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불교문화] 41집, 2020. 3, 109~136
인도초기대승의 수행문화 -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기원과 전개
(이 논문은 2017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7S1A5B5A07063913). 본 논문은 필자가 2016년 12월 15일에 열린
‘제6회 한국밀교문화총람 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한 ‘인도 사문주의의 문화사적 전개와
밀교적 수용’을 토대로 재작성한 것임을 밝힌다.)
최경아/강릉원주대학교 강사.
Ⅰ. 서론
Ⅱ. 인도수행문화의 기원
Ⅲ.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수행자의 위상
Ⅳ. 출가와 재가 – 초기 대승의 보살
Ⅴ. 수행과 성취 – 불교딴뜨리즘의 싯다
Ⅵ. 결론
[국문초록]
불교의 수행문화는 사문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고 그 핵심은 출가수행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가자들의 수행 역량은 무시되지 않았다. 초기불교
문헌에는 아라한과를 성취한 재가자와 청정범행을 하는 우바새(優婆塞,
upasaka)의 존재가 확인된다. 대승불교 초기 보살승은 성문승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보살승은 성문승의 구족계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재가자
들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 받을 수 있는 십선계를 받았다. 이로 인해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문헌 자료들은 오히려 숲속에
서의 출가수행이 강조되고 권장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탑사에 거주
하던 재가자들 가운데는 청정범행을 하여 출가자로 간주되어도 문제가 될
바가 없던 자들이 존재했었고, 또한 출가자 가운데는 숲속에서 혹독한 수행
을 하던 비구 외에도 몇 가지 이유로 탑사에서 생활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자
들이 있는데, 그들은 탑사의 운영과 관리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재가자로 간
주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등장한 불교딴뜨리즘에서는 초월적 능력을 성취하
는 것이 수행자의 목표가 되어 그 목적을 위해서 출가와 재가가 혼융되는 수
행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전개는 아리안계의 브라흐마나와 토착문화에서 비롯된 슈라마나
의 융합으로 조성된 인도종교의 토양에서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재가 수행자는 인도불교의 전개에 있어 대중(gaṇa)을 형성하는 주
요 멤버였으나 상가(saṅgha)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도불교 수행
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 발생기에
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인도불교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 역할은 사문
곧 출가자에게 있었다. 초기 대승에서 재가의 역할이 강조되었음에도 오히
려 더 엄격한 출가수행이 독려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Ⅰ. 서론
인도에서 해탈(S. Mokṣa)이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그 무엇에도 얽매
이지 않은 상태 곧 ‘무쯔(Muc)’가 목샤의 어원이다. 베다시대 인도의 구도자
들은 절대자와 결합함으로써 이러한 경지에 이르고자 열망했다. 절대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되었고 찬가의 염송이나 제식이 그 대안
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더스강문명의 유물인 빠슈빠띠(Paśupati)가
세겨진 인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리안이 인도에 도래하기 전부터 인도인
들은 명상과 수행을 통해 자력으로 성취하는 길을 추구했다. 마가다국을 중
심으로 확산된 갠지즈강문명의 슈라마나(śramaṇa) 전통은 베다 중심의 브라
흐마나(brāhmaṇa) 전통과 달리 현상세계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방법에 몰입했다. 본 연구는 출가중심의 사문주의로부
터 전개된 인도 수행문화의 흐름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 재가수행자 곧 재가
보살의 위상이 부상했는지 살펴보고, 이러한 현상이 대승불교 운동과 연계되
어 일종의 브랜드화된 현상에 주목한다. 따라서 먼저 불교 발생기와 초기불
교시대의 다양한 수행자들의 면모, 이어 출가자에서 재가자에게로 중심추가
옮겨지는 듯한 대승초기의 수행문화, 곧 보살가나(boddhisattva-gaṇa) 출현의
실상과 의미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출가와 재가가 혼용되는 양상을 보인
딴뜨리즘(tantrism)의 수행문화를 검토해 보며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사
적 특징과 의미를 확인해 보도록 한다.
Ⅱ. 인도수행문화의 기원
근대 인도학은 식민화 과정에서 주로 서구인의 주도하에 전개되었고, 인
도 내부에서는 엘리트 지식인층을 형성하는 브라흐만 사제계급과 힌두근본
주의자들이 이에 조력했다. 따라서 베다(Veda) 전통과 산스끄리뜨 문학이 인
도고유문화의 핵심으로 강조되었고, 아리안의 인도 유입에서 얻어진 산물이
라고 해석되었다. 이는 서구문화의 우위를 확보하고, 인도인을 그들의 문화
권에 종속시키려는 식민지시대 서구학자들의 이해와 부합하게 된다.
바샴(Vasham)은 브라흐마니즘과 불교 등에 가려 그 중요성이 간과되었던
아지비까(Ājīvika)에 대한 연구1)로 한동안 잊혀졌던 슈라마나 전통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도 학자 빤데(Pande)는 우빠니샤드철학은 베다
밖의 전통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떠돌이고행자와 요기는 베다시대 이전
부터 존재했는데, 그들은 베다에서 무니(muni)로 알려지기도 했고, 붓다와
마하비라의 시대에는 슈라마나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2) 무니는 석가모
니(釋迦牟尼: Sakhyamuni, 샤카족의 현자)라는 말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슈라마나라는 용어는 초기우빠니샤드에서 한번 언급되었을 뿐이
라고 지적한다.3) 반면, 불교학자 와더(Warder)는 붓다 이전의 슈라마나에 대
한 정보는 사실상 부재하다고 보고 있으며 그 기원도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
다.4)
1) Basham(1951),
2) Pande(1974), 257
3) Pande(1974), 259.
4) Warder(1998), 29-31
붓다는 베다의 제식주의와 브라흐만의 권위에 반대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5) 이는 니까야(Nikāya)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슈라마나가 브라흐만들과 대립하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주도가 된 기존의 사회질서를 배격하거나 저항했던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베다의 권위에 지배되지 않는 자유사상가로서, 베다의 제식주의와 권
위주의를 거부했을 뿐이지, 브라흐만에 의해 형성된 사회관습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슈라마나는 한역으로 사문(沙門)이라고 불리는데 중국에서
상문(桑門)이라고도 번역하였다. 중앙아시아를 거치면서 슈라마나(śramaṇa)
가 사마나(samaṇa)로 바뀌었고, 실제 발음인 사만(saman)이 중국에서 사문
(沙門)이나 상문(桑門)으로 음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단어에 대한 의역
가운데는 근식(勤息)이 있는데, 이는 선법을 열심히 닦고(勤修) 악법을 없앤
다(息滅)는 의미라고 한다.6)
5) Ambaṭṭhasutta, DN I, 87; The Jātaka, No. 543, 110 참조.
6) 이종철(2008), 43.
