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한국음악사 정리

수선님 2024. 6. 30. 12:47

1. 상고 시대의 음악

 

 

1]수렵 시대의 춤과 노래

 

-상고사회의 음악활동

문화형태 : 전형적인 농업사회의 풍속과 관련된 종교적 제천의식, 종교적 제의는 제정일치의 형태(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따라 제정 일치)

삼한 : 제사장→천군, 신라 : 종교.정치적 구실의 지배자→거서간.차차웅.이사금 칭호

 

 

1)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높이: 3m 너비:10m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

45점의 육지 동물과 고래 등의 바닷고기,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이 묘사되었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동물들이 많이 번식하고 그로 인해 사냥할 것이 늘어나기를 기원하면서 또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어떤 주술적인 굿 장면이었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2] 농사굿 시대의 춤과 노래

채집 및 사냥을 하선 시대와는 달리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무르는 농경,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고 소위 부족국가라고 하는 집단을 이룬다.

-1세기: 고구려 남쪽에는 변한과 진한 마한 등이 국가가 설립되었다. 바로 이 무렵 온 부족민들이 모여 농사와 관련된 제천의식을 벌이는 일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농업사회로 이러한 풍속은 상하구별 없이 종교적 제의와 관련하여 노래와 춤으로 즐길 수 있었던 씨족이나 부족공동체의 전통, 연주된 음악활동은 종합공연예술의 형태

영고나 동맹이 열린 시기를 보면 역시 농사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시형태의 종교의식 ⓑ그런 종교의식이 국중대회라는 말이 의미하듯 국가적인 행사였음을 주목

-한국 상고사회의 음악활동은 원시종교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마한의 농업사회 마을단위 풍습 → 삼한시대이후 → 조선 초 웅촌자벙 : 웅산사당 행사 →

오늘날 마을 안녕.번영을 비는 도당굿으로 전승

 

 

3]고대의 악기

 

 

1)고대의 관악기와 타악기 유물

-골제적: 함경북도 웅기군(선봉군)에서 1961년 발굴. 기원전 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 길이: 17.3cm 구명 개수: 7개 조류의 다리뼈를 잘라 만든 피리.

동물의 뼈로 만든 이 관악기가 체적의식에서 연주되었거나 점을 치는 도구(상징적 도구)였을 것으로 추정.

-철기 시대의 목제 타악기: 관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1997년 발굴. 나무 막대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한 쪽 면에 톱니가 새겨져 있는 나무 타악기.

 

 

2)삼한 시대의 현악기

-철기 시대의 현악기 유물: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1997년 발굴. 기원전 1세기, 기원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 목판의 길이:77.2cm 너비:28.2cm 한쪽 끝에는 현을 고정하는 작는 구멍 10개가 뚫려 있다. U자 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는 작은 사각형의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어 가야금의 양이두처럼 줄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팔현금 양이두: 대정 월평동 유적지애서 발굴. 5~6세기경의 것. 폭: 27.8cm 길이:9.6cm 두께:1.4cm 여덟 개의 홈이 뚫려 있는데 그 모양이나 규격이 일본 정창원에 전하는 신라금 유물의 양이두와 아주 비슷하다.

 

 

 

 

2.삼국과 가야시대의 음악

 

 

1]고구려 고분벽화의 음악 주제

-삼국 중 가장 일찍 인접 대륙과 상호 문화교률 함, 향악의 기반을 일찍 닦을 수 있었다. 거문고의 등장과 대륙약기의 수용, 해외음악활동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이후까지도 현세의 생이 계손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 거대한 고분을 만들고 그 무덤 안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 주제에는 음악과 춤, 놀이를 그린 수십 가지의 그림이 있다.

-황해도 안악 제 3호분과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무용총, 장천 1호분, 집안 오회분, 덕흥리 고분, 태성리 고분, 팔청리 고분, 약수리 고분.

 

1)주악도

-주악도의 분류

음악이 있는 잔치 장면: 연향악 신분이 놓은 인물이 의장을 거느리고 행렬하는 모습: 행렬악 공 던지기 칼 던지기 불 삼키기 들의 각종 기예에 맞춰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 잡희 무덤 천장에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연주 장면: 천상악

-안악 제 3호분의 주악도(고구려의 미천왕의 묘라는 학설이 주도적): 세 가지 유형의 주악도가 이 무덤의 전실. 회랑. 후실에 있다. 전실 남쪽 벽에 그려진 입고를 연주하는 사람, 소를 부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모습은 중국 고취계통인 한나라의 황문고취와 같고, 회랑의 벽화는 북. 소. 각. 요를 말 위에서 연주하는 모습의 그림으로 한나라의 단소요가 형태로 해석되며, 후실 벽화의 종적. 완함. 거문고 또는 쟁으로 보이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세 사람의 연주자와 춤추는 사람을 그림은 생존시 잔치음악의 연주형태로 보인다.

 

-고구려 안악 제 3호분 벽화의 가무도

악기는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길게 뉘어 놓고 연주하는 현악기, 퉁소처럼 생긴 세로로 부는 관악기, 완함처럼 생긴 악기.

기악연주가 세 명의 면주에 맞춰 한 사람이 춤을 추는 모습이다. 춤추는 이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춤추는 사람은 손뼉을 치는 관객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외국인 초청 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황해도 안악 제 3호분 벽화의 행렬도, 덕흥리 고분벽화: 대체로 타악기와 관악기의 편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야말로 고각, 혹은 고취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_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 ⓐ 중국의 고취계통인 한나라의 황문고취와 단소요가 형태의 음악연주가 사용됨 ⓑ 4세기 중엽에 이미 거문고 이 외의 북. 소. 각. 요. 종적. 완함 같은 여러 종류의 악기가 고구려 음악에 쓰임 ⓒ 거문고가 종적. 완함과 함께 춤의 반주음악에 사용된 사실이 확인

_황실에 전문음악기관이 설치된 것으로 짐작 : 그러나 자료가 없다

_4세기 중엽에 거문고 이외 북. 소. 각. 요 등의 악기들이 이미 고구려의 고취계통음악에 쓰임(관악기를 여러 개 묶어서 만든 소와 타악기의 일종인 요는 북아시아 대륙과의 음악문화의 역사적 상호교류를 통하여 수용된 고구려의 악기들로 보임)

 

 

2-1)고구려의 대륙악기의 수용

영토 확장으로 인한 중앙아시아와 서량과의 문화교류의 길을 트게 됨

-5C 이후의 고구려 음악에 대한기록

_「북사」「수서」「구당서」「신당서」의 음악지와 동이전에 전하는 기록

_통구.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악기그림으로 구체적 추적

_중국 문헌인「수서」의 동이전,「북서」의 고구려전의 고구려악기 : '고구려음악에 오현. 금. 쟁. 피리. 횡취. 소. 고가 있다'고 기록.

