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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당 서재> 지성인 필독도서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2>

수선님 2024. 9. 8. 12:34

지성인 필독도서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 2>

‘신동아新東亞’ 1968년 1월호 별책부록別冊附錄, 동아일보사 간刊, 이천만 윤색潤索

* 지성인 필독도서 <세계를 움직인 책 100권>, <사냥꾼이야기 (1 - 15권)>, <한국의 고전 100선>, 범당의 저서 (80여 권) 등 탑재 글을 읽으려면 Naver, Daum Blog <범당서재>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이천만의 시> <아라한우학>

(윤색자潤索者 서문序文, 신동아新東亞 편집자編輯者 서문, 목차目次, 본문)

<‘지성인知性人의 필독도서必讀圖書’> 발문跋文

* ‘동아일보’의 시사월간지時事月刊誌 ‘신동아新東亞’가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한국의 고전古典 100선選>을 선정하였으며, 이를 사계斯界 전문가 100인이 번역하여 다이제스트 Digest로 만들어 1968년 1월호 신동아 별책부록으로 증정贈呈하였음, 인생관 내지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거나 변화를 초래한 책, 인지認知의 계발啓發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책, 사회변동과 정치적 발전에 직접 자극刺戟이 된 책으로서 고전古典으로부터 현대문학까지를 대상對象으로 함 (신동아 편집자)

* 다이제스트 되었으므로 입문서入門書이며, 개관槪觀을 알고 텍스트 Text (원본原本)를 읽어야 명확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음 (작가, 책명, 저작연대著作年代, 번역자飜譯者, 다이제스트 Digest는 해설이며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을 읽어야 함, 해설 끝에 주석註釋을 게재揭載함, 원문原文이 한자어와 전문용어로 되어, 한자어는 병기倂記 또는 풀어쓰고, 줄이고, 전문용어는 풀이하여 주석註釋으로 보완함)

* ‘한국의 고전古典 100선選’은 한자가 많아 독서의 이해를 도울만한 어휘語彙 이외는 한자漢字를 병기倂記하지 않았으며, 고어체古語體 문투文套와 한자어漢字語, 고유명칭, 특히 고유명칭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필독도서를 골라 읽고, 연구 외 참고가 되는 책은 일별一瞥하기를 권장함

* 손자孫子 아라한과 아나율의 지성적 교양서로 윤색潤索하여 Blog블로그 (Naver, Daum Blog <범당서재>, <이천만의 시詩>, <이천만의 교학대한사敎學大韓史>, <아라한 우학于學>)에 탑재搭載함, 윤색潤索을 하기에는 방대尨大한 내용과 고전古典의 인용引用, 특히 한자漢字 상용구常用句, 한자漢字 이름을 찾느라고 자전字典, 옥편玉篇과 인터넷자료를 이용하였으나, 실험용 돋보기를 사용하면서도 눈이 아프고 시력視力이 흐려져 애를 먹었으며,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며 어렵게 윤색했으므로 한이와 율이가 필독必讀하기를 기대함

* 男兒須讀五車書 남아수독오거서의 유래由來

장자 (莊子 B.C 369 - B.C 289?) 제 33편 <천하天下> 7절節, 장자는 친구 혜시惠施 (B.C 370? - B.C 309?)와 논쟁論爭을 언급言及하며 그의 박식博識함을 설명하는 가운데, 혜시의 장서藏書가 ‘수레 다섯 분량’이라고 말했던 것을, 두보杜甫 (712 - 770년, 당대唐代 이백李白과 쌍벽雙璧을 이룬 시인詩人)가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라는 명감明鑑으로 삼아 전傳해지고 있음

. 사람은 평생 다섯 수레의 책 - 3,000여 권을 필독必讀 (추사秋史 김정희는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의 대가大家인데, 글씨다운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5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함)하여야 한다는 의미. 20세 - 50세, 30년 간 1년 100권, 매월 10권, 매주 2권 독파讀破, 아카데미아 Academia 에서 플라톤 Platon,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e 와 공자학당學堂의 공자는 제자를 가르치기 전 무지無知를 깨우쳤다. 무지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서당書堂에서 4서書5경經 (4서 -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 5경 -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대학과 중용은 예기에서 독립되어 별책이 된 것임)을 읽음으로써 훌륭한 선비가 되었음,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대학교수의 연구휴식년제休息年制)를 실시하여 교양과 지식을 고양高揚함

*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라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위대한 역사서를 썼는데, 그는 궁형宮刑 (거세去勢)을 당한 치욕恥辱을 감내堪耐하며 <讀書萬卷 독서만권 旅萬里行 여만리행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여행을 함으로써 사기를 저술著述할 수 있었다>라는 명언名言을 남겼음, 등용문登龍門의 귀감龜鑑임

. 특히 작가 지망생은 어휘력語彙力이 기본이므로 한글사전事典을 외우는 것이 작가의 왕도王道, 창의력은 독서에서 나오고, 여행은 창의력의 원천源泉

* 讀書百遍其義自見 독서백편기의자현 - 동우董遇는 후한後漢 말末 사람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에 열중하여 황문시랑黃門侍廊 벼슬에 올라 헌제獻帝의 글공부 상대가 되었다. 한 때는 승상丞相이었던 조조曹操의 의심을 받아 한직閒職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지만,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에는 시중侍中, 대사농大司農 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노자老子>와 <좌전左傳>에 주석註釋을 달았는데, 특히 좌전에 대한 그의 주석은 당나라 시대까지 폭넓게 읽혔다고 함. 동우의 명성名聲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음. 하지만 그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人有從學者인유종학자, 遇不肯敎而云우불긍교이운, 必當先讀百遍필당선독백편, 言讀書百遍其義自見언독서백편기의자현,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 왕숙전王肅傳)>고 함

* 朝聞道 夕死可矣 조문도 석사가의, 아침에 도道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

*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책을 읽어 교양敎養을 쌓지 않으면 말이 거칠다). (안중근의사義士)

* 溫故知新 온고지신, 고전古典을 익히고 새 지식을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학교) 교육은 독서다.

* 지성인의 고등정신기능 - 이해력, 판단력, 분석력, 평가력, 창의력, 분별력, 판별력, 평가력, 객관성, 예지력豫智力, 통합력, (종합력, 통섭력統攝力) 특히 창의력과 예지력은 (대학) 교육으로 육성 미흡未洽, 인문계 독서로만 가능, 교육 - 지식적 전문인 (지식, 지식인) 양성, 독서 - 교양적 지성인 (지혜, 교양인) 양성,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 <사족蛇足, 윤색자> 우리나라 이름은 <대한민국> 이다. 약칭은 <대한> 이다. <한민족의 나라> 다. <한국> 은 이름은 물론 약칭이 아니다. 대 (大, 큰) + 한 (밝고 환한, 가득찬, 하나 즉 으뜸, 한韓은 한자표기로 차용借用), 애국가의 <대한 사람>, <대한민국 만세>, <대한제국> 의 <대한> 이다. 중국의 대명, 대청, 대영제국, 대일본국과 같은 명칭이다. 더구나 <한반도> 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국권강탈의 소산이어서 일제 잔재 청산으로써 없애야 한다. 아울러 <KOREA> 도 <COREA> 로 바꿔야 한다. KORAEA는 일제강점기 때 영문표기상 알파벹 순으로 <C>OREA가 <J>apan 앞에 오는 것을 회피하려고 일제가 바꾼 명칭이다. 그래서 본서에서 <한국> 을 <대한> 으로 고쳐 썼다. (Naver,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참조)

< ‘신동아新東亞’ 편집자編輯者>의 서문序文

인류의 문명이 있은 이래 책이 휘두른 위대한 영향은 활자시대活字時代에서 전기시대電氣時代로 옮아가고 있다는 오늘날도 여전히 축적蓄積되어가고 있다. 그 문명의 산더미 속에서 100권을 선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권말卷末에 참고로 붙인 명저목록名著目錄에서도 보듯이 흔히 이런 종류의 선選에는 미리 한계를 두는 경우가 많다.

본本 부록附錄은, 그러나 가능한 모든 시대와 문화권文化圈과 분야分野를 망라網羅하기로 했다. ‘세계를 움직인’ 의 기준基準을

1) 인생관人生觀 내지 세계관世界觀의 바탕이 되었거나 그것의 변혁變革을

초래招來한 책

2) 인지認知의 계발啓發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책

3) 사회 변동과 정치적 발전에 직접 자극刺戟이 된 책의 세 가지로 정하고,

다음 100명의 전문가들에게 추천推薦을 의뢰依賴했다.

집계集計한 결과 문학작품이 많은 것은 위의 기준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대개는 집계대로이지만 편집자가 결정을 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이슬람권圈과 인디아의 대저大著들은 집계대로 하면 누락漏落될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작들이 모두 각 분야마다에 압도적壓倒的인 영향력을 끼친 것이 사실이지만 ‘한 권의 책’ 이라는 점에 유의했다. 추천된 책으로 100선에 들지 못 한 것은 권말에 서목書目만 적어두었다.

<목차目次>

<사상思想>

001 베다 Veda (B. C. 1200? - A. D 500년 경頃), (李箕永)

002 대장경大藏經 Tripitaka (B. C. 1200년 이래 2500여 년 동안 성장 발전) 삼장三藏 (李箕永)

003 논어論語 (2500년 경), 공자孔子 (安炳周)

004 대화록對話綠 Protagoras dialogues, 플라톤 Platon (趙要翰)

005 장자莊子, 장주莊周 (車柱環)

006 성서聖書 The Bible (50 - 100년 경), 安炳茂)

007 고백告白 Confessiones (400년 경),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林明芳)

008 코란 Holy Qur'an (640 - 60년 경), (柳正烈)

009 사서집주四書集註, 주희朱熹 (1252년) 安炳周

010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 (1266 - 1273년 경), 아퀴나스 Saint Thomas Aquinas (金奎榮)

011 그리스도교강요敎綱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칼빈 Jean Calvin (金觀錫)

012 수상록隨想錄 Les Essais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 (1580) 孫宇聲

013 방법서설方法叙說 Discours de la methode (1637), 데카르트 Rene Descartes (金奎榮)

014 팡세 Pensées, 파스칼 Blaiss Pascal (1670) (李桓)

015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 칸트 Immanuel Kant (金亨錫)

016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änomenologie des Geistes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807) (李碩潤)

017 철학적단편후서哲學的斷片後書 (1846), 키에르 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安秉煜)

01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 - 1884),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崔東熙)

019 시간과 자유 Essai sur les domness immediates de la conscience (1889), 베르그송 Henri Bergson (鄭錫海)

020 꿈의 해석解釋 Die Traumdeutung (1900), 프로이트 Sigmund Freud (鄭良殷)

021 순수현상학純粹現象學과 현상학적現象學的 철학시론哲學試論

Ideen Zu Einer Reinen Phanomenologie Und Phanomenologischen Philosophie

훗설 Edmund Husserl (1913 - 1952) (韓筌淑)

022 논리철학논교論理哲學論巧 Tractatus Logico - Philosophicus (1922),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李漢祚)

023 상징형식象徵形式의 철학 Philosophie der Symbolischen Formen (1923 - 1929), 캇시러 Ernst Cassirer (崔明官)

024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申一澈)

025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1927), 하이데커 Martin Heidegger (安相鎭)

<역사歷史, 지리地理>

026 역사歷史 Historiai (B. C 429년 경), 헤로도토스 Herodotos (趙義卨)

027 사기史記 (B. C 104), 사마천司馬遷, (李相殷)

028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646), 현장玄奘 (金庠基)

029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The Description of the World (1298), 마르코 폴로 Marco Polo (鄭雲龍)

030 여행기旅行記, 아랍어: ابن بطوطة, 리흘라 Rihla (1355 - 1356), 이븐 바투타 Ibn Battutah (朴魯植)

031 세계사世界史 Universal History (1375 - 1378), 이븐 할둔 Ibn Khaldun (閔錫泓)

032 로마제국쇠망사帝國衰亡史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 - 1788),

기본 Edward Gibbon (梁秉佑)

03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an (1860)

부르크하르트 Jacob (Christopher) Burckhardt (吉玄謨)

034 금엽지金葉枝 The Golden Bough (1911 - 1915), 프레이저 Sir James George Frazer (柳宗鎬)

035 역사歷史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1934 - 1954),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 (李普衍)

<사회社會>

036 군주론君主論 Il principe (1513),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金河龍)

037 유토피아 Utopia (1556), 모어 Sanctus Thomas Morus (金鎭萬)

038 리바이어던 Leviathan (1651), 홉스 Thomas Hobbes (金悳)

039 통치론統治論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 로크 John Locke (崔榮)

040 법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1748), 몽테스큐 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玄勝鍾)

041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Du contrat socia (1762),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金桂洙)

042 국부론國富論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 (1776),

스미스 Adam Smith (林鍾哲)

043 인구론人口論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 말사스 Thomas Robert Malthus (李海英)

044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 Manifesto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 마르크스 Marx - 엥겔스 Engels (朴東雲)

045 자유론自由論 On Liberty (1859), 밀 John Stuart Mill (李克燦)

046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 (1867 - 1894), 마르크스 Marx Karl (金定台)

047 제국주의론帝國主義論 Imperializm, kak vysshaya stadiyn kapitalizma (1917), 레닌Vladimir Ilich Ulyanov (梁好民)

048 경제經濟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haft (1921), 웨버 Max Weber (黃山德)

049 삼민주의三民主義 (1924), 손문孫文 (金俊燁)

050 나의 투쟁鬪爭 Mein Kampf (1925 - 1927), 히틀러 Adolf Hitler (李基遠)

051 이데올러기 Ideologie와 유토피아 Utopia (1929), 만하임 Karl Mannheim (高永復)

052 고용雇傭 ‧ 이자利子 및 화폐貨幣의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金斗熙)

<자연과학自然科學>

053 천체天體의 회전回轉에 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徐龍化)

054 혈액순환血液循環의 원리 原理 Exercitatio anati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1628),

하비 William Harvey (金在灌)

055 자연철학의 수학적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 뉴톤 Sir Issac Newton (朴益洙)

056 종種의 기원 基源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다윈 Darwin, Charles Robert (李敏載)

057 곤충기昆蟲記 Souvenirs entomologiques (1879 - 1910), 파브르 Fabre, Jean Henri (朴萬奎)

058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 Das Relativitätsprinzip (1913),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尹世元)

059 조건반사條件反射 Conditioned Reflexes (1924), 파블로프 Ivan Petrovich Pavlov (李基寧)

060 양자론量子論의 물리적기초物理的基礎 Die physikalischen Prinzipien der Quantentheorie (1930),

하이젠버그 Werner Heisenberg (朴惠一)

<문학文學 ‧ 예술藝術>

061 일리아드 Illias와 오디세이 Odysseia, 호메로스 Homeros (趙宇鉉)

062 우화寓話 Fables, 이솝 Aesop (洪思重)

063 라마야나 Rãmãyana (B. C. 500 - 300년 경), (李箕永)

064 오이디프스왕王 Oidipus tyrannos (B. C 430 - 420년 경) 소포클레스 Sophocles (吳華燮)

065 시학詩學 Peri poietikes,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 C 400년 경) (孫明鉉)

066 영웅전英雄傳 Bioi paralleroi (105 - 115년 경) 플루타크 Plutarchos (洪思重)

067 아라비안 나이트 Arabian Nights (850년 경) (安東林)

068 두공부집杜工部集 (1039), 두보杜甫 (李丙疇)

069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 (1080), 이백李白 (金宗吉)

070 신곡神曲 Ladivina commedia (1304 - 1321), 단테 Alighieri Dante (林明芳)

071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1321 - 1323년 경), 나관중羅貫中 (成樂熏)

072 햄리트 Hamlet (1601), 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呂石基)

073 돈 키호테 Don Quixote (1604),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尹泰鉉)

074 실락원失樂園 Paradise Lost (1667), 밀튼 John Milton (柳玲)

075 파우스트 Faust (1808 - 1832),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郭福祿)

076 괴기담怪奇담 Tales of the Grotesques and Arabesques (1830), 포우 Edgar Allan Poe (李佳炯)

077 적赤과 흑黑 Le rouge et le noir (1839), 스탕달 Stendhal (洪承五)

078 인간극人間劇 La commédie humaine (1842), 발자크 Honoré de Balzac (李鎭求)

079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 Lylical Ballads (1850),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李昌培)

080 백경白鯨 Moby Dick (1851), 멜빌 Herman Melville (梁秉鐸)

081 풀잎 Leaves of Grass (1855), 휘트만 Walt Whitman (金容權)

082 죄罪와 벌罰 Prestuplenie i nakazanie (1856),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金鶴秀)

083 악惡의 Les fleurs du mal (1857),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河東勲)

084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1862) 빅토르 위고 Victor - Marie Hugo (方坤)

085 전쟁과 평화 (1864 - 1869),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金鶴秀)

086 교양敎養과 무질서無秩序 Culture and Anarchy (1875), 아놀드 Matthew Arnold (金鎭萬)

087 인형人形의 집 Et dukkehjem (1879), 입센 Henrik Johan Ibsen (李根三)

088 허클베리 핀의 모험冒險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트웨인 Mark Twain (金容權)

089 배덕자背德者 L'immoraliste (1902), 지드 André Gide (朴玉茁)

090 율리시즈 Ulysses (1922), 조이스 James Joyce (羅英均)

091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 (1922), 엘리어트 Thomas Stearns Eliot (金禹昌)

092 두이노의 비가悲歌 Duineser Elegien (1923), 릴케 Rainer Maria Rilke (具翼星)

093 마魔의 산山 Der Zauberberg (1924), 토마스 만 Thomas Mann (李東昇)

094 성城 Das Schloss (1926), 카프카 Franz Kafka (李御寧)

095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s Lover (1928),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 (鄭炳祖)

096 인간조건人間條件 La condition humaine (1933), 말르로 André Malraux (河東勲)

097 구토嘔吐 La Nausée (1938),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吳鉉堣)

098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1942), 까뮤 Albert Camus (李彙榮)

099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1952),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金秉哲)

100 의사醫師 지바고 Doktor Zhivago (1957),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李東鉉)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 2

(051 이데올러기 Ideologie와 유토피아 Utopia - 100 의사醫師 지바고 Doktor Zhivago)

051 이데올러기 Ideologie와 유토피아 Utopia (1929), 만하임 Karl Mannheim

만하임은 1893년에 항거리인의 아버지, 도이치인 어머니 사이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에서 중학교육을 마친 후, 부다페스트대학, 프라이부르크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그리고 파리에서 주로 철학과 문화사회학을 수학修學했다. 대학 졸업 후 곧 동창인 심리학전공의 줄리아 랑과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생애의 연구를 위한 좋은 벗이였고, 조언자였다. 1925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사私강사가 되었는데 1929년‘이데올러기와 유토피아’라는 저서로 일약 학계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다음해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3년 나치스의 추방정책 때문에 영국 런던에 망명하여 런던대학의 사회학 강사가 되었다. 영국 망명 중 ‘사회학과 사회 재건을 위한 국제도서(International Library for Sociology and SocialReconstruction)’의 편집에도 종사했다. 1945년 런던대학 교육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1947년 5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만하임의 학문적 관심은 처음에는 철학 특히 인식론이었고, 그의 학위논문은 ‘인식론의 구조 분석’이었는데 여기서 인식의 존재와 관계를 구명하고 인식론이 독립의 학문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어 지식사회학적 접근방식의 기저를 확립하였다. 초기의 그는 신 칸트학파의 라스크, 리켈트 또 현상학파의 훗설 그리고 헝거리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카치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도이치의 대학을 수업한 후 일시 생지에 돌아와 벨라 쿤이 영도하는 혁명운동에 투신했으나, 반 혁명세력 때문에 혁명정부가 곧 붕괴되어버려 도이치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실천을 계기로 하여 그의 사회과학적 관심이 더욱 구체적으로 싹튼 것으로 보여진다. 그 후에 그의 학문적 관심은 철학에서 사회과학으로 바뀌어 막스 웨버나 막스 쉘리를 연구하고, 칼 마르크스의 저작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 입장을 개관하면 ‘인식론의 구조 분석’에서 인식의 존재성을 기초지우고 토뢸치의 영향하에 쓴 논문 ‘역사주의(1925년)’에서는 인식의 존재성이 동시에 역사성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으나. ‘인식사회의 문제(1932년)’에서는 역사주의적 입장을 직접 적용하여 인식의 사회과학적 구성을 전개하고 있다. 곧 일체의 사유思惟를 ‘존재구속성’이라는 입장에서 역사주의적으로 보는 이데올러기론적 지식사회학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가 후의 ‘이데올러기와 유토피아’에 상세히 전개되었다.

그의 출세작 ‘이데올러기와 유토피아’는 많은 그 전의 논문을 전제로 하여 완결된 것이다. 1929년의 독문판獨文版은 ‘서론으로써의 이데올러기와 유토피아’‘이론과 실천의 문제 - 정치학은 과학으로써 가능한가’‘유토피아적 인식’으로 크게 3분되어있다. 후의 영역판英譯版(1936년, Wirth and Shilse 역譯)에서는 ‘예비적 접근’이라는 보완 설명이 전문에, 후면에는 피어칸트편의 ‘사회학사전’에 실린 ‘지식사회학’이 첨부되어 있다.

그의 이데올러기론의 공헌은 한 마디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그 개념을 도임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그리고 보다 확대된 의미로 사용하여 이데올러기 개념을 문화사회학적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데 있다. 그러면 그는 이데올러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는 이데올러기 개념의 규정을 위해서 폭로의식으로부터 규명하고 있다. 폭로의식이란 어느 일정한 관념이 그릇된 것이라 할지라도 단순한 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지지하는 사회층의 세계상을 동시에 붕괴하는 방향에서 그 관념을 부숴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는데 성립한다. 단순히 일정한 관념을 의심하고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러한 관념을 지정하는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 되므로 단순한 부정으로써는 그 관념이 근거하는 입장이 근본적으로 허위임을 폭로할 수가 없다. 폭로한다는 것은 일정한 관념을 그것을 지지하는 사회적존재와 더불어 부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즉 폭로의식이란 것은 관념을 그 이론 외적인 기능성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폭로의식 내지 허위의식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러기라는 관념이 생긴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데올러기에 있어, 부분적 이데올러기와 전체적 이데올러기를 구별한다. 부분적 이데올러기란 상대방의 주장의 일부를 - 그리고 그것도 내용성에 있어서만 폭로하려 할 때 성립하는 것이고, 전체적 이대올러기는 특정시대나 특정집단의 전체의식구조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서 상대방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다. 전체적 이데올러기 개념은 칸트의 의식철학에서 성립했다고 볼 수 있으며, 헤겔에 이르러서는 이데올러기적 시야가 역사화되었으나 마르크스가 그것을 완성했다고 본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역사화된 의식의 지지자는 계급이 된다. 칸트 있어서는 의식일반이었던 것이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분화된 민족개념이 되나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는 이 포괄적인 민족정신이라는 개념은 계급의식 즉 계급 이데올러기로 대치代置된다. 여기서 비로소 부분적 이데올러기가 전체적 이데올러기 개념과 융합하여 계급 이해의 이론이 완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데올러기 개념은 단순히 심리학적인 개념으로부터 사회학적인 개념이 되었지만 그것은 적에만 향하고 있었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즉 이데올러기 개념은 부르조아계급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 자체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데올러기 개념의 사용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진영에서 이데올러기적 관점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전체적 이데올러기는 다시 특수적 이데올러기와 보편적 이데올러기로 구분된다. 전자는 상대방의 사상에 대해서만 특수적으로 이데올러기로써 기능화하려는 것이고, 후자는 상대방만이 아니라 원칙론적 입장에서 자기의 사상도 일반적으로 이데올러기로 기능화하려는 것을 뜻한다. 후자에서 전체적 이데올러기는 개념의 보편적 파악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그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식사회학은 이데올러기 개념적 파악을 위한 것이다. 지식사회학과 마르크스주의는 모두 전체적 이데올러기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성격상 아주 달라지는 것이다. 지식사회학에서 다루는 이데올러기 개념은 몰가치적 입장과 평가적 입장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지식사회학은 지식의 존재구속성을 상관주의적 입장에서 다루는 것이므로 다만 특정의 의식구조와 존재형태 사이의 관계만을 구명할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사고의 진위眞僞는 문제시 되지 않고 다만 사고의 존재구속성만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연구태도를 몰가치적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서서 연구한다 할지라도 지식사회학은 원래 상관주의적으로 동적動的으로 연구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종류의 절대주의적 주장에도 반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평가적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평가적 입장에 선더는 것은 궁극적으로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다. 같은 시대의 여러 가지 규범이나 사고방식이나 지향도식志向圖式 중에서 옳은 것과 그릇된 것, 그리고 순수한 것과 비 순수한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 이러한 평가적 입장은 경험적 입장에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른지 모르나 경험이라는 것도 역사과학에 있어서는 초超 경험적인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결정과 그것으로부터 나타나는 기대나 지정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결정을 주장하는 것은 사물의 경험적 파악을 방해한다고 비난될른지 모르나 그것은 그러한 결정이 경험에 선행되어 이루어지거나 고정된 것으로 되어있는 경우를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잠재적인 형이상학적 전제를 의식적으로 끄집어내어 연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것이 곧 평가적인 태도인 것이다. 만하임이 사회학에 시대적 진단을 가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도 결국 경험적 소재의 연구에 의해 검증하면서 그 경우에 작용하고 있는 시계視界를 구체적으로 형성해 나간다는 뜻이다.

유토피아의 개념에 대해 그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유토피아적 태도란 현실을 초월한 태도이고 그것이 행위에 옮겨진 때 지배적인 존재질서를 부분적으로든 혹은 완전이든 파괴한다고 본다. 따라서 유토피아적 사고는 이데올러기적 사고와는 달리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 된다. 유토피아적인 것과 이데올러기적인 것과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의 현실화 여하이다. 과거의 사회질서나 실현가능의 잠재적인 사회질서를 단지 왜곡하여 표상表象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뒤에 판명된 관념은 이데올러기적인 것이고, 계속 이어나간 사회질서 속에서 완전히 실현된 관념은 상대적인 유토피아이다.

만하임에 있어 유토피아는 역사적 사회적 변형하도록 작용을 보낸 존재 초월적 표상으로 규정된다. 유토피아의식으로는 재再 세레파적洗禮派的 천년왕국설은 자유주의적 인도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의 4형태를 든다. 재세례파적 천년왕국설은 압박된 계급의 혁명적 정렬과 시기로부터 나와 직접적 현재를 강조했다. 자유주의적 인도주의를 낳은 부르조아적 중산中産계급은 구속되지 않은 미래의 관념을 주장했다. 보수주의자는 과거를 현재의 사회상태의 필연적인 것으로 연결시켜 그것을 정상화했다. 사회주의적 공산주의는 눈에 보이는 현재는 과거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경향도 포괄한다고 주장하면서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와를 구별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는 현대사회의 위기를 구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기대하고 있지를 않다. 이데올러기나 유토피아는 그의 의현 모두 존재 불 일치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완전히 존재에 하치하는 관념만을 처리하는 지식사회학만이 현대사회의 위기를 구제하는 알맞은 사상을 공급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사회의 전체 관찰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을 위한 적임자는 인텔리겐차라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처럼 계급 대립이 격화하는 시기에 있어서 대립하는 양 극단을 조정해야 할 중간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대립하는 2계급의 중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계급없는, 너무 고정되지 않은 사회학으로써의 인텔리겐차에게 조정의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사회적 위치로 보아 부동浮動적인 인텔리겐차만이 현대적인 동태의 전체를 향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회의 전체 관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929년에 ‘이데올러기와 유토피아’가 출판되자마자 큰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사회학적연구가 이처럼 광범하게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드문 일이다. 사회학자만이 아니라 경제학자도 역사학자도 철학자도 신학자도 토론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찬부贊否는 반반이었다. 스파이어는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정신적 투쟁’을 기대했고, 포가라시는 ‘사적史的 유물론의 근본사상의 왜곡이고 사회 파시즘에 대하여, 결여되었던 이데올러기적 세계관적 기초를 주는 세련되고 다식多識하고 명민明敏함으로 일관된 기도企圖’라고 공박攻駁했다. 만하임의 정치적 입장은 어떻든 사회민주주의적임은 틀림없다. 학문적으로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지식사회학이라는 새 문야를 도입하는 동시에 현대의 여러 가지 사상을 분석하고 진단診斷하려는 사회학적 시대진단학의 시도를 대담하게 이끌어낸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머른은 만하임의 업적을

1. 사회력이 사고형식의 직접적 원인이며

2. 관념과 사고는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며

3. 문제의식은 사회적 입장의 표현이며

4. 특정사고의 필요조건으로써의 사회구조의 분석이 필요하며

5. 지식, 사회 및 문화와의 관계의 유형의 구명究明을 위한 필요성을 제공했다고 요약하였다.

그의 유고遺稿 ‘자유, 권력 및 민주주의적 계획’은 그의 정치적 유언으로 간주될만 하다. 그것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특히 교육에 의한 사회 재건을 위한 시론試論이었다. 그의 탁월한 관찰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론은 그의 이데올러기론이 결과적으로 이데올러기를 무력화시켜버린 것처럼 결국 무력한 것이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인테리겐차의 교육을 통한 자유를 위한 그의 계획안은 그가 이상 시하는 이데올러기가 되지 못 하고 중간계급의 이데올러기를 대변하는 한낱 환상적인 유토피아로 그치고만 것은 애석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052 고용雇傭 ‧ 이자利子 및 화폐貨幣의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보통 일반이론이라고 불리우는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1936년에 발간되었다.

헤리스는 ‘케인즈의 위대한 공헌은 경제학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변환하는 근대사회의 제도적 구조에 적응케 하는데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자유 자본주의시대, 말하자면 경쟁과 자본 부족 그리고 완전 고용의 시대의 경제학 대신, 20세기 즉 독점 저축 과잉, 자본 과잉 및 불완전시대의 경제학을 수립한 데 경제학에 대한 케인즈의 공헌이 있었다는 뜻이다. 과거의 경제학, 즉 케인즈가 말하는 고전적 경제학은 논리의 전개에만 몰두해온 나머지 현실과 유리된, 이른바 비 현실적인 이론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적으로 변천하는 현실과 논리적으로 전개된 이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론이 현실에 적응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반이론은 비현실적인 고전적 경제학의 비판을 통한 새로운 현실적 이론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케인즈는 그 서문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전적 경제학의 오류는 논리적 일관성을 조심하여 수립된 그 상부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제들의 명확성 및 일반성이 결여되어 있는데에 있다고 보았다. 종래의 경제 현실에서는 명확하였고 일반적이었던 사실이 1930년대에서는 불명확하고 특수한 사실로 변하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사실을 자명하고 일반적인 사실로 전제하고 그 위에 수립된 이론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케인즈는 당시의 경제사회에서 볼 수 있는 보다 더 명확하고 일반적인 전제를 선택하고 이에 입각하여 보다 더 현실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할 때에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실천적인 과학이 형성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과학하는 정당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경제학자는 예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 한 것이라든가 ‘경제학자는 방대한 체계적 저서를 쓸 필요가 없다. 오직 시사에 관한 팜프렛만을 쓰면 된다’고 말 한 것 등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면 케인즈가 본 1930년대의 경제 현실은 어떠하였으며 고전적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과거의 경제 현실과 어떻게 달라졌던가?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는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소위 자유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변질하였다. 자유자본주의 하에서는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최대한도의 요구 충족을 위한 소비활동을 정부의 간섭없이 할 수 있었고, 자본가는 자본가대로, 극대이윤의 획득을 위한 생산활동을, 역시 정부의 간섭없이 행할 수 있었다. 즉 국민경제는 거의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의하여 영위되어왔다. 그리고 최대의 요구충족을 위한 개개의 소비자의 활동과 극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개개의 자본가의 활동은 자유경쟁가격의 기능에 의해서 사회 전체의 총 자본의 유통 및 그 재 생산과정을 균형상태로 이끌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와같이 소비자들과 자본가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의하여 실현되는 균형상태는 또 대체로 완전 고용상태에 접근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노동의욕이 있는 노동자들은 모두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유자본주의 하에서는 반드시 완전 고용만이 실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도 불완전고용이 따르는 불황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황은 대략 10년 내외의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경기 순환의 일국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3, 4년 내에는 자기 조절적인 기능에 의하여 회복과정을 거쳐서 다시 번영으로 복귀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비 정상적인 특수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로운 개개의 소비자와 생산자의 활동은 정상적인 상태로부터의 일시적 일탈逸脫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가장 안정적이고 높은 경제 수준을 실현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개인 또는 개별경제의 합리성과 시장경제 또는 국민경제의 합리성이 아담 스미스의 이른 바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에 의하여 조화調和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점단계로 접어든 제 1차 대전 후의 자본주의에서는 이와는 판이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량의 실업이 만성화하여 심각한 불황은 좀처럼 회복의 기운을 보이지 않았고, 나아가서는 산업계, 금융계 전반에 걸친 대 공황을 초래하여 경제사회 전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윌가에서 발생한 주가株價의 폭락은 세계공황으로 발전하여 모든 자본주의국가로 파급되어갔다. 케인즈의 조국 영국에는 1920년대에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던 만성적 실업자가 1930년대에서는 300만 명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이것은 제 1차 세계대전 전의 약 4배, 대전 전 40년 간의 평균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숫자다. 뿐만아니라 공업생산은 약 1/ 3로 떨어졌다. 이것은 영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영국의 불황은 더욱 격심했으며, 1933년에는 1929년에 비하여 생산량과 국민의 수입이 약 1/ 2로 떨어졌다. 세계무역도 약 1/ 3로 저락低落하였다. 풍부하게 자본설비와 노동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본설비의 많은 부분이 유휴상태에 놓여있었고, 지장을 잃은 많은 노동자이 거리에서 방황했다. 풍부한 자본설비와 그 유휴상태, 많은 노동자들과 그들의 실업, 이것이야말로 케인즈가 말한 바와 같이 ‘풍부한 가운데에 있어서의 빈곤’임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자본주의가 자기 조절적인 기능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유자본주의는 이미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케인즈가 말한 바와 같이 자유방임은 하나의 ‘이례적인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게 되고말았다.

케인즈는 이렇듯 변천한 당시의 영국의 자본주의를 직시하였다. 그리고 그 직시를 통하여 그곳에서 해명해야 할 기본문제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경제사회의 큰 결함’으로 ‘그것이 완전 고용을 제공해줄 수가 없다는 사실과 그것이 부와 소득을 자의적으로 그리고 불균형하게 분배한다는 사실’에서 발견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에게 있어서의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불완전고용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불완전고용상태의 해소, 즉 실업의 제거를 경제학자로써의 그의 신성한 임무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업의 제거를 위해서는 실업의 원인을 구명한다는 것이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일반이론은 이러한 케인즈의 의도의 표현이다.

케인즈 경제학의 논리적 출발점은 유효수요의 원리다. 이 원리에 의하면 총 고용은 총 수요에 의존하며, 실업은 총 수요의 부족으로 발생한다. 유효수요는 다시 말하면 총 지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총 지출은 총 소비지출과 총 투지지출로 형성된다. 그런데 소비는 사회의 실질적 소득에 증가에 따라서 증가하지만 그 증가율은 소득의 증가율보다 작다. 이것은 소득이 증가하면 그 증가는 모두 소비의 증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소비의 증가와 저축의 증가로 분할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득이 증가할수록 그 소득 따라서 또 고용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총 지출 즉 유효소비와 소비지출 간에 간극이 확대된다. 이러한 상태 하에서 소득 및 고용의 유지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소득 및 고용의 증가를 위해서는 소득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매워 줄만한 실질적인 투자지출이 항상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투자지출이라는 것은 주로 민간기업이 담당하는 것이고 그들은 극대이윤의 추구를 위하여 자본의 예상 수익률과 현행 이자율을 비교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높을 때에 한해서만 투자를 하게 된다. 따라서 그 때 그 때의 자본의 예상수익과 이자율의 값에 따라서 투자지출은 결정되고, 그것에 의해서 고용수준과 소득수준이 결정된다. 고용수준과 소득수준은 이와같이 소비와 투자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소비는 비교적 안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용과 소득수준의 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투자다.

종래의 고전적 경제학에서는 이상과 같은 총 수요의 부족이라는 사태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이른바 ‘세이의 법칙’즉 ‘공급은 자기 자신의 수요를 작출作出한다’는 것을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공급이 바로 그대로 그만한 수요를 작출한다고 할 것 같으면 수요의 부족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이로 인한 불완전고용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케인즈에 의하면 ‘세이즈의 법칙’은 현실 경제사회에서 타당성을 가지는 법칙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요와 공급이 언제나 일치하기 위해서는 저축과 투자가 언제나 일치해야 할 것이지만, 저축과 투자는 그 담당자와 그 동기가 다르고 따라서 양자가 반드시 일치될 이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케인즈는 지금까지 자기를 키워주었고, 스스로 전도자傳道者로 자처해왔던 고전적 경제학과의 결별을 고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케인즈는 무수한 균형상태의 특수 경우에 불과한 완전 고용만을 유일의 균형상태로 가정하는 고전적 경제학을 특수이론이라고 비난하고, 완전고용 뿐 아니라 무수한 불완전고용을 가정하고 있는 자신의 경제학이야말로 일반이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저 수준의 고용 및 소득은 유효 수요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므로 완전 고용의 실현 및 소득수준의 인상을 위해서는 유효수요를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소비증가책과 투자증가책이 필요해진다. 케인즈의 정책을 요약하면

1. 소비성향을 인상할 것, 즉 저축성향을 인상할 것

일반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빈곤한 사람에 비해서 저축성향이 높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들의 소득을 누진과세로 징수하여 빈곤한 사람들에게 사회보장 기타의 방법으로 제공할 것 같으면 사회 전체로써의 저축성향은 올라가게 된다. 이것이 조세정책에 의한 평등화정책이다. 슘페터가 ‘케인즈혁명의 의의가 종래의 미덕으로 생각되어 온 저축에 대한 정면적 공격 및 소비의 옹호에 있다’고 한 것도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케인즈는 낭비까지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고 했다.

2. 이자율을 인하하여 민간투자를 증가시킬 것

그는 이자율 인하를 위한 구체적정책으로써 공개시장정책을 생각하였다. 그는 조세정책을 통한 소득 평등화정책 보다 이자율 인하정책이 훨씬 효과가 크고 빠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 정책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자율은 영零 이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 공공투자 등의 정부투자의 수행遂行 또는 재정적자赤子에 의한 유효수용의 작출. 케인즈가 가장 강력히 주장한 것은 이 공공투자정책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필요할 때는 정부가 자유로히 화폐를 발행할 수 있어야 했고, 또 그렇기 위해서는 금본위金本位를 폐지함으로써 금의 양과 화폐량과의 관계를 끊고, 인간의 지혜가 화폐량을 결정하는 관리통화제도를 필요로 했다. 그의 관리통화 주장은 이러한 근거에 입각해있었던 것이다.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주로 30년대의 자본주의 경제의 병폐인 불완전고용 즉 불황을 주로 분석하였다는데서 이를 ‘불황不況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반이론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유효수요의 이론은 불완전고용뿐만 아니라 완전고용하의 경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인플레이션하의 그것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의 이론은 일반이론이라고 불리울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일반이론은 경제이론면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켜 이론경제학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구미 경제학계의 공유재산이 되었다. 그의 수정자본주의적 이념은 세계 각국의 경제정책에서 채택되고 있고, 국제기구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은 그 대표적이다.

053 천체天體의 회전回轉에 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하늘에 떠있는 해, 달과 수많은 별들, 그리고 그들의 끊임없는 운동에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매혹魅惑되어왔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며, 계절이 변화하는 것 등은 여러 가지로 인류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전설과 종교도 천체현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문명의 발달에 따라 인류는 하늘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천문학분야에서 가장 앞선 사람은 B.C 5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지식은 A.D 15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에 살고있었던 이집트인 클레디오스 톨레미 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톨레미의 이론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어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과 항성恒星을 포함한 모든 천체天體가 그 주위를 회전한다는 천동설天動說이다. 톨레미에 의해 체계화된 천동설은 그 뒤 약 15세기 동안 인간의 마음을 지배했고, 우주에 관한 진리로 떠받들어졌다. 천동설이 이처럼 일반적인 찬동을 얻은 것은 이 이론이 자연의 외견外見 현상과 일치하며, 또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이 인간의 자아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그릇된 것이나 오랜 동안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천동설 대신 지동설地動說로 바른 우주상宇宙象을 보여준 이는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 - 1543년)이며, 그의 사상을 담은 저술이 사망 직전에 간행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이하 천체회전)’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은 유럽역사에서 가장 빛나고 모험에 찬 시기였다. 콜럼부스의 신 대륙 발견, 마젤란의 세계 일주, 바스크다 가마의 인디아 회항回航, 루터의 종교개혁 등이 이루어졌고, 미켈란젤로와 초인超人 다빈치가 활동하였던 시대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한자동맹(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의 상업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 Hanseatic League. Hansa는 Hanse 라고도 씀. 13 - 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다(도이치어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중세 도이치어로서, '길드'나 '조합'을 의미했음) 도시인 토룬에서 출생했다. 뒷날, 대사교大司敎인 백부伯父에게 큰 영향을 받은 그는 18세 때 크라코우대학에 진학했다. 5년 뒤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종교, 천문학, 수학, 의학 등을 연구, 강의했다.

1506년 33세 때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코페르니쿠스는 프라우엔부르크사원寺院 회원이 되었고 나머지 반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의료사업에 진력하는 한편, 폴란드, 프러시아 튜튼의 기사騎士 사이의 전쟁에서는 이 지구의 방위를 맡고, 그 후 강화회의에 참가하였다. 또 화폐제도 개혁에 관해 진언陳言하고, 오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그리스어 시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천문학은 재능에 찬 코페르니쿠스가 한 여러 활동 중의 하나에 불과했으나 점차 천문학은 그의 첫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독자적으로 연구했다. 관측소는 사원 주위의 성벽의 탑을 이용했다. 당시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약 1세기 전이어서 그가 사용한 기구는 해시계, 삼각의三脚儀, 천문관측의다.

그는 B.C 3세기의 그리스인 아리스타르쿠스가 우주는 태양 중심이라고 했던 사실을 알고 이 문제에 대한 재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지동설에 관한 체계를 세웠으나 발표는 30년이 지연되었다. 충실한 교인이었던 그는 이단자異端者 또는 순교자殉敎者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1510년 이전에 자기 신설新說에 대해 짧은 해설을 써놓아 상당히 복사 배포되었다. 그러나 도이치의 수학자 게오르그 레티쿠스의 노력이 없었다면 천체회전의 간행은 실현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1539년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온 레티쿠스는 감동한 나머지 신설을 편지로 은사에게 보내서 다음 해 ‘제 1 해설’이란 이름으로 단치히에서 간행하였다. 이 소 책자는 지구의 운동에 관한 부분만을 다룬 것이었으나, 큰 반향을 일으켜 저서 전체의 출판을 간청하는 소리가 높았다. 완전무결完全無缺을 기하는 코페르니쿠스였으나, 이같은 호평에 부응하여 레티쿠스에게 천체회전 원고를 넘겨주었다. 레티쿠스의 라이프치히대학 교수 취임으로 루터파의 목사 안드레아스 오시안데르 가 출판을 책임졌다.

오시안데르는 이 저술에 나타난 과격한 사상을 염려했다. 그는 허가없이 서문을 삭제하는 대신‘이 책은 천문학자에 의한 편의적인 가설假說을 담은 것으로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이 저술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자기 서문으로 대신했다.

인쇄가 끝나기 전에 코페르니쿠스는 병으로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그래서 뉴른베르크에서 이 역사적 저술의 첫 권을 가지고온 사자使者가 프라우엔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숨지기 몇 시간 전이었다. 1543년 5월 24일의 일이다.

당시의 관례에 따라 라틴어로 간행된 천체회전은 법왕法王 파울 3세에게 바친 헌사獻詞와 오시안데르의 허위虛僞 서문序文에 이어 6권으로 간행되고, 각 권은 장章으로 구분되어있다.

제 1권은 14장으로 구면삼각법球面三角法의 기초와 표로 채워진 마지막 석 장을 제하면서 이론의 개요가 기록되어있다. 즉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 지구도 다른 유성流星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태양중심설에 관한 논의, 계절에 관한 검토가 포함되어있다.

제 2권은 구면球面천문학, 제 3권은 분점分點의 이동과 태양의 운동, 제 4권은 달의 운동, 제 5권과 6권은 혹성惑星의 경도經度 및 운동을 논한 것이다. 제 3권 이후에서 어떤 운동을 설명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의 계산을 기초로 하는 천체의 진로를 표시하는 기하학적인 도표가 첨부되어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의 우주관을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성恒星의 천구天球이며, 여기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있고, 그 때문에 부동不動이다. 이것은 우주의 테두리로써 모든 별의 위치와 운동이 이것과 관련을 맺게된다. 일부 사람들이 항성천恒星天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지동설에서는 왜 그것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는데 대한 이유를 뚜렷이 밝힌다. 운동하고 있는 천체의 첫째 별은 토성土星이고 이것은 30년만에 궤도를 일주한다. 다음은 목성이며 공전주기公轉週期는 12년이다. 그 다음이 화성으로 2년만에 공전한다. 공전주기 순위 네 번째는 주전원궤도周轉圓軌道를 그리는 달을 가진 지구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1년에 한 번 공전한다. 다섯 번 째는 금성으로 공전주기는 9개월이다. 수성이 여섯 번째로 80일에 회전한다. 이 무든 것의 중심에 태양이 있다. 실로 이 아름다운 전당殿堂에 있어서 횃불이 전체를 밝힐 수 있도록 그것을 두어야할 더 나은 곳이 이밖에 또 있을까? 이와같은 질서있는 배치에 의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우주의 놀라운 대칭 및 운동과 괘도의 크기에 대하여 조화를 이룬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사상의 개요를 밝힌 천체회전에 대하여의 제 1권에서 우주가 구형球形인 것에 대해 물방울을 예로 든다. 모든 것은 물방울처럼 가장 완전한 모습을 갖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대지大地도 구형임을 논증했다. 다음으로 땅과 물이 합쳐서 하나의 구球를 이루고 있으며, 천체의 운동이 하나같이 원운동 또는 그 합성임을 밝힌다.

다음으로 우주에 있어서의 지구의 장소와 지구가 원운동을 갖고 있는가를 논했다. 이와 함께 그는 지구가 우주의 끝없이 넓은 (그러나 무한은 아니고 유한) 크기에 비하면 지구는 점點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우주가 아니라 지구가 일주회전一週回轉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면서 원자론原子論도 언급을 했다.

그는 고대인이 지구가 부동이며,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무거운 것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지구의 중심에 결부시킨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원인이 있다고 해명하면서 지동설에 반론을 소개한다. 이같은 톨레미의 견해는 갈릴레오나 뉴튼에 의해 뒷날 역학力學의 체계가 확립되고 ‘관성慣性의 법칙’이나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이 발견되기 전에는 반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 둘레의 공기가 지구의 운동에 따라 끌려간다는 사실’을 밝히고 또 ‘지구가 회전하지 않는다면 낮과 밤을 만들기 위하여 천공天空이 회전해야 하는데, 전全 우주 대신 지구가 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고 시사示唆’ 하면서 이를 논박했다. 이에 따라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운동이라는 개념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그 운동량을 문제삼고 있다. 이밖에 태양이나 달 또는 혹성의 궤도의 순서에 관한 엣부터의 견해를 소개하고 금성과 수성은 다른 혹성과 달라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한 마르티아누스 카페라 의 설을 신중히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천체회전 제 1편에서는 태양 중심의 우주계가 도입되고, 끝으로 지구의 운동에 의해 항성의 시차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항성의 높이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지구는 부동이 아니며, 지축 주위를 하루에 1회전하고 1년에 한 번씩 태양 주위 궤도를 돈다는 것으로 그것이 진리라면 인류는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나서 그의 거처는 허다한 유성 중의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이처럼 중대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으나 당시 카돌릭교회는 많은 난제를 안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오시안테르의 사람을 현혹시키는 허위 서문으로 인해 조속한 조처는 취해지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개혁의 지도자인 루터나 칼빈 등이 지동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1543년에 간행된 천체회전은 말썽없이 그 세기를 넘겨버렸다. 오래 뒤 부르노와 갈리레오 같은 코페르니쿠스설의 옹호자에 대한 보복이라는 형태로 1615년에 이르러서야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성서에 상반되는 불합리하고 이단적인 것이라고 규정되었다. 그에 따라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정정訂正될 때까지는’ 금서禁書목록에 들어갔다. 이것이 해제된 것은 2세기가 더 지난 1835년이다.

지동설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옹호자는 부르노로 그는 이로 인해 종교재판을 받고 1600년 2월에 화형火刑당했다. 1633년 갈릴레오도 종교재판에서 고문拷問과 생명의 위협을 받은 뒤 지동설에 관한 신념을 버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때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부르노와 갈릴레오의 수난으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오랜 세월을 요하기는 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점차로 인정을 받았다. 헌신적이고 개척적인 과학자들의 열의와 새로운 관측장비의 출현은 코페르니쿠스의 설에 반박 여지가 없는 증거를 쌓아갔고, 지동설이 지닌 결함을 차례로 제거했다.

케풀러에 의한 유성운동법칙에 공식화에 이어 천문학에 처음으로 망원경을 이용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실증한 갈릴레오가 역학의 근원원리를 확립했을 때, 지동설은 과학적 근거를 얻었다. 그러나 지동설의 타당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명은 아이작 뉴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유성의 운동법칙을 공식화 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끝내 풀지 못 했던 우주의 신비 몇 가지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로 해명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설은 많은 점에서 불완전하고 불확실했다. 천체가 정원正圓 위를 운동한다는 그의 개념과는 달리 타원橢圓 위를 운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우주가 한정된 한계를 가졌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태양계가 무한히 많다는 학설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지동설은 유성계의 중신으로 태양을 택했다는 본질적인 면에 있어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했고, 근대과학의 천문학에 기초를 마련했다.

<사족蛇足>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火刑을 당한 부르노는 얼마나 처참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 신을 믿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종교의 횡포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종교의 허상이다. 중세에는 그렇다 치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 고 호도糊塗하는데, 하늘의 어느 별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태양계는 항성恒星인 태양과 8개의 행성行星과 약 160개의 위성衛星, 수많은 소행성小行星, 혜성彗星, 유성流星과 운석隕石, 옅은 구름을 이루고 있는 행성 … 큰 망원경으로 관측하면 더욱 많은 소행성과 위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임. 새로운 혜성은 평균 1년에 6개 정도가 발견되고 있음. 그 어느 별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우주에는 수 백억에서 수 천억 개의 별과 성간星間물질이 모여 있는 집합체인 은하銀河가 대략 1,000억 개는 존재할 것으로 추정됨, 우리나라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사상’ 을 교리로 삼았다. 첨단 과학시대 하나님의 논리는 원시신앙처럼 개화改化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054 혈액순환血液循環의 원리原理 Exercitatio anati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1628),

하비 William Harvey

심장이 멎으면 인간은 죽는다. 심장활동은 생명의 상징이다. 혈액순환의 원동력인 심장활동의 정지는 생명의 종언終焉을 의미한다. 현대의학의 발달이 동맥動脈의 대체代替,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일부 심장질환의 수술치료를 가능하고 했고, 1967년말에는 심장이식수술을 거쳐 18일 간 연명한 사실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2020년 현재, 심장수술은 보편적인 의료행위가 되었음).

생명현상의 한 근원인 심장의 기능과 혈액순환의 기구機構를 밝히려는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등불을 찾아보게 된다. 하비의 ‘혈액순환의 원리’ 의 발견이다. 17세기에 이루어진 이 기념비적인 발견 및 그 발견 경위는 그 뒤 현대의학 및 생리학에 이르는 도정道程을 찬연히 비춰준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피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이를 호기好奇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혈액이 간장에서 만들어져 심장으로 옮겨지고 다시 체내를 거쳐 정맥으로 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장이 체온의 원천임을 밝히고, 아울러 지능의 터전이라고 믿었다. 그 뒤 알렉산들아학파의 에라시스트라스는 동맥이 정신을 운반한다고 주장했고, 뒤이어 가레노스는 동맥이 혈액을 운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레노스는 체내에서 소화된 음식이 간장으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자연의 정기精氣가 주어져 혈액으로 변하고 혈액은 조석간만朝夕干滿과 같이 정맥과 동맥 사이를 왕래한다고 믿었다. 그는 심장의 한쪽에서 나온 정맥혈과 세공細孔을 통하여 혼합된다고 생각했다.

그 뒤 1천 년 동안 가레노스의 설은 의심하거나 논박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디어왔고 극히 소수의 용감한 과학자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여기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과 함께 혈액이 폐를 통해 순환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나 심장이 펌프와 같다고 생각한 이는 없었다.

심장의 기능과 혈액순환이론에 부분적으로 불완전한 해답은 행해졌으나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하비(1578 - 1657년)의 이론이 나오기까지는 정연한 체계가 서지 못 했었다.

하비는 영국 남부 포크스턴에서 출생했다. 켄터베리학교에서 라틴어를 익힌 그는 15세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 4년 뒤 졸업했다. 그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명한 파두아대학에서 의학을 배우며 정맥변靜脈弁의 발견자인 파브리규스의 지도하에 동물해부와 실험을 진행시켰다.

1602년 영국으로 돌아온 하비는 이후 50년 간 의사, 교수 또 저술가로 활약한다. 그는 왕립의과대학 연구원, 성聖 바아톨로뮤병원 의사를 거쳐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하비는 평생을 치료 보다는 기초의학연구와 실험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616년 그는 왕립의과대학에서 혈액순환론을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그 강의노트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속에는 혈액순환이론의 타당성을 그 당시 이미 확신하고, 있었던 증거가 될 ‘혈액의 운동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으며 이것은 심장의 고동鼓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는 자기 이론에 결론을 얻어 출판하기까지 13년을 보냈다. 그는 혈액순환이론에 대해 ‘너무나 신기하고 들어본 일조차 없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에 일부 인사의 질투로 인해 나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널리 인류를 적으로 돌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바이다. 일단 습성이 된 것은 제 2의 천성天性이 된다. 한 번 깊이 뿌리를 박고 옛날부터 기초를 가지고 있는 교의敎義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수차의 실험과 시찰 끝에 하비는 자기 연구를 발표하기로 결심하여, 1628년 도이치 프랑크푸르트에서 단 72페이지의 소 책자인 ‘혈액순환의 원리’ 가 간행되었다. 이 역사적 저술의 완전한 책명은 ‘동물에 있어서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연구’ 이다.

라틴어로 된 혈액순환의 원리는 찰스 1세와 왕립의대학장 및 동료교수, 의사에 바친 2개의 헌사獻詞로 시작된다. 하비는 이 헌사에서 ‘나는 책으로부터가 아니고 해부로부터 , 즉 철학자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구조에서 해부학을 배우고 또한 가르칠 것을 공언한다’ 고 적어, 과학적 방법론의 의도와 정신을 밝히고 있다.

심장의 기능과 혈액순환의 관계를 기술한 본문은 서론에 이어 17장으로 나누어져있다. 그 중 서론은 가레노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의 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비는 제 1장에서 연구 도중 직면했던 몇 가지 문제점을 ‘내가 심장의 운동과 작용을 발견하는 수단으로 생체해부에 뜻을 두고 타인의 저작으로부터가 아니고 실제의 조사로부터 이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을 때, 이 일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게되자 심장의 운동은 오직 신만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운동이 빨라서 어느 때 심장이 팽창하고 어느 때 수축하는지를 처음에는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여러 동물에 있어서는 일순간에 이루어지고 번개가 번쩍이듯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비는 80여 종의 동물을 이용한 해부에서 움직이는 심장을 직시하고, 약간의 실험을 더해 심장의 수축이 혈액을 밀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같은 심장의 펌프작용에 의하여 혈액은 계속적으로 체내를 순환하며 동맥과 맥박을 일으킨다. 그는 혈액이 심장의 좌측에서 나와 동맥을 지나 사지로 퍼지고, 다음에 정맥을 통하여 심장에 오른편으로 돌아옴을 밝혔다. 하비의 연구는 혈액이 간장에서 만들어져 각 기관에서 소비된다는 설을 뒤엎고, 동맥에 의하여 각 기관에 운반된 혈액이 정맥에 의해서 다시 심장으로 보내져 완전한 순환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 과정을 ‘이 두 가지 운동 즉 하나는 심실心室의 또 하나는 심방心房의 운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조화와 리듬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한 개의 기계장치의 이치와 조금도 다름없다. 기계에서는 하나의 바퀴가 다른 바퀴의 운동을 전하고 있으나 모든 바퀴는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하비가 체내의 혈액공급을 순환운동으로 생각한 것은 원운동이 모든 운동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한 고대학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추측되고 있다. 그는 이 저술 중에서 ‘마치 원 가운데의 운동’‘순환이라고 불리워도 좋을 혈액의 운동’ 이라 적고 있다.

심장운동과 혈액순환을 결부시킨 그의 연구는 정확한 것이었으나 정맥을 통해 신체 각 기관으로 보내진 혈액이 어떻게 동맥으로 옮아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가는 설명하지 못 했다. 그는 ‘나는 동맥과 정맥을 문합吻合함으로써 양자의 관련성을 발견하려는 데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고 밝혔다.

하비는 혈액순환을 정량적定量的으로 다루어 혈액이 간장에서 만들어져서 심장을 거쳐 맥관脈管의 끝에서 살(육肉)로 고정된다는 가레노스의 설을 반박했다. 그는 30분 간에 심장이 동맥으로 내보내는 혈액량이 전 혈액량 보다도 많음을 실증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에 심장이 배출한 혈액량은 체내에서 섭취되어, 소화된 식물食物의 전량全量 보다 훨씬 많고 이에 따라‘혈액은 순환하여 심장으로 되돌아온다는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공급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전염병, 독毒 등이 전신에 퍼지는 사실도 혈액질환으로 설명했다. 하비는 동물을 실험대상으로 사용하여 해부학자들이 인체의 해부와 마찬가지로 하등동물의 해부에 정통하기만 했더라도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혈액순환에 관한 하비의 이론은 의학사상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내용은 오늘날까지 커다란 수정없이 인정될만큼 위대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업적은 실험적 방법을 도입한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면, 이후 생리학과 의학은 3세기 이상에 걸쳐 그가 만든 기초 위에 연구, 발전되어왔다.

의학은 하비 이전에도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있어 의학자들은 많은 병을 알아보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때때로 관찰만으로는 불충분했다. 하비는 실험에 의해서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보여준 것이다.

심장운동과 혈액순환에 대한 하비의 발견은 즉각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 했다. 보수주의와 편견에 의한 일부 반대론이 없지 않았으나 모든 개척적이고 선구적인 연구 발견이 그렇듯이 서서히 인정을 받았다.

그의 이론을 비판하는 경우 하비는 대부분 이를 묵살했다. 그러나 파리대학교 의학부의 계속적인 비판에 대해 도전했다. 파리대학 해부학교수 장 리오랑이 교수들을 설복說服, 하비의 이론에 대한 강의를 못 하게 했을 때 혈액순환에 관한 2편의 해부학논문을 써서 그에게 제시했다. 이 논문들은 1649년 소 책자로 출판되었는 바, 반향反響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혈액의 순환이 발표된 후, 나의 이 발견에 대해서 좋거나 나쁘거나 무슨 말을 듣지 않고 지낸 날은 거의 하루도, 아니 거의 한 시간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허약한 어린이이며, 빛을 볼 가치가 없다고 비난하고, 또 어떤이는 이 아이를 소중히 하고 길러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재고하고 있다. 전저는 법석대고 이를 반대하며, 후자는 수많은 찬사로 이를 후원한다. 일부에서는 내가 모든 논의의 세력에 대항하여 실험과 시찰과 접안경接眼鏡검사에 의해서 혈액의 순환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며, 또 다른이들은 그것은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며, 아직 모든 반대론을 반박하지는 못 했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생체해부에 대하여 자만심에 찬 애정을 보이고 잇다는 사람도 있고, 또 내가 개구리, 뱀, 파리 기타의 하등동물을 해부장解剖場에 도입한 것을 비웃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욕에 욕으로 대꾸하자면 나는 진리에 뒤떨어지는 지도자나 연구가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거의 완전한 하비의 이론 중, 혈액이 동맥에서 정맥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해명치 못 한 것은 ‘옥玉의 티’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 현미경이 없어서, 이같은 구실을 하는 모세관毛細管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통로가 있으리라고는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는 하비가 죽은 수 년 뒤 마르첼로 말피기에 의해 해명되어 혈액순환을 증명하는 마지막단계가 완성되었다.

하비는 흔히 불우한 개척자들과는 달리 자기 학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살았다. 죽기 3년 전인 1654년 그는 왕립의과대학장으로 선출되었다.

혈액순환에 대한 하비의 발견은 생리학과 의학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금자탑金字塔이다. 수천 년 간 집대성된 의학지식은 하비의 발견을 거쳐 현대의학으로 연결된다.

의학 진보에 대한 하비의 업적을 가장 훌륭하게 요약한 것으로는 읠리암 오슬로가 1906년에 런던의 왕립의학대학 하비학파 연례대회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연설이다.

‘그것은 낡은 전통에 대하여 현대정신의 발명을 특징짓는 것이다. 인류는 잉 이상 더 주의깊은 관찰이나 정확한 기술에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또한 훌륭하게 이루어진 이론이나 꿈에서 만족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한 일은 무지하다는 구실로써 쓰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처음으로 현대의 과학정신을 가진 한 사람이 실험적인 면으로부터 생리학의 대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는 확증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그는 관찰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또한 확고한 결론을 끌어내는 기지機智를 갖고 있었다. 귀로 듣고 또한 들을 뿐이었던 청자聽者의 시대에 뒤이어 눈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오직 보아야만 만족했다. 그러나 드디어 손 - 사색하고 궁리하고 계획하는 손의 시대가 왔다. 정신의 도구로써의 손은 72페이지의 소 논문이 되어 이 세상에 다시 도입되었다. 우리들은 실험의학의 시초를 이 논문에 두는 것이다.’

055 자연철학의 수학적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 뉴톤 Sir Issac Newton

뉴톤 생존시 영국경제사회의 배경은 상업자본을 중심으로 한 중상주의시대에서 산업자본을 중심으로 한 매니팩쳐 Manufacture시대로 이행하여 가는 시기였다. 교환화폐의 발달에 의하여 표면화한 시민계급의 사회적세력이 증대함에 따라 각국의 군주君主는 시민계급과 결탁하면서, 봉건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도시의 시민계급을 의회에 참가시키는, 이른바 신분제국가를 만들어 왕권을 확장함과 동시에 통일된 유통경제권 위에 중앙집권을 수행하여 간 바 영국은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여왕시대에 이미 절대주의 왕권체제를 확립하고, 상업자본의 옹호, 화폐의 획득, 국내 수공업공장과 식민지 무역의 보호 장려, 식민지의 획득 및 식민지제도 확립, 조세租稅, 금융 등의 중상주의정책을 조성하면서 산업자본의 육성을 촉진하였다. 국내의 정치상황은 이러한 가운데서 성정한 중산시민계급과 이와 대립된 상층시민계급,봉건귀족 간의 충돌이 부단하여 소위 영국의 시민혁명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것은 궁극에 있어서 1688년 명예혁명을 초래하였다. 영국은 명예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의회정치의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과학의 자유로운 육성에 새로운 생기를 북돋아주었다.

실제 뉴톤의 역학力學은 당시 영국의 사회적 경제적 정세를 배경으로 한 기술적 여러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때의 수상운수水上運輸, 광산업, 군사기술에 있어서의 여러 문제를 열거하면

1. 수상운수상水上運輸上의 문제

선박의 적재積載능력과 속도의 증가, 선박의 부양력浮揚力의 개량과 그 안정, 항속력航續力의 증가와 조종操縱의 簡易化간이화, 국내 수로의 완성과 해안의 연결, 운하運河와 수문의 건설

2. 광산업상鑛産業上의 문제

심갱深坑에서의 광석鑛石의 인양引揚, 갱내의 통풍수단, 배수 및 도출導出장치 펌프 문제, 용광로鎔鑛爐의 개량, 광석의 능률적 처리

3. 군사軍事기술상의 문제

발사發射되었을 때 화포火砲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연구, 화포의 최대중량과 그 안정도와의 관계, 정확한 조준방법, 진공탄도眞空彈道의 문제, 탄환의 공기 저항, 탄도에서의 탄환의 편의偏倚

뉴톤은 영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며, 1624년 12월 25일린칸셔의 울스도프에서 출생했다.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케풀러의 광학光學,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공부한 뒤 1665년에 BA학위를 취득, 이 때 런던에 흑사병黑死病이 유행하여 대학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귀향, ‘운동의 3법칙’,‘만유인력의 법칙’, ‘빛의 분석 및 미적분법微積分法의 발견’ 등은 모두 귀향한 동안 이루어졌다.

1667년 대학에 귀환하여 트리니티대학의 펠로우(영국대학 평의원評議員)에 추대되었다. 1668년에는 반사망원경을 발명, 1669년, 발로우교수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직에 취임하고, 광학을 강의, 루카스교수직이란 케임브리지의 에 있어서의 수학의 최고교수직이며, 1663년 대학대표의원 헨리 루카스의 유산遺産에 의해 설립한 아이작 펠로우로 최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동년 ‘빛의 분석실험’ 에 대해 보고했다.

1675년 ‘뉴톤 일환’ 을 발표, 1685 - 1686년 그의 명저名著 ‘자연철학의 수학적원리’ 를 완성하고, 1687년 출판, 1696년 조폐造幣국장으로 취임, 1705년에 나이트(기사騎士) 작위爵位를 받았다. 1703 - 1727년 사이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후, 동년 3월 27일, 86세의 고령高齡으로 병사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安葬되었다.

그 밖의 업적으로는 ‘뉴톤 합금合金’ ‘뉴톤 원판圓板’ ‘뉴톤의 포텐셜’ ‘뉴톤의 수통水桶실험’ ‘냉각冷却의 법칙’ ‘뉴톤 역학力學’ 등이 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하 수학적원리)’ 제 1권의 권두에서는 역학의 기본개념인 시간, 공간, 질량, 운동량, 힘, 가속도 등의 정의를 주고 뉴톤의 유명한 ‘운동의 3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 을 설명하였다.

제 1법칙 - 모든 물체는 그것에 주어진 힘에 의하여 그 상태를 정지 또는 직선상의 등속等速운동의 상태를 계속 지속한다.

제 2법칙 - 운동의 변화는 언제나 주어진 힘에 비례하며, 더욱 그 힘이 작용하는 직선의 방향으로 일어난다.

제 3법칙 - 작용과 반 작용은 언제나 그 방향이 반대고 크기가 같다.

그리고 계속된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는

1. 양量의 최초와 최후와의 비比의 방법에 대하여

2. 구심력求心力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3. 편심원추곡선상偏心圓錐曲線上에 있어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4. 하나의 초점焦點을 주고 타원적橢圓的, 포물선적抛物線的 및 쌍곡선적雙曲線的 궤도軌道를 정하는 것에 대하여

5. 2개의 초점의 어느 것이나 주어져있지 않을 때에 궤도를 정하는 것에 대하여

6. 주어진 궤도상의 운동을 정하는 것에 대하여

7. 물체의 직선적인 상승 및 낙하에 대하여

8. 임의의 구심력에 작용한 물체의 운동의 궤도를 정하는 것에 대하여

9. 운동하는 궤도상의 물체의 운동 및 그 근심점近心點, 원심점遠心點의 운동에 대하여

10. 주어진 표면상의 물체의 운동 및 진자적振子的 운동에 대하여

11. 구심력을 가지고 서로 잡아당기는 구형球形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12. 구형물체의 인력引力에 대하여 13. 구형 아닌 물체의 인력에 대하여

14. 매우 작은 물체가 하나의 커다란 물체의 각 부분에 향하는 힘에 의하여 움직일 때의 운동에 대하여이다.

제 1권은 당시의 학계에 있어서 미 해결된 혹성의 문제를 잘 해답해주었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고, 1609년에 케플러가 혹성운동에 관한 법칙 (동년 제 1 및 제 2 법칙, 1619년 제 2 법칙 발표)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운동은 어떠한 힘이 혹성에 작용하였기 때문인가에 대해서는 당시 전연 알지 못 했던 것이다. 뉴톤은 그의 운동의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여 이것을 명확히 설명하였다.

제 2권에 계속되는 ‘물체의 운동’ 에 대해서는

1. 속도에 비례하는 저항을 받는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2. 속도의 자승自乘에 비례하는 저항을 받는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3. 일부분에 속도의 1승, 일부분에 그 자승에 비례하는 저항을 받는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4. 저항매질媒質 내에 있어서의 물체의 원운동에 대하여

5. 유체流體의 밀도 및 압력에 대하여, 그리고 유체靜力學에 대하여

6. 진자振子의 운동 및 그 저항에 대하여

7. 유체의 운동

및 포물체가 받는 저항에 대하여

8. 유체 내를 전파하는 운동에 대하여

9. 유체의 원운동에 대하여

제 2권에서는 주로 저항있는 매질 내의 운동 및 유체의 운동을 논하였다. 유체론은 17세기 중엽에 토리첼리, 파스칼, 게릿게, 보일 등에 의하여 그 실험적연구가 부분적으로 행해졌으나 뉴톤에 의하여 비로소 종합적으로 다루어졌다.

제 3권에서는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 를 설명하였으며, 이것에 의하여 근대의 우주관은 과학적인 체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처음에 자연계 탐구상의 4개의 규칙을 설명하고, 다음에 ‘현상’ 이라 하여 목성의 위성, 혹성의 운동, 달의 운동에 관한 관측 결과를 기재하였으며, 그리고는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목을 취급하였다.

1. 우주의 조직의 원인에 대하여

2. 달의 불균등운동의 크기에 대하여

3.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의 크기에 대하여

4. 분점分點의 역행逆行에 대하여

5. 혜성彗星에 대하여

그런데 이 3권에 대하여 뉴톤은 ‘제 3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도록 통속적인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전에 설명한 원리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 우주론에 설명한 결론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오랜동안 관습되었던 편견을 바꾸지 못 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실제 역학의 기본법칙은 이 저서에 의하여 확립되었으며, 여기에 나타난 창의의 설명에 필요한 모든 수학적 착상은 뉴톤 자신에 의해 발명되었다.

원명原名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이나 보통 간단히 ‘원리(Principia)’ 라고도 하며, 과학사상 전례없는 최대 명저라 불리워지고 있다. 이것에 의하여 근대 물리학의 수학적방법이 완성된 동시에 근대과학의 기초가 성립되었으며, 200년 이상 모든 과학자의 뇌리腦裏를 점유하여, 최대의 찬미 속에 절대적인 신봉을 주었다.

