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인천보감

수선님 2024. 6. 2. 11:24

인천보감

해제

인천보감 (인천보감) 은 세상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일들을 모은 것으로서, 주로 승려들의 이야기이며 유교와 도교에 관계되는 옛사람들의 이야기도 수집하여 편집한 책이다.

편집자인 담수 (담수) 스님은 서문에서 이 책을 편집한 의도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옛 사람들의 훌륭한 일을 널리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비석이나 어록, 짧은 기록, 또는 직접 들은 이야기들을 시대의 앞뒤없이 보이는대로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대혜스님의 정법안장 (정법안장) 을 본따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선 (선) 을 닦는 이들이 오로지 선만을 주장하는 폐단을 경계하고 옛 사람들은 선과 율 (율) , 그리고 유교와 도교까지도 널리 터득하였음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담수스님이 사명 (사명) 절강성 (강성) 에 주석하던 소정 (소정) 3년 (1230) 에 스스로 서 (서) 를 쓰고, 난정 유비 (난정유비) 의 서 (서) 와 고잠 사찬 (고탁사찬) 의 발 (발) , 그리고 영은사 묘감 (묘감) 의 착어 (착어) 를 붙여서 2권으로 간행하였다.

옛부터 중국 총림에서는 이 책을 선림 7부서 (선림칠부서) 중의 하나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인천보감의 내용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불교의 스님들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천태종 스님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맨 처음에 소개되는 담광법사 (담광법사) 에서부터 열번째인 사명지례 (사명지예) 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태종과 관련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122단락 중에서 천태종에 관계되는 것이 약 40개이니 거의 13이나 되는 셈이다.

여기 수록된 천태종 스님들의 법계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이 법계도를 통해서 보면 이들은 모두 이른바 산거파 (산거파) 인 사명지례의 법손이며, 그 중에서도 선종과의 접근을 강조한 남병 (남병) 의 후손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어떤 스님들은 법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법계도에 들어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이 법계도에서 볼 때 맨 마지막에 있는 북봉인 (배봉인:1148~1213) 은 인천보감이 편집되기 불과 17년 전에 입적하였다. 그러나 선종의 스님으로서 담수 (담수) 스님에게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스님은 불조 덕광 (:1121~1203) 인데 약 50여 년 이전의 일이다.

둘째는 스님들이 속해 있는 종파에 따라 호칭에 차이가 있다. 즉 선종에 속한 스님은 선사 (선사) , 율종계통은 율사 (율사) , 그리고 천태종 계통은 법사 (법사) 라 하여 종파가 분명히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태종 초기의 스님인 남악 (남악) 의 경우에는 「남악선사'라고 한 경우도 있다.

셋째는 선종과 천태종 스님들과의 교류를 비롯하여 다른 종파간의 교류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종경록 (종경록) 에 대한 이야기로서 끝맺는데, 종경록은 선과 교, 천태, 유식, 화엄 등을 하나의 근원인 일심 (일심) 으로 귀결시키고 있는 책이다.

인천보감을 편집한 담수 (담수) 스님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임제종 대혜파인 소옹 묘담 (:1177~1248) 의 법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천보감에는 천태종 산거파의 스님들이 거의 모두 수록되어 있고, 또 북봉인스님까지 수록된 점으로 보아 담수스님은 이들과 관계가 깊은 분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사찬 (사찬) 의 발문에서 보면 "사명 땅 선객 담수공은……인천 (인천) 의 안목을 열어주었기에 보감 (보감) 이라 이름짓고 원각사 (원각사) 로 달려가 간행하고자 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본문 속에 소개된 원각사 (No.93) 는 천태종에 속한 절이다.

담수스님이 인천보감을 간행하기 위해 찾아간 원각사와 본문 중의 원각사와의 관계, 나아가 담수스님과 천태종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더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인천보감 (인천보감) 서 (서)

옛분들에게 있었던 훌륭한 일들이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는 것은 후학의 잘못이라고 들었다. 3교 (삼교) 의 훌륭한 분들 중, 불교에서는 한마디 말씀 한 가지 행이 모두 비석이나 어록, 단편 등에 실려 있으나 사방에 흩어져 있어 빠짐없이 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덕스러운 이가 묻혀서 혹은 들어보지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항상 총림에 드나들면서 더러는 큰스님들의 법문 중에서 듣기도 하고 혹은 찾아다니면서 구하기도 했는데, 모두가 의지를 북돋아주고 후세의 거울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그때 기록해 둔 것이 총 수백 토막이 되었는데, 그것을 「인천보감 (인천보감)」이라고 이름붙였다. 여기서 인물에 등급을 매기거나 선후를 나누지 않았으니 대혜 (대혜) 스님의 ꡐ정법안장 (정법안장) '을 본땄다.

옛날에는 선을 닦는 자들도 누구나 경학과 율법을 공부하였고 경율을 하는 자들도 모두 힘써 선을 닦았으며, 나아가 유가나 노자의 도에서도 터득하여 철저히 깨달았다. 지금처럼 한 가지 방법만 오로지 하고 한 가지 맛에만 빠져 마치 어울릴 수 없는 물과 불처럼 서로를 헐뜯지는 않았다. 아! 옛분들의 행이 어려운 것이 아닌데,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를 비하해서 옛분들을 쫓아갈 수 없다고들 하니, 그들은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같은 사람인 줄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스스로 분발하는 이가 있다면 옛분들과 무엇이 다르랴.

이제 이 책을 간행하여 이 내용을 널리 펴는 것은 후학에게 보여서 그들이 선배들의 모범을 알아 모두 도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니, 고명한 분들은 나무라지 마소서.

소정 (소정) 3년 (1230) 결제일에,

사명 (사명) 사문 담수 (담수) 는 서문을 쓴다.

서 문 (2)

이 책의 내용은 모두 불가(불가) 의 묘약이며 세상을 구제하는 것으로, 병자에게 먹이면 곧 병이 낫게 되고 심지어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까지도 낫게 할 수 있다.

사명도인(사명도인) 담수(담수:송대 임제종) 스님이 오랫동안 강 건너, 바다 건너 다니면서 이 약을 골고루 맛보았는데 번번이 효험을 보았다.

때문에 마땅히 간행하여 길이 후손에게 복을 내려주려 하는 것이니,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문을 쓴다.

소정(소정) 경인년(1230) 6월 보름

난정 유비(난정유비) 는 쓴다.

발 문 ⑴

옛 사람은 마음 닦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음 닦는 바른 행은 생각과 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를 세상에 알려 후생에게 모범이 되려 하는데, 여기에 어찌 선종 율장 교학, 유학 불교 도교의 차이가 있겠는가. 지극히 공정하면 천하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다.

사명 (사명) 땅 선객 담수공 (담수공) 은 여기에 두터운 뜻을 두고서 총림을 두루 다니며 현묘한 기연을 빠짐없이 봐오면서 가는 곳마다 보고 들은 바를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이 인천 (인천) 의 안목을 열어주었기에 「보감 (보감)」이라 이름짓고 원각사 (원각사) 로 달려가 간행하고자 하였다.

이는 선배들의 감추어진 덕과 숨겨진 빛을 밝혔을 뿐 아니라 장차 동지와 더불어 힘써 이 길을 따르고자 함이다.

나는 그의 말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책 말미에 발문을 쓰는 바이다.

때는 소정 (소정) 경인 (1230) 7월 14일, 고잠비구 사찬(고탁비구 사찬) 은 만수사 (만곤사) 귀운당 (귀운당) 에서 쓰노라.

발 문 ⑵

담수 (담수) 서기가 옛 일을 모아 책으로 엮어서 이를 「인천보감」이라 하고 나에게 평 〔착어〕 을 청하기에 한마디 써 주었다.

옛 스님의 사정을 알고 나니 부끄럽기만 한데

우물 속에 빠진 몸이 어찌 난간에 기어 오를 수 있으랴

본래 한 점의 마음은, 태양처럼 밝은데

변방사람인지 본토사람인지를 비춰 본 적 있으랴.

선덕정지사후안 나감낙정갱반난

본래일점명여일 호한하증자조간

소정 (소정) 경인 (1230) 8월,

영은사 (영은사) 주지 묘감 (묘감) 이 쓰다.

1. 승보 /담광(담광) 법사

당나라 덕종(덕종:779~805) 이 담광(담광) 법사에게 물었다.

ꡒ스님네들을 어째서 보배라 합니까?"

담광법사가 대답하였다.

ꡒ구체적으로 말해서 스님네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 모두를 보배라 합니다.

첫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단박에 깨쳐서〔돈오〕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대열에 들어간 분을 선승(선승) 이라 합니다. 둘째는 이해〔해오〕 와 실천〔수행〕 을 동시에 행하여 세간 흐름에 들어가지 않은 분을 고승(고승) 이라 합니다. 셋째는 계(계) ․정(정) ․혜(혜) 를 고루 갖추어 설법솜씨가 뛰어난 분을 강승(강승) 이라 합니다. 넷째는 견문이 깊고 알차서 옛일로 지금일을 검토하는 분을 문장승(문장승) 이라 합니다. 다섯째는 인과(인과) 를 알고 자비와 위엄을 함께 쓰시는 분을 주사승(주사승) 이라 합니다. 여섯째는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여 부처종자를 기르는 분을 상승(상승) 이라 합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마침내 천하에 조서를 내려 승려되는 것을 허락했다

「당승전 (당승전)」

2. 법화선문 /대선(대선) 선사

대선(대선) 선사는 남악(남악) 선사의 상수제자로서 법화선(법화선문) 을 닦아 자비삼매 (자비삼매) 를 얻었다. 당시 형양내사(형양내사) 정승고(정승광) 는 현령 진정업(진정업) 에게서 스님의 덕을 칭찬하는 말을 늘 듣기는 했었지만 믿음을 낼 생각은 없었다. 하루는 진정업과 함께 사냥을 나가서 사슴 한 떼를 포위하게 되었다. 정승고가 진정업에게 물었다.

ꡒ그대가 늘 대선스님은 자비삼매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오늘 저 사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진정업이 좌우 몇 사람을 거느리고 함께 소리 높이 ꡒ나무대선선사"를 염하니 즉시 뭇사슴들이 하늘로 치솟아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자 정내사는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국청석각 (국청석각)」

3. 두타행 /좌계 현랑 (좌계현랑)

좌계존자 (좌계존자) 의 법명은 현랑 (현랑:673~754, 천태종 제5조) 이며 조상 (조상) 사람이다. 천궁사 (천궁사) 혜위 (혜위) 법사에게 불법을 배워 종지를 얻고 바위산 골짜기에 숨어 살았는데, 원숭이가 열매를 따가지고 와서 발우에 바치기도 하고 날아가던 새가 와서 법문을 듣기도 하였다.

비구에게 필요한 열 여덟 가지 물건만을 가지고 12두타 (십이두타) 를 행하면서 30년을 이렇게 살았으며, 세세한 수행과 몸가짐까지도 모두 계율을 따랐다. 이화 (리화:당나라 문인) 는 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ꡒ누구에게 선법을 전해 준 적도 없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계율을 청정히 지켜 흠이 없었고 외모에 신경쓰지 않았다. 경을 강의해도 대중이 많기를 기대하지 않았으며, 고단한 줄 모르고 학인을 지도했다. 구석진 집에 살면서 두 가지 반찬있는 밥을 먹지 않았다. 경전을 공부할 때 말고는 밤에 등불을 켜지 않았고, 낮에도 부처님 상호를 우러러 예불할 때 말고는 한 발짝도 쓸데없이 걷지 않았다. 가사 한 벌로 40년을 지냈고 깔방석 한 장을 죽을 때까지 갈지 않았다. 이익 때문에는 한마디도 법문한 적이 없고, 터럭만큼도 불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재물을 받은 일이 없는 분이다." 「본전 (본전)」

4. 자기 부처 /무상 (무상) 선사

오대산 무상 (무상:684~162) 선사가 예불하고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ꡒ그대들은 진흙부처를 보았다 하면 절구에 쌀을 찧듯 절만 하고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으니, 자기 몸에 부처님이 한 분씩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허공을 타고온 많은 석가와 관음이 밤낮으로 그대들의 육근에서 빛을 내뿜고 땅을 흔든다. 거닐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사이에 언제나 함께 드나들면서 실오라기만큼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 부처님에게 예불드리고 배우지 않고 도리어 흙덩이한테 가서 살길을 찾고 있느냐. 그대들이 이 부처님에게 예불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마음에 예불드리는 것이다. 그대들 마음이 비록 뒤바뀐 헛된 마음이라 해도 그것은 본디부터 지금까지 넓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미혹하다 하나 한번도 미혹한 일이 없었고, 깨달았다 하나 한번도 깨달은 일이 없어 부처님보다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다만 바깥경계에 탐착하여 생멸과 미오 (미오) 가 있게 되었으니, 만일 한 생각에 회광반조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옛스님은 말하였다.

부처가 자기 마음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밖에서 찾고 있네. 값을 칠 수 없는 보배를 속에 지니고도 일생을 쉴 줄 모르네.'

또 화엄수 (화엄수) 법사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내가 마음이 본래 성품임을 깨닫고 나니 지금의 모든 수행과 동정 (동정) 이 본래 성품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수행 〔도〕 과 이치 〔리〕 가 부합하는 까닭에 종일토록 예불해도 예불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종일토록 염불해도 염불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자, 말해 보아라. 화엄스님은 어떻게 이것을 알아냈겠는가? 마치 선재동자 (선재동자) 가 비로자나 누각에 들어가 불가사의하고 자재한 경계를 깨친 것과 같다. 선재동자는 마지막 경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ꡐ나는 110성 (성) 을 돌아다니며 53선지식을 찾아뵈었다. 그러면서 갖가지 경계를 보고 온갖 법문을 들어보았으나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온갖 일을 보지만 꿈을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도력 높은 선사들과 선재동자는 비록 꿈속에서는 소소영영함을 얻었지만 여전히 오음 (오음) 경계에 떨어져 있다. 만일 정수리에 눈이 있고 팔꿈치에 부적이 있다면 석가와 미륵도 마른 똥막대이고 문수 보현도 땅에 가득 찬 범부일 뿐이다. 또한 진여와 열반도 나귀 매는 말뚝이고 일대장경도 고름 닦는 종이니, 무슨 들어갈 누각이 있고 깨칠 경계가 있겠는가. 혹 이렇게 못한다면 남의 꿈 속에서 한번이고 두번이고 절해야 할 것이다."

「통행록 (통행록)」

5. 조계 근원 /덕소 (덕소) 국사

천태산 (천태산) 덕소 (덕소:891~972, 법안종) 국사는 처주 (처주) 용천 (룡천) 사람이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매서운 의지로 선지식을 찾아 도를 물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조산 (조산) 에 와서는 대중에 묻혀 살았는데, 한번은 한 스님이 법안 (법안) 스님께 묻는 이야기를 들었다.

ꡒ하루 스물 네 시간을 어떻게 하면 단박에 온갖 인연을 쉴 수 있겠습니까?"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ꡒ공 (공) 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더냐, 색 (색) 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더냐? 공이 인연을 맺는다고 한다면 공이란 본래 인연이 없는 것이다. 색이 인연을 맺는다고 한다면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일상생활에 어떤 물건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는다는 말이냐?"

덕소스님은 그 말을 듣고 머리끝이 쭈해지며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또다시 어떤 선객이 물었다.

ꡒ무엇이 조계 (조계) 근원의 물 한 방울입니까?"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ꡒ이것이 조계 근원의 물 한 방울이로구나."

덕소스님은 듣고서 확실히 깨쳤다. 법안스님께서 ꡒ그대는 앞으로 우리 종지를 널리 펼 사람이니 이곳에 지체하지 말라" 하시므로 마침내 천태산을 돌아다니시다가 그곳이 좋아 그곳에서 생애를 마칠 생각을 가졌다.

당시 오월 (오월) 의 충의왕 (충의왕) 이 왕자의 신분으로 태주 자사 (태주사) 로 있었다. 그는 스님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한번은 사람을 보내 스님을 맞이하여 제자의 예를 올렸다. 왕은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에게 목이 잘리는 꿈을 꾸었는데 놀람과 의심이 풀리지 않아 마침내 스님께 해몽을 부탁하였다. 스님은 비상한 꿈이라면서, 주 (주) 자에서 점 하나를 없앴으니 곧 왕이 될 것이라고 하자, 왕은 과연 말씀같이 된다면 부처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였다. 건우 원년 (건우원연:948) , 충의왕은 임금자리를 물려받고 스님을 높이 받들어 국사로 모셨다.

당시 회창 (회창) 의 법난 (845) 때문에 천태 지자 (천태지자) 대사의 교법이, 큰스님들은 빛을 감추고 저술들도 대부분 해동 (해동:고려) 으로 흘러갔었다. 나계 의적 (라계의적:919~987, 천태종 중흥조) 법사가 앞으로 불법을 들을 수 없게 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힘써 모아 보았으나 우선 금화사 (김화사) 장경각에서 「유마경의소 (유마경의소)」 한 질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 뒤 충의왕이 불경을 읽다가 내용 〔교상〕 에 막혀 스님께 법문을 청하였다. 스님께서는 의적을 천태종의 종지에 훤히 통한 사람이라 칭찬하니 왕이 마침내 의적스님을 불러 강원을 세웠다. 왕이 기뻐하여 특별히 열 사람의 사신을 바다 건너 파견하여 경전을 베껴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이 다시 일어나 지금까지 땅에 떨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덕소스님과 의적스님의 덕택이라 하겠다.

개보 (개보) 4년 (972) 6월 28일 천태산 (천태산) 화정봉 (화정봉) 에서 입적하셨는데, 이날 밤 별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다. 스님께서 열반하실 때 보인 신비한 징조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법등 (법등:?~974) 선사의 「행업 (행업)」 등 글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6. 소금 한 줌 /지자 지의 (지자지의)

지자 지의 (지자지의:538~579, 천태종의 개조)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ꡒ나와 같이 공부하던 조 (조) 선사는 남악 (남악) 선사 회중에서 고행과 선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한번은 대중의 소금 한 줌을 공양 때 마실 물에 쓰고는 줄어든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개의치 않았다. 그 뒤 방등참법 (방등참법) 을 닦는데 홀연히 어떤 모습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 한 줌 소금이 3년 동안 몇 십 섬으로 불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급히 시자들을 시켜 자기 옷과 살림살이를 팔아 소금을 사서 대중에게 빚을 갚았다.

이 일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들은 바도 아니니 이것을 거울삼아 후회 없도록 해야 한다. 나는 비록 덕행이 적은 사람이지만 멀리서 가까이서 자못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간에 염령 (령) 이 가로막혀 걸어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늙고 병든 사람들이 드나들 경우에는 대부분 대중의 노새로 맞이하고 보내며, 내게 오는 손님은 개인적으로 수고비를 지불하여 피차 허물이 없게 하였다.

나는 대중의 주지이고 노새도 내것이었으나 이미 대중에게 희사한 이상 이제는 내것이 아니다. 내 맘대로 쓸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말을 하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예를 든 것에 불과하나 다른 일도 모두 마찬가지다." 「국청백록 (국청백록)」

7. 무작계 (무작계) / 택오 (택오) 율사

도솔사 (두솔사) 택오 (택오) 율사는 보령 (보령) 율사에게 공부하였는데, 몸 단속이 엄격하였으며 하루 한 끼 공양에 예불 독송을 끊임없이 하였다.

한번은 경산 (경산) 유림 (유림) 선사에게 도를 물었다. 유림선사는 택오율사가 계율에만 마음을 두어 도를 통하지 못함을 보고는, 계율에 몸이 묶여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지 않느냐고 놀렸다. 택오율사가 ꡒ저는 마음 〔근식〕 이 어둡고 둔해서 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스님께서 가엾게 생각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다. 유림선사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바수반두 (파수반두) 존자는 하루 한 끼 공양에 눕지도 않고 지내며 하루 여섯 차례씩 예불하였다. 이렇게 청정무구하여 대중들에게 귀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20조 (조) 사야다 (려야다) 존자가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바수반두의 문도들에게 물었다.

ꡒ이 두타승이 청정행을 열심히 닦아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ꡒ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는데 어째서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ꡒ그대들의 스승은 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정진해 가지고는 티끌 겁이 지나도 모두 허망의 근본이 될 뿐이다."

바수반두의 문도는 분한 마음을 내지 않고 사야다에게 물었다.

ꡒ존자께서는 어떤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 스승을 비난하십니까?"

ꡒ나는 도를 깨치려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 〔전도〕 되지도 않는다. 나는 예불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처님께 오만하거나 가볍게 굴지도 않는다. 장좌불와 (장좌불와) 하지 않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도 않는다. 하루 한끼만 먹는 고행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식탐을 내지도 않는다. 나는 만족도 탐욕도 없다. 이렇게 마음 둘 곳 없음을 도라고 한다."

바수반두는 이 말씀을 듣고 무루지 (무장지) 를 얻었다.

유림선사는 큰 소리로 할을 한 번 하고서 말하였다.

ꡒ비록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둔한 놈이다."

택오율사는 이 말끝에 마음이 활짝 트여 껑충껑충 뛰면서 절하고 말하였다.

ꡒ스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으면 어찌 잘못을 알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지키면서도 지키지 않는, 지킨다는 생각이 없는 계율 〔무작계〕 을 지키겠으며, 더이상 애써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작별하고 떠났다. 방장실로 돌아와서 익혀 왔던 수행을 다 버리고 그저 선상 (선상) 만을 지키며 법문하는 일 말고는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하루 저녁은 명정 (명정) 법사를 불러서 말하였다.

ꡒ경산스님께서 내게 망정과 집착을 타파해 주신 뒤 지금껏 가슴 속에 아무 일도 없다. 오늘밤에는 무성삼매 (무성삼매) 에 들어가겠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가 없더니 마침내 영영 누우셨다. 「통행록 (통행록)」

8. 불법을 위해 죽는다면 / 진종 (진종) 황제

송나라 진종 (진종:996~1022) 황제가 한번은 태평흥국사 (태평흥국사) 를 없애 창고를 만들려고 하였다. 조서가 내리던 날, 한 스님이 절을 없애서는 안된다고 꼿꼿하게 말하였다. 황제는 중사 (중사) 를 보내면서 ꡒ절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 하고는 칼을 뽑아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ꡒ그 중이 칼을 보고 겁이 나서 떨거든 목을 베고, 그렇지 않거든 용서해 주어라."

중사가 명령대로 하였더니 그 스님은 웃으면서 목을 쓱 내밀며 말했다.

ꡒ불법을 위해 죽는다면 실로 달갑게 칼을 핥겠다."

황제가 기뻐하여 폐사를 면했다.

한자창 (한자창) 이 말했다.

ꡒ지금 세상에도 이와 같은 스님이 있다니 참으로 납자라고 할 만하다."

「석문집 (석문집)」 "

9. 대중은 없어도/ 법창 의우 (법창의우)

법창선원 (법창선원) 의 의우 (의우:1005~1081, 운문종) 선사는 임장 (림장) 고정 (고정)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큰 뜻을 품고 사방을 돌아다녀 총림에 이름을 날렸다. 부산 법원 (부산법원) 선사는 스님을 두고 행각하는 후학들의 본보기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분령 (분령) 북쪽 천산만학 가운데 담이 무너진 옛 집에 은거했다. 간혹 납자들이 찾아와서는 모두 고된 일을 힘들어 했는데도 스님은 한 마디도 자상하게 문도들에게 가르쳐 준 일이 없었는데, 학인들은 스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 담담하고도 힘겨운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모두 그곳에서 떠나버렸다. 결국 혼자 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새벽에 향 피우고 저녁에 등불 밝히며 법당에 올라 설법하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고, 총림에서 하는 법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용도각 학사 (룡도각 학사) 서희는, 대중이 없어도 대중이 있을 때처럼 처신하니 진짜 산사람이라면서 감탄하였다. 돌아가실 즈음에 하루 앞서 게송을 남겼다.

금년 내 나이 일흔 일곱

길 떠날 날을 받아야겠기에

어젯밤 거북점을 쳐보니

내일 아침이 좋다고 하더라.

금연칠십칠 출행수택일

작야보구가 보도명조길

서희가 이 게송을 보고 깜짝 놀라서 영원 유청 (영원유청) 스님과 함께 찾아갔더니 이미 입적하셨다.「정강집(정강집)」

10. 나태함을 일깨운 입적 / 법지 지례 (법지지예)존자

법지존자 (법지존자:960~1028) 의 법명은 지례 (지예) 이다. 나이 40이 되면서부터 눕지 않고 늘 앉았으며 문밖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법을 물으러 다니는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하루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ꡒ반 줄의 게송을 보고도 자기 몸을 잊고, 한마디 법문을 듣고도 불 속에 몸을 던진다 하였다. 성인들은 법을 위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는데, 내가 신명을 던져 나태한 이들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도반 열 사람과 3년 결제로 법화삼매 (법화삼매) 를 닦고 3년 기한이 되면 함께 몸을 태우자고 하였다.

이때 한림학사 (한림학군) 양억 (양억:대연) 이 편지를 보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간곡히 청하면서, 정토를 좋아하고 속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종일토록 모든 상 (상) 을 깨트려도 모든 법 (법) 은 이루어지고, 종일토록 법을 세워도 티끌까지도 다 없어집니다."

그러자 양억이 다시 물었다.

ꡒ보배나무에는 바람이 읊조리고 금빛 도랑에는 파도가 인다고 하니,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ꡒ보고 듣고 하는 경계일 뿐 도리는 없습니다."

ꡒ법화경과 범망경은 모두 마왕의 설법입니다."

ꡒ부처와 마왕과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양공은 교리를 가지고도 스님을 굴복시킬 수 없고 말로서도 만류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침내 자운 (자운) 법사에게 편지를 내어 항주 (항주) 에서 명주 (명주) 로 오게 하여, 법사가 직접 그들의 결의를 막아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고을의 장수에게는 그들을 보호하여 분신할 틈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 해에 양공은 스님에게 법호를 내려 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진종 (진종) 황제가 양공을 불러 까닭을 물으시니, 공은 이 기회에 스님께서 몸을 버리려 한다는 일을 아뢰었다. 황제가 기뻐 찬탄하면서 양공에게 ꡒ세상에 머물러 주십사는 내 마음을 꼭 전하라"고 거듭 말하며, 법지 (법지)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이 일로 원행 (원행) 이 실현되지 않자, 스님은 도반들과 다시 광명참법 (광명참법) 을 닦아 자연스럽게 입적하자고 약속하였다. 닫새째 되던 날, 가부좌한 채 대중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ꡒ사람이 났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분수다. 그대들은 쉴 새없이 부지런히 도를 닦고, 내가 살아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말이 끝나자 스님은 염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교행록등 (교행록등) 」

11.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 / 대각 회연 (대각 회연) 선사

원통사 (원통사) 의 거눌 (거눌:1010~1071, 운문종) 선사는 신주 (재주)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 (인종) 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 (정인사) 에 주지하도록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 (회연:1009~1090, 운문종)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 (대각선사)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 (영종) 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 (소동파) 가 신규각 (신규각) 의 비문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신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으나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요 (삼요:?~1106, 운문종) 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실 때 왕 〔영종〕 께서 전국 어느 절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직접 내리셨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다면 전문 (전문) 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직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목 (룡뇌목) 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ꡒ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질그릇 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 밖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12. 공덕(공덕) / 보지 (보지) 선사

양 무제 (무제) 가 보지 (보지) 선사에게 물었다.

ꡒ짐이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했는데, 공덕이 되겠습니까?"

ꡒ공덕은 공덕이나 진정한 공덕은 아닙니다."

ꡒ"무엇이 진정한 공덕입니까?"

ꡒ성품이 깨끗하여 마음이 밝으면 바탕이 저절로 비고 고요해지니 이것이 진정한 공덕입니다."

무제는 이 말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옛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보배탑은 결국 먼지로 돌아가지만

한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이룬다. 「통행록 (통행록)」

13. 화엄경을 칭송함 / 손사막 (손사막)

도사 손사맥 (손사막) 은 경조 〔경조〕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하루에 만 글자를 외웠다. 노장 (로장) 을 잘하고 불전에 더욱 뜻을 두었다. 50세가 되자 종남산 (종남산) 에 숨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연홍 (연홍:송화 가루나 약초 등으로 만들어 신선도를 닦는 사람들이 먹은 음식) 만을 먹고 살았다. 도선율사 (도선율사:596~667, 지수율사의 법을 이음. 남산 율종의 개조) 와 사이가 좋아서 하루종일 법담을 나누었으며, 「화엄경"을 베껴 쓰기도 하였다.

그때 당 (당) 태종 (태종:627~649) 이 불경을 읽고자 하여 손사맥에게 물었다.

ꡒ어느 경이 가장 크고 높은 경입니까?"

ꡒ화엄경은 부처님도 높이시던 경입니다."

ꡒ요즈음 현장삼장 (현태삼장) 이 대반야경 600권을 번역하였는데 (660년) , 그것을 큰 경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80권 화엄경을 크다 합니까?"

ꡒ화엄법계에는 모든 법문이 다 갖추어져 있고 한 법문이 대천세계만큼의 경전을 설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야경은 화엄의 한 부분 〔법문〕 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알아듣고 그때부터 「화엄경」을 늘 독송 〔수지〕 하였다. 「석씨유설 (역씨류설) 」

14. 참학 (삼학) 하는 일/ 시랑 양억 (양억)

시랑 (시랑) 양억 (양억:974~1020) 은 한림학사 (한림학군) 이유 (리유) 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잠깐 남창 (남창) 태수로 와서 마침 광혜 상총 (광혜상총:1025~1091, 임제종 황룡파) 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공양을 될 수 있는대로 간소하게 하여 밥상을 물리고 여가가 많았으므로 더러는 직접 오시기도 하고 더러는 수레로 모셔오기도 하여 이것저것 터놓고 물었더니 어둡고 막혀 있던 것이 싹 풀렸습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뒤에는 마치 잊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자다 깨어난 듯 마음이 탁 트여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가슴에 막혀 있던 것이 저절로 탁 떨어져 내려가서 몇 겁을 두고 밝히지 못했던 일이 환하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정말로 스님께서 의심을 환희 결택 (결택) 해 주시고, 막힘없이 지도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옛분들이 큰스님을 찾아뵙던 일들을 거듭 생각해 봅니다. 설봉 의존 (설봉의존) 스님은 동산 양개 (동산양개) 스님을 찾아뵙고 투자 의청 (투자의청) 스님을 세 번 뵈었으나 마침내는 덕산 선감 (덕산선감) 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임제 의현 (림제의현) 스님은 대우 수지 (대우수지) 스님의 뒤를 이었으며, 운암 담성 (운암담성) 스님은 도오 원지 (도오원지) 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마침내 약산 유엄 (약산유엄)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단하 자순 (란하자순) 스님은 마조 도일 (마조도일)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으나 석두 희천 (석두희천) 스님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병든 이 몸이 지금 법을 이어받은 인연은 사실 광혜 (광혜) 스님에게 있으나 처음 일깨워 지도해 주신 분은 바로 별봉 (별봉:임제종 대혜파, 무제료파의 제자) 스님이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시랑이 한 스님과 법담을 나누다가 말하였다.

ꡒ참학 (삼학)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루종일 언제나 자기를 살펴보아야 〔조고〕 합니다. 듣지 못했습니까? 선 〔선도〕 을 말하자면 늘 살피고 다녀야 할 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무슨 일을 하거나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닭이 알을 두고 일어나버리면 기운이 이어질 수가 없어서 마침내 병아리가 부화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만가지 경계는 빽빽하고 6근은 요동하는데 조금만 살펴보는 일 〔조고〕 을 놓치면 그대로 신명을 잃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태어날 인연을 받아 생사에 매여 있는 이유가 수많은 겁토록 생멸심을 쫓아 그것에 끄달려다니다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한번이라도 살펴봄을 잃은 적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겠습니까? 큰 길의 흰 소 〔로지백우:본디는 법화경에서 일승을 비유한 말로서, 선문에서는 청정무구한 본심을 말한다〕 를 알고자 합니까? 콧구멍 〔비공:본래면목〕 을 잡고 한번 끌어당겨 보십시오."

또 말하였다.

ꡒ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눈으로 가섭존자를 돌아보시며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ꡐ나에게 정법안장 (정법안장) 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ꡐ나는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법한 일이 없다' 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도리이겠습니까?

누구나 저마다 한 글자 각주도 붙일 수 없게 되면 누구에게나 굉장한 일이 벌어진 셈이나 그것을 ꡐ굉장하다'고 해버리면 벌써 틀립니다. 그렇다면 석가는 패전한 군대의 장수이고, 가섭은 신명을 잃은 사람이라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생사 열반이 모두 다 꿈속의 일이고, 부처와 중생도 모두 군더더기 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곧바로 이렇게 알아버려야지 밖으로 치달려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밝히지 못했다면 그대는 한참 잘못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시랑은 임종 하루 전에 게송 한 수를 직접 써서 집사람들에게 주며 다음날 이부마 (리부마:리준욱 ?~1038) 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꺼졌다 일어나는 거품이여

두 법은 본래 같은 것

참된 귀결처를 알려 한다면

조주 동원의 서쪽이니라.

구생여구멸 이법본래제

욕식진귀처 조주동원서

이부마는 받아보고서 말하였다.

ꡒ태산 (태산) 의 사당 〔묘〕 속에서 지전 (지전:죽은사람의 노자돈으로 쓰는 가짜 종이돈) 을 팔도다." 「대성광등 (대성광등)」

15. 전생에 쓴 능가경 / 장문정공 (장문정공)

장문정공 (장문정공:장제현, 송 태종․진종대의 총신) 은 전생에 낭야사 (랑야사) 의 지장 (지장:장경각에서 경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소임) 이었는데, 「능가경 (방가경)」을 베끼다가 다 쓰지 못하고 죽게 되자 내생에 꼭 다시 쓰겠다고 발원하였다.

뒤에 제주 (저주) 에서 지사 (지사) 가 되어 낭야산에 왔다가 도량을 두루 걸어다녔는데, 어쩐지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장경각에 이르자 퍼뜩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들보 사이의 경 (경) 상자를 가리키며 "저것은 내 전생의 일이다!" 하고는, 가져오게 하여 들여다보니 과연 「능가경」이었으며 글씨체가 금생과 똑같았다. 한번은 그 경을 읽다가 ꡒ세간이 생멸을 떠난 것이 헛꽃 같은 일이며, 지혜는 유무가 있을 수 없어도 자비심을 일으킨다"고 한 대목까지 읽고는 마침내 자기 지견이 밝아져 게송을 지었다.

