위와 같다.
완성된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 오위 중, '色'에 11종이 달마를 배치하고 있다. 五根과 五境과 無表業(無表色이라고도 한다)이 그것이다. 그리고 '心'에는 1종을, '心所'에는 46종을, '心不相應行'에는 14종을, '無爲'에는 3종을 열거하여 합게 75종을 달마로 인정한다. 소위 五位七十五法이 이것이다.
75종의 하나하나는 어떠한 것인가. 왜 75종만을 달마로 인정하고, 그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의는 다음에서 하겠다.
달마이론의 발전
오이칠십오법의 체계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가마의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를 정비하고 세분한 데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연기. 무상. 무아의 가르침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마가 소박하게 사물의 종류를 열거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 무상. 무아를 설함에 대해, 달마의 이론은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달마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또한 아가마에서 설해진 온. 처. 계와 같이 그 하나하나의 내용은 어떠할 지라도 그들이 전체로서 '일체'를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달마는 논서 중에서는 간단히 '자체를 保持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을 따름이지만, 자체라는 말의 용례를 검토해볼 때 '자체를 保持한다'는 것은 대개 두 가지의 의미로 이해된다.
첫째는 다른 것의 존재방식에 대해 이와는 구별되는 그 자체의 존재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단순한 현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기초에 있는 불변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의미에 의하면 달마는 각각 독자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 이에 의해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두 번째의 의미에 의하면 현상의 심층에 잠재해 있는 존재의 기본적 요소로 생각된다. 논서에서 사용되는 달마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히 후자가 중요하며, 이것이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달마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각각의 특성을 가지며 모든 존재의 기본적 요소로서 존재하는 달마는 그 수에 있어서는 무수하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75종이다. 이것이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이 무수한 달마 상호간의 다양한 인과관계 위에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현상의 세계이며, 그러한 점에서 일체는 무상이며 무아이다.
'일체가 있다'라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이러한 존재의 기본 요소로서의 달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가'라고 함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가라는 의미이지만, 이러한 일체가 있다고 하는 주장이 검토없이 이해될 때에는 일체의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관통하여 존재한다는 내용으로 오해되기 쉽다. 이에 따라 '제행무상'의 테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다른 학파로부터 논란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일체'는 소박하게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본요소로서의 달마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란은 타당하지 않다. 과거의 달마, 현재의 달마, 미래의 달마, 그 일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 '一切有'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의 어느 때에도 있는 바의, 즉 '三世에 實有'인 바의 존재의 요소로서의 달마를 상정하는 것은 '諸行無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달마를 상정하지 않으면 '諸行無常'의 사실을 명백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입장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에서 달마라고 하는 것은 75종의 달마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72종의 유위의 달마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은 유위의 달마에게만 성립되는 것으로, 무위의 달마는 三世의 시간적인 존재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무위의 달마에 대해서는 잠시 미루어두고, 우선 유위의 달마의 개념을 규명해보도록 하자.
유위(有爲)의 달마의 두 가지 성질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유위의 달마 전체에 공통된 성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간성이며, 또 하나는 앞에서 말한 '삼세실유(三世實有)'성이다. 이 두 성질은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사실 다른 학파로부터 이것은 모순된 것이라는 격렬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구사론의 저자 세친 자신도 이러한 말을 하여 정통 설일체유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서도 설명되듯,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시간론에 설 때 이 둘은 모순이 없이 성립되며, 오히려 이에 의해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변증되는 것이다.
유위의 달마는 모두가 현재의 한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즉 현존하는 것은) 다만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시간적 지속성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상식적으로는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지속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달마의 이론'에 의하면, 이는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유위의 달마의 부단한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 컵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컵의 둥글고 긴 모양(이는 '色(협의)'의 달마이다.)과 견고하고 매끄러운 촉감(이는 '觸'의 달마이다)등의 많은 달마가 그 순간 여기에 함께 생기하여 컵이라는 존재를 구성하지만, 이들 달마 하나하나는 전혀 시간적 지속성을 갖지 않으므로 다음 순간에는 모두 소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순간에도 의연히 컵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앞서의 여러 달마를 계승하여, 이와 동일한 종류의 달마들이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관계를 맺으며 계속하여 생기하기 때문이다. 제3의 순간 이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비지속적, 순간적 달마의 연속적, 비단절적 생기에 의해 컵이라는 존재의 시간적 지속이 경험적 사실로 파악되는 것이다.
달마는 생기하자마자 다음 순간 곧 소멸된다고 하지만, 엄밀하게는 그 사이에 ⑴ 생기하고, ⑵ 생기된 그 상태를 유지하고, ⑶ 그 상태가 변이되며, 그리고 ⑷ 소멸한다는 네 가지 추이가 있다. 이 네 추이를 모든 유위의 달마는 한 순간에 겪는 것이다.
그런데 달마가 생기한다고 하여도 무에서 생기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하여도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생기한다고 함은 달마가 미래로부터 현재로 출현한다는 것이며, 소멸한다고 함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지나간다는 것이다. 현재로 출현하기 이전의 달마는 미래의 영역에 있다. 현재에서 가버린 다음의 달마는 과거의 영역에 있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가버리는 사이의 단 한 순간, 달마는 현재에 있다. 삼세의 어느 때에도 달마는 그 자체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삼세의 어느 때에도 달마는 그 자체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 三世에 實有'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위의 달마 전체에 공통된 두 번째의 성질이다.
이와 같이 유위의 달마는 '삼세에 실유'하지만, 그것이 생기하여 현재에 있는 것은 단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쌓여 경험의 세계에 있어서의 시간의 경과를 이룬다. 그러므로 달마가 '삼세에 실유'하는 경우의 삼세라는 시간과, 경험 세계의 시간 즉 우리가 함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명백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험적 세계의 시간 안에서 각각의 순간에 생기하는 달마는 다종다양하다. 전후의 순간에서 그들은 서로 다르므로 경험의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 유동한다. 즉 '諸行無常'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영화의 매카니즘에 비유될 때, 잘 이해될 것이다.
하나의 릴에서 송출된 영화의 필름은 한 장면 한 장면 광원 앞에 나타나고, 이 광원에 의해 비쳐져 스크린 위에 한 순간 화면을 투영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다른 릴로 감겨간다. 필름의 흐름은 릴에서 릴로 계속 움직여가지만, 필름에 인화된 하나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릴 속에 있을 때에도, 광원에 비쳐질 때에도, 다른 릴에 감겼을 때에도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고 존재한다. 그리고 스크린에 차례로 투영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며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이것이 무수히 부단히 연속함으로써 변화, 활동하며, 시간적 경과를 가진 한편의 이야기를 구성해간다.
처음의 릴은 달마가 경과하는 삼세 중 미래의 영역에 해당되며, 광원에 의해 비쳐지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되며, 다음이 릴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된다. 필름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곧 달마, 엄밀히 말하면 함께 생기하는 무수한 달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크린에 비쳐진 영상의 활동, 변화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는 현실의 경험의 세계 즉 '諸行無常'의 세계에 해당된다. 릴에서 릴로 필름이 흘러가듯이 달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다. 스크린에 투영된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이를 종으로 관통한다. 이 2종이 시간의 교차점은 절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경험의 세계에 사는 자들은 언제나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달마를 생기시키는 것
달마가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현재로 생기하는 것은 어떠한 힘에 의해서 인가? 미래의 영역에 있는 달마는 무수하며, 전후의 순서가 없다. 그 중에서 어느 순간에 어떤 달마가 현재로 생기한다. 어느 순간에 어느 달마가 생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과관계 이외에는 없다. 즉 그 순간에 현재로 생기하여야 할 원인을 가진 달마만이 결과로서 생기하며, 이를 갖지 않는 달마는 미래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때에는 미래에 머무르지만, 후에 어느 순간에 원인을 얻어 현재로 생기하는 것도 있으며, 생기할 원인을 얻지 못한 채 영구히 미래에 머무르는 것도 있다.
그러면 그 달마를 생기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다른 달마이다. 인과관계는 달마와 달마 사이에 성립된다. 어떠한 달마가 원인이 되어 어떠한 달마를 결과하는가? 이는 극히 다양하다. 인과의 관계는 결코 한 가지가 아니다. 여러 가지가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로 중첩되어 있다. 하나의 달마는 다른 무수한 달마를 원인으로 하여 생기하며, 동시에 다른 무수한 달마를 결과로서 생기시킨다. 어떤 달마는 어떤 종류의 인과관계를 맺으며, 다른 달마는 다른 종류의 인과관계를 맺는다.
가장 넓은 의미로 인과관계를 생각할 때, 어떠한 달마라도 자기 이외의 모든 달마를 인(因)으로 한다고 한다. 이러한 인을 능작인(能作因)으로, 그 과(果)를 증상과(增上果)로 부른다. 이는 어떠한 것이 생기할 때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해 원인의 작용을 갖는다는 사고방식이다. 상식적으로는 상호간에 전혀 인과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 - 예를 들어 달과 컵 등의 사이에도 그러한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한다. 달의 존재에 대해 컵은 어떠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달이 존재함에 방해가 되는 작용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컵도 달에 대해 소극적이면서도 원인의 작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의 존립에 전세계의 일체가 관련을 갖는다는 사상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광의의 인과관계 외에, 달마를 현재에 생기시키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인과관계는 무엇인가? 이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 원인이 선행하고 결과가 뒤에 생기는 경우와, 인(因). 과(果)가 동시에 생기는 경우이다.
전자의 예로서는 우선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으로, 컵이 앞의 순간에도 존재하며, 다음 순간에도 지속하여 존재한다는 경우이다. 제1의 순간에 현재에 있으면서 컵을 구성하던 갖가지 달마는 제2의 순간에 과거로 흘러가지만, 과거로 가버린 그 달마가 동일한 종류의 달마를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이끌어와 계속하여 현재로 생기시킴으로 말미암아, 컵의 존재는 전후의 순간에 걸쳐 지속한다. 선행하는 달마가 인(因)이며, 후행하는 달마는 과(果)이다. 이러한 인(因)을 동류인(同類因), 과(果)를 등류과(等類果, 因으로부터 유출되는 果라는 의미)로 부른다. 컵이 다시 제3의 순간에도 지속하여 존재할 때, 현재의 等類果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흘러감과 동시에 스스로 同類因이 되어 다음의 等類果를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현재로 생기시킨다. 이러한 인과의 연쇄가 계속되는 한 컵은 거기에 그대로 계속하여 존재하며, 그 연쇄가 단절될 때 컵의 존재는 변이 되든가 소멸된다.
2장에서 설명한 선(善) 또는 악한 行爲(業)에 의해 좋은 또는 좋지 못한 생존형태를 초래한다는 경우도 인이 선행하고 과가 그 후에 생긴다는 인과관계의 한 예이다. 이 경우 인은 업이며(이를 異熟因으로 부른다), 과는 생존형태이다(이를 異熟果로 부른다). 이 관계는 바로 앞의 예에서와 같이 전후에 직접 연속하는 두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因과 果의 사이에 어떠한 시간의 개재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소매치기를 하여(因) 현행범으로 체포되는(果) 경우에도 인. 과 사이에는 엄밀하게는 얼마간의 시간이 개재한다고 생각된다. 그 사이에 마치 과일이 시간을 경과하여 익듯이, 인에서 과가 생길 조건이 익어 과로서의 달마가 현재에 생기하게 된다. 이 경우는 동류인 → 등류과의 경우와는 달리, 이숙과가 인이 되고 나아가 다음의 이숙과를 생기시키는 일은 없다. 이숙인 → 이숙과의 관계는 일회로 한정되며, 차례차례 인과의 연쇄를 구성하는 일은 없다. 이숙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인과 과는 종류를 달리하는 달마로서, 과가 그대로 다음의 과의 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인은 필히 선하든가 악한 행위(업)이다. 果는 苦나 樂의 감수, 그리고 그 감수를 保持하는 신심, 달마의 이론에 충실하여 말하면 그 감수에 수반되어 생기는 몸. 마음으로서, 이는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이를 無記라고 한다)의 달마이다. 因으로서의 선. 악의 업은 선행된 어떤 순간에 현재로 생기하고(고 그 다음 순간에는 과거의 영역으로 가버리)지만, 이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된 다음의 어떤 순간에 그 과로서의 樂. 苦의 감수 등 무기의 달마가 선행하였던 업에 의해 야기되어 미래로부터 현재로 생기한다. 그러므로 선. 악의 행위를 하고, 이에 의해 후에 낙. 고의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달마의 이론'에 따라 설명하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과가 동시에 생기는 경우의 예로서는 心과 心作用(心所)의 관계가 있다. 마음의 달마는 1종류, 마음의 작용의 종류는 46종류로 헤아려지고 있으나, 마음이 생기할 때에는 적어도 10종, 대개 이 경우에는 훨씬 많은 마음이 작용이 수반된다. 마음의 작용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 마음이 작용이라도 그것이 생기할 때에는 필히 마음과 동반한다. 따라서 마음은 마음의 작용이 생기하지 않으면 생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은 마음의 작용이 생기하기 위한 인이 되며, 그 마음의 작용도 마음이 생기하기 위한 인이 된다고 한다. 즉 상호 인. 과가 되는 관계가 여기에 있다. 이 경우 인을 相應因이라고 하며, 과를 士用果라고 한다. 여기에서 마음이 현재로 생기함은 이에 동반하여 생기는 마음의 작용이 사용과로서이며, 동시에 마음은 스스로 상응인이 되어 사용과로서의 마음의 작용을 낳는 것이다.
이들 마음. 마음의 작용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생기하기 직전에 생기 된 다른 마음. 마음의 작용에 의해 야기된 것이기도 하다. 선행된 순간에 현재로 생기 되었던 마음. 마음의 작용이 그 직후의 순간에는 과거로 가버림과 동시에 스스로 인이 되어 다른 마음. 마음의 작용을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현재로 생기 시킨다. 여기에서 후의 마음. 마음의 작용은 선행된 마음. 마음의 작용을 계승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인이 되어 다음의 마음. 마음의 작용을 계승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인이 되어 다음의 마음. 마음을 생기 시킨다. 이러한 인과관계의 연쇄를 '心相續'으로 부른다. 이 마음의 상속이 개체의 의식의 흐름을 형성하며, 종종 인간존재의 주체 또는 자아로 생각된다. 이 마음의 상속에서의 마음. 마음의 작용의 시간적 인과관계는 앞에서 언급한 동류인 → 등류과의 관계와 흡사하지만, 인과 과가 필히 同類는 아니기 때문에('동류'라고 할 때에는 인이 선이라면 과도 선인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상속의 경우에는 선행된 순간의 마음. 마음의 작용이 선이고 후의 순간의 그것은 악인 경우도 있으므로), 이와 구별되며 이 인을 等無間緣, 과를 增上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마음의 작용)이 현재에 생기할 때, 이는 이와 동반하는, 즉 이와 함께 현재로 생기하는 마음의 작용(마음)을 상응인으로 하여 생기한 사용과이며, 동시에 직전의 순간에는 현재에 있는 지금은 과거의 영역으로 가버린 마음. 마음의 작용을 등무간연으로 하여 생기된 증상과이기도 하다.
육인(六因). 사연(四緣). 오과(五果)
인. 과의 관계는 이와 같이 다종다양하게 얽혀 있다. 우선 모든 인과관계를 정리하여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⑴ 能作因 ---------- 增上果 -+
+-⑵ 俱有因 士用果 |
육인(六因) +-⑶ 相應因 | 五果
+-⑷ 同類因 等類果 |
+-⑸ 遍行因 異熟果 |
+-⑹ 異熟因 離繫果 -+
+-⑺ 增上緣 增上果 -+
+-⑻ 等無間緣 士用果 |
사연(四緣) +-⑼ 所緣緣 等類果 | 五果
+-⑽ 因 緣 異熟果 |
離繫果 -+
+- 能作因 增上緣 -+
+- 俱有因 |
육인(六因) +- 相應因 等無間緣 | 四緣
+- 同類因 所緣緣 |
+- 遍行因 因 緣 -+
+- 異熟因
모든 원인을 6종으로 분류하여 육인(六因)이라고 하며, 마찬가지의 일체의 원인을 4종으로 분류하여 사연(四緣)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因)이라고 하거나 연(緣)이라고 하거나, 결과에 대한 원인을 의미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본래 불교용어로서의 인(因)과 연(緣)은 때로 구별되어 사용된다. 이 경우 인은 결과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연은 간접적으로 결과가 생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조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이와 같이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과 연은 동의어로서, 6인과 4연은 단지 분류방법의 차이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상호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리면 위와 같다. 결국 6인설에서는 4연 중의 인연(因緣)을 상세히 나누어 5인으로 하고, 4연에서는 6인 중의 능작인(能作因)을 상세히 나누어 3연으로 한 것이다.
⑴ 能作因 → 增上果는 주로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극히 넓은 의미의 그러나 매우 소극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그 외에 ⑻ 等無間緣 → 增上果, ⑼ 所緣緣 → 增上果 등의 관계도 이 중에 포함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도록 한다. 어떠한 달마도(무위의 달마까지도) 能作因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유위의 달마는 증상과로서 생기한다.
⑵ 俱有因 → 士用果와 ⑶ 相應因 → 士用果의 둘은 因. 果가 동시에 생기하며, 상호 인이 되고 과가 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러한 관계를 일반적으로는 구유인 → 사용과라고 하며, 특수하게 마음과 마음의 작용 사이의 관계에 한정해서는 상응인 → 사용과라고 하는 것이다. 상응인 → 사용과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구유인 → 사용과가 성립되는 경우의 예는 모든 유위의 달마와 이에 필히 수반되는 네 상태를 나타내는 달마(14종의 심불상응행에 포함된다) 사이, 물질적 존재의 4원소 상호간, 마음과 마음에 수반되는 달마(마음의 작용도 그러하지만, 그 이외의 어떤 종류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행위'와 여러 가지 상태를 나타내는 달마 등이 있다) 사이 등이 있다.
유위의 달마 중에는 본래 필히 그룹을 이루어 생기하는 ('俱生한다'고 한다)것이 있다. 위에서 말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그러하며, 모든 유위의 달마와 그 네 가지 상태(四相)를 나타내는 달마도 그러하다. 그리고 뒤에서 언급하게 될 물질적 존재를 구성하는 8종(달마의 종류로서는 4종)이 그러하며, 유정의 몸. 마음을 구성하는 갖가지 달마와 그 유정에 번뇌와 지혜 등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특수한 달마(心不相應行의 일종)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항상 '俱生'하는 달마는 상당히 있으며, 그러한 것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상호 俱有因 → 士用果의 관계에 있다.
⑷ 同類因 → 等類果와 ⑸ 遍行因 → 等類果 사이에도 앞의 ⑵와 ⑶ 사이에서와 같은 관계가 있다. 인이 선행하고 과가 그 후에 생긴다는 점과 인과 과가 동일한 종류라는 점이 이 두 가지의 인과관계에 공통된 특질로서, 동류인 → 등류과는 그러한 인과관계가 널리 유위의 달마 일반에 보이는 경우를 말하며, 변행인 → 등류과는 특히 변행하는 번뇌로 불리는 강력한 번뇌가 동류의 번뇌와 번뇌적인 달마를 야기하는 경우에 한정하여 말하는 것이다.
동류인 → 등류과는 앞에서 열거한 예와 같이 因. 果가 전혀 동일한 종류의 달마인 경우도 있으며, 다른 종류의 달마인 경우(예를 들어 '色'으로부터 '受'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因이 善이라면 果도 善, 惡이라면 惡, 無記라면 무기라고 하는 바와 같이 그 성질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인이 욕계에 속하면 과도 욕계에 속한다고 하는 바와 같이, 그 속하는 부류도 같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것이 '同類'의 의미이다. 앞에서 든 예는 동류인과 등류과가 전후에 직접 연속하는 두 순간에 있어 발생하는 경우이지만, 그렇지 않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격한 달마 사이에 동류인 → 등류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⑹ 異熟因 → 異熟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 악의 업(무기의 업은 이숙인이 되지 않는다)과 그 과의 관계로서, 인이 선행하고 후에 과가 생기하는 점, 인과 과가 동류가 아닌 점(인은 선이거나 악이나, 과는 무기)이 그 특질이다.
⑺ 增上緣 → 增上果는 ⑴ 능작인 → 증상과와 같이 가장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이다.
⑻ 等無間緣 → 增上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등무간연은 6인 중에서는 능작인 이외의 5인의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으므로 가장 포괄적인 능작인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서 이 등무간연 → 증상과의 관계도 ⑴ 능작인 → 증상과 안에 포함되지만, 실제로는 본래의 ⑴이 의미하는 넓지만 약한 인과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본래의 능작인을 無力능작인, 등무간연 등을 유력능작인으로 불러 구별한다.
⑼ 所緣緣 → 增上果가 ⑴에 포함되는 사정은 ⑻의 경우와 똑같다. 소연연도 유력능작인의 일부이다. 소연이란 마음( 및 이에 수반되는 마음의 작용)의 대상이다. 마음(마음의 작용)은 소연이 없으면 생기하지 않기(설일체유부에서는 대상이 없는 마음은 절대로 없다고 하기) 때문에, 마음. 마음의 작용의 대상은 인 즉 소연연이며, 마음. 마음의 대상은 과 즉 증상과이다.
⑽ 因緣은 능작인 이외의 5인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 5인 가운데 구유. 상응의 2인은 사용과를, 동류. 변행의 2인은 등류과를, 이숙인은 이숙과를 가져오므로, 그림에서와 같이 인연에는 3종의 과가 있게 된다.
이상의 10종은 모두 유위의 달마 사이의 인과관계이다. 그러면 무위의 달마는 어떠한가? 무위는 본래[원인에 의해] 조성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당연히 인과의 관계를 떠나 있다. 그러나 무위의 달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를 의식하거나 사고하는 경우 이는 마음. 마음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소연연 즉 有力능작인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는 다른 유위의 달마의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無力능작인 또는 증상연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무위의 달마는 넓게 말해 능작인 가운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인은 되어도 과(이 경우에는 증상과)를 갖지 않는다. 만약 과를 갖는다면, 무위의 달마가 유위의 달마와 인과관계를 맺게 되어 무위의 의미를 상실케 되기 때문이다.
3종의 무위 가운데에서 번뇌의 지멸(즉 열반)은 이계과로서 5과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번뇌의 지멸이라고 할지라도, 번뇌는 '삼세에 실유'하는 유위의 달마이므로 이것이 없어져 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뒤에서 언급할 내용과 같이, 다만 마음의 상속이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즉 離繫하는 것을 번뇌의 지멸이라고 하며, 열반이라고 한다. 離繫는 올바른 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열반은 올바른 지혜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이다. 이것이 離繫果로 불리는 소이이다. 그러나 열반은 인과관계 위에 성립되는 연기(緣起) - 유위(有爲) - 무상(無常)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경지로의 초월이다. 이계과라고 할지라도 유위의 달마(올바른 지혜도 유위의 달마의 하나이다)를 인으로 하여 통상의 의미의 인과관계에 의해 생기한 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과 이기는 하지만, 인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요컨대 무위의 달마는 능작인이기는 하지만 그 과를 갖지 않으며, 무위의 달마의 하나인 열반은 이계과이지만 인을 갖지 않는다.
과(果)를 '취한다', 과(果)를 '준다'
유위의 달마 사이에 성립되는 인. 과 관계에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인이 과를 '취한다'는 것과, 인이 과를 '준다'는 것의 구별이다. 모든 유위의 달마는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생기하여 현재의 순간에 있을 때, 필히 그 과를 '취한다', 즉 다른 어떤 달마를 자신의 과로서 취한다. 이때 그 양쪽의 달마 사이에 인. 과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꼭 단지 인이 그 과를 현재에 생기시키는(이를 인이 과를 '준다'고 한다) 것은 아니다. ⑵ 구유인 → 사용과와 ⑶ 상응인 → 사용과의 경우는 인과 과가 동시이기 때문에, 과를 '취하는' 것은 그대로 과를 '주는' 것이다. 즉 인이 과를 '취하는'것도 현재에 있어서이며, 과를 '주는' 것도 현재에 있어서이다.
그러나 ⑷ 동류인 → 등류과와 ⑸ 변행인 → 등류과 그리고 ⑹ 이숙인 → 이숙과의 경우는 인과 과가 시간을 달리하므로, 인이 과를 '주는' 것은 과를 '취한' 다음이며, 그 때 인은 이미 과거의 영역으로 가버리고 없다. 결국 인은 과거에 있으면서 과를 '주며', 과를 미래로부터 현재로 가져오는 것이다. 특히 ⑷와 ⑸가 직접 연속하는 전후의 두 순간에 일어나는 경우는 인이 현재에 있으면서 과를 '취할' 때, 과는 이미 현재에 생기하기 직전의 순간(이를 未來定生位라고 한다)에 있기 때문에 인은 현재의 순간에 있으면서 과를 '준다'고 생각된다. ⑴ 능작인 → 증상과의 경우, 인. 과가 同時인 경우도 있으며, 異時인 경우도 있으므로, 인이 과를 '주는' 것은 인이 현재에 있을 때도 있고 인이 과거로 가버린 후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과의 입장에서 말하면, 인에 의해 과가 '주어질' 때 ⑵와 ⑶과 ⑼ 소연연 → 증상과의 경우 과는 현재에 있으며, ⑷와 ⑸와 ⑹와 ⑻ 등무간연 → 증상과의 경우 과는 미래정생위에 있다고 한다. ⑴과 ⑺ 증상연 → 증상과의 경우 때에 따라 그 어느 쪽이라 한다.
모든 유위의 달마가 현재의 순간에 필히 그 과를 '취한다'는 것은 설일체유부에 있어 三世의 구별을 확인하는 기준이 된다. 달마가 과거. 현재. 미래 어느 때에도 동일하게 實有라면, 무엇에 의해 三世의 구별이 이루어지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이 학파의 논사들은 이미 과를 '취하는' 작용을 끝마친 달마는 과거에 있으며, 현재 과를 '취하는' 작용이 있는 달마는 현재에 있으며, 아직 과를 '취하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달마는 미래에 있다고 대답한다.
달마이론의 특이성
이상과 같이 설일체유부의 달마이론은 매우 특이한 사유방법이지만, 이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아가마 이래의 불교가 힘을 기울여 밝히고자 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다. 다만 그 사유방법에 특징적인 것은 첫째 극히 엄격한 달마의 순간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 대상이 없는 마음은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유위의 존재가 생멸을 그 성질로 하는 무상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모든 불교에 공통되지만, 이 학파와 같이 다만 한순간밖에 현존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달마라는 개념으로써 이를 주장하는 것이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 이외에는 한편으로는 소박하게 마음. 마음의 작용은 순간적으로 생멸하지만 육체는 그 생애에 걸쳐 지속하며 변화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달마의 개념을 정립하면서도 그 달마의 생멸 위에 몇 순간 또는 10여 순간의 경과를 인정하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의 입장은 이에 비해 달마를 엄격히 문자 그대로 순간적인 것으로 규정하므로, 이를 철저히 하면 체험 세계의 일체를 완전히 한 순간 한 순간의 의식내용의 연쇄로 귀착시키는 방향에 있다.