전통적으로 슈라마나는 세속적 안락을 포기하고, 궁극적 자유를 위해 금
욕과 고행을 수행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이를 위해 그들은 독신주의 출가주
의를 견지하며 탁발 걸식하는 무소유의 유행생활을 선택했던 것이다.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직시한 슈라마나의 사상은 절대자
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로써 이 모든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
고를 전파하며 출가주의가 크게 성행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갠지즈강 유역에서는 도시화가 진행되어 상공
인 집단이 조성되었고, 농업의 정착으로 잉여생산물이 증대함에 따라 계급에
의한 서열 외에 빈부 격차도 상당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적 불평등이 슈라마나 확산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
는다. 당시 브라흐만들 또한 현실인식의 출발을 ‘고(duḥkha, 苦)’로 파악하여
이를 벗어나기 위한 제식과 신에 대한 찬미를 강화하였다. 모든 사상계의 일
치된 목표는 ‘고’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그 원인을 밝히고 제거하는 것이 그
들의 공통된 과제였다. 그럼에도 슈라마나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고용문제,
부채나 고용주의 가혹한 대우, 비참한 생활환경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사회 양
상으로 ‘고’를 언급하지 않았다.7)
7) Pande(1984), 62
나까야에서 붓다는 설법의 대상으로 브라흐마나[brāhmaṇa; 이하 음역 바
라문으로 표기]와 사마나(P. samaṇa)를 함께 거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
다. 이 두 그룹은 당대 종교계를 주도하는 세력이었지만 각기 다른 세계관과
수행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변화하는 것을 덧없음[anitya, 無常]으로 규정하고, 불만스러운 것[duḥkha]
으로 해석하여 이러한 현상세계를 통렬히 인식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슈라마나의 세계관은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통해 완전성과 지고의 환희를
추구했던 브라흐마니즘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식을 통해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 이후의 삶마저 보장 받으려 했던 바라문들도 점
차 부분적으로 독신주의를 받아들이고 은둔과 고행을 수행의 주요 덕목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는 그들의 행보를 보았을 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이
는 내핍과 제어의 고된 수행을 동반하는 슈라마나의 생활방식과 철학이 대
중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에 대한 바라문의 대응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회
적 기반은 아직은 확고했지만, 점차 퇴색되어가는 종교적 영향력을 복구하는
데 슈라마나의 수행관을 사회규범으로서 수용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아슈라마(āśrama)이다.8) 인간의 일생을 범행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
의 네 단계로 분류하여 각각의 시기에 합당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킬 것
을 강조하는 ‘아슈라마’라는 개념은 베다와 브라흐마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인도종교문화에서 점차 확대되는 슈라마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바라문은, 범행기와 가주기로 자신들의 기득된 터전을 확보하고,
임서기로써 슈라마나적 생활을 응용하고, 유행기로써 그들의 수행문화를 도
입하는 대안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본래의 베다 전통에는 없었던 규
범이 슈라마나의 출현 이후에 사회규범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8) Winternits는 수드라를 제외한 상위 세 카스트가 이상적으로 간주하는 인생의 네 단계(Āśrama)
로 Brahmacārin, Gṛhastha, vānaprastha, Saṃyāsin를 소개하는데, 이는 각기 범행기, 가주기, 임
서기, 유행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각주를 통해 이와 같이 셋 또는 네 층의 일련의 단계로 인생
을 설명한 예는 최고층의 Upaniṣad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완전한 형태의 이론으로서는 후기
Upaniṣads, Mahābhārata, Dharmaśāstra에서야 나타난다고 한다. Winternits(1981), 215.
Ⅲ.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수행자의 위상
빠알리 문헌에서 사마나(samaṇa)는 곧 고행자를 의미한다. 아슈라마와 같
은 어근 ‘śram’에서 파생된 말로 “노력하다”라는 의미이다. 범어 śramaṇa는 문
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슈라마나는 브리하드아
란야까우빠니샤드(Bṛhadaranyakaupaniṣad)에 따빠스(tapas)라는 용어와 함께
나타난다.9) 이는 그 당시에 슈라마나와 따빠스, 곧 고행자가 함께 활동했었
고, 그들이 다른 성격의 수행자로 구별되었음을 나타낸다. 샹카라(Śankara)
는 그의 주석서에 슈라마나를 빠리브라자까(parivrājaka) 곧 탁발유행승으로,
따빠스 곧 고행자를 와나쁘라스타(vānaprastha)로 해설하는데, 이는 세 번째
단계의 아슈라마에 임한 바라문으로 간주된다.10) 또한 따이띠리야아라냐까
(Taittirīyāraṇyaka)에서 슈라마나는 나체승[vātaraśana]이라고 언급된다.11)
9) Bṛhadaranyakaupaniṣad Ⅳ.3.22, Radhakrishnan(1953), 263.
10) Ten principal upanishads with Śāṅkarabhāṣya, 264.
11) Taittirīyaranyaka 2.7.
슈라마나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기존
베다의 제식주의에 저항하는 탈제식주의 탈권위주의의 새로운 종교 운동이
라는 견해. 둘째, 아리안 유입 이전의 선주민의 문화에 기원한다는 견해. 셋
째, 갠지스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토속문화라는 견해 등이다. 이러한 견해의
공통점은 베다에 반(反)하고 있다는 점과 베다의 형식적 틀을 따르지 않는 자
유사상이라는 점. 그리고 정신적 구원의 방법을 개인적인 수행에서 찾는 점
등이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이하 Sn) 등 초기빠알리불전에서 사마나는 비불
교도 수행자를 말하기도 한다. 비구의 덕목을 열거하는 Tuvatakasutt 」에서
는 비구에게 사문[이하, 슈라마나나 사마나는 사문으로 통칭]이나 범부들로
부터 비난을 받더라도 거친 말로 대응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기도 하다.12)
붓다 또한 종종 비불교도들에게 사문으로 불리었는데,13) 최초의 제자인 오
비구들도 붓다의 성도 사실을 몰랐을 때, 그를 사문 고따마라고 불렀다.14)
Sn은 빠알리불전 가운데 붓다 당시의 상황을 가장 사실적으로 전하는 문
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당시 수행자들의 생활과 면모를 추적할 수 있는 다
양한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Sn의 일부는 따로 아쇼카왕의 비문에
도 언급되었기 때문에 불교 자료 가운데 최고층에 해당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15) Sn에는 바라문과 사문에 대해 정의하는 내용도 있다.
12) Sn, 932게.182.
13) Sn, 93.
14) Vinaya Ⅰ, 8
15) Muni-gāthā, Sn 207-221, Nālakasutta, Sn 699-723, Sāriputtasutta, Sn 955-975를 말한다.
“사비야야, 모든 악을 없애고, 더러움이 없으며, 잘 집중하여 자신을 유지
하고, 윤회를 넘어서서 독존(獨存, kevala)하며, 묶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자
를) 바라문이라고 한다. 평온하고 선악을 버리고, 오염 없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며, 생사를 초월하였다면 그러한 자를 바로 사문이라고 한다.”16)
16) Sn, 519-520게, 96.
