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세계)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28천
욕계 제2천인 도리천은 지상에 있는 가장 높은 신들의 세계이다.
따라서 도리천이 지상의 가장 높은 장소인 셈이다.
이 도리천 위에 도합 26개의 하늘나라〔26天〕가 층층이 쌓여 있으며
그 맨 위의늘의 세계마저 뛰어넘은 것이 붓다의 세계이다.
옛 신라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오는 불국사에 가보면,
거기 부처님 나라가 아름답게 조형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그 불국의 터전으로 들어서려면 옆으로 빙 돌아서 측면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원래는 거기 청운교 백운교로 곧바로 올라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마주 앉아 감로법을 전하는 신성한 공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청운교과 백운교의 돌층계 계단수는 총 33개 이다.
이는 33천인 도리천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도리천 위에 큰 사찰의 불이문(不二門)에 해당하는 자하문이 우뚝 서 있다.
불이(不二)란 번뇌와 해탈, 속(俗)과 성(聖)더러움과 깨끗함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에,
불이문은 번뇌와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 세계로 이르게 한다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번뇌가
둘이 아닌 경지로 이끄는 지극히 언어도단적인 불교의 정신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도리천을 지나서 다시 그 위 창공에 층층이 솟아 있는 하늘나라를 오른 후
그 불국으로 진입하는 막바지에 그러한 불이문이 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공간상에 구축해 내기란 굉장히 난해한 작업이어서 그렇게 깨달음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조형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거기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생략된 공간을 설명해 가면서
나머지 천(天)에 대해서 얘기해 본다.
천상에 있는 욕계 4천의 세계 도리천 위 공중에는 야마천(夜摩天: 閻摩天)이 있다.
수미산 정상으로부터 8만 유순(56만 킬로미터) 높이의 상공에 있는데,
거기 공중 궁전 비나나(vinana)에 그곳의 주인인 야마(yama)가 거주한다.
야마는 최초의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최초로 죽은 자이기도 하다.
그는 죽음의 길을 개척해 나갔으므로 그 후 죽은 이들은 그 길을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야마는 죽은 이들과 더불어 야마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 왕국이 하늘에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은 낙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야마는 지하 아귀계(死者의 세계) 왕으로도 군림하게 된다.
여하튼 그것은 서사시 시대에 전개된 나중의 일이다.
야마가 다스리는 야마국, 원래 그곳은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이었다.
아마 경전에서 말하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죽어서 천상에 간다는 그 하늘나라가 여기인 듯싶다.
이곳 야마천에서는 음욕이 경미하여 포응만 하여도 서로 기쁨을 누린다.
이곳이 욕계 제3천이다.
야마천 위에는 도솔천(兜率天)이 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미륵(彌勒)보살, 내지는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 머무는 곳.
그 도솔천의 산스크리트 명이 투시다(tusita)로서,
그것은 만족시킨다는 동사 원형 투스(tus)에서 나온 말로 모든 것이 만족된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족천(知足天)으로 번역되며 상족(上足), 묘족(妙足), 희족(喜足)도 그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 음역이 도솔천 또는 도사다천(覩史多天)이다.
여기서는 음욕이 더욱 경미해셔 서로 손만 잡아도 만족된다.
그렇지만 이곳도 욕심의 세계이기에 욕계 제4천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실 도솔천은 극락정토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도솔정토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솔천 위의 욕계 제5천이 화락천(化樂天)이다.
산스크리트 명은 니르마나 라티(nirmana - rati)로,
니르마나는 자유스러운 변화 내지는 창조를 의미하고 라티는 즐거움을 뜻한다.
신통력을 부려 자신의 욕망을 질적으로 잘 변화시켜 즐거운 생활을 하기에
화자재천(化自在天), 또는 낙변화천(樂變化天)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수니르 미타, 마주 서서 웃기만 하여도 음욕이 만족된다.
화락천 위에 욕계의 마지막 천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산스크리트 명은 파라니르마나 바샤바르틴(paranirmana vasavartin).
'파라(para)'는 자기가 아닌 상대방이며 니르마나는 앞서 말한 변화나 창조, 바샤바르틴은 통치하다는 뜻.
결국 이 말은 자신만이 아닌 남으로 하여금 그 욕심의 경지를 욕심이 아닌 것으로 돌려 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타화락천(他化樂天)으로 한역되기도 한다.
서로 보기만 하여도 음욕이 만족된다.
이곳의 주인은 자재천주(自在天主)이다.
이상이 사왕천과 도리천과 더불어 욕계 6천의 전부이다.
