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삼장 법사 현장

수선님 2024. 5. 5. 13:24

삼장 법사 현장

 

현장법사(玄奘: 602년 ~ 664년)는 수나라 시대 강릉 현령 진혜의 넷째 아들로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종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둘째 형 진소를 따라 열한 살 때 출가했다. 그가 공부에 매진할 당시 당나라에는 제대로 번역된 불경이 많지 않아서 교리 해석에 많은 논쟁이 따랐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구법승들이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에도 서역행을 고집했다. 현장 또한 당시의 구법승들처럼 불교의 발원지인 천축국으로 가서 불경을 구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무산되었다가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야 서역으로 떠날 수 있었다.

현장은 불경 번역가로 흔히 현장삼장(玄奘三藏)이라 한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하다가 13세에 승적에 이름을 올려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게 되었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삼장법사인데,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하여 얻게 된 별칭이다.

현장의 초상화

현장법사는 스승과 경전을 찾아 16년간 중앙아시아 지역과 인도 등을 여행했다. 그는 여행 도중 도적을 만나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고, 본국의 서역 여행 금지령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날란다(나란타)에서는 예언에 등장하는 승려로 여겨져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최고의 실력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다.

현장이 불경을 지고 귀국할 때의 모습

645년 현장법사는 여행을 마치고 많은 경전과 율(律), 논(論), 불상, 사리 등을 가지고 당나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당 태종이 그에게 구법 여행을 기록할 것을 명하자 열두 권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여행한 138개국의 지리, 기후, 산물, 정치, 교통, 언어, 전설 등과 사찰·승려의 수, 인물 등 불교적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대당서역기》를 편찬했다. 《대당서역기》는 7세기 당시 대외 전략의 방향을 고심하고 있던 당나라 조정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1,500년 전에 쓰인 《대당서역기》의 여정을 좇다 보면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건 한 고승의 용기와 열정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목숨을 걸고 얻어 낸 깨달음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다. 현재에도 《대당서역기》는 당나라와 서역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인도, 네팔, 파키스탄 등과의 교역사 및 고고학 사료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현장법사는 664년 2월 5일 열반에 들기 전까지 20여 년간 1,335권이나 되는 불경을 번역하여 불교가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드는 데 이바지했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 또는 629년에 천축(天竺, 인도)에 들어가 645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사망 시까지 만 19년에 걸쳐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며 당시까지의 번역법이나 번역어에 있어서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종래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또 그는 자신의 천축 여행의 견문기를 《대당서역기》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이 책은 당시의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이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현장의 천축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시대에 《서유기》라는 소설이 생겨났다.

 

행적

 

현장은 627년 (일설에는 629년) 천축으로 출발하여, 쿠차와 투르판 등의 서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행로를 거쳐 천축의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서역구법은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라는 소설로도 각색되었는데, 그의 흔적인 쿠차와 투르판 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국문태의 초대를 받아 630년 2월경에 도착하여 1개월간 고창국에 들러 이 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했는데, 그때 법회를 열었던 건물은 복원이 되어 있다. 고창국의 왕 국문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노잣돈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후 10여 년 유학을 끝내고 불경을 가지고 다시 고창국에 들러 당나라로 귀환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현장법사의 모국인 당나라에 의해 고창국이 멸망한 뒤였고 사람들도 다 떠난 뒤였다. 할 수 없이 현장은 고창국에 들러지 않고 바로 당나라로 귀환하게 된다.

 

저서

 

《대당서역기》: 총21권이며, 그의 17년간(629-645)의 구법 행적을 정리한 것으로 그가 정리하여 그의 사후 646년에 완성되었다. 대당서역기는 현장의 직간접 경험을 한 138개국의 풍토와 전설, 관습 등이 정리되어 있는 방대한 서적이다. 이것은 고대 및 중세 초의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역사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문헌기록이 미흡한 인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1차적인 사료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현장은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이나 역방하면서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써 할거로 점철된 인도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은 삼장법사로서 묘사된다.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가던 도중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건 죄로 산 밑에 500년째 깔려있던 손오공의 형벌을 면제해주고 손오공을 통제하기 위해 손오공에게 금고아를 머리에 씌운다. 그 이후 손오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천축으로 향하던 도중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 일행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삼장,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여러 요괴들을 만나지만 손오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일방적인 것은 거의 전부의 요괴는 모두 손오공이 무찌른다는 것이다.

 

장안을 떠난 현장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꿈에 그리던 나란타 대학에 도착했다. 나란타 대학은 불교역사이래 최대의 승가대학이었다. 배우는 비구들만 1만 명이 넘었으며 불교철학은 물론 싼스크리트 문법 · 약학과 의학 · 논리학 · 천문학 · 수학 · 주술 · 불교예술 · 베다의 학문 등 오명학을 두루 수학하는 불교종합대학이었다.

