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
서(2)
온 서중(무서중)스님은 호구(호구)스님의 8대손으로서 큰 도량에 앉아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승속 모두에게 귀의할 바를 제시해 주었다. 그의 “이회어(이회어)”는 무상거사 송렴(무상거군 송렴:명대 학자)이 서문을 쓴 바 있지만 “산암잡록(산의잡록)”에 대해서는 서문이 없었는데 스님의 큰제자 쌍림사(쌍림사) 주지 현극 정(현극정)선사와 전 남명사 주지 운중 선(래중원)스님이 함께 나를 찾아와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한두 차례 훑어본 후 현극스님과 운중스님에게 말하였다.
”지난 날 “이회어(이회어)”를 읽어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천갈래 강물이 한 근원에서 흐르듯 세찬 문장력을 구사했는지, 어쩌면 그렇게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처럼 번뜩이는 필치를 휘둘렀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다듬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막힘없고 원만하게 써내려갔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가지와 덩쿨을 잘라버려 쓸모없는 말이 없으면서도 구별[정탄:밭두덕〕 을 초월하여 정식(정식)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았는지! 그것은 아마도 참다운 불법에서 흘러나온 문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 저쪽에서 주워 모아 문장을 구사하는 자들과 비교해 보면 어찌 구만리 차이 뿐이겠는가. 그의 말을 통해 그의 깊이를 살펴보면 그는 부처와 보살의 경지에 이른 분이시다. 그러나 후인을 격려하고자 간간이 제창하신 법문은 불법의 요체를 밝히고 자신의 큰일을 끝마치는 것으로 목적을 삼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널리 미쳐줄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 책을 살펴보니,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마을과 시장거리 및 아래로는 산림속에 이르기까지 인물, 행적, 사실, 문장 등을 선하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 옳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 마땅히 이래야 할 곳과 그래서는 안될 곳, 우수하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빠짐없이 써놓고 있다. 이로써 선을 권장하기도 하고 악을 징계하기도 하니, 유학자․불교도․도교인․관리․은거한 선비․늙은이․어린이․부귀한 자․비천한 자․상인․예술가․백정․농사꾼,
그리고 나아가서는 부녀자와 가마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 되었다.
자비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한 치의 땅도 덮어주지 않는 곳이 없고, 불법의 비가 줄기차게 내리면 한 포기 풀잎까지도 적셔주지 않는곳이 없고 해와 달이 동쪽에서 솟아 서쪽으로 기울 때 어두운 거리를 비춰주지 않는 곳이 없으며, 위로는 하늘이 덮어주고 아래로는 땅이 실어주어 모든 생명을 붙잡아 주지 않는 게 없다. 이 책을 지으신 마음도 이와 같아서 대자대비로 일체중생을 가엾게 여기사 많은 방편으로 교묘히 인도하여 삿됨과 망녕됨을 버리고 참다운 지혜에 어둡지 않도록 하니, 차이가 없는 평등이란 이런 것이다. 부처님 같은 스님의 자비가 여기에 있기에 참으로 부처와 보살의 지위에 이른 분이라 한 것이다.
이 책을 한 번 보고서 훌쩍 돈오(돈오)한다면,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하여 무엇이든 권하고 징계하는 데에 이르게 되고, 권하고 징계하지 않는 것이 없는 데에서 다시 권하니 징계하니할 것도 없어진다. 그리하여 바른 길로 말미암아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감으로써 굳어진 습기(습기)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업식(업식)에 매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스님께서 이 책을 편찬하신 깊은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며, 현극스님과 운중스님이 이를 서둘러 간행하고 이를 유포하는 그 마음도 스님의 같은 마음이다.
아! 그저 보통 붓 나가는대로 기록하여 부질없이 견문만을 넓히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여대는 따위의 책들과 이를 견주어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말로서 서문을 가름하는 바이다.
홍무(홍무) 25년(1392) 겨울 10월 24일 무문거사 미산(무문거군 미산)소백형(소백형)서
서(3)
도는 말을 통해 밝혀지고 말은 덕에 의해 전해진다. 그러므로 덕 있는 자의 말은 한 시대 사람에게만 믿음을 줄 뿐 아니라, 후세까지도 의심없이 전해진다.
서중(무온서중:1309~1386)스님은 서암사(서암사)의 일을 그만두고 태백산 암자에 한가히 머물면서 스스로 도를 즐겼다. 쓸쓸한 방에는 물건들이 넉넉하지 못했는데도 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신발이 매일 문 밖을 메웠다. 그들은 밀어내도 가지 않고, 어쩌다가 한 말씀 얻어 들으면 천금처럼 귀중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감로수(감로수)나 제호(제호)를 마신 듯 마음과 눈이 한층 빛났다. 이는 스님께서 평소 여러 큰스님의 문하를 참방하여 보고 들었던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들을 마음 속 깊이 원만히 체득해서 말로 표현하였기에,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자연히 훌륭한 격식을 이룬 것이리라. 총림의 큰스님과 유학의 선각자, 그리고 아래로는 마을의 어린아이들까지 그들을 격려시킬 수 있는 선한 이야기와 그들을 경계시킬 수 있는 악한 이야기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이를 기록하여 “산암잡록(산의잡록)"이라는 책으로 만들어냈다.
취암사 주지로 있는 그의 제자 현극 정공(현극정공)이 이를 간행하면서 멀리 서울까지 찾아와 특별히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나는 읽으면서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태평성대의 말이란 모두 바른 법을 따르므로 거친 말과 부드러운 말이 모두 진리다”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훌륭한 의원이 다루면 모든 초목이 약이 되지만 모르는 자는 손에 약을 쥐고서도 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겠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이 불법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이치에 밝은 자가 이를 얻으면 모두가 세상에 전해지는 가르침이 된다. 덕이 있으면 말을 남기게 된다함은 스님을 두고 이르는 말로서 스님은 약과 병을 잘 아는 자이며, 불법을 잘 말하는 자이다.
나와 스님과는 한 문중이라는 우의가 있으므로 비록 한 차례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명성과 행적은 몇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그가 대중을 감복시킬 만한 덕을 지녔고 세인을 가르칠 만한 말씀을 남겼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을텐데 더구나 이 책의 내용은 모두가 있었던 사실이다. 사실을 통해 이치를 밝히고 가까운 일을 들어 먼 것을 가리키는 법이니, 이 책으로 당세를 유익하게 하고 끝없이 전해주어야 한다.
홍무(홍무) 기사년(1389) 여름 6월 승록사 좌선세(승록사좌선세) 홍도(홍도)서
서(4)
나는 평소 병 많은 몸으로 노년에 일본의 주청(주청)에 관한 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생각해 보니 설령 일본을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겠나 싶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성상폐하께서 나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일본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궁궐에 머물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도 온갖 병들이 끊임없이 나의 몸을 침범하여 세번이나 죽을 뻔 했지만 또한 천행으로 폐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천동사(천동사) 옛절로 돌아가도록 명하시니, 친구들은 내가 마치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반겼다.
내 나이 칠십에 가까운데 만번 죽을 고비를 겪고 다시 한번 삶을 얻게 되었기에, 이제 문을 닫고 모든 인연을 끊은 채 여생을 마칠까 하였는데 법질(법질) 장경중(장경중)이 자주 나의 암자에 찾아와 이렇게 청하였다.
”당․송 시대 큰스님들의 말씀과 저서는 끊이지 않고 간간이 세상에 나왔었는데 원나라부터는 이러한 일이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래 큰스님들의 법문과, 총림의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말씀이나 행실들이 대부분 없어져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총림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여 넓은 견문을 지니셨습니다. 제가 항상 노스님을 모시면서 들은 한두 가지 일만 해도 모두 이제껏 듣지 못했던 이야기로서 저를 더욱 깊이 일깨워주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노스님께서는 그저 유희 삼아[유희삼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위로는 옛 스님의 숨겨진 빛을 나타내시고 아래로는 후학들의 고질병을 벗겨 주신다면 불법문중의 경사가 되리라 믿기에 감히 간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야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내 말은 문장이 될 수 없으니 말을 하되 문장으로 잘 표현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먼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경중은 또다시 말하였다.
”이제 불법은 쇠하고 선배스님들도 거의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때 노스님께서 먼곳에서 돌아오실 줄은 실로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는데, 노스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신다면 장차 누가 이 일을 맡겠습니까? 문장이 잘되고 못되고를 어찌 따지겠습니까? 사실대로 기록하여 그 일을 밝힐 수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바라옵건대 굳이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나는 평소 스승과 도반이 강론했던 법어들과 강호에서 보고 들은 일 가운데 기연(기연)의 문답과 선악의 인과응보, 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낱낱의 처신 등을, 시대의 선후와 인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후배들을 일깨울 수 있는 일이라면 생각나는대로 붓 가는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고 이를 “산암잡록(산의잡록)”이라 이름하였다.
지난 송대(송대)에 큰스님이 편수한, 이른바 “나호야록(나호야록)” “운와기담(운와기담)” 등에 기재된 바는 불법의 제일의제(제일의체)를 고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 젊은 시절 이러한 류에 대한 기억이 있었으나 이제는 십중팔구는 잊어버렸고, 노년에 바다 한쪽 끝에 살다보니 사람들에게 물어 많은 자료를 채집할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빠진 것이 많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말을 하되 도로써 하는 것은 지극한 말로써 일찍이 말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밖의 것은 나의 분수에 벗어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총림에 사마천(사마천)과 반고(반고)의 붓을 잡는 자가 있다면 어쩜 이를 채택해 주지 않을까 한다.
홍무(홍무) 8년(1357) 12월 15일 천태산인(천태산인) 석 무온(역무)서
1. 말후구(말후구)/ 보엽 묘원(보엽묘원)스님
정수사(정수사) 보엽(보엽묘원)스님은 사명(사명) 사람이다. 경산사(경산사) 허당(허당지우:1185~1269)스님에게 공부하였는데, 선문 화두에 깨치지 못한 바 있으면 반드시 공부 많이 한 이에게 묻고, 깨닫기 전에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허당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덕산(덕산)스님의 말후구(말후구)를 만일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덕산스님께서 알지 못하였으며, 만일 없다고 한다면 암두(암두)스님은 어찌하여 “덕산스님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까?*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모르니 그대는 운(운)수좌를 찾아가 물어보도록 하라.”
이에 스님은 운수좌에게 물어보러 갔는데, 마침 운수좌는 산에서 돌아와 발을 씻으려고 물을 찾던 중이었다. 스님은 재빨리 물을 가져다 드리고는 몸을 굽히고 손을 내밀어 운수좌의 발을 씻겨주면서 고개를 들어 물었다.
”덕산스님의 말후구에 대하여 저는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좌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운수좌는 느닷없이 발 씻으려던 물을 양손으로 그에게 끼얹으며 말하였다.
”무슨 말후구가 있단 말이냐?”
스님이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튿날 허당스님을 찾아보니 허당스님이 물었다.
”내 그대에게 운수좌를 찾아가 말후구를 물어보라 하였는데 그가 무어라 말하던가?”
”화상의 말씀대로 물어 보았더니 그가 발 씻은 물을 나에게 끼얹었습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
”무슨 말후구가 있느냐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내 너에게 말하여 주리라. 그는 깨달은 자라고.”
스님은 이 말에 의심이 풀리게 되었다. 운수좌는 바로 한극(한극)화상으로 허당스님의 수제자이며 높은 수행을 닦아 호구사의 주지를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2. 죽을 날을 받아놓고/ 인 대방(인대방)스님
평강(평강) 정혜사(정혜사)의 주지 인 대방(인대방)스님은 천태(천태) 사람으로 고림(고림청무)스님의 법제자이다.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자재하였으며 군수 주의경(주의경)과 친분이 있었다. 대방스님이 절 일을 그만두고 영암사(영암사) 화(화)노스님 방에 머물던 지정(지정) 무술년(1358) 9월 8일, 주의경이 공무가 있어 사찰을 찾아가 스님을 방문하자 대방스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달 14일에 이 산에서 죽을 것이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이 사실을 증명해 주오.”
주 군수는 장난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러하겠노라고 답한 후 떠나갔는데 13일이 되자 게송을 주군수에게 지어 보냈다.
어제는 바위 앞에 땔감 주워 모아놓고
오늘 아침 이 허깨비 몸 한 줌 티끌 되리라
어진 그대에게 정성껏 말하노니
하늘에 구름 걷히면 한조각 달만 남겠지.
작일암전십득신 금조환질화위진
은근기어현후도 벽낙운수월일흔
주의경은 이 게송을 받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날 밤 화(화)스님에게, “마른나무를 쌓아놓고 하나의 앉을자리 하나를 달라'고 청하자, 화스님은 “마른나무야 말씀대로 드리겠지만 좌대는 없다'고 하였다.
대방스님이 화스님이 앉아 있는 나무의자를 가리키면서, “그것만으로도 또한 넉넉하다'고 하자 화스님은 그의 말에 따라 의자를 주었다. 14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법당 위로 올라가 대중스님과 영결을 고하고 또다시 게송을 읊었다.
나의 전신은 본디 석교의 승려라
이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과 미움을 나누었지
사랑과 미움이 다한 때 온전한 바탕 드러나
무쇠 뱀이 불 속에서 얼음덩이를 씹는구나.
전신본시석교승 고향인간공긍증
증긍진시전체현 철사화리작한빙
드디어 마른 나뭇가지를 소매 속에 넣고 나무더미 위로 올라가 앉은 후 스스로 불을 지펴 빨간 불길이 치솟아 올랐으나 그 불길 속에서도 태연히 향을 사르며 축원하였다.
신령한 싹은 음양의 종자에 속하지 않으니
그 뿌리는 원래 겁 밖에서 왔다오
이를 그만두고 몸소 설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 속에다 옮겨 심을 수 있겠는가.
영묘불속음양종 근본원종겁외래
불시휴거친설파 여하이향화중재
스님은 화스님에게 염주를 건네주면서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이에 화염이 휩싸이는 곳마다 많은 사리가 나왔는데 주의경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경탄해 마지않아 그를 위해 영암사에 사리탑을 세우고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3. 원(원)의 침입에 맞서 송(송)나라 사람의 절개를 지키다
/ 가공 설옥(가공설옥)스님
원나라 병사가 강남 땅을 침략했을 때 금산사 현묵암(현묵의)스님은 백안(백안:원장)의 협박으로 그의 막사에 머물게 되었으며 그를 따라 무림(무림)에 이르렀다. 당시 중축사(중축사)의 가공 설옥(가공설옥:석전의 법사)스님은 송나라가 망하자 곧바로 사원의 직책을 그만 두었다. 묵암스님은 가공스님을 잘 아는 사이며 또한 그의 도행을 존경해온 터였다. 이 때문에 백안에게 가공스님을 영은사의 주지로 승진시켜 주기를 청하고, 묵암스님 자신이 임명장을 가지고 가공스님의 문을 두드리니 가공스님은 빗장을 뽑아 얼굴을 반쯤 내밀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스님의 옛친구 묵암이요.”
이에 가공스님은 빗장을 걸면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였다. 가공스님은 비록 세속 밖에 살면서도 스스로 충절을 지켜 영은사 주지로 임명됨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이처럼 단호히 거절하였던 것이다. 당시 가공스님의 문하에 한 수좌가 있었는데 그의 나이 80여 세였다. 그는 “송나라에서 태어나 송나라에서 늙은 몸으로, 송나라에서 죽을 수 없게 되었구나!' 탄식하고서 마침내 단식을 하여 죽었다.
4. 총림에 떠도는 헛소문
총림에 떠도는 소문은 모두 따질 만한 게 못된다. 후세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대혜(대혜)스님이 불지(불지)스님과 함께 원오(환오)스님 문하에 있을 때 원오스님이 불지스님을 편애하여 대혜스님은 항상 그 점을 불평하였다고 한다. 뒤에 불지스님이 육왕사(육왕사)에 주지를 하다가 대혜스님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는데 물가에 있어서 좋지 않다는 핑계로 부도를 파헤쳐보니 그의 진신(진신)이 그대로 있기에 큰 괭이로 그의 두개골을 쪼개 기름을 붓고 태웠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참혹한 일로서, 보통 사람들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혜스님이 설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내 일찍이 불지스님 부도탑의 비명을 읽어보니 불지스님은 사리를 봉안하였을 뿐 부도 속에 전신을 매장한 사실이 없었다.
또한 소옹(소옹)스님이 육왕사의 주지로 있을 때 황폐한 사찰을 중수하는 일로 겨를이 없었는데, 때마침 천동사(천동사) 주지자리가 비어서 도당성(도당성)에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소옹스님을 천동사로 옮겨 임명하려고 하였다. 스님은 육왕사의 토목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여 임명을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는 서신을 재상에게 올렸는데 그 서신 가운데, “천동사가 곧 육왕사이며, 육왕사가 곧 천동사이다'하는 구절이 있었다.
소옹스님은 엄격하여 규율을 범하는 승려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그를 피했다. 그리고는 그가 천동사의 주지 임명을 사양하니 비방을 조장하여 결국은 “그가 십만 전으로 천동사의 주지를 샀다'는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를 전해 내려오면서 스님을 비난하는 구실로 삼고 있다.
나는 지난날 원나라 중기 지원(중기 지원:1335~1340) 연간에 보복교사(보복교사)의 아 경문(아경문)스님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경문스님이 소옹스님이 재상에게 올린 진필 서찰을 내보이기에 이를 보고서야 비로소 지난 날의 비방이 거짓임을 증빙할 수 있었다. 또한 “무문문집(무문문집)” 에 실려 있는 소옹스님의 행장(행상)과 삼탑사(삼탑사)의 탑명을 읽어보니, 스님께서 천동사의 주지를 사양하는 서신의 뜻과 일치됨을 알게 되었다. 두분 스님의 도는 마치 하늘의 일월과도 같아 모두를 다 비춰주므로, 비록 말할 나위조차 없는 거짓된 비방이 스님을 더럽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려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5. 자신의 안목을 잃고 후인을 그르치는 저술
/ 천뢰 선경(천뢰선경)스님
영은사 천뢰(천뢰선경)스님은 절우(절, 제우) 사람으로 우극(우극지혜)스님의 법제자이다. 책 읽고 문장 쓰는 데 있어서 그 당시 인물중에 그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부종현정론(부종현정론)”을 저술하여 사정(사정)을 분석하고 시비를 바로잡으니, 매우 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 내용 가운데 큰스님들이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운 일들을 단순한 이야기거리로 취급하여 진(진)대의 왕연(왕연)이 옥진미(옥진미) 불자를 잡고 자기 손의 색깔과 같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어 이를 증명하려 하였다. 큰스님들이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움은 깨달음을 일깨우는 일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천뢰화상은 이를 이야기거리로 취급하였으니 자신의 바른 안목을 잃었을 뿐 아니라 후인을 그르치고 의심을 낳았다 하겠다.
6. 염라대왕 앞에서/ 연복사(연복사)주지 택운몽(택운몽)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양련 진가(양연진가)를 강회(강회) 지방의 석교도총통(역교도총통)에 임명하고 그에게 월주(월주) 산음(산음) 지방에 있는 남송시대의 왕릉들을 발굴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연복사(연복사) 주지로 있던 택운몽(택운몽)이 진가를 따라 송 이종(송 리종)황제의 시신에 가혹한 행위를 하였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운몽은 고의적으로 진가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왼발로 이종의 시신 옆구리를 또 한차례 발길질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양주(양주) 고을에 사는 어느 한 사람이 갑자기 죽어 염라대왕 앞에 끌려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이승의 천자가 오신다는 기별이 왔다. 염라대왕이 명부전에서 내려와 천자를 맞이해 들였는데, 노란 수레덮개와 왼편에 깃털로 만든 일산이 즐비하고 수레며 말들이 꽉 메워 그 모습은 인간세상 황제의 의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리에 앉은 후 얼마 있으려니 졸개귀신이 한 승려를 결박한 채 명부전 앞으로 끌고 나왔는데, 천자가 그를 질책하였다.
”내 황제의 자리에 있은 4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별다른 잘못이 없었고 너희 불교에 대해서도 막은 일이 없으며 너와도 원수 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진가에게 아부하고자 나에게 지나친 능욕을 가하는가?”
마침내 사나운 역사에게 명하여 쇠송곳으로 스님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찔러 높이 꿰어 든 후 채찍을 치니, 그의 비명소리가 너무나 애처로워 코끝이 시큰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잠깐 뒤 물러나왔으나 갑자기 죽은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천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느 사람이 송 이종(송 리종)황제라고 하였으며, 채찍을 맞은 승려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항주 연복사 주지 택운몽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자 연복사를 찾아가 그 사실을 묻고 본것을 증험해 보았으니 즉 운몽스님은 왼쪽 엄지발가락에 부스럼이 생겨 고치지 못하고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7. 불법문중에 잘못되어가는 일을 바로잡다/ 봉산 의(봉산의)법사
근대 우리 선문에는 상황에 맞게 방편을 쓰되 옛사람의 묵은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기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불법을 구정(구정)*보다도 무겁게 하신 탁월한 분들이 많았었는데, 지금 그러한 스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항주 하천축사(하천축사) 봉산 의(봉산의)법사는 원대(원대) 연우(연우1314~) 초에 “삼장 홍려경(삼장홍려경)'의 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나 그 작록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법문중에 조금치라도 어긋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 잡았다.
고려 부마(부마) 심왕(심왕)이 황제의 칙명으로 보타관음(보타관음)을 예배하러 가는 길에 항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주머니 돈으로 명경사(명경사)를 찾아가 재를 올리고 많은 사찰의 주지를 위해 공양하였다. 성관(성관) 이하 여러 관아의 관리들이 직접 그 일을 감독하였으며,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는 심왕을 강당의 중앙 법좌 위에 자리하고 모든 관리는 서열에 따라 법좌 위에 줄지어 앉고 사찰의 주지들은 양쪽 옆으로 앉게 하였다. 자리를 모두 안배한 후 법사는 맨 나중에 왔는데 오자마자 법좌 위로 달려가 왕에게 물었다.
”오늘의 재는 누구를 위한 재입니까?”
”많은 사찰의 주지를 공양하기 위함입니다.”
”대왕께서 많은 사찰의 주지를 공양하기 위함이라 말하고서도, 이제 주인의 자리는 없고 왕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 모든 주지들을 양 옆으로 줄지어 앉히고 심지어는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자도 있으니, 이는 순라 도는 병졸들을 공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법에는 이렇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황공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사과하고 곧장 법좌에서 내려와 많은 사찰의 주지에게 예의를 표한 후 손님과 주인의 자리를 나누어 모든 관리들은 양 옆의 주지가 앉았던 곳으로 물러나 앉았다. 공양이 끝난 후 왕은 법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법사가 아니었더라면 예의를 차리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아! 이른바 상황에 맞게 방편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봉산법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8. 혐의 받을 행동을 미리 막다/ 허곡(허곡희릉)스님
허곡(허곡희릉)스님이 앙산사에서 사직하고 경산사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원주(원주)성에 이르니 사방에서 시주하는 신도들의 돈과 폐백 등이 수북히 쌓였다. 허곡화상은 서서히 이를 거절하며 말하였다.
”내 똑똑하지는 못하나 나로 인하여 양절(량절 : 절강의 옛명칭) 지방의 여러 사원에서 선문의 종지를 알게 되었는데, 경산사 주지자리가 비어 나를 부르는 뜻은 나에게 개당설법(개당설법)을 하여 선문의 종지를 밝혀달라는 것이다. 내 어찌 가난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혹을 사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보내주신 물건들은 도로 가져가시어 나에게 “신화엄(신화엄)'이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라오.”
시자승에게 꼭 필요한 행장만을 꾸려 그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9. 봉산 일원(봉산일원)스님의 염고(념고)
나는 천력(천역:1329~1330) 연간에 호주(호주) 봉산사(봉산사)에서 일원 영(일원영)스님을 찾아뵙고, 조주스님이 오대산 노파를 시험했다는 화두를 참구했으나 깨치지 못했다. 하루는 시봉하는 차에 이 화두를 들어 물으니, 스님께서 말하였다.
”내 젊은 날 태주(태주) 서암사(서암사) 방산(방산문¿)화상의 문하에 있을 때 유나(유나)를 맡아 보면서 나 역시 이 화두를 물었더니 방산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영유나(영유나)야, 네가 한마디 해 보아라.'하셨다. 나는 그 당시 입에서 나오는대로 “온누리 사람들이 노파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더니, 방산화상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온누리 사람들이 조주스님을 어찌할 수 없다고 하겠다' 하였다. 나는 그 당시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얻은 것마냥, 병든 이가 땀을 흘린 것처럼 스스로 기쁨을 알았다.”
이어서 말하였다.
”시자야! 너는 달리 한마디 해보아라.”
나는 그 당시 인사하고 곧장 그곳을 떠나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지난날 스님이 처음 이곳에 부임하여 상당법문을 할 때 “세존이 법좌에 오르시자 문수가 백추를 치고…'라는 공안*을 들어 설법한 후 염송하였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잘못 말씀하시고
문수도 이것을 잘못 전했으며
오늘 나도 이것을 잘못 거론했도다.
알겠는가.
한 글자를 세차례 베껴쓰면
오(오)자와 언(언)자는 마(마)가 되느니라.
세존이시착설 문수이시착전
신봉산금일이시착거
회마 자경삼사오언성마
그 당시 은사 축원(축원)스님은 육화탑(육화탑)에 은거하면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선정원(선정원)*에서 수많은 노스님을 천거하였으나 봉산(일원)스님이 조금 나은 편'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일원스님은 영해(령해) 사람이며 경산사 운봉(운봉)스님이 직접 머리 깎아 준 제자인데 주지로 세상에 나와서는 방산스님의 법을 이었다. 인품이 자애롭고 참을성이 있어 남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었으며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스님께서 입적하자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애도해 마지않았다.
10. 불경과 장자에 나오는 몸 큰 물고기
불경에 의하면, 바다 한가운데 산 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 위에는 큰 나무가 솟아 있고 밤낮없이 업장의 바람에 뒤흔들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하였고, 장자(장자)에도 북해에 곤(곤)이라는 고기가 있는데 몇 천리가 되는지 크기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지정(지정) 계묘년(1363)에 노아천(노아천)에서 왔다는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 그곳에 산 만한 고기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고기가 바다를 지날 때 물 위로 기나긴 지느러미가 보이고 등과 꼬리를 흔들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유유히 헤엄쳐 갔는데 나흘이 지나서야 그 물고기의 몸통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몸 큰 중생의 옛날 업장에 의한 감응'이라는 것이 이러하다. 그러나 아수라왕(아수나왕)이 큰 바다 가운데 서 있으면 키가 수미산 만하고 두 손으로 일월을 가지고 논다 하였으니, 그가 이 물고기를 보았다면 한낱 작은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란 자신의 이목으로 보고 듣는 데에 막히므로 그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그밖의 일은 모두 허황된 것이라 생각하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11. “선문종요(선문종요)”의 저자에 관하여
“선문종요(선문종요)”는 설산 담(설산담)스님이 지은 책이다. 설산스님이 송 순우(송순우:1241~1252) 연간에 태주(태주) 서암사(서암사)의 방산(방산)스님에게 귀의하여 완성한 책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이루어졌겠는가.
내 젊은 날 봉산사의 일원 영(일원영)스님에게 공부할 때, 스님은 야참(야삼)법문에서 문득 이 “선문종요”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에는 옛사람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들어 말한 곳이 있기는 하나 나머지는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책을 내려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후 40여 년이 지나 천의사(천의사) 청업해(청업해)라는 자가 자상하게도 이 책을 중간하면서 자기도 서문을 쓰고 용장준(용장전)에게도 서문을 써달라 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가, “설산스님이 남의 문집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행했다'고 하면서 “은공단강(은공단강)' 한마디를 증거로 제시하였고, 게다가 이를 10권으로 분책하고 매 편마다 본문에서 한마디씩을 뽑아 제목을 붙였으니 인용하여 본문의 취지를 잃은 곳이 매우 많다. 나는 뒷 사람들이 이 책의 유래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도리어 업해스님의 말을 긍정하여 설산스님에게 누를 끼칠까 근심한 나머지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12. 요즘 총림의 도반관계와 사자관계
호구사 동주(동주곤영)스님과 영은사 독고 붕(독고순붕)스님은 같은 고향에 동문수학한 사이로서 우의가 매우 두터웠다. 동주스님이 호구사 주지로 있던 어느 날 때마침 성 안에 있었는데 만수사(만수사) 주지자리가 비었다고 제방의 주지가 독고스님을 그곳에 추천하자 하였다. 당시 독고스님은 호주(호주) 천령사(천령사)의 주지로 있었으므로(만수사의 주지가 되는 일은) 단계를 밟아 승진하는 것이지 결코 단계를 뛰어넘는 일이 아닌데도 동주스님은 힘을 다해 저지하였다. 그러나 독고스님은 이 말을 듣고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해가 지나 동주스님은 화주(화주)할 일이 있어 호주에 갔다. 그는 이에 독고스님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만나지 않았고, 또한 그가 자기를 헐뜯어 모연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천령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독고스님은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속히 돌아와 예를 다하여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돈을 털어 모연을 돕고 그를 위하여 앞장서서 주선하며 조금도 전과 다를 바 없이 편히 대하면서 옛 우정을 나누었다. 동주스님이 호구사로 돌아온 후 깊은 밤에 방장실 치상각(치상각)에서 서성대며 스스로를 돌이켜, “독고는 군자이고 수영(수영)은 소인'이라고 하였다.