한 생각이라도 생멸이 있으면

천 가지 일이 유무에 묶이는데

신검의 칼끝을 가볍게 드는 곳에

쟁반 위의 구슬이 튀어나오네.

일념존생멸 천기박유무

신봉경거처 수출주반주

만년에 이 경 (경) 을 꺼내 소동파 (소동파) 거사에게 보여 주면서 그 내력을 이야기하였더니, 소동파가 경 끝에 제 (제) 를 달고 그것을 비문에 새겼다.

16. 몹쓸 병으로 죄값을 치르다/ 기 (기) 선사

기 (기) 선사는 진주 (진주) 용성 (룡성) 사람이다. 처음 천성사 (천성사) 호태 (호태) 선사에게서 법을 얻고 만년에 황룡 혜남 (황룡혜남) 선사에게 귀의하였는데, 혜남선사는 스님이 바르고 투철하게 깨달았음을 보고 몹시 후대하여 전주 (전주) 흥국사 (흥국사) 에 주지하게 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개당하여 마침내 혜남스님의 법을 이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산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ꡒ스님이 몹쓸 병을 만나면 이곳 인연은 다하는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산신은 숨어버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과연 문둥병이 걸려서 일을 그만두고 용성의 서쪽에 돌아와 작은 암자를 짓고 거기서 요양하였다.

스님에게 극자 (극자) 라는 한 제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양기 방회 (양기방회) 스님에게 귀의하였고, 선림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돌아와 정성으로 간호하였는데, 비바람과 추위, 더위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마을에서 걸식을 해와 봉양하였다. 하루는 스님이 극자스님에게 말하였다.

ꡒ내가 천성사 호태스님에게 도를 얻었는데 만년에 황룡스님을 뵙고는 도 (도) 와 행 (행) 이 겸비함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여 법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반평생 이런 몹쓸 병에 걸릴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나.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 그 죄값을 다 갚았다. 옛날 신선들은 흔히 몹쓸 병으로 신선도를 얻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티끌세상의 얽매임을 잘라버리고 허유 (허유) 와 소부 (오부)*의 풍모를 마음에 품었기에 전화위복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나도 이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이 있겠느냐. 이제는 머뭄도 떠남도 내게 달려 있어 머물고 떠남에 모두 자유롭게 되었다."

마침내 큰 기침을 한번 하고 묵묵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하니 신비한 향기가 들판에 가득하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다. 「주봉록 (주봉록)」

17. 석란문 (역란문) / 희안수좌 (희안수좌)

희안 (희안) 수좌는 자 (자) 가 성도 (성도) 이며 강직하고 과감한 성격이었다. 불법은 물론 다른 학문까지도 통달하였으며 품격과 절도로 스스로를 지켰다. 행각을 마치고 옛 초막에 돌아와 숨어 살면서 세속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항상 문 닫고 좌선만 하니, 수행이 고결한 사람이 아니면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명공귀인들이 여러 차례 몇몇 절에 주지로 모시려 했으나 굳이 거절하였다.

당시 참이 (삼이) 라는 행자가 있었는데, 승려가 되고자 하여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가 승려 될 그릇이 못됨을 알고ꡐ석란문 (역난문)ꡑ 이라는 글을 지어 물리쳤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을 아는 데는 아비만한 사람이 없고, 아비를 아는 데는 아들만한 사람이 없다. 내가 보건대 참이 (삼이) 는 승려 될 그릇이 아니다. 출가해서 승려가 된다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안함과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달팽이 뿔* 같은 하잘것없는 명리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사를 해결하는 길이고 중생을 위하는 길이며, 번뇌를 끊고 3계 바다를 벗어나 부처님의 혜명 (혜명) 을 잇기 위한 것이다. 성인의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불법이 크게 허물어졌는데, 네가 감히 함부로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

「보량경 (보양경)」에 말하기를 ꡒ비구가 비구법을 닦지 않으면 대천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다" 하였고, 「통혜록 (통혜록)」에도 ꡒ승려가 되어 10과 (십과)* 에 들지 못하면 부처님을 섬겨도 백년 헛수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래서 어렵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도 외람되게 승려의 대열에 끼어 불도에 누를 끼치고 있는데 하물며 네가 하겠다는 것이냐?

출가해서 승려가 되어 3승 12분교와 주공 공자 (주공진자) 의 도를 모른다면, 그는 인과에도 어두울 뿐더러 자기 성품도 알지 못한 사람이다. 농사 짓는 수고도 모르고, 신도들의 시주를 받기 어려운 줄을 생각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함부로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재계 (재계) 를 파하고 범하여 장사를 차리고 앉아 부처를 팔아먹는다. 도둑질, 간음, 노름으로 절집을 떠들썩하게 하고 큰수레를 타고 드나들면서 자기 한 몸만을 아낄 뿐이니, 슬픈 일이다. 여섯자 몸뚱아리는 있어도 지혜가 없는 이를 부처님께서는 바보중이라 하셨다. 세치 혀는 있어도 설법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벙어리 염소중이라 하셨다. 또한 승려 같으나 승려도 아니고 속인 같으면서 속인도 아닌 사람을 박쥐중, 또는 민머리 거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능엄경 (방엄경) 」에 이르시기를 ꡒ어찌하여 도적이 내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마구 팔아 온갖 죄업을 짓는가" 하였으니, 이런 이들은 세상을 제도하는 나룻배가 아니라 지옥의 씨앗으로서 설사 미륵이 하생할 때가 되어 머리를 내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몸은 이미 쇠우리 안에 빠져 온갖 형벌의 아픔이 하루아침 하룻저녁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지금 이런 자들이 백천, 혹은 만이나 되는데, 겉으로 승려의 옷만 걸쳤을 뿐, 그 속을 까놓고 말해보면 승려라 할 수 없다. 그것이 소위 솔개의 날개를 달고 봉 울음을 운다 하는 것이다. 이들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이지 옥 (옥) 은 아니며, 풀 무더기 속에 우거진 쑥대지 설산 (설산) 의 인초 (인초) 는 아니다.

나라에서 승려에게 도첩 (도첩) 을 주는 것은 본래 복을 빌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부역 면제 받는 것을 따지면서 승려에게 평민이 되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승려들에게 심한 푸대접을 하고 있다.

오직 지난날 육왕 회련 (육왕회연) ,* 영안 설숭 (영안계숭) ,* 용정 원정 (룡정원정) , 영지 원조 (영지원조) * 같은 분은 한 마리 여우털처럼 빛나는 보배라 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양가죽 같은 보잘것없는 자들이야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아! 불법의 바다가 오늘날처럼 더럽혀진 적은 없었다. 이런 말도 지혜로운 이와 할 수 있을 뿐, 속인들과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18. 공양할 때든, 목욕할 때든 /범 (범) 법주

범 (정범) 법주 (법주) 는 가화 (가화) 사람으로, 출가하여 신오 처겸 (신오처겸:천태종) 스님을 찾아 뵈었다. 정법스님은 깨달음 〔해〕 과 실천 〔행〕 을 겸비하였으며 불법을 위해 보시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만년에 북선사 (배선사) 에 살 때는 늘 시장거리에서 걸식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리자 그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규율을 말세 사람으로서 마땅히 실천하는 것이지 남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스님은 몸가짐이나 대중을 거느리는 모든 일에 법도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법석은 절강성 (강성) 서쪽에서 가장 모범적이었다. 스님은 문도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ꡒ하루 스물 네 시간 행주좌와 (행주좌와) 하는 4위의 가운데에서 지켜야 할 법문이 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참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지 모조리 마업 (마업) 이 되어버린다. 우선 발우를 펼 때만 해도, 광야의 귀신들이 항상 주림을 느끼다가 스님네들이 부딪치는 발우소리를 헛듣고 주림과 불길이 더해져서 고통이 배가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ꡐ반드시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난 다음에 밥을 받고 나누어 먹어라'고 이르셨다. 그러므로 백장스님의 청규 (청규) 에도 발우 씻은 물을 버리면서 하는 축원이 있으니 ꡐ옴 마휴라 사바하'가 그것이다. 백장선사는 오직 마음 〔심인〕 만을 전하는 분인데도 오히려 세세한 행을 지켰는데, 하물며 계율의 가르침까지 겸수하신 우리 스님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나아가 목욕을 할 때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옛날 한 비구가 목욕을 하면서 장난치고 웃고 하다가 바른 생각 〔정념〕 을 잃어 뒷날 끓는 물이 튀어오르는 업보를 받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께서는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게 하고 늘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하게 하였다. ꡐ내 이제 육신을 씻으며 발원합니다. 중생들의 심신에 때가 없어져 안팎으로 빛나고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우선은 이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다른 일도 다 이와 같다. 그러니 일상생활에 조심조심 노력하며 물러서서 돌이켜 보고 마음을 잘 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통행록 (통행록)」

19. 사명 법지스님을 추억하며 / 자운 준식 (자운전식)법사

자운 준식 (자운준식:964~1032, 천태종) 법사가 말하였다.

ꡒ나는 사명 법지 (사명법지:960~1028) 스님과 40년 동안이나 도반으로 지내왔는데, 막상 죽을 때에는 그의 방 앞에서 곡 한번 하지 못했다. 그래서 탄식하다가 못내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하늘에는 두 달이 없고

인간에는 스님 하나 뿐

천상무쌍월 인간유일승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에게는 후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박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다만 그의 깨달음과 수행이 남다르게 뛰어남을 보고 극단적인 말로써 내 감회를 펴 본 것이다. 남다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릉 (비릉:천태종 5조, 형계담연) 법사도 기억하지 못한 일대장교를 다 외웠고, 남들은 수행하기 어려운 네 가지 삼매 〔사삼매〕* 를 모두 수행하였다. 번갈아 찾아오는 추위와 더위에도 불구하고 옆구리를 자리에 붙인 일 없이 69세에 세상을 마쳤으며, 병이 갑자기 심해졌는데도 쉬지 않고 도를 닦으며 후학을 가르쳤다. 문도들이 편안히 쉬라고 청해도 듣지 않았는데, 죽고 나니 사리가 부지기수로 나왔다. 아!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20. 왕자로 태어나서 사문이 되다 / 용호 문 (룡호문) 선사

용호사 (룡호사) 문선사 (문선사) 는 당나라 희종 (희종:872~887) 황제의 태자였다. 얼굴과 풍채가 그려 놓은 듯 맑고 반듯하여 희종이 몹시 사랑하였으나 그는 세상을 다스릴 마음이 없었다. 왕은 백방으로 손 써서 회유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상화산 (상화산:석상선사) 의 도풍을 흠모하여 꿈 속에서 보곤 하였다.

중화 (중화) 원년 (881)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드디어 머리를 깎고 마음 내키는대로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석상 경저 (석상경제:807~888) 선사를 찾아가니 선사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ꡒ그대는 원력 덕에 왕가에 태어났으나 이제 그 몸을 벗고 나를 따르려하니 참으로 불속의 부용꽃이로다."

밤이 되자 문선사는 방장실에 들어가 간청하였다.

ꡒ조사께서 따로 전하신 일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ꡒ조사를 비방하지 마라."

ꡒ천하에 이 종지가 널리 퍼졌는데 그것이 빈 말이었겠습니까?"

ꡒ안산 (안산) 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가서 그대에게 말해주겠다."

문선사는 그날로 작별하고 떠났다. 소무성 (소무성) 바깥에 이르러 그곳 산이 깊고 울창한 것을 보고는 풀을 헤치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은거하는 고행승을 만났다. 그는 흔쾌히 자기 토굴을 내어주면서 ꡒ스님께서 이곳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는 깊숙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났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사는 그곳에서 십여 년을 머물게 되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였다.

ꡒ나는 사람이 아니고 용입니다. 비를 내리는 일을 잘못하여 하늘의 벌을 받았는데 도력을 빌어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작은 뱀으로 둔갑하여 소매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밤이 되자 바람과 천둥이 선상을 뒤흔들며 산악이 진동하였으나 문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이 앉아 있었다. 날이 새고 하늘이 개니 뱀은 땅에 내려와 어디론가 가버리고, 얼마 있으니 노인이 나타나서 사례하였다.

ꡒ대사의 힘이 아니었으면 피비린내로 이 산을 더럽힐 뻔 하였습니다. 무엇으로 보답할 길이 없으니 바위 밑에 구멍을 파서 샘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뒷날 대중이 모이면 물이 많이 모자라게 될 것이니 그래서 스님을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그 샘은 지금 호수가 되었고 이 인연으로 용호사 (룡호사) 라 이름하였다.

「사기비 (사기비)」

21. 방장실을 짓지 않고 대중과 함께하다 / 수기 (수기) 선사

장석사 (장석사) 수기 (수기) 선사는 부산 법원 (부산법원) 선사와 함께 행각하였고, 여산 (노산) 불수암 (불수암) 에 암자를 짓고 살기도 하였다. 뒷날에는 사명산 (사명산) 깊숙히 들어가 십여 년을 홀로 살았는데, 범과 표범이 나타나도 삼매를 닦은 힘 때문에 한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구불구불 험한 산길에 찾아오는 사람 없고

적막한 구름 속에 한 사람 뿐이어라.

석장조도무인도 적막운중일개인

뒤에 승속이 모두 그의 도풍을 듣고 흠모하게 되었는데, 산에 산 지 40여 년 되도록 집안에 쌓아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누더기 한 벌로 지내며 오직 절 일으킬 것만을 생각하여, 여러 해에 걸쳐 힘쓴 끝에 선림을 이루게 되었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많이 갖추어 놓았으나 방장실만은 짓지 않고 대중과 함께 거처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수기선사가 방을 따로 쓰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지사 (지사) 온궁 (정궁) 이라는 사람이 선사가 먼 곳에 출타한 틈을 타서 방장실을 지어놓았다. 당시 달관 담영 (달관담영:989~1060, 임제종) 선사가 설두산 (설산) 에서 법을 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ꡒ본색종장이 아니면 좋은 보필이 있을 수 없고 좋은 보필자가 아니라면 도인의 덕을 높일 수가 없다." 「장석달관비 (장석달관비)」

22. 전생의 원 (원) 을 이어 / 변재 원정 (변재원정) 법사

변재 원정 (변재원정) 법사는 항주 (항주) 어잠 (련잠)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어깨살이 가사의 매듭같이 솟아올라 있었다가 81일 만에 없어지니 그의 아버지가 감탄하여 말했다.

ꡒ이 아이는 전생에 사문이었으니 그 원 (원) 을 빼앗지 말고 자라면 부처님을 모시게 하겠다."

법사가 세상을 떠난 그 해가 실로 81세였으니 아마도 이는 숙명인 것 같다. 출가한 후에는 법좌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저기에 올라 설법을 해서 사람들을 제도하는 것이 자신의 원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운 (자운준식) 스님을 찾아가서 밤낮으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배움과 실천이 함께 향상하여 몇해 안 가서 자운스님의 상좌들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자운스님이 죽고 난 뒤에는 다시 사명산 (사명산) 의 조소 (조소) 스님을 모셨다. 조소스님이 천태지관 (천태결관) 을 가르치다가 ꡒ한끼의 밥으로 일체에게 보시하며 모든 불보살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수 있다" 하신 방편오연 (방변오연) 에 나오는 유마거사의 말씀까지를 이야기하니, 원정스님은 그 말 끝에 깨닫고는 ꡒ오늘에야 색, 소리, 냄새, 맛이 본래 제일의제 (제일의체) 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사물을 대할 때 마음 속에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심숙재 (심숙재) 가 항주 (항주) 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관음도량 (관종도장) 은 경 공부와 참회로 불사를 하는 곳이니 선수행자들이 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스님에게 교학하던 곳을 선도량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스님이 그곳에 도착하자 오월 (오월) 사람들은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라도 한 것처럼 귀의하고 부모를 공양하듯 스님을 모셨다. 돈, 베, 비단 등의 보시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천축사 (천축사) 에 머문 지 14년 되던 해, 그 절의 부 (부) 를 탐내는 사람이 스님을 협박하여 쫓아내니, 스님은 기꺼이 떠나면서 그것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이 일로 천축사 대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사건이 조정에 알려져 다음 해에 스님이 다시 옛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스님은 마지 못해 돌아오는 듯하였고, 대중들은 다시 크게 모였다. 스님과 세속을 벗어난 도반이었던 조청헌 (조청구) 은 이 일을 보고 찬 (찬) 하였다.

스님께서 천축사를 떠나니 산은 비고 귀신이 울었는데

천축사에 스님께서 돌아오니 도량에는 빛이 찬란하도다.

사거천축산공귀곡 천축사귀도장광휘

스님은 그곳에 다시 2년을 머물다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ꡒ성인이었던 우리 조사 지자 (지자) 대사도 중생교화를 더 급하게 여겨 자기 수행에는 해가 되었기에 수행위로는 철륜왕 (철륜왕) *이 되어야 하는데도 오품위 (오품위) *까지밖에 증득하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범부야…" 하고는 그곳을 떠나서 종남산 (종남산) 용정 (룡정) 에서 노년을 보냈다. 갈대와 대나무로 지붕을 덮고, 문 닫고 좌선하여 종일 아무소리가 없었다. 이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뿌리가 자라는 겨울의 마른 나무와 같은 경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가라앉은 옛우물과도 같은 경지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스님을 「눌 (눌:말더듬이) '이라고 불렀다.

스님은 계율을 엄격히 지켰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설법을 하였는데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귀신의 힘으로는 두렵게 할 수 없다. 낮에는 말을 해도 여기까지 오지 않는 수가 있고 밤에 사람들이 조용해야 들릴 정도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 그래서 오른손가락 2개와 왼손가락 3개로 겨우겨우 물건을 잡았는데 그 문도들 중에 따라하려는 자가 있으면 번번히 못하게 하면서, 동파 (소동파) 라야 나처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루는 누군가가 와서 북산 (배산) 에 스님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몇 있다고 하니 스님은 밀행 (밀행) 하는 승려들의 경계는 내가 추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용정잡비 (룡정잡비)」

 

23. 대중공사를 통해 살림의 법도를 정하다 / 부용 도해 (부용도해) 선사

부용 도해 (부용도해:1042~1118, 조동종 투자의청의 법을 이음)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ꡒ내 이렇다 하게 수행한 바가 없는데 과분하게도 산문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이제 옛분들이 주지하시던 법도를 비슷하게나마 본받아 보답하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일을 여러분과 의논해서 결정하고자 한다.

이제부터는 산을 내려가지 않고, 신도들이 베푸는 공양에 가지 않을 것으며, 화주 (화주) 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절에서 1년 동안 수확하여 거둔 것을 360등분하여 하루에 하루분만을 사용할 것이며, 사람 수에 따라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밥을 먹을 만하면 밥을 짓고, 밥을 짓기에 부족하면 죽을 쑤고, 죽을 쑤기도 부족하면 마음을 끓일 것이다. 새로 오는 사람과 상견례를 할 때에도 차 끓이는 것으로 족하다. 다른 일은 애써 줄이고 오직 도를 결판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일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일은 여러분 중에 나이 많은 이를 존중해서 다시 의논하도록 할 것이며, 이것 역시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이여, 옛사람의 게송을 들어보았는가."

거친 산전 (산전) 의 좁쌀밥과

채소 시래기 반찬을

먹겠다면 나도 따라 먹겠으나

안 먹겠다면 마음대로 하여라.

산전탈속반 야채담황제

끽칙종군끽 불끽임동서 「어록(어록)」

24. 부뚜막 앞에서 선정에 들다 / 지자 의 (지자 의) 선사

지자 의 (지자 의)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ꡒ예전에 큰스님 한 분이 주지살이를 하면서 공양주에게 늘 죽을 쑤게 하였다. 하루는 그 공양주가 생각생각에 다 타들어 가는 장작불을 보면서 덧없이 흘러가는 세상이 이보다 더 빠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부뚜막 앞에서 고요히 선정 (선정) 에 들었다. 며칠 만에 일어나 그 절 상좌에게 가서 깨친 경계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는데, 법을 말하는 것이 자못 깊었다. 그러자 상좌는

ꡐ그대가 이제까지 말한 것은 나도 아는 경계지만 지금 말한 것은 내 모르니 더는 말하지 말라'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ꡐ그대는 숙명통 (숙명통) 을 얻었는가?'

ꡐ조금은 압니다.'

ꡐ무슨 죄로 천한 몸을 받고 무슨 복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ꡐ저는 전생에 이 산의 주지였는데, 손님이 오는 바람에 모자라는 대중의 나물 반찬을 축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견책을 당해 지금 대중의 부림을 받게 되었으나 전생에 닦던 바를 잊지 않았기에 쉽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ꡑ" 「국청백록 (국청백록)」

25. 비구라는 말의 뜻/ 대지 (대지) 율사

대지 (대지) 율사가 지은 「비구정명 (비구정명)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범어로는 필추 (ц:비구) 며 중국어로는 걸사 (걸군) 니 안으로는 법을 빌어 성품을 돕고 밖으로는 밥을 빌어 몸을 돕는다. 부모는 사람 중에 가장 가까이 할 사람이나 가장 먼저 그 인연을 끊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모조리 깎아 없앤다. 칠보가 창고에 넘치는 부도 초개같이 버리고 일품 (일품) 벼슬에 달하는 명예도 구름이나 연기만도 못하게 보면서 무상 (무상) 함에 진저리를 내어 모든 현상 〔유〕 의 근본을 깊이 캔다.

뜻을 높이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낮추어야 하니 잡고 있는 주장자는 마른 찔레나무요 들고 있는 발우는 깨진 그릇과 다를 바 없다. 어깨에 걸친 회색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며 팔꿈치에 둘러 멘 걸망은 영락없는 푸대자루다. 청정한 생활은 이미 팔정도 (팔정도) 에 맞고 검약한 처신은 사의행 (사의행) 에 맞으니 구주사해 (구주사해) 가 모두 내가 가는 길이며, 나무 밑 무덤 사이 모두 내가 쉬는 곳이다.

삼승 (삼승) 의 좋은 수레를 타고 부처님이 남기신 자취를 밟으며 거룩한 가르침을 어김없이 받아 가지니 진정한 불제자다. 세상 인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으니 실로 대장부다. 마군과 싸워 이기고 번뇌 그물을 열어 제쳐 만금의 훌륭한 공양도 받을 만하며 사생 (사생) 의 복밭이 되는 것도 헛된 것이 아니니 걸사라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지원집 (지원집)」

26. 주지살이 / 영원 유청 (영원유청) 스님

영원 유청 (영원유청:?~1117, 임제종 황룡파) 선사는 문에다 방 (방) 을 써 붙였다.

나 유청은 이름만 주지일 뿐 실로 길손과도 같다. 단지 대중을 통솔하고 불법을 널리 펴서 우러러 교풍을 돕는 것을 내 직분으로 삼을 뿐이다.

절에서 관리하는 상주물 (상주물) 은 내 것이 아니므로 이치로 보아서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임자에게 모두 위임하고 분야를 나누어 일을 맡아 보게 하되, 공과 사를 분명히 하여 합당한 것은 하고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 나는 그저 대중과 함께 밥 먹고 옷 입고 할 뿐이며 몸에 지닌 물병과 발우만으로 인연 따라 가고 머물 뿐이다.

생각컨대 사방 납자들은 목적이 있어서 여기 왔을 것인데 침식까지는 정성껏 살펴주겠지만 나머지는 따로 공양하기 어렵다. 그 물건들은 세속법으로는 공공물이고 불법으로는 대중의 재산이니 이것을 훔쳐 남의 마음을 사고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일은 실로 본래 세웠던 뜻에서 보면 감히 하지 못할 일이다. 일찌감치 글로 써서 알리는 바이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석각재천동 (석각재천동)」

27. 좋은 인연들 / 시랑 장구성 (장구성)

시랑 (시랑) 장구성 (장구성:자소) 거사는 젊어서 진사 공부를 하는 여가에 틈틈이 불경 공부에도 매우 마음을 쏟았다. 영은사 (영은사) 의 오명 (오명) 선사를 뵙고 종지를 물어보니 오명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지금 한창 열심히 공부해서 이름을 날려야 할 때인데 어찌 생사 문제를 참구할 수 있겠는가?"

공이 말하였다.

ꡒ옛어른 〔선유〕 이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도 (도) 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어서, 옛날 훌륭한 신하 중에도 선문 (선문) 으로 도를 얻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유교와 불교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불교의 우두머리이신 스님께서 어찌 말로 저를 막으려 하십니까?"

오명선사는 그 정성이 갸륵해서 그를 받아주며 말하였다.

ꡒ이 일은 생각생각에 놓아서는 안되니, 오래오래 인연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저절로 깨치게 된다."

그리고는 화두를 주면서 말하였다. ꡒ조주 (조주) 스님에게 한 스님이 묻기를,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자, 조주스님은 ꡐ뜰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 이 화두를 들어 보아라" 하였다.

그러나 공은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호문정공 (호문정공:호안국) 을 뵙고 마음 쓰는 법에 대해 자세히 물으니 호안국은, 논어 맹자에서 인의 (인의) 에 대해 말한 부분과 한곳으로 유추해 보면 그 속에 요점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공은 그 말을 간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하루 저녁은 변소에 가서 ꡐ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 (인) 이 비롯되는 곳이다 〔측은지심인지단〕ꡑ라는 구절을 깊이 생각하였다. 묵묵히 생각에 잠겼는데, 그때 홀연히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뜰 앞 잣나무 화두가 들리며 〔거〕 갑자기 느낀 바 있어 게송을 지었다.

봄 하늘 달밤에 한마디 개구리 소리가

허공을 때려 깨서 한 집을 만들도다

바로 이런 때를 뉘라서 알겠는가

산꼭대기 곤한 다리에 현묘한 도리 있도다.*

춘천야월일성와 당파허공공일가

정임마시수회득 령두각통유현묘

공은 우연히 묘희 (묘희대혜:1089~1163) 스님이 불상에 붙인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되었다.

까맣게 옻칠한 커다란 죽비 (죽비) 에

부처가 온다면 한 방 치리라.

이 게송을 보고 나서 묘희스님을 만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다 조정으로 돌아와 예부시랑 (예부시랑) 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묘희스님이 서울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더니, 스님이 만나겠다고 알려와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그러나 날씨에 관한 이야기말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스님은 돌아와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ꡒ장시랑은 깨달은 바가 있더라."

ꡒ서로 만나 선 (선) 의 선 자도 뻥긋하지 않았다는데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아십니까?"

ꡒ내 눈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공이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받들기 위해 휴가를 청해 경산 (경산) 을 지나던 길에 스님을 뵙고, 「대학 (대학)」에 나오는 격물의 뜻 〔격물치지〕 을 물었더니 스님이 말하였다.

ꡒ공은 격물 (격물) 만 알았지 물격 (물격) 은 모르는군요."

공은 망연히 있다가 한참 뒤에 말하기를,

ꡒ거기에도 어떤 방편이 있겠지요"라고 하였다. 스님이 다시 이야기 말하였다.

ꡒ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당나라 사람이 안록산 (안록산) 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은 난 (란) 에 앞서 낭주 (주) 태수였던 이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당 현종 (현종) 이 촉 땅에 행차했을 때 그 그림을 보고 노하여 신하에게 그의 목을 칼로 치라 하였다, 그 사람은 그때 섬서성 (예서성) 에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공이 이 말을 듣자 홀연히 꿈에서 깨어난 듯하여 벽에 글을 지어 붙였다.

자소 (자소)는 격물 (격물)이요

묘희 (묘희)는 물격 (물격)이니

한 관 (관) 이 얼마나 되는고

오백돈이 둘이로구나.

자소격물 묘희물격

욕식일관 량개오백

공은 이로부터 도를 참구하여 법을 깨달아 자유로왔고, 마음이 텅 비고 의혹이 없어졌다. 언젠가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ꡒ경산 노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사방팔방으로 활짝 트여서 마치 천문만호를 한번 밟아보지 않고도 활짝 열어제치는 듯하다. 어떤 때는 가마를 나란히 타고 높은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깊은 연못가를 천천히 걷기도 하는데,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으나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의 경계 〔낙처〕 를 알지 못한다.

이 장구성이 생사 문제 〔말후대사〕 를 깨닫게 된 것은 실로 경산스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이 한 줌의 향 (향) 은 스님을 감히 등질 수 없기 때문에 피우는 것이다."

공이 남안 (남안) 에서 유배생활을 보낸 14년 동안, 불교 경전과 유가 서적들을 공부하면서 지나가는 납자 (납자) 가 있으면 반드시 경계를 확인해 보고 선열 (선열) 의 즐거움을 맛보았으나, 한번도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는 사람은 모두 그의 도풍과 현달함을 높이 평가하고 마음 깊이 존경하였다.

공은 언젠가 중승 (중승) 하백수 (하백곤) 에게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낸 적이 있다.

내가 경산스님과 절친하게 왕래하는 것은 다 유래가 있는 일입니다.

옛일들을 살펴보니, 배휴 (배휴) 도 황벽 (황수희운)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한퇴지 (한퇴지) 도 태전 (태)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습지 (리습지:) 는 약산 (약산유엄) 스님께, 백낙천 (백락천) 은 조과 (조과도림) 스님께, 양대년 (양대연:억) 은 광혜 (광혜상총) 스님께, 이화문 (리화문) 은 조자 (조자;정총) 스님께, 소동파 (소동파) 는 조각 (조각:동림상총) 스님께, 황산곡 (황산곡:정견) 은 회당 (회당조심) 스님께, 장무진 (장무진:상영) 은 도솔 (두솔종열)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 분들을 어찌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서 변소 청소나 하는 노파들과 같다 하겠습니까.

경산스님은 그 마음 바탕 〔심지〕 이 생과 사를 하나로 보고 사물의 이치를 지극히 궁구하였습니다. 나아가 도를 논하기를 좋아했는데, 선비들도 당하지 못할 적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해가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름난 명사와 사귀기를 좋아하고 그 사람들과의 친분으로 세상에서 행세하려 드는 것은 도둑들이나 하는 짓인데, 어찌 이 분들이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지난번 사형께서 나를 일깨워주신 편지를 받고 마음 속에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평소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지 않았더라면, 마음을 쏟아 주위 사람들에게 모두 알렸겠습니까. 덕 높으신 사형께서는 살펴주소서.

공이 유배에서 풀려나 북쪽으로 돌아올 때 장주 (♠주) 에 도착하니 묘희스님도 매양 (매양:묘희스님이 유배갔던 곳) 에서 그곳으로 와 있었다. 나란히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스님은 날마다 종지 〔종요〕 를 말해 주었다. 공이 물러나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ꡒ오늘 이 장구성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노스님께서 선 (선) 의 강물을 기울여 여러분들께 법을 들려 주셨겠는가?"

공이 영가현 (영권현) 을 다스릴 때 광효사 (광효사) 의 주지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복당 (복당) 서선사 (서선사) 의 수정 (수정) 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불법이 떠난 지 오래되어 경산 노스님께서 영외 (령외:매양) 로 가신 뒤에 학인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정은 맑고 경산스님도 돌아오셨으니 불법이 다시 일어나려는가 봅니다.

저는 사실 이 도에 일찍부터 부딪쳐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명공대가 (명공대가) 한두 분을 찾아 그 분들의 제창으로 미혹한 이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니 스님께서 제발 저의 청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혹 서선사는 넉넉한 곳이고 광효사는 박한 곳이라서 수정스님은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은 속인의 소견으로 다른 사람을 맞추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으로 불법의 흥망을 점쳐 보려 하니, 스님께서 불법을 일으켜 보겠다는 마음을 내고 여러분들이 반 팔의 힘만 내주신다면 지극히 다행이겠습니다.

불법을 지키려는 공의 정성이 이 편지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문도전(문도전)」

28. 도반될 자격 / 지화 (지화) 암주

지화 암주 (지화암주) 는 고소 (고소) 사람인데 성품이 고결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한번은 호상 (호상) 지방을 행각하다가 밤이 되어 객실에서 자게 되었는데 보교 (보교:1048~1124) 스님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지화스님은 보교스님이 침착하고 온후한 데다가 말없이 밤새도록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특하게 여겨서 물었다.

ꡒ스님은 만리 낯선 길을 혼자 다니시오?"

ꡒ예전에는 도반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절교했습니다."

ꡒ어째서 절교했소?"

"ꡒ 사람은 길에서 주운 돈을 대중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ꡐ도를 배우는 사람은 돈을 똥이나 흙처럼 보아야 하는데 그대가 비록 주워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하더라도 이는 아직 이익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는 헤어졌습니다. 두번째 도반은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도를 닦는다기에 내가 말했습니다. ꡐ도를 닦아 비록 불조의 경계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불효하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불효하거나 이익을 따지는 이들은 모두 내 도반은 아닙니다."

지화스님은 그의 현명함을 존경하여 드디어 같이 행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옛날 은산 (은산) 화상을 본받아 우뚝한 산꼭대기에 띠풀 암자를 짓고 구름과 하늘을 내려다보면서 세상 바깥 사람이 될 것이며, 세속에 떨어지지 말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보교스님은 맹세를 어기고 천동사 (천동사) 의 주지가 되었다. 보교스님이 지화스님을 찾아갔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정언 (정언) 진숙이 (진숙이) 가 그의 서실을 암자로 만들어 주어 그곳에서 이십 년을 혼자 살았는데, 너절한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호랑이 두 마리만이 시봉할 뿐이었다. 스님께서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나무 홈통에는 두서너 되의 찬물이 흐르고

창문 틈새로는 몇 조각 구름이 한가롭다

도인의 살림살이 이만하면 될 뿐인 걸

인간에 머물러 보고 듣고 할 것인가.

죽견이삼승야수 창간칠오편한운

도인활계지여차 류여인간작견문 「설창기 (설창기)」

29. 조산 (조산) 의 가풍 /조산 탐장 (조산탐장) 선사

조산 탐장 (조산탐장:840~901) 선사는 천주 (천주) 사람인데, 동산 양개 (동산양개) 선사에게서 비밀스런 종지를 받았다. 청을 받고 무주 (무주) 조산 (조산) 에 처음 머물게 되었는데, 도가 널리 퍼져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ꡒ이 나라에서 칼 만지는 이가 누구입니까?"

