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실공(如實空) ⋅ 여실불공(如實不空)>
나미비아사막
진여(眞如, 산스크리트어 tathta)를 설명함에 나오는 말이다. 여실(如實)은 진여의 다른 이름이다. 진여는 불교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말이고, 우주 만유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무차별한 절대 진리를 말한다. 진여(眞如)란 만상(萬象―모든 존재)에 본래 갖추어져있는 본성(本性-근본 뿌리)을 말하며,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항상 하는 것이다.
진여의 원어는 tath(그와 같이)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 t를 더한 단어로, 여실(如實)ㆍ여여(如如)라고도 번역한다. 생멸(生滅)에 대칭되는 말이면서도,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나타내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을 진리로 생각하고, 어떤 특수한 원리에 근거한 진리를 배척한다. 그리하여 진여는 참으로 실재(實在)이며, 모든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되는 현상,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주관에 드러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즉, 진여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 안에 무한한 공덕을 가지고 있어 일체의 제법을 형성한다. 진여 자체가 번뇌가 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진여는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생각을 벗어나 진여가 됨으로써만 알 수 있다. 진여를 말로 설명하지만 뭐라 일컬을 수 없고, 비록 생각으로 헤아리기는 하지만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이러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진리에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진여는 텅 비어 있다. 따라서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까닭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생각(분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생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아득하다. 아득하다는 것은 생각으로 규명할 수가 없음을 직감하는 것이기에 그 지점에서 생각으로 어찌 해보려는 마음을 포기하면(항복하면) 생각이 끊어진 그 순간에 진여가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것이 진여구나" 라는 생각(분별)을 일으키면 진여는 그 분별하는 생각에 감추어 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이언진여(離言眞如)ㆍ의언진여(依言眞如)로 구분한다. 언어를 빌려 진리를 표현하지만(依言眞如) 진짜 진리는 언어를 떠나 있다(離言眞如)는 말이다.
본래 진여는 인간의 개념적 사유를 초월한 말이지만, 굳이 언어로 설명한다면 여실공(如實空)ㆍ여실불공(如實不空)이 된다. 즉, <대승기신론>에선 언설에 의지해 진여를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진여는 분별심을 떠나고 언설을 떠난 것이지만 언설에 의해 분별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여기에 여실공과 여실불공의 두 가지 뜻이 있게 된다. 그런데 여실공의 반대말이 여실불공이 아니라 여실공이나 여실불공이나 둘 다 진여를 설명하는 말이다.
여실공(如實空)에서 여실은 진여이고, 여실공은 진여가 비어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형상이 없이 있기 때문에 여실공이라 한다. 진여를 겉으로 드러난 형상으로 헤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형상(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원적 사고(二元的思考)로 빚어진 실체를 바라보는 분별(관점)이다.
즉, 여실공(如實空)이란, 진여의 체성은 온갖 사상을 초월해 절대적인 것이므로 일체의 언설⋅사려(思慮)를 부정해버린다고 해서 공(空)이라 하고, 그래서 여실공이라 한다. 단순히 한 물건도 없는 공이란 의미는 아니다. 이 공(空)이라는 뜻이 진여의 진실한 내용을 표시하므로 여실한 공이란 것이다.
즉, 여실공이란 망념(妄念, 無明, 煩惱妄想)이 비어있고, 망념이 비어있기에 공하고 진실이 그대로 드러남을 말한다. 망상이 공하므로 언설을 떠나있어 모든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해 언설에 의해 건설된 일체 세계가 모두 공한 것이다.
무명과 번뇌 망상이 공할 뿐 부처의 덕(德)은 불공(不空)이다. 말하자면 진여를 체득한 사람은 공(空)해서 마치 무(無)와 같이 보이지만,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남과도 같다. 이 마음이 곧 공하지 않는 불공(不空)이다.
즉, 여실불공(如實不空)에서 여실(진여)은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온갖 형상들을 환처럼 만들어낸다. 쉽게 말해서, 진여는 모양 없는 궁극적 실재이면서 일체의 모든 모양으로 현현한다고 해서 여실불공이라 한다.
여실불공(如實不空; 妙有), 여기서 불공(不空)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해서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 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라 이름 한다. 모든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되는 현상을 말한다. 따라서 여실불공 또한 일상(一相)이다.