여기서는 한 단계 한 단계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라갈수록 욕심이 경미해지기는 하지만
아직 감각적 본능적 욕망인 식욕과 음욕이 살아 있어서 그 욕심의 테두리에서 기쁨을 누린다.
욕심을 떠난 색계(色界), 형태를 떠난 무색계(無色界) 이러한 천상의 세계는
지상과 지하의 세계와 더불어 독특한 불교의 세계관을 형성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그 세계 위에 선정(禪定)의 세계가 펼쳐진다는데서
불교의 독창적인 모습이 확연하게 들어온다.
그 선정의 세계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이다.
색계에는 18천이 있고 무색계에는 4천이 있어 도합 22천인데,
이것을 앞에서 말한 육계 6천과 합치면 28천의 세계가 전개된다.
색계 18천, 그곳은 식욕과 음욕 등 모든 욕심을 떠나 있으며
물질이 청정하고 훌륭하게 자리잡힌 세계이다.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음식도 필요 없고 분노도 없다.
그에 따라 배설된 분뇨도 있을리 만무하다.
바로 육심이 없는 형상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사는 생명들은 어디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평정한 무심으로 마음이 통일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형상의 속박으로부터는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러한 욕심을 떠나 마음에 평정이 가득 넘치는 단계를 선정(禪定)과 연관시켜 보았다.
여기에서는 4가지 선(禪)이 전개된다.
우선 초선(初禪)의 단계에서 욕계(欲界)를 자각하고 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정을 얻는다.
그 결과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는데, 그만 여기서는 그 기쁨과 즐거움에 묶이고 만다.
신들 중에 최고신인 범천(梵天) 브라마(brahma)가 초선에 머문다.
상세히 말하자면 여기서는 밑에서부터 차례대로 3개의 하늘이 펼쳐지는데,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이 그것이다.
대범천이란 바로 브라마를 말하며, 범중천은 대범천이 다스리는 백성들,
범보천은 그를 옆에서 보필하는 신하나 식구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색계에 들어서더라도 초선의 단계에서는 힌두 신화가 엿보인다.
범천은 힌두교의 최고신으로도 군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천도 불교의 선(禪) 속으로 들어왔으므로 신 그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신이 상징하는 이욕(離欲)과 정행(淨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사다가타 아키라(定方 晟) 교수는 말한다.
부파불교의 학승들은 인도 신화에서 중요한 범천의 자리를 그렇게 확보했을 것이다.
제2선은 제1선에서 맛본 기쁨과 줄거움에서 떠나기 위해서 선정하는 단계이다.
여기서는 마음이 고요한 삼매에 들어 대상을 헤아리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그러한 삼매에서 얻어지는 기쁨에 얽매이게 된다고 한다.
아직도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소광천(小光天), 무량광천(無量光天), 극락광천(極樂光天)이 전개된다.
바로 빛으로 상징되는 덕으로 충만된 세상이다.
화엄경에서는 이곳에 광음천자(光音天子)가 머물며 희광적정(喜光寂靜)의 법문에 안주한다고 말한다.
제3선에서는 삼매의 기쁨에도 구속되지 않고 마음이 평범한 무관심의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개념으로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의 상태라고 말할까.
기쁨도 없고 줄거움도 없다.
그러니 여기서도 참된 기쁨인 묘락(妙樂)은 있다.
아마 진리 그 자체와 하나가 되었을 때의 기쁨으로 전혀 호들갑을 떨지 않는 적정한 상태에서의 흡족함일 것이다.
여기서도 밑에서부터 소정천(小淨天), 무량정천(無量淨天), 변정천(遍淨天) 3개의 하늘이 층층이 전개되는데,
화엄경에서는 이곳의 주인을 변정천이라 부른다.
제4선은 모든 감각과 분별에서 벗어나 청정한 상태로, 기쁨과 즐거움을 초월한
그야말로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이 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8개의 하늘이 그야말로 높푸르고 선명하게 미세한 차이를 간직하면서 솟아올라 있다.
화엄경에서는 과실천자(果實天子)와 정거천(淨居天)이 이곳의 우두머리가 되어 머문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형상에 대한 속박이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색계 18천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무색계(無色界) 4천(天)이다.
이곳은 물질을 떠나 깊이 선정에 든 자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사실 공간의 개념을 떠나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첫재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은 공무변처정(空無遍處定)에 들어선 사람이 머무는 하늘로,
내외의 모든 물질과 대상을 공(空)으로 관한 결과 마음이 허공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허공이라는 어떤 것을 사고 대상으로 삼아 거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둘째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은 마음이 허공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애서 빠져나와 일체의 사고 대상이 배제된 세계,
그래서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접어든, 식무변처정(識無遍處定)에 들어선 사람이 머무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고의 대상을 모두 배제했다'는 '사고〔의식〕가 존재한다.
