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6-1. 6-2. 6-3. 7. 8
6-1 칼날위의 일
上堂(상당)에 僧問(승문), 如何是劍刃上事(여하시검인상사)오 師云(사운), 禍事禍事(화사화사)로다 僧擬議(승의의)한대 師便打(사편타)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칼날위의 일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어떤 스님이 칼날위의 일을 물었다.
여기서 칼날위의 일이란 달리 말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요량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말한다.
일대사(一大事)며 본분사(本分事)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칼날위의 일”이라고 한 뒤, 대답하라고 하므로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며, 일대사며, 본분사인가?
수행도 붙지 못하는 자리이며, 깨달음도 붙지 못하는 자리인가?
임제스님은 후려쳤지만 나는 “할!”이다.
6-2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問(문), 祇如石室行者(지여석실행자)가 踏?忘却移脚(답대망각이각)은 向什?處去(향십마처거)오 師云(사운), 沒溺深泉(몰익심천)이니라
한 스님이 물었다.
“저 석실행자가 방아를 찧다가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니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 버렸다.”
(강의)
석실행자는 청원(靑原)스님의 4세손인 석실선도(善道)스님을 말한다.
당나라 무종(武宗,814-846)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일로 인하여 스님은 속복을 입고 살았다.
그 후 법난이 끝나고 불교가 다시 회복되었으나 석실스님은 늘 속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행자(行者)라고 불리게 되었다.
석실행자는 정진이 순일하여 디딜방아를 찧다가 생각이 끊어져서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특기할만한 일이라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뜻에서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서 죽어버렸다.”라고 했다.
일대사인연을 깊이 참구하다가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그와 같은 무심(無心)의 경지에 든 것도 드문 일이긴 하나 옳은 공부는 아니다.
방아를 찧는 사람이라면 방아를 잘 찧어야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목석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암담하지 않은가. 멀쩡한 사람이 목석이 되다니.
천하의 육조스님도 방아를 찧으며 행자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리를 옮기는 것을 잊은 적은 없었다.
6-3 모두가 착각이다
師乃云(사내운), 但有來者(단유래자)하면 不虧欠伊(불휴흠이)하야 總識伊來處(총식이래처)로라 若與?來(약여마래)하면 恰似失却(흡사실각)이요 不與?來(불여마래)하면 無繩自縛(무승자박)이니 一切時中(일체시중)에 莫亂斟酌(막란짐작)하라 會與不會(회여불회)에 都來是錯(도래시착)이라 分明與?道(분명여마도)하야 一任天下人貶剝(일임천하인폄박)하노라 久立珍重(구립진중)하라
임제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였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을 나는 조금도 잘못보지 않는다.
그가 온 곳[견해·공부의 수준]을 모두 안다.
만약 그와 같이[석실행자처럼 되어] 온다면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그와 같지 않게 온다면 그것은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언제든지 함부로 이리 저리 짐작하지 마라.
‘안다, 모른다.’ 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나는 분명히 이와 같이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래 서 있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강의)
앞서 석실행자의 무심이 된 공부에 대하여 평하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석실행자의 그와 같은 공부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다.
불교공부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목석처럼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선시에 “무심(無心)을 도(道)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힌 상태니라
[莫言無心云是道(막언무심운시도) 無心猶隔一重關(무심유격일중관)].라고 하였다.
보고 듣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활발발한
무위진인의 삶을 주창하는 임제스님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공부다.
큰 사람 큰 장용이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무너트리는 마당에,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자리에 목석이라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천하 사람들이 다 욕하고 헐뜯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말씀인가.
만약 공부가 석실행자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그리고 안다.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가 죽은 말이다.
앞서서 내가 그 예를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쯤하고 모두들 돌아가 쉬어라.
