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法華經, skt. Saddharma pundarika sutra)의 이해>
<법화경>의 원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다.
‘흰 연꽃과 같은 올바른 가르침의 경’이란 뜻이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開), 보여(示),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悟) 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게(入) 함을 목적[개시오입(開示悟入)]으로 편찬된 경으로, 한자로 7만여 자가라고 한다.
<화엄경(華嚴經)>과 함께 한국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화엄경>을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하고 <법화경>을 대승종교(大乘終敎)라 해 최고의 가르침으로 꼽았으며, 대승불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법화경>은 불교 교판학(敎判學)에서 볼 때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완성된 경전이라고 일컬어진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도 이 경전이 효과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쉽게 설명했다는 의미다. 머리가 좋은 엘리트뿐만 아니라 약간 둔한 사람도 <법화경>을 읽고 외움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서 <묘법연화경>은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존숭되고 신봉해온 대승경전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천태종을 비롯한 여러 불교 종파에서 존중되고, 널리 읽혀온 경전이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는 현세의 부처만이 아니라 아득한 옛날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이른바 '구원불(久遠佛)'로 나타난다.
신앙과 헌신의 지고한 대상으로서 그의 특성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대한 묘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즉, 순식간에 사방에 제각기 부처를 모시고 있는 수천 개의 세계가 눈앞에 나타나도록 하는 표현도 있다.
<묘법연화경>에서 ‘묘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가리킨다.
부파불교의 번쇄한 이론중심 불교에 반발해 기원전후에 불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이 구체화돼 대승불교로 나타났다.
이후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사상경향에 따라 대승불경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법화경>은 한꺼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교적 초기에 성립된 대승경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법화경>은 <반야경>ㆍ<유마경>ㆍ<화엄경>ㆍ<아미타경(阿彌陀經)> 등과 함께 대승불교 제1기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지나 이 중 가장 늦게 조성된 듯하다.
기원 전후로 해서 신앙심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 서북인도에서 최초로 소부(小部)의 <법화경>이 만들어지고, 그 후 2차에 걸쳐 증보된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한 형성 시기는 대체로 3기로 나누는데,
제1기는 AD 50년경, 제2기는 AD 100년경, 제3기는 AD 150년경으로 3차에 걸쳐 소품 단위로 결집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가 대체로 쿠샨 왕조(Kushan Dynasty) 시대에 해당한다.
처음엔 8품 내지 10품 정도로 구성된 소규모의 경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제1 서품의 일부와 제2 방편품과 제3 비유품이 먼저 성립되고, 다음으로 차츰 증보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법화경>의 사본(寫本)이 근년에 와서 네팔, 캐시미르,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됐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영국의 호지손(Brian Hodgsnn)이란 사람이다.
그는 네팔 주재 공사였을 때 불경의 범어본 사본을 수집했는데, 그 중에 <법화경>의 사본도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본이 발견 됐다. <법화경> 사본은 대부분이 네팔 계통의 것과 중앙아시아 계통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네팔계 사본은 완전한 형태의 것이 많다.
이에 비해 중앙 아시아계 사본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중 네팔계는 11세기 이후의 것이고 중앙아시아계는 그 이전으로 생각되고 있다.
1931년 캐시미르이 길기트에서 <법화경>의 원전사본이 발견됐는데 이것은 5-6세기경의 사본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경전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을 번역했던 구마라습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쿠자에서 태어나 뒷날 중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번역에 사용했던 원전사본은 중앙아시아계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중앙아시아계의 것은 인도의 굽타왕조 시대의 문자로 씌어 있다.
그리고 3세기에 최초로 한역됐으므로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한역된 셈이다.
대략 3차에 걸쳐 한역됐으나 406년에 구마라습에 의해서 번역된 한역본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다. <법화경>은 아래와 같이 세 종류가 있다.
①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 27품, 축법호(竺法護) 역 ― AD 286년.
②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28품, 구마라습 역 ― AD 406년. ③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27품,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磨笈多) 공역 ― AD 601년.
이 중에서도 구마라습의 <묘법연화경>이 명역이라는 평을 받아왔고, 대승불교권에서 <법화경>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이 <묘법연화경>을 가리킨다.