_고고학자료에 나타난 고구려의 악기들 :

집안 제 17 호분: 완함. 각. 금. 소. 황적. 요고 이상 여섯 가지

장천 1호분의 전실 남면 벽화 : 횡적. 오현. 금 이상 세 가지

_중국 문헌사료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고고학자료와 일치하는 악기 다섯 가지 :

금(거문고): 고구려 대표적 향악기(왕산악 이후 고구려 음악활동의 중추적 역할)

소: 세워서 부는 관악기의 일종(안악 제 3호분 벽화에서 보이며, 4 세기 이후 고구려 음악에서 중요하게 쓰인 관악기의 일종)

고(요고): 허리가 짤록한 작은 장고형의 타악기(장고의 원형으로 보이며 5~6세기 이후 고구려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임, 현재 일본에 저하는 고마가꾸의 대표적 타악기인 산노쯔즈미의 모양에서 확인)

횡취(횡적); 젓대류의 관악기의 일종(젓대처럼 옆으로 가로잡고 붐, 5~6세기경부터 고구려음악에서 중요한 관악기로 쓰인 것 같음, 일본에 전래된 고마가꾸의 고마부에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임)

오현(향비파); 5현으로 된 향비파(장천 1호분 벽화에서 처음으로 확인, 늦어도 5세기경 고구려에서 사용)(「수서」「북사」의 오현비파, 쟁, 피리 이상 세 악기는 5세기경의 서역 대륙과의 문화교류의 결과로 보임, 오현비파나 피리는 모두 서역계 악기들, 쟁은 고대중국의 대표적인 현악기의 하나)

 

★ 오현금 : 오현 + 금 또는 오현금

오현과 금으로 나누어서 보는 이유 : ⓐ고구려악기 중에서 대표적인 현악기인 거문고가 고구려의 악기에서 빠진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음 ⓑ오현은 목이 곧은 오현비파를 의미함이고, 오현비파를 오현이라고 약해서 기록한 실례는 있지만 오현금이란 표기는 역사서에 없다.

 

- 안악 제 3호분의 벽화에 보이는 긴 목을 지닌 비파의 일종인 완함은 4세기 중엽에 벌써 무용반주음악에 쓰였고, 오현비파는 5~6세기 경에 완함과 함께 고구려음악에 완전히 수용되어 중요한 현악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통일신라에서 오현비파가 향비파라는 이름으로 거문고와 함께 향악기의 하나로 취급된 사실에서 확인)

- 오현 : 5세기경에 사용, 소 : 4세기 이후, 요고 : 5~6세기 이후, 횡적 : 5~6세기경부터 사용, 완함 : 4세기 중엽 이후에 사용

- 이러한 악기들의 활발한 사용은

- 대규모의 악기편성이 가능해짐

- 새 악기들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궁중의 음악인들이 있어 왕실이나 귀족의 요구에 따른 음악연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궁중음악인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 관장하는 음악기관인 신라의 음성서와 같은 관제가 고구려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5세기경부터 서역문화와 교류가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2)고구려 음악의 대화 교류

 

- 7세기 초 당나라의 십부기의 하나로 파견된 고구려악공과 무용수에 관한「구당서」음악지의 기록 : 악곡들은 매우 화려한 복장, 열 다섯 가지의 악기로 편성된 합주단 구성, 당나라 무후 때까지 25곡이란 연주곡목으로 활동 →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당나라의 궁궐에 남아서 오래도록 연주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

 

: 무용수 - 금귀고리, 소매가 긴 누런 저고리에 붉고 누런 바진, 검은 가죽신, 무용수들 쌍쌍이 무용반주음악에 맞추어 춤을 춤(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에서 나타남) 고려무라는 이름으로 송나라 초기까지 전승됐음이 진양의「악서」에서 확인

: 악기 - 당나라 초기 십부기의 하나인 고려기에 쓰인 15종의 악기 중에 서량기의 악기와 같은 열 두 가지 : 탄쟁.추쟁.와공후.수공후.비파.생.소.소피리.패.요고.제고.담고(대피리.도피피리.의취적 세 가지만 약간 다를 뿐) → 고구려음악이 중국대륙의 서북지방에 자리한 서량음악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악기편성이 비슷한 서량기와 고려기가 따로 존재한 까닭은 7세기경 고구려가 서역악기를 자주적으로 수용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구려 음악에 알맞게 소화해 새로운 양상의 음악문화형성의 문화단계를 이룸

-고구려의 악무는 일본에도 전해졌다. 중국에 진출한 고구려 악무가 대륙적이라며 국제적인 편성이었던 데 비해 일본에 저한 고구려 악무는 소박한 풍속무였다. 황적, 군후, 막목으로 연주하여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울리는 형태였다.

- 수나라나 당나라의 궁궐에서 백제나 신라보다 훨씬 활발하고, 대규모적인 활동전개 :「수서」의 음악지에 전하는 기록 - 수나라 개황초에 궁궐 안에 설립한 칠부악의 하나로 취급, 대업 때 개정된 구부악의 하나로 취급(백제음악과 신라음악은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 였던 소륵이나 강국, 왜국 등과 함께 잡기의 하나로 구별), (고구려의 음악은 고려기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천축기, 사마르칸드의 강국기, 카시가르의 소륵기, 보카라의 안국기, 중국 하서지방의 서량기, 천산북로 중심지의 구자기, 중국 속악인 청상악, 진나라의 가면기인 문강기 이상 여덟 나라의 음악인들과 함께 6세기 말 수나라의 궁궐에서 연주함.)

- 민간 음악: 건국 초기의 음악활동을 보여주는「삼국지」의 동이전의 기록

: 구전심수로 전수된 고구려노래가 어떤 형태로 발전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음, :「고려사」악지에 전하는 몇 가지의 노래 - 고구려의 어느 특정 지방의 민요를 바탕 으로 예술화시킨 성악곡들로 보임. 예)내원성. 연양. 명주 같은 속악곡명

- 고구려음악을 5~6세기경에 그 기반을 굳히고 7세기 전후에 절정을 이루었다.

 

 

3)거문고의 탄생

-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인들은 그것을 연주할 줄 몰라 당시 제상이었던 왕산악이 악기의 본모를 그대로 두고 법제를 개량하여 새 악기를 만들어 거문고라 칭하였다.