여기서 바라문과 사문의 차별점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미묘하게 서
술을 다르게 할 뿐, 동일한 내용으로 보인다. 댓구로 이루어진 이 게송에서
바라문은 악을 없앤 자이고 사문은 선악을 버린 자이다. 바라문은 윤회를 넘
어서 독존하는 자이고, 사문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서 생사를 초월한 자
이다. 바라문과는 달리 사문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났으며, 현상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서 이를 초월한 자로 보는데 방점이 있다. 니까야에서 종종 보
이는 바라문에 대한 조소적인 시각을 고층의 빠알리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초기불전에서 브라흐마(Brahma)는 ‘훌륭한’ 또는 ‘최고’를 나
타내는 형용사로써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다.
Sn에는 제사를 마친 바라문이 제사음식을 공양하려 다른 바라문을 찾다
가 발견 못하자 삭발한 수행자를 발견하고는 바라문 가운데도 삭발한 자가
있음을 상기하고 다시 접근한다는 내용이 있다.17) 바라문 측에서는 오히려
사문을 그보다 하위의 수행자로 간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바라문
에게 자신을 후계할 아들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이를 위해 결혼
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주로 마을 안에서 생활하였고 그들의 가업인
제식에 종사하는 일도 그 안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사문에게 고립은 언
제나 독려되는 수행의 길이었다.18) 사문의 또 다른 명칭인 무니의 생활에 대
해서는 더 구체적인 지침도 나타난다.
17) Sn, 455-486게 p.79-86 참조. 또한 Sn.의 Vasalasutta에는 한 바라문이 붓다에게 “삭발승아 거기
서시오. 사문이여 거기 서시오. 천한자야 거기 서시오,”라며 함부로 대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Sn. 21
18) “혼자서 좌선하며 사문은 명상을 익혀라. 혼자 있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라. 혼자인 것이 해탈
에 이르는 길이다.”Sn.718, p.138.
“그는 탁발을 하고 나서 숲속으로 갔다. 무니는 나무 아래로 가까이 가서
좌선에 든다. 꾸준히 선정을 닦고 숲속에서 즐기고 그 자체에 지족하며 나
무 아래서 선정을 닦아라. 밤이 지나 새벽이 오면 마을 끝자락에 가도 된다.
그러나 마을로부터의 초대나 가져온 것에 너무 반겨도 안 된다.”19)
19) Sn,708,
빠알리불전에서 사문의 동의어로는 빠리바자(paribbāja), 무니(muni), 문다
(muṇḍa), 비구(bhikkhu), 따빠사(tapasa) 등이 있는데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
고 있는 수행자를 지칭한다. 각기 출가유행승, 현자, 삭발승, 탁발걸식승, 고
행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무니는 리그베다에도 언급되는데,
빤데에 따르면, 무니는 베다를 소개한 아리안들에서 괴기스러운 존재로 간주
되었다고 한다.20)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브라만 사제의 말끔한 이미지와는
달리 숲속에서 홀로 지내면서 흙검뎅이와 털로 뒤덮힌 고행자가 아리안 정
착민들에게 충분히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사문의 대표
적인 이미지는 은둔과 고립, 그리고 수행이었다.
20) Pande(1974), 258
[담마빠다(Dhammapada)](이하 Dp)에서도 바라문과 사문, 출가자에 대한
정의가 나타난다.
“악을 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이라고 하고, 평정하게 살아가므로 사문이라
하고, 자신의 번뇌를 몰아냈기 때문에 출가자이라고 한다.”21)
21) Dp,388게,109.
Dp의 비구품 과22) 바라문품 에는 이상적인 비구상과 바라문상을 논하
고 있는데 바라문과 사문, 비구는 모두 동등하게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Dp
에 '사문품'은 따로 없다. 사문은 비구와 같이 전문적인 종교인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광의로는 수행자 일반을 모두 포용하지만, 바라문이
나 비구와 같이 형식적인 입문식을 치르지 않은 수행자들을 일컫는 명칭이
라 할 수 있다. 붓다 재세시에 사문들은 혹독한 고행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자이나교가 가장 혹독한 고행을 했는데, 그들의 기준에서 수행자
를 보는 잣대는 보다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23) Dp의 바라문품 에도 당시
거짓 수행자를 조롱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22) Dp, 360-382게,102-107
23) “머리를 삭발한다고 사문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옴’을 염한다고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숲속에 산다고 무니가 되는 것이 아니며, 길상초로 된 옷을 입는다고 고행자가 아니다.”
Uttarādhyayana Sutta 25,31, Gaina Sūtras, 140
“결발(結髮)이나, 가문,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와 정
의가 있는 자, 청정한 자, 그가 바로 바라문이다. 너의 결발한 머리가 무슨 소
용이란 말인가? 무지한 사람아. 너의 사슴 가죽 옷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안에는 열정만이 가득하고, 밖으로는 꾸미고만 있구나.”24)
24) Dp, 393-394게, 110-111.
결발은 고행자들의 엉킨 머리를 의미하며, 사슴 가죽을 두른 자를 의미한
다. 이는 후에 쉬바(Śiva)파로 상징되는 고행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틸라(jaṭila)라 불리웠는데 바라문 수행자이다. 이들은 외형은 은둔처
(Āśrama)에 머무는 고행자이지만, 탁발유행승들과는 달리 비용을 받고 제식
을 행했으며, 아내도 소유했다.25) 이는 당시 다양한 형태의 수행자들이 난립
했었고, 그들이 이렇게 조롱과 질타를 받기도 했음을 시사한다. Sn에는 “재가
자일지라도 진실, 도리, 결단, 관용의 네 가지 법을 갖추면 저 세상에 가서도
슬픔이 없습니다.”26)라고 하여 재가자(gharamesin)에게도 깨달음의 길이 열
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Dp에는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평정하게 살아가
고 고요하고 단호하고 제어되며 청정범행을 하고, 모든 존재에 대한 폭력을
멈추면, 그는 바라문이고 사문이며 비구이다.”27)라고 하여, 재가자의 수행도
무시되지 않았음을 보이고 있다. 붓다의 제자 야사(Yasa)는 재가자일 때 이미
아라한과를 성취했고 이후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28) 빠알리불전에서 출가가
아라한과를 얻는데 필수로 간주되었는지는 일관적이지 않다. 「미린다팡하
(Milindapañha)」에서 미린다왕은 아유빨라(Āyupāla)라는 사문에게 재가자도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답변을 듣는다.29) 그러나 이후에 만난 나가세나
는 미란다왕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25) Bailey and Mabbett(2003), 117-118. 이 책에서는 sanyasa와 관련된 출가원형이 바라문
전통에서 기원전 5세기경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6) Sn,188게, 33.
