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수선님 2025. 5. 25. 12:45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참선 중인 청화 스님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이란 <대지도론(大智度論)>,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등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짐작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말이고, 절대의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쓰이는 말이다. 언설이나 글자로도 표현할 길이 없고 마음으로도 어찌 할 수 없다는 뜻, 한마디로 언어의 효용가치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여러 대승경전과 논서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에 대해 다양하게 설하고 있는데, 용수(龍樹, Nagarjuna)가 지은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제법실상을 설명하는 가운데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이란 말이 나온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은 불교의 근본진리를 가리키는 용어의 하나로, 법화사상을 철학적으로 압축한 말이고, 대승불교를 일관하는 근본사상이다.

‘제법(諸法)’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현상까지도,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전부 최고의 경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제법 하나하나가 다 있을 자리에 있고, 거기서 제 나름의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즉, 우주 사이의 모든 존재와 사물은, 있는 그대로 진실한 것, 가치 있는 것,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인데, 연기의 실상을 제법실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제법실상은 곧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했다.

“그러한 제법실상을 바로 알려면, 보살의 지혜라야 한다. 즉,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부터 큰 서원을 세우고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크고 날카로운 지혜로 일체의 치우친 선정에 머무르지 않고, 마침내 모든 언어의 표현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으로 행할 바가 모두 사라진 곳[心行處滅]에 이르러야만 마침내 제법실상을 다 아는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 뒤 중국 당나라 시대에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였던 대주 혜해(大珠慧海, 8~9세기) 선사의 어록집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서 말했다.

“경에 이르기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니 그 뜻이 어떠하냐[問經云 言語道斷心行處滅 其義如何]?”라고 했다.

이에 대해, 진리의 궁극 처는 깊고도 묘해서 말로써는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글로써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을 써도 결코 생각할 수 없음을 찬탄하는 말이다. 곧 궁극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궁극의 진리는 말도 끊어지고 글도 끊어지고 마음으로도 도저히 미칠 수 없어서 생각조차 끊어진 경지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언어도단(言語道斷)은 말길이 끊겼다는 말이니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언어도과(言語道過), 명언도단(名言道斷) 등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 심행처멸(心行處滅)은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이니, 사람 마음속의 생각(心行)으로는 닿을 수 없다는 말이다. 즉, 마음의 작용(心行)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 곧 사량 분별(思量分別)이 끊어진 경계를 말한다.

• 여하(如何)는 어떻게 하는가, 어떠한가, 명사의 뒤에서 일의 귀추가 어떠한가라는 의미이다. 앞 말이 나타내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또는 앞 말이 나타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진리는 말로 설명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경전이나 문자로 설명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不立文字 敎外別傳)”고 말한다.

말로는 감정의 전달도 제대로 안 된다. 그러니 고요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는 결코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다. 말로는 음식 맛 하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된장 맛을 말로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된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외국 사람에게 된장 맛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세계를 말로 표현하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언어는 틀을 만들어 우리의 생각을 그 틀에 가둔다. 언어화(言語化)가 통찰력을 요구하는 문제의 해결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한글이 모든 소리와 모양, 우주만물을 글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했지만 사람이 어떤 이미지를 본 후 그 형상을 언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 이미지에 대한 기억력이 흐려진다. 뇌에 각인된 모습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보면 이미지가 흐려진다.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누구나 어떤 사람의 얼굴이나 꿈에서 본 풍경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그 이미지는 선명한데, 말로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을 때가 있다. 그것이 언어능력의 한계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진리는 언어의 한계 밖이다. 그래서 언전불급(言詮不及)이란 말도 나온 것이고, 법을 전함에 이심전심(以心傳心)란 말이 생겼으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것도 그에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고, 체험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선가(禪家)에서는 “곧바로 마음을 살펴 성불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보통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경전은 왜 있는가?”하고 물을 수 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나 ‘이심전심(以心傳心)’ 또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과 같은 말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언어도단 심행처멸’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를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찾을 수 있다.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벽면에 전자선(電子線, Electron Beam)을 쪼이면 맞은편 벽면에 밝고 어두움이 교차하는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입자는 간섭무늬를 만들지 못하므로 이것은 전자가 파동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간섭무늬는 파동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할 때만 나타나는 법이다. 구멍이 두 개 있더라도 한 번에 하나의 구멍만을 통과하도록 전자선의 세기를 약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간섭무늬는 생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의 전자가 둘로 쪼개져 각각의 조각이 구멍을 하나씩 통과하는가?