 

중국에서 젊은 비구가 수만리 고행 길을 지나 나란타에 도착하자 100여명의 승려와 신도들이 영접하고 찬탄 하였다. 나란타 대학의 학장이신 계현법사(정법장 · 실라바드라)를 찾아뵙게 되었다. 현장은 예물을 바치고 무릎을 대고 기어가 스승의 발에 입을 맞춘 후에 몸을 일으켜 정중한 자세로 큰절 3배를 올렸다.

 

106세의 계현법사는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 “저는 당나라에서 왔으며 스승님께 유가사지론을 배우고 싶어 사막을 건너고 물을 건너 3년을 걸려 왔습니다.”

 

계현법사는 현장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내가 3년 전에 병세가 심해지고 고통이 커서 육신을 떠 날려고 하였다. 그날 밤 꿈에 세분의 보살이 나타나 말하였다. 계현법사는 전생에 백성들을 많이 괴롭힌 왕이었기 때문에 그 업보로 임종의 고통을 받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 유가사지론을 배우러 비구가 출발 하였다. 법사는 때를 기다려 그에게 불법의 요체를 전수해야 할 것이다.”

 

106세의 계현법사는 현장을 보는 순간 병세는 씻은 듯이 좋아지고 유가사지론을 전수할 인연이 온 것을 기뻐하였다. 계현법사의 스승은 다르마팔라(호법)이다. 호법은 디그나가에게 유식철학과 인명논리학을 전수받았으며 디그나가의 스승은 무착과 세친 형제로 유명한 바수반두와 아상가이다.

 

무착은 매일 밤 꿈속에 도솔천에 올라가서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들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기록 하였다. 이렇게 백일 간 꿈속에서 전수받은 미륵보살의 가르침이 유가사지론 100 권이다. 유가사지론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무착이 꿈속에서 받아 적은 희귀한 논서 이다.

 

계현법사는 현장을 위하여 15개월에 걸쳐 유가사지론을 세 번 강설하셨다. 현장은 스승을 찬탄하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정법장 스승께서는 삼승의 가르침은 물론 외도의 단견과 상견에 대한 내용을 숨기지 않고 모두 설법해 주셨습니다. 품으신 고결한 뜻과 덕행은 널리 알려져 내외가 모두 귀의했고 인도의 위대한 스승이 되셨던 것입니다.”

 

 

중국 서안 대안탑에 세워져 있는 현장의 동상

현장은 대승불교철학은 물론 소승의 18개 부파 철학까지 모두 섭렵하여 나란타 대학의 10대법사로 손꼽히게 되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현장을 나란타의 도반들은 놓치지 않으려고 두손을 꼭 쥐었다. 중국은 변두리 나라이고 불법을 홀대하니 부처님 태어나고 훌륭한 스승이 많은 이곳에서 함께 공부하고 떠나지 말 것을 애원하였다.

 

현장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인도에 와서 위대한 스승님을 뵙고 불법의 진수를 배울 수 있는 행운을 감사하고 이 깊은 가르침을 중국에 소개하고 전하는 것이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귀국 후 10년 후에 계현법사의 열반소식을 듣고 현장은 울부짖으며 외쳤다.

 

“제 마음이 쪼개지는 것을 억누르려 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중생들이 탄 배는 고해에 침몰했고 천인들과 사람들은 이제 두 눈을 잃었습니다. 어찌 입적의 고통이 이처럼 빨리 왔단 말입니까? 스승님께서는 아리야 데바의 덕을 물려 받으셨고 나가르주나의 지혜를 이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불법의 깃발을 높이 들어 외도의 본거지를 때려눕히고 이단들의 홍수 같은 물줄기를 돌려놓았습니다.

 

아, 탕탕 하시도다. 오, 외외 하시도다. 정법장께서는 실로 불법의 당간이시고 큰 지혜의 바다였습니다. 정법장께서 주신 연꽃줄기와도 같은 가르침은 아직도 은근히 제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아, 어찌합니까. 어찌하겠습니까? 연모의 마음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입적소식을 듣고 연모하는 마음을 표현한 현장의 절절한 구도심이 전해진다. 현장은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며 이렇게 외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는 순간 이 몸은 대체 어느 악도에서 헤매고 있었단 말인가? 부처님께서 살아계시던 정법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장의 눈에서는 성불대탑을 참배하는 감동과 자신의 입장을 슬퍼하는 비탄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삼장 법사 현장

삼장 법사 현장 현장법사(玄奘: 602년 ~ 664년)는 수나라 시대 강릉 현령 진혜의 넷째 아들로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종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둘째 형 진소를 따라 열한 살

caf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