27) Dp,142, p.21.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은 산따띠(Santati)라는 재가자가 좋은 옷을 입고 연회를
즐겼는데도 열반에 들을 수 있었던 인연을 설하고 있다. Dhammapadaṭṭhakathā, vol.3, 78-84.
28) Vinaya Ⅰ, 15-18
29) Milindapañha, 19-20
“재가자도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는가? 재가자의 징표는 아라한과 같지
않다. 재가자가 아라한의 지위에 오르면 그 날 출가하던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어야 한다. 이는 아라한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의 조
건에 있는 것으로서, 출가자에 비해 약하기 때문이다. 그 결점은 아라한의
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의 징표가 약하기 때문이다.”30)
30) Milindapañha, 265.
이를 통해 초기불전에서 재가자의 깨달음을 대하는 시각을 볼 수 있다. 가
능성은 열어두되 제한적이며, 출가를 함으로써 완성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 [마짓마니까야]에는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등 재가와 출가
자 모두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31) 그런데 여기서 우바새
우바이를 각각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곧 흰 옷을 입고 청정범행
(brahamcārina)을 하는 재가자와 흰 옷을 입고 성적향유(kāmabhogina)를 하는
재가자이다. 그들을 포함한 사부대중이 모두 열반을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
는 것이다.32) 재가자들 중에서도 독신의 삶을 살며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음
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배우자와 사는 일반 재가자라 할지라도 궁극
적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여, 「미린다팡하」에서 출가 이후에나 완성될 수
있다고 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31) Mahavaccagottasutta MN, I, 489ff.
32) MN. I, 493
Ⅳ. 출가와 재가 – 초기 대승의 보살
초기 빠알리 불전에서 사문은 반드시 불교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자로서 다양한 종파에 걸쳐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라문 계열에
도 은둔과 고행을 하는 수행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목표는 초자연적인 힘
을 성취하는 것이거나 신과의 합일이었으며, 그들은 여전히 아내와 재물을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 내부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발견했다. 재가
생활을 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자와 –물론 그 후 출가를 해야 한다는 조건
이 있지만 –, 또 가능하다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운동은 재가신도 속에서 일어났으며 재가와 출가를 구별하지 않
는 가르침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재가자와 출가자의 가장 상징적인 차이
점은 성적인 활동을 하는 자와 끊은 자라는데 있을 것이다. 「대지도론」에는
앞의 마하왓짜고따숫따 에서와 같이 우바새로서 음행을 끊은 자가 있음을
설하고 있다. 우바새는 오계를 다섯 가지 형태로 받았는데, 그 가운데 성적인
금욕을 지키는 우바새가 따로 분류되어 존재했다는 것이다.33) 오계 가운데
불사음계는 삿된 음행만 금하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음행 자체를 끊었
다는 것이다.
33) “이 다섯 계율은 다섯 가지 형태로 받는 법이 있나니, 다섯 가지 우바새라 한다. 첫째는 한 부
분[一分]을 행하는 우바새이고, 둘째는 적은 부분[少分]만 행하는 우바새이고, 셋째는 여러 부
분[多分]을 행하는 우바새이고, 넷째는 원만히 행하는 우바새이고, 다섯째는 음행을 끊는 우
바새이다. 한 부분만 행한다 함은 5계(戒) 가운데서 한 계목만 행하고 나머지 네 계목은 행하
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적은 부분만 행한다 함은 두 계나 혹은 세 계 만을 행하는 것이요, 여러
부분을 행한다 함은 네 가지 계율을 행하는 것이요, 원만히 행한다 함은 다섯 가지 계율을 다
행하는 것이요, 음행을 끊는다 함은 다섯 가지 계를 받은 뒤에 다시 계사 앞에서 ‘자신의 아
내와도 음행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是五戒有五種受 名五種優婆塞 一者 一分
行優婆塞 二者少分行優婆塞 三者多分行優婆塞 四者滿行優婆塞 五者斷婬優婆塞 一分行者
於五戒中受一戒 不能受持四戒 少分行者 若受二戒若受三戒 多分行者 受四戒 滿行者 盡持
五戒 斷婬者 受五戒已師前更作自誓言 我於自婦不復行婬 是名五戒 如佛偈說),「大智度論」,
T25, 158c.
반면, 「마하승기율」에는 당시 우바새가 오계를 완전히 지키지 않고 일부
만 지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34) 우바새가 오계를 모두 지키는 것이 필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에는 붓다의 최초의 재가
제자 야사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빠알리 비나야와는 달리 여기서 야
사는 사성제를 명료히 알고 예류과를 증득한 후에 우바새의 오계를 지키겠
다고 선언을 한다. 여기서 오계는 불살, 불도, 불야행(不耶行), 불망어, 불음
주이다.35) 사특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계율이 불사음을 대신하고 있다. 어떤
자는 오계와 상관없이 비구 못지않은 엄격한 수행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우바새에가 지켜야할 계의 기준이 높지 않거나 우바새에게도 제한적이나
마 아라한과 성취가 가능했음도 알 수 있다.
34) 「摩訶僧祇律」, T22, 306a.
35) “歸佛法僧 爲五戒鄔波索迦 不殺不盜不耶行不妄語不飮酒”,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T24.129a.
이러한 맥락에서 보살가나(boddhisattva-gaṇa)의 출현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승이 시작됨과 더불어 출가와 재가를 크게 구별하
지 않았던 보살들은 공식적으로 출가자만 성취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최상
의 경지를 재가자에게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더 나아가 히라카와는 대
승불교는 본래 재가중심의 불교였다고 주장한다.36) 그에 따르면 보살이 귀
의해야 할 대상은 성문승가(śravaka-saṅgha)가 아니고 ‘보살중(菩薩衆,
boddhisattva-gaṇa)’이었다. 성문승가는 비구 비구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6) 히라카와는 이어 “오래된 대승경전에서는 재가보살중심의 교리가 설해지고 있다. 물론 대승
도 나중에는 출가중심의 불교가 되지만, 이것은 재가불교가 점차 출가불교로 바뀐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히라카와 아키라, 이호근 옮김(1989), 291.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출가자도 될 수 있고 재가자가 될 수도 있다는 근거
는 ‘십선계(十善戒)’이다. 이 열 가지는 불살, 부도, 불사음, 불망언,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 부질투, 부진에, 불사견 등이다.37) 이 십선계는 오계에 대응
되는 대승의 대표적인 계로서 출가와 재가가 두루 함께 받는 계이다. 원칙적
으로 이 ‘십선계’를 출가보살에게 주는 것은 성문 승가가 아니다. 구족계가 아
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출가보살은 전통 교단의 인증 없이도 비구의 자격
을 얻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37) “今當盡形受十善道 我弟子某甲 從今盡形 不殺不盜不邪婬 是身善業 不妄言兩舌不惡口綺
語 是口善業 不嫉妒瞋恚憍慢邪見 是意善業 是則名爲十善戒法”, ?佛說未曾有因緣經?, T17,
582c
대승불교에서도 보살은 출가와 재가로 양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지
도론」에는 보살에 출가 재가의 2종의 보살이 있음을 명확히 밝히며, 재가보
살은 모두 우바새 우바이 가운데 존재하고 출가보살은 모두 비구 비구니 가
운데 존재한다고 설한다.38) 그러한 정황은 「십주비바사론」과 같은 문헌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두 문헌은 모두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38) 「大智度論」, T25, 85a.