내 요즘 총림에서 도반이라고 하는 자들을 살펴보니 말 한마디나 작은 잇끝으로 서로 다투며 나아가서는 서로 헐뜯고 모함하여 상대방의 명줄을 끊어놓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 독고스님의 너그러운 우정과 동주스님의 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제자가 스승의 잘못을 덮어주고 스승의 훌륭함을 드러내며 옳은 일을 따르고 잘못을 저버리는 것을 효도라 하고, 스승의 선을 가리우고 잘못만을 들춰내며 옳은 일에 등을 돌리고 잘못된 일은 따르는 것을 불효라 한다. 만일 스승에게 드러낼 만한 선이 없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억지로 선이 있는 것처럼 꾸며 다른 사람들이 쑥덕거리게 만들어 도리어 스승의 불선을 들춰내게 한다거나, 순종할 수 없을 경우에는 스승에게 간언해야 옳은데도 어거지로 옳은 일이라 여기고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이 쑥덕거리게 만들어 도리어 스승의 비리를 들춰내게 하는 일 또한 불효라 하겠다.
내가 요사이 여러 곳의 큰스님들이 열반하는 일을 살펴보니 그 제자들이 행장을 잘 갖추어 유명한 자에게 비명을 부탁하되, 거기에는 반드시 그가 태어날 때 부모의 남다른 현몽을 기록한다거나 죽어서 화장하였을 때 치아와 염주 등이 부숴지지 않았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노라 기록하고, 이러한 몇 줄의 문장이 없으면 큰스님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제자들이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거짓말을 꾸며 자기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일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전등록(전등록)”에 실려 있는 1,700명의 선지식 가운데 사리가 나왔던 분은 겨우 14명이었으며, 적음(적음)존자가 저술한 “승보전(승보전)”에 실려 있는 81명의 선사 가운데 사리가 있었던 분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문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오로지 종지를 통달하고 설법을 잘하는 일이다. 향상(향상)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속박을 풀어 없애주는 일을, 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지엽과 말단이다. 화장하여 간혹 육신 [제근] 이 부서지지 않고 구슬같은 사리가 나오는 것은 평소 그의 수행이 청정했다는 증험이니 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내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의 승려들이 서로서로 이러한 일을 모방하여 거짓말을 조작하고 부질없이 자기 스승을 미화하느라 그 사실을 비석에 새겨, 다른 종교 사람들이 읽어 보고 도리어 남다른 기적이 있는 스님들까지 거짓으로 의심하는 일이 생길까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이러한 일들이 불문에 끼친 폐해는 참으로 적지 않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13. 용감히 물러선 두 스님/ 동양(동양)스님과 초석(초석)스님
동양(동)스님이 도량사(도장사)의 주지로 있을 때 낭승(랑승:사원 외무를 관리하는 승려)의 무고로 선정원(선정원)에 소송이 제기되는 일이 있었다. 선정원에서는 이 사건을 본각사(본각사) 주지 요암(료의)스님에게 위임하여 그 고을 군수와 함께 그들의 잘잘못을 다스리도록 하자 요암스님은 말하기를,
”동양스님은 규율을 엄격히 지키고 대중을 엄숙히 다스리므로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함부로 소송을 일으켜 그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들이 이제 우리 무리 속에 뒤섞여 있고 관리는 한가롭게 관아 위에 앉아 동양스님을 취조하려드니, 이 일을 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하고서 곧장 남당사(남당사)로 물러가 버렸다.
초석(초석)스님이 가흥(가흥) 천령사(천령사)에 주지로 있을 때였다. 마침 관리가 관청을 중건하려는데 재목과 돌이 부족하여 스님들이 살지 않는 마을의 폐사(폐사)를 헐어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고자 여러 사원의 주지들과 의논하였다. 당시 초석스님은 안된다고 힘껏 말렸으나 관리가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사퇴의 북을 두드리고 해염(해염) 천령사(천령사)로 돌아와 버렸다.
두 노스님은 모두 과감히 의리를 행하고자 높은 주지의 지위를 마치 헌신짝 보다도 더 가볍게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엔 자신이 화를 당하면서도 지위에 연연하여 차마 버리지를 못하니 이를 어찌하랴.
14. 동상종(동상종)을 지키고 전하다/ 운외(운외)스님
운외(운외)스님은 창국(창국) 사람이다. 몸은 왜소하게 태어났으나 정신만은 남달랐다. 설법할 때는 정확한 비유와 방증을 들었고, 자신을 굽혀 배우려 하는 자들을 귀하게 여겨 자상하게 성취시켜주었다. 그러면서도 맹렬히 달려나가 뒤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서는 매의 눈초리와 용의 눈동자를 지닌 자라 하여도 그를 엿보지 못하였으며, 동상종(동상종)은 그의 힘으로 전해졌다.
노년에 천동사 주지가 되자 세상의 뛰어난 선객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스님은 거만하거나 재물을 탐하거나 혼자 먹지 않았고, 시주를 받으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후생들을 만나면 존중하고 그들이 선문을 짊어질 것을 기대하였으며, 하루 두끼 죽과 밥은 반드시 손수 발우를 들고 큰방에 가서 하였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후 남아 있는 재산이 없자 선객들이 각출하여 스님을 영결하였다. 스님의 뒤를 이은 제자로는 빙 대방(빙대방), 여 독목(여독목), 성 우암(성우암), 증 무인(증무인) 네 사람이다. 그들은 종문(종문)을 크게 하기에 넉넉한 인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위가 덕을 따라주지 못하여 그들의 법통을 전수할 자가 없었으며 무인스님 문하에만 겨우 한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15. 알 수 없는 인물, 지귀자(지귀자) 온일 관(온일관)
온일 관(온일관)이라는 자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아호는 지귀자(지귀자)이며,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선림(선림)에 들어왔다. 얽매임 없는 천성으로 도를 즐기며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정토에 매어두고 경황 중에라도 잠시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왕희지 서첩의 임서(림서)와 포도나무 그리기를 좋아하여 두 가지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가는 절마다 떠나올 때는 반드시 돈을 달라하여 주는대로 주막에 들러 혼자서 술을 마시고, 남은 돈은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아이들을 앞장 세워 “재상 오신다!”고 소리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그를 보면 모여들어 열을 이루었다. 그의 시와 게송은 이전의 것을 뛰어넘는 작품들이었으며, 후일 서호(서호)의 교사(교사:천태사)에서 입적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백담연(백담연)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간의 인연을 끝마치지 않고서 어떻게 이처럼 큰 일을 마칠 수 있었겠는가?
16. 천자의 생일에 돈에 매수당한 선객을 물리치다/ 죽장 암(죽장암)스님
죽장 암(죽장암)스님은 태주(태주) 도솔사(두솔사)의 주지다. 태어나면서부터 큰 기개와 도량이 있어 선배 스님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므로 그를 미워하는 자가 많았다. 전조(전조)에서는 천수절(천수절:천자의 생신)에 반드시 각 고을마다 여러 사찰 주지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설법을 청하였다. 때마침 죽장스님이 그 일을 맡게 되자 그를 미워하던 자들이 많은 선객을 돈으로 매수하고 화두를 물어 기봉(기봉)을 꺾어놓으려고 하였다. 이 일을 주관하는 자가 그 사실을 알고 모두 전해주었으나 죽장스님은, 집안 일은 맡은 자가 할 일이고 법좌에 올라 설법하는 일은 주지의 임무이니, 그대는 허튼 말을 지껄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천령사(천령사)에 이르러 방장실의 객석에 좌정하여 여러 사찰의 주지들과 태연스럽게 담소하다가 북소리가 울리자 가마를 타고 법당에 갔다. 많은 관리들과 공손히 합장을 하고 법좌에 올라 축향(축향)을 끝낸 뒤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앉으니, 화두를 묻는 선승들이 끝이 없었으나 죽장스님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답했을 뿐 아니라 그 말로 되물으니, 그들 스스로 물러나 패배를 자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너덧 사람을 꺾는 동안 관리들은 오래 서 있는 데 싫증을 느낀 나머지 화두를 물으러 나오지 못하도록 중지시켰다. 드디어 스님은, 마치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우레가 진동하듯, 번갯불이 번쩍이고 별똥이 튀듯 종지와 화두를 들어 설법하니 사람들은 모두 기가 질렸으나 그만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설령 그를 미워하던 자에게 천만 개의 혓바닥이 있었다 하여도 스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이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총림에 복되는 일이 아니다.
17. 축원(축원)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신 고범(신고범)스님
황암(황암) 영석사(영석사)의 신 고범(신고범)스님은 초년에 호구사의 동주(동주)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동주스님은 그에게 장경각 열쇠를 맡긴 적이 있었다. 그 다음 홍복사(홍복사)의 축원(축원묘도)스님을 찾아뵙고, 어느 날 저녁 방장실에 올라가 자세한 가르침을 청하였다.
”저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구자무불성] 는 화두를 들고 있으나 들어갈 곳이 없으니,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축원스님이 호된 목소리로 꾸짖었다.
”밤이 깊었으니 물러가거라.”
고범스님은 방에 돌아와 욕을 지껄였다.
”나를 위해 말해주지 않으려거든 그만 둘 일이지 성깔을 부리기는…….”
어느 사람이 이 이야기를 전하자 축원스님은, “언젠가 스스로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범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바로 크게 깨쳤으며, 세간에 나오자 축원스님에게 맨 처음 향불을 올렸다.
18. 보운사 문종주(문종주)의 임종
보운사(보운사) 문종주(문종주)라는 자는 상산(상산) 사람이다. 교․관(교관)을 널리 통달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켜, 평소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렸으나 일단 법좌에 올라 강의를 할 때면 병에 든 물이 거꾸로 쏟아져 나오듯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임종할 때, 법좌에 올라 “십육관경(십육관경)”을 강론하고 나서 대중들과 영결을 고하려 하니 좌우의 승려들이 말씀을 올렸다.
”스님의 뒷일을 부촉하지 않고서 어찌 입적하시려 합니까?”
”납승이 떠나려면 속히 떠나야지, 무슨 뒷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제자들이 더욱 간청하자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온 후 낱낱이 조목별로 모두 써놓으시고 합장을 한 채 서방 사성존(사성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혜지보살, 대혜중보살)의 불호(불호)를 외우면서 회향발원(회향발원)을 끝마친 후 드디어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찬란한 사리가 나왔다.
19. 자상한 나의 스승, 축원 묘도(축원묘도)스님
스승 축원(축원)스님은 여 일암(여일암)스님이 절서(절서)에서 많은 책을 구입하여 태백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 요당(유일료당)에게 서신을 보냈다.
”듣자하니 일암스님이 많은 책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다른 일이 아니라 그저 동자승 몇을 가르치려고 하는 일일텐데. 네가 그에게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해주는 것이 좋겠다. 비유하자면 사냥개가 하루종일을 토끼를 쫓아다니다 보면 토끼 발자국이야 잃지 않겠지만 쫓는 도중에 사슴을 만나 토끼를 버리고 사슴을 쫓아가면 두 마리 모두 잡지 못해 말짱 헛것이 되고 마는 격이다.”
내 경산사의 몽당(몽당)에서 지낼 때 서신을 올려 스승의 안부를 물었더니 손수 답서를 보내주셨다.
”그대가 몽당의 화롯불 맡에 앉아 부젓가락을 놀릴 때나 담소할 때, 국물을 먹고 찬물을 마실 때, 이 모두가 그대 자신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인 공부 [직절공부] 란 결코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해 보니, 스승께서는 그 당시 아마도 나를 시원찮게 여겨 매서운 주먹질이나 발길질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처럼 간곡히 가르쳐 주신 성싶다. 바로 이것이 노란 나뭇잎새를 황금이라고 하여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가르침인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흙탕물을 뒤집어 쓰셨겠는가.
아! 스님이 입적하신 지 이미 30여 년인데 이 가르침을 적으려니 스승의 얼굴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20. 성 도원(성도원)스님의 「성학지요(성학지요)」
성 도원(성도원)은 속세에 있을 때는 호석당(호석당) 선생에게 배웠으며, 출가하여서는 경산사 허곡(허곡)스님에게 귀의하였다. 그는 “성학지요(성학지요)” 10권을 저술하여 큰 도움을 주었는데, 지정(지정) 병신년(1356)에 가화(가화)의 고사명(고사명)이 이 책을 편집․정리하여 간행한 일이 있다. 그 당시 장사성(장사성)이 소주(소주)를 점거하고 제멋대로 왕을 자칭하였는데 정명덕(정명덕)․진경초(진경초)․예지진(예지진) 등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유학자들은 이 책에서 성품에 대한 회암(회암:주자)의 의논은 본지를 잃은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사실을 장사성에게 말하니, 장사성이 그 본판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성품(성)이란 텅비고 고요하며 아무런 조짐도 없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선악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선악을 뒤섞어 세 가지 [삼품:선, 비선비악, 악] 로 나누고 기질(기질)과 함께 똑같이 논하니, 도원(도원)의 논변이 참으로 옳은 것이다.
내 들어보니 우(우:하대의 왕)임금은 선한 말만 들어도 절을 올렸고, 안연(안연:공자제자)은 한 가지의 선을 얻어도 그것을 잃지 않고 가슴 속 깊이 새겼다고 한다. 오늘날 수많은 유학자들이 모두가 우임금과 안연을 높히면서도 그들과 행이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
21. 명망이 너무 높아도 문제/ 고림 청무(고림청무)
고림(고림청무:1262~1329)스님이 보령사(보령사)에 주지로 있을 때 명망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당시 큰스님이라는 자들이 그를 싫어하여 큰 절 주지자리가 비었어도 천거하려 들지 않았다. 천동사의 운와(운와)스님이 돌아가시자 원문청공(원문청공)이 당시 한림원(한림원)에 있으면서 특별히 명주(명주) 만수장(만곤장)의 설애(설애)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난날 고림화상이 호구사에 있을 때 한차례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기봉(기봉)이 준엄하고 논리가 명확하여 쇠퇴한 종풍을 일으켜 세울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천동사에 주지자리가 비었으니 설애스님께서 한번쯤 추천해주셨으면 합니다.”
저속한 무리들이 팔뚝을 걷어부치고 크게 반발을 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추천자의 한몫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선발되지 못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22. 설두사 상장주(상장주)의 게송 4수
설두사(설사)의 상장주(상장주)는 횡산(횡산)스님의 제자이다. 그의 모습은 몹시 초라하고 일자무식이었으나 오로지 선정(선정)만을 닦았다. 그가 지은 게송은 현실과 이치에 다 맞고 음률이 막히지 않아 사람들을 크게 일깨우는 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상달마(상달마)'라고 일컬었다.
나는 소년시절에 경산사에서 그를 알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가 지은 게송 4수를 기억하고 있다. 즉 “철우송(철우송)”․“해문송(해문송)”․“고순송(고순송)”․“식암송(식암송)”이다.
“철우송”은 다음과 같다.
백번 달군 화롯불 속 재빨리 뛰쳐나와
머리에 솟은 뿔 세속 티끌 멀리하고
때려도 가지 않고 당겨도 꼼짝 않으니
이번 회향에는 결코 포태 속에 들어가지 않으리.
백련노중곤출래 두각쟁영체절애
타우불행견불동 저회단불입포태
“해문송”은 다음과 같다.
업풍이 불어 산처럼 파도치니
고기잡이 늙은이들 발 붙이기 어려워라
목숨과 몸 버리고 밀치고 들어가니
옥문에 자물쇠 없는 줄을 비로소 알았노라.
업풍취기낭여산 다소어옹저각난
변명사신애득입 방지옥호불증관
“고순송”은 다음과 같다.
자줏빛 거죽 다 벗기니 은처럼 새하얀 줄기
펄펄 끓는 솥 속에 이리저리 뒤적인다
이처럼 괴로운 마음 사람들은 믿지 않고
무심히 깨물으며 진미라고 좋아하네.
자의탈진백여은 백비과중전득신
자시고심인불신 등한교착미전진
“식암송”은 다음과 같다.
백척간두에서 방법을 묻지 않고
높은 봉우리에서 한가로히 지내는 이 몸
부서진 집 엉성하여 비바람 못가리나
내 집 사정 남에게 말하기도 난처하네.
백척간두파문진 고봉절정양한신
수연파옥무차개 난파가사설향인
23. 절노비 때문에 입은 명예훼손
/ 천뢰(천뢰)스님과 형석(형석)스님
주지된 사람은 누구나 엄하게 노비를 다스려야 하며 수시로 좋은 말로 그들을 가르쳐야만이 자신에게 누를 끼치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천뢰(천뢰선경)스님이 가흥(가흥) 천령사(천령사)의 주지로 있을 때 그의 노비가 동네 거리의 개 한 마리를 훔쳐 먹었는데 이 때문에 천뢰스님은 “개 삶아 먹은 스님[자구]”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형석(형석)스님이 고소(고소) 승천사(승천사)의 주지로 있을 때 신도 집의 초청을 받고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마을을 지나면서 그의 노비가 그 고을 사람의 염소 한 마리를 훔쳐 먹었는데 이 때문에 형석스님은 “염소 삶아 먹은 스님 [자석]”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를 훔치고 염소를 훔친 일들이 두 분 스님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마는 그 악명은 몸소 겪어야만 하였다. 이는 평소에 노비들을 엄격히 다스리지 못한 데에서 빚어진 일이라 하겠으니 뒷사람들은 이 두 스님의 전례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24. 속인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다가
주지(주지)란 모든 보살이 지혜로 머무는 경계에 머물러 [주]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륜을 잘 지키는[지] 자이니, 백장스님이 소위 불자주지(불자주지)라고 이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즘 들어 주지가 되어 명리를 쫓는 이들은 그들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중에는 간혹 속인들과 사귀며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지내는 이도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태주(태주) 홍복사(홍복사)의 심석산(침석산)스님은 절 주변에 사는 속인 방공권(방공권)과 사귀면서 서로 술자리를 돌려가며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 절의 감사(감사)인 방(방)스님은 창고 일을 맡아 보기로 승낙을 받았었는데, 방공권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모함하여 못하게 하였다. 이에 방감사는 앙심을 품고 방공권을 독살하려고 방장스님의 시봉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차 속에 독약을 넣었다. 그러나 공권이 석산스님을 존경하여 자기 찻잔을 돌려 먼저 드리자 석산스님이 그 차를 마시고 독살되었다. 방감사는 석산스님을 독살시킨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어느 날 콩새 우는 소리를 들어보니 영락없이 “방감이 날죽여[방감살아]”하는 것이었다. 이에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병이 되었고 햇볕 보기를 겁내다가 짚을 씹으면서 죽어 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석산스님은 자기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속인과 사귀며 그들의 말을 들어준 데서 화근이 되어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잃었으니 뒷사람들은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콩새 [상호조]를 시골 사람들은 단마조(단마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늦봄이 되어서야 운다. 세속에서는 그 울음소리를 “장감단마(장감단마:짱 찌안 뚜완 뭐)'라 하는데 이 중은 “방감살아(방감살아:팡 찌안 싸 워)로 착각한 것이었다. 티후루 [제호로]․쁘어삥찌아우 [파병초] ․워뿌쿠 [탈포고] ․니훠훠 [이활활] 따위의 새는 모두 그 울음소리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25. 목을 베자 하얀 우유빛 피가 흐르다/ 합존(합존)대사
합존(합존)대사는 송나라의 어린 임금 영국공(영국공)이다. 원(원) 살선(살선:세조)황제에게 귀순하자 황제는 그에게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도록 하였는데 국사가 그의 이마를 손수 쓰다듬으며 비밀 계법을 전하였다. 그는 확고하게 정진 연마하여 이미 많은 증험이 있어왔는데, 영종조(영종조:1321~1323)에 이르러 대사는 때마침 흥에 겨워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임화정에게 묻노니
매화는 몇 차례나 피어왔는지
황금누대 위의 길손이여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몸.
기어림화정 매개기도화
황김대상객 무복득환가
첩자가 그 시의 의도는 강남 인심을 격동시키려는 데 있다고 참소하자 황제는 그를 목 베어 죽였는데 스님의 목에서 우유빛 피가 흘러 넘쳤다. 황제는 그제서야 뉘우치고 내탕(내탕) 황금을 출연하여 소조상을 세우고 강남 지방의 글씨 잘 쓰는 승려와 선비를 연경(연경)에 불러들여 대장경을 서사하여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나 황제는 초여름에 상도(상도)로 가는 도중 더위를 피하다가 시해 당하여 새로 서사하는 대장경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26. 환생한 어린아이
지정(지정) 신축년(1361)에 섬서(합서) 지방의 민가에 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겨우 세 살이었다. 어느 날 마을 거리에서 “현관(현관) 행차에 길 비켜라' 하는 소리를 듣고서 앞길을 막아선 채 현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의를 표하며 말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오래인데 지금까지 별일 없었소?”
현관은 깜짝 놀라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에 어린아이 앞으로 나아가 물어보자 어린아이는 전생(전생)의 성명을 말하고 이어서 예전에 함께 주고 받으며 읊조렸던 시 몇 수를 열거하자 현관은 그때서야 옛 친구임을 믿게 되었다. 그는 다시 현관에게 말을 이었다.
”그대와 헤어진 뒤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하였으나 앞서 세 차례나 태어난 바 있다. 처음 죽어서는 개로 태어나 스스로 싫증을 느낀 나머지 일부러 주인집 아이를 물었는데 주인이 화가 나서 나를 죽였고, 다시 메추리로 환생하였으나 그것도 싫증이 나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 그대와 다시 만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로다.”
듣자하니, 이 아이는 전생에 주역의 이치를 즐겨보며 “태극이 움직이기 전 [태극미동]”의 경지를 체험한 까닭에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생사에 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의(마의)스님이 주역을 “심역(심역)”이라 하였고, 자호(자호)스님은 이를 “역(역)”이라 이름했는데,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27. 보(보)상좌의 사리와 피고름/ 파암(파암)스님
파암(파암조선)화상이 자복사에서 물러나 경산사 몽암(몽암)스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찾아가니, 몽암스님은 그에게 입승수좌(립승수좌)의 직책을 맡겼다. 그곳의 보(보)상좌는 큰 지견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주지나 수좌가 부임하여 개당법문을 할 때면 으레 느닷없는 선기문답으로 그들의 기봉(기봉)을 꺾곤 하였다. 어느 날 파암스님이 법좌를 열었는데 보상좌가 왔다.
”천지의 안, 우주의 사이 그 중간에 있다.”하면서 파암스님이 말씀하시자 보상좌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파암스님에게 얻어 맞고 쫓겨나왔다. 당시 보상좌는 파암스님의 말이 끝난 다음 앞으로 나가 반박하려 했었는데 이미 “그 중간에 있다.'라는 부분에서 얻어 맞고 쫓겨나오자 파암스님이 고의로 자신을 꺾으려 했다고 생각하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죽어버렸다. 화장을 하고 나서 고향 사람들이 사리를 거두어 파암스님에게 드리자 파암스님은 그것을 들고 말하였다.
”보상좌야! 너에게 설령 여덟 섬 네 말의 사리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한쪽 벽에 던져 놓겠으니 내 생전에 한마디 [일전어] 를 돌려다오!”
그리고는 사리를 땅에 던지자 오직 보이는 건 피고름 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선배에게서 들은 것이다.
28. 스스로 자초한 응보/ 장구육(장구육)과 방국진(방국진)
원 지정(원 지정) 병신년(1356)에 장사성(장사성)이 소주(소주)성을 공략했을 때 그의 아우 구육(구육)이라는 자가 맨 먼저 입성하여 살 집을 물색하다가 승천사(승천사)가 그윽하면서도 밝은 것을 보고서 내심 좋아하였다. 그곳을 궁실로 개조하고자 병사에게 법당의 불상을 부수도록 하였으나 병사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누구도 감히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구육이 화가 나서 불상의 얼굴에 활을 쏘아 맞힌 뒤 다 부숴버리고 장사성을 맞이하여 그곳에 살았다. 그 이듬해 정유년(1357)이 되자 명나라의 많은 병사가 여구(여구)의 황태(황태)를 공격하니 구육이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오른팔을 잘리고 죽었던 것이다.
무술년(1358) 방국진(방국진)이 강절성(강절성)의 분성참정(분성삼정)이 되어 명주(명주)를 수비할 때였다. 그의 좌우사관(좌우사관) 유인본(유인본)이 문학을 몹시 좋아하여 평소에 지은 문장과 시를 편집․간행할 때 성 중에 있는 사찰의 장경을 가져다가 이를 풀칠하여 표지를 만들고 경문을 지워 없앤 후 자기의 시와 문장을 베껴쓰니, 우리가 보기에도 뼈에 사무치게 마음 아팠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오(오)의 원년(1359)에 군대가 명주를 점령하여 방국진이 조정에 항복하자 유인본이 충성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그의 등을 채찍질하니 등이 터지고 창자가 드러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구육은 하나의 용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복(죄복)의 응보를 알지 못한 자이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인본은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서 차마 이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말에 의하면, “신을 공경하되 신명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은 삼계의 큰 성인이시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은 불상을 부수고 한 사람은 불경을 파손하였는데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극형의 응보를 받았다. 이는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서, 실제로 스스로가 자초한 응보이지 우리 성인이 보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29. 쥐들의 보답
은성(은성)의 관강소(관강소)에 두 스님이 함께 살았는데, 그 중 한 스님이 쥐가 설치는 것이 괴로워 크고 작은 두 개의 막대기를 가지고서 쥐덫을 마련하여 비치는 거울을 장치해 두었다. 쥐가 이를 건드리다가 덫에 걸리자 그 스님이 급히 뛰어나가 물을 가져다가 쥐를 처넣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같이 있던 스님이 차마 볼 수 없어 몰래 막대기를 들어 올려 쥐를 놓아 주었다. 이튿날 쥐덫을 놓았던 스님이 출타하여 함께 있던 스님 혼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보통 때와는 달리 많은 쥐떼들이 법석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그 스님은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내가 어제 저녁에 너희를 놓아 주었는데 너희는 도리어 이처럼 시끄럽게 구느냐?”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그의 자리 앞에 파란 색 끈 하나가 놓여 있어 속으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며칠 후 그 스님은 그 끈으로 허리를 묶고 나갔는데 옆방에 있는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내 것이다. 침실에서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그대가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스님은 허리띠를 얻게 된 경위를 말해 주었으며 그때야 비로소 그날 저녁나절 쥐들이 떼를 지어 옆방 스님의 끈을 훔쳐 보답하려고 시끄럽게 떠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0. 혜홍 각범(혜홍각범)스님의 「승보전」
각범(혜홍각범)스님의 “승보전(승보전)”은 원래 “백선사전(백선사전)”이라 이름하였는데 대혜(대혜)스님이 처음 이 책을 읽은 뒤 그 중에서 19명을 뽑아내 불태워버렸다. 그후 각범스님은 황벽사의 지(지)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종고(종광:대혜)스님이 ‘백선사전’을 훔쳐 본 후 그 중 19명의 전기를 불태워버렸는데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각범스님은 당시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만 끝까지 19명을 ‘승보전’에 수록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승보전에 81명만 수록된 것은 9×9의 수효에 준한 것이라고들 하나 이 말 또한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31. 공도사(공도사)의 정진과 게송
철경(철경지명)스님이 하산사(하산사)에 살 때 그의 문하에 공도사(공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명(사명) 사람으로 몸가짐이 청렴하고 불법 수행에 정진하며 날마다 법화경 한 권을 모두 외웠다.
임종 때 아무런 질병과 고통이 없이 옷을 갈아입고 가부좌 한 채 열반하였는데 화장을 해도 혓바닥이 불타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게송을 소리 높혀 읊조리며 추도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게송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느날 밤 홀로 앉아 게송을 하였다.
온 산의 창아래 등잔불을 밝히니
화로에도 불이 없어 썰렁하구나
화두는 놔 두었다 그 이튿날 들자하고
도인은 종을 치러 또다시 누각으로 올라가네.
