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중도란 느슨한 인과 관계를 긍정하는 지혜
모든 것이 공하다고 보면
대상에 대한 집착 끊어져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 버려야 중도
성인, 인과 어둡지 않을뿐
초월해서 존재하지는 않아
백장(百丈) 화상이 설법하려고 할 때, 항상 대중들과 함께 설법을 듣고 있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설법이 끝나서 대중들이 모두 물러가면, 노인도 물러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은 설법이 끝나도 물러가지 않았다. 마침내 백장 화상이 물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迦葉) 부처가 계실 때 저는 이 산에 주지로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학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가 오백 번이나 여우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화상께서 제 대신 깨달음의 한 마디 말을 하셔서 여우 몸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십시오.” 마침내 노인이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라고 묻자, 백장 화상은 대답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 백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크게 깨달으며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 몸을 벗어서 그것을 산 뒤에 두었습니다. 화상께서 죽은 승려의 예로 저를 장사지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장 화상은 유나(維那)에게 나무판을 두들겨 스님들에게 알렸다. “공양을 마친 후 죽은 승려의 장례가 있다.” 그러자 스님들은 서로 마주보며 쑥덕였다. “승님들이 모두 편안하고 열반당에도 병든 사람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리시는 것인지?” 공양을 마친 후 백장 화상은 스님들을 이끌고 산 뒤쪽 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끌어내어 화장(火葬)을 시행했다.
백장 화상은 저녁이 되어 법당에 올라가 앞서 있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황벽(黃檗) 스님이 바로 물었다. “고인이 깨달음의 한 마디 말을 잘못해서 오백 번이나 여우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매번 하나하나 틀리지 않고 말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백장 화상은 말했다. “가까이 앞으로 와라. 네게 알려주겠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황벽 스님은 스승 백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백장 화상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달마의 수염이 붉다고는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었구나!”
무문관 2칙 / 백장야호(百丈野狐)
▲그림=김승연 화백
1. 용수, 불교를 이론적으로 완성
불교는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실존적인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것, 그래서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는 이론적으로 이미 2,000 여 년 전 완전히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의 탁월한 사상가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 250?)입니다. ‘나가(naga)’가 용(龍)이라는 뜻을, 그리고 ‘아가르주나(agarjuna)’라는 말이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흔히 용수(龍樹)라고 부르기도 하는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나가르주나는 흔히 제2의 싯다르타이자 동시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가르주나는 튼튼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여 싯다르타가 열었던 불교 사상을 반석에 올려놓은 중요한 이론가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대승불교 전통은 이론적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나가르주나가 만들어 놓은 굳건한 대지 위에 다채롭게 피어난 꽃들이라고 할 수 있 수 있습니다. 동일한 장미 씨앗도 어느 곳에 자라는지에 따라 상이한 모습의 장미로 피어나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대승불교 종파들도 이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차이를 보였던 것입니다. 간단히 후대의 다양한 종파들은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 이후 발전한 모든 대승불교 전통이 공유하고 있던 그의 핵심 사상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나가르주나의 사상은 ‘공(空, Śūnyatā)’이라는 한 글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의 주저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나가르주나의 말대로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모든 것은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조건[緣]이 만나서 생긴 것이고, 당연히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이 헤어지면 모든 것은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겨울이 되면 유리창에는 성에꽃이 활짝 핍니다. 방 안의 습기, 그리고 당시의 온도가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방 내부를 떠돌던 습기가 술에 취한 아저씨의 탁한 호흡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연의 아픔 때문에 흘린 아가씨의 서러운 눈물과 흐느낌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온도라고 해도 성에꽃의 모양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습기라고 해도 온도가 달라지면 성에꽃의 모양은 달라지겠지요.
2. 상견과 단견 함께 버려야 중도
지금 유리창 표면에 기묘한 모양으로 활짝 피어 있는 성에꽃은 특정한 습기와 특정한 온도가 만나서 발생한 것입니다. 당연히 성에꽃 자체에는 불변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지요. 특정한 습기나 특정한 온도가 다르게 변한다면, 지금 보고 있는 성에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저 인연이 맞아서, 혹은 인연이 서로 마주쳐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인연이 다해서, 혹은 인연이 서로 헤어져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생겼다고 기뻐하거나 무엇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라는 개념으로 나가르주나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혹은 ‘여여(如如)하게’ 보는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싯다르타처럼 나가르주나의 가르침도 ‘있는 그대로’, 혹은 ‘여여(如如)’하게 사태를 보는 데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로 표현되는 불교의 강력한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사태를 있는 그대가 아니라 무엇인가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색안경으로 사태를 보는 생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견(常見, śāśvata-ḍṛṣti)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 ucchesadarṣana)입니다. 상견에 따르면 이미 습기, 온도, 유리창 표면의 물성에는 성에꽃이란 결과가 이미 씨앗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단견에 따르면 성에꽃은 습기, 온도, 유리창 표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상견은 아주 강한 절대적인 인과론이고, 단견은 인과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견도 버리고 단견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싯다르타가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를 이야기했고,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주저를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싯다르타나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 아닐까요.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 사이의 사랑이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부부가 아무리 사랑을 나누어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부가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3. 인과에 대한 집착 또한 병폐
‘무문관’의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제자에게 인과를 잘못 이야기해서 여우가 되어버린 어떤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을 때, 당시 그 스님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했던 겁니다. 그 벌로 스님은 오백 번이나 여우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여우가 되어버린 스님의 잘못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상견과 단견 사이에 위태롭게 펼쳐진 중도라는 길을 걷는 데 실패했던 겁니다. 중도란 인과관계를 절대화하는 것도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중도란 느슨한 인과관계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열심히 수행했다고 해서 모두가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망성 자체도 없어지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부처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치열한 자기 수행이라는 원인과 좋은 스승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을 겁니다. 동시에 치열한 자기 수행을 그치거나 스승과 같은 좋은 조건들이 사라진다면, 부처도 사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마치 온도가 올라가거나 습기가 사라지게 된다면, 성에꽃도 허망하게 소멸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백장(百丈, 749~814) 스님의 가르침, 그러니까 어느 불행한 스님이 여우의 몸을 벗어나서 마침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했던 백장 스님의 가르침이 빛을 발합니다. “불매인과(不昧因果)!” 그러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과를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생각 사이에는 이처럼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전자가 싯다르타의 중도나 나가르주나의 공을 부정하고 있다면, 후자는 긍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매인과’와는 달리 ‘불락인과’라는 생각에는 인과에 대한 강한 집착이 깔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황벽(黃檗, ?~850) 스님이 인과에 아직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백장 스님은 뺨을 후려갈기려고 제자를 가까이로 부릅니다.
집착에는 방(棒)이나 할(喝)처럼 강력한 충격 효과가 즉효약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자 황벽 스님은 자신이 결코 인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승 백장의 뺨을 먼저 후려갈깁니다. “스님이야말로 인과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저를 때리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얼마나 후련하고 장쾌한 일입니까.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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