- 거문고의 출현은 : 계량된 최초의 향악기, 기악의 발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 현악기가 다른 악기들과 함께 노래나 춤의 반주에서 사용된 것과, 독주악기로도 쓰였을 것으로 추측 → 후에 일본에 소개되어 군후 또는 백제금으로 알려지기도 함 →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중요한 향악기의 하나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문고가 중국의 칠현금에서 나왔다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칠현금이 고구려에 소개되기 이전 고구려에는 거문고와 비슷한 현악기가 있었고 구조가 비슷하기는 하나 세부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차이(거문고는 괘를 붙이고 가는 나무 막대를 쥐고 현을 쳐서 소리를 내고 칠현금은 괘를 붙이지 않고 휘라는 높낮이가 없는 둥근 자개를 박아 붙여 손가락으로 줄을 집거나 튕겨서 소리를 낸다.)가 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문과 무를 상징하는 무현과 문현이 있다는 것과 지식층 인사들이 교양으로 연주하면서 문인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는 점

이다.

- 왕. 귀족층의 음악 향수자 → 전문음악인의 배출

 

 

 

2]백제의 춤과 노래

 

 

1)백제의 풍속무와 기악무

-중국 남조와 밀접한 문화교류의 결과로 남조계통의 악기를 수용, 향토음악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향악을 형성 발전,

-같은 편성을 가진 고구려와 백제의 풍속무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백제사람 마마지는 중국의 오나라에서 기악을 배워 일본에 전해 주었다. 기악은 고대의 종교적 공연물로 주로 불교사원에서 공연되었는데 얼굴에 가면을 쓰고 악기 연주에 맞춰 일정한 이야기 구조가 있는 놀이를 펼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악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는 공연 예술은 없었지만 가면을 쓰고 벌이는 탈놀이의 전통은 매우 성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탈놀이와 일본의 기안무가 지니는 공통점을 연구한 학자들은 공견 방식이나 인물, 배역, 극의 구성 등이 '양주 별산대놀이'와 아주 비슷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백제는 일본에 지속적으로 음악인들을 파견. 이들은 춤, 기악 연주로 구성된 백제의 풍속 악무를 인본에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사람들이 고. 각. 공후. 쟁. 우. 지. 적. 등 일곱 개 악기를 연주했다고 동이전에 기록 되어 있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주류를 이루는 부드럽고 단아한 성격의 음악이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2-1)백제의 여덟 줄 현악기

-광주 신창동에서 기원전 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현악기의 일부일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발견, 1999년 2월 여덟 줄을 걸 수 있는 양이두가 학계에 소개되면서 백제 고대 현악기의 실체 연구 활발.

-백제 시대의 실제 악기 유물로는 최초 발굴된 양이두는 일본에서 소장한 신라금, 현제의 풍류가야금의 양이두와 모양이 같고 폭 27.8cm 길이9.6cm 두께 1.4cm 이며 현을 거는 8개의 구명이 뚫려있다. 이 유물은 역사 이래에 없었던 팔현금의 실체를 말해준다.

 

 

2-2) 6세기경 백제의 대표적 악기:(「수서」와「북사」의 기록에서 동일)

-공후. 쟁. 우. 지. 적 다섯 악기 : 남조음악을 대표하는 수나라의 구부기 가운데 청악 또는 청성악에서 쓰인 악기들과 일치→백제음악이 남조의 음악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임

-고. 각 : 남조음악과 상호관계를 맺기 이전의 백제음악을 설명할 수 있다. 북아시아계통의 악기이다. → 고구려 왕의 행차를 비롯한 행진음악 또는 싸움터에서 사용된 중요한 악기들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

-백제음악의 바탕위에 남조음악. 악기의 자주적 수용으로 6세기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 백제음악인들을 554년 일본에 파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구당서」음악지에 기록된 백제음악 연주단(당나라 이전부터 음악연주단을 파견한 것으로 보임): 악공과 무용수를 포함, 무용수들은 백제악공들의 무용음악반주에 맞추어 백제춤을 춤, 복식은 고구려무용수만큼 화려하지는 않음(자색의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치마, 장포관, 가죽신) 당나라 이후 송나라까지 전승됨.

_ 백제음악과 춤이 고구려의 것과 비교하여 외형, 내용면에서도 독특한 음악문화의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 보임(백제의 음악과 춤을 교육. 관장하는 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근거가 없다): 7세기 초 당나라 궁중에 남아 있던 백제악기 : 쟁. 적. 도피피리. 공후 이상 네 가지

- 쟁. 적. 공후 :「수서」의 동이전(6세기)에서 백제의 악기들임이 확인

- 관악기의 일종인 도피피리: 서역계의 악기로 백제음악이 고구려음악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닌 가 함

 

3)백제의 전통 노래

-주로 지명이나 산을 제목으로 삼은 노래들이 많이 있었다.

-「고려사」악지 : 백제속악이란 이름으로 전함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 등의 노래이름(특정 지방의 민요을 바탕으로 예술화시킨 성악곡들로 보임)은 당시 일반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담았던 민속악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

-백제는 마한의 상고사회 음악문화를 바탕으로하고 인접국가와의 상호교류를 통해 외래문화의 수용으로 한 민족의 음악문화를 새로운 방향에서 수립 => 수. 당나라와 일본까지 전래될 수 있게 기여함.

 

 

3]가야의 음악과 축제

 

 

1)가야금과 최초 연주곡의 탄생

-가야금은 6세기 중엽 가야국에서 탄생.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쟁을 모방하여 가야금을 만들고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을 위한 작품을 위촉했다.

-석대의 가야금은 제각이 규격이 좀 다르지만 대개 길이 150~160cm, 폭 30cm 가량의 오동나무 울림통 안에 안족 열두 개를 배열, 명주실 현을 건 현제의 풍류 가야금과 비슷.

-우륵은 가야금 줄 수와 같은 12 작품을 지었다.

-우륵은 551년 가야의 멸망이 코앞에 닥치다 제자와 함께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망명한다.