뉴톤 이전에 있어서의 물리학상의 대표적인 업적, 즉 케풀러의 ‘신천학新天學(1609년)’, 갈리레이의 ‘역학力學 대화對話(1638년)’ 에 있어서 혹성의 운동, 낙체落體 및 포사체抛射體의 운동에 관한 설명을 보면 이들은 어떤 특정한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상당한 추상화抽象化, 혹은 일반화를 기도企圖하였으나, 뉴톤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자연현상의 통일적 설명에 있어서 이보다 말 할 수 없이 넓은 시야를 갖는다. 가령 케풀러의 제 3법칙이 단지 혹성운동의 형태를 규정한데 대하여 뉴톤은 그러한 형태의 운동이 일어나는 역학적 조건을 추구하고 그러한 가운데 운동의 3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이것으로 케풀러의 혹성운동의 법칙과 갈릴레이의 지상운동의 법칙(낙체落體 및 포사체抛射體)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모든 현상에서부터 천체의 구조와 운행에 대한 현상에 이르기까지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뉴톤은 자연계에 있어서의 모든 상호작용에 ‘힘’ 을 전제하고, 힘을 받아 운동하는 물체가 나타낼 여러 가지 현상 중에서 가속도로 나타내는 그러한 간단한 변화의 경우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더욱 케풀러나 갈리레이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별해 사용하지 못하였던 ‘힘’ 과 ‘질량’ 의 개념을 뉴톤은 명확하게 구별하여 사용했고, 그곳에는 물체의 형상, 색色, 취臭, 미味 등은 전연 문제되지 않았고, 다만 질량과 힘의 관계에 의하여 물체의 운동을 고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뉴톤에 의하여 체계화된 물리힉의 특징은 자연을 단순한 타성惰性과 운동만을 보유하는 질점質點으로 고찰하고 힘에 의해서 질점(물체)이 질점(물체)에 작용하는 계기적繼起的인 과정만을 문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뉴톤적 물리학은 공간에 있어서의 객관적 실재성, 실제의 외부성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졌으며, 이러한 물리학적 인식은 그것을 감각하는 ‘감성感性’ 을 토대로 하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관의 내면적 원리인 ‘이성理性’ 과 준별峻別하게 되는 동시에 그 대립성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특히 자연현상을 일원적인 역학관力學觀으로 보는 뉴톤 물리학의 입장에서는 비 연속적인 것도 연속적으로, 우연적인 것도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자연을 인과因果필연적법칙의 세계라 규정하게 되어, 이러한 입장의 귀결로써 자연물로써의 생물 혹은 생명현상까지도 인과필연적 입장에서 기계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뉴톤에 의하여 확립된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역학관은 근대과학(고전과학)의 근본사상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눈부시게 발전하는 근대과학문명의 위세를 타고 철학, 사회, 문예 등 근대사회 모든 분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056 종種의 기원 基源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다윈 Darwin, Charles Robert

1858년 7월 1일 밤에 개최된 린네학회에서 다윈과 윌레스의 논문 - ‘자연도태淘汰 즉 생존경쟁에 있어서의 적자適者가 존속하는 것에 의한 종種의 진화進化에 관하여’ 가 발표되었다. 이어 그 익년翌年에는 다윈의 저서 ‘종種의 기원起源’ 이 발간됨으로써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고등생물은 간단한 구조와 기능 밖에 갖지 못 했던 원原생물로부터 오랜 시간적 경과와 함께 자연적 원인으로 보다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생물로 진화하여왔다는 개념이 과학적체계를 갖추고서 새로운 사조로 나타나게 되었다. 생물에 대한 이러한 진화의 개념이야말로 현대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관이나 인간관에도 커다란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사상상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근대 생물학의 전환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생물학에 있어서 갈릴레이, 뉴톤 그리고 화학에서 라봐제, 달톤적인 존재를 생물학에서 누구로 하느냐 할 때,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다윈과 멘델을 드는데 이론이 없다. 흔히 ‘생물학의 혁명’ 이라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대를 ‘세포설의 확립(1839년)’ 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판(1859년)’ 을 거쳐 멘델의 ‘유전遺傳법칙의 발견(1865년)’ 에 이르는 20여 년 간으로 잡으면, 또한 생명에 관한 전 근대적인 신비사상을 제거하고 물리화학적인 물질계로써의 생물을 다루는 근대적인 과학으로써의 생물학이 이 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물리학이 17세기에, 그리고 화학이 18세기 후반에 경과한 대 전환이 생물학에 있어서는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생물의 진화사상을 표명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다. 그것은 ‘창조’ 라는 개념에 대한, 그리고 생물의 종의 불변성이라는 독단에 대한 반발로 생겨진 것이다. 디드로(1713 - 1784년), 루소(1712 - 1778년), 카바니스(1757 - 1808년) 등의 진화사상을 피력한 사람들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생물진화론을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표한 첫 번째 생물학자는 프랑스의 라마르크(1744 - 1829년)이었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지질학상의 고찰로부터 생긴 것이라고도 하며, 무척추동물의 연구가 그 발견의 기초를 제공하였다고도 생각된다. 라카르크는 생물 진화의 주요인으로써, 전진적前進的발달(Progressive development)을 들고 있으며, 실제의 진화과정은 환경조건의 직접적인 영향이나 환경조건의 변화에 따른 요구나 습성의 변화에 의하여 규정되며, 환경에 적응한 다양한 형태나 체제를 낳게 하였다. 이 경우에 기관器官의 사용, 불 사용은 어느 기관을 더욱 발달시키고 다른 기관을 퇴화退化, 소실消失시켰다. 이렇게 하여 생긴 획득형질獲得形質은 생식生殖을 통하여 유전遺傳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라마르크의 생물진화사상은 종의 불변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당대의 저명한 생물학자 큐비에(1769 - 1832년)와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그 세력에 압도되어 일반에게 확인되지 않았으며, 라마르크의 말년末年은 노쇠老衰와 빈곤의 계속으로 불행하였다.

풍부한 실증적사실에 의거하여 진화론을 전개하고 결국에는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상을 일반에게 인식시키게 한 것은 영국의 다윈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승인시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은 다윈의 진화론 그 자체가 충분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서 사회의 구조나 일반의 의식이 변하였으며, 종교와 모순되는 학설일지라도 그것이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받아들이려는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윈이 진화사상을 갖게 된 것은 군함軍艦 비글호를 타고 5년 간의 세계 각지를 항해하고 있을 때였다. 다윈은 이 항해 동안에 자연 관찰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으며, 종의 창조설이나 불변설에 의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항해 중에 읽은 라이엘(1797 – 1875년)의 ‘지질학원리’ 가 그의 진화사상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라이엘은 저서에서 ‘지질학이란 자연계에서 유기물 및 무기물이 계속적으로 변화하여 온 것을 연구하는 과학’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초 자연적인 힘을 생각하지 않고서라도 우리들 눈앞에 작용하고 있는, 완만한 자연의 힘이 오랫동안 작용한다면 지구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라이엘은 주장하였다.

다윈은 5년 간의 오랜 항해로부터 귀국하여 항해 중에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사실을 비롯하여 진화를 실증할만한 사실의 수집에 노력하였다. 특히 사육되고 있는 동식물이 나타내는 변이變異에 대해서는 극히 풍부한 실례가 수집되었다. 그리고 사육 동식물 중에는 원종과는 현저하게 다른 형질을 나타내는 품질도 있으며, 이들 품종이 도태, 즉 인위적인 도태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말사스의 인구론을 읽고서 자연도태의 이론의 암시를 얻었다고 한다. 한데 동식물의 종은 어느 것이든 간에 다산多産이며, 생존 가능한 개체수 보다는 훨씬 많은 생식生殖을 한다. 그래서 개체 간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일어난다. 이 때 같은 어버이로부터 낳은 개체 간에도 조금씩 변이가 보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하여 유리한, 다시 말하면 환경조건에 가장 잘 적응한 변이를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는다. 이러한 자연의 선택이 몇 대에 걸쳐 계속 된다면 새로운 종이 형성된다. 이것이 다윈의 생각이며, 다윈의 자연도태에 의한 진화론의 골자骨子이다.

윌레스는 1854년부터 1862년에 이르기까지 말레이제도諸島를 여행하였으며, 1858년에는 몰러카즈도島에 있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발병했을 때, 말사스의 인구론을 자연계에 적용시키면 절멸종絶滅種에 대치代置하여 새로운 종이 출현하는 과정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열이 내리자 즉시 이 생각을 논문으로 작성하였다. 이 논문이 다윈에게 보내진 것이 6월 18일이었다. 이리하여 다윈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주선으로 윌레스의 논문과 다윈의 논문의 요약이 동시에 린네학회에서 7월 1일에 발표된 것이다.

1831년부터 1836년까지 만 5년 간에 걸친 영국군함 비글호의 세계 대 주항舟航 으로부터 귀국한 1837년에 종의 기원에 관한 최초의 노트를 작성하였다. 그 때는 남미南美의 화석化石 및 가라파고스군도群島에서 본 섬마다 다른 종의 분포상태가 관심의 중심이었다. 그 후에 농업에서 인위도태人爲淘汰의 자료를 얻었으며, 또한 말사스의 인구론을 읽고서 자연도태이론을 생각해내었던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완벽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후세의 비판을 받고 있으나, 생물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분야에 이르기까지 그가 끼친 영향은 다윈의 이름을 불후不朽로 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진화론의 증거를 굳힌 점과, 다른 하나는 진화의 요인으로써 자연도태설을 제창한 일이다. 그리고 후세의 비판은 구로 자연도태설의 가부可否에 집중되고 있으며, 진화의 증거를 굳히는 일은 이미 다윈에 의하여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하겠다.

세계에 현존하는 생물의 종류는 퍽 많으나 그것들을 분류하면 종류와 종류와의 연관이 명확해지고, 생물 전체가 계통적으로 배열되기 된다. 또한 화석연구로써 지질시대에 존재하였던 생물의 종류를 알 수 있겠으나, 이것들은 모두 비교적 간단한 체제를 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물이 출현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새로운 지층으로부터 나오는 생물은 현존하는 생물의 종류와 가장 비슷하다. 도서島嶼의 생물은 그 섬이 근접하고 있는 대륙의 생물과 가장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동식물의 발생 초기에는 성체成體와 거의 상치相馳된 형체를 나타내보이며, 일반적으로 이 초기의 형태는 가장 하등인 생물과의 유사점이 많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에 입각하여 다윈은 진화의 증거를 들고있으며, 거기에 설명된 일로써 진화의 사실은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다. 다윈은 진화가 어떠한 요인에 의하여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자연도태설’로 설명한다.

생물의 세계에 있어서는 동종同種 간의 개체 사이에 생존경쟁이 치열하며, 자연도태의 과정에서 강자 혹은 적자適者만이 살아남는다. 소유 적자생존의 개념이며, 이 적자는 같은 종류의 어느 것 보다도, 어느 점에 있어서나 뛰어난 성질의 것이며,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보다 고도의 적응성을 발휘한 것이다. 이처럼 생물은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서 보다 고도의 적응성을 구유具有하기에 이르며, 진화되어간다고 다윈은 설명한다. 요컨대 다윈의 진화론은 풍부한 실증적 사실 위에 설명되고 있으며, 시대적인 배경도 있으나 만은 생물학자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것도 다윈의 진화론이 위와 같은 성격에 기인된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생물진화의 사상은 인류가 경험한 수많은 사상상의 변혁 중에서도, 너무나 큰 변혁이었다. 생물진화의 사상은 이것과 대립되는 사상, 즉 유일한 절대자(신)의 신앙과 결부되는 관념론과의 오랜 그리고 격렬한 싸움 끝에 비로소 하나의 뚜렷한 사상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전통적인 신앙에 찬성을 느끼게 한 것은 비단, 생물 진화의 사상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탐험이나 발굴의 결과. 고고학考古學이나 인류학, 역사학 등의 발전도 인류의 선조의 생활상태를 점차 명백하게 해나갔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자연과학적인 정신의 확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의 진전은 그 때까지 모든 학문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던 철학의 지위를 크게 흔들어놓았으며, 그 후 철학에 뒤이어서 전 학문에 왕좌를 요구한 학문은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주의할 사회학자로 프랑스의 오규스트 콩트(1798 - 1857년)를 들 수 있다.

콩트는 사회학을 인간적 인식으로써 기초 지었다. 콩트의 주저는 1830 - 1842년에 출판된 ‘실증철학강의’ 전 6권으로써 그의 체계는 자연과학의 연구법과 진화사상을 기초로 하여, 사회의 과학을 자연과학과 동일하게 취급하려고 하는 것이다. 콩트에 의하면 인간은 신학神學의 단계, 형이상학의 단계, 그리고 과학의 단계 등 3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써, 제 1은 미신迷信의 시대, 제 2는 추상抽象의 시대 그리고 제 3은 실증實證의 시대라고 하였다. 이로써 사회발전의 문제가 인간관계의 인식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로 주어지게 되었다.

스펜서(1820 - 1903년)는 사회진화의 사상을 기초 짓고 유기적인 사회이론을 발전시켰다. 스펜서의 으하면 사회의 진화는 생존경쟁의 불안정에 의하여 일어나며, 적자생존을 유도誘導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원시조직의 미未 조직의 군群이 전쟁 등의 공포를 통해서 지도자에 의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제되고 조직되어, 방랑적인 다수의 소 사회집단은 안주적인 대 사회집단으로 통합되어 평상적인 안정이 확립된다. 지도자는 지배자, 왕으로써 세습화하며, 여기에 군사적국가가 성립하지만 점차로 산업적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형의 분업적 협동의 사회로 향해서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진화의 원리는 다윈의 진화론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진화의 개념은 부동의 기초 위에 놓인 것으로 생각한다.

057 곤충기昆蟲記 Souvenirs entomologiques (1879 - 1910), 파브르 Fabre, Jean Henri

생물학에서 18세기 말엽은 근세 생물학의 모든 기초를 확립한 시대라고 할 수가 있고, 또 고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생명현상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마침내 다윈, 멘델과 같은 위대한 학자들을 낳은 시대다.

다윈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널리 관찰하고 조사연구를 거쳐서 마침내 1859년에 이론을 이룩한 것이 유명한 ‘종種의 기원起源’ 이다.

그러나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당시 사회상은 그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 할 실정에 있었다. 고대로부터 생물의 종은 우주 창조 당시에 각각 창조되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른바 종種의 일정불변一定不變을 믿고있었던 시대였다. 따라서 동식물의 분류학의 창조자인 린네도 종은 부정불변한다는 기초철학에서 한 발도 더 내딛지 못 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종교계에서 진화론에 대한 반발이 컸고, 철학자들이 사상을 동요시킬 수 있을만큼 반향이 있었으나, 과학자들은 모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이를 지지하는 생물학자의 수도 적었다. 그러나 자연계의 사실에 입각하여 체계화시킨 그의 이론, 즉 진리는 무모하게 배척할 수는 없었다. 그의 진화론은 마침내 생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이 받아들여서 종은 일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이變異한다는 것으로 사상을 바뀌게 한 점에서 그는 위대한 생물학자이며 사상가였다.

다윈과 거의 때를 같이 하는 생물학자로써 획기적인 업적을 내서 과학사를 장식한 것이 바로 멘델이다. 다윈은 종은 변화하여 진화한다는 것을 제창하였으나, 멘델은 종이 변화하지 않는 면, 즉 자식들이 그 어버이를 닮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천재적인 유전학자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말의 참뜻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그는 완두콩을 실험재료로 썼고, 키가 크고 작은 것들 7가지의 대립된 형질形質을 갖춘 품종을 골라서 7년 간 교배交配실험을 한 결과 세운 이론이 유명한 ‘멘델의 유전법칙’ 이다. 이 법칙은 현대 유전학의 근간이 되는 원리다.

그의 탁월한 연구논문을 1865년에 ‘식물 잡종雜種에 관한 실험’ 이라는 논제로 발표하였다. 당시 학계에서는 그의 법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실정이었다. 다윈의 진화론보다 6년 후에 발표된 유전법칙의 진가眞價가 그대로 학계에서 매장埋葬되었을 뿐이다. 멘델은 그 법칙을 지지하는 학자를 얻지 못 하고 1884년에 이 세상을 하직下直하였다. 그러나 이 탁월한 연구가 언제까지 묻히지는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16년 후 1900년에 이르러 3인의 유전학자에 의하여 그 진가眞價를 재 발견함으로써 학계에서 그 법칙을 따르게 되었다. 1910년에는 세계의 학자들이 기금을 모아서 그의 제 2의 고향인 부른시市에 대리석 초상肖像을 세우고 그 초석礎石에는 ‘자연과학자인 신부神父 요한 그레고리 멘델 (1822 - 1884년)을 위하여 학문의 벗들에 의하여 이 초상을 세운다’ 라고 새겨서 그의 공적을 영구히 기념하고 있다. 세계의 학자들이 기금을 모아서 세운 기념비는 오직 멘델뿐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로써 축척되어가는 것이나, 다윈, 멘델 같은 탁월한 학설이나 중요한 법칙의 발견이 주기적週期的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과학사가 증명한다.

이 시대의 프랑스 파브르 (1780 – 1865년) 는 듀프르의 곤충연구의 영향을 받았는데, 듀프르는 1831 - 1834년에 걸쳐 곤충의 해부생리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처음부터 곤충해부학解剖學을 창시하려는 목적으로 그 연구를 수행하였으나, 발생학과 조직학의 연구 부족으로 인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하였으나 파브르의 연구욕을 북돋았고 진로와 그 방법 등에 대하여도 많은 힘이 되었다.

파브르는 곤충의 본능과 행동, 습성에 대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에 그 천재적인 소질을 십분 발휘하였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과 정밀한 실험을 통하여 많은 의문을 해결하였고, 미 해결문제는 오랜 세월을 걸려서도 해결하고야 만다는 연구태도를 보여 과학하는 사람들의 좋은 귀감龜鑑이 되었다. 고대로부터 18세기 중엽까지는 생물학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가 왕성하여 단편적인 지식이 급격하게 증가되어 근대생물학의 기초가 닦아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파브르는 1823년 12월 20일 상레온의 가난한 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9세가 된 1842년에 아비뇽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공립중학교 과학교사로 임명되었다. 1843 - 1844년에 걸쳐서 수학과 물리학의 학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844년 10월에 마리비아 할과 결혼하였다.

1849년 1월에는 코르시카의 아야치오 중학교 물리교사로 임명되었다. 1851년에는 식물학자 모캰 탕든 교사에게 식물학을 사사私事한 바 있고, 1859년 그가 32세에 전에 근무한 아비뇽 중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년봉 1만 6천 프랑을 받아 부모와 7명의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으나, 집안은 평화로웠고, 내조內助의 공도 커 곤충연구의 의욕이 높았다. 1856년에 이르러 ‘자연과학연보’ 에 ‘혹나나니벌에 관한 논문’ 을 발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프랑스 학사원에서 실험생리상을 받았다. 1858년부터 다윈과 친교親交를 맺고 연구의견을 서신으로 교환하였으므로 다윈은 ‘종의 기원’ 에서 파브르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곤충의 본능과 습성에 관하여서는 다윈이 파브르의 의견에 따랐다. 파브르의 곤충기에서는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것은 지금은 웨스트민스터에서 뉴톤의 맞은 편에서 영원히 잠들고 있는 유명한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에게 편지로 보내려던 것이다. … 내가 쓴 곤충기 제 1권을 읽었을 때, 땡벌이 먼 곳까지 날아가서 다시 제 집을 찾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에 다윈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남철指南鐵 (자석磁石) 구실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벌을 인도하고 있는가? 다윈은 비둘기로 실험해보려고 하였으나 다른 일로 바빠서 못 하였다는 사연을 편지로 써 보내왔다. 나는 이 실험을 내가 기르고 있는 벌을 가지고 할 수가 있었다. ….’ 라고 상세한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벌의 귀소성歸巢性에 대하여 밝혔다.

1878년에는 지금까지 20년 간의 교육자생활을 청산하고 오랑쥬로 이사하여 곤충연구에 전념하였다. 파브르의 연구열과 끈기는 영국 친구 스투어트 밀을 감동시켜 3천 프랑을 연구비로 받았다.

1879년에는 현재까지 이루어진 곤충의 본능과 습성을 정리하여 곤충기 제 1권을 간행하였다. 그는 곤충의 지혜와 우둔愚鈍에 관하여서 철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술가로써 감상하며, 시인과 같이 느꼈으며 표현력은 문학가도 못 따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곤충기는 연구서가 아니라 문학으로 어른으로부터 아이들까지 동화童話처럼 읽힌다. 이로 인하여 곤충의 본능과 습성이 널리 일반에게 알려졌고, 또 학계에서는 이 분야에 새로운 국면局面을 개척한 바가 있다. 제 10권까지 완성하는 데에 29년이 걸렸는데 바로 1907년이다.

1889년에는 프랑스의 프티 드 드모아 상賞으로 1천 프랑을 받고, 1907년에는 쥬네르 상으로 연금 3천 프랑을 받는 영예를 가졌다.

1910년 4월 10일은 국가에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파브르의 날’ 이라는 기념일을 제정하였다. 이 때 파브르는 77세의 백발白髮이었으나 얼마나 보람있었으랴. 생물학자의 업적을 평가하여 국가적인 기념일까지 만든 사실은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1015년 12월 11일 92세를 일기一期로 오랑주에서 별세別世하였다. 1921년 11월 프랑스 국회는 파브르가 살았던 집터를 사적史蹟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한편, 박물관을 건립하여 그의 찬란한 업적을 영구히 남기기로 결의하였다.

‘수술 잘 하는 사냥꾼 벌’ 에서 왕노래기벌이 새끼벌의 먹이를 얻을 때 쓰는 마취법痲醉法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관찰을 하였고, 그 방법을 이용하여 여러 곤충을 마취시키는 실험을 하여 마침내 그 원리를 알아냈다. 나나니벌에서는 먹이를 얻기 위해 격투하는 광경을 소상히 그려냈고, ‘왕노래기벌과 왜코벌의 실험’ 에서는 먹이를 얻기 위하여 활동하는 거리와 제 집을 찾아올 수 있는 능력을 밝혀냈다. 또 ‘벌레의 지혜’ 에서는 땅말벌이 먹이를 제 집으로 반입하는 도중에 불의不意의 악한惡漢 버마제비 (사마귀) 를 문앞에서 만나 그를 피하는 모습과, 그가 새로이 만들어준 환경에 대한 땅말벌의 행동에 관한 실험을 하여 마침내 곤충의 본능의 대한 한계점을 밝혀냈다. 곤충기는 곤충의 본능과 습성을 관찰과 실험에 의해 기술한 것이므로 이 방면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연구 지침서의 성격을 갖추었고, 일반에게는 곤충의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교양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곤충의 세계에 있어서도 책임을 완수하는 의무와 양심을 엿볼 수 있고, 일을 하는 존엄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간파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인생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배가 검은 독거미’ 에서는 거미의 독성毒性, 거미와 땅벌의 생존전투를 관찰하였고, ‘거미사냥의 선수選手’ 에서는 대모벌이 거미를 잡는 모습과 먹이를 갈무리하는 방법, 왕거미의 격투를 관찰하였다. ‘놀고 먹는 벌레’에서는 개미벌, 청벌, 침파리 등을 관찰하고, 놀고먹는 벌레와 진화에 대한 그의 견해도 천명闡明하였다.

‘옛날에 여신처럼 모셨던 쇠똥구리’ 에서는 그의 전원田園생활 중에서 가장 소득이라면 쇠똥구리에 관한 습성을 알게 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쇠똥, 말똥을 굴려서 경단을 만드는 모습과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소상히 관찰하였고, 그는 온갖 지혜를 다 모아 말똥으로 유사품類似品 경단을 만들어놓고, 말똥구리의 경단과 자기의 경단을 5 - 6세의 마을 아이들에게 심사를 맡겼는데, 자기 작품이 낙선을 했다는 고백에서는 사람의 손재주가 곤충의 본능에 미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매미의 생활’‘딱부리 먼지벌레의 재능’, 의사擬死, 최면술催眠術, 자구自救행위들, 더욱 ‘곤충계의 청소부장관’ 이라는 항목에서는 청소부장관으로 송장벌레를 임명했고, ‘파리’ 에서는 금파리, 쉬리, 검정쉬파리에 대한 습성과 발생에 관하여 상세하고 치밀한 보고서를 썼다.

파브르는 자연시인自然詩人이요, 철학자이며, 곤충학자이며,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일반인의 스승이며, 천재적인 문필가이다. 그러므로 그 곤충기는 일반의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학자까지도 도외시했던 곤충의 본능과 습성을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風景畵 같이 그려냈으므로, 독자들로 하여금 끝까지 독파하는 곤충의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곤충학자는 곤충기를 ‘인류문화의 위대한 유산이요, 자연과학의 금자탑이며, 대 자연의 신비와 진리를 천명闡明한 시집’ 이라고 하였다. (12. 21 윤색, 추고 완)

058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 Das Relativitätsprinzip (1913),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아이슈타인의 생애는 잘 알려진 것처럼 유태인을 양친으로 1879년 도이치 남부 뮨헨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양친은 프랑스에 가까운 슈베벤 사 람으로 종교적이며 철학적 사색을 좋아하였고 예술을 즐겼다. 그는 15세 때 부모를 따라 이탈리아로 이주移住하였는데 이 때 도이치의 군국주의軍國主義에 혐오嫌惡하여 도이치 시민권을 포기했다. 그 후 스위스 츄리히공과대학을 마치고 베른의 특허국에서 근무하면서 ‘특수상대성이론’ 그리고 그가 노벨상을 받은 ‘광전光電효과에 관한 논문’ 을 발표하였다. 1911년부터는 현 막스 프랑크 연구소 즉 카이져 빌헬름 연구소에서 자유스러운 연구활동을 하였으나, 히틀러가 주도하는 나치스당이 정권을 잡고 유태인을 추방하자, 1933년부터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망명하여 195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통일장統一場이론에 관한 연구’ 에 심혈을 기우렸다.

그는 평화주의자이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의 제조를 건의한 것은 유명한 일이지만 만년晩年에 그가 쓴 수기手記에는 ‘나는 청년시절 뼈아픈 고독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든 후에는 이 고독이 즐거웠다,’ 라고 썼다.

현대과학을 낳게 한 자연관의 역사를 말한다면 멀리 그리스시대의 탈레스(B.C 600년), 엠페토클레스 (B.C 469 – 435년) 등이 주장한 원소설元素說의 물질관을 설명해야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B.C 384 – 322년) 의 생체론적生體論的인 자연관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자연의 모습을 설명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체론에 의하면 생명이 없는 돌, 공기, 불과 같은 무기물질의 움직임은 마치 동물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듯이 그들도 각자 본능이 있어서 그들의 본능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황새가 높은 나무꼭대기에 집을 짓는 본능과 같이 불은 하늘로 올라가려는 본능이 있으며, 또 생쥐는 땅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듯이 무게를 갖는 모든 물체는 지상地上으로 떨어지려는 본능을 가지며, 무거울수록 이 본능은 커서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지상으로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체론적인 자연관을 뒤집어엎은 사람은 갈릴레오 (1564 – 1642년) 이다. 근 2천 년 동안 생체론적인 자연관은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하여준 댓가로 수정될 수도 없고, 반론을 펼 수도 없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었으나,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斜塔에서 실험한 낙체落體실험에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똑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실증되자 자연관에 대한 일대 변환變換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뉴톤 (1642 – 1727년) 은 그의 역학力學원리를 토대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 뒤이어 기계론적機械論的인 자연관을 세웠다. 그의 기계론에 의하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운동은 겉으로 보기에 복잡하지만 복잡하게 만든 방적紡績기계나 인쇄기계가 간단한 기계의 반복되는 조합組合으로 이루어지듯이 복잡한 운동도 실상은 직선운동, 원운동, 왕복운동과 같은 간단한 운동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기계론적 자연관은 9세기 말에 완성된 고전물리학의 기본을 이룬 철학으로써 프랑스의 수학자며 물리학자인 라그란제 (1736 – 1813년) 는 뉴톤을 ‘그는 가장 훌륭한 천재이지만 꼭 한 번 밖에는 있을 수 없는 자연의 질서체계의 확립이란 위대한 업적을 만든 행운아이다’ 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1879 – 1955년) 이 ‘상대성원리’ 에 입각하여 수리론적인 자연관을 세우고 또 이 수리론적 자연관이 현대과학의 자연관으로 됨에 따라 뉴톤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상대성원리의 물리학적 따라서 철학적 의의를 설명한다.

물리학은 자연현상의 법칙을 찾아내고 이를 형식화 하는 학문이다. 이 법칙과 수식화數式化된 형식은 현상을 관측하는 사람의 운동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법칙이 보편타당성을 가지려면 관측자의 운동상태에는 관계없이 수식화된 형식이 같은 모양을 가져야 한다. 상대성원리는 자연법칙의 수식화된 형식이 관측자의 운동상태에는 관계하지 않고 같은 모양을 가지도록 관측자와 관측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으로써 자연의 본질을 밝히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포괄적인 전범典範을 이루는 것이다.

상대성원리는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있었다. 갈릴레오 또는 뉴톤의 상대성원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써 등속도等速度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座標系 (기준계基準系) 에서 표현되는 역학법칙은 똑같은 모양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뉴톤의 상대성원리는 역학법칙에만 국한될 뿐 물리학 전반에 적용되지 못 하는 결함이 있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뉴톤의 상대성원리를 화장시켜 역학뿐만 아니라 전자기학電磁氣學 따라서 물리학 전반에 성립하는 상대성원리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해설하고 설명한 전문서적은 와일 (Wyle), 에딩톤 (Edington), 파울리 (Pauli), 베르그만 (Bergmann) 등에 의하여 저술된 것이 유명하며, 이밖에도 많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자신이 저술한 상대성원리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 밖에 없으며 이를 한 데 묶어 편집한 책이 몇 권 나와있다. 그 중에도 1923년 도이치의 유명한 물리학자 좀머펠트 (Sommerfeld)가 편한 상대성원리(The Principle of relativity)가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인슈타인의 논문뿐만 아니라 상대성원리가 아이슈타인에 의하여 완성되기에 앞서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상대성원리를 착상케 하고 또 도식화에 도움을 준 로렌츠 (H. A. Lorentz) 와 민코프스키 (H. Minkowski) 의 논문 및 일반상대성원리를 보충한 와일 (H. Wyle) 의 논문도 실려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논문은 이 책 전체의 1/ 4 밖에 안 되며, 200여 면에 달하는 이 책의 거의 전부가 1905년부터 1919년까지 발표된 상대성원리에 관한 아이슈타인의 논문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 책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관한 원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Dover 출판사 판 ‘Einstein and Others Priciple of Relativity' 는 구득할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논문은 1895년에 로렌츠가 발표한 ‘마이켈손의 간섭干涉실험’ 으로 1887년 마이켈손과 모레아가 에테르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행한 유명한 간섭실험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다음의 논문도 1904년 로렌츠가 발표한 ‘빛 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계系에서의 전자기電磁氣현상’ 이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그의 특수상대성원리를 발표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 것으로 유명한 ‘로렌츠 변환變換’ 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세 번째 실린 논문이 1905년 아인슈타인이 Annalen der Physik 71에 발표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 으로써 특수상대성원리의 원본을 이루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고대물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시성, 광속도불변성, 시간과 길이의 수축 및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성 등이 설명되어있다. 네 번째 실린 논문도 1903년 같은 잡지에 발표한 짤막한 ‘물체의 관성과 에너지와의 관계’이다. 다섯 번째 논문은 1908년 민코프스키가 발표한 ‘공간과 시간’ 이며, 이 뒤에 편저 좀머펠트의 특수상대론에 관한 주석이 실려있다. 여기서 잠시 아인슈타인과 민코프스키 사이의 관계를 말하겠다.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이 츄리히 공과대학시절의 수학선생으로써 아인슈타인을 수학자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아이슈타인이 물리학에 더 관심을 가지고 수학에 등한하였으므로 그는 아이슈타인을 ‘게으름뱅이이며 수학과 담을 싼 사람’ 이라고 혹평酷評하였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뒷받침한 수학이 민코프스키가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의 4차원 공간에 관한 수학임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아인슈타인이 1911년부터 발전시킨 일반상대성에 관한 논문으로 되어있는데 그 제목은

. 빛의 전파에 대한 중력장重力場의 영향 (1911년)

.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 (1916년)

. 하밀토원리와 일반상대성이론 (1916년)

.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우주론적 고찰 (1917년)

. 소립자素粒子의 구조에 중력장은 중요한 구실을 하는가? 등이며, 마지막으로 와일의 논문 ‘중력重力과 전자기電磁氣 (1918년)’ 가 실려있다. 이상의 논문 중에서 ‘일빈상대성이론의 기초’ 는 미분기하微分幾何를 이용하여 일반상대성이론을 형식화시킨 과정 및 중력장의 이론이 전개되어 있고, 또 빛이 중력장에 의하여 휘어지는 현상 및 행성궤도의 근일점近日點 이동 등이 설명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성원리라는 책자도 그가 손수 상대성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상대성원리를 학계에 알리기 위하여 주로 Annalen der pgysik에 발표한 논문을 한데 묶어서 책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저서로 의외로 알려진 것에는 아인슈타인의 ‘나의 인생관’ 과 인펠트와 공저 ‘물리학이 발달되어온 과정’ 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나의 인생관도 아이슈타인 자신이 나의 인생관이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다. 그가 상대성원리론으로 일약 유명해지고 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제까지의 자연관을 뒤엎고 새로운 자연관을 만든 점에서 , 물리학계뿐만 아니라 철학계, 종교계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 이 결과 철학자들이 모인 토론회, 종교가들이 주관하는 세미나혹은 이스라엘민족의 집회에 초대되어 강연을 하게 되고, 신문, 월간지에 기고하고, 의견을 달리하든가 또는 공통의 흥미를 갖는 문제에 대하여는 서간書簡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이러한 강연문 또는 논설문의 원고, 서간문 중 철학, 종교, 민족, 평화문제 등에 대한 것만을 추려서 편집한 것이 ‘나의 인생관’ 이다. 이 책은 해방 직후 현재 미국에 가있는 김영록박사에 의하여 일부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득하가 어렵다.

아인슈타인의 저서는 전술한 인펠트와 공저 ‘물리학이 발달되어온 과정’이 있다. 이 책은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원에 와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연구하던 인펠트와 물리학의 기본적문제와 그 발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에 관하여 토의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이 책의 처음 부분은 뉴톤의 역학에서부터 전자기, 빛 등에 이르기까지 고전물리학이 발전되어온 기본적인 생각과 이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특수상대성이론 및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오기까지의 로렌츠, 핏제럴드, 마이켈손, 모레이, 민코프스키 등의 생각이 알기 쉽게 또 자상하게 쓰여있다.

그리고 이 책의 후반부는 양자론量子論이 발전되어온 과정 및 빛의 파동적波動的 성격과 입자적粒子的 성격에 관한 2원적 행동에 관한 빛의 본성이 다루어져 있으며, 특히 양자론을 정식화시킨 철학적 배경에 대하여 닐 보아와의 논쟁의 출발점, 경과 및 결말 등이 기술되어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다룬 내용은 미시적 현상에 대한 물리법칙의 정식화를 중력장 및 전자기장을 표현하는 방정식의 확장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 즉 통일장이론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기술되어있다.

059 조건반사條件反射 Conditioned Reflexes (1924), 파블로프 Ivan Petrovich Pavlov

물리학에서 ‘反射’ 라는 말은 광파光波나 음파音波가 거울이나 어떤 계면界面에 부딛쳤을 때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입사入射한 쪽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뜻함은 잘 알려져있다. 그러나 생리학에서 쓰이는 반사라는 말은 생물의 단순한 반응을 뜻하는 것이 아닌 다음의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을 두고 말한다.

1. 받아들인 외계外界의 변화가 신경섬유神經纖維에 의하여 구심성求心性으로 전도傳導되고

2. 이 신경자극은 뇌, 척추의 어떤 단면에 가서 다시 되돌려지고

3. 다른 신경섬유에 의해서 어떤 효과기效果器에 반응을 나타내는 현상이 반사다. 따라서 반사에는 수용체와 구심성신경, 반사중추 및 원심성신경과 효과기의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고, 이 중 하나만 없어도 반사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뜨거운 물건에 손이 닿으면 순간적으로 곤을 뗀다 (효과기인 손의 근육이 운동을 하였음) 든가, 혀나 구강口腔의 자극에 의해 침이 흐른다 (효과기인 타액선이 자극하였음) 든가, 광선을 눈에 쬐면 축동縮瞳한다 (효과기인 동공瞳孔에 평활근平滑筋의 수축收縮이 있었음) 든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는 반사다. 위의 예에서 반사중추는 처음 것은 척수脊髓 (상부), 다음 것은 연수延髓 (중부), 마지막 것은 중뇌中腦 (중부)인데, 반사중추까지 도달한 자극은 원심성으로 반사를 일으키게 하고서는 계속 상부로 전도傳導되어 대뇌피질大腦皮質에 이르러서는 열온각熱溫覺, 미각, 광각이 되지만, 그 동안이 이미 반사는 의식, 판단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반사들은 파블로프가 말하는 생래의 무조건반사다.

그러면 조건반사란 무엇인가? 조건반사도 태고적부터 생물이 갖고있는 특색으로써 생물계에 널리 작용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처음 발견하고 그 의의를 캐내고 발전시킨 것은 제정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 (1849 - 1936년)다. 그는 원래 소화消化생리학자로써 타액선唾液腺의 연구를 했는데 연구를 하기 위하여 개 (견犬) 의 이하선耳下腺에 수술을 하고 뺨 밖으로 타액이 흐르도록 한 개를 사육하고 있었던 어느 날 개의 먹이를 나르던 조수의 발소리가 나자 개의 타액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시험적으로 개의 밥을 줄 때마다 메트로놈 (Metronome, 박절기拍節器) 를 울려보았더니 몇 번 반복한 결과 개밥을 주지 않고 메트로놈만 울려도 개에게서 타액이 흐르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밥을 주지 않고 메트로놈만 울리는 것이 계속되면 개는 다시 타액을 분비하지 않게 된다. 이와같이 일시적으로 획득한 반사를 파블로프는 생래의 무조건반사와 대비하여 ‘조건반사’ 라고 불렀다. 이 때에 개의 타액이 흐르게 하는 자극 - 개밥을 무조건자극이라하며, 무조건자극에 겹쳐서 주는 자극 (메트로놈 소리) 을 조건자극이라고 한다. 이 때에 주의할 것은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에 선행先行시켜야 한다는 점이며, 조건자극이 무조건자극에 뒤지게 하면 개는 조건자극만으로는 타액을 흘리지 않는다. 조건반사의 예는 파블로프가 파블로프가 발견한 위의 사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생래生來의 무조건반사에다 생래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조건을 결합시켜서 새로운 조건반사를 형성할 수가 있다. 즉 조건자극은 메트로놈의 소리가 아닌 키타의 소리 (청각), 정靜 혹은 동적인 각종 형상이나 빛깔 (시각), 열, 촉觸, 통성痛性피부자극 (피부 감각) 이나 근육감각 등 동물이 수용할 수 있는 각종 자극이 될 수 있다. 무조건자극으로써도 타액반사 외에 위액 분비分泌, 췌장액 분비, 광반사, 쓸개반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두 서너 개의 예를 더 들어보자. 개의 발에 통성痛性자극을 주는 동안 여러 형태의 소리, 예컨대 부자를 울려주는 동작을 반복하면 운동반응(즉 아픈 자극을 받은 발을 움추린다든가 그 발쪽으로 머리를 돌린다든가 하는)을 부저소리만으로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조건방어반사다. 위 예에서 통성자극은 무조건자극이었으나, 같은 통성자극은 타액분비 반사에서 조건자극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즉 통성자극이 크게 발을 아프게 하지 않을 때는 다리를 쳐드는 운동반사 대신에 타액분비만 일어난다. 이 때 타액분비반사는 방어반사 보다 강력한 때문이다. 파블로프는 여러 마리의 개가 서로 밥을 갖고 다툴 때는 방어반사 보다 타액반사가 훨씬 더 상위에 있음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발에 가해진 아픔이 강력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뒤 따를 때는 다리를 웅크리는 방어반응이 우위에 서게 된다. 또 다른 조건반사의 예는 개에게 모르핀주사를 할 때 볼 수 있다. 개에 모르핀주사를 하면 구토, 타액 분비, 수면睡眠이 순차적으로 초래되는데, 모르핀주사를 몇 차례 계속하고나면 주사기만 봐도 또는 사람만 와도 구토, 타액 분비, 수면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모르핀 아닌 약물 (예컨대 식염수食鹽水) 를 주사하면 마치 모르핀 그 자체를 주사했을 때와 구별되지 않는 일련의 반응을 보인다.

조건반사는 시간성을 띈다. 즉 개 발에 실험자가 손을 얹었다 떼고 1분 후에 구강에다 산액酸液을 넣어주면 타액분비가 일어난다. 이 조작을 몇 번 되풀이 하고, 다시 개 발에 실험자가 손을 얹었다가 떼면 산액을 구강에 넣지 않더라도 1분 후 타액이 분비된다. 똑같은 현상이지만 개에 30분 간격으로 밥을 주는 조작을 몇 차례 되풀이하여 조건반사를 형성시키고나면 30분 마다 밥을 주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 개의 소화액분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는 시간적 간격 그 자체 (손을 얹은 후 1분 간 또는 밥을 준 후의 30분 간) 가 조건자극의 성질을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건반사는 개뿐만 아니라 기타 동물 및 인간에서 모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일상의 경험이 늘고 연상이 축적됨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조건반사를 획득하게 된다. 서커스에서 동물이 묘기를 부리는 것도 알고보면 그 이면에 피눈물나는 동물과의 반복과정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묘기를 감상할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어린이의 교육에도 많은 조건반사의 심리적 응용이 끼어든다. 파블로프는 수면현상도 근본적으로 는 조건반사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조건반사의 근본적, 생리학적 근거에는 신경계통 내에서의 새로운 기능적 연결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즉 파블로프의 실험 자체를 예로 든다면 메트로놈 소리에 맞추어 타액분비가 일어나는 것은 청각로와 타액분비를 다루는 자율신경중추 간에 새로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대뇌기능상의 연락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대뇌피질을 제거하면 대부분의 조건반사는 형성되지 않든가 또는 약화되는 것을 보면 조건반사 형성의 생리적 근거라는 기능상의 연결은 대뇌피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반사의 3요소가 불가결인 것처럼 조건반사에서도 반사중추가 없으면 반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건반사중추로써의 대뇌피질의 구실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다. 조건자극이 복잡한 감각자극일 때, 대뇌피질의 감각영역의 존재는 조건반사중추로써 필요하지만 , 간단한 감각상의 자극으로 이루어지는 무차별 조건반사는 대뇌피질 없이도 형성 될 수 있다. 현재로는 조건반사 형성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대뇌신경 조직 내의 새로운 연락성이 대뇌의 피질하구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 같다. 파블로프가 조건반사를 발견함으로써 의학계에 던진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실험의학에 임하는 태도를 확립한 점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했던 그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성聖 피터즈버그대학 의학부에서 의학을 전공, 1883년 의학사가 되고, 이어 도이치에 유학, 당대의 생리학 석학碩學 카알 F. C. W 루드비히 및 루돌프 하이드하임 에게 사사, 귀국 후 1891년 사상 최초로 실험의학연구소를 설립함과 동시에 생리학연구실에 외과부를 신설, 본격적으로 실험의학을 개척하였다. 그의 실험의학에 임하는 태도는 조건반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가 취했던 바와 같이 동물의 반응을 타액분비량 측정이라는 객관적 척도로 평가 분석하고, 주관 및 연역적태도를 배척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타액분비량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하여 특수한 수술을 하였고, 특수장치도 고안하였다. 현대에도 체벽體壁에 胃주머니를 만드는, 소위 피블로프대袋 (Pavlov ponch) 는 실험의학에서 이용된다. 1904년 그는 노벨상을 받았지만, 이것은 조건반사에 대한 연구에서가 아니라 그의 소화생리에 관한 연구업적에 주어진 것이다. 조건반사에 대한 그의 연구는 1902년부터 1936년 그가 서거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최초로 발표한 것은 1924년이었다. 의학계에 끼친 또 한 가지 큰 영향은 대뇌생리학의 개척이다. 조건반사의 기본적생리는 이미 위에서 말하였거니와 그의 연구 및 그의 연구를 토대로 한 그 후 및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대뇌생리학의 연구는 뇌의 신비가 밝혀질 때까지 파블로프 그의 이름과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만년에 그는 조건반사를 정신병치료에 이용하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발견한 조건반사와 관련하여 그가 파생시킨 몇 개의 대뇌생리학상의 술어述語를 보자.

. 저지 (Inhibition) - 외인적外因的 및 내인적 저지로 나눈다. 외인적저지는 형성된 조건반사가 잡음, 이상한 냄새, 광선 혹은 눈에 익히지 않은 새로운 물상物象으로 저해沮害당함을 말한다. 파블로프는 조건반사를 저해하는 이러한 요인을 탐색探索반사 (Inbestigatory R.) 라 부르고 또 내인적저지를 소실消失 (Extinction) 및 조건저지 (Conditionde Inhibition), 지연遲延저지 (Inhibition of delay) 및 분화分化저지 (Differential Inhibition) 로 나눈다. 소실은 조건반사를 형성하고 나서 무조건자극을 띠고 조건자극만을 가할 때 형성된 조건반사가 차차 소실되는 것을 말한다. 조건저지는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메트로놈의 소리와 식사의 반복 투여로 조건반사를 형성하고 나서 메트로놈과 새로운 조건자극, 예컨대 부저소리를 함께 울리고서 밥은 안 주는 조작을 반복하면 메트로놈소리로 타액분비가 있으나 메트로놈소리와 부저소리를 함께 울리면 타액분비가 안 된다. 부저소리는 이 때 조건저지물이 된다. 지연저지는 타액분비 조건반사 형성에 있어, 조건자극을 잠시 (예컨대 1 – 5초) 주고 무조건자극 (밥) 을 주면 타액분비는 조건자극을 주기 시작하자 곧 나타난다. (즉 타액분비까지의 잠재시간이 짧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반사를 형성시키고 나서 조건자극을 길게 하면 타액분비까지의 잠재시간은 차차 길어진다 (지연반사).

. 대뇌의 사리事理분석 및 합성능合成能 - 주위 환경이 생체에 끼치는 각종 자극은 생체로써 볼 때 대부분 무관한 것들이지만 일부는 해該 생체의 존재에 이롭거나 위해를 주는 자극에 대하여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생물학적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전술한 타액분비 및 방어번사에서 나타난 반응은 대뇌의 이와같은 분석 및 합성능의 직용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 범화汎化, 분화分化 및 계화系化 - 예컨대 800 CPS (초당 진동수) 메트로놈소리에 조건반사를 형성시켜 놓았을 때 600 또는 1000 CPS 의 메트로놈소리로도 조건반사는 유지된다. 다만 800 CPS에서 상 ‧ 하로 떨어지는 메트로놈소리에는 조건반사 반응이 약화될 뿐이다. 이것이 범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트로놈소리 800 CPS에는 밥을 따르게 하고, 메트로놈소리 600이나 1000 CPS에는 밥이 따르지 않게 몇 차례 반복하면 전저의 경우에만 타액분비가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없다. 이것이 분화다. 여러 가지 조건자극을 순서지어서 조건반사를 형성시키고 난 다음 어쩌다가 조건자극의 순서가 흐트러지면 형성된 조건반사는 일시적으로 멎는다. 이것이 계화다.

기타 파블로프의 발견에 의한 조건반사와 관련하여 나온 대뇌생리학의 술어로 확연擴延, 집중集中, 유도誘導 (음성, 양성) 등이 있으며 이들 개념은 현대심리학, 정신분석, 철학, 교육학 등에 널리 이용된다.

060 양자론量子論의 물리적기초物理的基礎 Die physikalischen Prinzipien der Quantentheorie (1930),

하이젠버그 Werner Heisenberg

자연현상의 관찰로부터 원리나 법칙을 찾아내는 연구방법을, 대략 두 가지로 나누면,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물체 즉 고체, 액체, 기체 등을 연속적인 성질로 보고 논하는 소위 거시적巨視的현상에 대한 물리학이고, 또 하나의 방향은 물질을 세분하여 그 구성요소 즉 원자原子, 전자電子 등의 운동을 구명, 그로부터 물질 전체의 성질을 연역적으로 논하는 미시적微視的물리학이다. 또한 자연과학 각 분야의 본질적인 진전進展(사고방식과 법칙 등의 기초적인 개변改變 등)은 대부분 어떤 새로운 의외적인 경험사실의 발견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열복사熱輻射현상과 고전통계역학, 미켈슨의 실험 결과와 고전적 전자론과의 관계 등은 각각 이론과 실험 사의의 모순을 면치 못 하는 사실로써 드디어는 고전에 대치될 새롭고도 더욱 포괄적인 이론으로써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의 탄생을 보게되었던 것이다.

전 세기 말까지의 물리학은 대체적으로 거시적현상을 연구대상으로 하여왔는데, 전 세기 말 경에는 전자, X - 선, 방사성원소등의 발견으로, 원자물리학의 분야는 점차 물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세기 초부터는 이 분야에 실험 및 이론적연구가 본격화되어 초기양자론의 발전을 보게되었다. 즉 1900년에는 양자론의 초석을 이룬 홀랑크의 작용양자作用量子 (h) 의 발견 (h는 66,238 x 10의 - 27승乘 erg ‧ sec) 이고, 1905년에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1913년에는 보아의 원자론 등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보아는 코펜하겐 출신으로 톰슨, 루터포드 밑에서 원저모형에 관하여 연구한 후, 전자의 원圓 궤도운동에 양자가설假說을 도입하여, 가장 간단한 구조인 수소원자에서 전자의 정상상태 간의 천이遷移로써 발머계열系列의 분광학적分光學的 관계를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좀머펠트에 의하여 원자론은 전자의 타원궤도모형 (케풀러의 유성운동 유사類似) 에까지 일반화되어 더 많은 분광학적계열의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1924년에 와서는 전자를 단순한 대전입자帶電粒子로만 생각하지 않고 전자의 자전적효과로써 스핀 (Spin) 의 양까지 도입되어 이에 따르는 고유자기능률을 고려함으로써, 원자 스펙트럼의 미세구조에 관계되는 부분도 많은 해결을 보게되었다. 이 스핀의 개념은 후에 상대성양자역학(디락)의 발견으로, 전자 자신의 회전이라기보다도 상대론을 고려한 경우에 나타나는 이론의 본질적 특성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프랑크, 보아 및 좀머펠트의 이론은 이와같이 다채로운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관된 이론적 체계를 구성함에는 아직 불충분하였다. 즉 원자에서 방출되는 광의 파장은 명확히 결정할 수 있었으나, 광의 강도, 편광 등에 관한 지식을 연역하기에는 아직 무력하였다. 거기에는 자연현상의 거시적 여러 법칙과, 원자 안을 주기운동하는 전자의 작용변수를 플랑크의 작용양자 (h) 의 정수배整數倍로 규정한, 즉 양자화된 정성상태와, 그 사이의 단순한 천이遷移의 개념으로, 방출 에너지를 표시하는 양자가설이 이질적으로 병행되고있는 상황이었다. 무엇인가 과감한 대책이 요망되었다. 보아는 곧 이어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상상태 간의 천이는 고전적으로 취급되는 하나의 궤도에 대응되며, 이 대응궤도를 천이 전후의 궤도 간에 대하여 적당히 취한 평균으로써 관계지으려는 시도試圖 즉 대응원리 (Korrespondenzprinzip) 를 도입하여, 광의 강도强度, 편광偏光 및 천이에 관한 선택규칙까지도 도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아직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논리적이 못 되고, 다분히 학자들의 숙련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대응원리야말로 현상의 표면적설명을 위하여 고안된 하나의 과도적過渡的인 원리라기보다는, 그 원리가 지시하고 있는 내용 자체가 (결과적으로 보아서) 새로운 양자론적 법칙의 참된 형식을 잘 구비하고 있었으므로, 1925년 말에 하이젠버그에 의하여 행렬行列역학이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수학적체계가 완성될 때까지 내내 등대와 같은 역할로써 이론의 참된 진로를 지시해주고 있었다.

이 새로운 양자론의 창시자, 하이젠버그 박사는, 1901년 12월 5일 남 도이치 민헨에서 탄생, 뮌헨대학에서는 좀머펠트를 지도교수로 박사논문을 썼고, 그 후 괴팅겐, 코펜하겐에서는, 각각 보른 및 보아 밑에서 원자물리학을 전공, 1925년 괴팅겐에서 현재의 양자역학을 정초定礎하는 논문‘운동량과 역량의 양자론적 해석에 대하여’를 완성하였다. 1926년에는 슈뢰딩거의 파동波動역학의 창설을 보게되어, 하이젠버그의 행렬行列역학의 수학적 형식이 가지는 물리적 의미도 더욱 확실해지며, 양자역학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어 발표된 ‘불확정성 관계’ 는 양자역학에 새로운 해석을 부가했을 뿐 아니라 사상계에도 큰 파문을 던졌다. 1927년에는 라이프찌히대학 교수, 1928년에는 강强 자성에 대한 연구, 1929년에는 파울리와 같이 ‘장場의 양자론’ 을 발표, 양자역학에 새로운 전개방향을 주었다. 193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양자역학의 기초적 여러 문제와 핵물리학적 여러 분야에 끊임없이 지도적 역할을 계속하였다.

1942 - 1945년에는 베를린대학 교수, 2차대전 후에는 막스 프랑크 게젤샤프트의 핵물리학 연구소장, 주저主著는 ‘양자론의 물리학적 기초’, 1929년 봄 시카고대학에서 가진 강의내용의 저술을 들 수 있다.

원저 서문의 말대로, 이 책 간행의 취지는 ‘새로운 이론의 정당성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신앙으로 그것을 믿고 있는 상태’ 의 당시 학계 분위기를 통감하고, 양자적 기초개념이 가장 정통적으로 육성되었던 터전의 이름을 따서 ‘양자론의 코펜하겐 정신’ 의 보급에 이 책이 기여할 것을 정열적으로 원했고, ‘이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원자물리학의 발전 전반에 지침을 주었던 것이다.’ 양자론의 형성기인 이 세기부터의 약 30년 간은 비단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등의 각 분야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전환을 위하여 끊임없는 비판과 탐구로 충만된 시기다. 논리적 실증주의의 대두도 특기할만하며, 1924년 경부터 과학적 인식에 관하여 토론하던 윈의 철학자들은, 1929년에는 이른바 ‘윈 학단學團’ 의 공식적인 발족을 보게 되었다. 마흐의 영향을 받은 라이헨바흐 및 카르납의 실증주의, 기호논리학 등의 사고방식은 양자론의 새로운 이론체계 형성과정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이젠버그는 철저한 실증주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원자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도 직접 관측될 수 있는 양만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초기의 주장이었다. 이에 반하여 슈뢰딩거는 처음에 물질파波를 실제적인 것으로, 즉 고전적인 연속관連續觀을 일관하려 노력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초기에는 실증론적 경향과 실제론적 경향에 극단적으로 각가가 치우치고 있었다. 후에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성립으로, 두 개의 이론적 견해가 서로 융합되어, 양자역학의 수학적 형식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자역학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물리적 기초개념을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이점에 하이젠버그 저작의 귀중한 뜻이 있는 것이고, 한 마디로 말하여 이것은 ‘코펜하겐 정신’ 에 관한 교과서다.

이 책의 내용은, 우선 제 1장에서 광과 물질입자가 각각 가지고 있는, 파동 - 입자 2중성에 대한 실험적사실을 검토하고, 다음 제 2장에서 입자상像의 물리적 여러 개념의 비판으로 입자상에 대한 고전론적 개념의 적용 한계를 파동성의 도입으로 취급하고, 특히 하이젠버그 자신의 발견으로 된 불확정성관계가 지니고 있는, 물리적 의미를 추구하였고, 다음 제 3장에서는 역逆으로 파동상에 대한 불확정성관계를 입자상의 고려로 도출하고 있다. 제 4장에서는 양자론의 통계적 해석인데, 양자역학의 고전에 대한 가장 이색적이고도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인과율 (Kausalgesetz) 에 관계되는 수학적고찰로써, 확률의 간섭을 도식적으로 거듭 설명하고 있고, 상보성相補性 (Complementaritat) 에 대한 보아의 개념을 하나의 철학적 입장에서 음미하고 있다. 제 5장에서는 다시 여러 가지 중요한 실험 결괴의 예를들어, 이론적 해석의 예로 삼고 있다. 이같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새 이론과 경험 사실의 비교 검토 및 물리적 의미의 해명으로 시종되어 있고, 후반부에서는 양자론의 수학적 도구로 필요한 부분을 일종의 공식집 형식으로 모아서 수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하이젠버그 및 보아에 의한 양자역학의 기본성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사고思考실험이 거듭되었던 문제로써, 불확정성관계와 상보성에 관한 개념을 추려서 옮겨본다.

불확정성관계라 함은 여러 가지 물리력에 대한 동시적인 지식의 정확성의 정도를 규정지워주는 원리이다. 어떠한 상태의 전자의 운동을 관찰하는 경우, 예를들어 그 위치의 측정을 가능케하는 여하히 이상적으로 마련된 실험방법도 필연적으로 그 전자의 속도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교란攪亂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계系의 상태를 최대한도로 상세히 규정한 (양자역학적으로 축퇴縮退가 없는), 소위 순수상태 (Reiner Fall) 에 있는 대상을 측정할 경우에도 역시 결과는 어떠한 확정치를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측정과정 자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한다면, 측정대상이 측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은 어떠한 순수상태에 머물러 있겠지만, 일단 측정 조작이 가해지자, 관측자와 대상은 하나의 합성계(혼합상태)를 형성한다고 보게되며, 이 합성계 안의 여러 상태 중에서 대상이었던 부분이 일종의 교란된 상태로써 다시 관측, 분리됨으로써 실험이 끝나고, 하나의 측정값으로 확인된다.

하이젠버그는 위치 측정시에 생기는 운동량의 교란의 첫째 예로써, 현미경에 의한 전자의 위치 측정을 들고 있는데, 이 경우에서 본다면 단순히 대상 (전자) 조명용으로 사용된 광선의 파장에 의한 어떠한 위치성분成分 (x) 에 대한 광학적 분해능과 그 방향에서의 전자의 콤프턴 리코일 (Compton Ricoil) 의 양을 고려하여, x - 방향의 위치 및 운동량의 동시적인 불확정도를, △ Px ‧ △ x - h의 관계로 결론지우고 있다. 좀 더 엄밀한 방법은 임의의 좌표座標 q와 그에 대하여 공액共軛인 운동량 p에 대하여, △q ‧ p > h / 4 파이의 관계가 성립한다. (h는 플랑크의 작용양자). 이것은 측정한 수단으로 사용한 광이나 혹은 측정대상인 전자가 모두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다음은 위의 원리와 관련하여, 보아의 상보성원리에 대한 개념이다. 자연기술에 있어서의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엄밀한 법칙성을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측정조작이 현상 자체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고 관측할 수 있다는 가정 밑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원자물리학에서의 관측은,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관계가 표시하고 있듯이) 불가피한 현상의 교란을 수반함으로 이러한 가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고전물리학에 있어서는 모든 입자의 위치 (공간좌표) 및 그 외의 변수變數들이 시간의 함수函數로써 표시된다. 이와같이 시공적時空的으로 기술된 양의 각 시각에 대한 변화는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인과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한편 양자론에 있어서의 입자의 운동을 시공적으로 기술했을 때, 불확정성관계로 인하여 현상의 인과적因果的인 경과를 엄밀히 규정지을 수 없게 된다. 양자론은 형식적으로 인과적으로 표시할 수는 있으나, 이 양식은 시공적인 성격을 갖고있지 않다. 보아는 이와같은 성질을, 양자론에 있어서의 시공적인 기술記述과 인과관계가 서로 상보적이라는 말로 표현하였고, 같은 의미에서 입자상과 파동상의 표현방법은 서로 상보적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 원리는 이론 구성을 위하여 어떠한 정량적定量的인 관계를 주는 것은 아니나, 이 개념 역시 ‘코펜하겐 정신’ 이 양자론 해석을 위하여 낳은 의미있는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유물론자들은 관념론적이라고, 적대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 하이젠버그, 요르단 등의 ‘코펜하겐 정신’ 이 일관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061 일리아드 Illias와 오디세이 Odysseia, 호메로스 Homeros

호메로스라는 이름이 그 저자로 되어있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두 장편 서사시敍事詩는 다 합해서 약 28,000행行이지만, 3,000년을 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까지 큰 변화없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작품은 완전히 보존되어 내려왔지만,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그가 역사적으로 생존해 있었다는 아무 증거도 없다. 그러나 옛 그리스 사람들은 물론이고,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는 누구나, 호메로스라는 뛰어난 시인이 살았고, 그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라는 두 편의 서사시를 지은 것으로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출생지나 시대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그 이름조차 옛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두 서사시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너무나 유명한대다가 그가 태어난 곳이 밝혀지지 않고있다는 것이 여러 곳에서 그의 출생지임을 주장하는 경쟁을 일으켰고, 그 경쟁은 그의 출생지를 밝혀내는데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로 주장되는 16개 도시 중 어느 하나도 근거가 있는 곳은 없지만, 그 대부분이 소小 아시아인 것으로 미루어, 이오니아의 북쪽 항구인 스미르나와 그 서쪽 섬의 키오스 두 군데가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역사상의 실제 인물임을 가정假定한 이야기다.

호메로스의 시대도 그렇다. 옛 문헌이나 전설에서도 일치된 바가 없다. 가장 오래 거슬러올라가서, 그리스 사람들이 B. C 1159년이라고 계산하는, 트로이전쟁과 같은 시대라고 하는가 하면, B. C 686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근래 호메로스보다 앞선 문화에 관한 발견과 언어학적인 연구의 결과, 호메로스가 두 서사시의 작자임이 사실이라면, 그의 시대는 B. C 9세기 이전이리라는 것이 대세다. 이른바 호메로스의 생애 (Bioi Homerou) 라는 것도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체로 2, 3세기쯤에 나타난 것으로써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호메로스의 작품이라고 짐작되는 것 가운데서, 그 자신에 관한 얘기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전설적으로 엮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전설들은 호메로스라는 인물이나 그 경력에 관해서 아무런 독특성도 보여주지 못 하고 있다. 그는 다만 가난하고, 앞을 보지 못 하는 노인으로 시를 읊으며, 이 곳 저 곳을 유랑하는 사람들의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시대나 생애가 그렇게 근거를 잡기 어려운만큼, 그의 두 서사시에 관해서도, 그 전체가 단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작가가 오랜 세월을 두고 지어서 읊었던 것을, 호메로스라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통일해서 부르게 된 것이리라는 문제를 낳게 하였다. 이것은 이 두 장편시에 쓰이고 있는 말의 표현법과 그 실질적인 내용에서 많은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서사시이며, 서사시가 성립하는 조건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내용의 모순만 가지고서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현대의 연구에서는 오히려 이 두 작품은 작자가 각각 다르리라는 설도 나온다.

<일리아드>

‘노래하라/ 무우사의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라는 첫 행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전부 15,693행行, 24권의 서사시다. 일리아드라는 말은 소 아시아 서북쪽 미시아 땅의 도시 트로이아의 다른 이름 ‘일리온의 시’ 라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전투의 기록이 아니다. 10년에 걸친 트로이아전쟁의 10년째의 어느 하루부터 시작해서 약 50일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비장한 무인武人의 명예를 배경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 서사시 첫머리의 구절은 전 작품의 중신을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 군의 늠름하고 열정적인 젊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그것이다. 그가 어째서 격분하게 되었으며, 어떤 경과로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매우 자세하게 얘기하고 있고, 그의 성격, 감정의 표현, 그리고 그의 공적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여성에 대한 애착, 무도한 사람에 대한 분노, 참다운 우정, 수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통곡, 영원한 명예를 위한 용감한 전투 - 이런 일은 그의 정열에서 나온 것이다. 옛 그리스에서 이 시를 ‘아킬레우스의 분노’ 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폴론은 신의 제관祭官의 딸을 포로로 하고, 그 석방을 거절한 그리스군의 총지휘자 아가멤논에 대한 노여움에서 그리스군에게 전염병을 퍼뜨렸다. 그 처녀를 되돌려달라고 했던 아킬레스는 도리어 아가멤논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 트로이의 여女 사제司祭 브레세이스까지 빼앗겨 격분한 나머지, 전쟁에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제우스 신에게서, 아들이 당한 무도한 짓을 뉘우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군을 대패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에 이어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의 용사들은 수많은 전투를 거쳐, 트로이아군은 차츰 강세가 되고, 성을 뛰쳐나와서,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는 그리스군을 공격했다. 하는 수 없이 그리스군의 총 사령관 아가멤논왕은 오디우스왕 사자使者로 보내 아킬레우스에게 보상 - 보물과 아직 숫처녀로 있는 브리세이스를 되돌려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리스군은 점점 불리해지고, 트로이의 왕자인 헥토르에 의해 그리스군 진영은 초토화된다. 아킬레우스의 사촌동생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 몰래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타고 트로이아군을 치려고 하지만, 헥토르에게 죽는다. 사촌동생의 죽음을 통탄하는 아킬레우스를 위로하려고 테리스 여신은, 헥토르를 죽이면 아킬레우스 자신도 죽게 된다는 운명을 예언하지만, 아킬레우스가 단념하지 않자, 테티스는 불의 신 헤파이토스에게 파트로클로스가 잃은 갑옷 대신에 새 것을 구하려고 떠난다. 또한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화해하여 아킬레우스는 원수인 헥토르를 찾아가서 도전하는데 트로이아의 성 아래서 맞부딛친다. 도망가는 헥토르를 쫓아 아킬레우스는 토로이아 성을 세 번이나 돌아 쫓은 끝에 헥토르를 죽이고, 죽어가는 헥토르가 매장해 줄 것을 유언했으나 거절하고 시체를 전차에 매달아 그리스군 진영으로 끌고간다. 제우스는 이런 비정한 짓을 말리도록 테티스에게 명령하는 한편, 무지개의 여신을 헥토르의 아버지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에게 보내 아들의 시체를 찾아오도록 한다. 늙은 왕은 헤르메스 신에게 이끌려 어둠의 들판을 거쳐 아킬레우스를 방문하였고, 아킬레우스는 공손히 맞아들여, 아들을 죽인 사람과 해후하는 불행을 한탄한다. 왕은 헥토르의 시체를 성안으로 옮기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을 위하여 열하루 동안 휴전을 한다. 여기에서 일리아드는 끝을 맺는다.

이 시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특히 그 첫째, 아홉째, 열다섯째, 열여섯째 권에서 전개된다. 그 나머지는 본 줄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와 곁가지이고, 때와 곳에 얽매이지 않는 시적 창작이 차지하고 있다.

<오디세이>

스물네 권, 12,110행으로 이루어졌다. 오디세이란 이 서사시의 주인공 ‘오디세이의 시’ 라는 뜻이다. 오디세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해안에 있는 이타카 섬의 왕으로, 트로이아전쟁에서 지략이 뛰어난 그리스군의 명장이다. 일리아드가 전쟁의 서사시라면, 오디세이는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이의 여행, 모험 가정생활에 대한 서사시다. 주인공 오디세이의 성격, 여러 인물의 묘사, 깊은 관찰 그리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표현 등 우리의 흥미를 돋군다. 오디세이가 10년에 걸친 트로이아 전쟁이 트로이아 함락으로 끝나고 귀국하기까지 10년의 방랑의 기록이다.

‘말하라/ 무우사여/ 트로이의 거룩한 성을 무찌른 다음/ 그렇듯 멀고도 널리 방랑하여/ 숱한 나라를 보고/ 그 마음을 안/ 그 다재多才한 사람들’ 이라는 첫귀절은 일리아드가 그랬듯이, 이 시 전체의 전개를 엿볼 수 있다. 오디세이는 트로이아에서 귀국하는 동안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자기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고, 오귀기아 섬에 표류하여 여신 칼립소의 연모戀慕를 받고 머물렀다. 그 동안 고국 이타카에 남아있었던 아내 페넬로페이아는 백 명이 넘는 포악한 청혼자들에게 시달리고, 오디세이의 재물이나 가축은 그들에게 빼앗겼다.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었지만 아직 어려서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들은 회의를 열어 오디세이가 이미 충분한 고생을 겪었으니 귀국을 허락하자는 아테네 여신의 청을 받아들여, 제우스가 오귀아 섬으로 헤르메스를 보냈다. 여신 아테네는 이타카로 가서 오디세이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를 찾을 것을 권고하여, 아들은 펠로폰네소스로 건너가서 필로스의 네스토르 왕, 다음에는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왕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으나 허사였다.

한편 오디세이는 헤르메스 신의 분부를 받은 칼립소의 도움으로 배를 탔지만, 또 다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풍랑을 당하여 간신히 파이아케스 사람의 섬에서 그곳의 왕녀인 나우시카의 구조를 받았다. 그는 왕궁에서 보호를 받고 왕과 왕비는 그에게 귀국과 선물을 약속했다. 어느 하루 저녁잔치에서 눈 먼 가수가 부르는 트로이아 함락 노래를 듣고, 오디세이는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정체를 묻자, 오디세이는 신분을 밝히고 방랑을 얘기했다. 이어 아홉 번째와 열두째 권에서는 그의 10년에 걸친 방랑의 얘기가 일인칭화법으로 정리된다. 오디세이는 섬을 벗어나 거지로 변장을 하고 고국에 도착하여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나, 궁전으로 들어가 무기를 옮긴 다음, 오디세이의 아내 페넬로페이아가 지혜를 짜내 오디세이가 지녔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삼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이 지혜로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오디세이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인다. 그러나 페넬로페이아 왕비가 오디세이를 믿지 않자 증거를 보여주고, 이튿날 아들을 데리고 시골의 농장에 간다. 구혼자들의 친척들이 복수를 하려고 했으나 아테나 여신이 화해를 주선한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전해지는 것으로는 서양 문학작품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에서는 그들 최대의 시인, 극시劇詩의 시조始祖, 웅변술의 귀감龜鑑, 신학神學의 으뜸, 그 밖의 모든 문화의 효시嚆矢라고 한다. 로마시대, 로마가 멸망한 다음 1354년에 페트라르카가 그 사본寫本을 얻기까지 약 천 년 동안을 떼놓고는, 유럽 전체에 이 시만큼 일반적인 영향을 준 문예작품은 없다.

062 우화寓話 Fables, 이솝 Aesop

사무엘 존슨은 우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화 (fable or apologue)란 그 참다운 형태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그리고 때로는 동물적인 존재가 도덕적 교훈의 목적을 위하여 인간적인 관심이나 정열을 갖고 행동하고 말하도록 위장僞裝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화는 단순한 오락을 위한다기 보다도 도덕적인 교훈이나 사회비판의 한 형식으로 발달되어왔다.

오늘날 유명한 우화로써는 이솝으로부터 인디아 최고最古 우화집 판차탄트라 (Panchatantra, 불본생담佛本生譚), 중세기 프랑스의 ‘여우 이야기’, 고대 그리스의 호라시우스의 ‘서울 쥐와 시골 쥐’ 로부터 16세기 프랑스의 라폰테의 우화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역자 주註, 우리나라에도 정수동, 김삿갓 등 위트, 해학諧謔, 풍자諷刺 등)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이솝의 우화이며, 우화라면 어린이까지도 이솝을 연상한다. 그것은 이솝의 우화가 간결하고 읽기 쉽고 이중성이어서 그 속에 숨은 참뜻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솝의 우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의 파에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옥중獄中에서 이솝의 우화를 시 형식으로 재 창작하려고 했으며, 마르틴 루터도 ‘우화가 미덕美德을 위한 좋은 교훈’ 이라고 보고 이솝우화를 편저編著하고 서문序文을 썼다.

이솝은 B. C 약 620 - 560년 사이에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트리키아 아니면 푸리기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는 여러 주인에게 노예로 팔려다니다가 사모스 섬의 이아몬드에 의하여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솝은 그 후 리아다의 크레소스 왕의 궁전에서 살다가 델피의 신전神殿에 사절使節로 파견派遣되었으나, 토박이 주민들과 다투다가 살해되었다.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헤로도토스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이솝이 죽은 다음에 델피지방에 흑사병이 유행되어 델피사람들은 이솝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이솝의 옛 주인이었던 이아몬드의 손자에게 바쳤다고 말한다. 그 후 이솝 전기傳記작가들은 ‘그의 모욕적인 풍자에 델피사람들이 격노했다’, ‘델피의 신전에 기부하도록 크레소스 왕으로부터 부탁받은 돈을 횡령했다’, 또는 ‘은제銀製 컵을 훔쳤기 때문’ 이라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헤로도토스의 말이 사실무근이요 신빙성이 희박하다.

이솝이 노예였다가 이아몬드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修辭學’ 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사모스의 한 민중선동가를 변호하는 대중연설을 하였다는 사실에 미루어보아서도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정설로는, 그가 크레소스 왕의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왕의 궁정에서 솔론을 만났고, 또 코린트에서 페리안델과 함께 그리스의 7현賢들과 식사를 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이것도 연대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그리고 역시 근거가 분명치 않은 얘기지만, 이솝은 사모스의 철학자 쿠산토스 밑에서 일 한 적이 있고, 이 때에 그는 그가 지은 우화들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다고 한다. 또한 페이시스트라터스가 통치하고 있었을 때, 아테네를 방문하고, 이 때 ‘왕에게 요청하는 개구리들’ 이라는 유명한 우화를 들려주면서 아테네의 시민들로 하여금 페이시스트라터스를 다른 통치자로 갈아치우려는 마음을 돌리게 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러한 이솝에 관한 전설적인 얘기들은 거의 전부 14세기의 수도승修道僧인, 이솝이 만들었다고 하는 우화들을 엮어낸 책머리에 막시무스 플라니데스가 쓴 전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여기서 플라니데스는 이솝이 로마의 알바니 언덕에 세워져있는 대리석상에서처럼 추악하게 생긴 꼽추이며 어릿광대 노릇을 했다고 그리고 있다. 또 중세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만들어진 로망스들도 다 그를 그렇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풀루타크가 쓴 ‘7현賢들의 심포지움’ 에 의하면, 7현들의 초대를 받은 이솝의 이전 신분이 노예였다는 것이 웃음거리가 되기는 했어도 그의 외모에 대한 흉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아테네 사람들은 조각가 리시프스로 하여금 이솝의 입상立像을 만들게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가 꼽추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꾸며진 이야기다.

이솝의 생애에 관하여서는 이처럼 정설이 없고, 수없이 많은 전설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이솝이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나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 속에서는 이미 이솝은 ‘우화의 하느님’ 이라는 절찬을 받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파에돈에 의하면 이솝 자신이 저작을 남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 이솝의 우화도 구전口傳이었고 그것들이 유명하게 되자 모든 우화가 다 이솝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해내려온 이솝 풍 우화 4, 50편 중에 과연 어느 것을 이솝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솝이 만든 우화들이 어느 정도로 독창적인 것이었는지는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동물우화로는 B. C 700년 경에 헤시오도스가 만들었으리라고 짐작되는 ‘일과 나날’ 의 1부, 또는 ‘알티로코스의 단편’ 들이 있다. 이것들에 미루어 동물우화란 이솝 이전부터 흔히 있었던 것이며, 여기에 오리엔트 각국의 민속설화들이 가미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B . C 4세기나 또는 그보다 일찍 엮어졌으리라고 짐작하는 인디아의 ‘판차탄트라’ 와 관계도 여러 가지로 추단推斷되고 있다. 그러나 이솝이 판차탄트라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이솝의 우화들은 독창적이며, 분명히 인디아적인 요소와는 다른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요즘 우리가 읽는 이솝우화에는 칼리프가 나오는가 하면, 인디아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차판탄드라가 고대 페르시아나 중세 아라비아를 거쳐 라틴에 이입되고 여기서 이솝의 옛 것들과 합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솝우화 또는 이솝적우화가 최초로 문자화 된 것은 B . C 300년 경에 팔레룸의 데미트리우스가 낸 우화집이다. 이 우화집은 지금은 유실되어 분명히 알 길 없으나 아마 산문으로 되어있고, 10권으로 엮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수이다스가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저자 불명의 우화집이 엘레지 시형詩形으로 나왔던 것 같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바브리우스의 우화집이다.