<법화경>이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장소가 기사굴산(耆闍崛山=영축산/靈鷲山)으로 돼 있다.
그리고 오늘날 사찰에서 행하고 있는 영산재(靈山齋)란 바로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도량을 시공을 초월해서, 그 도량을 오롯이 옮겨와서 영산회상의 제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그만큼 <법화경>은 불교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들에 의해 수지 애호되는, 대승경전의 꽃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법화경>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법화사상의 체계를 세운 최초의 인물은 중국의 수⋅당시대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 538∼597)이다.
<법화경> 전체가 28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의(智顗)는 <법화경> 28품을 반으로 갈라서, 앞의 절반에 해당하는 제1 서품부터 ~ 제14 안락행품까지를 적문(迹門) 곧 ‘적문법화경’이라 하고,
제15 종지용출품부터 ~ 제28 보현보살권발품까지를 본문(本門) 곧 ‘본문법화경’이라고 해서 구분했다.
적문(迹門)이란 적불(迹佛-방편불)의 가르침(敎)이란 말이고, 본문(本門)이란 본불(本佛)의 가르침(敎)이란 말이다.
즉, 80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현생의 부처님을 적불(방편의 부처님)이라 하고, 영원한 부처님을 본불이다 한다.
이같이 석가여래불을 적불(迹佛)로 보는 경우와 본불(本佛)로 보는 경우가 있다.
<법화경>의 처음 절반은 석가여래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부처님의 출현이라는 말이 없다. 다만 인도에서 태어나셔서 35세에 깨달으시고 80세에 돌아가신 현생의 부처님으로만 묘사돼 있다. 즉, 처음 절반은 적불(방편불)의 석가여래로서 그 가르침을 적분(迹門-방편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중 절반에서는 석가여래께서 80세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결코 아주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석가여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몇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가 마음으로 석존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 석존은 살아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 절반의 가르침을 본문(本門)이라고 한다.
적문(迹門)이란 금생 부처님 신분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즉, 정각 이후 80세에 열반에 드시기까지 45년간 법을 편 석가세존은 중생교화를 위해 출현하신 방편불(적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적문(迹門)이란 방편의 가르침이란 말이다.
본문(本門)이란 ‘한량없는 과거세 백 천 만억 나유타겁에 성불하신’ 구원실성, 곧 구원(久遠) 본불(本佛)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불(本佛) 혹은 실불(實佛), 진불(眞佛)이라 함은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에서 비로소 부처님의 본래 경지, 본체를 밝히신 것을 말한다.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이라는 오래되고 먼 옛날에 이미 성불하셨으며, 그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의 비밀한 신통의 힘으로 가지가지 법을 설하셨고,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셨으며, 중생제도를 위해 방편으로 열반에 드시기도 했고, 항상 모든 곳에 머무르시어 멸하지 않고 법을 설하고 계시는 구원실성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적문은 현생의 가르침이고, 본문은 전생(영원의) 가르침이라 하겠다.
따라서 <법화경>은 부처님의 현생과 전생의 법문을 모두 공부할 수 있는 경전이라 하겠다.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품을 들라고 하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나, 일반적으로 적문에서는 ‘방편품(方便品)’이고, 본문에서는 ‘여래수량품(如來數量品)’을 든다.
적문에서는 대체적으로 성문성ㆍ연각승ㆍ보살승의 삼승을 전부 모아 가지고 우리의 최종 목적인 하나의 불승으로 나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사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꽃을 피워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통적 귀일불교로 이끌었다.
본문에서는 부처님의 수명이 장구(長久)하게 이어간다는 구원불성(久遠佛性)을 다루고 있어서 법의 영원성을 논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여래수량품’이 중심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먼 옛날에 이미 성불하셨지만 중생을 위해 방편으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신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출현하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아함경>에 설해진 4성제(四聖諦)와 12연기(十二緣起), 그리고 <반야경>에 설해진 6바라밀(六波羅密)은 하나의 불승(佛乘)에서 임시로 삼승을 분별해서 이들을 위해 설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법화경>에서 선언한 부처님의 일불승설은 매우 획기적이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리불이 이에 관해 세 번이나 부처님에게 설법을 청한 사실을 보면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은 불교의 목적이 종국에는 일체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교리 자체도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돼야지, 결코 일부 특정인들만을 위한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일불승(一佛乘)만이 진실한 교리이며 응당 이 교리로 사람들을 깨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불승(一佛乘)을 강조한 것이 곧 <법화경> 적문 부분이다.