점진산창일잔유 지노무화랭추추
화두류향명조거 도자고종우상루
철경화상은 법좌에 올라 특별히 이 게송을 칭찬하였다.
32. 휴거(휴거)스님과 동주(동주)스님의 문체를 평하다
/ 남당(남당)스님
내가 본각사(본각사) 남당(남당)스님을 방문했던 날 밤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가운데, 시문에는 섬세하고 통쾌한 차이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선휴거(선휴거)의 송별 게송을 예로 들었다.
누에고치가 집을 짓듯 스스로 얽어매어
백겹 천겹이 눈 앞에 놓여 있다가
이를 트고 나올 때에 온 몸이 나타나고
온 식구가 나루터 배 위로 오르게 되리.
여잠작 자포전 백잡천중재면전
열득파시전체현 수군가송상도두선
뒤이어 동주(동주)스님의 차운(차운)을 읊었다.
언제 동정에 얽매인 적 있으며
하필 미생전의 소식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가
고향 천리 길 이제사 돌아가는데
뭍에는 길이 있고 물에는 배가 있다.
동정하증섭개전 하수갱투미생전
고원천리금귀거 육유정도수유선
남당스님은 다시 말했다.
”휴거스님의 문장은 섬세하여 표백한 비단결같이 보이지만 동주스님의 통쾌한 기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33. 선불도(선불도)놀이를 하다가 꾸지람을 듣다
내 어린 시절 봉산사(봉산사) 택목료(택목료:선원의 요사)에 있었는데 공양 후 피곤함을 쫓기 위해 친구들과 선불도(선불도)놀이를 하였다. 일원(일원)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정두승(정두승:변소청소 소임)을 시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내왔다.
백천 제불과 그리고 중생을
한 장의 그림 속에서 비교하지 말고
마음 도장을 당장 가벼이 던져 버리면
당당하게 적광(적광)의 도량에 높이 앉으리.
백천제불급중생 휴향도중강교량
심인당양경척출 당당고좌적광장
이튿날 아침 문안을 올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사람들은 손톱 자를 겨를도 없었다는데 너희 후생들은 차마 세월을 허송할 수 있는가? 더구나 선불도놀이에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를 가지고 주사위 하나 던지고는 “나는 성불하였노라'고 좋아하니, 그대들은 언제 어디든지 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것이다.”
34. 천박한 소견으로 윗사람들의 어록을 펴내다
중모(중모)스님이 온주(온주) 선암사(선암사)에 주지할 무렵 천하는 바야흐로 태평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선승들이 찾아왔다. 나는 명 성원(명성원), 서 영중(서형중)스님과 함께 셋이서 선암사에 갔었다. 성원과 영중은 시자로 있었고 나는 이미 장각(장각) 소임을 맡은 뒤였다. 때마침 보름이 되어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설법하였다.
”한 번의 묵언으로 납승에게 대답하면 천둥이 우르렁대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세 번 불러 그 뜻을 깨달으면 옥이 구르고 구슬이 돌며 칠팔십번 해주면 정신없이 떠받히고 부딪혀 사람을 막히게 한다.”
이어 주장자를 뽑아든 채 게송을 이었다.
어젯밤 서풍이 베갯머리에 불었을 때
끝없는 매미소리 나무숲이 시끄럽구나.
작야서풍침암추 무한선성조고수
그 후 그의 어록을 편집하던 사람이 “애새쇄(애새살)' 세 글자를 “능유기(능유기)'라고 바꿔썼다. 이는 말로 표현하는 어려움을 모르고서 천박한 소견으로 선배들의 말을 쉽사리 고쳐 써버린 것으로서, 수료학(수료학)으로 많은 부처님의 기어(기어)가 바뀐 일과 흡사하다 하겠다.*
35. 황암 호두(황암호두)의 행각
황암 호두(황암호두) 정안인(정안인)의 휘(휘)는 각진(각진), 법호는 축심(축심)이다. 처음 위우산(위우산) 전절경(전절경)스님을 찾아뵙고 느낀 바 있어 가족을 버리고 토굴을 마련하여 혼자서 살아 왔는데, 용천사(용천사) 고우(고우)스님을 만나자 고우스님이 그에게 말하였다.
”양가집 여자가 이쪽저쪽으로 달아날 때는 어떻게 하려는가?”
”특별히 스님을 찾아 뵙겠습니다.”
”나는 이곳에 그대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에 정안인은 한 차례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30년 동안의 공부가 오늘 아침 무너졌다.”
고우스님은 그만두었다.
이에 그곳을 떠나 안산(안산) 춘우암(춘우암)의 무제(무제)스님을 찾아가 문을 들어서며 말을 내뱉었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행인들은 질퍽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이에 무제스님이 ”아니지, 아니지.”라고 하자 다시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할(갈)을 듣고 쫓겨나오고야 말았다. 만년에는 고을에 가서 명인사(명인사) 앞에서 승려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한 스님이 보따리를 들고서 곧바로 침실로 들어오자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하는 중이냐?”
”행각승입니다.”
”네 발밑의 짚신짝이 떨어졌는데 어찌하여 그것도 모르느냐?”
그 스님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의 보따리를 내동이치고는 쫓아냈다.
”이곳엔 네가 발붙일 곳이 없다.”
또 한 스님이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달마대사가 오시는구나.”
”나는 달마스님이 아닙니다.”
”분명 달마스님인데 콧구멍만 다르다.”
어느 날 명인사의 비구니 규장노(규장로)를 만나 물었다.
”듣자하니, 노스님께서 간밤에 아이를 낳았다고 하던데 정말이오?”
”말해 보아라, 아이가 남자겠느냐 여자겠느냐?”
”닭은 등잔을 물은 채 달아나고 자라는 낚시대를 씹는구나.”
36. 우연찮은 경우에 환희심을 맛보다/ 육왕사 면(면)시자
육왕사의 면(면)시자는 나의 친척 조카인데 어려서부터 참선에 뜻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하였다. 그는 천태산(천태산)과 안탕산(안탕산)으로 떠나가는 한 시자에게 송별 게송을 지어 보냈다.
조과스님이 실오라기를 불어
시자는 깨치고 떠나갔네
그러나 말에 떨어지진 않았어도
이미 고정된 형식을 이루었네
천태산 마루턱의 저 구름과
안탕산 속의 나무 숲을
이번 떠나는 길에 잘 헤아려 보고
그 곳 주지의 이름일랑 함부로 건들지 말아라.
조과취포모 시자변오거
수불섭언전 조이성로포
천태령상운 안탕산중수
차거호상량 막촉당두휘
임종할 때 다시 게송을 지었다.
남(생)도 본래 남이 아니오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로다
비마스님은 나무집게를 만들어 가르쳤고
구지화상은 손가락을 바로 세웠었지.
생본불생 사적비사
비마경차 구⺼저견지
내가 한번은 그에게 어떻게 해서 깨닫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지난날 옥궤사(옥궤사) 전단나무 숲 속의 경안(경안) 옆에 앉아 있다가 우연찮게 규(규)장주가 스님들과 함께 강론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스님이 “향상사(향상사)가 무엇이냐고 묻자, 규장주는 두 손으로 그의 주먹을 비틀어 머리 위에 얹어놓은 후 합장하고 “소로소로…' 하였습니다. 나는 이를 계기로 어떤 기쁨을 얻었고, 정신없이 몽당(몽당)으로 뛰어와 달(달)수좌에게 말하니 달수좌가 미소를 지으며 “너 왔느냐?'라고 하였는데, 그 뒤 가슴 속이 후련한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뒤에 규장주를 만나 그 이야기를 물어 보았더니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질 뿐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다시 서서히 물어 보았더니, 그는 당시 그런 흉내를 낸 것은 그 스님을 놀려주려고 하였을 뿐, 사실 어떻게 해야했는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 일이 말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불고 티끌이 일어나고 구름이 가고 새가 나는 것까지 모두가 사람을 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뒤로 얼굴을 마주치면 그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지금보면 규장주는 그 스님을 놀려주려고 한 일이었지만 면시자는 여기에서 어떤 기쁨을 얻었다. 생각컨대 이는 부처님 생존 시 어느 법회에서 어린 사미승이 가죽공을 가지고 장난삼아 늙은 비구의 머리를 때려 사과(사과)를 깨치게 만들었던 고사와 함께 생각해볼 일이다.
37. 세 분 스님의 학인지도/ 동서 덕해(동서덕해)스님
방산(방산문보)스님이 정자사(정자사)에 주지할 때 대중을 위하여 개당하고 물었다.
”남전(남천)스님이 고양이를 죽인 일은 어떤가?”
이에 대해 여러 스님들이 말하였으나 모두가 맞지 않았는데 한 노비가 곁에 있다가 말하였다.
”늙은 쥐가 왕초가 되겠군요.”
이에 방산스님이 말하였다.
”좋은 말 [일전어] 이기는 하나 너의 입에서 나온 것이 걸맞지 않다.”
동서(동서덕해)스님이 영은사 주지가 되어 개당 법문을 하였다.
”물고기는 물을 생명으로 삼는데 무슨 까닭에 물 속에서 죽는가?”
한 스님이 말하기를 ”강물 속에서 잃은 돈을 강물 속에서 주웠노라.”하니 스님은 그를 깊이 수긍하였다.
석실(석실)스님은 설두사에 주지할 때 개당 법문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말 꺼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세 분 큰스님께서 학인지도에 쓰신 방법은 각기 다르지만 심장과 간장을 해부해서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를 바 없다. 후세에 이 글을 보는 자는 안목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이다.
38. 이발사 장씨와 바늘장이 정씨의 게송
이발사 장(장)씨는 이름이 덕(덕)이며 은현 하수(은현 하수) 사람이다. 대대로 사찰의 물자를 공급하는 장사로서 참선하기를 좋아하고 항상 대중을 따라 법문을 들었으며 스스로는 깨친 바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었다. 어느 날 눈이 내려 어린아이들이 눈을 뭉쳐 불상 만드는 것을 보고서 선승들은 제각기 게송을 지었는데, 장씨도 뒤따라 한 수를 읊었다.
꽃 한 송이 여래 한 분 받들고 나왔는데
흰눈 꽃송이 둥글둥글 보조개에 미소짓네
해골이 원래 물이었음을 알았더라면
마야부인의 태속에 들어가지 않았을 걸.
일화경출일여래 육출단단소검개
식득촉루원시수 마야궁리불투태
바늘 만드는 정(정)씨는 천태(천태) 사람으로 서암사 방산(방산)스님에게 공부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가 유리에 대하여 게송을 읊었다.
놔 버리든지
집어 들든지
한 점 신령한 빛
천지를 비추네.
방하방하 제기제기
일점영광 조파천지
이 두 수의 게송은 사물을 빌어 이치를 밝힌 것으로서 모두 경지에 이른 글이다. 내가 이를 함께 기록하는 까닭은 그들의 지위 때문에 말까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39. 계적 원(계적원)스님의 출가와 저술
호성사(호성사)의 계적 원(계적원)스님은 임해(림해) 사람이다. 서생(서생)으로 있을 때 마을 보장사(보장사)에 계시는 숙부 견(견)스님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능엄경”을 보게 되었다. “산하 대지는 모두가 묘명(묘명)한 진심(진심)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어 두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한참을 묵묵히 있은 후 스스로 긍정되는 점이 있어 부모에게 아뢰고 출가를 허락받아 경산사 적조(적조)스님에게 제자의 예를 드렸다. 스승을 위하여 두타행을 하였는데 갈수록 부지런히 닦았다.
세상에 나와 호성사의 주지가 되었으나 인연이 순탄하지 못하여 동당(동당)에 은거하면서 7년 동안 저서에 몰두하였다. “대보환해(대보환해)”, “법운통략(법운통략)”, “췌담(췌담)”, “우설(우설)”, “유석정화(유역정화)”, “대매산지(대매산지)” 등 모두 몇 권을 남겼으며 “불조대통부(불조대통부)”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폐결핵으로 입적하니, 그의 나이 43세였다.
40. 자기를 알아준 은혜에 보답하다/ 서암 요혜(서암료혜)스님
천동사(천동사) 서암(서암료혜:1198~1262)스님은 촉 땅 사람이다. 남쪽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경산사에 이르러 무준(무준)스님을 만났다. 거기서 서로 선기가 투합하여 무준스님은 입실을 허락하고 장주를 맡기려 하였으나 애써 막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튿날 고인이 된 눌(눌)시자의 기감(기감:다비식 때 관을 다비장으로 옮겨가기 위해 일으키는 행사) 의식이 있었는데 대중이 모두 겁을 먹고 말 한마디도 못하자. 무준스님은 유나(유나)를 시켜 혜(혜)시자를 기감을 주관할 사람으로 맞이해 오도록 하였다. 이에 혜시자는 감(강) 앞에 이르러 연거푸 세 차례 ”눌시자!”하고 불렀지만 이때도 사람들이 겁을 내자 그는 마침내 ”세번을 불러도 대답 없더니 과연 눌시자의 정수리에서 요천골(료천골)이 나왔구나!”하였다. 무준스님은 혜시자를 밀쳐내려는 자를 당장에 쫓아내고 혜시자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하도록 하였는데 혜시자는 바로 서암스님이다.
스님은 이에 앞서 영은사의 묘봉(묘봉)스님에게 귀의하였는데 그 당시 영은사는 동서 양 행랑 벽 위에 그려진, 선재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에게 도를 묻는 벽화를 다시 단청하는 불사가 있었다. 선승들이 제각기 게송을 지어 축하했고 스님도 게송을 지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자가 두루마리에 써넣어 주지 않았는데, 묘봉스님이 두루마리를 펼쳐보다가 물었다.
”혜시자의 게송은 어찌하여 없는가?”
”있기는 하나 두루마리에 수록할 만한 글이 못됩니다.”
”한번 일러 보아라.”
게송을 본 후 묘봉스님은 그것을 첫머리에 써넣어 주었고 그 후로 명성이 자자해졌다. 뒷날 천동사의 주지가 되어서는 환지암(환지암)을 새로 지어 노년에 은거할 계책을 세웠고 사당 한 채를 따로 짓고 묘봉선사를 봉안하여 자기를 알아준 은덕에 보답하였다. 벽화를 찬양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도 사방에 막힌 벽이 없으나
누가 오색으로 허공에 단청할까
선재동자는 눈 속에 뿌연 눈병 생겨
한 꺼풀 도려내니 또 한 꺼풀 생겨나네.
행시십방무벽낙 수장오채회허공
선재안리생화예 거각일중첨일중
41. 고림(고림)스님 회하의 여름결제에서
호령강(호영강)은 고림(고림청무)스님의 제자이다. 고림스님이 요주(요주) 영복사(영복사)에 주지로 있을 때, 영강은 수좌승으로 여름 결제에서 불자를 잡았는데 한 납승이 나와서 물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담장에 부딪친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어떻게 됩니까?”
”구덩이 속에 떨어진다.”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리에 서서 죽을 놈이다.”
어느 사람이 방장실을 찾아가 ”수좌가 불자를 잡고 선객에게 답한 세 마디 [삼전어] 는 모두 기연에 맞는 말이었습니다.”하고 칭찬하자 고림스님이 말하였다.
”어느 곳이 좋단 말이냐? 듣지 못하였는가. 한마디 맞는 말이 만 겁에 노새 매는 말뚝이라는 말을.”
그러나 곧이 곧대로 알아들어서는 절대 안된다.
42. 쌍청의 종문을 드넓혔을걸 [능회쌍청]
담 천연(담천연)은 천력 개원(천역 개원:1328)에 봉산사 일원(일원)스님 회중의 윗자리 [전판]에서 불자를 잡았으며 제창할 법문을 일원스님에게 미리 바쳤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상봉산 앞을 흰구름을 바라보며 걷노라니 구름은 걷히고 다시 퍼지며 우천정(우천정) 위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 앉아 듣노라니 때로는 시끄럽다가도 다시 잠잠하여라. 눈으로 보는 곳에서 귀로 듣는 불사를 하고 귀로 듣는 곳에서 눈으로 보는 불사를 해야 관세음보살 뿐만 아니라 나도 그 가운데서 깨침을 보리라 [변견…]
일원스님이 “볼 수 있으리 [변견] '라는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이 두자가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 되니, 이 두 글자가 없어야 비로소 나의 말이 된다고 하자 천연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를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환단(환란:신선의 신약) 한 톨이 무쇠를 황금으로 만든다는 옛 말은 우리 스님을 두고 한 것이다.”
천연스님은 동서(동서)스님 문하에 뛰어난 제자로서 외모와 규범이 늠름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세간에 나와 지당(지당) 명인사(명인사)의 주지를 지내다가 입적하였으며 민중 겸(민중겸)스님과 함께 명성을 드날렸다. 민중 겸스님은 도력이 높고 성품이 훌륭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자였으며 동정 취봉사(취봉사)의 주지를 지내다가 입적하였다. 만일 조물주가 이 두 스님에게 장수를 누리게 했었더라면 마치 회당(회당)스님의 문하에 사심(사심), 영원(영원) 두 스님이 있었던 것처럼 분명히 쌍청(쌍청:영원유청, 초당선청)의 종문(종문)이 넓어졌을 것이다.
43. 사치스럽고 포악한 주지/ 혁휴암(혁휴의)
혁휴암(혁휴의)은 양주(양주) 사람이다. 젊은시절, 회전(회전), 연경, 오대산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흉년을 만나 상선을 얻어 타고 명주(명주)에 왔다가 천동사의 객승이 되었다. 낡고 헤진 승복을 입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밤을 새워 정진하니, 옛 스님의 의젓한 풍채가 있었다.
봉화(봉화) 상설두사(상설두사)에 주지자리가 비어 대중이 글을 올려 주지가 되어달라고 청하니, 혁휴암은 흔쾌히 수락하고 삿갓 하나만을 들고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방장실에 앉아 돈과 양곡을 관장한 지 일 년이 못되어 지난날 하던 것이 모두 바뀌었다. 허수룩하게 낡은 승복은 이제 가벼운 털옷으로 바뀌었고, 지난 날 하던 한 끼 공양은 이제 진수성찬으로 널려졌다. 그리고 좌우 사람들이 자그마한 계율이라도 범하기만 하여도 성을 내며 스스로 일어나 몽둥이로 때리고 그가 땅에 엎어지면 다시 직성이 풀릴 때까지 실컷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다. 이윽고 사원의 진귀한 물건들을 모조리 긁어다가 은성(은성) 민가를 사들여 암자로 바꾸고 그곳에 살면서 날마다 재산 불리는 일만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죽림사(죽림사) 승려들과 가옥관계로 관청에 소송이 제기되어 부정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요즘 불문에서 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바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욕을 끼치는 자들이 어찌 혁휴암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시전(시전)에 의하면, 처음엔 잘하지 않는 자가 없지만 끝마무리를 잘짓는 사람은 적다고 하였으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담에 의하면, 사람에겐 닦아서 얻을 수 있는 복이 있고 연장하여 얻을 수 있는 수명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일세(일세)만을 가지고 이 속담을 논한다면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삼세(삼세)로 확실하게 논한다면 그 근원은 알 수 있겠지만 그 변화는 통달할 수 없다. 변화란 일세가 삼세를 포괄할 수 있고, 삼세가 일세에 실현될 수도 있는 것으로서 삼세인과와 일세인과가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심에서 짓고 받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세상 사람 가운데 선행을 하는 자가 도리어 미천하거나 요절하고, 악을 자행하는 자가 도리어 복받고 장수를 누리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전생에 많은 선을 행한 자가 현세에 비록 악한 일을 하였다 해도 현세의 악이 전생의 선을 이기지 못한 까닭에 복을 받고 오래 사는 것이며, 전생에 많은 악을 행한 자는 비록 현세에 선을 행하였다 하지만 현세의 선행이 전생의 악을 이기지 못한 까닭에 비천하고 요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세의 선악과 대한 과보 또한 내생(래생)에 있는 법이다. 혹시 전생의 선행이나 악행이 그리 무겁지 않아서 현세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많다면 미천함과 요절은 복과 장수로 변하고, 복과 장수는 미천함과 요절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변화에 통달하여 삼세인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일심이 짓고 받는다는 이치에 어두워 현세의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44. 인과 변화의 이치, 수행과 기도의 영험/ 고정(고정)
경산사 고정(고정)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난장이에 입술은 위로 뒤집혀 있어 이와 잇몸이 드러나 보이고 목소리는 맑지 못하며 피부는 거치르고 메말랐었다. 어느 관상가가 그의 얼굴을 보고 점치기를,
”네 가지 천한 모습이 난장이의 몸에 모여 있으니 이 사람 일생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계기로 마음에 맹세한 후 관음대사(관음대사)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낮에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외우고 밤에는 보살 앞에 몇천 배를 올리면서 20년 동안을 이렇게 수행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천한 모습이 복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입술은 펴지고 이는 보이지 않았으며 목소리는 부드럽고 피부는 윤택하게 되었다. 그후 지난 날의 관상가를 또다시 만났더니 축하하였다.
”스님의 이제 모습은 옛 모습이 아닙니다. 더구나 벼슬할 수 있는 주름살이 생겨났으니, 머지않아 높은 자리에 올라 선풍을 크게 떨칠 것입니다.”
그 해에 융교사(륭교사)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으며 다시 융교사에서 보타사(보타사)로 옮겨갔고 보타사에서 또다시 중축(중축)경산사의 주지로 승진되어 5년이 채 안되는 사이에 세 차례나 자리를 옮겼고, 경산사에서 12년간 주석하다가 79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의 수행과 기도의 효험은 복과 수명을 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습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마치 남의 집 창고에 물건을 맡겨 두었다가 찾아오듯 쉽사리 이러한 일을 해내 우리처럼 게으른 자를 격려했다고 할만 하다.
45. 자택사(자택사) 창고지기 방 벽에 써 붙인 글
혼원(혼원)스님이 자택사(자택사)에 주지할 때였다. 고사(고사:창고 관리업무)가 거처하는 방의 벽 위에 벽기(벽기)를 쓰고 다시 그 끝에 덧붙였다.
물 한 방울 쌀 한 톨도
대중에게 속하는 물건이니
사람마음 즐겁게 하도록 힘쓰라
없는 살림 지탱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털 쓰고 뿔 돋힌 짐승의 업보를 생각해 보라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면
인과에 밝은 사람이 나와
다행히 이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적수립미 진속중승
무열인정 리난지파
당사피모대각 세월구장
명인과인 행의지실
스님의 글씨는 오랜 세월에 퇴색되어 거의 마멸되었는데 뒤에 일산(일산)스님이 그 자리를 이어 벽을 다시 단장하고 직접 이 글을 써서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오로지 잇끝만을 도모하는 자는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46. 문 닫고 사는 설법/ 노소(로소)수좌
노소(로소)수좌는 일생동안 문을 닫고 은거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원 천력(원 천역:1329~1330) 연간에 어느 한 선객이 노소수좌가 친필로 산에 은거하면서 나오는대로 회포를 적은 게송 세 수를 얻어 스승 귀원(귀원)스님에게 착어(착어)를 부탁하자 귀원스님이 말하였다.
”총림에서는 그가 세상에 나와 설법하지 않았던 점을 유감으로 여기지만 이제 이 세 수의 게송을 읽어보니 마치 큰 범종을 한번 치면 모든 소리들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어찌 그가 설법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게송이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대로 몇 수를 기록해 본다.
전등록 읽다 보니 구렛나루 먼저 희고
애써 공부 다워온 지 몇 낙차(낙차:십만 년)인고 튀 튀
낮잠 자다 깨어보니 책상 위엔 먼지만이 가득한데
처마 끝에 반쯤 드는 한가한 햇살 아래 뜨락의 꽃이 지네.
전등독파빈선화 공업유쟁기낙차
오수기래진만안 반첨한일낙정화
뾰족한 지붕 낮게 고치지도 않고
위에는 긴 숲이 있고 아래엔 연못 있으니
깊은 밤 놀란 바람 노란 잎새 휘날려
오히려 쑥대밭에 내리는 비소리 같아라.
첨두옥자불교저 상유장림하유지
야구경표략황엽 각여봉저우래시
덧없는 세상, 세월 얼마 남지 않아
애오라지 시를 쓰며 또 세월을 달래본다
오늘 아침 솔나무 아래에서
서풍을 등에 맞고 가마귀 수를 헤아려 본다.
부세광음자불다 제시료복답연화
금조아재장송하 배립서풍수란아
47. 청소하는 눈 먼 수좌/ 나한사(나한사) 증(증)수좌
안산(안산) 나한사(나한사)의 증(증)수좌는 눈은 멀었지만 도안(도안)은 명백하였다. 그는 아침마다 마당쓰는 것으로 불사를 삼았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
”이 한조각 땅뙈기를 말끔히 쓸었는가?”
증수좌가 빗자루를 세워 보였다. 또 다른 스님이 물었다.
”진짜 깨끗한 곳은 본디 한점 티끌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청소를 하는가?”
또다시 증수좌는 빗자루를 세워 보였다.
요청(락청) 지방에 구우산(구우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증수좌는 이 산에 대하여 게송을 읊었다.
너덧 봉우리 무리를 이룬 지 몇 해던고
봄 가을 겪어오며 바람과 아지랑이로 배불렸네
맑은 연못 물을 언제 한번 마셔볼까
푸른 들판 갈지 않은 채 긴 잠에 취해 있네
낱낱의 발꿈치를 모두 땅에 붙이고서
하나하나 콧구멍은 먼 하늘에 솟아있네
보통 천봉의 정상에 서 있으니
온누리 사람 온다한들 어떻게 끌고갈까.
사오성군지기연 춘래추거포풍연
청지유수하증음 록야불경장자면
개개각근개점지 두두비공진료천
심상지재천봉정 대지인래작마견
48. 귀원(귀원)스님의 문하
귀원(귀원)스님이 천복사(천복사)의 주지로 있을 때, 어느 날 저녁 문하의 스님들과 차를 마시면서 소동파(소동파)가 장산사(장산사)의 불혜 천(불혜천)스님을 방문하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천스님이 소동파에게 물었다.
”선비는 성씨가 무엇이요?”
”저울(칭)이요.”
”무슨 저울?”
”천하 노스님의 혓바닥을 재는 저울이요.”
이에 천스님께서 악!하고 할을 한 뒤,
”이 할은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말해보라”고 하니 동파가 말이 없었다.
귀원스님은 스님들에게 각기 소동파를 대신하여 한마디 해보라고 하였다. 당시엔 대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로지 원(원)장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촛불을 껐고 일(일)시자가 한 차례 기침소리를 내니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다.
”원장주는 촛불을 끄고 일시자는 한 차례 기침소리를 냈겠다!”
이 말에 뒤이어 정(정)장주는 스님께서 한마디 해달라고 청하니 스님이 말하였다.
”아마 네가 한다해도 이 범주를 넘지 못할 것이다.”
원장주는 뒷날 온주(온주) 수창사(수창사)의 별원(별원)스님이었으며 일시자는 명주(명주) 천동사(천동사)의 요당(료당)스님으로서 두 사람 모두가 귀원스님의 법통을 이었으며 정장주는 바로 대자사(대자사)의 천우(천우)스님으로 축서(축서)스님의 문하에 있었다.
원 지정(원 지정:1341~1367) 연간에 강제(강:강성) 행성(행성)의 승상 달세철목이공(달세철목이공)이 선정원(선정원)일을 겸직하였는데 행성(행성)의 일을 발표하면서 스님에게 두번이나 격문을 보내 천동사와 경산사의 주지로 삼으려 하였지만 스님은 모두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49. 수창사(수창사) 별원 법원(별원법원)스님의 인품
온주(온주) 수창사(수창사)의 별원(별원법원)스님은 봉화 사람이다. 오랫동안 귀원(귀원)스님에게 귀의하여 불법을 이으려는 일념으로 다른 길을 걷지 않았다. 무제 본(무제본)스님이 강심사(강심사) 주지로 있을 무렵 노년에 그에게 주지 일을 분담하여 납자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가 백학사(백학사)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가게 되자 무제스님은 후한 예우로 법제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별원스님은 웃기만 할 뿐, 은혜에 보답하는 첫 향불을 귀원스님에게 올리니 총림에서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다. 스님은 주지 자리를 세 차례나 옮겼는데 사찰에 들어가면 먼저 객승채를 수선하고 필요한 모든 물건을 갖추어 놓아 그곳을 찾는 운수납자들은 마치 자기 방에 들어간 듯하였다. 67세에 가벼운 병환이 있었는데 제자인 선암사(선암사)의 호(호)장로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문득 돌아가셨다.