-가야고는 6세기 중반부터 신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후에 신라음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2) 악사 우륵의 사회적 지위와 그의 예술성

-「삼국사기」악지 : 진흥왕은 악사 우륵에게 대나마 법지(진골 17관등가운데 열 번째 관등).대나마 계고. 대사 만덕(열 두 번째 관등) 세 사람을 보내어 가야고 전통을 전승시키게 함 악사 우륵을 진흥왕이 후대했다는 점, 신라사회에서 관직을 지닌 지식인 세 사람에게 가야고의 전통을 전수시켰다는 점 => 6세기경 당시 음악인의 사회적 지위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

- 우륵?: 가야국에서 악공들의 지도적 역할을 한 위치의 사람으로 신라사회에서도 악사가 높은 신분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의 제자인 법지와 계고, 만덕 또한 높은 신분에 위치. 가야고를 위한 열두 곡을 작곡해 음악성에서 뛰어남, 노래와 춤을 가르쳐 뛰어난 예술성이 보임. 계고에게 가야고, 법지에게 노래, 만덕에게 춤을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가르침.

 

 

4]신라의 춤과 노래

 

 

1)춤추고 노래하는 신라의 토우들

-토우는 2~3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어떠한 형상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5~6세기 무렵부터라고 한다.

-목이 긴 항아리: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제 16지구 고분 제 30호분에서 출토. 항아리의 목 부분에는 거북이,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새, 오리 등의 동물과 아이를 가진 임산부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남녀 등이 다양하게 표현. 씨앗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거나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

-주상악의 토우들은 장대한 장송행렬을 위한 연주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장례식을 할 때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장례 행렬을 선도하는 풍속처럼 무덤 속에서 노래하는 토우를 넣어 죽은 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역할.

 

 

2)신라로 전승된 가야금 음악

-가야에서 탄생된 가야금은 신라로 전승

-진흥왕은 가야에서 망명한 음악인 우륵과 그 제가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함. 이때 우륵과 제자 이문은 진흥왕을 위해 새 음악을 작곡하여 왕에게 들려주었는데 왕이 큰 감동을 받아 이듬해 우륵 일행을 국원에 정착하게 함. 그리고 진흥왕은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는다.

 

 

 

3)다양한 신라의 노래

-신라는 ‘노래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전하는 노래가 많다.

-향가: 6세기 말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때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려 초기 까지 이어진 신라의 중요한 전통이다. 주술적 의미의 제신가나 여회를 할 때 부르는 노래, 개인의 서정을 표현한 노래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신라의 향토음악문화

-지방 사람들이 즐겨하던 향토색 짙은 민속악이었으며, 시라건국 초기부터 지방마다 특색 있게 발전시켰을 향토음악문화

-유리왕 때의 화악: 팔원 한가위 날 김쌈을 하며, 여자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는 회소곡으로 밝혀짐.

-신열악: 지방을 나타내는 말의 음악으로 추측

-눌지왕 때의 우식악: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내물왕의 아들 미사흠이 박제상의 공로로 무사히 귀국한 것을 노래한 우식곡

-법흥왕 때 만든 미지악: 경북 의성군 단밀 지방의 음악

 

 

4)신라의 나라굿

-팔관회: 전래의 다양한 토속적인 노래와 춤, 놀이와 향가풍의 노래, 불교적인 음악, 신라의 궁중음악 등이 고르게 공연되었다.

 

 

5)신라의 국립음악기관

-음성서: 진덕왕 5년에 음성서에 관직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약 7세기경에 제도화 된 것으로 추정. 제사, 예연, 의례 등 때 연주와 가무를 담당하는 전문적 기관. 최초의 국립음악원.

구성 - 장(2명-11~6등관 사이) -> 명칭변경: 신문왕 : 경 -> 경덕왕 : 사악 -> 혜공왕: 경대사(2명- 13~11관등사이) -> 경덕왕 : 주부 -> 후에 대사로 복원사(4명- 17~13관등 사이)

_신라사회에서 차지하는 음성서 관리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음악행정과 : 음악교육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위해 궁중에 설립 기악. 성악. 무용을 궁중행사 때 마다 전문적으로 연주했을 악공의 연주와 교육을 다루었을 것이다.

_악기연주자중 가야고를 연주하는 악공을 금척(琴尺), 관악기 연주자하는 악공을 가척(茄尺), 춤추는 악공을 무척(舞尺), 노래 부른 악공을 가척(歌尺)이라고 불러 연주자들의 맡은 구실을 구별, 악공들의 연주곡목 또는 연주기능에 따라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구분 지움

 

:- 삼국은 외래음악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하여 고유의 향토적 음악문화를 바탕으로 나라마다 서로 구별되는 음악문화를 형성, 그 사실이 삼국의 음악문화가 소개된 중국의 고려기 .백제기. 신라기 라는 명칭이나, 일본의 고마가꾸, 구다라가꾸. 시라기가꾸 라는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중앙집권적 나라의 틀을 이룬 후 건국 이전부터 전승된 향토색이 강한 음악문화를 바탕으로 외래 음악문화의 수용을 자주적으로 소화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통일신라 시대의 음악

 

1]통일신라에 만난 삼국의 악가무

 

1)통일신라 시대 음악의 전형

-통일신라 시대의 향악이란 고구려, 백제, 신사 음악과 외국에서 수용되어 자국에 뿌리내린 음악을 포괄하는 개념. 여러 악기 중에서 몇 가지 악기를 간추려 삼현, 삼죽, 박판, 대고의 현성을 갖추고 춤을 곁들여 통일신라 시대 향악의 전형을 완성.

 

2)옥보고와 거문고의 전승

-옥보고는 50년 동안 거문고에 매진하여 30곡을 작곡하는데 이 작품들이 신라 거문고 음악의 뼈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음악은 제자 속명득 그리고 또 그 다음의 제자 귀금에게만 전해졌다. 하지만 귀금 또한 지리산에 은거하여 거문고의 전통이 끊어질 것은 염려한 왕이 윤흥을 파견하였고 윤흥은 안장과 청장이라는 두 소년을 귀금에게 보내 거문고를 배워오게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교습은 해 주지만 비밀리에 전해온 내용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윤흥은 직접 아내와 함께 귀금을 찾아가 예를 갖추어 정을 한 후에야 비장의 거문고 작품을 전해주었다. 윤흥은 안장에게 전하였고 안장은 자신의 아들인 극종에게 전했다. 그리고 극종은 새로운 거문고 곡 7작품을 지었다.

 

3)대금의 탄생과 만파식적 이야기

-만파식적: 신문왕 시기 때 동해용이 갖다 바친 대나무로 잣대를 만들어 불었더니 온 나라가 태평하게 되어 이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횡적에서 대금이라는 고유 이름을 가지고 통일신라의 앙기로 재탄생되는 과정이 만파식적 일화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만파식적의 이야기는 대금의 탄생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만 가지 파란(만파)이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여러 분제들 이를테면 정치적 소요나 민심의 동요 등을 뜻하고 이러한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신라는 음악을 통한 평화 정책을 펼침으로서 큰 효과를 거둔 것이 만파식적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있고 이 설화가 결국 패ㅇ망국인 고구려와 백체의 음악을 활용하여 삼국 화합의 서곡을 울리게 된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견해가 있다.