그리고 ‘방편품’에는, 부처님이 이 세간에 나타나신 것은 사람들에게 불지혜(佛智慧)를 알리고 불지혜로 인도해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일 때문이라 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80세에 입멸하신 뒤에도 부처님 보기를 원하며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간절히 신행한다면, 부처님은 항상 그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구원의 손을 펴신다고 했다.
즉, ‘여래수량품’ 제16의 게송에
「모든 사람이 내가 멸도에 든 것을 보고 널리 사리를 공양해
모두가 연모의 뜻을 품고 갈앙심(渴仰心)을 내며
중생이 그와 같이 신복(信服)해
질직(質直)하고 유연(柔軟)한 마음이 돼
일심으로 부처님을 보고자 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으면
그때에 내가 대중과 함께 영취산에 나타나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싸늘한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위대한 부처님 생명의 흐름이 영원한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다시 미래로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법화경>의 많은 부분에 어떠한 고난이라도 무릅쓰고 부처님 진리에 이르도록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법화경>을 널리 펴기 위해 모두를 희생하고 자기 몸마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거듭 설하고 있다.
그리고 <법화경>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구하는 보살들이 신명을 바쳐 노력하는 것도 역설돼 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구하며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은 대승경전 전반에 통하는 보살의 이상이다.
<법화경>의 근본은 부처님의 절대적인 자비심과 그것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의 너그러운 마음의 소통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법화경>의 특색 몇 가지를 살펴보자.
• <법화경>은 대승불교사상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전으로서 문학적인 가치도 높다.
• <법화경>은 소승을 포함한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먼저 설해 보인 후 결국엔 일승(一乘)의 가르침이 가장 뛰어남을 설하고 있다.
• '여래사(如來使)'라고 해서, 부처에 의해 세상에 파견돼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진리를 구현하며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청정한 불국토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보살의 전형이 제시되고 있다.
• <법화경>은 ‘방편품’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결국 본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불이라고 설한 ‘여래수량품’을 주지로 하고 있다.
• <법화경>의 ‘보문품’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과 더불어 방대한 경을 요약 축소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
• <반야경>이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 달리 <법화경>은 불국토 건설과 중생교화를 2대 주제로 삼고 있으며,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
• 제25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菩普門品)’은 <법화경>의 다른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는 관음신앙(觀音信仰)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는 본래 따로 독립돼 있던 경전[관음경]이 <법화경>으로 편입된 증거라 할 수 있다.
중국 5호16국의 하나인 북량(北涼)의 지배자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 <법화경> ‘보문품’을 외우고 건강을 회복해 이를 따로 떼 내어 <관음경>이라 이름 해 널리 유통시켰다. <관음경(보문품)>은 <법화경>의 진수이다.
<법화경>에서는 관음보살이 석가모니불의 중생구제를 돕기 위해 사바세계의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을 주처로 정하고 이 사바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 제26 ‘다라니품(陀羅尼品)’과 같은 경우 대승불교가 서서히 밀교(密敎)와 융합돼가는 과정의 흔적으로 보인다.
• <법화경>은 믿음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경전이지만, 불교에 들어온 자가 부처님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대의 교만이라고 설하고 있다.
• <법화경>을 읽고 있으면, <법화경> 스스로 다른 모든 경전에 비해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경전임을 나타내는 말이 너무 자주 나와 거부감을 준다. 법화경십유(法華經十喩)를 비롯해 여러 각도에서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특히 실대승(實大乘) <법화경>, 일불승(一佛乘) <법화경>, 본회경(本懷經) <법화경>, 구세경(救世經) <법화경>, 성불경(成佛經) <법화경>, 제왕경(帝王經) <법화경>, 수자의교(隨自意敎) <법화경> 등 수식어도 다양하다.
그리하여 <법화경> 외의 경전은 지나치게 하대하는 오만함이 있다. 거기에다가 마치 만화를 보고 있는 듯한 지나치게 과장되고 허황된 이야기가 많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와서 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래서 만화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법화경>에 열광해 군국주의 소의경전으로 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융무애한 <화엄경>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 <법화경>은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모두 다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원력의 발로로 가지가지 비유와 인연으로 교화하기 때문에 내용도 방대하다.