대상이 없는 마음은 없다는 것은 달마가 '삼세실유'라는 사실의 최대의 논거가 되고 있다. 마음이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상하는 이상, 이 추억과 예상이라는 생각의 대상이 되는 과거의 달마와 미래의 달마는 당연히 '實有'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한편으로는 '일체는 마음으로 인도되고, 마음으로 통섭되며, 마음으로 만들어진다'라고 하는 아가마 이래의 사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아가마 이래의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십팔계(十八界)로써 일체의 존재를 포괄하고자 하는 사유에 근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옛 사고방법을 설일체유부적으로 발전시켜 존재의 기본요소로서의 달마의 '실유(實有)'성의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4장 물질
달마의 체계에 있어 물질과 마음의 상대는 현저하다. 오온(五蘊)도 본래 물질('色')과 마음(識) 그리고 마음의 물질에 대한 작용으로서의 心作用(受, 想, 行)에 지나지 않으며, 오위도 무위를 제외하면 물질(色)과 마음(心, 心所)과 물질도 마음도 아닌 것(心不相應行)의 구별로 귀착된다. 이에 다음 두 장에서는 아비달마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물질과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고찰하기로 한다.
넓은 의미의 色 즉 물질적 존재에 대해 구사론이 부여하고 있는 설명 중 중요한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파괴되므로 色이라 한다.
(2) 色은 四大와 四大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3) 色은 五根과 五境과 無表色의 11종의 法이다.
(4) 色은 法處, 法界에 포함되어 있는 無表色을 제외하고는 極微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공간을 점유하며, 다른 色이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방해한다.
(5) 色이 生起할 때에는 반드시 8종류가 俱生한다.
色의 산스크리트어는 r pa이다. r pa는 變壞 또는 質碍(걸림)의 의미이다. 일체는 無常하기 때문에 당연히 色도 無常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존재이다. 파괴되는 것이 오직 물질적 존재 뿐만은 아니다. 마음도 마음의 작용도 그리고 그 이외의 것, 즉 인과관계를 가지며 존재하는 有爲의 것 중에 파괴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파괴되므로 색이다'라는 정의는 물질적 존재가 갖는 무상성, 유위성을 잘 표현하면서도, 이 정의는 물질적 존재도 포함된 유위의 공통된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四大는 地, 水, 火, 風이다. 四大는 자연계의 大地, 흘러가는 물, 타는 불, 부는 바람을 이루는 소재가 아니라, 이들이 대표하는 바의 물질의 물리적 성질 즉 암석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견고함, 물에 보이는 것과 같은 濕潤性, 불에 보이는 것과 같은 熱性, 바람에 보이는 것과 같은 유동성이 四大의 본체로 생각되었다. 四大의 본체가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이 되면, 四大가 재료 즉 질료인(質料因)이 되어 이로부터 물질이 합성된다고는 할 수 없다. 四大는 이제 물질의 근본적 성질인 것이다.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이라는 근본적 성질을 떠나서는 물질적 존재는 파악되지 않는다. 일반의 물질이 '四大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정의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야기되는 것이다.
五根은 眼, 耳, 鼻, 舌, 身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이며, 五境은 그것들의 대상인 色, 聲, 香, 味, 觸이다. 色境을 색깔과 모양으로 나누고, 색깔을 靑, 黃, 赤, 白의 4색으로, 모양을 長, 短, 方, 圓, 高, 下, 正, 不正의 여덟으로 나눈다. 색깔 중에는 특수한 것을 8종 또는 9종으로 헤아리는 경우도 있다. 聲境 즉 소리는 생물이 발하는 소리와 무생물이 발하는 소리, 의미를 전하는 소리(언어를 이루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즐거운 소리와 즐겁지 않은 소리의 차별에 따라 8종으로 구분한다. 香境은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 적당한 냄새와 지나친 냄새의 차이에 따라 4종으로 나눈다(3종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味境에는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쓰고 떫은 여섯 가지의 맛이 있다. 觸境 즉 감촉에는 매끄러움, 거침, 무거움, 가벼움, 차가움, 배고픔, 목마름의 7종 외에, 땅, 물, 불, 바람의 四大 즉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이 포함된다. 四大가 觸境에 포함되는 점은 四大가 물질을 구성하는 소재가 아니라 물질의 근본적 성질로 생각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無表色이란 表色에 대응한 명칭이다. 表色이란 우리들의 身語二業을 말하는데, 身語二業은 밖으로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하고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것을 表色 혹은 表業이라 한다. 이 身語二業의 表色이 그 힘이 강한 것은 身語二業과 동시에 그 결과가 특별한 善惡의 功能을 몸에 나타낸다. 이 功能은 無形象해서 밖으로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無表色 또는 無表業이라 한다. 이 無表色은 極微의 집합체가 아니므로 變壞가 없고 質碍도 없다. 그러므로 色法이라 하기 어려우나 본래 身語二業의 色法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無表지만 色에 귀속시킨 것이다.
無表色을 제외한 色은 極微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極微란 어떠한 방법으로써도 분할할 수 없는 최소입자를 말한다. 極微는 微粒子이지만 입체적으로 이를 둘러싼 면 즉 표면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표면을 갖는다면 이를 더욱 분할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이는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極微 한 개를 중심으로 그 전, 후, 좌, 우, 상, 하에 각각 하나의 極微가 결합되어 합계 7개의 極微가 집합한 것이 두 번째 단위인 微聚가 된다. 微聚가 같은 방법으로 7개 결합하면 세 번째 단위인 하나의 金塵이 된다. 이런 식으로 極微가 모여서 無表色을 제외한 色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극미가 이처럼 집합하여 공간을 차지하는 색법이 되지만, 극미 하나하나는 표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극미끼리 접촉하여 결합을 이룰 수는 없어서, 극미들은 접촉이 없이 집합하여 경험 가능한 사물로 되는 것이다. 이 극미도 有爲의 法으로서 전혀 시간적 지속성을 갖지 못하며 刹那滅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무수한 극미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色法이 생기할 때에는 동시에 色境, 香境, 味境, 觸境과 四大 등의 8종류가 반드시 함께 생기한다. 이는 외계의 현상이 물질적 존재로 파악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5장 마음
마음과 마음의 작용
물질에 대한 마음을 마음(心) 자체와 마음의 작용(心作用)으로 나눈다.
마음 자체를 나타내는 말에 세 가지가 있다. 오위의 하나인 '心'과 십이처의 하나인 '意', 그리고 오온의 하나인 '識'이 그것이다. 이들은 말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한 종류의 달마를 의미한다. 십팔계의 경우는 이를 나누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여섯과 의를 합쳐 모두 7계(七心界)로 구분한다. 마음은 6종이 대상을 향해 여섯 가지로 작용하므로, 그 양태를 안식, 나아가서는 의식의 여섯으로 구분한다. 즉 시각하는 마음, 청각하는 마음, 미각하는 마음, 촉각하는 마음, 사고하는 마음으로 구분한다. 이 육식계 외에 의계를 더하여 합계 일곱을 헤아리고 있지만, 여기에 의문이 생긴다. 마음을 그것이 작용하는 양태로 나누면 6식계만으로서 충분하고, 이를 나누지 않으면 의계 하나로서 충분하다. 6식계와 의계는 상호 타자를 포함하는 관계에 있으므로, 이를 병렬하여 일곱으로 헤아리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설일체유부 논서의 설명에 의하면, 마음은 현재에 생기하여 6식의 어는 것으로 작용하고 그 다음 순간에는 과거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지만, 동일한 그 순간에 새로운 마음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생기하여 6식 중 이 제6의 의식으로 작용한다고 하면, 이 경우 의식으로 작용하는 새로운 마음은 이미 과거로 가버린 직전이 마음을 그 의지처로 한다(만약 새로운 마음이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안식 및 신식으로서 작용하는 경우에는 각각 현재의 안근 및 신근을 그 의지처로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새롭게 생기하는 의식으로서의 마음의 의지처가 된다는 의미에서, 직전에 과거로 가버린 마음을 특히 의계로 별도로 설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7심계로 나눈다 할지라도 달마로서는 오직 한 종류이다.
이 오직 한 종류의 마음의 달마에 대해, 마음 작용의 달마는 46종이 있다. 여기에서는 임시로 마음의 작용으로 부르지만, 이의 원어는 '마음에 속하는 것'의 의미이다. 한역어 心所도 이러한 뜻이다. 이에 대해 마음 그 자체를 心王이라고 하여, 중국. 한국. 일본의 전통적 아비달마학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心王. 心所라는 말로 표현하여 왔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의 작용 사이에 왕과 이에 속하는 신하의 관계는 없다. 상응인과 사용과의 관계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상호 인이 되고 과가 되기 때문이다. 단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다른 점은 마음이 개체의 생존에 있어 실신하거나, 특수한 무념무상의 명상의 상태에 들어가거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거나 할 때, 等無間緣 ->增上果의 관계를 단절함이 없기 때문에 차례로 계속하여 생기하며, 이로써 개체적 생존에 있어서의 의식( consciousness)의 흐름을 형성함에 대해, 대부분의 마음의 작용은 어떤 때에는 이 心相續과 동반하여 생기하고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상속'의 경과를 살펴보면, 마음은 일관되게 생기를 연속함에 대해, 많은 마음 작용의 생기는 단절과 계속이 있어 항상됨이 없는 상태이다.(마음의 작용 중 열 가지는 어떠한 마음에도 필히 동반하므로, 이들은 마음과 함께 '마음의 상속'에 일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이라는 달마를 마음 상속의 중심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심왕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심왕이 심소라는 신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여,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상호의존관계를 잊는다면, 이는 아비달마 논사가 고심하여 건설한 무아의 입장을 허물어트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두 마음의 同時生起를 인정치 않음
마음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생기할 때, 이는 필히 六識중의 어느 하나로서 작용한다. '안식'으로 작용한다면 '눈'을 통해 '색(협의)'을 파악하며, '이식'으로 작용한다면 '귀'를 통해 '소리'를 파악한다. 동일한 마음이 둘 이상의 식으로 작용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한다(이를 二心의 起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텔레비젼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 때, 마음은 영상을 보는 '안식'과 방송의 소리를 듣는 '이식'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 '의식'의 셋으로서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설일체유부의 사고방법에서는 이 세 식(識)이 순간순간 교체되어 생기하는 것이 간단없이 계속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식'이 결코 '안식' 및 '신식'의 5종의 감각하는 마음(이를 前五識으로 부르며, 이에 대해 '의식'을 제6식으로 부른다)을 통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色(협의' '聲' 등에 대해 작용할 때 이를 '안식' '이식'등이라 하며, 동일한 마음이 '법'(제6의 경)에 대해 작용할 때 이를 '의식'이라고 함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전5식은 단지 현재의 대상에 대해서만 작용을 한다. 즉 과거, 미래를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의식'은 과거. 미래의 대상에 대해서도 작용을 한다. 즉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과거는 추억되고 미래는 예상되므로 과거의 달마도 미래의 달마도 '實有'가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된다고 주장되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의식'의 대상은 단지 '법(法)(협의)'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체의 달마에 적용된다. 이러한 점에서도 전5식과는 차이가 있다. '안식'의 대상은 단지 '색'이며, '이식'의 대상은 단지 '성'이며, 나아가 '신식'의 대상은 단지 '촉'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다만 대상의 넓고 좁음에 관한 것이다. '의식'도 '전5식'도 마음이 대상에 대해 작용하는 양태의 하나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동일한 '마음의 상속'에서 "두 마음이 동시 생기를 인정하지 않는" 점으로부터 특이한 사고방식이 생겼다. 어느 순간에 마음이 '안식'으로 작용하고, 어떠한 '색(협의)'을 대상으로 파악한다고 하자. 이때 그 '색'과 동시에 현재에 생기한 다른 '색'과 '성', '향','미', '촉'은 그 마음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다음 순간 과거로 지나가 버린다. 그렇다면 이때에 동일한 마음의 상속에 생기하여 이들 5종의 달마을 대상으로 하여야 할 5식은 현재에 생기할 수 없다. 이미 하나의 '안식'이 생기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후의 시간에 있어서도 현재로 생기할 수 없다. 대상이 되어야 할 달마는 과거로 가버렸으며, 5식은 현재의 대상에 대해서만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에 현재로 생기할 인을 얻을 수 없어 영원히 미래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이 경우 이들 5식에 일종의 무위의 달마와의 관계가 생긴다고 생각된다. 이 무위의 달마는 "[올바른' 지혜에 의하지 않은 [달마의] 지멸"(非擇滅)이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불린다. 같은 무위의 달마인 열반이 '擇滅' 즉 "[올바른] 지혜에 의한 [번뇌의]지멸'로 불림에 대해 이와 같이 불렸던 것이다.
이는 마음일지라도 그리고 그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달마가 "三世에 實有"이며,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생멸한다는 점, 전5식이 현재의 달마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 두 마음의 동시 생기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그런데 특히 '비택멸'이라는 별개의 무위의 달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에 설일체유부 다운 사고방식이 있다.
마음과 마음작용의 俱生
마음이 생기할 때에는 필히 마음이 작용이 동반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작용을 心相應法이라고도 한다. 마음과 동반하는 달마라는 의미이다. '마음의 相續'중 어느 순간을 살펴보아도 여기에 마음만이 홀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몇 종류의 마음의 작용이 상호 동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즉 '大地法'으로 불리는 10종의 마음의 작용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과 '俱生'(함께 생기)하며, 나아가 대개의 경우에는 몇몇 또는 10여 종의 마음의 작용이 마찬가지로 '구생'한다. 이리하여 마음을 중심으로 심적인 달마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에 다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구생의 관계로 연결짓는 작용을 하는 특수한 달마(心不相應行 중의 하나로 '得'으로 불린다)와 어떠한 유위의 달마에도 필히 수반되는 네 가지의 상태를 나타내는 달마 등이 구생하고, 이들 전체로써 소위 한 개체의 정신면이 구성되어 있다. 나아가 이에 육체를 이루는 '색(광의)'의 달마와 그 행위, 동작 즉 업의 달마등이 덧붙여져, 이 전체에 의해 유정으로 불리는 개체의 삶의 유기체가 성립된다.
이러한 달마 전체가 각각 순간에 소멸하여 과거로 흘러가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달마가 미래로부터 생기하여 이를 계승 또는 변이 시킨다. 그 동안에 개체의 생존은 갖가지의 그리고 중첩된 인과관계를 맺으며 계속 또는 지속한다. 개체의 삶은 단지 이러한 달마의 상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불변하며 상일한 '我(자아)'는 있을 수 없다.
개체의 삶은 그 순간순간에 어떠한 달마들이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정신의 측면에 한정하여 말하면, 개체의 정신 상황은 순간순간 마음에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 동반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A의 마음이 화를 냄에 의해서 또는 그 마음의 주체인 A의 '我(자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A라는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달마의 '相續'에 '마음'의 달마와 화냄이라는 '마음작용'의 달마 즉 '忿' 또는 '瞋'이 동반하여 생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A라는 개체의 '상속'에 '마음'과 '마음작용'이 분리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올바른 지혜에 의해 번뇌가 지멸되는 것(擇滅 즉 열반)도 올바른 지혜의 '마음작용'(慧)과 '마음'이 동반함으로써 번뇌의 마음작용(번뇌는 모두 마음작용이다)과 '마음'이 분리되고, '마음'이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를 離繫라고 한다)에 다름 아니다.
마음작용의 분류
이러한 입장에 서있으므로 발달된 설일체유부 논서의 마음의 작용에 대한 해설은 항상 마음과 마음작용의 '구생'의 문제가 중심이 되어있다.
가장 보편적인 10종의 마음작용은 마음이 생기하면 필히 이와 동반하는 것으로, 이는 전체적으로 (A) 大地法으로 불린다. 대지법이란 이것이 생기하는 범위가 큰 달마라는 의미로서, 이 10종의 마음작용은 어떠한 마음과도 - 선한 마음과도, 악한 마음과도,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의 마음과도 - 상호 동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이 열가지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역어로 열거하면, ⑴ 受, ⑵ 想, ⑶ 思, ⑷ 觸, ⑸ 作意, ⑹ 欲, ⑺ 勝解, ⑻ 念, ⑼ 定, ⑽ 慧이다.
⑴⑵⑶은 각각 오온의 하나에 상당한다. ⑴ 은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감수, ⑵는 대상의 모양을 마음으로 파악하는 표상작용, ⑶은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 지향, 의지의 발동을 의미한다. ⑷는 근. 경. 식이 접촉 즉 마음이라는 내계가 외계와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⑸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⑹은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 ⑺은 대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아는 것, ⑻은 기억작용, ⑼는 마음을 부동케 하지 않고 어느 한 점에 집중하는 것, ⑽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작용이다.
마음이 생기할 때에는 언제나, 즉 마음이 '의식'으로 활동하는 경우에도, '전5식'으로 활동하는 경우에도, 이 열 가지 마음작용 모두가 동반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는 아마도 이 열 가지가 마음의 활동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생각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하나의 달마는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어 ⑽ 혜는 정당한 분별, 판단작용(번뇌를 소멸시키는 올바른 지혜도 이 안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그릇되고 부당한 분별, 판단작용(예를 들어 뒤에서 언급될 '五見')도 의미한다. 또한 ⑼ 정에는 마음의 동요(이는 마음의 집중력을 미약케 함)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십대지법 이외의 36종의 마음작용에 대해서는 마음을 선, 악, 선도악도 아닌 중성('無記')으로 나누고, 이러한 각각의 마음에 어떠한 마음작용이 동반하는가를 음미하는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다. 중성의 마음은 다시 순수하게 중성인 것, 중성이기는 하지만 올바른 지혜가 생기하는 것을 방해하는 점에서 '염오된' 마음으로 간주되는 것의 두가지로 구분되며, 전자는 無覆無記, 후자는 有覆無記로 불린다. 이에 따라 마음작용은 앞의 ⒜ 십대지법 외에 ⒝ 일체의 선한 마음에 동반하는 것(大善地法), ⒞ 일체의 악한 마음과 동반하는 것(大不善地法), ⒟ 일체의 악한 마음과 有覆無記의 마음(이 둘을 염오된 마음이라 한다)과 동반하는 것(大煩惱地法), ⒠ 어떤 종류의 악한 마음과 有覆無記의 마음만 동반하는 것(小煩惱地法), 그리고 ⒡ 어떤 때에는 선한 마음과, 어떤 때에는 악한 마음과, 또 어떤 때에는 무기의 마음과 수반하는 것(不定法)으로 분류된다.
⒝ 대선지법은 10종이다. 이를 한역어로 열거하면 ⑴ 信 ⑵ 勤 ⑶ 捨 ⑷ 慙 ⑸ 愧 ⑹ 無貪 ⑺ 無瞋 ⑻ 不害 ⑼ 輕安 ⑽ 不放逸 이다.
⑴ 信은 마음의 청정함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四諦(삶의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은 번뇌에서 유래하며, 번뇌의 지멸이 괴로움의 지멸이며, 실천이 이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 진리), 三寶(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그 승단의 세 보배), 그리고 업과 그 과보 사이의 인과성의 셋에 대한 확신으로도 해석된다. ⑵ 勤은 마음의 힘씀으로서 선행을 하고자 힘씀을 말한다. ⑶ 捨는 마음의 평정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것이다. ⑷ 慙와 ⑸ 愧는 각각 두 가지로 이해된다. 첫 번째의 이해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덕에 대한 공경이 참이며,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이 괴이다. 두 번째의 이해에 의하면, 스스로를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과실을 부끄러워함이 참이며, 다른 사람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과실을 부끄러워함이 괴이다. ⑹ 無貪은 탐욕이 없는 것, ⑺ 無瞋은 미움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만, 단순히 탐욕과 미움이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욕망의 대상을 厭捨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⑻ 不害는 비폭력으로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⑼ 輕安은 적응성으로서 어떠한 일을 행함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다. ⑽ 不放逸은 精勵로서 전념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다.
⒞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에는 ⑴ 無 과 ⑵ 無愧의 2종이 있다. ⒝⑷와 ⒝⑸의 반대의 마음작용이다.
⒟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은 6종으로서 한역어로는 ⑴ 치(痴) ⑵ 방일(放逸) ⑶ 해태(懈怠) ⑷ 불신(不信) ⑸ 혼침( 沈) ⑹ 도거(掉擧)라고 한다.
⑴은 무명과도 같은 것으로 어리석음, 무지이다. ⑵는 ⒝⑽의 반대로 방자하며, 선행에 전심하지 않는 것이다. ⑶은 ⒝⑵의 반대로 마음이 과감하지 않은 것, 태만함을 말한다. ⑷는 ⒝⑴의 반대로 마음이 청정하지 않음으로 해석된다. ⑸는 마음이 침울함이며, 어떠한 일을 행함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 즉 ⒝⑼의 반대이다. ⑹은 마음의 경박하고 초조함. 부동하여 평정함이 없는 것이다.
⒠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으로는 10종이 열거된다. ⑴ 忿 ⑵ 恨 ⑶ 稻 ⑷ 嫉 ⑸ 惱 ⑹ 覆 ⑺ 堅 ⑻ 狂 ⑼ 僑 ⑽ 害가 그것이다.
⑴ 忿은 성냄, ⑵ 恨은 원한, ⑶ 稻은 마음이 비뚤어짐, ⑷ 嫉는 질투, ⑸ 惱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고 완고하고 우매함, ⑹ 覆는 자기의 허물을 은폐함, ⑺ 堅은 인색함, ⑻ 狂은 기만, ⑼ 僑은 자기만족이며, ⑽ 害는 해를 깨치고자 하는 마음 즉 ⒝⑻의 반대이다.
이들 여섯 가지의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은 마음이 제6의 '의식'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만 이것과 동반한다. '제5식'과는 동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생기한다. 즉 ⒜~⒟에서와 같이 같은 종류에 속하는 모든 마음작용이 함께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 부정법(不定法)은 8종으로서 이는 ⑴ 尋, ⑵ 伺, ⑶ 睡眠, ⑷ 惡作, ⑸ 貪, ⑹ 瞋, ⑺ 慢, ⑻ 疑이다. ⑴ 尋은 추론을 통하여 규명하고자 하는 거친 마음의 활동이며, ⑵ 伺는 관찰적인 미세한 마음의 활동이다. ⑶ 睡眠은 마음의 무딤, ⑷ 惡作은 본래는 악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과거의 악행에 대하여 그 과오를 뉘우치는 마음작용을 뜻한다. ⑸ 貪은 탐욕 즉 마음에 드는 대상의 대한 욕구, ⑹ 瞋은 미움 즉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 대한 증오, ⑺ 慢은 자만심이다. 僑와 여기의 만의 차이는 전자가 자신의 성질(미모와 젊음과 혈통과 학식 등)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에 집착하는 마음의 교만함임에 대하여, 후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망상하여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는 마음의 교만함을 말한다. ⑻ 疑는 四諦의 진리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하는 迷惑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과 같이 구사론에 있어서는 46종의 마음작용이 마음과 구생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여섯 부류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6類 46種의 마음작용의 설이 확정된 것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역사에 있어 비교적 후대의 일이다. 6류 중 일찍부터 고정되어 변하지 않은 것은 십대지법 뿐으로서, 마하비바샤가 성립되던 시기(1, 2세기 경)에 이르기까지 6류의 분류방법조차 정해지지 않았었다. '부정법(不正法)'등은 구사론에 이르러서도 그다지 명료하지 않아, 구사론의 주석자들은 그 해석에 대해 이론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번뇌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업도 그 중심이 되는 것은 마음의 업으로서, 결국 마음작용의 일종인 사(⒜⑶이다. 번뇌를 끊는 올바른 지혜도 마음작용의 일종인 무루의 혜(慧)⒜⑽이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업. 번뇌의 세계, 미혹의 세계도, 이를 초월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도도 모두 이 마음과 마음작용의 '구생'의 관계 중의 어떠한 것에 의해 성립된다. 즉 넓은 의미의 마음의 세계 안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비달마에 있어서는 번뇌론, 수도론이 모두 마음. 마음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제6장 선(善)과 악(惡)
1. 삼종의 행위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행위(業)를 신업(身業). 어업(語業, 또는 口業). 의업(意業)의 3종으로 나눈다. 이 3종류의 행위는 설일체유부의 달마체계에 따르면, 신업(身業)은 '色(협의)'중의 모양, 어업은 '소리(聲)'이다. 따라서 이 둘은 모두 넓은 의미의 '색(色)' 즉 물질적 존재에 포함된다. 그리고 의업(意業)은 마음작용의 하나인 '사(思)' 즉 마음의 동기, 의지의 발동이다.
이는 기묘한 사고방법으로 특히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설일체유부에 독특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때리는 행위는 주먹을 들어 상대방의 머리에 부딪치게 하는 과정의 한 순간 한 순간, 몸이 나타내는 형상이 조금씩 변해감으로써 완수된다(영화 필름의 한 장면 한 장면의 변화에 견주어 보라). 그 각 순간이 신체의 모습, 달마체계로 말하면 협의의 '색(色)' 즉 '안식(眼識)'의 대상 중의 모양이 누적되어 감이 신체의 행위가 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업(身業)은 달마로서는 모양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語業(언어적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한 순간 한 순간에 발음되는 소리가 누적된 것이 언어를 이룬다. 그러므로 '소리'의 달마 즉 '이식(耳識)'의 대상이 곧 어업(語業)이라고 한다. 일견 기묘한 주장으로 생각되지만, 일체의 존재를 달마의 체계로 환원시키고, 그 중 유위의 달마에게는 엄격하게 순간성 만을 인정하는 이 학파로서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의업(意業)을 '사(思)'(의지의 발동)로 생각하는 데에는 아함에 그 근거를 둔다. 아함은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우, 일반적으로 우선 행위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동 즉 '사(思)'의 마음작용이 있으며, 그 후에 그 결과 즉 실제의 행위가 발생한다고 하여 행위에는 두 단계가 있음을 명언하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그 제1단계 즉 실제의 행위가 일어나기 전의 단계로서의 의지의 발동('思')도 행위(業)라는 말속에 포함시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제2단계(실제의 행위)보다도 오히려 제1단계가 업의 본질이라고 하여 이를 중시한다. 현상으로 나타난 행위 자체의 선. 악보다도, 그 행위를 낳은 동기의 선. 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함 이래의 불교의 입장임은 명백한 일이다.
남방상좌부 경전에서는 "업(業)은 의지의 발동('思')이다. 의지를 발동시켜 신(身). 어(語). 의(意)로써 업(業)을 짓는다."라고 하고 있다.
북방한역 아함에서는 "업(業)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
+ 제1단계 사(思)
업(業) | ↓
+ 제2단계 신업(身業). 어업(語業). 의업(意業)
설일체유부의 논서에서는 이 '사업(思業)'을 의업(意業)이라고 하며, '사이업(思已業)'을 신(身). 어업(語業)이라고 한다.
+ 제1단계 意業(思) = 思業
업(業)|
+ 제2단계 身業(모양). 語業(소리)=思已業
의업(意業)은 마음에 의한 행위이므로, 당연히 일체의 심리활동이 이 안에 포함되어야 하며, 사실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는 의업(意業)은 단지 의지의 활동(思)에 한정시킨다. 그렇다면 다른 심리활동, 예를 들어 미움이나 사랑 또는 믿음이나 의심 등은 의업이 아니게 된다.
이는 미움이라는 방향으로의 의지의 발동(思)은 의업이기는 하지만, 미움은 의업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思'만이 업으로서 '思'로부터 생긴 다른 심리활동(예를 들어 미움이나 사랑 등)이 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동일한 '思'로부터 생긴 사이업(思已業)인 신업(身業), 어업(語業)도 업(業)으로는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신업과 어업을 업으로 인정한다면 '思'에서 생긴 다른 심리활동도 사이업(思已業)으로서의 의업(意業)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의지의 발동(思)이 단지 신체적, 언어적 행위로만 향하고 심리적 행위로는 향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사(思)'의 결과 행위로 발생하는 것이 단지 신체적, 언어적 행위일 따름이라는 것도 도저히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의 이러한 사고방법에는 큰 모순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 학파 업론의 중대한 결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드러난 행위와 숨겨진 행위
그러나 이 학파의 정통설에 따르면 의업은 사(思), 신업은 모양, 어업은 소리(聲)이다. 그중 신업과 어업은 각각 표업(表業)과 무표업(無表業)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3업은 5업으로 분석된다.