바브리우스는 로마인으로써 200년 경에 코리앙보스 시형詩形의 그리스 문시율체文詩律體로 이솝우화를 10권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1842년까지는 아무도 이솝우화 편집자로써의 바브리우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1842년에 그리스인 미노이데스 미나스가 아토스 산중의 한 수도원에서 원래의 이솝우화 중 123편을 발견하였다. 그 후 1857년에 95편을 더 발견하였는데, 이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정말 이솝 자신이 만든 것인지 그 진위성은 불명확하다.

바브리우스 이후에는 파에드러스가 이솝우화집을 엮어냈다. 파에드러스는 원래 마케토니아 출신의 노예로 그 자신의 자서전에 의하면 오그스터스에 의하여 해방되었고, 그의 날카로운 풍자에 의하여 투옥된 일까지 있는 그 당시에는 가장 유명한 이솝우화의 라틴어 번역자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이솝의 이름 아래 그 당시에 유행되었던 여러 우화들을 라틴 시율체詩律體로 옮긴데 불과하며, 독창성이 없는 우화작가였다. 그리고 데메트리우스가 그리스 산문으로 엮어낸 이솝우화들을 그 후에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변경하고 번안飜案하고 하였는데 아마 파에드러스도 이 번안된 것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기원 4세기에 이르러서는 아비아누스가 이솝우화 42편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것과 파에드러스의 우화집은 중세기 학교에서 가장 흔히 사용했던 라틴어 교과서였다. 이어 9세기에는 이그나시우스, 디아코누스가 53편의 우화를 코리압보스 시형으로 옮겼다. 여기에는 오리엔트의 것들이 가미되었는데 1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의 승僧 나누데스가 이것들을 한 묶음으로 종합하였다. 오늘날의 이른바 이솝우화집으로써 가장 일반적인 것은 바로 이 플라누데스가 엮어낸 것이다.

오늘날 우화들은 모두 우화적인 재미에 의하여 널리 알려진다. 그러나 고대에서는 사회비판의 형식으로 애용, 애독되었다. 그것이 인디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에서 크게 유행되었던 것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전제하의 지배자들을 풍자하고 비웃고, 정치를 비판하는데 있어 동물의 세계를 빌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정치적, 사회적 불만이나 비판은 부자유스러웠고, 그러기에 진실을 위장僞裝할 필요성은 보신保身을 위해서 필요했다. 특히 노예의 경우에는 더욱 절실했다. 이솝이나 파에드로스가 노예 출신이었다는 것은 우화로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우화가 유행하던 시기가 대개 오늘의 진실이 내일의 허위로 전락되기 쉬운, 정치적으로 혼란하였던 때가 아니면, 사상의 자유가 극도로 위협받고 있을 때였다는 것도 우화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솝의 우화가 제일 성행된 것은 그리스에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일어난 다음 민주정치가 무너진 때라든가, 로마 공화제의 말기, 또는 제정帝政의 기틀이 흔들리게 된 후와 같은 혼란기였다. 그리고 이솝이 만든 우화 이외에도 많은 이솝풍의 우화들이 다른 작가들에 의하여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이솝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도, 어찌보면 동물의 입을 빌려서 위정자를 공격하고 정치를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솝의 이름을 빌어 몸을 피했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보면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였던 루이 14세 때에 ‘라폰테느의 우화’ 가 나왔고, (여러가지 이솝 우화집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것은 이때다.) 러시아에서는 크리로프가 우화를 썼고, 근대에 이르러 ‘철의 장막’ 속에서 이솝풍의 우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든 우화들의 운명을 대변代辯한다.

이솝은 구변口辯이 능했고, 유모어를 즉석에서 꾸며내는 비상한 재능이 있었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천부적天賦的인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추악한 꼽추로 알려진 것도, 그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능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그가 노예신분으로부터 해방된 일이라든지, 크레소스 왕의 총애를 받은 것도 모두 그의 유모어에 대한 남다른 비상非常한 재능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의 우화가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풍자성은 그 후 고전문화의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된 다음부터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이때부터는 그 웃음의 요소보다 도 풍자성으로 이솝의 우화들이 많이 읽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족蛇足> 역자譯者의 저서著書에 <아라한 우학于學> 이 있는데, 아라한은 손자의 이름이고, 우학은 ‘공자孔子의 20 우학’, 손자들의 교양을 위한 저서, 학생 백과사전의 <해학諧謔편> - 동서고금東西古今 유모어, 위트, 풍자 등 약 1,000편 탑재搭載, 해학은 생활과 소통의 비타민이다, 생활속에서 유모어는 활력인데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지성知性과 천부적天賦的인 재능 그리고 재치才致의 순발력이 있어야 유모어를 구사驅使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유모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정쟁政爭을 마치 전쟁처럼 싸우는 정치가들이나 노사勞使 사람들이 익혔으면 함. (Daum Blog 이천만의 시, 이천만의 교학대한사에서 <아라한 우학> 의 해학편諧謔篇)

063 라마야나 Rãmãyana, B. C 500 - 300년 경

인디아 고대문학에는 마하브하라타 (Mahabharata) 와 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가 있어 인디아 문화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두 개의 서사시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이야기 하는 입장에서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두 개의 서사시는 그 규모로 보나 내용으로 보아 어느 하나만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를 제외할 수 없는 쌍벽雙璧을 이루는 인디아의 국민적 서사시이다. 라마야나에 관해 중점적으로 해설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마하브하라타에 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합당치 않으므로 다소의 설명을 한다.

두 개의 대 서사시가 다루는 이야기의 근간은 역사적으로 소급遡及된 옛날에 일어난 사건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음유시인吟遊詩人등에 의해 전해 내려오던 것이 점차 그 양이 늘어나고 현재 전해지는 바와 같은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아마 그 시기는 기원 전 수 세기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현재 마하브하라타는 18편, 10만 여 송頌을 헤아리며, 현존 라마야나는 7편, 24,000 송이다. 전자는 4세기 경, 후자는 2세기 경에 현형現形과 같이 정리된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2대 서사시는 주제가 되는 이야기 속에 많은 신화, 전설, 설화 등을 삽화揷話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편 다 그 전역全譯을 낸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사업으로써 흔히 인디아인 자신들에 있어서도 그 초역抄譯이 유포되고 있다.

마하브라라타란 브하라타족族의 전쟁을 이야기 하는 대사시大史詩란 의미다. 전설에는 이 시의 작자를 비야아사 선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믿기 어렵고 이와같은 장편이 한 사람의 손으로 한 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 B. C 10세기 경에 북 인디아에서 전개된 2대 부족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사화史話가 구전되어 오다가 마침내 이와같이 증보增補, 정리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10만 송이란 시구의 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한 것의 약 8배에 해당하는 세계 굴지屈指의 장편이다.

마하브하라타의 줄거리는, 고대에 위세를 떨친 브하라타 왕의 후예後裔 드리타라 슈트라와 판드라는 두 왕자가 있어, 쿠루지방의 한 마을에서 백부伯父 밑에 자라고 있었다. 형이 장님이었기 때문에 동생인 판드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다. 판드 왕에게는 5명의 왕자가 있어 판다바라고 불렀고, 드리타라 슈트라에게는 100명의 왕자가 있어 카우라바라고 불렀다. 그러나 판드 왕이 일찍 죽자, 장님인 형이 왕위에 올라 다섯 왕자를 자기 아들들과 함께 길렀다. 다섯 왕자는 모두 무예가 뛰어났고 마침내 그 다섯 왕자 중의 장형인 유미수리라가 태자로 정해진다. 그러자 카우라바들은 질투하여 박해를 한다. 그 후 카우라바의 왕자들과 판다바의 왕자들은 각각 다른 나라를 다스렸으나 판다바의 명성이 높고 나라가 번영했으므로, 카우라바 왕자들은 이를 시기하고 유미슈리타를 간계奸計로 유희遊戱에 초청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 판다바는 노예가 될 운명에 빠졌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방랑생활을 한다. 13년째 되는 해에 판다바와 카우라바 사이에는 쿠루세트라에서 18일 간의 대 회전會戰을 하고 판다바는 카우라바를 괴멸壞滅시키고 승리한다.

마하브하라타에서 주제를 이루는 이야기의 분량은 전편의 1/ 5에 불과하다. 이야기에는 종교, 신화, 전설, 풍속, 사회제도, 법제 등에 관한 자료가 기술되어 있어 마치 고대 인디아에 관한 일대 백과사전이다. 그러므로 마하브하라타는 후세의 문학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그 영향은 국외에도 미쳤다. 이 안에는 종교철학시로써 지금도 힌두교도敎徒들이 밤낮 외우는‘바가바드 기타 (Bhagauad gita)’, ‘기구한 운명이 깃든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 ‘나라 왕 이야기’‘정절貞節의 아내 사비트리 이야기’ 등이 들어있다.

‘바가바드 기타' 는 700송頌, 18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성립연대는 대체로 B. C 1세기로 상정된다. 내용은 성지聖地 크르크세트라에 있어서 친족결전親族決戰을 무대舞臺로 전쟁에 의혹을 품는 아르주나와 그의 마부馬夫이며, 의형義兄인 크리슈나가 격려, 교사敎唆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여기에 제기된 교의敎義에는 부분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게 들어나나, 이 책의 중심사상은 유일신의 헌신적인 사랑 즉 브하크티 (Bhakti) 의 강조에 있으며, 또 기존 사회제도 위에서 각자의 본분을 사심없이 수행하는 것이 권장되어 있다.

‘바가바드 기타’ 에 관한 연구는 18세기 이래 서구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었고, 1785년에는 윌키스거 영역을 했고, 1808년에는 칼칸타에서 산스크리트 원전이 출판되었고, 1822년 W. A. 돈. 슐레겔의 라틴어역이 나오자 이 문헌은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진정한 단 하나의 철학시편’ 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바가바드 기타’ 는 근세 인디아 사상가의 정신적 지주다.

라나야나 (Raniayana) 는‘라마 왕王 행전行傳’ 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서사시다. 7편, 약 24,000 송의 싯구로 구성되어있다. 예부터 이 시의 작자를 비야아사 선仙이라고 전하나 사실은 그의 창작이 아니라 그에 의해서 편찬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영웅 라마왕에 관한 전설이 통일된 형식을 갖춘 것은 B. C 500 - 300년의 일로써 마하브하라타 보다도 더 오랜 것이라고 믿어지나 그 후 추보推補되어 현존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2세기 말이라고 추정된다. 전 7편 중에서 제 1편과 제 7편은 2세기 경에 부가되었다고 추정되는데, 2권에는 많은 신화, 전설이 포함되어있고, 역사적 인물 라마왕을 비슈슈 신神의 권화權化라고 하는 등, 이 서사시의 종교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고, 후세에는 라마숭배의 기풍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

코오살라 국國의 수도首都 아요오디야는 다샤라타왕 치하에 매우 번영했다. 왕에게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카우사리아 왕비는 라마를 낳고, 카이케이 왕비는 부하라타를, 스미트라 왕비는 라크슈마나와 쌰트라구나의 쌍둥이를 낳았다.

라마는 문무를 겸비하여 국민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비데하국의 왕녀 시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부왕은 왕위를 그에게 계승하려고 결심하였다. 부왕이 태자식을 거행할 준비를 갖추라고 했을 때 카이케이 왕비는 강력히 반대하여 어려움에 부딪쳤다. 즉 카이케이 왕비가 낳은 브하라타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 라마를 14년 동안 삼림으로 추방할 것을 왕에게 승낙받으려고 한 것이다. 라마는 부왕의 명령에 따라 시타 왕비와 더불어 아우 라크슈아나를 데리고 숲속으로 갔으나 머지않아 부왕이 비탄 끝에 세상을 떠난다.

한편 부하라타는 왕의 부음訃音을 듣고 수도에 돌아왔으나, 그는 의리 바른 사람으로써 왕의 명령대로의 왕위 계승을 사양하고, 라마를 맞이하려고 숲속으로 찾아나선다. 그러나 라마는 브하라타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브하라타는 하는 수 없이 라마의 신발을 품에 안고 수도로 돌아와 이 신발을 왕좌에 모시고 라마의 대리인으로써 정무를 보았다.

한편 라마는 단다카의 숲에서 그 숲의 정적을 깨뜨리는 악귀를 정복했으므로, 랑카 (지금의 실론 섬) 에 본거지를 가지고, 열 개의 머리를 가진 마왕魔王 라바나가 크게 분노하여 하늘을 날아서 단다카에 와서 부하를 황금빛 사슴으로 변하게 하여 교란攪亂을 꾀했다. 라마와 라크슈마나가 마왕의 부하를 쫓고있는 동안에 마왕은 시타를 납치하여 랑카 섬으로 되돌아가 좋은 말로 시타를 꾀어 범하고자 하였으나, 시타가 반항하였으므로 마왕은 시타를 왕궁에 감금한다.

라마는 시타가 납치된 것을 알고 놀라 아우 라크슈마나와 시타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한 빈사瀕死의 독수리를 만났는데, 쥬타유수라는 이름의 이 독수리는 시타를 구출하려고 하다가 마왕 라바나에게 중상을 입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라마가 분노하여 시타를 찾으러 기는 도중 역경에 처한 우너숭이 족의 왕 스그리바를 도와 그를 다시 왕위에 복위시켜주었다. 원숭이 족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시타 구출을 돕기로 약속했다.

현명한 원숭이 족의 하누마트는 단신으로 랑카 섬으로 건너가 시타의 신상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라마에게 알려주었다. 라마는 원숭이 족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 격전 끝에 라바나를 항복시키고, 시타를 구출했다. 시타는 실신失神 아그니의 증명으로 결백함이 입증되었다. 라마는 시타를 데리고 아요디야의 수도로 개선하고, 국민들의 환호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믄체는 마하브하라타 보다도 훨씬 세련되고 기교적이므로 후세에 그 발달된 문체로 이름이 높은 카비야 체體 작품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현재 세 가지 이본異本이 있으며, 이 이야기는 고전古典 산스크리트문학에서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 인디아의 여러 가지 방언方言으로 된 번역, 번안飜案이 많으나 특히 힌디 어語 시인詩人 툴시다스 (1532 - 1622년) 의 람차리트마하나스가 가장 유명하다. 라마야나는 자바, 말레이반도, 타일렌드 등 남방지역에 전달되어 그 문학,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티베트, 중앙아시아에도 전해지고, 중국에서는 불전佛典에 의해 라마 왕 전설이 전해졌다. 한역장경漢譯藏經 중의 육바라밀경六波羅密經에 이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후에 일본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하브하라타에 수록된 설화로 유명한 것은 ‘나라 왕과 다마얀티 왕비의 이야기(Nalopakhyanu)’ 와 ‘샤쿤타라 공주이야기 (Sakuntalapakhyana)’ 가 있는데, 특히 후자는 인디아 고전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여겨지는 카리다사 (4, 5세기의 작품) 란 희곡에 있는 ‘샤쿤타라 공주의 반지’ 의 원형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마하브하라마 안에 들어있는 삽화揷話들 중에는 다른 문헌에 그와 유사한 소전所傳이 보이는 것이 허다히 있어, 인디아 설화 연구상 매우 흥미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불교설화로써 유명한 시바 왕 이야기와 동일한 내용은 세 가지이며,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은 종교적 인식뿐이다. 마하브하라타 안의 ‘영각선羚角仙 이야기’ 는 불교 안에서는 ‘일각선인一角仙人의 이야기’ 로 되어 있고, 불전인 ‘대 지도론’ 권 17 등에 실려 후대의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라마야나는 11세기 초에 고대 자바 어語로 번역되어 고대 자바문학의 시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자바의 프랑파낭 등의 사당祠堂벽면에는 라마야나의 이야기를 테마로 부조浮彫가 있어 유명하다.

또 이 인디아의 서사시는 인디아반도에도 일찍 전해졌고, 특히 캄보디아에는 6세기 후반 이래 그 이야기가 잘 알려져있었다. 유명한 앙코르와트 (11세기 전반에 건립) 의 회랑回廊 일부에는 라마야나의 부조가 있으며, 이 서사시는 크메르 어로도 번역되었다. 그것을 라마케르티 (Ramakerti) 라고 한다. 라마야나는 타일렌드에도 전해져 라마키엔 (Ramakien) 이라고 불려지는 민족 무용극으로 발전했다.

064 오이디프스왕王 Oidipus tyrannos (B. C 430 - 420년 경) 소포클레스 Sophocles

‘오이디프스 왕’의 작가 소포클레스 (B. C 496 - 406년)는 아이스클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3대 비극시인悲劇詩人의 한 사람으로써 아테나이 교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재질과 미모는 당시 아테나이의 우상이었으며 시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장군으로써 국사에 관여하는 등 다채로운 일생을 보냈다. 그의 작품은 123편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이아스, 안티고네, 엘렉트라, 오이디프스 왕, 트라키스의 여인들, 필록테테스 및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불과하다. 이밖에 많은 단편이 있다.

그는 배우의 수를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리고 (무대 위에서 동시에 대화할 수 잇는 배우는 두 명이었다), 합창단을 열두 명에서 열다섯 명으로 늘리는 등 기술적으로 비극을 개량하는 동시에 완전무결한 극의 구성과 섬세한 솜씨에 의하여 고전적 아티카 비극의 완성자로 인식된다.

현대인이 그리스 극, 특히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대극을 정치나 사회 및 경제와 관련시켜서 고찰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 비극은 신화나 전설이 소재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오이디프 왕’ 도 전설을 극화한 것에 불과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완전무결한 극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내세우고 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당시의 관습으로 아폴론의 신탁神託, 즉 신의 예언을 듣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탁에 의하면 아들은 친부親父를 살해하고 친모親母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다고 했다. 그래서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하인을 시켜 아기의 발목을 묶어 키타이론 산중에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하인은 차마 왕자를 죽게 할 수 없어 이웃나라 코린토스 왕에게 주었다. 코린토스의 왕가에는 소생所生이 없었으므로 아기를 친 자식처럼 키웠다. 이 왕자는 어느 날 연회석상宴會席上에서 자기가 왕의 친 자식이 아니라는 말을 취객醉客으로부터 듣고 부모에게 진부眞否를 물었으나, 왕과 왕비는 부정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꺼림칙한 왕자는 델포이에 가서 아폴론의 예언을 들었다. 그 예언은 끔찍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예언을 들은 왕자는 그러한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코린토스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들어선 곳이 바로 테바이란 걸 그는 알 리 없었다. 그가 어느 3거리에 도착했는데 반대쪽에서 오는 마차와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길을 비키라고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자 마차에 탄 노인이 왕자에게 채찍질을 했다. 그는 격분하여 노인을 죽인다. 살해된 노인은 바로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이 위기에서 왕의 시종侍從 한 사람이 살아남아 여러 명의 도적들에게 왕이 살해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불상사와는 달리 테바이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어 이를 풀지 못 하는 시민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이 괴물이 왕자에게도 수수께끼를 물었다. 그 내용은 ‘아침에는 발이 넷이고, 점신 때는 둘, 저녁 때는 셋인 것이 무엇이냐?’ 였다. 왕자가 수수께끼의 답이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괴물이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 테바이는 평화를 찾았다.

이러한 공로로 왕자는 테바이의 왕위를 계승하고 과부가 된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였다. 이전에 테바이 왕의 살해 현장에서 도망친 시종은 테바이의 새 왕이 선왕을 살해한 자임을 알았으나 구실을 만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이리하여 왕은 자신이나 테바이 시민이 이런 진상을 모르는 가운데 여러 해가 지나갔다. 새 왕과 이오카스테 사이에는 2남 2녀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와같은 전설이 비극 오이디프스 왕의 선행先行 사실이다. 여기서 미리 밝혀둘 것은 오이디프스라는 뜻은 ‘부은 발’ 이라는 말로써, 라이오스가 왕자를 버리라고 했을 때 발목 복숭아뼈를 꿰뚤어서 묶었기 때문에 발목이 부어서 생긴 이름이다. 사실 이 부분은 발목이 증거가 되는 장면이 연극 후반부에 나오지만 이름을 미리 알려준다.

이 비극은 이렇듯 오이디프스의 치하治下에서 번영을 누리던 테바이시市에 다시 무서운 전염병과 인축人畜의 사망이 빈번할 뿐만 아니라 곡식이 말라죽는 불안과 공포가 시작된다. 시민들은 오이디프스 궁정 계단 아래 모여 왕을 가다린다. 그들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현명한 왕을 칭송하면서 이 나라의 재앙을 면케 해달라고 호소한다. 오이디프스는 신탁을 듣기 위하여 그의 처남인 크레온을 델포이로 보냈다. 이윽고 돌아온 크레온은 모든 재앙은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테바이 안에 살고있기 때문이라는 예언을 전한다.

그러자 오이디프스는 장님 예언가 테레시아스를 불러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모든 사실을 알고있는 예언가는 오이디프스가 살해자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초조해진 오이디프스가 재촉을 하자 예언가가 그 살해자는 테바이 궁전 안에 살고있으며, 생모를 아내로 데라고 살고있다고 말한다. 이 암시에도 오이디프스는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임을 깨닫지 못 한다. 감히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살고있는 것이 자기라고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뿐만 아니라 크레온이 예언가와 음모하여 자기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크레온과 언쟁을 한다. 이윽고 등장한 왕비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가 아들의 손에 죽으리라는 신탁이 있었지만 사실은 도적의 손에 죽었으니 예언이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한다.

그러자 오이디프스는 라이오스가 살해된 때와 장소 및 그의 모습을 물었다. 3거리에서 도적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에서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다그쳐 묻는 오이디프스의 마음은 불안에 몰려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다. 자기는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왕 폴류보스와 왕비 메로페의 아들로써 성장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3거리에서 노인을 살해한 이야기에 이르자 그 노인이 라이오스였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그 떼 시종 하나가 달아났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다. 이제 자신이 심판대에 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극의 결정적인 순간이 오고야 만다. 코린토스로부터 사자가 와서 왕이 죽었으므로 오이디프스가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라는 전갈이다. 이 말을 듣고 왕비 이오카스테는 모든 공포와 불안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오이디프스는 자기가 코린토스로 돌아가면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공포를 제거할 수가 없다. 그러자 (아, 이 무서운 운명이여!) 사자는 그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오이디프스는 풀류보스의 친 아들이 아니며, 라이오스의 시복侍僕이었던 목자牧者에게서 버려진 아들을 선물로 받아 풀류보스에게 바쳤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이디프스라는 이름처럼 부은 발이 그 증거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왕비 이오카스테는 절망의 외침을 내뱉으며 궁정으로 뛰어들어가버린다. 그러자 오이디프스가 부른 라이오스의 시종侍從이 자초지종自初至終을 해명한다. 왕비 이오카스테가 목을 매어 죽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간 오이디프스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뽑고 두 딸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나타난다.

합창 - ‘보라! 오이디프스/ 불행한 파도에 휩쓸렸나니/ 저 최후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또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이 속세를 끝마칠 때까지는 그 누구인들 행복하다 하리요.’

‘오이디프스 왕’ 은 이와같이 지나간 사실의 발견에 의하여 영광의 왕좌에 앉았던 오이디프스는 불행으로 급 전락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비극의 극치로 찬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후세 연극학자들의 귀감으로써 비극연구의 가장 좋은 표본이 되었다.

이 비극은 운명비극이라고도 한다. 다르게 성격비극이라고도 부른다. 그 어느 쪽이건 추상적이론이기 때문에 그 한계가 분명하지 않다. 운명비극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의견으로 소포클레스는 ‘고립된 이 운명비극에 있어서 음울한 전설의 숙명관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전개하였다.’‘숙명과 운명과 무의식의 악이 있을 뿐’‘이와같이 그는 운명비극의 모범을 만들었다.’ 등등의 설을 위시하여‘이 비극의 행위는 물론 행위 자체의 성질 때문에 파국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가하는 저주스러운 연관 때문이다. 이 점은 소위 운명비극의 특성이다’의 운명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운명비극이라고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주인공의 ‘죄과罪科’, ‘비극적 죄과’ 의 부정이다. 따라서 오이디프스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한다. 죄과없이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즉 운명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주인공의 몰락은 그 자신의 죄과다.’ ‘자신의 행위의 결과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성격비극론자들이다. 주인공과 이오카스테는 물론 테레시아스에 대해서까지 성격적 결함을 적발하려고 한다. 주인공은 분노하기 쉽고, 전제, 폭력적이다. 이오카스테는 탐익적耽溺的 이기적이며, 신을 믿지 않는다. 테레시아스는 예언자이면서 다가올 어려움을 투시할 능력이 없으며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곳에 왔다. 다 불완전한 성격의 소유자임으로 성격의 비극으로써 그와 같은 파국을 초래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가장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살해, 어머니와 결혼도 주인공의 부주의, 경솔, 격하기 쉬운 성격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이미 무서운 신의 예언이 있지 않았는가? 그 예언을 명심했다면 노인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기보다 연상인 여자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주의를 망각한 성격적 조급함과 결함이 그의 비극의 죄과다.

이와같이 성격비극론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각 인물의 무죄설을 현대적 입장에서가 아니고 고대적 인생관의 입장에서 관찰하려고 한다. 즉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하는 것도 그리고 그에 관해서 반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그 시대를 배경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때는 영웅시대다. 정의니 법이니 하는 것은 오직 성벽 안에서나 있는 것이며,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면 오로지 자신의 완력腕力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오이디프스는 지배자의 혈통이다.

이오카스테도 여걸女傑이다. 그녀는 이미 20년의 결혼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원의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까지나 피어오르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구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포클레스의 신앙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의 위에 존재한다. 신의 세계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세계다. 그 신의 세계는 신에게 맡긴다. 인간의 마음으로써는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소포클레스의 온 사상을 밑받침하는 신앙이다.

장장 2천 여 년이 지난 뒤에도 ‘오이디프스 왕’ 은 비극의 전형典型으로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의 교과서가 되어오고 있으며, 이 비극이 지니는 상징성도 여러 모로 문학을 장식하고 있다.

065 시학詩學 Peri poietikes,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 C 400년 경)

아리스토텔레스(B. C 384 - 322년)는 마케토니아 섬 아뮨타스의 시의侍醫 니코마코스의 아들이다. 의가醫家의 관습에 따라 일찍부터 자연과학에 취미를 가졌다. 18세에 아테나이로 와서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하였고, 20년 간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스승의 곁에 머물렀다. 스승의 사후 아테나이를 떠나서, 트러아스의 앗소스에 아카데메이아의 분교分校를 세웠다가 B. C 343년 뮤틸레네로 옮겼다. 다음 해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의 초청을 받아 왕자 알렉산더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알렉산더가 동정東征을 떠날 때까지 측근側近에 있었다. B. C 335년 아테나이로 옮기고, 류케이온에서 가르쳤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는 친 마케도니아 파로 몰려 위험에 처하게 되어,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은퇴하였고, 그곳에서 수 개월 후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발전은 근래 주로 베르너 예어거에 의하여 구명究明되었다. 그에 의하면 그 발전은 아카데메이아시대 (도제徒弟시대), 과도기 (유력遊歷시대), 류케이온시대 (일가一家를 이룬 시대) 로 구분된다.

제 1기에서 이미 그는 플라톤적 대화편을 쓰고, 세상에 유포되었으나, 오늘날에그 그 단편만 전해진다. 제 2기의 저작의 어떤 것은 단편만이 전하여지고, 어떤 것은 Urmetaphysik, Urethik, Urpolitik 등으로써, 현존하는 해당 저작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들에 의하여 그의 독립과정을 알 수 있다. 제 3기의 저작은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집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고, 난해하여 독해에는 고대 말기의 주석가들을 필요로 한다.

저작은 여러 군群으로 나누어진다.

1. 논리학 관계, 카테고리아이 등, 오르가논이라고 통칭된다.

2. 제 1철학에 관한 것, 메타퓌지카

3. 자연학에 관한 것, 퓌지카 (자연학), 데 게네라티오네 에트 코르푸티오네 (생성生成과 소멸에 관하여), 히스토리아 아니말리움 (동물지), 데 아니마 (영혼에 관하여) 등

4. 윤리학, 정치학에 관한 것, 에티카니코마케아 (니코마우스 윤리학), 에티카 에우데미아 (에우데모스 윤리학), 폴리티카 (정치학), 아테나이온 폴리테이아 (아테나이인의 국제國制) 등

5. 창작학에 관한 것, 데 아르테 포에티카 (시학詩學에 관하여)

‘시학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그 일부분이 현존할 따름으로써, 비극시론이 그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래서 우리의 해설도 비극시론, 특히 그 카타르시스론을 주로 하겠다.

제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요,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의 장식은 각각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그리고 비극은 희곡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애린愛隣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에 의하여 나는 율동과 해음該音과 가요歌謠를 포함하고있는 언어를 의미하고, 각종 하나의 카타르시스란 말을 종교의식상의 정화淨化작용 (Purification) 으로부터 유래한 은유적隱喩的 표현으로 보아, 비극의 목적을 도덕적인 것 즉 여러 감정의 정화에 있다고 보는 견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신체 안의 좋지 못 한 체액體液의 배설排泄, 제거除去 (Prugation) 을 의하는 의학상의 용어로부터 유래한 표현으로 보아, 예술의 목적을 비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다. 전자는 많은 유명한 장식은 각가가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이에 의하여 나는 어떤 부분은 운문만에 의하여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가요에 의하여 진행됨을 의미한다.’

이상 인용한 것이 비극시에 대한 정의인데, 유명한 카타르시스란 말이 시학에서는 이 개처個處에서 한 반 나올 뿐으로써 고래로 연구가들의 이론이 많은 곳이다. 그들의 여러 견해를 대별하면, 대립되는 두 개의 견해로 나눌 수 있으니, 그 전자는 특히 렛싱 (Lessing) 이 주장한 견해이고, 후자는 이미 르네상스기에 있어서 발견되나, 19세기 도이치학자 베르나이스 (Berniys) 에 의하여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그 정당성이 확립된 견해다. (시인 밀튼은 이 두 견해의 중도를 취하였다.)

우리는 비극의 직접목적과 간접목적을 구별할 수 있다. 그 직접목적은 애린愛隣과 공포 -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의 수난受難에 대한 애린 및 그에 앞서 박두迫頭하고 있는 수난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비극이 애린과 공포를 환기하는 것이라는 것은 당시의 통념이었고, 플라톤이 비극을 공격한 주요 이유의 하나도 그 점에 있었다. 무릇 그의 견해에 의ㅎ면 비극은 우리를 더욱 감정적으로, 더욱 유약儒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간접적 결과는 우리들로 하여금 더 감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감정을 배설,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암암리에 플라톤에게 항변한다.

이것이 카타르시스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은 ‘정치학’에 있어서의 두 곳 (1341 a 21 - 25, b 32 - 1342 a 16에 의해서도 명시되고 있다.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종류의 음악 - 성격이나 행위를 모방하는 음악에 대립되는 광란적 (Orgiastic or enthusiastic) 인 음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교훈이나 오락을 의도하지 않고, 카타르시스를 의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인간에 있어서 강렬한 형태를 취하는 감정은 다소간에 모든 인간 속에 다 존재한다. 예컨대 애린, 공포 및 광란증 등이 그렇다. 광란증을 든 것은 그런 증세를 나타내는 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멜로디의 결과, 우리는 그들이 - 정신을 자극하여 신비적 광란에 빠지게 하는 멜로디의 영향을 느꼈을 때 - 회복됨을 본다. 마치 그 열광적인 감정이 치유되고 배설된 것처럼. 이와 동일한 치료방법은 애린, 공포 혹은 일반적으로 감정에 특별히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에게나, 혹은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감정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어떤 양식에 있어서 배설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은 경쾌히 될 필요가 있다. 꼭같은 방법으로 배설적 멜로디 (purg ative melodies) 는 인류에게 무無 사기邪氣한 쾌락을 준다.’

‘정치학’의 이 개처個處는 카타르시스의 충분한 설명은 ‘시학’을 보라고 하고 있으나, 그것은 지금 전하여지지 않은 제 2권을 지시하는 것 같다. 여하간 비극의 목적으로써의 카타르시스란 요약하면 이열치열以熱治熱하는 것, 즉 우리의 내부에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무거운 감정을, 비극의 관상觀賞에 의하여 감정을 자극, 환기喚起함으로써 말미암아 배설하여, 경쾌한 정신이 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새 가지를 주의하려고 한다.

1. 카타르시스적인 멜로디가 성격적, 윤리적 멜로디, 다시 말하면 성격의 향상을 의도하는 교훈적 멜로디와 구별되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대한 견해가 감정의 정화, 순화를 의미하는 도덕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비극의 목적이 그 밑에 종속되는 상위의 목적은 쾌락에 있다. 예술 (fine arts) 은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에 속하는 것이며,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실용적기술 (useful arts) 및 지식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과 구별된다. 비극시인은 애린愛隣과 공포의 정情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환기되는 쾌락을 생산하기를 의도해야 하고, 그 외의 쾌락을 의도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적 쾌락을 쾌락, 일반, 각종 기술에 의하여 생산되는 쾌락을 포함한 쾌락 일반의 일종으로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는지는 명백치 않다.

2.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의학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적 저작과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의 저작과의 연관에 있어서의 그 말을 검토할 때 그것이 의학적 용어임이 더욱 명백해진다.

3. 상기한 비극의 정의 중에 ‘이와같은 여러 감정의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아마 ‘이와같은 여러 감정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겠고, 보통 생각하듯이 ‘이와같은 여러 감정 중에 있는 비열한 요수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아리스토텔레스 용어의 관례상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와같은 여러 감정’의 전적인 제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애린이나 공포의 모든 경향성으로부터 전적으로 해방됨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며 (E N 215 a 12)’또 마땅히 애린의 정을 가져야 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여러 감정의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이와같은 여러 감정이 너무 과도하게 있는 한, 그 제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카타르시스의 참뜻이 이와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는 에브리엑션 (abreaction, 정화작용 혹은 소산消散반응이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과거경험을 재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방해적인 억압표상군抑壓表象群 즉 컴프렉스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에 유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 정신분석학자들이 변태적인 경우에 주장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상적인 관상자觀賞者에 대한 비극의 효용이라고 보는 점이 다른 것이다.

비극의 이와같은 효용은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는 현대인의 상상 이상의 것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생각건대 그것은 그리스인과 현대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매일 같이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 영화를 보고, 댄스를 하고, 신문 잡지를 읽고하여, 수시로 부지불식 간에 정신분석학자의 소위 소산반응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연 1회의 국가적 행사인 디오니소스 제전 때 모여 극의 경연을 관상할 따름이었다. 이 관상觀賞에 의하여 그들은 1년 동안 울적했던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되어 경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론은 이와같은 사실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으로 시학에서 말하는 비극의 본질과 그 비극의 효용성으로써 카타르시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대략 밝힌 셈이지만 이는 고전극 이론의 전범典範이 되어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시학에서는 인간의 예술적 충동이 모방본능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어 미의 창조에 대한 플라톤적 고찰보다 훨씬 구체적인 실례를 들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모방본능설은 도이치의 쉴러에 의한 유희본능설의 이론이 대두할 때까지 지배적인 예술론이며 미학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그의 시학은 본래적 의미에서 시작술詩作術을 뜻하고 작술에 있어서 시 보다도 희곡, 결국 연극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하여야 좋은 드라마가 될 수 있는가를 그 당시 작품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실례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에서 가장 완결된 전범을 찾고 있으며, 호메로스의 서사시 보다 훨씬 우월한 형식이라고 칭찬한다. (이 점에 대하여 헤겔은 안티고네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도덕적 견해를 세운데 불과하고, 오히려 미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보다 타당성있는 현대적 접근이다.)

그러나 그의 연극론은 드라마의 3통일을 엄수할 것을 주장한 점에서 고전극론의 한계를 넘지 못 하지만 시원적始原的인 면에서 의의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066 영웅전英雄傳 Bioi paralleroi (105 - 115년 경) 플루타크 Plutarchos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도 여가에 즐겨 읽었던 책의 하나가 영웅전이다. 영국 수상首相 디즈렐리가 어릴 때 그의 상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큰 뜻을 품게 해준 책도 영웅전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19세기의 역사가 마콜데이나 처칠이 즐겨 읽었던 책도 이 책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정열을 부어주고 큰 뜻을 품게 하였으며, 오늘에도 많은 애독자를 가진 영웅전은 그리스인 풀루타크가 지었다.

풀루타크는 B. C 46년 경 뷔오티아의 카이로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명문에 속하며 따라서 그는 좋은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아테네에서 철학공부를 하였고, 이 때 특히 소요逍遙학파에 속하는 이집트인 암모니우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이밖에도 그는 의가醫家 오네시크라테스, 문장가 에이지아누스 등을 사사하였고, 이집트에 가서는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앙에 흥미를 가졌다. 그 후 그는 로마에 약 20년 동안 머물면서 로마사람들에게 그리스어로 철학강의를 하였고, 로마의 유력자들과 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황제가 된 하드리안의 교육도 맡았다.

풀루타크는 트라얀 황제 때 콘슐라 (지방 집정관執政官) 에 임명된 적도 있고, 하드리안 황제 때에는 그리스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는 120년 경 고향에서 델포이의 아폴론의 대사제, 시장 등을 역임하며 그 영예 속에서 죽었다. 그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이밖에 알 길이 없으나 딸의 죽음에 이으러 쓴 ‘아내에의 위안慰安’ 이란 글에 기록된 것을 보면 딸 외에 아들 4형제를 두었으며,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신비적 종교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어느 특정의 철학적 유파에 속하지 않은, 자유사상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풀루타크는 매우 정열적인 작가로 그의 유명한 ‘대비對比 영웅전’ 이외에도 100권이 넘는 저술이 있다. 그 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82권이고, 나머지 24권은 제목만 전해진다. 저서는 철학, 윤리, 종교, 역사에 관한 것으로 특히 철학에 관하여 쓴 다섯 권의 저작은 서양고대철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그러나 우리가 풀루타크를 알게 되고, 또 그가 당대 뿐 아니라 그 후에까지 작가로써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영웅전이다. 그가 언제 이 책을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트라얀 황제 때에 로마에서 쓰기 시작하였고, 만년에 이르러 체르니아에서 완성시켰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풀루타크는 영웅전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비슷한 정치가는 정치가끼리, 장군은 장군끼리 각각 한 쌍을 묶으므로 하여 전기를 쓰고 한 쌍 마다 대조되는 양자에 대한 비교론을 첨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는 그리스인 23명, 로마인 23명, 도합 46명의 전기이다.

테세우스와 로물러스, 리컬저스와 뉴마, 솔론과 발레리우스 퍼블리콜라, 테미스토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우스, 알키비아데스와 코리오라누스, 티모레온과 아미리우스 파울러스, 펠로피다스와 말셀러스, 아리스티테스와 대大 카토, 필로페엔과 플라미니우스, 피루스와 아리우스, 리산델과 술라, 키몬과 루쿨러스, 니키아스와 크라서스, 우메네스와 섹토리우스, 아게실라우스와 폼페이우스, 알렉산더 대왕과 시저, 포키온과 소小 카토, 아기스와 클레오메네스, 그리고 그라치 형제,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 데메트리우스 포리올케테스와 안토니우스, 디온과 부르터스.

이밖에도 알타셀레스 므네몬, 아라투스, 칼비, 오소 등에 관한 보다 상세한 전기들이 따로 추가되어 있으나, 그 외의 전기들은 모두 유실流失되어 알 길이 없다.

풀르다크는 알렉산더 대왕전의 서두에서 자기는 대왕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사료로 하여 이들을 면밀히 검토하였다고 하면서도 자기는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쓰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항상 인물 그 자신과 그의 행위에만 초점을 두고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 같은 것에 대하여는 별로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료로써 영웅전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풀루타크는 인간의 미덕과 악덕의 발견에 관심을 두고 그가 다루는 인물들을 다소나마 미덕이나 악덕의 구현자具顯者로 보려는 윤리적 관심에 의하여 객관성을 잃게 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도리아인에 대한 애착에서 스파르타의 왕이나 장군들을 더 호의적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이오나아인들을 경시하였고, 이 때문에 헤로도토스까지도 그가 이오니아 사람이었으므로 아테네를 너무 변호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얻을 수 있었던 참고자료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희박했다든가 그가 라틴어에 익숙하지 못 했기 때문에 로마인에 대한 전기가 그리스인에 비해 다소 조잡하고 정확키 못 한 점이 있다는 흠이 있다.

그러나 그가 로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역사나 인물에 대하여 어떤 편견이나 고의적인 왜곡도 없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 한 문제에 대하여도 다수파의 의견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균형잡힌 자세를 지켰다. 어쨌든 영웅전이 풀르다크의 놀라울만한 박학다식과 면밀한 다년 간에 걸친 조사의 결과였다는 것은 그가 밝힌 긴 참고자료 리스트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풀루다크의 영웅전은 동 시대의 역사가들이 밝혀주지 못 한 부분을 매워주는데 있어 매우 가치있는 기록이다. 가령 키몬전에서 유리메돈의 싸움을 설명하고 있으며, 리컬거스와 솔론전을 통하여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초기 역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와 알키비아데스전에서는 펠로포네소스전쟁에 관한 투키디데스나 크세노폰의 이야기를 더 보충하여 주지는 못 했다 하더라도 니키아전에서는 시실리아 원정에 관한 루키디데스의 설명을 매우 적절하게 보충해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시저에 이르기까지의 로마의 초기역사를 살피는데 있어도 리비의 기록에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풀루타크의 영웅전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처럼 널리 애독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과거의 전기들이 흔히 사로잡히기 쉬운 결점을, 영국의 탁월한 전기작가인 리튼 스트레이치는 ‘소화消化되지 않은 재료의 누적累積, 문체文體의 등한等閒, 따분한 찬사, 취사선택取捨選擇이나 공정한 태도의 결핍缺乏’ 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영웅전은 이들 결점을 많이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풀루타크는 독자에게 흥미있게 인물을 다루고 생생하게 인물을 그려 보여주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풀루타크는 모든 인물을 영웅적인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갖가지 미덕의 추구자가 아니면 특정의 인간적인 정열의 노예로써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인물 묘사가 도식적圖式的이거나 평면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어느 인물을 다룰 때나 이들에 대한 다시 없는 공감을 갖고 그들의 내면에까지 파들어가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가 그려낸 인물들은 누구나 가 독자에게 다시없는 친밀감을 주고 또 그들의 행위는 생생하게 독자의 눈앞에 재현再現된다. 풀루타크전기의 특색은 한 인물의 생애가 아니라 그 인물의 영웅적인 자질이나 인간적인 돋특한 면모를 그려내는 데 있다. 이를 연대기적인 평이한 수법으로 그려내는 풀루타크 자신의 독특한 견해가 담겨져 있다. 그는 큰 전쟁이나 포위전 같은 가장 두드러진 행동 등은 인물의 성격을 그대로 들춰내주는 것이 못 되고, 오히려 무의식중에 일으키는 제스츄어나 표정을 통해서 인물의 참다운 성격이나 면목이 가장 정확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그는 대 사건보다도 사소한 사실들을 더욱 중요시하고 인물의 여러면을 잘 반영시켜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화逸話 등을 솜씨있게 꾸미고, 외모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또 대표적인 연설 등을 통해서 보다 생생하게 인물을 구현시키려고 하였다. 그 결과, 가련 시저에 맞선 키케로의 웅변이라든가, 부르터스 또는 안토니우스의 열변熱辯 등은 로마공화 말기의 숨막힐만큼 격동하는 역사의 움직임 속에서 다투는 인물들의 모습을 눈에 선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읽혀지는 영웅전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1559년 프랑스 자크 아미오가 처음에 프랑스어로 번역하였고, 1579년에 토마스 노스가 영어로 번역하였다. 아미오의 프랑스어판은 평이한 문장으로 또 독자가 보다 많은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하여 원서의 문장을 다소 첨삭添削하였다. 그러나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희곡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삼았던 것이 바로 노스의 영역본이다.

그 후 존 드라이든도 1683년에서 1686년에 걸쳐 영웅전을 번역하였고, 이것은 왕역본이 아니었으나 18세기 초 큰 인기를 거두었다. 이때부터 영웅전은 특히 영국에서 널리 보급되었으며, 1763년에 토마스 모티머는 이를 본따서 ‘영국 풀루타크 (British plutarch)’ 를 저술하였다.

1770년에 이르러서 존과 윌리엄 랑혼이 보다 완전한 번역을 내놓았으며 이 판이 그 후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A. H. 클로가 1852년에 출판한 것이다.

풀루타크는 이들의 장단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를 이들과 갈라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용모만 따진다면 아무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거니 눈이 번쩍해질 정도로 절세絶世 미인美人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와 사귀어본 다음에는 아무도 그녀의 마력魔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성품이 갖는 매력은 그녀의 능한 화술과 그녀의 언행의 독특한 멋과 함께 정말로 매혹적이었다.’

067 아라비안 나이트 Arabian Nights (850년 경)

‘세계 최대의 기서奇書’ 또는 ‘전승傳承문학, 설화說話문학의 백미白眉’ 라고 불리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원제原題는 ‘알프 라일라 와 라일라’ 이다. 알프는 천千, 라일라는 밤, 와는 접속사의 와, 다음의 라일라는 ‘다수多數의 밤’ 을 뜻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말한다면 ‘천야千夜와 일야一夜’ 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맨처음 영국에 번역, 소개되었을 때 ‘아라비안 나이츠 엔터테인먼츠 (Arabian Nights Entertainments), 즉 아라비아의 밤의 즐거움’ - ‘아라비아 야화夜話’ - 라는 표제를 붙였기 때문에 흔히 ‘아라비안 나이트’ 라고 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권위있고 결정판이라고 하는 버어튼판 영역본은 그래서 ‘The Book of the Thousand Nights and a Night’ 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나라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대로 ‘아라비안 나이트’ 라고 부른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저술연대나 작자 (편저) 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 방대한 민화집民話集은 오랫동안 아라비아 민중 속에서 구전되고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강 추정으로, 이야기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8세기 경, 가장 새로운 것이 13세기 경이 아닌가 추측할 정도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생겨나게 된 사회적 배경을 보면 먼저 당시 아랍인들의 민족적 특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랍인들은 사막 유목민과 도읍이나 농촌 정착민 두 파로 대별할 수 있는데, 특히 유목민인 바다위족族은 이슬람 전기前期의 풍습이나 소박한 특색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이며 생활풍습은 중세기 아랍인 전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니다.

중세 아랍인들의 장점은 한 마디로 그 성격이 헌신적이고 청결하며, 강직하고 은근 솔직하면서도, 낙천주의적이고, 유머러스하다. 그러나 한편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거만하며, 게으르고, 무지 잔인하며, 거기에다가 손쉽게 자기만족에 빠지기 잘 한다는 점이 결점이다.

그리고 아랍인들이 신봉하는 종교 이슬람교 (회교回敎) 는 깊이 그들의 생활에까지 스며들어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도 알라 (신) 을 칭송한다. 알라는 유일신이며, 모하메드는 그의 사도使徒다. 기독교와는 달리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아닌 유일절대신唯一絶對神 알라를 절대적으로 숭배한다. 종교적인 행사는 할례割禮, 희사喜捨, 1일 5회의 예배, 메카순례巡禮가 있다.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회교며 알라가 그네들 정신 속에 뿌리깊이 박혀있는가 하는 것은 간단한 일상용어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무슨 일에 건 알라를 칭송하거나, 알라 앞에서 서약誓約하기 일쑤고,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도 ‘알라의 은총恩寵이 깃드시기를’ - 이라고 하며, ‘예’ 하는 응락應諾은 ‘알라의 뜻에 맞으신다면’ 이고, 심지어는 거지의 구걸을 거절할 때도 ‘알라가 그대를 다른 집으로 인도引導하기를’ 이라고 한다. 이쯤되면 알라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신이지만, 본래 마호메트 자신부터 한 손에 칼을 또 한 손에 성전聖典을 들고 나선 것처럼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면을 지니고 있다. 미덕과 악덕, 사막의 유목생활에서 얻은 강직한 용맹성과 야만성, 그리고 별을 우러르며 샘솟는 시심詩心과 정열이, 무지와 가난과 터무니없는 미신迷信이 한데 뒤엉켜 어울어진 변화 많은 아랍인들의 생활은 곧 변화무쌍變化無雙하고 기과환상적奇怪幻想的인 서술시적敍述詩的 설화說話를 낳을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기원基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대강 페르샤 (이란) 의 오랜 전설화집 ‘하잘 아프사나 (천千의 이야기)’ 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평이다. 원본은 한 권도 남아있지 않고 꽤 오래 전부터 아라비아의 문인들 사이에서 읽혀지고,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850년 경으로 추정된다.

이야기는 인디아와 중국의 섬들을 차지하고 있었던 삿산왕조王朝의 하나인 샤리아르 왕이 자기와 동생의 왕비가 검둥이 하인과 음란淫亂한 간통姦通을 하는 장면을 목격目擊하고 분개憤慨하고 낙망落望하여 소문도 목적도 없이 여로旅路에 오르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도중에 마신魔神의 연인戀人이 7겹의 강철상자 속에 엄중히 갇혀있으면서도 잠깐씩의 해방된 틈을 이용하여 수없는 남자와 간통한 사실을, 직접 그녀의 위협에 마지못해 두 형제도 간통을 하고나서 알게된다. 그것도 바로 마신의 머리맡에서 ….

‘이 마신이 결혼날 밤에 나를 사로잡아다 7겹의 상자에 넣은 뒤 바다 속에 쳐넣었습니다. 그렇게 내 순결純潔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자기 이외 아무와도 정을 나누지 못 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키는대로 누구하고든 잤어요. 불쌍하게도 마신은 숙명이란 피할 수 없다는 걸, 무슨 수로도 막을 수 없다는 걸 모르고, 또 여자란 일단 마음먹으면 남자가 아무리 거절해도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법을 모릅니다.’

억지로 왕의 두 형제와 정을 통하고 난 여자의 말이다. 샤리아르 왕과 그 동생은 ‘알라의 힘을 빌어 여자의 사심邪心을 피하자. 우리보다 훨씬 힘있는 마신을 그 여자가 어떻게 구슬렀는지 생각해봐라. 우리에게 닥쳤던 불행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을 마신은 겪고 있다.’ 결국 형제는 여자는 모두 요물妖物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다시 말고삐를 자기들의 왕국으로 돌린다.

그 후부터 샤리아르 왕은 3년 간에 걸쳐 매일 밤 나라 안의 처녀를 골라들여 하룻밤의 잠자리를 하고는 다음 날 아침에 죽여버렸다. 드디어 처녀라고는 대신大臣의 두 딸 세라자아드와 도냐자아드 밖에 남지 않았다. 총명한 세라자아드는 자기에게 닥친 운명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자진하여 아버지를 설득한다. 그리하여 폭악해진 왕의 하룻밤 결혼을 하기 위해 왕의 궁전으로 스스로 찾아간다. 그날 밤 미리 동생과 약속하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동생을 잠자리에 들어오게 해서 한밤중의 잠 오지 않는 시간을 매꾸기 위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동생이 언니를 조른다. 세라자아드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음 날 아침, 왕은 세라자아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처형을 연기한다. 이렇게 하여 계속된 흥미진진興味津津한 이야기가 천일야天日夜를 이어가고 이윽고 왕이 세라자아드의 정숙함과 총명함에 감동하여 폭악한 처녀 처형을 그친다.

이렇듯 한 독립된 이야기에서 또 다른 독립된 이야기로 줄줄이 교묘하게 이어져나가는 프레임 테일 (Frame – tail) 의 구성법은 훗날 데카메론이나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걸작에도 크게 영행을 준 바 있거니와 그 내용 또한 끝없는 낭만과 꿈과 모험의 세계를 그리는 독자들에게 가없이 넓고 화려한 판타지의 길을 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아라비안 나이트 속에는 아랍인의 특유한 기지奇智와 드라이한 유모어, 거리낌없는 홍소哄笑, 폐부肺腑를 찌르는 야유揶揄, 체념諦念과 탄식歎息 등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정교精巧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대로 방대尨大한 인생 드라마가 전개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 널리 유포되었다고 생각되는 갖가지 시구詩句가 보석처럼 박혀있어 아랍인들의 현실을 미화하고, 시의 세계에서 도취적陶醉的인 경지를 찾는 특성이 잘 나타나있다. ‘시詩가 없는 아라비안 나이트는 태양없는 낮과 같다.’ 고 한 레인의 말도 수긍이 간다. 그런데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그대로 간과看過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성애性愛 (섹스) 의 적나라赤裸裸한 묘사描寫다. 이 작품은 당시 사회풍속을 그대로 묘사한 전형적典型的인 풍속風俗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녀의 정사情事, 짙은 러브신, 성교性交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져있는 게 특성이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매우 자연스럽고 천진난만天眞爛漫하여 조금도 추醜한 감感을 주지 않는다. 아랍인은 본래 사막 한가운데서 대자연의 위협과 싸우며 살아온 종족이기 때문에 오감五感이 날카롭게 발달하여, 매우 관능적官能的인 쾌락快樂이나 아름다움에 민감敏感하다. 아랍 고전문학의 정수精髓가 서정시란 것도 이런 아랍인의 특성에 기인한다. 때문에 애욕과 물욕에 사로잡혀 거기서 뒤채이는 남녀의 모습, 주색酒色, 풍류風流에 젖어 물 쓰 듯 재산을 탕진蕩盡하는 플레이 보이, 마법魔法, 환상幻想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적 욕망을 실현하는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이 작품을 외설猥褻이라고 한 사람들에게 버어튼은, 사무엘 존슨 박사가 그의 사전辭典 속의 난잡亂雜한 어구語句를 힐책詰責한 부인에게 한 말을 인용하여 대답할 수 있다.

‘부인, 부인께선 그런 말만 열심히 골라 읽으셨군요?’

아라비안 나아트는 얼마든지 쏟아져나오는 에로틱한 이야기와 장면만으로 외설이라고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위대한 문학작품이다.

‘동양적인 생활감정과 미에 대한 관능적인 즐거움이 가장 단적으로 순수하게 명시되어 있다. 거기에다 동양인의 관능적 쾌락이 시적형태와 다시없이 훌륭하고 행복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 (풍속의 거울)’ 고 한 현대 도이치 성性 풍속학자 한스 노이만 박사의 한 마디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가치를 증명한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체계있게 정리되어 유럽에 발표된 것은 18세기 초 갈랑 (1646 – 1715년) 에 의해서다. 처음 불역佛譯 (12권, 1704 - 1717년) 되자 전 유럽의 일반 지식인들에게 비상한 반영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많은 동양학자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갈랑의 번역은 오히려 번안飜案에 가까웠고 아라비아적이기 보다는 우아한 프랑스어를 써서 대중에게 읽히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원전原典이 지니는 중요한 시와 문학적요소를 거의 없애버렸다.

뒤이어 레인 (1801 - 1876년) 의 주석을 단 정확한 영역본 (1838 - 1840년) 이 나왔으나 역시 이것도 완역은 아니며, 특히 도학자적道學者的인 고려에서 소박한 성욕묘사가 대부분 빠졌거나 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는식으로 처리되어버렸다.

최초의 완역인 동시에 유려한 역본은 리처드 프렌시스 버어튼 (1821 - 1890년) 에 의해서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의 영역본 (16권, 1885 - 1888년) 은 많은 주석과 정확한 번역으로 결정본이란 정평을 받고 있다. 버어튼은 직접 아라비안 나이트의 현장무대를 찾아다니며 이 이야기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산재散在, 구전口傳되고 있는 것을 일일이 채집, 분류하는 동시에 이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체험했다.

‘성서에 맞먹을 만큼 포풀러하면서도 유럽에서는 어린애들 동화로 밖에는 알려져있지 않다. 참모습은 일부의 아라비아 학자 외에는 알지 못 한다. 그러나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랍인의 참 모습을, 그 중에서도 특히 남녀의 끝없는 애환哀歡과 애욕愛慾의 세계를 그린 어른의 책이다.’ 고 통감하고 버어튼은 드디어 누가 뭐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건 반드시 올바른 번역본을 내리라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오늘의 완벽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버어튼의 불굴의 의지와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다.

더구나 제 1야부터 제 천일야까지 의 밤의 형식을 엄수하고, 총 1만 행에 달하는 시를 모두 번역, 성애에 대한 노골적인 어구도 충실히 옮기고 또한 익숙하지 않은 아랍인의 풍속 습관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인류학적 주석’을 첨가한 버어튼의 공적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더불어 영원히 문학사상에 빛날 것이다.

068 두공부집杜工部集 (1039) 두보杜甫

두공부집은 중국이 낳은 최고의 시인 두보 (712 - 770년, 공부는 벼슬명) 의 시문집詩文集이다. 두보는 봉유수관奉儒守官을 신조信條로 천기天氣를 다질은 사화詞話와 자연을 넘짚는 관조觀照와 인생을 녹이는 성실을 사랑으로 가름하고, 체험으로 표상表象하여 고금古今을 집대성集大成한 천고千古의 시성詩聖이요 천종天縱의 정성情聖이다.

두보의 자字는 자미子美, 두릉杜陵, 소릉少陵은 별칭이니 장안 (서안) 동남방 두릉에 살았기 때문이다. 한편 좌습유左拾遺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벼슬을 지냈기로 습유, 공부와 아울러 초당草堂선생, 노사老社, 대사大社라 일컫고, 그 시가를 들어 시사詩史, 시종詩宗, 시경詩經, 시신詩神, 시성詩聖 등 최고의 경앙景仰을 독차지한 채 세계시사詩史의 정상에 군림하여 이른바 광도만장장光熖萬丈長 (한유韓愈) 을 돋뵈었다.

두보의 원조遠祖는 좌전학左傳學으로 유명한 두예 (B. C 22 - A. D 84년)요, 그 조부는 초당初唐의 문원文苑을 떨친 강수원함정江樹遠含情의 주인공 두심원 (647 - 702년)이니, 그가 자랑한 오조시관고吾祖詩冠古 (증贈 촉승蜀僧) 대로, 일찍이 문학의 계통에서 시시언오가사詩是言吾家事 (종무생일宗武生日) 를 천분天分으로 섬긴 전형적인 선비였고, 고고孤高한 이상가理想家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윈 두보는 낙양에서 자랐다. 당시 장안과 낙양은 서군西郡, 동군이라 호칭하며 동서의 교류가 잦고 문물의 극성極盛을 본 세계적인 도시였다. 더구나 시화년풍時和年豊에 공사公私의 창고는 그득하고 민심은 도타와 중국사상 가장 빛나는 전성기였으니, 그 통령統領의 대 기운은 청년 두보의 오관五官을 넓혀 안공眼空의 기백氣魄이 간단없이 도야陶冶되었다. 나이 20에 접어든 두보는 사마천의 장유壯遊를 본받아 강동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이 남유南遊에서 돌아온 24세의 두보는 선제先制에 좇아 진사시에 응했으나, 집권執權하는 초인宵人들이 ‘대 명시 독보大名詩獨步 (위초韋迢)’ 의 두보를 알아줄 리가 없었다. 낙방으로 ‘독사경윤당獨辭京尹堂(장유壯遊)’ 한 두보는 아버지가 연주사마兗州司馬로 보외補外되어 있었으므로, 산동의 하북길을 떠났다. 이 추정시趨庭時 사귄 사백詞伯 소원명蘇源明, 이(태)백李(太)白, 고적高適과는 흥겨운 나날을 보냈고, 이옹李邕을 모시고는 논문을 주고받으며 수창酬唱으로 호협豪俠을 기르며 한 여름을 나기도 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온 두보는 ‘치군요순상致君堯舜上 재사풍속순再使風俗淳(증贈 위韋 좌승장左丞丈)’의 포부를 펴고자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간알干謁을 부끄리는 그 올올兀兀은 천고千古를 오시傲視하는 기안氣岸을 불러 하당격범조何當擊凡鳥(화응畵鹰)를 외웠다. 그러나 바라는 벼슬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살림은 여식旅食으로 버티었다.

이 어간에 부賦를 바칠 기회를 얻어 ‘3대예부大禮賦’ 로써 크게 당唐 현종玄宗의 예상睿賞을 입었으나, 날뛰는 호반虎班들의 시세움이 앞질러 명황明皇의 총聰을 흐리고 겨우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낙착되었으매, 아예 불부不赴하였다. 비록 5두斗의 태창미太倉米로 연명을 할망정 지음知音과 더불어 통음痛飮하며, 제후帝侯의 지나친 개변開邊과 외람된 허영을 뇌었고, 권귀權貴들의 가혹한 취렴聚斂과 분외分外의 번비煩費로 말미암은 사회의 난상亂相을 개탄慨嘆하며, 평민의 소설騷屑를 대민代憫하기에 붓방아가 바빴다. 이즈음에 기우러가는 조강朝綱의 실태를 정사正寫한 병차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세병마洗兵馬, 전후출새前後出塞 및 봉선현영회奉先縣詠懷의 혈서血書가 거리낌없이 토吐해져 나왔다.

천보天寶 14년 (755년) 11월, 안록산의 난亂이 발발하자, 처자를 데리고 백수白水로 피난하다가 잡혀 연금軟禁 신세가 되었다. 그 서슬에서도 밤낮 행재行在를 그리며 미인곡美人曲을 외쳤으니, 애 강두哀江頭, 애 왕손哀王孫, 춘망春望, 등은 그 명증明證이다. 이 추상열일秋霜烈日의 고조苦操는 드디어 생사를 맡긴 탈출을 감행케 하여, ‘생환금일사生還今日事 간도잠시인間道暫時人(희달喜達 행재소行在所)’ 의 환호를 남겼다. 행궁行宮에 들이달아 숙종을 뵙자 곧장 좌습유左拾遺에 보補해졌다. 그 뒤 재상宰相 방관房琯의 파직罷職을 역간力諫한 항소抗訴가 마침내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가솔家率이 기식寄食하고 있는 여주로 도섭귀徒涉歸했다. 이 때의 정상情狀을 실사實寫해내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경륜까지 밝힌 장편이 바로 대표작 ‘북정北征’ 의 700자의 오언고시五言古詩다.

수경收京과 더불어 복직은 됐지만 환로宦路는 여전히 부진했고, 다만 사신詞臣과 수창酬唱 (조조대명궁早朝大明宮) 과 수 편의 응제시應制詩로 자못 열熱 없는 한적閑適을 엿뵈다가 화주華州의 연리掾吏로 좌천左遷됨에 따라 , 미구未久에 기관棄官하고 말았다. 이즈음 토적討賊의 전선前線인 낙양 왕래에서 얻은 중편 ‘삼리三吏’와 ‘삼별三別’ 은 자외字外에 도사린 정단情端이 하도 생생하여, 그 잔혹殘酷한 부렴賦斂이 사뭇 엊그제 이웃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삼삼한 인력引力이 다가선다. 실의와 곤고困苦의 볼모가 된 두보는 차마 사발농사를 다짐하고, 멀리 감숙성 진주秦州 (천수天水) 로 백년전봉百年轉蓬의 길을 떠났다. ‘滿目悲生事(진주秦州 잡시雜詩)’ 의 상란喪亂 속에서 구태어 구안俱安을 가려서가 아니라 , 다닥친 가난에 견딜 수가 없어 도궁장우생途窮仗友生 (객야客夜) 의 막길이었다. 딴은 불난석不暖席을 자위自慰로 동서남북인이 되어 인민의 비량悲凉을 샅샅히 목도目睹했고, 그 천공天工의 결과는 소재素材를 부박剖璞하기에 견민見珉의 문자가 가읍귀신可泣鬼神으로 해펐다.

그러나 진주는 소문과 딴판이었다. 요충要衝에 따르는 응접應接이 본성本性을 다쳐 경년經年이 못 돼서 또 ‘무식문락토無食問樂土 무의사남주無衣思南州(발發 진주秦州)’ 를 하늘처럼 믿고 ‘대재건곤내大哉乾坤內 오도장유유吾道長悠悠(동상同上)’ 로 초라함를 달래며, 이른바 조도鳥道를 솔권率眷한 채 동곡同谷을 지나 검각劍閣의 잔운棧雲을 넘어 성도成都에 다다랐다. 이 고비를 겨우 산채山菜와 상율橡栗로 끼니를 보탠 저공狙公이었으나, 동곡현가同谷縣歌를 비롯한 기행紀行 24편은 자신의 기구와 민생의 처참을 혈루血淚로 아프게 새기기에 만유萬有의 얼룩을 찍어놓았다. 물루物累에 감겨 1세歲4행역行役 (발發 동곡현同谷縣) 에 시딜리면서도 우국련민憂國憐民의 벼리는 잠시도 빠치지 못 하는 두보였다. 여기에서 매반불망군每飯不忘君 (소식蘇軾) 은 두보의 본령本領을 묘적妙摘하여 조린 정평定評이다.

파촉巴蜀에서 고을을 사는 친붕親朋들의 주선으로 성도 성밖 완화계에 초당草堂을 결은 두보의 생활은, 실로 모처럼만에 누린 소강小康이었다. 여기서 절도사 엄무의 막하幕下에 들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에 천거薦擧되었다. 이것이 ‘두공부’ 라는 관칭官稱의 비롯이다. 그러나 구난救難의 사우詞友였던 고적과 정친情親의 엄무가 사거死去하자, 그의 살림은 다시금 근거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천하를 뒤엎은 ‘안사安史의 난亂’ 은 자상잔해自相殘害의 혼란을 타서 회흘回紇의 의용義勇과 관군의 진격으로 겨우 평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간난艱難과 요도潦倒에 지친 만리 병객의 두보는 덧없이 청춘작반호환향靑春作伴好還鄕 (문聞 관군官軍 수하收河 남북南北) 을 방가放歌하며 장강을 타고 강릉으로 내렸다. 그러나 폐질肺疾, 소갈消渴과 학질瘧疾과 중풍中風 등의 증세가 도져 부득히 예주 (봉절) 에서 내려 매의북두망경화每依北斗望京華 (추흥秋興) 의 3년을 격주擊舟한 채 지냈다. 여기서도 지기의 도움을 받아 다소의 유여有餘가 있어, 제법 조숙종인타棗熟從人打 (추야秋野) 를 외고, 견수급중다遣穗及衆多 아창계자만我倉戒滋蔓 (장망보수시수귀張望補수시水歸) 의 콧노래가 드높아 使揷疏소 却甚眞 (우정오랑又呈吳郞) 으로 나무라는 나위가 있었다. 따라서 노갱성老更成의 붓은 전집의 2/ 7인 430여 편을 기쳤으니, 저 광고曠古의 절창絶唱 추흥秋興, 영회고적詠懷古蹟, 제장諸將, 추일변부영회秋日變府詠懷, 구일九日, 추야秋野 등이 모두 이 2장에서 얻어진 시율세詩律細의 유산임은 자못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천후天候와 식음이 못마땅하여 결국 대력大曆 3년 (768년) 정월 무협巫峽을 떠나 동정호洞庭湖로 내려와 금상악양루今上岳陽樓 (등登 악양루) 의 장관을 보았다. 무른 명기문장저名豈文章著 (여야서회旅夜書懷) 의 안깜힘을 재운 채 북행을 꾀해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또 지방의 소요騷擾를 만나 상륙도 못 한 채, 고주孤舟를 남으로 돌려 담주로 피했다. 공교롭게도 거기서도 민우民憂를 만나 다시 형주로 내렸다가 다시 남하하여 임주에서 녹사참군錄事參軍으로 있는 내구內舅 (최위催偉) 에 빌붙으려 다가 내양에서 폭우에 막혀 방전역에서 닻을 지었다. 기진한 두보는 그곳 현령의 대접을 심사深謝하고 마지막 북상을 강행했다. 그러나 병구病軀가 고행을 이기지 못 해 상강 주중舟中에서 그 성명동사이聲名動四夷 (백거이白居易) 의 붓을 영원히 놓고 말았다. 때는 대력 5년 (770년) 겨울, 향년 59세, 실 다사다한多事多恨의 생애였고 지루한 우경행각盂耕行脚이었다.

두시杜詩는 모조리 알뜰한 사실寫實문학이며, 생활문학일 뿐만 아니라 , 민시병속憫時病俗의 소위所爲에 있어 항상 충후측항忠厚惻恒한 용심用心과 진선폐사陳善閉邪의 기사紀事는 능언재사能言才士로 는 도저히 미치지 못 할 높깊은 천진天眞이니, 여기에 차마 품앗이 못 할 만세萬世의 법정法程이 이룩되었다. 더구나 그 예술은 생동하는 활자요, 핍진逼眞의 배열排列이요, 착색着色된 신어新語요, 치밀緻密한 묘사描寫요, 화성化城의 절족節族으로, 워낙 ‘능소불능能所不能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 (원진元稹)’ 의 대손代孫에서 2율律이 골라진 교향악이요, 맥脈과 향香을 갖춘 천연색 영화라고 기려 마땅하다. 이는 독서파만권讀書破萬卷 (증위좌승장贈韋左丞丈) 으로 모탕을 삼고, 전익다사시여사轉益多師是汝師 (희위戱爲6절絶) 로 작위作爲를 다듬었고,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강상치수江上値水) 의 심수深愁로 다져진 천인天人 합작合作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조신여명구멸爾曹身與名俱滅 불폐강하만고류不廢江河萬古流(희위戱爲6절絶)’는 진작 자가의 후일을 예언한 시참詩讖이 되고 말았다.

고금 시인들의 경력을 더듬어보면 전란을 겪은이가 거의이며, 갖가지의 체험과 구차스런 삭적削迹 역시 두보만의 전사는 아니었다. 1,200으로 헤아리는 당 시인이 모두 뼈져리게 겪은 외우내환外憂內患이었다. 그러나 그 격앙激昂의 정경情景을 정사正寫한 무한치밀無限緻密이 과연 두보에 비길 수 있겠는가가 문제의 초점이다. 따라서 두보는 븐명 제 3의 이목耳目의 소지자다. 그의 시는 이른바 하필여유신下筆如有神(증위좌승장贈韋左丞丈)으로 조형造型되었고, 탄식장내열嘆息腸內熱(봉선현영회奉先縣詠懷)의 도가니로 수혈輸血되었다. 펑퍼진 자연을 마음대로 반죽했고, 어수선한 세사世事를 뜻대로 개칠改漆하기에 성공했다. 여기에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벗어난 제물론齊物論이 성립되었다. 여기에 경중景中의 정情이 있고, 호소呼訴 뒤에 사랑이 있을 수 있었다. 이 자외字外의 각고刻苦가 이백이 가론 ‘차문도래태유생借問到來太瘐生 총위종전작시고總爲從前作詩苦(희증두보戱贈杜甫)의 묘지妙指다.

사실 두시에 부각浮刻된 온갖 원억冤抑은 평인平人의 혈루血淚요, 그네들의 대변代辯이다. 그래서 집중集中에 ‘한恨, 루淚, 우憂, 수愁’자字가 지천至賤이다. 그러나 낯가운 근시近視는 날자辣刺한 현실에 휘감겨 차라리 쾌락을 누림이 오히려 장기長技요 기풍氣風이었으니, 기탄없이 내뿜는 ‘주문주육취朱門酒肉臭 노유동사골路有凍死骨’과 ‘건곤함창乾坤含瘡이 우우하시필憂虞何時畢(북정北征)’의 분절憤切은 워낙 눈의 가시오 귀 거슬리는 극론劇論이라 말살抹殺치 못 해 애가 탔다. 두시는 철두철미徹頭徹尾 과학적인 결구結構라 일자一字의 가감加減을 불허不許하는 불간不刊의 시전詩典이다. 모름지기 정음正音은 범골凡骨에게는 불합不合함이 고금古今의 동탄同嘆이지만, 정론正論이란 급기야 정해지고 마는 것도 또한 통칙通則이다.

두시집은 진작 비부祕府에 60권이 간수되었다. 허나 그 때 이미 인멸湮滅되었고, 지기知己 번황樊晃이 두공부소집小集 (망실亡失) 이 그 남상濫觴이다. 이어 시체별詩體別로 집성集成한 송宋 왕수王洙 편編의 두공부집 20권 (1039년) 을 거쳐, 편년체編年體로 개찬改撰한 채몽필의 두공부초당시전草堂詩箋 40권 (1204년) 과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사보유詩史補遺 10권 (1204년) 과 유진옹劉辰翁 비점批點의 집천가주集千家註두공부시집 20권 (1536년), 그리고 부문별로 간추린 고초방高楚芳 편編의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 25권 (1200년) 에 이르렀고, 특히 청학淸學의 결실인 전겸익錢謙益의 두공부시전주箋注 (1667년) 와 양윤楊倫의 두시경전杜詩鏡銓 (1791년) 은 쌍벽雙璧에 값하고, 구조별仇兆鱉의 두시상주杜詩詳註 (1703년) 은 주두서註杜書의 대 집성이다.

한편 이 찬두讚杜의 유풍遺風은 아방我邦에 그대로 답습되어 김부식 이래의 모소慕蘇로 다소의 놀림은 받았으나 이제현, 이색의 대가大家가 있고, 드디어는 채주蔡註와 황주본黃註本의 복각覆刻까지 보았다. 다시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그 숭유崇儒정책의 각광을 받아 두시집 특히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는 갑인동자본甲寅銅字本 (1434년) 외에 목판본 등 5종이 현존한다. 또한 두시의 全 주석서인 을해乙亥동자본의 두시언해杜詩諺解 (1481년) 는 시단詩壇의 여력餘力을 과시한 대저大著로, 학사學社는 무론 시학詩學개발에 큰 파문을 던져 200래來의 모소풍慕蘇風을 가시는 진원震源이 되었다. 이 풍기風氣는 마침내 우백생虞伯生의 우주두율虞註杜律 (7언言) 과 조방趙汸의 조주두율趙註杜律 (5언) 의 판종板種을 10지指로 곱게했고, 이 치성熾盛한 학두열學杜熱은 바야흐로 형성될 목릉성제穆陵盛際의 밑바대가 되었다.

