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 육자(六字)>
위의 긴 제목은 <대승기신론>의 핵심내용을 요약해 숫자로 표시한 말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줄여서 <기신론(起信論)>이라고도 하는데, 동아시아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논서이다.
그래서 중국불교 이후의 모든 경론 가운데서 가장 주석서를 많이 가지고 있다.
<대승기신론>이 비록 불교 논장에 들어 있지만 대승불교의 반야 및 공사상과 유심의 실천수행 등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경에 버금하는 탁월한 논서이다.
‘마음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경전의 말씀처럼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마음을 잘 모르고 산다. 그런 마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그 정체를 <기신론>는 탁월하게 설명해 놓았다.
기원 1세기를 전후해서 마명(馬鳴, Ashvaghosa) 보살이 썼다고 하는 <대승기신론>이 마음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분석을 하고 있어 그 내용을 보고 감탄한 서양 심리학자들도 많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래장(如來藏)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관계를 명료하게 밝혔으며, 수행의 요지를 논리적ㆍ체계적으로 정리해 간명하게 설한 수행지침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신론>은 기본적으로 불성(佛性)을 지닌 잠재적 부처가 바로 중생이며, 단지 중생의 마음에 번뇌가 쌓여 불성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불성을 드러내기 위한 실천적 수행을 강조하면서 대승의 믿음으로 향하는 이론체계를,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 육자염불(六字念佛)회향」으로 요약했다.
그리고 이 논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일심(一心)을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또한 일심이 가진 특성을 체(體)ㆍ상(相)ㆍ용(用) 삼대의 이론으로 전개해 궁극적으로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게 하며, 나아가 실천적 행을 닦도록 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먼저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을 살펴보자,
불교교학에서 ‘문(門, skt. dvara)’은 출입문이 아니라 학설, 분야, 가르침 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법문(法門)’이라 할 때의 ‘문(門)’도 가르침을 말한다. 여기에서 ‘문’도 마찬가지 개념이다.
일심이문(一心二門)이란 한 마음에 두 개의 문(분야, 가르침)이 있다는 말인데, 특히 일심의 설명은 <기신론> 특유의 독창적인 논리를 전개해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핵심 포인트는 중생의 마음이 바로 대승이라 천명한 것이며, 이 대승의 근원이 진여(眞如)라는 것이다. 중생의 본래 마음이 진여이며, 또한 일체만법이 진여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기신론>은 그 마음의 문에는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로 가는 진여문(眞如門)과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生滅門)이 있다고 했다. 진여문을 심진여문(心眞如門), 생멸문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에는 두 가지 사상계통이 있는데 하나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이고 다른 하나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그런데 중관과 유식의 두 철학체계는 그 본질적인 차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교리 상에 여러 가지 대립적 차별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기신론>은 이 두 철학체계를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각각 부르고 있는데, 이 2문이 갖는 교리 상의 대립적 차별현상 속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잘 밝혀놓았다.
우리 마음은 본래 하나의 마음, 일심이지만 <기신론>에서는 일심을 두 개의 문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大乘)이라는 것은 일심(一心)이고, 그 일심에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있어서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아 각각 일체법(一切法)을 포함한다고 했다. 이것이 유명한 <대승기신론>의 핵심내용인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즉, 이문(二門)이란 진여문과 생멸문인데, 그 자체가 번뇌 무명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여문이고, 번뇌와 무명 작용에 오염 유전해 가는 것이 생멸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마음은, 마음의 이치와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문(門-분야)으로 이뤄지니 곧 일심이문이다.
진여문(眞如門)에는 성실함, 당당함, 지혜, 사랑, 자비, 완전, 보리, 부처, 극락 … 등의 말이 해당된다. 진여문은 한마디로 생사문의 중생이 도달해야 할 그 무엇, 즉 이상향을 말한다.
우리들의 삶은 생사문의 짜증 많은 삶에서 이상향의 진여문의 환상적인 삶으로 향하려고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마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향해가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리고 우리들 당면한 문제인 생멸문(生滅門)에는 게으름, 불안, 무지, 미움, 분노, 짜증, 부족, 번뇌, 중생, 지옥 … 등의 말이 해당된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들의 생생한 살아있는 삶 그 자체가 생멸문이다. 마음작용인 생멸문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그 때 묻은 마음을 말한다.