50. 선종사찰을 교종사찰로 바꾸려는 계획을 막다
/ 각암 몽진(각암몽진)스님
고소산(고소산) 승천사(승천사)의 각암(각암몽진)스님은 종지와 설법에 모두 통달하여 사람들은 그를 “작은 대혜선사'라고 일컬었다.
원 지원(원 지원:1335~1340) 연간에 화엄종의 강주(강주)모씨가 조정에 아뢰어 강남지방의 양절(량절)에 있는 유명한 사찰을 화엄종 사찰로 바꾸고 교종사찰의 서열을 선원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 놓고자 조정의 윤허를 받들고 남방으로 내려오는 길에 승천사를 찾았다. 그 이튿날 각암(각암)스님이 법당에 올라 그를 위하여 법문을 하였는데, 화엄경의 전체 종지를 광범하게 인용하여 종횡무진으로 설법하면서 여러 스님들의 논의나 해석의 잘잘못을 마치 손바닥보듯 명확하게 분석해내니 그 당시 화엄종의 강주는 여태껏 듣지 못했던 바를 듣고 큰 법익을 얻었다. 그리하여 “승천사처럼 작은 사찰의 장로마저도 이런데 더구나 항주 큰 사찰의 종사(종사)는 어떻겠나'하고는 되돌아갔다. 다시 상소를 올려 앞서 내린 어명을 중지케 하였는데 실로 각암스님의 힘이었다.
51. 전쟁 때 잃은 어머니를 찾아/ 승도(승도)스님
승도(승도)스님은 오흥(오흥) 사람이다. 원나라가 강남을 공격했을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자 도스님은 고아가 되어 백부가 길렀다. 그의 나이 14세가 되자 백부에게 “사람마다 부모가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부모가 없느냐'고 묻자 백부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는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하고 다시 물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너와 닮은 얼굴이다.”
그는 마침내 거울 하나를 지니고 이발기술을 익혀 먹고 살 밑천을 삼으면서 10년 동안 찾아 헤매었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생각지 않게 하간부(하간부) 장원현(상원현)에 이르러 말 키우는 늙은 군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의 어머니를 사로잡아간 자였다. 그를 따라 그의 집에 돌아가서 미처 앉기도 전에 밖에서 들어오는 한 노파가 있었는데 남부지방의 말씨가 섞여 있었다. 도스님은 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을 비춰보니 그 노파와 비슷하였다. 얼른 큰 절을 올리면서, 어머니 하고 부르자 노파는 고향과 성명과 생년월일 등을 물어 보았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이에 모자는 서로 부둥켜 안고 크게 울었으며 마을사람들이 모여 지켜보았다.
열흘쯤 머문 후 도스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그 집안의 늙고 어린 가족들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몰래 도망하여, 양주(양주)에 이르러서 작은 가마를 구하여 그 속에 어머니를 앉히고 가마를 메고 갔는데, 열 걸음 걸을 적마다 한 번씩 쉬면서 사방에 큰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엔 어머니께 절하였다. 곧장 사명(사명)의 보타산(보타산)에 이르러 관음대사현상(관음대사현상)에 기도드린 다음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도스님이 출가하려 하자 모친은 그를 허락하였는데 얼마 후 모친이 죽어 화장하자 잿속에서 작은 옥으로 만든 관음상 일구(일구)가 나왔으며, 지금까지도 이를 의흥(의흥) 남문 밖 정사(정사)에 봉안하여 공양을 올리고 있다. 그 정사는 도스님이 지은 절이다.
52. 두 스승에게 천태와 선의 종지를 공부하다
/ 아암 무(아암무)법사
상천축사(상천축사)의 아암 무(아암무)법사는 황암(황암) 사람이다. 방산(방산)스님에게 귀의하여 삭발하고 중축사(중축사) 적조(적조)스님을 찾아뵙고 문서에 관한 일을 보면서 시봉하였다. 그의 외숙은 태학(태학)의 원로 선비였는데 그를 잡아당겨 개종하도록 하니, 그는 연복사(연복사)의 담당(담당)스님을 찾아뵙고 열심이 교학을 연구하였다. 적조스님은 그가 떠난 것을 애석히 여겨 게송을 보냈다.
교에서 선으로 들어오는 것은 예나제나 있는 일이지만
선에서 교로 들어가는 것은 고금에 없던 일
일심삼관(일심삼관)이 문이 다르다 하지만
천강에 물은 가득한데 달만이 외롭구나.
종교입선금고유 종선입교고금무
일심삼관문수별 수만천강월자고
뒷날 세상에 나와 담당(담당)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뒤이어 한묶음의 향을 올려 적조스님에게 보답하였으니 발자취가 다르다 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다. 적조스님이 입적할 무렵 스님은 사명 땅 연경사(연경사)의 주지로 있었는데, 적조스님은 그에게 대소(대소:천태)와 소림(소림:선종) 이가(이가)의 종지를 넓히는 데 힘써 줄 것을 유서로 부탁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스님은 또한 적조스님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말하였다.
묘희의 오대 후손 중 가장 빛나는 불꽃
적조스님은 이 시대 감로*문일세
슬쩍 부딪치기만 해도 간뇌(간뇌)가 터지고
차가운 얼음 위에 갑자기 따뜻한 봄볕
내 생각하니 콧구멍을 잃어버린 날에
무슨 숨이 지금껏 남아 있겠소
북풍이 불어 오는 날 이 해도 저무는데
번갯불이 친다한들 공중에 무슨 흔적을 찾아볼까.
묘희오전최광염 적조일대감로문
등한촉저간뇌열 빙설홀작양춘온
아사타실비진일 시하기식금유존
천풍배래세운모 체전토심공중흔
그는 얼마 못살고 아무런 병 없이 백운당(백운당)에서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53. 능력과 상황에 맞게 소임을 안배하다/ 천동사(천동사) 동암(동암)스님
동암(동암)스님은 강서(강서) 사람으로 81세에 사부대중의 추천으로 천동사(천동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 당시 천동사는 몹시 퇴락해 있었는데 스님은 노년에 중임을 맡아 편안히 기거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그의 문도 동(동)․원(원)․경(경) 세 사람을 불러 각자에게 일을 분담시켰다.
”동아! 나는 강서 사람들과 인연이 있으니 네가 그곳을 찾아가 나의 뜻을 대신 전하여 재화(재화)를 얻어 만수건원보각(만수건원보각)을 세우고 구리로 여래불상 천 구와 아울러 공양구를 주조토록 하라. 이 일은 네가 맡아 할 일이다. 원아! 너는 관리들의 일을 잘 알고 있으니 관청 일을 네가 맡도록 하라. 경아! 너는 조심스러워서 위아래로 화목하니 병들고 수척한 이를 살피는 일은 너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의각(의각:조사의 의발을 보관하는 곳)을 지키도록 하라.”
그 후 5년이 채 안되어 건물이 준공되고 불상이 조성되었으며 나머지 재산을 가지고 상산(상산) 지방의 바닷가에 뚝을 막아서 사찰의 식량으로 쓰게 하니, 관청도 무사하고 상하 간이 화목하고 엄숙하였다.
비록 동․원․경 세 사람의 힘이라 하지만 스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쉽사리 이뤄질 수 있었겠는가? 요즈음 스승들을 살펴보면 그의 무리를 살찌우는 데만 힘쓸 뿐, 절이 퇴락해도 마치 길손이 길가의 버려진 헌집을 바라보듯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괴이한 일이라 하겠다.
54. 하안거 결제법문에서 소임맡은 제자들에게/ 단교(단교)스님
단교(단교)스님은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납자들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국청사(국청사)의 주지가 되던 날 영상담(영상담)을 수좌로, 구고전(구고전)을 서기로 삼았다. 당시 장주의 성명은 전해오지 않는다. 여름 결제 때 불자를 들고 법당에 올라 인사말을 한 다음 법문을 하였다.
”수좌는 선배 스님들에 비해 칭찬할 만하지 못하고 서기가 하는 법문은 마치 인물을 그릴 때 모든 것을 다 그려놓고 눈동자를 찍지 않은 격이며 장주가 하는 법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러고서도 뒷날 나는 노승의 법회에서 소임을 보다가 왔노라 하겠지!”
그는 불법 주관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불법을 손상한다거나 후학을 오도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비록 말로는 그들을 눌렀으나 실제로는 그들을 일으켜주었다. 오늘날 불법을 주관하는 자들은 자신의 안목은 밝지 못하면서 사탕발림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 데 힘쓰고 그들이 감동하여 법제자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 만일 단교스님이 이런 속된 짓을 보았더라면 어찌 침을 뱉고 욕을 하는 데 그쳤겠는가.
55. 아들 둘 낳고 출가하여 도를 이루다/ 희길상(희길상)
진강(진강) 보조사(보조사)의 희길상(희길상)은 산동 사람으로 피부가 새까맣고 깡말라 인도 승려와 비슷하였다. 젊은 나이에 부모에게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부모는 후손을 잇지 못하는 죄 크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인을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은 뒤에야 승려가 되어 유식업(유식업)을 주로 익혔다. 지원(지원) 25년(1294)에 설선황제(설선황제:원 세조)는 강회(강회) 지방에 36군데에 어강소(영강소)를 창건하였는데 보조사(보조사)도 그 중의 하나였으며 그곳 주지로 스님을 명하였다. 스님은 강설하는 일 말고는 “화엄경” 10권씩 읽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운남사(운남사)의 단 무념(단무념)스님과 교류하였는데 무념스님은 유식종의 종장이었다. 두 사람이 불법을 자세히 논하다가 무념스님이 조금치라도 오류를 범하면 법사는 바른 말로 고쳐주었으며 무념법사는 진심으로 굴복하였다.
열반 후 다비를 하니 많은 사리가 나왔는데 그의 문도가 유골과 사리를 거두어 검은 옷칠을 먹인 함 속에 20년 간 모셔오다가 비로소 단도(란도) 땅 우산사(우산사)에 부도탑을 세웠다. 그런데 부도탑에 사리를 넣으려던 날, 함을 열어보니 사리는 함 속의 보자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마치 벌이 모여 있는 듯, 개미가 모여 있는 듯하였으며 만져보니 빛이 찬란하였다. 진강(진강)지방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그려 사당에 모신 사람이 많았으며 그를 “길상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56. 생전에 불법을 닦으면/ 자안(자안)스님
명주(명주) 해회사(해회사)의 승려 자안(자안)스님은 원 지정(원 지정) 계묘년(1363) 가을 보당(보당) 저자 위의 산을 사들여 암자를 지으려고 터를 닦다가 세 개의 옛 무덤 구덩이 [광] 를 발견하고서도 흙으로 메운 후 암자를 지었는데 그 뒤에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풍도(з도)에 들어가니 옛 의관을 갖춘 세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자안의 죄를 참소하였다.
”자안(자안)은 전생의 성이 조(조)씨며 이름은 사굉(사굉)인데 지난날 관리로 있으면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명을 씌워 우리를 먼 곳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그 당시 함께 굴욕을 당한 사람이 네 명이었으나 이미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생전에 불법을 닦은 인연으로 죽자마자 제도되었으나 우리 세 사람은 죽은 후 모두 이곳에 안장되었는데 이제와서 또다시 우리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니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원래 우리는 힘을 합해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그가 관리로 있을 때 80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기에 이 생에 그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염라대왕이 자안을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한 후 그들의 땅을 되돌려 주라는 꾸지람을 듣다가 꿈속에서 깨어나니 어디선지 ”진실한 말을 어기지 말라!”하는 소리가 세 차례나 들려왔다. 이튿날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고 영고목(영고목)스님을 명하여 계법(계법)을 설하였는데 그 뒤로 자안은 쾌유되었다. 자안은 마침내 암자를 헐고 다시 옛 무덤을 만들어 준 후 그곳을 떠났다.
57. 염불공덕을 체험하고 신심을 내다/ 사첨사(사첨사)
사첨사(사첨사)는 단성(단성) 사람이며, 이름은 전(전), 자는 형보(형보), 아버지 헌부(헌부)는 남대장부(남대장부)이다. 나는 지정(지정) 신축(1361)년 은성(은성)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는 불가의 염불 공덕이 매우 크다고 극찬하였고 이어서 자기가 두번이나 직접 본 일이며 거짓이 아니라고 하였다.
연경(연경)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지천주(지천주)를 외웠다. 어느 날 저녁 눈썹이 긴 노인이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나는 사람이 아니고 용인데 비를 잘못 내린 죄로 상제께서 꾸지람을 받았으니 한 번만 비호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무슨 성인이라고 당신을 비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대는 항상 지천주를 간직하므로 공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하고는 말을 마치자 노인은 없어졌다. 며칠 후 우연히 왼쪽 엄지 손가락 손톱 밑이 따끔따끔 아프기에 살펴보았더니 가느다란 선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3․4푼(분) 정도였으며 색깔은 붉고 모양은 용과 같았다. 그 선비는 예전과 같이 주문을 외웠는데 그날 밤 노인이 또다시 나타나 감사를 표하고, ”비호해 주신 덕에 상제의 꾸지람을 피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지금 창 밖으로 손을 뻗어 보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창 밖으로 손을 뻗자 순식간에 우레와 비가 쏟아지면서 용 한 마리가 하늘에 솟구쳐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제령(제령) 땅에 신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좌선을 좋아하여 20여 년을 하였다. 하루는 집사람들에게 ”나는 간다”하고서 앉은 채 죽었다. 가족들이 그의 몸을 밀쳐 베개 위에 누이자 ”이러지 말라, 이러지 말라,”하고서 벌떡 일어나 연못으로 뛰어들어가 죽었다. 그 후 친구가 연못에 찾아오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생시처럼 함께 이야기했으며 어떤 때는 술을 달라고 하기도 하였다. 연못에 술을 부어주면 곧 사례를 표하면서,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스님이 걸식차 그의 집에 왔다가 연못에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20년 동안 참선한 공부가 어디에 있느냐?”고 호통을 치니 이때부터 연못이 고요해졌다고 한다.
사씨가 노년에 부지런히 참선과 염불을 한 것은, 이 두 가지 일로 해서 신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58. 남편과 맞지 않아 발심수행을 하다/ 유안인(유안인)
홍무(홍무) 5년(1372) 내가 상우(상우)지방을 돌아다니다가 개호(개호) 적경정사(적경정사)에서 여름안거를 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백관시(백관시)에서 유안인(유안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서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과 맞지 않아 발심하여 정토 수행을 닦아온 지 7, 8년이 되었습니다. 근래 1,2년 사이에 마음을 맑게 하고서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공중에서 가냘픈 음악소리와 황새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에 내 스스로는 훌륭한 경지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이 마의 경계[마경]라 하니 스님께서 결정지어 주십시오.”
내가 말하였다.
”이는 그대가 경에서 “백가지 보배의 가로수에 바람이 부니 그 소리는 마치 백천가지 음악과 같고 많은 새소리가 일시에 일어나는 것 같다는 문장을 보고 그 말을 독실히 믿어 그 생각이 팔식(팔식)에 뿌리 깊이 내려 제거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고요한 선정 가운데에서 이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뒤에 이러한 경지를 보게 되면 그것이 훌륭한 경지라거나 마의 경계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당장 그 자리에서 끊어버리면 비로소 마음이 정토이며 본성이 미타로서 온통 그대로가 다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십만억 리 머나먼 국토 바깥에 있겠는가”
이에 유안인은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젠 의심덩이가 풀렸습니다.”
59. 추강 담(추강담)선사의 산 제사
태주(태주) 광효사(광효사)의 추강 담(추강담)선사는 황암 단강(황암 단강) 사람이다. 어려서 고향 화성사(화성사)에서 잡역을 하다가 삭발하였다. 절의 오른쪽에 송암(송암)이라는 높은 암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법륜사(법륜사)터가 있었다. 이는 오대(오대)시대에 근(근)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오랫동안 황폐하여 유적이 잡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그곳에 이르러 구경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처량한 감회에 젖어 마치 오랫동안 객지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마음에 차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에 그 곁에 있는 큰 바위 아래에서 선정(선정)을 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식을 전해 듣고 서로 음식을 보내오고 재물을 내서 공사를 시작하여 사원을 일으키니 몇 해가 되지 않아 총림을 이루게 되었고, 또한 사원의 뒤 언덕에 부도를 세워 사후 일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문도를 재촉하여 부도가 완성되었는지를 묻고 사람을 보내 그 절에 다니던 사람들을 두루 초빙하여, 약정한 날에 모두 산사에 와서 결별을 나누자고 하였다. 약속한 날이 되어 승속이 모두 모여 들자, 스님은 법륜사 주지 신도원(신도원) 등에게 음식을 마련하여 살아 있는 사람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노인이 노망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스님은 더욱 재촉하였다. 하는 수 없이 조촐한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니 스님은 당상에 앉아 음식을 받고 나머지 음식은 신도와 대중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신도원 스님등이 제문을 읽으면서 통곡을 하자 스님도 눈물을 흘리면서 일어나 관 속으로 들어가 편안히 좌정하였다. 이때 시주 주형지(주형지)가 관음상을 들고와 찬(찬)을 써달라 청하고 대중들이 열반게를 청하니, 스님은 거침없는 필치로 써준 후 조금 있다가 입적하였다. 이 날은 4월 23일이었다. 스님은 육신이 차갑게 식기 전에 흙을 얹으라고 유언하였지만 대중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 이튿날에야 관을 덮고 그 위에 부도를 세웠다. 스님의 속성과 사법관계 주지살이 등은 모두 용장준(용장전)스님이 쓴 그의 전기에 나온다고 한다.
60. 무고를 당한 독실한 수행자/ 급암 종신(급암종신)선사
도량사(도장사) 급암 신(급암종신)선사는 무주(무주) 사람이다. 앙산사(앙산사) 설암(설암)스님의 법제자이며 독실한 수행이 있었으므로 생사 도리를 규명하려는 천하의 선승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그 중에는 몇 명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들 또한 그 앞에 나아가 제자 명단에 끼어 대중을 따라 설법을 들었다.
그런데 무뢰한들이 스님에게 소임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스님이 비구니를 가까이하여 사사로이 난행을 범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스님은 항주로 추방되어 오백가(오가)에 구금되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아무런 병도 없이 입적하였다. 이에 다비를 하니 정교하고 아름다운 사리가 빛났으며, 무고한 자는 도리어 처벌을 받았다. 영은사(영은사)의 평산(평산)스님은 그의 법을 이었다.
61. 젊은 패기에 휘둘린 시자, 너그럽게 봐주지 않은 스승
/ 설암(설암)스님과 무준(무준)스님
앙산사 설암(설암)스님은 무주(무주)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남달리 뛰어나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다. 젊은 시절 경산사 무준(무준)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때마침 범종을 주조하여 그에게 소(소)를 청하자 스님은 게송을 지어주었다.
온 몸통이 오직 하나의 입인데
백번 달군 풀무 속에 물흐르듯 흘러나온다
범종소리 농울져 석양을 돌려보낸 뒤에
또다시 밝은 달을 누대 위로 오르라 재촉하네.
통신지시일장구 백련련중곤출래
단송석양귀거후 우최명월상루대
이에 무준스님은 그에게 시자의 소임을 맡겼다. 소임이 만기가 되자 무준스님은 그 직책을 대신할 사람을 청해 왔는데 설암스님은, 이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스님은 무준스님이 보낸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멀리서 보고, 창문에 엎드려 심한 구토 소리를 냈다. 무준스님은 그의 마음을 알고 일부러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아이는 복이 없는 놈이다. 시자직을 그만두자 피 토하는 병까지 걸렸구나!”
하고 크게 성을 냈으나 설암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지로 세상에 나왔을 때, 여러차례 법을 잇는 향불을 올렸지만 어느 분을 위한 것이라고는 밝히지 않고 이런 말을 했다.
”낡은 좌복 위에서 땅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졌으니,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는 다시 향을 품 속에 넣고 법좌에 앉았다. 그가 앙산사의 주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무준스님을 위하여 향을 올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준스님이 스승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설암스님은 당시 젊은 나이에 패기에 휘둘린 것이며 무준스님은 당대 큰스님으로서 너그럽게 참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리가 이처럼 어긋나게 된 것이리라 여겨진다. 큰 사찰을 맡아 불자를 잡는 주지들은 이 일을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62. 중봉(중봉)스님의 수행과 깨침
중봉(중봉)스님은 항주 사람이다. 스승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구족계)를 받은 후, 참구해서 고인이 이룩한 깊은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당시 고봉(고봉)화상이 앙산사 설암스님의 허가를 얻어 천목산(천목산) 사자암(사자암)에 주석하면서 사관(사관)을 세워 결코 선승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봉스님을 한 차례 본 후 크게 기뻐하여 화두를 내려주었고 중봉스님도 힘써 정진하며 의문나는 점을 물었다. “금강경”의 ”여래의 무상정각을 짊어지고 [하담여래아누다나삼막삼보제] ”라는 구절에서 환히 깨치고 이때부터 막힘없는 지혜변재를 지녀, 위로는 군왕․재상, 아래로는 삼교(삼교)의 준수한 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성을 다해 도를 물었다. 그가 저술한 책과 어록 몇 권은 제자 칙천여(칙천여)스님이 두루 수집하여 조정에 올려 대장경에 수록하였고 보응국사(보응국사)라는 법호를 추증(추증)받았다.
스님의 풍채는 거룩하였고 조금이라도 머리를 숙이면 호흡이 고르지 못하여 항상 바로 보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법어를 청하면 두 사람의 스님에게 종이를 마주들게 한 후 붓 가는대로 글을 써주었다.
63. 포납(포납)선사의 원숙한 문장력
포납(포납)선사는 명주(명주) 정해(정해) 사람이며, 고봉스님의 법을 이었다. 일찍이 영명(영명)스님의 “산거시(산거시)”에 화운(화운)을 하였는데 그 의미야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문장력은 원숙하여 때로는 원운(원운)보다도 훌륭한 부분이 있었다. 임종 때 게송을 써놓고 중천축사(중천축사) 계자당(계자당)에서 가부좌한 채 서거하였는데 다비를 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
64. 탁발승 성지암(성지암)스님
성지암(성지암)스님은 항주 호포사(호포사)의 주지이다. 처음엔 포납(포납)스님을 모시다가 뒤이어 천지사(천지사) 원옹 신(원옹신)스님을 찾아뵙고 깨우친 바 있어 그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호포사는 원래부터 살림살이가 가난했는데도 수십 명의 승려가 살았으므로 스님은 매일 탁발을 하여 절 살림을 꾸리면서 혹한과 무더위 속에서도 전혀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년에 병으로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다.
65. 청빈하게 살다 간 말세의 선지식/ 석옥 청공(석옥청공)스님
석옥 공(석옥공)스님은 도량사(도장사) 급암(급암)스님을 친견하고 뒤에 오흥(오흥) 하포산(하포산)에 은거하였는데 청빈한 생활로 시주를 바라지 않았으며 궁하면 밥을 먹지 않고 물만 마셨다. 인품이 자애롭고 자상하여 중생을 아껴주었고 게송을 짓고 일깨워주는 말도 많이 하였으니, 그는 참으로 말세의 선지식이었다.
66. 옛 터에 암자짓고 분수껏 살다/ 무견(무견)선사
무견(무견)선사는 선거 섭(선거엽)씨의 아들로, 대대로 유학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준수한 재주를 지녀 천령사(천령사) 고전(고전)화상의 내기(내기)로 있다가 서암사(서암사) 방산(방산)스님 회하에서 참구하여 그의 법요를 모두 터득하고서는 마음을 바꿔 가(가)장주를 데리고서 함께 송대 고암(고암)스님이 주석했던 화정산(화정산) 옛 터를 찾아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때부터 그의 법이 크게 퍼져 학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승속이 모두 토지가 없으면 대중을 수용할 수가 없다고 여겨 간혹 토지문서를 시주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스님은 모두 물리치고 겨울과 여름을 날 승복 한 벌로 지냈다. 공양이라고는 오로지 허기진 배를 채우면 족하였으며 좋고 나쁜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입적 후 다비를 하자 갑자기 가슴에서 맑은 물이 솟아올라 마치 병 속의 물을 쏟아놓은 듯하였으며 콩알처럼 큰 사리가 눈부시게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산중에 봉안하여 공양을 올린다고 한다.
67. 절벽에서 떨어져 정(정)에 들다/ 단애 요의(단애료의)수좌
단애 의(단애료의)수좌는 고봉(고봉)스님 회하에서 참구하였는데 법어를 깨닫지 못한다고 고봉스님이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떠밀어 버렸다. 그날 밤 많은 눈이 내렸으므로 대중들은 그가 이미 죽었으리라 여겼다. 이튿날 눈이 멈추어 도반들이 장작더미를 들고 그곳을 찾아가 그의 주검을 화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고목 아래 반석 위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그를 흔드니 눈을 번쩍뜨고 사방을 돌아보며 자신이 절벽 아래 눈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와 다시 고봉스님을 뵈니 고봉스님은 말없이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그후로 그의 명성은 나날이 떨쳐 승속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스님은 도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주장자로 때릴 뿐, 말이나 얼굴색으로 나타내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다. 요즘의 큰스님들은 말로 가르치는 이가 많은데 스님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 높이 살 만한 일이다.
68. 경산사 본원(본원)스님의 수행과 주지살이
경산사 본원(본원)스님은 법명이 선달(선달)이며, 선거 자씨(선거 자씨)자손이다. 젊은 시절 급암 신(급암종신)스님과 함께 행각하면서 소임을 맡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강서지방에 머물 때 설암(설암)스님을 찾아뵙고 대중속에 섞여 그의 회하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설암스님이 그의 출중한 인물과 법도 있는 행동을 보고서 그에게 당사(당사)*라는 소임을 맡기려 하자 급암스님과 상의하니 급암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지난날 나와 맹세를 해놓고 이제 와서 어기려고 하는가?
스님은 결국 당사 소임을 사양하였다. 그후 고향인 선거(선거)로 돌아가니 마을 사람들이 다복사(다복사)의 주지로 맞이하였으나 그곳을 버리고 호남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복엄사(복엄사)의 주지가 되었다. 복엄사는 당나라 때 도관(도관)이었던 것을 사대(사대)스님에 와서 선원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 당시 불평하는 도사들이 많자 사대스님은 그들의 후세를 모두 주지로 삼겠노라는 서약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성은 목(목), 이름은 달선(달선)이라는 자가 있었다. 스님의 이름과 글자만 바뀌어 있을 뿐, 똑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님을 목도사(목도사)의 재생(재생)이라고 믿었다. 그후 절서(절서)지방으로 돌아와 경산사 운봉(운봉)스님을 뵙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깨침을 얻었다. 때마침 혜운사(혜운사) 주지자리가 비자 스님이 그곳 주지로 전보되어 처음 올리는 향불을 운봉스님에게 바쳤다.
그 후 보령사(보령사)․정자사(정자사)․경산사의 주지를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모두 기록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스님은 주지하는 곳마다 침상을 마련하지 않고 밤마다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며 정좌하였다가 아침이 되면 대중 처소로 나가는 것으로 일상을 삼았다. 또한 타고난 체질이 보통사람과는 달라 몹시 추운 날씨에도 성긴 갈포 옷을 입고 무더운 여름에도 두터운 솜옷을 입었으며, 사원에 남은 재산으로 경산 동쪽 산기슭에 대원원(대원원)을 지어 행각승들을 맞이하였다. 어느날 스스로 때가 온 줄을 알고 대중을 모은 후 평생 행각하던 이야기를 끝마치고 곧 입적하였다.
총림에서는 승직을 지내지 않았다 하여 그를 낮추어 보는 자가 있지만, 지난날 백장(백장)스님께서 사원의 소임 체제를 세우기 전엔 사람들이 오로지 도에만 힘썼다. 그리하여 마음을 깨쳐 불법을 짊어지게 되면 마치 하늘에 뜬 태양처럼, 온 누리를 흔드는 우레처럼 식(식)을 가진 모든 중생이 그의 빛과 일깨워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무슨 소임이 있었길래 그를 낮추어 볼 수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69. 역(역)수좌의 선정
역(역)수좌는 자가 무상(무상)이며 송 장군(송 장군)의 집안, 하씨(하씨)의 아들이다. 팔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무술에 정통하여 일찍이 부친의 벼슬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달갑게 생각하지 않다가 관직을 버리고 출가하여 상우(상우) 봉국사(봉국사)에서 잡일을 하다가 출가 삭발하였다. 그의 스승이 그에게 “심경(심경)”을 외우도록 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기억하지 못하자 그를 몹시 미워하였다. 어느 날 선 묘봉(지선묘봉)스님이 그 절을 지나는 길에 그의 스승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글자를 모르고 오로지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것만 좋아하니 아마 선정(선정)을 닦던 사람이 다시 태어난 성 싶다. 이 사람을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
스승은 그를 따라 가도록 흔쾌히 허락하였다.