본시 송학宋學을 존중한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우두열右杜熱은 주희朱熹의 영향이 컸다. 그로말미암아 각인各人의 시문집에는 심장적구尋章摘句는 무론 저마다 화운和韻하여 효빈效顰의 애도 무척 썼고, 입언立言의 용도用道도 무진 써보았다. 그 가운데서 서거정, 김종직, 권필의 두벽杜癖이 샛별 같다. 더구나 이식의 찬저撰著 찬주두시택풍당비해簒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 (1640년) 은 두시가 동래東來한 이래 유일의 전서專書다. 이를 전후해서 두시언해의 중각본重刻本 (1632년) 이 거듭되었고, 유인몽, 감찰합, 정약용의 대수大手가 뒤를 이었다. 또한 시문학 중흥에 앞장서서 시범示範한 정조正祖의 유육입두由陸入杜는 선조조宣祖朝 이래의 풍웅고화豊雄高華를 젖히고 기괴奇怪와 첨신尖新의 기상氣象을 고취鼓吹하고자 ‘두육분음杜陸分韻 두육천선杜陸千選 (1790년)’ 으로 학사學杜의 준적準的을 삼았고, 다시 신위申緯의 유소입두由蘇入杜는 판을 치던 실학사상에 휩쓸렸으나, 학두였음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이 시풍詩風의 일변一變으로 희미해가던 소단騷壇에 새로운 불씨가 앉혀져 후後4가家가 니왔고, 다시 한말韓末의 휘미揮尾를 장식했으니, ‘천하기인학두보天下奇人學杜甫 가가시축최동방家家尸祝最東方(신위申緯)’의 가림이 거짓이 아니다.

시詩로 역사로 표현한 시성詩聖 (Daum 백과사전에서 보완)

그 자신은 시성,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고 불리는 중국 최고의 시인 두보는 나라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처럼 여긴 충신이었다. 정의가 없는 사회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고 가슴 아파한 인도주의자였으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 시인이었다. 두보는 현종, 숙종, 대종 3대에 걸쳐 살았다. 이 시기는 당나라가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쇠락하던 전환기로, 급격한 사회 변화와 온갖 모순이 두드러지게 노출되었다. 두보는 이런 변화와 혼란의 한복판에서 가장 고통받고 희생되었던 백성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었다. 두보의 시에서 시대의 아픔과 그로 인한 민중의 아픔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두보

두보는 당 현종 즉위년인 712년 오늘날의 하남성 장안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두심언杜審言 은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고, 아버지 두한杜閑 은 뜻을 이루지 못한 서생이었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혹은 소릉야로少陵野老로 후세에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는 장안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만년에는 공부원외랑을 지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렸다.

두보는 일곱 살 때 이미 ‘봉황시’ 라는 시를 짓고 아홉 살 때는 글씨를 쓰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는 조부가 저명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두보가 창작에 뜻을 두게 된 데는 어린 시절 조부의 영향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 집을 떠나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시 ‘망악望岳’ 에서는 당시의 자신감 있고 패기 넘치는 젊은 두보를 만날 수 있다.

태산은 어떠한가 岱宗夫如何.

제나라와 노나라에 걸쳐진 그 푸르름에 끝이 없구나 齊魯靑未了

천지의 신비롭고 빼어난 것들이 모두 모였으며 造化鐘神秀

산의 남과 북이 아침과 새벽을 가르는구나 陰陽割昏曉.

겹겹이 피어나는 구름으로 가슴을 씻고 盪胸生層雲

두 눈을 크게 떠 둥지로 돌아가는 산새를 바라본다 決啙入歸鳥.

내 반드시 태산의 꼭대기에 올라 會當凌絶頂

뭇 산의 낮음을 굽어 보리라 一覽衆山小

태산은 어떠한가 岱宗夫如何.

제나라와 노나라에 걸쳐진 그 푸르름에 끝이 없구나 齊魯靑未了.

천지의 신비롭고 빼어난 것들이 모두 모였으며 造化鐘神秀

산의 남과 북이 아침과 새벽을 가르는구나 陰陽割昏曉.

겹겹이 피어나는 구름으로 가슴을 씻고 盪胸生層雲

두 눈을 크게 떠 둥지로 돌아가는 산새를 바라본다 決啙入歸鳥.

내 반드시 태산의 꼭대기에 올라 會當凌絶頂

뭇 산의 낮음을 굽어 보리라 一覽衆山小

그러나 두보는 시작詩作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과거에는 수차례 불합격했다. 그는 스물네 살 때 첫 과거시험을 보고 낙방했다. 이때는 간신 이임보李林甫가 정권을 전횡하고 있을 때라 공정하게 선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보는 이때까지는 크게 낙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 황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라는 충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보는 이후 다시 한 번 더 유랑을 떠나게 된다.

두보는 약 30세가 되던 741년에 양씨와 결혼한 후 단 한 번도 첩을 두지 않았다. 부인 양씨는 현모양처로 두보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지극히 궁핍한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두보의 곁을 지켰으며, 두보는 그런 아내를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시를 짓곤 했다.

두보가 살던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는 것이었다. 하여 두보도 더 이상 가난을 못 이겨 미관말직이라도 얻을 양으로 746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장안은 재상 이임보의 횡포와 양귀비의 일족들이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며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보는 출사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그는 스스로 노자의 후손이라고 칭하는 당 황실에 잘 보이고자 도교를 칭송하는 ‘삼대례부三大禮賦’ 를 지어 현종에게 올려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 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두보는 결국 임용되지 못했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두보는 장안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집권자들이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반면 백성들의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장안 시절 두보는 분명 불행한 생활을 했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그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때 정부와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의 참담함을 표현한 명작들이 창작되었다. ‘여인행麗人行’ 에서는 양귀비의 사치와 향락을 통해 절대 권력자의 방종을 고발했고, ‘병거행兵車行’ 에서는 어린 나이에 출정하여 마흔이 넘도록 전쟁터에서 고통을 겪는 백성의 원망을 한 병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다. 두보 개인에게도 아픔이 찾아왔다. 자식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이에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라는 명구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

음중팔선도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를 옮긴 그림. 여덟 신선이 술을 마시며 세속의 일을 한탄하며 시를 짓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이 시에는 당시 도교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755년 양귀비의 양자인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장안과 낙양을 비롯한 중원 지역을 모두 수중에 넣었다. 당 현종은 장안을 빠져나갔고, 백성들 함께 피란길에 오른 두보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어느 시골집에 자리를 잡았다. 두보는 태자 이형이 영무에서 숙종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다 도중에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일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이때 두보는 〈춘망春望〉을 지었다. 〈춘망〉에서 두보는 조정이 정치를 잘못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국토와 백성이 고통받는 시대를 슬퍼했다. 동시에 그 옛날 자신감이 넘치던 젊은이는 온데간데없고 상념에 젖어 가족을 그리워하는 백발의 서글픈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國破山河在

성 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城春草木深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感時花濺淚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恨別鳥驚心

봉홧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烽火連三月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家書抵萬金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白頭擾更短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 渾欲不勝簪

757년 간신히 장안을 탈출한 두보는 팔꿈치가 다 드러나 해진 홑두루마기를 입고 낡은 삼신을 신고 숙종을 찾아갔다. 그는 좌습유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일 년 만인 758년에 화주華州의 사공참군이라는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삶의 본질이 절대 권력에 의해 파괴되어 고통받는 현장을 고발한 대표작 ‘삼리삼별三吏三別’, 즉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이 탄생했다.

759년 그는 전쟁과 기근을 피해 사천성의 성도로 피신했다. 친구인 엄무嚴武가 후원자가 되어 주었고, 그는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여 비교적 안정적이고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두보의 시풍은 이때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나라와 백성을 향한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자연과 함께하는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많아진 것이다. 쉰 살이 가까워진 두보의 심경 변화는 ‘춘야희우春夜喜雨’ 에서 잘 드러난다.

좋은 비는 계절을 알고 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곧 내리기 시작한다 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이 밤에 살짝 스며들어 隨風潛入夜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신다 潤物細無聲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野徑雲俱黑

강 위의 배는 불을 외로이 밝혔다 江船火燭明

이른 아침 분홍빛 젖은 곳을 보니 曉看紅濕處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花重錦官城

그러나 두보의 만년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엄무가 죽고 난리가 나자 그는 사천 지방을 전전하다가 766년에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도착했다. 768년에는 다시 강릉을 거쳐 악양에 이르렀다. 이 당시 두보는 이미 폐병, 중풍, 학질, 당뇨병의 후유증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등 심신이 쇠퇴한 상태였으며 가난은 극에 달했다.

769년에는 배에 거적을 얹어 지붕을 만든 배를 집 삼아 동정호를 떠돌아 다녔다. 쉰아홉의 나이에 두보는 아무도 모르게 고생스러운 일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홍수로 인해 고립되어 열흘을 굶은 두보에게 뇌양 현령이 소고기와 술을 보냈는데, 이를 모조리 서둘러 먹어치우는 바람에 그날 밤 복부가 부어올라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이외에도 그가 물에 빠져서, 독에 중독되어서 혹은 오랜 뱃생활로 인해 병들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동정호

하지만 그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고도의 예술적 표현력이 발휘된 율시와 절구를 완성하여 중국 근체시를 집대성했고, 그가 남긴 시는 당 대부터 후대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시성’으로 존경받았다. 특히 결혼 이후 장안 시절 지어진 두보의 시는 사회시적 성격이 강하다. 두보는 나라와 백성에 대한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시대 상황을 고민하여 당시 가혹한 사회 현실을 비판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장편 고체시古體詩 (글자나 글귀의 수가 일정하지 않고, 운을 맞추는 것도 법칙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한시) 들은 ‘시로 표현된 역사’ 라는 뜻에서 ‘시사’ 라고도 불린다.

<사족蛇足> 두공부집과 이백문집은 역자의 현학적衒學的 해설과 학자연學者然하는 고답적高踏的 표현으로 윤색潤索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생각 같으면 제외하고 싶었으나 편집된 묶음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윤색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 하여 윤색하였다. 이에 Daum 백과사전의 해설을 첨가한다.

069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 (1080) 이백李白

이백李白 (이태백의 태太는 위대하다는 뜻의 존칭尊稱이고, 태백은 자字) 의 시문집詩文集으로는 이미 그의 생시에 그를 사숙私塾하였던 위호魏顥가 편찬한 이한림집李翰林集 (한림은 벼슬명) 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원형대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것은 송대宋代에 간행된 것들이다. 북송의 송민구가 편찬한 이백의 시집을 송의 증혁이 개편한 분류보주分類補註이태백집과 송간宋刊 이태백문집이 그것들이다. 촉간蜀刊 송간본 이태백문집의 경우 도합 30권이 12책冊으로 되어 상하 2질帙을 이루고 있는데

제 1권, 그 이전의 별집 (편저) 서序 3편 및 묘비문류墓碑文類 4편

제 2권 - 제 24권, 가시歌詩 총 994수首

제 25권, 고부古賦 8편

제 26권 - 제 30권, 문文 (표表, 서書, 서序, 찬讚, 송頌, 명銘, 기記, 비碑, 문文) 총 58편

송간宋刊 이태백문집 이후 원간元刊, 명明간 및 청淸간 분류보주分類補註이태백시 등이 있으나 제목이 이태백문집으로 되어있는 것은 청대의 습일파가 편찬한 것 (4책 30권) 과 왕기의 이태백문집집주 (16책 36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수록 작품 수에 있어서는 송간본과 비슷하여 청조 강희 년 간 (18세기 초) 에 편찬된 전당시全唐詩 및 전당문에 수록된 이백의 작품 수 (시詩 1004수, 구句 1수 제외, 문文 67편) 보다는 약간 적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것으로는 이른바 조선동활자본 분류보주이태백집이 있는데, 정확한 간행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형본 15책 25권으로 되어, 제 1책에는 서례序例, 별집서別集序, 연보年報를 수록했고, 제 2책에서는 제 14책까지가 부시賦詩, 제 15책이 문으로 되어 있다. 이 동활자본에 수록된 작품 수는 부 8편, 시가詩歌 982수, 문 62편으로 옥궤산인교각玉几山人校刻으로 된 같은 제목의 명간본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태백 (태백은 자字) 당 측천무후 장안 원년 (701년) 에 촉蜀 면주 창명현 (사천성 사천도 창명현) 청련향에서 나서 숙종 보흥 원년 (762년) 당도 (안휘성 무호도 당도현) 에서 잔殘했다 (이백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역대 이설이 있었고, 잔년에 대해서도 광덕 원년 (763년) 이라는 추정도 있음). 그러나 이백의 생애는 초당 말엽에서 성당의 거의 전 시기에 걸친 셈이다.

약 100년 동안의 초당시대는 유학과 문학이 정책적으로 장려된 시기다. 경향 각지에는 각급 학교가 서고, 중앙에는 유학연구를 위한 문학관이 설치되고, 조정에는 공적公的인 賦詩의 기회가 마련되어, 마침내는 관리 등용문인 과거科擧에 시부詩賦가 시험과목을 채택되었다. 그 중에서도 태종의 유학 장려와 무후의 문학 애호는 특기할만하다. 이러한 초당의 문학 진흥의 기운은 성당기에 들자 현종의 총명한 치세로 더욱 무르익어, 개원, 천보 양 년대를 통한 40여 년 간의 태평한 기간은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실질과 문사文辭를 겸하는 이른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풍조가 초당기부터 크게 일어난 것은 말하자면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러나 문화의 타성은 쉽사리 새로운 성과를 낳게 하지는 않는 법으로, 6조朝와 수隋의 형식 편중의 경향이 초당기의 시에서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다. 즉 초당기의 시풍은 문에 치우쳐 질에 있어서는 빈약함을 면치 못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풍이 문과 질을 겸비하게 된 것이 성당기였고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백과 두보다. 시인은 천품天稟을 타고남과 동시에 때를 잘 만나야 한다면 이백은 시인으로써 지극히 다행한 시기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성격과 생애는 시인으로써 특히 동양의 시인으로써는 전형적이다. 그의 성격은 세속을 초탈하여 시주詩酒와 산수山水를 사랑했고, 그의 생애는 파란波瀾과 유랑流浪으로 일관하였다. 25세 경부터 시작된 그의 유랑은 종생토록 계속되었으나, 유랑 도중 천보 2년 43세 때 장안에서 한림공봉이라는 벼슬을 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으나, 환관宦官 고력사의 중상으로 다음 해에 파면되었다. 또한 건원 1년 58세 때에는 영왕의 반군叛軍과의 관련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되어 야랑에서 한 해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이백은 세속을 초월하여 시주를 사랑한 뢰락磊落한 풍모는 두보의 음중飮中8권가倦歌 중의, 이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널리 알려져있는 시행詩行이 잘 나타내고 있다.

‘이백일두시백편李白一斗詩百篇 장안시상주가면長安市上酒家眠/ 천자호래불상선天子呼來不上船 자칭신시주가권自稱臣是酒中倦’

이백을 주중선酒中仙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도 보이지만, 그를 ‘천상적선인天上謫仙人(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장안의 자극궁에서 만난 하지장賀知章에서 비롯한다. 위로는 천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아래로는 처자를 돌볼줄 몰랐던 선풍도골仙風道骨, 평생을 술과 시와 유랑으로 보낸 시인의 전형이 이백이다.

이백의 시에서 신선, 산수, 음주, 부녀의 네 가지가 빈번히 제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그의 성격과 생활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선설에의 경도傾倒를 특히 현저하게 보이는 작품으로‘고풍가시古風歌詩 59수’중 9수가 있어,‘오장영단사吾將營丹砂 영여세인별永與世人別’이라는 등의 싯구가 보인다. 산수의 애착을 보이는 작품으로는‘산명월로백山明月露白 야정송풍욕夜靜松風欲 선인유벽봉仙人遊碧峰 처처생가발處處笙歌發’과 같은 싯구가 보이는 유태산遊太山과 같은 산수애와 신선설이 결부된 것들이 있는 가 하면, ‘일조향로생자연日照香爐生紫煙 요착폭포과장천遙着瀑布挂長川 비류직하삼천척沸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이라는 망로산폭포 와 같은 단순한 서경시敍景詩도 있다.

음주飮酒에 관한 이백의 작품으로는 ‘삼백육십일三百六十日 일일취여니日日醉如泥 수위이백부雖爲李白婦 하이태상처何異太常妻’라는 증내贈內(아내에게)를 비롯하여 허다허나, ‘삼배통대도三盃通大道 일두합자연一斗合自然 단득주중취但得酒中趣 물위성자전勿爲醒者傳’이라는 구가 보이는 ‘월하독작사수月下獨酌四首’, ‘군블견황하지수천상래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분류도해불복회奔流到海不復回 군불견고당명경비백발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조여청설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 인생득의수진환人生得意須盡歡 막사금존공대월莫使金樽空對月 …’하는 ‘장진주將進酒’,‘청천유월래기시靑天有月來幾時 아금정배일문지我今停盃一問之 인반명월불가득人攀明月不可得 월행각여인상수月行却與人相隨 …’하는 ‘파주문월把酒問月’ 및‘… 수무석상월手舞石上月 슬행화간금膝橫花間琴 과차일호외過此一壺外 유유비아심悠悠非我心’이라는 ‘독작獨酌’ 등이 특히 잘 알려진 것들이다.

부녀婦女에 관한 작품으로는 ‘목란지설사당주木欄之枻沙棠舟 옥편금관좌량두玉篇金管坐兩頭 미주준중치천곡美酒樽中置千斛 재기수파임거류載妓隨波任去留 …’라는 ‘강상음江上吟’식의 호유풍豪遊風은 적고, 악부樂府 즉 속요풍俗謠風으로 다룬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군가양판아君歌楊叛兒 첩권신풍주妾勸新豊酒 하허최관인何許最關人 오체백문류烏啼白門柳 …’라는 ‘양판아楊叛兒’, ‘고야계방채연녀若耶溪傍採蓮女 소격하화공인어笑隔荷花共人語 일조신장수저명日照新粧水底明 풍표향수공중거風飄香袖空中擧 …’라는 ‘채련곡採蓮曲’ 및 원행遠行한 남편을 기다려‘문전지행적門前遲行跡 일일생연태一一生緣苔 태심불능소苔深不能掃 낙엽추풍조落葉秋風早 팔월호접래八月胡蝶來 쌍비서원초雙飛西園草 감차상접심感此傷妾心 좌수홍안로坐愁紅顔老 …’라는 ‘장간행長干行’ 등으로, 이러한 작품은 화자話者가 여인女人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색이다.

시체詩體로 보면 고시古詩와 절구絶句에 능하고 율시律詩에 약하다는 것이 이백의 시에 대한 정평이다. 고시 중에서도 악부 형식과 장단구長短句에 있어 그가 비할 바 없이 능했음은 그의 분방奔放한 시재詩才에 구속이 덜한 자유로운 형식이 적합했고, 또한 절구에 능했음은 그에게 즉흥卽興이 어울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백은 각고조탁刻苦彫琢의 시인이기보다는 천재天才와 영감靈感의 시인으로 ‘약유인해사명고若有人兮思鳴皐 조적설혜인번로阻積雪兮心煩勞 …’로 시작하는 ‘명고가鳴皐歌’, ‘원별리遠別離 고유황영지이녀古有皇英之二女 내재동정지남乃在洞庭之南 소상지포瀟湘之浦 해수직하만리심海水直下萬里深 수인불언차리고誰人不言此離苦 …’라는 ‘원별리遠別離’ 및‘ … 문군서유하시환問君西遊何時還 외도?엄불감거畏途?巌不敢擧 단견비조호고목但見悲鳥號古木 웅비자종요림간雄飛雌從繞林間 우문자규제야월수공산又聞子規啼夜月愁空山 촉도지난난어상청천蜀道之難難於上靑天 사인청차조주안使人聽此凋朱顔 …’이라는 구가 보이는 ‘촉도난蜀途難’ 등은 장단구長短句 내지 악부가행樂府歌行으로 특히 유명하고,‘아미산월반륜추峨眉山月半輪秋 영입평강강수류影入平羌江水流 야발청계향삼협夜發淸溪向三峽 사군불견하유주思君不見下渝州’라는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 ‘고인서사황학루故人西辭黃鶴樓 연하삼월하양주烟花三月下揚州 호범원영벽산진弧帆遠影碧山盡 수견장강천제류唯見長江天際流 ’라는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및 ‘조사백제채운간朝辭白帝彩雲間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 양안원성제부진兩岸猿聲啼不盡 경주사과만중산輕舟巳過萬重山’이라는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과 같은 작품은 그의 허다한 절창絶唱 절구絶句 중에서도 여행(유랑流浪)에 관한 것들이다.

‘백야시무적白也詩無敵 표연사불군飄然思不群 …’이라고 이백을 격찬한 것은 두보였지만 흔히 두보가 리얼리스트요 조탁彫琢의 시인, 우수憂愁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이백은 로맨티스트요 천재의 시인, 풍류의 시인으로 일컬어져,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백을 시선詩仙이라고 하고, 두보를 시성詩聖이라고 하는 것도 그 대조를 잘 요약한 호칭이다. 역대歷代로 이 두 시인에 대해서는 그 우열優劣과 장단長短을 논한 여러 가지 평설이 있었으나 총체적인 평가는 평자의 기호嗜好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백을 신선류의 로맨티스트로만 보기 쉬운 그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에는 다소 제한을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이백의 문학에는 신선되기를 이상으로 하는 도가적道家的 색채를 비롯하여 불교 내지 노장老莊의 영향을 두루 보이고 있지만 그의 사상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유교다. 따라서 그의 산문에서는 ‘사군지도성事君之道成 영친지의필榮親之義畢 연후여도주류후然後與陶朱留候 부오호희창주浮五湖戱蒼州 부족위추의不足爲革隹矣(대수산답맹소부이문서代壽山答孟少府移文書)’이라는 유교적 이상을 보이는 구절이 나타나있고, 그의 시에는 국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뚜렷이 보이는, 이른바 풍자시諷刺詩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옥계생백로玉階生白鷺 야구침라말夜久侵羅襪 각하수정렴却下水晶簾 영롱망추월玲瓏望秋月’이라는 옥계원玉階怨이나 유명한 청평조淸平調 3수 같은 작품 가운데도 암암리에 군왕의 미인에 대한 미혹迷惑을 풍간諷諫하고 있다.

따라서 이백은 정상적인 현실감각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처자와 우인에 대한 정회情懷를 읊은 작품들에 보이는 세계고世界苦의 절실함은 또한 그의 현실감각이 유달리 날카로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작추포객愁作秋浦客 강간추포화强看秋浦花 산천여섬현山川如剡縣 풍월사장사風月似長沙’라는 구를 포함하는 ‘추포가秋浦歌 17수’와 같은 작품에는 유랑시인의 사무치는 객수客愁가 담겨있고, ‘야랑천외원리거夜郞天外怨離居 명월루중음신소明月樓中音信疎 북안춘귀간욕진北雁春歸看欲盡 남래부득예장서南來不得豫章書’라는 ‘남류야랑귀南流夜郞歸(혹惑 기寄)內’라든가 ‘문난지통곡聞難知慟哭 행제입부중行啼入府中 …’이라는 ‘재심탕비소기내在瀋湯非所寄內에는 객리客裡에서 처자를 생각하는 정이 간절하여, ‘척탕천고수滌蕩千古愁 유연백호음留連百壺飮 양적의청담良寂宜淸談 호월미능침晧月未能寢 취래와공상醉來臥空上 천지즉금침天地卽衾枕’이라는 ‘우인회숙友人會宿이나,‘청산횡북곽靑山橫北郭 백수요동성白水遼東城 차지일위별此地一爲別 고요만리정孤遙萬里征 부운유자의浮雲遊子意 낙일고인정落日故人情 휘우자자거揮牛自玆去 소소반마명簫簫班馬鳴’이라는 ‘송우인送友人’과 같은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친구를 좋아하고 우정이 간곡懇曲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은 그의 시를 중심으로 한 이백의 인간과 문학에 대한 소개였으나, 그의 문장 또한 독특한 풍격風格을 가진 화려한 것이었다. 그의 시도 6조풍朝風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나, 그의 산문散文에도 6조朝의 46병체풍騈體風이 농후하여 대우법對偶法을 현저하게 많이 사용한 것으로 ‘부천지자만물지역여夫天地者萬物之逆旅 광음자백대지과객光陰者百代之過客 이부산약몽而浮山若夢 위탄기하爲歎幾何 …’로 시작하는 ‘춘야원종제도리원서春夜宴從弟桃李園序’도 그 뚜렷한 사례다. 내용면으로 그의 산문은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상을 보이고 있어, ‘명당부明堂賦’와 같은 유교적인 사상이 농후한 것을 비롯하여‘동풍귀래東風歸來 견벽초이지춘見碧草而知春 …’으로 시작하는 섬세하고 우아한 ‘수양춘부愁陽春賦’가 있는가 하면 ‘대?부大?賦’와 같은 노장적老莊的 색채가 짙은 것이 있고, ‘숭명사불항존승다라니종송崇明寺佛項尊勝陀羅尼鐘頌과 같은 불교사상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백락천, 왕안석과 같은, 이백을 싫어한 후세의 시인, 학자들도 없진 읺았으나 중국 내지 극동極東문학, 특히 시에 있어 이백의 영향은 너무나도 큰 것이어서 여기서는 논외論外로 하고, 현대의 구미시歐美詩 특히 현대 영시英詩에 대한 그의 영향에 대해서 언급한다. 현대의 가장 저명한 한시漢詩 영역가英譯家는 아더 웨일리였으나, 특히 이백의 작품을 1910년대에 영어로 옮겨, 현대 영시, 특히 이미지스트들의 모범이 되게 한 것은 에즈라 파운드이다. 그러나 파운드에게는 그 당시 한문漢文에 대한 소양素養은 거의 없었고, 그가 가위可謂 우연한 기회에 입수한 어니스트 페넬로사의 유고遺稿를 토대土臺로 하여 영어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의 번역에는 어학적인 착오가 많으나, 그 중에는 원시原詩가 신통하게 잘 옮겨진 것도 있다. 파운드는 이백과 왕유의 시에 그의 이른바 시각시視覺詩의 최대한의 실현을 발견하고, 중국문화에 대한 평생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시각적인 이미져리를 강조한 이미지즘이론을 이백 등의 한시에서 재확인하였다.

술 한 잔에 백 편의 시를 짓다

618년에 건국되어 약 290여 년간 지속됐던 당 왕조는 중국 내륙 왕조 중 한 왕조 이래 두 번째 대제국이었다. 한나라가 한족의 순수한 정체성을 확립했다면, 당나라는 그 정체성의 세계화를 이루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당나라는 사상적으로 대단히 관대하고 방임적이어서 세계문화적 성격을 띠는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특히 당 대의 문학은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했다.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은 그에 따라 시 세계 또한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띠는데, 그는 근체시, 고체시, 악부시 등을 고루 잘 지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잘 맞는 악부시에 특히 뛰어났다. 이백은 또한 서정시의 새 국면을 열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 Daum 백과에서 보완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으로 출생과 본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그가 촉蜀 태생으로, 모친이 꿈에서 태백성 (太白星, 금성金星) 을 보고 출산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왔다는 설로, 이는 아버지 이광李廣이 서역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태어났다는 설과 부친이 서역의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백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단 젊은 시절 촉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은 스물다섯 살 무렵 촉을 떠나 양양, 형주, 무창, 금릉金陵, 양주 등 장강 연안 지역을 유람하며 시 창작의 제재를 얻었다. 그는 안릉安陵에서 10년 정도 머물러 살 때 맹호연 (孟浩然,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긴 시인) 과 교류했다. 이백은 서른다섯 살 무렵 안릉을 떠나 북쪽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산동 연주兗州의 조래산徂徠山에서 도사 공소부孔巢父, 배정裵政 등 네 사람과 함께 머물며 술로 나날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6명을 ‘죽계육일竹溪六逸’ 이라고 불렀다.

이백의 유람 생활은 두 가지로 읽힌다. 단순한 유람 생활이었다는 설과 출사를 위해 명사들과 교류했다는 설이다. 이백은 당시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문장력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어도 왕족이나 제후 등 권세가들에게 청탁하지 않고는 출사하기가 힘들었던 때로, 천성이 청렴했던 이백에게 출사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742년 이백이 회계에서 머물며 교류했던 도사 오균(吳筠)이 현종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갔다. 오균은 현종에게 이백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이에 이백은 장안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망하던 출사를 하게 된 것이다.

장안에 도착한 이백은 오균의 소개로 고관 하지장賀知章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장은 이제야 이백과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백을 ‘적선인謫仙人’ 이라고 칭했다. 이백은 현종을 알현하고 다시 한 번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 (翰林供奉, 천자의 조칙을 기초화하는 일을 하는 관직) 에 임명되었다.

조정에 나간 이백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관직은 유명무실한 직책으로 현종은 그가 관리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펼쳐 주길 바랐다. 이백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령의 현종은 애첩 양귀비와의 환락에 빠져 있었고, 조정은 온통 비열한 소인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당 조정에 실망한 이백은 맘껏 술을 마시고, 미친 듯 행동하며, 장안의 술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느 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침향정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흥을 돋우기 위해 이백을 찾았고, 이미 고주망태가 된 이백이 사람들에게 억지로 끌려왔다. 현종은 친히 이백의 술기운을 깨우고, 양귀비에게 손수 먹을 갈게 했다. 그는 취기를 빌어 〈청평조사 (淸平調詞)〉 3수를 지었다.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 雲想衣裳花想容

살랑이는 봄바람, 영롱한 이슬일레라 春風拂檻露華濃

군옥산 마루서 못 볼 양이면 若非群玉山頭見

요대의 달 아래에서 만날 선녀여 會向瑤臺月下逢

한 떨기 농염한 꽃, 이슬도 향기 머금어 一枝濃艶露凝香

무산의 애절함은 견줄 수 없고 雲雨巫山枉斷腸

묻노니, 한나라 궁궐에 비길 이 있을까 借問漢宮誰得似

조비연이 새 단장하면 혹 모르리 可憐飛燕倚新粧

꽃도 미인도 서로 즐거움에 취한 듯 名花傾國兩相歡

바라보는 임금님 웃음도 가시질 않네 常得君王帶笑看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리며 解釋春風無限恨

침향정 북쪽 난간에 흐뭇이 기대섰네 沈香亭北倚欄干

이백이 단숨에 아름다운 시를 짓자 크게 기뻐한 현종은 이백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이백은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환관 고력사가 자신의 신을 벗기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로 이백은 고력사의 원한을 샀으며, 양귀비 또한 자신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비연 (趙飛燕, 한나라 성황제의 황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으로 여겨진다) 에 빗댄 것 때문에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양귀비나 환관 고력사 등 권세가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킨 이백은 결국 현종에게 중용되지 못했다. 이백은 주색에 빠진 현종에게 환멸을 느껴 744년 장안을 떠났다. 이 시기 이백은 두보杜甫를 알게 되어 그와 우정을 나누며 시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안을 떠난 후 이백은 10여 년간 산동에 거처하면서 유람 생활을 했다.

이백의 친필로 기록된 ‘상양태첩上陽臺’

755년 이백이 명승 노산盧山에 머무를 때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난을 제압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겠다며 강남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백은 이린의 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태자 이형이 이린을 견제하고자 먼저 왕위에 올라 숙종에 올랐다. 후에 숙종의 명령으로 곽자의郭子儀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자, 이린을 도왔던 이백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백은 곽자의와의 친분으로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귀주貴州 야랑夜郞으로 유배를 떠났다. 야랑을 향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이백은 도중에 사면 통지를 받고 풀려났다. 그 후 이백은 금릉金陵, 선성宣城 등 장강 중하류 지역을 유람했다. 그는 만년에 친족인 이양빙(李陽氷)에게 의탁했고, 762년 임종을 맞을 때 시문이 적힌 초고를 이양빙에게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달빛이 은은한 저녁에 취해 우저기牛渚磯에서 홀로 뱃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백이 하늘을 보니 거울 같은 얼음이요, 몸을 숙이니 강물에는 밝은 달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백이 흥에 겨워 강물 속의 달을 건지려다 그만 배에서 떨어져 익사溺死했다는 것이다. 술과 시를 사랑했던 이백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070 신곡神曲 Ladivina commedia (1304 - 1321) 단테 Alighieri Dante

단테의 일생과 작품에 관한 연구와 저술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오늘날까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해석도 시대정신의 변천에 따라 새로운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간단히 다룰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다만 선입견을 넘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파란 많았던 일생과 역사적인 배경이다.

그는1265년 5월 하순에 피렌체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부친 알리기에리 디 벨린치오네는 조부때부터 십자군에 참가한 덕분에 가지게 된 기사귀족의 신분에 알맞게 단테에게 유년시기부터 귀족적인 교양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단테는 귀족적인 양친을 잊어버리고 양모養母 라파차룻휘의 손에서 자랐고, 당시 피렌체의 석학碩學 부르네티 나티니로부터 라틴어 고전을 배웠으나, 그의 문학적인 교양은 독학으로 이루었다. 라틴 고전 중에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을 받고, 번역판을 통하여 그리스철학과 문학에도 심취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문학적인 특히 시에 대한 소질을 나타냄으로써 당시의 피렌체의 문예인서클에 참여하였으며, 블로냐대학에 진학하고는 문인으로써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1283년에 (일설에 의하면 1285년) 1273년부터 형식상의 결혼을 한 렌마도라티와 결혼생활을 하고, 아이를 셋 가졌으며, 흔히 말하는 이 결혼이 불행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단테의 내적인 생활에서 일생 잊을 수 없는 존재로써 베아트리체가 있었으나, 그녀가 다른 귀족에게 출가하고 또 1290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단테 개인의 결혼생활 자체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베이트리체는 단테에게 인간 추구의 유일한 대상이었으며, 그의 종교적인 신앙과 역사적인 환경과 함께 단테의 정신적인 세계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자전적인 산문시집 ‘신생新生(1293년 작품)’에서 그가 말하 듯, 베아트리체의 죽음의 소식이 그에게 얼마만한 충격이었으며,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문학적인 활로가 결정적으로 되는 동시에 피렌체의 경박한 풍조에 경멸과 허무감을 느끼며, 그의 종교신앙에 따라 영원한 세계에서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원화를 시도, 여기서 그의 위대한 작품‘신곡’이 실현되었다.

그는 1295년부터 1302년까지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벌였으며, 피렌체 시에서 고관직을 지내며, 당시 백당白黨인 교황파와 흑당黑黨인 황제파의 대립에서, 그가 쓴 ‘제정론帝政論’에서 보인 그의 정치관에 따라 백당에 가담하여, 교황을 봉건사회의 수장으로 한 정신적인 권위에 입각한 중세 질서 확립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피렌체 백당의 대표로 당시의 교황 보니파치오 8세를 설득하기 위하여 로마에 체류 중, 피렌체에서 흑당의 정변이 성공하여 모든 백당의 간부들이 추방당하여, 단테의 방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공동국가군으로 분열된 이탈리아 각 지방의 군주의 식객생활을 하면서 피렌체에 다시 돌아갈 것을 책동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여 끝내는 생애의 최후 4년 간을 처자와 함께 라벤나 영주領主의 빈객賓客으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내다가, 1321년 9월 13일, 56세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인물로써 널리 알려진 그의 유해遺骸의 반환을 요구하는 피렌체와 거부하는 라벤나의 대립이 격화하였는데 그는 이국 땅 라벤나에 매장되었고, 오늘날까지 안치되어 있다.

그의 작품활동을 보면 상기한‘신생’에 이어 철학 윤리상의 여러 문제를 다룬 ‘향연饗宴(1306 - 1308년)’, 언어와 시형詩形을 논한‘속어론俗語論(1302 - 1305년)’이 있으며, 그의 최대의 걸작 ‘신곡’은 베아트리체의 사망 후 착상되었고, 실제로는 ‘지옥계’가 1304 - 1308년,‘정죄계淨罪界’가 1308 - 1313년,‘천당계’는 일단 중지되었다가 그의 생애의 마지막 7년 간에 집필되었다. 그간 그의 정치관을 그려낸 ‘제정론’이 1312년에 발표되었다.

신곡은 중세의 그리스도교적인 정신환경 속에서 르네상스가 부르짖던 개인으로써 인간의 편력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써, 이성과 낭만, 환상과 지智, 시와 과학이 조화롭게 묘사된 코메디아인 것이다. 원래 단테가 이 작품을 코메디아라고 한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비극에 비하여 끝에서 인간 승리를 찬양하였기 때문이며, ‘Divina (신적神的) 라는 형용사는 후세인들이 그의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널리 받아들인데서 나온 것으로 오늘날 신곡이라고 통론 된 것이다.

지옥계는 단테가 인간이 직면하는 인간의 시련으로써 첫걸음인 슬픔을 엮은 것으로, 참혹한 모습을 그린 것이나, 그러나 여유있는 장난으로써 낭만이 있다. 등장하는 인물로 알 수 있는데, 단테가 인간생활의 축도상縮圖狀으로 재미있게 인간의 비극을 읊으려는 것을 보면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던 인간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그린 지옥은, 삼각三角을 거꾸로 놓은 형태이며, 그 정상은 지면에서 시작되고, 그 밑은 지심地心에 도달하며, 그 사이에 죄상罪狀에 따라 9층이 있고, 각층은 죄인의 죄질에 따라 구별되어 있다. 즉 지옥에 간 혼魂이라도 그 죄상에 따라 가벼운 순서로부터 무거운 것으로 나누어져, 마지막 지저地底에는 천국에서 추방당한 루치훼가 자리잡고 있는 마지막 골짜기이다.

그 암흑에 단테는 그가 가장 영향을 받은 베르길리우스에 의하여 안내되며, 거기서 만 24시간을 보내고, 지옥의 끝 지심으로부터 남반구의 지상으로 오기까지 21시간을 보내며, 다시 지상에 출현하여 다음 장소인 정죄계로 들어간다.

정죄계는 남해에 돌출한 분화산噴火山에 해당하는데, 속죄의 세계를 묘사한 인간의 정情과 인간 현실이 혼동되어 있는 명백하지 않은 세계다. 거기서 단테가 보낸 시간은 만 3일이며, 그 3일은 밤과 낮이 있는 날로 되어 있다. 여기서 벌을 받은 인간은 지옥과 달라 교회에서 규정한 구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죄인 이외에 경범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처량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희망이 있어 지구 보다 더 활기가 있다. 3일을 정죄계에서 보낸 단테는 인간의 승리를 행하는 천국으로 가며, 거기서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3일을 보내는데, 이 3일은 밤이 없는 광명이 계속되는 하루다. 거기까지 안내를 맡아온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라 세례를 받지 못 한 이유로 천당에는 들어갈 수 없어 단테와 헤어진다.

천국은 광명과 춤과 노래의 나라이며, 모든 성인은 회전하는 9개의 천층天層에 나누어 자리잡고 있으며, 끊임없는 음악과 광선의 조화는 신의 정의란 질서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작품의 중세기적 고딕건축양식을 따른 웅대한 균형과 조화는 주목할만 하지만, 더욱이 그 형식에 있어서까지 철저한 그의 종교관념이 지배한 것도 주의할만 하다. 즉 전체적으로 3부로 나누어진 이외에, 각 부는 또 33장으로 분리되어 전곡全曲은 99장으로 구성되고, 거기에 지옥계의 서장序章을 합하면 모두 100장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3이란 숫자가 주인 것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앙에서 나온 것이며, 100은 10의 자승自乘이며, 십은 역시 3의 자승에 1을 합하여 이루어진 완전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시의 운률도 3행으로 구성되는 테르자 리마로 되어 그 총 수는 1,423행이다.

바로 이 작품의 내용과 형태에 나타난 단테의 종교신앙으로 미루어볼 때, 과연 그는 어디까지나 중세기의 교회주의를 대표하는 문인의 지나지 않느냐, 혹은 그 형식을 초월하여 르네상스가 부르짖었던 인간 개인의 확립에 의한 인간 찬미를 추구한 현대인의 선각자였던가 라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된다. 한 작품은 한 작가의 시대적인 감각과 영감의 예술적인 표현이므로, 그 작가의 정신상황을 이해 못 하고는 그 작품의 객관적인 섭취는 이루어지기 어려움으로, 신곡이란 거대한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단테의 역사적인 배경과 그 속에서의 정신 상황의 분석은 불가피하다.

그가 일생을 보낸 시기는 유럽역사에 있어 그리스시대 다음으로 문화적 창조가 풍부한 때이며, 또한 그만큼 사회적인 변동이 극심하던 중세와 르네상스의 과도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움직임의 틈바귀에 끼어 있었던 그가 전통적인 중세기의 종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바이나, 또한 새로이 창조되어 형성되어가는 르네상스시대의 주 테마인 인간 찬미에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상 단테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시대가 태동한 시기다. 중세는 한 마디로 교권敎權시대이며, 정치적으로는 교권의 비호 아래 자라나 신성 로마제국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사회이며, 이 사회 형태는 로마제국 멸망 (476년) 이후 유럽사회를 근 900년 지배하였다.

이러한 정신적 정치적 전제주의에 반대하여 인간 개인의 확립과 자율적인 국가의 독립을 찾으려는 음직임은 11세기 말부터 표면화하여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르네상스 시기의 출현을 가능케하는 여러 사회 조건이 형성되었다. 즉 각국의 어학語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족의식과 더불어 황제권의 약화로 각국의 정치적 독립은 유럽의 정치풍토를 새로이 만들어놓았고, 교권의 타락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을 가져옴으로써, 맹신의 종교로부터 이성적인 종교의 움직임이 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309년부터 1376년에는 프랑스 국왕이 교황을 아비뇽에 납치함으로써, 중세기의 교황,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국가 단위의 새로운 체제가 확립되고, 그 당시까지 불가침의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교권의 타락과 몰락은 교회에 새로운 방향감각을 줌으로써 시대의 주도권은 각 군주와 개인활동으로 넘어가게 됨으로써, 르네상스의 원동력인 개성주의가 강력하게 움직였다. <Uomo Singolare> 또는 <Uomo Unico>라고 르네상스를 대변하는 말은 중세기의 전체적인 사회에 대하여 주관적인 개인을 뜻하는 것으로, 생활단위로써 하나의 독립된 인격과 존재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개인의 추구는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볼 때 단테에게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 수 있다.

신곡의 소재가 지옥, 정죄, 천당이라는 종교적인 세계이며, 그 형식에 있어 신앙에서 나오는 수식數式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 소재와 형식의 종교성, 즉 중세기적 영향만으로 그 작품이 중세기적이며 반 휴머니즘적이라 속단하여서는 안 된다.

단테가 중세적 보편어인 라틴어를 젖혀놓고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쓴 것은 바로, 르네상스시대의 정치적인 특권인 각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족언어에 대한 애착을 뜻하며, 신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요 테마는 인간의 운명의 문제와 더불어 베아트리체로 표현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집착과 승리를 영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인간 찬미이다.

한 여인에 대한 숭고한 사랑, 또한 이 사랑이 현실에서 이루러지지 못 함으로써, 그것을 영원한 세계로 발전시킴으로써, 단테는 개인의 존엄성과 영원성을 주장하였으며, 이 개인성의 주장은 바로 르네상스의 모체인 <Uomo Singolare> 를 뜻하는 것이다. 단테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다리 놓아줌으로써 조화있고 질서적인 시대 변천을 가능케한 역사적인 인물인 동시에,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초현실적인 내용과 인간 추구란 현실적인 가치는 그로하여금 또한 그의 신곡으로 하여금 모든 세대의 공감과 감명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만들었다.

071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1321 - 1323년 경) 나관중羅貫中

조선시대 선조가 하루는 경연經筵에서 여러 유신儒臣들과 담화하는 중에 우연히 ‘장비張飛의 고함소리에 만군萬軍이 놀란다’는 말을 인용하였더니 경연관 기대승이 나와 아뢰기를 ‘듣자온즉 삼국지연의란 책이 근간에 중국에서 나와서 항간巷間에 돌아다닌다는데 지금 전하께서 이용하신 말씀은 그 책에 있는 구절인가 합니다. 신은 아직 그 책을 보지 못했사온데 전하께서는 벌써 어디로부터 그 책을 얻어보셨습니까?’라고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벌써 삼국지연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 동시에 유학자들은 그 책을 탐탁치 않게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책이 처음에는 저속한 대중에게서부터 먼저 유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의 한문소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렇지 않아 글이 읽기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한학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읽을 수 없었으므로 그 소설들은 대개 고급 독서층에서 읽었다. 유학자의 중국소설에 대한 태도는 아이들에게 서상기西廂記, 수호전水滸傳, 삼국지연의 등은 금서禁書였다. 서상기는 음욕淫慾을 조장하며, 수호지는 간휼姦譎, 잔학殘虐함을 일깨우는 글이므로 혈기血氣 미정未定한 소년들이 읽으면 인품 형성과 풍속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삼국지연의는 위 두 종류의 책과는 다르다. 그러나 금서가 된 이유는 연의가 정사正史로 오해될 수 있다는 이유다. 물론 진수陳壽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정사와 연의를 혼동할 리가 없지만 정사 삼국지를 읽은 사람은 4서3경四書三經과 사략史略, 통감절요通鑑節要 등을 읽은 최고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이요, 또 100년 뒤만 하여도 정사인 삼국지를 중국에서 구해온다는 것은 심히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삼국의 사실을 통감절요나 강목綱目 등의 사서史書를 통하여 대략 알고있는 사람일수록 삼국지연의에 재미를 붙여서 탐貪하게 되었다. 5, 60년 전만 하여도 삼국지연의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으며, 어른들이 소년들에게 읽지 않기를 바랄수록 몰래 읽었다. 정사와 연의를 혼동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공부에 전념해야 할 소년들이 야사野史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다투어 번역하여 여러 가지로 출판이 되었다.

삼국지연의 해설은, 송대로부터 역사가, 강담講談으로 일반 무식층에 유해한 소위 평화平話, 강사講史의 풍습이 생겼는데 구연口演이었다. 소동파蘇東坡의 저술인 ‘지림志林’에 의하면 ‘국팽이 어제인가 나에게 말하기를 항간에서는 소아들이 집에서 놀며 귀찮게 굴므로, 부모가 돈을 몇 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거리에 나가 모여 앉아, 고담古談을 강설하는 것을 듣게 하였더니, 삼국시대의 일을 강설하는 장면에 이르러, 유현덕이 패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고, 조조가 패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좋아서 날뛰며 노래를 부른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주는 감명이 후세에까지 깊이 남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하였다. 삼국지연의의 시초다.

중국의 역사에서 이야기가 될만한 시대로 말하면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내용이 되는 춘추전국시대는 너무 두서頭緖가 번잡煩雜하다 할 수가 있고, 8년 풍진風塵에 항우와 유방이 다투던 것을 내용으로 한 ‘초한楚漢연의의 시대’는 단조롭고 오직 삼국시대는 번잡하지도 않고, 단조롭지도 않고, 호화찬란한 무용武勇과 책략策略이 재미있는 설화說話의 재료로 가장 좋았던 까닭으로 삼국지연의의 가치가 뛰어났었다.

본서의 특징은

1. 연의와 정사와의 관계로 볼 때에 진수가 지은 삼국지를 근거로 하고, 습격치가 지은 한진漢晋춘추를 참고로 하고, 배송지의 삼국지주注까지도 인용한 것이 많으므로 8 - 9/ 10은 신빙성이 있고, 가공架空은 극히 적다.

2. 삼국의 수많은 일시 인재를 모두 망라하여 본서 안에 수록된 것을 계산하여본 즉 6 - 700인이나 된다. 이야말로 소설 중에서는 공전空前의 장관이다.

3. 동한말로부터 삼국을 거쳐서 진晋의 통일천하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영웅이 각기 일방을 차지하여 이렇게 많은 인재들이 활약하다보니, 신선하고 백열적白熱的인 장면이 층생첩출層生疊出하여 일부의 연의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흥미가 고조된 장면이요 냉각된 시기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4. 가지가지 인물의 모형模型에 있어서 조조는 간웅奸雄이요, 손책은 조숙早熟한 영웅이요, 조운은 용장勇將이요, 장비는 조솔粗率하고, 주유는 풍류요, 관우는 의기요, 지교智巧에는 재갈량이요, 술책術策에는 사마의 등등 개성을 각기 독자적으로 살려서 독자의 눈을 휘황輝煌하게 한 것이다.

다음으로 연의와 정사와의 관계로 보면 청나라 장학성이 말하기를 ‘사실이 7할이요, 가공적인 것이 3할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공적으로 흥취있게 보탠 것도 사실에 대하여 문채文彩로 첨가한데 불과하다. 예를들면 유, 관, 장 3인의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사실이 아니나, 세 사람이 형제처럼 처음부터 사생死生을 같이 하기로 하여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한 방에서 자고, 한 상에서 밥을 먹었다는 것은 명사明史에 있다. 왕윤이 여포를 사주使嗾하여 동탁을 죽인 것은 사실이나, 미인 초선으로 음모를 하였다는 것은 가공이다. 관운장의 오관참장五關斬將은 사실이 아니나, 관운장이 조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백마진의 싸움에 원소의 명장 안량을 한 칼에 베어죽여, 조조에게 보답하고는 조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현덕을 찾아간 것은 사실이며,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제갈량이 산상山上에서 동남풍을 빌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나, 동남풍이 불 때 황개가 거짓 항복으로 조조의 병영에 불을 지른 것은 사실이다. 제갈량이 주유를 격동시켜 조조를 항거하게 할 때에 ‘조조가 동작대를 새로 짓고 강남의 두 미인 교씨喬氏 자매姉妹 (대교大喬는 손책의 부인이고, 소교는 주유의 부인) 를 빼앗아 가지려고 하였으니, 두 미인을 보내면 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하며 조조의 동작대부銅雀坮賦를 읊었다. 동작대부에 이교二喬를 빼앗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이교二橋는 두 개의 구름다리라는 뜻인데 이를 이교二喬 - 교씨 자매라고 둘러붙인 것은 사실이 아니다. 후세 당나라 시인 두목지의 적벽강시에도 ‘동남풍이 주랑 (주유) 에게 편리를 주지 않았더라면 동작대에 봄이 깊은데, 이교가 그 속에 놀았을 것이다 (동풍불여주랑편東風不與周郞便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라고 하였다. 오장吳將 황개가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러 간다고 속여 배에 인화물引火物을 싣고가서 조조의 함대에 불을 붙인 것은 사실이나, 방통이 조조를 꼬여 병선兵船에다 못을 쳐서 한 데 연결시켜 몰살케 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조가 간신히 몸만 빠져 도망한 것은 사실이나, 관운장이 길목을 지키다가 조조를 만나 전일前日의 은혜를 생각하고 놓아주었다는 것은 가공이다. 주유가 유현덕의 형주 점령을 방해하였고, 36세로 애석하게 죽은 것은 사실이나, 제갈량이 분노를 돋구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은 가공이다. 관우가 여몽에게 죽은 것은 사실이나, 조조가 관우의 머리를 보고 놀라 병을 얻었다는 것은 가공이다. 어복포에 제갈량이 만들어놓은 돌무더기의 팔진도八陣圖는 당唐, 송宋 이후에까지 남아있었으나, 오의 대장 육손이 그 속에서 헤매는데 제갈량의 장인丈人인 황승언이 길을 인도하여 살려냈다는 것은 가공이다. 마직이 제갈량의 군령軍令을 어기고 가정에서 패한 뒤 제갈량이 읍참泣斬마직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위병魏兵이 가정을 파한 뒤에 물밀듯 밀려올 때 제갈량이 서성의 문을 열어재치고 문루門樓에서 거문고를 타며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것은 가공架空이다. 제갈량이 목우木牛와 유마流馬를 창제하여 군량을 운반한 것은 사실이나, 사마의 부자父子를 상방곡에서 화공火攻으로 다 죽게 만들었다가 뜻하지 않게 비가 내려 살려보냈다는 것은 가공이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나, 기도를 할 때 위연이 실수로 등불을 꺼 제갈량의 죽음을 예지豫知했다는 것은 가공이다. 그러나 정사에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연의에는 빠진 것도 많다. 예를들면 조조가 원袁씨를 파破하고 입성할 때, 그의 아들 조비가 먼저 원씨의 내실에 들어가서 원소의 작은 며느리 미인 견씨를 차지해버리자 조조가 늦게 들어와 ‘이번의 승전은 아이놈에게만 좋은 일을 시켰구나’하였으니 이것은 조조 자신이 처음부터 견씨를 탐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정사 외 다른 기록에 있는 것인데, 마초가 처음 유현덕에게 항복한 뒤 현덕이 너무 우대하므로, 마초가 버릇이 나빠져 현덕이라고 자字를 부르며 오만방자傲慢放恣했다. 장비가 화를 내고 마초를 죽이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죽일 것이 아니라 길들이기로 하였다. 하루는 큰 연회를 열고 문무관원이 다 모였는데 마초가 착석하고 본즉 자기와 한 줄에 있어야 할 장비가 보이지 않았다. 두루살펴보는데 뒤늦게 현덕이 들어와 착석하자, 장비가 모시고 들어와서 자리에 앉지도 않고, 장팔사모를 들고 현덕의 뒤에 시립侍立을 하고 있었다. 마초가 마음속으로 놀라 그 뒤부터는 현덕에게 군신의 예를 다했다. 이런 삽화揷話가 연의에 실렸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을 것이다.

혹은 사건을 종합관련적으로 다루는 소설에서 영쇄零瑣한 개개의 사건을 삽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작자를 위하여 변명을 할른지 모르나, 지금 예를 든 사건은 연의에서 이미 조비와 견씨의 사건을 서술하면서 왜 이를 뺐느냐는 것이다. 연의와 정사와 동이점에 대해서는 아주 가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도, 정사 그대로 쓰면 소설이 되지 못하는 몇 가지 예를 들면, 유비가 제갈량을 만날 때 ‘세 번째에 보았다’는 것은 정사의 기록인데 여기에다가 연의의 작가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노상路上의 온갖 풍경을 묘사하고, 관우, 장비가 불평하는 것을 삽입하였으며, 또 조조가 동탁이 반드시 패할줄 알았으므로 그가 임명한 효기교의 벼슬을 받지 않고, 성명을 바꾸고 향리鄕里로 내려갔다는 것이 정사에 있으므로, 연의에서는 조조가 칼을 가지고 동탁을 자살刺殺하려다 실패하였다는 분식粉飾을 한 것 등이다.

삼국지연의는 저자의 성은 원대元代의 라羅, 자字가 관중貫中이라고 한다. 그는 명초에까지 생존한 사람으로 전기는 전해진 것이 없으나 다른 소설작품도 있고, 수호지에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전하는 것은 청대淸代 김성탄의 정평을 거쳤다고하는데, 성탄은 서상기, 수호지의 정평자다. 그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을 때 ‘한 칼에 목을 선뜻 끊기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일인데, 나는 뜻밖의 일로 우연히 이런 통쾌한 맛을 보겠구나’하고 유쾌히 형장刑場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선인先人들은 더욱 삼국지연의를 경계하였던 모양이나, 수백 년 간, 배운 사람들이나 못 배운 사람들까지도 양반, 상인常人을 거론할 것 없이 삼국지연의를 속담이나 관용구慣用句처럼 일절一節이라도 인용引用하지 못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족蛇足>

조선시대 이야기꾼들은 삼국지연의를 달달 외워서 사랑방의 청중聽衆을 달구었다. 극적인 장면에서는 화자話者와 함께 손뼉을 치고,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다. 글을 읽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읽을만한 책도 없었던 때, 그래서 특히 아녀자兒女子들은 은밀하게 이야기꾼을 초빙招聘했다. 삼국지연의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최고의 소설이다. 지구촌 역사상 어떤 소설도 삼국지연의의 미치지 못한다. 혼란의 시대상, 인물의 개성, 역사적 배경, 사건들의 구성, 표현까지 소설의 백미白眉다. 단, 영화나 방송드라마로 보는 건 눈을 즐겁게 할 뿐, 책으로 읽어야 한다.

072 햄리트 Hamlet (1601) 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섹스피어는 1594년 영국 중부 소 도시 스트레트포드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상인이었고, 부친이 도시의 관직도 맡았으나, 섹스피어의 소년시절에 가세가 기울어져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 하였다. 성년 전후의 행적은 전승傳承 외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8세 연상의 여자와 결혼, 얼마 후 런던으로 출분出奔했다. 런던생활도 미상未詳이나,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1590년 경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극단 전속작가로 활동했으며, 소속극단의 경영진에도 참여하여 1/ 10의 주식을 소유하기도 했다. 연기자로써 무대에 섰다는 기록이 있으나 활동상은 미상이다.

세익스피어의 작가로써의 활동은 1590년대에서 1600년대에 걸친 20여 년 간이며, 이 기간 동안에 그는 36 - 37편의 극과 3편의 장시를 썼다. 현재 알려져있는 전기적 사실이 매우 적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통한 그의 작가적 발전의 경로는 비교적 쉽게 더듬어갈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습작 또는 형성기의 젊은 작가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미숙함이 들어나 있으며, 그 가운데는 그의 전 작품의 3대분야라고 할 수 있는 희극戱劇, 비극悲劇, 사극史劇이 다 포함되어 있다. 작가로써 비로소 본령을 나타내는 것은 중기의 희극에서부터이며, ‘베니스의 상인商人’‘여름방의 꿈’‘당신 좋으실대로’‘12야夜’등 구김살없는 작가적 재능이 빛나는 작품들이 이 시기의 노작勞作이다. 같은 시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헨리 4세’‘리처드 2세’등 일품적逸品的 사극史劇도 있다. 그 중 영국 중세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사극을 거의 다 집필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천재가 절정을 이루는 것은 다음 시기, 즉 1699년 경부터 약 5, 6년 간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 4대비극이라고 하는 햄리트,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등의 절품絶品을 썼으며, ‘줄리어스 시저’‘안토니어와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사극에도 손을 댔다. 그의 필력은 원숙圓熟과 심오深奧의 극極에 이르러 인간정신이 문학 가운데 표현을 얻을 수 있는 최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 통칭 엘리지베스 왕조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는, 영국 르네상스가 정치적 안정과 국가적 발전의 호기好期를 포착하여 화려한 개화를 보여준 때였던 만큼 인간에 대한 흥미 또한 무한정하게 확대 심화될 수 있었다. 그것이 문학 가운데 표현을 얻은 것이 바로 세익스피어 작품이며, 그가 ‘태양이 가득한’ 희극에서부터 ‘음산陰散하기 이를데없는’ 비극에 이르게까지, 드물게 보는 작품의 폭과 깊이를 가질 수 있었던 연유 또한 불세출不世出의 천재에 더하기 이 시대 배경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기를 거친 다음 세익스피어는 다시 작품세계를 전환하여‘화해和解의 극’을 쓰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는 비극의 바탕에다, 그는 비극적 결말 대신에 용서와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이 만년의 작품계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태풍’이다. 그는 이 작품이 쓰여진 1612년 경 은퇴를 하여 고향 스트레포드로 돌아갔다. 그 이후 1617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붓을 놓았다. 붓을 꺾어버린 동기에 대해서도 어느만큼 촌도忖度 (헤아림) 할 수 있기에는 우리는 세익스피어 개인의 대한 지식이 너무 희박稀薄하다.

햄리트의 창작 또는 상영년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통설로는 1601년 경이라고 본다. 그리고 대개의 세익스피어 작품이 그렇듯이 극도 순전히 창작은 아니고 원화原話가 있다. 이 이야기의 맨 처음으로는 12세기 말 덴마크인 삭소가 쓴 ‘덴마크사史’안에 들어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토대로 프랑스인 벨르포레가 ‘비극설화悲劇說話’라는 책으로 옮겨온 것이 1570년의 일이다. 그밖에 현존하지 않지만 이 작품 이전 다른 극작가 손으로 이뤄진 이른바 ‘원原 햄리트 극劇’이 있었을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이야기의 주축은 당시의 유행이던 복수비극의 스토리로 이뤄어져 있다. 부왕父王 헴리트가 간악한 아우의 계교에 빠져 독살당하여 왕위를 빼앗긴다. 거기에 왕비 거투르드마져 신왕의 비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왕자 햄리트는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사건의 진상을 알게되어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계교計巧에 능한 신왕 클로디어스는 좀체로 틈을 주지 않아, 왕자는 미치광이로 가장假裝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재상宰相의 딸 오필리어마져 버리고, 유령의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연극을 꾸며 왕의 눈치를 살피기로 한다. 그리하여 기회를 노리던 중 뜻하지 않은 일로 왕비의 침실에서 어머니의 부정을 탓하던 차에, 몰래 엿듣고 있었던 주책 망나니 재상 플로니어스를 칼로 찔러 죽인다. 이로 인해서 그는 왕에게 구실을 주어 영국으로 유배당하기에 이르고, 연인 오필리어는 미쳐버린다. 유배길에 나선 왕자는, 수행한 두 신하가 왕의 밀명으로 그를 죽이려던 했던 것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신하들을 죽이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 플로니어스와 누이 오필니어의 불운한 죽음에 격분한 친구 레어티스와 검술시합을 하는데, 이 자리에서 왕의 간계로 악인배惡人輩도 죽여 없애버리지만 자신도 독극물毒劇物에 의해 죽는다.

이상의 줄거리는 복수 비극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의 흥미는 그 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복起伏이 많고 자극적인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는 그 원색적 분위기며, 엘리지베스시대의 특유의 과장된 수사修辭가 당시 인사들의 구미를 당겼던 것은 물론이겠지만, 그 시대의 취미가 현대에까지 그대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도 이 작품이 지니고있는 매력의 중요한 부분은 주인공 햄리트의 성격에 있다. 일반에게 널리 퍼지고 또 오랫동안 뿌리박아온 견해는 덴마크 왕자 햄리트를 매우 사변적思辨的이고 내성적 인텔리, 유약하고 행동성이 결여된 유약한 존재, 거기다 우울증에 사로잡혀있는 인물로 고정시켜버렸다. 이러한 이미지를 주는 인물형으로써 햄리트상은 동서고금의 세계문학을 통해서 유래가 없을만큼 선명하며, 그 점에 있어서 햄리트만큼 유명한 성격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는 햄리트상相은 무척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을 전부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내성적 사변적 면이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매우 행동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잔인하다고 할 정도의 일면도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投影시켜본 이른바 베르테르적 성격의 일면과 동시에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典型, 또한 주인공 가운데서 찾아보기 힘들지 않다. 그러한 상반된 면을 아울러 지님으로 해서 햄리트는 더욱더 매력을 풍기며, 여러 가지 모순된 점을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성격으로 해서 실제의 인물이 아닌 픽션 가운데서의 리얼리티를 만끽시켜주는 것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나 새로운 면을 지니고 있고, 언제 보나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인물, 이 점에서 세익스피어 창조의 최대 신비가 숨어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처한 세계, 그것은 모든 것이 ‘사개가 물러난’세상이었다. 왕위王位의 찬탈簒奪, 모비母妃의 부정不貞, 신하배臣下輩의 아첨阿諂, 불신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현실과 닮은꼴이다.

073 돈 키호테 Don Quixote (1604),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세르반테스 (1547 - 1616년) 는 문학활동 분야로 볼 때 스페인 황금세기 (1550 - 1680년) 에 살았으며, 정치, 경제면으로 볼 때에도 스페인이 세계를 재패했던 찰스 5세 (1516 - 1556년), 필립 2세, 필립 3세 (1598 - 1621년) 시대에 살았다. 1474년 인쇄술이 스페인에 들어오면서부터 네브리바 (1441 - 1522년), 루이스 비베스 (1492 - 1540년) 와 같은 고전문학의 거장, 라틴어 및 스페인어 문법, 인문주의학파들의 왕자들이 나옴과 동시에 라셀레 스티나 (1499년) 와 같은 풍자소설이 출판되었으며, 많은 ‘아마디스데 가울라’의 기사도騎士道소설이 출판되었다. 더욱이 16세기에는 스페인어가 발달하여 스페인문화는 도이치 역사가 브렌타노가 말 한 것처럼 유럽의 지적생활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전 세계가 스페인을 모방할 정도였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발표한 17세기 초는 유쾌한 풍자문학, 정치, 사회를 익살로 그린 대화, 극, 시가 번창하였다. 16세기에는 스페인에 32개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세르반테스도 살라망카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토록 그는 문학분야로 볼 때, 카스틸랴지방의 서정시 국민문학, 도덕화를 목표로 한 풍자문학, 기사도소설이 절정을 이룰 때와, 정치, 경제면으로도 직접 그가 참가하고, 자국의 위대함을 체험한 절호의 시대에 살았다. 세르반테스는 의사 아버지와 귀족 출신 어머니에게 태어났고, 어려서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사소한 일로 친구와 결투 끝에 상처를 입히고 1569년에 로마로 망명했다. 로마에서는 추기경 앗구아비바 주교 밑에 은신하다가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군 복무를 하다 오토만제국과 전쟁에 참가, 레판토해전 (1571년) 에 앞장섰다. 가슴과 왼팔에 상처를 입었고, 1575년에 동생과 함께 스페인으로 귀국하려다 터기 군의 포로가 되어 오란 등지에서 5년 간 감옥살이를 했다. 4차례의 탈옥을 하였지만 모두 실패, 감옥에서 각색 각층의 인물들을 알게 되며, 이것이 돈 키호테를 집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드리드로 돌아온 후 생활이 궁핍해져 남미로 가려고 애를 썼으나 허사였고, 1585년, 1587년에는 스페인 남쪽지방으로 전전하며 무적함대에 식료품 공급을 허여 연명했다. 이 때에도 몇 개의 무대작품을 썼다. 1590년에는 필립 2세에게 서신으로 남미 (특히 콜럼비아, 과테말라) 의 관직官職을 요청했으나 수포화되었다. 그러나 1602년에 타인의 일로 누명을 쓰고 몇 개월 간 감옥에 갇혔다. 여기서 그는 더럽고 천한 생활을 보고, 이를 작품에 인용했다. 이렇게 그는 풍운아風雲兒의 생활과 밑바닥을 체험하여 인생을 달관達觀했다. 1603년에 수도가 발야돌릿으로 옮겨지자 그도 따라가 돈 키호테 출판권을 얻어 1604년에 전편을 내놓았다. 그후 1606년에 다시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지자 이주하여, 1610년에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이 모든 좌절에 문학에 집념하여 돈 키호테 후편을 집필, 1615년에 펴냈다.

돈 키호테는, 결정적으로 선인善人이 되는 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며, 미쳐서 용감한 게 아니라 너무나 용감하다보니 미치게 되는 것이다. 행동은 미쳤지만 그가 내놓은 이론이나 대화는 현자賢者다. 즉 키호리즘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고, 관대한 최상의 윤리적인 귀중함을 입증한다. 다시 말하면 키호리즘은 기장 귀중한 윤리적인 가치의 관대함과 자신 포기에 비할 수 있다.

돈 키호테의 영향을 보면, 전편이 나온지 얼마 안 되어 아벨랴네다의 1614년 위작僞作 돈 키호테가 있으리만큼 영향이 컸고, ‘돈 키호테의 생활’‘돈 키호테의 길’‘돈 키호테의 역사’등 무수한 작품이 계속 나왔다. 돈 키호테는 마다리아가가 평한 것처럼 인간이 창조해낸 다섯 인간 (돈 키호테, 산초 판사, 돈 환, 햄리트, 파우스트) 중의 하나가 될만큼 문학계에 준 영향을 크다. 또한 돈 키호테의 인물에 대해 실존한 인물이냐 아니냐는 논의가 활발하였지만 확실한 결론은 없고, 전편 몇 장에 나오는 대화가 실제 인물과 통하는 때가 있기는 하다. 여하튼 ‘올테가 이 가세트’가 말 한 것처럼 ‘돈 키호테는 두 가지의 매우 상이한 뜻을 가졌는데, 돈 키호테는 하나의 소설인 동시에 그 소설 자체가 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키호리즘에 의해서 이해되는 선이라는 것과 악이라는 것은 그 인간의 키호리즘이다.’

영국식 돈 키호테는 로빈슨 크루소로 보며, 피일딩은 조세프 엔드르스와 톰 존스에서 돈 키호테식의 신념을 묘사했고, 바이런은 돈 키호테를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인물로 보았으며, 슬프면 슬플수록 웃음이 터진다고 하였다. 또 바이런은 ‘이 영웅은 언제나 정의를 찾아다니며, 바로 이 덕이 그로하여금 미친짓까지 하도록한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적으로 귀족적인 성격과 이상을 가졌고, 그 관대하고 정의를 위한 투쟁은 세대가 흐르고 불의가 아무리 득세해도 그의 신념을 깨어질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돈 키호테는 햄리트와 극에서 극으로 대조적인 인물이다. 미국에서는 1801년에 피메일 키호티스모 (Female Quijotismo) 가 출판되었고, 멜빌의 모비 딕 (백경白鯨) 은 돈 키호테의 영향을 많이 입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마담 보봐리가 돈 키호테의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는 ‘치마 두른 돈 키호테’라고까지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만소니의 돈 앗본디오 데 로스로비오스가 돈 키호테를 모방하였다. 러시아에서는 고골 리가 ‘죽은 혼魂’에서 돈 키호테를 모방했다. 중남미에서는 많은 작가가 돈 키호테를 옮겨 썼지만 에콰도르의 1872년 작품 ‘세르반테스가 잃어버렸던 장章들 및 모방할 수 없는 책에 대한 모방 연습’이라는 글을 내놓았다. 끝으로 스페인에서는 오늘날에도 돈 키호테의 열은 굉장하며, 우나무노, 아소린 등은 모두 이 영웅에 관해 몇 권의 책을 썼으며, 현 스페인 한림원 원장 데넨데스 피달은 ‘돈 키호테 작성에 있어서의 한 관점’이라는 글로 세르반테스를 스페인 최고작가로 올렸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성서 다음으로 널리 읽혀졌고, 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 자신의 그림자로써, 그의 인생관, 그의 욕망을 대변하여 싸우고, 마침내는 작가처럼 글을 맺는 것이다. 이는 세르반테스 자신이 사후에야 비로소 인정을 받는 것처럼, 그는 가난과 미래를 위해 싸웠고, 외롭게 쓸쓸히 떠날망정 귀족이라는 신분, 그 명예는 결코 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광의로 볼 때 돈 키호테는 바로 스페인인이며, 보슬러가 말한 것과 같이 ‘전 내용을 통해 이 주인공의 미친 것이 스페인어 이외로 그려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의 신념이 로만 카돌릭 아니고는 그렇게 될 수 없으며, 그의 마음은 기사도 모형이 아닌 다른 꿈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돈 키호테는 여러 형태로 변화하여 쓰여졌고, 돈 키호테 작품 그 자체가 그렇게 쓰어지도록 되어 있지마는, 돈 키호테는 일편단심一片丹心 그의 신념을 믿고, 그 저돌적猪突的인 신념으로 그의 숭고한 윤리관을 믿고 나가는 것이다.

074 실락원失樂園 Paradise Lost (1667) 밀튼 John Milton

밀튼의 서사시 실낙원은 17세기 정신세계를 집약한 근세문화의 정화精華다. 아니 종교개혁을 거친 기독교세계를 대변하는 인류문화의 찬가讚歌다. 호메로스의 일리어드, 오딧세이가 그리스정신의 증언이요, 버질의 이니드가 로마정신, 단테의 신곡神曲이 르네상스정신의 증언인 것처럼, 실락원은 근세 프로테스탄트정신의 증언이다. 근세 문화가 프로테스탄트정신의 개화開化, 결실結實일진데 이 서사시敍事詩는 곧 근세 문화의 원리와 이데올러기의 형상화라고 보겠다. 그러면 어떻게 이 작품이 이루어졌는가?

우선 밀튼의 생애를 통해 그 작품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시의 창작에 뜻을 두기는 작품 속에서(Ⅸ, 26)직접 고백한 바와 같이 자못 오래였다. 오랜 숙고熟考와 기획企劃을 거치고 시상詩想 독창獨創의 완숙完熟을 거쳐 집필이 되었다.

한편 그의 생애는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기구한 운명의 계속이었다. 세 번의 변위치세變位治世를 거쳐 세 번의 혁명을 겪었으니 시인 자신이 곧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란 풍운아風雲兒라고 할까. 크롬웰이 찰스 1세를 내쫓고 의회정치를 하자 그 밑에서 자유공화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정치생활을 하다가 과로로 실명失明이 된다. 가정적으로는 전형적인 퓨리탄환경에서 자랐으나 겹치는 이혼離婚으로 불행이 거듭되었다. 사회적으로 사업의 실패는 물론 옥고獄苦를 겪는 등 격동하는 세태에 휘말려 불안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정치, 사회, 가정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아성牙城인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받았으니 안식, 자유, 광명도 그에게는 먼 딴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고독의 극한 속에서 오히려 용기와 신념을 북돋아 본연 대오大悟의 길로 나섰다. 이제야말로 자기가 가장 자유롭다고 외치며 드디어 라이프워크에 착수한 것이다. 온갖 시대의 물결과 체험의 탕축蕩蓄을 기우리고 자신의 확고한 예술의 총 역량을 승화昇華하여 여기 영원의 섭리를 인류와 시대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다.