 

4)통일신라 시대의 노래

-향가: 개인의 서정을 문학적인 형식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서민들의 생활 노래와는 차이가 있다. 고려가요와 조선 시대의 가곡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옛 노래의 전통을 생각해보면 통일 신라 시대의 향가는 삼현이나 삼죽 같은 연주에 맞춰 부른 예술적 노래였을 것으로 추측.

-향가의 성격에 따른 구분

주술적인 성격의 향가: 도솔가 반복되는 어구가 있는 차사사뇌계 향가: 희소곡, 사내악, 돌아악 민요계 향가: 헌화가, 양산가, 해가 10구체 향가: 사뇌가

 

5)통일신라 시대의 연회

-최치원 ‘향악잡영오수’:<금환>, <원전>, <대면>, <속독>, <산예>

최치원의 시가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될 수 없었을 통일신라 시대의 재미있는 놀이 다섯 가지, 그것을 아울러 향악이라 부르는 것은 통일신라 음악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당악의 수용

-통일신라에서 당악을 연주했다는 결정적인 기록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통일신라 시대에 연주된 여러 악곡이 중국식 악조로 되어 있다는 점, 문무왕 4년(664)에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부성(공주)에 보내어 당악을 배워오게 했다 는 기록이 전부이다.

 

3]불교 음악의 전래

 

1)불교 의례 음악, 범패의 수용

-불교 음악이란 불교에서 부처에게 예를 갖춰 공양할 때 바치는 노래와 연주, 춤을 말한다.

노래와 연주, 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노래인데 이것을 범패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범성이라고도 하며 범패승이 부르는 노래라 하여 어산 이라고도 부른다.

-인도에서 전래되었던 범패는 중간 과저에서 중국에서 새로 창작되기도 하여 우리나라에는 인도식 범패와 중국식 범패 두 가지 타입의 범패가 수용되었다.

 

2)진감선사와 범패의 전승

-경남 하동군 쌍계사의 ‘지감선사대공탑비’: 최치원이 글을 짓고 직접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

내용은 진감선사가 804년에 당으로 들어가 불도를 닦고 27년 만인 830년에 구국하여 하동 옥천사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다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범패전승에 진감선사의 공이 매우 컸음을 알려 준다.

-옌닌의 ‘압당구법순례기행기’: 일본인 승려의 기록으로 838년 견당사로 입당하여 법화원에서 3년 가까이 지냈는데 이 때 경험한 일을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하며 순례한 여행기’라는 뜻으로 남긴 글.

적산원의 불교 의례 이야기가 아주 상세기 담겨있다.

-적산원강격의신에는 세 가지 종류의 불교 음악인 칭탄불명, 운하어차경, 처세계여허공 등의 세 가지 범패가 있고 세 가지의 부르는 방법이 있었는데 신라풍의 향풍, 옛날풍의 고풍, 중국에서 성행하던 불교음악의 당풍 이 있다.

 

3)불교 미술품에 표현된 주악상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 부도, 사리기, 동종 같은 유물에는 삼국 시대의 음악사에 자주 등장하던 공후, 생황, 피리, 요고, 비파, 금, 동발, 퉁소, 횡적 등의 악기가 다양하게 새겨져 있다.

-불교 미술품에 표현된 주악 내용은 음악과 춤을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의 일종으로 표현된 것이다.

 

 

4.고려시대의 음악

 

1]궁중의례

 

1)오례

-길례: 국가의 제사(12세기 이후에는 아악을 주로 연주)

-흉례: 본국 및 이웃나라의 국상이나 국장에 관한 장례

-군례: 군대의 출정 및 훈련에 관한 예

-빈례: 국빈을 맞이하고 보내는 의례(향악과 당악을 연주, 각종 놀이도 빠지지 않았다)

-가례: 왕실의 즉위, 책봉, 국혼과 국왕의 행차와 사연 등에 관한 의례

†이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거의 비슷하게 이어졌다.

††놀이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대악서와 관현방이라는 국가 음악원을 두어 당악과 향악을 담당하는 전문 음악인을 양성, 이 밖에도 아악을 전담하는 아악서, 기예를 전담하는 산대색 등을 운영. 고려 시대에 이르러 구가 의례가 체계화 되었다.

2]새로운 가무 형식의 당악 정재

 

1)사

-미전사와 미후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전사와 미후사에 각각 4구로 구성되어 있고 미전사의 2~4구는 미후사의 2~4구와 음이 같으며 환입이라고 부르며 미후사의 1구는 환두라 부른다.

-여기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사는 기악 반주에 맞춰 부르기도 하고 가무희의 일종인 당악 정재를 출 때 중요하게 불렸다. 또한 고려의 문인들도 사의 형식에 맞춰 새로운 노랫말을 짓는 등 사악은 고려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2)송의 노래 사악의 수용

-사악은 대개 만과 령이라는 두 가지의 형식으로 되어있고 만은 대개 전단과 후단에 59자 이상의 문자가 들어가고 음악적으로는 16박이 1구가 되고 령은 만보다 노래하는 글자 수가 적으며 8박이 1구를 이루어 만보다 짧다. 령의 1구에는 대개 7자 이내의 가사를 노래하며 박이 들어가는 위치는 규칙적이다.

-당악 정재와 함께 혹은 독립적인 악곡으로 연주되던 사악이 비단 궁중뿐만 아니라 문인들의 풍류방에 널리 퍼졌었다.

-가무희에 고정적으로 편입된 것 외에 독립된 성악곡도 있다.

 

3)당악 정재의 구성

-일종의 가무희 이다.

-송에게 유행한 대곡의 영향을 받아 규모가 아주 커졌다.

-고려시대의 당악 정재에는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등이 있다.

-궁중 정재는 연회뿐만 아니라 팔관회나 연등회, 나례 등에서도 자주 연행되었다.

▷헌선도

-상징적인 장치와 도구들로 꾸며진다.

//인인장: 연꽃 모양을 봉의 끝에 장식하였다. 태양의 부활과 영생을 뜻한다.

//정절: 일곱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에 붉은 색, 초록색, 검은색 등을 칠한다. 고난 끝에 얻는 태평성대가 온다는 뜻을 상징한다.