그래서 간단하게 숫자를 사용해, “일승(一乘), 이문(二門), 삼주(三周), 사행(四行), 오사(五事), 육공(六功), 칠유(七喩), 팔보(八菩), 구비(九譬), 십여시(十如是)”로 정리해 <법화경> 전체의 윤곽을 그리기도 한다.
① 일승(一乘)은 모두 다 성불한다는 일불승(一佛乘)이고,
② 이문(二門)은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을 말하고,
③ 삼주(三周)는 상근기가 수기를 받는 법설주(法說周)와 중근기가 수기를 받는 비설주(譬說周)와 하근기가 수기를 받는 인연주(因緣周)를 말한다.
④ 사행(四行)은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설해지는 것으로 설법자(說法者)가 갖추어야할 신(身)ㆍ구(口)ㆍ의(意)ㆍ서원(誓願)의 네 가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말한다.
⑤ 오사(五師)는 <법화경>의 유명한 오종법사(오종묘행/五種妙行)를 말하는 것으로 경을 수지, 독, 송, 해설, 서사하는 것이고,
⑥ 육공(六功)은 육근공덕(六根功德)을 가리킨다. 즉. <법화경>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공덕이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서 소상하게 밝혀지고 있다.
⑦ 칠유(七喩)는 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법화경>에서 그려지는 유명한 일곱 가지 비유이다.
⑧ 팔보(八菩)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 <법화경>을 널리 이 세상에 펴겠다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에 의해 부정(否定) 당해지는 팔천항하사보살(八千恒河沙菩薩)들로서 매우 깊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⑨ 구비(九譬)는 앞서의 칠유에다가 두 가지 비유를 더 첨가한 것이고,
⑩ 십여시(十如是)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가르쳐주는 십여시를 말한다.
그리고 <법화경>의 문장은 장문(長文)과 게송(偈頌)으로 돼 있는데, 특히 다른 경전보다도 게송 부분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내용이나 표현에 있어서도 훨씬 우위인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체로 이 게송이 먼저 결집됐다고 보고 있다.
또한 <법화경>이 설해진 장소와 횟수는 ‘이처삼회설법(二處三回說法)’이라 해서 왕사성 기사굴산(耆闍崛山-영축산)에서 설하다가 다보탑(多寶塔) 속으로 들어가 허공(虛空) 중으로 올랐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설법한 것으로 매우 상징적으로 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백제 현광(玄光)과 혜현(惠現) 등에 의해 <법화경>이 구체적으로 연구되고 실천됐다.
현광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혜사(慧思)로부터 <법화경>의 가르침을 전수받고 법화삼매를 증득한 뒤에 귀국했고, 577년(위덕왕 24) 입적하기 직전까지 회삼승귀일승(會三乘歸一乘)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신라에서도 연구가 활발해, 원효(元曉)는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를 지었으며, 회삼귀일일불승(會三歸一一佛乘)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사상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게 했고, 그의 화쟁(和諍)사상이나 회통(會通)사상도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과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사상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불국사 건축이 법화사상에 의해 건축됐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의 핵심사상----
천태대사 지의(智顗)는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을 저술해 삼제원융(三諦圓融)과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일심삼관(一心三觀)과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실천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일불승의 경지를 논술하고, 일체 중생이 다 같이 성불할 수 있는 교설과 영원한 일불승에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을 강조했다.