밀튼의 의도를 보면 이미 초기 서정시 등에서 그 뜻을 비쳤고, 31세 때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며 위대한 문학작품을 창작하되 자기의 모든 능력을 기울일만한 스케일과 후세에 결코 멸하지 않을 일품逸品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것은

첫째, 라틴어의 시가 아니라 영어작품이라야 했다. 이는 당시의 조류潮流를 거슬러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轉換’이었으니 문학상으로나 어학상으로나 일대 혁명적인 모험이었다. 단테가 라틴어 그리고 이탈리아의 방언으로 ‘신곡神曲’을 써서 이탈리아의 말과 문학에 혁명적인 역할을 한 것과 같다.

둘째로는 국가적인 의도라 하겠으니 자기의 작품이 조국의 영예와 가르침이 되어야 했다. 즉 스스로 조국의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내 나라의 정신적인 지주와 양식이 되고자 모국어의 극치極致를 결합하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도덕적인 의도라 하겠으니, 그 섬나라를 통틀어 모국어로써 시민들에게 지고지성至高至聖의 해설자 및 발언자가 되고자 했다. 세계적인 의미에서 최선과 최성의 조류를 마련하여 스스로 원천이 되고자 함이었다.

넷째는 종교적인 뜻이다. 무엇보다도 철저히 기독교의 기원基源과 이념을 형상화 하는 것이다. 성서의 기본정신과 원리에 통달하고 귀의歸依하는 데서 얻는 참된 신앙과 예술적인 이념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국가적인 포부가 기독교의 이론과 동화同化 일치하는데서 실낙원이란 대 서사시가 발화發火한 것이다.

이러한 동기와 의도에서 성경의 우주창조의 신화를 소재로 인류창조 및 원죄原罪의 기원, 즉 인류 타락의 대 비극을 다루어 인도人道의 부족 및 비非에 대하여 천도天道의 완전 및 시是임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스케일과 웅심장엄雄深莊嚴한 스타일로 온 인류를 향하여 노래한 것이다.

풀롯의 구조를 보면 하늘나라 신의 세계의 움직임이 하나의 계통이요 지옥의 세턴일파가 둘째 계통, 새 세계의 인간을 셋째 계통으로써 사건이 각기 움직여가고, 다시 전체의 움직임으로 통합되어 인류비극이 진전된다. 즉 천국, 지옥, 세계의 3계의 갈등이 묘하게 조직 구성이 되어 갈등위기를 적절히 배치하되 스릴과 서스펜스를 살리고, 극적효과를 낸다. 다시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3계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와 연결, 전개하여 단조한 사건을 미묘하게 조직하여서 에픽의 면목面目과 효과를 발휘하는데 그의 독창적인 천재를 기울이고 있다.

더욱이 에피소드를 클라이맥스 전후에다가 효과있게 균형 배치하고, 대조적으로 조직하여 플롯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앞의 에피소드는 과거로 올라가 인류 타락의 배경을 보인다. 즉 타락의 원인이 되는 흐름을 이끌어서 숙명적인 악의 침략의 긴박으로 클라이맥스의 필연을 유도하고, 후자의 에피소드에 가서는 인류 영원의 장래를 보여 클라이맥스에 뒤따르는 대단원을 기독교윤리와 신앙체계에 연결하여 안정을 꾀한다.

다시 말하면 스트락처의 조직이 성격과 작품의 사상적요소와 치밀하게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작품 전체의 유니트를 살린다. 사건의 진전이 오더를 따라서 논리적으로 또 연쇄적으로 되어가되, 한결같이 공통한 목표로 종합 발전하여 갔으니 결국 플롯의 완벽을 기하기에 온 정력을 바쳐 대 가람伽藍을 이룩하였다고 하겠다.

줄거리는, 하늘에서 신이 성자聖者를 책봉冊封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새턴일파 천사天使는 1/ 3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 역전을 일으키나 만능의 신에게 패배를 당하고 지옥에 떨어져 고역苦役을 당한다. 시詩는 이 지옥에서 신음하며, 제 2차 반격을 모의하는데서 시작된다. 새턴은 악마의 괴수魁首들을 모아 참모회의를 연다. 여러 가지 전략이 나왔으나 당시의 여건으로써 부득히 직접공격이 아니라 간접침략을 꾀한다. 즉 하늘에서 반역천사의 공백을 메꾸는 성업으로써 인류세계를 창조한 것을 기화로 인류 타락을 꾀하여, 신의 성업을 파괴하자는 안건이 채택된다. 이 대 임무의 수행을 새턴 스스로 단독 강행하기로 한다. 새턴이 온갖 꾀와 용기로서 지옥을 벗어나 인류세계인 에덴에 접근하여 그 주인공들, 최근 창조된 아담과 이브를 찾아낸다. 그 동안에 작은 위기와 모험의 고비를 넘는 것도 여러 가지로 재미있게 조직, 묘사가 된다. 세턴은 인류 파멸의 금제禁制가 제정되었음을 탐지하고 이를 공격의 목표로 삼는다. 즉 낙원에서 온갖 자유를 누리되 지혜의 나무는 금지되어 있으니 이를 맛보면 에덴동산을 쫓겨나야 한다.

세턴은 여기서 유혹의 대상으로 이브를 택하여 꼬신다. 마음이 약하고 믿기를 좋아하는 이브는 세턴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넘어가 드디어 지혜나무 열매를 맛본다. 천지가 격동하고 온 우주에 변화가 온다. 아담은 이브의 축출逐出에 방관할 수 없어 사랑과 운명의 길을 택하여 스스로 열매를 맛본다. 클라이맥스의 결실이다.

그러나 인류가 낙원을 쫓겨나면 인류에게는 영원의 절망뿐일까? 여기서 시는 유명한 둘째 번 에피소드를 유도하여 인류의 미래사를 스토리와 비젼을 통하여 전개시킴으로써 대 단원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회개와 속죄를 통하여 인류 속에 낙원을 건설할 것을 과업으로 준다. 여기 예수의 탄생으로써 인류가 구원될 길을 엿보여줌으로써 비극의 종말은 해피엔딩의 모색을 기약한다.

이 시의 문학적의의는, 우선 형태상에서 볼 때, 고전 서사시의 작가 호메로스, 단테, 버질의 3대 시인의 장점을 소화하고, 다시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차원의 서사시를 만드는데 기독교이념에서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성과야 어떻든 그러한 야심이 형태면에서 엿보여 일종의 종합적인 형태의 진전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원래는 비극의 바탕에서 상연을 뜻하다가 더욱 큰 시 세계를 마련하고자 서사시로 방향을 돌린 까닭에 시 전편에 극적인 풍미風味와 효과가 넘친다. 다시 또 고독의 극한이요, 실명의 역경에서 창작을 진행시킨 주관적 여건은 도처에서 서정시의 향기를 풍기게 한다. 그러므로 읽다가보면 서사시를 떠나서 서정시를 읽는 기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다든지 또 버젓이 주관적인 견해를 높이 부를 때는 어느덧 사건의 진행에서 떠나 서정의 분위기에 놀게 된다. 그래서 어느 평자는 오히려 서정시로써 향기가 더 짙으니 서정극이라고 함이 좋겠다고까지 말한다. 어쨌든 이렇게 드라마와 에픽, 릴릭의 3대 장르를 종합한 감이 있어, 역시 장르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라고 하여, 휴스 같은 평자는 이를 새로운 차원의 시츄에이션 드라마로써 네오에픽이라고도 함이 좋겠다고까지 말한다. 또 이런데서 단순한 풀롯에다 다양성을 주어 에픽의 부족을 보완한 결과도 된다.

어떤 면에서는 라틴의 조류를 물리치고 과감히 영어를 전용하여 영어의 뉴앙스를 살릴 뿐 아니라, 많은 새 말들을 도입하여 영어세계를 확장, 발전시키고 다시 라임을 버리고 운율의 자유율을 시도하여, 후일의 자유시의 원천이 되게 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또 스타일의 과감한 창조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고유명사의 배합에서도 새로운 운율을 찾는다던가, 라틴식 무거운 문장구조를 도입하여 영어구조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 등 기억해야 할 점들이 많다.

문화사적인 면에서 보면, 주제가 이미 하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종합, 조화 , 통일에 있는 만큼 신의 세계를 중심한 기독교문화와 인간의 문화를 중심한 그리스문화내지는 르네상스문화의 조화, 통일을 꾀하였다.

그런 까닭에 지나칠만큼 이 양대 문화의 조직, 배열이 시를 어렵게 하고 또 놀라게도 한다. 즉 밀튼시대에 이르는 온갖 문화의 정수精髓가 여기 종합되어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종합체계를 구현하고 있다. 더구나 그 지식이 결코 장식적이거나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체계 위에서 앞을 예견하는 방향을 보이고 많은 문제점을 제시하는 등 초인적인 작업에 후학이 놀라는 바이다. 따라서 여기 과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종교와 예술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분수령分水嶺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신과 인간과의 종합의 상징이요, 또 극체極體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仲裁者이신 예수로써 표현이 되고 귀결된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나는 사상을 보면 종교개혁의 기본정신이며, 다시 퓨리탄의 이상인 인간과 신의 일치를 그 정수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시의 주제 그대로 ‘Justify the ways of God to men' 이란 이념에 투철하고 있다. 즉 하늘의 법과 인류의 법의 일치를 찾고, 하늘의 소리와 인간의 도리의 조화를 강조한다. 그러기에 인류의 기본과제인 자유정신에 일관해있음은 퓨리탄의 개념과 다름이 없다. 인간창조에서부터 자유의 이념에서 시작하여 원죄의 성립 그 처벌, 다시 영원의 구원의 길마져 모두가 인간 자유재량에 맡겨지니 일종의 인간 자유선언과도 같다. 또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하고 미래를 항상 염두에 두는 면에서 일종의 실존정신 속에 시가 조직되어 있음은 오늘에 보아도 감탄을 마지않는 점이다.

요컨대 유럽의 종교적인 문화인 기독교의 이념과 인간적인 문화인 헬레니즘의 이념이 이 시에서 형식상으로나, 또 내용상의 하나의 통합을 이루어 새로운 문화의 종합적인 입체상으로써 세계 인류에 어필하여 근세문화의 대변의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류 장래에 예언의 시로서 크나큰 역사적인 사명 속에서 불후不朽의 빛을 밝힌다. 영국의 유일한 세계적 서사시로써 또 고전 3대 서사시인의 전통을 잇고 개혁한, 근세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서사시로써 후세 시인詩人 묵객墨客에게 끼친 영향은 여기 일일이 열거할 겨를이 없다.

075 파우스트 Faust (1808 - 1832)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괴테의 생애를 연구해본 사람은 누구나 그의 생애의 풍부하고 다양한 인생체험과, 심오한 정신세계의 끝없는 발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경탄하는 것은 이렇게 풍부하고 다양한 내적 외적 체험이 작품 속에서 아름답게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산 체험이 아무리 거칠고 부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괴테의 작품 속에서는 예술적으로 균제되고 있다. 많은 변천과정을 통해서 괴테는 성숙되어갔다. 우리는 그를 막연히 올림피아의 쥬피터 신이나 또는 뮤즈 신처럼 천부적인 위대한 예술가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위대한 시인인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생의 탐구자였다. 괴테는 자기의 우주관 속에서 생의 모든 갈등과 모순을 통합하고 있다.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생의 목표였다.

괴테는 사상적으로는 젊은 시절에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로서는 다신론자이며, 자연과학자로써는 번신론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세 가지 체험, 즉 라이프치히에서의 학문연구와 프랑크푸르트에서 병을 치료하면서 얻은 비관적 신비주의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그가 헬더를 만나게 된 일은 괴테의 문학 전체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헬더를 통해서 감상적이고 창조적이었던 괴테는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큰 암시를 받게 되었다. 이성주의자이며 전통고수자였던 괴테의 정신세계를 신 세계로 이끌어 문학의 이념으로써 논리가 아니라 감성을 괴테에게 가르치고 그리스문학, 성경, 세익스피어극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은 헬더였다. 질풍노도기 천재시대, 괴테시대라고 불리우는 이 시기의 문학자들은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중시한 결과 주지주의로 흐르게 되엇음을 간파하고 오성 보다는 인간 본연의 감성을 내세우고 자연으로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크롭슈톡과 하만에 의해 촉진된 이 운동은 1770년 혁신적인 젊은이들에 의해 질풍노도기의 문학의 화려한 깃발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 선구자는 헬더로써 그들은 게르만민족의 본질을 탐구하여 일반 서민문학을 중시하여 국민문학을 부르짖었고, 감정의 해방과 영감에 의한 천재의 정열적인 시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즉 르네상스가 종교와 전통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처럼 이러한 반 계몽주의운동은 인간의 오성과 논리에서 인간의 감성과 열정을 해방시켰다. 괴테는 계몽주의자들의 작품 속에 풍부하고 따뜻한 인간 체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작품 파우스트는 작자인 괴테 자신의 체험과 당시의 시대정신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다. 괴테가 이 작품을 구상해서 그것을 끝맺기까지는 거의 그의 전 생애가 걸렸다. 그가 파우스트에 대한 착상을 시작한 것은 젊은시절 질풍노도기였다. 작품 괴츠에서 힘의 거인을 통해 강한 생활의욕과 발랄함을 보여주고, 그 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몽상적이고 염세적인 나약함을 보여주었던 괴테는 이 두 가지 양극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 파우스트를 작품화하기로 구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72년 초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또 괴테가 얼마 뒤 바이마르 궁정으로 가게 되어 거기서 자기 자신을 파우스트와 비슷한 처지에 놓아보고 또 작품 진전에 많은 도움을 준 슈타인 부인을 알게 되어 그 주제는 더욱 진전되어나갔다. 그러나 괴테가 어렴풋이나마 연금술사 파우스트의 운명에 관해 큰 관심과 매력을 갖기는 그보다 훨씬 이전 유년시절의 인형극에서였다고 한다. 16세기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 박사’는 17세기에 이르러 영국 흥행극단의 의해 영국에 수입되었는데 그것이 괴테시대에 와서는 어린이들의 인형극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신학, 법학, 의학 등 모든 학문에 염증을 느끼고 인간존재의 궁극을 신에 도전해서 캐내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만 파우스트 속에서 괴테는 학술연구와 실험을 포기하고 생의 와중에 뛰어들려는 강한 유혹을 느꼈던 자신의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이마르 궁정시절에 완성된 것이 초고 파우스트다. 이것이 완성된 뒤에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처음 완숙한 형식미를 보고 미의 본체를 느꼈다. 그 때 쯤 파우스트도 미완이었지만 발표되었으며, 1790년에는 괴테 스스로 전집 7권으로 발표했다. 그 후 그가 쉴러와 친교를 맺게되자 급속도로 진전되어 1801년에는 제 1부가 완성되었으며, 1808년 발표되었다. 그 뒤 쉴러의 사후 긴 공백기간을 거쳐 파우스트의 죽음과 승천이 구상되어 결국 1831년 7월에 2부까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발표된 것은 죽음을 2개월 앞 둔 1832년 1월이었다. 초고 파우스트는 1888년 바이마르의 어느 귀부인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우리가 보통 파우스트라고 부르는 작품 보다는 길이도 짧고 구성도 단순하지만 사건의 본질적인 것과 파우스트 고뇌의 핵심과 그레첸 비극이 모두 담겨있다. 1808년에 나온 마지막의 파우스트에 따르면 제 1부는 23개의 장으로, 제 2부는 22개의 장으로 되어있지만, 제 2부는 너무 환상적이고 이념적이어서 상연되는 횟수도 1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 하는 파우스트는 ‘그레첸의 비극’이라고 불리우는 제 1부다. 제 1부를 자세히 살피면

헌사는 48세의 괴테가 젊은시절을 그리워하고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할 당시의 젊었던 자신을 그리워하는 회고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1. ‘무대에서의 전희’에서는 하나의 극을 상연하는 데 있어서의 작가, 배우, 기획자의 각기 다른 문학관과 야심을 그린 것

2. ‘천상의 소곡’에서 메피스토페레스 는 인간을 ‘비참한 동물들’이라고 부르며, 신에게 파우스트를 유혹하여 데려오겠으니 내기를 걸저고 한다.

3. ‘밤’에서는 모든 지상의 학문에 만족하지 못 한 파우스트가 절망하고 지나간 세월을 회의한다.

4. ‘성문 밖’에서 파우스트는 밝은 봄 속에서 요란하게 요동하는 세속의 쾌락에 집착하려 한다. 그 때 메미스토가 복슬개의 모습으로 파우스트의 서재에 따라 들어온다.

5. ‘서재에서 - 1’성서 번역에 고심하고 있는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는 현세의 만족을 주겠으니 영호을 팔라고 파우스트를 유혹한다. 그리고 그 계약을 성공시킨다.

6. ‘서재에서 - 2’파우스트는 현세적이고 궤변적인 메피스토의 말과 기지에 혼돈되고 만다.

7. ‘아우엘바하의 술집’에서 메피스토는 재주를 피우ㅏ 술 취한 학생을 골려준다.

8. ‘마녀의 주방;으로 파우스트를 끌고간 메피스토는 생의 쾌락에 만족할 있도록 파우스트를 젊은이로 만든다.

9. ‘거리에서’ 파우스트는 그레첸을 보고 메페스토에게 그 여자를 얻도록 해달라고 요구한다.

10. ‘산책’ 메피스토가 몰래 방에 가져다놓은 보석상자를 그레첸이 발견한다.

11. ‘이웃 여자들의 집에서’그레첸을 유혹하기 위해 메피스토는 이웃집 여자 마르테을 이용하려고 한다.

12. ‘길거리’에서 그레첸의 순결함에 파우스트는 다소 죄책감을 느끼지만 메피스토가 하는대로 내버려둔다.

13. ‘정원’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순결한 대화와 메피스토와 마르테의 음탕하고 현세적인 대화가 비교된다.

14. ‘정자’에서 그레첸이 사랑을 고백한다.

15. ‘숲과 글’에서 파우스트는 가책을 받지만 또 다시 메피스트의 말에 따른다.

16. ‘그레첸의 방’ 그레첸은 물레질을 하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17. ‘마르테의 정원’ 종교에 대하여 토론이 벌어진다. 신에 대하여 메페스트는 시니컬하다.

18. ‘우물가’바바라라는 친구의 타락에 대해서 그레첸은 우연히 듣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19. ‘성벽’에서 그레첸은 성모에게 죄를 뉘우친다.

20. ‘밤’ 그레첸의 오빠 바레틴은 메피스토에게 복수하려고 하나 결국 동생 그레첸의 타락을 저주하며 죽고만다.

21. ‘사원’ 그레첸이 악마에게 시달리며 고뇌한다.

22. ‘발푸르기스의 밤’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참화할 것을 두려우ㅏ 하여 숲속 악마의 관능세계로 끌고간다.

23. ‘발푸르기스 방의 꿈’은 세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의 영향을 받아 사회 풍자식의 막간물로 들어간 것

24. ‘흐린 날’ 메피스토는 그레첸의 비극에 냉담하게 외면한 채 그녀가 감옥에 끌려가는 일은 파우스트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그를 위안시키려고 한다.

25. ‘밤, 벌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는 말을 타고서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간다.

26. ‘감옥에서’ 파우스트는 그레첸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레첸은 행복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자기 혼자 죄를 감수하겠다고 한다. 메피스토가 파우스트를 끌고나갈 때 하늘에서 ‘구원을 받았노라’라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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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볼 때 우리는 주인공 파우스트를 2개의 다른 관점애서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를통해 일상적이며, 평범한 인간의 약점과 강하고 행동적인 고고한 탐구자로써의 두 모습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써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 속에서 항상 동요하고 있다. 노력괴 행동의 사람으로써 파우스트의 면모는 그의 끊임없는 ‘자기 발전의 투쟁’속에서 느낄 수 있다. ‘노력하는 한 인간을 방황한다’라는 말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인물이 바로 파우스트다. 그리고 인간의 두 영혼 즉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행동과 사고로 대립되는 인간의 끊임없는 갈등이 이 작품에서처럼 선명하고 강렬하게 부각된 것은 찾아보기 힘든다. 파우스트가 절망과 고뇌 석에서도 끊임없이 긍정의 사람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메피스토는 부정과 ‘절망의 기지’로 일관되고 있다. 파우스트가 이상과 환상의 꿈을 찾았던 것과 달리 메피스토는 현실적인 것에만 급급하고 있다. 메피스토는 기회주의자다. 그런 의미에서는 역설적으로 메피스토가 좀 더 현대인을 그리고 있다고까지 말 할 수도 있다. 그레첸은 괴테가 이상으로 하던 ‘영원히 여성적’인 미덕을 갖춘 처녀로써 그레첸의 아름다움을 그리는데 있어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에 그가 헤레네 여신에게서 느꼈던 감흥을 그대로 옮겼다. 겸손하게 또 스스로 느끼지 못 하면서 그레첸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빛을 덩져주고 있다. 자기 희생과 봉사와 충절이 그녀의 특성이다.

그 뒤 파우스트의 소재는 그 소재의 극성과 심오함으로 많은 음악, 시, 희곡의 소재로 다시 되풀이 되었다. 그리하여 파우스트, 그레첸, 메피스토는 많은 예술가들이 애호하는 인물이 되었다. 구노의 파우스트와 바그너의 ‘파우스트 서곡’에 의해 작곡되었으며, 레나우, 하이네의 파우스트를 주제로 한 시도 유명하며, 특히 현대에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는 거대한 도이치 산문의 정점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것은 파우스트의 비극이나 그레첸의 비극이 시대를 넘어서 초超 시간적 위대한 작품인 까닭이다.

076 괴기담怪奇談 Tales of the Grotesques and Arabesques (1830) 포우 Edgar Allan Poe

포우가 그의 첫 단편집 괴기담을 출판한 것은 1839년 12월 (발행년도는 1840년으로 되어 있음)이었는데, 포우는 이 단편집 및 그 뒤의 단편들로 미국 단편소설의 창시자가 된다. 포우 이전에 단편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단편소설을 단순한‘짧은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고 ‘예술형태’로 의식하고 쓴 작가는 포우가 처음이다. 포우가 쓴 첫 단편은 1832년 1월에 ‘필라델피아 세터디 쿠리어’에 발표한 ‘메센게르수타인’이지만 그의 단편 중에서도 맨 먼저 주목을 받은 것은 볼티모어에서 가난하게 살고있을 때 시市에서 발간되는 세터디 디지터 지의 100달러 단편 현상소설에 응모하기 위해 쓴 소설이다. 당선작은 ‘병 속의 원고原稿 (1833년)’이다. 이 단편을 보고 주목한 사람이 대 작가 J. P. 케네디였으며, 케네디의 추천으로 1835년 12월 리치먼드의 사우던 리터러리 메신저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이 잡지를 무대로 1837년 1월 해고될 때까지 미완의 비극 폴리치아노, 시 6편, 에세이 4편, 단편소설 3편, 그리고 서평 83편을 썼다. 그 후 그는 필라델피아 시의 버튼즈 젠틀멘즈 매거진의 편집장을 1839년 7월부터 1840년 6월까지 했는데, 그의 대표작 ‘어셔가의 몰락沒落(1839년)’을 기고했다. 괴기담에 수록된 단편의 수는 25편인데, 유명한 것으로는 ‘어셔 가家의 몰락’과‘병 속의 원고’‘약속’‘라이지어(Ligeia)’‘윌리엄 윌슨’‘베리나이시’‘모렐러’ 등이다. 괴기담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 내용이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가 있듯이 그것들은 공포의, 신비의, 동양의, 정열의, 교묘한 추리의, 괴상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이다.

괴기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편이며 포위의 단편 중에서도 백미의 걸작‘어셔 가의 몰락’의 줄거리는

나는 옛날 소년시절의 친구 라데리크 어셔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는다. 병석에 있다는 친구의 문병을 하기로 하고 방문한다. 산속 호숫가에 유령처럼 서 있는 어셔 가의 저택은 음산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다. 라데리크와 그의 쌍둥이 누이 메들린은 어셔 가의 마지막 생존자인데 신경성 질병을 앓고 있다. 라데리크는 기묘한 즉흥시나 즉흥곡을 들려준다. 그가 좋아하는 책들은 대개 병적인 책이다. 근육강경증에 걸려 실신한 메들린은 지하실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어느 폭풍이 부는 밤에 심한 흥분상태에 빠져있는 라데리크의 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에게 중세기 로맨스를 읽어준다. 로맨스의 무서운 장면의 배경처럼 방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수의壽衣를 입은 메들린이 나타나 라데리크와 함께 쓰러지더니 둘 다 죽는다. 나는 겁에 질려 어셔 가에서 뛰쳐나와 뒤돌아다보니 달빛 속 어셔 가는 회오리바람에 산산히 부셔져 호수 속으로 갈아앉는다.

어셔 가의 몰락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공포의 분위기는 포우의 독창성이 아니다. 이것은 18세기 후반의 영국의 고딕 로맨스 (Cothic Romance) 나, 19세기 초엽 도이치의 환상담幻想談 (Fantagiestuckc) 에서 내려온 것이다. 포우에게 독창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공포의 이야기를 정교한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포우는 괴기담 후에도 ‘붉은 죽음의 탈 (184년)’‘지하실과 시계추時計錘 (1843년’‘검정 고양이 (1845년)’등 어셔 가의 계열에 속하는 단편소설을 써서 미스테리문학의 분야를 개척했다. 포우가 경도傾度된 미스테리문학의 분야는 이상의 공포담 (tail of horror) 뿐만 아니다. 포우가 개척한 추리담 (tail of ratiocination) 이라는 미스테리문학의 분야는 오늘날 우리가 탐정소설 또는 추리소설이라고 부르는, 20세기에서 가장 번성하는 장르의 하나다.

1841년 4월에 포우는 자기가 편집한 그레엄즈 매거진에 ‘모르그 가의 살인’을 기고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탐정단편 (detective short story) 이다. 포우는 탐정소설의 창시자다.

‘모르그 가의 살인’에서나 그 속편 ‘마리 로제의 비밀 (1842 – 3년)’에서나 ‘오퀴스트 뒤팽 (Auguste Dupin)’이라는 박식博識한 파리의 한 청년이 아마튜어 탐정으로 등장한다. 뒤팽은 이상할 정도로 분석력을 가진 천재이며, 그의 예리한 추리는 경찰이 못 푸는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어낸다.

1842년 현상금을 타기 위해 쓴 ‘황금충黃金虫’과 1844년에 발표한 ‘네가 범인이다’의 2편도 전자는 ‘암호暗號의 해독’, 후자는 ‘탐정 즉 범인’이라는 탐정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보며, 비록 뒤팽 탐정은 등장하지 않더라도 역시 포우의 탐정소설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포우의 추리분야의 단편 중에서 가장 완전한 작품이며 포위의 전 단편 중에서도 굴지屈指의 걸작은 ‘도둑 맞은 편지 (The purloned letter, 1845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모르그 가의 살인’이나 ‘마리 로제의 비밀’에서와 마찬가자로 뒤팽 탐정이다. 줄거리는

파리의 경시청장이 뒤팽을 찾아와서 난해한 사건의 해결에 대한 조언을 청한다. 정부의 D라는 장관이 왕실의 여성으로부터 어떤 편지를 훔쳐서 그것을 정치적 도구 및 협박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왕실의 모 여성은 경시청장에게 이의 해결을 호소한다. 청장은 수개월에 걸쳐서 면밀한 과학적 수사를 한다. 그러나 청장은 결국에 그 편지가 장관의 신체나 거처에는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 도둑맞은 편지에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있다. 뒤팽은 한 달 후 편지를 찾아 현상금을 탄다. 편지를 찾은 경위는, 청장의 수사는 편지를 숨겨둘만한 집의 으슥한 구석이나 장소 카페트, 책상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정상적인 수사의 원칙이다. 그런 곳은 이미 청장이 철저하게 수사했다. 그런데도 못 찾았다. 그렇다면 상식적인 장소에는 숨겨지지 않았다. 뒤팽은 직접 장관을 방문하여 편지가 숨겨진 장소를 물색한다. 그리고 편지를 숨긴 곳을 간파하고, 다음날 다시 방문하여, 미리 집 밖에서 총격전을 벌이게 하여 장관의 시선을 밖으로 끌어놓고 진짜 편지와 가짜 편지를 바꿔치기한다. 만약 편지가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라도 장관 앞에서는 편지를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판단에서 총격전을 벌이게 한 것이다. 편지는 의외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편지통에 휴지처럼 구겨져서 버려져 있었다.

‘도둑 맞은 편지’에서 뒤팽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리고 또 그는 자기의 노력의 댓가를 챙기는데 민첩하다. 명실공히 현대의 미스터리문학에 나타나는 탐정의 원형이다. 포우의 문학은 공포의 단편이건, 요컨대 본질적으로 미스테리의 문학이다. 그가 다른 미스테리 작가와 다른 점은 신비가임과 동시에 분석가였다는 점이다. 즉 그는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상력과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 두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우에게는 그의 단시의 경우 와 마찬가지로 단편의 경우에도 그의 독특한 창작이론이 있었던 것이다. 포우의 시론을 그의 걸작시 ‘갈가마귀 (The Raven, 1845년)’의 해설인 ‘작시의 철학 (1846년)’과 그의 시론인 ‘시의 원리 (1848년)’에서 보면 한 편의 시는

1. 교훈적이어서는 안 되며

2. 짧아야 하며

3. 미의 운율적 창조여야 하며

4. 이상을 미화하과 영혼을 고양시켜야 하며

5. 우울한 미를 가져야 하며

6. 미녀를 최고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예술의 목적이 미임을, 시의 원리는 이 세상 밖의 미의 열망 (Aspiralion for Suerpnal Beauty) 임을 주장한다.

그의 단편의 창작이론에 있어서는 한 편의 단편소설은

1. 효과의 전체성을 가져야 하며

2. 첫 문장부터 시작해야 하며

3. 진실을 목표로 해야 하며

4. 짧아야 하며

5. 결말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의 이론들은 포우의 단시나 단편소설 속에 훌륭하게, 때로는 너무나 정연히 예시되어 있으므로, 포우의 시나 소설은 그의 이론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미스테리문학은 비록 주제의 세계가 협소하기는 하지마는 미에 대한, 기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하락하지 않는다. 그는 능숙한 시인이었으며,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의 단편소설 및 탐정소설의 창시자다.

그러나 생존시의 포우는 거의 무명의 문사였으며, 그의 시 갈가마귀도 영국에서나 유럽에서 호평을 받았을 뿐, 본토에서 포우의 평가는 형편없었다. 에머슨은 그를 ‘운運장이 (Jingle Man)’이라고 하고, 로웰은 ‘3/ 5은 천재요, 2/ 5는 엉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미국이 포우를 이해하지 못 한 것은 사실이다. 하기는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이룩된 미국문학의 바탕은 청교도주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문학에서 종교나 도덕을 배제하는 포우의 예술지상주의적 문학을 폄시貶視한 것은 당연하다. 포우의 진가가 그의 사후에 알려진 곳은 프랑스다. 포우의 시와 소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자 보들레느나 말라르메에게는 천사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보들레느의 단편번역 (Hitoires extraordinaires, 1856년) 과 말라르메의 갈가마귀번역 (1875년) 을 보더라도 포우가 프랑스의 상징주의시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포우의 미스테리 단편집 괴기담 (1840년) 은 상징주의자들에게는 현상세계의 덧없고, 불완전하고, 결국은 의미가 없는 본질을 암시해주었고, 특히 포우를 번역한 보들레느는 포우를 자기의 ‘정신적 형’으로 생각했다. 포우의 시나 시론은 상징주의 시인들에게는 대 환영을 받았으며, 시에서 특히 ‘음악적 효과를 노리는’그들에게는 포우의 고도로 음악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운율적인 작시법과, 그의 언어의 의식적인 모음각운母音脚韻일치법은 상징시의 표본이 되었다. 보드레느가 그의 시 시학(ART poetique) 첫 줄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을, (De la musique avant toute choie)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영향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유럽으로 추방되었던 포우는 유럽의 시신詩神의 보호를 받다가 오늘날 고향 땅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미국은 지금 위대한, 그러나 고독했던, 천재 포우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077 적赤과 흑黑 Le rouge et le noir (1839) 스탕달 Stendhal

앙리 베일이라는 본명보다는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적과 흑’ 의 작가는 이탈리아 가까이 위치한 알프스 연봉을 바라보는 그로노블에서 1783년에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에 프랑스 대 혁명이 일어났으므로 구 제도가 붕괴된 후 국민공회에서 1759년에 가결된 법률에 의거하여 설립된 신제 공립중학교에서 그는 합리주의에 의한 정신형성을 교육받을 수 있었다. 종래 구교 관장하에 있었던 교육을 공화주의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교육방침이었기 때문에 정서교육보다는 과학교육 등 합리주의정신 함양에 중점이 주어졌다. 따라서 그러한 교육제도 제정에 이바지한 관념학파의 주장과 그 원천인 감각론철학은 청소년기의 스탕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콩디야끄, 엘베시우스, 카바니스 이름이 빈번히 그의 글에 보인다. 중학교 재학시에는 성적이 우수하고 특히 수학이 뛰어났으나, 이때부터 문학 애호열이 싹트기 시작하여 문학작품을 탐독하고, 17세기의 대 희극작가 몰리에르처럼 당대 풍속을 풍자하는 희극을 써보겠다는 희망을 갖게된다. 1799년에는 이공과대학에 입학한다는 구실로 파리에 갔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독서로 자유를 누리던 중,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는 나폴레옹 휘하 군에 친척의 알선으로 입대하여 원정에 참가하고, 2년 후에 귀국하여 제대한 후 사교계에도 출입하고, 독서, 연애를 하는 등 자유분방한 날을 보냈다. 1806년 재 입대하여 이에나, 비그람 등 전투에 참가, 오스트리아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다. 나폴레옹 휘하에 있으면서 그 영웅에게서 받은 영향은 ‘내가 평생 숭배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그의 말로도 얼마나 심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14년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밀라노에서 살다가 쫓겨서 영국을 여행, 파리로 돌아온다. 1830년 7월혁명의 결과 오래전부터 공작해오던 숙망이 이르어져서 신 정부에 의해 트리에스트 영사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자유주의와 진보사상이 오스트리아 당국의 비위에 거슬렸으므로 쫓겨나, 그 후 10년 동안을 치비타 베키아로 있으면서 휴가를 핑계로 파리에 가서 장기 체류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1842년 4월에 뇌일혈의 발작으로 거리에서 쓰러져 영면했다. 묘비명墓碑銘은 스스로 생전에 지어놓은대로 ‘아리고 ‧ 베일, 밀라노 사람,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하였노라’였다.

그의 생존기간 문단에서는, 나폴레옹 실각 후의 왕정복고王政復古시대와 그 뒤 1830년 7월혁명으로 세워진 7월 왕정시대에 걸쳐, 그러니까 1820년 경에서 1850년 경까지 낭만주의가 지배하여 라 마르틴느, 빅토르 유고, 뮤세 등 자아의 감정 토로가 유행했지만은 스탕달은 초기에 ‘라신느와 세익스피어’를 발표하여, 이에 가담하는 듯 했지만 끝내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먼 초연超然한 입장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적과 흑’‘파르므의 승원’등 걸작을 남겼다.

적과 흑은 1830년에 냉담한 반향 속에 발표된 소설이다. 줄거리는

미천微賤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미남 청년 줄리앙 소렐은 어떤 고난을 겪고라도 기어히 크게 입신출세立身出世하고야말겠다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다. 프랑스사회에서 문벌門閥도 재산도 없는 청년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군대에 들어가 공훈功勳을 세우는 것과, 정치와 함께 천하의 세력을 양분하고 있는 성직聖職에 봉사하는 것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밖에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전쟁이 없는 오늘, 군인으로 공훈을 세울 세상이 아님을 판단하고, 줄리앙은 성직을 선택한다.

한편 뛰어난 라틴어 실력 덕으로 시장市長 신흥귀족 드 레날 댁의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레날 부인을 유혹한다. 미천한 목수의 아들로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드 레날의 집에서 나와, 다시 스승의 알선으로 당대 권세가 드 라 몰 후작侯爵의 비서로 들어가 후작의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딸 마틸드를 유혹한다. 그리고 마틸드가 아버지 후작을 설득해서 가까스로 결혼에 성공한다. 드디어 결혼식이 임박하고 귀족의 작위爵位와 용기병龍騎兵 중위中尉의 임명을 받았으니 평생 소원이었던 입신출세의 첫 단계에 올라가서 장차 권력과 영화榮華가 보장되는가 할 무렵, 그가 버린 중년 여인 레날부인의 광련狂戀의 질투로 만사가 깨진다. 격분한 나머지 부인에게 권총을 발사했으나 살인미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아 단두대斷頭臺에 오른다. 그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들은 레날부인은 충격을 받아 병사病死하고, 약혼자 마틸드는 단두대에서 잘린 줄리앙의 머리를 훔쳐서 화려하게 장례를 치른다.

대략의 줄거리이지만, 이 소설이 발표 당시보다 후세에 더욱 많은 독자를 얻고 특히 현대인들의 공감을 얻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선 적과 흑이라는 표제는 무엇의 상징인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스탕달 연구가에 의하면, 흑은 성직자의 검은 옷, 따라서 성직자를, 적은 살인자 또는 승복僧服에 튄 핏자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주인공 줄리앙이 레날부인을 쏜다는 내용과 부합하지만 살인미수란 극히 우발적인 사건인만큼 약간 무리한 점이 있다. 다른 연구가는 적이 좌경左傾 자유주의사상을, 흑이 성직자들과 음모와의 상쟁相爭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줄리앙 소렐이 출세의 길로 항상 군대와 성직에 매력을 느끼고, 때로는 군대에 끌리기도 하고, 때로는 성직에 끌렸으므로 당시 용기병의 제복색인 빨강색이 군대를, 신부들의 승복빛인 검은색이 교권을 뜻한다고 주장하며 이 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다. 또 다른 이는 적이 줄리앙의 공화주의를, 흑이 교권과 그것을 위요圍繞한 반동적 음모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제목의 해석에서, 의외로 정치사상이 표면으로 들어남을 볼 수 있다. 원래 ‘19세기 연대기’라는 부제副題를 붙였으며, 또 서문에서 ‘소설이란 세상 모습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거울로써, 비록 추악한 얼굴이나 더러운 거리를 비친다고 해도 그것은 거울의 죄가 아니라’는 내용의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고, 사회의 묘사는 필연적으로 당시의 정치를 묘사한다는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다음, 스탕달은 소설을 구상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자기 자신이나 잘 아는 사람들을 인물로 등장시키는데, 물론 약간 변장變裝시키든가 또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한 인물 속에 섞어서 재구성한다. 줄거리도 대개 실제로 경험한 사건이나 사회에 있는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이 사건은 1828년 법정신문에 게재된 ‘베르테 사건’이라는 실제 범죄를 소재로 했다.

마을의 대장장이 아들이었던 베르테는 공부를 좋아하고, 20세 때 유력한 지방유지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는데 그 집 부인의 애인이 되었고, 이어서 신학교에 입학한 뒤 다른 귀족댁에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 집 딸과 연인이 되어 해고당한다. 베르테는 실직의 원인을 과거의 가정교사 집 부인의 방해라고 생각하여 교회에서 부인을 저격하여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스탕달은 적과 흑의 주인공 줄리앙에게 베르테의 운명을 그대로 옮겨놓고 다만 사회적인 규모를 확대했을 뿐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작가는 사회를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적과 흑에는 왕정복고 말기의 사회상이 충실히 반영되어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작가로써 19세기 전반前半의 프랑스 사화사社會史를 만들겠다는 발자크의 방대尨大한 인간극人間劇, 이른바 호적부戶籍簿와 경쟁을 해보겠다는 그 방대한 기록적인 소설이 보여주는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정치사상이나 사회의식에서는 오히려 발자크를 능가하고 보다 현대인의 그것에 가깝다.

나폴레옹 실각 후 왕정이 복고된 틈을 타서 다시 권력을 장악한 귀족들의 영화며 왕당주의자들의 생태, 또 진보사상을 내걸고 기회만 노려 이익을 보려고 혈안이 된 자유주의자들, 신성한 승복을 입고 정치적 음모에 휩쓸린 성직자들 등등 7월혁명까지의 사회상을 짧은 삽화揷話로 잘 들어내고 있다.

다음으로 스탕달이 적과 흑에서 보여준 성격묘사나 심리분석은 19세기의 어떤 작가 보다도 뛰어났다. 다른 작가들에게서처럼 단순한 심리나 성격묘사로 끝나지 않고 스탕달은 심리나 성격이 복잡 미묘한데다가 오만한 자존심과 자의식의 갈등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밤 줄리앙은 정원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레날부인과 부인의 여자 친구 데르빌부인과 함께 앉아서 저녁시간을 보낸다. 이날 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부인의 손목잡기를 획책한다. 그러나 비천한 자기 신분에 대한 자의식 때문에 손과 마음이 일치되지 않아 망설이다가, 어둠 속에서 끝내 부인의 손을 더듬어 잡고 가슴 뿌듯한 행복을 느끼는 장면의 심리묘사는, 마치 독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겪는 것처럼 현장감이 생생하다.

이렇듯 적과 흑은 사회의식과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심리분석을 함께 혼합하여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행복의 내면성을 추구한 작품이다.

이상에서 살핀 여러 특징들은 모두가 차라리 현대인들과 통하는 요소들이기에 적과 흑도 당시에는 몇몇 지기知己들, 메리메라든가 발자크의 격찬을 받았을 뿐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 했다. 스탕달 자신도 그것을 알고 대중의 무無 관심과 몰沒 이해에는 아랑곳없이 창작을 계속했다. 그가 거리에서 졸도卒倒했을 때, 주머니 속에 유서遺書가 있었는데 ‘나는 80년 후에야 이해될 것이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고, 실제로 사후 80년 후에 그의 진가眞價가 알려지기 시작하고, 발자크, 풀로베르, 졸라 등 19세기의 다른 문호들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의 영향이 후세에 어떤 것이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사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작가를 대라면 곤란하다. 평생을 그의 지기로 지냈으며 누구보다도 그의 진가를 인정하고, 또한 낭만주의나 사실주의의 테두리 밖에서 창작활동을 한 중편소설 작가이며 카르멘의 작가로써 알려진 메리메를 그의 핏줄을 잇는 작가라고 꼽을 수 있을 뿐이지만, 스탕달의 적과 흑의 영향은 20세기에 광범위하게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그의 성격묘사나 심리분석이 현대작가들의 그것과 직결된다는 것은 위에서 말했지만, 근대의 다른 작가들이 사회의식이 없거나 희박했다는 것 말고도, 성격 또는 심리의 움직임을 인생, 질투, 부성애父性愛, 자기 희생, 악마, 호색好色 등등으로 유형화類型化하고, 그러한 편집광적偏執狂的인 요소의 분석을 하고 있는데 반해서, 스탕달은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을 만들어 줄리앙 소렐이라는 한 인물 속에 천사에서 악마에 이르는 모든 요소가 뒤섞여 동존케 하고 있다. 그뿐이랴. 그 복합적 성격에 다시 현대인의 특징인 자의식까지 있어서 다정다감多情多感한 미남 청년 줄리앙 소렐과, 집요執拗하게 따라다니는 자의식과, 자존심과,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심에 사로잡힌, 하층계급 출신의 인텔리로써의 줄리앙 소렐 사이의 내적인 갈등, 그리고 결국은 이러한 모든 것을 지배하고마는 타산打算, 이것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줄리앙 소렐의 심리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그의 인격을 이루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현대인들의 복잡한 정신구조와 같은 것 아닌가. 그러므로 적과 흑은 현대소설로의 문을 열어놓고 길을 다져준 선구자이며, 그만큼 현대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할 것이다. 또한 ‘소설은 길을 따라가며 비치는 거울’이라든가, 작가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도처到處에 있는 신이 아니라는 사건 전개 태도는 소설미학의 큰 혁신으로 현대의 안티 로망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078 인간극人間劇 La commédie humaine (1842) 발자크 Honoré de Balzac

오노레 드 발자크 (1799 - 1850년) 가 그의 부친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법률가수업을 떠나 작가가 되기를 결심한 1819년 이후, 파리의 다락방에서 춥고 가난한 생활을 무릅쓰고 습작으로 혹은 소르본느에서의 문학강의 청강으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설상가상격雪上加霜格으로 출판 사업의 대 실패로 그의 일생을 따라다녔던 큰 빚마져 졌지만, 한편 1829년의 ‘올빼미 당원黨員’과 ‘결혼생리학’으로 성공을 거두고 이에 이은 초인적인 저작생활을 1850년, 그가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았던 그 시기는, 또한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활발하고 복잡하고, 따라서 그만큼 진통을 내포한 현상과 기운이 단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우선 18세기 말 영국에서 비롯된 산업혁명의 물결은 유럽에도 필연적으로 범람해왔고, 프랑스의 경우는 나폴레옹이 시작한 여러 해에 걸친 전쟁의 피해가 워털루 패전과 때를 같이 한, 1815년의 나폴레옹의 몰락과 더불어 아물기 시작하고, 다시 안정의 길을 밟던 1830년까지 사이에 견직물, 목면공업, 중공업에 걸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 치하의 이른바 왕정복고시대 (1815 - 1830년) 에는 프랑스 국민들은 새로운 산업형태가 가져오는 번영과 안전 속에서 물질적인 풍요한 생활을 향락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정치는 나폴레옹에 대한 열강의 반동이 빚어낸 보수적 반동적 정책으로 생기를 잃고, 일찍이 프랑스혁명에서 고취되었던 자유와 민권이 점차 억압당하고, 언론이 위협을 받고, 무기력한 회고懷古 내지는 복고색으로 침울한 공기가 떠돌았다. 1830년의 7월혁명, 그리고 공화제의 재현을 가져온 1848년의 2월혁명 등 정치상의 몇 차례에 걸친 격동은 이러한 불만스러운 상황이 빚어내는 고민의 표시요 모색의 과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가 장려하는 복고와 수구를 따라 먼 과거, 현대 아닌 꿈의 세계, 자기들이 살고있는 자기들의 사회가 아닌 어느 다른 나라를 좋아하고 동경하고, 묘사를 통해서 찬미했다 - 로멘티스트 문학의 만개滿開.

어떤 사람들은 시대의 혜택을 최고도로 결실시키고자 대 기업을 개척해서 물질적 사회적 명성을 거두기에 여념이 없고, 그를 위한 기회의 포착과 방법의 구사에 있어서 무자비하고 타협이나 염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은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영예를 갖다줄 따름이었다 - 금력 만능현상과 배금拜金주의의 지배.

산업의 발달에 따른 상업, 공업의 활발화, 이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계급의 교체, 즉 귀족의 몰락과 중류계급의 실권자로써의 등장, 이의 필연적인 결과로써의 활발한 사회제도 내지는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와 시도와 착오와 물의物議. 그리고 물질생활의 윤택에 따른 정신생활에 대한 일부 양식자들의 진지한 검토와 새로운 설계 - 애오라지 과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 있어서 19세기가 가장 큰 발달을 거두게 된 연유의 일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바로 이러한 시대, 이러한 사회에서 살았으며, 그의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회고나 몽상夢想 또는 이국異國 취미로 해서 그 시선이 흩어지는 일 없이, 그것이 갖는 모든 장점과 결점과 그리고 고민과 함께 자기의 시대 및 사회에 살아있는 그대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서는 이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의 일대 벽화壁畵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당초에는 부친의 소망대로 법률가가 되려고 파리의 어느 공증인의 서기로 있다가 뛰쳐나와, 문학가가 되고자 부친에게 일정 기간의 유예를 얻어, 그 동안에 어떤 천분天分의 증명을 보이기로 했던 것인데, 1825년 경까지 습작 겸 생활비 마련을 위해 수 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 했고, 그러는 동안에 사귄 베르니여사의 도움으로 인쇄소를 사서 출판업을 시작했으나 의욕과 공상을 뒷받침할 상재商材를 갖지 못 한 그로써는 막대한 빚만 진 체 사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 빚의 청산과 타고난 호화로운 꿈 탓으로 평생에 걸친 불철주야不撤晝夜의 노역勞役 - 집필생활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올빼미 당원’과 ‘결혼생리학’으로 다소 성공을 거둔 그는 본격적으로 작품생활에 매진邁進한다. 그의 고정관념인 생명의 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다룬 ‘상어가죽 (1831년)’을 비롯해서, 사회관을 밝힌 ‘시골 의사 (1833년)’, 학문적 야망을 피력한 ‘절대의 탐구 (1834년)’, 그의 신비사상을 반 자서전적으로 엮은 ‘루이 랑베르 (1832년)’와 ‘세라휘타 (1832년)’그리고 사실적인 묘사로 사생활의 정경을 밝힌 ‘30세 여인 (1832년)’과, 최초의 걸작이자 흔히 그의 대표작처럼 알려져 있는 ‘으제니 그랑데 (1833년)’‘고리오 영감 (1834년)’등의 명작들을 연달아 발표한다.

폴란드 여자로 뒤에 그의 아내가 되는 한스카라는 여인과 사랑은 ‘골짜기의 백합百合 (1835년)’‘세자르 비로토의 영고성쇄사 (1837년)’‘사라진 환영 (1837 - 1843년)’‘마을의 사제 (1839년)’‘베아트리스 (1839년)’‘유르쥘 미르에 (1841년)’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런데 이 고리오영감에서 시도된, 이른바 인물의 다른 작품에의 재 등장 또는 반복 등장이라는 새로운 수법을 통한, 소설세계의 ‘한 완전한 체계화’는 그의 머리 속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1837년에는 자기의 소설을 통털어 ‘사회적 연구’라는 표제로 묶을 생각을 하고, 이어 1842년에는 ‘인간극’이란 이름으로 결정 짓는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작품 이외에 다시 ‘농민 (1844년)’‘모데스트 미뇽 (1844년)’‘사촌누이 베트 (1846년)’‘사촌형 퐁스 (1847년)’등의 작품이 인간극에 첨가된다.

18년 간이라는 긴 세월을 편지로만 사랑을 나누다가 1850년, 드디어 우크라이나로 한스카 여사를 찾아가서 결혼을 했으나, 작품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발자크는 모처럼의 결혼의 행복도 못 누려보고 불과 수 개월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기록에 의하면, 1850년 3월 14일에 결혼, 동년 8월 18일에 사망).

정확성에 있어서 호적戶籍에 견줄 수 있는 것을 기약하고, 20년의 세월을 바쳐 왕정복고와 7월혁명시대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프랑스의 사회 전모를 그려놓은 ‘인간극’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풍습風習연구

(1) 사생활 전경

고브세크 (1830년), 30세 여인 (1832년), 샤베르 대령 (1832년), 고리오영감 (1834년), 결혼 계약 (1835년), 베아트리스 (1839년), 두 젊은 기혼旣婚 여인의 회고기回顧記 (1842년), 모데스트 미뇽 (1844년) 등 28편

(2) 지방생활 정경

으제니 그랑데 (1833년), 골짜기의 백합 (1835년), 노老 처녀 (1836년), 골동상骨董商 (1836 - 1838년), 사라진 환상 (1837 - 1843년), 유르쥘 미르에 (1841년), 낚시꾼 (1841 - 1842년) 등 17편

(3) 파리생활 정경

유녀遊女의 영화榮華와 비참悲慘 (1846년), 세자아르 비로토의 영고성쇄사榮枯盛鎖史 (1837년), 사촌누이 베트 (1846년), 사촌형 퐁스 (1847년) 등 25편

(4) 정치생활 정경

암흑사건 (1841년), 현대사의 이면裏面 (1842 - 1848년), 아르시스의 대의사代議士 (1847년) 등 5편

(5) 군대생활 정경

올빼미 당원 (1825년), 사막에서의 정열 등 2편

(6) 전원생활 정경

촌村 의사 (1833년), 마을의 사제司祭 (1839년), 농민 (1844년) 등 3편

2. 철학적 연구

안녕安寧 (1830년), 상어가죽 (1831년), 붉은 주막 (1831년), 루이 랑베르 (1832년), 세라 휘타 (1832년), 절대의 탐구 (1834년) 등 20편

3. 분석적 연구

결혼생리학 (1829년)

이상 100여 편의 작품에 2,0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발자크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한 세계이니만큼 거기에는 정치, 경제, 법률, 종교, 예술, 학문, 풍습 … 기타 현실세계가 갖고있는 모든 것이 있다. 너무나도 활기와 실감에 차 있어서 그것이 허구의 세계임을 잊게 하는 인간극을 소설로 환원시켜 생각해볼 때, 발자크는 소설장르를 새롭게 다시 창조한 셈이다. 그때까지 고작 연애문제나 심리분석을 일삼던 소설이 이제 발자크와 더불어 사회, 종교, 철학, 과학, 역사, 정치, 종교, 경제 등 우리 앞에 현전現前하는 모든 영역을, 그 판도版圖에 넣고 이들이 서로 얽히어 작용하며 이루어놓는 하나의 총체를 송두리체 들어내는 엄청난 구실을 가로맡게 된 것이다.

연작燕雀이 홍곡鴻鵠의 뜻을 헤아리지 못 하는 것처럼, 발자크의 이 웅대한 천재가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많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을 거쳐야 했다. 그는 생존시에 이미 많은 프랑스의 독서대중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을뿐 아니라, 영국, 도이치, 러시아 등을 비롯한 유럽 전체의 명성높은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의 일이고, 문학을 본업으로 하는 전문가들에게는 도리어 냉대와 멸시를 받았다. 이른바 ‘유파類派’내지는 ‘주의主義’가 빚어내는 편견偏見과 단견短見, 처음으로 대하게 된, 도대체 어느 정도로 큰 정체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태산 한 모퉁이에서 몇 그루의 나무나 가지로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무리들의 옹졸함, 거치른 문체나 우아한 감성의 결여缺如를 트집잡는 섬세파纎細派, 사상을 시비하는, 혹은 비도덕성이라고 나무라고, 혹은 염세厭世주의라고 또는 회의懷疑주의라고 낙인烙印을 찍으려드는 메마른 생태. 이플리트 카스티유가 그랬고, 고티에가 그랬고, 심지어는 생트 뵈브까지도 그랬다. 다소 이해한다는 사람들도 자기네 유파를 위한 아전인수我田引水를 일삼았다. 샹플르리, 뒤랑티 등의 사실파寫實派들이다. 이들 보다는 좀 더 나은, 상당히 파고들었으나 역시 편벽便辟됨을 면치 못 했던 사람들로 이폴리트 테에느와 폴부르제가 있다.

요컨대 그의 인간극의 형태는 루공마카아르 총서叢書라든가 대하大河소설 형식으로 모방되면서도, 그는 말하자면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선원船員들에게 잡혀 희롱당하는 알바트로스 (갈매기) 였다. 다만 러시아의 토스토예프스키, 영국의 부라우닝과 와일드, 도이치의 딜타이와 호프만스탈, 그리고 프랑스의 빅토르 유고 등, 진정한 그의 이해자 내지는 찬미자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전체성을 통한 발자크의 파악이라는 올바른 해석이 날로 그 열을 높여가고 있다.

079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 Lylical Ballads (1850)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영국 문학사에서 흔히 ‘낭만주의의 부활’이라고 하는 한 문학시기의 출발점을 1798년으로 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워즈워스와 콜리지 공저의 서정민요집이 그 해에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사실만으로서도 우리는 그 책이 하나의 문학사조의 기점을 이루는 실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책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정민요집이라고 알려진 이 책의 풀 타이틀은 ‘서정민요들과 기타의 수 편의 시들 (Lyrical Ballads with a fare other poems)' 이고, 그 초판은 1798년 9월에 브리스톨 시에 있는 조셉 - 코틀 (Joseph Cottle) 의 출판사에서 익명匿名으로 나왔다. 출판인 코틀이라는 이름은 겨우 몇 권의 타이틀 페이지에 나와 있을 뿐이고, 이 책이 잘 안 팔렸음인지 초판 500권의 대부분이 런던의 아치 (Arch) 에게 넘어가 대부분의 책에는 아치의 이름이 출판인으로 나와있다. 이 초판은 권두언과 목록 8페이지를 제외하고 본문 120페이지로 된 8절판의 작은 책이다. 책에 수록된 시는 유명한 ‘노 수병의 노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등 4편의 콜리지의 시와, 역시 유명한 ‘틴턴 애비 (Lines written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 등 19편의 워드워즈의 시, 합 23편이다. 이것이 1800년에 제 2판, 1802년에 제 3판, 이런식으로 1846년 정고定稿에 이르기까지 계속 판을 거듭하면서 내용의 일부가 달라지기도 하고, 수록 순위가 바뀌는 등 양상이 달라졌는데, 무엇보다도 주목할 사실로써 학자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어있는 것은, 제 2판에서 워드워즈가 초판에서 광고 (Advertiement) 라는 이름으로 5페이지 정도의 권두언卷頭言을 붙였던 것을 본격적인 서문으로 확장하여 시인 자신의 시론을 전개한 것과, 제 3판에서 다시 그 서문을 약 18페이지 정도로 증보 개정하고 거기에 시어론詩語論을 더 첨가하여 거의 완전한 워드워즈의 시론을 완결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저자들은 하나의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기 위하여 서정민요집에서 직접 자신들의 시를 예시하고, 거기에 시론을 붙여 그 예시들을 이론적으로 변호한 셈이다. 이렇게 대담하게 주장하고 나선 그들의 시의 이론은 그것이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놀랄만한 새로운 목소리였을 뿐 아니라, 저자 자신들에게도 일종의 모험에 가까운 하나의 선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저자들은 초판에서 이름을 숨기고 반향을 조심스럽게 살폈던 것이고, 그 반향에 상관없이 그러한 시적 신념이 더욱 굳어짐에 따라, 2년 후 재판을 낼 때에는 저자명을 밝히고 서문에서 간곡한 시적 변명과 주장을 피력하여, 그것이 본인들이 얘기했든 안 했든 하나의 문학시기의 시점을 이루게 되고, 한 세기의 시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책이 어떤 이유로써 한 문학시기의 시점을 이루게 되었는가를 고찰하기 전에, 이 책이 어떤 동기로 나오게 되고 더욱이 공저의 형식으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워드워즈와 콜리지는 서로 출생지가 같다든지 출신학교가 같은 것도 아니다. 2년 위인 워드워즈는 캄버런드 출신으로 센 존즈 칼레지를 다녔고, 콜리지는 디본쉬어 출신으로 지저스 칼레지를 다녔다. 두 사람이 다같이 젊었을 때 이상주의적 경향이었고, 한 때 자유주의사상에 불탔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1796년 가을, 처음 대면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고, 워드워즈의 초기 시 한두 편을 콜리지가 읽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나 별로 큰 영향을 주고받은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것이 워드워즈 26세, 콜리지 24세 때 어느날, 브리스틀의 한 가정에서 처음 만난 후부터 두 사람의 우정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서로 거처를 가까운데 정하고, 수시로 만나서 담론하고, 산책하고, 여행하고, 장래를 계획하며 정신적인 형제 간이라고 불리워질 정도의 다정한 우정을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이들 두 사람의 우정은 영문학사상 희귀한 사실로써 만일 그런 정신적 결연이 없었다면 서정민요집이라는 역사적인 책이 나오지 않았을 것은 물론, 영문학사의 흐름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해서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서정민요집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우정의 산물로써, 두 사람은 시의 기본적 원리를 논의한 끝에 그런 원칙 위에서 시작을 실험해보고자 계획하여 서로 한 부분씩을 분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사정을 콜리지가 후일에 그의 유명한 문학평전 (Biographia Literatia) 에서

‘워드워즈와 내가 이웃하고 살던 첫해에 우리의 얘기는 자주 시의 두 가지 기본점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즉 자연의 진리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자극시키는 힘과 상상력으로써 색조色調를 변화시켜 신기新奇에 대한 흥미를 주는 힘의 두 기본점 말이다. 우연히 비치는 햇빛이나 그림자, 또는 달빛이나 석양이 우리가 잘 알고 익숙한 풍경 위에 퍼질 때 나타나는 돌연한 매력은, 그 두 힘을 실지로 결합시킬 수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이런 것이 자연의 시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누가 그랬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일련의 두 가지 종류의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첫째 종류에서는 사건과 행위자가 적어도 일부분은 초 자연적일 것이니, 이 때에 노리는 미점은 그런 상황 (그것이 진실하다면) 에 자연히 수반되는 감정의 극적 진실성에 의한 감동의 흥미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런 상황은, 환상이 어디서 기원했든지 간에, 자기가 어느 한 때에 초 자연적 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믿는 모든 인간에게 진실인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시에 있어서는 그 주제를 일상생활에서 택하게 되는 것이니, 그 인물이나 사건은, 어느 마을이나 그 근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인물이나 사건들이어서, 그런 것이 있을 때에는 명상적이고 감정있는 마음은 그것을 찾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서정민요집의 계획은 시작되었다. 그 책에서 나는 초 자연적이고 적어도 로맨틱한 인물이나 존재를 그리기 위하여 노력할 셈이었고 … 한편 워드워즈는 일상사물에 신기한 매력을 부여하고, 정신의 주의력을 습관의 잠에서 일깨워 그것을 우리 안간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에 향하게 하여, 즉 우리가 너무 친숙한데 가리우고, 각자의 근심걱정 때문에 눈이 있어도 보지 못 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 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 하는 무진장의 보고寶庫에 정신의 주의력을 향하게 하여 초 자연과 유사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겠다고 하였다 … 이런 형식으로 서정민요집은 출판되었고, 하나의 실험으로써 그에 의하여 제시되었던 것이다. 취급된 주제들이, 그 성격상 보통 시에서 쓰는 흔히 있는 장식이나 불필요한 구어체를 배제하고, 시가 전달할 특수한 임무인 쾌락의 흥미를 나타낼만큼 일생생활의 언어로써 다루어졌는지 안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이와같이 콜리지는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두 사람이 분담했던 시의 두 가지 기본점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19세기 로맨티시즘의 커다란 두 가지 특질, 즉 초 현실적인 태도와 또 한 가지 평범한 인물과 사물과 언어에 대한 존경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방향을 더욱 뚜렷이 더욱 자세하게 천명한 것이 워드워즈가 서정민요집 제 2판에 붙인 서문이고, 제 3판 부록의 시어론이다. 그 서문에서 워드워즈는 재래 일반적으로 통용된 바와 같은 시론, 즉 시는 특수한 상황과 주제와 특수한 시어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배격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제재와 사건을 택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언어로써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 일상적인 사물에 상상의 색채를 씌워 평범한 것도 평범하지 않는 것으로 고양시켜야 하고, 일상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 인간성의 근본법칙을 더듬어 그것을 흥미있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시의 제재로써는, 전원田園에서의 일상생활을 택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전원생활은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감정과 본연의 면목이 단순한 상태로 발달되어 그것을 정확히 관찰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제재에서 얻어지는 경험이나 감정이 인위적인 가공없이 자연발로 하는 것이 워드워즈의 시다. 그의 유명한 말로써 ‘시는 힘찬 감정의 자연발로이다’라고 한 말이라든지,‘시는 평정하게 회상된 감정에서 연유한다’고 한 말들은 대체로 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우러나온다는 것이고, 현대시로에서 시인을 제작자로 보는 견해나 시를 정서의 객관적인 상관물이라고 보는 견해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리고 워드워즈가 그 서문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시어의 문제다. 그는 자기가 서정민요집 속에서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의 언어를 바로 그대로 모방하거나 채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하고, 소위 시어詩語라고 하는 것을 극력 피하고 보통 사람들의 언어에 가까운 시어를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가 예를 들어 공격하는 시로서 토마스 그레이의 ‘애가哀歌’의 경우를 보면, 이 시인은 이상하리만치 시어에 공을 들여 시와 산문과의 간격을 넓히고자 애썼다는 것이다. 그 시에서 다소의 가치가 있는 부분은 그 중에서도 산문과 별로 차이가 없는 수數 행行 뿐이라고 말하고, 우수한 시일수록 시와 산문과의 구별이 없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18세기 의擬고전주의 시에서의 정교한 운율과 세련된 시어, 생명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 등에 대한 반박으로써, 시어를 산문의 위치로 끌어내리고자 한 점, 현대시론을 무색케 할 정도의 탁월한 선견先見이었다.

이러한 제재면과 언어면의 주장이 서정민요집에 실린 23편의 시에서 실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주에서 콜리지의 ‘노老 수병水兵의 노래’는 초 자연적인 신비감을 자아내는 장편 설화시說話詩로써 영문학사상 주목할만한 걸작이다.

노 수부가 겪은 난파사건이다. 돗대에 앉은 남해왕조南海王鳥를 사살射殺함으로써 초래된 저주와 죄의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노 수부가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 소박한 언어와 거기에 감도는 신비스런 분위기, 그리고 내포된 많은 상징 등, 과연 콜리지의 천재를 충분히 나타내는 좋은 시다.

19편의 워드워즈의 시 중 가장 걸작은 ‘틴턴 애비 시’다. 시인이 5년 전에 한 번 방문한 일이 있었던 틴톤사원을 다시 찾아, 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어린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자연 속에서 ‘고요한 인간성의 슬픈 음악’을 듣고 신을 인정하게 된다는 매우 엄숙한 시로써 시인의 신비적인 자연관을 잘 나타내는 명시다.

여기에 실린 두 시인의 시들이 다분히 신비적이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극한 동정을 표시한 시들인 점에서 그것이 그들 직전의 윌리엄 블레익이나 로버트 번즈의 시와 다분히 유사성이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서정민요집의 시들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표준 하에 쓰여졌으면서도 그 제재나 언어가 보편성을 지녔던 점에서 낭만주의라는 한 문학사조를 선도하고 촉진하여, 한 세기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길이 인류문학에 크게 공헌하여 오늘날에도 위대한 고전작품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다.

080 백경白鯨 Moby Dick (1851) 멜빌 Herman Melville

백경 (1851년) 은 한 때의 독서계로부터 망각된 상태에 놓여지기도 했으나, 작가의 탄생 100주년 되던 1919년부터 재 평가되어 오늘에는 세계문학의 거봉이니 최대의 영어소설이라느니 하는 평을 받고 있다. 백경은 단순한 해양소설로써도 최대 걸작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성을 내포한 고전으로써도 여러가지 새로운 해석이 되고 있다. 백경은 장기간에 걸친 복잡한 창작과정의 소산이었으며, 이 작품의 소재는 작가의 애큐슈네트 호 상에서의 해상생활 체험과 백경에 대한 몇 가지 기록 및 문헌이기는 하나, 작가의 독서와 사색 그리고 그의 종교적 신념을 기초로 한 인간 영혼의 탐구라는 내면세계의 형식, 그리고 기교의 수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작가 멜빌은 수년 간의 방랑생활을 기초로 하여 그의 공상을 섞은 수 편의 해양소설 - 타이피 (1846년), 오무우 (1847년), 마아디 (1849년), 화이트 재키트 (1850년) 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들 작품은 그 주제가 바로 바다에 관한 모험담이기는 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는 선과 악, 인간과 생의 의의意義, 인간과 자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바다를 하나의 편리한 배경으로 삼아 인간을 관찰하였고, 바다와 대조하여 인간관계, 인간 자태姿態 그리고 인간정신을 관조觀照하였던 것이다.

멜빌은 ‘화이트 재키트’를 탈고脫稿하자, 19세기 중엽의 미국에서 중요한 상업활동이었으나 이미 쇠퇴일로를 걷고있었던 포경업捕鯨業에 관한 글을 쓰라는 권고를 친구로부터 받아, 1850년 5월 경에는 반 가량 완성했다. 그 무렵 그는 나다니엘 호손의 ‘노老 목사관의 이끼’를 감명깊게 읽고, 유명한 호손론을 집필했다. 그는 호손론에서 ‘인간정신을 진실로 탐구하는 영혼의 탐구자’를 발견하였고, 그의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암흑과 광명은 ‘단순한 비평가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하며, ‘나의 영혼에 발아發芽의 씨를 뿌려준 것이다’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런던 차, 그 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이 두 작가는 상봉하게 되어 그들의 영교靈交가 계속되었으며, 호손으로부터 심각한 정신적 영향을 받아, 멜빌은 거의 완성되었던 포경항해에 관한 글을 처음부터 개작하여 오늘의 백경을 1851년 10월 28일 런던에서 그리고 11월 상순 뉴욕에서 발표했다.

백경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포경선 피퀴드 호의 광적狂的인 노老 선장船長 에이허브는, 3명의 뉴 잉글란드 출신인 백인 조타수와 3명의 원시인 살잡이, 신비로운 배화교도拜火敎徒와 백치白痴 흑인소년 그밖의 여러 가지 경력과 직업을 가진 여러 인물을 거느리고, 아메리카 동북안의 난타케트 항을 출범한다. 말하자면 19세기 중엽의 미국사회를 상징하는 피쿼드 호는, 세계의 온갖 민족과 온갖 종교를 거느리고 세계의 3대양으로 향한다. 그런데 에이허브는 ‘모비 딕’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백색 괴경怪鯨에 복수하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전 싸움에서 패배당한 그는 그 패배의 상징으로 고래뼈로 만든 의족義足을 달고 있다. 복수에 불타는 에이허브는 두 번째의 회전會戰을 향해 출범하면서 완전한 승리 아니면 파멸이 있을 뿐이라고 맹세한다. 그의 망집妄執은 모든 선원을 그의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배가 모비 딕을 쫓아 희망봉에서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으로 향하는 사이 여러 가지 사건이 전개된다. 드디어 모비 딕을 추적한 피쿼드 호는 3일 간의 사투死鬪를 전개한다.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 딕의 몸에 박힌 추살밧줄에 끌려 그만 바다귀신이 되며, 배는 모비 딕의 일격으로 침몰한다. 유일한 생존자는 방황자 이슈메일 한 사람 뿐이며 그가 그 전말顚末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작품은 포경선의 생활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린 이야기이고, 모험과 이상한 인물들의 로맨스이며, 영웅적 결의와 투쟁의 극劇이고, 포경기술에 관한 논문이며, 또한 작가 자신의 깊이 사고한 인생철학이다. 멜빌이 심혈을 기우려 공상과 리얼리즘을 뒤섞어서 쓴 작품인 만큼 전체가 내적 생명수에 생동하고 있으며,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수필적인 성격을 띤 철학적인 서사시이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사건이 비장한데다 상상이 분방하고 용어가 자유자재하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웅대한 작품의 요소를 갖추고 있어, 종래의 소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한 문학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백경의 구성은 단순하고도 산만한 것 같지만, 세부로 파고들어감에 따라 결코 산만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묘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 포경항해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에이허브의 비극과 작가 자신의 인간 운명의 사색思索의 이야기를 서로 결합하면서 전개시키는 그런 구성을 이루고 있다. 백경과 독자 사이의 거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차츰 거리를 좁혀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줄거리와 하등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장章들과 최후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감정과 심리의 흐름이 교묘하게 서로 교차되고 있다.

이 비극적 서사시는 줄거리를 중심으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지리적인 견지見地에서 보면 네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고, 또한 희곡의 형식에 비추면 5막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슈메일의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 그리고 이 항해가 보통의 항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의 서론과, 백경을 추적하여 대서양으로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헤매는 동안의 가지가지의 희비극적인 해상생활과 고래에 관한 고증考證, 고래의 생태와 용도 등 여러 가지 사상을 면밀하게 기술한 부분, 그리고 마지막 추적, 결투, 패배, 피쿼드 호의 침몰,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지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첫째 부분은 이슈메일과 원시인 퀴이퀘그를 중심으로 한 항해 준비를 서술하며, 다음 부분은 피쿼드 호가 대서양을 달리고 있을 때의 에이허브 선장과 선원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셋째 부분은 피쿼드 호가 인도양에 그 웅자雄姿를 나타내자 주로 경학鯨學에 관한 논문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마지막으로 피쿼드 호가 태평양에 등장하여 백경과의 사투를 전개하기까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희곡의 형식에서 보면 22장까지는 서막, 그 다음 에이허브와 선원들이 등장하여 항해의 목적을 소개하는 데까지가 제 1막, 백경에의 공포와 증오에 불타는 괴怪 인물들이 타고 있는 것이 분명해지고,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쉬운 기운이 있음을 암시하는 데까지가 제 2막, 처음으로 고래를 잡고 고래를 처치하는 과정을 서술하며 고래의 생태, 용도, 고증을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 제 3막, 순더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오면서 백치 소년 핍의 조난遭難, 에이허브의 의족 제작, 퀴이케그의 중병重病 등 일련의 괴기한 사건을 전개하며 적도의 가까워 폭풍을 만날 때까지가 제 4막, 그리고 적도선상에서 백경의 출현을 기다리는 에이허브의 집념, 그리고 백경과의 대단원까지가 제 5막, 마치 세익스피어 극과 같은 극 구성을 이루고 있다.