처음 설두사(설두사)에 이르러 방부를 들이고 부지런히 참구하며 누워 자는 일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른나무처럼 꼿꼿하게 선정에 들어 있었다. 그의 옆에 정(정)수좌가 계속해서 그의 동정을 살폈는데 7일이 지나서야 서서히 선정에서 풀려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양 깊은 밤에 회랑(회랑) 처마밑을 천천히 오가는 것이었다. 이에 정수좌가 ”큰 일을 마쳤으니 기쁘겠소!” 하였으나 역수좌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보이는 종루를 가리키며 입에 나오는대로 게송을 읊었다.
또다시 정수좌의 말에 따라 첫 새벽에 지팡이를 흔들면서 길을 재촉하여 이틀 후에 화정산(화정산)에 닿았는데, 계서(계서)화상을 뵈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벌써 산문이 닫힌 뒤였다. 산문 밖에서 잠을 자고 이른 새벽 산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계서화상을 뵈었는데 서로 문답하며 시험하는 동안 종지를 깨치고 향로대를 걷어차고는 곧장 그곳을 떠났다. 계서화상이 불렀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마침내 산을 내려오고야 말았다. 이윽고 항주 천목사(천목사) 고봉(고봉)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두 사람의 말이 딱딱 들어맞자 고봉스님은 그를 수좌로 삼았다.
지정(지정) 원년(1341) 명주(명주) 해회사(해회사)에 와서 한 방에서 단정히 기거하며 모든 인연을 끊은 채 그림자가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 도구(도구)가 떠나지 않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지정(지정) 갑오년(1354) 정월 느닷없이 시자승에게 다음 달 24일에 강동지방에 잠시 놀다 오겠다고 하였는데, 그 날이 되자 목욕 하고 옷을 갈아입고 행전을 찾아 발에 묶고 시자승의 부축을 받으며 부처님 앞에 가서 삼배를 올린 후 물러나와 가부좌를 하고서 대중스님들에게 결별을 고하였다.
”지난번에 내가 너희들에게 오늘 길을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말을 마치고 잠자듯 고이 열반하시니, 향년 99세이다. 7일 동안 관 속에 모셔 두었으나 얼굴빛이 선명하고 수족이 부드럽고 따뜻하여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다비를 하자 불길이 높이 솟구쳐 흩어지는 모습이 마치 수많은 기왓장이 하늘로 튀어오르는 것같았고 연기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다비가 끝난 후 사리가 많이 나왔다.
국역 산암잡록 하권
1. 능엄경 “관음원통품”을 읽고 깨쳐/ 묘각사 정(정)스님
호주(호주) 묘각사(묘각사) 기당(기당:명당)의 정(정)스님은 오강(오강) 지방의 농부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할 기회를 잃고 도첩을 받은 후 묘봉 현(묘봉현) 스님을 찾아갔다. 현스님은 중봉(중봉)스님의 법제자이다.
“부모가 낳기 이전엔 어느 것이 나의 본래 모습인가'를 참구하도록 하였는데 정스님은 이를 30년 동안 계속하였으나 깨달은 바 없었다. 그 후 명주 화엄사의 스님 조공(조공)이 호주에 와서 그와 함께 거처하게 되었는데 조스님이 그에게 능엄경의 “관음원통(관음원통)” 한 품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생멸(생멸)이 사라짐에 적멸(적멸)이 실현 [현전] 되도다”라는 구절에서 활짝 깨친 바 있어 온몸에 기쁨이 넘쳐 말을 할 수 없고 그저 춤을 췄던 것이다. 이에 누군가가 중풍이 들었느냐고 하자 그는 ”적멸(적멸)이 실현되었다”고 대꾸하였다.
홍무(홍무) 원년(1368) 10월 25일 조스님에게 ”11월 1일이 내 생일인데 그날 이 세상을 떠나겠다”고 하였다.
그날이 되자 목욕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향 세 개를 올렸는데 하나는 석가모니불에게, 또 하나는 무량수보살에게, 마지막 하나는 산주(산주) 요공(료공)을 위한 것으로 요공은 스님의 은사스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뒤 3일 만에 다비를 하고, 7일 뒤에 뼈를 부수어라. 뼈가 부셔지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이상하다 여겼는데 막상 뼈를 부수려고 하자 뼈가 녹아 물같이 되면서 더운 기운이 없어지고 한 송이 영지(영지)가 되어 오색찬란한 광채가 영롱하였으며, 두들겨보니 소리가 울렸는데 조각을 한다거나 그림으로 그린다해도 그처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영지는 지금까지도 묘각사의 기당(기당)에 봉안되어 있다.
2. 해운 인간(해운인간) 대사(대사)의 행장
연경 경수사(경수사) 해운대사(해운대사)는 법명이 인간(인간), 산서(산서) 땅 사람이며 성은 송(송)씨다. 7세에 그의 아버지가 “효경(효경) 개종명의장(개종명의장)을 가르치자 스님이 물었다.
”연다[개] 하는데 무슨 종(종)을 연다는 것이며, 밝힌다[명]는데 무슨 의(의)를 밝힌다는 것입니까?”
그의 아버지가 남달리 생각하여 그를 데리고 전계사(전계사) 안(안)스님을 찾아뵈니 안스님은 그의 근기(근기)를 살피고자 석두(석두)화상의 “초암가(초암가)”를 읽어보도록 하였다. 그가 초암가를 읽다가 ”허물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거나 주인은 원래대로 존재한다.”
라는 구절에서 안스님에게 물었다.
”주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주인 말이냐?”
”허물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음을 떠난 것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객이지 주인이 아니다.”
”주인.”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안스님은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길로 중관사(중관사)의 소(소)스님을 찾아가 그를 삭발은사로 삼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어느 날 저녁, 허공에서 스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인간)아! 대사를 이루거든 이곳에서 지체 말고 떠나거라.”
그리하여 지팡이를 끼고 연경으로 가는 도중에 송포(송포)를 지나다가 비를 만나 바위 밑에서 묵게 되었다. 동행하던 사람이 부싯돌을 치자 불똥이 튀는 모습을 보고서 크게 깨치고 얼굴을 문지르며 말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눈썹은 가로 붙어 있고 코는 세워 있음을 알았노라.”
이에 경수사(경수사)의 중화 장(중화장)스님을 찾아갔다. 그가 이르기 전날 밤에, 장스님은 한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곧장 방장실로 달려와 사자좌(사자좌)에 걸터앉는 꿈을 꾸고서 이튿날 그 이야기를 좌우 사람에게 들려주면서 말하였다.
”오늘 조금만 기다리면 그 사람이 도착할 터이니, 곧장 나에게 인도하도록 하라”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스님이 도착하자 장스님은 웃으면서 이 스님이 바로 어젯밤 꿈에 본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로 문답하며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았으나 스님의 기어(기어)가 민첩하고 막힘없이 투철하자 장스님은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서기실(서기실)의 일을 맡아보도록 명하였다. 그의 지혜와 깨달음은 더욱 깊어졌으며 마침내 장스님은 그에게 법의와 게송을 내려주었다. 게송은 이러하다.
천지는 같은 뿌리로 다름이 없는데
어느 집 어느 산에선들 그를 만나지 못하리오
내 이제 부처님의 도장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만법의 빛은 모두 하나이어라.
천지동근무이수 가산하처불봉거
오금부여공왕인 만법광휘총일여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와 장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여러 유명한 절에 주지를 지내면서 두 차례나 경수사(경수사)의 주지가 되었다. 태조에서 세조까지(1300년 말~1400년 초) 여러 황제의 국사로 추앙되어 지위가 승통(승통)에 이르렀으며 황제의 예우 또한 극진하였다. 나이 56세에 생각지 않게 풍증에 걸렸는데 하루는 게송으로 대중을 결별하고 시자승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시끄럽게 떠들지들 마라! 내 편히 누워 쉬리라.”
시자승이 주사(주사)에게 이 소식을 급히 전하고 그곳에 도착하니 스님은 이미 오른쪽으로 누워서 열반한 뒤였다. 다비를 하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리가 나왔으며 칙명으로 경수사 곁에 스님을 안장하고 그 위에 부도를 세웠으며 불일원명대사(불일원명대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궁궐에 나아가 불법을 논하다/ 경산사 묘고(묘고)스님
지원(지원) 25(1288)년 봄, 승통(승통) 양련 진가(양련진가)는 황제의 칙명으로 강남지방 교종과 선종의 여러 스님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아가 불법을 논하였다. 황제가 선종에서는 무엇을 종지로 삼느냐고 묻자, 경산사 주지 묘고(묘고)스님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였다.
”선이란 청정하고 지혜롭고 오묘하고 원만하여 그 바탕이 본래 공적(공적)하니 견문각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량과 분별(분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선종의 조종(조종)과 후예를 모두 말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선종의 조종과 후예는 석가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황금빛 나는 한 송이 바라화(파나화)를 들어 두루 대중에게 보이시자 그 당시 가섭존자만이 미소지으시니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안장(정법안장)과 열반묘심(열반묘심)이 있는데 이를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습니다. 그후 대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보리달마에 이르렀는데 달마존자께서는 동쪽나라 이 중국에 대승의 근기가 있음을 바라보시고 바다를 건너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것이 선종입니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기자 묘고스님은 다시 자연스럽게 말하였다.
”선과 교는 본래 하나였습니다. 비유하자면 수백 수천의 다른 강줄기가 모두 바다로 돌아가 한맛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폐하께서 온누리를 다스려 천하가 통일되니 사방 오랑캐가 온갖 조공을 바치고자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찾아오지만 반드시 순성문(순성문)을 통과하여 황금 대궐에 이르러 몸소 용안을 본 후에야 집안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교학가들이 언어문자에 집착하여 현묘한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들은 아직도 순성문 밖에 있는 사람들이며, 선종에서도 예닐 곱 개의 좌복이 낡아 떨어지도록 참선을 했다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이들 또한 순성문 밖에 있는 사람들이니, 모두 다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곧 교학을 익히는 자는 반드시 현묘한 이치를 통달해야 하고, 참선하는 자 또한 반드시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 신하들이 오늘에야 몸소 황금 대궐 위에 올라와 한차례 용안을 보고서야 비로소 집안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기뻐하며 음식을 하사한 후 물러나도록 하였다.
4. 고승전을 편집하는 태도/ 몽당 담악(몽당담악)스님
몽당 담악(몽당담악)스님이 진(진)․당(당)․송(송) 삼대의 “고승전”을 다시 편수하면서 종전의 십과(십과)를 육학(육학)으로 바꾸었다. 그 중 “선학(선학)”의 이조 혜가조사(이조 혜가조사)가 팔을 끊고 법을 구했다는 고사가 기재되어 있는 선종의 서적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유독 도선(도선)율사만은 이렇게 말했다.
”혜가스님이 도적을 만나 팔을 잘린 것인데 함께 살았던 임(림)법사마저도 오히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임법사 또한 도적에게 팔을 잘리자 혜가대사는 그를 감싸안고 치료했는데 그의 몸 움직임이 불편한 것을 보고서 임법사가 이상하게 여기자 이 일로 혜가조사는 “네가 어떻게 나에게도 팔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느냐'고 하였다.”
몽당스님이 이 말을 “고승전”에 인용하려고 하자, 그 당시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혜가대사는 불법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눈 속에서 시체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더구나 한 쪽 팔이겠는가? 참으로 팔을 자르는 일이란 사람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서도 거친 성깔을 지닌 졸장부들도 이따금씩 자기의 팔을 자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사께서는 법을 위하여 일신을 잊고 마음가짐이 간절했는데 이것쯤이야 하지 못할 턱이 있었겠는가. 설령 모든 사실이 율사의 말대로라고 한다면 어떻게 도적이 사람을 살상하는데 팔뚝 하나만을 자르는 데 그쳤겠는가? 그리고 이미 팔이 잘렸다면 함께 사는 사람마저 이 사실을 모를 턱이 있었겠으며, 또한 어떻게 잘린 팔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감싸주고 치료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도선율사는 살아 있는 보살이랄 수 있는데 그가 어찌 거짓말을 했겠는가?”
”도선율사가 전하는 “인물전”이란 도선율사 자신이 낱낱이 그들의 행적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필시 다른 사람이 채록한 사적에 근거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남이 채록하는 과정에서 와전될 수 있다는 것이지 도선율사가 선종과 율종이 다르다 하여 거짓을 조작한 것은 아니다. 내 말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확신할 수 있는 일은 확신있게 전하고 의심스러운 일은 의심스러운대로 전하자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후세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이 함부로 뜯어 고치고서 율사의 말을 빌어 세인의 믿음을 얻으려고 들 것이다.”
몽당스님은 이 말을 수긍하고 이 이야기를 “전등록”에 근거하여 “고승전”에 수록하였다.
5. 불광 도오(불광도오)선사의 행장
불광 도오(불광도오)선사는 협우(합우) 난주(난주) 사람이며 성은 구씨(구씨)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빨이 나있었다. 16세에 삭발한 뒤 2년 동안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임조(림조)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자점(만자점)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인도 승려가 부르는 소리에 꿈을 깼으며 때마침 말 울음소리를 듣고 환하게 깨친 후 스스로 노래를 읊조렸다.
좋구나 좋아
허공에 가득한데
다만 하나 뿐일세.
호야나 호야나
편허공 지일개
그리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나는 간밤에 물건 하나를 주웠다'고 하니 어머니가 “무슨 물건을 주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시작도 없는 때부터 잃어버렸던 물건'이라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선지식을 찾아가는 길에 마을 사람들이 게송을 청하자 지어 주었는데, 그 중에는 “물은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고 학은 흰구름 위로 솟아 날도다 [수류수도해 학출백운두] '라는 구절이 있다.
웅이산(태이산)에 이르러 백운 해(백운해)스님을 찾아보니 서로 뜻이 맞았다. 이에 앞서 어느 사람이 해스님에게 어찌하여 법제자를 두지않느냐고 묻자, 해스님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빼어나게 피는 난초는 서진 땅에서만 나온다'고 대답하였다.
스님이 그곳에 도착할 무렵 해스님은 공중에서 울리는 사람소리를 들었는데 ”내일 곽상공(곽상공)을 맞이하라!”는 것이었다. 해스님이 살던 절은 곽자의(곽자의)가 세운 것인데 불광스님은 곽자의의 후신이었다. 해스님이 입적하자 불광스님은 세상에 나와 정주 보조사(보조사)의 주지가 되어 해스님의 법을 이었다. 그후 죽각암(죽각암)에 은거하면서 낙천(낙천)지방에 보이다 안보이다 하니 사람들은 그의 행적을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를 범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성인의 자리로 갈 것이며, 나를 성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범인의 자리로 가리라. 나를 성인도 범인도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너희들의 눈동자와 콧구멍 속으로 수없이 거꾸러지며 들어 가리라.”
태화(태화) 5년 5월 13일 아무 병 없이 서거하였는데 그가 살던 집 위에 오색 구름이 일산처럼 뒤덮힌 가운데에 해같이 둥글고 붉은 빛이 세 개나 나타났었다. 당시 스님의 나이 55세였다.
6. 돼지 잡아 손님 대접하다가/ 하산사(하산사) 노승
오흥(오흥) 하산사(하산사)의 노승 모(모)스님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대중을 업신여기고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더욱이 살생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 손님을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아 머리를 먼저 솥에 넣고 삶으면서 고기가 익었는가를 직접 가서 살펴보는데 언뜻 사람 머리 하나가 보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머리카락이 뒤엉켜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노승은 그 모습을 보고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가서 보자하니 그것은 돼지머리였다. 노승은 그 일을 계기로 잘못을 뉘우치고 선행을 닦게 되었다.
7. 청정(청정)에 걸린 장애를 깨고/ 조문민(조문민)
조문민공(조문민공)이 항주의 관아에서 적조(적조)스님을 방문하여 차를 마신 후 근래에 자신이 지은 시를 거론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 청정의 업장을 깨닫고 나니 [료차청정장] ”라는 구가 있었다. 스님은 그에게 물었다.
”청정함에 어찌 업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때묻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여 청정을 좋아하는 그것이 업장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대를 한림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보니 의관을 갖춘 스님이었구려.”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시던 날 밤, 스님 한 분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고 하는데, 나는 평소 선종의 향상기연(향상기연)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경전의 가르침에 관한 것은 읽기만 하면 대의를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8. 세력을 업고 비행을 일삼다가/ 휘동명(휘동명)
휘동명(휘동명)은 황암(황암) 사람이며 우승상 의방(의방)의 부인이 그의 어머니다. 이 때문에 세력을 빙자하여 선배를 멸시하였다. 영석사(영석사) 연 일주(련일주)스님은 용상사(룡상사) 소은(소은)스님에게서 법을 얻고 선정원(선정원)의 명을 받아 그 절 주지로 있었는데 동명은 그를 밀쳐내고 주지로 앉았으며, 또한 홍복사(홍복사), 안국사(안국사) 두 사찰을 돈으로 사서 한 몸에 세 곳의 주지를 겸하면서 마음대로 비행을 일삼았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잠자다가 깨어보니, 영석사의 가람신이 나타나 도깨비를 시켜 그의 목을 누르고 무릎으로 허리춤을 짓이기고 꿇어앉힌 후 사정없이 곤장을 치고 이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종휘(종휘)는 이제부터 감히 절 재산을 훔치지 않을 것이오니,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애걸하는 것을 보았다. 그 후 3년 만에 그는 죽고 말았다.
9. 말세의 신심/ 주(주)씨 노파와 전자중(전자중)
은현(은현) 보당시(보당시)의 주씨(주씨) 노파는 일생동안 정토수행을 닦았다. 매년 정초가 되면 묵언을 하며 정월이 다 가도록 꼬박 눕지 않았고 5월이 되면 사람이 모여드는 정자에 나가 차를 끓여주면서 한여름을 보냈다. 그의 나이 70여 세가 되던 어느 날 저녁, 큰 연꽃잎이 보당마을 전체를 덮고 그녀가 손에 염주를 들고 연잎 위를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후 가벼운 병이 들었는데 이웃사람들이 그날 밤 많은 깃발과 큰 가마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새벽녘이 되어 노파를 살펴보니 그녀는 합장 염불하는 모습으로 간 뒤였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말법에는 빗발처럼 많은 남염부제국(남염부제국) 여인들이 정토에 왕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주씨 노파를 보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홍무(홍무) 병술년(1370) 겨울 봉화(봉화)에 사는 전자중(전자중)이 태백사(태백사)에 나를 찾아 와서 오랫동안 함께 기거하였다. 내가 우연한 기회에, “금강반야경은 염라대왕의 명부전에서는 공덕경이라 일컫기에 세간 사람들은 죽은 이를 천도하는데 금강경을 많이 읽는다'고 하였더니, 전자중은 죽을 때까지 이 경을 수지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어느 날 그의 모친 기일(기일)에 신심을 내어 금강경을 백 번 넘게 외워 천도한 뒤 새벽에 일어나 소나무 의자 위에 앉아 아홉번째 읽어가는 중이었다. 그때 도깨비들이 형틀에 묶인 한 노파를 끌고와 그의 의자 앞에 꿇어 앉혔는데 헝크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이에 자세히 보니 그 노파는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전자중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잠깐 후 다시 끌고 가는데 마치 형틀을 벗겨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전자중이 큰 소리로 울면서 어머니가 끌려왔을 때 금강경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위로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금강경의 공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리만큼 큰 것이다. 전자중이 신심을 내어 금강경을 외우던 일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저승의 명부(명부)를 감동시켜 모자 간에 서로 만나볼 수 있도록 한 것이며, 그 고통을 풀어줄 것이다. 아! 이는 위대한 일이다.
10. 네 스님의 게송
육왕사(육왕사)의 허암 실(허암실)수좌가 와운(와운)암주에게 보낸 게송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정원에 말을 달리니
한 치의 거리에서 칼을 어루만지지 않나 의심을 하네
매화나무에 달빛이 쏟아지고 숲 위에 눈이 나리면
와운암 베갯머리엔 단꿈이 맴돈다.
황김원리마교치 경촌다성안검의
월쇄매화천수설 와운일침몽회시
천동사(천동사) 환암 주(환암주)수좌는 응암(응암)스님의 부도를 참배한 후 게송을 지었다.
드르렁거리며 잠자는 호랑이 그 가죽 엿보니
중봉을 끌어다가 기대는 산을 만들었구려
깨어진 사발 하나 얻지 못하고
자손 살길 빌어봐도 어려울 걸세.
탐탐수호관규반 변파중봉작고산
불득파사분일개 자손걸활야응난
묵중사(묵중사)의 유서당(유서당)스님이 누에고치에 대하여 읊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밭 뽕 산 뽕 모두 다 없어지자 그때야 쉬는 마음
면밀한 공부 이 고치에 들었네
화롯불 끓는 솥에 던져 넣고
학인 위해 한 가닥만 남겨두었네
상공자진시심휴 면밀공부일 수
노탄확탕변득입 위인지재일사두
불농사(불사) 의 행가(의행가)스님이 빗소리를 들으면서 지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뚜렷한 빗방울
자신을 모르는 중생들 아우성소리
나 또한 요사이 물욕을 따르는 일 많아
봄날의 베개 위에 단꿈 꾸기 어려워라.
첨전적적심분명 미기중생환작성
아적연래다축물 춘소일침몽난성
아! 네 분의 게송은 잘 되었는데도 당대에 알려지지 못했기에 내 이를 기록하여 후학에게 보인다.
11. 게송 짓는 일/ 축원 묘도(축원묘도)
스승 축원(축원묘도)스님은 노년에 천태(천태) 자택산(자택산)에 한가히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이런 말을 하였다.
”송을 지을 때는 반드시 사실 [사] 과 이치 [리] 가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 비유하자면 두 다리가 똑같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천(대천)화상의 “거미에 대한 송 [지주송] ”은 잘 지었기는 하나, 그 가운데 세 글자는 이치를 표현한 데에는 손색 없지만 사물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송은 이렇다.
한가닥 줄을 허공에 걸어놓고 머물 때
백억 가닥 엉킨 줄마다 살기가 번뜩이네
상하 사방으로 그물을 얽어놓고
빠져 나갈 수 없을 때 바야흐로 화두가 된다.
일사괘득허공주 백억사두살기생
상하사위나직료 대무장망화방행
마지막 구절의 세 글자 “화방행(화방행)'은 거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다.
그는 또한 석가출산상에 송을 썼다.
빼어난 자품으로 왕궁을 나오셨다가
까칠한 얼굴로 설봉을 내려오면서
온갖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노라 맹세하니
언제나 다 할려는지 알 수 없구려.
룡자봉질출왕궁 구면회두하설봉
서원욕궁제유해 불지제유기시궁
여기서 설산(설산)을 설봉(설봉)이라 바꿔 쓴 것은 운(운)자에 구애된 것이지만, 이곳(중국)에 설봉이라는 이름이 이미 알려진 이상, 설산을 설봉으로 쓴 것은 잘못된 성싶다. 이렇게 해서 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어 또다시 이어 말하였다.
”허주(허주보도)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있을 때 눈이 내리자 상당 법문에서 송을 하였다.
하룻밤 사이 강바람 불어 옥가루 휘날리니
고봉은 희지 않아 정신을 흔드네
공중에서 내려왔다가 공중따라 올라가니
뼈속에 사무치는 추위 몇이나 겪을고.
일야강풍교옥진 고봉불백전정신
종공방하종공간 철골한래유기인
학인들이 앞다투어 이 송을 암송하고 있으나 허주스님은 옛사람이 말한 참뜻을 몰랐으며 학인들도 으레껏 잘못 이해해 오고 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스님께서는
”옛 사람의 송에, “눈이 천 산에 덮혔는데 어째서 고봉은 하얗지 않나 [설복천산 인심고봉불백] '한 말은 한마디 전어(전어)였는데 허주스님이 고봉은 실제로 하얗지 않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으며, 다시 말씀하셨다.
”대체로 입원불사(입원불사:주지에 임명되어 하는 첫 법문)에서 정밀하고 오묘하게 법문하기 어려운 것은 송을 지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동서(동서)스님이 정자사(정자사) 주지가 되어 산문(산문)에서 한 법문은 다음과 같다.
청정한 자비의 문
호수의 가을 물이
들어오든 말든
범은 대충(대충:범)을 물고
구렁이는 별비사(별비사)를 삼키도다
이 문을 딴 곳으로 옮겨놓아도 쓸모가 없다.
청정자문 일호추수
입득입불득 호교대충
사탄별비 차이타처용불득
죽천(죽천)스님이 중축사(중축사) 불전(불전) 불사를 할 때 지은 송은 다음과 같다.
먼지를 털어내고 부처님을 보지만
부처 또한 먼지임을 그 누가 알랴
귀 뚫린 선객 만나기 힘들고
흔히 만나는 건 각주구검하는 어리석은 자.
발진견불 수지불적시진
한봉천이객 다우각주인
이는 체제가 잘 된 송으로서 학인들이 본받을 만하다.”
12. 원암 회(원암회) 장주의 게송
원암 회(원암회)장주(장주)는 임안(림안)사람으로 오랫동안 정자사의 몽당(몽당)에 살았으며 조문민공(조문민공)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문민공은 일찍이 원암스님의 시를 옮겨써서 커다란 시집[시축] 을 만들고 그 끝에 제(제)를 썼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를 자랑으로 여겼으나 원암스님만은 담담하였다. 그 절의 택장산(택장산)이라는 스님이 낸 돈으로 열반당의 침선판(침선판), 세면실, 화장실 등을 수리하자 선승들은 게를 지어 두루마리를 만들어 감사의 뜻을 표했는데 원암스님은 그것을 보고서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대중들이 게를 지어달라 부탁하자 마침내 게를 지었다.
한가닥 열반길 전부 뒤집혀
부딪히는 곳마다 공부하기 어렵지 않네
얼굴을 씻다가 문득 코가 만져지니
바늘 귀 속에 잘도 산을 감추겠네.
열반일로진흔번 촉처공부견불난
세면천연모착비 수침안리호장산
당시 회기(회기)스님이 주지로 있었는데 법상에 올라 설법할 때 특별히 이 게송을 칭찬하였다. 이 게송으로 나머지 그의 시를 미뤄보면 그의 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만하다.
13. 일계 자여(일계자여)스님의 행장
중천축사 일계(일계)스님의 법명은 자여(자여)이며 복건 사람이다. 원나라 병사가 강남을 침략했을 때 스님은 어린나이로 사로잡혔으나 임안(림안)에 이르러 병사들이 스님을 내버리고 떠나가니, 임안의 부호 호씨(호씨)가 스님을 거두어 길렀다. 그의 자제들과 함께 서당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는데, 스님은 서당의 모퉁이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고 조용히 귀기울여 말없이 이해하고 하나도 잊지 않으니 호씨가 매우 좋아하였다. 자제가 장성하자 호씨는 그를 마을 무상사(무상사)에 보내 승려가 되도록 주선하였다.
그후 경산사의 설봉(설봉)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깨쳤으며 계행이 엄정하였고 법복과 발우가 몸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 원각경 등을 암송하였다.
맨처음 절강(절강) 만수사(만수사)에 주지가 되었을 때 절 뒤편에 대부호 황씨(황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스님의 계행을 존경하여 항상 나물밥을 공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으로 스님을 초청하여 정성껏 공양을 올리고는 그의 금고를 열어 소장하고 있는 금옥 보화를 내보이며 스님의 마음을 동요시키려 하였다. 스님은 절로 돌아와 좌우의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저 황씨가 금고 속의 보물을 내보인 것은 나의 마음을 현혹하여 죽은 후 그의 아들이 되도록 하려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금옥 보화를 돌멩이처럼 보는 나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은 전철을 밟은 옛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는 그의 아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나 말이 된 자까지도 있다. 나는 이제부터 황씨를 멀리할 것이다.”
천력(천역) 원년(1329) 중천축사의 주지 소은(소은)스님이 관아에 글을 올려 칙명으로 대 용상사(룡상사)를 창건하였다. 그 일로 그를 대신할 중천축사의 주지 세 사람을 천거했는데 황제는 어필을 들어 스님을 인준하자 선정원(선정원)에서 임명장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어 스님을 초청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입적하였는데 신통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14. 지식에 막혀 깨닫지 못하다가/ 각 종성(각종성)스님
전당(전당) 광화사(광화사)의 주지 각 종성(각종성)스님은 경산사 본원(본원)스님께서 손수 도첩을 내려주신 제자이다. 여러 제자 가운데 가장 어린 까닭에 항상 다른 제자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으므로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마침내 사명사(사명사) 몽당(몽당)스님에게 배웠다. 당시 괴석(괴석)스님은 대자사(대자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굳이 그를 자기 시자로 불러들였다. 얼마 후 다시 석실(석실)스님에게 시를 배웠는데 시의 경지가 나날이 심오해져 조자앙(조자앙), 우백생(우백생), 장중거(장중거)와 같은 이도 모두 그의 시를 칭찬하였다. 더욱이 청렴하고 신의가 두터워 한 끼라도 남에게 얻어 먹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과 약속을 하면 아무리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어기지 않았다.
