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미래 100년의 비전 : 사회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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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감폭력의 과정
평화를 사전에서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폭력이 없어 본 적은 없다. 어떤 형태든 폭력은 지속되어 왔다. 그렇다면 평화에 대한 좀 더 현실감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 그 대안 중 하나가 평화를 ‘폭력을 줄이는 과정’ 즉 ‘감폭력(減暴力)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폭력을 줄이고 줄여 궁극적으로는 폭력이 없는 상태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평화이다. 평화학은 이러한 평화를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이다.
그런데 《불교평론》에서 평화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와 평화의 관계, 평화학적 평화가 불교학적 지향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아보면서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평화유지
예나 이제나 세계 곳곳에서는 온갖 폭력이 갖은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제일 먼저 상상되는 폭력의 유형은 주먹질이나 전쟁 같은 ‘물리적 폭력’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가자 지구)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전쟁 직전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곳도 부지기수이다. 개인의 주먹질이나 칼부림과 같은 물리적 폭력은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흔하다.
만일 이런 폭력이 내 옆에서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말려야 할 것이다. 책임의 소재를 따지며 시비를 가리는 것은 다음 일이다. 어떻든 당장의 싸움을 말리면 그 이상의 끔찍한 사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원리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폭력의 당사자들과 이해관계가 있을 때 그렇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폭력의 행사자가 나와 가까운 관계자일 경우는 그 폭력에 소극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가해자 편을 들기도 한다. 내가 폭력의 피해자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피해자가 당하는 폭력을 관망하거나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고생 좀 하라’며 도리어 피해자를 조롱할 수도 있다.
국가 단위로 가면 평화는 더 어려워진다. 개인들의 정치 ·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까닭에 국가는 한 가지 분명한 입장을 정하기가 힘들다.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면 주변국에서 중재하고 말려야 하지만 국익, 정권, 국내 정치, 지정학적 이유 등과 얽히면서 중재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거나, 상황을 자국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면서 전쟁이 격화되기도 한다.
평화는 이러한 난제를 푸는 과정이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싸움을 말리고 멈춰 세워야 한다. 그래야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런 행위를 ‘평화유지(peace keeping)’라고 한다. 전쟁을 말려 그 이전 상태를 유지하는 행위, 폭력을 멈추어 폭력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전쟁을 멈추고 무고한 생명이 더 희생되지 않도록 하는 행위이다.
왜 생명을 죽이면 안 되는 것일까. 당연한 전제와도 같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오래전부터 강하게 체화해 온 전통은 불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호 관계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실유불성”(《涅槃經》 〈四倒品〉)의 세계관에 따라 모든 존재자를 존중해 온 불교는 ‘평화유지’의 이론과 원리를 가장 탄탄하게 견지해 온 전통이다. 불교에서 ‘불살생’을 최고의 계율이자 윤리로 삼는 이유도 이런 세계관에 있다. 불자라면 폭력 축소의 책임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불교적으로 보면, 평화유지의 과제는 인지상정 그 이상의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정언명령’과도 같다. 평화유지가 불교적 실천의 실질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평화조성과 물리적 폭력
싸움을 말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이상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가 더 근본적이다. 국가 간 물리적 분쟁을 멈춘 뒤, ‘정전협정’을 맺고 ‘종전선언문’을 작성해, 다시는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문서 등으로 보장하고 증인을 세우는 일이 그 사례이다. 그렇게 하는 데에 당사자는 물론 중재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래야 더 이상 물리적 폭력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좀 더 안정적인 환경이 확보된다. 물리적 폭력을 멈출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도록 서로 간에 약속하는 이런 과정을 ‘평화조성(peace making)’이라 한다.