백경의 서술형식은 분방奔放하며 변환變換하기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1인칭 서술인가 하면, 어느 사이 3인칭으로 바뀌며, 수필적인 산문이 계속되는가 하면, 희곡형식이 전개되고, 기다란 장章이 나오는가 하면, 극히 짧은 장이 나오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는 전체 형식에 통일성이 없는 감을 주지만, 그것이 착잡하게도 잘 통일되고 있어 특이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피쿼드 호의 순행에 따라, 문체는 서술적으로 인상적인데서 상징적으로 옮아간다. 그 서술은 외부로부터 내부로 향하는 분석적인 서술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이슈메일과 퀴이퀘그에 관한 사실적인 서술이 진행되다가, 요나와 에이허브의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서술로 옮겨가고 있다. 다음은 피퀴드 호의 선원들의 외관外觀을 묘사하다가 그들이 독백이니, 꿈이니, 심지어 그들의 무의식적인 세계로 발전되어 간다. 그 다음 고래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처음에는 머리, 생김새, 꼬리 등 외형을 기술한 다음 고래뼈, 고래기름, 고래 해골 등 내부로 옮겨가 고래의 안팍을 묘사한다. 마지막은 피쿼드 호 갑판상에서의 여러가지 외형적인 사건과 에이허브 선장실 내의 내부적인 사건이 서로 교체되고 있으며, 에이허브의 내면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같이 외부로부터 내부로 서술이 진행하면서, 백경의 거대하고 흉맹凶猛한 모습이 독자 앞에 뚜렷이 나타나게 하고 있다. 처음에는 암시에 지나자 않던 것이 차츰 암시의 도수가 잦아지며 그 강도가 강해짐에 따라 형태가 명료해진다. 그리고 고래에 관한 지루한 기술은 백경에 대한 독자의 이미지를 그만큼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멜빌의 문학은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으므로 바다의 웅대한 생명감이 충일充溢하고 있다. 여기에다 그의 시인적인 성향이 합쳐 그의 문체를 시적인 문체로 발전시켜, 바다의 대 서사시를 만들고 있다. 멜빌 산문의 미는 해학과 우울한 기분과의 교착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정서, 분방한 경구警句, 성서 구절의 인용, 방대한 비유, 방종한 율동律動, 의음적擬音的인 효과, 이러한 여러 특질이 적당히 융합되고 있어 시각에 보다 청각에 더 어필하는 대 산문시를 이루고 있다.

서머세트 모옴이 세계 문학 중에서 10대 작품을 선택하여 작품과 작가를 논한 글에서, 백경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해석을 소개하고 있는데, 백경을 악의 심볼이라고 보고, 에이허브와 백경과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선이 멸망하고마는 선과 악의 투쟁을 나타낸다는 해석에 동의하여, ‘이것은 멜빌의 어두운 염세주의와도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모옴은 이와 정반대의 해석을 내릴 수 있지 않은가 하고 의미심중한 말을 하고 있다. 즉 푸른 바다를 자유로히 질주하는 백경을 선의 심볼이라고 보고 광적으로 복수의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에이허브를 악의 심볼이라고 볼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즉 상징의 해석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따르는 것이며, 때로는 정 반대의 해석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뜻하는 바 참으로 천차만별이며 그 의의 역시 무한하며 심원한 바 있다. 백경을 악, 바다를 인생, 에이허브를 진실된 목적은 갖고 있으나 이들과 같이 서글픈 인간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어, 선악의 투쟁은 물론, 인간과 자연과의 투쟁, 인간과 도덕악과의 투쟁, 영성靈性과 육肉과의 영원한 투쟁, 현상과 영원과의 상극相剋 등 무한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다종다양한 광채를 던지고 있다. 이처럼 백경은 여러가지 면에서 또 여러가지 수준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를 보통 해양소설, 사상소설, 상징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선과 악, 영과 육, 문명과 야만野蠻, 현세와 영원 등이 엉키고 있는 이 대 장편이 과연 무엇을 그 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 간단히 논하기란 어렵다.

한편 이 소설만큼 남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연애는 티끌만큼도 있지 않고, 비유할 바 없는 웅장한 무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모험과 격투만을 전개하고 있어 원시력에 대한 찬가, 전제적인 것에 대한 반항, 굳게 일관된 민주정신을 찾아볼 수도 있다.

1920년대에 와서 백경에 대한 흥미가 부활했는데, 이것은 문예사상 가장 극적인 가치평가 역전逆轉의 예例다. 멜빌은 하룻밤 사이에 19세기 미국문학의 6대작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으며, 1차대전에 참가했던 청년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바 컸다. 오늘날에 와서는 평자에 따라서는 신곡, 햄리트, 카라마조브 가의 형제나 전쟁과 평화 같은 작품과 동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리고 어느 서평가가 말했듯이 정말 ‘고래 같은 책’이다. 그 중요한 줄거리는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게 한다.

081 풀잎 Leaves of Grass (1855) 휘트먼 Walt Whitman

미국 시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시’ 로 알려져있는 ‘풀잎’ 은 오늘날 비단 미국뿐만 아니고 동서양에서도 널리 읽혀 애송愛誦된다. 지금은 이 시집을 미국 최대의 서사시 혹은 영웅시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이가 없을 것이지만, 처음 12편으로 된 얄팍한 시집이 자비 출판으로 나왔을 때 (1855년) 는 별로 이목을 끌지 못 했다. 그 후 판이 거듭됨에 따라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이 시집은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즐거움과 동시에 충격을 주었다. 종래의 문학적 전통이 강요한 시어詩語에서 떠나 일상생활의 언어를 사용한 것을 비롯하여, 성性의 중요성을 솔직하게 찬양한 것이라든지, 형식과 내용면에서 가장 독창적 경지에 가까이 간 것은 미국시사상 하나의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미국문화의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집은 식민시대 이후로 미국사회를 지배해오던 반 문학, 반 시적인 전통을 극복한 최초의 돌파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30년대 초에 미국의 각지를 여행하면서 새 대륙의 제도와 풍물을 살폈던 프랑스의 젊은 여행가 토크빌은 그의 대저大著 ‘미국의 민주주의’ 에서 말하기를 미국의 생활은 한 마디로 ‘시적詩的’ 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사상에는 시정詩情이 넘쳐있으며, 이것이 사상의 틀에 활력을 주는 숨은 신경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머지않아 민주주의를 노래하는 시인이 나타나리라는 낙관적인 예언을 했다. 그런데 그 시인은 지난날의 전설이나 설화를 되풀이 노래하지 않을 것이며, 새 시대와 새 사람을 노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휘트먼은 한 마디로 토크빌의 이 예언을 몸소 실현한 최초의 미국시인이었던 것이다.

풀잎을 내기 전의 휘트먼의 생활은 위대한 예언자로써 풍모나 능력을 엿보이는 면이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휘트먼은 1819년 5월 뉴욕 주 롱 아일런드의 웨스트힐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와 목수 겸업을 했는데 조상은 영국계의 청교도이며, 어머니는 폴란드계 퀘이커교인이었다. 9명의 형제 중 둘째였으며,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월터였으나 월트로 불리웠다. 1833년 경에 뉴욕의 브록크린으로 이사했으며, 11세까지 공립힉교를 다니다가, 인쇄소 사환使喚, 수습식자공修習植字工으로 지냈고, 2년 간 교편敎鞭을 잡기도 했다. 1838년에 롱 알릴렌더 지誌를 창간했으나 그 이듬해에 손을 땠다. 이러는 동안 성서를 위시하여 세익스피어, 단테, 호메로스, 니벨룽겐의 노래, 읠터 스코트, 그리스 및 인디아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했는데, 그의 후기 작품의 격조와 사상에 그 영향이 들어나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신문에 관계하다가, 1846 - 1847년에는 브룩크린 데일리 이글 지의 편집인이 되었으나, 정치적인 의견에 관해서 민주당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은 데다가, 편집인으로써 다소 게으른 편이어서, 편집인의 자리를 내어놓았다. 1848년에 남부 뉴지아나 주의 뉴 올린즈에 가서 크레선트 지의 주필을 지내다가 얼마 안 되어서 뉴욕에 되돌아와 퓨리먼 지의 주필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한 동안 직업을 갖지 않았다.

브룩크린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기록한 노트북에서 ‘풀잎’ 이 태동한다. 이 시집은 에머슨과 몇몇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나, 다른 평론가한테서는 주제와 형식면에서 전통을 깨뜨린 이유로 비난을 받았으며, 일반대중에게서는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 했다. 1865년에 제 2판이 나오면서 잘 나가기 시작했고, 에머슨과 소로우 등의 문인과도 사귀게 되었다. 남북전쟁 중 (1861 - 1865년) 에는 부상한 아우 조지를 찾아 버지니아 주에 갔고, 1863년에서 1865년까지 위싱턴 시내의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다. 시집 ‘북소리’ 는 이 동안의 체험을 담은 것이다. 1871년에 산문 ‘민주주의의 전망’ 을 발표했으며, 커져가는 산업사회의 폐단을 공격했다. 1873년에 이르기까지는 줄곧 워싱턴에서 일했다. 동년 1월에 중풍이 발병했고, 또 어머니가 병사했다. 문병 차 뉴 저지 주의 남단에 있는 캠든 시에 간 이후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879년에는 서부와 중남부를 여행했으며, 1882년에 자사전적인 수기 (Specimen and collect) 를 발표했다. 1888년에 병세가 악화하여 유작遺作을 썼으나 회복했고, 1890년에 마지막 유서遺書를 작성했다. 이 만년기에는 호레이스 트라우벨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문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가운데 유유자적悠悠自適했다. 1892년에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3월에 영면했다. 풀잎의 최후 개정판은 병상에 누워서 가필했기 때문에 임종판이라고도 불린다. 작품으로는 이밖에 1888년에 발표한 시, 산문집 ‘11월 나뭇가지’가 있다.

휘트먼의 풀잎은 1855년 7월 (미국독립기념일) 에 자비 출판한 풀잎의 초판에 붙인 서문에서는 그의 시론을 피력했다. 이것은 이 보다 앞서 1801년에 영국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가 S. T. 콜리지와 공저로 낸 ‘서정민요시선(1789년)’ 에 붙인 서문에 비길만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워드워즈는 서문에서 ‘이 시집에서 제기한 중요한 목적은 일상생활에서 사상과 정경을 골라내서, 될 수 있는대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서술하고, 동시에 거기에 얼마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평범한 것이 비범하게 들어나도록 하는데 있다 …’ 라고 말하고, ‘비속卑俗한 시골생활을 대체로 골라보았다 …’ 고 했다. 이같이 참신한 언어와 주제를 선택할 것을 주장하므로써, 워드워즈와 콜리지 두 시인이 다가올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길잡이가 되게 이른 것은 너무나도 가치있는 일이었다. 휘트먼은 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미국 시인들의 횃불이 되었다. 풀잎의 서문은, 12편의 시나 별로 다름이 없는 산문시로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아메리카와 그것의 위대한 표현을 높이 찬양하겠다는 강렬한 국수國粹주의다. 이 지상에 있는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 보다 미국인들이 가장 넘쳐흐르는 시적 자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미합중국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최대의 시’ 라고 휘트먼은 선언하였다. 그래서 미국 시인이 할 일은 미국인들의 이상을 노래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사회와 정치의 이상으로 삼고, 그 기초를 자아를 존중하는 개성의 평등한 결합인 동포애에 두는 미국인의 신념을 강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또 개개인은 우주와 연결되어있어, 우리의 생명은 불멸한 것이며, 인간은 그의 혼과 못지않게 육체도 소중하며, 남성도 여성도 똑같이 종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성애同性愛도 찬양한다고 주장했다. (휘트먼의 생애나 시작품 속에 동성애적인 요소가 뚜렷이 나타나 있음은 많은 평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며, 휘트먼 자신은 10명이 넘는 사생아의 애비라고 말한 일이 있기는 하나 미혼으로 세상을 떠남). 풀잎은 해를 거듭할수록 개정판이 나오고, 새로운 작품이 덧붙여지자 민주주의의 찬양과 함께 사랑에 대한 찬양도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아담의 아이들’ 에서는 이성 간의 사랑을, 칼라머스에서는 동성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휘트먼의 이상과 같은 생각에는 인간의 신성神性에 관한 에머슨의 교설敎說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다 휘트먼은 에머슨보다 폭 넓고 따뜻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어서, 에머슨의 교설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하여 적용했던 것이다. 또 휘트먼은 초절론적超絶論的인 직관直觀에 대한 에머슨의 신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은 불식간에 ‘내적內的 광명’ 에 대한 퀘이커교적 신앙과 함께 융합融合했을 것이다.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퀘이커교적 전통은 그의 독립심이라든가, 만인과의 동포애, 평화에 대한 사랑에 기여한 바가 크다. 만년에 접어들면서 뚜렷해진 신비주의적 경향은 에머슨과 퀘이커교도와 동양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육체의 찬미는 위의 어느 줄기에서도 비롯하지 않은 휘트먼의 독자적인 것으로써, 에머슨을 놀라게 했고, 그와 대립을 초래했다.

휘트먼의 서문의 한 구절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시인은 가장 균등한 사람이며 … 자기의 시대와 강토疆土 (영역領域) 를 균등하게 만드는 사람’ 이라고 했다. 풀잎의 시를 보면, 마치 상품목록을 만들 듯이 주변에서 보는 허다한 사물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나름의 민주주의가 가진 균등화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노래하라’ 는 장시長詩에 나오는 ‘나 자신’ 은 중세극에 나오는 ‘모든 사람’ 과 다름없다. 그 시에서 서술되어있는 경험의 어떤 것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고, 어떤 것은 상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달리 강렬한 공감으로 휘트먼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가 있어서, ‘개들에게 몰린 노예’ 가 될 수 있었고, ‘흙투성이가 된 소방수’ 가 될 수 있었다. 절대적인 평등이야말로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북전쟁 중에도 그의 기본적인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삶의 포옹자抱擁者’ 였고, ‘곧 북군파며 남군파’ 여서 전쟁의 쟁의점과는 아랑곳없이 북군, 남군의 부상병을 똑같이 간호했다. 시집 ‘북소리’ 가 펼쳐놓은 세계는 정치적문제와는 전혀 관계없이 인간들의 비애, 고뇌, 환희를 보기드문 사실적 필치로 그린 세계다.

전쟁은 휘트먼의 사상에 보태는 바가 없었고, 그의 근본태도를 바꿔놓지도 않았으나, 그의 시를 극명克明하게 그리고 영화榮華하는데 이바지 했다. 이 시기 이후 휘트먼은 ‘즐거운 육체적 상면’ 을 전처럼 ‘관능적’ 으로 노래하지 않았고, 그의 시는 더욱 신비적 경향을 띠었다. 그의 최대 걸작 ‘마지막 라일락이 뜨락에 피었을 때’ 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장시는 암살당한 링컨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가哀歌로 쓰여진 것으로, ‘라일라과 별과 새’ 에 의해서 길이 남을 시인의 슬픔과, 전 국민의 비애와 장례식과 교회의 종소리를 적절히 새겨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부는 휘트먼이 신비적으로 읊는 죽음의 찬가의 배경으로 변하여 미국도 링컨도 이 시의 불타는 핵심에서 잊혀지고만다. 그러나 이 계열의 시를 제외하고서는 미국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고, 또한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인디아로 가는 길, 그리고 인디아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 그의 세계적인 동포의식은 분명히 강한 집념으로 남았었다.

풀잎의 시 형식과 시어는 그 주제에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풀잎이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성정性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의 시도 또한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것에서 벗어나냐만 했던 것이다. 그의 시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웅변조의 문체를 닮은 구절이 들어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문체나 그가 가장 싫어했던 ‘응접실應接室 시詩’ 의 생명없는 문체에서는 거리가 먼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일상생활의 언어에 관심을 가졌고, 그런 언어를 인간생활에서 자라나는 언어라고 찬양했다. 시행詩行을 사고思考의 보통 길이에 맞추어 자연스러운 격조格調로 쓰면서 비어卑語, 은어隱語 혹은 지방색 짙은 용어와 자기가 만든 용어를 뒤섞어놓았고, 그럼으로써 생명있는 언어를 재생하려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도 휘트먼의 시는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한다.

휘트먼의 시에 공감을 느끼든 반발을 느끼든 그의 영향을 거치지 않고 현대시를 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휘트먼이 죽은 해에 E. A. 로빈슨이 이런 의견을 말한 후 허다한 시인들이 휘트먼에 갖가지 반응을 보여주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얼마 안 가서 휘트먼과 ‘휴전’ 을 맺었다고 했고, ‘피사 시편’ 에서는 반反시적인 미국의 풍토와 대결하는데 있어 휘트먼과 꼭같은 소임을 맡고 있다고 했다. T. S. 엘리어트는 1920년대의 평론에서, 휘트먼의 안개와 같이 몽롱한 사상을 공격했으나, ‘4개의 사중주곡四重奏曲’ 에는 휘트먼의 메아리와 추념追念이 깔려있다. 또 하트 크레인은 장시 ‘다리’ 에서 휘트먼을 비관적인 엘리어트와 대립되는 미국의 문화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윌리엄 C 윌리엄즈는 휘트먼이야말로 현대시의 길을 터놓은 선구자先驅者임을 최근에 발견했다고 한다. 비트 파 시인에게도 그의 영향을 뚜렷하다.

082 죄罪와 벌罰 Prestuplenie i nakazanie (1856)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은 날이 가고 해가 거듭될수록 끊임없이 우리 면전面前에서 성장하고 있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만큼 가면 갈수록 새로운 평가와 문제를 제시해주는 작가는 드물다. 그것은 그의 병적인 성격과 포착하기 힘든 실존주의적 발상, 그리고 강열무화强烈無化한 그의 독창적인 사상성에 기인한다. 그의 일생을 괴롭혔던 불치의 간질병, 사형 선고, 사형집행 몇 분 전의 특사特赦, 4년 간의 시베리아 감옥생활 -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난을 다 겪으면서도, 한쪽에서는 인간의 잔인성, 야수성, 악마성을 구명하고, 또 한쪽에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선성善性과 신성神性을 투시한 작가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인생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워지지만, 동시에 고통과 저주에 넘친 현대의 묵시록黙示錄, 혹은 예술적인 병리학서病理學書라고도 불리워진다.

여기서 고찰해보려는 ‘죄와 벌 (1856년)’ 은 그의 최후의 대작大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과 나란히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고, 그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고, 또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쓸 당시, 러시아에는 ‘사회의 부정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허용된다’ 는 허무주의적인 초인超人사상이 유행하였던 시대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도 이러한 초인사상의 소유자였다.

페체르부르크의 가난한 대학생인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非 범인, 즉 평범한 인간과 천재적인 인간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그리고 범인은 기성의 도덕과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나, 비 범인은 그러한 도덕과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확신했다. 특히 인류 전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할 때는 그 일부분을 희생시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고 또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스코니코프는 생각한다.

‘누가 나폴레옹의 살인죄를 물었던가? 나폴레옹은 사상 최대의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위인으로 존경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나폴레옹이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런 존재의 이유도 없는 전당포의 노파老婆를 살해할 생각을 품는다. 즉, 자기는 비 범인이기 때문에 무가치한 범인인 고리대금업의 노파를 살해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행사는 또한 정당한 것이라는 그의 독특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마침내 라스코니코프는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 그리고 그때 마침 집으로 돌아오던 노파의 여동생까지도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범행 직후부터 양심의 가책과 고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양심의 가책은 그에게 있어서는 도무지 예기치 않았던 것이다. 이 고민은 논리와 지혜가 명령한 논리적 의지와 인간의 내부에서 발하는 선과 정의의 정신적 의지와 충돌에서 생기는 투쟁이었다. 이 양자는 라스코니코프 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투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충돌과 투쟁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고민은 심각해졌다. 이러한 심각한 고민과 착란錯亂, 그리고 그 무한한 고독속에서 그는 드디어 자기가 무가치한 범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비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위인이 아니었던 증거였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비 범인이 아니었다면, 자기는 분명 사람을 죽인 범죄자였던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라스코니코프는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독교적인 권화權化라고 할 수 있는 소냐를 찾아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인거야.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의 짓이었어!’ 여기서 ‘자기 자신을 죽였다’ 는 것은 자신의 비 범인철학이 보잘 것 없는 범인인 노파에 의해서 완전히 분쇄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간단한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라스코니코프는 그 당시의 사회사상(합리주의적인 초인철학)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용감하게 기성旣成 도덕을 넘어섰지만, 그 후에 미칠 듯한 고독감과 강박관념에 그만 굴복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선과 악, 악덕과 자유의지, 인간과 신의 문제다. 죄와 벌에서는 악을 대표하는 라스코니코프가 선을 상징하는 소냐 앞에 굴복한다. 이것은 두뇌와 이론에 대한 신성과 양심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라스코니코프의 회오悔悟와 갱생更生에 의해서 죄와 벌의 주제가 일단 해결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철저힌 개인주의와 권력의지의 사상이 논리적으로 완벽을 기하고 있는데 반해서. 소냐의 신과 양심의 사상은 그 이론적 무장이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도스토예프스키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신과 양심의 법칙을 이론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주로 반대측으로부터 접근해서, 무신론적 개인주의를 변증법적으로 검토하고, 그 개인의지에서 발생하는 악을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선과 대결시키는 수법을 썼던 것이다.

라스코니코프와 소냐 외에, 가장 흥미있고 중요한 인물은 선악의 경계를 모르는 방탕자放蕩者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는 라스코니코프의 제 2의 자아自我로써, 라스코니코프처럼 도덕이며 법률의 계약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라스코니코프와 달리 태연히 남의 피를 짓밟고 넘어가는 강자强者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는 언제나 복잡하고 모순에 차 있다. 라스코니코프가 때로 종교심의 잠재潛在를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적인 방탕한 스비드리가일로프도 내세의 존재를 믿고 있다. 다만 그의 마음에 비치는 내세는 그의 데카단적인 성격에 들어맞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의 내세관이 그토록 추한 것이지만, 이미 내세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상, 그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의 종교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통해서, 아무리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악인일지라도 뼈속까지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악인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분석하여, ‘이지理智의 세계와, 정열의 세계, 그리고 이지와 정열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로써 구성되고 있다’ 고 말 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거의 공통되는 말로써, 죄와 벌에서의 이지의 세계는 라스코니코프의 관념의 세계이고, 정열의 세계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악마적인 행동의 세계이며, 논리와 정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소냐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이지의 세계와 정열의 세계는 다 멸망하고만다. 라스코니코프는 노파를 죽인 후 소냐의 복음사상에 의해서 갱생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가졌던 이지의 세계 - 자신의 초인주의를 말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로써 자신의 악마적인 행동의 세계를 결산한다. 오직 신의 상징이며 기독교사상의 권화인 소냐만이 부지不知의 세계로써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밖에도 작자는 라스코니코프를 끊기있게 추적하는 명名 형사 포르피리,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리스코니코프를 구하려는 소냐, 소냐를 창녀로 전락시킨 퇴직관리 마르멜라도프와 같은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각도로 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근본적인 관념은 라스코니코프에 의해서 대표된 협의의 개인주의이고 합리주의적인 원리와 소냐에 의해서 대표된 종교적 기독교적 원리와 대립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생에서 악마적인 육적 원리와 신성한 정신적 원리와의 이 2대원리의 투쟁을 항상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은 그의 어느 작품을 통해서도 가장 현저한 사실이다. 그러나 작자는 예민한 예술가로써, 한쪽으로는 인간에게서 완전하고 고상한 이상의 실현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 한쪽으로는 이 세상에는 전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완전한 죄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생에서 이 2대원리의 투쟁을 연구한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인간을 이상으로 접근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위대한 작품이 다 그렇듯이 이 작품도 작자가 지닌 인생관 내지는 그 사상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죄와 벌은 그 작법에 있어서 세계문학사상 또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냈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탐정소설 수법 속에 사상적인 관념소설을 처음으로 예술적으로 결정시킨 작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라스코니코프의 관념적인 사색, 대화, 숨 막히는 추적망상증, 그 드릴에 찬 심리상태의 변천 등이 주요한 특색으로 되고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작품이 갖는 현저한 특색은 이 작품이 주는 병적인 성격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간질병환자며, 히스테리 환자며, 백치白痴며, 색마色魔이며, 알콜중독자 같은 병적인 불구자들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같은 병자들이 단순히 그 병자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영원한 건강으로 갱생하기 위한 바탕으로써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감명을 독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하나의 소설이면서도 성전聖典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도 그의 작품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러한 종교적인 복음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죄와 벌이 독서계에 준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독자들은 가는 곳 마다 이 작품의 중압감과 괴로운 감명을 이야기했고, 도이치의 철학가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자기의 스승이라고 불렀고, 범죄학자들은 범죄심리학의 표본이라고 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인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은 라스코니코프의 사건이 너무나도 현실과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라스코니코프의 범행 장면이 러시아통보 지에 발표되었을 때, 초인사상에 사로잡힌 어느 대학생이 실제로 금방의 주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적인 직관력이 얼마나 밀접하게 당시의 사회성과 일치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간혹 비평가들 사이에는 라스코니코프가 그 악마적 초인적인 개인주의를 최후까지 관철시키지 못 하고, 소냐의 기독교적 모랄 앞에 굴복당한 것을 애석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관념상의 초인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산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그러한 허황한 초인사상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당시의 사회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들한테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것은 작가가 청년층의 대부분을 매혹하고 있었던 합리주의사상을 희화화戱畵化 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기계적 평등화를 전통적으로 때려부셨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푸스키의 이러한 사상은 이미 그의‘지하실 생활자의 수기’에서 표명된 바 있지만 그는 죄와 벌에서, 개인의 자유는 어떠한 외력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는 없다는, 그의 귀중한 도덕적인 신념을 다시 한 번 만 천하에 천명闡明했던 것이다.

여기 소개한 죄와 벌 외에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가히 근대문학의 거봉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들, ‘가난한 사람들 (1846년)’ ‘백치 (1868년)’ ‘악령 (1874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880년)’ 등을 남겼다.

083 악惡의 꽃 Les fleurs du mal (1857)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본명이 샤를르 피에르 보들레르인 이 시인은 1821년 4월에 파리의 오뜨페이유 가에서, 프라슬랭 공작公爵의 가정교사였던 프랑스와 보들레르 (1759 - 1871년) 를 아버지로 카롤린느 아르셍보 뒤페이 (1794 - 1871년) 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1828년에, 그러니까 시인이 7세 되던 해에 작고하자 어머니는 그 이듬해 오피크 소령이라는 연하의 육군장교와 재혼했다. 시인은 의부 앞에서 생부에 대한 연연한 정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오피크가 중령으로 진급하여 리용으로 배치되자 이사했다. 시인은 리용 시의 드로롬 기숙학교에 맡겨졌고, 이듬해 (1833년) 에는 로와이얄 사립 고등중학교에 기숙생으로 들어갔다. 모정이 절대적인 작용을 하는 나이 (12세) 에 어머니와 떨어져 있었다는 일은 시인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즉, ‘영원히 외롭게 운명지워졌다’ 는 생각과 ‘무거운 우수憂愁’ 로 인하여 그는 행복한 학생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피크 대령이 파리지구의 참모부로 발탁되자 어린 샤를르도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사립 고등중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837년 3학년도 말에 그는 학교의 백일장에서 라틴 시 부문의 장원을 했다. 이 무렵에 초기의 시작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의부 오피크와 함께 피레네 산으로 여행을 떠난 것도 이 무렵이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1839년에 루이 르 그랑 학교에서 퇴교하자 바카르레아 (대학 입학 자격고사) 에 응시하였다. 그에게 장래가 보장되는 확고한 직업을 갖도록 간청하는 의부의 뜻을 거역하고, 문필을 업으로 택한 것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신념도 있었겠지만 의부義父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1839년부터 1841년은 이른바 그의 생애에서 ‘자유로운 파리생활’ 에 해당하는 시기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문학과 첫 관련을 맺은 시기다. 오 포이으에, 르꽁뜨 드 릴르, 보까주 같은 문우들과 사귄 것도 이 무렵이요, 베륀느나 생 루이 근처의 어느 집에서 문우들을 앞에 놓고 낭랑한 목소리로 자작시를 읊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리고 절도 없는 생활과 잡음으로 의부를 놀라게 한 것도 이 때부터다.

이 민감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에게 여행을 시킴으로써 어떤 효과를 기대했던 의부와 어머니는 그를 살리스 선장에게 맡겼다. 살리스는 보르도에서 인디아로 왕래하는 정기선의 선장이다. 1841년 (20세) 에 남양정기선南洋定期船이라는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가 5월 9일이다. 그는 항해 도중에 시종 우울하게 선실에만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배가 인도양의 모리스 섬에 있는 풀루이 항과 브루봉 섬의 생드니 항에 기항하자 배에 더 머물기를 거부했다. 1841년 11월에 탈선하여 알 시드 호에 편승하여 이듬해 2월에 프랑스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약 9개월)이 그의 넋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만일 보들레르가 대양과 태풍, 섬과 항구를 몰랐더라면 ‘알바트로스 (갈매기)’ ‘전생’ ‘바다와 인간’ ‘머리카락’ ‘이국異國의 내음’ 등 유명한 시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상징주의 헌장憲章이라고까지 평가되는, 그의 미학적 진수眞髓인 저 유명한 ‘교감交感’ 도 태어나지 못 했을 것이다. 이 시들은 ‘악의 꽃’ 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면 문제의 시집 악의 꽃을 살피기 전에 그의 문학작품 전체에 대하여 일별一瞥하기로 하자. 어느 시인의 경우도 그러하겠지만, 보들레르의 작품은 특히 그의 생애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야비할만큼 천박한 열정을 알았는가 하면, 더 할 나위 없이 순결한 승화昇化도 체험한 사람이다. 흑백 혼혈녀인 잔느 뒤발을 통하여 욕정을 충족시켰는가 하면, 고상하지도 못 한 사바티에 부인에 대해서는 거의 신비적인 숭배를 바쳤다. 그의 삶은 가슴과 정신을 전도顚倒시키거나 혹은 매혹하는 것들로 지배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 또한 고뇌와 참담, 희망과 기원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는 것이다. 악의 꽃은 바로 이러한 내적 비극의 메아리이다.

1847년 무렵에는 ‘공안公案’ 이라는 신문을 창간했으나 불과 2호로 끝났다. 그 후에도 ‘철인哲人 올빼미’ 라는 이름으로 신문 발간을 꿈꾸었지만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1865년에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자 예리하고 정확한 통찰력으로 선線과 색色에 대한 미의식을 개진하면서 드라크로와를 격찬하는가 하면, 대조적인 앵그르의 천재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했다. 또 1846년부터 1847년 사이에는 ‘젊은 마법사’ 라는 소설을 위시하여 6편의 산문을 썼다. 이와같이 그의 재능은 자못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악의 꽃의 시인이다.

시집 악의 꽃은 1857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2년 전, 1855년에 ‘2개의 세계’ 지에서는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보들레르의 시를 18편이나 특집으로 게재한 바 있었는데 이 때의 특집명이 악의 꽃이었다. 보들레르의 친구 에르네스트 프라롱은 악의 꽃 중에서 가장 훌륭한 15편의 시는 이미 1843년부터 만들어졌다고 확언하고 있다. 이 말은 근거가 있는 것 같은데 유고와 생트 뵈브는 이 무렵부터 보들레르에 대하여 상당한 경의를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1851년 (시집이 출판되기 6년 전) 에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시집이 완성되었으나 다만 사정이 여의치 못 하여 출판이 늦어지고 있다는 사연이 있다. 그러니까 악의 꽃 가운데서 상당수의 시는 적어도 1850년 이전에 쓰여졌다는 결론이다. 1846년에는 시집의 이름이 ‘레스보스의 여인들 (동성연애의 여인들, 그리스의 레스보스에서는 이런 풍속이 있었다고 함)’ 이었고, 1849년에는 ‘지옥의 변경邊境’ 이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었던 것 같다. 이 중의 몇 편의 시는 1845년에서부터 1852년에 걸쳐 La Artiste Le Corsaire, Le Magasin des Familles, La Semaine thealrale, La Reune de Paris 등 여러 잡지에 게재된 것들이다.

결국 이 시집이 악의 꽃이라는 책명으로 출판된 것은 1857년 6월이다. 알랑송 시市의 플레말라시스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초판에는 10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우울한 이상理想’ ‘악의 꽃’ ‘반항’ ‘술’ ‘죽음’ 의 5부로 되어있다. 시집이 출판되자 불과 며칠만에, 저자와 출판사가 검열檢閱에 걸려 미풍양속美風良俗을 해쳤다는 죄로 일부 삭제 및 벌금형의 제제를 받았다. 이 때문에 고민을 했지만 변호를 맡은 셰 데 스탕주는 역사에 남을 명 변론을 했다. 저자의 신앙과 몇몇 미술작품의 모랄을 시인과 비교하여 지지하고, 시인의 재능을 칭찬하며 실제로 책 속에서 명시名詩를 인용하여 읊은 다음 ‘이 위대한 예술을 여러분도 다치기를 원치 않을 것이요, 이 재판이 끝난 다음에는 깨끗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돌려보내주리라고 확신합니다’ 라고 변론을 마쳤다. 보들레르는 300프랑의 벌금형에다 6편의 시를 삭제할 것은 선고받았지만, 나폴레옹 3세의 황후에게 탄원하여 50프랑으로 감면된 벌금형마져 연기했다.

1891년 2월에는 악의 꽃이 재판되었는데, 130편의 시, ‘우울한 이상’ ‘파리의 정결들’ ‘술’ ‘악의 꽃’ ‘반항’ ‘죽음’ 의 6부로 이루어졌다. 그는 제 3판을 구상했다. 그러나 3판은 그의 사후 1868년에야 햇빛을 보게되었다. 테오도르 방비유와 아슬리노의 배려에 의하여 브리쉘에서 출판되었는데, 책명은 ‘표류물漂流物’ 이었고, 151편이 수록되었다.

악의 꽃의 위대함을 요약해서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이 출판된 1857년만 하더라도 그의 친구에게나 그의 적에게나 이 시집은 너무나도 그 내용이 낯설었고, 그 수법은 이해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낭만주의는 표현상의 과도성과 거의 무분별에 가까운 자아의 분출 때문에 이미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던 당시였지만, 1830년대의 지지자에게는 아직도 무시못할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보들레르는 오로지 르꽁트 트릴르의 예술에 심취하면서 정서의 낭비를 억제한 경도硬度 높은 시를 썼다. 악의 꽃이 지닌 참신함은 보들레르를 칭찬하거나 보들레르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조차도 이해되지 않았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이 시집이 6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생生에서 사死로 가는 도정道程의 여섯 숙소宿所라고 더보데는 말했다. 삶이라는 지옥을 거치면서 시인의 절망은 유일한 구원인 죽음을 향하여 항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통폐通弊인 정서의 분출이란 걸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답파高踏派의 차가운 조형미에 억제되어 있지도 않고, 시인의 감각과 현대적인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추상성과 형식미가 넘쳐흐른다. 그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고가 지닌 현대성 때문에 보들레르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요컨대 시집 악의 꽃은 한 인간과 한 예술가의 증언인 것이다. 보들레르는 시를 하나의 신비로운 초월超越의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를 통하여 시간과 시간을 극복하면서 인간의 모든 리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악의 꽃이다. 원래 인간이란 무한소無限小라기엔 너무도 위대한 존재요, 무한자에 비하면 너무도 미미한 존재가 아닌가! 그러기에 초월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신이든 시든 그 이름은 다를지언정 …. 시의 본질이 비가悲歌쪽의 탄식에 있거나 정교한 실용성에 있지 않을진데 시는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를 보다 옳은 차원으로 지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시를 통하여 암호처럼 계시되는 초월자를 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얼핏보면 악의 꽃은 인간의 오만성傲慢性을 비하卑下시키고 낭만주의가 신성화시킨 인간의 정열을 통렬히 비판하는 페시미즘으로 차 있는 듯 하지만 보들레르는 절망과 반항과 전락轉落과 참담한 독선적獨善的인 언사言辭를 통하여 오히려 미의 지배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미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리얼리티이다. 미는 이데아의 거울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예술을 통하여 논리와 이성의 구속을 ‘교감交感’ 으로 대치代置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수법은 인유引喩와 상징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음향과 색채와 냄새와 지각이 혼효混淆하는 세계에서 시인은 미를 엿본다. 그리고 영혼에 계시啓示되는 언어를 듣는다.

랭보, 베를렌느, 말라르메, 발레리는 다같이 보들레르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악의 꽃은 근대시의 성전聖典이다.

보들레느는 1867년 8월에 사망했다. 몽파르나스의 묘지 - 의부義父 오피크 장군과 어머니의 무덤 사이에 이 시인은 잠들었다.

084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1862) 빅토르 위고 Victor - Marie Hugo

빅토르 유고 (1802 - 1885년) 의 일생은 거의 19세기 전체를 통해서 걸쳐있다고 할 수 있다. 1802년 2월 부장송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외국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그 후 파리에 돌아와서는 루이 르 그랑 중학교를 다니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했다.

혁명에 이어 제 1 제정, 제 2 제정, 그리고 제 3 공화국의 역력한 목격자로써 참가한 그는 그 파란 속에서 거대한 태산처럼 엄연히 서서 그 폭풍을 겪어냈다. 거기에는 유고의 샘 솟 듯 끊일줄 모르는 정력이 있었다. 그 정력은 때로는 왕당王黨으로, 때로는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그리고 세계주의자로써 강한 공감과 명석한 상상력으로 구현되었다. 어떠한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을 하고 세밀한 데까지 상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서정시인으로써 극작가로써, 소설가로써 그리고 정치가로써 19세기를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달리면서 때로 느끼며, 울부짖으며 고발하는 모습은 19세기 그 자체의 모습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서정시인으로써의 유고에게는 수많은 시집이 있다. ‘가을의 나못잎’ ‘석양의 노래’ ‘마음 속의 목소리’ ‘빛과 그늘’ ‘징벌懲罰 시집’ ‘관조觀照 시집’ ‘제諸 세기世紀 전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시집이 있다. 유고의 시는 그 회화적 묘사에 있어 특히 우수하지만, 추상적인 사상을 구체적인 형상에 교묘하게 이식해서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유효 적절하게 부각시킨다. 선과 악, 악마와 신, 빛과 그늘, 무한과 순간을 대칭으로 삼아, 게다가 시조는 점차적으로 박력을 가해서, 끝에 가서는 무한 속에 개방되는 느낌을 주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극작가로써도 유고는 당대에 무시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작 에르나니 (1930년), 루이 블라스 (1838년), 레 뷰르그라브 (1843년) 등을 위시해서 약 7, 8편의 희곡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된 작품이 ‘에르나니’ 였다. 이 작품이 일반에게 공개되었을 때는 마치 전혀 새로운 예술이 탄생된 것 같은 소동이 벌어졌다. 그 광경은 테오필르 고티에의 ‘로맨티즘의 소설’ 이라는 평론 속에 뚜렷이 적혀있다. 구경꾼 속에 신구 양 시대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져 대립하여 소란이 벌어진 것이다.‘ 두 개의 조직, 두 개의 당파黨派, 두 개의 군대軍隊, 두 개의 문명이 대립한 것이다.’ 사실상 양 파의 사람들은 주먹다짐까지도 사양치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는 상영금지라는 조치를 당하게 되지만, 로맨티즘 연극의 대표적 작품을 유고는 남겨놓았다.

유고의 소설은 ‘노트르담 더 파리 (1831년)’ ‘레 미제라블 (1862년)’ ‘ 바다의 일꾼 (1866년)’ 외 5, 6편이 있다. 평하는 사람은 위 대표적 세 작품을 가리켜 유고는 ‘노트르드담 드 파리’ 에서 신을, 레 미제라블에서 인간 또는 사회를, ‘바다의 일꾼’ 에서는 자연을 묘사했다고 적절 간명簡明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시인 유고의 소설들은 어디까지나 대중소설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엄연한 사실이고, 동시에 대중소설이기 때문에 그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고, 세계적으로 읽힐 수 있었고, 시대를 초월해서 두고두고 애독자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마치 20세기의 헤밍웨이나 펄 벅의 경우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의 소설 작중 인물의 특징은, 작가 자신의 시와 철학과 사상이 도처에서 엿보이는 동시에 부르조아지의 일상생활, 선택된 소수자 아닌 다수자의 비참한 모습을 섬세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묘사한 수법이 한 가지, 그리고 그 소재가 종래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피 지배계급이란 데 있다. 과거의 소설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지배계급에 속하는 인물이었음은 물론이다.

레 미제라블은 사회적 의의가 있는 작품인 동시에 역사적 소설이기도 하다.

무식하고 가난한 노동자인 장 발장은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한 조각의 빵을 훔쳤다가 19년이라는 기나긴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슈다. 감옥에서 나와보니 전과자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자에게는 사람들의 멸시와 경계심만 쏠린다. 드디어 그는 사회를 증오하게 된다. 다시 죄를 저지르려는 동기는 그에게 충분했다. 그러나 장 발장을 죄악의 구덩이에서 건져준 것이 미리엘 주교다. 하룻밤 잠자리를 얻은 주교댁에서 그는 은촛대를 훔쳤으나, 그것을 적발한 헌병에게 주교는 그 사실을 부인하고, 은촛대는 자기가 가난한 그에게 준 것이라고 말하여, 그 무지하고 사나운 사나이의 심금을 떨리게 한다. 이는 선의 가치를 뼈저리게 알게 된 장 발장을 후일 자선慈善사업에 투신하면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한히 아끼고 사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방의 소읍小邑에 언제부인가 나타나 조그만 공장을 세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고용하고, 어린이들을 귀여워하고, 읍민들의 일이라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초노初老의 신사 마들렌느는, 읍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마들렌느는 장 발장의 변신變身이다. 드디어 마들렌느는 읍장邑長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자벨이라는 형사부장이 있다. 과거에 19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미리엘 주교의 도움으로 갱생更生을 맹세한 그도, 어느 날 어린이가 땅에 떨어뜨린 동전 한 잎을 빼앗으려는 악의 본능이 발작해서, 또 다시 감옥살이를 한 일이 있었는데, 자기의 뉘우침과 속죄贖罪를 위하여 탈옥에 성공한 후 열심히 일을 해서 오늘날의 사회적 신망을 얻었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입장에 섰지만 … 자벨은 마들렌느 읍장이 흉악범의 변모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감시하며 증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떤 다른 고장에서 탈옥한 장 발장을 체포하여 노역勞役을 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고민한다. 침식을 폐하고 고민을 하던 그는 자수한다. 자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누명陋名을 쓰고 고생하는 것을 숨어살며 감추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정의한 사회에 대한 고발이며, 동시에 대오大悟한 인간, 성자聖者에 가까운 인간의 모습을 유고는 묘사했다. 그러나 보람있는 삶에 대한 신념에 차있던 장 발장은 이내 탈옥에 성공하였고, 불행한 아이 코제트를 두고 떠난 판틴느와의 생전의 약속을 지켜, 고아孤兒 코제트 양육을 결심한다. 코제트를 데리고 수년 간 수도원에서 은신하다가, 풀류메라는 작은 도시에서, 코제트를 딸처럼 사랑하고, 외로운 자기 자신에게서 그는 육신의 사랑, 어버이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나 장 발장의 불우한 생애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코제트를 열렬히 사랑하는 청년 귀족 마리우스가 나타난다. 장 발장은 마음 속의 갈등을 억제하지 못 한다. 고민은 다시 그의 폐부肺腑를 좀먹었다. 가련하고 순진한 코제트도 그를 어버이로 생각하고 사랑하지만, 청춘의 피는 마리우스에 대한 사랑으로 끓는다. 마리우스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평민에 가담해서 파리를 휩쓰는 폭동의 도가니에 뛰어들었다. 장 발장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다. 숭고한 자기 희생만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장 발장은 총탄과 창검槍劍이 난무亂舞하는 폭도暴徒들의 요새要塞로 마리우스를 구출하기 위해 들어간다. 농성籠城하는 폭도들은 사면에서 포위를 당하여 탈출구도 식량도 없이, 탄약도 떨어져서 전멸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도들 중에서 마리우스를 찾아다니던 장 발장은 폭도를 도와 지휘를 맡는데, 거기까지도 뒤를 쫓는 자베르는 장 발장의 체포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벨의 신분이 노출되어 자벨은 폭도들에게 처형의 위기를 맡는다. 장 발장은 자벨의 처형을 자진해서 맡아 폭격에 쓰러진 건물로 가서 공포空砲를 쏘고 자벨을 놓아준다.

장 발장은 부상을 당하여 실신한 마리우스를 찾아 어깨에 메고 하수도를 통하여 필사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자벨은 경찰로써 회의를 느끼고, 또 인간으로써 양심의 가책으로 장 발장 체포를 포기하고 자살한다. 장 발장은 자기의 정체와 과거를 마리우스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자기가 마리우스를 구출한 것은 감춘다. 마리우스는 존경하면서도 전과자前科者인 장 발장을 코제트로부터 멀리 하기를 희망한다. 장 발장은 이를 이해하고 스스로 희생의 길을 선택한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나 해학적이게도 사실이 표면화된다. 악당惡黨 테나드리에는 하층사회의 해충 같은 존재로써, 폭동의 틈을 타서 약탈과 좀도둑질을 히였는데, 마리우스의 존재를 알고, 귀족 조부의 집에서 요양을 하는 마리우스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려고 마리우스를 찾아갔다가, 마리우스를 구한 것이 장 발장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늦었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장 발장을 찾아갔을 때는 장 발장은 임종臨終의 자리에 누워있었다. 기나긴 생애 - 선과 악의 갈등, 죄를 씻기 위해 온갖 자기 희생을 서슴치 않았던 생애를 돌이키며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띄우며 장 발장은 코제트의 손을 잡고 눈을 감는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 이후 나폴레옹시대 그리고 1832년 경의 파리를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바테룰루전쟁, 그리고 그 틈을 타고 날뛰는 테나르디에 같은 인간, 또는 마리우스 같은 실제 인물을 그려놓은 점에서 역사소설이며, 또 죄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조직 속에 있다는 철학을 밑바닥에 두고 있는 점에서 사회소설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 가 유고가 28세때 발표된데 비하여, 레 미제라블은 그가 60세에 내놓은 작품임을 생각할 때, 흥미있는 대조가 된다. 만만한 투지는 원숙한 사상에 싸여서 모가 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인간사회의 향상과 정화淨化를 주장하고 인간 상호간에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보다 주관적 작품이라고 하겠다.

186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60여 년 전에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이래로 공화제에서 제 2 제정시대를 겪고 다시 혁명을 겪는 동안, 유고의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波瀾萬丈, 왕조王朝의 상원의원에 임명되었다가, 제정하에서 국외 추방을 당하고, 제정이 붕괴한 후에는 다시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한 때 공화정의 대통령 입후보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는 문필가로써 세계에 공한 한 바 크다. 세기世紀를 두고 세계 방방곡곡坊坊曲曲에까지 읽히면서 꾸준히 인간의 상호 이해와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레 미제라블(비참한 인간)이다.

085 전쟁과 평화 (1864 - 1869)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에 출생하여 1910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82년이라는 기나긴 생애는 심각한 심리 투쟁의 끊임없는 연속이었다. 로망 롤랑은 그의 투쟁을 ‘생명의 모든 힘이 온갖 미덕과 온갖 악덕이 참가한 비극적인 영광의 투쟁’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표적인 두 장편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리나’ 를 비롯해서, 수십 권에 달하는 중편, 단편, 희곡, 민화, 종교, 도덕적인 학술논문과 평론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나 넓이에 있어서 감히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톨스토이를 세계적인 대 문호로 구분하는 이외에, 기독교적인 종행자라고도 하고, 무신론자라고도 하고, 불타나 공자와 같이 지고한 도덕적 광명에 도달한 성인聖人이라고도 하고, 신新 종교의 개조開祖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통한 도덕적인 설교의 목적은 그리스고교의 쇄신과 그의 독특한 신 종교를 이 세상에 수립하려는데 있었다. 러시아 굴지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시절 육군사관으로 코카서스와 크리미아전쟁에 참가하였다. 24세 때 처녀작 ‘유년시대’ 를 익명匿名으로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27세 때 세바스토폴리를 써서 일약 문단의 혜성彗星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 후 페테르부르크의 상류사회로 돌아와 방탕과 나태의 생활을 보냈다. 그의 특색인 종교적인 죄악관은 바로 이 떼 조성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1862년, 34세 때 궁정의宮庭醫의 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그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생애 중에서 자가와 자기 가족, 주위의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리나의 두 장편을 완성하기까지의 15년 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소위 말하는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소년시절부터 고민해오던 인생에 대한 절망감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숙명적인 영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인 갈등과 싸움은 그가 사랑했던 가족과 명성과 재산을 버리고 아스타포보라는 한촌 역사에서 객사客死 (1910년 11월) 할 때까지 조금도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전쟁과 평화는 그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 그리고 그 취재의 범위에 있어서 세계 문학사상 최대의 서사시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 작품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프롤로그로써의 첫째 부분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던 때인 1805년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3제회전이 묘사되고 있다. 1806년과 1811년에 이르는 휴전시기를 묘사한 둘째 부분에서는, 작품의 주인공인 안드레이와 피엘, 그리고 로스토프 가와 볼콘스키 가의 가족들을 생생히 묘사하면서, 얼마 후에 커다란 시련을 겪어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러시아의 실태를 그린다. 여기에 나오는 장면들은 전 작품 중에서도 가장 시적인 부분이어서, 로스토프 가의 사냥이며, 크리스마스 날 밤의 썰매놀이이며, 그 밤의 아름다운 장면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매혹적인 러시아의 전원을 배경 삼아 안드레이가 처음으로 나타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달밤의 정경 같은 것은 문자 그대로 로맨스와 자연이 혼연일치渾然一致된 톨스토이 표현의 극치極致라 할 수 있다. 셋째 부분에서는, 전쟁과 평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1812년의 보로지노회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함락과 더불어 러시아 민족의 잠재력과 그 본질을 이루는 애국심이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 넷째부분에서는, 러시아의 동장군冬將軍과 쿠투조프 장군에게 완전히 섬멸당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비참한 말로가 묘사되어 있으며, 1812년의 전쟁 후기와 전후의 시기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피엘과 나타샤 일가들이 모여앉아 지난 날을 회고하고 시사를 논하는 1820년의 어느 날 밤을 묘사함으로써 대 장편 전쟁과 평화의 막을 내린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에서 1820년에 걸친 러시아 역사상의 가장 종요한 시기를 재현한 것으로써, 보로지노 회전會戰이며,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함락이며, 모스크바의 대 화재, 프랑스 군의 퇴각 등 러시아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 스케일의 웅대함에 있어서 세계문학의 최고봉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역사소설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라 많고 변화무쌍한 전기소설이며, 감미로운 연애소설이며 동시에 인생의 가장 심오한 문제에 해답을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과제를 주요한 두 사람의 주인공 - 안드레이 공작과 피엘의 어깨에 짊어지우고 있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이 두 주인공 속에 전쟁과 평화의 예술적 사상적 의의를 구현시키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드레이 공작과 피엘은 톨스토이의 내면의 상반되는 양극을 구상화 한 것으로써, 귀족 출신이며 특권계급이었던 인간 톨스토이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체현되고, 공상가이면서도 진리의 탐구자인 그의 반면은 피엘에게 선명하고도 굳센 표현을 얻고 있다.

안드레이 공작은 낡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순수한 귀족이었기 때문에, 여러 세기에 걸친 순화와 세련된 육체와 지능의 소유자로써, 그 당시 러시아의 인텔리 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전적인 우월감과 긍지를 갖는 반면에 세련된 이지와 마음의 조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불합리한 것은 남에게 요구하는 일은 없을뿐더러, 신 사조의 영향을 받아서 급진적인 이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부의 농노해방보다 반 세기나 앞서서 자가의 영지의 농노農奴를 해방할 것을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천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농노를 해방한 것은 농민을 사랑하고 동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교양있는 진보된 인간의 정신적인 의무라고 느꼈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써,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 조차 없다. 여기에 톨스토이의 무신론적인 반면이 의미심장한 암시를 준다.

한편 피엘은, 그는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대 지주이면서, 안드레이 공작에게서 볼 수 없는 특권적 계급 심리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피엘과 안드레이를 비교한다면 두 사람이 모든 점에서 상반된 양극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안드레이가 해부와 비평에 뛰어난 관찰자라면. 피엘은 항상 자기 내부생활에 몰두해서 추상적으로 외계를 바라보는 예외자이고, 안드레이가 현실파라면, 피엘은 이상파다.

피엘은 그 당시 유행하던 온갖 사상적 유혹을 다 경험했다. 메이슨의 교의, 신비적 인생관, 나폴레옹 침입 당시의 애국심의 발로, 박애주의博愛主義, 급진주의 - 이러한 수 많은 사상적인 노정을 겪어나가는 사이에, 그는 하나의 확고한 인생 긍정의 사상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인생을 무수한 물방울로 구성된 하나의 원으로 봄으로써 처음으로 정신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개개의 물방울은 서로 반발하고 배척하면서 남을 억누르고 자기만을 확대시키려고 애써서, 어떤 것은 팽창하고, 어떤 것음 위축되고 또 어떤 것은 소명하고 말지만, 원 자체는 유동하고 동요하면서도 언제나 원 그대로의 여성을 지니며 빛나고 있다. 바로 인생에 있어서도 희노애락은 이론과 말로 파악할 수는 없는 합리성에 의해서 통일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인생관이 마음속에 열려졌을 때, 피엘은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니 인생 긍정 인생 찬미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이상의 두 주인공 안드레이와 피엘을 가지고 사상적 측면을 구현하고 있으나, 예술적 사상의 가장 선명한 상징으로써 여주인공 나타샤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만일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강조하려는 사상이 인생 긍정 인생 찬미였다고 한다면, 발랄한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나타샤 외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나타샤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본능의 예지를 완전히 소유하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희귀한 여성이다. 그녀 속에는 자아와 박애주의, 향락과 자기 희생의 모든 이론을 초월해서, 아무런 모순도 없이 양립하고 있다. 나타샤야 말로 참된 인생 그 자체로써, 그 누구보다도 톨스토이의 인생 긍정, 생명 찬미의 사상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역사철학관을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은 소수의 위정자와 외교관, 군 지휘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관여한 무한소의 분자, 즉 민중의 의지의 총화에 의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의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과 형태로 미리 규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힘은 (어떠한 천재, 어떠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예로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을 들고 있다. 나폴레옹은 수백 만의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을 그의 의지에 의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것을 단순한 환상으로 보고, 인식의 착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톨스토이는 한 사람의 힘으로 태산을 무너뜨릴 수 없듯이, 나폴레옹이 50만이나 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려다가 자기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써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힘 앞에 쓰러지고마는 나폴레옹의 모습이라든지, 만인의 뜻을 알고도 싸울 수 없어 그 앞에 순종하는 쿠트조프 장군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철학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영향이 너무나도 컸으므로, 작품이 발표되자 사방으로부터 - 특히 나폴레옹전쟁에 참가했었던 무관으로부터 맹렬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물론, 전쟁에서의 지휘관, 참모들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말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톨스토이가 주장하는대로 격전 중에 상관의 지휘가 철저하게 전달될 수 없다거나, 혹은 군의 사기라는 것이 지휘관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가끔 전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뚜르게네프는 전쟁과 평화의 예술적 반면의 가치만은 찬양을 했지만, 톨스토이의 역사철학관을 작품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는 사도라고 부정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가 가정 내의 사생활만을 취급하는 단순한 소설만이 아니라, 그와 병행해서 참된 역사를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있는 이상, 이러한 전쟁론도 사실은 소설로써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유력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러시아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리우는 이 작품을 통해 톨스토이가 표현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웅장한 역사적인 스케일과 낭만을 조립해서, 수만 갈래의 줄거리를 교묘히 조종해나가면서, 조금도 혼란없이, 장엄하고 화려하고 다채로운 대 교향악을 구축해낸 톨스토이의 천재는 참으로 문학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086 교양敎養과 무질서無秩序 Culture and Anarchy (1875) 아놀드 Matthew Arnold

‘도버 해협’이라는 유명한 시를 위시한 많은 작품을 남긴 시인으로써, 그리고 ‘호메로스의 번역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강의를 한 옥스포드 시학詩學교수로 영문학사에 기록되어 있는 아놀드는 영국의 전통적인 중산계급 출신. 그의 부친 토마스 아놀드는 럭비 고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중산계급의 챔피언과 같은 사람이다. 1822년 12월, 미들섹스에서 탄생했다. 10년 동안 윈체스터에서 수학하고, 럭비로 옮겨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의 벨리올을 1844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오리엘 칼레지의 펠로우 (평의원) 으로 선출되었다. 당시의 옥스퍼드는 뉴먼 추기경과 그의 동료들이 군림하던 소위 옥스포드운동의 고장이었고, 젊은 아놀드는 교양과 미의 상징으로써의 옥스포드를 자랑스러워했다. 1847년은 아놀드의 생애의 한 전기가 되었다. 그 해 아놀드는 옥스포드를 떠나서 자유당정부의 각료의 비서가 되었고, 1851년에는 시학관視學官 (장학관獎學官) 이 되었다. 그리고 1888년 별세하기 2년 전까지 줄곧 시학관으로 근무했다. 아놀드는 럭비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시작詩作을 했지만, 그의 첫 시집 (1849년) 은 물론,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든 여러 시집과 평론집을 낸 것이 시학관으로써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시절의 일이었고, 시학교수로써 출강 역시 그랬다. 아놀드의 이름이 주로 그의 시와 문학평론과 함께 기억되어왔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업業이었던 시학관으로써의 업적은 흔히 잊혀졌다. 실상 아놀드는 그의 부친과 같이 교육, 특히 국비에 의한 초, 중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성취를 위해서 헌신했다. 아놀드의 문학비평도 그렇지만 아놀드의 관심은 문학을 포함해서 넓은 의미의 인간성, 인간 생활에서 여러 문제의 관찰과 해설과 해결책의 ‘하이네론論’ 은 그대로 사회, 문명, 종교, 정치 등에 대한 그의 식견과 사고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아놀드는 ‘문학과 도그마’ ‘신과 성경’ ‘교회 및 종교론’ 등의 책도 썼다. 그리고 그의 이 방면의 저작이, 영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아놀드가 최고형태의 교양을 종교에서 발견하고, 종교 없이는 모든 세속적인 교육은 허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연히 그의 시학관으로써의 업적에 반영되었고 또 그의 문학비평의 기조였다. 그러기에‘정치 및 사회비평의 한 시론’ 이라 부제가 붙어있는 ‘교양과 무질서(1875년)’ 는 단순한 문명비판이 아니라 그의 문학론의 사회적 연역이기도 하다.

교양과 무질서의 내용을 제한된 지면에 정확하게 요약해서 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문체가 대단히 명석하고, 추리도 정교하게 전개되어 있다. 그러나 아놀드의 이상과, 바로 이 저서의 기본적인 입장이 사물의 어떤 한 단면만을 보고 조화된 통일체로써의 전체를 놓치는 것을, 비 교양과 무 질서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론을 삼가야 하는 것이다. 가령 아놀드를 가리켜서 그의 부친과 같은 자유주의자였다고 단정하고, 그와같은 안목을 가지고 교양과 무질서를 읽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놀드는 자유주의자들과 자유당정권이 주장하던 애란교회의 비 국교화, 재산상속에 있어서 장자뿐 아니라 모든 자녀가 똑같은 분배를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상속법 개정, 혹은 무역의 자유화 문제 등에 대해서 원칙적인 찬의를 나타내면서도 결국 그러한 정책이 자칫하면 기계적이고 비 이성적인, 이를테면 히브리적인 타성惰性에 빠지기 쉽고 현실의 개선도 난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놀드는 그가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것이라고 하고,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당장의 이익이나, 물질적 혜택에 현혹되지 말고, 진정한 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정치, 사회정책의 목표가 되는 진정한 선을 이룩하는 방법은 ‘완전한 인간 완성’ 의 경지에 접근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도덕의 우위만을 고집하고, 그와 같은 편협한 생각으로 국정을 요리하려는 히브리주의 신봉자들이었다. 도덕도 좋고, 히브리주의도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히브리주의는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물의 법칙을 깊이 사고하는 습성’ 이며, ‘신의 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선’ 의 달성을 가능케 해주는 헬레니즘과 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놀드의 주장이다. 아놀드의 자유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놀드의 자유주의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기본적인 상념의 통제를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초 계급적인 - 혹은 영국의 모든 계급의 이를테면 엘리트로써 구성되고 대표되는, 진정한 교양의 주인공들이 구성하는 ‘국가’ 의 설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했다. 자유주의자로 시작하고, 자처하기도 한 아놀드가 권위주의자로 인정되고 비난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에서 본 것은 교양과 무질서의 제 6장 ‘자유주의 실천자들’ 이란 대목을 요약한 것이다. 그리고 제 1장에서 5장까지의 서술은 위와같은 결론에 이르는 사고와 추리의 과정을 개진한 것이다. 교양과 무질서가 후세에까지 길이 기억된다면 그것은, 아놀드가 살았던 영국시대의 정치나 사회의 구체적인 사상의 대한 긍의 견해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어낸 몇 개 지표의 기발함과 정당성 때문일 것이다. 제 1장의 ‘감미로움과 빛’ 제 3장의 ‘야만인, 속물俗物, 대중大衆’ 그리고 제 4장의 ‘헬레니즘과 히브라이즘’ 등이 그것이다. 이 해설은 그와같은 지표를 위의 순서를 쫒아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감미로움과 빛’ 이란 문구는 아놀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스위프트가 ‘책의 전쟁’ 에서 쓴 말이다. 빅토리아 조朝의 영국 중산계급이 기계와 부와 일련의 자유주의 입법의 효능을 과신한 나머지, 수단을 목적으로 인식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을 개탄慨歎하면서, 그 과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교양을 내세우고, 교양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감미로움과 빛이라고 한 것이다. 그와 같은 교양은 지식에 대한 정열과 선을 행하려는 정열을 합친 것이고, 올바른 이성과 신의 의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교양은 인간의 어떠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한 면만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면을 고르게 개발하여 전인적인 완성을 노리는 것이다. 교양은 신의 의지를 보고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게 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아놀드는 ‘감미로움과 빛’ 으로 집약되는 교양을 대표하는 것으로 뉴먼 추기경의 옥스포드운동을 들고, 중세의 아벨라르, 도이치의 렛싱과 헤르더를 들었다. 결국 교양이란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완성의 추구는 곧 감미로움과 빛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소수만이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머지 대중이 모두 기계와 증오와 야만 속에서 허덕인다면, 교양의 복음은 그 실實을 거둘 수가 없다. 교양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스며들어야 하고, 온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교양은 ‘진정한 사상,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한 감미로움, 진정한 빛’ 이 되는 것이다.

아놀드가 살았던 시대를 휩쓴 민주주의라는 것은 표준이 없고 방향도 없는 것이어서 그 결과는 무질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무질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교양을 널리 세상에 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양과 무질서’ 에서 아놀드가 제시한 사회계층의 분류 즉 ‘야만, 속물, 대중’ 은 대략 영국의 귀족, 중산계급, 하류계급의 구분과 일치한다. 영국의 귀족은 기개가 당당하고 거동이 점잖코 위엄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사상을 흡수하는 능력을 결缺하고 있기 때문에 야만을 탈피하지 못 했다. 아놀드가 속물들이라고 한 중산계급은 영국의 중추적中樞的인 계급이며, 영국의 전통적인 모든 사물과 제도에 반기反旗를 들고나서며, 대단히 정력적이며 또 도덕관념이 강렬하나, 그 흠은 감미로움과 빛을 지니지 못 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중은 그저 맹목적이고 미개인의 처지에서 허덕이고 있다. 아놀드는 자기 자신이 중신계급의 출신이며, 그러므로 속물의 전통을 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는 관계없이 중산계급이 과시하는 큰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중산계급이 가지고 있는 지나친 히브리주의를 헬레니즘으로 감화시켜서, 그들이 갖추지 못 한 교양을 터득케 하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생각했다. 영국인들을 위의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있어서, 아놀드는 그 세 계층이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인간적인 기반이 있다고 하고, 또 세 가지 계층의 각각에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식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신과 인간 완성에의 애착으로 움직이는 국외자局外者 (aliens) 들이 있다고 했다. 결국 이러한 국외자들은 백성의‘최선의 개성’을 대표하는 것이고, 빅토리아 조의 영국이 들어낸 무질서를 청산하기 위해서 어떤 권위의 원천을 그해야 한다면, 바로 그와같은 최선의 개성의 집약체集約體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놀드의 지론이었다.

히브리주의와 헬레니즘은 다같이 인간의 완성이나 구제救濟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그 방법은 서로 다르다. 헬레니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고, 히브리주의는 행위와 복종을 강조한다. 헬레니즘은 자발적인 의식을, 히브리주의는 엄격한 양심을 강조한다. 아놀드가 주장하는 교양과 그 내용인 ‘감미로움의 빛’ 을 낳을 수 있는 것은 헬레니즘이다. 한편 히브리주의의 성전聖典인 구약舊約이 가르치는 것은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피하라는 것이다. 명석하게 생각하고 사물의 기본요소와 아름다움을 보면서 인간의 완성을 노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헬레니즘이라면, 히브리주의는 죄를 의식하고 죄의식에 눈을 뜨는 것은 인간의 지상과제로 내세운다. 원래 헬레니즘과 히브리주의는 그 어느 쪽만으로도 인간 발전의 법칙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두 가지가 상부상조相扶相助해서 인간 완성의 길을 마련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두 가지가 서로 각축전角逐戰을 벌여왔고, 아놀드가 본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은 중산계급의 지배로 히브리주의의 거의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놀드는 영국인은 민족적으로 한 서구민족이며, 원래는 유대인들의 히브리주의가 아니라 헬레니즘의 후예라고 했다. 초기 기독교는 분명히 히브리주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15세기부터 약 200년 동안에는 다시 헬레니즘이 득세하여 인간은 그 스스로와 세계를 알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발적인 의식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한 서구사회의 추세趨勢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배계급은 줄곧 엄격한 양심을 강조하는 히브리주의를 따랐고, 그 결과 혼란과 무질서가 생겨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떤 건전한 질서와 권위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실제 본능과 욕망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딴 본능과 욕망과 결합시켜서 우리의 인생관을 확대’해가는 것 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교양과 무질서에는 빅토리아 영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고, 이상과 추리가 지나치게 비 현실적인 인상을 풍기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가지고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일사분란一事紛亂한 문체文體로 일관되어 있다. 영국이 이은 서구문화의 전통의 내용을 분석한 것으로, ‘교양과 무질서’ 를 하나의 고전古典으로 볼 수도 있다. 빅토리아 조 영국이 들어낸 무질서의 구체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완성에 교양이 기여할 수 있는 거의 절대적인 가능성을 설파한 것으로 ‘교양과 무질서’ 는 길이 읽혀질 가치가 있다.

087 인형人形의 집 Et dukkehjem (1879) 입센 Henrik Johan Ibsen

입센의 ‘인형의 집’ 이 출판된 것이 1879년, 입센이 51세 때 발표한 작품이다. 그가 첫 희곡 ‘카타리나’ 라는 로마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쓴 것이 1850년, 21세 때 일이니 그로부터 약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인형의 집이 나온 셈이다. 이 작품은 입센이 작가로써 원숙한 경험과 확고한 사상을 지닌 50대에 들어서 나온 첫 작품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처럼 사실주의극의 성전聖典으로 생각되는 이 작품도 출판되었을 때는 매우 고된 시련을 겪었다. 작품의 공연은 물론 판매까지 금지되는 불운을 겼었다. 뿐만 아니라 입센 개인에 대한 사회의 공격도 거셌다.

은행장인 남편은 물론 두 자녀들마져 버리고 집을 나가는 로라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풍양속美風良俗을 해치는 작가라고 추방이 거론되었다. 이로부터 2년 후에 입센이 세상에 던진 ‘유령幽靈’ 은 자기를 공격하는 무리들에 대한 입센의 항의서抗議書다. 유령의 주인공 알빈 부인은 로라가 가출 대신, 사회의 여론이 그렇듯이 끝내 집을 지키며 늙었을 때의 모습을 그렸다. ‘당신네들은 로라가 후년에 알빈 부인처럼 파멸에 빠지기를 원합니까?’ 라는 입센의 강한 반박문反駁文이 유령이다.

입센의 작품활동을 대개 3기로 나눈다. 제 1기는 ‘브란드 ’나 ‘피엘 진트’ 등을 쓴 낭만주의시대, 제 2기는‘인형의 집’ ‘유령’ ‘민중의 적’을 쓴 사실주의시대, 그리고 제 3기는 상징주의시대로 구분한다.

흔히 입센을 가리켜 근대연극의 시조始祖라 한다. 그를 근대연극의 시조로 만든 작품이 바로 ‘인형의 집’ 이다. 근대극은 유럽에서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 탄생된 극을 말한다. 과거에 궁중, 귀족들의 보호를 받던 연극이 근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일반 시민이 자유롭게 연극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상업극장이 출현할 정도로 연극은 급속도로 시민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시민연극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세기에 전 유럽을 휩쓴 ‘자연과학사상’ 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 이 나오고, 스펜서, 헉슬리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이 각기 ‘새 과학철학’ 을 주장한 것이 바로 19세기다. 자연과학은 연극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73년에 에밀 졸라의 저 유명한 ‘자연주의 연극 선언’ 이 그 좋은 예다.

‘나는 인지認知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진실과 경험과학을 향한 커다란 음직임을 연극에도 미치게 하고자 한다. 이것은 과학의 새로운 방법에 의해 시작되었다. 자연주의란 비평과 역사의 혁명이다. … 모든 것은 정확한 분석의 체계를 따라야 한다. 이제 진실이 탄생했다. … 가까운 장래에 자연주의운동은 극단에 현실의 힘, 현대예술의 신新 생명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 이제 과거는 죽었다 …’

졸라는 소설과 연극을 다소 혼동했다. 연극이 자연주의사상을 구체화한 것은 퍽 오랜 뒤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도이치에서는 삭세 마이닝겐 공公 (1826 – 1914년) 이 ‘삭세 마이닝겐 극단劇團’ 을 창설하여 과학적인 무대장치를 강조했고, 합리적인 연기법을 창안하여, 이른바 앙상블연극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유럽 각처를 순회하며,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연극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에 자극을 받아 1887년 프랑스에서는 ‘앙트완느’ 가 지금 보기에는 이름에 퍽 신파적인 냄새가 나지만 ‘자유극장’ 이라는 실험적인 소 극장을 세웠고, 1889년에 베를린에 ‘자유무대’, 1891년에는 영국에 ‘독립극장’ 그리고 1898년에는 모스크바에 ‘스타니스라브스키’ 와 ‘단첸코’ 에 의해 ‘모스크바 예술좌藝術座’ 가 세워졌다.

19세기 사조思潮에서 우리는 ‘여성해방운동’ 을 놓칠 수 없다.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여권女權 선언’ 과 존 스튜어트 밀의 열렬한 여권 옹호는 괄목할만한 일이다. 19세기를 ‘여성 해방의 시대’ 라고 부를 정도로 사회는 여성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리하여 시민사회의 연극은, 극중의 인물을 과거의 왕, 장군, 영웅, 귀족 대신 평범한 시민으로 대치代置시켰고, 무대도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터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과학사상은 자연 무대 자체는 물론 그 공연면에 있어서도 퍽 사실에 충실한 근거를 요구케 되었으며, 남성의 예속물隸屬物로 존재했던 여성이 보다 커다란 위치를 희곡 속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 연극사상 이러한 모든 것이 연극 속에서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인형의 집’ 이다.

입센은 1828년 3월 노르웨이의 스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상인이었으나 입센이 8세 때 파산했다. 가난한 생활에 정을 붙일 수 없어 입센은 15세에 고향을 떠나 그림스타트 ‘우울한 고장’ 으로 가서 약방의 하인 겸 견습생이 되었다. 장래 희망이 건축가나 과학자였던 그의 꿈은 엄두를 내지 못 할 형편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부모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고향을 찾지도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서 독서를 취미삼아 소일했다. 1850년 그는 크리스티아나로 가서 대학의 청강생이 되어 문학공부에 몰두했다. 다음 해에는 벨겐에 있는 국립극장의 전속專屬작가가 되었다. 극장의 운영상 무대장치까지 혼자 해냈다. 1864년 노르웨이를 떠나 거의 30년 간을 로마, 드레스덴, 뮤리히 등에서 지내며 ‘브란드 (1866년)’ ‘피엘 진트 (1867년)’ 을 썼고, 그 후 ‘인형의 집’ 을 비롯하여 많은 사실주의寫實主義 극을 썼다. 1891년에 크리스티아나로 돌아왔으나 1906년 5월 숨을 거두었다.

입센과 동시대의 노르웨이 극작가에 뵤른손이 있었다. 사실 입센이, 인형의 집을 발표할 때까지는 뵤른손의 존재가 커서 입센은 그의 그늘 밑에서 생활을 했다. 뵤른손은 1903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가다. 극작가로써 최대의 영광을 누린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뵤른손의 작품은 거의 읽혀지지 않아 작품은 시대에 따라 양상을 달리한다. 입센의 작품을 말 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두 사람, 프랑스 작가 유진느 스크립 (1791 - 1861년), 도이치 작가 프레드리히 헵벨 (1813 - 1863년)이다. 입센 보다 앞선 작가들이다. 유진느는 소위 ‘잘 조작된 극’ 의 수법으로 서민생활을 소재로 해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희극을 많이 썼다. 헵벨은 ‘마리아 막달레나’ 라는, 사회 문제를 다룬 시민 비극을 써서, 웃음과 오락에만 치중하던 당시의 극계에 충격을 주었다. 입센은 전자로부터는 치밀한 작품 구성법을 배웠고, 후자로부터는 본격적인 사회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 양자의 결합이 곧 인형의 집이다.

