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나'라는 것은 본래 없다 / 무위 해공
깨달음이란 무아, 즉 내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본래 없으니 살아가면서 쌓인 정신적. 육체적 습관인 습기(習氣)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다.
'개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개체가 오랫동안 쌓은 습관도 본래 없다.
그러한 착각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습기가 있어서 닦아내야 한다는 것도 착각이다.
깨달은 후에도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은 그대로 일어난다.
다만 그 모든 것은 대상과 더불어 연기 법칙으로 일어나는 것일 뿐, 그것을 내가 일으켰다, 나에게서 일어났다는 착각이 없다.
그냥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으로,
생멸하면서 계속 펼쳐져 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습기 하면서 닦아내야 한다면,
죽을 때까지 닦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습기가 일어나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다.
이것이 진리이고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본래무아’다.
‘본래무아’라는 것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무아가 아닌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아가 되려고 몸과 마음을 고생시킬 필요가 없다.
우주 현상계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라고 하는 이 존재도 개념이다.
꿈속에서 나라고 하던 존재가 꿈을 깨면 사라지는 허상이듯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존재도
본래 참나인 절대가 투영시켜 놓은 하나의 상이다.
그러니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고
찰나간에 생멸하는 허상체임을 바로 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니까
자기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착각한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일어날 때
그것이 다른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이든 반드시 그것이 일어나게 되는 대상적 연기(緣起)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우주 현상계 전체가 상대적 연기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로 2500년 전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본질은
개체로서의 내가 열심히 갈고 닦아서 부처가 되거나 참나가 되거나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다.
그것이 본래절대 상태다.
깨달음은 새로운 무엇을 알고
새로운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깨달아서 절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본래절대다.
시작도 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나다.
그것이 깨달음의 상태다.
위빠사나 명상을 계속하면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 중에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없고,
전부가 대상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연기법이고 연기법이 제대로 보이면
무아는 저절로 깨달아진다.
이 현상 세계의 모든 삶이
연기 법칙에 의해 저절로 펼쳐지듯이
깨달음도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도 개인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상 세계에서의 깨달음 조차도
내가 깨달아야겠다고 의지를 굳게 다지는 한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 상태에서는
깨닫고자 하는 에고가 너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체 의식이 너무 강하면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뿐이다.
깨달음은 너무 쉽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어렵다.
왜 쉽다고 할까?
열심히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한 단계씩 올라가서 나중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적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
깨달음은 이것 하나다.
그때 참나인 절대가 드러난다.
그래서 개체적 자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
이것 하나만 잡으면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쉬운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어렵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나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라고 믿고 살았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놓아야 하니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매일 꿈을 꾼다.
꿈속에는 나도 있고 가족도 있고
이 세상이 완벽하게 다 들어 있다.
그리고 그 꿈 속에서도 평상시와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꿈에서 느꼈던 시간과 공간은
꿈을 깨는 순간 없어진다.
그러면 그 꿈 속에 있었던 시간과 공간은 무엇인가?
의식이 개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 그 꿈속에 투영되어
개념으로 만들어 놓은 시간과 공간을
진짜로 있다고 믿고 펼쳐 나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라고 믿고 있는 현실
이것이 매일 밤 꿈을 꾸는 것과 똑같다.
절대가 의식을 통해서 펼쳐 놓은 이 꿈 속에
지금 이렇게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가 펼쳐 놓은 꿈 속에서는
정확하게 시간도 있고, 공간도 있고,
사물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다 있다.
우리가 꿈속에서 그 상황이 진짜인 줄 알고 속듯이
지금 현실이라는 꿈 속에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괴로워한다.
그런데 이 꿈 속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된 시간과 공간뿐만이 아니고
그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타고서 펼쳐졌던
수없이 많은 사건과 현상을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걸까?
본래 있었는데 없어진 걸까?
그런 세상은 본래 없었다.
다만 의식 속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현상 세계는 허상이고
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꿈에서 깨어나
이 현상 세계가 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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