진여문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불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이 문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ㆍ무형의 사물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고 애착 혹은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버려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생멸심)이 일심(一心)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진여심 위에 세속적인 마음인 생멸심이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면서 일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말한다. 즉, 일심으로의 회귀를 말한다.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과 같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정돈된 마음을 진여심(眞如心), 심진여문(心眞如門) 혹은 불심(佛心)이라 한다.
불심(佛心)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이다. 이 불심을 일심이라고 한다.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이다. 일심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그냥 ‘참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분리될 수 없지만은 동일한 중생심을 양쪽에서 관찰한 것이다. 영원한 불심에서 보면 심진여문이요, 생멸의 현상에서 보면 심생멸문이다.
일심의 ‘일’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가 그 안에서 진실로 살아 있는 조화로운 전체가 일심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고,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음을 말한다. 일심은 우주의 진리를 말하는데, 이 일심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이다.
이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계(對象界)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고,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기신론>의 이러한 일심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 고승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다음은 삼대(三大)를 살펴보자.
일심(一心)에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는데, 그 일심의 특징은 삼대(三大)로 표시된다.
삼대는 어떤 사물의 본체와 밖으로 드러난 형상과 그 활용성 또는 작용이다. 이를 줄여서 채(體)ㆍ상(相)ㆍ용(用) 삼대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삼대란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를 말하며, 일심을 체, 상, 용의 세 관점에서 본 것이다.
‘대(大)’라고 하는 것은 체ㆍ상ㆍ용이 너무나 큰 모습과 작용을 가지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 것이다.
이 체ㆍ상ㆍ용 삼대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세 가지 부처님으로도 표시될 수 있다.
우리 마음의 본체와 겉모양은 부처님의 법신자리와 같고 마음의 활용기능은 부처님의 보신자리ㆍ화신자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 체(體)의 관점에서 일심을 보면, 악마도 신도, 부처도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 이 일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체(體)는 위대하다. 그래서 체대(體大)라 한다.
• 그리고 상대(相大)는 여래장을 말하는데 바로 부처의 법신이다. 즉, 부처님과 똑 같은 훌륭한 작용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며, 또한 이 일심에는 무량한 덕상(德相)이 구비돼 있기 때문에 상대(相大)라고 한다.
•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용대(用大)라고 한다.
그런데 한 마음이 진여의 세계로 갈 가능성이 나타날 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 불리어지고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유를 설명할 때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불리어진다.
이 중생심이 여래장도 되고 아뢰야식도 된다. 진여의 세계로 가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언도도단(言語道斷), 말과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신론>의 주안점은 진여문의 설명이 아니라 생멸문의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체ㆍ상ㆍ용 삼대에서 중요한 것은 용대(用大)의 기능이다. 내 마음이나 마음의 그림자인 모든 사물은 언제나 일으키기만 하면 나타나게 될 불과 같다. 내 마음은 중립의 상태에 있다. 그 마음의 기능이나 활용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서 불국토를 장엄하는 사람도 되고 불국토를 부수는 사람도 된다.
<금강경>의 방식대로 삼대를 말한다면,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고[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용대(用大)는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깨끗한 마음으로 꾸며진 지극히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이 너울대는 이상향일 것이다.
이 불국토의 장엄은 우리의 더럽혀진 마음에서 깨끗한 본래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것이 본래 갖추어진 여래장에 노니는 <기신론>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체대, 상대, 용대를 알게 되면 인생이나 자연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말하자면 자연이나 인생의 영묘한 작용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성계(靈性界)도 보이기 시작하며, 법계(法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일심ㆍ이문ㆍ삼대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만유의 근원이고 우주의 생명이며, 대자연의 실상인 진여(眞如)에 대해 저절로 합장 경배하게 되며, 동시에 불ㆍ법ㆍ승 삼보에 귀의하게 된다고 했다. 단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심, 이문, 삼대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저절로 귀의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적 신앙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신(四信)을 검토해보자.
