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 수행
숨 한 번에 모든 불국정토(佛國淨土)가 거기 있다.
숨이 천지창조이며 생명이며 삶이다. 오직 지금 그대가 살고 있음을 의식하라 ! 그 의식의 챙김이 깨어 있으면 그대는 행복할 것이다.
불법은 “darista dharma sukka vihara“ 지금 행복하게 머무는 것‘이며 ‘Madithaion is art’ 명상은 예술이다‘라는 틴낫한 스님은 ‘마음챙김의 에너지가 진여(眞如)이며 일심(一心)’이라 했다.
현대적인 참선은 ‘ 지금 여기서 스스로 그러한 생명작용 이며 삶’이다.
1) 참선수행의 목적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는 열반의 삶이며 나아가 가족과 이웃 모든 것들과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불교의 핵심 정신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이며 생사해탈(生死解脫)과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본질이다.
또한 부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불법의 이치를 전하러 온 것이며 그 이치를 바르게 알고 수행하여 스스로 구원됨을 자각(自覺)하게 하는 종교인 것이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이다. 자기 마음의 오염(汚染)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 자기의 본래 성품)의 참 모습을 본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妄想)과 집착(執着)이며, 자성이란 곧 여래(부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無二無別].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기의 여래 지혜와 덕상을 증득(證得)하여 곧 부처가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중생인 것이다.- 허운 스님은 1840년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리는 불법의 대의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어렵게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럴까하며 법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법의 참된 이치를 적확하게 안다면 불법은 너무나 쉽다. 혹자는 세수하다 코만지는 만큼 쉽다고 한다. 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하면 수 십 년을 앉아서 참선을 한다 해도 헛일이다.
또한 불법은 지식이나 뜻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진리가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수행을 통해 바로 깨달음으로 불법과 하나로 계합되는 진리인 것이다.
8만4천의 방대한 경전이나 삼세제불과 수많은 역대 선지식들도 글과 말을 통해서는 오직 교학(敎學)적인 방편으로 불법의 진리를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불법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이며 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고 스스로 수행(修行)을 통해 그 대의를 몰록 깨달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법의 교학(敎學)과 수행(修行)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꿈속에서 살고 있다. 꿈속에서 살면서도 꿈속임을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이다. 우리는 이러한 꿈에서 깨야 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꿈 깬 것인가?
직접 꿈을 깨보지 않고는 절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흔히들 경험 혹은 체험으로 말하는데 사과의 맛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맛을 느낄 수가 없듯이 불법의 대의도 그와 같다.
깨달음을 아무리 구구절절이 설명해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불법의 대의를 알 수가 없다. 그렇듯 참선(參禪)수행이란 직접 몸으로 체득하여 스스로 체험을 통할 때 진정한 깨달음이라 한다. 물론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공부를 하고 선(禪)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생사해탈의 일대사 인연에 귀의 하는 일이다.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꿈속에서 살다보니 꿈같이 모르고 잊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초발심을 내고 깨달음을 증득하여 대 자유인이 되길 바란다.
2) 선(禪)의 유래
⓵ 인도 선(禪)의 발생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인도의《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사마타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禪定)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 戒·定·慧, 法身‘普身’化身, 佛‘法’僧 )
사무량심(四無量心: 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 身·受·心·法)
사성제(四諦: 苦·集·滅.道)
팔정도(八正道: 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⓶ 중국의 선(禪)의 전래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제(師弟: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⓷ 한국의 선(禪)의 전래
한국에 불교의 큰 선맥을 보면 신라의 원효대사에서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조선의 사명대사와 근세의 경허스님에서 오늘의 한국 선불교를 꽃 피우고 있다. 선불교는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기로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대부분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왔고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들 중에는 가지산문의 개조인 도의(道義)가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선사에게 선법을 받았고, 또 도윤(道允)이 남전보원(748~834)을 찾아가 예를 올리자 남전이 탄복하면서 ‘선종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고 탄식했다. 이것은 중국선의 법맥이 우리나라에 선종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도의(道義)선사가 조계종의 종조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중에서 참선수행은 그 핵심을 이룬다. 더구나 불교의 핵심 사상은 원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수행법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선의 사상이나 역사에 대한 책은 많은데 정작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드물고, 선법문을 하는 분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불법의 교학적인 기본 지식을 습득하면서 참선의 이론과 실제적인 참선 방법에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3) 선(禪)이란
선은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고 나와 우주의 참모습(眞面目)을 자각(自覺)하여 참된 주체(我)을 확립하는 수행이다.
참선(參禪)이란 참구한다. 참여한다는 의미의 참과 선이라는 말의 합성어가 참선이다.
선(禪)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참선(參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선(禪)은 인도(印度) 말인 범어(梵語)로 하면 디야나(Dhyana)라고 ‘고요함‘을 의미 한다. 한문으로 음역(音譯)하면 선나(禪那)라 하고, 일본사람들은 '젠나'의 '나'를 생략하여 그냥 '젠(zen)'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禪)으로 ’깊이 사유함‘으로 참선으로 통용된다. 일반적으로 참선(參禪)은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으로 불교의 대표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정심(定心)이므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정은 범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 삼매, 삼마지, 삼마야, 삼마제 등을 의역한 말로 마음이 고요하여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다. 삼매는 다른 말로 등지(等地)라고도 하는데 평등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선(禪)을 뜻으로 풀이하면,
1,기악(棄惡)- 선(禪)을 행하면 악을 버리고 나쁜 짓을 자연적으로 안한다는 말이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몸도 마음도 정화되어서 나쁜 짓을 못하게 된다.
2,공덕총림(功德叢林)-총(叢)은 떨기 총으로,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뜻으로 공덕이 하나 둘이 아니라 마치 숲 모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것이 공덕총림이다.
곧, 선을 닦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된다는 말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아는 것이고, 자기 번뇌를 다 알고 끊어 버리는 신통(神通)도 얻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도 얻고, 우주만유의 모든 음성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청각도 얻고, 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도 얻고, 그와 같이 모두를 알 수 있고 모두를 할 수 있는 그런 자재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덕총림 이다.
지금 수행자들이 그런 신통을 못하는 것은 선을 바르게 닦지 못 해서 그런 것이며 바른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가 정화(淨化) 되어서 악을 범(犯)할 수 없게 된다. 참선을 많이 했다고 하는 분들이 음식도 함부로 먹고 계행을 함부로 파계(破戒)하는 것은 참선을 많이 못한 탓이며, 참선을 많이 하면 모든 계행은 저절로 지켜지며 지혜와 덕성(德性)이 두루 조화롭게 성취하여 우리 인격완성의 가장 최고도의 수행방법이다. ※<위의 내용 중에 일부는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의 책과 법문 등 자료를 참고 하였음>
통융님의 블로그 1, 참선(參禪) 수행 (tistory.com)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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