業 ┌ 思 業 ---- 意業 ───────┐
│ ┌ 身表業 │
└ 思已業 ┌ 身業 │ │
│ └ 身無表業 │ 五業
│ ┌ 語表業 │
└ 語業 │ │
└ 語無表業 ┘
표업. 무표업은 문자적 의미는 '알려진 행위' '알려지지 않은 행위'이다. 즉 행위자의 외면에 나타나 다른 사람에게 인지되는 행위와 행위자의 내면에 잠복되어 다른 사람에 인지되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통상적 의미에서의 신업, 어업 즉 신체적, 언어적 행위는 물론 전자이다.
강력한 선 또는 악한 신. 어표업이 조성될 때, 그 업이 남긴 여세는 업을 지은 사람에게 작용하는 좋은 또는 악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업의 여세의 영향은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무표(無表)'라고 한다. 표업은 신. 어 모두 광의의 '색(色, 즉 물질적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이에 준하여 무표도 '색(色)'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는 보통의 물질적 존재와 같이 '원자'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전5식의 어느 것의 대상도 되지 않으므로 10색처의 어느 하나도 아니다. 단지 '색(色)'으로서 법처(法處, 法界)에 포함된다.
3. 행위가 남기는 영향
업의 관념에는 행위와 그 행위가 행위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두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불교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도사상 일반에도 보이는 사상이다.
설일체유부에 있어 업이 행위자에게 남기는 영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이숙인(異熟因)→이숙과(異熟果)의 관계이다. 일체의 선. 악의 행위는 그것이 현재에 생기할 때, 필히 이에 상응하는 낙(樂). 고(苦)의 과(果)를 취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필히 과를 준다. 즉 그 과를 현실로 생기시킨다. 이 경우 업은 업이 생기하는 순간, 즉 그 과를 현실로 생기시킨다. 이 경우 업은 업이 생기하는 순간, 즉 과를 취하는 순간부터 과를 주는 순간까지 그 여세를 보존하며, 과를 주는 순간 일거에 그 효과를 발휘한다. 즉 과를 현재에 생기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여 낙.고의 과를 주면, 다시 말하여 낙. 고를 현실로 생기시키면, 업의 여세는 그것으로 종식되므로, 이때 비로소 그 업은 완료된다.
업이 행위자에게 남기는 여세의 다른 하나는 무표업으로 설명된다. 이것도 선. 악의 행위가 뒤에 남기는 여세이지만, 이 경우 그 효과는 선한 행위에 의해 악에 저항하는 습성(妨惡의 功能)을 지니게 되고, 악한 행위에 의해 선에 저항하는 습성(妨善의 功能)을 지니게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이숙인→이숙과의 경우와 다른 것으로 중요한 점에 두가지가 있다. 첫째, 이숙인으로서의 업은 이숙과를 낳을 때 비로소 그 효과를 일거에 발휘하지만, 무표업은 표업이 조성된 순간부터 항상 그 행위자에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면 행위자로서의 달마의 상속(相續)과 부단히 구생(俱生)하며, 그러면서 그 효과를 지속적으로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숙인으로부터 이숙과가 나타나는 것은 한 생애에서인 경우도 있으며, 다음 생애 또는 다음 다음의 생애에서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표업이 계속되는 것은 단지 한 생애에 한정된다. 이는 어떤 생애에서의 신체적. 언어적 행위에 의해 지니게 된 소위 후천적 성격이므로 죽음에 의해 그 생애가 끝났을 때에는 당연히 종식된다.
설일체유부가 의업에 무표업을 설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다. 이는 마음속에서 의지가 활동하여도 이것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신체적, 언어적 행위가 되지 않는 한, 무표업적인 효과 즉 '방악. 방선의 공능'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는 신업. 어업보다 의업을 중시하며, 외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 자체의 선. 악 보다는 그러한 행위를 낳게 되는 내적인 동기의 선. 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교의 입장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모순은 사이업(思已業)으로서의 의업을 고려하지 않는 설일체유부 업론의 중대한 결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신. 어의 표업에서 생긴 무표업 외에, 삼매(三昧)에서 생긴 무표업이 있다. 삼매는 옛부터 인도에서 중시된 정신수련의 방법으로, 자세를 곧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호흡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수행이다. 불교에서도 이를 가장 중요한 수도방법으로 채용하고 있다. 아비달마의 경우에도 그 수도론에서 삼매가 중요한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이에는 "뱀이 대나무 통 속에 들어가면 구부림이 없이 나아가는 바와 같이, 수도자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감으로써 곧게 나아간다."는 비유도 있다. 삼매에 들어가면, 부동(不動). 무언(無言)이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신. 어의 표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삼매에 의한 무표업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계율을 엄수하는 수도승이 계를 지키는 경우 그러한 선한 신. 어업으로부터 무표업이 생기는바, 이 무표업으로부터 생긴 '妨惡의 功能'과 동일한 것이 삼매에 들어간 사람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수도론상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무표업이 논의되는 바탕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행위의 여세가 행위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관념이 있지만, 한편으로 이는 실천. 수도의 문제 특히 계율생활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선한 무표업을 낳는 강력한 선의 신.어업으로 열거되는 것 중 중요한 것은 계율의 준수 및 삼매이며, 악한 무표업을 낳는 강력한 악의 신. 어업으로 열거되는 것 중 중요한 것은 계율에 배반되는 살생 등을 상습적으로 행하는 사람의 행위이다.
무표업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만약 무표업이 없다면 수도는 성립되지 않으며, 지계자의 덕도 유지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계율과 수도와 직접 관계없는 행위에 의해서도 무표업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무표업은 적어도 아비달마논서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는 않다. 설일체유부에서 무표업의 이론을 가능케 한 것은 행위의 여세라고 하는 인도의 오랜 업의 관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아비달마논사들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주로 승단에 있어서의 受戒의 意義에 대한 탐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4. 선과 악
갖가지 업 가운데에서 어떠한 것이 선인가? 어떠한 것이 악인가? 그리고 어떠한 것이 선도 악도 아닌 중성(無記)인가?
이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논서가 십팔계 하나하나에 대해 선(善). 악(惡). 무기(無記)를 구별하고 있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오근(五根). 오경(五境)의 10색계(色界)는 신.어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기이다. 7심계(心界) 중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痴). 참( ). 괴(愧)와 동반하는 것은 선, 탐(貪). 진(瞋). 치(痴). 무참(無 ). 무괴(無愧)와 동반하는 것은 악, 그 이외의 것은 무기이다. 법계(법처) 중 위의 무탐 등, 이들과 동반하는 것, 이들로부터 생기하는 것, 무위의 달마인 '택멸(擇滅)' 즉 열반은 선이며, 탐 등과 이들에 동반하는 것, 이들로부터 생기하는 것은 불선(不善)이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무기이다. 신. 어의 표업으로 위에서 말한 선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선, 악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악, 그 밖에는 무기라고 한다.
또한 선. 악의 달마를 각각 4종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있다.
① 궁극적으로 선.악인 것-궁극적으로 선인 것은 열반, 궁극적으로 악인 것은 일체 유위의 달마
② 그 자체가 선. 악인 것 - 그 자체가 선인 것은 위에서 말한 無貪 등의 5종의 마음작용이며, 그 자체가 악인 것은 貪 등의 5종의 마음작용이다.
③ 그 자체 선. 악인 것을 동반함으로써 비로소 선. 악이 되는 것 - 無貪(貪)등과 동반하는 마음 및 이 마음에 수반하는 다른 마음작용(선심에 동반하는 것으로서는 대지법. 대선지법 등, 악심에 동반하는 것으로는 대지법. 대불선지법. 대번뇌지법 그리고 때로는 소번뇌지법 등)이다.
④ 그 자체 선. 악인 것과 동반하는 것으로부터 생기하기 때문에 선. 악인 것. - 선. 악인 것은 신. 어의 표. 무표업과 심불상응행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결국 십팔계에 대한 선. 악. 무기의 구별과 전혀 동일하다.
①은 불교의 최후의 목표인 열반을 궁극적 선으로 하고, 이에 대해 일체의 유위의 달마는 결국 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당면의 문제는 업(이 자체는 유위의 달마이다.)의 선. 악의 근거이므로, 유위의 달마 전체를 악으로 간주하지 않고 이에 대해 선. 악을 구분하는 경우를 살펴보지 않으면 않된다. 이에 ②③④를 보면 유위의 달마를 선. 악으로 구분한 것은 결국 그 자체 선이라고 하는 무탐 등의 5종과 그 자체 악이라고 하는 탐 등의 5종의 달마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무탐. 무진. 무치. 참. 괴의 다섯은 그 자체 선인가? 어떻게 탐. 진. 치. 무참. 무괴의 다섯은 그 자체 악인가? 논서는 다만 " 이들 5종은 다른 달마와 동반함으로써, 또는 다른 달마로부터 생기함으로써 비로소 선(악)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선(악)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를 良藥(독약)에 비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들 5종과 동반하기 때문에 선(악)인 마음과 이 마음에 수반되는 다른 마음 작용은 약(독)을 포함한 물에 비유되며, 이들과 동반하는 것으로부터 생기하기 때문에 선(악)인 신. 어업과 이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의 심불상응행은 양약(독약)을 포함한 물을 마신 젖소가 배출하는 우유에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선. 악에 대해 또 하나의 정의를 갖고 있다. 좋은(좋지 못한) 과를 낳는 것이 선(악)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실은 선(악)의 달마 일반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선(악)의 업에 대한 정의임은 자명하다. 이와 같이 樂(苦) 果를 낳는 업은 이것이 의업인 경우에는 무탐(탐) 등과 동반하는 "思"이며, 신.어업인 경우에는 무탐(탐) 등과 동반하는 마음. 마음작용(직접적으로는 그 중의 思)으로부터 생기하는 모양 또는 소리이다. 결국 일체의 선(악)한 신. 어업의 근저에는 선(악)의 의업이 있으며, 신. 어. 의 전체의 선(악)의 마음작용이 있다. 그리고 일체의 선(악)의 마음. 마음작용 그 자체의 선(악)성의 근원으로서는 무탐(탐) 등의 5종을 동반하고 있다.
본래 끊어버려야 하는 것이지만, 선심과 동반하는 5종의 경우 그 중에서 무탐. 무진. 참. 괴는 대선지법이며 무치는 慧로서 대지법이므로, 이들 5종의 마음작용은 모두 선심과 동반한다고 하여도 좋다. 그러나 악심과 동반하는 5종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즉 치는 대번뇌지법, 무참. 무괴는 대불선지법으로서 필히 악심과 동반하지만, 탐. 진의 둘은 부정법이며 이중 어느 한 쪽이 그 마음과 동반하거나 둘 다 동반하지 않거나 하지 둘이 모두 그 마음과 동반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앞에서 기술한 "일체의 악한 마음. 마음작용은 탐 등의 5종과 동반한다"라는 구는 엄밀하게는 "일체의 악한 마음. 마음작용은 이와 동반하는 성질을 가진 탐 등의 5종의 마음작용 중 치와 무참과 무괴를 필히 동반하며, 때로는 그 위에 탐 또는 진 가운데 어느 것을 동반한다"라고 해야 한다.
무탐. 무진. 무치(탐. 진. 치)를 3선(불선)근 즉 세 가지의 선(악)한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아함에 나타나있으며, 아비달마는 이를 계승하였다. 치는 다른 말로 하면 '무명'이다. 다시 말하면 무지이며, 진리에 대한 무자각이다. 그러나 인도적인 표현방식이 종종 그러하듯이, 이는 단순히 覺知가 결여된 상태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내적인 혼미함이다. 이 내적인 치가 밖으로 활동을 할 때, 이는 탐과 진이 되어 나타난다. 마음에 드는 대상에 대한 욕구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이 둘은 내적인 혼미함을 지닌 인간이 외계에 대하여 취하는 근본적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때로는 적극적인 전자로 대표된다. 이를 갈애(渴愛) 즉 목마름과 같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라고 하며, 무명과 상대시킨다.
무치도 단순히 무지가 결여된 상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지견(知見)하는" 올바른 지혜이다. 즉 유위. 무상. 무아의 진리를 명료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내적인 명료한 자각이 밖으로 활동할 때, 이는 무탐. 무진이 되어 나타난다. 이들도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결국 욕망의 대상에 대한 염사(厭捨)와 타자에 대한 애련(愛憐)이다. 따라서 탐. 진. 치도 무탐. 무진. 무치도 개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평상성 안에 있는 마음의 혼미함, 이를 자각함으로써 혼미함이 명료함으로 전환된다는 뜻을 두 계열의 세 낱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선이 근본이며 또한 악의 근본인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논서가 이들을 "그 자체 선(악)인 달마"로 헤아리고 있음은 아함을 따르는 아비달마의 태도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탐과 진을 공주(共住)하기 어려운 관계로 이해한 것도 아비달마적 분석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이다. 두 마음의 동시생기를 인정하지 않는 아비달마의 분석적 입장에서는 마음에 드는 대상을 욕구하는 심리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증오하는 심리가 같은 동일한 순간, 동일한 마음에 생기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서가 참(무참). 괴(무괴)를 "그 자체 선(악)인 달마"로 헤아리고 있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아마도 이들 두말에 공통된 "자신의 과실을 부끄러워함(부끄러워하지 않음)"이 선(악)의 심리에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였기(그러므로 참. 괴를 대선지법으로, 무참. 무괴를 대불선지법으로 헤아리기)때문일 것이다.
선업은 락과(樂果)를 가져오고, 악업(惡業)은 고과(苦果)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다시금 밝혀두지 않으면 안될 점이 있다. 업이라는 인(異熟因)으로부터 업의 과(異熟果)가 생기는 관계를 유루의 달마와 유루의 달마 사이의 관계, 즉 업. 번뇌의 세계(미혹의 세계)에 있어서의 인과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업은 본래 유루의 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업이 모두 유루인 것은 아니다. 무루의 업도 있는 것이다. 이 무루의 업은 무루의 지혜에 수반되는 의업 즉 무루의 "사(思)"로서, 업. 번뇌의 세계를 초월하여 깨달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도(道)"로 작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유루. 무루의 업을 그림으로 정리하여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선(善) - 락(樂)의 이숙과를 낳는다.
+-유루(有漏)의 업(業)| 악(惡) - 고(苦)의 이숙과를 낳는다.
업(業) | +-무기(無記) - 이숙과를 낳지 않는다.
+-무루(無漏)의 업 : 모두 선 - 열반으로 인도한다.
제7장 번뇌(煩惱)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심신을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으로 클레샤(Kle a)라는 산스크리트가 중국어로 <번뇌> <미혹(迷惑)>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원래 불선(不善)·부정(不淨)한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수많은 불교술어 중의 하나였으며 뒤에 그들의 심리작용과 정신상태를 총칭하고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넓은 뜻의 번뇌에는 가장 기본이라는 탐(貪; 집착)·진(瞋; 증오)·무명(無明; 자기 중심으로 인해 공평·정확한 지견이 없는 것)이 있다. 여기에 만(慢; 만심)·의(疑;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견(見; 잘못된 견해)을 더해서 육번뇌(六煩惱)라고 하여, 근본적인 번뇌로 친다. 이 밖에 잠재적 번뇌인 수면(隨眠), 현재 작용하고 있는 번뇌인 전(纏), 또는 결(結)·박(縛)·누(漏) 등 인간의 착하지 못한 심리상태를 상세히 분석한 매우 다양한 번뇌가 있으며, <백팔번뇌> <8만 4천 가지 번뇌>라고도 한다.
1. 일곱가지 수면
번뇌에 대해 설일체유부는 옛부터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소위 98 隨眠說이 그것이다.
'수면'으로 번역되는 아누샤야(anu aya)는 아함에서도 때때로 사용되었다. 가장 넓은 의미로 일반적인 기질, 경향, 성향 등을 나타내는 이 말은 불교 특유의 용법으로서는 특히 나쁜 경향, 나쁜 자질을 의미하며, 번뇌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아함에서는 누(漏). 폭류(暴流, 세차게 흐르는 것), 결(結, 결합시키는 것), 전(纏, 달라붙는 것), 계(繫, 동여매는 것)등의 말이 각각 뉴앙스를 달리하며 번뇌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수면(隨眠)도 이러한 말 중의 하나이다. 다른 말들이 행위로서 표면에 나타난 번뇌를 지칭하는 데에 대해, 수면은 본래 아직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고 마음속에 숨은, 악으로의 강한 경향을 의미하였다.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번뇌와 수면을 끊는다."라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수면에 특정 번뇌의 이름을 붙여, '탐수면(貪隨眠)' '진수면(瞋隨眠)' 등이라 하였으며, 이때에는 수면 본래의 의미가 희박하게 되어 거의 번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탐수면(貪隨眠)'은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탐에의 경향'이 아니라 탐욕이라는 번뇌 그 자체를, '진수면(瞋隨眠)'은 마찬가지로 미움의 번뇌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의 번뇌에 대해서가 아니라 복수의 특정한 번뇌에 이 말을 부가하여, 번뇌의 군(群)을 타나내는 경우도 많게 되었다. 탐수면(貪隨眠), 진수면(瞋隨眠), 무명수면(無明隨眠)이라든가, 만수면(慢隨眠), 유탐수면(有貪隨眠), 무명수면(無明隨眠)이라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번뇌군 가운데에 가장 정돈된 형태가 7수면(隨眠)이다.
아함에 보이는 7수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탐(貪). 진(瞋). 견(見). 의(疑). 만(慢). 유탐(有貪). 무명(無明)의 일곱을 열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중에서 '탐(貪)'을 '욕탐(欲貪)'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가 본래의 형태이고 후자는 보다 새로운 변형이지만, 아비달마는 모두 후자의 형태로 논의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98수면의 이론은 이 7수면설을 기초로 하고, 이를 번뇌에 대한 논의의 중심으로 삼아 발전시킨 것이다.
아함경에는 3불선근(不善根). 5개(蓋). 4폭류(暴流). 5결(結)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번뇌군이 설해지고 있으나, 7수면은 이러한 것에 비해 그다지 특별하고 유력한 설은 아니다. 오히려 아함에 나타난 횟수로 말하면, 이들 어떠한 것보다도 적다. 다만 탐욕으로부터 무명에 이르는 일곱가지 번뇌를 헤아리는 방법은 다른 여러 가지 설에 비해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가 경전에서 특히 이 설을 선택하여 번뇌에 관한 논의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아마도 이러한 점에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 7수면에서 98수면으로
7수면설에서 98수면설이 성립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은 것으로 짐작된다.
1) 7수면 중 욕탐(欲貪)은 욕계(欲界)에 있어서의 탐(貪)이며, 유탐(有貪)은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 있어서의 탐(貪)으로 모두 동일한 달마이기 때문에 하나로 정리된다. 따라서 7수면은 달마의 수로 말하면 貪. 瞋. 慢. 疑. 見(이는 마음 작용의 명칭으로서는 십대지법의 하나인 '慧'의 일부에 해당된다.). 無明의 6수면이 된다.
2) 6수면 중 '견(見)'은 사견(邪見, 有爲의 달마 사이에 적용하는 因. 果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그릇된 견해), 견취(見取, 저열하고 그릇된 견해 등에 집착하여 이를 훌륭하고 진실된 견해라고 생각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옳지 않는 계율. 신앙 등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드는 것), 변집견(邊執見, 극단적인 것에 집착하는 견해라는 의미로 특히 사후에도 상주한다거나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신견(有身見, '나'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아집)으로 나뉘므로 이에 따라 10수면이 된다.
3) 10수면의 하나하나에 삼계(三界, 欲界. 色界. 無色界). 오부(五部)의 구별이 있다.
* 五部는 일체의 번뇌를 '견소단(見所斷, 見은 四諦를 보는 것을 의미. 所斷은 단절되는 것)'과 '수소단(修所斷)'으로 나누고, 이 '견소단(見所斷)'을 다시 견고소단(見苦所斷). 견집소단(見集所斷). 견멸소단(見滅所斷). 견도소단(見道所斷)으로 나누어 합계 5부로 하는 것이다.
4) 그 중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은 '見苦所斷'일 뿐이며, 계금취견(戒禁取見)은 '견고소단(見苦所斷)'과 '견도소단(見道所斷)'일 뿐이며, 사견(邪見). 견취(見取). 의는 '견고(見苦). 집(集). 멸(滅). 도(道)소단(所斷)'이기 때문에 전체 98수면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설일체유부에 독특한 것으로, 다른 학파에는 보이지 않는다.
3. 수번뇌(隨煩惱)
98수면설은 본래 아함에 나타난 7수면설로부터 출발하여 이를 상세히 분석. 고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7수면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많은 번뇌는, 아무리 아비달마에서 7수면을 98수면으로 확장하여 설한다 할지라도 계속 그 안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함중에 다양하게 설명되어 있는 많은 번뇌를 해설하는 데에는 98수면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에 따라 설일체유부는 7수면(을 정리한 6수면) 이외의 많은 번뇌(煩惱)를 수번뇌(隨煩惱)라는 이름으로 일괄하게 되었다.
번뇌와 수번뇌는 중국 등지에서의 구사론의 전통적인 연구에서는 근본번뇌(根本煩惱)와 지말번뇌(枝末煩惱)의 관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두말은 아함에서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6수면은 확실히 설일체유부의 논서에서 번뇌론의 중심이 되고 있지만, 이들과 수번뇌와의 관계가 필히 근본(根本)과 지말(支末)의 관계는 아니다. 예를 들어 구사론에 "번뇌는 곧 수번뇌이다. [번뇌는] 마음을 염오(染汚)시키기 때문이다. 번뇌와는 별개의 염오된 마음작용으로서 행온(行蘊)에 포함되는 것은 단지 수번뇌로서 번뇌는 아니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수번뇌는 번뇌(즉 6수면)와 이 이외의 '염오된' 마음작용인 행온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번뇌 쪽이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며, 번뇌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행온에 포한되는 '염오된' 마음작용이란 대번뇌지법. 대불선지법. 소번뇌지법 등으로 헤아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작용으로써의 분류를 떠나 개별적인 입장에서 이들을 정리한 것이 십전(十纏, 無 , 無愧, 眼, 掉擧, 昏沈, 嫉, , 忿, 覆, 悔), 육구(六垢, 惱, 害, 恨, 諂, , )이다. 10전의 제1. 제2는 대불선지법, 제3. 제4는 부정법, 제4. 제6은 대번뇌지법, 마지막의 넷은 소번뇌지법이며, 6구는 모두 소번뇌지법이다.(보통 수번뇌라고 하면, 이 10전. 6구만을 가리킨다.)
6수면에 이 10전과 6구를 더하고, 다시 대번뇌지법으로 헤아려지는 방일(放逸). 해태(懈怠). 불신(不信)을 보충하면, 모든 번뇌를 열거한 셈이 된다. 3루(漏), 4폭류(暴流), 5결(結), 9결(結), 4액( ), 3전( )등 아함에 보이는 다양한 번뇌는 모두 위의 어느 것인가에 해당된다.
4. 번뇌를 끊음
모든 번뇌를 끊을 때, 깨달음이 열린다. 상식적으로 이것이 곧 열반의 경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하나하나의 번뇌가 끊어지고 유정의 상속이 그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때마다, 즉 이계(離繫)할 때마다, 하나하나의 열반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열반은 '택멸(擇滅)'로 불린다. '택(擇)'은 달마에 대한 올바른 분별. 판단을 하는 통찰력의 의미로서, 무루의 지혜를 가리킨다. 지혜에 의한 번뇌의 지멸이 '택멸(擇滅)'이다. 이는 달마의 체계에 있어 무위의 달마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그리고 어떤 유정의 상속에서 하나하나의 번뇌가 무루의 지혜에 의해 끊어져 이계(離繫)될 때마다, '택멸(擇滅)'이라는 무위의 달마가 하나하나 그 유정의 상속과 결부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하나의 번뇌를 단절하고 하나하나의 열반이라고 한다.
제8장 도(道)
올바른 무루의 지혜로써 번뇌를 끊어, 즉 번뇌와 심상속(心相續) 사이의 구생(俱生)의 관계를 단절시켜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에는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의 셋이 있다. '견도(見道)'는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는 과정, '수도(修道)'는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는 과정이다. 그런데 '무학도(無學道)'는 도라고는 하지만, 견소단(見所斷). 수소단(修所斷)의 일체의 번뇌를 남김없이 끊었을 때 출현하는 경지이므로, 이미 수행의 도가 아니라 그 목표이다. 무학(無學)은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준비단계
그러므로 삼도라고 하여도 사실상 번뇌를 끊는 수행의 도는 견(見). 수(修)의 이도(二道)이다. 다만 그 이전에 긴 준비의 단계가 있다. 삼도에 대한 학설은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 일찍부터 성립되고 고정되었지만, 그 준비단계에 관한 설명은 논서에 이르러 전개되었다. 지금은 구사론에 나타난 바에 따라 설명하도록 한다.
도에 뜻을 세운 사람은 우선 계(수행자의 생활상의 자율)을 지켜 그 생활을 올바르게 하고, 절도와 청정함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다음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사색하며 삼매를 닦음으로써 지혜(유루이지만 선한 지혜)를 연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뭇사람 속에 머무름을 피하고, 좋지 않은 마음의 활동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수행자가 욕망이 왕성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족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생활방식을 유지하기가 용이할 것이라고 논서는 말한다. 그렇게 하여 수행자는 '법의 그릇(法器)'가 된다. 만약 그가 욕망이 강한 사람이라면 '부정관(不淨觀)'을 닦아야 하며, 만약 마음의 동요가 많은 사람이라면 '지식념(持息念)'을 닦아야 한다. '부정관(不淨觀)'은 시신이 점차 부패하여 마침내 백골이 되기까지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관상하는 것이다. 성적 욕망-이성의 안색과 피부색이 아름다움, 용모의 아름다움, 촉감의 즐거움, 기거동작의 아름다움 등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지식념(持息念)'은 호흡법의 수련이다. 들숨. 날숨의 수를 세거나 호흡을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하고, 마음을 자신의 코끝과 미간에 두어 몸안의 생명을 관상하고, 나아가서는 널리 일체의 것을 마음속으로 관상함으로써 점차 보다 높은 정신적 경지를 자신으로부터 도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념주(四念住)'의 수행으로 나아간다. '사념주(四念住)'는 신체는 부정하다, 감각은 고(苦)다, 마음은 무상(無常)하다, 일체의 사물은 무아(無我)이다라고 관상하는 수련이다. 처음에는 이 네 가지를 각각 별도로 관상하고, 다음으로는 이들을 하나로 하여 신체. 감각. 마음. 일체의 사물은 부정하다, 고(苦)다, 무상(無常)하다, 무아(無我)이다라고 관상한다.
준비단계의 마지막은 '사선근(四善根)'으로 불린다.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제(四諦)를 유루(有漏)의 지혜로써 분석적으로 그리고 반복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하여 관찰하는 동안에 수행자의 마음은 점차 고양되어 무루(無漏)의 지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태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극한에 이르러 수행자는 무루(無漏)의 지혜를 일으킨다. 이를 설일체유부적으로 표현하면, 수행자의 심상속에 유루의 지혜를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하는 무루의 지혜가 생긴다. 이리하여 수행자는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것이다.