여실불공이란 모든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되는 현상, 분별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주관에 드러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때문에, 불공(不空)이란 가득 찬 공이다. 일체를 실체로 바라보는 관념이 비워지고 비워지면 빈 공이 곧 찬 공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불공은 ‘공(空)’ 개념의 반대말이 아니고 공 개념을 결코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흔히 공을 설명함에 있어서, “공은 비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공은 진여로 꽉 차 있기도 하다.”라고 한다.
여기서 ‘꽉 차 있다’는 말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불공이다. 때문에 불공은 공의 반대말이 아니라 오히려 공을 설명하는 말로 동원되는 말이다. 그러니 공과 같은 맥락의 말이라 하겠다.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진여로 꽉 차 있다. 꽉 차 있으므로 불공이란 말이다.
빈 공은 무아(無我)이고, 찬 공은 진아(眞我), 그런 관계이다.
빈 것과 찬 것이 어떤 것이냐고 질문을 하면, ― 말의 의미만을 고집(집착)하면 알 수가 없다. 흔히들, 이러한 설명은 이원적 관점의 중생들에게는 실체라는 관념으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진여의 바다라는 정도이지 세밀한 설명은 말을 떠나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여의 세계이다. 그리고 진여뿐인 바다에서 온 우주가 환(꿈)처럼 현현한다. 그것이 여실불공이다.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진여를 설명하는 <기신론>도, 고작 그 정도로 그친다. 그러한 진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다가는 자칫 '실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진여의 본성은 중생의 망심, 분별심에 의해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 말하지만 만약 분별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여실불공이란 이미 진여자성이 공해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진여자성이야말로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 해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
이와 관련해 여실지견(如實知見)이란 말이 있다.
여실지견이란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여(如)가 불가에 들어 와서 쓰일 때는 ‘같이, 그러한’의 뜻으로만 쓰이지 않고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그리고 여(如)는 반드시 여실(如實)이며 진여(眞如)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여실한 인식,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첫째, 주관적 편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올바른 객관적인 관찰이 돼야 한다. 우리들 삶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편견, 주관, 경험에서 비롯한 선입견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우리 삶의 주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는 주관적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여실지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아주 드물게, 미국의 링컨? 인도의 간디?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퇴계 선생, 그런 분 정도가 여실지견하는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우리들 인식은 우리들 삶 속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여실지견이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이고, 진리는 우리들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다. 허황된 형이상학에 매달려 희론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인식대상은 바로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라야 하고,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과 무관하게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넘기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涅槃)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진리이다.
그리고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려면 직관(直觀)의 힘을 길러야 한다. 머리를 너무 많이 쓰면 논리에 집착하게 되고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기 쉽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게 돼 있으니 말이다. 분별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한 측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 다르다. 직관은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통찰력, 통찰지를 말한다.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정법의 수행방법이 아니다. 지혜의 눈, 즉 ‘혜안(慧眼)’으로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다.」― 미산 스님
다음은 여실지견(如實知見)에 관한 어느 도반의 글이다.
“무슨 말을 일러 주어도 자신의 방식대로만 해석하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지구조이다. 인연에 따라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2분화하는 마음의 심층활동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 활동 결과인 견분과 상분을 독립적 [자아]와 [세계]로 실체화하고, 그 각각을 실유(實有)로 간주하는 것(분별)이 문제라고 유식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분별활동의 중심에는, 여지없이 나[我痴, 我慢, 我愛, 我見]가 도사리고 있기에 ‘나’ 아닌 것들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선지식들은 공통적으로 ‘나’ 중심적 해석을 버리고 무아적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다고 끊임없이 역설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긴 하나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본다[如實知見]라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대승기신론>에 의거하면, 진여가 언설과 사고(思考) 작용을 떠난 것이기는 하지만 언설과 사고 작용에 의하지 않고는 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여기에 언설에 의한 설명이 있게 된다. 이 언설에 의한 설명방법에서 다시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의 뜻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실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여라는 세계에는 능(能)⋅소(所)의 분별이 있을 수 없고, 모든 존재현상의 차별되는 모양을 여의었다. 진여의 세계에는 취하는 대상[所取相]이 없으므로 취하는 주관[能取見]이 없으며, 따라서 헛된 심념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소취상과 능취견이 없다는 뜻에서 '공(空)' 이라고 한다.
여실불공이란 이미 진여의 본성은 허망한 요소가 없어 공하기 때문에 바로 진심이며, 이 진심은 항상 해서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불공(不空)이라 하는 것이다. 불공이라고 표현했으나 이 진심의 자리에는 취할 만한 상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불공은 공과 다르지 않은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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