중년이 되어 배움이 끊긴 종지를 탐구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중모(중모)스님을 찾아갔으나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본각사(본각사) 남당(남당)스님을 찾아가 법을 물으니 남당스님이 말하였다.
”너는 원래 대사(대사)를 깨친 사람이지만 듣고 본 것이 너무 많아 가슴이 막혀 본지풍광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새벽에는 죽 먹고 점심 때는 밥 먹는다.”
”스님께서는 큰 풀무를 열어 놓으시고 성인이나 범인이나 모두 녹여 단련하십니다. 저같은 사람이야 쓸모없는 한덩이 구리나 무쇠 같다지만 이 속에 들어왔으니 단련하여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할 수 없다면 이는 스님 풀무에 열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당스님은 그의 정성스럽고 간곡한 마음에 감동되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나의 이 법문(법문)은 그대로 깨닫는 것을 귀중히 여기지 세속적인 지혜와 총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서운 의지를 내서 일도양단한다면 무슨 구리를 단련하고 무슨 그릇을 만들고 할 것이 있겠는가? 이 두 가지 길을 버리고 “부모가 낳아주기 전 [부모미생이전] '의 소식에 대하여 한마디 해보아라!”
이에 종성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후 옛사람을 본받아 미륵불상을 머리에 이고 아침 저녁으로 도를 행하며 불호(불호)를 외우고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하게 하여 달라 기원하고 시를 지어 그의 뜻을 피력하였다. 62세에 병이 들자 주변에 명하여 평소 지은 시와 문장을 가져오라 하여 모두 불태워 버린 후 열반하였다.
스님은 황암(황암) 사람인데 속성은 채씨(채씨)이며 괴석스님의 법을 이었다고 한다.
15. 강심사(강심사) 동당(동당)의 고승들
무언(무언)스님이 강심사(강심사) 동당(동당)요사에 머물 때 문에다가 방(방)을 써붙였다.
”재를 하기 전까지는 경을 읽고 좌선을 하며 재를 마친 뒤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스님과 마주하여 당대의 주지를 칭찬하거나 훼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림의 전고(전고)와 선문의 강요(강요)에 대해서는 하루종일 이야기하여도 피곤해 할 줄을 몰랐다. 그는 근대에 동당(동당)으로서의 체모를 갖춘 분이었다.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대나무 평상에 누워 웃으시면서 혼자말로 ”늙는다는 건 좋은 게 아니로군.”하였는데 흔들어보니 이미 입적한 뒤였다.
그 당시 무제(무제)스님도 동당(동당)에 있었으며 석실 암(석실암)스님이 주지를 맡아보고 있었다. 암스님은 학문이야 부족하였지만 매우 진솔한 인물이었다. 절의 노승들은 모두가 스님(무제)의 제자였기에 스님은 주지에게 경솔히 대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으레 초하루와 보름에 설법을 마친 후 모두들 스님의 처소에 와서 절을 올릴 때마다 반드시 그들에게 주지의 상당법문이 어떻더냐고 말하도록 한 후 정담어린 말씨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장로의 상당법문은 좋은 말씀이다. 그의 법문은 주지직을 맡아보는 데 규모가 있고 문도를 거느림에 법도가 있는 말씀이다.”
기(기)상좌는 명암 희(명암희)스님이 손수 도첩을 내려준 제자이다. 어느 날 욱(욱)산주의 과려도(과루도:당나귀 타고 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를 들고 무제스님을 찾아와 제(제)를 청하자 스님은 서슴없이 붓을 잡고 게를 지었다.
절름발이 당나귀 시내 다리 지나다가 발을 헛디였을 때
완두콩을 진주로 잘못 알았지 덧 덧 덧
아이들은 집안 추태 감출 줄 몰라서
도리어 양기노스님을 웃겨버렸네
책건계교차각시 오장충완두작진주
아조불해장가귀 소도양기로고추
이어 기상좌에게 물었다.
”말해보아라. 당시 양기스님의 한바탕 웃음이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를?”
기상좌가 말하였다.
바람도 없는데 연꽃 잎새 흔들거림은
필시 물고기의 움직임 때문.
무풍하엽동 필정유어행
무제스님은 손바닥을 탁 치며,
”돌아가거든 너의 스승에게 이 말을 분명하게 전하라.”
고 하였다. 학인을 가르치는 스님의 방편은 과연 이와 같았다. 기상좌는 바로 대매사(대매사)의 중빈(중빈)스님이다.
16. 허곡(허곡)스님의 인연과 수행
허곡(허곡)스님은 무주(무주) 사람이다. 정자사 석림(석림)스님 회하에 있으면서 내기(내기) 소임을 맡아보다가 기실(기실)로 승진되었는데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렵게 공부하며 춥거나 덥거나 한결 같았다. 지난날 태백사(태백사)에서 여름 안거를 하면서 동정료(동정료)의 수건을 훔쳐 속옷을 만들어 입은 적이 있었는데, 후일 세상에 나와 앙산사에 30년, 경산사에 6년 동안 주지를 지내면서도 동정료의 수건에 관하여 일체 시제(시제)로 쓰지 않았으니 뜻은 그때의 가난한 생활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젊은 시절 꿈을 꾸었는데 정자사 나한당(나한당)에 들어가 동남쪽 모퉁이에 이르니 갑자기 존자 한 분이 나타나 대들보 사이의 시를 가리키면서 스님에게 보여주었다.
한 방은 고요한데 절정이 열리어
여러 봉우리는 그려놓은 듯 이끼보다도 푸르러라
한가히 패다엽경 펼쳐본 후에
백군데 기운 가사장삼 마음대로 재단하네.
일실요요절정개 수봉여화벽련태
등한흉파패다엽 백납가사자전재
처음에는 그 시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앙산․경산 두 사찰의 주지가 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앙산사에는 패다엽경이 보존되어 있고 경산사에는 양기스님의 법의가 보존되어 있었다.
아! 스님의 출처는 나한존자가 그의 전생에 이미 정해놓은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처럼 될 수 있었겠는가?
17. 관음기도로 얻은 기쁨/ 절조 휘(절조휘)스님
온주(온주) 수창사(수창사)의 절조 휘(절조휘)스님이 정자사의 동정료(동정료)에서 여름 안거를 할 때 신벽(신벽)에 관음상 수묵화가 있었다. 스님은 밤마다 절을 올리고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갑자기 정병의 물이 벽 틈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 온몸에 기쁨이 가득하였다. 그 후론 경지가 더욱 깊어지고 지혜 [지감] 가 밝아졌다. 한번은 게송을 지었다.
공부해도 방원(방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홀로 난간에 기대 몇번이나 시름하였던가
오늘이 사흘이면 내일은 나흘
머리 위엔 눈서리 쉽사리도 얹혀지네.
공부미도방원지 기도빙란독자수
금일시삼명일사 설상용역상인두
공부에 뜻을 둔 자가 이 게송을 들으면 모두 분발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정성으로 사람을 감동시켰으니, 비유하자면 비상이란 그 자체가 독이여서 먹는 사람은 다 죽는 것과 같다.
18. 주지로 정해지는 인연
송 도종(송 도종:1265~1274)은 몽고군의 공격이 치열하자 도사에게 명하여 큰 제사를 마련하고 하늘에 글을 올려 국가 중대사를 물었다. 그 당시 고(고)도사가 하늘에 상소를 올렸지만 오랫동안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제사를 끝마친 후 그 까닭을 묻자 고도사는, 하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은 경산사의 48대 주지를 정하는 일로 하늘의 대답이 늦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호암(호암)스님이 경산사 주지로 있을 무렵 적조(적조)스님은 수좌로 있었는데 호암스님은 항상 법좌에서 이 일을 들추어 대중에게 자랑하였다.
”주지라는 이 자리가 어찌 우연으로 48대까지 이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늘에서 이미 정해놓은 것이다.”
적조스님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자신이 경산사의 주지가 되고보니 그 예정된 48대에 해당하였다.
지난 날 운거사(운거사)의 즉암(즉암)스님은 토지신이 현몽하여, “다만 죽 한 끼의 인연'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현몽대로였다.
여러 곳의 주지란 그 과보가 추호의 오차도 없는데 부질없이 남의 자리를 밀쳐내고 빼앗으려다가 갇히는 몸이 된 자 없지 않다. 하늘에서 미리 정해놓은 이름과 토지신의 현몽이라는 이 두 가지 일을 듣는다면 날카로운 기세는 조금이나마 거두어 들이게 될 것이다.
19. 천목사 괴일산(괴일산)의 후신
천목사(천목사)에 사는 괴일산(괴일산)은 소주(소주) 사람으로 박학다재하며 천동사(천동사)의 평석(평석) 노스님과 절친한 사이였다. 총림의 전성시대를 맞아 모두들 세상에 나아갔지만 괴일산은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살며 속인과 사귀지 않으니 대매사(대매사) 나찬(라찬)스님의 옛 풍모를 지녔다. 그러나 아랫마을 시주 홍씨 집안의 자제만은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홍씨는 괴일산이 작은 가마를 타고 그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그 이튿날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응괴(응괴), 자를 사원(사원)이라 하였다. 어려서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부인을 맞아 아이를 기를 때까지는 전생의 기미가 전혀 엿보이지 않다가 30세가 되자 갑자기 반성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모두 바꾸었으며, 승려 명유나(명유나)와 함께 동천목산(동천목산) 꼭대기에 암자를 짓고 선정(선정)을 익히며 화전을 일구고 걸식을 하는 일까지 모두 몸소 하였다. 고행으로 늙은 스님일지라도 그처럼 독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정(지정) 정유년(1357) 북쪽 오랑캐에게 경산사가 소각당했을 때 나는 그의 처소를 찾아갔는데, 그의 용모는 숙연하고 예의가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대하였다. 나는 까닭을 물어본 후에야 그가 괴일산의 후신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전신은 천동사의 평석(평석) 노스님과 둘도 없는 사이였다. 노스님의 나이 아흔이지만 아직도 이목이 밝으니 그대가 게를 지어 보낸다면, 한 꿈에 두 번 깨어났지만 꿈과 깸이 한결같음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사원(사원)이 게를 지었다.
천동사의 노스님 평석(평석)에게 전하노니
한생각은 이제도 옛날도 아니로다
단풍나무 다리 위에 깊은 밤 종소리를 듣자니
오강은 예전처럼 하늘에 잇닿아 푸르구려.
기어천동로평석 일념비금역비석
욕청풍교반야종 오강의구연천벽
그러나 이 게송이 전해지기도 전에 노스님은 입적하였다.
20. 인과를 경시한 업보/ 경산사 혜주(혜주)스님
경산사의 제점(제점)을 맡은 혜주(혜주)스님은 호암(호암)스님의 문도로서 매우 총명하여 일처리를 잘하는 재간을 지녔다. 그는 절 일을 맡아본 30여 년 동안 금전과 양곡을 멋대로 썼다. 누군가 인과응보로 충고하면 그는 “가득히 실려오는 뿔달린 축생 가운데 나는 뿔 한 쌍만 달면 되지!”라고 빈정거렸다.
지정(지정:1341~1367) 초에 고납린(고납린)이 선정원(선정원)의 사무를 맡게 되자 그의 아랫사람인 정가(정가)스님은 그의 비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고발하였다. 이에 그의 죄상이 드러나자 곤장을 쳐서 환속시켰다. 그후 화성원(화성원)에 숨어 살다가 풍증을 앓아 주먹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오므라들고, 두 손을 꼭 쥔 채 양 볼을 감싸안고 두 다리는 엉덩이 뒤에 바싹 붙였다. 그의 병을 간호하는 자가 펼치려 하면 아픔을 참지 못하였으며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처럼 3년을 지내다가 드디어 죽었던 것이다.
혜주는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를 처리하고 인과를 경시하여 결국 “수많이 실려오는 뿔달린 축생 가운데 나는 뿔 한 쌍만 달면 되지.”하던 말같이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삼도(삼도)의 업보 가운데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면 한 마리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가는 동안 무량겁에 이르도록 줄곧 뿔을 달고 태어날 것이다. 어찌 한 생에 그치겠는가. 모든 사찰의 재물을 관리하는 자들은 혜주의 전례를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21. 청렴하고 유능한 제점승/ 지문사 이 정당(초정당)
홍무(홍무) 8년(1375) 가을 나는 도반 보복 원(보복원)스님을 찾아 상산(상산) 지문사(지문사)를 갔는데 그곳에 이 정당(이정당)이라는 제점(제점) 승려가 있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절 재물의 출납을 맡아보았는데 청렴하고 유능하여 계획과 결단에 규모가 있었으며 대중을 잘 무마하여 여섯명의 주지를 겪으면서도 시종여일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해 7월 24일 밤 꿈에, 두 동자가 책상 앞에 나란히 서 있기에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자 동자는 제점에게 금전출납부를 계산해 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이에 나에게는 계산할 수 있는 장부가 없다고 말하다가 깨었는데 다시 잠이 들어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 이튿날 방장실을 찾아가 어젯밤 꿈이야기를 한 후 방장스님에게 말씀올렸다.
“간밤에 이와 같은 꿈을 꾼 것은 올해 고사(고사)를 맡아보는 자가 게을러서 상주재산의 장부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니, 스님께서는 그를 독촉하심이 좋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태도를 보니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얼마 후 들어보니 이 정당이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끄러져 술 취한 사람처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다시 깨어나 황급하게 뒷일을 정리한 후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정당은 지문사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 하겠으니, 임종 때까지도 자기 일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절 일을 맡아보는 많은 사람들은 상주물을 보면 마치 소리개가 먹이 낚아채듯, 제비가 벌레 잡아먹듯 하며 인과의 죄보를 개의치 않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행동을 고칠 것이다.
22. 중년에야 뉘우쳐 계행을 닦다/ 청차 일계(청차일계)스님
경산사(경산사) 한 노스님의 법명은 청차(청차)이며, 법호는 일계(일계)이다. 젊은 시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리지 않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아침 덧없는 저승사자가 밀어닥치면 어떻게 쫓아버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모아두었던 의복과 재물을 모두 거두어 보경사(보경사) 동편에 관음당(관음당)을 짓고 청정한 계행을 닦으면서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그뒤 몇년이 지나 손수 금강반야경을 쓰다가 “3천대천세계(삼천대천세계)'라는 구절에서 붓을 쥔 채로 반듯이 앉아 입적하였다.
지정(지정) 정유(1357)에 북쪽 오랑캐가 보경사와 부근의 민가를 불태웠으나 관음당만은 그대로 있었다. 부처님 말씀에, 선악의 응보는 마치 그림자나 산울림 같다고 하셨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23. 다른 말씀 없으시고/ 백운사(백운사) 도(도)스님
처주(처주) 여수현(려수현) 백운산(백운산) 백운사(백운사) 도(도)스님은 화정사(화정사) 무견(무견)스님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였으며 일평생 굳건히 정진하여 언제 어디서나 뛰어났다. 그는 말 일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구차스럽게 법어를 청하는 학인이 있으면 그저 몸소 대사(대사)에 진력하라는 한마디 뿐 다른 말이 없었다.
근래 절에서 주지하는 이들은 옛사람의 말을 긁어 모아 자기 말인 양 떠들어대며 후학의 정신을 뽑아놓는다. 그러다가 눈 밝은 사람이 따지고 들면 흡사 도적놈이 주인집 물건을 훔쳐 다시 주인집에 팔려다가 훔친 물건이라는 증거가 분명해져 다시는 변명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몸둘 바를 모르는 꼴과 같다. 이런 류의 사람과 도스님의 기용(기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다. 내 듣기로 그의 선실로 들어간 사람은 매우 많다고 하는데 그의 종지를 깨달은 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24. 일생동안 참선하여/ 해회사 옹(옹)스님
해회사(해회사) 옹(옹)스님은 임해(림해) 사람으로 30세에 집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와 경산사 호암(호암)스님 문하에서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 처음 전단나무 숲에 갔다가 법당으로 돌아오면서 순찰하는데 누군가 그의 행동이 촌스러운 것을 보고서 뒷전에서 수군대자 스님은 분발하여 그 이튿날 바로 천목사(천목사) 중봉(중봉)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침식을 잃고 힘을 다해 참구하였으며 밤이 이슥하여 잠이 몰려와 물리치기 어려우면 어두운 바닥에 염주를 뿌려놓고 몇번이고 발로 더듬어 찾아내곤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진하였지만 깨친 바 없었다. 당시 동주(동주)스님은 호구사(호구사)에, 고림(고림)스님은 개선사(개선사)에, 동서(동서)스님은 풍교사(풍교사)에 주지로 계셨는데 스님은 소주(소주)를 찾아가 세 노스님의 문하를 두루 출입하여 점차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갔다. 그후 용화사(룡화사)의 주지가 되어 고림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93세에 육왕사(육왕사)에 가서 횡천(횡천)스님의 부도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평지에서 넘어져 왼쪽 발목을 삐어 걷지 못하게 되자 항상 평상에 앉아 달밝은 밤이면 낭랑히 옛분들의 게송을 읊었는데 제자 환(환)스님이 물었다.
”일생 동안 참선하다가 이제 와서는 그것을 쓰지 못하고 도리어 게송을 읊어 마음을 달래십니까?”
”듣지도 못하였느냐? 대혜(대혜)스님이 병환으로 신음할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일생 동안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더니만 이제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자 스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신음은 이렇지 않더냐?' 하신 말씀을.”
환스님은 절을 올렸다. 스님이 입적하여 다비를 하자 남다른 향취가 사람의 코를 찔렀다.
25. 사재를 용납치 않은 주지/ 동산사 노산(로산)스님
동로산(동로산)은 사명(사명)의 사람으로 인품이 강직하고 탐욕스럽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남달리 공경하였다.
세간에 나와 동산사(동산사)의 주지가 되자 공부할 때 모아둔 자기 재물을 모조리 쓸어다가 동산사 토목공사에 써서 얼마 후 집들이 새로와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등창이 생겼다. 곁에 있던 승려들이 훌륭한 의원을 불러들여 치료하자고 권하였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오직 편안히 앉아 절의 많은 일들을 처리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죽으면 장례에 필요한 옷과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 재산에 넣으라고 하니 그 절 승려들은, 스님께서 새로 받아들인 제자가 십여 명이나 되는데 만에 하나라도 스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상복 하나 마련할 길이 없다고 하였으나 스님은 듣지 않았다. 또다시 간청하자 그제서야 한 사람마다 곡식 한 섬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스님이 열반하자 대중들은 슬픈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곰곰히 살펴보니, 요즘 스승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가 새로 주지를 맡게 되면 소작인을 모두 모아놓고 소작문서를 뒤바꾸면서 돈을 받아 절 비용에 충당하고 또한 날짜를 정해 놓고 이자를 거둬들이며 죽을때 가서는 온갖 물건을 자기 측근에게 나누어 주므로 장례를 치른 후엔 으레껏 절 재산에 손해를 끼친다. 아! 노산스님과는 큰 차이가 있다.
26. 죽는 날까지 능엄경을 읽다/ 여 일암(여일암)스님
여 일암(여일암)스님은 영가(영가) 사람이며 속성은 원씨(원씨)다. 그가 태어나기 5일 전 그의 아버지가 꿈을 꾸었는데, 한 스님이 불경을 가지고 왔기에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오운산(오운산)에서 왔다 하며, 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은씨(은씨)라 하였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자 또다시 성이 은씨라고 대답한 후 5일 후에 반드시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경전을 그의 집에 놓아두고서 신표를 삼았다. 약속한 그날이 되자 과연 스님이 태어났는데 머리가 우뚝 솟고 눈빛은 사람을 쏘았다. 15세에 방산(방산)스님에게서 공부하여 종지를 얻었으며 보복사(보복사)의 주지로 있다가 서간암(서간암)에서 10년 은둔하니 명망이 날로 높아만 갔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마음을 내어 수능엄경을 암송하다가 제 5권까지 읽고는 피를 토하는 병으로 더할 수 없었다. 그후 쾌차되던 어느 날 밤 꿈에 읽지 못한 나머지 부분의 경을 보았는데 모두가 금자 [김자] 로 씌어 공중에 펼쳐 있기에 목청을 돋구어 경문을 읽어가다가 잠을 깨었는데 남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이 때문에 스님은 다시 능엄경을 암송했으며 이 경하나만으로도 넉넉하다고 하여 죽는 날까지 그치지 않고 매일 한 차례씩 외웠다.
27. 단강 각은(단강각은)스님의 행장
단강(단강)스님은 법명이 각은(각은)이며 속성은 자계 고씨(자계고씨)다. 스님은 후리후리한 키에 청정하고 준엄하게 살았다. 어린 시절 운문산 광효사(광효사)에서 삭발하고 뒷날 명주 연경사(연경사) 문법사(문법사)에게 사교의(사교의)를 배웠는데 겨우 7일 만에 통달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 당시 횡천(횡천)스님이 육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선종을 중흥시키자 학인들이 모여들었다. 스님도 그곳을 찾아가 향을 사른 후 입실하여 기어(기어)가 맞자 횡천스님은 내기(내기) 소임을 맡도록 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공부가 나날이 드러나 원근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스님이 지은 게송은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는데 제형 모헌지(제형 모구지)는 책머리에 서문을 썼으며 당시 사대부 조문 민공(조문민공)․등강 장공(등강장공)․원문 청공(원문청공) 등과 모두 절친한 사이였다. 소주(소주) 천평사(천평사) 주지가 되어 횡천(횡천)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뒤에 개원사(개원사)와 명주 보복사(보복사)의 주지로 옮겨 갔다가 월주(월주) 천의사(천의사)에서 입적하였다.
어느 날 방장실에 앉아 있다가 주장자를 붙잡고 ”빈 골짜기에 지팡이를 의지한 노승은 분명 한 폭의 수보리(수보제) 그림이렷다!” 하였다. 그리고는 시자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주장자를 내던지고 깔개에 기댄 채 열반하였다.
28. 양황참범(양황참법)의 효험
지정(지정) 경자(1360)년에 정해(정해)의 뱃사공 하태삼(하태삼)이 양곡을 싣고서 연(연:배해)으로 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후 16년이 지난 홍무(홍무) 을묘(1375)년에 그의 아내 진씨(진씨)와 아들 선(선)이 지난 날 하태삼을 생각해 보니, 그는 성품이 포악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데 인정이 없었으므로 비명에 죽은 외로운 넋이 바다에 잠겨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도를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 나머지, 재물을 모아 은주(은주) 십자항암(십자항암)에 엄숙하게 도량을 차리고 갖가지로 훌륭하게 장엄하였다. 청정한 스님 열 분을 모시고는 협만종(협만종)스님에게 그 일을 주관해 주십사 청하고 “양황참법(양황참법)”을 닦았다.
진씨는 지극정성이었으므로 그가 처음 도량에 들어와 사연을 전했을 때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날 “예참”의 제 2권을 마치고 밤이 깊어 선잠을 부치게 되었는데 의변(의변)이라는 승려가 느닷없이 놀라 신음하면서 잠꼬대를 하였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고 오직 겁에 질린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만종 등 여러 스님은 그가 깨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모두 일어나 한참 동안이나 주문을 외웠으며 다급하게 부르자 겨우 소생하였다. 그에게 까닭을 묻자 울기만 하다가, 다시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위태천(위태천)처럼 생긴 한 신인(신인)이 위엄스런 의관을 갖추고 일산과 화려한 수레, 그리고 창칼로 매우 삼엄하게 호위하며 나를 강제로 동행시켜 하태삼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천도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해포(해포)를 지나가자 신인의 위엄이 늠름하여 행인들은 멀리 피했으며 험한 곳을 두루 지나 큰 바닷가에 이르니, 귀신떼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어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신인은 나에게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하태삼의 손을 잡고 데리고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하태삼은 원나라 모자를 쓰고 세찬 파도 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였으므로 도저히 그의 손을 붙잡을 수 없었으며, 게다가 다른 귀신이 나에게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마침 수중에 돈이 있어 그들에게 주고 힘을 다해 하태삼을 붙잡아 언덕으로 올라서려는 찰나에 그대들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울었는데 그것은 너무나 고생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죄를 없애고 죽은 이를 천도하는 데에는 이 참법보다 더 좋은 공덕이 없을 것이기에 나는 짐짓 이를 기록하여 세인에게 권하는 바이다.
29. 지극한 신심을 가진 일가/ 황암 진군장(황암 진군장)
황암 진군장(황암 진군장)은 인품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말씨가 적었다. 그는 조심스레 사람을 사귀어 신의(신의)가 한 고을을 감복시켰다. 그의 나이 마흔에 가까워지자 부인 섭씨(엽씨)와 함께 틈만 있으면 경건히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그 고을에 “양황참문” 책이 없어서 군장은 손수 베껴 썼는데 그러다 보니 문 앞의 산다화(산차화)가 가을을 맞이하여 활짝 핀 줄도 몰랐다.
홍무(홍무) 경술(1370)년에 군장의 나이 60세였는데 병세가 위독하였다. 그의 아들 경성(경성)과 며느리 왕씨(왕씨)는 타고난 효성으로 약과 음식을 몸소 보살피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낮에는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왕씨는 자기 넙적다리 살을 도려내어 죽을 끓여 바치기까지 하였다. 그 해 12월 11일 서산에 해질 무렵 군장은 그의 몸을 부축해서 앉히게 한 후 경성에게 유언을 하였다.
”나는 돌아가련다.”
”어디로 돌아가시렵니까?”
”해 지는 곳으로 떠나가리라.”
또 이어서 부탁하였다.
”내가 죽으면 불가의 법에 따라 화장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함께 아미타불을 부르라 하고는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군장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바로 경성이고 둘째는 나에게 출가한 거정(거정)이다.
30. 걸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다/ 공 행이(공행이)스님
공 행이(공행이)스님은 상우(상우)의 사람이다. 일생 동안 어렵게 공부하여 내전(내전:불경)과 외전(외전)을 모두 탐구하였으며 특히 시를 잘했다.
어머니가 연로하여 의탁할 곳이 없자 걸식으로 봉양하였는데 어머니를 업고 전당(전당) 호수를 건너면서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어머니는 가마 위에 계시고 아들은 길을 걷는데
가마에 오르지 않고 걸을 때면 어머니가 먼저 아들을 부른다
끊어진 다리 밑에 흐르는 저 물길 따라 석양이 지는데
차가운 숲에 어미새에게 먹이를 물려주는 까마귀 보기가 민망스럽다.
모재람여자재도 자행불모선호
단교류수사양외 수견한림반포오
이 시를 음미해 보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1. 불상 조각가 광보살(광보살)의 일생
광(광)보살은 은현(은현) 사람으로 장(장)씨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조소(조소)를 가업으로 해왔는데 광(광)보살 대에 와서는 더욱 정교한 솜씨를 갖게 되었다. 그는 장년의 나이에 식구에게 얽매여 사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해회사(해회사) 수 매봉(수매봉)스님에게 귀의, 삭발하고 승려가 되려고 하였지만 그의 아내가 자식을 데리고 관가를 찾아 호소하는 바람에 수스님이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보살은 만호(만호) 완도(완도)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광보살에게 도망할 것을 권유하자 광보살은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칼을 뽑아 자기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다. 그 후 절강을 건너 패구(패구)를 지나 광부(광부) 땅에 오르는 동안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수스님을 찾아뵈려고 하였으나 그는 벌써 입적한 뒤였다. 화정사(화정사) 무견(무견)화상의 도행이 높다는 말을 듣고 가슴 속에 품어온 의심들을 말하자 무견스님은 그에게 “개에게 불성이 없다 [구자무불성] '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는데 마침내 깨친 바 있어 무견화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를 은사로 삼았다.
