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말은 주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과 함께 4구로 이루어지며, 선종의 특색과 그 가르침을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라 하겠다.
선(禪)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수로서 ‘경전이나 언어문자 밖에 별도로 전해 준 진리’라는 뜻이기도 하므로 선의 특징을 잘 나타낸 말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경전이나 교학보다는 선이 더 ‘진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교학을 배척하고 선을 옹립하기 위한 사상 투쟁적 성격을 가진 술어라고 하겠다.
이 말은 선종의 종취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긴 하지만, 부처님이 하신 말이 아니라 중국 선불교에서 창안한 말이다.
달마 대사가 주창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당ㆍ송(唐宋) 시대에 나왔다.
처음 등장한 경전은 위경으로 알려진 <대법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고, 이후 801년 지거(智炬)가 저술한 <보림전(寶林傳)> 등에 수록됨으로써 일반화됐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문자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여기서 설 ‘입(立)’ 자는 선다는 말이 아니라 ‘활용하지 않는다’, ‘쓰지 않는다’ 하는 말로 쓰인다.
따라서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능가경>의 불타문자(不墮文字-문자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문자(離文字-문자를 떠나다)라 하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내용은 선종에서 경전 강술이나 언어 문자 수단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는 말이다.
즉, 교(敎)와 설(說) 외에 체험에 의해서 별도로 전해지는 것이 바로 선의 진수이므로 오직 좌선에 의해서 석존의 깨달음에 바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언어나 문자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마음을 단순히 언어나 문자에만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이는 초조(初祖) 달마 대사와 자신의 팔을 끊어 법을 구한 2조(二祖) 혜가(慧可) 대사 사이의 법을 전수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으며, 특히 육조 혜능(慧能) 대사의 남종선(南宗禪)에서 강조됐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迦葉) 존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염화미소(拈華微笑)’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발단이며, ‘불립문자 교외별전’ 역시 염화미소에서 유래했다고 말하고 있다.
문자를 써서 나타내는 것이나 언어에 의한 표현들은 모두 한계가 있다.
때문에 언어나 문자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표현이 될 수 없다.
언어 문자는 단순히 수단이나 방법일 뿐이지 사물 표현의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더구나 불심(佛心)이나 불성(佛性)을 언어나 문자로 파악하거나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불심이나 불성은 문자나 언어 같은 설명의 수단을 단절한, 그런 것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의 세계이다. 이를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한다.
불심은 마음으로 직접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불립문자이며, 이심전심이 강조되는 이유이다.
문자나 언어가 미치지 않는 행적(行的) 체험이 필요하다.
문자나 언어라 해도 체험에 의해 증명된 문자이고 언어여야 한다.
이런 언어에는 생명이 있고 박력이 있고 진리가 번뜩인다.
예컨대, 부처님 생존 당시 재가신자로서 불교의 심오한 뜻에 통달했다는 유마(維摩) 거사의 침묵을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침묵'이라고 말한다. 이 침묵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레와 같은 큰 음향을 내는 침묵이란 말이다. 유마 거사는 이런 침묵이야말로 말없는 웅변이며 진실 자체임을 갈파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묵묵히 마음으로 통하는 이심전심의 세계이다.
당나라 때의 고승 황벽(黃壁希運) 선사는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그 즉시 무심으로 묵묵히 계합할 뿐이다.”
문자나 언어는 마음으로 가는 길잡이 구실을 할 뿐 마음 자체를 표현하거나 진실 자체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문자⋅언어를 단절한 불립문자의 세계가 있음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진제(眞諦)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우리 인간의 언어는 한갓 희론(戱論)에 불과하다.
용수(龍樹) 또한 즐겨 사용한 희론이란 개념은 무가치한 소음과도 같다고 했다.
믿음이 낮은 표층 믿음은 문자주의로 빠지기 쉽다. 문자주의에 빠질 경우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질 뿐만 아니라 배타주의라는 함정에 떨어지기 쉽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를 강조한다. 문자를 멀리 하라는 말이다. 교에 너무 빠지지 말라는 말이다.