ꡒ나 조산이다."

ꡒ누구를 죽이시렵니까?"

ꡒ닥치는 대로 다 죽인다."

ꡒ홀연히 낳아주신 부모를 만나면 어찌하시렵니까?"

ꡒ무엇을 가리겠는가?"

ꡒ자기 자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ꡒ누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ꡒ어째서 죽이지 않습니까?"

ꡒ손 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지의 도자 (지의도자) 라는 사람이 동산 (동산) 에서 찾아왔는데 스님이 물었다.

ꡒ지의 (지의) 안에 있는 일은 어떤 것인가?"

ꡒ한 조각 가죽을 겨우 몸에 걸쳤으나 만사가 다 그럴 뿐이요."

ꡒ그 지의 속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

지의 도자는 가까이 다가서더니 옷을 벗어 던지고 차수 (차수) 한 채 떠났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ꡒ그대는 이렇게 갈 줄만 알았지 이렇게 올 줄은 모르는구나" 하였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말하였다.

ꡒ신령스러운 진성 (진성) 이 여자의 뱃속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다면 어떻소?"

ꡒ아직 묘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것이 묘한 것이요?"

ꡒ빌리지 않으면서 빌리는 것이요 〔불차차."*

그러자 그는 법당에 내려와 죽었다.

당시 홍주 (홍주) 의 종씨 (종씨) 가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단지 대매 법상 (대매법상) 선사의 산거시 (산거시) 한 수로 답을 보냈다.

천복 신유 (천복신유:901) 년 6월 여름밤에 소임자에게 오늘이 몇일이냐고 물어 그가 유월 보름이라고 대답하자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평생 행각에서 반드시 90일로 한 철을 났으니 내일 진시 (진시) 에 행각길에 나서련다."

그러고는 때가 되자 향을 사르고 입적하였다. 「승보전 (승보전) 」

30. 독설로 불사를 짓다 / 법운 법수 (법수) 선사

법운사 (법운사) 법수 (법수:1027~1090) 선사는 진주 (진주) 사람인데 전생에 노화상 (로화상) 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하루는 노화상에게, 자신이 죽거든 대밭 언덕 아랫집으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 집에 아기가 태어나자 노화상이 찾아가서 보았더니 아이가 한번 웃음을 지어 보였으며, 세살 때 노화상을 따라가겠다고 하여 출가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인물이 남달랐고 온 대중 가운데 있으면 그려놓은 듯 우뚝하고 훤칠하였다.

스님은 늘 독설 〔노매〕 로 불사를 지었다. 당시 사마온공 (사마온공:광) 이 등용되었는데, 불법이 너무 성하다 하여 이를 억제하려 하자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ꡒ상공 (상공) 은 총명하여 사람 중에 영걸이오. 불법 인연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소.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부처님의 부촉을 저버린단 말이오?"

그러자 공은 마음을 돌렸다.

또 이백시 (리백시) 는 말 그림으로 잘 그려 한간 (한간:당 현종 때의 화가) 에 뒤지지 않게 그림값을 받았는데 스님은 그를 꾸짖었다.

ꡒ그대는 사대부로서 그림으로 이름이 났는데, 하물며 말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묘를 얻었다고 자랑하며 봐 주기를 기대하겠지만, 묘하게도 그대는 말 뱃속에 들어갈 것이다."

이백시는 이에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또 황정견 (황정견:노직) 은 저속한 시를 즐겨 짓고 사람들은 다투어 그것을 전하니,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ꡒ묘한 문장을 내게도 좀 끌러 놓으시죠."

그러자 황노직이 웃으며 말하기를, ꡒ나도 말 뱃속으로 집어넣을 참입니까?" 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ꡒ그대는 저속한 말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음난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어찌 말 뱃속에 그치랴.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31.자기 제문을 짓다 고산 지원 (고산지원) 법사

고산 지원 (고산지원:976~1022) 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경론에 대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서호 (서호) 가에 높이 누웠으니, 권세로도 부귀로도 스님을 꺾을 수 없었으므로 속된 무리들은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이때 문목왕공 (문목왕공) 이 전당 (전당) 에 오게 되었는데, 군 (군) 의 스님네들이 모두 관문까지 마중을 나가자고 하자, 스님은 몸이 아프다면서 가지 않고는 심부름꾼을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ꡒ자운법사 (자운법사) 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전당 땅에 중이 하나 있다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스님은 늘 비장 (비장) 에 병이 있어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가운데서도 침상에 붓과 벼루를 깔아놓고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고하였다.

ꡒ내 나이 마흔아홉인데 이미 오래 못 살 것을 안다. 내가 죽거든 땅을 골라 후하게 장례치르노라 내 허물을 더 불리지 말고 너희들이 항아리를 합쳐서 장사 지내다오."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 제문 (제문) 을 지어 부탁하였다.

삼가 강산과 달과 구름을 차려놓고 중용자 (중용자:지원법사의 호) 의 영을 제사 지내노라. 그대는 본래 법계의 원상 (원상) 이며 보배롭고 완전한 묘성 (묘성) 으로서, 아직까지 동정의 조짐이 없었으니 어찌 오고 감에 자취가 있겠는가. 이제 일곱 구멍 (칠혈:사람 얼굴에 나있는 구멍) 을 뚫으니 혼돈 (혼돈) 이 죽고 6근이 나뉘어 정명 (정명:일심) 이 흩어지게 되었도다. 그리하여 그대 스스로의 마음을 보건대 바깥 경계와 다른 바가 있도다. 생존과 사멸 두쪽을 집착해서 항상 흔들려 쉴 날이 없으며 깜깜하여 비출 줄을 모르는구나.

내 혼돈 (혼돈) 을 회복하여 정명 (정명) 으로 돌아가려 하노라. 그리하여 허깨비 아닌 〔비환〕 법에서 허깨비 언설을 지어내는 것이니, 허깨비 아님도 없거늘 어찌 허깨비라는 법이 있으랴. 그대 중용자도 묘하게 이 뜻을 알아들을지어다. 그대가 이미 허깨비 생을 받았으니 허깨비 죽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허깨비 몸이 있어서 허깨비 병이 있게 되었고, 입으로는 허깨비 말을 빌어 허깨비 제자에게 허깨비 붓을 잡아 허깨비 글을 쓰게 하노라. 그리하여 미리 그대 허깨비 중용자를 제사 지내고 끝없는 뒷사람들에게 모든 법이 허깨비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렇게 하면 허깨비삼매 (여환삼미) 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아! 삼매,그것도 허깨비로다. 잘 받아 먹으라.

그리고는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드셨다. 「한거편 (한거편)」

 

32. 소동파의 옥대 / 요원 (료원) 스님

소동파 (소동파:1036~1101) 가 말하였다.

ꡒ어머니께서 나를 가졌을 때 꿈에 비쩍 마른 애꾸스님 한 분이 문 앞에 오셨다는데, 열살 남짓 되어서는 내 꿈에 자주 보였다. 그러니 나는 전생에 스님이었던가 보다. 또 내 아우 자유 (자유) 가 진정 극문 (진정극문) , 수성 상총 (곤성상총) 스님과 함께 고안 (고안) 에 있을 때 그들이 사계 (사계) 스님 만난 꿈 이야기를 똑같이 했으니 아우가 사계스님의 후신 (후신) 임에 틀림없다."

소동파는 진정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ꡒ전생에 이미 법을 만난 듯하니 바라옵건대 더욱 채찍질하여 자신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그가 금산사 (김산사) 에 갔을 때 마침 방에 들어가는 불인 (불인료원:1032~1098) 스님과 마주쳤는데 불인스님이 말하였다.

ꡒ여기에는 단명전학사 (단명전학군:소동파의 직명) 께서 앉을 자리가 없소."

ꡒ스님 몸 〔사대〕 을 빌려서 선상 (선멸) 을 만들지요."

"내가 한마디 물을테니 대답을 하면 내 몸을 선상으로 쓰되, 대답을 못하면 옥대 (옥대) 를 끌러놓고 가시오."

소동파가 옥대를 책상에 풀어놓으면서 물어보라 하니 스님께서 물었다.

ꡒ내 몸 〔사대〕 은 본시 공 (공) 하고 5음 (오음) 도 있는 것이 아닌데 그대는 어디에 앉겠다는 것이오?"

소동파가 대답을 못하자 스님은 시자를 불러 옥대를 산문의 가보로 길이 간직하게 하고 대신 중 바지 하나를 내 주었다. 이에 소동파는 절구 (절구) 두 수를 읊었다.

병든 몸은 허리의 옥대를 감당키 어려웠고

둔한 근기는 날랜 기봉에 나가 떨어졌다네

마침 가비원 (가비원) 에 걸식할 판에*

구름 덮인 산에서 승복과 바꿔 입었네.

병골난감옥대위 둔근틈낙전봉기

회당걸식가비원 환득운산구납의

객사에 사람 들르듯 많은 사람 거쳐온 이 옥대가

흘러 흘러 나까지 온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로다

비단 도포를 잘못 떨어뜨려

딴 것과 혼동하여

거짓 미치광이 만회 (만회) 에게 빌어다 주었네.*

차대열인여전사 류전도아적유재

금포착낙혼상칭 걸여양광로만회 「주파시 (주파시) 」

33. 원력의 영험 / 현장 (현장) 법사

삼장법사 현장 (현장:622~684) 스님은 27세에 서역으로 법을 구하러 갔다. 진주 (진주) 난주 (난주) 양주 (량주) 를 거쳐 과주 (과주) 에 이르러 옥문관 (옥문관) 을 나서니 관문 밖에는 정탐꾼들이 살고 있었다. 점점 가다가 사막에 이르니 악귀와 온갖 짐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였으나 그때까지는 멀리 달아나지 않다가 반야심경을 외우자 그 소리에 모두 사라졌다.

갠지즈 강가에 왔을 때 도적떼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ꡒ이 사문은 단정하고 아름답게 생겼으니 신에게 제사 지내면 길하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휘두르려는데 스님이 말하였다.

ꡒ내 이미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안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음을 맞도록 조금만 기다려다오."

마침내 미륵보살을 염하였다.

ꡒ원컨대 그 곳에 나서 묘한 법문을 듣고 신통 지혜를 성취하여 이 땅에 도로 하생하여 먼저 이 도적들부터 제도하고 그들에게 훌륭한 수행을 닦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는데, 그 발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천둥 번개가 치고 회오리바람에 나무가 부러지니 도적들이 깜짝 놀라 사죄하고 흩어졌다. 「본전 (본전) 」

34. 고승의 진영 / 상국 배휴 (상국배휴)

상국 (상국) 배휴 (배휴) 는 하동 (하동) 사람인데, 신안 (신안) 태수 (태수) 로 있을 때 희운 (황수희운) 스님을 만났다. 희운스님은 처음에 황벽산에서 대중을 버리고 대안정사 (대안정사) 로 들어가 노역하는 무리들과 섞여 숨어 살았다.

공이 절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다가 소임자에게 물었다.

ꡒ이것이 무슨 그림입니까?"

ꡒ고승의 진영 (진영) 입니다."

ꡒ진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

소임자가 대답을 못하자 다시 물었다.

ꡒ이곳에 선 (선) 닦는 사람은 없습니까?"

ꡒ요즘에 한 스님이 절에 들어와 막일을 하고 있는데 자못 선승같은 데가 있습니다."

공이 모셔오라 하여 스님이 이르자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ꡒ내게 마침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데 스님네들이 말씀을 아끼시니, 대신 한말씀 해주십시오."

스님이 물으십시오 하니, 공은 앞에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하였다. 스님이 ꡒ배휴!" 하고 낭랑한 소리로 부르자 공이 ꡒ예!" 하는데 ꡒ어디 있느냐?" 하였다. 공이 당장에 그 뜻을 깨닫고 마치 상투 속 구슬을 찾은듯 기뻐하며 말하였다.

ꡒ스님께선 진짜 선지식이십니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법을 보여주시면서 어째서 이런 데 숨어 계십니까?"

이때부터 제자의 예를 올리고 다시 황벽산에 머무시기를 청하였다.

공은 조사의 심법을 훤히 깨치고 교학까지도 두루 꿰었으니, 제방 선사들은 모두 배상국은 황벽스님 문하에서 헛 나온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전등 (전등)」

35. 백련결사에서 공부한 거사 / 유정지 (유정지)

진 (진) 나라 유민 (유민) 인 유씨 (유씨) 는 이름이 정지 (정지) 이며 팽성 (팽성) 사람이다. 한 (한) 나라 초원왕 (초원왕) 의 후손으로 그의 조부는 진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승상 환현 (환현) 과 태위 사안 (사안) 이 조정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여산 (려산) 의 혜원 (혜원)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 후 뇌차종 (뢰차종) 과 주속지 (주속지) 가 함께 와서 혜원스님과 살게 되었다.

혜원스님은 ꡒ여러분 모두는 아마도 정토에 노닐기 위해 여기에 왔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결사문을 짓도록 명하여 이 일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 결사 〔백련사〕 의 인원은 백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 훌륭한 사람이 18명이었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염불을 할 때면 언제나 자주색 금빛 몸을 한 아미타불이 그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부끄럽고 행복하여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ꡒ여래께서는 저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고 저에게 옷을 덮어주십시오."

그러자 갑자기 부처님께서 나타나 이마를 어루만져주고 가사를 끌어다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뒷날 그는 또 꿈에 자기 몸이 칠보로 된 큰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못에는 백련화 청련화가 어우러져 피어 있었으며 물은 맑고 맑아서 끝간 데가 보이지 않았다. 못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서 못물을 가리키며, 8공덕수 (팔공덕수) 이니 마셔보라하기에 물을 마셔보니 맛이 감미로왔다. 이윽고 꿈을 깨고 나서도 털구멍에서 신비한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그는 말했다. ꡒ이는 나에게 정토의 인연이 다가온 것이다. 누가 육화중 (육화중:스님들을 가리킴) 을 위해 나를 증명해줄 수 있겠는가?" 조금 있으니 대중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그는 불상 앞에서 향을 사루고 재배한 뒤 축원하였다.

ꡒ제가 석가모니불께서 남기신 가르침으로 아미타불이 계심을 알게 되었으니 이 향은 마땅히 먼저 석가모니부처님께 공양하고 다음에 아미타불께 공양하고 아울러 시방의 불보살님들께 공양하옵니다.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정토에 가서 나게 하여 주십시오."

축원을 마치고 이 부딪치는 소리를 세번 내더니 장궤 합장한 채 죽었다. 「여산집(려산집)」

36. 정토수행을 한 거사 / 왕일휴 (왕일휴)

왕일휴 (왕일휴) 거사는 용서 (룡서) 사람인데 품행이 단정하여 젊어서 국학 (국학) 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득 ꡒ서방정토에 귀의함이 최고의 일이로다" 하고 탄식하였다. 이때부터 베옷에 채소밥을 먹으며 매일 천배 (천배)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정토에 날 과업을 장엄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ꡒ그대는 이미 마음이 순일한데 더 고행을 할 것까지야 없지 않습니까?" 하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경에 말하기를 적은 복덕을 닦은 인연으로는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하였으니 한 마음으로 고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생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거사는 집에 있을 때에도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으며 앉아서는 반드시 좌선을 하고 누울 때는 의관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얼굴과 눈에서는 빛이 났으므로 보는 사람들은 그를 도인이라고 믿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두루 친지들과 작별하면서 정토수행을 힘써 닦으라고 부탁하였다. 밤이 되자 소리를 가다듬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다가, ꡒ부처님께서 나를 맞으러 오신다!"고 외치며 우뚝 선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운병섭윤적기 (이운병섭윤적기)」

37. 좌선의 요법 / 정상좌 (정상좌)

정상좌 (정상좌:국청사정) 는 처음에 현사 (현사사비:825~905) 스님을 뵙고 오묘한 종지를 얻은 뒤 천태산에 살았다. 30년 동안 한번도 산을 내려오지 않고 3학을 폭넓게 공부하여 깨끗한 수행으로 고고하게 살았다. 한번은 선을 닦는 이가 물었다.

ꡒ좌선할 때면 생각 〔심념〕 이 갈래갈래 흩어집니다. 스님께서 지도 좀 해주십시오."

정상좌가 대답하였다.

ꡒ그대는 생각이 흩어지는 그 때, 흩어져 달아나는 바로 그 생각으로 흩어져 가는 곳을 찾아 보아라. 찾아 보아도 가는 곳이 없다면 흩어지는 생각이 어디 있겠느냐? 찾는 그 마음을 돌이켜 찾는다면 찾는 그 마음은 또 어떻게 있겠느냐?

또한 비추는 지혜 〔능조지지〕 도 본래 공 (공) 하며 연 (연) 이 되는 대상 〔소록지경〕 도 고요한 것이다. 따라서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음은 고요한 주체가 없기 때문이며,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음은 비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주관과 대상이 다 고요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니 이것이 마음 근원으로 돌아가는 긴요한 방편이다."

38. 노자의 도를 닦다가 불법을 만나다 / 오설초 (오계초)

도사 (도군) 오설초 (오계초) 는 주 (주) 주양 (주양) 사람이다. 하청 (하청) 군수로 있다가 중앙관서에서 보낸 사자의 탄핵을 받고 숭산 (숭산) 에 숨었는데 거기서 석태 (석태) 선생을 만났다. 오설초가 묻기를 ꡒ노자의 가르침 〔허무지도〕 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하니 석태선생이 말하였다.

ꡒ선각 (선각) 의 말씀에 의하면 다섯 가지 무루법 〔오무장법〕 이 있다. 첫째 눈으로 보지 않으면 혼 (혼) 이 간장에 있게 되고, 둘째 귀로 듣지 않으면 정기 (정기) 가 신장에 있게 되며, 셋째 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정신 (정신) 이 심장에 있게 되고, 넷째 코로 냄새를 맡지 않으면 넋 〔백〕 이 폐에 있게 되며, 다섯째, 사지를 움직이지 않으면 의지 〔의〕 가 비장에 있게 된다. 이 다섯 가지가 서로 융합하여 하나의 기 (기) 가 되어 3관 (삼관, 인체의 3대 요소) 에 모이면 이것을 연홍 (연홍)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연홍은 몸안에서 구해지는 것이어서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

오설초는 이 비결을 전해받고 나서 오랜 노력 끝에 공부가 성취되었다. 한번은 우연히 서악 (서악) 에 갔다가 자양진인 (자양진인) 을 만났다. 자양진인이 말하기를, ꡒ그대가 얻은 바가 훌륭하기는 하나 만일 성품도리를 밝히지 못하면 헛수고일 뿐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하니, 오설초가 말하였다. ꡒ나는 2기 (이기:음양) 를 황도 (황도:태양이나 인체음양의 운행법칙) 에서 추적할 수 있고 3성 (삼성, 심중의 삼정) 을 원궁 (원궁, 단전) 에 모을 수 있어서 어떤 경계를 대하여도 여여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데 더 이상 무슨 성품도리를 운운하는가." 그러자 자양진인이 원각경 (원각경) 을 보여 주면서 ꡒ이것이 불교의 심종 (심종) 인데 깊이 음미해 본다면 뒷날 나아갈 길을 알게 될 것이고 내 말이 빈 말이 아님을 믿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설초는 마침내 그 말을 믿고 받았는데, 하루는 ꡒ적정 (적정) 하기 때문에 시방 여래의 마음이 거울 속에 상이 비치듯이 그 가운데 뚜렷이 드러난다" 한 대목을 읽다가 문득 감탄하면서 ꡒ이제까지는 내가 문을 닫고 살아 왔는데 오늘에사 팔을 휘저으며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선 법회를 두루 돌아다니며 의심을 묻고 결택하곤 하였는데 나중에 동선 법종 (동선법) 선사를 뵙고 물었다.

ꡒ불성이 엄연히 드러나 있건만 상 (상) 에 집착하여 미혹한 생각 〔정〕 을 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우니 만약 본래 ꡐ나'가 없음을 깨달으면 내 얼굴은 부처님의 얼굴과 어찌됩니까? 학인들이 깨달았다고 하면 깨달은 것이겠지만 어찌해서 부처님 얼굴을 보지 못합니까?"

그 말을 듣자 동선선사는 주장자를 뽑아들고 오설초를 두들겨 내쫓아 버렸다. 오설초가 막 문을 열고 나서는데 활짝 깨닫고는 송 (송) 을 지었다.

조사의 기봉을 단번에 간파하니

눈을 뜨고 감음이 한결같도다

이로부터 성인이고 범인이고 다 없어져

대천세계는 원래 털끝 만한 거리도 없다.

맥연처파조사기 개안환동합안시

종차성범구상진 대천원불격호백 「선원유사 (선유유사)」

39. 목선암 (목선의) / 대수 법진 (대수법진) 선사

대수사 (대수사) 법진 (법진 834~919) 선사는 신주 (재주) 사람이며 염정왕씨 (정왕씨) 자손으로 원래 벼슬이 높은 집안이었다. 젊어서 숙세 인연을 깨닫고 뜻을 세워 스승을 찾아나섰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약산 도오 (약산도오) 선사를 뵌 뒤, 대위산 (대산) 영우 (영우) 선사를 찾아 뵙고 대중 속에 끼어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배불리 먹지 않고 따뜻한 곳에 잠자지 않으면서 맑은 고행과 철저한 수행으로 실천과 지조가 남달랐으므로, 영우선사가 늘 그의 근기를 인정하였다. 하루는 대위선사가 물었다.

ꡒ자네는 이곳에 와서 왜 한 마디 법도 묻지 않는가?"

ꡒ무엇에다 입을 열어야 하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ꡒ무엇이 부처냐고 묻지 그러느냐?"

진 (진) 선사가 손으로 대위선사의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자 대위선사는 ꡒ그대는 참으로 도의 진수 (진수) 를 얻었구나"하고 감탄하였다.

그후 서촉 (서촉) 으로 돌아가 도수 (도수) 가에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그들 모두에게 차를 끓여주곤 하면서 3년을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뒷산에 올라가 옛절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름이 대수사 (대수사) 였다. 그 산에는 둘레가 네 길 〔장〕 되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남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어 도끼나 칼을 빌리지 않고도 그대로가 암자였다. 선사가 마침내 이곳에 살게 되니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글자 그대로 ꡐ목선암 (목선암) '이라고 불렀다.

혼자 그곳에 살기 십여 년에 명성이 멀리까지 퍼져서 촉왕 (촉왕) 이 세번이나 불렀으나 들어주지 않으니, 왕은 선사의 고고한 도풍을 우러러볼 뿐 한번 만나볼 길이 없었다. 내시를 보내 스님에게 호와 사액 (사액) 을 하사하였지만 받지 않았고 무려 세번을 보냈으나 확고부동하게 거절하였다. 촉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면서 칙명을 내려 이번에도 전처럼 받지 않는다면 그대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가 다시 찾아가 간절히 절하면서 ꡒ스님께서 받지 않으시면 제가 죽습니다"라고 하니 선사는 그제서야 받았다.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ꡒ나는 명리를 위해서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을 얻고자 할 뿐이다. 백운청산 속에서 시비를 쫓지 말지니 업보로 받은 이 몸을 벗어버리면 풀 한 포기도 먹지 못할 것이다. 선승들이여, 내가 행각할 때에 여러 총림에 가 보면 많게는 천명, 적어도 2백명의 대중이 있었다. 그곳에서 동안거, 하안거를 보냈으나 깨닫지 못하고 공연히 시간만 보내다가, 위산스님 회중에 가서 7년 동안 밥을 짓고 동산 (동산) 스님 회중에서 3년 나무를 했다. 그 중에서 나를 중하게 대하는 곳이 있으면 얼른 떠나 버렸으니, 그 때는 오직 나 자신이 깨달을 생각뿐 남의 일은 상관하지 않았다.

불보살 같은 분들도 모두 오랜 세월을 각고해서야 비로소 성취하였는데, 오늘날의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각고했길래 ꡐ나는 출세간법을 깨달았노라'고 하는가. 세간법도 아직 깨닫지 못한 처지에 조그마한 경계라도 경험하면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어쩔 줄을 모르니, 무슨 해탈법을 설하겠는가? 길다란 선상에 앉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신도들의 시주물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ꡐ내가 수행한 영험이 이와 같다' 하니, 이는 자기를 속일 뿐 아니라 모든 부처님까지도 속이는 것이다.

이미 가사 〔삼의〕 를 입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 해서 생사대사를 해결해야지, 또 다시 6도윤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재한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무슨 화탕지옥, 노탕지옥에 들어가느니 혹은 말 뱃속, 당나귀 뱃속에 들어가느니를 논할 것이 있겠느냐. 이런 경지에는 맛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맛이 있겠지만 아직 이러한 경지를 얻지 못했다면 정말로 이런 과보를 받는다. 한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다시 오늘같이 인간에 태어나고자 해도 만에 하나도 어려운 일이다. 듣지 못했는가? 옛 스님이 어느 스님에게 묻기를, ꡐ무슨 일이 가장 괴로운 일이냐?"라고 하니 「지옥업보를 받는 일이 가장 고통스런 일입니다' 하였다. 그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ꡐ그것은 아직 고통이라 할 수 없다. 출가하여 도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라고 하셨다. 옛 스님의 이런 말씀은 참으로 간절한 말씀이니 명심하고 때때로 경책해서 후회없도록 해야 한다." 「어록 (어록)」

40. 수도자는 가난해야 한다 / 광혜 원련 (광혜원연) 선사

광혜 원련 (광혜원연:951~1036,, 임제종, 수산성념의 법사)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면 늘 사람들에게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고 먹고 입는 것을 간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또 언젠가는 ꡒ만약 도를 배우려거든 먼저 가난과 고생 속에서 힘써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를 이루려고 하여도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다.

원련선사는 입적할 때 대중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ꡒ내가 평소 너희에게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고 먹고 입는 것을 소박하게 하면 반드시 도업 (도업) 을 이룰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무슨 까닭인가? 모든 죄업은 재물 때문에 생겨나고 모든 더러움은 입과 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 동안 재물을 모으지 않았고 대중들과 따로 밥을 먹지 않았으니, 그것이 내 분수 밖의 일이어서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어버이를 작별하고 출가하여 마음을 알고 근원을 통달해서 무위법 (무위법) 을 깨닫고자 하면 세간의 재물을 버리고 걸식으로 만족하며 하루 한끼 먹고 나무 밑에서 하루 밤을 자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밝으신 가르침인데, 어찌 그것을 어길 수 있겠느냐. 내가 만약 잘 먹고 잘 입는 것으로 자재해지려 했다면, 어째서 세속에 살면서 어딜 가나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무얼 하려고 하필 부처님의 형상과 옷을 빌어 불법문중을 파괴하랴. 이미 불자가 되었으면 불자다운 행동을 해야 하며, 나는 복이 있고 인연이 있으니 마음놓고 업을 지어도 된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부모와 스승에까지 누를 끼쳐 함께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다.

요즘 세상에 선지식이라 하는 어떤 이들은 자기 안목이 바르지 못해서 입만 열었다 하면 사람의 목숨을 끊으려 하고 부딪치기만 하면 독사같은 마음을 품는다. 이익이나 명예를 보면 피를 본 파리처럼 결코 포기할 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또 나는 선을 알고 도를 깨쳤다고 하며 봉 (봉) 도 하고 할 (갈) 도 하니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그대들은 행각할 때에 반드시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말을 마치고는 입적하였다. 「주봉록 (주봉록)」

41. 화엄경을 읽다가 / 광효 지안 (광효위안) 선사의 행적

광효사 (광효사) 지안 (위안) *선사는 영가 (영권) 사람으로 성은 옹씨 (옹씨) 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진중하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아버지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여 출가시켰다. 천태산 운봉 (운봉) 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장좌불와 (장좌불와) 하고 하루 한끼 먹으며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누더기 하나로 여름과 겨울을 났다. 한번은 천태덕소 (천태덕소) 국사를 찾아가니 국사가 물었다.

ꡒ3계에는 아무 법도 없는데 어디서 마음을 찾을 것이며, 4대 (사대) 는 본래 공한데 부처는 무엇에 의지해 머물겠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에서 나를 보는가?"

선사가 대답하기를, ꡒ오늘은 스님께 걷어 채였습니다" 하였다. 국사가 다시 ꡒ이게 무엇이냐?" 하자 선사가 향대 (향대) 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버리니 국사가 쓸만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사가 하루는 「화엄경」을 읽다가 ꡒ몸도 몸이라할 것이 없고 수행도 수행이라 할 것이 없으며 법도 법이라 할 것이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공적 (공적) 할 뿐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활짝 깨쳤다. 선정에 들어 십여일이 지난 뒤 비로소 정에서 깨어나니 심신이 상쾌하면서 문득 현묘하고 비밀스런 것이 생겨났다. 선사는 이통현 (리통현) 이 화엄경에 대해 해석한 논 (론) 이 규모가 넓고 뜻이 깊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합쳐 120권으로 만들었는데 〔화엄경합론〕 , 그것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충의왕 (충의왕:오월왕) 이 선사의 도풍을 흠모하여 월주 (월주) 청태사 (청태사) 에 주지케 하였는데 선사는 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방장실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든듯 하였다. 하루는 선정에 들어 두 스님이 법당 난간에 기대 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천신 (천신) 이 둘러싸고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조금 뒤에 갑자기 악귀가 나타나 침뱉고 욕을 하며 천신의 자취를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난간에 기대섰던 스님들에게 까닭을 물어보니 처음에는 불법을 이야기하다가 뒤에는 세간 이야기를 했다고 하였다. 이에 선사는 말하기를 ꡒ한가한 이야기도 이러한데 하물며 불법을 주관하는 사람이 북을 울리고 법당에 올라가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랴" 하고는 이때부터 종신토록 한번도 세상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선사가 죽어서 화장을 했는데 혀는 타지 않고 붉은 연꽃 잎같이 부드러웠다.

「전등통행 (전등통행)」

42. 정종기 (정종기) / 명교 설숭 (명교계숭) 선사

명교 설숭 (명교계숭:1007~1072, 운문종) 선사는 등주 (등주) 사람이다. 출가한 뒤 늘 관음상 (관종상) 을 머리에 이고 하루에 십만번씩 명호를 불렀는데 그러는 동안 세간의 경서는 배우지 않고도 능통하게 되었다. 동산 효총 (동산효총) 선사에게서 법을 얻고 경력 (경역:1041~1048) 년간에 전당 (전당) 요호산 (락호산) 에 가서 머물렀다. 거쳐하는 한칸 방은 이렇다할 물건 하나 없이 깔끔하였고 종일토록 맑게 좌선하였으므로 청정하고 바르게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오지 못하였다. 스님의 도는 매우 깊어서 근기 낮은 학인들은 그 경계를 알 수 없었고, 한편 선사도 그들의 근기에 맞춰주느라 자기의 도풍을 낮추는 일은 조금도 없었는데, 한번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ꡒ어떻게 둥근 정에 모난 자루를 맞출 수 있겠는가. 성현의 행을 듣건대, 뜻을 세웠으면 그 도를 실천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말하는 것으로 그쳤다. 말과 행동이 이로 말미암아 만세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의 학인들이 법도를 알고 밝은 도를 닦아서 삿된 것을 멀리하고 정도 (정도) 에 노닐게 하셨으니 굳이 눈앞에서 법을 전수해주고 내게서 나왔노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문을 닫고 책을 썼다. 책 〔전법정조 (전법정종) 〕 이 다 되자 서울로 가지고 가서 한림학사 (한림학군) 왕소 (왕고) 를 통해 인종 (인종) 황제에게 올리고, 편지를 써서 먼저 바쳤더니 황제가 편지를 읽다가 ꡒ신 (신) 은 도를 위해서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닙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선사의 지극한 마음에 탄복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교대사 (명교대사) 라는 호를 내려 표창하고 그 책을 대장경에 넣게 하였다. 책이 중서성 (중서성) 에 보내지자 당시 위국공 (위국공) 한기 (한기) 가 보고 이를 문충공 (문충공) 구양수에게 보여주었다.

구양수는 당시 한창 문장가로 자처하고 천하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또한 종묘를 수호한다 하여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위국공에게 말하기를 ꡒ스님네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다. 날이 밝으면 한번 만나보자" 하였다. 위국공이 구양수와 함께 선사를 찾아가 만났는데 구양수는 선사와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매우 기뻐하니 한승상 (한승상) 이하 모든 고관들이 선사를 초대하여 만나보고는 존경하여 이로부터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드디어 배를 사서 동쪽으로 내려가니 대각 회연 (대각회연) 선사가 ꡐ백운부 (백운부) '라는 시를 지어 가는 길에 주었다.

흰구름 인간세상에 내려와도

떠다니는 티끌색에 물들지 않고

태양은 아득히 불타고 있는데

만가지 자태는 기막힌 정취로다

아아, 살찌고 경망스런 사람들아

하늘에 드리운 날개를 보았는가

남으로 가려함에 기회를 만나야 하니

한번 날면 여섯달이 되어야 쉬리라

천지에 아롱지는 기운을 어찌 알리요

무심히 내 가고픈 곳으로 가리라

하늘은 어찌 한결같이 고요할까

말았다 폈다 함에 흔적이 없네.

백운인간래 불염비진색

요주태양휘 만태정가극

차차경비자 견의수천익

도남성유기 거당육월식

령지인온채 무심임오적

천우일하요 서권비류적

선사는 노년을 영안정사 (영안정사) 에서 보내다가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6근 (육근) 중에 타지 않은 것이 셋이나 되었고 정골 (정골) 에서는 콩같이 생긴 맑고 투명한 혹백색 사리가 나왔다.

아아, 선사를 보고 주고 뺏는데 공평하지 못하고 말씀이 도에 부합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이와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석문행업 (석문행업)」

 

43. 감통전기 (혹통전기) / 도선 (도선) 율사

종남산 (종남산) 도선 (도선:596~667) 율사는 처음 제 (제) 나라에 태어나 승호 (승호) 라 하였으며 월주 (월주) 염현 (현) 에서 미륵불상을 조각하며 살았다. 두번째는 양 (양) 나라에 태어나 승우 (승우) 라 하였고 뒤에는 수 (수) 나라에 태어나 도선 (도선) 이라 하였다. 율사의 할아버지는 호주 (호주) 사람이며 아버지는 진 (진) 나라 이부상서 (리부상서) 였는데 임금을 따라 장안으로 갔다가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는데 인도승이 나타나 ꡒ당신이 잉태한 아기는 양나라 승우율사이니 출가시켜서 불교를 널리 펴도록 하시오" 하였다.