7 고봉정상과 네거리
上堂云(상당운), 一人(일인)은 在孤峯頂上(재고봉정상)하야 無出身之路(무출신지로)요 一人(일인)은 在十字街頭(재십자가두)하야 亦無向背(역무향배)니 那箇在前(나개재전)이며 那箇在後(나개재후)오 不作維摩詰(부작유마힐)하며 不作傅大士(부작부대사)하노니 珍重(진중)하라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고봉정상에 있어서 몸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으면서 또한 앞뒤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가[누가 더 나은가]?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편히 쉬어라.”
(강의)
말이 있는 것이 옳은가? 말이 없는 것이 옳은가?
길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고 높은 봉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다.
쉽게 풀이하면, 높고 높은 봉우리에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사람과 어디든 갈 수 있는
네거리에 있으면서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하는 사람과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라는 말이다.
고봉정상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알겠는데 네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꿔 해석하면 사실은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교학에 전간문(全揀門) 전수문(全收門)이라는 것이 있다.
일체를 부정하는 길과 일체를 긍정하는 길이다.
고봉정상은 일체를 부정하는 입장이고, 네거리는 일체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공(空)과 유(有)의 경우다.
공이든 유든 모두가 치우친 견해다.
변견(邊見)이며 편견이다.
그래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도가 아니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불교가 아니다. 진정한 삶의 길이 아니다.
둘 다 틀린 것이다.
거기서 더 나은 사람을 묻는 것은 장난이다. 덫이다.
유마대사는 유마경에서 불이(不二)법문을 말이 없음으로 표현하여 문수보살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말이 없음[杜口]으로써 그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전간문의 삶이다.
그러나 부대사(傅大士,497-569)는 그와 반대의 입장이다.
설법을 많이 한 분이다.
그래서 사방에서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왕궁에도 출입하며 법을 설했다.
저서도 있다. 남달리 전법활동을 많이 하여 다 수용하면서 살았다.
그는 전수문의 삶이다.
임제스님은 경고한다.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하지만 임제스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면 왈, “유마힐도 되고 부대사도 되거라.”
임제스님은 쌍차(雙遮)로 보이고, 필자는 쌍조(雙照)로 보였다.
그래서 결국은 차조동사(遮照同時)가 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독자들은 알아듣기 쉬울지 모르나 여운이 없다.
역시 임제스님의 말씀으로 끝나야 한다.
8. 집안과 길거리
上堂云(상당운), 有一人(유일인)은 論劫在途中(논겁재도중)호되 不離家舍(불리가가)하고 有一人(유일인)은 離家舍(이가사)호되 不在途中(불재도중)하니 那箇合受人天供養(나개합수인천공양)고 便下座(편하좌)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에 있으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한사람은 집을 떠나 있으나 길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人天供養(인천공양)]을 받을 만한가?” 하시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앞에서는 치우친 견해를 들추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이면으로는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보다 조화로운 경우를 말하고 있으나
실은 앞의 사람은 전수문(全受門)의 삶이고, 뒤의 사람은 전간문(全揀門)의 삶이다.
긍정과 부정의 관계다.
본문을 달리 표현하면, 예컨대 한 사람은 언제나 바깥에 있으면서 집안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집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경우가 실은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
이(理)와 사(事)의 두 면을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잘 처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다 치고,
이와 사 어느 것도 관계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사를 한 가지도 관계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할까?
실은 이와 사에 있어서 어느 면에서도 그와 같이 물들고
집착하지 않은 자세[中道]가 되어야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들의 설법원칙인 중도(中道)에 기준하여 해석한 것이다.
본래 이 내용의 원형은 이렇다.
문수는 언제나 집안일[理(이)·智(지)]을 담당하지만 바깥일[事(사)·行(행)]에도 어둡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바깥일을 담당하지만 집안일에도 어둡지 않다.
좌와 우, 아내와 남편, 이판과 사판, 국민과 정치인, 동양과 서양, 물질과 정신 등등
모든 상대적인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조화[中道(중도)]를 뜻한다.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를 부처님이라고 할 때 그를 문수와 보현의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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