확인을 해보면 언제나 하나의 전자가 하나의 구멍을 통과한다. 전자 하나가 둘로 쪼개지는 법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하면 이번엔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 확인하면 마치 자신이 입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발각됐으니 더 이상 파동의 행세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전자는 더 이상 간섭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같은 상황, 같은 실험 장치에서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를 관찰하면 입자처럼, 관찰을 중단하면 전자는 다시 파동처럼 행동한다.

구멍을 열 개 뚫어 놓으면 하나의 전자가 열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전자가 해파리처럼 전 공간에 넓게 퍼져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중성을 처음 발견했을 때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하나의 전자가 넓은 공간에 퍼져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찰해보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관찰하면 언제나 전자는 하나의 점(點)과 같이 공간적 크기를 갖지 않는 점 입자(Point Particle)일 뿐이다.

그런데 그 입자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하나의 점이 동시에 여러 곳, 열린 공간이라면 전 공간에 퍼져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의 입자일지라도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으로서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관찰하면 어느 한 곳에 점 입자로 나타난다.’는 것은 관측결과이다. 이것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그냥 관찰 결과 가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자연이 내 뜻대로 행동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다. 자연현상, 즉 자연의 생긴 모습에는 쉽고 어렵고가 없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이 파동을 실체가 없는 파동으로 해석하고 ‘확률파(確率波)’라 이름 짓고 이론을 정립한다. 그 때 ‘이 이론적 해석은 어렵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삼라만상이 본질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본 선승들은 “언어도단 심행처멸 불립문자 교외별전(言語道斷 心行處滅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것이다.』 - 김성구

즉,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소불급(言所不及), 말이나 글로는 법을 담아낼 수도 없고, 또한 추구할 수도 없다는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문구들이다.

그리고 한결같이 말과 글이 전부 비었고 없다고만 한다면 과연 무엇으로써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옛 성인들이 우리에게 전하려 했던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도구가 말과 글뿐이라면, 이때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진지한 수행자라면 여기서, 왜 말과 글은 깨닫는 데에 전혀 소용없는 것이라고 곧장 말하지 않고, 말길이 끊어졌다거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거나, 혹은 말로는 미치지 못할 바라고 에둘러 말한 이유를 깊이 되짚어 봐야한다.

이 길에 들어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우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말의 구조와 기능을 잘 살펴봐야 한다. 우리 범부 중생이 쓰는 모든 말은 그 어미(語尾)가 궁극적으로 '이다' 혹은 '아니다'로 끝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선택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언어습관 속에 젖어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런 이분법적 선택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범부가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본래 스스로 원만하건만 말은 그 자체가 이미 치우쳐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말로는 그 온전한 진리 전체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로는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 - 단어란 그 통용되는 것 자체로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고 통제하는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인민’이란 말을 보자, 인민(人民)의 일반적인 의미는 선량한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덧씌워 ‘인민민주주의니’, ‘인민군’이니 해서 일반적 의미의 ‘인민’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쓴다. ‘동무’란 친한 친구란 말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쓰는 ‘동무’란 말은 친한 친구란 말이 아니다. ‘이념이 같은 동지’란 뜻으로 쓴다.

언어 - 단어란 그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파편들이다. 우리가 올바른 단어마저도 함부로 구사하지 못할 정도의 사회라면 그 사회는 왜곡이 심각한 상태라는 반증인 것이다.

옛 선현들이 말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고, 그저 농으로 해왔던 말이 아니다. 말이란 그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써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언어가 도용되고 오염되면, 그 사회는 바로 설수 없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말 한마디에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백 마디 말보다도 서슴없이 실행하는 진실한 행동이 더 중요하다. 한 개의 사과도 자신이 직접 만져보고 먹어봐야 그 모습과 맛을 제대로 알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그 모양이며 참 맛을 정확히 끄집어낼 수 없다.

