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사덕(涅槃四德)-상 ․ 락 ․ 아 ․ 정(常樂我淨)>
고려시대 금동삼존불감(국보제73호)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 가지로 요약된 삼법인(三法印)이다. 그리고 이 삼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교의이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 부르기도 하며, 불교와 다른 종교 혹은 사상과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만큼 중요한 개념이다. 그 삼법인의 하나인 열반적정의 세계가 열반사덕이다.
<대반열반경> 가운데 나오는 말씀으로 열반의 네 가지 덕, 즉 상(常) ․ 락(樂) ․ 아(我) ․ 정(淨)으로서, 열반의 세계는 절대 영원하고, 즐겁고, 자재(自在)한 참된 자아가 확립돼 있으며, 청정하다는 불교의 이상세계를 말한다.
상(常)은 상주법계(常住法界)를 말하고, 낙(樂)은 안락(安樂)을 뜻하며, 아(我)는 진아(眞我), 정(淨)은 구경청정(究竟淸淨)을 말한다.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상(常)],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즐거움이 가득 찬[낙(樂)], 진아(眞我)의 경지로서[아(我)], 집착을 여의고 자유자재해서 걸림이 없고,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정(淨)] 경지를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열반’이란 사멸에 의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을 완전히 멸진한 적정(寂靜)의 경계를 말한다.
헌데 여기서 잘못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가 불교 가르침인데, 여기에서는 깨침의 세계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는 속제(俗諦)의 세계, 소아적 세계, 현상적 세계, 괴롭고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사바세계의 실상이다. 이러한 소아적인 것들이 극복된 진제(眞諦)의 세계가 바로 열반의 세계이다.
• 상덕(常德)---여기서 ‘상(常)’은 상주불변(常住不變)의 뜻인데,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멸과 변화가 없는 덕을 갖춘 것을 말하며, 상주불변해서 생멸이 없다는 말이다. 생멸이 없다는 말은 영생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누리시는 열반의 경지는 '항상하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반드시 없어지고 태어나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들이 사는 중생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의 세계이다. 하지만 부처님 세계는 나고 죽음을 벗어난 영원, 그 자체이다. 무상이 아니라 무한이다.
그리고 열반은 극락이요 해탈이며, 또한 불성이다. 그래서 열반까지 가야 '참 나' 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 열반의 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이 영생한다는 것이다.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체 존재는 무상한 것인데, 열반은 무상하지 않고,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이 항시 존재한다.
우리 생명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때그때 있다가 없어지고, 또 인연이 생기면 없다가도 생긴다. 그러나 우리 생명의 본체인 불성(佛性) 자리는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實相)이니까 항상 상(常)자를 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사는 세계가 항상 하다는 것과 열반의 항상 한 모습은 그 의미가 다르다. 현상세계가 무상한 줄 분명히 알면 불생불멸의 열반의 세계가 열린다.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고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게 돼지만,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 생명의 본바탕에 있는 그러한 공덕은 항시 존재한다는 말이다.
• 낙덕(樂德)---세상은 온갖 고통으로 꽉 차 있다. 생로병사에 따른 고통, 사랑과 미움에서 오는 고통, 욕망이 성취되지 못하는 고통 등 중생들에게는 수많은 고통이 언제나 함께 한다. 그러나 열반의 경지란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세계이다. ‘낙(樂)’은 안락의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난 적정무위(寂靜無爲)의 안락한 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즉 무위 안락한 것이다. 유위는 우리가 애써서 받는 것이고, 무위는 애쓰지 않고서 그냥 자연적으로 받는 것이다.
열반의 낙(樂)은 ‘나’라고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오욕락(五欲樂)과 같은 유한적인 그런 즐거움이 아니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즐거움이다. 조금도 변치 않는 영생의 안락을 말한다. 이 같이 열반의 세계에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몸뚱이 때문에, 우리의 나쁜 생각 때문에 안락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 아덕(我德)---우리들의 몸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바다에서 일어난 한 점의 거품처럼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허깨비와 같다. 마치 빌려다 쓴 물건과도 같아서 이 몸은 언젠가는 땅과 물과 불과 바람에게 돌려주어야 된다.
열반의 ‘아(我)’는 현상세계에 집착한 아(我)가 아니라, 소아(小我)가 멸한 대아(大我), 우주적인 나를 의미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아(我)’와 아상(我相)의 ‘나’가 아니라 인(因)을 초월한 깨달은 ‘참나’를 말한다. 이 대아는 영생불멸이다. 대아는 상락아(常樂我)라 영생이고, 우리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진아(眞我)의 세계를 일컫는다.
