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이문(一心二門)>
불교교학에서 ‘문(門, skt. dvara)’은 출입문이 아니라 학설, 분야, 가르침 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법문(法門)’이라 할 때의 문도 같은 맥락이고, 여기에서 ‘문’도 마찬가지 개념이다.
일심이문(一心二門)이란 한 마음에 두 개의 문(분야, 가르침)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은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그 마음의 문에는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로 가는 진여문과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이 있다.
진여문(眞如門)을 심진여문, 생멸문(生滅門)을 심생멸문이라고도 한다.
즉, 이문(二門)이란 진여문과 생멸문인데, 그 자체가 번뇌 무명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여문이고, 번뇌와 무명 작용에 유전해 가는 것이 생멸문이다.
진여문(眞如門)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불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이 문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ㆍ무형의 사물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고 애착이나 집착을 놓아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생멸심)이 일심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진여심 위에 세속적인 마음인 생멸심이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면서 일심으로 돌아가야 함, ― 일심으로의 회귀를 말한다.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과 같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정돈된 마음을 진여심(眞如心), 심진여문(心眞如門) 혹은 불심이라 한다.
불심(佛心)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이다. 이 불심을 일심이라고 한다.
일심(一心)은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이다.
일심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그냥 ‘참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분리될 수 없지만은 동일한 중생심을 양쪽에서 관찰한 것이다. 영원한 불심에서 이를 보면 심진여문이요, 생멸의 현상에서 이를 보면 심생멸문이다.
일심의 ‘일’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가 그 안에서 진실로 살아 있는 조화로운 전체가 일심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고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음을 말한다. 일심은 우주의 진리를 말하는데, 이 일심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이다.
이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 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고,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 연기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발전시킨 고승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우리 마음은 본래 하나의 마음, 일심이지만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을 두 개의 문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대승(大乘)이라는 것은 일심(一心)이고, 그 일심에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있어서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아 각각 일체법(一切法)을 포함한다고 했다. 이것이 유명한 <기신론>의 핵심내용인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즉, 일심이문(一心二門)에서 일심은 대승이고, 두 개의 문은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의 삶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지금 우리들의 삶인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나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마음은, 마음의 이치와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문(門-분야)으로 이뤄지니 곧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진여문(眞如門)에는 성실함, 당당함, 지혜, 사랑, 자비, 완전, 보리, 부처, 극락… 등이 있다. 진여문은 한마디로 생사문의 중생이 도달해야 할 그 무엇, 즉 이상향을 말한다. 우리의 삶은 생사문의 짜증 많은 삶에서 이상향의 진여문의 환상적인 삶으로 향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마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향해가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리고 우리들 당면한 문제인 생멸문(生滅門)에는 게으름, 불안, 무지, 미움, 분노, 짜증, 부족, 번뇌, 중생, 지옥… 등이 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들의 생생한 살아있는 삶 그 자체가 생멸문이다. 마음의 작용인 생멸문(生滅門)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그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동요하는 마음의 상(相)과 순수한 마음의 상, 두 종류가 있음을 <기신론>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일심을 체(體)와 용(用), 둘로 나누어 설했다. 일심에는 진여의 체와 생멸의 용이 있다.
진여의 체란 움직임이 없어 조용한 바닷물과 같은 것을 말함이요, 생멸의 용이란 바닷물이 바람을 만나 거센 파도 가 일어 출렁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마음(一心)이 조용한 바다같이 된 상태를 진여문이요, 천차만별이 일고 있는 상태를 생멸문이라 한다. 진여의 체에 무명 번뇌가 가려지면 그 즉시 생멸의 용(用)이 발동되는 것이다. 일심은 한순간에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무명(無明)이 가려지면 생멸문의 온갖 번뇌가 일어난다.
진여와 생멸은 넓은 차원에서 중생심이라 하지만, 진여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생멸의 마음은 범부 중생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범부 중생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보니 모든 사건 사고가 비일비재하다. 진여의 마음, 즉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면 안락한 사회가 되리라. 일심 속에 조금이라도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영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함없는 정진으로 우리 몸의 육근(六根)이 불교 수행정진과 인연을 맺어 진여(부처님)의 마음이 훈습 돼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으로 살아간다면 서서히 생멸문 속의 번뇌와 사건사고가 사라지게 돼 행복한 사회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일심에는 진여문과 생멸문, 두 문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비록 두 문으로 나누어지지만 종당엔 일심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도 “염정(染淨)으로 나누는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진망(眞妄)의 이문(二門)이 다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하며, 이 두 문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일심이라 한다.”고 했다.