//용선: 용무늬를 그려 넣은 부채. 왕을 위한 의물이다.

//봉선: 봉황을 그려 넣은 부채. 용과 짝을 이루는 봉황 역시 군왕을 상징한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나타낸다.

//작선, 미선: 새의 꼬리를 그린 부채. 작선은 꼬리가 짧은 주작, 미선은 꼬리가 아주 긴 새. 봉황이 날면 뭍새들이 따른다는 옛 고사를 작선과 미선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

▷그 외 네 가지 당악 정재

/1/포구락: 편을 갈라 구멍에 공을 던져 넣기를 하는 춤놀이.

/2/수연장: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을 표현한 당악 정재. 열여섯 무원들이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3/오양선: 군왕의 장수를 소망하는 내용으로 양을 탄 다섯 신선의 고사를 춤으로 재현한 것이다.

/4/연화대: 본래 석지에서 나온 춤이라하여 석지무라고 하였으며 서역의 석지에서 당나라 현종 때 중국에 전래되어 송 대에도 유행을 하다 춤의 일부가 고려에 전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3]더욱 다양해진 향악의 편성

-통일신라의 향악 전통이 이어졌다.

-가야금, 거문고, 비파, 대금, 중금, 소금, 해금, 피리, 박판, 대고, 장구를 기본으로 하는 향악 편성이 완성되었다.

 

1)해금의 유입

-원나라에서 들어온 호족 문화가 유행할 무렵 함께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론 송에서 보내온 쌍현이 바로 해금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해석도 있다.

 

2)향악 노래들

-통일신라의 향가에 바탕을 두었다.

-지방의 이름이나 효도, 부부의 의리 강조 또는 지도자들의 경RP해야 할 내용을 담거나 국방의 중요성을 담은 노래들이 많았다.

▷정과정

-향가의 전통이 서서히 쇠퇴해 갈 무렵에 탄생된 노래.

-만, 중, 삭 이라는 빠르기에 따른 세틀 형식을 갖추고 진작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었다.

-고려의 노래가 조선의 노래로 이어지는 핵심 고리를 지닌 노래이다.

▷풍입송

-임금의 선정과 태평성대를 기리면서 장수하실 것은 축원하는 내용이다.

▷야심사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풍입송과 야심사는 궁중 연회에서 고정으로 불렀기 때문인지 조선 시대까지도 꾸준히 전승되었다.

3)고려 시대의 향악 정재

-무고: 가장 활발하게 전승 되었다. 검은 장삼을 입은 무용수들이 연주단화 여기들을 인도하여 춤을 시작. 춤이 시작하면 여기들이 향악 반주에 맞추어 정읍사를 한다. 노래가 끝나면 무희들은 두 명씩 나와 북을 치면서 춤을 추다가 모든 순서가 끝나면 다 같이 절을 하고 퇴장한다.

-동동: 춤을 추며 동동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동동이라는 제복을 갖게 된 향악 정재이다. 다른 이름으로 아박무라고도 불린다.

-무애: 원효가 불교의 민중 포교를 위해 불렀다고 하는 불교 선교 노래 제목이다. 아무 꺼릴 것이 없는 사람은 한 가지 도로써 생사를 벗어난다. 라는 뜻. 통일신라 시대의 무애가는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한 불교 노래였으나 고려 시대에 들어 궁중가무의 형식으로 변화 되었다.

 

4)문인, 귀족 사회의 풍류 문화

-선비들의 여가를 중심으로 전개.

-시와 음악이 있는 연회는 궁궐뿐만 아니라 선비나 귀족들 사이에서도 성행했다.

-문인들은 음악을 통해 성정을 기르고 세상 어떤 것보다 깊은 멋이 있는 음악을 좋아했다. 문인과 귀족사회를 풍미한 음악 문화는 향악과 당악을 두루 수용하면서 일상에 녹아 들었다.

-한림별곡이나 자하동을 비롯한 여러 시문에 표현된 풍류 문화는 다른 시대에 비해 훨씬 화려한 쪽으로 기울었음을 보여준다.

 

4]아악의 전래와 전승

*아악?: 중국 고대 음악의 한 갈래. 제사 등의 국가 의례 때 사용.

 

1)아악의 전래

-유교식 제례의 예에 어울리는 음악 연주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중 고려 예종 11년(1116) 6월에 송에서 보내온 아악을 수용.

-대성아악이라 불렸으며 송의 휘종 황제가 제정한 아악의 이름이었다.

 

2)아악의 전승

-아악이 새로이 수용된 후 왕실에서는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태묘, 하늘에게 제사지내는 원구,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직,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문선왕묘에서 아악을 연주하였다.

-아악은 감상의 목적만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과 국가의 안녕을 드러내 주는 일종의 상징으로 작용하였다.

*용어정리!

-팔음: 여덟 가지의 악기 주재료로 금속, 석(돌), 죽(대나무), 포(바가지), 토(흙), 사(실), 혁(가죽), 목(나무)을 말한다.

-등가: 궁정의 댓돌 위에 배치하는 악대

-헌가: 궁정의 댓돌 아래 배치하는 악대

-일무: 종묘나 문묘 등 제향 때 줄을 지어서 추는 춤. 일무에는 문무와 무무가 있고 지위에 따라 팔일무, 육일무, 사일무, 이일무의 네 종류가 있다.

-문무: 종묘, 문묘 등 제향 때 추는 춤. 연신, 전폐, 초헌에 춘다.

-무무: 왼손에는 간, 오른손에는 척을 가각 들고 문묘 등 제향 때 추는 춤.

 

5]고려 시대의 국가 축제

 

1)팔관회

-한겨울인 음력 10월과 11월에 고려의 수도인 서경과 중경에서 각각 열렸다.

-추수감사제적인 성격의 축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본 행사가 있는 날을 대회일 그리고 전날을 소회일이라 칭하였다.

-후기로 가면서 행사 규모로 인한 민폐와 낭비가 지적되고 고려 후기에 이르면 니들 나라굿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 점차 저조해 지다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춘다.

 

2)연등회

-팔관회처럼 소회일과 본회일로 구분되어 진행되었다.

-고려 초기에 정월 보름이었다가 현종(1010) 때에 이르러 2월 보름으로 바뀌고 고려 말에는 4월 초파일로 또 한 번 변화하면서 지속되었다.