그렇다면 대승에서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을 분류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
으며,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히라카와는 대승의 보살 관념은 ‘불탑신앙’을 배
경으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39) 스뚜빠(stūpa), 곧 불탑은 빠알리어로는 투
빠(thūpa)인데, 불교 이전에도 인도에서는 불탑과 유사한 형태의 쩨띠야
(cetiya), 곧 탑묘를 순례하는 풍습이 있었다. 마하빠리닛바나숫따
(mahāparinibbānasutta) 에서도 불자들이 쩨띠야 순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 나타난다. 붓다는 탑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으로 넷이 있음을 설하
는데, ⓵ 여래 아라한 정등각, ⓶ 벽지불, ⓷ 여래의 제자, ⓸ 전륜성왕 이
다.40)
39) 平川彰(1968), 779-780
40) DN.II, 141-142.
붓다의 입멸 후, 불탑신앙이 확산되면서 불탑에 바쳐진 공물이 쌓이고 이
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족계(upasampadā)를 받은
비구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었다. 게다가 붓다는
[열반후의] 여래의 유체를 공경하는 것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수행에 전념하
라고 당부한다. 끄샤뜨리야, 바라문, 장자의 현명한 자들이 이 일을 행할 것
이라고 설한다.41) 따라서 불탑 주위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전통적 의미의 비
구가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신앙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2) 탑사(塔
寺)란 비구의 승원이나 정사가 아니고 보살의 주거지와 함께 했던 것으로 보
이는 불탑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 머물면서 공물에 의지해 수행이나 설법에
몰입할 수 있었던 집단은 스스로가 언젠가는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며,
본래 성불 이전의 부처의 전생의 모습을 일컫던 보디삿드바(Boddhisattva) 곧
보살을 그들 자신에게 투영했던 것이다. 이 용어는 붓다의 전생담을 다룬 문
학작품인 ?자따까(Jataka)?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이 명칭은 대승불교 흥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히라카와는 기원전 1세기 초에 성립되었
을 것으로 추정한다.43)
41) DN.II, 141.
42) 平川彰, 沈法諦 역(1989), 15.
43) 平川彰(1968), 137
전통적인 의미에서 비구는 구족계를 받은 수행자를 말한다. 스스로 계를
지킨다고 해도 비구는 아니다. 스리랑카의 사서에는 이러한 자들이 비구 승
단에 들어와 승단을 어지럽혔는데 이들을 ‘적주비구(賊住比丘)’라 부른다고
했다.44)
44) 스리랑카의 사서 「디빠밤사(dipavamsa)」에는 「까따밧투(Kathavatthu)」의 편찬계기가 되었다
고 전해지는 승가의 와해도 이들 적주비구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그 당시 구
족계를 받지 않았던 자들도 상가 안에서 비구를 자칭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Dipavaṁsa
VII, 34-41.
초기대승불교 시기에 보살은 성문과 벽지불을 비판했고 기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견고한 서원이란 보살이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견고한 서
원이라 한다. 첫째 성문승에 나아가지 않음이며, 둘째 벽지불승에 나아가지
않음이며, 셋째 외도의 일에 나아가지 않음이며, 넷째 일체 악마의 일에 나아
가지 않음이며, 다섯째 인연이 없이 나아가지 않음이다.”45)라고 하여, 성문승
과 벽지불승으로 전환하는 것을 외도와 악마의 일로 전환하는 것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따라서 보살승들은 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
로 비구가 되는 의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45) “菩薩以五因緣故 名爲堅願 一於聲聞乘心不轉 二於辟支佛乘不轉 三於外道事不轉 四於一
切魔事不轉五無因緣不轉” 「十住毘婆沙論」, T26, 103c
대승불교에서 대부분의 보살은 성불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범부 보살이라
고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보살은 중생과 동의어로도 간주되었다. 「유가사
지론」에 나타난 보살율의계에서 보살은 칠중의 별해탈율의를 받는 자들로서
비구계, 비구니계, 정학계, 사미계, 사미니계, 우바새계, 우바이계 등 일곱이
있는데 이는 재가와 출가의 두 종류이다.46) 보살의 범주에 비구와 재가가 모
두 포함되므로, 불교 전반의 통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46) 「瑜伽師地論」, T30, 511a. 謂諸菩薩所受七衆別解脫律儀 卽是苾芻戒 苾芻尼戒 正學戒 勤策
男戒 勤策女戒 近事男戒 近事女戒 如是七種 依止在家出家二分 如應當知 是名菩薩律儀戒
반면, ‘십지경(十地經)의’ 주석서격인 「십주비바사론」47)에서의 보살은 주
로 출가보살을 말한다. 여기서는 비구와 보살이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십주비바사론」에서는 출가보살의 계법으로 다음의 12두타를 논하고 있
다.48)
48) 「십주비바사론」에서 비구가 행해야 할 12두타는 아란야처에 머물 것과 항시 걸식할 것을 포
함하여 다음의 열가지를 더 기술하고 있다. “十二頭陀法 上來以廣解二事 餘十頭陀功德亦應
如是知 何以故 是二則爲開十頭陀門 餘則易解 十頭陀者 一著糞掃衣 二一坐 三常坐 四食後
不受非時飮食 五但有三衣 六毳衣 七隨敷坐 八樹下住 九空地住 十死人間住” 「十住毘婆沙
論」, T26, p.114b25.