1) 삼제원융(三諦圓融)
삼제원융은 천태교학 기본교의의 하나로서, 파도가 바다를 떠나 존재하지 못하듯 공(空)ㆍ가(假)ㆍ중(中)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란 말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반성적 사유가 가능한 생물의 종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물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또한 이는 불성의 자각 곧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반성적 사유에 의해 나 자신을 포함해 우주의 모든 사물을 고찰해 보면, 그 크기가 아주 작은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에서부터 대단히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자성(自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연기에 의해, 즉 서로의 연관에 의해 존재할 뿐이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오직 연기에 의할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이는 지금 존재하는 그 어느 것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좋은 예를 현대물리학의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찾는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이 이해하는 진공의 개념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완벽하게 차 있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자리가 바로 색의 세계이며, 색의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세계이다. 따라서 색과 공은 분리해 낼 수 있는 두 세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세계를 이르되, 일체의 모든 사물은 연기하므로 가(假)라고 하고,
일체사물이 무아여서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하며,
또한 그 둘의 양변을 떠나면서 그 양변을 포용해 중(中)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ㆍ가ㆍ중’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그러므로 가(假)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오고,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오며, 중이라 하면 가과 공이 따라온다. 이렇듯 공과 가와 중이 거칠 것이 없이 원융무애하니 이를 일러 공가중 삼제원융(空假中 三諦圓融)이라 한다. - 양형진
2) 제법실상(諸法實相)
‘제법(諸法)’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현상까지도,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전부 최고의 경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체법(一切法)은 불법이란 말이다. 일체 불법이 아닌 것이 없다.
일체의 모든 사물, 심지어 먼지까지도 전부 불성을 내포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이론적으로 부처 아닌 자가 없고 불성이 아닌 사물이 없다는 말이다.
‘실상(實相)’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의 ‘참 모습’ 또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 혹은 ‘진실한 본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법화사상을 철학적으로 압축한 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제법실상’은 <법화경>의 중심적인 교설이다.
즉, 모든 존재는 그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그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논거는 대승불교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근본사상이라는 의미에서 대승불교의 삼법인(三法印)에 대해 <법화경>에서는 일법인(一法印)이라고 한다. 제법실상의 일법인, 곧 일실상인(一實相印)만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일실상인은 <법화경>에서 설하는 단 하나의 특징이란 말인데, 이는 곧 부처님의 일법인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론”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을 바로 봐야 한다는 말은 결국 중생이 실상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실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까닭은, 중생은 모든 사물과 대상에 항상 장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은 사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기분, 자기 편견에 의하거나, 혹은 주변의 사정과 정황에 따라 사물을 잘못 보거나 왜곡되게 보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아상(我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저변에 제7 말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3)일심삼관(一心三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확립한 삼관(三觀)의 법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천태지관(天台止觀)의 모태가 됐고, 이에 바탕 해 천태 지의 대사가 세운 천태삼관(天台三觀)을 ‘일심삼관’이라 일컬었으며, 삼제삼관(三諦三觀)이라고도 한다.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이라고 했고, 이를 줄여서 공ㆍ가ㆍ중(空假中) 삼관이라 약칭 한다.
이러한 삼관은 차차 관(觀)이 깊어지는 단계를 말하는데, 공⋅가⋅중 세 가지 진리를 한마음 가운데서 원만하게 체득하는 것을 말하며, 3관이 일념 속에 즉성(卽成)됨을 뜻한다. 이 삼관의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심삼관(一心三觀)은 자기의 마음속에 공관ㆍ가관ㆍ중관의 삼관이 있음을 알고, 생사ㆍ번뇌의 경지에서 벗어나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는 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즉, 공ㆍ가ㆍ중이 한 마음 같이 연결돼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일심(一心)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는 관법이다.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이란 ‘한 마음’을 의미하며, 마음의 본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일체의 잡념ㆍ번뇌 망상이 끊어진 온전한 마음의 경지를 일심이라 한다.
그리하여 일심삼관은 공ㆍ가ㆍ중 세 가지의 진리를 한마음 가운데서 원만하게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공관ㆍ가관ㆍ중관의 3관이 일념 속에 즉성(卽成)됨을 뜻한다.
그리하여 일심이 공하면 일체가 공하고, 일심이 가이면 일체가 가이고, 일심이 중이면 일체가 중이라고 했다. 즉, 일심을 관조해 대상에 사로잡히는 마음을 파하고 모든 현상을 살필 뿐만 아니라 절대의 세계까지를 체달하는 것이다.
헌데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공(空)이라고 보는 것은 대승불교의 일반적 이론이다.