견도(見道) - 진리의 관찰
'견도(見道)'에 들어간 이후는 무루(無漏)의 지혜로써 번뇌를 단절시켜가는 과정이다. 우선 고. 집. 멸. 도의 사제를 관지(觀知)함으로써 88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고, 그 다음 '수도'에 들어 아직 남은 수소단의 번뇌를 끊는다. '견도'에 들어갔으므로 수행자는 평상적인 사람(범부)이 아니라 고귀한 사람(성자)이다. 견. 수. 무학의 삼도는 聖道(성자의 길)로도 불린다.
견소단의 번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지의 측면의 번뇌이므로, 사제의 관지로부터 생기하는 무루의 지혜에 의해 곧 단절된다. 다시금 사제의 진리성을 인식하는 것은 이것이 그대로 견소단의 번뇌를 떠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곧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소단의 번뇌는 망치로 돌을 치면 돌이 부수어지듯이 일거에 끊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 번뇌를 끊는 작용을 하는 무루의 지혜에는 2종이 있다. '인(忍)'과 '지(智)'가 그것이다. '인(忍)'은 기묘한 호칭이기도 하나, 불전(佛典)에서 이 말은 인내의 뜻이 아닌 것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때 이 말은 어떤 특수한 지혜의 작용을 의미한다. 지금도 그러한 의미이다. 우선 '인'으로써 번뇌를 끊는다. 즉 번뇌와 심상속의 '구생'의 관계를 떠나고, 다음으로 '지'(이것도 일종의 지혜의 작용이다)로써 그 번뇌의 단절을 확증하여 이계(離繫)를 얻는다. 이는 어떤 사람이 도둑을 잡아 집 밖으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이 그 도둑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거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거에 끊는다고는 하지만 무루의 지혜가 '인'으로 작용하는 데에 한 순간, '지'로 작용하는 데에 또한 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견소단의 한 번뇌가 단절되는 데에는 두 순간이 걸린다고 보아야 한다.
견소단의 번뇌에는 견고소단에서 견도소단에 이르기까지의 4종이 있으며, 이들 각각에 또한 욕계에 속하는 것, 색계에 속하는 것, 무색계에 속하는 것이 별도로 있다. 그런데 견소단의 번뇌가 단절될 때, 색. 무색의 두 세계(上界)의 번뇌는 별도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단절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견소단의 번뇌 88가지는 사제의 구별과 욕계. 상계의 구별에 의해 8종으로 나뉜다. 이 8종이 욕계의 견고소단으로부터 시작되어 상계의 견고소단, 욕계의 견집소단, 상계의 견집소단의 순서로 차례차례 단절되고, 마지막으로는 상계의 견도소단의 번뇌가 끊길 때,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가 단절된다.
욕계의 번뇌에 대해 작용하는 '지'를 법지(法智)라고 하며, 상계의 번뇌에 대해 작용하는 '지'를 류지(類智)라고 한다. 그러므로 견소단의 번뇌가 단절되는 과정을 무루의 지혜의 측면에서 말하면, 고법지인(苦法智忍)이 생기함(고법지인이 생기하는 순간이 견도에 들어가는 순간이다)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법지(苦法智)가 생기하고, 나아가 고류지인(苦類智忍). 고류지(苦類智). 집법지인(集法智忍). 집법지(集法智). 집류지인(集類智忍). 집류지(集類智)가 순차적으로 생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류지인(道類智忍). 도류지(道類智)가 생기하기에 이른다. 고법지인의 생기로부터 도류지의 생기까지 16순간이 필요한데 도류지에 의해 마지막의 견소단의 번뇌가 단절되는 순간, 그 사람은 '수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제16의 순간은 '수도'에 속하는 것으로 제외되어 견도십오심(見道十五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차례로 '돌을 부수는 것과 같이' 88견소단의 번뇌는 단절된다.
수도(修道) - 오랜동안의 마음의 수련
수소단(修所斷)의 번뇌의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이는 정(情). 의(意)의 측면의 번뇌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성적으로 알아서는 이를 떠날 수가 없다. 여기에서는 아는 것과 끊는 것이 별개이다. 알고는 있되 그만두지 않는 것, 이것이 정(情).의(意)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공통된 성격이다. 그리고 이를 끊기 위해서는 삼매(三昧)를 닦으며 사제(四諦)라는 진리의 관지(觀知)를 반복함으로써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마음을 고양시켜 끊기 어려운 번뇌를 서서히 단절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 탐(貪) -+
+- 진(瞋) |
+- 욕 계(欲 界) +- 치(痴) | 欲 界 地 - 九品-+
| +- 만(慢) -+ |
| +- 初 禪 地 - 九品 |
| +- 탐(貪) -+ +- 第二禪地 - 九品 |
修所斷의 번뇌 +- 색 계(色 界) +- 치(痴) |-+- 第三禪地 - 九品 |
| +- 만(慢) -+ +- 第四禪地 - 九品 |- 81 品
| |
| +- 空無邊處地 - 九品 |
| +- 탐(貪) -+ +- 識無邊處地 - 九品 |
+- 무색계(無色界) +- 치(痴) |-+- 無所有處地 - 九品 |
+- 만(慢) -+ +- 非想非非想處地 - 九品-+
수소단의 번뇌는 그림으로 나타낸 것과 같이 삼계로 나뉜 10종이지만, 견소단이 번뇌와는 달리 정의적(正義的)번뇌는 그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끊어가지 않으면 안되므로, 번뇌의 종류에 따른 구별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 힘의 강약에 따라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의 9종(九品)으로 나눈다. 그리고 색(色). 무색(無色)의 2계에 속하는 번뇌는 각각 다음에 설명되는 바와 같이 4종으로 나뉘기 때문에, 이에 의해 8단계의 구별이 성립된다. 결국 9품. 9지로써 일체의 수소단의 번뇌를 81로 분류한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수소단의 번뇌를 끊는 순서는 욕계의 상상이 번뇌로부터 시작하여 하하의 번뇌에 이르며, 다름으로는 색계초선지(色界初禪地)의 상상의 번뇌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무색계비상비비상처지(無色界非想非非想處地)의 하하의 번뇌에 이른다.
사선(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다시 각각 4단계로 나눔은 삼매에 들어갔을 때의 정신적 경지에 깊고 낮음의 차이를 두기 때문이다. 색계에 있어서는 초선에서 제4선까지의 4단계의 경지(四禪)를 설정하고, 무색계에 있어서는 공무변처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4단계(四無色定)를 설정한다. 삼매의 경지를 나타내는 이러한 명칭들은 아가마에도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부류는 본래 상호 관계가 없는 것이며, 이들과 욕. 색. 무색의 삼계설도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사선과, 색계, 사무색정과 무색계가 결부되어 삼계구지(三界九地)의 설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이중에서도 특히 삼계설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설일체유부는 그 번뇌론, 수도론, 세계론을 삼계의 분류와 관련하여 논의함으로써 복잡한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우선 초선으로 불리는 삼매의 경지에서 마음은(물론 '定'의 마음작용과 구생하지만, 이 외에) '심(尋)'과 '사(伺)'의 마음작용을 동반하며,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의 두 감수(感受)가 있다. 제2선의 경지에 들어가면, '심'도 '사'도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매에서 생기는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은 느껴지고, 마음의 청정함이 증장된다. 더욱 삼매이 경지가 깊어져 제3선으로 나아가면 절묘한 '락(樂)'의 감수만이 있으며, 제4선에 들어가면 이것까지도 없게 되어 마음은 어떠한 것에도 동요됨이 없이 청정함만이 남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확실히 점차로 깊어져 가는 삼매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4선설이 우주론과 결부되면, 이 4계층에 속하는 번뇌와 이의 소멸이 상정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수행자의 삼매의 체험과 아비달마의 분석학적 학풍이 결합된 결과일 따름이다.
사무색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되고 있다. 공무변처(空無邊處)는 (물질적 존재가 없는)공간의 무한성에 대한 삼매의 경지라는 의미이며,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인식의 무한성에 대한 삼매의 경지,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어떠한 것도 여기에 없는 삼매의 경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관념이 있는 것도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 삼매이 경지라는 의미로서, 이들은 모두 깊은 삼매의 황홀경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삼매의 경지에 대응하는 네 계층적 영역이 천계의 최고의 장소인 무색계(無色界)에 존재한다고 한다(예를 들어 일상용어로서도 사용되는 '유정천(有頂天)'은 본래 존재의 최고의 장소에 있는 천이라는 의미로서, 비상비비상처천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도 각각의 계층에 속하는 번뇌가 있으며, 이의 단멸(斷滅)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는 무색계(無色界)의 四無色定地와 색계의 四禪地, 그리고 欲界地라고 하는 3계. 9지의 단계적 분석이 번뇌의 종류와 질의 분석과 중첩되고 있으며, 이것이 다시 수행의 도에 대한 논의와 형식적으로 상응한다. 여하튼 이러한 분석은 매우 복잡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비달마의 실천도
설일체유부가 설하는 실천도 즉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도식은 극히 정연하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으로 정연하여 오히려 수행도의 실천과 상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요해할 때 견소단의 번뇌가 즉시 단절된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 시작하여 도류지(道類智)까지의 16종의 무루(無漏)의 지혜가 계속하여 그 순서에 따라 생기한다. 그러므로 견소단의 번뇌가 연속하는 15순간에 모두 그 순서에 따라 단절된다고 함이 일반적 체험에서 항상 가능한 일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확실히 도식적인 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오랫동안 마음을 수련한 결과 점차 단절된다는 수소단의 번뇌가 욕계에 속하는 가벼운 것으로부터 상계에 속하는 강력한 것으로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단절되어 간다고 하는 일이 개개의 수도자의 체험에 어떻게 실증될 수 있는가?
이러한 점은 형식적으로는 정돈되어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공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논의를 위한 논의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비달마의 큰 결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히려 '견도(見道)'에 들어가기 이전의 준비단계의 설명에서 수행승들이 실천의 구체적 모습을 발견한다. 여기에 아가마 이래의 불교적 실천도의 기본적 틀, 즉 '계(戒)'에서 '정(定)'으로, '정(定)'에서 '혜(慧)'의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이 잘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아비달마의 실천도는 결국 마음의 수련으로 귀착된다. 이는 본래 승원의 철학자들의 의념( +疑 念)의 소산이지, 동적인 사회의 흐름에 따른 생활상의 지침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실비적 체험을 통하여 이를 단숨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점진적으로 몸. 마음의 환경을 정비하고('계' '정'이 이것이다), 정신의 활동을 가장 방해받지 않는 조건에 두면서, 자유. 활발한 활동을 진작시키기보다는 고요한 明證('慧'가 이것이다)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제10장 아라한과 부처
사향사과(四向四果)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은 '견도(見道)'에 들어갔으므로 '고귀한 사람'(성자)이라고 불림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 성자는 네 단계로 나뉜다. 예류(預流, 처음으로 법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 일래(一來,다시 한번 이 세상에 돌아오는 사람). 불환(不還, 두번 다시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 아라한(阿羅漢,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이 그것이다. 이를 보통 사과(四果)라고 한다. 수행도의 네 성과라는 의미이다. 4과의 설은 아가마 이래 불교의 일반적 생각이지만, 설일체유부는 이를 이 학파에 독특한 견(見). 수(修). 무학(無學)의 삼도(三道)이 과정과 결합시켜 설명한다.
'견도(見道)'에 들어간 성자는 겨우 15순간에 그 과정을 통과하고 제16 순간에는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어 '수도(修道)'로 들어간다. '견도(見道)'에 있는 15순간을 예류향(예류로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며, 제16 순간에 '수도'에 들어갔을 때 아직 수소단의 번뇌를 하나도 끊지 못했을 경우('견도'에 들어가기 이전에 유루의 지혜에 의해 수소단의 번뇌를 끊은 일도 있으므로, 이 경우는 제외한다), 이 단계를 예류과라고 한다(이미 유루의 지혜에 의해 어떠한 수소단의 번뇌를 끊었을 경우는 예류과를 뛰어넘어 즉시 다음의 일래과와 불환과의 단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예류과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그후 가장 많은 경우라도 인간과 천인이 경지 사이를 7차례 왕래하는 사이에 즉 14회의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에 필히 깨달음이 경지에 들어간다. 그는 결코 삼악취(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예류과에서 '수도'에 들어간 성자는 계속하여 수행도의 걸음을 옮긴다. 이번에는 일래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므로, 일래향이라고 불린다. 즉 '수도'에 들어간 이후 욕계에 속하는 수소단의 번뇌의 제6품을 끊기 직전에 이르기까지가 이것이다. 그리고 제6품(중하의 번뇌)을 끊는 순간 일래과에 도달한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인과 천 사이를 오직 한 번 왕래하는 사이에 필히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일래과로부터 나아가면 불환향에 들어간다. 불환향은 일래과를 얻고 나서 욕계의 수소단의 번뇌의 제9품을 끊기 직전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킨다. 제9품(하하의 번뇌)을 끊는 순간, 즉 욕계의 수소단의 번뇌를 모두 끊는 순간 불환과에 도달하며, 이러한 사람은 다시 욕계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수행도의 마지막 과정은 아라한향이다. 이는 나머지의 색. 무색계의 수소단의 번뇌를 끊는 과정이다. 이를 모두 끊는 순간 수행도는 완성된다. 긴 '수도'의 과정은 끝나고 '무학도'에 이른다. 즉 일체의 번뇌가 단절되어 아라한으로 불리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는 생사. 윤회의 세계로부터의 결별이며, 깨달음의 영역으로의 초월이다.
견(見). 수(修). 무학(無學)이 3도의 과정이 도식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제시된 4향. 4과의 과정도 어느 정도 도식적이어서 그 내용은 공소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설에서 다만 '법이 흐름에 들어간' 다음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깨달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길고 긴 정신의 수련과정이 있다는 점, 수행자는 이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는 점,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의 정신적 경지는 견고해진다는 점을 알면 충분할 것이다. 아비달마의 분석적 논의는 수행자의 자질을 나누거나, 수행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아가마에 나타난 특수한 용어 '가가(家家)''일간(一間)'(또는 一種子) 등을 일래향. 불환향의 과정과 결부하여 해석하거나, 불환과를 5종류로 나누거나 하지만,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아라한을 6종으로 구분하는 것은 일단 일체의 번뇌를 끊어 아라한이 된 사람 중에서도 때로는 그 경지에서 후퇴하는 사람, 또는 후퇴할 염려가 있는 사람, 또는 그 경지에 정체하는 사람 등이 있음을 설하는 것으로서, 이는 아비달마 논사의 구도에 대한 진지하고 솔직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이 육체를 가지고 생존하는 한 그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盤)에 있다고 하며, 육체가 사멸되었을 때에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어갔다고 하여 이를 구별한다. 육체는 달마의 체계에서는 '色(광의)'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유루(有漏)이지, 결코 무루(無漏)가 아니다. 무루의 지혜에 의해 일체의 번뇌를 끊은 아라한의 심상속도 유루의 육체를 동반하고 있는 한, 완전한 무루성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러한 구별의 근저에 있다. 예를 들어 일체의 번뇌를 끊은 아라한에는 정신적인 고통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병 등에 의한 육체적 고통은 당연히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길, 부처의 길
아라한이라는 말은 아가마 이래 부처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처는 참된 자각자를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 보는' 올바른 지혜로써 일체의 번뇌를 끊은 사람은 모두 부처이며, 이러한 사람은 바로 '공양을 받을 만한 '아라한이다. 샤키야무니 붓다가 깨달음에 도달한 후, 처음으로 다섯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하고 이로써 다섯 사람이 샤키야무니와 동등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옛 불전은 "세상에 6인의 아라한이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는 부처님인 샤키야무니도, 그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에 이른 다섯 사람도 모두 동일한 아라한이다. 이는 올바른 지혜로써 번뇌를 끊은 사람은 누구라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깨달음에의 길 즉 부처님이 되는 길은 만인에게 열려있음이 불교의 실천도의 근본임을 나타내고 있다.
아득한 옛 부처님도 일찍이 이 길을 걸어 열반에 이르렀으며, 가까이는 샤키야무니 붓다도 오랫동안 잡초에 묻혀있던 '고불(古佛)의 길'을 재발견하고 이로써 열반의 '고성(古城)'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도 샤키야무니 가르침의 인도로 이 길을 밟아 올바른 지혜를 얻는다면, 동일한 열반에 이를 것이며, 동격의 부처가 되고 동격의 아라한으로 불릴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길은 멀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한 걸음 한 걸음 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일찍이 여러 부처님이 걸어갔던 길이며, 또한 이 길이 그대로 우리가 부처님이 되는 길이다. 이러한 것이 초기 불교도의 신념이었으며, 이는 선(禪)에서 정토교(淨土敎)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승불교도의 원(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비달마 논사가 생각하였던 것은 확실히 이와는 다르다. 논서가 제시하였던 바, 평상적인 인간(범부)으로부터 고귀한 사람(성자)으로, 그리고 아라한이라는 깨달음의 길은 부처님이 됨에 틀림없는 사람 즉 보살이 걸어갔던 길과는 별개의 것이다.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길은 단지 번뇌를 끊는 수행의 길이지만, 보살로부터 부처로의 길은 그 이외의 큰 과제를 갖고 있다. 즉 자비를 갖고 유정을 이익되게 한다는 이타의 행이다.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길은 널리 사람들에게 해방되어 있지만, 보살로부터 부처로의 길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특히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길은 널리 해방되어 있다고 하여도, 재가자는 그 길의 중도밖에 , 즉 기껏해야 불환까지 밖에는 이를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 이상 나아가기 위해서는 출가가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논서에 의하면, 보살은 우선 3아상키야마하칼파 동안 육바라밀(① 남에게 줌, ② 생활을 정돈함, ③ 고난을 감내함, ④ 선을 행함, ⑤ 마음을 동요하지 않게 함, ⑥ 완전한 지혜를 얻음)의 수행을 쌓고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다. 이에 의해 부처의 깨달음을 얻고, 다른 유정에 대자비행을 하기 위한 무량한 공덕이 축적된다. 그 다음에는 잠부주에 태어나 100마하칼파 동안 다시 다른 수행을 쌓는다. 이는 32상 즉 부처님이 된 사람만이 갖추는 32종의 뛰어난 육체적 특징을 구비하는 데 필요한 덕을 쌓기 위함이다. 이상의 두 종류의 수행을 마친 보살은 다시는 삼악취(三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이나 천(天)의 경우로만 삶을 향유한다. 그리고 항상 부귀한 집안에만 태어난다. 그는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대자비의 행에 게으름이 없으며, 사람들을 위한 '무급(無給)의 사용인(使用人)'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 묘사된 보살이 모습은 그의 이타성과 자기 연마성에 있어 거의 무한하다. 이러한 보살의 길은 삼천대천세계 중에서 동시에 두 사람이 함께 출현함이 없다고 하는 부처님이 되는 길이므로, 이는 선택된 희유한 사람의 길로서 보통의 성문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들이 걷는 아라한으로의 길과는 현격하게 구별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위대함
설일체유부 논서는 부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데에도 열심이다. 부처님에게만 갖추어진 덕으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다른 사람과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만이 갖는 열여덟 가지 성질)을 헤아리는 것은 설일체유부뿐만은 아니지만, 이 부파는 다른 독특한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삼념주(三念住), 대비(大悲)가 그것이다. 십력(十力)은 갖가지 정신적 능력을 열거하여 부처님의 전지. 전능을 말하며, 사무외(四無畏)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흔들림이 없는 자신감을, 삼념주(三念住)는 부처님의 마음은 부동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음을, 그리고 대비(大悲)는 부처님의 자비가 유래하는 바의 깊이 그리고 널리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평등하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불공법 외에도 부처님의 삼원덕(三圓德, 보살이었을 때의 수행이 광대하고 원만함, 부처님이 되어 갖추는 지혜. 특수한 능력. 육체. 번뇌의 지멸이 완전함) 유정을 이익되게 함이 완전함)이 이야기된다. 그리고 부처님만이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 '염오되지 않는' 무지, 즉 비번뇌성의 무지)까지도 탈각하여 일체지(一切智, 전지)임을 주장하고 있다. 부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점에 있어 아비달마논서들은 대승경전의 작자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전통적인 출가승단의 샤키야무니 붓다에 대한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부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스스로가 지향하는 목표를 아라한의 경지에 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부처님의 경지 사이에 큰 거리를 둠으로써 불과(佛果, 수행의 결과로써 부처가 됨)를 목표로 한다는 불손함을 갖지 않고자 하였다. 극히 아비달마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진지한 구도자이었던 그들은 그러한 진정한 구도상의 체험으로부터 진실된 지혜를 추구하는 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곤란한 길을 열어 보이고 이를 자비심으로써 사람들에게 가르친 부처님이 위대함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제10장 아함에서 아비달마로
아비달마의 발전단계
아비달마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3단계가 상정되고 있다. 그 첫 단계는 아가마경전 자체 안에 이미 교설을 정리, 조직하거나 해설, 주석하는 소이 '아비달마적 경향'이 나타나있는 단계이다. 둘째는 이 경향이 발전하여 경전 외에 아비달마로 불리는 별개의 문헌이 독립, 발전되어 갔던 시기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가마의 내용을 해설,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장대한 교의체계를 수립했던 시기이다.
첫 단계의 아가마에 포함된 아비달마적 경향은 다시 두 단계로 대별된다. 하나는 분석적 경향, 또 하나는 종합적 경향이다.
분석적 경향이란 아가마의 가르침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하나하나 그 의미를 상세히 주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아가마 중의 이러한 주석적 설명은 샤키야무니 붓다 스스로 행했던 것으로 귀결되는 것도 있으며, 붓다의 설법을 후에 제자 중에 뛰어난 사람이 해설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중 어떠한 경우라도 이와 같이 설명, 해석된 것을 늘 가까이서 청문하였던 사람(전설적으로는 붓다의 시자이었던 아난다)이 후에 이러한 상황을 진술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컨대 형식은 그렇다 할지라도 이들 모두가 붓다 재세의 시대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함에는 무리가 있다. 적지 않은 부분이 샤키야무니의 서거 후, 승단의 아비달마적 연구에 의해 부가된 주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부가된 부분이 점차 증대되고, 나중에는 이를 아가마 속에 부가시키기가 어려워졌을 때, 이것이 아가마로부터 독립하여 아비달마라는 성전이 새로운 장르로 성립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종합적 경향이란 아가마에 수록되어 있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 안배하는 것을 말한다. 아가마는 그 자체 짧고 간명한 것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이 더욱 요약되고 정형화된 형태로 전승, 집록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웅대한 체계적 논술 또는 수미일관한 장편의 이야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대개 틀에 짜인 문체와 형식으로 언급된 간단한 교설이나 삽화적인 짧은 이야기이다. 또는 이들 몇 가지를 묶거나 결합시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하나하나의 독립된 경전(단경)의 모습을 취하며, 때로는 계통적으로 정리되고, 또 때로는 순서 없이 무수하게 엮어져, 전체로서 아가마경전이라는 총서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 간단한 교설 몇 가지를 하나의 단경으로 묶는 수속, 또는 단경 몇을 하나의 계통으로 정리, 배열하는 수속 등은 후에 아비달마시대에 이르러 가르침의 요점을 리스트로 작성하는 소위 마트리카(mat k )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아가마의 아비달마적 경향의 일면, 즉 종합적인 형향을 대표한다. 이러한 수속 중 중요한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와 관계된 교설을 그 수에 따라 一法, 二法, 三法과 같은 순서로 병렬시키는 방법(소위 법수에 의한 정리)이며, 또 하나는 가르침의 내용이 주제에 따라 유별하여 배열하는 방법(소위 '상응'에 의한 정리)이다.
이러한 아비달마적 경향은 아가마경전에 상당히 보이고 있지만, 이것이 발전하면 아비달마논서가 아가마로부터 분리, 독립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원시승단이 부파로 분열하였던 때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아가마와 마찬가지로 옛부터 성립되어 있던 또 하나의 성전인 비나야(승려의 수도생활상의 규정과 승단의 행사 등을 정한 것)를 합하면, 경(經, s tra 또는 gama). 율(律, vinaya). 논(論, abhidharma)의 삼장(三藏)으로 불리는 불교문헌의 세 형식이 갖추어진다.
아비달마는 일단 독립되자 강력하게 발전하여 새로운 문헌들을 성립시켰다. 초기의 아비달마논서들은 아직 아가마에 나타난 아비달마적 경향을 그대로 연장한 내용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각각의 부파에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킨 논서(論書)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일관된 이론과 정연한 조직을 가진 아비달마적 교의학서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 둘째, 셋째의 단계에 해당된다.
댜행스럽게도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논서는 상당한 양이 현존하고 있다(이 외에 남장 상좌부의 팔리어논서가 있으나, 그 이외에 현존하는 것은 극히 적다). 그러므로 설일체유부의 단계적 발전경과를 상당히 자세히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중요한 논서의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면서 그 발전경과를 개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설일체유부의 분파의 사정을 잠깐 살펴보도록 한다.
설일체유부의 분립
원시불교승단의 분열경위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여하튼 최초에는 상좌부(上座部). 대중부(大衆部)의 두 파로 나뉘었으며(근본분열), 그 후 각각 세분되어 간 것(지말분열)이 틀림없다. 근본분열의 원인은 승단 중이 보수파, 전통존중파(이것이 상좌부가 되었다)와 혁신파, 자유사상파(이것이 대중부가 되었다)의 대립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말분열에 대해서는 다양한 원인이 상정되고 있다. 교리에 관한 이견과 계율에 대한 해석이 차이에서 연유하는 경우, 유력한 지도자가 나타났으므로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경우도 있으며, 단순히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별개의 파를 형성했던 경우도 있었다.
설일체유부가 상좌부 계통에 속해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계통에서 언제 어떻게 지말분열하여 독립된 일파를 형성하였는가는 확실치 않다. 이에 대한 전설이 구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파가 그 분리의 처음부터 특이한 교의, 학설을 갖고 있었음은 틀림없으므로, 분리는 교리상의 견해 차이에 일차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파분열 당시, 불교세력이 중심은 샤키야무니 붓다가 활동하였던 갠지스강 중류지방으로부터 이동하여 서인도의 아반티, 마라바, 마투라 등의 지역과 남인도의 안드라지방 등으로 옮겨져 있었다. 설일체유부는 그 초기에는 안드라지방에서 번영하였으나, 후에는 서북방의 카슈미르지방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세력의 진전과 함께 승단의 용어에도 변천이 있었다. 붓다시대에는 주로 마가다의 지방어가 사용되었으나, 후에는 교단이 지역적 발전과 부파의 분열에 의해 부파마다 여러 가지 언어가 채용되었다.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산스크리트어가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파의 아비달마논서는 처음부터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여 작성되었다. 인도의 정통적 문화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일찍부터 채용하였던 것은 인도불교사상의 역사에서, 나아가서는 인도사상의 역사에서 설일체유부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하나의 요인으로 헤아려지고 있다.
설일체유부 논서의 발전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논서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는 ⑴ 상기티파리야야(Sa giti-pary ya, 원문으로 남아있는 단편을 제외하면, 7세기 중국의 번역승 현장에 의한 한역 阿毘達磨集異門足論만이 현존한다), ⑵ 달마스칸다(Dharma-skandha, 원문의 단편을 제외하면 현장 역 阿毘達磨法蘊足論만이 현존)가 있다. 이들은 논서라고는 하지만 완전히 경전에 밀착되어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들은 단지 경전의 소략한 주석, 교설의 정리. 배열 이상은 아니므로, 앞에서 지적하였던 '아가마 중의 아비달마적 경향'의 직접적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에 독특한 용어와 사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여러 부파에 공통적인 요소가 많다. 특히 ⑵는 어느 부파에 소속되는가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舍利弗阿毘曇論(한역만 현존), 남방 상좌부에 속하는 비방가(Vibh ga) 등과 그 내용도 전체의 구성도 서로 통하는 바가 많다.