말이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 미치지 못하는 더 중요한 영역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의 심연은 그렇게 말을 떠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그 심연의 정원으로 들어서려면 어찌 할 것인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무의미한 말은 없다. 말에는 의미가 있다. 무엇을 지향하고 지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내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 있기에 거기엔 ‘나’라는 자아의식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에고가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인간의 사유작용에서 나온다. 생각이 말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각, 즉 이성은 대상을 헤아리고 나눈다.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를 분별한다. 그래서 그것은 내 주관적인 선입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할 때는 너무 그리워 아름답게 보이던 연인도 사랑이 식어 헤어질 때면 꿈에도 보기 싫은 사람으로 변한다. 그렇게 생각은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색안경을 씌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본다. 심지어는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진실이라고 우겨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과 갈등이 생긴다.

그렇게 내 생각에 함몰돼 입을 연 즉 본질과는 십만팔천 리 멀어진다. 그래서 입을 여는 순간 등지는 것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입을 여는 순간 그 즉시 틀려버린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벗어난다. 동념즉괴(動念卽乖)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이어 어긋나버린다는 말이다. 어떤 생각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어의 한계, 표현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을, 현실을, 진실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말과 생각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말과 생각의 작용으로는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 또한 말을 떠나 있다. 언어로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마음으로 분석하고 추측하고 헤아려서는 알 길이 없다.

깨달음의 세계 그 자체, 나 자신의 말로는 표현할 말길이 끊어진다. 그렇게 말길이 끊어지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한다.

말길만 끊어지지 않는다. 그 말을 움직이는 마음작용 또한 사라진다. 마음의 길도 끊어져 마음으로 생각하고 추리하며 판단하는 작용 또한 자취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길도 사라져 종적이 묘연하기 때문에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한다. 진리는 그런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또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작용이 멈출 때가 있다.

바로 화두를 들 때이다.

화두는 모든 말의 작용은 물론 생각의 작용을 차단한다. 생각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여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도저히 그곳을 피해나갈 길이 없다. 바로 그 순간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간절히 의심한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는 그 순간 의심 삼매에 들어 생각이 길이 끊어지는 것이다. 알음알이가 작용을 멈추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문관(無門關)>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전개된다.

수산 성념(首山省念, 926~993) 선사가 죽비를 들고 대중에게 말했다. 수산 성념 선사는 임제 선사의 4대째 후손으로 중국 송(宋)나라시대의 승려이다.

“여러분,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죽비라는 모습에 걸리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그것도 역시 죽비가 아니라는 모습에 걸리게 된다.”

이에 대해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묻는다.

“죽비라 부르면 집착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고 하니, 말이 있어도 안 되고 말이 없어도 안 된다. 속히 말해 보라. 속히 말해 보라.”

여러분도 말해보시라. 말하는 순간 벗어날 것이다. 무엇도 맞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생각의 작용이 끊어진다. 생각의 작용이 끊어지면 본래 부처의 모습이 드러난다. 청정한 우리들의 본래모습이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화두를 들게 되면, 우리는 부처의 자리로 들어간다.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 그 순간 모든 말의 작용과 생각의 작용이 멈추기 때문에 본래 그 자리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본래 그 자리는 공의 자리요, 무아의 자리며, 무념의 자리며, 부처의 자리다.

새가 날아가는 길을 조도(鳥道)라 한다. 새가 날아가는 길은 자취가 없다. 가을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자취가 보이자 않는다. 지나간 흔적조차 없다. 그렇게 그 길은 찾을 수가 없다. 화두 역시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진리 또한 생각과 말의 흔적이 없다.』 - 고명석

그래서 승찬(僧璨) 대사는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했다.

「절언절려(絶言絶慮) 무처불통(無處不通)」이라고,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게송의 앞 구절이 「다언다려(多言多慮) 전불상응(轉不相應)」이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지극한 도와 더욱 상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말이 많으면 진실과 거리가 멀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없다고 한다. 말을 줄이고 잡스러운 생각을 끊으면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말로써는 겨우 감정의 일부밖에 전달이 안 된다.

고요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는 결코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가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한 것이다. 언설이나 글자로도 표현할 길이 없고 마음으로도 어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의 이원성이 우리 안에서 사라져서, 모든 헤아림이 멈추고 ‘가려서 택하는’ 분별과 몸짓이 정지함을 가리킨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진다. 가려서 선택하는 그런 마음, 그런 말을 끊을 때, 진리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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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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