이 공을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내면의 집착하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인도불교에서도 공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중국불교로 넘어오게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바세계를 초월하자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중국인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세계에 철저히 파고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세계는 우리가 집착하는 방식과 다르게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가(假)이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 공관(空觀)---공관은 공을 깨닫는 단계, 모든 현상 이전의 비어 있는 본체를 관하는 것이다. 즉, 공관이란 현상계의 일체법은 다 그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이 공관을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이라 하는데, 현실세계에서 공을 깨닫는 것이다. 집착의 대상에 대해 범부중생은 욕심을 내고,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한다. 그리고 설사 욕심이 채워졌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욕심을 위해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비로소 무집착의 세계인 공(空)을 깨닫고 마음의 편안을 찾는다. 종가입공관에서 공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假)를 잘 살펴봐야 한다. 가를 잘 살펴서 가에 집착하지 말아야 공을 체득할 수 있다.
• 가관(假觀)---가관은 비록 자성이 없는 공한 것이기는 하지만 연기의 차별된 세계는 임시로 나타나 존재하는 이상, 공으로만 보지 말고 현상의 경계를 그대로 인정 수용하는 측면이다.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즉, 우주의 모든 존재는 공(空)한 것이어서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도 실체가 없는 임시적인 가(假)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관을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 즉 공한 것으로부터 가(假)에 들어가는 관(觀)이라고 한다.
가관이란 현상계의 차별상에 대한 진리를 달관하는 것을 뜻한다.
공의 진리에만 국한해 있으면 이것은 성문ㆍ연각의 소승 나한도에 불과한 것으로,
공의 원리밖에 모르는데 떨어진 낙공(落空)의 경지에 불과한 미완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중생계ㆍ현상계의 일체법을 달관하고, 중생구제의 도를 성취하는 대승의 진리ㆍ보살도를 성취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제(假諦)의 원리를 관찰하는 가관이 된다.
따라서 공관을 통해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양상을 잘 관찰하고 보살의 자비를 키워가야 하는 것이다.
• 중관(中觀)---공관과 가관이 하나로 작용해 본체와 현상이 걸림이 없는, 즉 공관과 가관이 융합된 관이다.
중관은 모든 법이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공이면서 유요, 유이면서 공임을 관하는 중도적 입장의 관법이다.
즉, 중관은 공관과 가관을 서로 회통시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을 교화한 공덕으로 인해 완전한 깨달음을 획득하는 단계이다.
불교 최후 구경의 진리는 공의 진리와 가의 진리를 별개로 체득하는 것이 아니고,
공(空)과 가(假)는 둘인 듯 하나이고 하나인 듯 둘의 원리를 체득하는 데에 있다.
즉, 궁극의 진리는 공도 가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제야말로 불타 구경의 가르침인 중도이며 원만각(圓滿覺)인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보았듯이 관이 깊어지는 단계는 공을 깨닫고, 그 공의 힘에 의지해서 세간에서 중생을 구제하고, 그 다음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비유해 말하면-------
• 공관은 만유현상을 거울에 나타난 허상처럼 보는 것이고,
• 가관은 거울에 나타난 허상이 비록 실물이 아니나 보는 이의 시각에 들어와 차별을 느끼도록 하기에 그 허상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별의 허상을 그대로 인식하게 된다.
• 중관은 공관과 가관을 종합해 융통시켜 보는 것이므로 공관이나 가관의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관이다.
용수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조건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
그는 자성이 없는 것을 가리켜 공(空)이라고 하고, 조건에 의존해서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가(假)로,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공이면서 동시에 가(假)로 존재하는 모습을 가리켜 중도(中道)로 설명했다.
용수에게서 공ㆍ가ㆍ중은 모든 현상이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난다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인 연기(緣起)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개념으로서 이 셋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다.
4세기경, 구마라습이 용수의 공사상을 중국에 소개한 뒤, 중국의 불교도들은 용수의 공사상에 근거해서 대승불교를 이해했다.
그러나 공사상에 대한 이들의 이해나 주장은 하나로 통일되지도 않았고, 심지어 공사상을 오해하기도 했다.
4) 일념삼천(一念三千)
‘일념삼천설’은 사람의 한 마음에 삼천 가지의 가능성이 간직돼 있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삼천’이라는 숫자는 전체를 의미하는 숫자다. 따라서 일념삼천설은 사람이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념삼천설이란 우리 한 순간의 마음에 우주만유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한 생각이라고 한 것은 범부의 순간적인 마음, 즉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마음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삼천이라고 하는 숫자는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우주 만상을 삼천이라고 숫자화한 것이다.