-고려 시대의 음악 문화 전승에 중요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6]연희의 전통과 나례

-나례: 귀신이나 흉 액을 쫓아 버리는 의식. 연극처럼 꾸며 거행. 춘하추동 계절에 맞게 네 번 거행. 고려 이후 조선까지 매년 한 번씩 송구영신의 의례로 치러졌다.

-후대로 올수록 제의적인 성격 보다는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로 더 비중이 높아져 나의 혹은 나예로 불리기도 했다.

-나례의 핵심 공연물이던 처용무는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7]연주 모습이 표현된 불화

 

1)고려 불화 속 세련되 악기와 연주 모습

-인송사의 <관경십육변상도>: 장구, 생황, 피리, 박, 비파를 들고 있는 다섯 연주자가 그려있다.

-지은원 소장의 그림: 장구, 당비파, 생황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장구는 고려청자로 빚은 고려 시대 장구 유물과 아주 비슷하다.

†당악기와 향악기 목록에서 보았던 악기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중요한 그림들 이다.

 

2)거창 둔마리 고분벽화

-충충하게 생긴 선녀들이 관악기와 장구 등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악기와 연주 모습이 표현된 것이라 해석된다.

 

 

5.조선 시대의 음악

 

1]조선 시대의 국가 의례

 

1)건국 초기 국가 의례 음악 상황

-건국 초기에는 하늘의 명을 받은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 공덕을 악장으로 지어 기리고, 이것을 음악과 춤으로 나타낸다. 는 예에 따라 여러 가지 노래를 짓고 이것을 각종 국가 공식 행사에서 춤을 곁들여 연주 한다.

-<수보록>, <몽금척>, <근천정>, <수명명>, <하황은>, <문명지곡>, <무열지곡>

-예와 악의 조화로운 전승을 위해 음악전문기관을 정비하고 연주 제도를 마련하는 등 도력을 기울였다.

 

2)세종조의 성공적인 음악 사업

-음악을 잘 알았던 박연을 등용하여 한국 음악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음악 정책을 편다.

-박연은 조선의 제례악을 기록한 악서의 내용이 고전인 주례와 맞지 않고 l행되고 있는 제례악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음을 확인, 제례의 용악과 관련된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개선안을 내놓는다.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

-독자적으로 황종의 율관을 제정하였다.

-편경의 재료가 발견되고 편종과 편경에 음고를 제시해 줄 율관이 제정되자 아악기의 제작 사업이 활발히 추진된다. 아악을 포함한 국가 의례 음악의 자율적 전승 기반이 형성된다.

-악가 제작 전문기관을 설치하고 국가의 각종 의례에서 사용할 악기를 자유롭게 만들어서 사용했다.

 

3)신악의 창제와 전승

-신악: 향악, 아악, 당악 등의 요소를 조화시킨 새로운 음악

-세종이 작곡한 신악은 전래의 향악과 고취악을 참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향당 합주, 혹은 향당 합주, 혹은 향악 합주 및 정재로 표현되었다.

향당 합주에 맞춘 <보태평>, <정대업>, <봉래의>, <여민락>, 향악 연주에 맞춘 <치화평>, <취풍형>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신악의 내용은 모두 1447년에 정간보로 기보되어 [세종실록]의 ⌜악보⌟에 실렸다.

-세조 10년에는 종묘 제례에 향악을 쓰고자 했던 세종의 뜻을 이어 신악 중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함으로써 영구히 전승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4)정간보의 찬안과 음악의 기록

-정간보: 유량악보의 한가지로 정간보는 일자일음 식으로 된 아악과 달리 매 음의 길이가 불규칙한 일자 다음식의 향악을 기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국가의 전란 등으로 행여 그 연주 전통이 단절도리지도 모를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 중요한 성과이다.

 

5)세조조의 주요 음악 사업

-왕조 선현들을 위한 제사에서 속악을 연주하기로 결정한다.(보태평과, 정대업을 가리킨다.)

1464년 종묘 제례악에서 처음으로 <보태평>과 <정대업>이 연주된다.

-정간보를 수정, 보완하여 효율적으로 발전시킨다.

†차이점: 세종은 율명으로 음높이를 표시하고 매 칸의 정간으로 길이를 표시할 수 있고 한 줄에 모두 서른 두 개의 칸을 그은 ‘36정간보’ 이고, 세조는 복잡한 한자로 쓰인 율명을 대신하여 오음을 “一, 二, 三, 四, 五”의 숫자로 표시하는 방식은 선택 그리고 악보 한 줄에 서른두 개의 정단 대신 열여섯 개의 정간을 그려 넣은 다음, 일종의 마디에 해당하는 대강을 그어 여섯 개로 나누었다(16정간 6대강 오약음보).

-원구제사를 부활시켰다.

 

6)성종조의 ⌜악학궤범⌟ 편찬

-성종조는 국립음악기관인 ‘장악원’의 새 청사를 건립하고 국가 음악의 새로 세우는 등 안정적인 음악 문화를 구가한다.

-음악에 밝은 성현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고 성현을 중심으로 ⌜악학궤범⌟ 편찬을 추진하였고 1493년 국가 의례 음악에 관한 실용적인 정보를 집대성한 악서인 ⌜악학궤범⌟이 탄생한다.

 

2]궁중의 여러 행사와 음악

 

1)제례 아악

-제례에 연주된 아악은 치밀한 악론 연구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이론 체계를 갖춘 동시에 실제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연주될 수 있는 실용적인 연주 방식을 갖추었다.

 

2)여려 가지 연향의 가무와 향악, 당악

-연향: 국가와 왕실에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명절과 각종 기념일에 격식을 갖추어 성대하게 벌이는 잔치.

-연향의 목적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며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화목함을 나누는 ‘화합’에 있었다. 친목을 다지는 이 잔치를 여민동락의 ‘예연’ 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음악 한 곡, 춤 한 가지라도 예에 맞게 거행될 수 있도록 규범을 상세히 정해 놓고 있었다.

 

3]선비들의 풍류 문화와 정악

-조선 시대에는 어느 때보다도 선비들의 풍류 문화가 융성하여 독자적인 풍류 문화의 음악적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1)시조와 가사

-시조: 가곡과 같이 시조의 시를 노래하지만 가곡에 비해 노래의 형식이나 창법이 단순하고 가곡은 반드시 줄풍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데 비해 시조는 반주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쉽게 부를 수 있어 좀 더 서민적이다.

-시조는 원형인 평시조 외에 사설시조, 지름시조, 각시조, 엮음시조, 수잡가, 중허리시조 등이 파생되어 다양하게 분화 되었다.