선종에서는 언어문자가 곧 번뇌의 원인, 혹은 언어문자 자체를 번뇌로 본다.
그리하여 지식(知識)조차도 지해(知解-알음알이)라고 해서 멀리한다.
지식은 대게 지적인 이해로만 얻어지므로, 그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로움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찰 전각이나 일주문 기둥의 주련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글귀가 곧 잘 눈에 띈다. 이 문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知解]를 내지마라는 말이다. 얄팍한 지식 나부랭이는 떨쳐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라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지(자기) 꾀에 지가 넘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화두참구 역시 같다.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가로 막는 존재다. 때문에 참선할 때에는 알음알이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정면으로 화두를 참구하지 않고 잔머리를 굴려서 알려고 하고, 이리저리 지능적으로 알려고 하는 짓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禪)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것도 다 알음알이를 마음에 두지 말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지식이 많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립문자를 지향한다. 불법을 말 밖에 전한다[교외별전(敎外別傳)]고 한다.
문자로 불법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진수가 문자나 말이 아닌 은밀한 방법으로 따로 전해진다는 말이다.
진실로 실상은 말로써 담을 수가 없다. 진리는 언어문자를 떠나 있어, 진리를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이언진리(離言眞理), 언전불급(言詮不及)이라는 말이다.
불립문자의 의미는 문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한 것이고, 중국불교의 선종에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를 일자무식했으면서도 돈오 견성(頓悟見性)했다고 미화하는 것도 불립문자의 세계를 강조하기 위한 후학들의 의도였다.
선(禪)의 최고경지는 문자로는 이해할 수 없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선종의 ‘불립문자’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실제를 중시하는 중국의 ‘실제주의’가 명확하게 드러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립문자(不立文字)에는 언어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의 경계로서, 즉 어떠한 인위적인 사고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번뇌이고 오염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본래 있던 것을 본래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제기와 답변을 무시하거나 금기시했고, 언제나 깨달음을 향해 직진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대승경전은 퍽 상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많다. 대승불교의 두 축인 중관사상(中觀思想)이나 유식학(唯識學)이야말로 언어문자에 의하지 않고는 논의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언어문자를 강조하는 고차원적인 형이상학 현상이 생겼느냐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는 일체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왜?
부처님이 생존해 계셨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렵거나 막히는 일이 있으면 부처님이 다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입적 후 불교가 급속히 확장했으며, 여타 종교사상과 교류를 하면서 온갖 교리상의 질문이나 비판에 직면해 이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위 경⋅율⋅논 삼장에서, ‘논(論)’은 경전의 해석 또는 주석이라고 하지만 사실인즉 형이상학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견해 표명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알고 보면 대승불교도 부파불교 아비달마 못지않게 논(論)위주의 불교가 됐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흥기했고, 불립문자(不立文字)가 강조됐던 것이다.
그리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선종(禪宗)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말한다. 즉, 경전 외에 별도로 전해진 진리를 가리킨다. 이 말은 앞의 불립문자와 같이 연결돼 선의 근본 특색을 간단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교외별전 역시 선의 참뜻이 경전이나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불심을 직접 파악하는데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교(敎)]에 의거하기보다는 곧바로 가르침의 근본인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떤 경전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했다.
이는 정법안장(正法眼藏),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의 말과 더불어 선(禪)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와 같이 교외별전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말한다.
이심전심이란 스승과 제자가 경전이나 문자에 의거하지 않고 서로 직접 맞대서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 불법을 전수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선문의 조사들은 염화미소의 고사에 기초해서 언어나 문자에 기대지 않고 직접 부처님의 마음이나 불법의 참뜻을 전수했던 것이다.
교외별전이 이심전심이라고 하지만, 전해 받는 이가 전하는 이와 똑같은 심경이 되지 않으면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완전한 수용 자세를 갖춰 일촉즉발(一觸卽發) 상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상태가 돼야 비로소 전하는 자의 마음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것이다.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이 같은 관계를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기미(機微)라고 한다.