이 법계는 십법계(十法界)로 나누어 있다.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의 육범부계(六凡夫界)와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의 사성계(四聖界)를 합해서 십법계라 한다.
범부 육계는 미계(迷界)이니 미혹의 세계이며, 성인 사계는 깨달음이 있는 오계(悟界)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일념(평삼심) 속에 십법계가 다 갖추어 있다는 말이다.
한 생각 자비심(慈悲心)은 보살이며,
한 생각 지혜로움은 벽지불이며,
한 생각 청정함은 아라한이요,
한 생각 선(善)함은 천상이요
한 생각 정직함은 인간이요
한 생각 투쟁은 아수라요,
한 생각 어리석음은 축생이요,
한 생각 탐욕은 아귀요,
한 생각 성냄은 지옥이니,
이렇게 인간들의 한 생각 속에 십법계를 함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삼천으로 표현되는 모든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념에 포함된다고 해서 일념삼천이라 한다. 즉, 우리들의 평소 한 생각 속에는 언제나 삼천으로 표현된 온갖 것이 포함돼 있다. 그리하여 차별적인 삼천제법(三千諸法)이 한 생각 속에 원융무애하게 구족돼 있으므로 일념삼천을 깨달으면 구경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길흉화복으로부터 국가의 흥망성쇠, 나아가서 인류세계의 온갖 고락 등의 우주만상은 한 생각의 그림자요 작용인 것이니, 이 도리를 일념삼천이라 한다.
따라서 한 생각은 우주만유의 핵이며 본체이며, 비록 형상은 없으나,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육대(六大)가 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 있다는 모든 것이 한 생각의 작용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한 생각 가운데 삼천제법을 구족했다고 해서 이를 일념삼천이라 한다.
5)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공관(空觀)의 실천,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일체 중생의 성불에 있으며, 이런 뜻을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법화경>이다.
한 권의 경전을 요약해 간단하게 드러내는 것을 대지(大旨)라고 하는데, <법화경>의 대지, 근본사상은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이다. 따라서 <법화경>의 근본사상은 일불승(一佛乘)에 있다. 즉 일승만이 진실이라는 의미이다.
회삼귀일(會三歸一)은 삼승(三乘)을 회통해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일시키는 것을 말한다. “3개를 모아서 하나로 귀결시킨다.”는 뜻이다.
성문성ㆍ연각승ㆍ보살승이라는 삼승(三乘)의 방편을 통해서 결국은 부처의 깨달음인 일승(一乘)으로 인도한다는 교리이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홀로 이 세상의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승불교에 해당하고,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처님은 진정한 가르침은 오직 하나이며, 제2, 제3의 가르침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셨다. 분명 일불승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시대의 중생들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는 방편을 써서 3승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삼승방편 일승진실(三乘方便 一乘眞實)'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삼승을 전부 다 모아 성불이라는 일불승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세 수레의 비유가 회삼귀일을 상징한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에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지만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결국은 모두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삼승(三乘)은 모두 방편이고 모두가 부처님이 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일승만이 참된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불승(一佛乘)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두 일불승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으로, 이를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한다.
6)교관 이문(敎觀二門) - 교관이문쌍수(敎觀二門雙修)
교관 이문이란 논리적 교상문(敎相門)과 실천적 관심문(觀心門)을 말한다.
교상은 해당종파의 교의를 말하고, 관심문은 실천행을 말한다.
“경전은 불법을 담고 있는 그릇이지, 그 자체로 진리는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천이다.”
교관이문쌍수는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며 우리가 불법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뜻하는데, 교관이문쌍수는 종교 간의 벽 대신 다리를 놓고, 지구촌 문명을 분열시키는 대신 하나로 엮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 전쟁, 살인, 지배, 약탈 등의 반문명적 행위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종교인과 다른 종교인' 간의 대립에서 비롯된다.
"교관이문쌍수의 실천 덕목은 이런 대립의 구도를 화합으로 돌리는 회삼귀일(廻三歸一)과 일불승(一佛乘)에 근거한 불국토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이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 창안되는 만큼, 문명 간의 충돌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언급하고 있는 교문이문쌍수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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