이는 ① 숲속에 머무는 것[住阿練若=空閑法] ② 걸식하는 것[乞食法] ③ 분
소의를 입는 것, ④ 하루에 한 번만 먹는 것 ⑤ 언제나 앉아있는 것 ⑥ 식후 때
가 아닌 때는 음식을 받지 않는 것 ⑦ 세 가지 옷만 지니는 것 ⑧ 솜털로 짠 옷
만 입는 것 ⑨ 펴놓은 대로 앉는 것49) ⑩ 나무 밑에 머무는 것 ⑪ 빈 곳에 머무
는 것 ⑫ 묘 사이에서 머무는 것 등이다. 이 12가지는 데바닷다의 5사(五事)와
비교해 볼 때 더 상세하고 더 엄격한 것으로 보인다. 그 5가지는 ① 목숨이 다
하도록 걸식하고, ② 목숨이 다하도록 분소의를 입고, ③ 목숨이 다하도록 맨
땅에 앉고, ④ 목숨이 다하도록 커드와 소금을 먹지 않고, ⑤ 목숨이 다하도
록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50)
49) “자리를 얻을 경우 앉고, 남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隨敷坐者 隨所得坐處 不令他起”는 의
미로 정사 내에서 침구가 주어지는 대로 받지 다른 이들을 법랍이 더 높다하여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十住毘婆沙論」, T26, 114c
50) “我今有 五法亦是頭陀勝法少欲知足樂出離者 盡形壽乞食 盡形壽著糞掃衣 盡形壽露坐 盡
形壽不食酥鹽 盡形壽不食魚及肉” 「四分律」, T22, 594a. 상응하는 Vinaya의 대응 부분은 다
음과 같다. “죽을 때까지 숲속에 머물러야 한다. 촌락에 들어가면 죄가 된다. 죽을 때까지 걸
식해야 한다. 청식을 받는 자는 죄가 된다. 죽을 때까지 분소의를 입어야 한다. 거사의
(gahapaticīvara)를 받으면 죄가 된다. 죽을 때까지 나무 밑에 머물러야 한다. 옥내에 머물면
죄가 된다. 죽을 때까지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 생선과 고기를 먹으면 죄가 된
다.” Vin. II, 197
5법의 경우 3가지가 먹는 것과 관련된 반면, 12두타법의 경우 ①, ⑤, ⑨,
⑩, ⑪, ⑫이 머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⑨의 항목만 정사에 머무는 것을 상
정한 계율일 가능성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숲속에 머무는 경우에 해당할 수
있는 항목이다. 출가보살들이 정사에서 생활했다면 ⑨를 제외한 항목은 굳
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출가보살들이 탑사에서 거주했다면 굳이 필요치 않을 계법
인데 왜 이러한 것들이 상정되었을까? 여전히 출가자들은 숲속에서 유행생
활을 하는 것이 권장되었던 것은 아닌가? 실제로 ?십주비바사론?에서 출가
보살은 숲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우선시 되지만, 질병을 앓거나 법을 듣거나
교화하기 위해서는 탑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51) 그러나 숲속에
머무는 보살은 ① 재가와 출가를 멀리 여의고, ② 심오한 경전을 독송하고자
하고, ③ 중생을 인도하여 아란야처의 공덕을 얻게 하고, ④ 밤낮으로 염불을
떠나서는 안 된다52)고 하여 여전히 탑사를 떠난 숲속의 은둔생활을 권장하
고 있다.
51) “見有十利故 常不捨空閑 問疾及聽法 敎化乃至寺”, 「十住毘婆沙論」, T26, 111c.
52) “菩薩住阿練若處者 一遠離在家出家 二欲讀誦深經 三引導衆生使得阿練若處功德 四晝夜不
離念佛”, 「十住毘婆沙論」, T26, 114a.
「십주비바사론」에 따르면 비구에게는 두 가지 옷이 있다고 한다. 거사의
와 분소의이다.53) 분소의는 불교발생기에서부터 사문들이 입었던 시체를 싸
거나 버려진 옷가지를 기운 누더기 옷이다. 거사의란 재가자의 옷을 입었다
는 말인데, 거사가 보시한 옷이라고도 하지만,54) 거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사의가 아닌 분소의를 굳이 보시했을까? 이는 출가보살 가운데 재가자의
옷을 입고 탑사에 거주했던 자들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53) “應著二種衣 一者居士衣 者糞掃衣”, 「十住毘婆沙論」, T26, 111c,
54) 平川彰, 沈法諦 역(1989), 209.
쇼펜은 ‘바르후트(Bhārhut)나 산치(Sāñcī)에서 발견된 기원전 120년에서 80
년 정도로 연대가 추정되는 최초기의 보시에 관한 비문들은 언급하며 불탑
숭배와 보시 등의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자들의 상당수가 비구 비구니였음을
지적한다.55) 전통적인 의미에서 비구와 비구니는 명칭 자체에서도 시사하듯
이 걸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오히려 보시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반
면 보살은 수행자를 위해 보시를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비구나 비구니
라는 명칭을 그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들의 정체를 히라카와와
같은 학자들은 출가비구로 간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56) 그러나 단지 그
들이 탑사에 보시된 공양물을 관리하고 축적했다는 사실만으로 재가자로 보
았다면 이는 인도 종교 일반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이다.
55) ‘스투파숭배와 보시와 복을 쌓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자들의 상당수가 비구와 비구
니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단순히 승려가 아니라 교학전문가로서 바나까(bhānaka, 誦出者),
수딴띠까(sutaṁtika, 誦經者), 삐따낀(peṭakin, 藏師), 빤짜네까이까(pañcanekāyika, 五部師)
등으로 불리웠다. 쇼펜은 다른 보시에 관한 비문들을 보아도 승가의 보시자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마투라 비문을 보아도 50퍼센트 이상의 보시자들이 비구와 비구니라고
지적한다. 대승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문의 경우는 그 비율이 더 올라가 70퍼센트 이상이 비
구나 비구니고 재가자는 20퍼센트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쇼펜은 인도불교의 맥락에서 숭배
와 보시와 같은 종교행위들이 근본적이고 절대적으로 재가자의 몫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비문에 나타난 기록들은 그와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Shopen
(1997), 30-34.
56) 平川彰, 沈法諦 역(1989), 15.
12두타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출가보살의 수행에 임하는 잣대는 붓다 재
세시 데바닷따의 5사에 상응하거나 더 엄격했다. 재가의 생활이 끼어들 여지
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살중은 탑사를 중심으로 교단을 형성했기 때문에 출
가와 재가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출가보살들은 주
로 숲(āraṇyāyatana:阿蘭若處)에 머물었는데 특히 숲에서 지내는 출가보살
들은 초기 사문들에 버금가는 엄격하고 혹독한 수행을 했던 것이다. 사문주
의에서 비롯된 출가주의를 엄격히 유지하고 있었던 불교는 대승불교에 이르
러 재가보살의 역할이 증대되었지만, 출가자의 권위는 계속 존중되어졌다.
대승불교운동의 동력을 재가보살에서 찾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관점도 있
다.
해리슨(Harison)은 “대승 초기의 발전을 위한 동력은 숲속에서 거주하는 승
려들에게서 왔으며, 많은 대승경전은 도시, 재가, 신애운동 등의 산물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는 오히려 불성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본래
의 영감으로 회귀하려는 엄격한 고행주의적 시도를 증빙하고 있다.”고 지적
한다.57)
57) Williams and Tribe(2000) 107 재인용.