율사는 머리깎고 나서는 고행을 참고 마음을 다져 먹으며 전념으로 불법만을 구했다. 한번은 보물함을 머리에 이고 탑을 돌면서 도를 닦았는데, 함 속에 사리가 내리게 해달라고 발원했더니 7일만에 과연 감응을 얻었다. 이때부터 더욱 뜻을 고르게 하여 하루 한끼 먹고 곧게 앉아 잠자지 않고 선정에 드는 것을 즐겼다.

정관 4 (정관 4:630) 년 청궁사 (청궁사) 에서 반주삼매 (반주삼매) 를 닦는데 천룡이 내려와 시봉하는 감응을 얻었고 물이 모자란다 하여 흰 샘이 솟기도 하였다. 안거일에 성심으로 발원기도 하기를 ꡒ만일 하안거에 좌선한 공덕이 있다면 상서로운 징조를 내리소서" 하였더니 뒷뜰에 과연 지초 (지초) 가 났다. 율사가 과로로 병이 나자 천왕이 보심약 (보심약) 을 내려주면서 말하였다.

ꡒ지금은 상법 (상법) 시대 말이라 나쁜 비구들이 절만 거창하게 짓고 선의 지혜는 닦지 않으며 경전도 독송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천에 하나 둘 뿐입니다."

그 후 서명사 (서명사) 에 있을 때 깊은 밤에 도를 닦다가 법당 앞 계단을 헛디는데 어떤 성인이 발을 부축하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북천왕의 아들인데 칙명을 받고 모시게 되었다고 하니 율사가 말하였다.

ꡒ저의 수행에 태자를 번거롭게 할 것 없습니다. 태자는 위력이 자재하시니 천축국에 지을만한 불사가 있거든 그것이나 힘써 주시오."

ꡒ제게 길이 세치, 넓이 한치되는 부처님의 치아가 있는데 오랫동안 보물로 간직해왔습니다 이제 이것을 스님께 은밀히 드릴 터이니 잘 간직하소서."

율사는 받아서 낮에는 땅굴 속에 두었다가 밤에는 받들고 도를 닦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제자 강율사 (강율사) 가 가만히 율사의 뒤를 따랐다가 보고는 세상에 알리려 하자 율사가 말하기를 ꡒ신근이 천박한 이는 나를 요망하다 할 것이니 너와 나 단둘이만 알도록 하자" 하였다.

율사는 천신과 자주 왕래하였는데 신령스런 자취나 성스러운 일에 대해 듣기를 즐겼다. 그리고 묻고 답하는대로 기록하여 그것으로 「감통전기 (혹통전기)」 라는 책을 만들었다.

건봉 2년 (건봉:667) 봄 2월에 천신이 나타나 율사의 이제 과보가 다하려 하니 아마 미륵궁에 날 것이라고 알렸다. 그리고는 향 한봉지를 남겨두면서, 제석천왕이 사루는 천상극림향 (천상극림향) 이라고 하였다. 그해 시월 초사흘, 하늘에서 하늘 음악이 울리며 꽃과 향기가 가득히 내려와 율사를 청해 맞이하니 서거하셨다. 「별전등기 (별전등기)」

44. 지자 지의선사의 행적

지자 지의 (지자지의) 선사는 성이 진씨 (진씨) 며, 영천 (영천) 사람으로 날 때부터 겹눈동자 (귀인의 상) 였다. 열다섯살에 장사 (장사) 땅 부처님에게 가서 출가하겠다고 서원하였는데 염불하는 중 꿈꾸듯 황홀한 가운데서 바다에 맞닿은 산이 보였다. 산꼭대기에서 스님 한 분이 손짓하며 부르기를,ꡒ너는 여기 살게 될 것이며 여기서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깨고 나서 더욱 지극 정성을 드렸다. 열여덟살에 상주 (상주) 과원사 (과원사) 법서 (법서) 스님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율장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정도 아울러 닦았다.

당시 무진 (무진) 사람인 혜사 (혜사) 선사는 명성이 높고 수행이 깊었는데, 그의 도풍을 멀리 전해듣고는 기갈든 사람보다 더 간절하게 만나보고 싶어 하였다. 혜사스님이 살던 곳은 당시 진 (진) 나라와 제 (제) 나라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법을 중히 여기고 목숨을 가벼히 여겨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니 혜사스님은, 옛날 영산회상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는데 그 인연으로 지금 다시 온 것이라고 하며 보현도량 (보현도장) 을 보여주고 4안락행 (사안락행) 을 설하였다.

선사는 밤낮으로 고행하면서 가르침대로 마음을 갈고 닦았다. 이 때 법을 구하는 마음은 불탔으나 살림살이는 가난하여 잣나무를 끊어 향을 대신하고 주렴을 걷어올려 달빛을 받았다. 달이 지면 소나무 잣나무에 불을 붙여 밝혔으며 그것도 떨어지면 밤나무로 이어갔다.

그렇게 열나흘이 지나 법화경을 외우다가 약왕품 (약왕품) 에서 ꡒ모든 부처가 함께 칭찬하되 이야말로 참된 정진이요. 이야말로 참된 법이니 이것을 여래께 공양드리는 길이라 한다" 한 구절에서 심신이 툭 트였다. 계속 정에 들어 고요한 가운데 관조해 보니 마치 높이 뜬 해가 깊숙한 골짜기를 비추듯 법화를 깨닫고 맑은 바람이 허공에 노닐듯 모든 법상 (법상) 을 통달했다. 그리하여 체험한 것을 혜사선사께 아뢰니 혜사선사는 다시 자기가 깨달은 바와 스승에게서 받은 것을 말해주고 나흘밤을 정진케 하였는데, 그때 정진한 공은 백년 정진한 것보다 나았다. 혜사선사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ꡒ그대가 아니면 증득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들었던 정 (정) 은 법화삼매 (법화삼매) 전에 나타나는 방편이며, 나타나 지속된 것은 법화의 선다라니 (선타나니:가유를 돌려 공으로 들어가는 대지혜로서 법화 육즉위 중 제5위) 이다. 설령 문자법사 천만 명이 그대의 논변을 따르려 해도 안될 것이니 설법하는 사람 중에 그대가 제일이다."

그 후 의동대장군 (의동대장군) 인 심군리 (심군리) 의 청으로 와관사 (와관사) 에 주지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사임하며 문도를 심군리에게 보내 말하였다.

ꡒ제가 예전 남악선사 회상에 있다가 처음 강동 (강동) 으로 건너왔을 때 법의 거울은 더욱 맑았고 마음 거문고는 자주 울렸습니다. 제가 처음 와관사에 왔을 때 40명이 함께 좌선하여 20명이 법을 얻었고, 다음 해에는 백여 명이 좌선하여 20명이 법을 얻었으며, 그 다음 해는 2백명이 좌선하여 10명이 법을 얻었습니다. 그 후 대중은 점점 많아졌으나 법을 얻는 사람은 점점 적어졌고 도리어 제 수행에 방해만 되니 제 수행력을 알만 합니다. 천태산에 관한 기록에 보면 선궁 (선궁) 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그 산에서 인연을 쉬며 봉우리를 쪼아먹고 개울물을 마시면서 평생의 원을 펼쳐볼까 합니다."

진 (진) 나라 태건 (태건) 7년 (575) 가을, 천태산에 들어가니 노승 한 분이 길을 인도하며 말하였다.

ꡒ스님께서 절을 지으려 하신다면 산밑에 터가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스님께 드리겠습니다."

ꡒ지금 같은 시절에는 초막도 꾸미기 어려운데 하물며 절을 짓겠는가?"

ꡒ지금은 때가 아니나 삼국이 통일되면 세력있는 사람이 여기에 절을 세울 것입니다. 절이 다 지어지면 나라도 맑아질 것이니 절 이름을 국청사 (국청사) 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때 천태산에는 정광 (정광) 선사란 분이 있었는데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산에 산 지 30여 년에 자신을 감추고 도를 밝혀, 그와 어울리기는 쉬웠으나 그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예언한 일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지자선사는 그날 저녁 정광선사의 초막에서 묵게 되었는데 정광선사가 말하기를, ꡒ예전에 손짓하며 부르던 일이 기억나느냐?" 하기에 그가 사는 곳을 보니 영락없이 전에 꿈에서 본 산과 같았다.

수양제 (제) 가 사람을 보내 스님을 석성 (석성) 으로 오게 하였으나 이렇게 말하였다.

ꡒ나는 내 명이 여기에 있는 줄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것도 없이 도끼를 주워들고 오늘 인연줄을 끊어버리겠다."

그리고는 무량수 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하였다.

ꡒ정토를 장엄하는 아미타불의 48원과 꽃 연못 보배나무에 머물기는 쉬우나 사람이 없다. 지옥의 불덩이 수레를 눈앞에 보고 참회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래도 극락에 가서 날 수 있는데 하물며 계율과 지혜를 닦은 사람이겠는가. 그들은 늘 도를 닦아온 수행력이 있으므로 결실이 헛되지 않으며 부처님의 음성과 모습은 진실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이때 지랑 (지랑) 스님이 청하였다.

ꡒ선사께서는 어느 지위에 이르셨으며, 이렇게 세상을 떠나시면 어디에 가서 나십니까? 또 저희들은 누구를 종사로 삼아야 합니까?"

ꡒ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6근청정위 (육근청정위:원교 육즉의 계위 중 상소즉위에 해당하며, 눈․코․귀 등의 6근이 청정함을 얻는 지위) 를 얻었을 것이나 남을 위하느니라 내가 손해를 보아 5품위 (오품위) 에 머물렀다. 그대가 어느 곳에 나느냐고 물었는데 나의 모든 스승과 도반들이 관음보살을 시종하고 있으니 그들이 와서 나를 맞아갈 것이다. 누구를 종사로 삼아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듣지 못했는가? ꡐ계율 〔파나제목차〕 이 그대의 스승이며 4종삼매 (사종삼매) 가 그대들의 밝은 길잡이니 그대들의 무거운 짐을 버리게 하고 3독 (삼독) 을 없애줄 것이다. 또한 4대를 다스리고 업의 결박을 풀어주며 마군을 부수고 선미 (선미) 를 맛보게 하며 아만의 깃발을 꺾고 삿된 길을 멀리하게 할 것이다. 또한 그대들을 무위의 구렁텅이 〔무위〕 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비탄의 장애 〔대비난〕 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하였으니, 오직 이 큰 스승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나와 그대들은 법으로 만나 법으로 친해졌고 불법의 등불을 전하고 익혔으니 그렇게 해서 권속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우리 문도가 아니다."

말을 마치자 선정에 든 듯하였다. 「별전 (별전)」

45. 30년을 절 안에서 살다 / 여산 혜원 (려산혜원) 법사

여산 혜원 (려산혜원) 법사는 안문 (은문) 가시 (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도안 (도안) 법사에게 법을 배우다가 「반야경」 강설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법사는 대윤 (대윤) 인 장비 (장비) 와 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그에게 말하였다.

ꡒ역경계는 깨기 쉬워도 순경계는 깨기 어렵다.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은 오직 ꡐ참을 인자 (인) ' 한 자면 잠시도 안되어 지나가지만 만약 내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나면 마치 자석이 쇠를 만난 듯 부지불식간에 하나로 합쳐진다. 무정물도 그러한데 하물며 온몸이 티끌경계에 빠져 있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후 여산을 돌아다니다가 그곳 산수가 아름다워 마침내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자사 (척사) 환이 (환이) 가 동림사 (동림사) 를 지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로부터 거의 30년간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고 오직 정토를 생각하여 부지런히 염불만 하였다. 처음 십여년 동안은 마음을 맑혀 집중해서 관 (관) 을 닦아 아미타불 성상 (성상) 을 세번이나 보았으나 법사는 무거운 성격이라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후 20년 만에 반야대 (반야대) 에서 선정이에들었는데 아미타불의 몸이 허공에 가득찬 것을 보았고, 또 아미타불이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내가 본원력 (본원력) 으로 여기에 와서 그대를 편안케 하노니 그대는 7일 뒤에 나의 나라에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는 비로소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ꡒ내가 이곳에 살면서부터 다행히 세번이나 성상을 보았는데 지금 또다시 나타나셨으니 나는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그대들도 각자가 노력해야 한다." 「탑명 (탑명)」

46. 위산의 주인 / 위산 영우 (산영우) 선사

위산 영우 (산영우:771~853) 선사는 복주 (복주) 사람으로 머리를 깎고 천태산 국청사에 가서 구족계를 받으려 하였다. 그때 한산 (한산) 과 습득 (십득) 두 스님은 미리 길을 닦아 놓고, 오래지 않아 생불 〔육신대군〕 이 여기 와서 구족계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길옆의 깊숙한 풀숲에 숨어 있다가 선사가 그 앞을 지나가자 별안간 호랑이 시늉을 하고 포효하며 뛰어나왔다. 선사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니 한산이 말하기를, ꡒ영산회상에서 헤어진 뒤 다섯 생에 인간의 주인이 되어 오니 지금은 옛 일을 다 잊었구나"라고 하였다.

그후 백장 (백장) 선사를 찾아갔다. 하루는 모시고 있던 차에 백장선사가 화로 속에 불이 있는지 뒤적여 보라고 하자 화로 속을 뒤적여 보고는 불이 없다고 하였다. 백장선사가 몸소 일어나 깊숙히 뒤적여 조그마한 불덩어리를 꺼내 보이니 선사는 여기서 깨달았다. 절을 하고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니 백장선사가 말하였다.

ꡒ그것은 잠시 나타나는 단계일 뿐이다. 경에 말하지 않았던가.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시절인연을 살펴야 한다고. 시절이 이르면 마치 미망에서 홀연히 깨어난 듯하고 잊었던 것을 문득 기억해 내는 것과 같아서 비로소 자기 물건일 줄을 깨달아 다른 데서 찾지 않는다." 그리고는 선사에게 전좌 (야좌) 소임을 맡겼다.

그때 사마두타 (사마두타) 가 호남 (호남) 에서 찾아와 백장선사에게 말하였다.

ꡒ장사 (장사) 서북쪽에 있는 산꼭대기는 터가 좋아서 천명 대중은 살 만합니다."

ꡒ내가 그곳에 가면 어떻겠소?"

ꡒ스님은 골인 (골인) 인데 그곳은 육산 (육산) 이니 알맞은 곳이 아닙니다."

ꡒ제일좌 (제일좌) 가 가면 되겠는가?"

ꡒ아닙니다."

ꡒ전좌는 어떻소?"

ꡒ그 사람이야말로 위산 (산) 의 주인입니다. 그곳에 가서 10년만 있으면 대중이 모여들 것입니다."

이리하여 선사는 위산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살게 되었다. 도토리와 밤으로 식량을 삼고 새와 원숭이와 벗이 되어 그림자가 산밖을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조용히 좌선하였다. 그렇게 9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ꡒ내가 이곳에 산지도 오래 되었건만 결국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구나. 본시 내 뜻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혼자 살아서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암자를 버리고 떠나려고 골짜기 입구에 다다르니 호랑이, 표범, 뱀, 구렁이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ꡒ내가 만약 이곳에 인연이 있다면 너희들은 각각 흩어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나를 마음대로 잡아먹어라" 하니 말이 끝나자 다들 흩어졌다.

이에 다시 암자로 돌아왔는데 천신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ꡒ이 산은 옛날 가섭불 때에도 도량이었는데 이제 그것을 다시 짓게 될 것입니다. 이 산을 항시 수호하신다면 반드시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 해에 대안 (대안) 선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와서 선사를 도와 총림을 일으켰다.

「사비 (사비) 」

47. 진영 찬 (찬) / 정인사 도진 (도) 선사

정인사 (정인사) 도진 (도:1014~1093) 선사는 복주 (복주) 고전 (고전) 에서 태어났다. 부산 법원 (부산법원:991~1067) 선사에게서 종지를 얻고 뒤에 정인사 회련 (회연) 선사를 찾아가니 회련선사가 수좌로 삼았다가 오 (오) 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선사에게 법석을 잇게 하였다.

신종 (신종) 황제가 한번은 경수궁 (경곤궁) 에 초청하여 높은 법좌를 마련하고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문답하게 하였는데 좌우상하 모두가 이제껏 듣지 못했던 법문을 들었다.

도진선사는 사람됨이 순박하고 도타우며 마음이 깊은데다 겸손하여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 같았지만 일단 논변을 했다 하면 종횡무진으로 막히는 곳이 없었다. 또한 몸가짐이 매우 검소해서 바지 한 벌을 12년이나 입었다. 태사 (태사) 황정견 (황정견) 은 선사의 진영 (진영) 에 제 (제) 를 붙였다.

늙은 호랑이는 이빨이 없고 잠든 용은 울부짖지 않으니

수풀에 달빛 어둡고 천지에 구름 음산하도다

먼 산으로 눈썹 그리니 살구꽃 같은 뺨이여

봄바람에 실려 시집갈 때에 중매장이 필요 없었네

늙은 할머니 그 옛날 열다섯 젊은 시절에

이쪽은 칠하고 저쪽은 지우고 화장할 줄 알고 왔다오.

로호무치 와룡불음

천림월흑 육합운음

원산작미홍행시

가여춘풍불용매

로파삼오소연일

야해동도서말래 「은산집 (은산집)」

48. 법화경을 외우다가 깨침 / 증오 지 (증오지) 법사

증오 지 (증오지) 법사는 태주임씨 (태주림씨) 자손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책을 읽으면 한눈에 외웠으며 의술이나 점복에 관한 책까지도 모두 통달하였다. 하루는 경을 강설하는 곳에 갔다가 「관무량수경」 설법을 듣게 되었다. 귀를 기울여 한참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감탄하기를 ꡒ해 떨어지는 곳이 나의 고향이다. 지금 이 경을 듣고 있으니 마치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은 듯하구나" 하고는 머리를 깎고 불조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따르겠다고 서원하였다.

백련사 (백련사) 선 (영) 법사에게 귀의하여 ꡐ완전한 도리와 변하는 도리 〔구변지도〕 '에 대해 물으니 선법사가 등롱 (등모) 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성품을 여의고 아님도 끊어져 〔리성절비〕 본래 그 자체는 비고 고요하니 이것이 ꡐ완전한 아치'요, 4성 6범이 보는 경계가 다르니 여기에 ꡐ변하는 도리'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법사는 깨닫지 못했다.

그 후에 땅을 쓸면서 「법화경」을 외우다가 ꡒ법은 항상하여 성품이 없으니 부처종자가 이로부터 일어남을 알지니라 〔지법상무성불종종록기〕 " 한 구절에서 깨달아 마음이 활짝 트였다. 선법사가 보고는 ꡒ기쁘다! 큰 일을 마쳤구나. 법화지관 (법화결관) 은 이것이 핵심인데 그대가 이것을 깨달아냈으니 깊고도 묘한 경계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마음이 훤히 트이고 자유로와서 사람들에게 자주 이 법문을 하였다.

법사는 닷새마다 한번씩 잠을 잘 뿐 나머지는 요체에 푹 젖어 지내면서 오직 공부가 잘 되지 않을까만을 걱정하였다. 한번 동산 (동산) 에 자리잡고는 24년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동산, 서산 두 산의 학인들이 와서 논변해보았으나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다.

법사는 늘 후학들이 명상 (명상) 의 굴레 속에 갇히고 책 속에 달라붙어 심지어는 한 종파의 경전만을 받아들여 문자학을 일삼으면서 다른 종파는 업신여겨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음을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문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면서 격려하였다. ꡒ우리 부처님께서 이것이야말로 ꡐ참다운 정진이다' 하신 말씀을 어째서 생각지 않느냐. 이 한 구절에 깨달음의 기연이 있는데 어째서 직접 맞닥뜨려보지 않느냐?"

그 후 왕명으로 상축사 (상축사) 에 주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진공 (진공) 이 묻기를 ꡒ지 (결) 와 관 (관) 은 같은 법입니까, 다른 법입니까?" 하니 법사가 대답하였다.

"같은 법입니다. 이것을 물에 비유하면 조용하고 맑은 것은 지 (결) 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비춰볼 수 있는 것은 관 (관) 인데 물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또한 군대와 같아서 부득이할 때만 쓰는 것이니 어둡고 산란한 중생들의 중병을ꡐ지관'이란 약으로 그 심성을 고쳐내서 온전한 바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법계에는 고요함 〔적연〕 을 지 (결) 라 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춤 〔조〕 을 관 (관) 이라 합니다. 그러니 오로지 지 (결) 할 바를 고집한다면 어디서 관 (관) 할 바를 찾겠습니까? 마치 공께서 허리띠를 드리우고 홀을 단정히 들고서 묘당에 앉아 있을 때,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도 천하를 흥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공은 ꡒ법사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불법의 묘한 도리를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며 기뻐하였다. 「탑명 (탑명)」

49. 교․관을 닦음 / 동산 능행인 (능행인)

동산 (동산) 의 능행인 (능행인) 은 교 (교) 와 관 (관) 에 밝은 분이었다. 굳은 의지로 정진하여 한번 참실 (참실:참회법을 행하는 집) 에 들어가서는 추우나 더우나 변치않고 40년을 계속하니 절강 (절강) 땅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자신은 한번도 스스로를 수행인이라고 한 일이 없었고 그에 대해 말하기를 ꡒ지자대사는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하고 네 차례 좌선하는 것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는데 하물며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초암 (초의인) 법사가 한번은 함께 수행을 하였는데 가까이 앉아서 보니, 언제까지고 흐트러지거나 기대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혹 병이 나도 며칠동안 밥을 먹지 않으면서도 참선은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병은 저절로 낫곤 하였다.

능행인은 성격이 강직하고 결백하여 명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시주물이 들어오면 언제나 대중들에게 나눠주고 털끝만치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다 떨어진 누더기 뿐이었다. 여름이 되면 대나무 껍질을 엮어서 대들보 위에 묶어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그것을 내려서 추위를 막았다. 늘 산에 들어가 호랑이를 길렀으나 호랑이가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고, 혹 비바람치는 캄캄한 밤에 언덕 위 무덤에서 좌선하는데도 심신이 편안하여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절에는 산신이 있어서 영험으로 그 지방을 교화하였는데 능행인은 항상 그 산신과 친하게 지냈다. 어쩌다 향이 다 떨어지면 원주가 그때마다 능행인에게 알렸다. 능행인이 곧 기도를 드리면 이튿날 시주하는 사람들이 문이 메워지게 찾아오곤 하였다. 스님네들이 그 까닭을 물어보면 그들은 어젯밤에 누군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절에 상주물이 다 떨어졌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공양을 올리러 왔다고 하였다. 「행장 (행상) 」

50. 작은 지조, 큰 불법 / 분양 선소 (분양선소) 선사

분양 선소 (분양선소:947~1024) 선사는 태원 (태원) 사람이다. 도량과 식견이 넓고 깊어 겉치레가 없고 큰 뜻을 품어 무슨 글이든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통달하였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세상이 싫어져 출가하였는데 명망높은 선지식 70여 분을 찾아뵙고 그들 가풍의 묘한 종지를 모두 터득하였다. 또한 가는 곳마다 오래 머물지 않고 산수구경을 즐기지 않으니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선사를 운치없는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러자 선사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ꡒ옛분들은 행각할 때 성인의 마음과 통하지 못했다는 그것 하나로 말을 달려 스승을 찾아가 결단을 보았을 뿐, 어찌 산수를 구경하는 일로 절을 찾아갔겠는가!"

그 후 수산 성념 (수산성념) 선사를 찾아뵙고 물었다.

ꡒ백장스님이 자리를 말아올린 뜻**이 무엇입니까?"

ꡒ곤룡포 소맷자락을 떨쳐 여니 온 몸이 드러난다."

ꡒ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ꡒ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 자취 끊겼다."

선사는 마침내 크게 깨닫고 ꡒ만고에 푸른 못과 빈 하늘에 뜬 달은 두번 세번 애써 걸러내서야 알 수 있다" 하고는 절을 올리고 대중에게 돌아갔다. 당시 섭현 귀성 (엽현귀성) 선사가 그곳에 수좌로 있었는데 선사에게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갑자기 그렇게 자신만만하냐고 물으니 ꡒ이곳이 바로 내가 신명을 놓을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장사 태수 (장사태수) 장공 (장공) 이 네 곳의 큰절 중에 어느 곳이나 마음대로 택해서 주지를 해달라고 청했으나 선사는 ꡒ나는 오래도록 죽이나 먹고 밥이나 먹는 중일 뿐인데, 부처님의 마음 종지를 전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두 여덟 차례를 청했으나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에 태자원 (태자원) 으로 맞이하려 하니 선사는 산문을 굳게 닫고 높이 누워버렸다. 석문 온총 (석문총) 선사가 문을 밀어제치고 들어가서는 비난하기를 ꡒ불법은 큰 일이고 조용히 물러나 있는 일은 작은 지조인데 그대는 불법을 짊어질 만한 힘이 있거늘 지금이 어느 때라고 편안하게 잠만 자려 하시오!" 하니 선사는 벌떡 일어나면서 ꡒ그대가 아니면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오. 빨리 가서 여법하게 준비해 두시오. 내 곧 가리다"라고 하였다.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는 한번 선상에 앉아 30년 동안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용덕부윤 (룡덕부윤) 이공 (리공) 이 승천사 (승천사) 로 모시려 하여 사자가 세번이나 되돌아와서 청했으나 가지 않았다. 사자가 벌을 받을 참이라 다시 찾아와, 반드시 선사와 함께 가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니 생각해 달라고 하였다. 선사는 굳이 같이 갈 것이야 있겠냐면서 그대 먼저 가면 나는 나중에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식사를 마련하라 하고 행장을 챙기라 하면서 ꡒ나는 간다!" 하고는 젓가락을 멈추고 입적하였다. 「승보전 (승보전) 」

51. 불로관 (불로관) / 도사 장평숙 (장평숙)

도사 장평숙 (장평숙) 은 노장의 도 〔청허〕 를 매우 좋아하였다. 신선도를 닦는 곳에서 정여빈자 (정여빈자) 를 만났는데 그가 하도락서 (하도낙서:역서) 를 지고 있는 용마도를 꺼내 보이니 마침내 그 뜻을 알았다. 오랜 노력 끝에 공부를 성취하고서 말하기를, ꡒ내 몸은 비록 단단해졌으나 본각 (본각) 의 성품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불경을 탐구하였는데 「능엄경 (방엄경) 」을 읽다가 느낀 바 있어서 「오진편 (오진편) 」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선종가송 (선종가송) 」을 지었다.

그 서문에서는 「능엄경」에 나오는 10가지 신선을 인용하면서 ꡒ비록 그들이 천만년을 산다해도 정각 (정각) 을 닦지 않으면 선선의 과보가 다해 다시 태어날 때 6도 속에 흩어져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ꡒ안팎이 하나여야 하니, 만약 거기서 티끌 하나라도 세우면 그대로 번뇌가 된다. 이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묘한 도리로서 「금강경」과 「원각경」, 이 두 경을 통달하면 금단 (김란:신선이 되는 비법) 의 뜻이 저절로 밝아진다. 그런데 하필 도교와 불교를 분별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장평숙이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구하려면 반드시 불교에 귀의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선주옥 (군선주옥)」

 

52. 8만겁을 산다해도 /도사 여동빈 (여동빈)

도사 여동빈 (여동빈) 은 하양 (하양) 만고 (만고) 사람으로 당나라 천보 (천보:742~755) 년간에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인데 여러번 진사 (진군) 시험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화산 (화산) 에 놀러 갔다가 종리권 (종리권) 을 만났다. 종리권은 진대 (진대) 에 낭장 (장) 을 지내다가 난리를 피해 양명법 (양명법:건강장수하는 비결) 을 익힌 사람이었다.

그는 여동빈을 시험해 보려고 먼저 재물을 주어보기로 하였다. 하루는 여동빈이 종리권을 모시고 길을 가는데, 종리권이 돌 한덩어리를 주워 약을 바르니 금새 황금덩이가 되었다. 그것을 여동빈에게 주면서 앞으로 길을 가다가 팔으라고 하니, 여동빈이 "이것도 부서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종리권이 5백년은 되어야 부서진다고 하자,ꡒ뒷날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하면서 던져버렸다. 종리권이 다시 여색으로 시험하려고 여동빈에게 산에 들어가 약을 캐오라하고 조그만 초막을 꾸며 놓았다. 그 안에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가 여동빈을 맞으면서 ꡒ지아비가 죽은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는 손을 잡으며 가까이 오려 하였다. 여동빈은 여자를 밀어 제치면서 ꡒ가죽푸대로 나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는데, 말이 끝나자 여자는 보이지 않고 종리권이 그곳에 있었다.

이에 종리권이 금단술 (김란술) 과 천선검법 (천선검법) 을 전수하니 드디어 아무 걸림없이 다니는 경계를 얻고 시를 지었다.

아침에는 남월 (남월) 땅에 갔다가

저녁에는 창오 (창오) 들녘에 노니네

소매 속의 푸른 뱀

날아오르는 기운이 으스스한데

사흘동안 악양루에 있어도

알아보는 이 없어서

소리높이 읊조리며

동정호를 날아 지나갔도다.

조유남월모창오 수리청사담기추

삼일악양인불식 랑음진과동정호

한번은 용아 (룡아 거둔:835~923) 스님을 찾아뵙고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용아스님이 게송을 지어 주었다.

어찌하여 아침시름이 저녁시름에 이어지는가

젊어서 공부 안하면 늙어서 부끄러우리

이룡 (루룡) 은 명주 (명주) 를 아끼지 않는데도

지금 사람들 그것을 구할 줄 모른다네

하사조수여모수 소연불학로환수

명주불시루룡석 자시시인불해구

한번은 악주 (악주) 황룡산 (황룡산) 을 지나가다가 자주빛 기운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도인이 살지나 않을까 하여 산에 들어가보니, 마침 기 (기) 선사가 상당법문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선사는 이상한 사람이 자리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는 큰소리로 꾸짖었다.

ꡒ대중 속에 법을 훔치려는 자가 있구나!"

그러자 여동빈이 썩 나서서 물었다.

ꡒ좁쌀 한알 속에 세계를 갈무리하고, 반되짜리 솥 안에 산천을 삶으니, 이 무슨 도리인지 한번 말해보시오." 선사가 ꡒ시체나 지키는 귀신이로구나" 하니, 여동빈은 ꡒ주머니 속에 장생불사하는 약이 있다면 어쩌겠소?" 하였다. 선사가 ꡒ설령 8만겁을 산다 해도 결국에는 허무 속에 떨어질 것이다" 하니 여동빈은 분한 기색도 없이 떠났는데, 밤이 되자 칼을 날려 선사를 위협하였다. 선사는 미리 알고 법의로 머리를 감싸고 방장실에 앉아 있었다. 칼이 들어와 몇바퀴 돌다가 선사가 손으로 가리키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여동빈이 사죄하자 선사가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물었다.

ꡒ반되짜리 솥 안은 묻지 않겠지만, 어떤 것이 좁쌀 한알에 세계를 갈무리 하는 일인가?" 여동빈은 이 말끝에 느낀 바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노래하는 아이*를 잡아당겨

거문고를 부숴버리니

지금은 물 속의 금 (김) 을

그리워 하지 않네

황룡스님 (기선사) 을 보고나서야

이제껏 마음 잘못썼음을 알게 되었네.

요각표아쇄각금 여금불연수중김

자종일견황룡후 시각종전착용심 「선원유사 (선유유사)」

53. 봉급을 털어 불경을 사다 / 급사 풍즙 (풍즙) 거사

급사 (급사) 풍즙 (풍즙) 거사는 젊어서 상상 (상상:태학, 성균관) 에서 공부하였다. 하루는 과거에서 ꡐ생이란 덕이 수레바퀴처럼 비치는 것이다 〔생자덕지광륜〕 '라는 글로 장원급제하였는데 그 글은 「『원각경 (원각경」)의 이치로 밝힌 것이었다.

그는 비록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불법을 잊지 않고 이름난 스님들을 두루 찾아뵙고 법을 물었는데, 한번은 용문산 (룡문산) 에 있을 때였다. 불안 (불안청원:1067~1120) 스님을 따라 거닐다가 우연히 동자가 마당에 달려오면서 ꡒ만상 가운데 홀로 몸을 드러냈구나!"라고 읊조리는 소리에 불안스님이 공의 등을 두드리면서 ꡒ좋다!" 하였는데 거사는 여기서 깨달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노남 (남) 의 태수 (태수) 가 되었을 때, 한번은 좌선을 하다가 글을 지었는데 거기에 ꡒ공무를 보는 여가에 즐겨 좌선을 하며 옆구리를 침상에 대고 자는 일이 적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는 청정한 공부에 더욱 뜻을 두어 가는 곳마다 수준 높은 참선회를 만들어 승속을 일깨웠다. 또한 전란이 일어나 경전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받는 봉급을 오로지 경을 사는 데 보시하였다. 그때 그가 지은 게송이 있다.

나는 별난 성미 타고나서

재물은 있는대로 허공에 저축하네

자손을 위한 계책은 세우지 않고

수레나 말을 타고 거드름피우지 않으며

놀이개를 사는 데 충당하지도 않고

성색을 즐기는 일에 쓰지도 않는다

송곳 꽂을 땅도 없고

한조각 기왓장 올릴 집도 없으며

달마다 받는 봉급은

오직 경전 사는데 보시하노니

경을 펼쳐 보는 이는

하나도 남김없이 깨달아 들기 바라네

옛날 부처님은 게송 반마디를 듣기 위해

야차 (야차) 에게까지도 온 몸을 버렸으니

그러므로 나도 재물을 아끼지 않고

미혹한 이들에게 열어 보인다

묻노니, 재물 아끼는 사람들아

하루종일 이리저리 저울질하다가

홀연히 죽는 날이 닥쳐오면

생사를 면할 수 있겠는가.