※줄탁동시(啐啄同時)---마지막 계란이 부화하는 과정에서 어미닭과 병아리가 함께 하는 행동을 ‘줄탁동시’라고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올 때 안에서 쪼는 것이 ‘줄’이고, 어미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는 것이 ‘탁’이다. 온전한 병아리가 되려면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서 제대로 부화가 진행돼야 한다.
부처님이 언어로써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교내(敎內)의 법이라면, 교외(敎外)의 법은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표월지(標月指: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진리를 달에 비유한다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선(禪)은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외별전이란 불교의 진수가 비밀리에 따로 전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은밀하고 내밀한 전수법에 의해서 전해진 적이 없다.
부처님은 깨달아 아신 모든 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근기와 지식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공개리에, 백일하에 투명하게 전해주셨지, 어느 누구에게도 은밀한 속삼임을 들려주신 적이 없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해서 다자탑전반분좌(多子塔前畔分座), 영산회상염화미소(靈山會上搛花微笑), 니련선하곽시쌍부(泥蓮河畔槨示雙趺)가 조사선에서 교외별전이 된 근거라는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이 영취산(靈鷲山)의 설법 도중에 부처님은 갑자기 말을 끊고 한 송이 꽃을 주워 들고 가만히 여러 대중들에게 그 꽃을 보일 뿐이었다.
이 장면은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라고 해서 이를 흔히 불가에서는 선의 시원으로 삼고 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대중들은 갑작스러운 부처님의 침묵과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린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가섭 존자의 파안미소(破顔微笑)를 본 순간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문자나 교리로가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제자에게 전해졌음을 깨닫게 됐으며, 8만의 설법으로도 표현해 낼 수 없는 진리, 즉 부처님의 마음을 가섭 존자가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게 됐던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리고 가섭 존자의 미소를 부처님이 알아보시고 마음이 전해졌음을 아시게 된 일을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다.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바른 진리의 가르침 정법안장(正法眼藏)과
끝없는 진리의 자유로운 경계 열반묘심(涅槃妙心),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또한 모든 것이 없는 불변의 진리인 실상무상(實相無相),
오묘한 불법으로 들어가는 깊고 묘한 길 미묘법문(微妙法門),
그리고 문자나 경전의 가르침과 같은 글자로 표현될 수 없이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오묘한 진리인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다. 이를 바로 마하 가섭에게 전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는 부처님이 사위국 급고독원에서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는 중 마하 가섭이 뒤늦게 해진 옷을 입고 왔는데, 좌석이 꽉 차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때 부처님이 “잘 왔다 가섭이여.” 하면서 앉은 자리의 반(半)을 나누어주며 같이 앉자고 한 것이다. 이것이 다자탑전 반분좌(多子塔前畔分座)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가섭 존자가 먼 곳으로부터 뒤늦게 이르니 부처님의 몸은 이미 관에 들어가 있었다. 가섭이 그 관 앞에서 슬피 울면서 “세존이 어찌 벌써 열반에 드셨나이까?” 하고 호소하자 부처님이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놓으며 광명을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니련선하 곽시쌍부(泥蓮河畔槨示雙趺)라 한다.
이러한 말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에 심법(心法)이 따로 전해지게 됐으며, 이를 최초로 전해 받은 사람이 바로 마하 가섭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마하 가섭을 불조법맥(佛祖法脈)에 있어서 제1데 조사(祖師)라고 부르고 있다.
이후 선가에서 사제간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하는 것도 교외별전이라 했다.
그런데 특별한 교습 계획을 세우지 않고, 종전처럼 교학체계라는 도그마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도그마에 구애되지 않고 진리를 직접 파악하려면 두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신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좌선이 필요하게 됐다.
그리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은 기존의 모든 개념적인 주장이나 교훈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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