그 다음으로 성립된 것으로 생각되는 ⑶ 프라즈냪티(Praj apti, 완전한 것으로는 티베트역만이, 부분역으로서는 11세기 초에 한역된 施設論이 현존)로부터 아가마를 벗어나 아비달마논서 특유의 형식이 농후하게 나타난다. ⑷ 비즈냐나 카야(Vij a-k ya, 현장역의 阿毘達磨識身足論만이 현존), ⑸ 다투 카야(Dh tu-k ya, 현장역의 阿毘達磨界身足論만이 현존)에 이르면, 법수에 따라 정리된 술어(아가마 이래이 법수 외에 설일체유부에 독특한 法數도 나타난다)에 대하여 극히 복잡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개의 술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미세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어, 아비달마 논의에 번쇄, 정치함의 도를 더하고 있다. ⑶은 아비달마적인 우주론. 세계론을, ⑷는 마음의 활동에 대한 분석을, ⑸는 마음과 마음작용에 대한 해석을 크게 진전시키고 있다.
바수미트라(Vasumitra)의 저작이라고 하는 ⑹프라카라나(Prakara a, 완전한 것으로는 현장의 한역 阿毘達磨品類足論만이 있으나, 다른 부분역도 있다)는 본래는 몇 개이 작품이었던 것을 편집한 것(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으로 생각되지만, 이중에는 술어에 대한 분석적 고찰이 더욱 진전되고 있으며, 오위설. 98수면설등 설일체유부에 독특한 이론이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으로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점이 주목된다.
⑴~⑹은 일괄하여 육족론(六足論)으로 불린다. 이에 대해 ⑺ 즈냐나프라스다나(J na-prasdh na, 4세기의 고역 阿毘曇八 度論과 현장에 의한 신역 阿毘達磨發智論이 현존)를 發智身論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이 즈냐나프라스다나가 설일체유부의 논서 중에서 중심적인 것임을 인정하는 것임을 말한다. 저자는 카티야탸니푸트라(K ty yan putra)이다.
⑴⑵가 경전의 주석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⑶⑷⑸⑹이 각각 특정한 문제를 분담하여 논의하고 있음에 비해, 이 책은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조직. 논술하고 있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오랫동안 이 부파의 대표적인 논서로 중요시되어 왔다. 그러나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조직은 그렇게 엄밀한 것은 아니며, 관련있는 문제를 한 곳에 모아 논의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⑻ 마하비바샤(Mah vibh , 5세기의 고역 阿毘曇毘婆沙論과 현장에 의한 신역 阿毘達磨大毘婆沙論이 현존, 전자는 완역은 아니다)는 ⑺에 대한 극히 방대한 주석이다. 이 논서가 출현함으로써 문제는 더욱 분화되고 고찰은 더욱 정밀하게 되었다. 이 논서는 단순한 ⑺에 대한 주석은 아니다. 이 논서는 ⑺에 거론되지 않은 문제도 새롭게 거론하고 있다. 자파내의 다양한 이론과 다른 학파의 설을 무수히 인용하여(500명의 논사가 모여 이 론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가능한 한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주석의 방법은 ⑺의 문장을 빠짐없이 충실하게 해설하기보다는 중요한 문제로 인정되는 곳에는 충분한 양을 할애하고, 그렇지 못한 곳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⑻이 실질적으로는 ⑺의 영역을 넘어 독자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⑺의 조직에 의거하고, ⑺의 내용에 따라 주석한다. ⑼ 비바샤(Vibh a, ?), 4세기 말 가까이 僧伽跋澄에 의해 한역된 미완역의 婆沙論으로만 현존)도 내용을 보면 ⑻에 매우 가깝다.
⑽ 아비달마사라(Abhidharmas ra, ?)(4세기 말의 한역 阿毘曇心論으로만 현존)는 적은 논서이지만, 설일체유부 사상의 조직화라는 점에서는 특필해야 할만큼의 공헌을 하고 있다. 이 논서는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7장(뒤의 3장은 2장이 보유, 1장이 부록)에서는 복잡하게 발달한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정연하게 조직하였다. 이는 ⑺에서와 같이 8장으로 조직된 것보다 진보된 것이다. 제1. 제2장에서는 이 학파의 입장으로서의 '달마이론'을, 제3장. 제2장에서는 미혹의 세계로서의 현실을, 그리고 제5. 제6. 제7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와 이에 이르는 길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그 후 거의 모든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가 답습하게 되었다. 운문으로 학설을 기술하고, 산문으로 이를 부연, 설명하는 형식도 아비달마논서로는 이 책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이후의 거의 모든 아비달마논서들이 이를 답습하고 있다. 역시 한역만이 현존하는 ⑾ 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經)과 ⑿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은 ⑽을 다소 개량, 증보 ⑿에서는 상당히 증보하고 있다)한 것이지만, ⑽의 연장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의 ⒀ 아비달마코샤(Abhidharmako a 즉 구사론은 이의 연장, 발전이지만, ⑽⑾의 보유와 부록 부분 즉 마지막의 3장 ⑿에서는 1장 더 많아 4장)의 내용을 정리하여 앞의 7장 중의 적당한 곳에 삽입하고, 앞의 7장에 새로이 한 장(제3장)을 추가하여 미혹의 세계 현실을 밝히는 부분을 3장으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사론은 도합 8장의 정연한 조직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 마지막에 새롭게 '파아의 장'을 부가하여 특히 무아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⑴⑵에서 비롯되어, ⑺에서 학설의 대개의 전모가 밝혀지고, ⑽에서 그 조직적 논술의 틀이 정해진 설일체유부 아비달마는 이 ⒀에서 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
이 외에 尊婆須蜜菩薩所集論(僧伽跋澄에 의한 한역만이 현존)은 ⑺과 유사한 구성을 갖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양은 ⑺보다 훨씬 적으며, 설일체유부의 전통에서 점유하는 지위도 이와 비교되지 않는다). 阿毘曇甘露味論(역자는 불명이지만 3세기에 이루어진 한역만이 현존)도 소품이지만, ⑺의 형태에서 ⑽의 형태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에 있으며, 의미에 있어서는 주목할 만하다. 아비달마아바타라(Abhidharm vat ra, 현장에 의한 한역 入阿毘達磨論과 8세기에 이루어진 티베트역만이 현존)는 ⒀과 동시대 또는 조금 선행하는 시대의 품으로 생각되지만, ⑽ 이하의 논서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구성을 지닌 강요서적 입문서이다.
이제까지 설명한 내용을 개관하면 논서의 단계적 발전의 궤적을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이 발전과정에 아가마의 교설이 점차 체계적 사상으로 정리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개의 논서의 성립순서를 확인하고 그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를 조감하고 그 위에 논리적 발전단계를 확인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설일체유부의 논서는 대별하여 3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⑴⑵, 중기는 ⑶에서 ⑼(이를 다시 나누면 A⑶⑷⑸, B⑹, C⑺, D⑻⑼가 되면 존바수밀보살소집론은 C에, 아비담감로미론은 D 이후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후기는 ⑽ 이후가 그것이다. 이를 이 장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세 단계에 대응시키면, 초. 중기는 둘째 단계에, 후기는 셋째 단계에 상당한다. 특히 초기의 두 논은 아비달마논서로 독립되었다는 점에서는 둘째 단계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내용으로서는 첫째 단계로부터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위 첫째 단계의 연장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긴 과정을 거쳐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번쇄철학'이 구축되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이론이 도입되거나, 새로운 술어가 사용되거나, 정치한 분석이 이루어지거나, 거꾸로 이들이 정리되어 간단하게 되거나 하는 다양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설일체유부 논사들의 생각은 아가마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논술하고자 하는 아비달마의 본질로부터 전혀 일탈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설일체유부는 아비달마의 여러 학파 중에서 상당히 특이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특이하 성격 즉 '일체가 있다(一切有)'는 기본적인 생각은 앞에서 개관한 아비달마논서의 진전과정에 선행하여 이미 초기에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가장 초기의 논서 ⑴ 상기티 파리야야에도 이 특이한 사유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술어가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보통 설일체유부의 논서에서 '일체유'의 사상이 나타나는 것은 ⑷ 비즈냐나 카야가 최초라고 한다. 물론 명확한 형태로 이를 주장한 것은 ⑷에 이르러서이지만, 이러한 사유방법 자체는 이 학파가 분립되던 당초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긴 설일체유부의 역사는 전체로서 특이한 사상의 전개의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상의 조직화. 체계화의 역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제11장 세친의 전기
세친의 전기의 개요
세친의 전기의 자료로서 가장 신빙할 만한 것은 한문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바수반두법사전(婆藪槃豆法師傳) 1권이다. 서인도 출신으로 535년 양의 무제에 초빙되어 중국으로 와, 양의 말기로부터 진(陣)대(代)에 걸쳐 활동한 번역승으로 파라마르타(Param rtha, 眞諦, 499~569)가 있다. 그는 이 바수반두법사전의 저자로서 구사론의 한역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전에 의하면 반수반두는 샤키야무니 붓다의 서거로부터 900년이 되는 때에 간다라의 푸루샤푸라(현재이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바라문 카우쉬카의 2남으로 태어났다.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여 굽타 왕조의 수도 아요디야(현재이 라크노의 동쪽 120킬로미터, 고그라강변)에 머물었으며, '博學多聞' '神才俊朗' '戒行淸高'로 이름을 날렸다.
그이 스승 붓다미트라가 상키야학파의 철학자 빈드야바신과의 논쟁에서 패배하였을 때, 세친은 설욕을 위해 칠십진실론(七十眞實論)을 저술하여 상키야학설을 타파하였다. 후에 구사론의 싯구를 지어 설일체유부의 중심지인 카슈미르로 보냈는데 카슈미르의 아비달마 논사들은 기뻐하며 이를 수용하였지만, 세친이 산문의 주석을 작성하여 싯구를 해설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이것이 정통파의 학설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종종 정통서을 버리고 경량부의 설을 채용한 것을 알고 '우고(憂苦)'를 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세친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고, 굽타왕조의 바라디티야왕과 왕비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 즈음 바수라타가 구사론 중의 어구를 문법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하였던 일에 대해, 세친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하여 이에 반론하였다. 바수라타는 세친을 타파하기 위해 설일체유부의 학승 상가바드라(Sa ghabhadra, 衆賢)를 아요디야로 초빙하여 구사론에 반박하는 책2권을 짓게 하였으나, 세친은 이에 대해서는 대결을 피하였다.
세친의 장형으로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의 창도자인 아상가(Asa ga, 無著)는 푸루샤푸라로 동생을 불러 대승불교를 연마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로써 세친은 대승불교로 전향하였으며, 아상가의 사후 많은 대승논서를 짓고 여러 대승경전에 주석을 썼다. 이들은 모두 '文義精妙'하여 "견문하는 자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친은 아요디야에서 사망하였으며, 그 때의 나이 80세이었다고 한다.
이상이 바수반두법사전이 말하고 있는 세친의 전기의 개요이다. 그런데 당대(唐代)의 대번역승인 현장은 17년에 걸쳐 인도을 여행하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가운데에도 세친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법사전의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세친의 스승은 마노라타로서 다른 학파의 인물과의 논쟁에서 져, 부끄러움에 자살하였다고 한다. 구사론을 지은 것은 푸루샤루라에서이며, 아상가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한 것은 아요디야에서라고 한다. 또한 세친은 아상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중국에서 작성된 구사론이 주석이 전하는 바로는, 세친은 이름을 숨기고 카슈미르로 들어가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공부하였지만, 상가바드라의 스승 새건지라(Skandhira ? sgandhara ?)에게 발각되어 간다라로 되돌아왔으며, 그 후에 구사론의 싯구를 지어 이를 카슈미르로 보냈다고 한다. 티베트의 전승에서는 세친이 카슈미르로 들어가 수학한 스승은 상가바드라로서, 후에 구사론의 싯구를 보냈던 것도 상가바드라에게 였다고 한다. 티베트의 전승에서는 또한 세친 형제의 고향을 푸루샤푸라라고 하지 않고, 중앙인도의 마가다지방(현재이 비하르 주)이라고 한다.
세친의 업적
세친은 용수와 함께 인도불교사상사에 있어 두 개의 밝은 별이다. 그의 업적은 매우 넓은 범위에 이르고 있으나, 대략 5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① 아비달마 논사로서의 활동, ② 유가유식설의 체계적 수립, ③ 여래장사상의 해명, ④ 대승불전에 대한 주석, ⑤ 논리연구가 그것이다.
①에 대해서는 구사론 외에 카르마싯디(Karmasiddhi)가 있다. ②는 세친이 사상가로서 가장 능력을 발휘한 분야이다. ③의 여래장사상은 진실 또는 진실의 체현자로서의 불타가 현실세계에 출현. 활동하는 도리를 고찰하는 것으로, 승만경(勝 經). 열반경(涅槃經) 등의 대승경전에 나타나있는 사상이다. 세친은 이를 佛性論(한역만이 현존)이라는 논서로 정리하고 있다(불성론이 세친의 저작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④에 대해서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법화경(法華經). 十地經(화엄의 일부).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에 대한 평론이 있으며, 여기에 대승의 보살도. 육바라밀. 십지 등이 해석과 일승사상. 법신사상. 정토사상 등의 대승불교의 중요한 사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⑤에 대해서도 일군의 저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여실론(如實論)만이 한역으로 현존한다.
세친의 연대 - 신고(新古)의 두 세친설
세친의 생존년대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많은 학자들의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수반두법사전은 세친을 불멸 후 900년대의 인물이라고 하고 있지만, 다른 전기에서는 불멸 후 1000년 또는 1100년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 전설이 샤키야무니 붓다의 서거를 어느 때로 잡고 있는가도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여러 전설을 비교, 검토하여 세친의 연대를 확정하고자 하는 일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선택된 자료, 사용된 방법이 다른 것과 같이 도달된 결론도 구구하다. 그러나 이를 대별하면 세친의 연대를 4세기에 두는 것과 5세기로 간주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근래의 연구에서는 5세기로 간주하는 견해가 통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1951년 오스트리아의 프라우발너(E. Fraauwallner)는 종래의 여러 학자들의 설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도불교의 역사에서 세친이 이름으로 불리는 논사가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아상가의 동생으로 유가유식학의 거장으로서 320~380년 경에 생존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구사론의 저자로서 400~480년 경에 재세하였다는 것이다. 옛 세친의 존재는 옛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다만 구사론의 저자 세친보다 선행하는 시대의 설일체유부의 한 논사라고만 생각되어 왔다. 이를 무착의 동생인 세친으로 간주하여, 구사론의 저자인 세친과 대승유식의 사상가인 세친을 동명이인으로 생각하였던 것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프라우발너가 사용한 자료는 많은 학자들이 이제까지 사용하여 왔던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종래 제시되어 왔던 서로 모순된 주장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보다 유력한 자료를 제시하기보다는, 유식의 세친과 아비달마의 세친이라는 두 논사의 존재를 상정하는 대담한 가설을 세웟다. 그리고 이에 의해 종래 논의되어 왔던 많은 자료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해석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학자들의 논의에 보이던 모순과 무리를 이로써 해소시켰다는 점도 인정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① 아비달마로부터 대승의 철학.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상활동을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세친에 귀일시키는 것은 일견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점, ② 종래 세친을 4세기의 인물로 간주하는 설과 5세기의 인물로 간주하는 설이 대립되어 해결되지 않았다는 두 가지 난점이 이러한 신고의 두 세친을 상정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활실히 푸라우발너설의 매력이다.
그러나 한편 대담한 가설이 선행하고 자료에 대한 해석이 이에 종속되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으며, 상세한 점에 이르면 그러한 논의에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①만 하여도 티베트역만이 현존하며, 세친의 작품으로 귀속되는 바키야유크티(V ky yukti)등의 내용을 고려하거나, 구사론. 카르마 싯디. 유식의 여러 논서라는 경로에 나타난 사상의 논리적 진전을 고려한다면, 한 사람의 세친에서 그러한 사상의 폭넓은 전개를 발견코자 하는 것이 결코 부당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프라우발너의 설을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됨이 있다.
제12장 구사론 이후
구사론 이후의 세 논서
구사론 이후에 출현한 설일체유부의 논서로서 현존하는 것에 셋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구사론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다. 현장의 한역만이 현존하는 상가바드라의 아비달마순정이론(阿毘達磨順正理論). 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과 산스크리트 원문으로 남아있는 아비달마 디파(Abhidharmad pa, '아비달의 등불'의 의미)가 그것으로, 이들은 모두 구사론의 체제에 따르면서도 종종 구사론을 비판하고 설일체유부 정통파의 학설을 주장한다.
인도 고대의 철학서는 그 학설의 요체를 싯구의 형태로 기술하고, 이에 산문의 주석을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설일체유부의 논서도 아비담심론 이후에는 대개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앞에서 거론한 상가바드라의 두 논서는 싯구의 부분에서는 구사론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이에 대한 주석의 부분에서는 구사론에 나타난 세친의 학설을 비판하여 정통파 설일체유부의 설을 주장한다. 순정리론은 구사론의 두 배 이상, 현종론도 구사론을 능가하는 분량이다. 전자에서는 특히 세친의 학설에 대한 상세한 비판과 예리한 반박이 보이며, 후자에서는 세친설에 대한 비판보다는 정통설의 선양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작자 불명의 아비달마 디파도 정통파의 입장에서 구사론 중의 세친설을 비판한다. 아비달마 디파는 본래 싯구의 부분에만 붙여진 이름으로 이에 대한 산문이 주석은 비바샤프라바(Vibh prabha)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었지만, 싯구도 산문의 주석도 동일한 작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를 합쳐 아비달마 디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논서는 현재 반 이상이 전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부분만으로도 거의 구사론에 필적한 분
량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완본이 존재한다면 순정리론에 가까울 정도의 방대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질적으로는 극히 뛰어난 것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거의 구사론의 서술형식을 따르면서도 정연함에 있어서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며, 순정리론과 같이 구사론의 설을 비판하면서도 순정리론의 예리함과 넓이에 비해서는 훨씬 열등하다. 그 성립년대도 상가바드라의 두 논서가 구사론과 동시대(전설적으로 그렇다고 한다.)이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현격하게 뒤떨어지지는 않음에 대하여 아비달마 디파는 상당히 후대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구사학의 형성
설일체유부의 논서와 이 장에서 언급한 세 논서 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전통설이 예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구사론은 설일체유부의 교의학서로서 나아가서는 불교교의의 기초학의 교과서로서 그후의 장구한 불교의 역사를 통해(적어도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 걸쳐 전개된 북방불교의 역사를 통해)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우선 인도불교의 제학파에서 이 논서가 어떻게 학습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석서와 강요서 등이 여러 차례 작성되었던 점에서도,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비판, 반박의 책이 쓰여졌다는 점에서도 광범위한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도에서 작성된 구사론의 주석서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①스티라마티(Sthiramati)의 타트바 아르타(Tattv rtha), ② 야쇼미트라(Ya omitra)의 스푸타 아르타(Sphu rtha), ③ 푸르나바르다나(P rnavardana)의 라크샤나 아누사린(Lak a nusarin)의 셋이다. ① 은 티베트역으로서는 전부가, 한역(俱舍論實義疏)으로서는 일부분이 존재한다. 세 주석 중 가장 방대한 것이다. ②는 산스크리트 원문과 티베트역이 현존하며, ③은 티베트역으로만 존재한다. 이 셋은 모두 구사론의 배가 넘는 분량의 상세한 주석이다. 이 외에 ④ 디그나가(Dign ga)의 카르마 프라디파(Karmaprad pa)가 있다. 이는 구사론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제거하고, 중점적인 부분만을 부연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후의 문장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듯한 곳의 원문을 개조하거나 짧은 문장을 삽입하여 이를 보충하고 있다. 그리하여 원래의 구사론을 약 3분의 1정도의 분량으로 압축시키고 있다. 또한 이는 티베트역으로만 현존한다. ⑤ 샤마타데바( amatadeva)는 우파이카(Upaika)라는 특수한 주석을 지었다. 이는 구사론에 인용된 아가마경전의 어구를 하나하나 적출하고 이 어구를 포함한 원래의 경전의 한 절 전부, 또는 그 경 전부의 문장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도 티베트역으로만 현존한다. 이들 여러 주석들의 개개의 성립년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개 5~7세기 사이일 것으로 생각된다.
구사론 및 그 주석 타트바 아르타의 위구르어역이 현존하는 점에서, 이 논서가 중앙아시아의 불교교단에서도 중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티베트에서 몽고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14, 15세기 이후 구사론의 학습이 라마교 학문사원의 학습과정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왔으며, 소위 다섯 근본논서의 하나로 존중되었다. 티베트에서 쓰여진 구사론의 주석서도 적지 않으며, 그 중에서 쨘쟈무얀의 주석이 가장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眞諦의 구사론 번역(563년) 이전에도 설일체유부논서 몇 가지가 번역, 연구되었으나, 구사론이 번역된 이후 아비달마 연구는 구사론의 연구 즉 구사학(俱舍學)이었다. 특히 현장의 신역(651년)이 나오고부터는 그의 문하인들에 의한 신역 구사론에 대한 연구가 적극적으로 행해져 많은 주석서, 강요서, 해설서가 작성되었다. 주석서 가운데 유명한 것이 신태(神泰)의 俱舍論疏(태소라고 한다.), 보광의 俱舍論記(광기라고 한다), 법보의 俱舍論疏(보소라고 한다)가 있다. 이들은 모두 현장이 직접적인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태소는 일찍 산일되어 4분의 1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으므로, 후에 구사론 학습의 근간이 되었던 것은 광기와 보소이다. 그리고 현장의 신역이 나온 지 50년 후에는 원휘의 구사론송소가 작성되었다. 이는 신역 구사론의 싯구 부분에 알기 쉬운 설명을 붙인 것으로, 구사론 연구의 입문서로 널리 칭송되며 순린(盾麟) 등은 다시 이에 주석을 붙이기도 하였다.
근대적 연구의 전개
긴 전통을 가진 구사론 연구는 구사학으로 불리며, 유식연구와 합쳐서 성상학(性相學)이라고도 한다. 이는 오랫동안 불교교리의 기초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여 왔다. 그런데 이는 전혀 한역 구사론 특히 현장에 의한 신역, 그리고 한문으로 쓰여진 이의 주석을 연구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근대적인 동양학. 인도학이 발전에 수반되어 산스크리트 원문과 티베트역의 자료를 사용하고, 방법론적으로는 단지 설일체유부의 교의 또는 구사론의 학설을 이해,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불교사상전개의 역사 위에서 비판적으로 보고자 하는 새로운 연구가 100여년 전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근대적인 구사론 연구의 기점은 1844년 프랑스의 천재적인 도양학자 부르누프(E.Bureunuf)가 파리 아시아협회에 소장되어 있던 야쇼미트라의 구사론에 대한 주석 스푸타 아르타의 산스크리트 사본(1820년대에 허디슨이 네팔에서 수집한 것)을 중요한 자료의 하나로 삼아 인도불교사서론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수푸타 아르타를 불교의 사변적 부문에 관한 지식에 다함이 없는 광맥"이라고 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앙아시아를 탐사하였던 영국의 스타인(A. Stein)은 동파키스탄에서 많은 위구르어 문서를 발견하였다. 이 중에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구사론의 위구르어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로스 등이 이를 연구하였다. 1917년에는 티베트어역 구사론 제1장이 소련의 스체르바츠키에 의해 간행되고, 그 다음 해에는 스푸타 아르타의 산스크리트 본문 제1장이 스체르바츠키와 프랑스의 레비에 의해 간행되었다. 1914년에서 18년간에 걸쳐 벨기에의 드라 발레 뿌셍은 구사론 제3장을 티베트어역에서 불역을 하고, 스푸타 아르타 제3장이 산스크리트 본문을 교정. 출판하였다. 1920년에는 스체르바츠키가 구사론 제9장을 티베트어역으로부터 영역하였다.
드라 발레 뿌셍이 대표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구사론 전체의 불역은 1923년 제1권 구사론의 제1장, 제2장이 출판되기 시작하여 1926년에 출판된 제5권까지 9장 전체가 번역되었다. 그리고 1931년 서론, 싯구의 산스크리트 본문 단편, 색인 등을 수록한 제6권이 간행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실로 근대의 불교연구사에 있어 하나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대업이었다.1927년 드라발레 뿌셍은 불교도덕을 저술하여 설일체유부의 업이 사상을 해설하였다. 1930년에 이르러 스체르바츠키는 독일어역 구사론의 간행을 계속하여 제2장의 반까지 출판하고, 드라 발레 뿌셍은 불교의 교의 및 철학을 저술하여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설명하였다. 1935년 인도의 라훌라 상크리티야야나는 티베트에 들어가 많은 귀중한 산스크리트 사본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는 구사론의 싯구 부분만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와 구사론 자체의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음이 보고되었었다. 1936년 벨기에의 라모뜨(E.Lamotte)는 구사론 제4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세친이 카르마 싯디(Karmasiddhi)를 티베트역으로부터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1946년 인도의 고칼레(V.V. Gokhale)는 라훌라 상크리티야야나이 수집품 가운데 앞에서 언급한 사본을 이용하여 구사론 싯구의 산스크리트 본문을 교정. 출판하였다. 1957년 오스트리아의 귄터는 아비달마의 철학과 심리학을 저술하여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 대승유식파 논서의 학설을 비교하면서, 아비달마적 사고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였다. 1955년에는 종래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던 아비달마 디파의 산스크리트 본문이 인도의 쟈이니에 의해 교정. 출판되었다. 이것도 라훌라 상크리티야야나가 수집한 것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라훌라 상크리티야야나의 수집품에 포함되어 있는 구사론 전체의 산스크리트 텍스트도 인도의 프라단(P.Pradhan)에 의해 이미 교정이 끝나, 멀지않아 간행될 것이다.