아부탐벽벽 유재저공허

불작자손계 불위차마포

불충완호용 불매성색오

치추무남무 편와무옥노

소득월봉급 유장속범서

서사피열자 함득입무여

고불위반상 상내사전구

시이불석재 개시제미도

차문석재인 종일교치수

무상홀도지 령면생사무

소흥 23 (소흥:1153) 년 거사는 장사 (장사) 태수로 있었는데 갑자기 친지들에게 7월 23일을 기해서 세상을 마치겠다고 알렸다. 그날이 되자 뒷마루에 높이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을 맞이하다가 계단을 내려가 대궐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 그런 다음 조운사 (조운사) 를 오라하여 군 (군) 의 사무를 대신 맡아보게 하고, 승복을 입고 스님네들이 신는 신발을 신고 높은 자리에 걸터 앉아, 모든 관리와 승속에게 각기 도에 정진하여 불법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침내 주장자를 뽑아 들고 무릎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셨다. 「만대빙지 (만대빙지)」

54. 벼락소리에 깨치다 / 조변 (조변)

청헌공 (청구공) 조변 (조변) 은 나이 40여세에 성색을 멀리하고 조사의 도에 마음을 두었는데, 마침 불혜법천 (불혜법천:운문종, 운거효순의 법제자) 선사가 구주 (구주) 남선사 (남선사) 에 와서 살고 있었다. 공은 날마다 스님을 찾아 뵈었는데 스님은 허튼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후 공이 청주 (청주) 를 다스릴 때 일을 보는 여가에는 좌선에 힘쓸 때가 많았다. 하루는 갑자기 벼락소리에 몹시 놀라면서 활연히 깨닫고 게송을 지었다.

묵묵히 공청에 앉아 괜스레 책상에 기대니

마음근원은 깊은 물같이 움직임 없었네

벼락치는 소리에 정문 (정문) 이 열리니

본디 내 밑천을 불러일으켰구나

묵좌공당허은궤 심원불동담여수

일성벽력정문개 환기종전자가저

법천스님이 듣고 말하기를, ꡒ조열도 (조열도:청헌공의 자) 는 황홀경을 두드렸구나!"라고 하였다. 「매계집 (매계집)」

55. 작은 석가 / 앙산 혜적 (앙산혜적) 선사

앙산 혜적 (앙산혜적:802~887) 선사는 소주 섭씨 (소주엽씨) 자손이다. 삭발한 뒤 큰 구슬 하나를 얻는 꿈을 꾸었는데 그 빛이 사람을 쏘는 듯하였다. 꿈을 깨고나서 말하기를, ꡒ이는 더할 수 없는 마음 보배인데 내가 얻었으니, 이것으로 내 마음 자리를 밝혀야겠다" 하고는 제방을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탐원 (탐원) 선사를 찾아뵙고 묘한 이치를 깨닫고 나서 뒤에 위산 영우 (산영우) 선사를 찾아 뵙고 마침내 깊은 종지를 얻었다.

혜적선사가 위산선사께 물었다.

ꡒ어디가 참 부처가 머무는 곳입니까?"

ꡒ생각없는 생각 〔사무사〕 의 묘한 법으로 불꽃같은 신령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라. 그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오면 성품과 모습이 항상하고 현상과 이치가 둘이 아니어서 참 부처가 여여 (여여) 할 것이다."

혜적선사는 이 말끝에 활짝 깨쳐 비밀스런 인가를 받았다. 대중을 거느리고 왕분산 (왕산) 에 자리를 잡았으나 교화할 인연이 맞지않아 원주 (원주) 에 이르러 앙산 (앙산) 을 찾아갔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두 산신이 맞이하면서 물었다.

ꡒ깊고 험한 이 산에 어찌 오셨습니까?"

ꡒ암자 터를 하나 보러 왔소."

ꡒ저희들은 복이 있어 스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이 산을 시주하여 스님께 드리겠으니 여기 머물러 사십시오."

ꡒ그대들이 이미 나에게 시주했으니 필시 넓은 마음을 가졌겠구나. 다른 스님이 없다면 내가 그대들의 시주를 받겠다."

산신이 좋다하고 집운봉 (집운봉) 아래를 가리키며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하였다. 선사는 마침내 그곳에 초암을 짓고 살면서 나무열매를 따먹고 개울물을 마시며 종일 꼿꼿하게 앉아 좌선하였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산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ꡒ앞으로 대중이 많아지면 이 제자는 살 곳이 불편할 것이니 거처를 옮겨야 하겠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과 우뢰가 크게 일더니 산신당이 30리 바깥 도전 (도전) 으로 옮겨가고 옛 산신상과 큰 소나무들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 갔다. 무창 (무창) 3년 여름 4월의 일이었다.

한번은 외국 승려〔이역승〕 가 하늘을 날아 오는 감응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ꡒ특별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동쪽나라에 왔다가 오늘 뜻밖에도 작은 석가 〔소역가〕 를 만났다"라고 하였고, 이로부터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종풍이 크게 세상에 떨쳤다.

선사가 입적하려 할 때 산신이 찾아와 남길 말씀이 있느냐고 물으니 선사가 말하였다.

ꡒ내 몸은 허깨비나 물거품 같아서 인연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올 때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갈 때인들 더 무엇을 구하겠는가?"

ꡒ모든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 천룡 (천룡) 이 나타나 남기실 말씀을 청했습니다. 저도 이를 어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선사는 법통을 얻은 스승 위산 영우 (산영우) 선사의 기일 (기일) 이 정월 8일이니 재를 지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감히 그 날을 어기지 못하고 있다. 「사기 (사기) 」

56. 승려의 자리를 지킴 / 도법사 (도법사)

도법사 (도법사) 는 서경 (서경) 순창 (순창) 사람이다. 선화 (선화:1119~1125) 연간에 조서를 내려 승려의 법명을 도교식으로 바꾸게 한 일이 있었다. 법사는 임영소 (림영고:도사) 와 옳고 그름을 항변하고 조정에 상소하였는데, 황제의 뜻을 거슬려 도주 (도주) 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때 호송하는 관졸 〔감방〕 이 유배지는 여기서 만리 길이나 되니 마늘 등 냄새나는 음식이나 술 등으로 몸에 힘을 돋구어야 한다고 하니 법사는, 죽는 것은 천명인데 불법에 금한 일을 범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관졸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법사가 유배지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군수가 밤에 불상이 형틀을 지고 성에 들어 오는 꿈을 꾸었고, 군의 관리들도 같은 꿈을 꾼 사람이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법사가 도착하니 태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ꡒ죄를 짓고 오는 사람은 반드시 남다른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곳에 유배된 지 한달이 안되었는데 그 군 사람의 반 이상이 병에 걸렸다. 법사가 못을 파서 물에 축원을 드리니 그 물을 마신 사람은 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그 지방 사람들 모두가 어버이나 스승 이상으로 법사를 공경하고 섬겼다. 이에 그곳에서 추방당하여 그 길로 떠나 장사 (장사) 땅을 지나다가 적음존자 (적종존자, 혜홍각범:1171~1128) 를 만났는데 그가 시를 남겨 주었다.

도법사의 간담은 몸집보다 더 커서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슬리고 간언을 올렸도다

어깨에는 가사를 걸치고 등에는 불법을 지고자 했기에

때문에 달갑게 목을 내밀어 형틀을 받았네

3년 유배에도 마음에 부끄러움 없었고

만리 길 돌아와도 모습 여위지 않았도다

훗날 불교문중에 벼리 〔강기〕 가 될 분인데

요즘 듣자니 벼슬아치들 조정으로 달려간다 하네.

도공담대과신구 감역룡린상간언

지욕단견담불사 고감인경수주서

삼연찬축심무괴 만리귀래모불기

타일교문강기자 근문화홀.훼조추

당시 공경대부들은 법사에게 문무 (문무) 의 재략 (재략) 이 있으니 조정에 청하여 벼슬을 주어 관직에 충당하고, 군사 통솔권을 나누어 주어 옛 강토를 되찾게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법사가 극구 사양하자 조정의 명신들이 법사의 지조를 뺏을 수 없음을 알고 황제께 아뢰어 「보각원통법제대사 (보보각원통법제대사) '라는 호를 하사하도록 하였다.

소흥 (소흥:송 고종 즉위년, 1131) 으로 연호가 바뀌자 황제의 명으로 궁에 들어 가니 황제가 말하였다.

ꡒ선황제 (선황제:휘종) 께서 요망한 술수에 속아 그대의 얼굴과 법복을 망가뜨렸으니 짐이 그대 얼굴의 먹자욱을 없애주어도 되겠소?"

그러자 법사가 대답하였다.

ꡒ신이 비록 성은에 감복하오나 선황제께서 내리신 보배 먹자욱을 지워 없앨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ꡒ이 스님이 늙어서까지 꼬장꼬장하구나!" 하면서 편할대로 하라고 허락하였다.

소흥 3년 (소흥:1133) 에 법사는 도사 (도군) 유약겸 (유야겸) 과 함께 조정에 들어가 기도도량의 서열을 정비하였는데 그때 올린 상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ꡒ숭녕 (숭령:1102~1106) 연간에 임영소 (림영고) 등이 높은 벼슬을 멋대로 차지하여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도교가 불교의 서열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염 (건염:1127~1130) 연간 후로 도사들의 모든 재산은 다시 몰수되고 관의 비호도 없어졌으니 마땅히 조종의 옛 제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조정에서 현명한 지휘를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개정령을 내려 천하에 반포하고 시행케 하여 풍속을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국정에 일이 많아 이 주장은 유보되었으나 소흥 13년 (1143) 에 와서 다시 정돈하는 모임을 열어 승려들은 왼쪽에, 도사들은 오른쪽에 자리할 것을 영원한 규정으로 삼았다.

그후 가뭄 귀신으로 백성들이 시달리자 황제의 명을 받아 궁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법사는 자리에 올라가자 금으로 된 물병 네 개를 빌려서 병마다 산 붕어를 넣고 물을 뿜어주며 가만히 축원하였다. 그리고는 곧 발빠른 사람 넷을 시켜 물고기를 강과 소 (소) 에 놓아주게 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비가 쫙 퍼부으니 황제의 얼굴이 매우 기쁜 기색이었다. 「탑명 (탑명)」

57. 가장 모진 병 / 회암 미광 (회암이광) 선사

회암 미광 (회암이광:?~1155) 선사는 민현 (현) 장락 (장락) 사람이다. 영남으로 나와서 원오 극근 (원오극근:1063~1135, 임제종 양기파) , 불심 본재 (불심본재:임제종 황룡파) 등 큰스님들을 찾아뵙다가 마침 대혜 종고 (대혜종광:1089~1163, 임제종 양기파) 선사가 광인사 (광인사) 에 살고 있다 하여 찾아가 그 밑에서 공부하였다.

미광선사가 하루는 대혜선사를 모시고 가다가 물었다.

ꡒ저는 이곳에 와서도 철저하게 깨닫지 못했으니 그 병통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혜스님이 대답하였다.

ꡒ그대의 병은 가장 모진 병이다. 세상에서 이름난 의원도 속수무책이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다른 사람은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는데, 그대는 살아있을 줄만 알지 아직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크나큰 안락의 땅에 도달하려면 한번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광선사가 더욱 의심이 생겨 방장실에 들어가니 대혜선사가 물었다.

ꡒ죽은 먹었는가? 발우는 씻었는가? 약을 먹느라 가리는 음식 〔약기〕 일랑 집어 치우고 한마디 던져 보아라."

미광선사가 ꡒ찢어버렸습니다" 하자, 대혜선사가 엄한 기세로 악! 하고 할(갈)을 하고는 ꡒ그대는 또 와서 선을 이야기할 참이냐!" 하니, 미광선사는 여기서 크게 깨달았다.

대혜선사는 북을 쳐서 대중을 모아놓고 알렸다.

토끼털을 뽑았다고 해해거리다가

일격에 만겹 관문의 쇠사슬이 열렸도다

평생에 통쾌한 경사는 오늘같은 날인데

누가 말하나 천리 밖에서 나를 속여 먹었다고.

토모념득소합합 일격만중관외개

경쾌평생재금일 숙운천리잠오래

그러자 미광선사는 송을 지어 바쳤다.

한번 부딪쳐 기연을 만나니 성난 우뢰같은데

놀라 일어나 수미산을 북두성에 감추었구나

넘실대는 큰 파도는 하늘에 닿는데

콧구멍 〔비공:본래면목〕 을 뽑아드니 입 (언어문자) 을 잃어버렸네.

일찰당기노뢰후 경기수이장배두

홍파호삽낭도천 념득비진실각구 「어록등 (어록등)」

58. 지자대사의 두타행을 잇다 / 고구려 바야 (파야) 사문

바야 (파야) 스님은 고려 (고려:고구려) 사람이다. 개황 (개황:581~601) 연간에 불롱사 (불롱사) 를 찾아와 지자 (지자) 선사에 선법을 구하였는데, 얼마 안되서 깨달은 바가 있자 지자선사가 말하였다.

ꡒ그대는 이곳에 인연이 있다. 그러니 꼭 조용한 곳에 한거해서 오묘한 행을 성취해야 한다. 천태산 (천태산) 의 화정봉 (화정봉) 은 지금 이 절에서 6,7리 떨어져 있는데, 그곳은 지난날 내가 고행 〔두타행〕 을 하던 곳이다. 그대가 그곳으로 가서 도를 닦아 수행이 진보되면 반드시 깊은 이익이 있을 것이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은 하지 말아라!"

바야스님은 가르침을 따라 그곳으로 가서 새벽에서 밤까지 수행하였다. 한번도 누워서 자는 일이 없었고 그림자가 산을 나오지 않은지 16년이나 되었는데, 하루는 홀연히 산을 내려와서 여러 도반에게 알렸다.

ꡒ나 바야는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있기에 다만 산을 나와 대중들과 이별할 뿐이다."

그리고는 곧 화정봉으로 돌아가서 죽었다. 「천태석각 (천태석각)」

59. 연경정토원기 (연경정토원기) /정언 진료옹 (진료옹)

정언 (정언) 진료옹 (진료옹:진관) 은 남검주 (남검주)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하여 세상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단점을 보면 한번도 면전에서 꺾어버리지 않고 약간의 뜻만 보여서 일깨워주었다.

공은 처음에는 잡화엄 (잡화엄:화엄경의 다른 명칭) 을 받들어 자못 조예가 있었다. 그러다가 명지 (명지) 법사를 만나 천태종 (천태종) 의 종지를 물으니, 명지법사는 지관 (결관) 법문 중에서 상근기가 닦는 부사의경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청정한 본성에서 보자면 원래 닦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작위 없는 행을 이룬다는 내용이었다. 공은 여기서 홀연히 깨달았다. 만년에는 유배당하여 섬에 살았는데 그때도 전혀 불만이 없었고 오직 서방정토에 돌아가기를 염하였다. 공은 또 「연경정토원기 (연경정토원기) 」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ꡒ여래께서 9품을 설하셨을 때에도 지성으로 하는 자를 상상품으로 삼으셨고, 지자 (지자) 대사가 「10론 (십론) 」을 지을 때도 빈틈없이 얽힌 의심을 깨부수라 하셨다. 얽힌 것이 풀리면 정식 (정식) 이 흩어져 지 (지) 가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미타정토의 경계를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없으니 마치 맑은 거울을 보면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ꡒ마치 맑고 깨끗한 둥근 달이 그림자를 모든 물 속에 드리우되 그 바탕은 둘이 아니고, 물결대로 흩어지는 것을 거두어 한곳으로 돌아오게 하듯 시방세계를 한곳으로 모은다. 또한 거울 열 개를 빙둘러 쳐놓고 가운데 등불 하나를 켜둔 것과 같아서 등불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교차되어 동서를 가릴 수가 없으나 반드시 제자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쪽은 원래 서쪽이 아니고 각각 비춰지는 영상에 따라 자리가 뒤섞이니 보이는 경계를 뉘라서 집착할 수 있겠는가. 번뇌 속에 살며 한쪽 방향에만 집착하는 견해로 어찌 여래의 걸림없는 경계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혜인 (혜인) 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요옹 (료옹) 의 정토에 관한 말이 불조의 오묘한 종지를 깊히 씹어 본 말이라고 할 만하다.ꡓ

60. 훌륭한 스승과 훌륭한 제자 / 행소 (행소) 대사 행정 (행정) 법사

석벽사 (석벽사) 는 항주 (항주) 월주 (월주) 에서 20리 거리에 있다. 용산 (룡산) 을 따라 서쪽으로 달려가 그윽한 골짜기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계곡과 바위가 펼쳐진다. 비록 그곳은 기상이 맑은 곳이나 처음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가 행소 (행소) 대사와 행정 (행정) 법사가 그곳에 살면서부터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니, 역시 땅은 사람 때문에 유명해지는 것이다.

행정법사와 행소대사는 모두 전당 (전당) 사람이며, 함께 영명 연수 (영명연곤) 선사에게 귀의해서 출가하여 율부 (율부) 를 공부하여 통달하였다. 당시 천태 덕소 (천태덕소) 국사의 도가 크게 떨칠 때라 행정스님과 행소스님은 그곳을 찾아가 배우게 되었다. 덕소국사가 보고는 그릇이 되겠다고 하여 나계 의적 (라계의적) 법사를 찾아가 3관법 (삼관법) 을 배우게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함께 찾아가 의적법사를 모시고 3관의 대의 (대의) 를 익혔는데 얼마 안되어 공부가 성취되었다. 행정스님과 행소스님은 다시 석벽사 (석벽사) 로 돌아와 대중을 모아 강론하며 지냈다. 전후로 모두 50년을 산림의 지조를 지켜 한번도 고향집이나 마을에 다녀본 적이 없고, 처신을 깨끗히 하여 오 (오) 땅의 학승이나 큰스님들이 모두 그들을 고결한 분이라 추대하였다.

명교 설숭 (명교계숭)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연수 (연곤) 선사에게 출가하고 의적 (의적) 법사에게 법을 배웠으며 덕소 (덕소) 국사가 알아주었다. 위 세 분은 모두 절개와 수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여 세상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분들이 아닌데 두 분 법사는 이 분들을 모두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가령 한 번 만나보기만 해도 매우 좋은 일인데, 하물며 이 분들에게 법을 얻기까지 했으니 두 법사는 복이 많다 하겠다." 「탑표 (탑표)」

 

61. 승직을 버리고 은거하다 / 해월 변 (해월 변) 선사

해월 변 (해월혜변) 도사 (도사:도사는 도승정을 말함) 는 운간 (운간) 사람이다. 태어나면서 남다른 바가 있어 그의 부모가 보조사 (보조사) 에 들여보내 출가시켰다. 명지 (명지조소) 법사에게 법을 얻었는데 명지법사가 늙자 명을 받고 8년간 대신 강의를 하다가 마침내 절 일을 맡게 되었다.

한림학사 심시경 (심시경) 이 항주 (항주) 의 승려들을 사납게 대하므로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겁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독 법사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으므로 공이 남다르다고 하여 승직에 앉게 하였고, 그후 도승정 (도승정) 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당시 소동파가 항주태수로 있었는데 그의 도행이 높고 말씨가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한번은 이런 글을 지었다.

ꡒ승려가 많은 것으로는 아마도 전당 (전당) 이 으뜸가는데 그중에는 도력과 덕성, 재주와 지혜가 있는 분과 망령되고 옹졸하며, 잔꾀나 부리고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어서 그들을 일률적으로 부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승직에 승정 (승정) 과 부승정 (부승정) 을 두고, 그 밖에 별도로 도승정 (도승정) 한사람을 보충하였다. 그리하여 장부나 문서관리, 또는 쫓아다니며 손님을 맞이하는 수고는 전적으로 부승정 이하에게 맡기고 도사는 중요한 일만을 맡게하였으니 실로 수행과 깨달음이 대중의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법사는 용모와 행동이 단정하고 조용하였으며 쓸데없는 물건을 쌓아두지 않았다. 밤에 도둑이 그의 방에 들었는데 입었던 옷을 벗어주고 샛길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 자리에 있은 지 얼마 안되어 사람 만나는 일이 귀찮아서 초당에 돌아가 은거하였는데 여섯가지 필수품 〔육사:3의와 발우, 방석, 물병〕 만이 몸에 딸려왔을 뿐이었다.

입적하면서 소동파가 도착하거든 관뚜껑을 닫으라고 미리 유언을 남겼다. 소동파가 나흘만에야 산에 도착하여 스님이 산사람처럼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그때까지도 따뜻하였다. 마침내 절구 (절구) 3수를 지어 그를 조곡 (조곡) 하였다.

그대가 남긴 자취를 찾고저

굳이 옷을 적시며 찾아왔네

본래 그대로가 태어남이 없는데

없어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밤 그대 강당에 떠오른 달은

옛날처럼 뜰에 가득하건만 서리같이 차구나.

욕심유적강첨상 본자무생가득망

금야생공강당월 만정의구랭여상

나고 죽음은 팔이 굽혔다 펴지는 것 같은데

망정 모여 생긴 우리들 한결같이 쓴고생이라

백낙천 (백락천) 은 봉래섬의 손님이 아니었고

서방정토에 기대어 그곳 주인 되었다네.

생사유여비굴신 정종아배일산신

락천불시봉래객 빙장서방작주인

뜬구름 일어났다 꺼지는 인연을 찾고저 하나

인연은 없고 도리어 꿈 속의 몸만을 보네

마음을 편히하여 잘 머문 사람은 왕문도 (왕문도) 이니

이 도리를 남에게 물어볼 것 있겠는가.

욕방부운기멸인 무연각견몽중신

안심호주왕문도 차리하수갱문인 「탑명 (탑명)」

62. 출가자는 모두 석 (역) 씨다 / 불인요원 (불인료원) 선사

고려의 승통 (승통) 인 의천 (의천:1055~1101) 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중국에 불법을 물으러 왔다. 처음 사명군 (사명군) 에 도착하자 연경사 (연경사) 의 명지 (명지) 법사와 삼학사 (삼학사) 의 법인 (법린) 법사 두 사람을 수행원 〔관반〕 으로 임명하였다. 항주 (항주) 에 이르러 혜조 (혜조) 율사를 찾아가 율학을 배우고자 하니 혜조율사가 그를 위해 계율법문을 설하고 의례와 법도를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3의와 발우, 석장을 전수하고 이어 게송을 지어 주었다.

그대를 위해 법의를 만들어주고

다시 발우와 석장으로 위용을 도우니

그대 일숙각의 노랫말을 들어보라

이는 모양을 내려고 허트로 지니게 함이 아니라 했네.*

위여재성응법의 갱장지석조위의

군간숙각가중도 불시표형허사지

조정에서는 다시 양차공 (양차공) 에게 명하여 수행케 하였는데 지나는 절마다 왕에게 하는 예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그러나 금산사 (김산사) 에 이르니 불인요원 (불인료원:1032~1098, 운문종) 스님만은 유독 선상에 앉아 큰절을 받았다. 양차공이 놀라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불인스님이 말하였다.

ꡒ의천 역시 다른 나라의 승려일 뿐이다. 갖가지 성씨가 출가하면 누구나 석씨의 아들로 이름하는 법이니 어떻게 귀족을 따지겠는가. 만일 불도를 굽혀 속법을 따른다면 무엇보다도 지혜의 눈을 잃어버리는 일이니 무엇으로 중국의 모범을 보여주겠는가"

이 일로 조정에서는 요원스님을 일의 대체 (대체) 를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승전등 (승전등)」

63. 다라니를 외면 사리가 나오다 / 천축사 오법사 (오법사)

천축사 (천축사) 의 오 (사오) 법사는 전당 (전당) 사람인데 다라니를 외울 때마다 사리가 나왔으며 그가 공양올리는 불상에서도 꼭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천성 3 (천성:1028) 년에 자운 (자운) 법사가 지자대사의 교관 (교관) 을 대장경 안에 넣자고 청하였다. 문목공 (문목공) 왕종 (왕종) 이 이를 황제께 아뢰려하자 오법사는 ꡒ이는 보통 일이 아니니 소승이 돕고저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천수관음을 그려놓고 대비주를 외우면서 ꡒ일이 과연 이루어지면 이 몸을 불사르겠나이다" 하고 서원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왕종이 죽자 오법사는 밤낮으로 쉬지않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해가 지나 마침내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자 오법사는 드디어 전날의 서원했던대로 몸을 불살랐다. 장작불이 다 꺼져도 시신은 그대로 있었고 가사로 몸을 두른채 마치 산사람처럼 엄연하였으므로 대중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에 자운법사가 다시 향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마침내 몸이 부서지고 무수한 사리가 나왔으며 3년 뒤까지도 신도들이 사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자운법사는 이에 찬을 써서 돌에 새겼다.

오법사는 나의 문도라 불법 짊어지고 몸을 버리니

불꽃이 타오를수록 그 즐거움도 끝이 없었네

불이 다 꺼지려 하는데 엄연하게 가부좌하고

뒤에 뼈를 부수니 찬란한 사리 둥근 구슬 같았네

아주 옛날에는 있었겠지만 지금 세상엔 없는 일이니

꽃다운 나이 서른에 참으로 대장부였네.

오야오도 하법연구

기염혁혁 기락유유

체화장멸 엄여가부

체골후쇄 찬야원주

신고응유 금야칙무

방연삼십 진재장부 「금원 (김원)」

64. 선을 닦는 학인에게 고함 / 회당 조심 (회당 조심) 선사

ꡒ 회당 조심 (회당조심:1025~1100, 임제종 황룡파) 선사는 처음에 혜남선사가 돌아가시면서 하신 부탁을 받아 주지할 인연을 맡았다. 그후 13년이 지나 법석이 한창 융성할 때에 의연히 주지 일을 그만두고 서원 (서원) 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는 그 방을 회당 (회당) 이라 이름짓고 말하기를ꡒ 내가 그만둔 것은 세상일일 뿐이니 지금부터는 오로지 불법수행에 전념하고자 한다"는 그 방문에 방을 써붙였다.

ꡒ선을 닦는 모든 학인에게 고하노라. 도를 철저히 캐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살펴보아야 하니 남이 대신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중에 혹시 인연을 보아내어 스스로에게 기뻐하며 들어갈 곳이 생겼거든 얼른 방장실에 들어와서 털어놓고 옳은지 그른지, 얕은지 깊은지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아직 밝혀내지 못했거든 무엇보다도 우선 쉬어버려라. 그러면 도는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고생고생 달려가며 구하면 도리어 미혹과 번민만 더하게 된다. 이것은 말을 떠난 도리이니 요는 스스로가 긍정하는 데 있는 것이지 남에게 의지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밝혀내는 것을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는 생사의 근본을 확실히 통달했다고 말한다.

만약 말 떠난 도리를 볼 수 있다면 성색과 언어, 시비 등 모두가 전혀 다른 법이 아님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말 떠난 도리를 보지 못하면 눈 앞의 차별된 인연을 비슷하게 이해한 것으로 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오직 눈 앞에 전개되는 헛그림자를 오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쓸데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머리끝까지 자만에 차서 심력을 헛되이 써버릴까 걱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이기고 행주좌와에 정성껏 관찰하여 미세한 곳까지 자세히 살피면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연히 도에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이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배워서 이루어지는 공부가 아니다. 만일 이와같이 치밀하게 참구하지 못한다면 경읽고 절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니, 그것이 마구 불법을 비방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이렇게 늙은 시절을 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 일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런 매임이 없으리라고 내가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이밖에 입실하는 일은 지금부터 초하루와 보름 이틀만 와주기를 바란다."「정강(정강)」

65. 3교 성인의 가르침 / 효종 (효종) 황제

효종 (효종:1163~1189재위) 황제가 경산 (경산) 의 주지 보인 (별봉보인:1109~1190) 선사를 선덕전 (선덕전) 에 초청하여 말하였다.

ꡒ3교 (삼교:불유선) 성인들의 도리는 본래 같은 것입니까?"

보인선사가 아뢰었다.

ꡒ그것은 허공에 동서남북이 애초에 따로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ꡒ그래도 성인들이 세우신 방편은 각기 다른점이 있으니, 예컨대 공자는 중용 (중용) 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ꡒ중용의 가르침이 아니면 어떻게 세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화엄경」에서는, ꡐ세간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세간 벗어나는 법을 이룬다 하였고, 「법화경」에서는, 세간을 다스리는 말과 삶을 지탱해 주는 생업들이 모두 실상 (실상) 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ꡒ지금의 사대부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이 많은데 오직 문자만 파고들 뿐 공자의 도는 보지 못하고, 더욱이 공자의 마음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석가부처님은 문자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마음의 근원을 그대로 지적하여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어 저마다 깨달아 들어가게 하니 이 점이 훌륭한 일입니다."

ꡒ비단 요즘의 공부하는 사람들만 공자의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열 분 제자 가운데 안자 (안자) 같은 분은 바탕을 갖추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인데 자기 평생의 역량을 다하고서도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ꡐ우러러보니 앞에 있는 듯하다가는 홀연히 뒤에 있으시다.' 이렇듯 그의 입신이 탁월하긴 했으나 결국은 공자의 그림자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분명하게 털어놓고 여러 제자에게 말씀하기를 ꡐ제자들아, 너희들은 내가 무엇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느니라. 나는 모든 행동에서 너희들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제자들이여 이것이 나 공구 (공구) 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공자는 한번도 제자들을 피한 적이 없는데도 제자들 스스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지난날 장상영 (장상영) 승상도 정작 불교를 배우고 나서야 유교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황제가 자신의 생각도 그렇다고 하면서, 장자와 노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였다.

ꡒ이 사람들은 불법에서는 소승인 성문 (성문) 일 뿐입니다. 소승은 몸을 감옥이나 형틀같이 생각하여 싫어하고 지혜를 잡독으로 여겨 멀리합니다. 그리하여 불 속에 몸을 태워 무위 (무위) 의 경지에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ꡐ몸은 본래 고목같이 만들 수 있고 마음은 본래 꺼진 재처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마음에 꼭 맞는 말이라 하였다. 「주대록 (주대록)」

66. 파초와 대나무를 벗삼아 / 가구 (가구) 스님

고승 가구 (가구) 는 전당 (전당) 사람이다. 강원을 두루 다녀 천태의 종지를 깊이 터득하고, 그 뒤 상부사 (상부사) 에 살았다. 스님은 옛 음률로 시 짓기를 좋아하여 담담하면서도 맑은 경지에 이르렀는데 소동파 (소동파) 는 스님을 ꡐ시로 (시로) '라고 불렀다. 소동파가 정월 대보름에 관료들과 함께 관등놀이를 갔다. 그는 혼자 스님을 찾아뵈었는데 스님이 조용히 앉아 좌선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절구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문 앞엔 노래소리 북소리 왁자지껄한데

말쑥한 방 하나, 얼음같이 차구나

부질없이 유리로 사물을 비쳐보지 않고서야

무진한 그것이 본래 등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네.

문전가고뇨분붕 일실소연랭욕빙

불파류리한조물 시지무진본비등

스님은 매우 엄격하게 몸을 다스려 눕지 않고 지내며 하루 한끼 먹고 행주좌와 어느때고 법복을 벗은 일이 없었다. 스스로 근검절약하여 평생 누더기 한 벌을 바꾸지 않았으며, 혹 양식이 떨어지면 벽곡 (궐곡:곡물을 먹지 않고 솔잎이나 야채를 먹음) 을 하며 좌선할 뿐이었다.

만년에는 서호 (서호) 가에 살았는데 말끔한 선상 (선멸) 하나 뿐 쓸데없는 물건은 남겨두지 않았다. 창밖에는 오직 붉은 파초 몇대공과 푸른 대나무 몇백줄기 뿐이었는데 그곳을 스스로 ꡐ소소당 (소소당) '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임종하면서 사람들에게 ꡒ내가 죽고나면 파초와 대나무도 죽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뒤에 그 말대로 되었다. 「이운집 (이운집)」

67. 정토에 오고감 / 양차공 (양차공)

양차공 (양차공:양걸) 이 말하였다.

ꡒ원력 크신 아미타불은 정토에서 오지만 와도 실제 오는 것이 아니며, 신심 깊은 범부는 정토로 가지만 가도 실제 가는 것이 아니다. 저쪽에서 이곳으로 오지 않고 이쪽에서 저곳으로 가지도 않으나 그들 성인과 범부는 만나서 양쪽이 교제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밝은 빛은 크고 둥근 달과 같아서 법계를 두루 비춘다. 염불하는 중생이 이를 간직해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의 마음 속에 있는 중생은 티끌같이 무수한 극락을 얻게되고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정토는 생각생각 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만약 발심하여 저 명호를 염 (념) 할 수 있으면 그대로 왕생하여 강가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 입을 모아 칭찬하고 시방의 보살들이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믿을 것이며 정토가 가서 날만한 곳이 아니라면 어느 땅이 가서 날만한 곳인가. 스스로 자기의 신령함을 버린다면 그것은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공은 임종 때 금으로 된 자리 〔대〕 가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게송을 짓고 돌아가셨다.

삶이라해서 연연할 것도 아니고

죽음이라해서 버릴 것도 아니니

크나큰 허공 속에

오고 가는 것일 뿐인데

잘못에 잘못을 더하여

서방극락이 되었구나.

생적무가련 사적무가사

태허공중 지호자야

장착취착 서방극락 「보도집 등 (보도집등)」

68. 동정 (동정) 법문 / 현사 사비 (현사사비) 선사

현사 사비 (현사사비:835~908) 선사는 복주 (복주) 사람이며 성은 사씨 (사씨) 다. 젊어서 남대강 (남대강) 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홀연히 배를 버리고 불문에 들어왔다. 스님은 짚신과 베옷에, 겨우 기운을 이어줄 정도로만 먹고 하루종일 좌선을 하니 설봉 의존 (설봉의존) 선사가 불러 말씀하셨다.

ꡒ스님은 두타행 (두타행:고행) 을 하던 이가 다시 이 세상에 온 사람인데 어찌 제방에 두루 다니며 법을 묻고 참구하지 않는가?"

ꡒ달마는 동쪽에 오지 않았고, 2조는 서천에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자 설봉스님은 그를 인정하였다.

스님이 현사사 (현사사) 에 움막을 엮었는데 대중이 서로 물어물어 찾아와 마침내 총림을 이루었다. 스님은 경에 부합되는 말씀으로 법을 설하니 요점을 분명히 알지 못한 자들이 제방에서 찾아와 모두 해결을 보았다.

대중에게 말하였다.