셋째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은 그러한 의식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소유의 세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는 그 '없다'는 생각에 구속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공(空)이나 무(無)에 얽매어 있는 것이다.
넷째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다.
비상(非想)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머물러
그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매몰되기에 비상(非想)을 부정해서 비비상(非非想)이라 한 것이다.
이것마저 부정하면 비비비상(非非非想)이 될텐데, 그렇다면 '생각한다, 안한다'라는 방식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비상' '비비상'이라는 형식으로 동시에 부정하면서 거기서 빠저나오는 것이다.
그 이상 사유를 진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것마저 부정한다.
왜일까?
거기에는 “사유”라고 하는 미세한 인위적 조작이 아직까지 꿈틀대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티끌이나 흔적마저 자취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멸진정(滅盡定)이라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것은 바로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합한 28천 모두는 조작된 유위(有爲)의 세계,
곧 집착의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멸한 자리다.
거기서 불이(不二)의 경지, 유마거사의 침묵이 사자후를 토하는 것이다.
불국사의 자하문은 그러한 불이의 이치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것이다.
마음과 세계, 그리고 나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은 마음 상태에 따른 외계 대상의 모습이
바로 여러 가지 세계와 거기에 사는 존재들로 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은 마음이 그려낸 세계라는 점에서, 아니 그렇게 마음이 투영된 세계라는 점에서,
지옥을 비롯한 욕계의 중생도 이 마음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에 따라서 이렇게 다양한 세계가 명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가 진정 마음의 세계일 뿐인가 하는 점은 쉽게 단정을 내리기 곤란할 듯하다.
아무튼 그런 존재의 세계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는 없다.
마음과 외적인 대상은 불이적(不二的)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색계와 무색계는, 아니 욕계마저도 마음의 수행 정도에 따른 구체적인 세계의 전개라는 점에서
욕계에서 무색계로의 진입은 깨달음이 점진적으로 무르익어 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맨 밑바닥의 지옥에서 인간과 신의 나라로, 그리고 깨달음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 인생관은 마치 장대한 파노라마와 같은 웅대한 스케일로 펼쳐진다.
거기서 느껴오는 인생 여정의 감흥은 번연의 『천로역정』이나 단테의 『신곡』보다 더 짜릿하다.
지옥에서부터 축생으로, 인간으로, 다시 신으로, 더 나아가 붓다의 세계로 접어드는 상승의 과정이
깨달음으로의 길이라면, 그 반대 방향으로의 전개는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불 보살들의 자비행이다.
이 속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이며 사건들이 불교의 정신으로, 문화로 여울져 흐르고 있다.
더불어 그 속에 내가 있음을 느껴 볼 일이다.
나는 어디로 향하고자 함인가?
인간이 한 형태의 유한한 모습에서 또다른 유한성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사슬은
깨닫지못하는 한, 무한하게 이어진다.
끝없이 생사하는 것이다.
당장에 고통이 실어서 죽음을 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또 다시 생이 시작되어 고통이 이어진다.
이렇게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 무한하게 생멸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저에 허무가 실존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윤회의 싸이클에는 인간의 형태를 비롯하여 다른 이류(異類:지옥, 축생 등의 나머지)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 인간 자신에 대한 철저한 직시는 인간으로서의 현재 나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거기에 갖가지 존재 유형이 포함되는 전체 지평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실존의 입장에 섰을 때이다.
우리는 시간적으로 끝없이 생사하고 공간적으로 여러 이류를 포함하여 생사한다.
유한성의 끝없는 윤회(유한성의 순환 과정)는 인간과 다른 모든 류를 포함한 지평에서의 끝없는 역정(歷程)이다.
윤회를 실존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렇게 세계 내에서 여러 가지 굴레로 끝없이 생사한다.
그 속에는 허무가 깊이 잠재해 있다.
그 허무 위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 업을 쌓아나가면서 또다시 업에 밀려 다양한 모습으로 생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는 것은 고통이다.
아니 끝없는 생사의 이율배반 그 자체가 고통이다.
거기에다 허무는 더욱 지독한 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실존적인 고통이다.
우리는 이 허무를 직시해야 한다.
그러한 허무를 직시해야만, 그 허무를 뛰어넘으려는 결단을 통해서만 그것으로부터의 초월이 가능하다.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는 그의 주저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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