평화조성은 정전협정이나 종전선언과 같은 약속을 지키는 행위에 기반해 있다. 서로를 속이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핑계를 대지 않으며, 약속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을 줄이거나 끊는 데에 언어적 이해와 문자적 합의 등 정신적 세계를 개입시킨다는 점에서 평화조성은 평화유지에 비해 좀 더 성숙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애당초 살생이 일어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살생을 멈추는 행위 이상으로 더 큰 평화에 기여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 그 자체로 불교적이다. 서로 정한 약속을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不妄語], 나아가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불교적 실천이다. 평화조성 행위 그 자체로 불교적이고, 불자의 사회적 책무가 되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
그런데 현실에서는 서로 간에 맺었던 약속을 무시하거나 파기하는 일도 벌어진다. 어렵사리 조성된 평화가 깨지는 경우도 많다. 상황이 변했거나 이해관계가 달라졌거나 예상 밖의 변수를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것은 폭력이 거대한 규모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 집단, 국가 단위에서의 양극화, 권력 집중, 정치 경제적 독재 등, 개인이 조심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해결되기 힘든 ‘구조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집단 등 당사자 간 문제가 해결된 듯 해도,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그 당사자를 둘러싼 환경이 누군가에게 좀 더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폭력이 구조화되어 있다면, 즉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다면 어떤 협정문을 지킬 때 더 유리한 측과 불리한 측으로 나뉠 수 있다. 기존의 평화조성 약속을 지킬수록 어떤 이에게는 손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 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당사자 간 약속이 도리어 장기적 불평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애당초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국제사회의 구조를 좌우하는 더 큰 세력이 이스라엘에 좀 더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 놓은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조적 폭력이 계속되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폭력의 문화화 혹은 ‘문화적 폭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 습관이나 종교적 이념 등으로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힘을 ‘문화적 폭력’이라고 한다. 성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에서는 특정 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불평등을 감내해야 한다. 애당초 불평등을 불평등으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문화적 폭력이다. 가톨릭에서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도 오늘의 눈으로 보면 문화적 폭력이다. 종교, 정치, 경제의 리더가 주로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딱히 문제의식이 없는 것도 문화적 폭력이다. 나아가 자유경쟁을 당연시하고 양극화를 필연적이라고 간주하는 경제적 인식도 일종의 문화적 폭력이다. 폭력이 문화화되어 있으면 구조적 폭력을 잘 보지 못하거나, 그 폭력을 당연시할 가능성이 크다. 구조적이고 문화적 폭력까지 극복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평화를 일체의 폭력을 줄여가는 감폭력의 과정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평화구축과 불국토
이렇게 온갖 폭력을 축소해 가는 과정을 ‘평화구축(peace buil-ding)’이라 한다. 평화구축은 일체의 폭력을 없애 가는 다각도의 실천적 과정이자, 그렇게 축소되어 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평화유지’ ‘평화조성’ ‘평화구축’ 등의 용어는 얼핏 그저 좋은 말로 들리고 다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평화학에서는 세 범주를 구분해 사용한다.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리면 아래 그림과 같다.
이 그림에 담겨 있듯이, 평화조성은 평화유지를 포함하는 과정이고, 평화구축은 평화조성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물론 사람이 사는 곳에 폭력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폭력 없는 세상을 지향해 나갈 뿐이다. 평화구축은 평화유지와 평화조성을 포함하는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영역이다. 일종의 ‘대문자 평화(PEACE)’를 이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유지, 조성, 구축이 시간적이고 단계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동시에 다양한 양상으로 곳곳에서 벌어진다. 어디선가는 평화가 유지되지만, 어디선가는 다시 깨지고, 어디선가는 평화가 조성되다가, 어디선가는 다시 후퇴한다. 어디선가는 평화가 구축되는 양상을 일부 보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 중요한 것은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없어야 한다는 인식과 공감대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평화학은 불교학의 세속적 표현
평화구축을 불교 언어로 하면 ‘불국토’를 세우는 과정과 같다. 세계의 ‘정토화’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 집단, 국가 간에 서로를 살리는 행위, 상호 긍정으로 조화와 균형을 확장해 가는 과정, 이렇게 상생하고 협력하는 사회를 ‘불국토’가 아닌 어떤 용어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전술했듯이 “살아 있는 것들에는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涅槃經》 〈四倒品〉).” “살아 있는 것들에는 여래장이 있다(一切衆生有如來藏 《寶性論》 〈如來藏品〉).”고도 한다. 인간은 물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귀중하고 존엄하다고 말해 주는 최고의 메시지이다.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불교적 이유이자 요청의 근간이다. 평화는 존재하는 것들의 무차별성,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상호 관계성의 지혜로 뒷받침될 때, 그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평화학은 물리적 폭력을 멈출 뿐만 아니라, 그 폭력의 행사 가능성 자체를 축소해 가면서, 궁극적으로는 폭력 자체가 사라진 세상을 꿈꾼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불국토를 구체화하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학은 불교학의 세속적 표현인 셈이고, 평화는 개인의 내적 안정감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원의 균형과 조화까지 도모하는 일은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평화는 불교의, 평화학은 불교학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불교의 이름으로 어찌 평화에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
이찬수 chansuyi@hanmail.net
서강대 화학과를 거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HK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교양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이자,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평화, 평화학, 불교의 역할 / 이찬수 - 불교평론
평화는 감폭력의 과정평화를 사전에서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폭력이 없어 본 적은 없다. 어떤 형태든 폭력은 지속되어 왔다. 그렇다면 평화에 대한 좀 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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