ꡒ불도는 드넓어서 정해진 길이 없고 3세에 있는 것도 아니니 어찌 떴다 가라앉음이 있겠느냐. 세워지고 무너지고 하는 것은 조작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움직이면 〔동〕 번뇌 경계에 빠지고 고요하면 〔정〕 어둡고 몽롱한 곳에 가라앉는다. 또한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없애면 아무 것도 없는 데 떨어지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받아들이면 불성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니 경계를 마주할 때 굳이 마른나무나 꺼진 재처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마치 거울에 물건을 비춰도 거울 빛이 어지러워지지 않듯, 새가 공중을 날되 하늘 색을 더럽히지 않듯, 그저 상황에 임해서 타당함을 잃지 않고 응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ꡐ시방에 그림자가 없고 3계에 발자취가 끊겼으며 가고 오는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있다는 생각에 머물지도 않는다. 이는 마치 힘센 장사가 팔꿈치를 펼 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자가 거닐 때 짝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하늘을 가리운 것이 없는데 무슨 뚫고 통과할 것이 있는가. 한줄기 빛은 이제껏 어두운 적이 없었으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 바탕 〔체〕 은 적적하되 항상 밝게 빛나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이 가이 없다. 원각 (원각) 의 빛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늘 땅을 삼키고 불살라서 다시 비춘다." 「전등 (전등)」

69. 불상이 허물어져도 / 문로공 (문로공)

문로공 (문로공) 이 낙양 (낙양) 에 있을 때 한 번은 재를 올리러 용안사 (룡안사) 에 가서 불상을 우러러 보고 예불을 드렸다. 하루는 홀연히 불상이 허물어져 땅에 떨어지니 공이 그것을 보고 조금도 공경하는 기색없이 오직 뚫어지게 바라만 보다가 나가버렸다. 옆에 있던 스님이 왜 예불을 안하느냐고 물으니 불상이 허물어졌는데 내가 어디다 예불을 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하였다.

ꡒ옛 성인은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ꡐ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관리들이 다니는 길에서 흙을 파다가 불상을 만드니, 지혜로운 사람은 길가의 흙인줄 알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불상이 생겼다고 한다. 뒷날 관리가 지나가려고 도로 불상으로 길을 메우니 불상은 본래 생겼다 없어진 것이 아니고 길 역시 새 길 옛 길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느낀 바 있어 이로부터 도를 흠모하는 데 매우 힘써 아흔이 넘도록 아침에 향사르고 저녁에 좌선하는 일을 한 번도 빠뜨린 일이 없었다. 공은 매일 다음과 같이 발원하였다.

ꡒ저는 항상 정진하여 모든 선업을 부지런히 닦고 싶습니다. 저는 심종 (심종) 을 깨달아 모든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싶습니다."

70. 스스로 강에 장사지내다 / 묘보 (묘보) 수좌

묘보 (묘보:1071~1142) 수좌는 스스로를 ꡐ성공 (성공)'이라 이름하였다. 사심 (사심오신:1043~1114, 임제종 황룡파) 선사에게서 종지를 얻고 오랫동안 화정 (화정) 에 살았으며 쇠피리를 즐겨 불면서 자재하게 스스로 즐기니 아무도 그 경지를 헤아려볼 수 없었다. 또한 시를 지어 세상 사람들을 일깨우기를 즐겼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도를 배움은 궁성을 지키는 일과 꼭 같아서

낮에는 6적 (육적) 을 막고 밤에도 초롱초롱 해야 하니

장군과 주장이 호령을 행사하면

창과 방패 움직이지 않고도 태평을 이루네.

학도우여수금성 주방육적야성성

장군주장능행령 불동간과치태평

또 이런 게송을 지었다.

밭갈지 않고 밥먹고

누에치지 않고도 옷입으며

세상 밖에서 맑고 한가롭게 지내니

성군의 시절보다 더 편하네

허나 조사의 관문 빗장을

뚫지 못했거든

모름지기 뜻을 두어

마땅한 곳에 마음을 붙여야 하리.

불경이식불잠의 물외청한과성시

미투조사관려자 야수존의착변의

하루는 대중들에게 알렸다.

ꡒ앉아서 죽고 선채로 죽고 하는 일도 수장 (수장) 하는 것만은 못하다. 첫째는 땔감을 절약하고 둘째는 뫼구덩이 파는 일을 안해도 되기 때문이니, 손 놓고 그냥 떠나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누가 내마음 알아줄까. 선자 (선자) 화상*이로다. 그 높은 풍모 천백년 이어지기 어려워 어부가 한 곡조를 부르는 이 없구나."

그리고는 마침내 청룡강 (청룡강) 으로 가서 나무판을 타고 베돗대를 친 다음 먼곳으로 떠나가 죽었다. 「보등 (보등)」

71. 정토를 눈앞에 보다 / 우법사 (우법사)

우법사 (법감공우법사) 는 가화 (권화) 사람으로 유학 (유학) 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였다. 각고의 노력으로 정진하기 30년에 더욱더 수행에 힘써 하루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일찍이 도잠 (도잠) , 칙장 (칙장) 두 스님과 도반이 되었는데 도잠스님은 시를 잘해서 명예를 가까이 했으나 칙장스님과 법사는 빛을 감추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일에만 힘썼다. 그런던 중에 칙장스님이 먼저 죽고 우법사도 입적할 때가 되자 대중에게 말하였다.

ꡒ내 꿈에 신선이 나타나 알려주기를 「그대 도반인 칙장스님은 보현보살의 원행삼매 (원행삼매) 를 얻어 이미 정토에 가서 났다. 그곳에서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되는데 어찌 머뭇거리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정토의 거룩한 모습과 여러 가지 꽃이며 음악이 모조리 눈앞에 나타나더라."

그리고는 게송을 지어놓고 돌아가셨다.

허공 속에 온갖 꽃이 그물처럼 피었고

꿈 속에 칠보연못이 보이네

서방정토 돌아가는 길 편안히 밟으니

다시는 한 점의 의심도 없구나.

공리천화나망 몽중칠보련지

답득서귀로온 갱무일점호의 「행업기 (행업기)」

72. 수식관 (수식관) / 소동파 (소동파)

소동파 (소동파) 가 말하였다.

ꡒ배가 고프거든 비로소 밥을 먹되 배부르기 전에 그만 먹어야 한다. 산보하고 거닐며 배를 꺼트려 배가 비게되면 조용한 방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생각을 고요히 하고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센다. 하나에서 열까지 열에서 백까지 세어 수백에 이르게 되면 이 몸은 우뚝해지고 이 마음은 고요해져 허공과 같아지니, 번거롭게 금기하고 다스릴 일이 없어진다. 이렇게 오래 하다 보면 한 숨이 스스로 머물러 들어가지고 나가지도 않을 때가 있다. 이 때 이 숨이 8만4천의 털구멍을 통해서 구름이 뭉치듯, 안개가 일듯하는 것을 깨달아 무시 이래의 모든 병이 저절로 없어지고 모든 업장이 소멸된다. 마치 눈먼 사람이 홀연히 눈을 뜨듯 저절로 밝게 깨달아, 이 때가 되면 남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전 (대전)」

 

73. 대지율사 (대지율사) 의 행적

영지사 (영지사) 원조 (원조:1048~1116) 율사는 전당 (전당)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숙세의 인연이 익어져 나이 열여덟에 경에 통달하여 출가하였으며, 사미로 있을 때 이미 대중을 위해 경을 강의하였다. 계율을 배우면서는 배울만한 스승이 없다고 늘 탄식하였다. 당시 신오 처겸 (신오처겸) 법사는 천태의 도를 깊이 터득하고 있었다. 율사가 찾아 뵙고는 v참으로 나의 스승이시다" 하고 청을 해서 문하에 있게 되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날마다 몇 리 길을 걸어와 배웠다. 처겸법사는 강론을 할 때마다 반드시 율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쩌다 조금 늦어져 대중들이 시간이 지났다고 강론을 청하면 언제나 ꡒ강을 들을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그는 이토록 율사를 사랑하였다.

율사가 익혀왔던 것을 버리고 법사를 따르려 하니 법사가 말하였다.

ꡒ요즘 들어서 율의 가르침이 점점 약해지는데 그대는 뒷날 반드시 종장이 될 것이니 꼭 법화 (법화) 를 밝히고 사분율 (사보율) 을 널리 펴도록 하여라. 나의 도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율사는 마침내 많은 종파를 널리 연구하고 그 중에 율을 근본 삼았는데 단지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일찍이 남산 도선 (남산도선) 율사에게 귀의하여 하루 여섯 차례씩 예배를 드리고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발우를 들고 걸식을 다녔는데 옷이라고는 큰 베옷 하나만 걸쳤을 뿐이었고, 정오가 지나서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발우 하나와 옷 세벌 뿐 바랑 속에 쓸데없는 물건은 없었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메뚜기를 없애달라고 빌면 메뚜기가 경계 밖으로 떠나고,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면 장마비가 내렸다. 술고방공 (술고방공) 이 율사에게 비를 빌도록 명하였는데, 축원 〔참〕 이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니 공이 말하였다.

ꡒ우리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섬기지 않았는데 지금 율사를 만나고 보니 귀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태사 (태사) 사월왕 (사월왕) 이 율사의 비 뒷면에 이렇게 썼다.

ꡒ유학을 하는 사람은 유학으로 자기를 묶고, 계율을 하는 사람은 계율로 자기를 묶는 것이 공부하는 이들의 큰 병통이다. 그런데 유독 율사만은 3천 가지 몸가짐과 8만 가지 세세한 행을 갖추어 흠잡을 데 없는데도 늘 정혜 (정혜) 의 테두리를 껍질벗듯 초탈하였으니 율장 중에 진짜 법왕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수백년 뒤까지도 사람들을 분발케 하니, 그를 남산율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하나 그 공은 배가 된다고 하겠다.

만일 지난날 율사에게 하여금 승복을 입게 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유교의 우두머리로서 특출난 조예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터인데, 아까운 일이다."

율사가 돌아가신 지 26년이 되도록 그 남긴 향기가 없어지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지율사 (대지율사) '라는 호를 내리고 탑을 ꡐ계광 (계광) '이라 이름지어 시호를 하사하는 은혜를 주었다. 이 일은 유공 (유공) 의 글에 언급되지 않았기에 비의 뒷면에 써둔다."

「탑명 (탑명)」

74. 대혜 종고선사의 행적

대혜 종고 (대혜종광:1088~1163) 선사가 담당 준 (담당문준:1061~1115) 스님을 찾아가니 준스님은 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선사가 제멋대로 생각하며 물러섬이 없자 준스님은 ꡒ그대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는 데 병통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소지장 (소지장) 이라는 것이다"라고 꾸짖었다.

당시 뛰어난 선비였던 이상노 (리상로) 가 준스님을 찾아뵙고 도를 묻고 있었는데 마침 선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ꡒ도는 신령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 묘는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 이를 체험하는 데에는 총명함이 필요치 않고 이를 얻는 데는 보고 들음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자 이상노가 무릎을 치고 감탄하며 ꡒ어찌 사고 (사고) 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학문을 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이 일로 두 사람은 도반이 되었다.

준스님이 입적하자 선사는 승상 무진거사 (무진거군, 장상영:1043~1121) 를 찾아가 준스님의 탑명 (탑명) 을 부탁하였다. 공은 평소 선공부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서 대단한 지견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그의 문턱을 오르지도 못했다. 선사는 그를 만나 대화하는데 탁월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공이 이를 보고는 ꡒ자네의 선은 격식을 넘어섰네"라고 칭찬을 하니, 선사가 ꡒ그래도 스스로는 긍정하지 못하겠는 데야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공이 ꡒ그대는 천근 (천근:원오극근) 스님을 만나보면 될 것 같소"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는 서울 천녕사 (천령사) 로 원오 극근 (원오극근:1063~1135) 스님을 찾아갔는데 원오스님은 마침 법좌에 올라 거량법문을 하고 있었다.

ꡒ한 스님이 운문 (운문문언) 스님께 묻기를 ꡐ무엇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까?'라고 하니 운문스님께서 ꡐ동산 (동산) 이 물 위로 간다'라고 하셨는데 만약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ꡐ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라고 대답하겠다."

선사는 여기서 홀연히 앞뒤가 다 끊겼다. 그리하여 움직임 〔동상〕 은 생겨나지 않았으나 도리어 깨끗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계 (정처) 에 빠지게 되었다. 선사가 방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원오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그대가 이런 경계에 도달한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깝구나! 죽기만 했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화두 (어구) 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로다. 듣지 못했는가. 깍아지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스스로 긍정해야 맨 끝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이렇게 되면 그대를 속일 수 없으니 이런 도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번은 방장실 〔동산오조법연의 처소〕 에서 원오스님이 묻기를 ꡒ있다는 말 〔유구〕 과 없다는 말 〔무구〕 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으니 입을 열고 말을 했다 하면 틀립니다"라고 한 일이 있었다.*

선사가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손에 잡고도 먹는 것을 잊고 있으니 원오스님이 웃으며 손님에게 말하였다.

ꡒ저놈은 회양목선 (황양목선:꼭 막혀 융통성 없이 선공부 하는 것을 잘 자라나지 않고 딱딱한 회양목에 비유한 말) 을 참구해 터득했다오."

대혜선사가 분개하며 물었다.

ꡒ스님께서는 지난 번 오조스님께 ꡐ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는데 오조스님께서는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ꡒꡐ묘사하려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또 묻기를, ꡐ나무도 자빠지고 넝쿨도 말라버리면 있다 없다 하는 그 말은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하니 오조스님은 ꡐ서로 따라오느니라' 하셨다."

선사는 여기서 ꡒ나는 알았다!"라고 외쳤다. 이때부터 마음이 확 트여 응어리지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길을 떠나 강서지방을 가다가 대제 (대제) 한자창 (한자창) 을 만나 유학과 불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는데, 한자창이 깊이 탄복하여 선사는 그의 서재에 반년을 묵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로 인사하는 외에 때가 아니면 강론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길을 가는 데 선후를 사양하는 일이 없고 앉을 때에도 주인자리 손님자리를 따지지 않았다. 너와 나를 서로 잊고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 다 쏟아 놓으며 하루도 법락을 맛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후 승상 장위공 (장위공:장상영) 의 청으로 경산 (경산) 에 주지하니 천하의 납자들이 모여들어 따르는 대중이 2천 명이나 되었다. 선사는 청규 (청규) 로 대중들을 묶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율에 맡기기도 하였다. 납자들이 불법의 요의를 서로 따지다가 혹 기분이나 이론이 맞지 않아 선사 앞에서 다투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선사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정을 지어주지 않고 으레 담당자를 보내서 쫓아내버렸다. 당시 유나 (유나) 로 있던 소진 (소진) 스님은 촉 (촉) 땅의 선비였는데 선사가 명을 내리면 잠만 자면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산 유람을 하도록 하였다. 이 일이 나중에 선사에게 알려지니 선사는 ꡒ이 묘희 (묘희:대혜의 호) 의 용상굴 (룡상굴) 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열중 (열중:대중을 통솔하는 직무) 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

형중온 (효형중정:임제종 대혜파) 이 말하였다.

ꡒ선사는 뜻이 크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취향과 식견이 고명하였다. 성격은 비록 급했으나 도량은 실로 너그러워 성이나서 꾸짖는 가운데도 사실은 자비로움이 있었다. 대중 가운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명령대로 거행케 하지만 한번도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으니 선사가 소진유나를 칭찬한 이유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뒷사람들이 거울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속전 (정속전)」

75. 금강경 송 (송) / 야보천 (야부천) 선사

야보산 (야부산) 도천 (도천) 선사는 소주 (소주) 출신으로 활 쏘는 사람이었다. 숙세에 심어진 인연으로 선법 듣기를 좋아해서 늘 경덕사 (경덕사) 겸 (겸) 선사를 찾아뵙고 법을 물었는데, 겸선사는 조주선사가 ꡐ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하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새벽부터 밤까지 참구만 하면서 이 때부터 직무도 수행하지 않으니 위관 (위관) 이 화가 나서 곤장을 쳤는데, 그는 곤장을 맞는 순간 홀연히 깨쳤다. 이에 겸선사가 그의 이름을 고쳐주면서 말하였다.

ꡒ그대는 이제까지 적삼 (적삼) '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ꡒ도천 (도천) '이라고 이름지어 주겠다. 지금부터 등뼈를 곧추세워 더욱 더 정진한다면 그 도가 시냇물처럼 불어날 것이나,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말할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도천선사는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뜻과 서원을 바꾸지 않았다.

한번은 금강경 (김강경) 에 송 (송) 을 달았는데 지금도 세상에 유행되고 있다. 야보산에서 법을 열어 동짓날 대중법문을 하였다.

ꡒ모든 음 (음) 이 꺼지니 하나의 양 (양) 이 생겨나 초목과 수풀에 모두 새싹이 움트는데, 오직 납승의 밑없는 발우에는 여전히 밥도 담고 국도 담는다." 「주봉집 (주봉집)」

76.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다가 / 덕산 연밀 (덕산연밀) 선사

덕산 연밀 (덕산연밀:운문종) 선사의 회하에 한 선승이 있었는데, 공부가 매우 예리하였다. 그는 ꡐ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깨달은 바가 없었다. 하루는 홀연히 해 만큼이나 커다란 개머리가 입을 벌리고 자기를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것을 보고는 겁이 나서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옆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는 마침내 덕산선사에게 아뢰니 덕산선사가 말하였다.

ꡒ두려워할 것 없다. 단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가 개가 입을 벌리거든 그때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거라. 그러면 없어질 것이다."

그는 가르쳐준대로 앉아 있었다. 밤중이 되어 개가 다시 나타나자 머리로 힘껏 한번 부딪쳤다. 그랬더니 그것은 궤짝 속이었다. 이에 확연히 깨닫고 뒷날 문수사 (문수사) 에 나아가 불도를 크게 떨쳤는데, 이분이 바로 응진 (응진) 선사다.

77. 곳곳마다 고향 신조 / 본여 (신조본여) 법사

신조 본여 (신조본여:982~1051) 법사가 법지 (법지:사명지예를 말함) 존자에게 물었다.

ꡒ무엇이 경 (경) 중에서 왕입니까?"

ꡒ그대가 나를 위해 3년동안 창고소임 〔고사〕 을 맡아 보면 그대에게 말해주겠다."

본여법사는 공경히 그 명을 받들다가 3년이 지나자 이제는 말씀해 주십사 하고 다시 청하였다. 법지존자가 큰소리로 ꡒ본여야!" 하고 부르자 그 한소리에 홀연히 깨닫고는 송을 지었다.

곳곳에서 돌아갈 길 만나고

곳곳마다 그곳이 고향일세

본래 다 완성되어 드러나는 것을

하필 사량을 기다리랴.

처처봉귀로 두두시고향

본래성견사 하필대사량 「교행록 (교행록)」

78. 돌배나무 무위 (무위) 를 본받다 / 사암 엄 (사암엄) 법사

사암 엄 (사암엄:1020~1101) 법사는 경시 (경시) 를 거쳐서 출가하여 동산 신조 (동산신조) 선사에게 귀의하였다. 신조선사는 큰그릇이라고 여겨 ꡒ우리 종문에 사람을 얻었으니 앞으로 종문이 실추되지 않겠구나" 하면서 그를 윗자리에 앉혔다.

법사는 단지 경을 강하는 것만을 제일로 치지 않고, 말을 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모든 처신을 반드시 법도에 맞게 하였다. 당시 법진 (법진:법진 처함) 스님이 지관 (결관) 의 부사의경 (불사의경) 을 물으니 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만법은 오직 한 마음일 뿐이어서 마음 밖에 별다른 법이 없는데 이 마음법 〔심법〕 을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을 묘삼천 (묘삼천) 이라 합니다."

얼마 있다가 법진스님이 동액 (동:궁궐 안에 있는 절) 으로 거처를 옮기며 주지를 사임하게 되자, 법사에게 명하여 뒤를 잇게 하니 법사가 말하였다.

ꡒ옛날 지자 (지자) 대사는 나이 50이 되기 전에 문도대중을 흩어버렸고, 사명 (사명) 대사는 40이 되자 장좌불와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늙어서 한가하게 주지를 맡겠습니까."

그리하여 끝내 받지 않고 영취산 동쪽 봉우리에 은거하였는데, 그곳에 아기위나무가 한그루 있어 그 옆에 암자를 짓고 「사암 (사암) '이라 이름하였다. 암자의 기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ꡒ내 나이 60에 산에 돌아와 암자터를 잡았다. 암자가 다 되어 그 속에서 요양이나 하고 지내면서, 그렇다고 세상살이를 지나치게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암자 서쪽에 아가위나무 한그루가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암자 이름을 지었는데, 아가위란 맛이 좋다고 이름난 과실도 아니고 배나 밤에 비하면 부끄럽게 생겼다. 그러나 배는 그 시원한 맛 때문에 칼에 베어지고 밤은 그 단맛 때문에 입에 씹히게 되니, 설혹 배와 밤에게 식성 (식성) 을 부여해서 그들 스스로 쓸모없는 곳에 있게 해달라고 해도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 아가위는 돌배의 종류에 속하는 것이어서 비록 향기는 있어도 맛이 떫다. 억지로 씹으려해도 향기로는 배를 채울 수 없고 떫은 맛은 입을 상쾌하게 할 수 없으니, 삼척동자라도 이것을 찾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주렁주렁 가지에 매달려 스스로 만족하는 그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 사람은 지혜 때문에 자기 뼈를 고단하게 하고 아가위는 떫은 맛 때문에 그몸이 편안하니, 지혜와 떫은 맛 중에 어느것이 참된가? 나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아가위와 이웃이 되었다."

법사는 몸에 필요한 물건이라고는 오직 작은 발우 하나 뿐이었고, 아침 점심의 밥은 오직 세가지 흰것 〔삼백:밥과 무우와 소금〕 뿐이었다. 이렇게 혼자 살기를 20년, 문을 닫고 좌선하니 세상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계율의 조목들은 경중을 막론하고 똑같이 지켰으며, 생활용구는 문빗장 같은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고 적막함에 자족하며 오로지 정토에 왕생할 것을 기약하였다.

하루 저녁은 꿈에 못에서 큰 연꽃이 피어나고 하늘 음악이 사방에서 줄지어 들려왔다. 법사는 ꡒ이것이 내가 왕생할 정토의 모습이다" 하였는데, 그후 7일만에 과연 돌아가셨다.

「행업기 (행업기)」

79. 세속의 명리를 좇다가 덕을 잃다 / 무명씨 (무명씨)

예전에 고승 한 분이 있었는데 도와 학문이 높아 불교집안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황제의 명을 받고 주지가 되어 황제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임종할 때 황제가 몹시 슬퍼하며 조서를 내려 장례를 치르도록 하니, 신하가 그 스님은 옷과 발우가 너무 많아서 관청에 소송당했다고 말하였다. 황제는 불쾌하게 생각하였고 돌보아주려던 장례도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에 소운 (소운) 이 말하였다.

ꡒ아깝구나! 세상 명리가 그의 이름을 덮어버리고 덕을 잃게 하였다. 지금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 또 긁어모으는 사람들이여, 어찌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잡편 (운잡편)」

80. 목욕탕에서 한 법문 / 무명씨 (무명씨)

옛분이 목욕실에서 게송으로 법문을 하였다.

ꡒ본래부터 비린내, 누린내 나는 것이 임시 모여서 이루어진 몸이라. 가죽과 털, 진액과 기름기가 끊임없이 생겨나니 설사 바다를 기울여 아침내내 씻더라도 나귀해 〔루연:간지에도 없는 해〕 가 될 때까지 깨끗해질 줄 모르리. 몸에서 일어나는 때는 그래도 잘 씻겨 나가지만 마음은 욕심경계를 따라가 더더욱 물이 든다. 불쌍하구나, 근원을 잊은 세상사람들이여, 한갓 피부만 씻을 뿐 마음은 씻지 않는구나. 물통 가득 넘치는 더운 물, 큰 국자로 씻는데도 시주들은 이익이 늘 것만을 바란다. 뒷 생에 자기가 온 곳을 모른다면 복이 수미산 같아도 선 자리에서 녹아짐을 보리라." 「호심석각 (호심석각)」

81. 먹고 쉴틈도 없이 화두를 들다 / 분암주 (보암주)

분암주 (보암주) 는 어찌나 열심히 도를 닦았던지 밥먹고 쉬고 할 틈도 없었다.

하루는 돌난간에 기대 ꡐ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서 한참 후에 옷이 젖자 비가 온 줄을 알았다.

그후 강가를 걸어 가다가 ꡒ시랑 (시랑) 행차시오!" 하는 계사 (계사) *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 홀연히 깨닫고는 게송을 지었다.

몇해나 그 일이 가슴에 걸렸던가

사방에 다 물어도 눈을 못떴네

이때 간이고 담이고 다 찢어지는데

강가에서 시랑 행차시오 하는 한마디를 들었네.

기연개사괘♠회 문진제방안불개

간담차시구열파 일성강상시랑래

이때부터 처소에 매이지 않고, 검문산 (검문산) 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그 교화가 영 (령) 밖에까지 미쳤다. 게송을 지을 때는 붓이 달리듯 하였는데,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 글 (제) 을 달았다.

모습은 비구지만 말씨는 고약해

어리석고 취한 듯 하나 성격만은 호탕하다

바람 불 때도 욕하고 비가 올 때도 욕하지만

자비로 치면 성인인지 범부인지 더듬기 어렵도다

매일 다리 〔교〕 가엔 똑같은 사람인데

세상에 왕랑, 백락* 같은 사람 없어서

일생을 헛 보내고 말았구나.

면목두수 어언박악

치치감감 뢰뢰낙낙

매풍매우당자비

시성시범난모색

매일교두교미등개인

세무왕양백락 일생공과각 「은산 (은산)」

82. 밤낮으로 참구하다 / 영원 유청 (영원유청) 선사

영원유청 (영원유청:?~1115, 임제종 황룡파) 선사는 남주 (남주) 무녕 (무령) 사람으로 맑은 용모를 가진 분이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지칠줄을 모르니, 태사 (태사) 황정견 (황정견) 은 ꡒ유청스님이 학문을 좋아함은 마치 기갈든 사람이 음식을 찾듯 한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회당 (회당조심) 선사에게 귀의하여 밤낮으로 참구하느라 자고 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한번은 회당스님이 손님과 이야기하는 차에 모시고 서 있었다. 손님 간 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으니 회당선사가 ꡒ유청스님은 죽었는가?"라고 하자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유청선사가 불감혜근 (불감혜근:1059~1117) 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ꡒ제가 두 군데 주지로 있으면서 늘상 동산 (동산, 오조법연) 사형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제껏 세속 일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저 간절히 부탁하는 일은 자기 몸을 잊고 우리 불도를 널리 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제가 황룡산 (황룡산) 에 도착했을 때 받은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는 날이 가물어 제방 농장에서 손해를 입었지만 나는 이 일을 조금도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근심스러운 것은 선가에 안목있는 이가 없는 일이다. 이번 하안거에 백여명이 선방에 들어와 조주스님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있는데, 한 사람도 깨친 자가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걱정거리다.'

이것은 참으로 지극한 말씀입니다. 절 살림살이가 갖춰지지 않은 것을 근심하고 관리들에게 밉보여 추궁당할까봐 겁을 내며, 명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문도대중이 많지 않을까를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실로 거리가 먼 분입니다." 「정강필어 등 (정강필어등) 」

 

83. 49일 동안 서서 공부하다 / 불등 수순 (불등수순) 선사

불등 수순 (불등수순) 선사는 삽천 (천) 사람인데 오랫동안 불감 혜근 (불감혜근) 선사에게 귀의해서 공부하였다. 대중에 섞여 살며 법을 묻곤 하였는데, 까마득하여 아무것도 깨달은 바가 없자 갑자기 탄식하며 말하였다. ꡒ내가 이 생에서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맹세코 이불을 펴지 않겠다." 이에 49일 동안을 노주 (로주) 에 기댄 채 맨땅 위에 서 있었는데, 마치 부모 상을 당한 사람 같았다.

한 번은 불감선사가 상당하여 ꡒ삼라만상이 모두 한 법에서 도장 찍히듯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순선사는 그 말 끝에 단박 깨달았다. 그리하여 불감선사를 찾아가 만나니 불감선사가 말하기를 ꡒ아깝다! 한 알의 밝은 구슬을 이 지랄병 든 놈이 주웠구나"라고 하였다.

원오 극근 (원오극근) 선사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아직 그런 경지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ꡒ내가 꼭 시험해 봐야겠다" 하고는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한번은 같이 산에 갔다가 깊은 못에까지 오게 되었는데 원오선사가 순선사를 물 속에 떠밀어넣고는 대뜸 물었다.

ꡒ우두 (우두법융) 스님이 4조 (사조도신) 를 만나지 않았을 때는 어땠는가?"

순선사가 허우적대면서 말하였다.

ꡒ못이 깊으니 고기가 모입니다."

ꡒ만난 뒤에는 어땠는가?"

ꡒ나무가 높으니 바람을 부릅니다."

ꡒ만나지 않았을 때와 만난 뒤에는 어떤가?"

ꡒ다리를 뻗는 것은 다리를 오므리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에 원오선사가 매우 칭찬하였다. 「주봉어록 등 (주봉어록등)」

84. 선원없던 곳에 선원을 세우다 선섬 / (선예) 선사

수주 (수주) 선섬 (개선선예) 선사는 다섯 살에 벌써 빼어난 기질을 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가 특별하다고 여겨 자성사 (자성사) 로 보내 출가케 하니, 선사는 여러 곳의 선원을 두루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수주 (수주) 에는 그때까지 선원이 없었고, 주지로 올 사람을 기다리자니 그때까지 자리가 빌 형편이었다. 선사는 머물던 절을 선원으로 고치고 제방 선림의 청규를 그대로 시행하며 절 살림을 주관하였다.

당시 오중 (오중) 의 승려들은 자리에 질서를 잃어 세력의 고하로 자리를 정하고 계율이나 덕행은 조금도 따지지 않았다. 선사는 이를 개탄하고 글을 올려 관가에서 다스려 줄 것을 구하여 그 일을 바로잡은 적이 있다. 선사가 명교 숭 (명교계) 선사에게 말하였다.

ꡒ나는 도를 가지고 그다지 세상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지도 못했고 덕행 또한 보잘 것 없으니 윗 성인들께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법을 어지럽히는 것을 구차하게 참고 보고만 있으니 이것이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설숭선사가 말하였다.

ꡒ그렇게 겸손해 할 것 없다. 종문의 묘한 도에는 다다른 사람이 드물고, 출세간 수행의 극치인 12두타 (십이두타) 는 우리 스님네들도 하기 어려운 수행이다. 법을 위해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는 일도 역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인데, 선사는 이 모든 것을 체득해서 행하니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영당기 (영당기)」

85. 선문 (선문) 에서 정토수행도 아울러 하다 / 원조 종본 (원조종본) 선사

원조 종본 (원조종본:1022~1099) 선사는 상주 (상주) 사람인데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다. 천의 회 (천의의회:936~1064, 운문종) 선사에게 귀의하여 헤진 옷에 때 묻은 얼굴을 하고, 물긷고 방아찧고 밥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낮에는 스님네들의 뒷바라지에 쫓아다니고 밤이면 새벽까지 좌선하며 고생을 무릎쓰고 정진하였는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ꡒ수행하면서 대중의 일도 맡고 있으니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하니 선사는 한 법이라도 버리면 원만한 공부라 할 수 없다. 결단코 이 생에서 이 몸으로 깨치려는데 감히 고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서광사 (서광사) 에 주지 자리가 비어서 선사에게 주지하도록 명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북을 치니 대중이 모였는데 갑자기 북이 땅에 떨어져 떼굴떼굴 구르면서 크게 울렸다. 한 스님이 선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ꡒ이것은 화상의 우뢰 같은 법음이 땅을 진동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어느덧 그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이때부터 선사의 법석은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 후에 여러 절에서 다투어 선사를 맞이해 갔고 만년에는 정자사 (정자사) 에 주지하였다. 영지사 (영지사) 의 조 (원조) 율사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조율사가 법의를 주었더니 선사는 종신토록 법좌에 오를 때면 언제나 그 법의를 입었다.

동도사 (동도사) 의 희법사 (6법사) 가 정 (정) 에 들었을 때 정토를 본 일이 있었다. 그곳 연꽃에 금으로 된 글자로 ꡐ항주 영명사 비구 종본의 자리'라고 크게 씌어 있었다. 희법사가 그 일을 이상하게 여겨 각별히 찾아가 예를 올리고 물었다.

ꡒ선사께서는 교외별전의 종 (종) 인데 어찌하여 정토에 자리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ꡒ내가 비록 선문 (선문) 에 있지만 늘 정토수행도 아울러 했기 때문이다."

「업등기 (업등기)」

86. 행주좌와에 생사를 살펴라 / 앙산 원 (앙산원) 선사

앙산원 (앙산원) 선사는 우강 (우강) 사람이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도를 배우기로 용단을 내렸는데, 묘희 (묘희) 선사가 매양 (매양) 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가 귀의하였다. 거기서 열심히 밥짓고 부엌일을 하며 각고의 정진을 하였다. 묘희선사는 그의 예리하고 빈틈없는 식견을 보고 남다르다고 여겼다. 한번은 소참 (소삼) 때 묘희선사가, ꡐ범부의 법을 가졌으면서도 범부를 모르고 성인의 법을 가졌으면서도 성인을 모르니, 성인을 알면 그가 바로 범부요 범부를 알면 그가 바로 성인이다' 하신 수산주 (수산주) 의 말씀을 들려주었는데, 앙산선사는 이 말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에 구주 (구주) 상부사 (상부사) 에 주지하다가 원주 (원주) 의 앙산 (앙산) 으로 옮겼다. 거기서 일을 맡아본 지 7일 만에 선문 (선문) 의 고향례 (고향예:스승에게 향을 사르며 설법을 청하는 예) 를 하게 되어 수좌가 대중을 이끌고 일제히 절을 올린 다음 법을 청하였다.

ꡒ생사란 큰 일이고 죽음은 신속히 찾아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자비로서 인연을 열어 보여 주십시오."

원선사는 천천히 말하였다.

ꡒ생사대사를 밝히고자 한다면 바로 행주좌와하는 가운데서 「생은 어디서 왔으며 사는 어디로 가는가. 결국 생사란 어떻게 생겼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느니라."