망집의 아(我)를 벗어난 무애자재 한 본성의 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일체 모두를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일체 모두를 볼 수가 있고, 일체 모든 음성을 다 들을 수 있고, 일체 것에 다 신통 자재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아덕이다. 따라서 우리가 참다운 진아가 되면, 즉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참다운 도인(道人)이 되고 성불하면 일체를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 정덕(淨德)---번뇌가 조금도 없고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것이 정덕이다. 열반의 경지는 번뇌 망상의 티끌이 멸진해 맑고 깨끗한 세계라 청정무구한 정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중생계는 온갖 죄업과 악으로 물들어 있다. 투쟁이 있고 증오가 있고, 미움과 원망이 있다. 아집과 욕망이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자랑스러워서 대립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투명하고 뚜렷한 곳, 그 곳이 바로 부처님의 열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의 세계는 조금도 물든 것 없이 청정하며, 참으로 담연(淡然)한지라 안온과 평화만이 존재한다.
즉, 열반의 정(淨)은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의식을 초월한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세계를 가리킨다. 불성 자체가 청정하다는 것 - 자성청정심이다. 우리 본래의 마음자리는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것인데, 우리가 분별을 내어 가지고 망상을 한단 말이다. 불성(佛性)을 깨달아서 불성자리에 들어가면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고, 거꾸로 뒤바꿔 보고 그런 전도몽상(顚倒夢想)도 없다.
부처님께서도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 중의 <우다나((優陀那, udana)>라는 자설경(自說經)에서 “열반이란 어떤 것인가?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묾도, 죽음도 재생도 없다. 나루터도 없고, 윤회도 없고, 의지처도 없다. 그러나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더 이상 나고 죽지 않는 세계이며, 더 이상 변화를 겪을 필요가 없는 세계로 재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열반사덕은 우리가 목적하는 성불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처, 즉 진아(眞我)에 갖추고 있는 공덕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범부지(凡夫地 ; 보통 사람의 경지)에 있다 하더라도 내 본바탕은 이같이, 열반사덕이 있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헌데 열반 4덕의 경지는 무아(無我)가 돼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먼저 망령된 ‘나’, 잘못된 ‘나’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진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열반 4덕에 대한 비판>
다음은 <전도경(顚倒經)-A4:49>의 내용이다.
「삿된 견해에 빠지고 마음이 혼란하고 인식이 전도된 중생들은
무상에 대해 항상하다고
괴로움에 대해 행복이라고
무아에 대해 자아라고
부정한 것에 대해 깨끗하다고 인식한다.
그들은 마라의 밧줄에 걸려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태어남과 죽음으로 치달리면서 윤회를 거듭한다. 광명이신 부처님들 세상에 출현하면, 그들에게 괴로움을 가라앉히도록 하는 이 법을 밝히시니, 통찰지를 가진 자들은 그분들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회복한다.
무상을 무상이라고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무아를 무아라고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보나니
바른 견해로 [공부]지어 모든 괴로움 제거하도다.」
이상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말이므로 대승불교 교의를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외도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게송이다. 헌데 내용이 대승불교의 열반 4덕을 비판하는 글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내용이라서 흔히 열반 4덕을 비판하는 글로 이용된다.
열반을 상ㆍ락ㆍ아ㆍ정으로 설명한 것은 초기경과 남ㆍ북 아비담마 그리고 대승의 아비달마라는 유식계열의 경ㆍ론 등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여래장계열의 경인 대승 <대반열반경> 등에만 나타난다.
남ㆍ북방 불교의 주석서들에서 유위법의 특징은 한결같이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不淨)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대승 여래장계열의 경인 <대반열반경>에서는 유위법의 특징인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의 반대가 되는 성질인 상ㆍ낙ㆍ아ㆍ정으로 무위법인 열반을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승에서도 속제(俗諦)의 입장에서는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을 말하지만 진제(眞諦)의 입장에서 상락아정을 말하고 있으므로 열반에 대한 상ㆍ락ㆍ아ㆍ정의 설명은 큰 무리는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열반을 ‘아(我)’로 설명하는 것을 진정한 자기완성이요, 인격의 완성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이것을 가지고 열반은 대아(大我)다 진아(眞我)라고 이해해서 외도의 진아설과 같이 보면 이는 큰 문제가 돼버린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상좌부 주석서와 <구사론> 등의 북방 아비달마 논서와 대승의 유식계열의 논서에서는 이러한 설명은 결코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며, 비불교적인 언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반을 무엇이라 설명하는 자체가 자칫 열반을 유위법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빠알리 니까야와 북방 <아함경>에 포함된 초기경의 <대반열반경>에는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면서 열반은 상락아정이라고 했다는 언급이 없다. 다만 후대 여래장 계열의 대승불경인 <대반열반경>에 상락아정을 언급하고 있다.
<대반열반경>은 석존께서 돌아가심을 중심으로 한 내용의 경전인데, <대반열반경>에는 소승과 대승 두 종류가 있다. 이름도 똑 같아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대반(大般)이라는 말은 조금도 흠절이 없는 모든 것을 다 포섭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석존이 돌아가실 무렵에 행한 모든 법문을 다 포괄(包括)한 경전이란 말이다. 헌데 두 경전의 내용이 상이하고, 사상도 다르므로 해석에 유의해야 할 일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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