초기의 대승교단에서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같은 계를 받았다는 것은 출
가자의 수행에 대한 부담은 내려가고 재가자의 역할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식으로 이해될 여지도 있다. 탑사에 머물던 보살들의 종교생활은 예불, 예탑
과 독송, 좌선, 재가신자에 대한 설법과 교화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들은 출
가보살로 대우받으며 재가신도를 지도하는 입장이었지만, 흰옷을 입고 청정
범행을 하는 「마하왓짜고따숫따」의 우바새나 「대지도론」에서 언급되는 단
음우바새와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숲속에
서 수행하던 출가보살들 가운데 탑사로 돌아온 보살들이 늘면서 자연히 탑
사에 머물던 보살들은 모두 출가보살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보살중이 점차 확대되면서 교단으로 유입되는 출가자가 증가하며, 이에
따라 성문승가의 구족계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들을
소승이라고 폄하했던 입장도 점차 누그러졌다. 탑사에 머물던 보살들과는
달리 숲속에서 수행하던 출가보살들은 엄격한 사문주의 수행의 명맥을 이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도시화와 경제적인 이유로 재가의 역할에 크게 의존했던 초기대승은 성문
의 유입으로 점차 초기의 반성문(反聲問)적인 성향이 누그러지며 다시금 출
가중심의 사문불교로 회귀하게 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여전히 출가전통
은 불교의 핵심적인 정체성으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Ⅴ. 수행과 성취 –불교딴뜨리즘의 싯다(Siddha)
나가르주나(Nāgārjuna)는 전 장에서 소개된 ?대지도론?과 ?십주비바사론?
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인도불교에서는 중관철학의 대
학승으로 간주되는데, 그가 구족계를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티벳불교에서는 그를 싯다(Siddha)로 보고 있다. 싯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성취자라 불리며 수행을 완성한 자로 간주되지만, 실제적으로는 딴뜨리즘의
수행자를 일컫는다. 티벳불교는 대승불교와 딴뜨리즘(Tantrism)을 뚜렷히 구
별하지 않았다. 물론 불교사에서 다수의 나가르주나가 존재했기 때문에 동
일인인지 아닌지는 명확치 않지만, 티벳역사가들은 중관의 대가인 그를 그들
전통의 싯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상가(Asaṅga)나 마이뜨레야나타
(Maitreyanātha)도 딴뜨리즘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58)
58) Bhattacharyya(1999), 212
인도불교는 굽타왕조에 이르러서는 한편으로는 중관과 유식과 같은 고도
의 철학체계를 전개해 나가면서 학파불교로서의 전통을 유지했다. 반면 바
라문교는 토속신앙을 흡수하며 사회관습으로서의 힌두이즘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와 함께 당시 민간에서 성행했던 주술과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딴뜨
리즘이라는 형태로 59)급격히 확산되었다.
59) 히라카와 아키라, 이호근 옮김(1991), 288-289.
딴뜨리즘의 기원을 아리안 유입 이전의 인도의 원주민 문명에서 찾는 경
우도 있지만, 붓다 시대에도 만뜨라(mantra), 다라니(dhāraṇi)와 무드라(mudrā
:印契) 및 만다라(maṇḍala) 등이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라흐마잘
라숫따(Brahmajālasutta」는 다수의 위드야(vidya; 明呪)에 대해 언급하고 있
다.60) 붓다는 주술이나 주문을 금지했지만 치병을 위해 민간에 널리 유포되
었던 민속을 빠릿따(paritta:防護呪)의 형태로 수용했다.
60) DN. I, 1-46
빠알리문헌에는 신족(iddhi:神足) 즉 수행을 통해 생기는 초자연적인 힘
인 신통에 대한 내용도 종종 발견된다. 붓다는 신통을 경계했지만, 때로는 직
접 행했다는 내용이 경전 안에 종종 나타난다.61)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
히 하지 않았던 초기대승불교의 교단(敎壇) 안에 일상생활과 직결되는 민간
신앙이 침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4세기 무렵부터 인도종
교에서는 쉬바신과 비슈누신, 여신을 중심으로 박티(bhakti; 信愛)가 유행하
며 의식과 주술 등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밀교(密敎)가 등장하게 된다. 히라
카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61) Mahāpadānasutta는 붓다가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으며, Pāṭikasutta는 신
통력을 겨뤘을 뿐만 아니라 월등한 능력을 과시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차례로 DN. II,
1-54; DN. II, 1-35 참조.
“밀교에는 대승불교의 교리가 농후하게 스며있다. 특히 중관사상이나
유식의 교리가 많이 채용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인도불교에 있어서 7,8세기
이후에는 중관파나 유가행파의 학승이 동시에 밀교의 수법자이기도 한 경
우가 많다. 그 점에서는 대승불교와 밀교는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확실히 기초교리에는 양자는 동일하며, 밀교는 대승불교의 기초교리 위에
서 성립한 상부구조라 할 수 있으나 신비주의적인 점에서 행법이 다르기 때
문에, 양자의 종교체험이 달라지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밀교라는 명칭으로 익숙한 불교딴뜨리즘은 바즈라야나
(Vajrayāna), 곧 금강승(金剛乘), 또는 만뜨라야나 (Mantrayāna) 곧, 진언승(眞
言乘)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리운다. 밀교의 수행은 유가행파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진언이나, 다라니, 만다라를 활용하여 번뇌를 제거하여 살아있는
동안의 성불을 목표로 한다.
딴뜨리즘은 우빠니샤드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해탈을 추구하면서도 현
세를 부정하지도 출가를 지향하지도 않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오히려 현세긍
정의 입장에 섰다. 정통 바라문주의에서 제식집행, 재생(dvija)의 자격이 상위
3계급(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의 남자에게만 제한되었던 반면, 딴뜨리
즘에서는 계급,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격이 인정되었다. 또
한 성적인 교섭 등 정통적 수행자에게 최대로 금기시되는 것이 딴뜨리즘에
서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수행되었다.62)
62) 이미 Culadhammasamādānasutta에서는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젊은 여성 유행승과 욕락을
탐해도 무해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MN, I, 305.
6세기말경에는 쉬바(Śiva)신의 배우자 여신의 성적 에너지에 대한 숭배와
더불어 딴뜨리즘이 불교와 힌두교 모두에 가미되기 시작했다.63) 딴뜨리즘
수행자는 해탈뿐 아니라, 성취법(sādhana)을 통해 얻어진 신통력(siddhi)의 획
득도 목표로 하였다. 싯다(Siddha)는 이러한 신통력을 성취한 자라는 의미이
다. 인도에서 ‘싯다’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자들은 자이나교도로서 ‘성
공적인 성자들’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드슨에 따르면, 기원전 2세
기에서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리사주의 부바네스와르의 북쪽 우다야기
리언덕에 있는 석굴의 비문은 ‘아라한에게 예배하고 싯다에게 예배한다
(namo aranatānaṁ namo savasidhānaṁ).’는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싯다가 자
이나 성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자이나교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호칭인 아라한뜨(Arahant)와 띠르탕까라(Tīrthaṅkara)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64)
63) Waddell(1972), p.14
64) Davidson(2004), 173.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과를 얻으려면 비구나 비구니가 되어야 하거나, 적
어도 아라한과를 얻은 직후에라도 출가를 해야 하는데 반해, 불교딴뜨리즘에
서 싯다는 출자자이던 재가자이던 상관이 없으며, 신분계층에도 구애받지 않
았다.65)
65) Davidson(2004), 335
「바즈라바이라와딴뜨라(Vajrabhairavatantra)」는 여러 의식들에 관해 설명
한 후, “이러한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져서는 안 되며 이런 행위를
하는 어리석은 신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했으며 탱화도 공
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비밀주의를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은 암시
적이고 간접적이며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형태의 다양한 언어(saṁdhyābhāṣā)
를 쓰는 것이었다.66)
66) Williams and Tribe,(2000), 198.