그리고는 한참을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더니 이윽고 그대로 몸을 벗었다.

「행장 (행상) 」

87. 진여철 (진여철) 선사와 양기 회 (양기회) 선사에 대한 평 / 대혜 (대혜) 선사

대혜 (대혜) 선사가 말하였다.

ꡒ근대에 주지살이 잘한 사람으로는 진여 철 (진여모철) 선사 만한 분이 없고, 총림을 잘 보필한 사람으로는 양기 회 (양기방회) 선사 만한 분이 없다. 자명 (자명:양기선사의 스승) 선사는 성품이 진솔하기는 하였으나 일처리를 대강하는 경우가 있었고, 꺼리고 피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양기선사는 자기 몸을 잊고 스승을 모셨는데, 어디 빈틈이라도 있을까가 오로지 걱정거리였다. 심한 추위와 더위가 닥쳐와도 한 번도 자기 일을 급하게 여긴다거나 얼굴에 태만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남원사 (남원사) 에서 흥화사 (흥화사) 까지 30년을 자명선사의 대 (대) 가 다 끝나도록 30년을 이렇게 총림의 기강과 계율을 다잡았다.

진여선사란 분은 행장을 챙겨 행각할 때부터 세상에 나가 문도를 거느릴 때까지, 법을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잊기를 기갈 든 사람보다 더하게 했다. 경황 중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고 정신없이 말하는 일이 없었으며 온 방안을 말끔히 하고 고요함을 즐겼다. 선사가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납자로서 안으로 고명하고 원대한 식견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좋은 도반이 없다면, 그런 중에 그릇이 될 사람은 거의 없다.'

아! 두 분 스승이야말로 천년토록 후배들의 아름다운 모범이 될 것이다."

「여서선서 (여서선서)」

88. 어머니의 충고 / 석총 법공 (석창법공) 선사

석총 법공 (석창법공:1102~1181, 조동종) 선사는 도행이 뛰어나고 재주와 역량이 대단했다. 오랫동안 천동사 (천동사) 의 굉지 (굉지정각) 선사에게 귀의하여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보며 지냈다.

하루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인사드렸는데 어머니가 말하였다.

ꡒ네가 행각하는 것은 본래 생사를 해결해서 부모를 제도하기 위함이었는데,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맡아보고 있구나. 어쨌든 인과를 밝히지 못한다면 그 화가 지하에 있는 나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법공선사가 말하였다.

ꡒ저는 절 재산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속임이 없습니다. 등불 하나까지도 피차의 용도를 분명히 하고 있으니 염려마십시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ꡒ물 건너가는 데 발이 젖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운록 (이운록)」

89. 불교의 효 (효)

태산(태산) 과 화산(화산) 도 편편하게 할 수 있고 음식은 안 먹을 수도 있지만 효도는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큰 효도는 천지 일월과 같아서 운행을 쉬지 않는다.

대계 (대계) 에 ꡒ부모와 스승 〔사승〕 께 효순하라" 하여 효를 승려의 계율로 이름지웠으니, 효를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머리깎고 삼보 속에 속한 우리들은 빈부귀천을 물을 것 없이 반드시 도를 숭상하고 효를 숭상해야 한다. 물어보아서 부모를 봉양할 친속이 없으면 부처님은 의발의 한 부분을 덜어 봉양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러니 몸소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자는 우리 불교 집안 사람이 아니다. 「총림공론 (총림공론)」

90. 유교의 장부, 불교의 장부 / 목암 유붕 (목암유붕) 법사

목암 유붕 (목암유붕) 법사는 무주(무주) 금화(김화) 사람이다. 거계 경 (차계택경:?~1108) 법사를 찾아 뵙고 생사대사를 밝힌 뒤, 여러번 큰 절의 주지가 되니 학인들이 뒤질세라 모여들었다. 법사는 강론할 때마다 미리 주석서를 읽어보는 일이 없었고, 시자에게 주제를 뽑으라 하여 선 자리에서 술술술 막힘없이 설명하였다.

한번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ꡒ내가 문도들을 지도한 이래 마하지관 (마결관) 을 일곱번 논강하였는데, 정작 정수 (정수) 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입을 열어 한 일이 없다."

또 말하였다.

ꡓ나는 대부(대부)의 경론 가운데서 조그만한 문제를 내려할 때도 종이쪽지 만한 정도의 글도 만들 수 없다. 이것을 일러ꡐ문자의 성품을 여읜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년에는 명주 (명주) 연경사 (연경사) 에 주지하였다. 하루는 법좌에 올라 ꡐ조어장부 (조영장부) '에 대해 강을 하는데 홀연히 몇 사람의 사대부가 찾아와 법사의 법문을 들었다. 법사가 말하였다.

ꡒ유교 (유교) 의 장부를 논할 것 같으면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사는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에 큰 일을 이루고 희대의 명성을 얻게 되며 마침내는 명리와 성색에 빠지지 않으니, 이런 사람을 장부라 한다. 그러나 우리 불교 (불교) 에 있어서는 일심3관 (일심삼관:천태지관의 관법, 공관 가관 중관) 으로 나룻배를 삼고 5회 (오회:예불, 참회, 권청, 수희, 회향을 하는 행법) 로 노를 삼아 모든 마군을 항복시키고 외도를 누르는 자를 장부라 이름한다."

사대부들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며 떠났다. 「임분론 (림보론)」

91. 천태의도가 사명 (사명) 존자 때문에 망할 것이다 /무외 구 (무외구) 법사

무외 구 (무외법구:?~1163) 법사는 여조 (여) 사람이다. 혜각 옥 (혜각옥) 스님에게 귀의하여 종지를 얻고 훗날 두루 선법회를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언젠가는 경산 (경산) 불일 (불일;대혜) 선사의 방장실에 간 적이 있었다. 불일선사는 밤에 앉을 때면 반드시 법사를 불러 천태 (천태) 의 이론과 능엄경 (방엄경) 의 요지를 설하라고 명하고는 깊이 대우를 하였다.

세상에 나가 청수사 (청수사) 에 주지하니 학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법사는 후생들이 독방을 쓰면서 멋대로 할까봐 근심하여 방을 헐어 대중방을 만들었다. 또한 깨끗한 책상과 밝은 창문․이불․선판 (선판) 등이 물을 뿌린 듯 깨끗하여 옛 총림의 풍모가 있었다. 법사는 강론하던 차에 학인이 글귀에 집착하여 틀린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ꡒ천태의 도는 사명 (사명지예:960~1028) 존자에 의해서 흥했으나 또한 사명존자 때문에 망할 것이다. 성인이 다시 나오지 않고는 누가 이것을 지켜줄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법사가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법사는 타고난 성품이 지혜롭고 예리하였으며 물 흐르듯한 논변과 위엄있는 행동으로 사람들과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평생을 사귀어 온 사람도 법사에게서 기쁜 얼굴이나 노여워하는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법사는 낮에는 7경 (칠경) 을 공부하고 밤이면 좌선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으며, 무외암 (무외암) 을 짓고 노년을 거기서 보냈다. 「탑명 (탑명)」

92. 대혜 (대혜) 선사와 굉지 (굉지) 선사

소흥 계해 (소흥계해:1143) 년 겨울에 대혜 (대혜종고:1091~1157, 조동종) 선사가 왕은 (왕은) 을 입어 북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형양에서 유배생활을 했었다) . 마침 육왕사 (육왕사) 에 주지자리가 비어 있어서 굉지 (굉지정각) 선사가 그곳 주지로 천거하였다. 굉지선사는 대혜선사가 오게 되면 대중이 많아져 반드시 식량이 바닥날 것을 미리 알고 소임자에게 이렇게 일렀다.

ꡒ그대는 나를 위해 한해 예산을 서둘러 준비하고 향적 (향적:창고) 의 일용품은 모두 두 배를 비축해 두도록 하라."

소임자는 분부대로 하였다. 이듬해 과연 대혜선사가 오니 대중이 천 명을 넘어 얼마 안되서 창고가 바닥이 났다. 그리하여 대중은 갈팡질팡하고 대혜선사도 어쩔줄 몰라 했다. 이에 굉지선사가 쌓아 두었던 물건을 모조리 꺼내서 도와주니 모든 대중이 구제를 받았다. 대혜선사는 굉지선사를 찾아가 ꡒ고불 (고불) 이 아니면 어떻게 이와 같은 역량이 있겠습니까?" 하며 감사하였다.

하루는 대혜선사가 굉지선사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ꡒ우리 두 사람 다 늙었소. 그대가 부르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부르면 그대가 대답하다가 하루아침 먼저 갑자기 죽는 사람이 있게 되면 남아 있는 사람이 장례를 치뤄 주도록 합시다."

그 이듬해 굉지선사가 입적하니 대혜선사가 마침내 상을 주관하여 그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설총잡기 (설창잡기)」

93. 조그만치의 게으름도 용납않다 / 원각사 자 (자) 법사

원각사 (원각사) 의 자 (자:원각 온다) 법사는 이론과 수행을 겸비한 사람으로 학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액사 (동사) 에 주지자리가 비어 있어 능 (능) 법사와 문 (문) 법사 두 사람이 주지로 천거하여 자법사가 그곳으로 가자 법석이 크게 성하였다. 몹시 더운 여름에 강론을 마치고 방장으로 돌아와 누워서 쉬고 있는데 마침 문법사가 찾아와 말하였다.

ꡒ동액사 도량은 대대로 도가 높은 사람이 주지해 왔소. 강을 마치고 나서는 참실 (참실) 에 있지 않으면 선당 (선당) 에 있었지 누워서 멋대로 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소."

자법사가 듣고는 ꡒ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 뒤로는 아주 추운 겨울이나 아주 더운 여름이나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초암록 (초암록)」

94. 관음보살의 응화 / 마조 (마조) 선사

남악 양 (남악회양) 스님이 육조를 찾아뵈었을 때 육조가 반야다라 (반야다나:?~457 중인도 스님) 의 예언을 소개하면, 그대 (회양) 의 한 가닥 불법이 그대 곁에서 떠나면 이 다음에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서 천하 사람들을 밟아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마조 (마조도일) 선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마조선사가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으므로 세상사람들이 그를 관음보살의 응화라고 하였으며 그가 주지하는 절은 모두 왕이나 대신들이 바친 것이었다.

그곳에 20년 동안 원주를 맡아 오던 사람이 있었는데 절 살림을 관리하면서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관리가 조사를 하는 통에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ꡒ우리 스님은 범부인지 성인인지 모르겠다. 20년을 그를 도왔는데 오늘날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게 되다니…"라고 생각하였다. 마조선사는 절 안에서 그 일을 알고 시자에게 향을 사르게 한 다음 단정히 정 (정) 에 들었다. 그러자 원주는 옥중에서 홀연히 마음이 열려 20년 동안 써온 돈과 물건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기에게 명하여 입으로 말하는 것을 받아 적게 하니 계산이 틀림없었다. 「통명집 (통명집)」

95. 말세의 본보기가 될 만한 자비 / 고암 (고암) 선사

설당 행 (설당도행:1089~1151, 임제종 양기파) 스님이 말하였다.

ꡒ고암 (고암선오:1074~1132) 스님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곧으며 매사에 법도가 있었다. 자기에게는 검소하였지만 남에게는 넉넉하여 누가 병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여겼다. 심지어 종이나 마부에 이르기까지 몸소 찾아가 문병하고 그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들이 죽게 되면 돈이 있건 없건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주었으니 그 깊은 자비와 사랑은 참으로 말세의 좋은 본보기다." 「이운록 (이운록)」

96. 참선의 기쁨 황태사 (황태사)

황태사 (황태사:정견) 가 호소급 (호소급:호직) 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ꡒ공 (공) 은 제법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는 처방으로는 참선의 기쁨 〔선열〕 을 깊이 맛보아 생사의 뿌리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고나면 기쁨․성냄․근심 같은 것은 발 붙일 곳이 없게 됩니다. 병의 뿌리가 없어지면 가지나 잎새로는 사람을 해칠 수가 없습니다. 투자 총 (투자보총) 과 해회 연 (해회종연) 스님도 모두 도행이 높고 깊어 옛 사람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분들입니다. 만일 그대가 문장 잘하는 선비들과 다니며 헛된 말이나 꾸밈말을 배운다면 그저 지견 (지견) 만 늘릴 뿐, 자기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매계집 (매계집)」

97. 죽은 고양이를 팔다 / 간당기 (기) 선사

간당 기 (간당행기) 선사는 태주 (태주) 선거현 (선거현) 사람으로 양씨 (양씨) 집안의 자손이다. 풍채가 남달랐으며 재주는 유림 (유림) 을 압도하였다. 스물다섯에 처자를 버리고 출세간법을 배웠는데, 늦게 차암 원 (차암경원) 선사를 만나 남모르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세상에 나와 완산사 (완산사) 에 주지하였는데 산전을 갈아 화전을 일구면서 17년을 혼자 살았다. 그때 게송을 하나 지었다.

질화로에는 불티 하나 없고

객승의 바랑은 텅 비었는데

저무는 해에 눈은 버들꽃처럼 내리는구나

동강난 삼오라기를 주워 누더기를 꿰매면서도

내 몸이 쓸쓸한 데 있는지를 모르겠구나.

지노무화객♠공 설소양화낙세궁

십득단마천괴납 불지신재적료중

선사는 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ꡒ나는 아직도 모자라는 점이 있는데 어떻게 주지하는 일로 내 본분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도에 대한 마음이 대중 속에 있을 때 보다 조금도 덜함이 없었으며 조금도 그만두는 일이 없이 밤낮으로 참구하였다.

하루는 우연히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나무가 땅에 자빠지는 것을 보고 홀연히 크게 깨쳐 평소 가슴에 막혀 있던 것이 어름 녹듯 녹아 없어졌다.

얼마 있다가 강주 (강주) 원통사 (원통사) 에 주지를 맡으라는 명이 있자 선사는 자신의 도가 이제 세상에 펼쳐지려 한다며 즐거이 주장자를 끌고 떠나가서 법좌에 올라가 설법하였다.

ꡒ나는 여기서 약방을 연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은 고양이를 팔 뿐이다. 몇 사람이나 사량분별하지 않는 사람이 나와 이 독약을 먹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릴지 모르겠다."

「대동십유 (대동십유)」

98. 본분사와 주지살이 / 은산 (은산) 선사

은산 (은산) 선사가 영공 (영공) 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ꡒ사문이 고상한 것은 부처님의 큰 자비 덕분인데 후세에 와서 시끄러워진 것은 스스로가 비천하게 굴기 때문이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산속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데 그 모양이 마치 천태산 바위동굴과 다를 바가 없고, 빈번히 왕공재상들 앞에 가서 꼽추처럼 등을 구부리고 아첨을 하니 뜻있는 사람이라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년에 와서는 똥불에 산감자를 구워 먹고 살면서 사신이 와도 일어나 인사하지 않았던 옛 분의 풍모는 아예 볼 수 없거니와 황소를 타고 다닌 유정 (유정) 스님이나 지암주 (위암주) 같은 사람 한분을 찾기가 마치 땅을 파면서 하늘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되고 있다."

99. 밤마다 관 (관) 에 들어갔다가 / 오자재 (오자재)

소흥 13 (소흥:1143) 년 좌수직랑 (좌수직랑) 인 첨숙의 (첨숙의) 가 재부 (재부:세금 등 국고수입) 에 의견서를 올려 주지가 되려는 이에게 도첩을 팔자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소흥 32년까지 이 의견대로 도첩을 팔아 왔는데, 시랑 (시랑) 오자재 (오자재) 가 진정서를 올려 도첩을 나누어 팔도록 허가받자 그것은 부처를 팔아 복을 받으려는 짓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오자재는 관직을 그만두고 바위산으로 돌아가 선상에 앉아 경과 선을 음미하며 자족하였고 구름과 물을 감상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그리고는 관을 하나 만들어서 밤이면 그 속에 누워 자다가 날이 밝으려 하면 두어명의 동자를 시켜 관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ꡒ오자재는 돌아가라! 삼계는 어디고 불안하여 살 만한 곳이 없으나 서방정토에는 연화대가 있다." 오자재는 듣자마자 일어나 참선과 독송을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계속 정진하였다. 임종 때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ꡒ너희들은 들었느냐?" 하니 집안사람들은 아무것도 못들었다고 하였다. 오자재가 ꡒ너희들은 생각을 거두고 들어보라" 하니 이때 모든 사람들은 공중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하늘음악을 들었다. 이에 오자재가 말하였다. ꡒ나는 청정세계에 살다가 생각 〔념〕 을 잃어버려서 이곳에 왔었는데 금으로 된 좌대가 도착했으니 이제 가겠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자 임종하였다. 「설총기 (설기)」

 

100. 형 (형) 에게 음식값을 받다 / 적실 광 (적실 광) 선사

적실 광 (적실혜광:운문종) 선사가 영은사 (영은사) 주지로 있을 때였다. 그의 형이 찾아갔는데 차만 끓여주고는 물러가 버리니 형이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소임맡은 이가 창고방으로 맞아들여 음식을 잘 대접하였는데, 혜광선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ꡒ음식을 대접받으면 뒷날 나에게 누가 되는 일이 있다"하고는 형에게 대접받은 만큼 채워놓고 떠나게 하였다. 「정강필어 (정강필어)」

101. 참선과 법문으로 밥을 삼다 / 장령 탁 (장영 탁) 선사

장령탁 (장영수탁:1065~1123, 임제종 황룡파) 선사는 무시 (무시개:1080~1148) 선사를 입승 (립승:선원생활의 책임자) 으로 임명하여 법석을 엄숙하게 하였다. 부엌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직 참선으로 공양을 대신하고 야참법문으로 저녁공양을 대신하게 하니 납자들 중에는 이런 생활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무시선사가 수탁선사에게 아뢰었다.

ꡒ사람이란 먹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해서야 대중이 편안하겠습니까?"

수탁선사가 노여워하며 말하였다.

ꡒ당돌하고도 경솔하구나!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러자 무시선사는 ꡒ먹는 일에 관해서라면 제가 아니면 누가 따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자항소참 (자항소삼)」

102. 불조선사에게 보낸 글 / 효종(효종) 황제

효종 (효종) 이 불조 (불조덕광:1121~1203) 선사에게 손수 써 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ꡒ선사께서 말씀하신 보살10지 (보살십지) 란 수행해나가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니, 범부에서 성인의 경지에 들어감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실다운 경지를 몸소 밟아 하루 스물네시간 한번도 끊어지는 적 없이 완전하게 익어진 경지에 이르면 더러움과 깨끗함이 모두 장애가 되고, 작지임멸 (작결임멸)*이 다 병통 〔선병〕 이 되는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신대로 항상 마음의 칼을 휘둘러 등뼈를 곧추세우고 발심정진을 해도 오히려 물러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면 늘 조심스러워 한번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속인들은 선을 허공에 뜬 것이라 생각하고 교학을 희론으로 생각하니 그들은 이토록 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큰 일을 어찌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저 내 생각을 적어볼 뿐입니다."

103. 제자들에게 내린 훈시 / 자항 박 (자항 박) 선사

자항박 (자항료박:임제종 황룡파) 선사는 복주 (복주) 사람이다. 명문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홀연히 허깨비같은 뜬 세상이 싫어 몸을 빼내 출가하였다. 선사가 계를 받을 때 몸과 마음이 공중에 뜬 것처럼 가볍고 편안해지니 계를 내리는 스님이ꡐ그대는 참으로 가장 높은 묘계 〔상품묘계〕 를 얻었다ꡑ고 하였다. 이때부터 종신토록 매우 엄하게 계를 지켰다.

20년 동안 천동사 (천동사) 에 주지하면서 하루도 대중과 따로 공양을 한 일이 없고 병에 걸렸을 때도 이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스스로는 몹시 검소하게 지냈으나 대중들에게는 지극히 넉넉하게 대했다. 선사에게 제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창고 소임 〔지고〕 을 맡아보다가 일을 끝내고 돌아와 선사에게 절하고 말하였다.

ꡒ제가 힘을 다해 경영해서 돈을 굴려 배나 이득을 보았는데 감히 제 것으로 하지 않고 절 재산으로 넣으려 합니다."

그러자 선사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ꡒ네가 벌어들인 것은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얻은 것이며, 절 재산은 깨끗한 재산이다. 어찌 의롭지 못한 너의 물건을 받아들이겠느냐."

그리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그 스님을 쫓아내버렸다.

선사는 동자승이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으면 그들을 모두 사미들의 거처 〔사이료〕 에 보내 계단 (계단) 에 올라가 계를 받는 의식절차부터 익히게 하고 유교경 (유교경) 을 외우게 하고 나서야 구족계를 주었다. 구속계를 받으면 모두 새로 계받은 이들의 거처 (신계료) 에 들여 보내 승복 세벌과 발우 하나를 받아 지니도록 하고, 밤이면 좌구를 펴고 오조가사를 덮고 자게 하였다. 그리고는 계경 (계경) 잘 외우는 스님 하나를 청해 그들에게 계경을 가르치도록 하여 통달하여 외울 때가 되면 비로소 선방에서 참구하는 것을 허락하고 이삼년 하안거를 지내고 나야 비로소 절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제방에 행각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사는 언제나 미간에 기쁜 기색을 보이며 기꺼워 하였다. 그리고는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길을 독촉해 보냈다.

한번은 그의 문도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ꡒ예전에는 스님이 되려하면 조정에서 시험을 치루어 도첩을 얻게 하였다. 그래서 발심해서 승려가 된 사람들이 모두 영특하고 수행이 높았으며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법이 엷어져서 이름만 있지 알맹이는 없어졌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이면 승복을 입고 돈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부처를 팔아 이득을 본다. 탐욕스런 위선자들이 많이 나와 못하는 일 없이 나쁜 짓을 하다가 하루 아침에 승려의 무리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평생 쓸 만큼이 다 마련되었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사욕을 극복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인과를 무시해버리고 세월을 허송하며 신도들의 시주만 부질없이 없앤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출가의 본뜻 〔정인〕 을 잊고 불법의 인과를 모르며, 3승 12분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체법이 모두 공한 이치를 통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하고 깨치지 못한 것을 깨쳤다하여 귀족이나 권세가에게 아첨하면서 세상일에만 신경쓴다. 법을 위하는 마음이나 몸가짐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로지 탐욕과 성내는 마음으로 허물만 짓는다. 이러한 무리들이 우리 법에 들어와 불법을 무너뜨리니 매우 해로운 일이다. 부처님 말씀에, 사자의 몸 속에 있는 벌레가 사자의 살을 파먹는 것과 같아서 외도나 천마가 불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이미 바른 생각으로 출가하였고 바른 생각으로 승려가 되었으니 반드시 마도를 멀리 떠나 불도의 계를 지키고 따라야 한다. 만일 도를 통한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런 데다 마음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오랜 겁부터 지금까지 심식 (심식) 이 어둡고 전도되었으니 어찌하랴. 처음 승려가 되었을 때부터 세벌 법복과 발우 하나와 갖가지 계율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도에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마치 성질이 거친 코끼리나 말은 길을 들일 수 없다가 갖가지 모진 고통을 주면 비로소 길이 들어 엎드리는 것과 같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뒷날 3악도의 고통이 겹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무시 (무시개:1080~1148) 선사의 회중에 있을 때 새벽이면 언제나 선사에게 법을 물었다. 선사가 스님네들에게 훈계하면 나도 꼭 가서 들었는데, 입이 쓰도록 대중을 위하는 말씀을 듣자면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이 흘렀다. 무시선사의 문하에 들어와 그가 해주는 법문을 듣고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절집에서 늙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진땀이 나며 기가 죽는다. 그것은 아마도 이 노스님이 평생을 진실하게 지내온 데다가 수행과 설법이 모두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선사는 40여 년을 때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고 옷과 발우를 쌓아두지 않았으며 몸을 지키는 세세한 행동까지도 모두 계율을 따랐다. 그랬기 때문에 선사가 가서 주지하는 곳은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빛을 움직이지 않고도 자연히 법석이 조용하고 엄숙하여 제방에서는 그를 「철면 (철면) '이라고 불렀다. 너희들은 불제자가 되었으니 분발심을 내서 옛분을 흠모하고, 그분들의 말씀대로 수행을 세워 비열하고 저속한 곳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무시선사가 언제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불법을 이끌어가는 사람으로서 방편으로 그대들을 가르쳐 마음을 다스려 도를 닦게 하지 못하고 뒷날 그대들이 무지로 해서 죄를 짓게 되면 이 노승도 그대들과 함께 고통받는 일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대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니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나의 허물이 아니다. 듣지 못했느냐?

양 (양) 선사란 사람은 정주 (분주) 사람으로 양기 (양기방회) 선사의 회하에 있었던 큰스님이다. 이 분에게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계율을 범해서 죽을 무렵에 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스승에게 한을 품고 하는 말이 모든 것이 스승께서 나에게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꿈꾼 이야기를 양선사에게 알렸으나 그는 믿지 않았다.

당시 용도각 (룡도각) 의 덕점 (덕점) 서희 (서희) 가 평민으로 있을 때였는데 양선사를 찾아가 법을 묻곤 하였다. 그가 잠깐 꿈을 꾸니 어느 관청에 들어갔는데 무기를 든 병졸들이 양쪽에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뜰 아래 양선사가 앉아 있고 졸개귀신들이 방아공이로 그의 등을 때리는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온통 진동하였다. 다시보니 그의 제자가 결박을 당하고 목칼을 쓴 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덕점이 문지기에게 스님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ꡐ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의 스승인데 스승이 평소에 제자를 잘못 가르쳐서 마음대로 파계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므로 스승의 죄가 특히 무거운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살아서 받는 과보이지만 7일 뒤에 제자와 함께 무간지옥에 떨어지면 그땐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서희가 꿈에서 깨어나 양선사에게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양선사는, 이 며칠 동안 등허리가 마치 무엇으로 두드려 맞는 것처럼 아픈데 약을 써도 낫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과연 7일 만에 죽었다. 이에 서희는 주먹만한 큰 글씨로 분녕 (보령) 지방 모든 절 벽에다가 이 사실을 써 붙였다." 「소희간광효초선사방우천동행당벽 (소희간광효초선사방우천동행당벽)」

104. 선종과 교종의 화합 / 초암록 (초암록)

법지존자 (법지존자:960~1028) 는 학식과 수행이 뛰어난 분이었다. 그가 지은 모든 저술은 종지를 세우고 삿된 이론을 물리쳤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어 진실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다. 존자가 한번은 핵심되는 법문을 뽑아서 책을 만들었는데, 완성되자 설두현 (설두중현:980~1052) 선사가 그것을 가지고 산을 나와서 재를 올려 축하하였다. 이어서 다회 (차회) 를 열고 방을 써붙여 그 일을 찬미하였다. 이렇게 예전에는 선과 교가 하나가 되어 서로 그 분위기나 취향을 존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과 교가 서로를 헐뜯고 매몰시키려는 지금과는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초암록 (초암록)」

105. 황룡 심 (심) 선사의 행적

황룡 심 (황룡조심: 회당조심, 1025~1100) 선사는 남웅 (남웅) 사람이다. 유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열아홉살에 눈이 멀어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자 홀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행각하면서 남 (황룡혜남) 선사를 찾아뵈었는데 비록 이 일을 깊이 믿기는 하였으나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하직을 하고 운봉 (운봉문열) 선사의 회하에 갔는데 운봉선사가 세상을 떠나자 석상 (석상초원) 선사에게 가서 머물렀다. 거기서 전등록 (전등록) 을 보다가 한 스님이 다복 (다복) 선사에게 묻는 것을 읽었다.

ꡒ무엇이 다복의 한 줄기 대 (죽) 입니까?"

ꡒ한두 줄기는 비스듬하다."

ꡒ잘 모르겠습니다."

ꡒ서너 줄기는 굽었다."

선사는 이 대목에서 문득 두 분 선사의 면목을 보게 되었다.

그 길로 혜남선사에게 돌아와 제자의 예를 올리고는 좌구를 펴고 앉자 혜남선사가 ꡒ그대는 내 방에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선사도 역시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응수하였다. ꡒ큰 일이란 본래 이런 것인데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십니까?"

ꡒ만일 네가 깊이 참구해서 마음 쓸 곳 없는 경지까지 가게 하고, 거기서 스스로 보고 스스로 긍정하도록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너를 매몰시키는 것이다."

마침 혜남선사가 입적하자 스님들과 신도들이 선사에게 그 뒤를 이어달라고 청하였고, 사방에서 귀의하여 혜남선사가 있을 때 못지 않았다. 그러나 선사는 진솔함을 숭상해서 일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해서 마침내 주지를 그만두게 되었다. 얼마 안돼서 사사직 (사사직) 이 담주 (담주) 태수가 되어 대위산 (대산) 에 주지자리가 비었다고 선사를 초청하였다. 선사가 세 번이나 사양하자 또 강서 (강서) 의 전운사 (전운사) 인 팽기자 (팽기자) 에게 부탁해서 장사사 (장사사) 를 마다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ꡒ마조나 백장스님 전에는 주지란 것이 없었고, 도인들은 서로 고요하고 한가한 곳을 찾아다녔을 뿐이다. 그 후에도 비록 주지란 제도가 있었으나 왕처럼 존경을 받아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이름을 관가에 걸어 놓고 바로 심부름꾼을 보내 오라가라 하니 이 어찌 다시 할 짓이겠는가."

팽기자가 그대로 전하자 사사직은 다시 편지를 보내 ꡒ한번 만나보고자 할 뿐 감히 주지 일로 서로를 궁색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사방의 공경대부와 사귀는 데 있어서 뜻이 맞으면 천 리라도 가지만 뜻이 맞지 않으면 수십 리밖에 안되는 곳도 가지 않았다. 선사는 불전 (불야) 뿐 아니라 다른 책들을 가지고도 자세히 따져가면서 법문하여, 저마다 공부해 온 것을 바탕으로 욕심을 극복하고 스스로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깨닫게 되면 같은 길로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면 가르칠 것이 없었다. 이 일로 제방에서는 다른 책과 불전을 뒤섞어서는 안된다고 비난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ꡒ견성을 못하면 불조의 비밀한 말씀도 모조리 바깥 책이 되고, 견성을 하면 마구니 설이나 여우 선 〔호선〕 도 불조의 비밀한 말씀이 된다."

이런 까닭에 40년 동안 그의 도풍을 듣고 깨달은 사대부가 많다. 황정견 (황정견:1045~1105) 은 오래 전부터 수기를 받은 일로 큰 법을 맡아볼 만한 사람이었으나 안목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선사의 탑을 찾아와 보고서는 크게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깊은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단단한 옥돌에 글을 새겨 선사가 남기신 아름다운 자취를 공경히 송하였다. 「탑명 (탑명)」

106. 살터를 꿈속에서 미리보다 /천동 각 (천동 각) 선사

굉지 각 (굉지정각:1091~1157) 선사는 습주 (습주) 사람이다. 행각을 나서기 전에 미리 천동사 (천동사) 의 경관을 꿈꾸고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ꡒ우거진 솔밭 길, 깊숙한 문에 갔을 때는 희미한 달, 바야흐로 황혼이었네."

건염 (건염:1127~1130) 연간에 장노사 (장로사) 주지를 그만두고 보타암 (보타암) 의 진헐 (진헐청료) 선사를 찾아가는 길에 천동사에 도착해 보니 그 경관이 꿈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리하여 관청에서 천동사 주지를 맡아 달라고 간곡히 청했으나 굳게 거절하였는데, 뒤에 납자들이 어깨를 비빌 정도로 법좌를 찾아오자 힘써 받아들였다. 30년을 주지하면서 불법을 전하는 일 밖에도 살림살이를 새로 잘 갖추어 항상 천여 명의 대중이 살았다. 공양거리와 필수품이 넉넉하여 가장 부자 절이 되니 납자들은 편안하게 도에만 힘쓸 수 있었다.

선사가 한번은 대중을 위해 걸식을 나갔다. 오월 (오월) 지방 사람들은 그의 교화를 독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돈과 베 등의 시주가 구하지 않아도 모여드니 선사가 여러 시주에게 말하였다.

ꡒ내가 시주를 받는 것은 그대들의 인색한 마음을 깨주려 함이니 나에게만 시주할 것이 아니라 뒷날 작은 절에서 스님이 찾아오면 거기에 시주하기 바란다. 혹은 궁핍한 절을 보거나 노약자 등 딱한 백성을 보거든 옷과 돈을 시주하여 그들을 기쁘게 해 주어라." 선사는 물건을 쌓아두는 일이 없었고 쓰다가 떨어지면 그대로 지냈다.

철괴 (철괴) 라는 습주 (습주) 스님이 있었는데 꼿꼿한 사람이었다.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지 않고 선사의 회하에 묻혀 지냈는데, 1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가 굉지선사의 고향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굉지선사는 기쁘게 찾아가서, 고향사람인데 너무 인정을 끊고 지내는 것이 아니냐며 그를 방장실로 불러들이려 하였다. 그러자 철괴스님은 사양하며 ꡒ내 일도 아직 가리지 못했는데 어찌 고향 예법을 논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하고는 주장자를 끌고 떠나버리니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는 그길로 예전에 진헐스님이 살던 보타암을 찾아가 좌선을 하며 지냈다. 한달 남짓 지나 임종하게 되자 대중을 불러 설법을 하고는 세상을 떠났는데, 다비를 하니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설총지기사 (설창지기사)」

107. 구양수가 만난 노승

구양문충공 (구양문충공:수) 이 숭산 (산) 에 갔을 때였다. 마음 닿는대로 가다가 어느 옛 절에 이르니 경치가 쓸쓸한데 한 노승이 태연히 경을 읽고 있었다. 공이 말을 걸어도 별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공이 물었다.

ꡒ옛 고승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대개가 담소하면서 입적하셨는데 무슨 도리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스님이 대답하였다.

ꡒ정혜 (정혜) 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ꡒ어째서 지금은 그런 인물이 없습니까?"