-가사: 가사문학의 소산인 문장을 가곡이나 시조와 비슷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음악이다.

 

2)고악보의 발달

-합자보: 성종 대에 거문고를 좋아했던 성현이 가존 악보에 거문고의 연주법을 첨가해서 만들었다.

-거문고 외에도 가야금, 양금, 칠현금 등을 위한 고악보도 적지 않다.

-실제 연주한 음악의 기록이라는 점과 조선 시대 음악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풍류방의 음악 명인들

-풍류 음악의 수요가 중인층으로 확대되자 전문 가객과 전문 금객이 출현한다. 이들은 노래보임(가단)을 조직하여 교습과 공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와 같이 풍류방 음악 명인들의 활약은 풍류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4]서민들의 음악 문화

-풍년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갖가지 농사굿의 전통, 그리고 공동체 사람들끼리 화목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인 마을굿과 마을 축제의 현장은 조선조에도 여전했다.

-마을굿 전통 외에 서민들의 일상에는 생업과 관련된 갖가지 민속악이 민속놀이와 함께 전승되었다.

 

1)서민 문화에서 탄생한 민요와 풍물

-민요: 민중들의 생활사나 세시 풍속 놀이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승된 노래,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구전 노래이기도 하다.

-풍물: 타악기를 치면서 춤과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거나 마을굿 등의 의식과 일을 할 때 연주하는 음악. 지역권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2)잡가

-잡가: 민요식으로 부르는 긴 노래.

-잡가는 일반적으로 전승 지역의 음악적 특징에 따라 서도 잡가, 경기 잡가, 남도 잡가로 구분한다.

 

3)민속 예술 음악의 탄생

-판소리: 노래하는 사람이 북을 치는 고수 한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서 긴 이야기를 노래하는 성악곡.

=설화나 소설을 소리로 부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 무당들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와 축원, 놀이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의견, 광대들의 음악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의견들 등이 있다.

=종교적, 정치적, 제도적 기능과 상관없고 가사의 내용이나 표제적인 성격에도 제약받지 않는 순수 민속 예술 음악으로 탄생된 현대적 의미의 예술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산조: 느린 속도에서 빠른 속도로 점차 빨라지는 ‘만, 중, 삭 연속 연주 형식’으로 한소리의 장단에 악조와 시나위나 봉장취의 가락을 얹어 연주하는 즉흥적인 기악 독주곡.

=산조는 19세기 말엽에 전라남도 영암 사람 김창조가 가야금 산조를 처음 연주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창조는 음악의 형식을 가장 완성도 높게 정리해서 오늘날 전승되는 산조의 구조를 확고하게 정착시킨 인물이다.

=산조는 전체적으로 장단의 틀 안세서 조와 가락의 음악적 논리로 진해되는 절대적인 음악성을 추구한다.

 

 

 

 

 

 

 

 

6. 20세기의 음악

 

1]궁중 음악과 정악의 전승

 

1)궁중 음악 전승의 새로운 전환

-국가의 상징으로 연행되던 많은 악무가 완조의 몰락과 함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었다.

-국가음악기관의 직제 개편에 따라 기관의 명칭이 마뀌고 소속 인원도 대폭 축소되어 이왕직 소속의 아악부라는 작은 기구로 남게 되었다.

 

2)이왕직아악부의 설립과 활동

-이왕직에는 음악기관인 아악대 또는 아악부를 두었는데 이 음악기관이 곧 이왕직아악대 또는 이왕직아악부 이다.

-조선 왕실과 관련된 의전과 연향, 제례 등에서 악무를 담당하고 음악인을 양성하였다.

-이왕직아악부는 외부 전문가들과 활발히 교류함으로써 민족음악의 맥을 잇는 데 적극 적이었다.

 

3)정악의 전승

-20세기 초반 선비들의 풍류 전통은 정가 또는 음률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20세기 초반의 정악은 조선 시대의 가객, 금각의 맥을 이은 남성 음악가들과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의 음악인, 그리고 여성 음악가인 기생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4)이왕직아악부로 수용된 정악 교육

-정악은 이왕직아악부로 수용되고 전문 음악인들에 의해 전수되기 시작한다.

-선비들의 풍류 중에서도 가곡의 전승이 ‘폐지’될 상황이이 되자 이왕직 아악부에서는 하규일 외에 임기준 등을 초청하여 가곡과 가사 교육에 힘썼다.

 

2]민속악의 전승과 새로운 도전

-서구 사조의 유입으로 심각하게 위축된다. 또한 굿과 불교 의례에 따르는 가무는 미신으로 몰리거나 법적으로 금지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일상의 필요에 의해 구전되어 온 민속 생활 음악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1)판소리의 전승과 오명창

-20세기의 판소리는 과거의 판소리가 전승되는 한편, 새로운 시대를 맞아 창극의 양식을 탄생시킨다.

-명창들은 음반 취입과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사랑받게 되는 데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이 다섯 명창을 판소리 오명창이라 부른다.

 

2)창극의 발전

-소리꾼의 수가 증가하고 서양식의 원형 극장이 생기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분창 형태의 한소리 공연은 점차 음악극 형태로 발전하며 1930년대에는 본격적인 음악극으로서 틀을 갖추게 된다.

 

3)산조의 발전과 전승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여러 악기의 산조가 탄생되면서 산조의 시대를 열어간다

-여러 음악가들이 산조를 연주하여 가락을 창작하고 유파를 형성하면서 전체 연주 시간이 20여 분을 넘지 않았던 것이 40여 분에서 70여 분에 이르는 긴 산조로 발전하였다.

 

4)잡가와 민요의 전승

-잡가와 미요는 가각 지역적 음악성을 띠고 있어 과거에는 특정 지역에서 주로 전승되었지만 20세기에 변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전문 음악인들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5)현대로 전승된 풍물굿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풍물굿은 미신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외래문화의 범람과 산업 구조의 변화는 풀물의 전승 기반을 더욱 척박하게 하였다.

-명맥만을 유지해 오던 몇몇 지역의 풍물은 중요무형문화재 및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해지고 있다.

-과거 전문 연희패들이 전승해 온 판굿과 일부 무대화된 농악이 판소리나 민요 등의 민속 예술과 함께 공연 문화의 일부로 수용되면서 전승되었다.

-1978년 남사당패의 젊은 후예들이 사물놀이라 는 새로운 이름의 풍물 공연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풍물 전승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고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Samulnorian’ 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게도 하였다.

 

 

 

 

 

 

 

[출처] <퍼온 글> 한국음악사 정리 |작성자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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