‘인형의 집’ 은 4막으로 되어 있다. 이 극의 생명은 4막 후반부에 있다. 즉 주인공 노라와 은행가요 남편인 헬마와의 심각한 대화 부분이다. 입센도 이 장면 하나를 위해 인형의 집을 집필했다고 말한다. 병중인 남편을 돕기 위해 노라는 부자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서 빚을 내서 남편을 외국의 휴양지로 보낸다. 이 극의 막이 오르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노라의 가정을 본다. 남편은 노라를 ‘다람쥐’ ‘종달새’ 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남편은 은행장으로 승진한다. 그런데 크로그스타트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극은 급전한다. 은행원인 그는 새 책임자가 된 노라의 남편이 불신하는 사람이라서 은행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다. 그러나 노라가 예전에 남편을 위해 돈을 빌린 사람이 바로 이 사내이다. 이 사내는 노라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유임을 시켜주라고 부탁하고, 여의치 않으면 노라가 위조한 서명 건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사회풍토를 모르고 사는 노라는 남편을 위해 한 일이 위법인줄도 모른다. 그러나 노라의 간청을 남편은 들어주지 않는다. 사내는 폭로의 서신을 보낸다. 무도회에서 돌아온 부부는 편지를 받았다. 남편은 노라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바보, 위선자,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한다. 결국 자기를 위해 한 일의 댓가가 이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사회적으로는 부부인 척 하지만, 남편은 아이들 교육을 노라에게 맡길 수 없으니 애들에게 접근을 하지 말라고 선언한다. 이 때 크로그스타트로부터 또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후회 끝에 과거의 모든 임금 관계 증서를 없애겠다는 편지였다. 이 편지를 읽고 남편은 그제서야

‘아, 살아났다. 노라, 당신도. 당신을 용서하겠오! 이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일이니 …’

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노라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놀이터요, 저는 인형에 불과 했습니다 … 내 자신 스스로를 교육하고, 내 자신을 찾기 위해 집을 나가겠습니다. 결국 우리 둘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노라는 이 말을 하고 영원히 집을 나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거야!’ 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일단 인형의 집이 발표되자, 소위 부인해방론자는 박수갈채拍手喝采를 보냈고, 반대자들은 작가를 결혼과 가정의 신성을 파괴하는 자라고 지탄하여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때문에 이 극은 여러 나라에서 상연이 금지되고, 사회계에서도 이 극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타부가 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부인해방론자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다. 작가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의 노트를 보면, 노라는 도덕상의 기준을 잃고 혼란 내지는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 메모가 있고, 후에도 작가는 노르웨이 부권婦權동맹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부인의 권리를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을 부정하고 ‘프로파간다를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가 의도한 바는 인생의 묘사다’ 고 할 정도여서 한 마디로 단정, 판단할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작가가 철저하게 허위를 들춰내서 진실을 찾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습적因襲的, 미온적微溫的인 헬마의 허위를 가차 없이 폭로하고, 노라를 가출시키지만 그녀의 앞길에 아무런 구호救護도 준비하지 않았다. 노라의 모습은 퍽 동정적이나, 오히려 경박輕薄하게 그려졌고, 미리부터 파멸되게 운명지어졌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이 작품 하나로 작가는‘세계의 입센’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문제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루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희곡이 산문으로 쓰여졌다는 사실과, 노라라는 한 여성의 성격이 첫 막과 종막終幕에서 완전히 변한다는 점이 퍽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인형의 집을 계기로 해서 유럽의 연극은 과거에는 타부처럼 생각했던 일상회화會話를 대사臺詞에 도입했고, 심지어는 사투리의 편용偏用도 허용되었다. 즉 무대에서 시가 추방되고, 산문으로 대치된 것이다. 또한 과거의 추상적인 이야기로 엮어졌던 연극이 우리 주위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연극으로 변했고, 희곡에 인형의 집에서 시도한 것 같은 자세한 무대 묘사 또는 인물 묘사의 문장이 등장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이 극을 계기로 인물의 성격 분석면이 활발하게 발전했고, 이야기거리를 쓰는데 불과했었던 희곡을 지양하고, 사회 문제를 다루는 보다 폭이 넓은 희곡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입센이 간지 60년, 그러나 그의 영향은 아직도 극계劇界를 지배하고 있다.

088 허클베리 핀의 모험冒險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마크 트웨인 Mark Twain

마크 트웨인 하면 유모어 작가를 연상하리만큼 그의 이름은 낯익다. 본명이 세무엘 클레멘스였던 이 작가만큼 일반 대중의 인기와 경애를 누린 작가는 많지 않다. 그의 그러한 인기는 그 비할 데 없이 발랄한 유모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한 자리에 놓고보면 그가 여러 면에서 문제성을 지닌 작가임을 알게 된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와서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비평적 관심은 그 때 그 때의 유행과 방법의 초점이 옮겨짐에 따라 달라졌으나, 그가 중요한 작가라는 데는 의견이 항상 일치되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1884년)’ 은 이 보다 앞서 나온 ‘톰 소여의 모험 (1876년)’의 속편으로 볼 수 있는 소년소설로 어린 독자들의 상상력을 일깨워준 바가 컸지만, 한낱 소년소설로 보아넘기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평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소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메리카의 서書’ 이며, ‘민주주의의 책’ 이다. 윌트 휘트먼의 시집 ‘풀잎’ 이 미국 시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의와 위치를 미국 소설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두 작가의 태도, 특히 정치적 태도에는 공통점이 허다하다.

마크 트웨인 (1835 - 1910년) 은 미국 중서부 미주리 주의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셜 클레멘스는 법률가였으며 부동산도매에도 손을 댔으나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는 못 했다. 1839년에 일가는 같은 주 한니발로 옮겼다.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이 마을은 위에서 언급한 두 소설의 무대인 피터스버그이며, ‘미시시피 강의 생활 (1883년)’을 포함한 그의 걸작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였다. 1847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견습공이 되었다. 1850년에 맏형이 ‘한니발 저널지’ 를 창간하자, 식자공으로써 형을 돕는 한편 풍자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53년에 형을 떠난 후, 톱트 루이스, 뉴욕, 필라델피아 등을 방랑하면서 자연과 인생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알게 되었다. 식자공, 인쇄공 그리고 신문기자로 인생의 전반기를 보냈다는 것은, 보다 앞서 벤자민 프랭크린이 그랬고, 윌트 휘트먼도 그랬듯이 많은 미국 작가들이 겪은, 공통된 인생행로였으며, 이 점에서도 마크 트웨인은 미국문학의 전통에 속하고, 있다. 1856년에 뉴 올리언스로 가서 브라질로 가려고 했으나, 그 계획을 포기하고,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는 기선의 길잡이가 되었다. 필명筆名인 마크 트웨인은 뱃사람의 용어로 ‘두 길의 수심水深 (미시시피 강 물 깊이를 재는 단위)’을 뜻한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잠깐 동안 남군에 복무한 후 네바다 주와 센 프란시스코로 옮겨 신문기자가 되어 해학적인 글을 기고하기 시작하면서 문명文名이 높아졌다. 1865년에 ‘카라베라스의 뜀뛰기 개구리’ 라는 단편으로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한편 강연의 재능도 풍부하여, 강연여행을 다녔고, 1867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여행통신기 ‘철부지 외유기外遊記 (1869년)’ 를 출판함으로써 대 성공을 거두었다. 1870년에는 동부의 갑부의 딸인 올리비아 랭든과 결혼하여, 코네디커트 주의 하트포트 시에 정주하여 저작에 전념하였다. 1872년과 187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디킨스 등의 주선으로 런던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찰스 더들리 위너와의 합작 ‘은금銀金시대 (1873년)’ 에서 남북전쟁 후에 팽배해진 물질만능의 풍조를 비판한 것을 위시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왕자와 거지 (1881년)’에서 봉건성의 문제를 다루었고, ‘아서왕 궁정의 커네티커트 태생의 양키’ 에서 중세와 근대와의 대립을 그리면서 민주주의의 사회관을 내세웠다. 1890년대에 들어서서 자동식자기와 출판사업에 손을 대어 실패한 후 베를린으로 옮겼고, ‘장 다크의 회상기 (1896년)’ 를 써서, 자신의 불행을 달래기도 했다.

1895년에 귀국한 후, 다시 부인과 딸을 데리고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 인디아, 실론, 남미를 거쳐 영국을 돌면서 강연여행을 계속했고, 여행기 ‘적도赤道를 따라서 (1897년)’의 인세印稅 등으로 부채負債를 청산했다. 1900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과 허드슨 강변의 별장에서 지냈다. 1903년 부인의 병 치료로 이탈리아에 갔으나, 이듬해 6월에 부인을 잃었고, 1908년에는 혼자서 돌아와 커네티커트 주의 별장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놀면서 소일했다. 만년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는 등, 외면적으로는 화려했으나, 부인과 딸을 여의고, 작가로써의 고민과 사상적인 회의로 해서 차츰 염세적이 되어 ‘인간이란 무엇이냐? (1898년 사가판私家版, 1906년 공간公刊)’ 에서 일종의 숙명적 세계관을 표명하였다. 70년 전에 할레 혜성彗星과 함께 출생한 그는 191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미국 문학사상 1865년에서 1914년까지의 시기는 유모어가 소설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시기였으며, 또 소설과 융합하여 위대한 작품을 산출한 시기다. 남북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동부와 남서부의 유모어 작가들이 속출하여 각 지방의 특유한 민화民話, 설화說話, 일화逸話 등을 가지고 이른바 지방색이 짙은 유모어문학을 썼다. 그리고 서부 변경이 개척되어감에 따라서 개척지와 그곳의 주민들을 소재로 한 서부의 유모어가 덧붙여졌다. 지방색을 들어내기 위해서 각 지방의 방언方言과 하류사회 사람들의 언어와 비어卑語를 자유롭게 구사한 것이 지방문학의 특징이었고,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서 과장적인 표현을 많이 쓰고, 철자綴字는 오자誤字 투성이로 적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1865년에 이르기까지의 유모어문학의 대가들의 작품의 상당수를 들었고 읽었으며, 그의 많은 작품에 그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워낙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 혹은 동료 작가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할 수 있었다. 유모어를 더욱 세련시켜서, 희곡의 수법을 단편 혹은 장편소설에 수법과 적절히 배합한 작품을 쓴 것도 트웨인이다. 유모어에 관해서는 ‘얘기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유모러스 스토리는 엄격히 말해서 고상하고 섬세한 예술작품이며, 오직 예술가만이 그것을 말 할 수 있다.’ 또 그 기법에 관해서 말하기를 ‘유모러스 스토리는 엄숙하게 얘기해야 한다. 얘기하는 사람은 그 얘기에 우스운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최선을 다 해서 감추도록 할 것이다.’ 또 ‘서로 관련이 없고, 어처구니 없는 것을 보기에는 아무 목적도 없는 식으로 한 데 이어놓고, 또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전연 느끼고 있지 않은 것처럼 꾸미는 것이 미국적 예술의 근본 바탕이다’ 라고 했다. 이와같이 전통적인 유모어문학의 특질을 더욱 개척허고, 영어가 아닌 토착적인 미국어로 작품세계를 그리는데 미국문학에 대한 그의 위대한 공헌을 찾을 수 있다.

트웨인은 하트포드의 화려한 저택에 살면서 그의 소년시절을 토대로 한 3부작을 썼는데, ‘톰 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의 생활’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이다. 이 작품들의 소재는 한니발 주변의 미시시피 강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보다는, 차라리 그가 어린시절과 소년기에 익혀왔던 정경과 인생에 대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가깝다. 추억은 흔히 추악하고, 달갑지 않은 세부細部를 지워버리고, 회상적回想的인 허구虛構 안에 목가적牧歌的인 것만을 남겨두는 일이 많다. 어떤 고장에 한정된 세부와 과거에 대한 동경이 지방색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부작의 척 작품 ‘톰 소여의 모험’ 은 어린시절의 갖가지 두려움과 기쁨을 가득 담고, 톰 소여라는 발랄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고있는데, 소년의 경험세계를 표면적으로 그리고 있다. 삶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2부 ‘미시시피 강의 인생’ 은 미시시피 강의 묘사와 인상을 모은 것으로, 참신한 관찰과 아울러 기억에서 그린 일종의 자서전自敍傳이다. 첫 작품과는 9년의 시간을 두고 나온 3부‘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세 작품을 한 데 잇는 속편續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결코 소년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고 일종의 민중서사시의 높이에 올라섰으며, 미시시피 강을 미국의 크나큰 상징으로, 그리고 인간이 끝없이 대결해야만 하고, 또 거기에 유일한 믿음을 걸 수 있는 상징으로 만들어놓았다. 10년 간의 시일이 흘러간 동안에 작가 세무엘 클레멘스는 인생의 긍정에서 돌아서 인간의 비 인간적인 행위 때문에 인간에 회의를 품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는 ‘이 얘기의 동기動機를 찾고자 하는 자는 고소될 것이며, 교훈을 찾고자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며, 줄거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사살射殺될 것이다’ 라는 구절이 실려있는 것이 우선 이 작품을 유모어문학의 계열에 올려놓고 있다. 사실상 이 작품에도 유모어와 경구警句가 도처에 깔려있다. 이 작품의 구조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구조를 닮은 데가 많다. 전형적인 악한惡漢소설의 경우, 주인공은 비천한 하류사회 출신의 성인이며, 그의 일생 혹은 일생의 한 시기를 묘사하며, 주인공이 부딪치는 여러 사건은 전체적 구성에 맞추어서 제시되느니 보다는 삽화揷話의 연속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또 주인공은 횡재를 만나든가,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다든가 해서 그의 표면적 생활의 변화가 생기게 되지만, 내면적인 인간성 혹은 성격 자체에는 변함이 없게 하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몇 가지 점에서 재래의 악한소설을 닮았지만,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리고 소년 허크가 모험을 거쳐가는 동안에 인간성, 성인사회, 문명 등에 여러 양상을 꿰뚫어보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점에서 악한소설과는 다르다.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의 모진 구박과 더글러스 과부의 끈덕진 개화改化의 손길에 싫증을 느낀 허크는 미시시피 강에 있는 젝슨 섬으로 탈출하여 야성과 자유를 즐긴다. 작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남부로 내려가는 길에 미스 위슨의 흑인노예 짐과 만난다. 다른 뜻에서 자유를 그리는 두 사람은 뗏목을 타고 센트루이스로 향하다가 잘못 되어 남부로 떠내려간다. 함께 유랑하는 동안에 그리고 잠시 짐과 헤어져 혼자 지내는 동안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과 인물들이 정확한 사실적 솜씨로 그려진다. 왕과 공작公爵을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보여주는 타락한 인간성, 그렌져포드 일가와 세퍼드슨 일가의 피비린내 나는 결투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며 펼쳐지는 가운데, 보통 사람들의 고정화한 도덕관은 허크의 부드럽고 겸허한 도덕관과 부딪친다. 이 소설의 첫머리에 잠깐 나오는 톰 소여가 끝에서 다시 등장하여 부자연스러운 해피엔드로 끝나는데, 주인공 허크 소년은 문명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대신 다시 서부의 자유로운 천지로 떠난다.

이 소설의 이와같은 결말은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보는 저명著名한 비평가도 있다. 그러나 거개의 평가들은 이 작품의 뛰어난 사실적인 서술성 혹은 사실 배면背面에 깔려있는 풍부한 상징성, 혹은 개인과 각 지방의 언어의 정확한 재현再現 등의 여러 가지 특징을 들어서 위대성을 높이 사고 있다. ‘미국의 모든 현대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고 하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 비롯한다’ 고 한 것은 헤밍웨이다. 현대 미국 소설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메아리치고 있다. 인물과 지방의 언어에 대한 정확한 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분명히 그 영향의 하나다. 또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의 홀든이나, 벨로우의 ‘오기 마치의 모험’ 의 오기는 다같이 소년의 눈을 통해서 문명과 성인세계를 비판하는 많은 현대소설의 낯익은 주인공의 본보기이다.

089 배덕자背德者 L'immoraliste (1902) 지드 André Gide

전 세기 말엽부터 금 세기 중엽에 걸친 오랜 창작생활에서 많은 작품을 통해, 특히 젊은 지성인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드가 간지도 어언 50여 년, 그처럼 자주 지식인들에게 오르내리던 그의 이름도 이제는 좀 듣기 어렵게 되었나 보다. 그러나 ‘고민하는 지성인의 진정한 대변자代辯者’ 였던 그의 사상은 지금은 그의 모든 현대작가나 지식인들의 사고법 속에 동화되어, 그 피가 되고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과거 봉건주의사회에서 겪던 모든 사회적 질곡桎梏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 17, 8 세기에 있어서 우리 선각자들이 한 용감한 노력의 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그러한 대 사회적 자유, 법적 자유보다 획득하기가 한결 어렵고, 그 존엄성에 있어서도 차원이 한결 높은 개인 내부에 있어서의 자유, 의식의 자유, 즉 윤리도덕적 자유를 찾을 수가 있게 된 것은 실로 지드의 피 눈물나는 고민의 문학의 덕분이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고민의 문학이란 말을 썼지만, 사실 지드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 보다 작가의 내적생활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있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자서전 ‘한 알의 밀이 …’ 를 읽지 않고는, 또 그의 ‘일기’ 를 읽지 않고는 그의 작품을 논하지 말라라는 일반적 원칙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물론 고민의 문학의 작가인 지드에게 있어서는 자서전이나 일기도 다른 작가에 있어서와는 전혀 딴 의미로 완전한 작품 계열에 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드는 1869년 11월 파리에서 출생, 부친을 잃고나서는 완전히 청교도적으로 무장된 3인의 여인 - 어머니, 백모伯母 클레에르 및 가정교사 샤클톤에 의해서 길러진다. 엄격한 종교적 교육을 하는 가정 분위기도 분위기이려니와, 부계 혈통은 남부 프랑스의 신교도 집안, 모계 혈통은 북부 프랑스의 구교도 집안이었다는 사실은 그 기질의 차이에서 오는, 서로 모순된 성격을 지드의 내부에 혼식함으로써 자기를 모순투성이의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말하면서, 지드 자신이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갈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아무튼 그의 어린시절은 불만과 부자유에 찬 형식적 억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8세에 알자스학원에 들어갔지만 품행, 성적이 한 가지로 나쁜데다 몸도 허약해서 퇴학한다. 한동안 친척 집에서 휴양하다가, 10세에 다시 알자스학원에 입학하여 그 이듬해 다시 퇴학, 이렇게 여러번 입학과 퇴학을 되풀이 한 끝에 겨우 자리가 잡혀서 성적이 좋아진 것은 18세 때부터다. 이 때 같은 반인 피에르 루이스와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그의 교우 관계는 차츰 넓어져 베틀레느, 발레리, 말라르메, 에레디아 등과 자주 만나게 된다. 특히 나중에 두 사람은 살롱에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상징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독서를 통해서는 특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을 받는다.

22세 때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手記’ 를 발표하면서부터 매년 계속 작품을 집필했다. 그의 초기의 작품은 대체로 관념적인 것인 동시에 상징주의적 경향을 띤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1891년 그가 위의 첫 작품을 내놓은 후부터 심각한 심적 혼란에 빠져, 그 우울한 심경으로부터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날 때까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고 되어있다. 알제리로 출발한 것은 그가 24세 때의 일로써 이 때부터 그는 새로운 인생을 배우고 새 사람이 된다. 여기서부터 씌어진 작품이 ‘팔뤼드 (1895년)’ ‘지상의 양식 (1897년)’ ‘배덕자 (1902년)’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이후의 그의 모든 작품이 이 때 그가 겪은 자기 내부의 돌변에 토대를 둔 것이라 할 수 있을른지도 모른다.

여기서 지드의 주요한 작품을 소개하면, 자서自序, 수상隨想, 논문 형식을 취한 작품을 제외한 소설류로는 ‘배덕자 (1902년)’ ‘좁은 문 (1909년)’ ‘이자벨 (1912년)’ ‘전원교향악 (1919년)’ ‘아내들의 학교 (1929년)’ ‘로베르 (1929년)’ ‘주느비에브 (1936년)’ ‘테세우스 (1946년)’ 등이 있고, 그 다음 그룹으로는 ‘팔뤼드 (1895년)’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1899년)’ ‘교황청의 지하도 (1914년)’ 가 있고, 끝으로 로망으로는 ‘사전私錢꾼들 (1926년)’ 이 있다. 이 중 첫째 그룹의 소설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지드 자신은 이것을 레시 (이야기) 라고 불렀으며, 둘째 그룹의 것은 지드가 소띠 (중세기의 광대극廣大劇) 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특수한 형식으로, 익살스러운 스타일의 풍속극에 속한다. 로망이라고 지드가 말하는 마지막 ‘사전꾼들’ 은 지드가 자기 나름의 새로운 소설 정의定意에 따라 새로이 창안한 허구적虛構的 소설을 의미한다.

이상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영향이 컸던 작품은 수상록隨想錄 형태로 된 일종의 산문시散文詩 ‘지상의 양식糧食’ 이었음은 이론이 없으나, 그것은 소띠 형식으로 된 모든 작품과 로망으로 엮어진 사전꾼들 등과 함께, 지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이 특수한 것이니만큼 여기서는 배덕자를 소개한다.

이 책은 지드의 알제리여행에서 얻어진 수확이다. 따라서 이것은 먼저 나온 팔뤼드와 함께, 후에 나올 ‘지상의 양식’ 에 대한 서문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자신으로부터의 탈피’ - 팔뤼드를 거쳐 ‘새로운 생의 환희’ - ‘지상의 양식’ 에 이르는 비결秘訣을 말하고 있는 책들이다.

배덕자는, 주인공 미셀은 책밖에 모르는 고고학자考古學者인데, 마리슬리느와 결혼하여 신혼여행으로 아프리카에 갔다가 폐병을 앓게 된다. 아내의 희생적인 간호로 회복기에 들어서는 그는 처음으로 자신 속에 오랫동안 잠들고 있었던 생명을 발견하여, 종전까지의 리고리즘을 청산하고 순수한 생명의 환희와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데 열중한다는 이야기다.

인간에 관한 한, 근원적인 진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여러 본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능의 명命에 따라서 우리는 욕구하고, 행동하고 또 조절하고, 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 즉 교양, 종교, 도덕, 관습 - 이런 것은 본능을 짓밟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관능적인 생활을 즐기는 북 아프리카의 이교도異敎徒의 단순하고 야만적인 생활방식이 미셀의 거의 마비되다싶이 된 감각을 크게 자극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다. 미셀은 배덕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인습因襲 기준 여하에 따라서는 한 사회의 악은 타 사회의 선이 될 수도 있다.

어린시절에 청교도적인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자란 지드는 1893년 그가 24세 때 처음으로 아프리카로 여행을 하고, 뜨거운 남국의 태양 아래서 갱생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그곳에서 새로운 생을 발견한 그는 인간을 속박하는 모든 기성관념을 타파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교육을 타파하기 위한 교육’으로, 개인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선입견에 대한 선전포고宣戰布告다. 즉 진정한 자유는 각 개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재자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드에게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리고 언제든지, 다른 보다 타당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 다. 그는 그러한 disponibilite 속에 남기 위해서 언제나 선택을 삼가도록 권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한 가지를 택한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것을 영영 포기해버린다는 것을 의미’ 하니까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의 선입견을 제거한 후 그 자리에 새로운 어떤 원칙을 택한다는 것은, 그 새로운 원칙이 또 다른 선입견이 되므로써 행사하는 독재로 말미암아 ‘나’ 는 다시 노예상태를 면치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중 주인공인 미셀이 구습을 탈피하여 자유로운 새 인간이 된 것까지는 좋으나, 관능적 쾌락을 쫒는 새로운 생에 도취한 나머지 사랑하는 아내마져 희생시킨 것은 실패한 인생이요, 또 이야말로 진실로 배덕자다.

배덕자 중에, 지드 자신을 나타내는 주인공 미셀 이외에 메날크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은 다분히 승화된 지드, 즉 지드의 사상을 대변하는 완전한 인격인 이상적 인물을 등장시켜놓은 것이다. ‘지상의 양식’ 에서도 같은 인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드의 작품이 젊은 세대의 청년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그의 모든 작품을 뚫고 흐르는 중심의 문제가 언제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금 세기 젊은 층의 가장 절실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19세기 이후의 산업구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한 경제구조의 혁명, 과학의 발전 및 사회제도의 급격한 변천 등등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는 예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따라서 인간을 둘러싸는 현실 역시 예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윤리관은 구태의연한 체 그대로다. 지드는 어디서 ‘인간의 제반 발전과정 중 성性 문제에 관한 것만큼 뒤떨어진 것이 없다’ 고 갈파한 일이 있었다.

지드의 고민은 모든 동 시대의 그것이었다. 지드는 마침내 모든 지성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도덕률을 위한 모험에서 그는 어떤 스캔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진지성의 소유자였다. 자기를 얽맬 수 있는 것으로는 예술밖에 인정하지 않은 그에게는, 단연코 예술만이 어떠한 모랄도 굴복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고, 따라서 또 예술만이 그에게는 진지한 인간, 속임없는 인간, 그릇된 사회 앞에 아첨할줄 모르는 인간상을 그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드의 예술은 진지성의 표현을 의미한다. 배덕자에서 미셀은 말한다 - ‘나는 원칙을 가진 모든 인간을 싫어해요.’ 이에 대해서 메날크가 한 말은, ‘그런 자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싫은 자들이지. 그 자들에게서는 털끝만큼도 진지성을 기대할 수 없거든. 왜냐하면, 그 자들은 자기들의 원칙에 입각해서 밖에는 행동을 하지 않거든, 그리고 그런 원칙을 무시한 모든 행동을 그 자들은 악이라고 규정한단 말이야’ 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 지성인의 ‘양식’ 을 인습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준 동시에, 얽매이지 않는 ‘제 자신’ 에 대해서 보다 충실할 수 있는 진지한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준, 지드가 당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끝으로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해서 앙드레 말르로가 한 말을 여기에 인용해두고 이 글을 끝을 맺는다.

‘아마도 앙드레 지드는 철학자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나로써는 그를 양심의 지도자로 믿고싶다. 그것은 훌륭한 직업인 동시에 기이한 직업이다. 하지만 숱한 젊은이들이 지도받을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략) … 지드는 우리의 욕망과 품위 사이의 갈등과 또 우리의 야심과 그것을 억제 내지 실현해보겠다는 의욕과 갈등 -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내부적 갈등을 보여주었다. 그의 충고와, 그로 하여금 생존 중인 모든 프랑스 작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만든 그의 작가로써의 재질은, 그로 하여금 오늘날 금 세기 최대의 위인偉人의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의 반수가 지드에게서 지성인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계시啓示받았으니 말이다.’

090 율리시즈 Ulysses (1922) 조이스 James Joyce

제임스 조이스는 ‘추방追放된 예술가’ 로써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암시적인 작품을 통해서 세상을 떠난지 8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세계의 독자와 평론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1년에 100을 넘는 연구서적이나 논문이 나오고, 가능한 한 모든 각도에서 분석과 감상과 이해가 시도된다. 이런 과정을 밟는 동안에 처음에는 모호하고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은 일도 있었던 조이스의 생각이 차츰 현대인의 의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설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하고 성공한 그의 작품들이 현대의 문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거의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만큼 크다. 다만 ‘더불린 사람들’ 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제외한 ‘율리시즈’ ‘피네간의 경야經夜’ 등의 대작은 일반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외국인이면 웬만한 각오가 아니고는 좀처럼 달려들기가 어렵다는 애로가 있다. 그러나 이 대작들이 일부의 극화나 영화화도 시도되었고, 그것이 또 신기하게도 흥행상으로 성공한 것을 보면 새삼 조이스의 창작의 폭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조이스는 1882년 2월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다. 1840년대 대 기근饑饉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아일랜드는 정치적인 독립을 위한 투쟁과 그것을 둘러싼 신교와 구교의 분쟁, 테러, 음모 등으로 어수선하였다. 뿐만아니라 조이스의 가정환경도 평화스럽지 못 했다. 아버지는 애국지사 파넬을 지지하는 하급관리였는데 파넬의 실각失脚으로 집안살림이 어렵게 된다. 어머니는 예민하고 약간 예술적인 기질도 있었던 모양이나, 가난한 살림에서 10명의 자녀를 키우느라고 조이스에게 특별히 감화 같은 건 주지 못 했다. 오히려 조이스의 종교 이탈과, 입센 같은 불공不恭한 작품을 읽는 독서 경향을 막아보려는 노력에서 그로 하여금 독특한 예술세계를 창조하게 한 역설적인 영향을 주었다고나 할까?

1888년에서 1902년 사이에 조이스는 클론고우츠 우드 칼레지, 벨베디아 칼레지, 그리고 유니버시티 칼레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하게 될 무렵까지는 조이스는 그의 주인공 스티브와 같이 정신적 자유를 위해 국가, 종교, 가정을 등질 것을 결심했던 것 같다.

유럽의 문화를 몸소 겪기 위해 파리로 간 조이스는 의학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신문기자 노릇을 하고, 하우프트만의 영역英譯도 하였으나 모두 신통치 않고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더블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노라 바나클이란 여인과 다시 유럽으로 출분出奔, 파리, 트리에스프, 로마, 츄리히에서 살며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이스는 어렸을 때부터 문재文才가 있었다. 그의 최초의 작품인 ‘Et Tu, Healy!’ 는 9세 때 아버지가 출판해주었다. 대학시절에는 유럽에서 굴지의 문예지 포트 나이틀리 리뷰(Fortnightly Review) 지에 입센에 대한 논문을 싣기도 했다. 작품 ‘실내악’과 ‘더블린 사람들’ 의 대부분은 23세 이전에 쓴 것이다.

유럽에서의 생활도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생계를 위해서 교사를 했고, 틈틈이 작품을 썼으나 검열, 출판사와의 알력軋轢, 사회적 정치적 압박, 문단의 몰沒 이해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 어렸을 때부터 약한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만년에는 거의 맹인이 되다싶이 되었다. 그래도 원만한 결혼생활과 세계적인 명성에 힘입어 1939년에는 마지막 작품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 를 탈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시작된 세계대전 때문에 출판 당시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다. 프랑스의 항복, 나치스의 횡포, 친구 폴 레온의 죽음, 딸의 병과 같은 슬픔과 불안을 가져온 전쟁 속에서 조이스는 1941년 1월 츄리히에서 별세했다.

율리시즈는 모던 라이브러리 대형판으로 780페이지가 넘는 장편이다. 그러나 18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진 이 소설을 작가가 처음 구상했을 때에는 ‘더블린의 헌터’ 라는 단편이었다. 그는 이것을 희극으로 세상에 내놓았으나 사람들은 T. S. 엘리엇의 ‘황무지荒蕪地’ 에 비견比肩되는 심각한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작가의 의도와 사회의 반응이 어긋났다는 점에서도 율리시즈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이스는 치밀한 구상으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 모티프, 언어를 다루어 완벽한 소설의 형태를 만들어내려고 한 것인데, 세상은 형태의 부재不在니, 언어의 무질서니, 예술적 세련의 결여니 하고 이 작품을 비난했던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작의作意와 고전적古典的인 배경, 억제된 기교技巧의 구사驅使는 ‘언어의 혁명’ 을 낳았고, ‘미래의 소설’ 을 지향한다는 의견이 차츰 우월해졌다. T. S, 엘리엇은 조이스의 고전적인 수법을 가리켜 ‘현대의 예술적 처리를 가능케 한 제 1 보步’ 라고 했다.

이 작품 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1904년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45분까지, 장소는 더블린, 주요인물은 스티븐 디덜러스 (Stephen Daedalus) 와 레오폴드 브룸 (Leopold Bloom) 과 그의 아내 몰리 브룸(Molly Bloom) 이다. 더블린의 거리는 정확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정확하고 상세한 묘사를 작가는 인물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묘하게 짜넣고 있다. 작가는 순간마다 잡다한 주위의 디테일이 주인공의 의식에 넘치는 그림자를 표현함으로써 예술적 표현의 패턴을 부각浮刻시키려고 한 것이다.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스티븐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肖像’ 은 스티븐이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유럽으로 떠나는 데서 끝난다. 율리시즈는 그 때부터 몇 달이 지나 스티븐이 어머니의 별세 때문에 유럽에서 돌아와 있는 데서 시작한다. 스티븐은 여전히 자존심이 강한 지성인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깊은 좌절감을 지니고 있다. 파리에서 의학연구가 여의치 못 했고, 또한 문학에서도 아직 성공하지 못 한 대다가 아버지와 사이가 소원해진 것이 가슴 아프고, 또 임종 때 어머니의 청請을 거스린 후회가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스티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이 내적 독백獨白은 전작前作에서 보다 약간 더 예리銳利해지고, 괴로움이 좀 더 커졌을 따름이다. 그의 머리 속은 아직도 철학, 문학, 역사, 신화, 종교, 시사적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스티븐은 율리시즈에서는 2차적인 인물이다. 제 1 주인공은 희비적喜悲的인 엔타이 히로 레어폴드 볼룸 (폴더) 이다. 폴더는 모든 의미에서 평범하고 어중간한 인간이다. 나이는 38세, 젊지도 늙지도 않다. 유태인인 그는 처음에 신교도였다가 나중에 아내의 권유로 카톨릭교도가 되었다. 바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성인도 아니다. 직업은 광고업자다.

그의 성격은 수줍고 겁이 많다. 성性에 무관심하지는 않으나 여성의 매력을 상상 속에서 아니면 간접적으로 밖에 즐기지 못 하는 위인이다. 아내 몰리는 외아들 루디가 어려서 죽은 뒤에는 아이를 낳는 것을 거절해왔다. 그날 오후 4시에 블레지스 보일란 (Blazes Boylan) 이란 남자가 아내와 정사情事를 하러 집으로 찾아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그 시간에 차마 집으로 들어가지 못 한다.

그의 유태인의 태생이 말하듯이 그의 인생은 패배자의 그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구수한 인간성이 있다. 페디 엠 (Peddy Digham) 이 죽었을 때 유족遺族에게 부조금扶助金을 주고, 하인즈 (Hynes) 에게 돈을 빌려주고, 새에게 먹이를 사주고, 창녀집에서 스티븐을 지켜주고, 산고産苦로 입원한 여인을 찾아가고, 아내의 정사에 대해서는 동정을 갖고 대한다. 그의 마음 속에는 동포 내지 인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는 욕망이 깔려있는 듯 하다. 이런 성격의 브룸의 의식의 흐름은 스티븐의 경우 보다 훨씬 모호하나 사람다운 체취가 풍긴다.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스티븐은 우수한 지성을, 브룸은 정신과 육체의 평범한 혼합체를 대표하고 있다면, 몰리는 정욕을 분출하는 육체의 욕망을 나타내고 있다. 율리시즈에서 그 여자는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날 야밤이 넘도록 생활이 묘사되어 있는데, 언제나 침실에 누워있는 자세로 등장한다. 비 지성적이고 나태한 그녀는 동물과 같은 소리로 만족과 불만을 표시한다. 글을 읽을줄은 알지만 그녀의 독서는 ‘죄罪의 감미甘味’ 같은 속악俗惡한 것에 그친다. 소설의 종장 페넬로페의 에피소드는 몰리의 간간없는 내적 독백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내용은 전부가 여자의 생활 중에서도 관능적인 면에 관한 것이다. 그녀가 정복한 남자들, 그녀의 성적 매력, 관능의 기쁨, 또 여자로써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이다. 그녀 애인의 길다란 명단은 단적으로 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정연한 논리와 이지와 판단, 표현이 가능한 사고 - 이런 것이 전혀 없는 몰리의 관능이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 조이스는 문장 표현상 구두점句讀點을 없애버렸다. 그것은 물의 흐름과도 같이 끊을 수 없는 말의 흐름이다. 몰리의 의식의 본질은 바로 이 논리로 구두점도 없이 강처럼 흐르는 감정에 있는 것이다.

율리시즈는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3개의 에피소드는 스티븐, 마지막 한 에피소드는 몰리, 나머지는 폴디 브룸의 의식에 관한 것이고, 중심인물인 브룸은 양兩 극단極端이 스티븐과 몰리의 중간적인 인간으로 묘사되어있다.

브룸과 스티븐의 해후邂逅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브룸은 외아들이 죽었고, 스티븐은 정신면에서 그와의 유대紐帶를 포기함으로써 아버지를 잃었다. 생계도 제대로 이어나가자 못 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는 감상가, 떠벌이인 아버지를 스티븐은 경멸輕蔑할 뿐이다. 브룸처럼 스티븐은 집을 나왔고, 브룸처럼 스티븐은 집의 열쇠를 갖고있지 않다.

조이스는 미래의 생활, 인생의 고통을 경감輕減해줄 의미를 상징하는 아들을 찾아 해매는 아버지 브룸을 설정하고, 여기에 맞서는 스티븐을 그려놓았다. 스티븐은 일찍이 그리스의 명장 디덜러스 (Daedalus) 를 아버지로 삼았으나, 근래에 와서 디덜러스의 아버지로써의 영상映像이 흐려졌던 것이다.

브룸도 스티븐도 모든 현대인과 같이 인생의 공허를 느끼고 서로에게서 충족감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스티븐은 브룸의 접근에 좀처럼 응하려 하지 않는다. 브룸은 이 냉철한 청년의 지성 앞에 주춤한다. 조이스는 이 두 사람 사이의 갭을 종종 있는 침묵과 어색한 대화로 드라마타이즈 하고 있다.

조이스는 이 소설에 보편성을 주고, 일견 혼돈混沌한 디테일의 묘사에 받침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각 에피소드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와의 에피소드를 병행竝行시켰다. 그러나 이 병행의 수법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으리만큼 신중하다. 그러나 브룸, 스티븐, 몰리의 성격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인물들과 대조할 때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조이스는 자기의 인물들을 어디까지나 엔타이 히로익한 현대적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브룸은 오딧세이처럼 꾀가 많고 영악하지만,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일도 없고, 돌아와서 페넬로페에 해당하는, 몰리를 쫓아다니는 남자들을 죽이지도 않으며, 부정한 아내를 꾸짖지도 않는다. 스티븐으로 말하더라도 그는 텔레마카스처럼 효성이 지극하지 않다. 오히려 브룸의 정을 괴팍한 이기심으로 뿌리친다. 고전에서 방랑의 영웅은 보잘 것 없는 광고업자가 되고, 정숙한 아내는 간부姦婦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가 비 영웅적이고, 평범하고, 보잘 것 없고, 시시한데, 이것을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와 비교하는 배후에는 조이스의 날카로운 문명 비판의 눈과 우매愚昧와 고통을 웃음으로 볼줄 아는 해학의 정신이 숨어있는 듯 하다.

091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 (1922) 엘리어트 Thomas Stearns Eliot

T. S. 엘리어트 (1882 – 1965년) 는 ‘문학의 독재자’ 란 칭호를 얻을 정도로 20세기 전반의 영미문학에 군림했다. 시에서 그는 노쇠기老衰期에 접어든 낭만주의 전통에 대신하여 까다롭고 복잡한 지적인 시를 써서, 이것을 새로 영시英詩의 전통으로 수립하였다. 또 그는 비평에 지적 세련을 도입하고 과거의 영문학 내지 유럽문학을 조직적으로 검토하여 하나의 새로운 문학 전통을 건져냈다. 그러나 정신사적으로 볼 때 그의 영향력은 그의 시의 어떤 특성이나 그가 개척한 비평과 전통의 새 분야에 한정시킬 수 없다. 그것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현대적 감수성으로써 존재한다. 윌리엄 앰프슨의 비유를 빌어, 그는 ‘동풍東風처럼’ 편재偏在하며, 현대의 마음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적 기술에 있어서나, 어떤 한 사람의 업적을 중심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의 속기술에 불과하다. 엘리어트가 ‘현대’ 의 시인으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그를 20세기 영시의 혁명가로 이야기 할 때, 우리는 T. E. 흄의 영향이라든지, 에즈라 파운드의 공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엘리어트 이전의 이들은 바로 낭만주의의 해이解弛한 시적 테크닉에 대하여 고전적인 절제와 단단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장하였다.

20세기 영문학사 내지 정신사에서 ‘황무지’ 가 중요하다면, 말 할 것도 없이 그것은 엘리어트의 전 작품이, 또 그가 전통으로 수립한 감수성이 중요한 때문이고, 또 이것은 엘리어트와 더불어 20세기 영문학에 신풍을 일으킨 다른 문학파들의 업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황무지는 1922년 엘리어트 자신이 편집하는 크라이티리온 지에 처음 발표되었고, 곧 이어서 버지니아 울프 부부가 경영하는 호가스 사에서, 그 유명한 원저자原著者의 주註를 붙여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엘리어트는 후에 이 주가 붙게 된 사정을 설명하여, 시가 단행본으로 출판된 때 부피를 늘릴 양으로 주를 붙인 것이란 말을 했으나, 엘리어트의 성격으로 보아 진담인지 어떤 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황무지가 발표되기 7, 8년 전부터 엘리어트는 시를 발표하였고, 이 시들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니까, 황무지 출간 자체가 그렇게 폭탄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른지 모른다. 차라리 황무지는 그 이전의 초기 시들에 대한 하나의 대 단원이라 할 것이다.

하바드, 마르부르크, 소르본느 그리고 옥스퍼드에서 철학공부를 한 엘리어트가 런던에 정착한 다음, 최초로 발표한 - 시카고의 포이드리 지에 – 시는 ‘푸르프록의 연가戀歌’ 였다. 이 시를 비롯한, 그의 초기 시에서 엘리어트는 행동과 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의식이라든가, 너저분한 도시의 풍경이 의식에 미치는 우울한 효과를 아이러니컬하고 깡마른 스타일로 기록하였다. 황무지는 이러한 현대생활의 울적鬱寂을 보다 큰 테두리에서 표현한 것이다. 아마 당대의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도 황무지의 이러한 현실감이었을 것이다. 작년 겨울의 ‘시워니 리뷰’ 엘리어트 특집호에서 당시 옥스퍼드의 학생이었던 스티븐 스펜더는, 엘리어트의 호소력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황무지에 열을 올린 것은, 첫째 그것이 우리가 리얼하다고 느낀 삶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 말하고 있다. 스펜더는 이 시의 리얼한 면을 이야기 해주는 예로 ‘스타킹과 슬리퍼와 속옷과 코르세트’ 가 널린 너저분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타이피스트와 여드름쟁이 점원의 정사情事를 들고 있지만, 사실 황무지는 점성술가占星術家 마담 소소스트리스에서, 소다수에 발을 씻는 거리의 연인들까지 현대 도시의 면면들에 관한 스냅셧의 엔솔로지라고 할 수도 있다. 황무지의, 또는 엘리어트의 한 공적은 현대 도시의 경험을 시에 쓸 수 있는 것이 되게 한 데 있다. 그러나 황무지가 현대생활의 묘사를 모아놓은 잡동사니가 아니다. 앞에 언급한 에세이에서 스펜더는 황무지를 푸르스트의 ‘소돔과 고모라’, 헤르만 브록흐의‘몽유병자’, 슈팽글러의 ‘서양의 몰락’과 같은 계열의, 종말과 악에 대한 대 저작들에 관련시켜서 생각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황무지는 서구문명에 대한 하나의 진단서診斷書다. 현대 도시의 묘사들은 이 진단서에서 병적인 정상情狀들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서양문명의 상황은, 제목 그대로 황무지로 파악되어 있다. 여기의 황무지의 이미지는 제임스 프레이져 등의 인류학적인 연구에서 나온 것인데, 여기서 특히 출전出典이 되어있는 것은 제시 L. 웨스튼의 ‘의식에서 로만스에로’ 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웨스튼 여사는 중세 이래 서양문학의 소재로 곧잘 사용된 성배聖杯 전설에 풍요제식豊饒祭式의 인류학적, 정신분석학적 연구의 결과를 적용하고 있다. 성배 전설에는 여러 이설이 있으나, 어부 왕 (Fish King) 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가 입은 이상한 상처로 나라 안의 모든 생물이 생산을 그치고 나라는 황무지가 된다. 이 국난을 구하는 데는 순결한 기사가 있어야 한다. 그가 많은 시련을 통과하여 성배를 가져올 때 황무지의 저주는 풀리게 된다. 이 전설의 근원인 풍요의식은 묵은 해와 새 해, 겨울과 봄의 교체를 제사하는 원시종교 의식인데, 여기에서 해의 바뀜은 신의 죽음과 부활, 대지와 인간에게 생식력의 위축과 갱신에 관계되는 미신적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엘리어트는 이러한 신화들을 그의 시의 설화적 테두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배聖杯문학 - 손 쉬운 예로 바그너의 파르지팔 - 에서 와는 달리 신화가 시의 내용 그 자체가 되지는 않는다. 내용면에서 황무지의 전설은 막연한 비유적 상황으로 사용되고, 형식의 면에서 이것은 시의 조직원리로써 사용된다. 말하자면, 황무지라는 ‘관념의 음악’에서 여러 테마를 연결시켜주고 이것들에게 일정한 질서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 성배 전설이다.

신화적 구조의 이점은, 그것이 현대를 내다볼 수 있는 한 관점을 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신화가 이 시에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자는 진정으로 현대를 설명해주는 중심적 신화가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엘리어트의 의도의 일부이기도 하다.

황무지의, 또 엘리어트의 시의, 가장 유명한 특징은 그 인유적引喩的 (allusive) 인 방법이 될터인데 - 434행行의 이 시는 35명의 작가로부터의 차용借用 내지 개작改作을 담고 있다 - 이 시에 있어서의 인유의 기능은 대개 신화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현대에 대치代置되는 어떤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실수를 하고

홀로 방안을 서성일 때면,

기계적인 손으로 머리를 하고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걸어놓는다.

어느 피로疲勞한 타이피스트의, 정사情事가 끝난 다음의 모습을 묘사하는 이 구절의 첫 행은 골드 스미스의 극에서 온다. 이 빌려온 시행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 비교를 유발하여 현재를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이 시에 있어서의 인유의 작용을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검토는 우리가 이 시의 주제를 똑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우리는 인유가 과거를 높이고 현재를 낮추는 역할만을 하는 듯이 이야기 하였다. 우리는 작용에 대해서 반작용 쪽에 유의하여야 하겠다. 앞에서 든 골드 스미스의 싯구는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싯구 그것에 대한 자체 비판으로도 작용한다. 이 시구는 이제 너저분한 정사의 기술에 베어드는 문학적인 회상 이상의 가치를 갖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 시에 인용된 다른 고전적인 작품, 베르길리우스나 세익스피어, 심지어는 기독교나 불교의 유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인유가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은 서구문화의 쇠퇴이다. 이 시의 주제는 현대의 혼란이라고 보기보다는 차라리 서구정신의 무력함이다.

황무지가 그 신화적 테두리나 과거의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적극적 해결로 나아가지 못 하고, 유희遊戱나 절망이 반반씩 섞인 인용구의 혼란으로 끝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다. 황무지가 ‘무너짐에서 이러한 조각들을 건졌노라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oins)’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상으로 현대의 상황을 추스릴 수 없는 무력한 의식을 다루고 있다면, 이러한 무력한 의식의 문제는 늘 엘리어트 시의 주제였다. ‘푸르프룩’ ‘부인의 초상肖像’ ‘게론티온’ 등의 초기 시들에서 엘리어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생의 현실에 맞부딛쳐서 낭패를 경험하는 과잉의식의 경우였다. 황무지가 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키지 않는, 극히 객관적인 시라는 것은 비평가들이 지적해온 바 그대로이지만, 이 시는 다른 면에서 볼 때 시인의 깊은 감정에 기초한 시이다.

엘리어트는, 단테의 시가 극히 보편적이면서도 또 깊은 개인적인 고뇌에서 우러나온 시임을 이야기 한 일이 있는데, 황무지는 바로 이러한 시인 것이다. 황무지를 분계점分界點으로 하여 엘리어트는 보다 확실한 믿음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간다. 이제 제 2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네 개의 사중주四重奏’ 같은 시에서, 엘리어트는 경험과 의식의 모든 혼란이 결국은 믿음의 평화 속에 지양됨을 노래한다. 어떤 비평가는 - 가령 클리언스 브룩스 - 황무지에도 이미 기독교적 관점이 스며들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 거기에 신화와 전설의 관점이 있음은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확실한 믿음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임시방편적인 - R. P. 블렉머의 말을 빌어 ‘변칙적인 형이상학形而上學’ 에 불과하다. 이 시는 현대의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심판이 아니라, 심판 이전의 정신적 혼미昏迷와 고뇌苦惱에 대한 기록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황무지는 다른 어떤 엘리어트의 시 보다 현대의 고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증언의 하나가 된다. 영국의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는 엘리어트에 관한 논문에서, 20년대에 시작된 현대 예술의 특징을 데크레아숑 (decreation) 이란 말로 설명하고 있다. 데크레아숑은 시모느 바일로부터 빌려온 말인데, 바일에 의하면 이것은 창조에서 무로 돌아가는 파괴와는 달리, 창조에서 창조되지 아니한 것으로 돌아가는 조작을 의미한다. 다시 커모드가 인용하는 윌리스 스티븐스에 의하면 ‘현대의 현실은 데크레아숑의 현실이며, 여기에서 우리가 기질 수 있는 계시啓示는 믿음의 계시다.’

황무지는 최초로 데크레아숑의 현실을 증언한 얼마 되지 않은 기념비적 작품의 하나다. 그것은 어떤 믿음의 계시도 아니며, 그렇다고 니힐리스틱한 파괴도 아니다. 이것은 믿음과 허무의 불확실한 지대에서 살 수 있는 껏 살아보는 현대의 현실과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는 시이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어트는 현대의 마음을 만들어낸 몇 안 되는 문학가의 한 사람이며, 황무지는 그 마음에 관한 그의 가장 뚜렷한 증언이다.

<사족蛇足> 황무지는 작은 포켓북으로 주머니에 넣고다니며 때때로 꺼내 보았으나, 마치 쓰디 쓴 약과 같아서 책장만 닳았다. 팡세보다도 더 난해하여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명한 시라는데 이 걸 읽지 않고 어떻게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불과 한두 줄, 서너 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팽개치기를 여러 번, 그러나 끝내 읽지 못했다. 그러다가 누구에겐가 황무지 해설서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해설서를 구했다. 이해하지 못한 원인은 황무지에 인용된 그리스 고전古典이었다. 라틴어 고전을 접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황무지를 읽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했는지. 제목조차 황당한 황무지는 상징시여서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시의 행 하나하나, 구절 구절이 라틴고전의 인용이었다.

092 두이노의 비가悲歌 Duineser Elegien (1923) 릴케 Rainer Maria Rilke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 - 1926년) 는 방랑자의 생애다. 이는 시인 자신의 취미가 아니며 운명적인 것도 아니다. 자기 의지로 택한 준엄한 길이다. 시인으로써 체험을 찾아 해매인 초조와 고뇌의 세월이다. ‘말테의 수기手記’ 에서 시인 자신이 말하듯이 ‘시란 체험’ 이며, 이 체험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찾아 해매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고독한 방랑 속에서 얻어진 체험은 그것만으로 당장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한 줄의 시가 부화孵化하기까지는 다시 괴로움과 끈기가 필요하다.

‘두이노의 비가’ 야 말로 이러한 과정을 밟은 전형적인 소산으로써 오랜 기다림과 괴로운 몸부림 끝에 이루어진 릴케 필생의 대작이다. 그때까지의 릴케의 인생은 이 작품을 낳기 위한 예비단계였던 것 같은 감마져들며, 사실상 이 작품을 씀과 동시에 릴케는 실질적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릴케에게 이 비가의 착상이 떠오른 것은 1912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릴케의 방랑의 발걸음은 그 전 해의 10월부터, 마침 아드리아 해변의 절벽 위에 서 있는 두이노 성城에 머물고 있었다. 이 성은 릴케가 1909년 12월 파리에서 알게 되었던 문학 애호가 마리 투른 운투 탁시스 후작侯爵 부인의 별장으로써, 후작 부인은 벌써 1910년 4월에 릴케를 1주일 간이나 두이노 성에 초대한 바 있었다.

릴케가 두 번째 두이노 성에 체류하게 된 이 무렵은 그의 소설 ‘말테의 수기’가 탈고, 출판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이며, 이때 릴케는 온 정열을 그의 말테에 쏟고난 다음의 허탈상태였다. 그가 두 차례나 두이노 성을 찾게 된 데에는 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옛 성과 성을 에워싸고있는 대 자연 속에서, 그가 빠져있는 침체상태로부터 헤어나올 계기를 찾으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그는 이 곳에서 상기上記한 1912년 1월의 시신詩神의 새로운 내방來訪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그는 달갑지 않은 사무적인 편지를 한 통 받고 성의 뜰을 거닐며 그 회답을 구상하고 있었다. 헌데 그때 지나가는 바람결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싯구를 들었다.

‘행여 내 울부짖은들, 뉘라 천사들의 계열系列에서 날 들으리.’

릴케는 곧 자기 방으로 올라가 이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싯구들을 써내려갔다.

하물며 어느 천사가 있어 불현 듯 나를 가슴에 안아준다 한들

보다 강한 그 존재에 눌려

나는 꺼져버릴 것만 같아라. 아름다움이란 언제고 우리가

상기 견디고 있는 두려움의 시초밖엔 아무것도 아니려니

우리가 이다지도 이를 찬탄함은, 우리로 하여 멸하게 함을 잠잠히 거부하는 까닭이어라.

이렇게 하여 95행으로 된 제 1 비가悲歌가 단숨에 탄생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돌연히 찾아온 영감의 소용돌이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 해의 5월 초까지 계속된 두이노 성의 체재를 통하여 단지 또 하나의 ‘비가’ 즉 ‘제 2 비가’ 만이 더 완성되었을 따름이다. 결국 총 10편 839행에 달하는‘두이노의 비가’ 가 완성되기까지에는 무려 10년이란 오랜 방랑과 대망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동안에 그는 그를 버리고 떠나버린 시신의 재래를 고대하며 베니스, 이집트, 스페인, 도이치의 가가지, 스위스의 베른, 츄리히, 로잔느, 베르크 등을 전전했다. 세계 제 1차 대전 중에는 한동안 군에 징집되어, 그 의기소침의 도는 한결 더 심해졌다. 이윽고 한평생에 걸친 그의 방랑의 1921년 스위스의 위소트에 그의 고단한 몸을 이끌어주었고, 그곳에서 몇 년 남지 않은 여생의 나날을 평생 처음으로 정착하여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시인생활을 총 결산해줄 마지막 영감의 폭풍이 드디어 그의 시심을 창작의 엑스터시 속에 휘몰아 넣어준 것도 바로 여기에서다. 그것은 1922년 2월의 일이었다. 이 때 그는 비단 비가의 미완성 부분뿐만 아니라 전혀 뜻하지 않게 하나의 커다란 부산물까지 얻게 되었는 바, 이것이 ‘두이노의 비가’ 와 아울러 그의 대표작의 쌍벽이라 일컫어지는 2부 40편으로 이루어진‘오르포이스에 부치는 소네트’이다.

비가의 서문 노릇을 하는 제 1 비가에는 비가 전체를 통해 제시되는 여러 가지 모티브가 상호 연관 속에 나타나있다. 천사, 동물, 인간의 존재, 사물, 생과 사, 영웅, 연인 등. 헌데 제 1 비가에서는 무엇보다도 그 첫귀가 말해주듯이 천사天使의 충족된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개탄한다. 릴케의 비가에 등장하는 천사는 외면적으로는 기독교의 그것과 일맥의 공통성을 갖고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양자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여 릴케의 천사는, 신학적 종교적 천사로써 신의 사자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허무한 존재에 대한 대극對極으로 릴케가 생각해낸 하나의 완벽한 존재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의 천사는 지상적인 것과도 통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 존재의 극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허무함은 우선 시간이 아무에게도 ‘당부할 수 (brauchen)' 없다는 데서 역력히 들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무상한 존재 가운데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의 거점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천사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존재인, 다시 말하여 생사여일生死如一의 경지인 ‘전일全一 (das Ganze)’ 의 상태에 들어서있는 과거의 위대한 연인들에게서 ‘당부當付’ 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들을 찬탄해줌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더욱 완벽하게 해주는 동시, 이러한 사명을 통해 인간 자신의 허무한 존재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 비가에서도 제 1 비가와 마찬가지로 천사와 인간과의 단절이 거듭 한탄되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 존재의 허무성이 무 지속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영원히 지속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처하는 열렬히 사랑하는 남녀들조차도 이별을 통해 허무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이러한 자기 존재의 허무감에 눈을 가리려들거나 그것에 억지로 저항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다운 절도를 지켜나가는 가운데 구원의 길이 있을 것임에 이 비가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이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상실되어 있음을 시인은 한탄하고 있으며, 이별과 사랑을 하나로 표현한, 고대 그리스 예술에 나타나는 절도 높은 인간상을 모범으로써 제시한다. 제 2 비가에서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인생의 무상한 일면을 그린데 뒤이어, 제 3 비가는 사랑이라는 것의 근원이란 인간에게 깊이 뿌리박힌 성 본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성 본능은 ‘피의 하신河神’ 으로 불리우며 그 무자비함은 그 제물祭物이 되는 소녀의 청순함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결국 남성의 이러한 본능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으로써 역시 소녀의 청순성에 기대가 걸려지고 있다.

‘제 4의 비가’ 에서는 인간의 존재란 허무하며 따라서 ‘전일’ 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이유로써 인간의식의 분열, 나아가서는 존재의 분열을 들고 있다. 인간은 비록 ‘응시凝視 (schauen)’ 로써 전일적 존재를 실현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순수한 천부의 상태가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천부의 상태로써의 전일적 존재를 구현하고 있는 초년시절을 시인은 그리워한다. ‘전일’ 의 상태란 생과 사와 미래가 한데 융합된 영원한 상태인 바, 바로 어린이들은 이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죽음을 스스로 의 내부에 부드럽게 간직하고 있는 어린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주로 피카소의 ‘광대廣大 가족’ 이라는 그림에서 힌트를 얻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관계로 ‘제 5 비가’ 는 ‘광대의 비가’ 로 별칭別稱된다. 릴케는 이 비가로 허무한 인간 존재의 표본을, 정처없이 떠돌며 무의미한 연기로 생활하는 광대를 통해서 보여준다.‘어려서부터 조급히, 누구의, 그 누구를 위해 한 번도 만족하지 못 하는, 의지가 졸라매는 이들, 우리들 보다 한결 허망한 이들’의 허위의 연기에 대해 릴케는 진정한 연인들을 대비시켜 이들에게서 진정한 연기의 가능성을 암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전 비가의 중심을 이루는 제 5 비가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에 들어가는 제 6 비가의 입장이 엿보인다.

제 6 비가는 지속이 없는 인간 존재 가운데서 예외를 이루고 있는 영웅을 들어 그 전일적 존재를 찬양한다. 영웅은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위험과 죽음조차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향해 기꺼이 돌진해감으로써 자기 존재를 확립한다. 여기서는 제 5 비가까지에서 엿보이던 비탄의 어조가 오히려 찬가로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생에 충만한 예외적인 인간 존재, 그리고 무상함을 자인하고 거기에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하려는 새로운 입장에서 보는 현실의 생을 ‘훌륭한’ 것으로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7 비가에서는 인간 심정의 힘이 찬양된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허무성 가운데서 릴케가 도달한 커다란 최초의 거점이다. ‘애인이여, 내부 이외의 아무데도 세계는 없으리라’ - 이렇게 세계의 내면화를 통해 릴케는 생의 긍정의 자각에 들어선 것이다.

제 6, 제 7 비가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강하게 나타난데 뒤이어, 제 8 비가에서는 인간 존재의 허무성이 동물과 인생과의 존재방법의 대비를 통해 다시 한 번 돌이켜진다. 의식의 분열을 모르는 동물들은 많거나 적거나 간에 ‘열려진 세계 (das Offen)’ 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의 분열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해방된 ‘열려진 세계’ 를 보지 못 하고, 죽음의 세계에 대한 공포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가도 역시 전적으로 ‘인간 존재’ 를 부정적으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역시 예외가 설정되어 있는 바, 어린이, 연인들, 죽음에 가까운 자들이 그것이다.

제 9 비가는 이제까지 다루어온 문제들을 종합하여 귀결 짓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릴케는 최종적으로, 이제까지 되풀이해 한탄해온 인간 존재의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런대로 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따라서 지상생활에로의 귀결을 고지告知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의미는, 이미 제 1 비가에서도 나왔지만 대지의 인간에 대한 ‘당부’ 를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시 말 해 지속성 없는 대지를 내면화 하고 외용外容에 좌우되지 않는 불가현적不可現的인 것으로 영원해야 한다. 이것은 즉 그것을 찬양함으로써 가능하며 그 사명을 맡은 것이 곧 시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러한 심정의 고양高揚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상에서의 유한적 존재를 영원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비가에서는, 제 9 비가에서 도달한 생에 대한 긍정을 보다 신중한 태도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있다. 즉 릴케는 이 긍정이 우연한 착상이 아니라 깊은 연관성에서 연유하였음을 상기시키고, 이것을 긍정의 확고부동確固不動한 다짐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무서운 인식’ 이 곧 ‘환희의 찬가’ 로 변한다는 것, 비통, 고뇌 그리고 이것들의 극에 있는 죽음이 지상 존재에 대한 긍정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상의 것은 모두 ‘전일’ 의 세계에 인도되어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온 바와 같이 ‘두이노의 비가’ 의 의의는 유한한 인간존재를 무한으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데 있다. 비통한 인간존재의 허무감에 대한 개탄에서 출발하여 지상에 존재한다는 일의 위대성을 인식하고, 이 비가를 인생에 대한 찬가로 끝맺을 수 있었다는데 시인 릴케의 위대성이 있으며, 이는 위기의식 속에서 사는 현대인의 대한 하나의 위안이며, 생의 길잡이이기도 한다.

093 마魔의 산山 Der Zauberberg (1924) 토마스 만 Thomas Mann

토마스 만은 1875년 6월 뤼벡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상원의원이며, 곡물회사 사장이고, 모친은 브라질 대 농장의 딸이다. 형은 유명한 문필가 하인리히 만이다. 학교를 싫어해서 1년 밖에 다니지 않았고, 부친을 조실早失하고 가족이 뮌헨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1년 간 마음에도 없는 화재보험회사 견습사원을 했다. 그 후 신문기자가 된다는 구실로 여러 학기 동안 대학에서 역사학 및 국민경제학을 청강했고, 1849년 처음으로 대학생의 연애를 주제로 한 단편 ‘마음에 들다’ 를 발표했다. 그 후 형 하인리히와 더불어 금전을 대여해주고, 그 이자로 로마, 팔레스티나, 사비나산맥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1899년에 뮌헨에서 발간되는 해학 지 짐프리치스무스의 편집 및 교정원으로 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3개월 간 군대에 복무하고, 1905년 대학교수 프링스하이먼의 딸과 결혼했다. 그동안 유명해진 그는 문필활동을 수단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오버암마 가에서 살다가 이자 강변 튈스라는 곳에 자기 농장을 구입하여 1908년 이래 그곳에서 살다가, 한 때는 리도에서도 살았다.

1912년 폐병으로 입원한 부인이 요양을 받은 다보스 요양원에서 우연한 기회에 X - 레이 사진을 찍은 토마스 만은 자기의 폐에 침윤浸潤을 발견하고 요양을 받았고, 요양소 입소를 꺼려 도주하 듯 사회로 돌아와버렸는데 이것이 ‘마의 산’ 을 쓰게 된 동기다. 1914년에 다시 뮌헨으로 돌아왔고, 유럽여행을 했고, 1차대전 후에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도이치 작가의 대표로, 펜 클럽의 대표로 강여여행을 했으며, 1926년 이후 프러시아 한림원작가부의 지도회원으로 있었고, 뤼백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프라텐 상패賞牌의 보유자 및 여타의 수상을 했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자, 선전성宣傳省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심한 비난이 있었고, 곧 이어 그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토마스 만은 그 해에 있었던 바그너 기념강연회 강사로써 폴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지를 여행했고, 이 여행에서 도이치로 돌아오지 않고 망명했다. 1936년 본 대학은 1919년에 그에게 수여했던 명예박사학위를 몰수했고, 시민권도 박탈당했다. 그러자 미국의 하바드대학이 ‘도이치문학의 위대한 전통의 보유자’ 라고 해서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으며, 이것을 전례로 1949년에 옥스포드대학이, 룬투대학이, 1953년에 케임브리지대학이, 1955년에 예나대학이 각각 박사학위를 수여했으며, 1946년 본 대학은 나치스가 박탈했던 학위를 다시 수여했으나 토마스 만은 이를 거부했다. 1933년에서 1939년 사이를 그는 스위스 츄리히 호반湖畔의 퀴스나하트에서 지냈고, 그곳에서 콘라트활케와 더불어 ‘척도尺度와 가치’ 라는, 자유 도이치문화를 위한 격월간 잡지를 발행했다. 1939년 이후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서 프린스턴대학의 초청교수로 있으며 인문주의 강의를 담당했고, 그 후 13년 간을 켈리포니아 주에서 살았고, 1944년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937년에 체코가 수여하는, 망명자를 위한 헤르더 상을 수상했고, 194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시가 주는 괴테 상을 받았으며, 또 동 도이치는 그에게 괴테 국민상을, 미국 예술원은 공로상을 수여하고, 또 미국 예술문학원의 회원으로 추천되고, 1952년 이탈리아의 헬트리넬리 상을 받았고, 1953년 프랑스의 레지옹 드 뇌르는 그에게, ‘그의 문학활동의 비상한 가치와 세계적 가치를 인정해서’ 기사증騎士證을 수여했고, 1955년 그는 네델란드의 오렌지 낫소 기사단의 단장에 추대되고, 도이치의 푸르 르 메리트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80세의 고령으로 전 세계의 숭배를 받으며 1955년 8월 츄리히에서 별세하자, 그의 유언대로 신교新敎의식으로 킬히베르크에 묻혔다.

토마스 만의 ‘아이러니와 거장성巨匠性, 진심과 성실성, 의무감 그리고 애정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나 하는 것은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도이치의 애독자 층에서 이해를 받자 못 했으며, 이것이 우리들의 혼돈된 시대를 지나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게 할 것이다’ 고 헤르만 헷세는 평했다.

19세에 처녀작품 ‘마음에 들다’ 라는 단편의 발표 이래 토마스 만은 줄곧 작가적 성장을 해왔다. 61년에 걸친 긴 창작생활 기간에 그는 3단계로 대작을 발표했으니, 청년기의 대표작이 ‘부텐부르크 일가’ 이며, 장년기의 대작은 ‘마의 산’ ‘요셉과 그 형제들 (4부작)’ 이요, 노년기의 대작이 ‘파우스트 박사’ ‘사기사 펠릭스 크룰의 고백’ 이고, 그 외 수많은 중편, 단편소설과 논문, 평론, 정치평론 등이 있고, 그의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사’ ‘소설의 소설’ 의 작가적 입장 해명의 백미百媚이다.

토마스 만은 도이치의 다른 작가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작가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문학적 경향인 자연주의에서 출발해서, 그 후 독특한 전개를 추구한 작가로, 그가 추구한 것은 언제나 현실의 접근이었다. 도이치 작가들이 보유한 예언자적인 풍모나 어떤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의 연역적 전개 내지는 ‘오르페적’ 인 태도는 그에게 있어서는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았고, 비 정상과 과장을 철저히 싫어했고, 철저한 논리적 사유를 전제로 작품을 쓴 작가다. 토마스 만의 이성은 너무나 뚜렷해서 어떤 전제도 절대일 수가 없고, 무 의미성의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는 철저한 현대인으로 어떠한 전통이나 역사적인 전제도 그를 맹목적인 신념으로 이끌지는 못 한다. 토마스 만은 소재의 선택에서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을 안중에 두었고, 비 정상적인 것을 싫어했다. 여자 친구인 리지 베타에 대한 편지에서 그는 정상인 것의 추구가 자기의 이상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귀족적 직관을 소유한 보수적 시민계급 출신으로 시민계급을 매우 사랑하고, 이런 면에서 19세기적인 면이 있다.

그의 작품을 관류灌流하는 몇 가지 주제는 죽음, 자유, 사랑 등으로, 이것들이 언제나 우리가 처한 현대라는 문화사적 기초 위에 극명克明하게 부각浮刻이 되고, 언제나 해답은 없다. 그는 해답을 제시하려는 작가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현실을 예리하게 파악함으로써 해답의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기존하는 어떤 것도 최종적인 것은 아니고, 어떤 해답도 가설 이상의 것은 못 된다. 부텐부르크 일가에 나타난 문화비관주의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쇼펜하우어적인 의미로써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철저히 논리적인 회의懷疑를 통해서 자기의 전설권傳說卷을 구성했다. 위의 작품에서 그는 물질 문명의 팽창과 반 비례해서 인간의 내적 빈곤이 증대되고, 외적인 화려華麗가 내적인 비참으로 이르러 마침내 한 가족이 쇠퇴해가는 필연적인 과정을 그렸고, 이 작품은 프롯의 다양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이 너무나 치밀해서, 독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논리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쇠퇴시키고, 반 자연적으로 만들어 자연으로부터 유리遊離시켜 멸망시키고 만다는 예고가 있다.

토마스 만은 작가란 정신적인 면에서 비 종속적이며, 교양, 종교, 출생, 전통, 세계관 등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런 전제없는 자유를 추구하려면 그 태도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부정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민은 자기가 비 정상이 아니라, 사회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것으로 용인하고 있는 것들이 총체적으로 비 정상이며 병적임을 표시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발판을 제시하고자 한다. 세계의 다양성을 목전에 둔 인간의 어떤 일방적인 논리체계가 그 자체로써 해명의 관건關鍵이 될 수 없다는데서, 그는 해답이 아닌 문제의 극명한 제시를 시도하고, 어떤 해답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해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서 모든 것은 새로운 해석을 받아야 될 것으로 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문화사적 의의가 있는 셈이다.

1912년 토마스 만의 부인이 폐병으로 다보스 요양원이 입원했는데, 그가 병문안을 갔다가 진찰을 받고 자기의 폐에도 침윤浸潤된 병소病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도주하다싶이 뮌헨으로 돌아왔는데, 전에 그가 소재로 취재했던 죽음이 다시 소재가 된다. 처음에는 단편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1차대전 중 작품활동을 중지하고, 정치비평을 하는 동안 내심에서 점차 성장, 전후戰後에 손을 댔을 때, 대하大河소설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 ‘마의 산’ 은 그의 제 2의 대작으로, 줄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함브르크의 양가良家 출신 젊은 엔지니어 한스카스토르프는 폐병에 걸린 사촌 요하임을 고지高地 요양소 베르크호프를 방문하고, 자기가 열이 있어 진찰을 받은 결과 폐병임을 알고 이 마의 산의 분위기에 휩쓸려 7년을 그곳에서 시간을 망각하고 보낸 후에, 대전大戰이 일어나자 비로소 현실에 회귀回歸하여 전사戰死하고만다는 줄거리이다. 이 줄거리는 너무도 간단해서 거의 무의미하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이 짧은 줄거리 속에 시민계급이 붕괴 직전의 안일安逸을 가책苛責없이 표현했다. 말기 시민사회의 공허성이 이렇게 철저히 표현되고, 유럽의 세기 말이 이렇게 극명히 묘출描出된 작품은 그 유래가 없다.

마의 산이라는 무풍지대는 모든 면에서 ‘명면明面한 의미를 가진 진리’ 를 망각 내지는 상실한 지대地帶로 병이 생존의 의의가 된 지역이다. 생명의 상징이 병으로 된 세계는 모든 가치가 전도顚倒된 지역이며, 원초적 생명의 약동이 오히려 병적으로 간주되고, 시간의 흐름이 망각된 불모不毛의 지역이다. 무위無爲가 일생생활의 기준이요, 병에서 발생하는 열이 모든 부 도덕적 감성적인 자극을 추구한다. 무의미가 생의 내용이 되고, 운명과 외면하고 비 본질이 본질화된 착오된 세계에서 7년이 경과하는 동안 카스트르프는 점차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로 회귀를 하고, 스키를 타러간 고산高山의 만년설을 이고 있는 지역에서 자연의 원초적인 힘을 인지認知한다.

인생은 반대되는 현상들의 총화總和이니 생명과 병, 정신과 자연, 이성과 신앙 등의 총화가 이것으로 ‘인간은 이 대립들의 주인공이고, 그 때문에 이런 것을 보다 우위優位에 선다’ 는 인식을 추위에 지쳐 쓰러진 후 꿈 속에서 알게 된다. 전제 없는 이성과 경건한 마음만이 인생을 구원할 수 있고,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선과 사랑을 위하여 인간은 죽음으로 하여금 인생을 지배하지 못 하게 해야 한다’ 고 카스토르프가 생각했을 때, 꿈속에도 천국의 낙원이 그의 눈앞에 전개된다. 이런 낙원을 추구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하고, 희생을 통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난 카스트로프는 장엄한 신전神殿에서 마녀魔女가 어린 아기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보는데, 이것도 상징으로, 희생과 참여 없이 세계의 개선은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카스트로프는 이 구원을 위한 자아희생에 나아가서 전사戰死한다. 이 희생의 문제가 그의 다음 대작 ‘요셉과 그 형제들 (4부작)’ 의 주제가 된다.

이 거대한 작품 속에서 토마스 만은 그 후 우리 현실의 사상을 지배하게 된 숱한 주제와 문제를 터치하고 있다. 즉 정신분석과 심령론心靈論, 예술병과 죽음을 잇는 사슬, 아인슈타인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 시간의 상대성, 서구인西歐人, 특히 중산中産계급의 성격,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인류의 적절한 교육 등이 그것이다.