광보살은 일생 동안 절강 양편, 여러 사찰의 불상과 보살상을 매우 많이 조성하였지만 일을 끝마치면 짐을 꾸려 곧장 떠나갔으며 보수는 조금도 받지 않았다. 노년에 화정사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석교암(석교암)의 오백나한상을 빚었는데 그 정교함은 극치를 다하였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던 새벽녘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북소리․종소리․범패소리가 가득히 울려왔으며, 끝마친 후에는 채소밭에 먹을 것이 없었다. 광보살은 사람을 보내 시주를 하려 하였는데, 생각지도 않게 영해(령해) 다보사(다보사)의 원(원)강주가 채소를 보내왔다. 광보살은 기뻐하며 그 까닭을 물으니, 얼마 전 진보살이 부처님의 명을 받고 그의 절을 찾아와 채소를 시주하라고 말해주길래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석교암에 진(진)이라는 승려가 있었지만 그는 병으로 몸져 누워 오랫동안 문밖 출입을 못하던 자였다. 이 사실로 본다면 다보사를 찾아간 사람은 신인(신인)의 응화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광보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73세에 아무런 병이 없이 화정(화정)에서 앉은 채 입적하였으며 화장을 한 후 산중에 부도를 세웠다.
32. 사 성암(사성암)스님의 법문과 게송
사 성암(사성암)스님은 태주(태주) 영해(령해) 사람이며 속성은 알 수 없다. 형제 네 명 가운데 성암스님이 맏이였는데 모두 일시에 신심을 내어 출가하였다. 종친들에게 조상의 유산을 다 나누어 주고 살던 집 한 채 만을 남겨두었는데 친척들이 그것마저 서로 차지하려고 계속 다투자 사스님은 형제들과 함께 집을 불태운 후 그곳을 떠나버렸다. 사스님은 그후 여러 곳을 참방하여 향상의 지견을 갖췄으며 온주(온주) 영운사(영운사)의 주지를 하다가 영암사(영암사)로 옮겼고 마지막에는 영운사의 앞 초막에 은거하였다.
지정(지정) 갑신(1344)년, 내가 달차원(달차원)․명성원(명성원) 등과 함께 스님을 찾아가니, 당시 스님은 90이 넘어 긴 눈썹과 호호백발이 무척이나 맑아 보였다. 스님은 신발을 끌고 나와 서서히 걸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강심사(강심사)에서 왔습니다.”
”강물의 깊이가 몇백 발이나 되는가??”
”노스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에 성암스님은 합장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앉으시오. 차 한잔 합시다.”
성암스님은 성품이 반듯하고 고결하여 시를 지으면 한산자(한산자)와 유사한 기품이 있었다. 그가 “어느 승려를 욕하며'라는 시를 벽에 써놓았다.
오온(오온)*을 버리지 못한 채 머리만 깎고
누런 베옷 두르니 이것이 중이라네
불법도 세속법도 전혀 모르고
잘하는 것이라곤 돼지고기 개고기 잘 먹는 일.
오온불타두자㫴 황포위신변시승
불법세법도불회 당저당구십분능
책상 위에 그의 어록 한 권이 놓여 있기에 손가는대로 펼쳐보니, 여름 결제 때 한 상당법문이었다.
대원각은
소바리 말바리에 실어오고
우리 가람을 위해서는
외바구니 나물바구니를.
이대원각 우각마각
위아가람 과람채람
또한 상당법문에서 조주스님의 “개에겐 불성이 없다 [구자무불성] '는 화두를 들어 송을 하였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
원숭이는 인색하고 교활한 장사치 때문에 시름하고
개는 청정하고 도통한 중의 입을 보고 달아나네.
구자불성무 구자불성유
후수루루두 구주두루구
나는 달차원등과 그곳을 떠나왔으며, 다시는 감히 그의 기봉(기봉)을 범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영운사에 묵으면서 노스님에게 사 성암스님의 몇 가지 언행에 대하여 들었는데 모두 전할 만한 것들이었다.
33. 오로지 하는 일은 도적질
복건(복건)에 한 관리의 아들이 있었는데 오로지 하는 일이 도적질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심하게 꾸짖었으나 고치지 못하여 그 이유를 조용히 물어보니, ”어찌 도적질을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한 남자가 찾아와 끌고 가기에 마지 못하여 그를 따라 도적질을 합니다”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일 오늘밤에 또다시 찾아오거든 알려달라고 당부한 후 활과 화살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이윽고 밤이 이슥하자 과연 문밖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아들이 그를 가리키며 알리자 그의 아버지도 과연 그 사람을 보고서 활을 당겨 쏘았는데, 도리어 아들의 가슴에 꽂혀 즉사하였다.
34. 썩지 않은 시체
지순(지순) 경오(1330)년, 절서(절서) 지방에 매년 흉년이 들어서 항주 고을에 굶어 죽은 자의 시체더미가 서로 뒤엉키자, 관리들은 마을의 우두머리에게 인부를 부려 육화탑(육화탑) 뒷산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매장하도록 하였다. 그 속에 한 노파의 시신이 있었는데 십여일이 지났는데도 썩지 않고 매일 여러 시신 위로 올라와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의 몸을 뒤져보니 품 속의 작은 주머니 속에 염주와 세 폭의 아미타불도가 들어 있었다. 이 일을 관리에게 알리고 널을 구입하여 시신을 안치하고 화장을 하자, 연기와 불꽃 속에 불보살의 모습이 찬란하게 현신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신심을 내어 염불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35. 전생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다/ 말산(말산)스님과 서응(서응)스님
건령부(건령부)에 한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법명은 말산(말산)이다. 후일 그의 일생을 점친 한 행의 시를 살펴보니 “한 그루의 나무를 잿마루 위에 옮겨심는다. [일목이래령상안]”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는 조물주가 그의 이름을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일목(일목)'이란 끝 말(말:일+목)자를 의미하며 “영상(령상)'이란 산(산)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를 합하여 “말산(말산)'이라는 이름으로 본 것이다.
그는 좋은 인연 만들기를 즐겨하여 길을 닦고 교량을 놓아주는 등 수없이 많은 선행을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그 고을 추씨(추씨)의 꿈에 현몽하였고 태어날 때도 그의 친구가 같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그는 전신이 승려였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승려들과 사귀기를 싫어하고 목석처럼 어리석고 멍청했다.
한편 항주 천목산(천목산)의 의 단애(의단애)스님은 고봉(고봉)스님을 뵙고 깨달아 그에게 귀의한 자가 매우 많았다. 그가 죽어서는 오흥(오흥)의 가난한 집안에 현몽하여 다시 태어났으며 후일 승려가 되었는데 그의 법명은 서응(서응), 자는 보담(보담)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사람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아보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내가 천계사(천계사)에 있을 무렵 보담스님도 그곳에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그가 하는 일을 살펴보니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변변찮았고 때론 자신의 내력을 묻는 이가 있으면 오직 부끄러워하였다.
이 두 사람의 전신은 모두가 비범한 자들이었는데 어찌하여 전생에 익혔던 바를 이토록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을까? 옛사람의 말에 의하면, 성문도 오히려 모태에서 나올 때 깜깜해지고 보살도 생을 바꾸면서 혼미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행인이 어찌 삼가하지 않을 수 있으랴!
36. 8식 가운데 남아있는 무명의 뿌리
강서의 절학 성(절학성)스님은 산사에 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 회하의 일곱 제자는 참선을 함께 하기로 맹세를 하였다. 그 중에 가장 어리면서도 경지가 탁월한 사람이 있었다. 성스님이 그를 시험해 보기위하여 삼관(삼관)화두를 들어보이자 그는 마치 북을 치면 소리 울리듯 명확하고 신속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절하여 산사의 아래 민가에서 다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에게 모두 현몽을 했었다. 5세가 되어 글을 읽어보라 하니, 낭랑하게 소리내서 읽으며 스승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었고 글의 뜻도 잘 분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산사를 찾아 성스님을 친견하자 성스님은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전생에 나에게 답한 세 마디를 기억할 수 있느냐?”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성스님이 그 말을 꺼내자 머리를 끄덕이며 자기가 한 말이라고 수긍하였다. 성스님은 그의 부친에게 이 아이를 잘 보살펴 기르도록 부탁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다른 사찰의 승려가 그의 집에 많은 재물을 주고 그를 제자로 삼아 어산범패(모산범패)를 가르쳤다. 그 뒤로 시주 집의 청을 받고 범패를 하며 많은 보시를 얻게되자 교만하고 사치하는 마음이 동하여 세속의 비행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성스님은 이 일로 세 가지 대원(대원)을 세워놓고 학인을 채찍질하였다. 대체로 참선하는 사람들이 고요한 정(정) 가운데 어떤 환희를 얻게되면 잡된 시달림이 잠시 사라지고 밝은 지혜가 조금 나타나게 되지만 그것만으로 다 됐다고 할 수 없다. 무엇 때문일까? 팔식(팔식) 가운데 아직도 무명(무명)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바위 밑에 깔린 풀과 같으니, 바위를 들춰내면 깔렸던 풀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후세 학인들은 이 점을 미리 경계해야 한다.
37. 불법에 조예 깊은 사대부/ 왕문헌공(왕문헌공)
전조(전조:원) 천력(천역) 원년(1328) 천하에서 글씨 잘 쓰는 승려와 유생을 불러들여 항주 정자사(정자사)에 모두 모아놓고 금가루로 대장경을 쓰게 하였는데 왕문헌공(왕문구공)도 부름을 받고 참여하였다. 그는 반드시 대중 승려와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만일 따로 음식을 차려주면 불쾌히 여겼고, 더 나아가서는 팔꿈치를 끌고 욕해도 먹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지금도 그가 어느 스님을 위하여 절벽 위의 난초를 그린 그림에 쓴 시가 생각난다.
간지러운 봄바람 어디엔들 불지 않으랴만
가파른 절벽 위에 몸을 맡김은 무엇을 위함이뇨
그를 따라 스스로 전도망상 피웠으니
절벽에서 손 놓을 때를 보아야 하리.
뇨뇨춘풍일양취 탁신고처의하위
종거자작전도상 요견현애살수시
소동파의 영정에 쓴 글(제)은 다음과 같다.
오조스님은 세속 바깥의 사람이라
사바인연 끊은 지 이미 오래 전인데
텅 빈 솜씨로 그 아득한 모습 그려낼 자 누구기에
후세에 몸 밖의 몸을 찾으려 하오.
오조선사세외인 사파구의단생인
수장묘막허공수 거멱타연신외신
황산곡(황산곡)의 영정에 쓴 글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회당 노스님 비웃더니
만나자마자 계수나무 꽃향기를 이야기했네
그림을 펼쳐보니 옛모습 그대론데
어찌 일찍이 콧구멍이 크고 작고 하였으리오.
소살당연로회당 상봉강도계화향
피도면목혼의구 비공하증유단장
그는 한 시대의 큰 유학자였지만 불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저절로 옛스님들이 제창한 법어와 일치된 것이니 우러러볼 만한 인물이다.
38. 대원경으로 서로를 비춰보다/ 고정 조명(고정조명)스님과 구양규재(구양유재)
고정(고정조명)스님이 항주 중축사(중축사)의 주지로 있을 때였다. 구양규재(구양유재)는 복건성 안렴사(안렴사)로서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가는 길에 항주에 들러 고정스님을 찾아왔다. 정분어린 법담을 주고 받으며 열흘이 넘도록 머물다가 떠날 때 고정스님은 서호(서호)까지 나가 송별하니 규재가 말하였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기약이 없겠습니다.”
”대원경(대원경) 가운데서는 그대와 한 번도 이별한 일이 없습니다.”
이 말에 규재는 기뻐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고정스님이 경산사로 자리를 옮기자 규재가 게를 지어 보냈다.
스님만이 용무늬 솥을 들어 올리고
하늘의 제일 관문에 눌러 앉으셨으니
서호에서 헤어질 때 들려주던 대원경으로
희끗한 나의 모습을 비춰보고 계시리라.
상인방거룡문정 좌단릉소제일관
호상별래원경어 상응조빈아모반
39. 죽천(죽천)스님의 대보름 상당법문
영은사의 죽천(죽천)스님은 인품이 꾸밈새가 없고 깨침이 온당했으며 법어가 정밀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상당법문을 하였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
눈발이 멈추면 맑은 봄을 보리로다
얼마나 많은 절에서 천 등에 불이 켜지나
하늘에는 둥실한 대보름달
고요한 밤 깨는 범종소리
마을에서 법석이는 풍류소리
이 모두가 원통의 경지인데
굳이 따로 나루터를 물을 건가.
금조상원절 설소견청춘
기찰등천점 장공월일륜
고종훤정야 가관료비린
총시원통경 하수별문진
입적한 삼감사(삼감사)스님의 다비를 하며 말하였다.
”삼라만상이란 한 법에서 찍혀나온 것이다. 이제 너에게 금강권과 율극봉을 들어 보여 주리니, 무엇을 한 법이라 하는가? 하나는 둘로 말미암아 있는 것인데 하나, 그것마저 지킬 수 없구나. 불꽃 속에 새까만 거북이가 사자후를 하도다.”
그의 어록 가운데 이 두 단락이 빠졌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40. 흩어져 가는 선방 요사채 분위기
태정(태정:1324~1327) 초에 선정원에서 가흥(가흥) 본각사(본각사)의 영석 지(영석지)스님을 기용하여 정자사(정자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는데 스님은 당시 84세였으며 모든 이에게 고불(고불)과 같은 추앙을 받았다.
나는 경산사에서 정자사까지 모셔다드리고 전례에 따라 그곳에 방부들일 수 있었다. 당시 그곳엔 500명에 가까운 대중이 있었으며 태온(태온)의 향장(향장) 충경초(충경초)라는 자가 본산(경산사)의 수좌로 있었는데 나이와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이 귀의하였다. 나는 당시 학인의 신분으로 있는 터라 우연히 행랑에서 책장수를 만나 “장자(장자)” 한 권을 샀다. 장주(장주)의 요사채로 돌아와 위로실(위노실:응접실)에 들어가 장자를 읽으면서 참선공부에 지장이 될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마침 충수좌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매우 불쾌한 뜻을 표하며 정좌한 후 나를 그의 앞에 세워놓고 꾸짖었다.
”그대는 처음 대중 속에 들어와 참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잡학(잡학)에 힘쓰는가. 게다가 또한 선원의 위로실이란 손님을 맞이하고 불법을 논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외서(외서)를 읽어서야 되겠느냐.”
2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정자사를 찾아가 보니 요사채 위로실에 나이 어린 승려와 노승이 뒤섞여 거문고를 켜거나 바둑을 두거나 아니면 먹물을 핥으며 산수화를 그릴 뿐, 외서조차 뒤적거리며 읽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참선공부를 하는 자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아! 충수좌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 날 묘희(묘희)스님께서 양서암(양서암)의 대중방에 걸어놓았던 방문(방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뒤에 충수좌는 무주(주) 화장사(화장사)의 주지가 되었다.
41. 나호야록에 실린 염송에 붙이는 소견
“나호야록(나호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거사(오거사)의 설당(설당)스님이 정(정)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요사이 “선인전(선인전)”을 살펴보니 그대의 염송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 중에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무엇이 불전 안의 일입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하여 그대는 이렇게 염송하였다.
하나의 해골 속에
하늘땅을 떠받쳐 주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지일개루리
이유탱천지인
그런데,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는 잘못된 기록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양기(양기)의 자손들은 결코 어떤 인지 [감각] 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만일 인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음계(음계)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데 어떻게 선문의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게송을 하나 지어 부질없이 그대의 귀를 더럽힐까 한다.
홀로 위태로운 경지에 서지 않고서는 기연이 높지 못한 법
조주 노스님은 흠집없는 하나의 옥
당두노인 불전 속의 일을 곧바로 가리키시니
어른거리는 눈 속에 헛꽃을 모두 없애 주었도다.
불립고위기미준 조주로자옥무하
당두지출전리저 잔진망망안리화
내 생각으로는 정공이 “인지'를 인정한 것에 대한 오거스님의 비판을, 나호스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까지는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나호)가 오거화상의 이 송이 선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데 대하여서는 반드시 잘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또한 “조주노자옥무하(조주로자옥무¿)'와 “잔진망망안리화(진망망안화)'라는 구절도 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를 애써 참지 못하고 오거화상의 송에서 네 글자를 바꾸어 송을 하는 바이니 이것도 후학의 비판을 기다린다.
홀로 위태로운 경지에 서지 않아야 비로소 기연이 높아지는 법
조주 노스님은 옥에 흠집이 생겼네
당두노인 불전 속의 일을 곧바로 가리키시니
어른거리는 눈 속에 헛꽃이 덧붙는구나.”
불립고위기시준 조주로자옥생하
당두지출전리저 첨득득망망안화
42. 대혜스님의 후예로 지조를 지키다/ 서소담(서소담)스님
서소담(서소담)은 민현(민현)의 사람이다. 강직과 절개로 자신을 지키며 명리를 하찮게 여겨 절의 살림을 모두 집사에게 맡겼다. 그가 거처하는 방은 언제나 조용했으며 혼자서 선송(선송)을 즐겼는데 그의 문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노련한 선승들이었다.
지순(지순:1331~1332) 연간에 의연히 절을 떠나 금릉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용상사(룡상사)의 소(소)스님을 방문하자 소스님은 그를 수좌로 맞이하였다. 때마침 이충사(이충사)에 주지자리가 비어 소스님이 적극 추천하였으나 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스님께선 생각지 못하시는군요. 그곳은 송나라의 간신 진회(진회)*의 제사가 맡겨진 절입니다. 진회는 개인 감정때문에 권력을 빙자하여 대혜(대혜)스님을 매양(매양)과 형양(형양)으로 귀양 보냈던 자입니다. 내 비록 변변치 않으나 대혜스님의 후예로서 어떻게 차마 진회의 제사를 이어 받들 수 있겠소? 스님께선 참으로 생각지 못하십니다.”
당시 큰 선비나 덕망높은 선승들은 이 말을 전해듣고 극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일 그는 귀종사(귀종사)의 주지로 갔다가 세상을 마쳤다.
43. 생사는 무상한 것
형경남(형경남)이라는 자는 남창(남창) 만씨(만씨)집안 자손으로, 어려서 내복산(래복산) 단(단)스님에게 귀의하여 백장사(백장사) 여암 우(여암우)스님과 용상사(룡상사) 소(소)스님의 회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선정원의 추천으로 향성사(향성사)에서 개법(개법)하였다. 그 사찰은 오랫동안 폐사로 묵어오다가 일신되었으며, 스님은 그후 상람사(상람사)로 옮겨갔는데 도풍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78세가 되던 어느 날 곁에 있는 승려에게 명하여 물을 끓여 목욕한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편히 앉아 게를 쓰고는 주장자에 기대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단단한 사리가 매우 많이 나왔는데, 그의 법손 제성(제성)이라는 스님이 주장자와 승복과 사리를 거둬 내복산에 부도탑을 세워 갈무리하였다.
상법시대 이후 행각승들이 어느 곳에 가서 자리를 잡으려할 때는 반드시, 생사의 일이란 몹시 무상하고 신속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도 정신이 간절한 듯하지만 승적(승적)을 얻은 후엔 지난날 스스로 노력하겠다던 말을 실천하지 않고 명리만을 분주히 좇을 뿐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오늘날 경남스님은 임종 때에도 이와 같았으니 평소의 수행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44. 적조(적조)스님의 문장
스승 적조(적조)스님은 젊었을 때 허곡(허곡)스님과 함께 소주(소주) 승천사(승천사)의 각암 진(각암진)스님에게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온 후에야 깨침을 얻게 되어 동정호(동정호)를 생각하면서 부(부)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그 시는 실제로는 향상사(향상사)를 드러낸 것으로서 특별히 남다른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맑은 연기 푸르고
파도는 망망한데
동정호는 아득하여 하늘과 하나되었네
위로는 일흔두 송이 푸른 연꽃 피어 있고
아래엔 삼만육천이랑 은빛 물결
그 가운데에 한 사람
원앙새 수놓인 황금옷 입고
천리마 수레에다 명월주 귀걸이라
그대로 우주 조화와 함께 날으노라
옛일을 생각하니, 하늘바람 나를 실어 그 집 위에 올려놓고
황금줄기에 내린 8월의 맑은 이슬 나에게 마시게 하고
곤륜산의 영롱한 오색 구슬 나에게 요기하라네
내 골수 바뀌어지고
내 간장도 말끔히 씻기워
깨끗한 마음자리 항시 청량쿠나
사방 팔방 이 우주가 적기도 하려니와
만고세월 3광(삼광:일월성진)도 시들시들 늙는구나
오랫동안 볼 수 없으니 속절없이 슬픈 이 내 마음
오랫동안 볼 수 없으니 속절없이 슬픈 이 내 마음
연창창 도망망
동정요요천일
상유칠십이타지청부용
하유삼만육천경지백은장
중유인혜 체복김원앙
유룡차 명월당
직여조화삼고상
억석천풍취아등기당
음아이김경팔월지해항
식아이곤구오색지림랑
환이정수
척이간장
쇄연심지상청량
비독가이묘사극경팔황
억차가이로만고주삼광
구불견혜공개강
구불견혜공개강
또한 유학자를 위해 “십현영매시도(십현영매시도)”에 붙인 글 [제] 은 다음과 같다.
시경의 소남편, 서경의 열명편을
옛날 공자께서 정리하셨을 때는
모두가 열매만을 말하였을 뿐
꽃은 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양나라 하손에서
당송의 십군자까지는
소남을 읽고 열명편을 외우고
공자의 학문을 익혔는데도
그들의 시가며 문장에 표현된 바는
모두가 꽃만 이야기하였을 뿐
열매는 말하지 않았다.
아!
세상의 도가 옛날 같지 않고
인심이 더욱 야박하고 거짓된 것은
근본을 두텁게 하지 않는 까닭으로
모든 게 으레 이와 같으니,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감회에 젖어든다.
시지소남 서지설명
공자석소산정야
개언기실 이불급기화
유양하손 지당송십군자자
독소남 송설명 습공자지업자야
형지영가술제장구
개언기화 이불급기실
희 세도불고 인심익박차위
기불돈본야 례개여시
여관시도 절유혹언
조송설(조송설), 우소암(우암) 등도 이 글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원수(원수:적조스님)스님은 식견과 경지가 매우 높아서 붓가는 대로 말을 내뱉아도 자연히 고금에 뛰어난 문장이 되니, 우리가 애를 써 말해 보아도 스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적조스님은 임제의 정통 종지를 전해받은 분이다. 그가 장난삼아 문장을 가지고 놀며 선문의 뜻을 엮어내는 일은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었는데도 큰 선비들이 그를 이처럼 존경하였다. 무문찬(무문찬)스님은 ”요즘 총림에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들이 궁할 때는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다가 사정이 피고 나면 “진짜 선지식'이 되버린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통절한 이야기다.
45. 희 태고(희태고)스님의 학인지도
천태산 명암사(명암사)의 희 태고(희태고)스님은 정자사의 동서(동서)스님에게 오랫동안 귀의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지정(지정) 병술(1346)년 정월 13일 나는 자택사(자택사)에서 명 성원(명성원)․서 영중(서형중) 두 스님과 함께 한암사(한암사)의 향축담(향축담)스님을 방문하고 그 이튿날 태고스님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스님이 행각에 지친 나머지 찾아뵙지 못하였는데 때마침 태고스님이 축담스님을 찾아왔기에 우리 세 사람은 객석에서 향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자 태고스님은 느닷없이 우리에게 물었다.
”장주(장주)는 오랫동안 축원(축원)스님을 시봉하였으니, 세존께서 처음 하계에 내려오실 때 수많은 귀신을 만들어 냈다는데 그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지를 아는가?”
나는 이렇게 답하였다.
”맛있는 음식은 배부른 사람이 먹기에는 걸맞지 않습니다.”
태고스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위 아래를 가리키고 큰 걸음으로 사방을 돌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천상천하유아독존)이로다.”
아! 오늘날 큰스님들은 후학을 지도할 때, 보기 쉬운 것은 감추어두고 어려운 것만을 보여 후인을 농락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태고스님의 그대로 보여주는 법문 [직한거화] 은 걸인의 방석 밑에서 천금 되는 구슬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하겠다.
46. 고난을 구해주시는 아미타부처님
원 지정(지정) 15년(1355) 겨울, 장사성(장군성)이 호주(호주) 강절(강) 지방을 침공하자 승상이 경산사의 말사 화성사(화성사) 승려 혜공(혜공)에게 그 고을 백성을 집결시켜 경계의 산마루를 방어하라고 명하였다. 어느 날 적병이 경계를 침범하자 혜공스님은 향병(향병)을 거느리고 격전을 치르어 적병은 패해서 도망가고 40여 명의 포로를 잡아 관가로 송치하는 도중 서호(서호)의 조과사(조과사)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동이 텄을 때 마침 조과사의 전 주지였던 요주(요주) 천령사(천령사) 모대유(모대유)스님이 느린 걸음으로 행랑간을 산책하자 포로들은 스님의 우아한 모습과 쉬지 않고 염불하는 소리를 듣고서 마침내 모두가 ”노스님! 우리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스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을 구해줄 수 없지만 너희들이 지극정성으로 “나무구고구난 아미타불(남무구고구난 아이타불)'을 하면 아미타불이 너희를 구해줄 것이다.”라고 하니, 포로 가운데 세 사람은 스님의 말을 믿고서 쉬지 않고 큰소리로 염불을 하였다. 이윽고 관리가 포로를 데리고 출발하려고 모두 형틀의 쇠고랑을 바꾸어 묶었는데 우연히 이 세 사람은 형틀이 없어 새끼줄로만 묶어놓았다. 관가에 도착하여 죄수를 심사할 때도 관리가 유별나게 이 세 사람만을 국문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보리밭을 다듬다가 적병에게 붙잡혀 왔다고 진술하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원래 명주(명주) 봉화현(봉화현)의 톱(거)장이였는데 이곳에 고용되어 일하다가 사로잡혔다고 하여 이 세 사람은 풀려나게 되었다. 그들은 조과사를 찾아 대유스님에게 감사의 절을 올린 후 떠나갔다.
내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아미타불은 서원(서원)이 깊으셔서 염불하는 자는 임종 때 영험을 얻을 뿐 아니라 현세에서 처형되려는 죄수까지도 그의 가호로 풀려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47. 머리를 깎다가 사리를 얻다/ 서천축 판적달(판적달)스님
서천축국(서천축국)의 큰스님 판적달(판적달)은 선정(선정)을 굳게 닦으시고 아울러 계율까지 잘 지켰다. 세 벌 옷과 바리때 하나만을 몸에 지닐 뿐이었고, 시주를 얻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세상살이에는 그저 담담하였다. 홍무(홍무) 7년(1374) 남경(남경)에 도착할 즈음, 황제는 관리에게 명하여 천계사(천계사), 장산사(산사)의 주지와 함께 남경 여러 사찰의 승려를 인솔하여 교외에 나아가 맞이하고 깃발과 향과 꽃으로 그를 인도하여 대궐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기뻐하시고 깊은 총애와 후한 하사품을 전하였으며 장산사에 유숙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 자주 문안을 드렸다. 그해 겨울 황제는 친히 고명(고명)을 지어 도장을 새겨주고 그에게 선세선사(선세선사)라는 법호를 내렸다.
당시 나는 천계사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금단(김단)의 이발사 장생(장생)이 스님의 머리를 깎아 머리털을 쟁반에다 받아 놓았다. 처음 머리를 깎아 쟁반에 놓자 낭랑한 소리가 울리니 시자승이 재빠르게 덥쳐갔다. 다음번에 깎은 머리털은 장생 스스로 가져갔는데 그 속에 둥글고 깨끗한, 콩알 만한 사리 한 알이 있었다. 나머지 머리카락은 구경하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두 가져갔는데 사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다. 당시 모두 세 알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장생이 얻은 사리만을 보았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선세스님의 시자승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런 일은 우리 스승에게 항상 있는 일이지만 세상에 자랑거리가 될까 두려워 머리를 잘 깎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홍무(홍무) 9년(1376) 가을, 선세스님은 황제의 명으로 절강좌성(절강좌성)으로 내려와 육왕사의 사리탑과 보타관세음(보타관세음)의 시현(시현)을 위해 예배하였다. 두 곳에서 매우 특이한 상서로운 빛과 모습이 나타났으며, 스님은 두 곳에서 모두 게송을 읊었는데 다 범자(범자)로 씌어있다 한다.
48.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맹세
원대(원대)에 복건 도운사(도운사) 모(모)씨의 생일날, 서리(서리)인 주청(주청)이 생일잔치를 마련했는데 상 위에 쇠고기가 있었다. 이에 도운사는 급히 쇠고기를 치우게 한 후 여러 손님에게 천천히 설명하였다.