일심의 상태에서 진여문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한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여(眞如)의 마음자리와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대승기신론’에서 ‘기신(起信)’이란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말이다.
그리하여 그 믿음의 대상으로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즉, 일심의 상태에서 진여문의 상태로 가고 일심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네 가지 믿음이 바로 진여의 마음자리와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진여와 불ㆍ법ㆍ승 삼보는 우리가 현실생활 속에서 만나는 외적인 삼보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본래 자리 잡고 있는 진여자리, 깨달음의 지혜, 진리, 그리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에 아무리 진여의 문과 깨달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수행이 없다면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 믿음은 다음 다섯 가지 실천[오행(五行)]에 의해 완전히 확고한 것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행이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행(五行)의 수행을 보자.
마음에 아무리 진여의 문과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수행이 없다면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요청된다.
이러한 수행이 오행인데, 이는 육바라밀을 뜻한다.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이 육바라밀인데, 이 육바라밀 중에서 선정과 지혜를 지관(止觀)으로 묶어서 다섯 가지로 줄인 것이다.
즉, 육바라밀에서의 선정과 반야를 합해 지관문(止觀門)으로 정리했다. 이는 선정과 지혜를 겸한 수행이어야만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됐던 것이다. 따라서 오행이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종교심이 생겨나게 되면 이 오행은 불도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
신앙은 실천 수행에 의해서 깊어지고, 실천 수행은 신앙에 의해서 지탱된다.
더구나 〈기신론〉은 지력에 의한 수행을 설할 뿐만 아니라, 서방극락 세계의 아미타불(自性佛)을 염송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도 설한다.
그런데 중생이 대승의 가르침을 배워 사신과 오행을 닦고, 정신(正信)의 불퇴위(不退位)를 얻으려 해도 그것은 좀처럼 어렵다. 수승한 능력이 있는 중생이라면 좋지만, 대부분의 중생은 나약하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서 제불을 친견한다거나 부처님께 (친견을 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가하게 된다. 결국 도저히 신심을 성취할 수 없다고 믿어버린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은가에 대해 부처님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 가르침인 육자염불(六字念佛)은 6자로 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을 말한다.
위와 같은 중생에 대해 부처님은 훌륭한 방편을 말해주셨다.
즉, 그 승방편(勝方便)이란 바로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그래서 전의염불(專意念佛)의 인연에 의해 원에 따라 타방불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며 영원히 삼악도를 떠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뜻을 바르게 하고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원하는 대로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요컨대, 근기가 수승해서 지관(止觀)을 행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좋고, 염불로써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좋다. 선도 염불도 함께 현세의 가르침인 것이다.
선(禪)은 현세에서 즉심성불(卽心成佛)함을 바라고, 염불은 극락왕생을 원함으로써 현세에 안심을 얻는다.
이와 같이 근기가 약한 중생을 위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방편이 염불삼매(念佛三昧)인 것이다.
이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염불의 예를 든 것이다.
그래서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참선이나 다른 수행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그 세계에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비록 능력이 출중해 자력수행으로 깨달아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라도, 중간 정도의 능력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행도(易行道)의 하나이다.
여기서 염불은 믿음이 돈독하지 못한 수행자에게 믿음의 강화를 통해서 오행을 닦게 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해 누구나 대승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공능(功能)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수행은 자력과 타력을 결합한 믿음의 실천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신(三身-법신·보신·화신)의 가피력에 의해서 믿음이 확고해져서 자기의 본래심인 진여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불교는 마음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 마음은 큰 수레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중생심, 일심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다.
진리로 가는 문과 나고 죽는 고통의 윤회로 가는 문이다.
또 이 마음에 본체와 성스러운 성상과 오묘한 작용의 특징이 있는데, 법신ㆍ보신ㆍ화신의 능력과 같다.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돌아가고 체ㆍ상ㆍ용 삼대의 본래 특징을 찾기 위해서는 마음자리의 진여 및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오행과 육자염불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기신론>의 요지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 특히 계환 스님의 글을 많이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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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 육자(六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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