ꡒ옛 사람은 생각 생각이 정 (정) 에 있었으니 임종이라해서 흩어 〔산〕 질 리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사람은 생각 생각이 산람함 〔산〕 에 있으니 임종에 어떻게 정 (정) 을 얻을 리가 있겠습니까"

문충공은 이 말을 듣고 탄복하였다. 「임간록 (림간록)」

108. 장경보시 발원문 / 풍제천 (풍제천) 거사

풍제천 (풍제천:~1153) 거사가 장경 (장경) 보시를 하면서 발원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ꡒ제가 장경을 시주한 것은 한 가지로 두 가지 시주를 한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장경에다가 돈을 낸 것은 재물보시가 되고, 그 경으로 법을 전하는 것은 법보시가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살펴보건대, 재물보시로는 다음 생에 하늘이나 인간세상에 태어날 복된 과보를 받고, 법보시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 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보가 모두 윤회의 씨앗이며 괴로운 과보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제 발원하오니, 이 두 가지 과보를 회향하여 임종할 때 극락에 왕생하여 그곳을 장엄하게 하여지이다. 연꽃 태 (태) 에서 나와 부처님을 뵙고 그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 (무생법인) 을 깨닫고 물러남이 없는 자리에 올라 보살지위에 들어가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시방세계의 5탁악세에 다시 돌아와 어디든 내 몸을 나타내 불사를 하게 하여지이다. 오늘 재물과 법, 이 두 가지를 보시한 인연으로 관세음보살같이 대자비를 갖추고서 5도 (오도:지옥․아귀․축생․사람․하늘) 에 노닐되, 그 중생의 모습대로 몸을 바꾸어 갖가지 묘한 법문 설하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통의 길을 멀리 여의고 지혜를 얻게 하며, 모든 중생과 더불어 성불하게 되어지이다. 이것이 제가 장경불사를 하면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사경비 (사경비)」

109. 경계하는 글 / 북봉 인 (인) 선사

북봉 인 (배봉종인:1148~1213) 법사는 잠자는 것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

ꡒ불법은 멸해가는데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기르는구나. 그러나 이 냄새나는 몸은 끝내 재가 되고 흙이 되니, 조금이라도 불법을 세우려다가 죽는다면 정말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또 말하였다.

ꡒ다른 사람보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니 행동이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 만일 자기 자신에게 한 점 쓸모도 없다면 비록 천만 가지 경론을 외운다 해도 마치 아난존자와 같을 것이니 무엇이 귀하겠는가."

또 말하였다.

ꡒ한번은 식견있는 사람과 불교집안을 일으키고 빛나게 하려면 주지가 어찌해야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지런히 예불 올리고 재물을 결백하게 쓰며 대중을 위해 일하면 그 뿐입니다.' 나는 이 말이 극진한 도리라고 생각하며 매우 기뻐한다. 만약 식견없는 사람과 이야기 했다면 땀을 흘리며 세상을 쫓아가야 한다고 했을 것이니 그것은 납승 본분의 체통을 잃는 일이다." 「자행록 (자행록)」

110. 묘총(묘총) 비구니의 행적

자수사 (자곤사) 묘총 (묘총:임제종 대혜파) 선사는 소씨 (소씨) 며 원우 (원우:1086~1093) 년간에 승상을 지낸 분의 손녀다. 열다섯살 때 선 (선) 이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몰랐으나,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생은 어디서 오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유독 의심을 냈다. 그 생각만 하다가 홀연히 느낀 바 있었으나 스스로 별것 아니라 여기고, 사람이면 다 그런 줄 알고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부모의 명을 순종하여 서서 (서서) 의 허수원 (허곤원) 에게 시집갔는데 얼마 안돼서 세상살이가 매우 싫어졌다. 재계하고 몸가짐을 깨끗이 함으로써 자족했으며, 나아가 세속 바깥에 높이 노닐고자 하였다. 뜻을 세워 옛사람을 흠모하고 마침내 천엄사 (천엄사) 의 원 (원) 선사를 찾아뵈니 원선사가 물었다.

ꡒ규중의 숙녀가 어떻게 대장부의 일에 끼겠는가?"

ꡒ불법에서 남녀 등의 모습을 나눕니까?"

원선사가 따져물었다.

ꡒ무엇이 부처입니까 하니 마음이 부처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ꡒ오래 전부터 스님의 이름을 들어왔는데 겨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ꡒ덕산스님의 문하에 들어간다면 몽둥이를 맞겠구나."

ꡒ스님께서 만일 그러한 법령을 시행한다면 인천의 공양을 헛받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ꡒ아직 멀었다."

이에 묘총이 손으로 향로 탁자를 한번 때리니 원선사가ꡒ향로 탁자가 있으니 마음대로 치라만, 없었으면 어찌하였겠나?" 하고 물었다.

묘총이 밖으로 나가버리자 원선사가 부르면서 말하였다.

ꡒ그대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이러는가?"

ꡒ밝고 밝게 보니 한 물건도 없다."

ꡒ그 말은 영가 (영권현각) 스님의 말이다."

ꡒ남의 말을 빌어서 내 기분을 나타낸들 무엇이 안될 것이 있습니까?"

ꡒ진짜 사자새끼로구나."

당시 진헐 (진헐청료) 선사가 의흥 (의흥) 에 암자를 짓고 살고 있었는데 묘총선사가 그곳을 찾아갔다. 진헐선사는 선상에 단정히 앉아 있다가 묘총이 문으로 들어서자 물었다.

ꡒ범부인가, 성인인가?"

ꡒ이마에 눈은 무엇 때문에 달려 있소?"

ꡒ직접 대면해서 자기 경계를 드러내 보이면 어떻겠는가?"

묘총이 좌구를 집어들자 진헐선사가 말하였다.

ꡒ이건 묻지 말라."

ꡒ틀렸다."

진헐선사가 대뜸 악! 하고 할 (갈) 을 하자 묘총도 할을 하였다.

묘총은 강절 (강절) 지방의 큰스님들을 거의 다 찾아뵙고 법을 묻다가 허수원 (허곤원) 이 가화 (가화) 태수로 발령이 나서 따라 가게 되었는데, 오직 묘희 (묘희) 선사를 만나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마침 묘희선사가 풍제천 (풍제천) 과 함께 배를 몰고 가화성에 도착하니 묘총이 소식을 듣고 찾아가 절하고 존경을 표하였다. 인사만 했을 뿐인데 묘희선사는 빙제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ꡒ지금 온 도인은 천신도 보고 귀신도 보고 온 사람인데 단지 대장간의 풀무로 담금질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마치 만 섬을 실은 배가 물을 건널 때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뿐인 것과 같다."

풍제천이 껄껄 웃으면서 ꡒ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하십니까?" 하자 대혜스님이 말하였다.

ꡒ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기만 한다면 분명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이튿날 허수원이 묘희선사에게 설법을 명하니 묘희선사가 대중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ꡒ지금 이 가운데는 어떤 경계를 본 사람이 있다. 이 산승은 사람을 간파할 때 마치 관문을 맡아보는 관리와 같아서 누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세금을 가져왔는지 안가져왔는지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자 묘총이 마침내 법호를 지어달라고 하여 묘희선사는 ꡐ무착 (무저)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음 해에 경산 (경산:대혜) 의 법석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하안거를 보냈는데 하루저녁은 좌선을 하다가 홀연히 깨닫고 송을 지었다.

갑자기 본래면목에 부딪히니

온갖 재주가 얼음녹듯, 기와장 무너지듯 했네

달마는 하필 서쪽에서 와가지고

2조의 헛된 삼배를 받았는가

여기에 이걸까 저걸까 물어본다면

좀도둑 한떼거리가 대패했다 하리라.

맥연당저비두 기량빙소와해

달마하필서래 이조왕시삼배

갱문여하야하 일대초기대패

묘희선사가 그 송을 다시 읊어보고서 말하였다.

그대는 이미 산 조사의 뜻을 깨달았으니

단칼에 두쪽내듯 당장에 알아버렸다

기연에 임해서는 하나하나 천진 (천진) 에 맡겨라

세간 출세간에 남고 모자람 없도다

내가 이 게를 지어 증명하니

사성육범이 모두 놀라는구나

놀랄 것 없다

파란눈 오랑캐는 아직 깨닫지 못했느니라.

여기오활조사의 일도량단직하료

림기일일임천진 세출세간무잉소

아작차게위증명 사성육범진경요

휴경요 벽안호아유미효

ꡒ그리하여 묘총은 입실 (입실) 하게 되었는데 대혜선사가 물었다.

지금 온 이 스님은 오직 그대만을 상대하는데 한번 말해 보아라. 노승이 무엇 때문에 그를 인정하지 않았겠느냐?"

ꡒ어찌 저를 의심하십니까?"

대혜선사가 죽비를 들고 말하였다.

ꡒ그대는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ꡒ아이고! 아이고!"

대혜선사가 갑자기 때리자 묘총이 말하였다.

ꡒ스님은 뒷날 사람을 잘못 때렸다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ꡒ때렸으면 그만이지 잘못이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인가?"

ꡒ이 법을 펴는 데 전념하겠습니다."

하루는 묘총이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묘희선사가 물었다.

ꡒ그대가 산을 내려가다가 누가 이곳의 법도를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ꡒ경산에 아직 가보지 않았다면 의심해도 괜찮다고 하겠습니다."

ꡒ경산에 와 본 다음에는 어떤가?"

ꡒ이른 봄은 아직도 춥더라고 말하지요."

ꡒ그렇게 대답한다면 나를 얕보는 것이 아닌가?"

묘총은 귀를 막고 떠나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대중이 그를 칭찬하여 세상에 무착이란 이름이 유명해졌다. 그는 오랜동안 숨어 살다가 마침내 승복을 입었다. 묘총선사는 나이와 덕망이 높았으나 몹시 엄하게 계율을 지켰고 고행과 절도로 스스로를 격려하여 옛 고승의 면모가 있었다. 태수 장안국 (장안국) 이 선사의 도와 덕망을 높이 사서 자수사 (자수사) 주지를 맡아 세상에 나가도록 명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주지를 그만두고 노년을 집에 돌아가서 보냈다. 「투기전 (투기전)」

111. 자인삼매 (자인삼매) 를 얻고 / 도담 (도담) 법사

도담 (도담) 법사는 상주 (상주) 사람으로 선정을 닦던 중 자인삼매 (자인삼매) 를 얻었다. 늘 원숭이와 새들이 꽃과 과일을 공양하니 그들을 위해 계를 주고 설법을 해서 보냈다. 밤이 되어 귀신에게 밥을 줄 때면ꡒ내 밥을 먹고 내 법을 받아 내 도반이 되어라" 하며 축원하였다. 90여 세가 되어서도 사방에서 와서 스승으로 모셨는데, 법을 받은 사람은 모두 신참소년이었다.

법사는 경을 읽을 때면 언제나 향을 사르고 아홉 번 절한 다음, 가부좌한 채 한참을 묵묵히 있은 뒤에야 책을 열였다. 항상 문도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ꡒ성인의 가르침을 엿보는 목적은 종지를 밝히기 위해서이니, 만일 자기를 단정히 해서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어떻게 여래의 경계에 갈 수 있겠는가. 참으로 작은 인연이 아니니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손중익비 (손중익비)」

112. 철공장이 출신 곽도인 (곽도인)

곽도인 (곽도인) 의 집안은 대대로 철공 일을 해왔다. 그는 늘 경덕사 (경덕사) 충 (충) 선사를 찾아뵙곤 하였는데 한번은 충선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ꡒ그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참구하기만 한다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루는 충선사가 상당하여 법문하였다.

ꡒ선악은 뜬구름 같아서 정처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과 같다."

곽도인은 이 말 끝에 홀연히 마음이 열리면서 이때부터 하는 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죽을 때 가서는 친척 친구들과 작별하고 결가부좌를 한 채 게를 짓고 떠났다.

육십삼년을 쇠를 두들겨

밤낮으로 풀무가 쉴새 없었네

오늘 아침 쇠망치를 버리고 나니

붉은 화로가 흰눈이 되었구나.

육십삼연타철 일야선팽불헐

금조방하철추 홍노변성백설 「유설 (류설)」

113. 이암 권 (이암 권) 선사의 행적

이암 권 (이암유권:?~1180, 임제종 양기파) 선사는 임안부 (림안부:강성) 창화현 (창화현) 사람으로 기씨 (기씨) 자손이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무게가 있고 의젓하여 어른 같더니, 14세에 출가하여 불교뿐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통달하고, 무암 전 (무암법전) 선사에게 귀의하였다. 거기서 매우 열심히 공부했는데 하루 해가 저물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ꡒ오늘도 이렇게 시간만 보냈고 내일 공부도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구나!" 하였다.

선사가 대중 속에 있을 때, 사람들과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꼿꼿하게 처신하니 아무도 가까이 하거나 멀리 할 수 없었다. 한번은 밤부터 새벽까지 계속 좌선하는데 죽을 돌리는 사람이 와도 발우 펴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사람이 손으로 건드리자 깨달아 게를 지었다.

칠흑 같은 곤륜이 낚싯대 잡고

낡은 돗대 높이 올리고 쏜살같이 여울 내려가

갈대꽃 그림자 속에서 달구경하다가

눈 먼 거북 당겨올려 배 위에 실었노라.

흑첨곤륜파조간 고범고괘하경홍

로화영리롱명월 인득맹구상조선

무암선사는 기뻐하며 자기와 비슷한 경지라고 하였다.

건도 (건도:1163~1173) 년간에 세상에 나와 만년사 (만연사) 의 주지로 갔다. 그곳에서 공부 많이 한 노스님들도 그의 몸가짐을 보고 그의 법어를 듣고는 모두 팔장을 끼고 심취하였고, 천명안팎의 대중은 질서정연하게 마치 관청에 들어가듯 하였다. 선사가 가는 곳마다 대중과 함께 고생하며 수행하니 상서 (상서) 우포 (우포) 가 말하였다.

ꡒ주지는 편안히 앉아서 법을 설하면 되는데 어째서 몸소 고행까지 하십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ꡒ그렇지 않습니다. 말법의 비구들은 증상만 (증상만) 이 있어서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면서 제멋대로 합니다. 내가 몸소 실천해도 오히려 따라오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감히 스스로 편하려 들 수 있겠습니까?"

근세에 선림의 모범을 말할 때는 반드시 선사를 첫째로 꼽는다. 「행장 (행상)」

114. 부젓가락 하나라도 절 물건은 / 동산 연 (동산연) 선사

동산 연 (동산연) 선사는 하는 일이나 행동이 단정하고 결백하기로 총림에 알려졌다. 선사가 동산사에서 오봉사 (오봉사) 로 옮겨왔을 때였다. 부젓가락을 보니 동산사에서 쓰던 것과 다르지 않아 마침내 종 〔노〕 에게 따져 물었다.

ꡒ이것은 동산사 방장실의 물건이 아니냐?"

ꡒ그렇습니다. 여기나 저기나 절집에서 쓰는 물건이라 이해를 따지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연선사가 타일렀다.

ꡒ무지한 너희들이 인과법에 ꡐ섞어쓰는 죄 〔호용죄〕 '가 있는 줄을 어찌 알겠느냐?"

그리고는 급히 돌려보냈다. 「이운록 (이운록)」

115. 남의 허물을 일러바친 제자를 내쫓다 / 별봉 인 (별봉인) 선사

별봉 인 (별봉보인:1109~1190, 임제종) 선사가 설두산 (설보산) 에 주지할 때였다. 제자 하나가 수좌의 허물을 일러바치자 성을 내면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ꡒ너는 나의 제자로 아래․윗사람들을 감싸줘야 할 처지에 도리어 남의 허물을 이야기 하느냐? 곁에 두었다간 반드시 내 일을 망치겠다."

그리고는 주장자로 때려서 내쫓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명석하냐고 감탄하였다. 「소운잡기 (소운잡기)」

116. 잠시라도 정신이 딴 데 가면 / 단하 순 (란하 순) 선사

단하순 (란하자순:1064~1117, 조동종) 선사는 검주 (검주) 사람이다. 단하산 (란하산) 에 주지할 때 굉지 (굉지정각) 선사가 시자로 있으면서 요사채에서 한 스님과 공안을 따져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 마침 단하선사가 그 방문 앞을 지나갔는데, 밤이 되어 굉지선사가 참문 (삼문) 할 때 단하선사가 물었다.

ꡒ그대는 아까 어째서 크게 웃었는가?"

ꡒ한 스님과 화두를 따져보다가 그의 대답이 너무 서툴러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ꡒ그렇기는 하더라도 그대의 웃음소리 하나에 많은 좋은 일을 잃게 되었다. 옛 말을 듣지 못했느냐? 잠시라도 정신이 구도에 있지 않으면 죽은 사람과 같다 하였다."

굉지선사는 공경히 절하고 승복하였으며 그 후에는 어두운 방 속에 있을 때라도 감히 한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설총기 (설창기)」

117. 죽는 순간에도 정신차리고 / 소각 조 (소각 조) 수좌

성도 (성도) 소각사 (소각사) 의 조수좌 (조수좌) 는 오랜동안 원오 (원오) 선사에게 공부하였다. 방장실에 들어가 ꡐ마음이 부처다'한 말을 묻고, 여기서 깨달은 바 있어 원오스님이 분좌 (분좌) 하도록 명하였다.

하루는 대중을 위해 대중방에 들어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ꡒ생사가 닥쳐오면 어떻게 피하겠느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불자를 집어던지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대중들이 깜짝 놀라 바라보다가 급히 원오선사에게 알리니 원오선사가 와서 ꡒ조수좌!" 하고 불렀다. 조수좌가 다시 눈을 뜨자 원오스님이 ꡒ정신차리고 관문을 뚫어라" 하니 다시 머리를 끄덕끄덕 하고는 드디어 영원히 잠들었다. 「동림안둔암기기사 (동림안둔암기기사)」

118. 불교백척의 결과

한퇴지가 그 자신이 불교를 돕지 않고 배척한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였고, 그것이 구양수 (구양수) 에 와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불법이 우리 중국의 근심거리가 된 지 천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불교에 현혹되지 않고 세상에서 우뚝하게 힘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불교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없어졌다 싶으면 또 모여들고 치면 잠시 깨졌다가 더욱 굳어지고 때리면 없어지기도 전에 더욱 치열해져서 마침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유도 (유도) 를 키우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파괴했으나 사실상 우리 불도를 드날려 준 셈이니 무슨 해가 되었겠는가. 「공론 (공론)」

119. 서왕 (서왕) 의 해박한 불교지식

서왕 (서왕) 이 불혜법천 (불혜법천:운문종, 운거효순의 법제자) 선사에게 물었다.

ꡒ선가에서 말하는 세존의 염화시중은 어느 경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ꡒ대장경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ꡒ내가 얼마 전 한림원 (한림원) 에 있을 때 우연히 「대범왕문불결의경 (대범왕문불결의경)」 3권을 발견하여 읽어 보니, 그 경에 매우 상세하게 이 말이 실려 있었습니다. 범왕이 영산회상에 이르러 부처님께 금색 연꽃을 바치고 몸을 던저 좌석을 만들고는 중생을 위해 설법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세존께서 자리에 오르사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인간 천상의 백만 중생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ꡐ나에게 정법안장 (정법안장) 과 열반묘심 (보반묘심) 이 있는데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나누어 맡기도다' 하셨습니다."

법천스님은 그의 해박한 연구에 탄복하였다. 「매계집 (매계집)」

120. 유위법만 닦다가 화두선을 하다 / 진국 (진국) 부인 법진 (법진) 비구니

진국부인 (진국부인) 계씨 (계씨) 는 법명이 법진 (법진) 이다. 과부가 되고부터는 화장도 안하고 채식을 하고 헌 옷을 입고 지냈으나 유위법 (유위법) 만 익혔지 선 (선) 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경산 대혜선사가 겸 (겸) 선사를 보내 안부를 물었는데, 그의 아들 위공 (위공) 과 준공 (준공) 이 겸선사를 머물게 하고 조사의 도로 그의 어머니를 이끌어주게 하였다. 법진이 하루는 겸선사에게 물었다.

ꡒ경산사 대혜스님은 평소에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십니까?"

ꡒ스님께서는 오직 사람들에게 ꡐ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만을 들게 하십니다. 여기에는 말을 붙여도 안되고 이리저리 헤아려도 안됩니다. 오직 ꡐ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한데 대하여 조주스님이 ꡐ없다'라고 한 말씀만을 들라 하십니다. 오직 이렇게 학인을 가르칠 뿐입니다."

법진은 마침내 크게 믿음이 가서 개 화두 〔구자〕 를 밤낮으로 참구하였다. 한번은 밤중까지 앉아 있다가 갑자기 깨달은 바 있어 당장에 게송 몇 수를 지어 대혜스님에게 보냈는데, 그 맨 마지막 송은 다음과 같다.

종일토록 경문을 읽으니

예전에 알던 사람 만난 듯하네

자주 막히는 곳 있다고 말하지 마라

한 번 볼 때마다 한 번씩 새로워진다.

종일간경문 여봉구식인

막언빈유애 일거일회신 「어록 (어록)」

121. 몸을 잊고 구도하다 / 신광 (신광) 스님

신광 (신광) 은 자주 (자주) 사람으로 마음이 넓고 뜻이 높은 사람이었다. 유학 (유학) 을 하면서 많은 책을 널리 읽었고 현묘한 도리를 잘 논하였는데 한번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ꡒ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법도와 규범에 관한 것이며 불교의 경론도 묘한 도리를 다하지는 못했다. 요즘 듣자니 달마 (달마) 대사가 소림사 (소림사) 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도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거기 가서 현묘한 경계에 도달해야 되겠다."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새벽에서 밤까지 찾아뵈었으나 대사는 단정히 앉아서 벽만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이라고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자 신광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ꡒ옛사람은 도를 구하기 위해 뼈를 두들겨 골수를 냈고 몸을 내던져 게송을 들었다 하니 옛사람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해 12월 9일 밤에는 큰 눈이 내렸다. 신광은 뜰 가운데 서 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까지 쌓이니 달마대사가 가엾게 생각하여 물었다.

ꡒ그대는 눈 속에 서서 무슨 일을 구하느냐?"

신광은 슬픈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ꡒ오직 자비로 감로문을 열어 널리 중생을 제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ꡒ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한 도는 오랜 겁을 부지런히 구해야 한다. 하기 어려운 것을 해내야 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야 하는데 그대는 어찌 작은 덕과 작은 지혜, 경망스런 마음과 오만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을 엿보려 하느냐?"

이에 신광은 가만히 날카로운 칼을 꺼내서 스스로 자기 왼팔을 잘라 스승 앞에 갖다 놓으니 달마는 그의 근기를 알아보고 마침내 말하였다.

ꡒ모든 부처님도 처음 도를 구할 때는 법을 위해 자기 몸을 잊어버렸다. 너도 지금 내 앞에서 팔을 잘랐으니 그 구도심은 옳구나 〔가〕 ."

그리하여 이름을 ꡐ혜가 (혜가) '라고 바꾸게 하였다.

신광이 물었다.

ꡒ모든 부처님의 법인 (법인) 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ꡒ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ꡒ저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스님께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ꡒ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편안케 해주마."

ꡒ마음을 찾아보아도 아무곳에도 없습니다."

ꡒ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다."

신광은 여기서 깨달았다. 「전등 (전등)」

122. 종경록 (종경록) / 영명연수 (영명연곤) 선사

영명연수 (영명연곤:904~976, 법안종) 선사의 조상은 단양 (란양)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가 전란에 휘말려서 오월 (오월) 에 귀순하여 선봉이 되었다가 마침내 전당 (전당) 에 살게 되었다. 선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돌이 되었을 때 부모가 말다툼을 하여 사람들이 말려도 듣지 않자, 선사가 높은 책상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니 양친이 놀라서 안고 울며 말다툼을 그만두었다.

커서는 유생이 되었는데 34세에 용책사 (룡책사) 로 가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고행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아침에는 대중들에게 공양하고 저녁이면 선을 익혔다. 이어 태주 (태주) 천주봉 (천주봉) 에 가서 90일 동안 선정을 익혔는데 종달새가 옷에다가 둥지를 쳤다.

천태 덕소 (천태덕소) 국사를 뵈오니, 국사는 한번에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만히 깊은 종지를 전해주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그대는 원 (원) 선사와 인연이 있으니 뒷날 불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처음에는 명주 (명주) 자성사 (자성사) 에 주지하다가 건륭 (건륭) 원년 (960) 에 오월 (오월) 충의왕 (충의왕) 의 청으로 영은 (영은) 의 새로 지은 절에 머무니 그 절의 첫번째 주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청을 받아 영명사 (영명사) 도량을 주지하니 대중이 2천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두타행을 잘 닦아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이었는데 선사는 왕에게 아뢰어 도첩을 받게 하고 삭발하고 먹물옷을 입혀 주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ꡒ무엇이 영명의 종지입니까?"

ꡒ영명의 종지를 알고 싶은가. 서호 (서호) 의 물이니, 해가 뜨면 빛이 나고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인다."

또 한 스님이 물었다.

ꡒ제가 오랫동안 영명도량에 있었으나 어찌하여 영명의 가풍을 알지 못합니까?"

ꡒ알지 못하는 곳을 알아라."

ꡒ알지 못하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ꡒ소의 뱃속에서 코끼리 새끼가 태어나고 푸른 바다에 티끌 먼지가 일어난다."

개보 (개보) 7년 (974) 에 주지를 그만두고 화정봉 (화정봉) 으로 돌아가면서 송을 지었다.

목마르면 물 반국자 떠 마시고

배고프면 솔잎 한 입 따 먹으며

가슴속에는 한가지 일도 없어

높이 백운봉에 누웠노라.

갈음반국수 기찬일구송

흉중무일사 고저백운봉

우연히 「화엄경」을 읽다가 ꡒ만일 보살이 큰 원력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보살의 마장 〔마사〕 이다" 한 대목에서 마침내 「대승비지원문 (대승비지원문)」 을 지어 미혹한 뭇중생들을 대신해서 날마다 한 번씩 발원하였다. 국청사 (국청사) 에서 참회법을 닦고 있을 때, 밤중에 절을 돌아보다가 보현보살상 앞에 공양한 연꽃이 홀연히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일생동안 꽃을 뿌리는 공양을 하였다. 또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입에 부어주는 감응을 받고 설법하는 재주 〔대변재〕 를 얻게 되어「종경록 (종경록)」 100권을 저술하였다.

적음 (적종:혜홍각범) 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ꡒ내가 이 책을 깊이 읽어보니 방등부 계통의 경전을 누비며 넘나든 것이 60종이었으며, 중국과 외국 성현의 말씀을 관통해서 논한 것이 3백가 (가) 였다. 천태종 (천태종) 과 화엄종 (화엄종) 의 핵심을 알았고 유식 (유식) 을 깊이있게 논하였으며, 세 종파의 다른 이치를 대략 분석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의문이 마구 생기면 깊은 뜻을 낚고 먼 뜻을 길렀으며, 어두운 점을 쪼개고 파헤칠 때는 치우치고 삿된 견해를 쓸어버렸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자기 마음을 활짝 깨우쳐 성불하는 으뜸이며 달마가 서쪽에서 온, 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뜻을 분명히 알려준다."

선사가 입적하고 나서도 총림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희령 (7령:1068~1077) 연간에 원조 (원조) 선사가 비로소 이 책을 들고 나와 널리 대중에게 알렸다.

ꡒ예전에 이 보살께서는 스승없이 터득하는 지혜 〔무사지〕 와 저절로 터득하는 지혜 〔자연지〕 를 숨기고 오로지 보통지혜만을 써서 모든 종파의 강사들에게 서로 질문공세를 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심종 (심종) 의 저울대를 가지고 그들의 이치를 고르게 달았으니 그 정묘한 극치는 가히 마음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이로부터 납자들이 다투어 그 책을 전하고 읽게 되었다.

원우 (원우:1086~1093) 연간에 보각조심 (보각조심) 선사는 그때 이미 나이가 많았으나 손에서 이 책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ꡒ나는 이 책을 늦게야 보게 된 것이 한스럽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글과 노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이치가 그 속에 다 모여 있다."

그리고는 그 요점만을 골라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 「명추회요 (명추회요)」라고 이름지으니 세상에 널리 퍼졌다. 후세에 이 두 분 노스님이 없었다면 총림은 숭상할 바가 없었을 것이다. 오래된 학인은 날로 속스럽고 게을러져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늦게 온 사람은 날로 숨이 막혀 공연히 근거없는 말만 할 뿐일 것이니 무엇으로 이 책을 알 것이며 그 뜻을 논하고 음미할 수 있겠는가.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조사의 교외별전이거니 불립문자거니라고만 생각할 것이니 어찌 문자의 속까지를 찌를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은 달마 이전 마명 (마명) 과 용수 (룡수) 도 역시 조사였으나 논을 쓸 때는 백가지 경의 이치를 아울렀고, 광범위하게 보려 할 때는 용궁의 책까지도 빌려다 보았으며 달마 이후에 관음대적 (관종대적:마조도일) ․백장회해 (백장회해) ․황벽 희운 (황수희운) 같은 분도 역시 조사였지만 모두 3장 (삼장) 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모든 종파들 널리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그 분들의 어록이 모두 남아있어 가져다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달마만을 이야기하는가.

성인의 세상이 멀어질수록 중생의 근기가 낮아져 뜻과 생각이 치우치고 짧다. 도를 배우는 일이 간단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앉아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일은 게을리하면서 침을 흘리며 밥먹는 것만 쳐다보는 것과 같으니 웃을 일이다.

영명선사는 늘 이렇게 발원하였다.

ꡒ널리 발원하옵니다. 시방 모든 학인과 뒤에 오는 현인들이 도는 부자가 되고 몸은 가난하며, 정 (정) 은 성글고 지혜는 빈틈없게 되어지이다. 그리하여 불조의 마음 종지를 펼치고 인간․천상의 안목을 활짝 열게하여 지이다" 「보록등 (보록등)」

 

【주】

*허유와 소부:요 (요) 임금이 허유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하니, 허유는 더럽다 하여 거절하고 영수 (영수) 의 양지쪽에 있는 소부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소부는 귀가 더럽혀졌다 하여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

*달팽이 뿔:장자 (장자) 에 나오는 우화. 달팽이 뿔 위에서 씨국 (씨국) 이 다투어 수만의 희생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로서, 보잘 것 없는 명리나 소유욕을 두고 다툼을 비유한 말이다.

*십과:번역 (찬역) ․해의 (해의) ․명률 (명율) ․감통 (혹통) ․유신 (유신) ․독송 (좌송) ․호법 (호법) ․흥복 (흥복) ․잡과 (잡과) .

*육왕 회련 (1009~1090) :운문종 늑담스님의 법제자. 인종 (인종) 황제의 존경을 받아 왕에게 불법을 설하고 대각 (대각) 이라는 호를 받았다.

*영안 설숭 (1007~1072) :운문종 효총스님의 법제자. 「보교편 (보교편)」을 저술하여 선문 (선문) 의 계통을 밝혔고, 「원교론 (원교론)」을 지어 유불일치 (유불일치) 를 주장하면서 한퇴지의 배불론을 반박하였다.

*영지 원조 (?~116) :율 (율) 과 천태교관을 배워 강론하면서 여러 종파의 학문을 두루 닦았다.

*사삼매 (사삼매) :네 가지 삼매로, 상좌삼매 (상좌삼매) , 상행삼매 (상행삼매) , 반좌반행삼매 (반좌반행삼매) , 비행비좌삼매 (비행비좌삼매) 를 이른다.

*철륜왕 (철륜왕) :전륜성왕의 4위계인 금륜왕 (김륜왕) , 은륜왕 (은륜왕) , 동륜왕 (동륜왕) , 철륜왕 (철륜왕) 중의 마지막.

*오품위 (오품위) :천태종에게 원교 (원교) 의 수행 계위중 십신 (십신) 이 전단계. 오품 제자위 (오품제자위) 라고도 한다.

*원문의 사 (사) 는 묘 (묘) 인 듯하다.

*부차차 (불차차) :굉지정각 (굉지정) 각이 동산 (동산) 오위설 (오위설) 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사차차 (사차차) 중 세번째, 네번째 「차 (차) '는 공 (공:수, 사) 과 위 (위:증, 리) 를 빌어 법상 (법상) 을 설명한다는 뜻.1.차공명위 (차공명위) 2.차위명공 (차위명공) 3.차차부차차 (차차불차차) 4.전초부차차 (¡초불차차) .부차차 (불차차) 는 양쪽을 모두 잊은 제일의제 (제일의체) 를 뜻하며 동산오위 (동산오위) 중 「겸지 (겸지) ' 「겸도 (겸도) '에 해당한다.

*당나라 상국 배휴 (배휴) 가 중 바지를 입고 아가씨 방을 찾아가 걸식한 일이 있다. 【원문주】

*당의 측천무후 (칙천무후) 가 비단도포와 옥대를 만회 (만회) 스님에게 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원문주】

*만자 (만자) 속장경에는 지영 (위령) 으로 되어 있다.

*5품위 또는 5품제자위 (오품제자위) 라고 하여 천태종에서 원교 (원교) 8위 (팔위) 중의 제1위 (제일위) 를 말함.

*마조스님이 상당하였을 때 백장스님이 앞으로 나가 자리를 말아서 거두자 마조스님은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표아:길에서 음악을 켜고 표규 (표규:법패의 일종) 를 부르며 구걸하는 아이.

*일숙각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나오는 구절 ꡐ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 말린 석장이여,양쪽의 쇠고리는 짤랑짤랑 울리는도다.이는 모양을 내려 허트로 지님이 아니요,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받음이로다."

*선자덕성 (선자덕성) :당나라 약산 유엄스님의 제자. 화정에 배를 띄우고 오가는 사람을 건네 주다가 협산 선회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배를 뒤집어 물 속에 자취를 감췄다.

*대혜어록에는 이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ꡒ"매일 방장실에 들어가 ꡐ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 함을 거량하고서, 내가 (대혜) 대답하려고 입만 열면 원오스님은 틀렸다고 하셨다."

*계사 (계사) :고관들의 행차에 길을 인도하는 하급관리.

*왕량 (왕양) 백락 (백락) :옛날에 명마를 잘 알아보던 사람.

*원각경 보안보살장에서 설명하는 네 가지 병통. 작 (작) 은 어떤 목적을 위해 꾸준히 작용하는 것, 지 (결) 는 그 작용을 그치는 것, 임 (임) 은 되는대로 놔두는 것, 멸 (멸) 은 적멸을 추구하는 것.

 

 

 

 

 

 

 

 

인천보감

인천보감   해제 인천보감 (인천보감) 은 세상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일들을 모은 것으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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