Ⅳ. 衆賢(Sa ghabhadra)의 {俱舍論本頌}의
개작과 삭제에 대하여
權 五 民*
I. 들어가는 말
義淨의 {南海寄歸內法傳}에서 무착·세친과 함께 '淸哲의 徒'로 불리고 있는 衆賢은 世親의 {俱舍論}을 비판한 {阿毘達磨順正理論}(이하 {순정리론}) 80권과 說一切有部 毘婆沙의 종의를 밝힌 {阿毘達磨藏顯宗論}(이하 {현종론}) 40권을 저술한 위대한 논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조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양대 저술이 {구사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의 명성에 그 가치가 가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불교사상사에서 {구사론}이 차지하는 위치나 비중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만, 중현의 양대 저술 역시 {구사론}에서 논리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나 言外의 의도까지 상세히 밝혀 {구사론}에서의 이설을 비판하고 유부 비바사의 종의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세친의 입장과 궤를 같이하면서 다만 一言一句의 자의해석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다른 어떠한 주석서보다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開元釋敎論}에 따르면 玄 은 {현종론}을 唐 영휘2년(651년) 4월 5일에서 3년 10월 20일에 걸쳐 번역하고, {순정리론}은 동 4년 1월 1일에서 5년 7월 10일에 걸쳐, 그리고 {구사론}은 동 2년 5월 10일에서부터 5년 7월 27일에 걸쳐 번역하였다. 말하자면 현장은 3년 2개월에 걸쳐 {구사론}을 번역하면서 전반 1년 수개월은 {현종론}을, 후반 1년 수개월은 {순정리론}을 번역하였던 것으로, {구사론}상의 역어와 역문이 중현의 양대저술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세 논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유부 아비달마 연구의 공시적인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우기 {순정리론}이 {구사론}의 일언일구에 대한 비판서라면, {현종론}은 적극적으로 유부 비바사의 종의를 드러내기 위해 작성된 논서로서, 여기서 {구사론본송}에 대한 부분적인, 혹은 완전한 새로운 개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혹은 그것이 유부의 異說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삭제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정통 유부학설을 밝히는데 필수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유부교학의 금과옥조로 일컬어지는 {구사론본송}과, {현종론}에서 개작되고 삭제된 그것의 내용을 비교분석하여 흔히 新 薩婆他로 일컬어지는 중현의 {구사론}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현종론}에서 {구사론}의 이설을 평파하고 케시미르 유부종의를 드러내고 있는 곳이 本頌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중현이 {구사론본송}의 개작과 삭제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였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아비달마교학을 탐구함에 있어 대개 {구사론}에 의거하여 왔으며, 또한 논의의 쟁점보다는 내용의 나열과 그 이해에 관심을 기울려 왔다. 아비달마의 생명은 말 그대로 논의의 엄격함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그들에게 있어 논쟁점은 무엇이었던가? 필자는 평소 어떤 한 교설을 당위로서 받아드리기보다는 타자와의 對論을 통한 이론적 근거와 난점을 명백히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럴 때 세친의 {구사론본송}의 제작이나 중현의 개작에는 어떠한 이론적 근거와 난점을 지니는 것인가? 필자는 {구사론본송}과 {현종론} 40권을 국역한 바 있는데({한글대장경} 273과 200·201), 일본의 {國譯一切經}(비담부23·24)의 많은 부분에서는 어찌된 영문에서인지 원문에서 개작된 {구사론본송}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나 우리들 모두 중현에 대해 무관심하였던 증거로 볼 수 있다. 후술하듯이 중현은 毘婆沙의 정법을 수호하고 이단을 파척하고자 목숨마저 버렸다. 그가 파척한 이단설은 무엇이고, 그가 내세운 정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현종론}의 문헌적 사상적 의의는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불교학에서 잊혀져 왔던 衆賢의 역할과 위치, 나아가 아비달마철학의 제문제에 대해 다시금 주목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II. {顯宗論}의 제작인연
1. 중현과 그의 저술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현의 양대저술은 세친의 {구사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현종론}의 성립인연이나 시기, 나아가 작자 중현의 연대는 모두 그것과 관련하여 추정될 뿐이다. 특히 {현종론}의 경우 {순정리론}과는 달리 어떠한 전승에서도 그 명칭을 남기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구사론}과 그에 따른 {순정리론}의 제작인연을 통해 {현종론}의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오늘 날 중현과 그의 저술의 성립사정을 전하는 자료는 眞諦 역의 {婆藪槃豆法師傳}과 玄 의 {大唐西域記}, 그리고 티벳 전승인 푸톤의 {불교사} 세가지이다. 먼저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4에 따르면, 이미 알려진대로 케시미르에 잠입하여 有部 毘婆沙를 배운 세친이 經部의 교의에 따라 그것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대비바사론}의 대의를 600여 송으로 간추리고 이에 長行의 주석을 붙힌 {아비달마구사론}을 저술하자, 이에 격분한 중현은 12년간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2만 5천송, 80만言으로 이루어진 {俱舍雹論}을 지었다. 그리고 그와 직접 만나 대론하고자 하였으나 세친의 거부(그를 피해 중인도로 유행함)로 성사되지 못하고, 기력이 쇄진한 중현은 자신의 저술을 세친께 부촉하고 목숨을 마치고 말았다. 이에 세친은 "중현은 총민한 후배(普光의 {俱舍論記}에 따르면 양인은 塞建地羅Skandhira, 즉 悟入의 제자임)로서 비록 이치에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말에는 부족함이 없다. 지금 내가 중현의 논을 파하려고 하기만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만, 임종 때의 부탁도 있고 또한 어려운 문제를 잘 관찰 이해하여 비바사의 대의가 전달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뜻을 들어주도록 하리라. 하물며 이 논에서는 우리의 종의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데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논의 제목을 고쳐 {阿毘達磨順正理論}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제의 {바수반두법사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전혀 새로운 구성과 인물 및 서명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에 따르면 케시미르에 잠입하여 비바사를 배운 이는 佛滅 500년 무렵 아유타국의 婆沙須拔陀羅(Va asubhadra)이고, 그 후 불멸 900년 중에 婆藪槃豆(Vasubandhu)법사가 數論의 외도 頻 訶婆娑(Vindhyakav sa)를 논파하고 비바사의 교의를 선양하기 위해 {七十眞實論}과 함께 {구사론본송} 및 그 주석서인 {구사론}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유부의 교의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치우침이 있는 것은 경부의 교의로써 논파하고 있어 케시미르의 비바사사들은 그들의 종의가 파괴된 것에 우려하였다. 그런데 당시 아유타국에는 馝柯羅摩阿 多(Vikramaditya)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불교를 외호하던 태자 婆羅 底也(B l ditya)와 왕비가 법사를 청하여 공양하였다. 그 때 바라문이던 태자의 매부 婆修羅多(Vasur ta)는 毘伽羅論(Vy kar a,문법학)의 교의로써 {구사론}의 문구를 비판하다가 도리어 논파당하였다. 이에 수치를 느낀 그는 천축의 僧伽 陀羅, 즉 중현법사에게 {구사론}을 논파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중현법사는 일만송으로 이루어진 {光三摩耶論}을 지어 {대비바사론}의 교의를 서술하였고, 십이만송으로 이루어진 {隨實論}을 지어 비바사의 교의를 옹호하면서 {구사론}을 논파하였다. 그리고 이 두 논이 완성되자 天親, 즉 세친과 직접 대론하고자 하였으나 세친은 늙음을 탓하여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티벳의 {불교사}에 따르면 중현은 세친의 스승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세친은 나란다에 출가하여 성문의 삼장을 완전히 학습하고, 나아가 아비달마와 18부파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 케시미르로 가서 중현논사 아래서 학습하였다. 그 후 인도로 돌아온 세친은 {구사론본송}을 저술하여 스승이었던 중현에게 보냈다. 중현의 제자들은 그 중에 '傳說'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우리종의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현은 "세친은 논을 짓는데 뛰어난 자이다. 頌文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그들을 달래면서, 경에 근거하여 이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그 후 세친이 다시 자신의 주석서 즉 {구사론}을 써 중현에게 보내자 그는 "이것은 경에도 논에도 반하는 것으로, 누군가 이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스스로 반론서를 저술하여 세친과 대론하고자 하였으나 세친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그를 피해 네팔로 떠남), 나란다에 도착한 그는 목숨을 다하고 말았다.
이상의 세 전승은 각기 다른 자료들을 근거로 한 것으로 생각될 만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현장과 티벳의 전승은 모두 세친 자신이 케시미르에 잠입하였다고 전하고 있지만, 진제의 전승에서는 세친이 아니라 그보다 400년 전의 바사수발다라이다. 또한 진제의 전승에서는 세친이 중현의 선배란 사실만 전할 뿐 두사람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지만 현장의 전승에서 둘은 오입존자의 제자로서 사형사제의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티벳의 전승에 따를 경우 중현은 세친의 스승이다. 그리고 중현의 저술과 관계하여 진제의 전승에서는 세친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외도사의 부탁으로 중현이 아유타에서 {광삼마야론}과 {수실론}을 지었다고 한데 반해, 현장과 티벳의 전승에서는 중현이 {구사론}을 보고 분개하여 케시미르에서 반론서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다만 현장의 경우에는 {구사박론} 즉 {순정리론} 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지만 티벳전승에서는 먼저 {구사론본송}에 대한 주석서를 쓰고 나중에 세친의 {구사론}의 장행석을 보고 분개하여 반론서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세 전승은 '세친이 경량부의 뜻으로, 혹은 전설이라는 말로 케시미르 비바사를 불신하고 비판적 입장에서 {구사론}을 짓자 중현이 이에 대한 반론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전설(kila)'이라는 말은 대개 경량부의 입장에서 케시미르 비바사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말로서, {구사론본송}에서는 전후 8차례에 걸쳐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구사론}은 번쇄 잡다한 케시미르 비바사의 대표적인 요강서이기는 하지만, 경량부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구사논주 세친은 法寶의 말대로 '理長爲宗'의 정신에서 어느 부파, 어느 종의에도 얽메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비판적 입장에서 {구사론}을 조술하였는데, 그것을 지배한 정신이 바로 경량부적 사유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鳳潭의 經部爲宗說이나 圓暉의 顯密兩宗說(표면적으로는 케시미르 유부의 이론을 표방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경량부이론으로서 유부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에 세친은 은밀히 경량부를 종의로 삼는다)로써 {구사론}을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경량부적 사유에서 유부 비바사의 교학을 평석하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진제삼장의 제자인 慧愷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사(세친)의 德業은 別傳({바수반두법사전})에 실려있는 것처럼 먼저 薩婆多部에 출가하여 그 부파에서 확립된 삼장을 배웠으며, 그 후 그들의 법에 다수의 어긋난 점이 있음을 보고 이 논(구사론)을 지어 그들의 주장을 모두 서술한 후 잘못된 부분마다 經部로써 그것을 논파하였다. 그래서 이 논의 本宗은 바로 살바다부이지만 그 중의 취사선택은 경부로서 正量으로 삼은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정하에서 케시미르 有部의 宗匠이었던 중현은 {구사론}에 대한 비판서인 {구사박론} 혹은 {순정리론}(진제전승에서의 {수실론}?)을 저술하게 되었던 것이며, 실제로 {순정리론}에서는 {구사론}의 작자 세친을 經主라 일컬으면서 이같은 '전설'이라는 말을 포함하여 장행의 일언일구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면서 케시미르의 유부종의를 변호하고 있다.
2. {順正理論}과 {顯宗論}의 관계
그렇다면 중현의 또 다른 저술인 {현종론}은 무엇인가? 진제의 전승에서 비바사의 교의를 서술하였다고 한 {광삼마야론}이나 티벳전승에서의 {구사론본송}의 주석서가 바로 {현종론}인가? 그러나 내용상 {현종론}은 {순정리론}에서의 顯正의 부분만을 간추린 요강서로서, 그 뒤에 저술된 것이다. 즉 {현종론} 곳곳에서 '이에 대해서는 {순정리론}에서 논의한 바와 같다'고 설하고 있으며, 「序品」귀경게에서도, "이미 '순정리'라고 이름하는 논을 설한 바 있어, 思擇을 즐기는 자라면 마땅히 배워야 하겠지만, 문구가 번잡하고 끊겨있어 찾아보기 어려우며, 적은 노력으로 능히 이해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廣文의 요점을 간추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보다 간략한 논을 지어 '현종'이라 이름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순정리론}이 {구사론}의 일언 일구에 대해 破邪를 위주로 하는 廣博한 논서인데 반해 {현종론}은 적극적으로 케시미르 有部宗의 正義를 간추려 顯正을 목적으로 한 略論으로, 「서품」이 덧붙혀진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순정리론}과 논의의 체계가 동일하다.
그러나 {현종론}은 {순정리론}을 단순히 요약한 것 만은 아니며, 그곳에서 잘못 기술된 것에 대해서는 시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순정리론}권33에서는 '의업은 표업이 아니기 때문에 무표업도 역시 아니다'는 사실을 분별하면서, '무표업은 대종을 소의로하여 일어나 그 후 生因의 대종이 소멸하더라도 동류의 대종이 소의가 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상속 생기하지만, 의업은 마음에 의해 일어나며, 후시에 동류의 마음이 상속하더라도 의업의 무표는 그러한 마음에 依止하여 다찰나에 상속하지 않는다. 즉 마음은 선 등으로 찰나찰나에 다르게 변이하기 때문에, 설사 무표의 사업이 동류로 상속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전찰나의 마음에 의지한 의업이 후찰나의 異類의 마음에 따라 전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종론}에서는 이에 대해 마음은 상속의 能依일 뿐 소의가 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예증에는 무리가 있다고 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순정리론}에서는 {구사론}의 본송을 그대로 전재하면서 다만 장행에서 비판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현종론}에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유부의 정의에 부합하게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改作하기도 하며, 혹은 그것이 유부의 이설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삭제하기도 하였다. '송'(k rik )이란 어떤 한 주제의 논설에 대한 개요의 성격을 지닌 詩句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장행의 논문 앞에 게재되어 그 논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규정한다. 따라서 구사본송의 삭제나 개작은 장행에 대한 비판과는 달리 논의의 틀 자체를 달리함을 의미한다. 곧 {현종론}은 전체적으로 보면 {순정리론}상의 破邪의 부분이 삭제된 개요서이지만 내용적으로 정통 유부 비사사에 입각한 {구사론본송}의 주석서로서, 어쨌든 볼륨에 있어서나 그 성립에 있어 {순정리론}과 전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진제전승의 {광삼마야론}이나 티벳전승의 {구사론본송}의 주석서가 이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Ⅲ. {俱舍論本頌}의 개작과 삭제
{구사론}의 6백여 송 가운데 내용의 일부를 개작한 것은 23송이며, 완전히 개작한 것은 8송, 삭제한 것은 5송인데, 그것의 대체적인 주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K는 {구사론}의 본송, P는 {현종론}의 본송으로, {大正藏} 권29에 따른 것임)
1. 부분적 개작
(1) 아비달마는 佛說로서, 궁극적으로 佛陀眞智의 이해 간택력인 無漏淨慧를 본질로 한다. 즉 아비달마는 衆經의 차별을 決擇하고 경의 了義와 불요의를 판별하는 표준적 근거(經量)이자 일체의 聖敎 가운데 오로지 正理의 말씀만을 總攝한 것이기 때문에 慧를 본질로 삼는 요의경이다.
K. 번뇌에 의해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니, 이로 인해 부처는 대법을 설하였다고 전한다.
由惑世間漂有海 由此傳佛說對法:「계품」제3송(권1, p.1중)
P. 번뇌에 의해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니, 그래서 적대사는 대법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由惑世間漂有海 爲寂大師說對法(권1, p.779중)
(2) 聲境은 2종으로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리의 자성은 알기 어려울 뿐더러 有情數(혹은 有情名, 언어적 소리)와 비유정수의 소리도 결국 유집수대종과 무집수대종을 근거로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K. 소리는 오로지 8가지를 본질로 한다.
聲唯有八種:「계품」제10송(권1, p.2중)
P. 소리는 오로지 두가지를 본질로 한다.
聲唯有二種(권2, p.781중)
중현에 의하면 소리에는 有執受와 無執受大種에 근거한 有情名과 비유정명의 可意聲과 불가의성 뿐만 아니라 유집수대종에는 다시 유정류의 가행에 의한 소리와 가행없이 나는 소리가 있고, 전자에는 다시 어표업을 자성으로 하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유의미의 말을 근거로 하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선악분별이 가능한 有記의 소리와 그렇지 않은 무기의 소리가 있으며, 무집수대종을 근거로 하는 소리에는 유정의 가행에 의한 소리와 諸界의 요동에 의한 자연의 소리가 있기 때문에, 그 모두를 분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3) 전5근과 5경은 바로 12처 중의 10처, 18계 중의 10계이다.
K. [11종의 색] 중에서 근와 경을 바로 10처와 10계라고 인정하고 있다.
此中根與境 許卽十處界:「계품」제14송(권1,p.3하)
P. [11종의 색] 중에서 근와 경을 바로 10처와 10계라고 설한다.
此中根與境 卽說十處界(권2,p.783상)
여기서 '인정한다'(許,i a)는 말은 '傳說'처럼 유부 비바사사설에 대한 불신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유부에서는 온.처.계 三門의 실유를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이 가운데 온과 처의 假有를 주장하며, 따라서 가유인 處의 그것으로 界의 體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한다'고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유부에서는 假의 극미가 적취하여 하나의 實의 극미가 될 때 비로서 극미로서 자상을 갖기 때문에, 積聚(rasi)의 뜻인 온(一實極微名爲蘊) 역시 실유라고 주장하였으나, 논주 세친은 온은 어디까지나 적취물이기 때문에 가유일 뿐이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경량부에서는 안 등의 극미는 다수가 모여야 비로서 의식을 낳는 문(生長門, ya-dv ra)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온이 가유라면 眼 등의 有色處도 역시 가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적취가 바로 뜻(聚卽義)이 아니라 그것의 소의인 온이 적취의 뜻(聚之義)이기 때문에 적취자체는 실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소의인 온은 실유이다.
(4) 三科분별의 근거는 교화될 유정의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즉 3과를 분별한 불타의 의도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이치에 근거하여 推尋해 보아야 하며, 그럴 경우 이 밖에도 제자들의 학습단계나 허물, 병의 차별에 따라 3과를 분별해 볼 수 있다.
K.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의 세가지로 인해 온·처·계의 세가지를 설하게 된 것이다.
愚根樂三故 說蘊處界三:「계품」제20송(권1,p.5중)
P. 어리석음과 근기 등의 세가지로 인해 온·처·계의 세가지를 설하게 된 것이다.
愚根等三故 說蘊處界三(권2,p.784하)
(5) 온 중에 무위를 설하지 않는 것은 오온 각각과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K. 온은 무위를 포섭하지 않는다.
蘊不攝無爲:「계품」제22송(권1,p.5중)
P. 온에는 무위를 설하지 않는다.
蘊不說無爲(권2,p.785상)
(6) 空界의 본질은 명암이다. 즉 上座 스리라타( r l ta)나 譬喩師들은 '(허)공계는 허공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같은 허공자체는 실유가 아니기 때문에 허공계 역시 실유가 아니다'고 주장한데 대해 공계란 문틈이나 콧구멍과 같은 한정된 공간(竅隙)으로, 유부법상에 의하는 한 명암은 12현색 중의 하나로 실유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질로 하는 공계 역시 실유의 법으로서 색법에 포섭된다.
K. 공계는 말하자면 규극으로, 전설에 따르면 이는 바로 명암이다.
空界謂窺隙 傳說是明暗:「계품」제28송(권1,p.6하)
P. 공계는 말하자면 규극으로, 그 본질은 바로 빛과 어두움이다.
空界謂窺隙 體卽是光暗(권3,p.787상)
(7) 22根 중 眼 등 5근의 증상력은 莊嚴身·導養身·生識等·不共事의 4가지이다. 즉 몸을 이끌고 기르는 것은 식이 아니라 눈이다. 또한 여·남근은 유정을 남.여로 차별짓는 작용과 거동.말씨 등의 형태를 차별짓는 작용을 갖고 있으며, 命根은 과거의 衆同分을 상속하고 현재의 중동분을 유지하는 작용이, 의근에는 後有를 상속하게 하고 또한 뜻하는 바대로 세간을 이끌고 섭수하는 작용이 있으며, 5수근의 경우 희수와 낙수는 貪수면에 의해, 우수와 고수는 瞋수면에 의해, 사수는 癡수면에 의해 隨增된 것이기 때문에 염오의 증상력이 있으며, 信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청정법에 따라 생장된 것이기 때문에 청정의 증상력이 있다.
K. 전설에 따르면 5근은 네가지에 대해, 4근은 두가지에 대해
5근과 8근은 염오와 청정중에 각기 별도의 증상력이 있다.
傳說五於四 四根於二種 五八染淨中 各別爲增上:「근품」제1송(권 3,p.13중)
P. 5근은 네가지에 대해 증상력이 있으며,--.
五根於四事--(권5,p.795상)
(8) 俱有因은 서로가 서로에게 결과가 되는(互爲果) 원인이라기 보다는 동일한 결과는 낳는(同一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며, 따라서 여기에는 四大種 등의 세가지 유형 뿐만 아니라 제 심수전법이나 제 能相 등도 포함된다.
K. 구유인은 서로에게 果가 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大와, 相과 所相과 심수전에 대한 心과 같은 것이다,
俱有互爲果 如大相所相 心於心隨轉:「근품」제50송(권6,p.30상)
P. 구유인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으로,
이를테면 大와, 相과 所相과 심수전에 대한 心 따위와 같은 것이다,
俱有一果法 如大相所相 心心隨轉等(권8,p.814상)
(9) 색계에는 17천이 아니라 16천이 있는 것으로, 초정려의 大梵天은 梵輔天의 일부이다. 즉 대범은 단일하여 同分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범보와 합하여 1천으로 삼은 것으로, 이는 바사의 정설이다.
K. 욕계위의 17처를 색계라고 이름하니, 거기에는 앞의 세정려에 각기 3처가 있고 제4정려에 8처가 있다.
此上十七處 名色界於中 三靜慮各三 第四靜慮八:「세간품」제1송(권8,p.40하)
P 욕계위의 16처를 색계라고 이름하니, 거기에는 초정려에 2처, 제2 제3정려에 3처가 있고 제4정려에 8처가 있다.
此上十六處 名色界於中 初二二三三 第四靜慮八(권12p.829상)
(10) 연기에는 刹那·遠續·連縛·分位의 4가지 설이 있지만, 유부에 의하면 12연기支는 오온을 본질로 하며 무간에 상속하는 것으로 각각의 상태(分位,avasth )에 따라 명칭이 설정되었다. 이를테면 무명이 가장 두드러진 오온의 상태를 '무명'이라 하고, 노사가 가장 두드러진 오온의 상태를 '노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K. 전설에 따르면 分位에 의거하여 설한 것으로, 수승한 것에 따라 각 지의 명칭을 설정하였다.
傳許約位說 從勝立支名:「세간품」제25송(권9,p.48하)
P. 불타께서는 分位에 의거하여 설한 것으로, 수승한 것에 따라 각 지의 명칭을 설정하였다.
佛依約位說 從勝立支名.(권14,p.842상)
(11) 4대주 중 西瞿陀尼洲와 北俱盧洲의 說相의 차이.
K. 서쪽의 구타나주의 경우 그 상은 둥글어 이그러짐이 없고,--
북구로주는 주사위와 같은 사각으로, 네 면은 각기 2천 유선나로 동일하다.
西瞿陀尼洲 其相圓無缺 北俱盧 方 面各二千等:「세간품」제55송(권11,p.57하)
P. 서쪽의 구타나주의 경우 그 상은 둥근 달과 같고,--
북쪽의 주는 네모난 자리와 같으며, 네 면은 각기 2천 유선나이다.
西瞿陀尼洲 其相如滿月 北洲如方座 四面各二千(권16,p.850중)
(12) 무표업을 引起하는 等起心에는 因等起와 刹那等起가 있는데, 인등기의 轉因도 되지 않고, 찰나등기의 隨轉因도 되지 않는 것은 수소성의 마음으로, 그것은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즉 세친은, 무루정은 오로지 정려 중에만 존재하는 내문전이기 때문에, 이숙생의 마음은 가행에 의하지 않고 임의로 일어나 그 성질이 저열하기 때문에 둘은 다같이 전인도 수전인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유루의 定心도 역시 양자 모두 아니기 때문에, 이숙생의 마음은 다만 전인이 되지 않을 뿐이기 때문에 그 두가지를 양자 모두 아니라고 할 경우 減過의 과실이 있게 된다. 즉 이숙생심이 양자 모두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婆沙의 정설이지만, 만약 '가행에 의하지 않고 임의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生得善 역시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중현은 俱非로서 유·무루의 정심을 모두 포괄하는 수소성의 식을 들고 있는 것이다.
K. 무루와 이숙의 마음은 두가지 모두 아니다.
無漏異熟非:「업품」제11송(권13,p.71하)
P. 두가지 모두 아닌 것은 수소성의 식이다.
俱非修所成(권19,p.864하)
(13) 정려율의를 획득한 자로서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은 이는 대개는 과거와 미래의 무표도 항상 성취하며, 정려와 무루도에 들 때는 현재의 그것의 무표(정려율의와 도생율의)를 성취한다.
K. 정려율의를 획득한 자는 항상 과거.미래의 것을 성취하며,--
定과 道에 머무는 자는 중간(즉 현재)의 것을 성취한다.
得靜慮律儀 恒成就過未- 住定道成中:「업품」제20송(권14,p73하)
P. 정려율의를 획득한 자는 대개는 과거.미래의 것을 항상 성취하며,--
定과 道에 들어가는 자는 중간(즉 현재)의 것을 성취한다.
得靜慮律儀 多恒成過未-- 入定道成中(권19,p866하)
이를테면 순결택분에 포섭되는 정려율의는 현재 최초찰나 중에 과거의 무표를 성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생에서 획득한 것은 목숨을 마칠 때 버리고 금생에 다시 그러한 법을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으로, 송에서 '대개'는 바로 그러한 법과 구별하여 이해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나아가 '머문다'를 '들어간다'로 고친 것은 무표를 성취하지 않는 出觀의 경우와 대칭시키기 위한 것으로 사료된다.
(14) 오로지 무표업만을 성취하고 표업을 성취하지 않는 이는 易生의 聖者(번뇌와 성도는 斷熟이 어렵기 때문에 몇번이고 생을 바꾸어 수행하는 성자) 뿐만 아니라 정려를 획득한 이생도 그러하다. 즉 표업을 아직 낳지 않았고, 이전에 생겨난 것을 이미 버린 역생성자는 욕.색계에 있을 때에는 정려와 도생율의만을 성취하고, 무색계에 있을 때에는 도생율의만을 성취하기 때문에 표업을 성취하지 않지만, 이치상 표업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이미 생겨난 것을 상실한 이생의 정려자 역시 무표만을 성취하고 표업은 성취하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송문에는 보다 외연이 큰 정려자로 규정해야 한다.
K. 표업을 버리고서 아직 낳지 않은 성자는 무표업을 성취하더라도 표업을 성취하지 않는다.
捨未生表聖 成無表非表:「업품」제25송(권14,p.74중)
P. 표업을 버리고서 아직 낳지 않은 정려자는 무표업을 성취하더라도 표업을 성취하지 않는다.
捨未生表定 成無表非表(권19,p.867중)
(15) 정생율의는 유루의 정려지에서 획득된다. 만약 定地 즉 선정의 단계(dhy na bh mi)에서 획득된다고 할 경우, 정지는 유·무루를 모두 포섭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무루정을 획득한 이는 도생율의 즉 도공계를 획득하기 때문에(彼聖得道生), 정생율의를 획득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유루의 4정려'라는 보다 구체적 술어로써 앞의 사실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K. 정생율의는 선정의 단계에서 획득된다.
定生得定地:「업품」제26송(권14,p.74중)
P. 정생율의는 정려에서 획득된다.
定生得靜慮(권19,p.867하)
(16) 계경의 4종 近事는 능히 지니는 學處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한 것이다. 즉 근사(upasaka)는 3귀의 및 5계를 모두 수지(五戒定具)해야 하지만 상황에 따라 일부분을 지닐 수도, 모두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에 불타는 4종의 근사를 설하였던 것으로, 이는 바사의 정설이다.
K. 능히 지니는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 말한다.
謂約能持說:「업품」제31송(권14,p.76상)
P. 능히 지니는 것에 근거하였기에 그렇게 설한 것이다.
約能持故說(권20,p.869중)
(17) 무루의 율의(즉 聖法)를 버리게 되는 것은 어떤 사문과를 획득하거나 그것으로부터 退失할 때로서, 세친이 말하는 練根은 得果에 포함된다. 즉 연근하여 利根의 도를 획득할 때에는 반드시 다시 이전의 과를 획득하여 鈍果의 도와 勝果道를 버리기 때문이다.