원효 대사도 그의 대표적인 저서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을 이문(二門)으로 해석하면서 생멸문에 여래의 본성인 여래장(如來藏)이 감추어져 있고, 진여문과 생멸문은 그 본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했다.
또한 진여문은 통상(通相)으로, 생멸문은 별상(別相)으로서 일체를 포섭하는데, 통과 별의 화합을 흙과 기와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흙은 기와의 통상으로서 흙을 떠나서 기와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의존하면서 화합돼있다고 했다.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두 문은 출세간과 세간법을 포괄하는 일심의 두 측면이므로 일체법을 모두 아우른다는 것은 당연하나, 두 가지 문이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는 것은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여, 생멸 두 문이 통상과 별상으로 서로 상입(相入)하며 상의(相依)하고 있음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금으로 가락지를 만들고 불상을 만든다고 할 때 금은 통상이고 진여문이요, 가락지와 불상은 별상이며 생멸문이다. 금의 성품은 진여문에 속하는 것이지만 통상인 금이 별상인 가락지와 불상 등을 포섭하므로 이미 별상으로서의 생멸문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생멸문이 별상으로서 가락지와 불상 등 천만가지 형상을 갖더라도 진여문으로서의 금의 성품을 잃지 않으므로 또한 진여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여문과 생멸문이 각각 일체법(一切法)을 총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것은 같은 이치로 이(理)와 사(事)의 관계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즉, 우리 마음의 체(體)는 진여문이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생멸문이다. 비유하자면, 일심의 광대한 바다에 생멸의 파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진여문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진여문이 따로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피안의 세계인 진여문에 도달해야 할 곳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법(二法)이 되므로 바로 불이법(不二法)에 정면으로 저촉된다.
불법의 기본은 불이법이다.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생사문과 진여문도 불이법이다. 결코 둘로 나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로 나눌 수 없는 일심을 진여문과 생멸문의 둘로 나눈 것은 분별심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귀결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즉, 생멸문과 진여문은 하나의 바탕, 일심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생멸문 → 일심」과 같이 생멸문에서 일심으로의 회귀하는 것이다.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이문에 있어서, 심진여는 일심을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해 언제나 참되고 한결같은 본성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심진여야말로 제법(諸法)의 유일한 근거로서 지극히 고요해 모든 더러움이 사라진 중생심이다.
그리고 심생멸문에서는 참되고 한결같이 진여한 일심이 어떻게 흘러가서 불각(不覺)의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며, 어떻게 하면 다시 일심의 원천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곧, 진여한 일심은 어느덧 생겨난 충동적인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해서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해 스스로 진여한 일심을 가리고, 차츰 주객의 분별과 이기적인 생각들을 일으켜서 마침내 지옥ㆍ아귀ㆍ축생 등의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된다고 봤다.
그러나 일심에는 언제나 스스로를 맑게 정화하고 밝음으로 이끌어 가려는 훈습력(薰習力)이 있기 때문에, 그 훈습하는 힘이 좋은 계기를 만나면 끊임없이 작용해 마침내 본래의 깨달음 상태인 진여로 나아가게 한다. 일심은 너와 나의 차별이 있는 상대적 마음이 아니라 어떤 것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다. 일심은 탐ㆍ진ㆍ치의 마음이 떨어지고 사리사욕이 없기 때문에 서로 화합하고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것이 순간순간 대상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고[生滅] 거기에 따라서 행위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마음은 인연 따라 변하므로[生滅門] 본래 허공과 같이 공적(空寂)한, 비어있는 진여문과 더불어 이문(二門)이 되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生滅門]는 요란하지만, 진리의 세계[眞如門]는 언제나 한결같다[如如]. 바람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현상계는 늘 생멸 변화하지만, 그것은 잠깐뿐, 다시 본래 모습을 찾는다. 사람들은 고요한 진리의 세계, 한결같은 진여(眞如)의 세계만을 꿈꾸나 바람 불고 요란한 이 현상계도 필요한 것이다. 현상계를 모르고서 진여문으로 갈 수는 없다. 진리의 세계는 현상계를 반드시 거쳐야 갈 수 있다. 생멸 속에 생멸하지 않으면 바로 진리의 세계요, 무상 속에 영원을 바라보면,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으면, 무상한 이 세상이 바로 영겁의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오로지 일심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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