「구흐야사마자딴뜨라(Guhyasamājatantra:秘密集會)」에는 연등불(Dīpaṅkara;
燃燈佛)에서 가섭불(Kāśyapa-Buddha:迦葉佛)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아직
충분히 깨어있지 않았기에 마하구흐야빠다르타(Mahāguhyapadārtha: 大秘密
義)가 설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67) 후에 요기니딴뜨라의 등장과 더불어 수
행자의 특징들도 변화한다. 주로 화장터에 머물며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행
동하는 비승원적 비독신의 남녀요가행자들이 싯다로 불리웠던 것이다. 문헌
기록들은 재가자와 승원의 금강수행자가 함께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경우는 비구인 금강승보다 재가자인 금강승 스승을 더 선호하는 비구
를 비판하고 있거나, 결혼한 금강승 스승이 승원의 정화의례를 집전하는 것
을 비난하고 있다.68) 이러한 타락은 대승불교 초기에 보였던 재가자와 출가
자의 구분이 모호했던 상황과 대비된다. 불교딴뜨리즘의 싯다의 경우는 조
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사문주의를 답습했던 이전의 불교도와는 달리 독신
의 수행 전통이 흔들렸다. 이는 성적인 활동이 수행법의 일환으로 활용된 것
에 기인한다.
67) Guhyasamāja Tantra, 144.
68) Williams and Tribe,(2000), 238-239
딴뜨리즘에서 여성은 때로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Tārā)와 바즈
라요기니(Vajrayoginī)와 같은 여존들은 주존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69) 불
교딴뜨리즘에서 여성의 역할은 중요했으며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현실의 삶이 아닌 초월적 영역에 대한 주관적
관점에 불과하다. 불교딴뜨리즘의 수행은 본질적으로 남성을 위한 것이었
다. 요기니딴뜨라의 경우 남성수행자가 재가자가 아닌 이상, 여성은 딴뜨릭
배우자로서 일시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출가냐 재가냐의 문
제라기보다는 비구니, 우바이, 사미니 등으로 여성을 동등한 상가의 구성원
으로 인정했던 불교전통과는 다른 모습으로, 수행의 단계를 올리기 위해 여
성을 조력자로써 이용하는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불교 내부에서도 여성
의 지위가 높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언제나 개별적 수행의 주체로서 인정
되었다. 불교딴뜨리즘에서 수행의 성취라는 이상이 극대화되고 이를 위해
재가의 성역할마저 도구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사문주의에서 비롯된
불교 수행 전통의 심각한 변형이며,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간에 여성에 대한
바람직한 처우가 아니다. 남성중심과 출가주의의 왜곡은 바라문교와 사문주
의의 중간에 위치한 불교딴뜨리즘의 한계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69) Williams and Tribe,(2000), 240.
Ⅵ. 결론
서론에서도 언급된 인더스문명의 유물인 빠슈빠띠가 세겨진 인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도인들은 개인의 수행과 명상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인도토양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의 공동 목표
는 해탈이다. ‘유즈(Yuj)’는 요가(Yoga)의 어원이다. 수행을 의미하는 대표적
인 용어이다. 이는 ‘묶다’라는 뜻으로 ‘감관의 제어 또는 통제’라는 의미로 해
석된다. 대승불교의 요가짜라(Yogacara) 곧 유가행파도 같은 어원에서 파생
된 명칭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어느 시대 어느 종파이든 수행을 떠나
서는 성립할 수 없다.
불교의 수행문화는 사문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고 그 핵심은 출가수행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가자들의 수행 역량은 무시되지 않았다. 우리는 초
기불교 문헌을 통해 아라한과를 성취한 재가자의 사례와 청정범행을 하는
우바새의 존재를 확인했다. 대승불교의 시원과 보살의 출현은 모든 불교개
론서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이에 대해 문헌적인 증거가 빈약하다
는 비판도 있다.70) 대승초기에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분이 모호했던 상황도
탑사를 중심으로 엿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탑사에 거주하던 재가자들 가
운데는 청정범행을 하여 출가자로 간주되어도 문제가 될 바가 없던 자들이
존재했었고, 또한 출가자 가운데는 숲속에서 혹독한 수행을 하던 비구 외에
도 몇 가지 이유로 탑사에서 생활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자들이 있는데, 그들
은 탑사의 운영과 관리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재가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대승초기에 보살승의 위상이 높아졌음은 명백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
이 성문승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또한 이런
자료와는 대조적으로 숲속에서의 출가수행이 강조되고 권장되었음도 확인
했다. 마지막으로 대승의 전개와 더불어 등장한 불교딴뜨리즘에서 수행이
더욱더 중시되면서도 출가와 재가가 혼용되는 모습의 싯다의 수행양상을 살
펴보았다.
70) Shopen(1992), 31.
이상의 전개는 인도종교의 토양에서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아리안계의 브라흐마나와 토착문화에서 비롯된 슈라마나의
인도적 융합이라 볼 수 있다. 가계의 대를 이어 자신의 종성을 세습하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간주했던 자들과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집
착의 근원으로 간주했던 자들의 수행관의 절충과 조율은 필수적인 과정이었
다.
우리는 대승불교초기에 보다 엄격한 두타행이 강조되었다는 것도 확인했
다, 곧 출가수행의 사문전통은 대승까지 줄곧 이어져왔던 것이다. 인도의 불
교딴뜨리즘은 사문주의에서 비롯된 출가주의를 답습하면서도 초기대승불교
와는 대조적인 방향성을 제시한다. 요컨대 재가를 수용한 듯 했으나 출가주
의를 재차 불교의 핵심 정체성으로 자리 매긴 초기대승불교의 보살중의 양
상과는 다르게, 성취자인 싯다가 되기 위해서는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
거나, 재가의 삶을 활용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재가 수행자는 인도불교의 전개에 있어 대중(gaṇa)를 형성하는 주요 멤버
였으나, 엄밀히 상가(saṅgha)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도불교 수행
문화를 이끄는 주요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 발생기에서
대승에 이르기까지 인도불교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 역할은 사문 곧 출
가자에게 있었다. 초기 대승에서 재가의 역할이 증대되고 강조되었음에도
실제 수행의 현장에서는 오히려 더 엄격한 출가수행이 독려되었다는 사실에
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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