K. 聖法을 버리는 것은 果를 획득하거나, 練根 혹은 退失에 의해서이다.
捨聖由得果 練根及退失:「업품」제40송(권15,p.79하)
P. 온갖 무루의 선을 버리는 것은 果를 획득하거나 退失에 의해서이다.
捨諸無漏善 由得果退失.(권21,p.874상)
(18) 경계의 소연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離繫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견도위의 苦智가 이미 생겨나고 集智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견고소단의 소연은 이미 끊어졌지만 견집소단의 수면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견고소단법을 소연으로 삼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견집소단의 수면에 의해 유정은 계박된다.
K.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 경우, 그 밖의 변행수면이 [여전히 계박한다].
於見苦已斷 餘遍行隨眠:「수면품」제28송(권20,p.106중)
P.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 경우, 이를 연으로 하는 그 밖의 수면이 [여전히 계박한다].
於見苦已斷 餘緣此隨眠(권26,p.902중)
(19) 색·무색계의 탐을 '유탐'이라고 하듯이, '癡'를 제외한 상 2계의 번뇌는 무기성이고 동일하게 대치되며, 동일한 삼매의 단계(定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有漏'(bhava- sarva,欲漏에 대응하는 말로서, 무루에 대응하는 유루와는 그 뜻이 다르다)라고 한다. 즉 상 2계의 번뇌는 색·성·촉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오로지 내적으로 일어나는 內門轉의 번뇌라고는 할 수 없다.
K. 다같이 무기이고 내면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유루이다.
同無記內門:「수면품」제36송(권20,p.107중)
P. 다같이 무기이고 대치가 동일하기 때문에 유루이다.
同無記對治(권27,p.904중)
(20) 見道는 四諦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며, 修道는 3계9지의 9品의 번뇌를 닦는 것이다.
K. 견도는 오로지 무루이며, 수도는 [유·무루] 두가지 모두와 통한다.
見道唯無漏 修道通二種:「현성품」제1송(권22,p.113하)
P. 견도는 聖諦를 관찰하는 것이고, 수도는 9품을 닦는 것이다.
見道見聖諦 修道修九品(권29,p.914상)
즉 이미 앞({구사론} 권19, p.99하; {현종론} 권25, p.893하)에서 有頂地의 견소단과 수소단의 수면은 오로지 성자만이 끊는 번뇌이고, 하 8지에 포섭되는 번뇌 중에서 견소단의 수면은 성자만이, 수소단의 수면은 성자와 범부 모두가 끊는 번뇌라고 하였다. 따라서 견도는 성자가 의지하는 도이기 때문에 오로지 무루이고, 수도는 범부와 성자가 다같이 의지하는 도이기 때문에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되었으므로 그것을 구태여 본송에서 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현의 생각이었다.
(21) '제법무아'와 같은 세속지는 聞·思所成慧일 뿐만 아니라 修所成慧이기도 하다. 세친에 의하면 세속의 수소성혜는 유루의 6관행처럼 3계 9지를 각각 별도의 소연으로 삼지만, 예컨대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제법무아'와 같은 세속지를 수소성혜라고 할 경우, 수소성에는 離染의 힘이 있어 그러한 무아관을 닦을 때 바로 일체의 염오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수소성혜일 수 없다. 그러나 중현은, 婆沙所說에 따라 '제법무아'의 세속지는 자신의 품류를 제외한 일체의 법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수소성혜라고 주장한다. 즉 유부종의에서는 정려지에 포섭되는 수소성혜는 일체를 소연(總緣)으로 하는 것이 인정되며, 이 때 혜는 다만 기뻐하는(欣行相) 혜일 뿐이기 때문에 이염의 공능이 없다는 것이다.
K. 세속지는 오로지 문.사소성혜일 뿐이다.
唯聞思所成:「지품」제18송(권26,p.138상)
P. 세속지는 문·사·수소성혜이다.
聞思修所成(권35,p.952상)
(22) 숙주통은 法念住이며, 누진통은 법념주 혹은 4념주이다. 즉 세친에 의하면 숙주통과 누진통은 오온과 일체의 경계를 모두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같이 4념주에 포섭되지만, 중현에 따르면 숙주통은 법념주에 포섭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사의 정설이다. 비록 계경에서 "일찌기 영납한 고.락의 일 등을 기억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이는 바로 전생의 고.락 등의 受에 의해 영납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바로 雜緣인 법념주에 포섭된다. 또한 누진통은 10力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는 법념주이고, 혹 어떤 경우에는 4념주이다.
K. 염주의 경우 처음 세 신통(神境·天眼·天耳通)은 身념주이고, 他心通은 세 념주이며, 나머지 신통(宿住·漏盡通)은 4념주이다.
念住初三身 他心三餘四:「지품」제44송(권27,p.142하)
P. 세 신통(신경·천안·천이통)은 身념주이고 하나(타심통)는 나머지 세 념주이며, 하나(숙주통)는 법념주이고 뒤의 신통(누진통)은 법념주 혹은 4념주이다.
三身一餘三 一法後法四(권37,p.960하)
(23) 造論의 근거: 중현은 오로지 케시미르 비바사에 의거하여 아비달마를 해석하였다.
K. 나(세친)는 대다수 그것(가습미라 비바사)에 의거하여 對法을 해석하였으니, 조금이라도 폄훼하여 헤아린 바가 있으면 나의 과실이다.
我多依彼釋對法 少有貶量爲我失:「정품」제40송(권29,p.152중)
P. 나(중현)는 오로지 그것에 의거하여 對法을 해석하였으니, 혹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과실이다.
我唯依彼釋對法 或有差違是我失.(권40,p.977중)
2. 완전한 개작
(1) 무표색이란 행위할 때나 행위하지 않을 때나, 행위할 때의 마음과 다른 마음이거나 혹은 동류의 마음이거나, 그리고 멸진·무상정과 같은 마음이 소멸된 상태(무심)에 있어서 隨轉하는 것으로, 선·불선의 언표가 가능한 有記이며, 나아가 극미가 아니기 때문에 無對이며, 따라서 그것을 대종으로 간택해서는 안된다. 즉 무표는 무대의 非色이지만, 오온 중의 색온에 포섭되기 때문에 所造性이라는 것이다.
K. 亂心과 無心 등을 따라 유전(隨流)하여 淨.不淨이 되는 것으로서, 이는 大種所造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비바사사는] 무표라고 설하는 것이다.
亂心無心等 隨流淨不淨 大種所造性 由此說無表:「계품」제11송(권1,p.3상)
P. 조작할 때 등과 여타의 다른 마음 등과, 그리고 無心의 상태에서, 有記이며, 무대(無對)로서 所造를 본질로 하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무표색이라고 한다.
作等餘心等 及無心有記 無對所造性 是名無表色.(권2,p.781하)
(2) 婆沙에서는 6근에 대해 첫째 文詞의 순서에 따라, 둘째 說者·受者·持者의 순서에 따라, 셋째 細한 순서에 따라, 넷째 定과 不定의 순서에 따라, 다섯째 위치하는 장소의 상하순서에 따라, 여섯째 유정들이 서로 만나 예의를 갖추게 되는 순서에 따라 설해진 것이라 평석하고 있는데, 선설의 취사선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친은 이 중에서 네 번째 근이 취하는 소연의 정·부정과 다섯 번째 근의 위치에 의거하여 6근의 순서를 논설하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 전설로 이해하였다. 즉 비·설·신근은 이치상 花 을 쓴 것처럼 횡으로 배열된 것이어서 처소상에 높낮이가 없으며, 따라서 그는 이같은 처소에 따른 순서를 다만 '假說'로 이해하였을 뿐이다. 이에 대해 중현은 6근의 순서는 다만 작용의 선후와 멀리 있는 대상을 취하는 것과 분명함에 따른 것이라는 새로운 송문을 짓고 있다.
K. 앞의 5근의 대상은 오로지 현재하는 것이고, 4근의 대상은 오로지 所造色이며, 그 밖의 것은 작용이 멀거나 빠르고 분명함에 따라,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에 따른 순서이다.
前五境唯現 四境唯所造 餘用遠速明 或隨處次第:「계품」제23송(권1,p5하)
P. 앞의 5근은 작용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고, 5근의 작용 중 처음 두가지는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나머지 세가지 작용 중의 앞의 두가지는 분명함에 따라,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에 따른 순서이다.
前五用先起 五用初二遠 三用初二明 或隨處次第.(권3,p.786상)
(3) 識은 見의 근거일 뿐 '견' 자체는 아니며 단일하기 때문에, 색을 보는 것은 눈(안근)이지 식(안식)이 아니다.
K.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의 能依인 識이 아니니,
전설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眼見色同分 非彼能依識 傳說不能觀 被障諸色故:「계품」제42송(권2,p.10하)
P. 동분의 眼이 색을 보는 것으로, 識이 아니니, 그것은 '견'의 근거이기 때문이며, 식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며, 은폐된 색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眼見色同分 非識見因故 識類無別故 不觀障色故.(권4,p.791상)
(4) 12심의 획득에 대한 분별: 욕계의 염심(불선심과 유부무기심)이 현전할 때에는 그것을 등무간연으로 삼아 욕계의 무부무기심도 획득되지만 색계선심과 유학심이 현전할 때에는 획득되지 않으며, 욕계 색계의 무부무기심이 현전할 때에는 어떠한 마음도 획득되지 않는다.
K. 삼계의 染心 중에서는 6가지.6가지.2가지 마음을 획득하고, 색계선심에서는 세가지를, 유학심에서는 네가지를, 그 밖의 마음에서는 모두 같은 종류의 마음만을 획득할 수 있다.
三界染心中 得六六二種 色善三學四 餘皆自可得:「근품」제73송(권7,p.40중)
P. 삼계의 염심에서는 차례대로 7가지·6가지·2가지 마음을 획득하고 색계선심에서는 두가지를, 유학심은 세가지를, 두 마음은 획득하는 일이 없으며, 그 밖의 마음은 같은 종류의 마음만을 획득한다.
三界染如次 得七六二種 色善二學三 二無餘自得(권11,p.828하)
(5) 死有와 生有의 중간에 존재하는 有(오온)를 中有(antar bh va)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인해 生處로의 연속(續生)이 가능하다. 그런데 像色부정론자인 세친은 {구사론}에서 이같은 중유의 실재성을 논증함에 있어 대중부 등의 중유무체론자들이 언급한 '본체와 거울에 맺힌 그 영상(像色 즉 그림자) 사이에도 어떠한 매개체가 없듯이 사유와 생유 사이에도 중유가 없다'는 예증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유부에 있어 영상의 상색은 8가지 현색의 하나로서(광명을 장애하여 중간에 나타나는 다른 색) 그 실재성이 인정되기 때문에(유부는 像色有體論임) 중현은 세친의 이러한 상색무체론의 논거를 하나하나 비판하면서 중유부정론에 대한 비판도 {구사론}의 그것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K. [유정은] 곡식 등이 상속하듯이 生處에 단절됨이 없이 속생하지만 상색의 실유는 성립하지 않으며, [성립한다 하더라도 생유와] 동일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譬喩가 되지 않는다.
즉 동일한 처소에 두가지의 실재가 병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상색은 본체가] 상속한 것이 아니며, 두가지 조건(본체와 거울)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으로, [경에서] 그것의 존재를 설하고 있으며, 건달박과 아울러 5종不還과 7善士趣가 경에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중유는 실재하는 것이다].
如穀等相續 處無間續生 像實有不成 不等故非譬:「세간품」제11송
一處無二竝 非相續二生 說有健達縛 及五七經故:동 제12송(권8,p.44중)
P. [유정은] 곡식 등이 상속하듯이 生處에 단절됨이 없이 속생하는 것으로, 우리의 종의에서는 [거울에] 상색이 생겨나는 것을 인정하니, 그것들 사이도 역시 무간이다.
[상색의 실유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譬喩가 되지 않는다고 어떤 이들은 주장하지만, 그들이 설한 바는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상색은 소연이 되어] 능히 그 밖의 또 다른 상을 낳기 때문이며,
[실유의] 相을 갖고 상응하기 때문이며, 항상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능히 그 밖의 다른 색의 생기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인 전오식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동일한 처소에 두가지가 병존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지만, 이와 같이 말함으로서 [상색의 실유는] 획득될 수 있으니, '빛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며, 두가지 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동일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譬喩가 되지 않으니,
[상색의 경우] 하나의 본체로부터 다수가 생겨나기 때문이며, 상속한 것이 아니며, 두가지 조건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聖敎에서 [그것의 존재를] 설하고 있으며, 건달박과 아울러 5종불환과 7선사취가 경에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중유는 실유이다].
如穀等相續 處無間續生 我宗許像生 其中亦無間
不成故非譬 是一類所許 彼所說非理 能生餘像故
有相相應故 非恒可得故 能障餘色故 無分別境故.
一處無二竝 由謂如是得 非光二像生 不等故非譬
從一生多故 非相續二生 聖說健達縛 及五七經故.(권13,p.834중)
(6) 신표업의 본질은 형색극미에 의해 이루어진 신체의 구체적 형태[形]로서, 이는 일련의 행위전체를 신표업의 본질로 간주하는 정량부의 '행동설'과 이에 따른 暫住滅說, 형색극미설을 부정하고 다만 思가 신체를 매개로하여 밖으로 표출된 형태인 動發勝思로 간주하는 경량부의 업론에 대비된다.
K. 신표업은 '행동'이 아니라 개별적인 신체적 형태[形]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하니, 온갖 유위법은 유찰나(무간소멸를 갖는 것)로서, 멸진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원인없이 비존재가 되기 때문으로, [원인이 있다면] 생인은 능히 멸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태' 역시 실유가 아니니, [그럴 경우 색처는] 두 근에 의해 파악되기 때문으로, [형색]극미란 [다수의 현색극미의 차별일 뿐] 개별적으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身表許別形 非行動爲體 以諸有爲法 有刹那盡故:「업품」제2송
應無無因故 生因應能滅 形亦非實有 應二根取故 無別極微故:동 제3송(권13,p.67하)
P. 신표업은 '행동'이 아니라 개별적인 신체적 형태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하니, 온갖 유위법은 유찰나로서, 멸진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객관적인] 원인없이 비존재가 되기 때문으로,
[원인이 있다면] 생인은 마땅히 멸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결정코 [소멸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地 [등과 화합하든 火와 화합하든 땔감의 색이 변하는 것]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顯·形으로] 요별되는 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각각의] 상을 취함에 있어 다른 것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요별되는 상의] 상위는 그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현색과 형색은 각기] 멸하고 멸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극미(즉 단일극미)의 실재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형색은 실유이다).
[다시 말해 색처는] 2근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것[형색]은 결정코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견고함(堅:촉경) 등을 분별하고 난 다음에 길이 등의 색에 대한 지식이 비로서 생겨나며, 一面에 대한 다수의 촉이 생겨날 때 길이 등의 형색이 존재함을 추리하여 알 수 있으니, 이는 다수의 觸聚 중에 길이 등의 형색이 결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불의 색깔과 따뜻함의 경우도] 동일하기 때문이며, [현색에도] 동일한 허물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身表許別形 非行有爲法 有刹那盡故 應無無因故
生因應滅故 無決定因故 地等無異故 了相有別故
取不待餘故 相違因別故 有滅不滅故 許別有微故
非二根取故 彼定意境故 分別堅等已 長等智方生
一面觸多生 比知有長等 於多觸聚中 定有長等故 同故過同故(권18,p.860상)
즉 經主 세친은 '만약 형색이 현색과는 별도로 실재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색처가 두 감관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길이 등은 신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분별인 안식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다. 예컨대 장단 등의 형색은, 어두움 속에서 견고성(堅,地의 자성)이나 습윤성(濕,水의 자성) 등이 신근에 의해 알려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근이 견고함 등의 촉의 상을 분별하고 난 다음에 알려지는 것으로, 이를테면 다수의 촉이 생겨나는 어떤 일면을 신근으로 분별하고 나서 촉과 함께 작용하는 안식에 의해 견인된 의식을 통해 추리되어 알려지는데, 이는 마치 불의 색채를 보거나 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능히 함께 작용하는 불의 감촉과 꽃의 색깔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 경주는 다시 '불의 색채와 따뜻함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한가지를 취함에 따라 그 밖의 다른 한가지를 기억하는 것일 뿐으로, 만약 촉과 형색이 不相離의 관계가 아니라면, 어떻게 촉에 따라 형색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지만, 불이나 꽃의 색깔에 따뜻함이나 향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촉에 형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동일한 경우이다. 나아가 두 감관에 의해 파악되기 때문에 개별적 실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연기 역시 눈과 목구멍에 의해 파악되기 때문에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신표는 바로 이같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형색극미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중현은 말하고 있다.
3. 구사본송의 삭제
1) 22근의 증상력에 관한 이설
앞(III-1-7)에서 기술하였듯이 세친은 22근, 그 중에서도 특히 眼 등 6근의 증상력에 대한 비바사사의 해석을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를 '전설'로 이해하면서 有餘師의 識見說에 따라 22근의 증상력을 다시 해석하여 '안 등의 6근에는 자신의 소연을 요별하거나 전체를 요별하는 전5식과 제6식을 낳는 소의로서의 뛰어난 작용(증상력)이 있으며, 여·남근은 성의 차별을 낳는 증상력이, 명근은 동분을 지속시키는 증상력이, 5수근과 信 등의 5근은 잡염법과 청정법에 대한 증상력이, 그리고 3무루근은 각기 이지근의 修道와 구지근의 무학도와 現法樂住의 열반을 획득하는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되었다'는 내용의 다음의 세 송을 열거하고 있다.
자신의 대상과 모든 대상을 요별하는데 뛰어난 작용[增上]이 있어 6근을 설정한 것이며, 소의신에 따라 두가지의 근을 설정함은 여성과 남성에 뛰어난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了自境增上 總立於六根 從身立二根 女男性增上(「근품」제2송)
同分을 지속시키고, 잡염과 청정에 뛰어난 작용이 있기 때문에, 명근과 5수근과 信 등을 세워 '근'이라고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리라.
於同住雜染 淸淨增上故 應知命五受 信等立爲根(동 제3송)
미지당지근과 이지근과 구지근도 역시 그러하니,
각기 그 다음 다음의 도와 열반 등을 획득하는 뛰어난 작용이기 때문이다.
未當知已知 具知根亦爾 於得後後道 涅槃等增上(동 제4송)
이에 대해 중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根이 識의 소의로서 증상력을 갖는다고 할 경우, 彼同分의 근(三事和合되지 않은 근)은 마땅히 근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피동분의 안 또한 소의신을 이끌고 의식을 낳으며 보는 등의 작용은 없지만 신체를 장엄하는 증상력은 갖고 있기 때문에 역시 근이 될 수 있다. 또한 제 안근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온갖 색을 요별하는 식은 일체의 안근과 구생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청색과 황색을 보는 눈은 동일한 눈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안근이 일체의 색을 요별하는 식에 보편적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식의 밝고 어두움은 식이 일단 생겨나고 나서 비로소 근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식은 다만 근에 따라 밝고 어두움이 있다'고 함도 올바른 논거가 되지 못한다. 혹은 그같은 논거를 수용할 경우, 그것은 바로 導養身의 논거로서 역할한다. 즉 눈의 작용이 뛰어날 경우 뛰어난 식이 생겨남에 따라 능히 험난한 곳을 피할 수 있지만, 눈의 작용이 미약해지면 저열한 식이 생겨나 험난한 곳을 피하지 못하고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몸을 도양하는 것은 근이지 식이 아니다. 그리고 여·남근에 대해서는 신근과의 차별을 보다 강조하고 있을 뿐이며, 그 밖의 근의 작용은 결국 유부정설과 부합한다.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중현은 {현종론}에서 위의 3송을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나아가 이같은 이설의 유여사는 22근을 설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流轉門과 還滅門의 근거로 해석하고 있다.
혹은 流轉의 소의가 되고, 아울러 그것을 낳고 지속하고 수용하므로
앞의 14가지 근을 건립하였으며, 還滅의 뒤의 것도 역시 그러하다.
或流轉所依 及生住受用 建立前十四 還滅後亦然(「근품」제6송)
즉 유전은 識을 본질로 하지만, 6식은 6근을 소의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에 6근은 바로 유전의 소의이다. 또한 이러한 유전은 여.남근에 의해 생겨나며, 명근에 의해 지속하며, 5수근에 의해 대상을 영납 수용한다. 따라서 앞의 14근은 유전에 가장 뛰어난 소의.생.지속.수용의 근거로서 설정되었다. 그리고 信 등의 5근은 일체의 선법을 낳는 근본이기 때문에 환멸의 소의이며, 이것은 미지당지근에 의해 正定聚 중에 처음으로 생겨나며, 이지근에 의해 열반을 획득 상속하며, 구지근에 의해 현법낙주를 수용한다. 따라서 신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환멸에 가장 뛰어난 소의.생.지속.수용의 근거로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현은 이 역시 장행의 주석과 함께 그의 {현종론}에서 삭제하고 있다. 다만 {순정리론}에서는 이같은 이설을 수용하여 그것을 유부적인 논의로 부연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신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바로 환멸(즉 택멸)의 소의 등이 아니라 그것의 '得(pr pti)'의 소의 등이라는 것이다.
{현종론}에서 상기 4송을 삭제한 것은, 그것이 결국 소의신을 이끌며, 색을 보는 것 따위는 안근 등이 아니라 識이며, 나아가 유전의 본질 또한 식이라는 識見家의 설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異說을 논의의 주제頌으로는 설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位不同說에 대한 비판
주지하는 바와 같이 說一切有部에서는 일체법의 三世實有를 설함으로서 자신의 부파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럴 때 그들은 제법의 삼세의 혼재라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婆沙의 4대평자 중 世友의 위부동설을 평취하여 선설로 채택한다. 즉 제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그것이 처한 상태(位,avasth )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를 미래라 하고,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재라 하며, 이미 작용을 끝낸 상태를 과거라고 하지만, 그 본질 자체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 항상 실유이다. 이에 대해 세친은 경량부의 過未無體說에 근거하여 4가지 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송문을 짓고 있다.
무엇이 작용을 장애하며, 작용이란 무엇인가.
[작용이 법체와] 다르지 않다면 시간의 차별은 바로 허물어질 것이며,
[미래.과거가] 실재한다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미 멸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법성은 매우 깊고도 깊도다.
何 用云何 無異世便壞 有誰未生滅 此法性甚深.(「수면품」제27송)
즉 제법 자체가 삼세에 걸쳐 실재한다면 그 작용 역시 항상 일어나야 할 것인데, 무엇이 장애하여 어느 때는 일어나게 하고 어느 때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인가? 만약 衆緣이 화합할 때 비로소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 인연 역시 실재하므로 항상 화합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만약 작용에 의해 삼세가 차별된다면, 그같은 작용의 시간적 차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다시 말해 작용은 무엇에 의해 과거.현재.미래로 구별되는가? 만약 또 다른 작용에 의해 그것의 삼세가 구별된다면 무한소급(窮致)에 빠질 것이며, 삼세 이외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 때의 작용은 무위로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작용과 법체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같은 과실이 없다고 한다면, 작용 또한 실유이므로 그것의 유무로서 삼세를 구별지을 수 없을 것이다. 넷째, 과거.미래가 실유라면 미래의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며, 과거의 무엇이 '이미 소멸한 것'인가? 말하자면 이 송문은 제법실유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體(dravya)와 性(bh va,즉 作用)을 별개의 것으로 분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시하는 하는, 자재신의 변덕스러운 짓거리와 같은 유부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현은 '예컨대 눈 자체는 차별이 없지만 그 작용에는 차별이 있듯이, 제법의 體相과 性類는 等價가 아니기 때문에 첫 번째 두 번째 난문은 證因으로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작용이 바로 법체가 아니므로 衆緣에 의해 작용하는 상태(位)에 차별로서 삼세가 설정된다'고 변론하고 있지만, 어쨌든 유부의 옹색한 변명인 제4구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단의 논의이기 때문에 {현종론}에서는 삭제되고 있다.
IV.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현종론}에서 개작되고 삭제된 {구사론본송}의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구사론}상에서 경량부는 대체로 '識有必境'에 근거하여 분별된 諸法, 이를테면 형색극미나 무표색, 제심소, 혹은 각각의 불상응행법 내지는 제무위법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고 '心(種子)상속의 이론'으로써 인간의 행위와 세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순정리론}과 {현종론}에서의 중현의 破邪와 顯正은 필연적으로 이같은 상속설을 다시 비판하고, 유부철학의 제 개념과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규정에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종론}에서의 개작되고 삭제된 {구사론본송}을 통해 新 薩婆他로 일컬어지는 중현사상의 전모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그의 술작태도와 신 살바타교학(neo Sarv sti- v da)의 정체성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구사론본송}에 언급된 '傳說'(kila,혹은 '傳','謂') 또는 '許'(i a, i yate) 등 이른바 논주 세친의 不信을 나타내는 말을 삭제함으로서 논의 전편에 걸쳐 배여있는 유부교학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불식하였는데(그것들은 대개 婆沙정설임), 이를테면 부분개작의 (1) (3) (6) (7) (10) (16) (23)과 완전개작의 (3) (6)등이 그러하다. 둘째, 부분개작 (9) (10) (16) (21) (22)등의 경우처럼 바사정설에 위배되거나 혹은 그것을 부정하는 경우 이를 시정하고 있다. {대비바사론}의 문구나 자구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올바른 논거가 결여된 채 다만 經說에 따라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논의의 엄격함을 생명으로하는 아비달마의 毘婆沙師(Vaibh ika)가 취할 태도가 아닌 것으로, 유부는 진정한 佛說인 아비달마를 定量으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 부분개작의 (2) (4)와 완전개작의 (2)등에서처럼 그 이치가 명백하지 않을 경우, 바사소설이라 할지라도 有說에 따라, 혹은 논주 자신이 取捨해서는 안되며, 거기에는 깊은 推尋이 필요하다. 즉 어떤 한 교설의 그 이론적 근거에 대한 온갖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넷째, 부분개작 (8) (12) (13) (14) (15)등에서처럼 설혹 바사정설에 위배되지 않았을지라도 보다 합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즉 유부 제법분별상 예외조항의 분별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보다 포괄적이어야 하며, 기왕의 교설과 상치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중현은, 2-(1)에서의 무표색, (5)의 상색과 중유, (6)의 신표업과 그 본질인 형색극미 등과 같은 개념은 유부교학의 독자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또한 3-1) '22근의 증상력에 관한 이설'과 2) '위부동설에 대한 비판'은 각기 識見家와 경량부의 설이기 때문에 완전히 개작하고 또한 삭제하여 버렸던 것이다.
중현은 {구사론본송}의 개작과 삭제를 통해 보다 엄격하고도 분명하게, 또한 적극적으로 유부종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이론적 근거를 {구사론} 장행의 비판과 함께 {순정리론}에서 제시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지면관계상 세친의 {구사론본송}의 제작과, 중현의 개작과 삭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사실상 각각의 송문은 이미 그 자체로서 하나의 교학체계를 갖는 것으로, 그 각각의 개념과 명제에 대한 검토는 후일을 기약한다. 또 하나 남은 문제는, '전설(kila)'로 규정된 {구사론본송} 중 불율의의 無期限을 불신한 「업품」제27송(惡戒無晝夜 謂非如善受, n sa varo'sty ahoratra na kilaiva prag hyate)과 見瀑流·見 을 설정하고 見漏는 설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불신을 나타낸 「수면품」제37송(瀑流 亦然 別立見利故 見不順住故 非於漏獨立, tathaughayog d n m p thagbh vas tu p av t. n srave v. asah y n m na kil sy nuk lat )에 대해서는 {현종론}에서 그 어떠한 개작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순정리론}에서도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두 본송은 그 역문에서 보듯이 '전설'이나 혹은 그 어떠한 말로도 번역되지 않고 있으며, 진제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점에 대해서도 후일을 기약한다.