토마스 만의 특수한 천재는 고도의 사색을 보다 전통적인 성격과 분위기에다 잇는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의 산은 우리들 불행한 세기에 나타난 희대稀代 걸작傑作의 하나로 ‘인간의 전全 창조적 생명에 대한 수용적 관대성과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는 싱싱한 지성知性’ 을 베풀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1929년에 토마스 만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094 성城 Das Schloss (1926) 카프카 Franz Kafka

흔히 하는 말이지만, 키에르케고르와 카프카가 만일 70년이라는 간격을 두지 않고 같은 때 태어났더라면, 우리는 그 두 사람을 정신적이 쌍둥이라고 생각했을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비슷하다. 성격도 비슷하고, 그들이 고독, 불운, 그밖의 인생이나 문학에 대한 그들의 관념도 그렇다.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거상 도이치 계 유태인 맏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체코 사람들로부터는 2중으로 의심을 받는 처지였는데다가, 부친은 성격이 괴팍하고 얼굴이 못 생긴 그를 별로 탐탁찮게 생각했다. 그 결과 프라하에서 어렸을 때부터 의 카프카는, 후에 프랑스에다 그 일기를 번역 소개한 마르트 로베트 부인의 말대로, ‘가장 가까운 것이 오히려 단절을 심각하게 할 뿐인 상황’ 속에서, 즉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숙명적인 이방인 같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신경병에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어렸을 때부터 그는 고독감, 불만감, 억압감 같은 악 감정에 시달리며 몹씨 감정이 조숙早熟 또 예민해졌고, 부모가 강요하는대로 법률을 전공하여 1906년 (23세) 프라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획득, 더욱 비극적인 악 감정상태에서 프라하의 형사재판소와 민사재판소에 취직했으나 견뎌내지 못 하고 1908년 (25세)에는 노동자 재해보험국으로 전직, 1916년 (35세) 까지 종사했다. 헌데 노동자 재해보험국은 그에게 집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었고, 실제로 그는 ‘성’ 을 낳은 12페이지의 스케치 ‘마을에서의 시련’, 그리고‘성’ 과 함께 미완성의 3부작으로 되어버린 ‘심판’ ‘아메리카’ 또 단편소설 ‘사형선고’ ‘관찰’ ‘변신’ ‘소송’ ‘유형지流刑地’ ‘시골 의사’ 등 주요작품을 이 시기에 썼다. 문학상을 타게 되어서 작가로써 운이 좀 트이는 듯 한 때 그는 폐병에 걸렸으며, 직장에는 사표를 내고, 또 끝내 이방인 같은 모습으로 홀로 겉돌던 고향, 가족과의 관계마저 끊고 전지요양에 나섰다. 이 때의 일로써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파혼破婚 문제다. 물론 이 때의 그는, 엄격하게 말해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중重 환자’ 였다. 곧 그의 작품이나 인간이나, 그만하면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전적으로 예언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셈인데, 어쨌든 그는 폐병 때문에 전지요양轉地療養을 했다기 보다, 그 자신의 유태인계 공동사회나 가정에서 의지가 될만한 어떤 힘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와 19세기에 있어서의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던 것처럼 현대에 있어서 카프카는 철저히 고독하고 절망적인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듯이 카프카도 일시적인 구제책으로 결혼을 꿈꾸었다. 즉 1912년 (28세) 의 그는 베를린 태생의 F. B 양을 만났다. 그리고 결혼할 생각이 들자 그녀와 2년 후에 약혼. 하지만 결혼의 회의와 불안 때문에 몇 달 후에 파혼. 그러나 1915년에 다시 만나서 이듬해에 두 번째로 약혼. 그러더니 1917년 말에는 위에서 말했듯이 전지 요양 차 여로에 오르면서 다시 파혼해버렸다. 그에게 결혼이란 것은 ‘피할 수도 없거니와 절대로 한정되지 않은’ 의무였다. 그래서 전지요양 중, 1920년 (36세) 의 그는 메란에서 빈 태생의 센스카 부인을 사귀었으나 2년 후 단교하고, 그 이듬해 1923년 (39세) 에는 디만트라는 소녀를 알게되어 동거생활을 했으나, 전후의 불경기에서 병과 가난에 시달린 끝에 이듬해 윈 근교의 한 요양소에서 별세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고독은 아예 그 자신의 일부였고, 그것은 이미 그의 가슴에 깃들어있는 유다른 세계를 가꾸어나가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리하여 성자들이 신앙 속에서 살듯이 카프카는 그의 고독 속에서 살았고, 드디어는 자기 작품만을 위하여, 자기 작품만을 먹고 살아가는 어떤 설화적인 동물의 생태를 가지게 되고, 푸르스트처럼 산 채로 그 속에 묻혔으며, 단테가 14세기에 그랬듯이 카프카는 전 20세기를 철저히 체험한 작가였다.

한데, 위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카프카가 생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사형선고 (1913년)’ ‘관찰 (1913년)’ ‘변신 (1915년)’ ‘유형지 (1919년)’ ‘시골 의사 (1919년)’ 등 몇몇 단편소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아니었더라면, 기왕에 그가 발표한 단편소설들과 문제의 걸작인 ‘심판 (1925년)’ ‘성 (1926년)’ ‘아메리카 (1927년)’ 등의 3부작이 사장死藏될 뻔 했다. 브로트는 미완성인 체로 그에게 보낸, 장편소설의 원고들을 불태워 없애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저버리고, 이들 유고를 모두 출판했다.

카프카에 대해 먼저 주목한 것은 프랑스의 NRF계의 작가들이었고, 2차대전 후에는 카프카의 예언적인 내용에서 종교적인 면이 단테에 비유되고, 철학적인 면이 실존주의로 해석되고, 방법상의 비유의 문제가 특이하거도 완벽한 상징수법으로 해석되자, 그는 20세기 문학의 최고봉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실제로 W. H. 오든은 카프카를 단테, 세익스피어, 괴테에 비유해서‘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로 인정했고, 클로델은 20세기의 최대 작가가 카프카라고 말했다. 이렇게 뒤늦게야 유명해졌다는 점에서도 역시 카프카는 키에르케고르와 비슷한 운을 타고난 셈인데,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그의 3부작 중 ‘성’ 은 곧 문자 그대로 카프카의 대표작인 동시에, 그의 전부다.

원래 ‘성’ 이란 제목은 카프카가 생전에 구두口頭로나 말하던 것을 기억해둔 브로트가 이 원고를 출판할 때 내건 제목이다. 그리고 아직도 이 작품의 정확한 제작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브로트의 해설에 의하면, ‘마을에서의 시련’ 이란 12페이지의 스케치에 기초를 둔 이 장편소설 일부분이 1921년에, 대부분은 1922년에 쓰여졌다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특히 전지요양 때의 카프카의 정신상태가 곧 주안점이 되어있다. 카프카는 그 때‘약속된 천지天地’ 라는 것은 포기했었던 것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경우는 단테나 스위프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생애에 대해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세익스피어나 괴테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작가론에서는 오히려 그의 생애에 관한 고찰이 많은 지면을 필요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 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의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헌데, 원래 카프카는 ‘자기의 안타까움을 뿌리 체 뽑아버릴 수 있는’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기의 존재이유를 정당화하지 못 했다. 도이치어를 사용한 영리한 유태인으로써의 그는, 게르만 민족주의 지배하의 도이치에서처럼 체코에서 완전히 고독하게 겉도는 존재였다. 게다가 같은 유태인이나, 자기 종족의 종교나, 자기 가족과 교섭을 갖지도 못 했다. 그의 고절孤節상태는 이른바 ‘제 2의 운명’ 이자 바로 그의 생애 전체였고, 그는 부여받은 직업마저 포기했다. 직업은 종래 그가 증오하게 된 인간세계에 그를 계속해서 계류繫留시키는, 세계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는 가족과 동포와 고향을 벗어나 살아보려고 베를린으로 갔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롭게 ‘적멸寂滅’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꿈과 친근한 삶 이외의 모든 것을 멀리 떨쳐버리는 백일몽白日夢과, 인간계 밖과, 절대의 세계를 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에서의 그는 역시 ‘괴로움을 참을 수 밖에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세계 안에서 계속 허위적대다가 패배했을 뿐이다.

전지요양 전후에 있어서의 카프카의 그와같은 상황은 곧 ‘성’ 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어느 겨울의 눈이 내리는 날 밤에 K로 불리우는 주인공은 한 마을에 도착한다. 측량사인 그는 ‘성’ 과의 계약 때문에 멀리 고향을 떠나서 이 마을에 왔다고, 자기의 출현 이유를 밝히는 동시에 권리를 주장하지만, ‘성’ 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 마을에서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거니와 그를 냉대하고, 말도 걸지 않는다. 이와같은 ‘고절’ 상태에서 그는 ‘성’ 에 도달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하나 좌절한다. 그러다가 ‘성’ 에서 파견되었다는 2명의 조수助手를 맞은 그는 자기 자신과 ‘성’ 과의 계약 관계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하지만 ‘성’ 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강구되지 않고, ‘성’ 의 사자使者란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 모두가 냉정한 상태를 유지할 뿐이다. 여기서 K는 애정 문제에서도 실패, 결국에는 이 마을에서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이방인으로 고절상태에서 불안에 쫓길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발표한 브로트에 의하면, 주인공 K가 임종할 때에야 비로소 ‘성’ 에서는 비록 그에게 정식으로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을에서 살고 일 해도 좋다는 정도의 허락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헌데 막스 브로트는 ‘성’을 ‘신’ 의 은총 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원高遠한 지혜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성’에 도달하려던 K의 노력은 곧 인간계 (마을) 밖을, 절대의 세계를 구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그의 편력遍歷은 지옥계, 연옥계煉獄界, 천국계를 거친 단테의 편력에 비교된다. 그리고 끝내 권리를 인정받지 못 하게 된 K의 숙명적인 좌절상태는 실제로 ‘괴로움을 참을 수 밖에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조건에 해당되면서, 단테의 신곡에 있어서의 고뇌하는 인간의 그것에 비교된다. 그리고 카프카 자신이면서 ‘성’ 이란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K의 존재상태는, 카프카가 약혼자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과 같은 몇 마디 말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 … 저는 저의 가족 속에서 … 이방인처럼 아주 낯설게 살고 있습니다. … 저는 저의 아버지에게, 인사말 외의 다른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 누이들과는 … 절대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 ’

도널드 피어스가 말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하나의 탐구서였다면 카프카의 ‘성’ 도 탐구서다. 그리고 단테가 신곡에서 그 시대와 인간조건을 요약하였다면, 카프카는 성에서 20세기와 20세기의 인간조건을 요약해놓고 있다. 성은 곧 카프카의 신곡이다.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지, 그래야 2, 30년 밖에 안 된 이제 카프카 내지 이 작품의 영향을 말 한다는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인 듯 한 감이 있으나, 뚜렷하게는 이미 까뮤가 그 영향을 받은 작가로 들어나 있으며, 구미歐美에서는 물론 우리나라 안에서도 그 영향이 암암리에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숱한 아류亞流 작가들과 작품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영향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아직 미지수이며, 현 시점에서는 실제로 카프카 내지 ‘성’ 에 대한 해석이란 것도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095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s Lover (1928)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

20세기 소설의 특색의 하나는 성性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한 데 있다고 할 수 있고, 로렌스 (1885 - 1930년) 는 다른 어떤 작가 보다 대담하고 진지하게 성 탐구에 몰두한 작가다. 이러한 경향은 대전 후 서구사회가 겪어야만 했던 전통적 도덕에 대한 반동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숨김없이 발표한다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특히 성의 문제는 그것이 갖는 중요성에는 눈을 가리고 금기처럼 외면했던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내려온 모랄이었으나 이른바 프로이트학파의 연구로 인간생활이 성의 지배를 받는 비중이 밝혀지자 소설도 금단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금은 오용되는 일도 허다해서 불필요하고 추잡한 성행위의 묘사가 횡행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인간의 중요한 일면을 파헤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현대문학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로렌스는 초기작인 ‘아들과 연인’ 에서 이미 자서전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양성 관계를 못 가지게 하는 과정을 그렸거니와 ‘무지개’ ‘사랑하는 여인’ 들에서도 줄기차게 이상적인 남녀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를 탐구했고, 수다한 단편을 통해서도 생명의 힘과 피의 부름과 접촉, 따뜻함, 부드러움, 너무 주지도 않고 너무 빼앗지도 않은 균형 위에 이루어지는 넘녀관계를 반복 강조한다. 그는 한 때 유토피아적인 사상에 사로잡혀서 ‘캉가루’ ‘날게 돋친 뱀’ 등 일련의 작품도 썼고 실제로 자기가 창도唱導하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친구들을 설득하기도 했으나, ‘죽었던 사나이’ 라는 중편의 주인공처럼 설교자나 구원자로써 자신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고 다시 성의 탐구라는 그의 신앙적 과제로 돌아와서 쓴 것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 이다. 이러한 점에서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장편이라는 점에서나 이 작품은 그의 탐구의 결론이라고 보아 무방하겠고 다른 작품 보다 훨씬 대담하게 성교 장면의 묘사를 하고 있고, 그 때문에 많은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의 작품 중에서 반드시 가장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로렌스의 다른 소설도 그렇듯이 간단하고 오히려 평면적이다.

여 주인공 코니는 열 다섯에 언니와 함께 드레스덴으로 음악공부를 가서, 젊은 남자들의 개방적인 분위기에 어울려, 열여덟에 처음 남자를 알게된다. 그러나 곧 전쟁이 일어나 귀국했고, 귀족 출신인 클리포드와 결혼, 한 달의 밀월여행을 즐겼으나 남편은 전상으로 영원히 하반신이 마비된 체 귀향했다. 이들 부부는 시골의 광대한 영지에서 광산 경영에 열정을 쏟고, 또 성공하여 남편과 별 불만족 없이 살아가지만, 코니는 점점 겉잡을 수 없는 초조감에 사로잡히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친정 아버지와 남편과 자기 자신이 잘 알고있었고, 그런 감정의 배출구로 아일란드 출신 극작가인 마이클리스와 성교를 해보지만 만족을 얻지 못 하다가, 사냥터지기 멜러즈에게서 비로소 생의 충족을 찾는다. 멜러즈와 코니가 때로는 실패도 하지만 생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과정을 충실히 그리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성적 질투를 느끼지 않는 클리포드는, 코니에게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줄 것을 희망하고, 코니에게 남자 관계가 있음을 알고도 묵인하지만, 신분이 다른 멜러즈의 씨를 잉태한 코니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코니가 요구하는 이혼을 거부하지만 멜러즈는 다른 농장에서 일터를 얻고 그들은 새로운 결합에 충실한 삶의 새 출발을 준비한다.

물론 결혼 전 성교와 간통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로렌스 이전에도 많은 작가가 다루어왔고,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로렌스의 경우는 비교적 공개적인 성교 장면의 묘사가 되풀이 되고, 더구나 문자화가 금기禁忌로 되어있던 인체의 비밀부분의 이름을 거리낌없이 사용했기 때문에, 마치 무슨 외설猥褻한 호색好色문학의 표본처럼 떠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기껏해야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의 묘사에 그쳤던 빅토리안 모럴의 입장에서 보면 끔찍한 일임에 틀림없다. 또 어느 한 장면을 읽는다면 확실히 외설하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작품 전체가 갖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그럼 부분에만 흥미를 느끼는 독자에게는 위험한 서설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작가가 얼마나 진지한 의도에서, 무엇을 말하려는가에 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 전체를 놓고 평가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그런 부분의 묘사도 당연히 정상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로렌스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소설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시대에 살고있고, 따라서 그것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대 붕괴가 있었고, 우리는 그 폐허 속에 있으며 새로운 거처를 만들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려는 일을 시작한다. 그건 힘 드는 일이고 장래로 뚫린 평탄한 길은 이제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뚫거나 장애물을 넘어간다.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

이 말은 암시적이기는 하나 이 소설의 의의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현대가 기계문명의 병폐로 말미암아 건전한 인간성을 잃고, 규격화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오랜 세월에 걸친 기독교문명은 또한 정신에만 편중한 까닭에 왜곡된 인간성을 만들어놓았다고 단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는 올바른 인간 관계를 되찾음으로써만 구재될 수 있고, 인간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남녀 관계일 수 밖에 없고, 남녀 관계는 성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상적인 성 관계 위에 세워지는 진정한 결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래의 정신 편중의 병폐가 이런 기본적인 육체 관계, 즉 인간의 조건인 성교를 자칫하면 죄악시하고 또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생각한 나머지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해왔다. 그러나 성이란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고, 귀중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다. 이것을 죄악시하면서 묘사하는 것이 바로 외설이라고 로렌스는 단언한다. 우리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때로는 노골적인 장면 묘사와 남녀의 국부局部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시정의 소위 호색문학과는 차원이 다른 감흥을 느끼는 것은, 로랜스의 문장이 갖는 시 정신의 작용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이렇게 경건하리만큼 진지한 성에 대한 태도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채털리 부인은 네 남자와의 성 관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상대만 바꾸어 같은 종류의 성교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 가장 무의미한 관계가 사실은 정식으로 결혼한 남편 클리포드와 관계다. 그는 결혼했을 때 동정童貞이었으나 한 달의 밀월여행蜜月旅行 때도 성을 도외시했고, 마치 무슨 부수적인 행사에 불과했으며 진정으로 그것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친근하기는 했으나 흡사 침몰하는 배에 탄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한 것과 같았다. 더욱이 전상戰傷으로 하반신下半身을 못 쓰게 된 다음의 클리포드는 병들고 불구不具가 된 현대문명의 상징에 불과하다. 로렌스의 생각으로는 부부라는 형식적 관계 때문에 애정도 업이 되풀이되는 성교性交야 말로 추악한 것이다.

학생시절에 경험한 성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토론하고, 노래하고, 캠프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으로 성을 경험했으나, 오히려 일종의 앤티 쿨라이막스를 맛보았을 뿐이고, 원시 복귀와도 같은 느낌을 얻었을 뿐이다. 성에 대한 깨어남조차도 아직 충분하지 않은 단계다.

마이클리스와의 관계는 남편이 불구가 된 후에 육체적인 필요에 의해서 맺은 것이었으나, 여기서도 충족을 얻지 못 한다. 그는 두뇌는 명석하지만 육체는 남성적인 생명에 넘쳐있지 않고, 성을 일종의 위안이나 진정제로 생각하고 여성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끼지 못 하고, 따라서 성교에 있어서도 이기적이기만 하고 균형과 조화를 얻지 못 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니는 그 여자대로 자아自我가 겉돌고 있으며, 남성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지 못 하여 실망하고 낙담한다.

채털리 부인은 멜러즈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성의 충족을 맛본다. 그는 청교도적淸敎徒的인 금기의식禁忌意識도 없고, 성을 지성화知性化 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통해서 느끼는 사람이다. 성에 대한 선입관도 없고,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을 따른다. 그러니까 그는 진정으로 여성에게 부드럽고 사랑으로 맺어지는 성교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전에 세 번이나 여성 관계에서 실패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따뜻한 피의 부름에 응하는 관계가 아닐 때는 남성으로써의 매력이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까 실패를 경험한 남녀가 비로소 생의 충족을 얻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라고 헤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고, 가령 멜러즈가 코니에게 의심을 품고, 그런 멜러즈에게 코니가 불만일 때는 만족스로운 관계가 되지 못 하고, 코니는 비참한 심정을 이길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고마는 장면도 있다. 두 사람은 여러 번 맺어지지만 이것도 역시 자극적인 장면을 되풀이하는 춘화본적春畫本的 수법이 아니라, 육체의 교섭을 통해서 오히려 서로의 애정이 깊어가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 이외의 여러 작품에서도 이상적인 성 관계란 남녀가 서로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그렇다고 상대편의 자아를 침범하지도 않고, 이루어지는 관계 - 즉 너무 주려고 하지 않고, 너무 빼앗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피의 부름에 순종하는 동물적 따뜻함과 부드러움과 애정이 따르는 관계라고 되플이 강조한다. 그것은 두 마리의 사자獅子가 뒷발로 서서 한 개의 왕관王冠을 받쳐들고 있는 옛 문장紋章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이렇게 성에 대해서 거의 종교적인 성실성과 정열적인 탐구욕을 가지고 있는 로렌스에게는, 성행위란 종교의 의식만큼이나 신성한 것임에 틀림 없었고, 이것을 마치 수치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감추려는 것은 모독이었을 것이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세 번이나 개고改稿를 해서, 1928년 플로렌스에서 출판되었다. 그 후 파리에서도 출판되었으나, 로렌스의 모국母國인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생략판만이 간행되었고, 비 합법적으로 돌아다니는 소위 진본眞本이라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30년이 지난 후 미국의 글로브 출판사에서 완본이 간행되어 우송郵送을 거부한 체신국장과 출판사 간에 재판 소동이 일어나, ‘미국사회가 허용하는 성적性的 관용寬容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는 판결과 더불어 출판사측이 승소勝訴했고, 이어 영국에서도 펭귄 출판사에서 완본完本을 출판하자 재판사건이 일어났다. 이 재판은 연 6일 간 계속되었고, 35명의 유명한 로렌스 연구학자, 소설가, 시인, 언론인, 종고가, 심리학자, 교육자들이 증언에 나섰다. 물론 모두가 변호인측의 증인이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결코 외설문학猥褻文學이 아니라는 점을 확언했다. 마지막 증언자인 21세의 아가씨는, 자기가 17세 때 읽은 생략본省略本이 오히려 외설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고, 자녀들에게 읽히겠느냐는 검사檢事의 질문에 증인들은 읽혀도 무방하다고 대답한다. 물론 유죄판결이었다. 연전年前에 일본에서 완역판이 나와서 역시 재판에 걸렸고, 문단이 떠들썩한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는 완역이 될텐데 어떤 반응이 있을지 흥미로운 일이다.

096 인간조건人間條件 La condition humaine (1933) 말르로 André Malraux

석학碩學 앙리 끌루아르는 앙드레 말르로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렇듯 명징明徵하고 응축凝縮된 정신이, 이렇듯 혼란스럽고 폭발적인 사물에 대하여 작용한 적은 여태껏 없었으리라’ 고 했다. 과연 수긍이 가는 말이다.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하여 명징하고 응축된 정신으로 대결한 인간 - 앙드레 말르로는 1901년에 은행가銀行家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위시하여, 수 개 국어를 수학했다. 1차대전이 이른바 ‘정신의 위기’ 와 더불어 유럽에 불안을 가져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양식良識에 대하여 불신임결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혹자或者는 니힐리즘으로 빠져들어갔고, 또 혹자는 행동을 유일한 생명 긍정肯定으로 인식했다. 얼핏 보면 이 두 가지 태도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허무주의라는 하나의 씨앗에서 발아發芽한 쌍엽雙葉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을 뿐이다. 말르로는 이 의지를 지닌 니체적 인간이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생명 긍정의 방법인 행동은 무 의식의 전사戰士가 아니라 명징한 정신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극한 상황에 처한 개아個我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형이상학적으로 재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인간조건 (1933년) 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그의 니힐리즘은 ‘서구西歐의 유혹 (1926년)’이라는 서간체書簡體의 평론에 잘 나타나 있거니와, 유럽에 대한 절망을 자아의 모험으로 바꾸어놓으려는 심리가 이미 엿보인다. 드디어 1927년 중국의 광동혁명에 참가함으로써, 허무로부터 행동자를 창조했다. ‘정복자征服者 (1928년)’ 와 ‘인간조건 (1933년)’이 그것이다. 후자는 그의 니힐리즘을 행동으로 극복하려는 실험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죽음을 매개媒介로 하여 고독한 개아가 우정 혹은 동지애와 결부되는 것이 인간조건의 주제다.

‘첸은 모기장을 걷어올리려 시도할 것인가? 모기장 위로 그냥 내려찍을 것인가? 고뇌가 그의 배를 옥죄었다. 그는 자신의 단호한 결단을 알고 있었다. 허지만 이 순간에는,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하나의 육체 위로 천장에부터 드리워진, 흰 모슬린의 덩치에 홀려 결단에 대하여 멍청한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다. 잠결에 비스듬이 기울어진 발 하나만이 모기장 밖으로 나와 있다. 그래도 살아있는 발 - 인간의 살.’

첸이 무기상武器商을 비수匕首로 암살하려는 순간의 장면이다. 이와같이 긴박한 순간을 숨가쁜 문체文體로 계속하여,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르포르따주에 가깝다. 전 7부로 완성된 인간조건은 연월일시를 각부各部의 서두序頭에 명시明示하거나 또는 지명地名을 밝히고 있다. 이른바 일기체日記體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일인칭소설一人稱小說은 아니다.

‘1927년 3월 12일 자정 30분’ 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파리 7월’ 이라고 두서頭序가 붙은 제 7부에서 끝을 맺고 있다. 1927년 상하이의 공산당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이를 탄압하는 국민당의 장개석 군軍과 공산당의 테러리스트 사이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이 이 소설의 근간根幹을 이룬다. 그러면 우리가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알베레스는 ‘20세기 문학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에서 ‘1900년부터 1956년 사이에 문학적 감정은 아주 달라졌다. 독자나 작가도 그렇거니와, 정신적 경향, 욕구, 취미들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다. 문학의 의도도 목적도 심지어는 그 대상까지도 이제는 전혀 딴판이 되고말았다 … 문학은 예술만이 아니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말르로의 경우에도 딱 들어맞는 지적이다. 인간조건의 숨가쁜 얘기 갈피에는 언제나 본질적인 현실이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설은 19세기적 의미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는 도저히 없게 되었다. 사회, 정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시대의 요청이 다급했던 것이다. 말르로가 ‘인간이란 행위의 총화總和’ 라고 말한 것은 시간 속에 해체된 인간을, 요약이 가능한 존재로써 파악하려는데 의미가 있다. 인간에게는 개아의 본질과 진실을 이루고 있는 어떤 가치와 승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개아가 판단한 이 가치는 행동의 스프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조건 속에서 첸은 말한다 - ‘인간이란 항상 자기 안에서 공포恐怖를 발견한다. 샅샅이 그 공포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행동할 수 있다.’ 그러면 이 행동이란 것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아의 가치판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연성, 불합리성, 절제성 그리고 삶은 여하한 경우에도 하나의 ‘유형물有形物’ 이란 점이다. 다시 말한다면 생명의 긍정과 더 나아가서는 그 생명을 강렬하게 만드는 방법의 발견에 관한 문제이다. 이 생명의 강도强度에 의해서 죽음의 고민을 넘어서고, 고독의 담벼락을 헐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말르로의 철학은 다분히 니체적이다. 가령 ‘왕도王道 (1930년)’ 의 주인공 가린느는 뻬르깡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말르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허무에 대한 지고至高한 구원을 모험 속에서 찾는다. 명징한 정신으로 모험을 통하여 생명의 강도强度를 확인하려고 한다. 사실 말르로의 작품들은 그의 내적 로망을 펼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나신裸身에 접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집요執拗한 사색, 부조리한 세계에 의하여 희망을 상실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번민煩悶하는 그의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에게는 혁명적인 행위란 오락娛樂과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 될 생生의 수단이 된다. 말르로는 혁명적행위를 일종의 약藥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이 행위 속에서 예기치 못 한 중대한 의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고독에 대한 우애友愛와 동지애同志愛다. 니체이즘을 연상시키는 ‘정복자 (1928년)’ 로부터 ‘희망 (1937년)’ 에 이르기까지는, 그는 우애라는 중대한 의미를 혁명적행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구원을 향한 참된 발걸음은 인간조건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인공 키요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반지 속에 감추어두었던 청산가리를 동지에게 주는 장면은 자못 감동적이다.

그렇다면 말르로는 이 우연의 발견물인 우애友愛를 전적으로 구원救援의 수단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나이브하지는 않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첫째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문제요, 둘째는 이 생명을 측면에서 긍정하는 것이 우애 (友愛, fraternite) 이다. 여기까지는 확실하다. 그러나 허무의 심연深淵에 빠져든 인간조건이 어떻게 솟아오를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작품 인간조건은 여러 각도에서 암시를 주고 있다. 1927년에 상해上海의 공산당 음모가 획책하던 비밀 결사, 무기 구입, 인간관계, 외교 및 군사상의 기밀 등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은 욕망과 꿈에 의하여 동요動搖되는 그들의 무감각을 자못 소란스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펼쳐나간다. 투쟁鬪爭은 모호模糊하고도 기괴奇怪하다.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주인공인 키요나 그의 아버지인 노老 학자 지조르 영감이나, 첸, 그리고 키요의 아내 메이가 모두 저마다의 레알리데를 찾고있는 인간일 뿐, 혁명을 지고至高의 것으로 받드는 진짜 공산당원은 아니다. 이들은 혁명을 개아를 위하여, 정확히 말하면 생명의 강도를 담금질하는 일종의 풀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땅 위에 얽매놓은 가공可恐할 쇠사슬처럼 생각되는, 사회적인 또는 종교적인 마지막 구속救贖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그 존엄성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직도 절망적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이 해방의 희미한 여명黎明은, 이 책의 끝머리에서 무겁고 슬픈 지평선地平線을 형성하고 있다. 그 지평선 위로 인간의 외침이 메아리도 없이 가로질러 간다. 일찍이 시인詩人 알프레드 비니가 들은 바 있는 인간의 외침! 그러나 소설가 말르로는 인민이 아닌 행동의 열풍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인간 문제 혹은 개인의 문제는 말르로에게 있어서 중대한 과제다. 인간조건에 대한 그 연민憐憫은 현대의 세계가 제출하는 공포와 황폐荒廢 앞에서 타오르거나 얼어붙을 뿐만 아니라, 개아의 존엄성과 집단의 필요성 사이에서 야기惹起되는 무모한 노력 앞에서도 그러하다.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말르로의 경우는 이 연민의 형태인 것이다. 때로는 이 연민이 애정의 형식을 취한다. 가령 인간조건에 나오는 지조르 영감의 부정父情이나, 키요의 자기 아내 메이에 대한 애정은, 성격의 난해성과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명확한 형태를 부각浮刻시키지 못 하고 있지만 분명 애정이다. 그리하여 말르로는 자문自問하는 것이다 - 개인의 가치를 집단 속에 종속從屬시킴으로써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인가? 남성적인 동지애를 실현하는 건 집단 속에서만 가능할 것인가? 등등 질문의 양식은 복잡해져 간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자명自明하게 마련이다. 집단의 생성生成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해방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경화硬化되지 않은 집단은 언제나 개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반대로 개아는 집단의 필요성을 윤리의 기조 위에서 파악해야 한다. 즉 그것은 인간애를 목적으로 하여, 때로는 자발적으로 개아를 희생할 수 있다는 무한의 선택자유 (가치 판단) 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조건 속에서 키요는 죽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는 마당에서 그는 ‘가장 강열한 의의와 가장 위대한 희망’ 으로 충만된 것을 위하여 싸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키요) 는 그가 함께 살고싶어 하던 사람들의 품속에서 죽어갔다. 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하나 하나 잠든 그의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죽어갔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 하는 삶?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인간조건에서 가장 감명 깊은 장면은 키요의 마지막을 묘사描寫한 이 구절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이상에서 말르로의 죽음과 삶에 대한 태도, 시대와 운명에 대한, 허무와 행동에 대한, 개아와 집단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문제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르뽀르따주문학의 백미白眉라 일컫는 인간조건이다.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작품을 토대로 살펴보면, 우선 ‘서구의 유혹 (1926년)’ 은 그의 니힐리즘의 출발점을 나타낸다. ‘정복자 (1928년)’ ‘왕도 (1930년)’ ‘ 인간조건 (1933년)’ 은 니힐리즘의 극복을 행동에서 찾는다. 그리고 나치스에 체포된 공산주의의 저항을 그린 ‘모멸侮蔑의 시대 (1935년)’ 나 스페인 내란을 몽따주 수법으로 그린 혁명의 서사시敍事詩라 불리우는 ‘희망 (1937년)’ 등은 남성적인 우애 (fraternite virile) 를 윤리의 경지에까지 고양高揚시킨다. 무한한 인간의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그는 공산주의자와 결별訣別했으며, 1939년에 독소獨蘇협정이 체결되자 그는 단호히 반공적인 태도를 취했다. 1940년에 항독抗獨 레지스땅스에 참가했다. 미완未完의 소설 ‘천사天使와의 씨름 (1943년)’ 은 제 1부가 ‘알텐부르크의 호두나무’ 란 이름으로 나왔는데, 여기서는 관조적觀照的이며 신비적인 경향이 엿보인다. 1949년에는 야심적인 예술사 ‘예술심리학’ 이 나왔다. 일찍이 생명의 강도를 경험한 작가 말르로는 생명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반反 회고록 (1967년)’ 을 냄으로써 그의 이러한 모습을 더욱 명료明瞭하게 부각浮刻시켜주었다.

절망을 뛰어넘는 그의 행동은, 그리고 사상과 문학은 우주宇宙에 대한 인간의 지배성 (la maitrise) 을 긍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당사자 (l'auteur) 의 지배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097 구토嘔吐 La Nausée (1938)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구토는 사르트르의 최초의 소설이며 가장 예술적으로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다. 사르트르를 ‘재수없는 나팔수’ 정도로 생각하는 많은 비평가들도 그의 ‘구토’ 와 ‘상황 1’ 에 실린 그의 문학평론, 그리고 최근에 발표된 그의 ‘말’ 만은 입을 모아 위대한 문호文豪의 작품이라고 찬탄한다. 구토에는 그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 - 그것을 우리는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 과 그의 명석明晳하고 냉철冷徹한 논리를 과시하는 듯한 그의 득의만만得意滿滿한 면面 - 그것을 우리는 논리의 현상학적기술現象學的技術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 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그의 양면성兩面性은 문학평론과 ‘말’ 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지속되고 있어, 단순히 혈기血氣 많은 논객論客으로 그를 밀어붙이려는 많은 사람들을 곤란케 한다. 구토가 발간된 것은 그의 일련의 상상력에 관한 논문 ‘상상력 (1936년)’ ‘감청이론시고感請理論試考 (1939년)’ ‘상상적인 것 (1940년)’ 을 앞뒤에 둔 1938년이었다. 이것은 구토가 베를린의 프랑스학회에서 그가 연구하고 있었던 훗설과 하이데커의 영향 밑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사실상 사르트르의 전반의 생애란 훗설의 현상학과 하이데커의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상학적 존재론이란 부제가 붙은 ‘존재와 무無’ 는 그의 이런 노력의 총화總和이다.) 뿐만 아니라 1938년이란 이 연대는 전체주의의 팽배와, 서구문명의 위기에 대한 많은 지식인들의 지적 성찰이 거의 절정에 달한 듯 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차디찬 지적 관찰을 통해 자기 존재의 허무성을 입증하려한 구토의 출간을 퍽 이상하게 생각케 해준다. 후에 극적으로 참여문학을 부르짖은 사람이 진짜 혼란의 와중渦中에서 쓴 것이 고작 구토란 말인가? 이것은 1942년 까뮤의 이방인 - 전쟁의 와중渦中에서, 지중해地中海의 모래와 바다와 태양을 노래한 이방인이 그야말로 낯설게 보였다는 그의 어느 한 문장을 생각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당시의 지적知的 상황, 그 당시의 정신 풍토를 가장 잘 들어낸 작품으로 구토와 이방인을 드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줄로 안다. 그것은 이 두 작품이 국수주의國粹主義의 편협偏狹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나아가서 말르로가 문제로써 제기한 ‘인간은 지금 과연 살았는가 죽었는가?’ 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 댓가로써 얻어진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서구사회의 지주支柱가 되어온 개인 ‧ 인간이 신神의 부재不在 선언 이후에 그 존재 이유를 박탈당할 우려가 있었던 시기, 니체를 거쳐 슈팽글러의 ‘서구西歐의 몰락沒落’ 에서 예견된 서구사회의 종말이 격렬한 시기에, 이 두 작품은 물론 다른 질감質感의 언어를 통해서 그 분위기를 묘파描破해주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당시의 정치적 팜플렛보다 그것은 훨씬 더 많은 감동과 성찰省察의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가 구토의 첫머리에 셀린느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 역시 우리에게 생각의 여지餘地를 제공한다. 사르트르의 가장 충실한 해설가로 알려진 장송이 그의 구토를 끝내 도덕적 지평地平에서 관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바깥에서 바라본다면, 소설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구토는 로깡땡이라는 한 사학도史學徒의 내면일기內面日記에 지나지 않고, 사건 역시 지극히 단조롭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물의 구토를 느껴, 이 때까지 해오던 롤르봉 연구를 집어치운다는 것이 중요한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연애戀愛라고 볼 수도 있을 안나와의 관계 역시 너무 단조롭고 흔히 기대하기 쉬운 정사情事 한 번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 단조로운 소설이 우리를 계속 자극하고 밀고 나간다. 거의 시적詩的인 충격을 주는 그의 아름답고 명쾌한 문체文體 때문에, 이런 자극은 더욱 고조高調된다. 그러면 그 단조로운 사건의 배후에 무엇이 있어 독자를 계속 끌고나가는가? 그것은 구토라는 별로 기분좋지 못 한 감정이다. 로깡땡이 우리에게 넘겨준 이 구토라는 참 따분하고 미지근한 감정을, 우리는 구토라는 소설의 몇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억지로 떠맡는다.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전일前日 바닷가에서 내가 조약돌을 쥐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일종의 가벼운 역겨움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기분이 나빴던고! 확실히 그 역겨움은 조약돌에서 왔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내 손으로 지나갔다. 그렇다, 그거다. 틀림없다. 그 손 속의 구토다.’

이러한 로깡땡의 고백은, 그의 구토가 바닷가에서 조약돌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가리켜주는데, 이 두 가지 점은 구토라는 소설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두 지주가 되어있다. 로깡땡의 구토가 바닷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바다라는 말라르메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말라르메적 바다는 의식意識의 표상表象이며 의식 그 자체다.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라는 훗설의 명제命題에 어긋남이 없이, 로깡땡은 바닷가에서 일어난 역겨움을 후에야 구토로써 파악한다. 그의 의식의 언저리에서 일어난 어떤 것이, 그의 의식이 그곳으로 향하자 구토로써 파악된다. 의식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스스로 유도誘導해낸 대상이 조약돌이다. 로깡땡의 의식 내부에서 핸들과 독학자獨學者의 손으로 이어지는 사물의 저주咀呪로써 파악된 조약돌은, 로브그리에의 명석한 분석에서 자세히 밝혀져 있다. 로깡땡의 의식은 대상對象과의 상호 침투浸透를 거의 완벽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것은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지,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내 손 속으로 지나갔다’ 의 지나갔다는 표현에 주의하기 바란다. 바닷가와 조약돌이라는 이 두 차디찬 이미지로써 사르트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자아와 사물과의 이해할 수 없이 큰 거리, 의식과 사물과의 영원한 거리이다. 그 거리는 자아에 흡수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아와 영원한 거리를 계속한다. 그 거리를 사르트르 - 로깡땡은 구토라는 말로 표시한다. 말을 바꾸면 구토란 거리 때문에 야기惹起된다.

‘그날 아침 8시 15분에, 프랭타니아 호텔을 나와 도서관으로 가려 했을 때, 나는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 한 장을 주우려고 했는데, 못 했을 따름이다. 그게 전부고 사건이랄 것은 아니다.’

로깡땡의 의식이 구토로 향하는 계기를 이루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로깡땡이 결국 종이를 줍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 종이와 의식과의 거리 때문이리라. 이 구토 때문에 롤르봉연구 역시 중단되고 만다. 어떤 사물이든 자기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 속으로 자기가 끼어들어갈 수 없다면, 즉 모든 것이 ‘추상적 범주의 비 공격적 태도’ 를 잃어버린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겁나게 할 게 틀림없다. 이때까지 우리의 도구道具로써의 우리와 밀착되어 있던 것들이 갑자기 그 도구성을 벗어던지고, 우리와 거리를 유지하고 저기서 버티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험을 로깡땡은 공원에서 느낀다. 유명한 마로니에 뿌리에 관한 대목 말이다.

‘그런데 조금 아까 나는 공원에 있었다. 마로니에의 뿌리는 바로 내가 앉은 걸상 밑에서 땅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것이 뿌리였다는 것이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다. 어휘語彙는 사라지고, 그것과 함께 사물事物의 의미며, 그것들의 사용법이며, 또 그 사물의 표면에 사람들이 그려놓은 가냘픈 기호는 사라졌다. 적敵이 어깨를 쭈그리고 고개를 숙인 체, 나는 혼자서 그 검고, 울퉁불퉁하고, 억세고 나에게 공포감을 주는 나무더미와 마주 앉아 있었다.’

마로니에 뿌리는 이제 로깡땡에게 어떤 도구적인 의미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검고 울퉁불퉁하고 억셀’ 따름이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심을 야기시킨다. 왜 나무뿌리는 그런 형태로, 나와 이런 거리를 갖고 거기에 있는 것일까? 로깡땡은 알 수 없다.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야기된다. 존재의 우연성과 여분餘分, 그리고 자유.

‘여분, 그것은 내가 이 나무들, 철책들, 조약돌 사이에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관련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무기력하고, 쇠약하고, 음란淫亂하고, 의기소침意氣銷沈하고, 내 음험陰險한 생각으로 흔들거리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이었다.’

의식은 나무뿌리와 거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자아와도 거리를 유지한다. 널리 알려진 즉자卽自와 대자對自의 구별이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내가 애쓴 모든 이유들이 사라지고, 또 이유는 이미 생각할 수 없다.’

롤르봉 연구 역시 존재의 허무함을, 여분과 자유를 보상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곧 느낀다. 롤르봉을 통해 그는 자기의 여분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따지고보면 과거의 롤르봉을 살게 하는 것은 현재의 자기이며, 현재의 자기란 역시 여분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 자신의 과거도 유지할 힘을 못 가졌던 내가, 딴 사람의 과거過去를 구해낼 수 있으리라고 바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해서 롤르봉은 두 번 죽는다. 그렇다면 로깡땡은 항상 여분의 존재로써 남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시켜 줄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 할 것인가? 로깡땡은 마지막으로 이런 암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것은 예술에 의한 구원이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부터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 노래는 거의 전면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확산擴散된다.

‘멜로디는 그렇게 먼 - 그렇게도 먼 배후背後에 있다. 이것도 나는 알고 있다. 즉 판板에 금이 가고 닳아서, 가수歌手는 아마 죽었을지도 모르며, 나는 간다는 것, 나는 기차를 타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에서 현재로 미끌어져가는 것의 배후背後에, 매일매일 해체解體되고 벗겨지고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가는, 그 소리들 뒤에, 동일同一하고, 젊고, 힘찬 멜로디가 매정한 증인처럼 서 있는 것이다.’

멜로디의 구성에는 어떤 필연성이 있다. 이 멜로디의 필연성을 갖는 어떤 것을 로깡땡은 쓰려 한다. 어떤 종류의 것을? 음악은 모르기 때문에, 역사책은 롤르봉연구처럼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마 소설 같은 것을 쓸 지 모른다. 아니 그게 확실하지는 않다.

이러한 로깡땡의 내면의 성찰은 앞서 말한 현상학적 기술과 예술의 도피逃避의 두 다리 위에 세워져있다. ‘도피’ 라는 말을 우리가 감히 쓸 수 있는 것, 그것은 장송의 비난 그대로 책이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박명薄明 속에서’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토의 역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도이치 비평가의 말 그대로 그 당시의 사회 단면斷面을 무의식적으로 내보여주고 있다. 그 사회 단면이란 우리가 보기에는 몰락해가는 서구사회의 그것이며, 길 잃은 뿌띠 부르조아의 그것이다. 그것은 구토의 시적詩的 문체文體와 시적 충격을 곧 이해하게 한다. 아마도 뽕쥬의 시편詩篇들과 비교될 수 있는 그의 충격적인 묘사描寫들은, 그 자신이 뽕쥬에 대해서 말한 사물 ‧ 언어의 딴 예로써 보여진다. 이러한 것의 딴 측면이겠지만, 그의 소설은 롤랑, 바르뜨가 말하는 기술의 전환기의 정점頂點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구토에서 자주 보여지는 반反 과거와 단순 과거의 차이, 즉 사유思惟와 행위行爲의 차이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만’ 이 있다는 로부그리예 류類의 감정의 현상학적 기술의 가능성을 예고해준다. 그의 구토 이후의 역정歷程이 그가 구토에서 예감했던 것과 정 반대의 길로 간 것이 옳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구토가 존재의 무상성無常性, 사물의 존재 양태樣態에 대한 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엄밀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후에 반反 소설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으로도, 그의 이론은 단순한

나팔수 정도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098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1942) 까뮤 Albert Camus

알베르 까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이 ‘부조리不條理’ 와 ‘반항反抗’ 에 근거를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까뮤 문학의 사상적 배경을 두고 우리는 에세이 형식으로 발표된 ‘시지프스의 신화神話’ 와 ‘반항인’ 속에서 볼 수 있다. 부조리며 반항을 몇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들의 근본적인 성격만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까뮤는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를 모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란 다시 말하면 인생이다. 그러면 인생이란 모순을 이루고 있는 두 기본 항項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죽음에 대한 절망과 삶의 환희’ 라고도 할 수 있겠고, ‘고독과 사랑’ 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악과 선’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순된 인생에 대한 명석한 인식’ 그것은 까뮤가 ‘시지프스의 신화’ 와 ‘반항인’ 에서 전개한 기본 사상일 뿐 아니라 그의 체험 (이 체험의 증언이 ‘표리表裏’ 다) 에서 얻은 기본적 진리로서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일관하여 지킨 것이다. 그의 처녀작이 상반되는 두 말로 ‘표리’ 라고 되어있고, 최후작 역시 상반되는 두 말로 ‘적지敵地와 왕국’ 이라 되어있는 것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까뮤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는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세계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이 알아볼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인간이 가진 바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沒 합리’ 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까뮤의 부조리이며, 인간이 피하지 못 할 숙명,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졸고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 한다. 그저 습관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있으면 존재자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까뮤에 의하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생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반항’이다.

이방인은 알제리아를 무대로 전개된다. 까뮤는 1913년 알제리아 몽도비에서 태어났다. 아마 까뮤는 알제리아의 해변과 태양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계통이다. 빈곤한 가정이었기에 알지에 국립대학을 나올 때까지 고학하였다. 이 때 그 지방 신문사에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자주 신문기자로 활약한다. 1934년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이듬해 탈당한 일이 있으며, 연극에 매료되어 ‘작업대’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여러 작품을 각색, 상연했고, 특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자신이 이반의 역할을 맡았다. 1938년 ‘알지에 레피블리깽’ 지에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해서 ‘인간의 추악한 면이 강조되었다’ 는 비난 기사를 썼다. 이것은 까뮤의 인간성의 일 단면을 보여준다. 2차대전이 시작된 때인 1940년 ‘이방인’ 과 ‘시지프스의 신화’ 제 1부를 탈고하여 2년 후 발표하였다. 문제의 이방인이 2차대전 초, 혼란한 시기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1942년부터 항독운동기관지 ‘투쟁’ 지의 파리 책임자가 되어 저항운동에 앞장섰고, 1년 후 투쟁 지의 주간이 되었다. 이 때 사르트르와 교우하기 시작했으나, 1951년 에세이 ‘반항인’ 을 발표한 다음, 이듬해 사르트르가 주간으로 있는 ‘현대’ 지에서 프랑시스 장송이 반항인을 혹평하자 ‘잡지 현대지의 주필에게 보내는 공개장’ 을 동지에 투고함으로써 사르트르와 절연하였다. 1955년 ‘전락’ 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약 20년 간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까뮤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전 세계에 독자를 갖게 되었다. 이방인은 그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앞에서 말 한 바와 같이 졸고있는 의식이 불가피하게 허망한 모순에 부딛쳐 부조리를 낳게 되는 귀결을 보여주는 것이 이방인이다. 이방인에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자.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섹스를 하고, 희극영화를 보고 웃고’ ‘태양 때문에’ 아라비아 사람을 죽이고, 사형 집행 전날 밤 ‘과거에도 행복하였지만 지금도 역시 행복하다’ 고 말하며, ‘증오심을 발하여 자기의 사형 집행을 보기 위하여’ 단두대斷頭臺 주위에 많은 군중이 모여줄 것을 원한다. 알제리에 사는 일개 사무원인 뫼르소는 아주 범속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속에 허망의 세계가 펼쳐진다.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언제나 다름없는 우울한 일요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매장되었다.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는 구절을 읽게 된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이 충격적인 말은 뫼르소로 하여금, 그 다음 날 마리라는 타이피스트와 정사情事를 하게 한다. 그리고 우연히 레이몽이라는 건달을 만나 함께 해수욕장에 간다. 그리고 레이몽과 시비가 붙은 아라비아인을 뜨거운 태양 때문에 쏘아 죽인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나 재판관이나 검사는 어머니 장례식 날의 그의 태도에 중점을 둔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졸았다는 사실이 타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 날 피곤해서 졸았을 뿐이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갑자기 그 (예심판사) 는 어머니를 사랑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예, 딴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 이렇게 대답’ 했다. 뫼르소는 어머니를 사랑한 것과 어머니 장례식날 졸았다든가, 여자와 정사를 가졌다는 사실과의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 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라비아인을 죽인 것과는 더욱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뫼르소가 변호를 잘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일에 관심을 갖지 못 했다. 사건들은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지나가버린다. 그는 우연에 이끌려 연출된 그의 범죄를 의식하지 못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민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형선고에 어리둥절해 있다. 왜냐하면 해변에서 수영하는 쾌락이나, 알제리아의 오후의 부드러움 그리고 육체적 사랑 등을 제하고는 이 세상의 어떤 일도 그에게는 무관한, 정말로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들의 눈에는 그의 행동이 죄가 되며, 그것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말하자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냉혹한 심장, 건달패와 섞였고, 음란한 일에 관련되고, 사람을 죽인 탈선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이때부터 자기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착을 느끼지만 사회는 이미 그에게 무관심하다. 세계가 그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이 무관심 때문에 그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런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모두가 이룩되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라고 외침으로써 이 소설은 끝난다.

‘흑사병’ 에 대한 자신의 해설로써 ‘반항인’ 을 썼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에 대한 해설로써 그 보다 몇 달 늦게 나온 ‘시지프스의 신화’ 를 까뮤는 썼다. 이 권태와 허무를 그린 소설을 ‘시지프스의 신화’ 에서 ‘기상起床, 전차사무소나 공장에서 4시간, 식사, 4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월, 화, 수, 목, 금, 토, 언제나 같은 리듬' 으로라고 설명한다. 변화하지 않는 똑같은 생활의 되풀이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기계화되고 생활은 단조로와져 간다. 인간에게는 희망도 환상도 사라지고 육체적인 진실, 순간적인 쾌락만 남아있다. 까뮤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갑자기 환상과 광명이 없어진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이 추방에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기억도 없고, 약속된 땅에 대한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란 세계에 대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뫼르소의 행위, 가령 어머니 장례식 다음의 마리와 정사라든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아라비아 인의 살해라든가를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타난 구절이 잘 말해준다.

‘어떤 사나이가 유리창 저 편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물론 이쪽에서는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의미한 몸짓을 볼 수 있다. 왜 그가 그런 몸짓을 하고 있는가? 이쪽 사람은 생각한다.’ 이 때 그 유리창 안에 있는 사람의 동작은 부조리하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면 ‘그는 끊어진 회선回線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 선이 연결되고 인간의 활동은 뜻을 가지게 된다.’

까뮤는 등장인물과 독자 사이에 유리창을 삽입한 것이다. 유리창 뒤에 있는 사람은 무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리창은 모든 것을 통과시키지만 통과시키지 못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동작이 가지는 의미다. 이 의미의 불통 때문에 뫼르소와 타인들 사이에는 의식의 단절斷切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의식의 단절이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까뮤가 이방인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와같은 부조리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이며, 가장 신랄辛辣한 고발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이방인은 ‘건조하고 깨끗한 작품, 외관상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잘 짜인 작품이며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는, 2차대전이 일어나 프랑스뿐만 아니고 세계 각국의 사회적 정신적 혼란기였기 때문에, 양차 대전을 통한 인간의 가치관이 변하였던 때였다. 사람의 목숨이란 그렇게 귀중하지 않은 것처럼 수 없이 죽어갔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로써 평가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1952년에 번역, 소개되었다. 그는 실존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런 경향에 속했다. 2차대전을 전후해서 세계에 실존주의 작품이 선풍旋風을 일으킨 것은 바로 까뮤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철학적 이론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가 1957년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그의 문학적 공로에서다. 자기의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작가적정신은 그로 하여금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라기보다는 성실한 작가로 지칭되게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황량한 폐허에서 인간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까뮤가 제시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은 중세의 종교 이상의 힘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것이 통속적인 허무주의로 인식되어 왔던 것은 까뮤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 한 데 기인한다. 적어도 1950년대에 대두된 르보로망이 문학의 일반적 조류로 대두되기 전까지 까뮤의 문학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 까뮤의 불행한 죽음은 또 다른 이방인의 제시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1942년의 이방인은 적어도 2차대전 전후의 문학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하고 지배했다는 의미를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다.

099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1952)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시카고 근교 오크 파크에서 출생하여, 1917년 오크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 1918년 7월 야반夜半에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그 후부터 문학 정진이 시작되었으며, 파리로 갔다. 여기서 그의 문학의 특색인 간소체簡素體 - 하드보일드체가 완성되었다. 주요작품은 ‘해는 또 다시 뜬다 (1926년)’ ‘무기여 잘 있거라 (1929년)’ ‘빈부貧富 (1937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40년)’ ‘강 건너 숲속으로 (1950년)’ 와 노벨상 수상작 ‘노인과 바다 (1952년)’ ‘움직이는 향연饗宴(1964년)’ 등이 있으며, 1961년 7월 아이다호湖 주州의 케첨에서 건강을 비관하여 엽총으로 자살했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여섯 번 째 장편이며, 이 작가의 생존 중에 발표된 최종작이다. 사후에 발표된 유작으로는 1964년의 ‘움직이는 향연’ 과 1967년의 제 1 유고 수필집 ‘바이 라인 헤밍웨이’ (이 책은 1967년에 우리나라에서 ‘푸른 파도를 타고’ 로 번역되었음) 가 있다.

노인과 바다는 1951년 1월에 기고되어 일단 그 해 4월 말에 현재 상태로 원고가 작성되었으며, 1952년 9월 라이프 지에 전편이 게재되었다. 이 작품을 집필한 곳은 큐바의 하바나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자택 핀카 비지아였으며, 3층 서재에서 매일 아침 6시부터 8시 사이에 집필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의 글 쓰는 태도인 바, 연필로 쓰는데, 서술문을 연필로 쓰고, 대화문은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타이프로 단숨에 써넣는다. 또 반드시 서서 쓴다는 등 기벽奇癖이 있다. 반 바지만 입고, 웃통은 벗고, 서서 책상에 허리를 구부리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모습은 독특하다.

라이프 지에서 5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게재한 이 작품 덕택으로 라이프 지는 5백만 부가 팔려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라이프 지의 성공 탓으로, 1952년 9월에 단행본을 낸 스크리브너즈 사社는, 이미 독자들이 라이프 지의 글을 읽어 판매가 되지 않아 적자를 냈다. 우리나라에서도 라이프 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헤밍웨이는 라이프 지 게재로 금전적 혜택을 보지는 못 했지만, 작가로써의 세계적인 성가聲價를 올렸다. 1952년 퓨리쳐 상,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헤밍웨이의 경우 다른 작품에서도 그 자서전적 성격이 짙지만, 노인과 바다도 그 예외가 아니다. 아직까지 노인과 바다의 원형原型에 관해서 학자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직접 소재로써, 1936년 4월 호 에스콰이어 지에 발표한 ‘푸른 파도를 타고서 (On the Blue Water, 이 수필은 전기 수필집에 수록되어 있음)’ 가 큐바의 노 어부에 관한 삽화라는 것을, 미국의 저명한 헤밍웨이 연구 학자인 필립 영 및 칼로스 베이커들이 말하고 있다. 과연 그 에세이는 노인과 바다의 원형이라고 할만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 … 언제였던가 한 노인이 카바나스에서 홀로 작은 배로 낚시질을 나가 큰 머린을 낚았는데, 머린이 배를 끌고 다녔다. 이틀 후 노인은 60마일이나 동쪽으로 끌려간 곳에서 어부들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는데, 머린의 머리와 등뼈, 꼬리만 선체船體에 매달린 체였다. 그래도 원체 큰 머린이라서 남은 고기가 800 파운드나 되었다. 노인은 이 머린이 바다의 깊은 부분으로 배를 끌고가고 있는 동안 이틀 낮과 밤을 고기와 싸웠다. 머린이 힘이 빠져 물 위로 떠오르자 노인이 힘을 내서 머린을 배로 끌어당기고, 머린의 심장에 작살을 찍었다. 머린이 너무 커서 배에 실을 수 없어 뱃전에 묶어 끌고오는데 상어떼가 달려들어 머린을 뜯어먹었다. 상어떼와 싸움이 벌어졌다. 노인은 상어떼를 작살로 찌르고 때리면서 싸웠으나 머린은 상어밥이 되어버리고 머리와 꼬리 그리고 뼈만 남았다. 노인이 어부들에게 구출되었을 때는 상어가 머린을 다 뜯어먹은 후였으므로 노인은 반 미친 상태로 싸움을 했는데, 상어떼는 아직도 배 주위를 돌고 있었다.’

이 단편에 나오는 노 어부도 우리가 보아서 안 것처럼 거대한 머린을 잡기는 했지만 상어들의 습격을 만나 노인은 멕시코 만류灣流에서 홀로 상어떼와 싸운다. 노인은 기진맥진氣盡脈盡하고 결국 머린은 상어떼에게 다 뜯겨버리고 뼈만 남았다. 실신상태로 돌아온다는 내용은 노인과 바다와 비슷하다. 이것이 노인과 바다의 소재다.

그러나 최근 집접 소재의 정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밝힌 책이 바로 커트 싱거가 쓴 ‘헤멩웨이 - 한 거인巨人의 삶과 죽음 (1961년)’ 이다. 영과 베이커의 책이 1951년에 나왔고, 이 책이 1961년에 나왔으니까 10년 만에 정체가 밝혀졌다.

이야기의 내용은, ‘노인과 바다’ 나 ‘푸른 파도를 타고서’ 나 ‘커트 싱거가 전하는 글’ 이나 거의 비슷하지만 원형은 원천이 다르다. 싱거에 의하면 헤밍웨이는 큐바에 실재한 노 어부 마뉴엘 몰리바리 몬테스판에게서 들은 어부의 실제 경험담을 기초로 노인과 바다를 썼다. 과연 그 책을 보면 노인과 바다의 내용과 마누엘이 싱거에게 한 이야기는 비슷하다. 이를 토대로 ‘푸른 파도를 타고서’ 는 ‘노인과 바다’ 의 직접 소재가 아니다. 물론 여기서 헤밍웨이 자신이 ‘노인과 바다’ 의 원형이라고 전하는 이야기와 ‘푸른 파도를 타고서’ 의 이야기도 비슷한 것이어서, 12년 동안 구상을 한 헤밍웨이에게 우연의 일치로 그에게 소설화를 위한 자극제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헤밍웨이 자신이 ‘노인과 바다’ 의 원형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헤밍웨이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그 사실을 캐낸 싱거의 문장을 인용하면,

‘선생님께서 노인과 바다를 쓰시게 된 경위는?’

그 구상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알자는 뜻에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썼느냐고? 힘들었지, 정말 힘들었소이다. 200번이나 고쳐 읽었지요. 그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소. 그것이 끝나 완성된 이제까지도 그 놈을 집어들고 보면 일생을 두고 벼르던 일을 끝낸 것만 같소. 그렇소, 정말. 그건 내 일생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사자獅子였소.’

‘음, 그건 좀 힘든 얘긴데’

무슨 계시啓示를 말하고 있는 듯 그의 어조가 엄숙해졌다.

‘그 얘기를 얻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소. 어느 날 아침 일찍 필라 호號를 좀 타볼 생각에서 부두로 나갔단 말이요. 나는 거기서 노 어부를 만났소. 우리는 얘기를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그 얘기를 나에게 했단 말이요. 그 사람은 그 경험을 기억해내는 동안에도 나에게 고통과 실망의 빛을 보입디다. 그건 비극이었지. 그 다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단 말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 한 그대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이야기 한 것에 내가 윤색한 이야기를 쌌던 거요.’

노 어부의 이야기를 윤색한 것이 헤밍웨이의 말대로 노인과 바다가 된 것인데, 노인과 바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개 이 노 어부가 경험한 이야기의 내용도 알게 된다.

그 전에 한 가지 더 얘기해두고 싶은 것은, 이 마누엘이라는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의 원형이 되는 사람은 1963년 10월에 큐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해서 현재 미국에서 살고있고, 또 그가 큐바에 있을 때 그는 헤밍웨이를 고소했다. 자기가 제공한 소재로 헤밍웨이만 부자가 되었으니, 자기가 요구한 모터 달린 배 한 척만 주면 되었을 것을, 그것을 거절한 헤밍웨이가 괘씸하다고 제소한 것이다. 결국 패소했지만, 마누엘이 경험한 이야기가 어떠한 이야기인가는 노인과 바다를 이야기하는 것으로써 그 윤곽을 알 수 있으리라.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 (원형은 마뉴엘), 큐바 섬 해변의 오두막집에서 혼자 사는 홀아비 어부. 너덜너덜하게 꿰맨 돛을 달고, 작은 배로 멕시코 만류까지 출어하지만, 고기를 못 잡은 지가 벌써 84일 간이나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불운을 큐바에서는 스페인 어로 ‘살라오 (Salao)’ 라고 한다. 노인은 가족이 없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마놀린이라는 소년이 이웃에 살고있어 도움을 준다. 그러나 소년의 부모는 소년이 노인을 따라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85일 째의 이른 아침, 노인은 혼자서 배를 타고 듬벌로 나간다. 점심 때 쯤 깊이 600 피트나 되는 듬벌에서 머린이 낚시에 걸린다. 배 보다 2 피이트나 더 큰 놈으로, 낚아 올리기가 어렵다. 노인은 머린에게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사력死力을 다 하여 낚시줄을 잡고 머린과 사투를 벌인다. 낚시줄에 긁혀 손가락마디는 피투성이가 된다. 해가 지자 9월의 바다는 춥다. 머린과 사투로 지친 노인은 피를 흘리며 배에 쓰러진다. 밤 새 머린은 배를 제멋대로 끌고다닌다. 이틀 째에도 머린은 힘이 줄지 않는다. 노인은 제절로 배 안으로 날아온 날치를 먹으며 버틴다. 해가 지자 바다가 어두워지고, 곧 달이 뜬다. 노인은 잠이 든다. 아프리카 사자의 꿈을 꾼다. 사흘 째의 해가 떠오른다. 노인도 지쳤지만 머린도 힘이 빠져 배를 끌지 못 하고 원모양의 궤도軌道를 그린다. 그리고 해면으로 떠오른다. 거대한 동체胴體와 자색紫色 무늬가 선명하다. 그래도 사투는 게속된다. 결국 힘이 빠진 머린이 끌려오자 노인이 작살을 머린의 급소에 찍는다. 머린은 갈아앉았으나 곧 은색 배를 들어내며 떠오른다. 사방이 피바다다. 노인은 밧줄로 머린을 뱃전에 묶어 끌고가려고 한다. 길이 18 피트, 무게 1500 파운드의 거대한 머린을 잡았으므로 노인은 불운이 가시고 행운이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서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상어와 싸움을 벌이고, 결국 머린의 동체는 상어에게 모조리 뜯겨버리고 대가리와 꼬리 그리고 거대한 형해形骸만 남았다.

항구에 닿아 노인은 마스트를 내리고, 돛을 감고, 지친 몸으로 오두막에 들어가 물 한 잔을 마신 다음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진다. 노인은 또 사자 꿈을 꾸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주인공 산티아고가 한 말 ‘인간은, 죽는 일은 있을망정 지지는 않는다’ 라는 인간정신의 최고의 모습으로써의 불굴의 투쟁정신이야말로 그에게 영원한 승리를 말한다. 노 어부 산티아고가 말하는 이 감상을 물론 철학도 사상도 아니다. 하나의 감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이 한 사람의 노인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에 부딛친다. 거대한 머린과의 싸움 뒤에 오는 노인의 불행은 인간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노인이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인간이 어디까지 인내하고 투쟁할 수 있나?’ 그 한계를 결정하려고 인간이 운명과 대결하는 것에 있어 이 작품은 그리스 비극에 견줄 수도 있으리라.

100 의사醫師 지바고 Doktor Zhivago (1957)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195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의사醫師 지바고’ 는 작품 자체의 문학, 예술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물의物議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소련 작가의 작품이면서 소련 국내에서는 출판이 금지된 반소反蘇, 반공적인 작품이라는 면에서 소련 당국의 노여움과 불만을 유발하여 작가로 하여금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데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말썽과는 관계없이 이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 가치는 날이 갈수록 더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19세기 러시아문학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의사 지바고가 국외에서 출판된 지 10여 년, 파스테르나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을 그처럼 맹렬히 비난했던 소련에서도 제한된 부수나마 출판이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1890년, 화가 아버지, 음악가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파스테르나크는 블로크, 예세닌, 마야코프스키, 자먀친, 필리냐크, 바벨리 등을 배출한 20세기 초엽初葉의 이른바 황금시대에 속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첫 시집은 1914년과 1917년에 출판되었는데, 그것으로 그는 일약 동 년대 중견시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시의 형식과 경향은 서구 상징파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금 세기 20년대에서만 해도 그는 소련에서 시인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전체주의가 확립되자 사정이 일변했다. 뛰어난 천분을 지닌 그의 문학 동료들은 모조리 침묵을 강요당하고,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예세닌은 1925년에 자살하고, 마야코프스키도 1930년에 자살했다. 자야친은 그의 소설 ‘우리들’ 을 국외에서 출판했다 하여 몇 해 동안이나 옥고에 시달린 후 1931년에 서구로 망명했다. 필리냐크와 바벨리는 시베리아로 유형流刑되었다가 거기서 처형되었다.

이처럼 가공可恐할 시대에 처하여 순교자殉敎者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파스테르나크는 창작생활을 포기하고 외국의 고전古典, 특히 세익스피어의 번역이라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소련과 서구가 동맹 관계에 있었던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어느 정도 통제가 완화되어, 1943년과 1945년에 그는 두 권의 조그마한 시집을 내놓았다. 그러나 전후의, 이른바 문화공세로 그는 또 다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소련의 어용御用 비평가들로부터 ‘부르조아적 미학’ 이니, ‘형식주의 ’니, ‘병적으로 세련된 조그만 경험의 세계에 은거隱居하는 반동反動 시인’ 이니 하는 말로 비난을 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 첫 해빙기가 시작되자,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1954년 4월에는 즈나먀 (깃발) 지에 그의 시 10편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소설 ‘의사 지바고’ 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의사 지바고는 스탈린이 죽은 후 착수되어 1954년 말 경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작가의 모국에서 어떠한 탄압과 비방을 받았으며, 외국에서 출판되어 어떤 명성을 획득했는가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의사 지바고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공산주의 혁명 속에서의 러시아 인텔리의 비극적 운명을 서사시적으로 엮은 소설이다. 의사이며 시인인 유리 지바고의 생애 - 1905년 혁명 전야前夜의 청년시대부터, 1929년 모스크바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의 그의 생활과 사랑이 그 내용이다.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유리 지바고는 어릴 때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숙부의 양육을 받고 성정한다. 철학자인 숙부는 그에게 깊은 종교적인 영향을 준다. 의과대학을 나온 유리는 모스크바의 자유주의적인 교수의 딸 토냐 그로메코와 결혼한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의관軍醫官으로 존군從軍하게 되는데, 전선戰線에서 종군 간호사 라라 안티포바와 만난다. 라라는 소녀시절에 어머니의 정부情夫 코마로프스키라는 변호사한테 정조貞操를 유린蹂躪당한 어두운 과거를 가진 여인인데, 그 후 노동계급 출신인 재능있는 청년 안티포프와 결혼하였고, 지금은 그녀를 버리고 전선으로 떠나버린 남편의 뒤를 쫓아 간호사로 종군한 여자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지바고는 가족이 기다리는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혁명의 혼란과 도시의 기아飢餓상태를 모면하려고 지바고는 가족과 함께 처가妻家의 연고지 우랄지방으로 피난한다. 도중에 그는 적위군에게 연행되어 심문을 받는데 그를 심문한 적군장교 스트렐리니코프는 라라의 남편이었던 안티포프다. 지바고는 무사히 석방되어 처가에 도착한다. 그러나 혁명의 물결이 휩쓴 황량한 우랄지방에서 생활을 꾸려나가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지바고는 현청縣廳 소재지인 유라친 시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라라와 재회再會한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의 비극적이면서 시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바고는 유라친에서 가족에게로 돌아오는 길에 적계赤界 빨치산에게 납치되어, 숲에서 그들을 위해 군의軍醫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얼마 후 빨치산을 탈주한 지바고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유라친으로 돌아온다. 그가 빨치산에 납치된 후 그의 가족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있었지만 곧 소련정부에 의해 국외로 추방된다. 유라친에서 지바고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라라였다. 지바고가 열병에 걸려 중태重態에 빠지지만, 라라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회복하고, 두 사람은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나마 깊은 애정을 나눈다.

그러나 지바고는, 빨치산에서 탈주했다는 죄목으로 지명수배指名手配를 받는다. 이 때 두 사람 앞에 코마로프스키가 나타나서, 라라와 그의 어린 딸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백위군의 세력 하에 있는 극동지방으로 자기와 함께 떠나자고 라라를 유혹한다. 지바고는 사랑하는 라라의 안전을 위해 라라를 속여 코마로프스키와 함께 떠나게 하고 자기는 홀로 우랄에 남는다.

어느 날, 지바고가 은신隱身하고 있는 집으로 라라의 전 남편인 스트렐리니코프 (안티포프) 가 찾아온다. 한 때는 적위군의 선봉이었던 스트렐리니코프도 이제는 오히려 반역자의 낙인烙印이 찍혀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 극적인 재회가 있은 후 스트렐리니코프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지바고는 멀고 먼 길을 걸어 모스크바로 간다. 이제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정력을 상실하여, 옛날에 자기 집 하인 노릇했던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아 실의와 허탈 속에서 만년晩年을 보낸다. 그는 전차電車 속에서 졸도卒倒하여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에 우연히 라라가 나타나서 시체를 얼싸안고 애절한 독백獨白을 한다.

주인공 지바고의 성격은 1917년 혁명을 정점으로 한 러시아사회의 붕괴를 배경으로 발전한다. 사회의 대 변혁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오히려 동정적인 면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관자傍觀者의 범주範疇를 벗어나지 못 한다. 역사적인 운명이라든가 러시아사회의 발전이라든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바고도 젊은 때부터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그런 문제에 참여하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는 적극성 있는 행동파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광신자狂信者를 대할 때와 같은 연민憐憫의 정을 표시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혁명에 무관심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혁명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작품 속에 뚜렷이 묘사되어 있다.

1917년, 러시아의 정치적 형편을 고려할 때, 혁명은 마치 어떤 자연의 힘 모양으로 도저히 모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라라는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마음이 끌린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를 알 수 있었고, 자기 자신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혁명의 사회적 혼란에 대한 이 객관주의적 내지는 자연주의적인 태도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가깝게 해주었고, 그들을 굳은 애정으로 결합시켜주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지바고와 극히 대조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라라의 남편 안티포프다. 안티포프는 노동계급 출신으로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어느 철도노동자의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는 후에 대학교육을 받고 인텔리가 되어 라라와 결혼을 하지만, 라라와는 성격적으로 어울릴 수가 없어서 아내의 곁을 떠난다.

지바고가 방관자형이라면 안티포프는 전형적인 활동가형의 청년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적위군장교로써 최선봉에서 싸운다. 그러나 결국은 혁명의 대열에서도 밀려나 인생의 패배자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두 인물 - 지바고와 안티포프의 대조對照는 이 소설의 중심적인 이데올러기 면에서 테마다. 방관자인 한쪽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조그만 선행 밖에는 할 수 없다고 느끼며 그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한쪽은 활동가 내지는 광신자다. 그러나 양쪽이 모두 - 지바고의 감정이나 상식, 안티포프의 높은 이상이나 이론 따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법칙에 지배되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멸망해간다.

그러나 작자 파스테르나크가 의사 지바고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작가 자신의 신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바고로 대표되는 소련 지성인의 비참한 운명에 있다 할 것이다. 탄압과 획일이 지배하는 사회의 그늘에서 파리한 모습으로 시들어 숨져가는 무수한 지성인들의 내적생활의 추구,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중추中樞를 이루고 있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에서 시도한 장르는 ‘시로 엮은 소설’, 다시 말해서 소설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서정시적인 아름다움과 서사시적인 전개, 극도로 세련된 문체와 철학적인 깊이를 지닌 대화, 미묘한 심리적 관찰과 심오深奧한 사색思索의 결합, 그것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나가는 호화로운 오케스트라는, 이 작품을 러시아문학의 위대한 고전古典들과 능히 비견比肩할 수 있는 걸작傑作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이점에서 ‘의사 지바고’ 는 소련에서 반 세기만에 처음 나타난 문학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특히 이 소설의 후반을 이루는 지바고와 라라의 비련悲戀은 무대舞臺의 전면에 크게 클로즈 업 되어 압도적인 힘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남녀의 애정문제를 작품의 방계적傍系的인 삽화揷話로 밖에는 취급하지 않는 러시아문학에서 이것은 희귀稀貴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스테르나크가 ‘의사 지바고’ 에서 거둔 예술적 성과는 앞으로의 소련 문학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소련의 젊은 작가나 시인들이 한결같이 파스테르나크를 자기들의 스승으로 추앙推仰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의사 지바고’ 는 파스테르나크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 문학사상에 불멸不滅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윤색 탑재 끝, 이어 한국의 고전 100선 연재함)

 

 

 

 

 

 

 

<범당 서재> 지성인 필독도서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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