”내 젊은 시절 외가의 아우 아무개와 함께 한 백정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에 그 백정은 왼손에는 칼을 들고 오른손에는 송아지가 있는 암소 한 마리를 끌고와 처마 기둥에 묶고서 그 앞에 칼을 놓고 떠나가자 송아지가 갑자기 칼을 입에 물고 채소밭으로 달려가 발로 땅을 파헤치고 칼을 묻어버렸습니다. 백정이 돌아와 칼이 보이지 않자 화를 내기에 그 까닭을 말해 주었더니, 그는 칼을 찾은 후 문턱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탄식을 하다가 그 칼로 자기의 머리를 깎고 처자를 버린 채 출가하여 불법을 배웠는데, 지금 그가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후 외가 동생이 벼슬차 강서지방으로 부임하는 길에 배를 타고 황하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황량한 강기슭에서 쉬게 되었는데 건너편에 어슴프레하게 큰 집이 한채 보였습니다. 그 저택은 높고 넓었으며 엄숙하고 반듯하게 정돈되어 마치 제왕의 거실 같았습니다. 이에 강기슭을 올라가 저택으로 다가가 문지기에게 이곳이 뭐하는 곳이냐고 공손히 묻자, 이곳은 관청인데 구경하고 싶다면 들어와도 막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문안으로 들어가 보니, 큰 의관에 긴 허리띠로 단장한 사람이 정청(정청)에 반듯이 앉아 있기에 그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왔다 하고, 이곳이 무슨 관아냐고 물으니 이곳은 천하태을뢰산(천하태을뢰산)으로 여기에서는 소 백정만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에 살던 백정 황씨네 넷째아들이 죽은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 하기에 그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씨네 넷째는 목칼을 덮어 쓰고 쇠고랑에 묶인 채 끌려오다가 우리 외동생을 보자 깜짝 놀라서, 그대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냐고 묻기에 임지로 부임하던 중 우연찮게 이곳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그대의 죄를 벗겨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죄가 너무 무거워 벗어날 길이 없지만 관리께서 부임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권하여 120마리의 소를 죽이지 않으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저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외가동생은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소를 잡지 말도록 권했는데 그가 말한 수효를 모두 채우던 날 밤 황씨네 넷째가 외가동생을 찾아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저는 관리께서 소를 죽이지 말도록 권한 은덕으로 이미 죄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집에 전하실 서신이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으나 다만 문 안에 던져줄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외동생은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집을 들러 내 옷을 빨리 보내라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두 달이 지나자 과연 임지에 옷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많은 손님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쇠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49. 정토종의 말폐, 백련칠불교(백련칠불교)
정토교(정토교)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많은 경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정토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은 동림 혜원(동림혜원:진대)법사부터 비롯된 것이다. 법사는 유․뢰(유뢰) 등 제현을 모아 연루(련루:물시계) 위에 이름을 새기고 하루 여섯 때 예불을 올리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는데, 정성이 간절하여 임종 때 각각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전조(원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근기가 얕고 거짓 마음이 나날이 돋아 “백련사'라는 이름을 빌어 밥과 옷을 구하는 자가 종종 있었다. 연우(연우:1314~1320) 연간에 우담 도(우담도)법사가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그 폐단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물러나와서는 “여산보감(려산보감)” 몇 권을 저술하여 정교(정교)를 밝히고 이단을 배척하여 동림사(동림사)의 옛 일을 일신하였다. 그러나 우담법사가 입적한 지 백 년이 채 못되어 용렬한 자들이 그의 이름을 도용하여 이른바 백련칠불교(백련칠불교)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폐단은 극심하였다. 어떤 이는 자칭 도사(도사)니, 사장(사장)이니 하면서 방등무애(방등무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여 신도를 규합하여 정법을 훼손하고 마군이 일을 널리 행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를 전파하고 온갖 광채를 나타냈다. 귀중한 음식을 불전에 올리지도 않고 내놓거나 시식(시식)까지 모두 끊고서 스스로 부처라 하며 또한 삼보(삼보)란 불(불)․법(법)․사(사)라 하여 함부로 도사(도사)를 삼보 속에 넣고 승려는 아니라 하였다. 우매한 속인을 선동하고 그것을 풍속화하여 막을 수 없는 세태에 이르니 결국 조정에서는 백련칠불교를 엄단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동림사의 수행을 더럽게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 어떻게 하면 우담법사와 같은 분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 폐단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까.
50.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시주들을 대하다/ 서설 애(서설애)스님
서설 애(서설애)스님은 황암(황암)의 사람이다. 어릴 때 추강 담(추강담)스님에게 출가하여 신성산(신성산) 유경원(류경원)에 살았다.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금강반야경을 일과로 삼았으며 더욱이 유가법사(유가법사)에 능하였다. 승속의 청을 받으면 가서 지성껏 불사를 했을 뿐 시주가 많고 적음은 헤아리지 않았으며, 더러는 한푼을 받지 못하여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다시 부르면 가서 처음이나 다름없이 해주었다.
홍무(홍무) 신해(1371)년 5월 가벼운 병을 앓자 더운물을 찾아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고 게를 써놓고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다. 다비할 때 큰 별이 백호광에 섞이듯 빛이 흩어졌는데 연기와 불꽃은 전혀 없었으며 단단한 사리가 많이 나왔다. 세수 83세였다.
51. 말년을 불법 참구로 보내다/ 송무일(송무일)
송무일(송무일)은 여요(여요) 사람이며 별호는 용암(용암)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너그러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의연하였다. 어려서 양렴부(양렴부)․진중중(진중중) 두 선생에게 배워 경서에 밝고 학문을 통달하였으며 문장에도 엄격한 법도가 있었다. 노년에 이르러선 선학(선학)을 몹시 좋아하였는데 명조(명조) 창건 초기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러 원사(원사) 편수에 참여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돌아왔다.
나는 문도 거정(거정)에게 자계(자계) 용산사(룡산사)에 머물면서 수시로 무일을 찾아 문장짓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그 일로 무일이 나의 문도를 통하여 나에게 입도(입도)의 요지를 묻는 서신을 전해 오면 나는 답서에 무어라 적어보내기도 하였고, 계환(계환)스님의 능엄경 주석과 대혜(대혜)스님의 서간집(서간집)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그후로 무일은 항상 눈을 감고 꼿꼿이 앉아 반복하여 두 책의 이치를 탐구하여 깨달은 바 있었다.
홍무 9년(1376) 6월, 병으로 눕자 그의 문인 왕지(왕지) 등에게 명하여 아들에게 주는 시 한 수를 받아 적게 한 후 태연히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부채를 흔들면서 가족들을 만류하며 말하였다.
”나는 조용히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말을 마친 후 눈을 감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세상을 마쳤다. 그 당시 날씨가 몹시 더웠는데도 시신을 염하려고 보니 얼굴엔 미소를 머금고 더욱 깨끗하고 윤기가 있었다.
“용암유고(용암유고)” 몇 권이 세상에 전해오고 있다.
52. 세상에 나오는 엉터리 어록들
요즘 세상에는 머리 깎은 외도가 한 무리 있는데, 그들은 불조께서 남긴 말씀을 모아 실속없는 책으로 만들고는 이를 “어록(어록)”이라 하여 신도들의 시주로 간행하고 있다. 그들은 원래 깨달은 바도 없는데다 불조 화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현학적인 말로 어리석은 자신의 해석을 잘못 붙이니 아는 사람이 보면 두려운 마음에 흐르는 땀을 금할 길 없을 것이다.
소천강(소천강)은 사명(사명) 사람이며 원직지(원직지)는 천태 사람이며 혁휴암(━휴암)은 양주의 사람인데 세 사람 모두 온갖 번뇌에 얽힌 범부에 불과하며 정견(정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 마음대로 “어록”을 발간하였다. 휘(휘)장주는 은현(은현)의 사람으로 조천강에게 귀의하여 금강경을 조목마다 분석하고 제멋대로 송을 붙여 간행 배포하였다.
내가 동곡사(동곡사)에 있을 무렵 휘장주가 찾아왔기에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 경에다 제목을 붙였으며 무엇으로 종지를 삼았느냐?”
그러나 그는 전혀 아는 바 없었다. 하물며 그가 미혹한 중생을 위하여 무상정변지각(무상정편지각)을 표출해 낼려고 하겠는가. 이들은 모두 정인(정인)에 근본하지 않고 삿된 도에 힘써 세상에 재난을 주면서 자신의 명성만을 좋아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유혹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고 슬픈 일이다. 오늘날 큰 법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들을 추방하고 바로 잡아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들을 따라 칭찬하고, 어떤 이는 서문과 발문까지 써주고 있으니 그들이 불문에 끼친 죄는 매우 큰 것이다.
53. 자암(자암)스님의 “총림공론(총림공론)”을 논하다
나는 자암(자암)이 지은 “총림공론(총림공론)”을 읽어보고 그가 식견이 고매한데다가 연구가 정밀하여 다른 사람으로서는 쉽사리 따라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논리가 지나친 부분도 있고 논해서는 안될 것을 논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적음지증전(적종지증전:홍각범)을 논하면서 그 몇 군데 지적을 했는데, 벼포기 속에서 모벌레가 생겨나지만 벼를 해치는 것은 모벌레라고 한 말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승보전(승¿전)에 대하여, 전기에는 과장된 말이 많고 찬(찬)에는 억설이 많다고 하니, 분명 그렇다면 승보전에 실린 81명의 스님들에겐 모두 명성에 맞는 실제의 덕이 없다는 말인가? 참으로 이는 적음스님이 거짓 문장으로 꾸몄다고 몰아부치는 것이니, 이러한 점은 그의 논설에 있어서 지나친 부분이다.
또한 도연명(도연명)의 “귀거래사(귀거래사)”에 대하여는, 한담(한담)이 넉넉하고 문장의 격이 높으나 소우(소우: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없애리라 [락금서이소우] ) 두 자가 좋지 못하다고 하였고, 한퇴지(한퇴지)의 “송이원귀반곡서(송리진귀반곡서)”에 대하여는, “슬픔과 비난이 많고 그릇된 일을 치장했다'고 하였다.
왕원지(왕원지)의 “소죽루기(소죽루기)”에서, ”공청에서 물러나 한가할 때면 학창의(학의)를 입고 화양건(화양건)을 쓰고 손에 주역 한 권을 들고 향을 사르면서 말없이 앉는다.”는 구절에 대해 왕원지가 자신의 가련한 삶을 다행으로 여긴 것이라 하고 이어서 ”세속의 생각을 떨쳐버린다”는 구절이 옥의 티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옛 유학자의 문장이 잘되고 못되고야 우리 불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이를 “총림공론”에 넣은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논해서는 안될 것을 논했다는 부분이다. 옛사람의 말에, 한 자도 짧을 수 있고 한 치도 길 때가 있다고 하니 정말 그렇지 않겠는가?
54. 통쾌한 납자가 없는 이 세상/ 육왕사 설창(설창)스님
육왕사 설창(설창)스님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머물기를 청하자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천태산에서 왔습니다.”
”발우는 가지고 왔느냐?”
”가지고 왔습니다.”
”내게 좀 보여주지 않겠느냐?”
”객사에 있습니다.”
”나는 그 발우를 물은 게 아니다. 내가 묻는 것은 밑없는 발우이다.”
그 스님이 몸둘 바를 모르자 스님은 한탄하였다.
”통쾌한 납승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가거라!”
55. “선림보훈(선림보훈)”에 기재된 임시변통의 문제에 대하여
“선림보훈(선림보훈)”에는 담당 준(담당준)스님이 이상로(리상로)에게 보낸 서신이 실려 있다.
요컨대 법을 잘 전하는 것은 변통에 달려 있습니다. 변통을 모르고서 교학과 문자에 얽매이고 모습과 망정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가 임시변통을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물으니 조주스님께서, “내가 청주(청주)에 있을 무렵 베 적삼 한 벌을 해 입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옛사람이 임시변통에 통달하지 못하고서야 이처럼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의 생각으로는 그 스님이 던진 물음도 대단하긴 대단했는데 어째서 조주스님이 네가 머물 곳 [수주박처] 은 없다고 하였을까? 그러나 그에게 답한 한마디를 임시변통에 통달한 것으로 여김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임시변통이라는 것은 상황을 보아 알맞게 처신하는 일로서 심의식(심의식)을 쓰는 것이다. 게다가 그 스님의 그와 같은 물음과 조주스님의 그와 같은 대답은, 두 개의 거울이 서로 비치는 것이며 빛과 그림자가 둘 다 없는 경지인데 어찌 임시변통이 있다 하겠는가? 담당스님의 이와 같은 말 속에는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56. 경전과 어록에 보이는 염화시중의 이야기
한명선(한명선)선생이 육방옹(육방옹)이 지은 “보등록(보등록)” 서문의 초본 말미에 덧붙여 썼다.
”방옹선생이 손수 저술한 “보등록” 서문의 초본은 보은사 정(정)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나도 지난날 선생의 유문(유문) 두 질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잘못된 곳들은 선생이 손수 다 지워버렸다. “전등록”에 의하면, 세존이 꽃을 들어보이자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제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경전에 없다 하여 거짓말이라고 비난한다. 어느 사람의 말에 의하면, 금릉의 왕승상 [왕안석] 이 비서성에 있을 때 “범왕결의경(범왕결의경)”을 발견하여 그 책을 펼쳐보니 “염화시중(념화시중)'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숨겨야 할 사정이 있어 이를 장경 속에 넣지 않았다는데 이제 선생(육방옹)이 이를 패다라엽(패다나엽)의 옆줄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왕안석이 보았다는 책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반드시 고증이 있었을 것이기에 아울러 끝에 기록하는 바이다.”
두 선생은 박식하고 이론에 밝으니 어찌 거짓말을 하겠는가?
얼마 전에 송한림(송한림:송경렴)이 나를 위하여 “응수록(응수록)” 의 서문을 썼는데, 거기에 그가 “대범천왕문불결의경(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실려 있는 “염화시중'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운운하는 부분이 있다. 송한림이 몸소 보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경전인데도 어느 사람은 이를 거짓이라고 비난하니, 앞서 말했듯이 ”숨겨야 할 사정이 있어 이를 장경에 넣지 않았다”는 말이 이 모두를 말해주고 있다.
57. 상투화 되는 조사(조사)
옛사람들이 죽은 승려를 위해 불사(불사)를 하는 것은 그의 견도(견도)가 밝지 못하여 죽는 순간에 막히거나 집착할까봐 두려워 실로 이를 일깨워주고자 몇자 썼을 뿐, 그가 생시에 지냈던 벼슬과 기연에 관한 이야기들을 구구히 쓰지는 않았다.
무준(무준)스님이 경산사 주지로 있을 때 관(관)상좌의 다비식에서 불을 붙이면서 말하였다.
”큰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 이야기 하기가 어려운 법이니 물결이 다하면 물거품도 없어진다. 이제는 바다도 사라지고 물거품도 없어졌으니 머리를 돌려 자기 집에 안주하였다.” 운운하였는데 당시 그곳에 있던 큰스님들이 뒤따라 조사(조사)를 써서 조사는 그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총림에서는 조사 쓰는 것이 상투화되어 아무 의미없는 어거지 문장을 엮어내니 이른 바 죽은 승려를 일깨워주려던 원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58. 관세음보살의 현신/ 조료 원(조료원)스님
천동사 조료 원(조료원)스님은 원래 병이 많던 사람이다. 홍무(홍무) 병진(1376)년 날로 병이 악화되자 면(면)장주는 그에게 관세음보살 명호를 하라고 권하였다. 조료원은 그의 말을 따라 하루에도 몇만 번씩 염불하다가 다음 해 10월 17일 오시(오시)에 이젠 죽음이 멀지 않으니 아미타불로 바꾸어 염불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갑자기 아름다운 부인 한 분이 몸에는 육수의(육수의)를 걸치고 손에는 맑은 물병을 들고 문 밖에서 들어와 그의 앞에 섰다. 그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다. 조료 원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고백하고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보살은 잠깐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그 일이 있은 지 5일이 지나 병이 다 나았고 지금은 50여세가 되었다.
59. 무정불성(무정불성)에 관하여 논하다/ 경산 여암(여암)장주
경산 여암(여암)장주는 태주(태주) 위우현(위우현) 사람으로, 교학을 하다가 선공부로 들어왔다. 침착하여 서둘지 않았으며, 내전(내전:불경)과 외전(외전)에 널리 통달하고 자기 생사문제는 더욱 치밀하고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노년에는 천동산 왼편 산기슭에 은거하였는데, 나는 지정(지정) 갑신(1344)년에 그의 은거처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정물에 불성(불성)이 있는지 유정물에 불성이 있는지에 언급하게 되자 이리저리 따지고 묻고 하다가 여암스님이 갑자기 말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교학하는 큰스님 한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무정 속에 본래 불성이 있는가, 아니면 불성이 어디에나 있어서 무정에도 막히지 않기 때문에 무정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인가”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급히 막으면서 말했다. 불성은 텅 비어 말과 명칭을 벗어나 있으니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자 여암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60. 금동석가상과 관음보살상의 영검
은성(은성) 복취암(복취암)의 비구 보월(보월)스님이 받들고 있던 청동으로 만든 석가상은 오래되고 정교한 불상인데 애당초 번양(번⻏양)에 있던 것이라고 할 뿐, 처음 조성된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 없다. 송(송) 휘종(휘종) 정화(정화1111~1117) 연간에 전감(전감:쇠돈 만드는 곳의 우두머리)이 그 불상을 가져다가 풀무에 넣어 무려 3일 동안이나 녹였지만 형태와 색상이 더욱 선명하였으므로 모두들 놀라서 그 불상을 요주(요주)의 광효사(광효사)에 봉안하고 “벽화금동석가보상(벽화김동역가보상)'이라 이름하였다. 광종(광종) 소흥(소흥1190~1194:원문의 “소흥'은 잘못으로 생각됨)에 광효사의 주지 보걸(보걸)스님이 화공에게 명하여 그 불상을 그리고 또 돌에다 새겼다. 회계(회계)의 중교(중교)스님이 찬(찬)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부처님께서 부처 삶는 놈을 만났네
불꽃 속에 넣어서 녹이려 했지만
삼일 동안 들판에 불똥이 튕길 뿐
큰 용광로 속에서 끄떡도 안했다네.
작가회우살불수 치지열염령소용
화성병야긍삼일 외외불동홍노중
그후 사씨(사씨)가 정권을 잡자 그 불상을 사씨에게 바쳐 결국 절좌(절좌) 지방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며, 금조(금조:명) 홍무(홍무) 임술년(1382) 보월스님이 사씨에게 돈을 주고 산 것이다.
또한 해회사(해회사)에 지난 날 안휘(안휘)가 손수 그린 관음성상이 한 폭 있었는데 필력이 정묘하고 채색이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워 세상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원 지정(원 지정:1341~1367) 연간에 성 안에 사는 고씨(고씨)가 양황참법(양황참법)의 예를 거행하면서 삼일 동안 그 그림을 모셔다가 불단을 마련하였다. 공양을 끝마치고 모든 사람들이 흩어진 저녁 2경(이갱) 무렵 그 그림에서 큰 빛이 쏟아져 집 밖으로 뚫고 나갔다. 저자 사람들은 불이 난 줄 알고 불을 끄려고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그것은 그림에서 쏟아져 내린 빛이었다. 그후 저씨(씨)와 장씨(장씨)가 불사를 거행한 후 공양에 청하니 처음처럼 상서로운 빛이 났었다.
청정법신은 일체 만물을 포섭한다. 경에 이르기를, 삼천대천세계에 겨자씨 만한 곳이라도 보살의 신명(신명)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하였다. 중생에 응하여 모습을 나투시고 인연 따라 감응하니 어느 곳이라도 부처님이 계시는 곳 아닌 데가 없다. 이를 비유하자면 태양이 하늘에 떠서 강물 속에 그림자 비치면 보는 사람마다 각기 하나의 태양이 그 사람을 따라 다니는 것과도 같다. 불보살의 신비한 조화를 비교해 보면 어찌 그 차이가 만배에 그치겠는가?
이제 청동으로 만든 석가상과 관음의 그림을 보면 그 영검이 이와 같으니 불상과 진신을 두 가지로 생각하여 깊은 공경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61. 혼례식날 도망가서 출가하다/ 영 고목(영기목)
영 고목(영기목)스님은 은성(은성)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채식을 하고 법화경을 계속 읽어오다가 출가를 청하니 부모가 허락하지 않고 어거지로 결혼을 시키려 하였다. 혼례를 치루던 저녁, 스님은 도망가서 차가운 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의 외가 형 육씨(육씨)가 옷을 벗어 입혀준 후 부축하고 돌아와 더운 물로 몸을 녹이고서야 소생하였다.
맨처음 해회사(해회사) 매봉 수(매봉수)스님을 모시다가 다음에 정자사(정자사)의 동서 해(동서해)스님을 찾아뵙고 삭발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엔 맑은 정신으로 참선을 하며 끊임없이 분발하여 중봉 단애(중봉단애)․포납 대량(포납대양)․무방 고림(무방고림) 등 여러 큰스님을 두루 찾아뵙고 예를 다해 법을 물어 그들의 가르침을 크게 받았다. 설창(설창)스님이 육왕사의 주지로 있을 무렵 스님의 계행이 엄숙하고 안목이 진실함을 존중하여 특별히 제2수좌로 초청하였다.
지정(지정) 정유(1357)년, 대중의 여망을 따라 해회사(해회사)에서 개법하니 승속이 모두 그를 믿고 추앙하였고, 이에 힘입어 사찰이 흥성하게 되었다.
금조(금조) 홍무 4년(1371)에는 서울 [경사] 에 가서 종산법회(종산법회)에 참여하였고 다음 해에 동쪽 지방으로 돌아왔다. 또 그 다음해에 은성의 거교암(차교암)에서 입적하였는데 널에 넣은 지 7일이 지나도록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73세이다.
62. 계율을 경시하는 말세의 풍조를 개탄하다
명주(명주) 오대산(오대산)의 계단(계단)은 영지(영지)율사가 중창한 것이다. 축조를 마치고 법을 강론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났다. 신비한 기가 뛰어나고 눈썹과 수염이 하얀 그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저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세 알의 구슬을 바쳐 오늘의 계단 조성을 축하합니다.”
말이 끝나자 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단 중심에 세 알 구슬을 안치하였는데 여러 차례 빛이 나왔다.
황조(황조:명) 홍무 11년(1378) 4월 17일, 단주(단주) 덕옹(덕옹)이 열 명의 율사를 모시고 계법회(계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그후 이틀이 지난 밤에 자계사(자계사)의 스님 자무(자무)가 단에 오르려는 찰나에 갑자기 구슬에서 광채가 밖으로 뻗어나오는 것이 보이고 그 속에서 선재동자가 나타났다. 자무는 깜짝 놀라 소리쳤고 온 대중이 돌아가면서 예배하였다.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그후로 밤마다 대중들은 더욱 경건하고 간절히 기도하니, 황금부처로 나타나기도 하고 팔이 여섯 달린 관음상, 또는 붉은 대 푸른 버들 위에 빈가새 [빈가조]가 좌우로 춤을 추며 날아다니기도 하고, 또는 월개(월개)를 쓰거나 손에 화로를 든 부처로 나타나기도 하고, 용신이 구슬을 바치는 등 신기한 변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 내 들어보니 세존께서 계단의 축조를 마치시자 범천왕(범천왕)이 귀한 구슬을 올렸고 제석천왕도 여의주로 비를 내려 세존을 도왔다고 한 세존께서 돌아가실 때 비구들에게 “계율로 스승을 삼으라'고 부촉하셨고, 또한 “만일 나의 법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계율에서 비롯된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와 계율의 관계는 실로 크다. 오대산의 계단에 구슬을 올린 사실은 본디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법시대(말세)에 계법을 거행하자 신비한 감응이 이처럼 빛날 줄을 생각이나 했었겠는가! 천룡(천룡)이 계법을 보호하는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스님들이 계율을 쓸모없는 형식이라 생각하고 조금치도 마음에 두지 않음을 어찌하랴. 가슴아픈 일이다.
발문 1
천희주산 수인
“산암록”은 산암(산암)스님이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기록 중에는 좋은 일 좋지 못한 일들을 숨김없이 그대로 썼으니 불교문중의 좋은 역사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에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모두 쓰지 않을 수 없되 그것이 천하의 공론과 일치한다면 더욱 훌륭한 일이다. 이 책이 세상에 퍼지면 “임간록(림간록)” “초암록(초암록)” 등 여러 저술과 함께 끝없이 전해질 것이다.
홍무 경오년(1390) 봄 2월 16일에 천희산주(천희산주) 수인(수인)은 쓰다
발문 2
내 젊은 시절 스승 묘명(묘명)스님을 시봉하면서 경산사에 머물 무렵 항상 몽양실(몽양실)에 계시던 공실(공지) 노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들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노스님께서는 선배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여 바른 지견을 갖추셨고 해박한 학문으로 묘한 법문을 하셨다. 또한 피로한 줄 모르고 부지런히 학인을 가르쳤으며 향상(향상)의 수단을 쓰는 일에 대해서도 그의 곁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후에 두 차례나 절동(동) 지방 명찰의 주지를 지낸 뒤 한가히 태백산에 은거하셨다. 나는 그 당시 계속 사명(사명)에 있었기에 명절이 되면 반드시 스님을 찾아가 문안을 드릴 수 있었으나, 종산(종산)으로 온 지 3년 만에 스님의 상좌 취산사(취산사) 전 주지 현극정(현극정)스님이 사명에서 나를 찾아와 노스님이 입적하신 지 4년이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어느 날 나에게 “산암잡록” 한 편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읽어보니 모두가 지난 날 노스님께서 내게 일러주셨던 이야기들이었다.
아! 노스님을 다시 찾아뵈려고 하여도 다시 만날 수 없는데 노스님께서 평소 쓰신 논저를 읽어보니 감개가 무량할 뿐이다. 노스님이 설법하신 어록은 따로 세상에 전해오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어록에는 향상 법문 [향상보제]이 많고 이 책은 고인의 옛 말씀과 지난 행적을 들어 학인의 견문을 넓혀주려는 글이니 난해한 어록에 비하면 이 책이 쉽다고 한다. 그러나 애당초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본디 세존께서도 근기를 보고 맞게 가르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역대 조사의 종문에서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운다든가, 눈썹을 날리고 눈을 깜빡인다든가 하는 일들은 하나하나 학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이 책을 학인을 위한 향상의 방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학인들은 반드시 안목을 갖추어야 하리라.
홍무(홍무) 경오년(1390)에 영곡주산(영곡주산) 청예(청예)는 절하고 쓰다.
 ̄*덕산스님이 어느날 공양이 늦어지자 손수 바리때를 들고 법당으로 갔다. 공양주이던 설봉스님이 이것을 보고 ”이 노장이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바리때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하니 덕산스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 곧장 방장실로 돌아갔다. 암두스님이 이 말을 듣고 ”보잘것 없는 덕산이 말후구(말후구)를 몰랐다”하였다. 덕산스님이 암두스님을 불러 ”네가 나를 긍정치 않느냐?”하니 암두스님은 은밀히 자기생각을 말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는데 그 전과 달랐다. 암두스님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기쁘다. 늙은이가 말후구를 아는구나. 앞으로 천하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3년 뿐이로다.”하였다. 과연 3년 후 돌아가셨다.
*구정(구정):하(하)나라 우(우)임금이 주조했다는 큰 솥.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보배.
*선정원:원(원)나라 때 불교의 승속과 티벳, 트루판을 관리하던 관청.
*여기의 철우, 해문, 고순, 식암은 스님들의 이름이다.
*원문의 “운'은 “로'의 오기인 듯하다.
*원문의 “청'은 “정'인 듯하다.
*진회(진회):남송 고종 때의 재상으로 충신 악비(악진)를 무고로 죽이고 주전파(주전파)를 탄압하여 금(김)나라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당시 대혜스님 등의 승려들은 주전파의 입장을 동조하여 귀양보내졌다.
*당사(당사):절의 당우를 관리하는 소임.
*“일목(일목)'이란 끝 말(말:일십목)자를 의미하며 “영상(령상)'이란 산(산)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를 합하면 “말산(말산)'이 된다.
*세존께서 어느 날 자리에 오르시자 대중이 모였다. 문수가 백추(백퇴)를 치고 말하되 ”법왕의 법을 자세히 살펴보니 법왕의 법이 이러하나이다”하니 세존께서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수료학:비나야잡사(비나야잡사)에 나오는 고사. 아난이 비구들과 죽림원에 갔을 때 수료학(수료학)이라는 비구가 게송을 읊고 있었다. ”백세를 누리면서 수료학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하루를 살더라도 수료학을 보는 것만 못하리”라고. 아난은 그것을 듣고 비구들에게 전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백세를 누리면서 생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하루를 살면서 생멸을 밝히는 것만 못하리' 하셨느니라.”
아난이 잘못 기억했다가 정법을 그르쳤다는 뜻으로 쓰임.
*제점(제점):상주물 관리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