Ⅴ. 阿毘達磨의 敎學的 意義
許 庚 九
(東國大學校 佛敎學科 講師)
차례
1. 緖言
2. 철학적 論의 문제
3. 심리과정 분석을 통한 無我解明
4. 法有를 통한 無我解明
5. 原始佛敎와 아비달마의 연관성
6. 아비달마의 현대적 의의
7. 結語
1. 緖言
경전과 율전이 불타의 對機說法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편집되어 있는데 반해 초기 論典인 아비달마는 部派 형성 이후 학자들의 체계적인 불교연구의 성과이다. 불교의 출발이 석가의 初轉法輪에서 비롯된다면 불교 敎學의 단초는 아비달마에서 마련되어 이후 대승교학으로 연결되었다.
拙 에서는 그동안 북방불교권에서 소승교학으로 간단하게 무시되어 온 아비달마의 교학적 의의를 정립해보고자 그 문헌이 방대하게 남아 있는 說一切有部와 南方上座部의 기초교학을 중심으로 서설적인 전개를 해보고자 한다.
남방상좌부의 P li아비담마는 法聚論(Dhammasa gan )을 비롯한 七論에서 완성되어 南方佛敎 전개의 교학적 기반이 되며, 설일체유부의 Sanskrit 아비달마 역시 發智論을 비롯한 七論에 기초, 대비바사론에서 총결되어 北方佛敎 전개의 序幕을 여는 설일체유부의 교학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大乘佛敎의 전개는 설일체유부에 대한 비판과 극복에 있다고 본다면 한편으로 남방교학의 경우는 인도 대륙의 대승흥기와는 별 교섭없이 자체적으로 전개 발전되었다고 보면 순수 불교 내적인 발전으로 생각된다. 사실 설일체유부의 경우 그 교학체계는 인도 정통철학인 상캬학파 승론학파 등과의 끊임없는 對論의 과정 속에 형성 발전되었다.
졸고에서 남방 상좌부의 교학을 같이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근본 상좌부교학의 원형을 설일체유부보다 더 가깝게 파악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에서이다. 이 기대의 근거는 불교의 스리랑카 전파가 이미 아쇼카 왕대에 이루어지고 있고, 한편, 대륙의 설일체유부는 상좌부에서 초기 분파하여 천여 년 동안 외도와의 교섭 속에 다소 변용되었다고 본다면 P li어에 근거를 둔 남방 상좌부 문헌의 경우는 보다 더 불교학의 원류에 가까울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 및 언어학적 기초에서이다. 아비달마의 의의는 이들 두 가지 흐름을 같이 파악해 봄으로써 초기 불교교학의 지위를 보다 선명히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철학적 論의 문제
엄밀한 의미에서 교조 불타의 지위는 철학자라기 보다는 人生苦의 해결을 위한 심리학적 宗敎家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철학적 희론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경전적 근거를 볼 때 그 당시 유행하던 정통 브라만의 祭式爲主의 권위에 대치되는 現實的 苦의 해결은 慾望의 解消를 통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에 있었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욕망의 근저를 참구한 결과 그 근본이 자기 자신에 대한 執着心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形而上學的 희론의 거부는
1) 세계는 常住하는가 無常한가?
2)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3) 신체와 영혼은 같은 다른가?
4) 如來는 死後에 존재하느냐 않느냐?
의 문제인데 이러한 서술에 관계없이 후기 불교교학의 전개는 이런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일 三法印으로 刻印되는 無常, 無我, 苦는 초기경전상으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철학적 해명이 없이 체험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괴로움의 문제는 즉자적으로 누구나 경험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고 무상 또한 변화하지 않는 常住보다는 믿을 수 있는 확률이 절대적이다. 초기경전 역시 이들 명제에 대해서는 그 이유의 설명보다는 이를 전제로 하여 解脫觀을 설한다.
문제는 무아의 경우이다. 인도 정통종교는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을 상정하여 그들 나름대로 완결된 철학체계를 발전시켜 왔음을 볼 때 불교에서의 무아해명의 문제는 심리학적 구제론인 불교가 철학화 될 수 있는 계기임과 동시에 불교교학의 성립인 아비달마 형성의 기반이 되며 한편으로는 부정적 의미의 희론으로 떨어질 수 있는 오류도 胚胎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론을 적멸하는 데서 출발한 중관철학의 개조 龍樹는 그의 中論서두 게송에서
사라지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는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희론을 완전히 잠재우고
참다운 연기원리를 제시하신
위없는 불타 세존께 귀의합니다.
라고 하여 기존의 철학적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에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의상관의 연기 원리가 불타 교설의 핵심임을 나타내어 아비달마 체계와는 그 관점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초기경전인 전유경의 내용이나 위의 중론게송은 생각의 한계 내지 생각 자체에 대한 오류성 내포 판정에서는 동일하다.
무아이론의 확신은 근원적으로는 증득으로 이어지는 체득일 수밖에 없다면 철학의 무용론이 필히 제기될 수 있으며 아비달마 내지 전반적인 불교 교학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아비달마 논사들이 이 대목에서 생각한 것이 有爲(samskta)와 無爲(asamskrta)의 설정이다. 그들은 생각이 적멸한 무아의 상태를 무위에 포함시키고 무아에 대한 설명은 유위법의 단계에서 체계짓고자 한 것이다.
그들이 희론에 빠진 것이 아니라 어차피 유위 세상은 희론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전제에서 희로뇔 수 있는 모든 개념(dharma)들을 분류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남방상좌부 아비담마 제1권인 Dhammasa gan 의 matika(論母) 정신이다.
달마에 대한 불교적인 해석은 그 변천이 크게 보면
1) 초기경전에서는 '불타의 말씀'
2) 부파불교 단계에서는 '철학적 정의개념'
3) 대승불교 흥기 후에는 '우주론적 원리'
의 세 가지 단계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개념확장 내지 변천은 다른 인도 종교 철학의 정립과정과 평행선 상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불교 역시 체계 정립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것이다.
아비달마 논사들은, 어떤 생각에 이미 그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여 생각 자체를 안 하는 입장이 아니라 생각을 하되 그 한계있음을 아는 지혜(pa ) 정신에서 어차피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면 생각을 하되 좋은(kusala) 생각을 하자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고정적 주체의 불성립을 천명하는 무아해명의 방법을 천명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심리과정 분석을 통한 無我解明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정적 실체로서 윤회하는 아트만의 부정논리로 초기경전에서는 五蘊을 들고 있다.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의 잠정적 결합체로서의 오온의 설정은 남방상좌부 역시 설일체유부와 마찬가지다. 이 無我의 한문적 표현이 非我가 되어야 원뜻이 보다 부합할 수 있다는 설이 주장되기도 하나 근본적으로 그 한문적 표현은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그 부정방법이 어떻게 전개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없다'는 불교의 대전제는 단지 wdrywjr 의미로서의 당위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진위문제로 들어간다면 불교교학 성립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법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며 先決問題로서 '내'가 무엇인가로 질문이 되돌아 간다. 그 '나'는 베다문헌이나 초기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나의 존재보다는 나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 方向轉換한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나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였으니 그 정의 개념이 현실적 감각인식에 바탕을 둔 色·受·想·行·識인 五蘊(Pa ca skandha)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정신적 물질적 복합체의 이합집산인 오온에 貪慾이 오온의 질량을 결정하여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도 종교 전반이 윤회관에 기초하여 이 괴로운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어떻게 될 수 있는가에 있었다고 보면, 불교 또한 윤회와 해탈의 문제해결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윤회하는 것은 고정적 인격체가 하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현세에서의 열반이라는 윤회의 주체적 정지에 그 중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불타자신의 內證과 현실적 윤회관의 간격이 해소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서 無我理論이 설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我가 있다면 필연적인 윤회를 한다는 것이 통속적인 윤회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무아는 我의 부정이 되면 된다. 그 輪廻가 부정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我의 不成立이 되며 그 我의 불성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我에 대한 세세한 분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我가 처음부터 불성립이라면 그 분석이 성립될 수 없지 앟은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불타와 같은 自內證이 안 된 상태라면 그 我의 불성립을 설명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비달마 연구는 우선 이 교학의 엄청난 心法과 色法의 분류에 압도 당하게 된다. 왜 이러한 분류법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다른 인도 종교와 후기 대승교학의 철학체계와 달리 왜 처음부터 달마의 분류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이는 단순히 여가의 학업이라기보다는 그 만큼 我의 定義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정적 주체관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류법을 도입하여 '어떤 하나'를 분해하는 방법으로 그 하나가 고정적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남방상좌부 교학에서 生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오온 보다는 더욱 세세하게 心理科程(citta-vithi)의 분류로 結生(patisandhi)에서 難生(Cuti)까지의 14개자 정신현상으로 마음의 주기를 설정하여 心과 色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보완관계에서 작용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도 변화하는 가운데서 잠정적으로 파악되는 무아해명의 일환이다.
남방상좌부에서 마음의 상태를 비유하는 예를 들어본다.
어떤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망고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그때 망고 과일이 떨어져 그의 곁에 굴러왔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무엇이 그의 잠을 방해하였는지 알려고 한다. 이윽고 그는 망고 과일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집어 냄새를 맡아보고 만져본다. 과일이 아주 잘 익은 것을 알고는 먹는다.
위의 예에서
1) '깊은 잠'은 마음의 수동적인 상태로 비유되는데 어떤 대상이나 관념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흐름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로 有分(bhavanga)이라 한다.
2) '일어나서 무엇이 그를 방해하였는지 알려고 하는' 상태는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된 것을 알려고 하는 5根(pa cadv r vajjana)이 작용한 단계이고
3) '망고 과일을 보는' 것은 특수한 감각이 일어난 것으로 반성적 작용이나 기억이 아닌 眼識(cakku-vi na)의 작용상태이며
4) '망고 과일을 집어 올리는' 행위는 현실적으로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領受(sampaticchana)의 단계이며
5) '냄새를 맡고 만져 보는' 것은 지난 경험에 비추어 망고를 생각해 보는 推理(santirana) 과정이며
6) '망고가 잘 익은 것을 아는' 것은 알음알이로서 그 과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決定(vo hapana)의 단계이고
7) '망고를 먹는' 것은 행위의식(javana)으로 이 상태에서 주관이 그 자체로서 認知되고 대상에 대한 자세가 확정된 단계이다.
이러한 心理過程(manodv ra-v thi)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아니라 이미 內在的으로 특징지어지고 확정된 데서 오는 觀念的 이미지들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며, 주체성의 확립은 항상 정해져 있지 않고 그때 그대 잠정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잠자는 나, 보는 나, 알고자 하는 나, 먹는 나, 기분 좋은 나이지, 고정적인 내가 보고 먹고 즐기는 구조가 아니라는 논리를 비추는 비유이다.
여기서 有分의 개념은 생명체를 定義하게 하는 기초적인 의식의 흐름으로 과거의 반성적 기억들이 포함된 潛在意識이라 볼 수 있겠는데 찰나찰나 생멸하면서도 연속되는 不連續 가운데의 連續性을 지닌 흐름이라 볼 수 있다.
설일체유부가 무아의 분석을 法有로서 해결하고자 하였다면 남방상좌부으 경우 마음의 相續的 계기로서 그 밑바탕이 되는 有分(bhav ga) 개념을 도입하여 계속 변하는 표면의식 안에 생멸하면서 연결되는 잠재의식을 설정, 변화 속에 이어지는 過程的 분석으로 '나'의 고정적 개념을 해소시켜 버린다.
나를 의식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집착된(upada) 마음의 일시적 현상이며 이것이 心所(cetasika)와 결합하여 마음 작용을 일으키며 물질적 현상(rupa)과 함께 구체적인 희로애락을 느끼는 나로 정의되는 것이다.
4. 法有를 통한 無我解明
사실 dharma 개념은 불교 교리중 가장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인데 이는 북방불 전개상의 난점이지 남방교학의 경우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이는 애초부터 외도와의 그 개념의 논쟁에 휘말리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지만 설일체유부의 경우 단순히 일체가 바깥에 감각기관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實在論的 外境論者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때의 有의 의미는 감각적 質料(sense data)로서 파악된 궁극적 이념적 현상을 단순히 개념적으로 정의하였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바깥에 간격적으로 있다거나 주위로 둘러 싸인 내가 있다는 공간적 방식이 아닌, 현상적으로 보고 느끼는 그것을 없지 않다는 定義의 有인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현상이라는 것은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비달마에는 法空이 논하여지지 않았다는 後代의 비판은 法有를 설정하게 되는 동기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의 결여에서 나왔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떠한 것도 그 실체를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空의 논리는 아비달마 철학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법유의 유는 홀로의 유가 아니라 관계 속의 有라면 공의 논리에 배치되지 않는다. 龍樹 中論의 취지도 독자적으로 先住하는 개념의 부정이지 關係 속의 개념은 俗諦로서 인정하고 있음은 단지 공의 도리를 강조하였을 뿐이지 아비달마 자체의 부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과거의 업이 미래에 결과를 낳지 않는다면 어떻게 修行이 필요할 것인가라는 경전 근거로 과거 현재 미래의 정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그냥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은 설일체유부의 유개념을 바르게 파악하는 열쇠라 생각된다.
佐佐木現順은 아비달마의 사상사적 의의를 大意識的 존재성으로 규정된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라는 문제에 있다고 하여 有의 의미를 논리적 긍정개념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모든 현상을 정의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분류하게 되며 이 두 현상에 포함되지 않는 心不相應法까지 정의할려고 하는 설일체유부에서의 법개념은 해석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공식과 같은 유형으로 생각된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相對性 理論이 우주현상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 이론자체가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인지의 발달과 현상의 다양화로 그 도구개념이 우주현상의 설명에 보다 근접하는 의미 이상이 아니듯이 설일체유부의 법유도 無我의 해명을 위해 법유를 가정함이 보다 무아의 설명에 편리하다는 의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어떻게 무아와 법유는 연관될까? 내가 물체를 본다고 하면 상식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보다 나의 눈이 물체를 본다고 하면 보다 정확하게 들린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눈이 먼저냐 물체가 먼저냐가 다시 문제될 수 있으며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無境論者와 外境論者의 갈림길이 된다.
이 경우 동시라고 보면 나의 눈과 물체사이의 관계만 문제되지 나의 눈이 무엇이냐 물체가 무엇이냐는 선결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의 동시성은 초기 경전에서 觸(sparsa)으로 정의되어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설일체유부의 경우 남방상좌부에 비해 이러한 관계성을 보다 일반화하여 법유의 개념으로 정립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근거로는 달마인 법을 作用性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과 有의 개념을 得과 非得의 논리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心과 外境은 관계성을 떠나 홀로 있을 수는 없으며, 有 또한 나의 눈에 들어오고[得] 안 들어오고[非得]의 관계를 벗어나 그냥 절대적으로 恒有하는 것은 아니다.
我의 불성립만으로 얻어지는 결과로서 자기자신만 없고 외부 주위는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허무 허전할 것인데,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무아는 어떤 현상인가? 물론 體得的인 무아의 경지는 허무도 아닌 일체외의 合一이 될 수도 있고 분별을 떠난 법열의 즐거움으로 체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비달마에서는 그야말로 설명, 해설하고자 하는 것이며 철학적 의미로 체계화 하고자 我와 無我는 단순히 정의 개념일 뿐인 법유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我가 존재한다 혹은 안 한다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보다는 정의 개념인 법유 속에서 항상 변화하는 잠정적 현상적 나로 존재되는 것이다.
法體恒有의 문제는 후기 교학의 전개과정에서 설일체유부를 공격하는 주요 소재로 되나 이 때의 비판자들은 항상 자기의 입장에서 법유를 實在論的으로 정의 짓고 그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특히 中觀學派의 경우 法空의 논리로, 설일체유부가 법의 體性을 인정하였다고 하나 근 일천년의 역사를 가진 유부교학의 자체근거가 그렇게 간단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 현상을 定義하고자 하는 노력과, 定義 自體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입장은 서로 다른 지평의 문제로서 서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으나 둘 사이의 우열이 결정될 수는 없다. 중관 철학의 경우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 한편 현실적 언어를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설일체유부의 법유의 문제도 무아의 해명을 위해 설정되어진 것으로 보아진다.
모든 현상의 근저인 법의 작용을 항상 우리 인식 속에서 파악 정의될 수 있다는 설일체유부의 현실적 교학은 得과 非得의 논리에 의해 인식 주체의 잠정성과 그 결과로서 무아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비록 설일체유부에서 경량부의 種子 개념이나 유식학파의 아라야식 구조가 없어 교학 발전의 초기 단계로 흔히 주장되나 설일체유부 교학자체는 실재론적인 결함을 지녔다기보다는 자체 완결된 초기 불교교학으로 단지 그 사유구조의 체계가 다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종자나 아라야식 개념은 윤회 전생의 근거로서 세련된 체계라고 볼 수 있으나 초기경전의 근거 자체는 약하며 생물학적 용어의 도입으로 현실감은 있어 보이나 인식 주체가 중심이 되는 관념론적 경향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주체와 객체의 동시적 사유보다는 주체에 경도된 경향은 이론의 정치함에는 성공하였을지 모르나 초기 경전이나 아비달마에 나타나는 상호 연기적인 견지에서 보면 불교학의 변용이라고까지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실재론도 관념론도 아닌 다시 말하면 外境이 존재하느냐 않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아니라 어떻게 人間苦의 문제를 무아 해명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진정한 주체성의 파악 내지 회복일 뿐이다. 無表色의 설정은 찰라생멸하는 현상 속에 윤회를 설명하는 개념인데 경량부의 種子 개념과는 달리 생멸이동하는 형식이 아닌, 생멸은 하나 이동은 없는 그러나 그 잠세적인 효력은 전달되는 무형의 에너지(무표색)로 설정된 것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業의 전달은 있으나 그 주체는 없다'는 표현은 불교학 연구의 주요 과제가 되는 부분인데 이는 경량부나 유식학파 보다는 설일체유부의 무표색 개념설정에 근본적으로 가깝게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무표색의 한계가 종자개념의 도입으로 불교교리가 발전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정신사 발전의 시각에서 불교교리 또한 발전되었 고 보는 변증법적 견지에 서서, 정신 문화사적 현상인 불교의 역사를 철학사의 일면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단면이지 않나 생각된다.
현대학문의 발달 순서가 철학에서 심리학, 언어학으로 전개되고 수학에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전개되었다고 하여 선행의 학문이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없듯이 현대의 학문분류를 거의 포함한 문화현상으로서의 초기 불교학인 아비달마가 단순히 서양철학의 전개과정과 동일선상에서 파악되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된다.
인도불교 사상사에서 보면 설일체유부 경량부 중관학파 유식학파는 인도에서 동시에 오랜기간 동안 존재한 대표적 학파이며 서로 비판과 영향은 있을지언정 어떤 하나가 이론에 한계가 있어 없어지고 다음이 나타난 것이 아닌 것이다.
5. 原始佛敎와 아비달마의 연관성
근대 영국에서 일어난 초기 니가야에 대한 연구는 部派佛敎 형성 이전인 원초적인 불타의 교설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하여 후기 학자들의 교학인 아비달마보다는 초기 경전의 교설을 중심으로 현대적 시각에서 재조명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原始佛敎學이 태동하였다.
이는 불교학의 연구를 근원에서부터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로 엄밀히 말하면 현대적 의미의 아비달마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 불교학계 역시 大正時代부터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져 왔으며 우리나라는 최근 뒤늦게 소수의 학자를 중심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런데 拙者가 전에부터 품어온 의문은 아함 니가야를 포함한 初期經典들에 여러 가지 部派의 敎說이 혼재된 상태이고 이미 부파적 영향을 받은 경전이라 보면 어떤 교설을 채택하여 기존의 아비달마학과 구별되는 원시불교 철학을 과연 재정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和 哲郞은 원시불교 자료에 대한 관심에서 字井伯壽의 근본불교론에 의문을 제기, 그것은 단지 역사적 현실을 떠난 理論的 推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먼저 원시불교 자료비평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러 경전에 나오는 공통적인 논재로서 그 철학체계를 다시 세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이미 아비달마 내지는 대승교학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현존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철학적 言表를 기준으로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현대적 언어 관념으로 새로운 현대적 의미의 아비달마를 시도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 불교교학의 체계로 성립되지 않은 시기인 원시불교의 단계를 가정하여 후기 형성된 아비달마 교학과 비교, 그 교학 발전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初期 經典學의 연구를 통한 원시불교학의 성립은 가능하나 원시불교철학은 그 용어 자체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아비달마에서 원시불교 철학체계는 시작되었으며 원시불교 단계에서는 단편적인 論題의 討論은 있었겠으나 論典의 형태로 정립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의 형성으로 불교학이 퇴보한 것도 진보한 것도 아닌 불교교학의 처음 형성인 것이다.
초기경전을 연구하는 참뜻은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시 체계짓는다는 것보다는 엄밀한 철학적 사유로 침잠된 교학으로부터 벗어나 불타의 金口直說을 가깝게 대하며 설법의 유형과 그 변화 내지는 용어선택의 차이를 발견하며 敎說이 발전정립되는 과정을 불교 문화사적 사실과 연결해 보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자칫 교설간의 관계를 불교 문화사적 사실과 연결해 보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자칫 교설간의 관계를 우위론적 방법으로 체계짓고자 하는 시도는 불교학 연구의 지평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미 오랜기간 전개된 정통 불교학의 역사는 그것으로 완결되어지고 있으며 새로이 초기 교학체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다양해진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학을 다른 방향에서 再照明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기존의 용어를 사용하여 다시 체계짓는 것보다는 원시불교의 경우 原典 資料의 엄밀한 연구가 우선이라 생각된다.
기존의 연구서들이 후기 교학의 도구로서 분석하고 있으나 이는 결과론적 의미를 前者에서 찾는다는 점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초기경전의 成立問題나 敎團史的 여구는 가능하나원시불교철학의 체계를 아비달마를 떠나 그 자체로 정립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불교 교리사의 과정에서 볼 때 큰 의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山本啓量은 원시불교의 인식론은 觸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여 이를 중심으로 그 체계를 세우고 있으나 부파불교와 구별되는 독특한 이론없이 해탈론으로 연결되고 있다. 원시불교와 아비달마를 굳이 구별지어 그 체계나 궁극적 목적의 차이를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학문적 열의로서는 인정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아비달마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으며 이에서 대승교학 역시 그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 교리사의 전개에서 보통 불교교리의 핵심이 연기에 있다고 보아 後代 화엄의 事事無碍 현상으로까지 결론지어 지나, 보나 근저로 보면 불교교리의 역사는 아비달마에서 시작된 無我解明의 역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무아해명을 위해 연기론이 발전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중국 禪佛敎의 단계에서는 연기문제 보다는 無我와 관련되는 無心 無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음은 현실적 나에 관계되는 무아체득의 실천도로서 불교학적 정통성의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6. 아비달마의 현대적 의의
오랜기간 소승교학으로 폄하되어온 아비달마는 후기 중국에서 전개된 화엄이나 천태학 내지 선불교와 전연 관계없는 아라한의 교학일까? 불교학의 전개과정에서 종종 오도되는 문제는 大乘의 小乘에 대한 優位, 禪의 敎에 대한 우위 문제이다. 중관과 유식의 교학은 아비달마의 否定이나 克服인가? 아니면 새로운 의미의 아비달마는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후기 대승교학들도 그들 교학의 근거를 위해 항상 경전적 근거에 의거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대승경전에 근거를 둔 아비달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출발이 불타의 초전법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불교의 의의는 자기만의 自內證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법열의 경지를 남과 동시에 나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내증과 방편설법은 불교를 선정주의자와 구별짓는 대중구제적 종교로서의 대목이다.
역사적으로 아비달마 형성기인 아쇼카왕 시대는 한편으로 대중구제 사업과 대중설법이 동시에 이루어져 왔으며 대승불교 형성기 역시 보살불교 사업이 동시에 행하여졌다. 중국에서도 교학과 선이 유행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교학 그 자체만으로 우열을 논하는 敎相判析은 북방불교에서 아비달마를 劣等敎로 퇴락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중국불교가 종학으로서 불교를 연구하는 한계에 나온 중국적 불교의 이해이며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선불교 융성 이후 敎禪 우열 논쟁으로 비화 한국불교 역시 크게 보면 이러한 중국불교의 영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비달마에 기초를 둔 난방상좌부 계통의 불교가 역사적 현실로서는 더욱 대중구제적 요소가 많음은 대승경전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보살을 등장시키지 않고도 실질적으로는 중생구제적 역할을 충분히 하여 왔던 것을 보더라도 소승열등관은 북방불교의 오해 내지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敎禪 우열논쟁 자체가 없는 印度佛敎의 統合性과 完決性은 아비달마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무아 해명을 통한 해탈관의 전개는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무념 무심의 깨침을 통한 見性의 구조와 견주어 하등 열등할 게 없다.
아비달마는 초기 구태의연한 교학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 다시 조명되어야 할 불교교학의 源流이며 觀念的인 佛敎에서 탈피하는 종합적인 人間學으로서 가치 부여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7. 結語
이상과 같이 살펴 본 論旨는 그 동안 단순히 법분류학으로서 오해되어온 아비달마를 근원적으로 그 중요성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序說的이면서도 槪括的으로 단지 그동안 소홀히 대해 온 초기교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봄으로서 현재 지말적 분파적으로 연구되는 불교학을 근원에서 맺어 보고자 하는 염원에서였다. 그리고 서술자세는 初心者의 마음으로 기존의 초기불교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제기 방식을 취하였다.
결론적으로 아비달마는 그 근본이 無我解明을 통한 解脫의 철학이라는 데서 그 교학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이후 전개된 불교교학의 공통적인 소재가 되며 남방상좌부나 설일체유부가 오랜기간 불교학파로서 정통적으로 존립할 수 있었던 기반이기도 하다.
外境 實在論으로만 파악된다거나 唯識無境의 체계가 없어 한계가 있다는 주장은 有無의 철학으로 불교 교리사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으나 佛陀 교설의 근저는 有無를 떠난 中道에 있다고 보면 아비달마의 의의는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法有의 의미도 無我와 연계되어 파악되어야 설일체유부의 교학적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며, 단순히 人空은 논해지나 法空은 논해지지 않아 교학적 한계가 있다는 판단은 대승교학자들의 주된 주장이나 아비달마의 사유근저에서 보면 대상과 함께 잠정적으로 존재되는 주체성의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며, 엄밀히 말하면 대승교학 역시 法空의 문제는 空空의 설정으로 아비달마로 귀환되고 있다고 보면 拙著의 지나친 비약일까?
불교교리 전개의 역사는 心識論의 측면, 緣起論의 관점, 佛身論의 변천 등의 여러 입각지에서 연구되어 왔으나 그 전개의 근저에는 정통 인도 종교와 구별되는 무아론의 해명에 있으며 이는 아비달마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初期佛敎 資料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는 불교학의 원류에 대한 총체적인 고찰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이와 함께 아비달마 철학에 대한 내용도 풍부해 질 것으로 생각되며 대승교학 내지 선불교와의 脈絡도 찾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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