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止, 산스크리트어 samatha)와 관(觀, 산스크리트어 vipassanā)>
지(止)와 관(觀)의 합성어가 지관(止觀, śamatha-vipassanā)이다.
<대승기신론>에 지관수행을 언급하고 있다. 지(止)란 무엇이고, 관(觀)이란 무엇인가(云何修行止觀門)?
지(止-멈춤)란 일체대상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으로서 사마타 수행을 의미한다(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義故).
관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 거기서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서 위빠사나 관찰 수행을 의미한다(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毘鉢舍那義故) 라고 했다.
그리고 천태학에 있어서도 진리의 체득을 위한 실천체계로 ‘지관(止觀)’을 언급하고 있다.
지(止)는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본원적인 진리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며,
관(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지혜의 작용이 돼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번뇌에 휩싸이고, 어리석고 미혹한 까닭에 지관(止觀)으로써 마음을 닦아야 한다. 지관이 닦음의 출발이고 정혜(定慧)는 지관에 의해서 도달하는 특정한 수준으로서 수행결과라고 말할 수가 있다.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해 온갖 번뇌가 그친 상태를 말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아채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한다. 즉, 정신을 집중해 바깥 경계를 쫓아 일어나는 모든 잡념과 망상을 그치고, 마음이 적정(寂靜)해진 상태를 말하는데, 바로 삼매(三昧)의 초기단계를 말한다.
즉, 지(止)는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움직이지 않고 한 대상에 머물러[止] 있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관(觀)은 이 상태에서 바른 지혜로써 제법을 관조하는 것을 이른다. 이와 같이 지와 관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므로 이 둘을 별개로 분리할 수는 없다. 이는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교리이기도 하며, 불교사상적으로도 대단히 중시된다.
예로부터 불교수행은 ‘지관(止觀)’이란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불교수행은 선정과 지혜의 증득에 달렸는데, 그 증득하는 법이 바로 지관이기 때문이다. 즉, 지(사마타)를 통해 선정을 얻고, 관(위빠사나)을 통해 지혜를 얻는 수행법이 지관인 것이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위빠사나(vipassanā, 毘鉢舍那)의 의역으로서 마음이 지(止)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즉, 관(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상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반야이다.
지(止)는 번뇌와 생각을 그치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며 본원적인 진리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관(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지혜의 작용이 돼 사물을 진리에 합치시키며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정(定), 관은 혜(慧)에 해당하며, 오른팔이 위빠사나(vipassanā)라면 왼팔은 사마타(奢摩他, śamatha)이다.
사마타(samatha)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마음의 안정을 얻는데 반해, 위빠사나는 번뇌를 해결해 지혜를 얻는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필수적이고 유일한 수행이다. 한문으로는 사마타를 지(止)라고 하고 위빠사나를 관(觀)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자를 선정수행(禪定修行)이라고 하고, 후자를 지혜수행(智慧修行)이라고도 한다. 사마타는 고요함을 개발하는 불교의 명상법이다. 위빠사나가 관조, 관찰을 하는 명상법인 반면에, 사마타는 고요함, 적멸, 사마디(삼매)를 목표로 하는 명상이다. 따라서 간단히 정리하면, 「사마타+위빠사나=⇛사마디(Samādhi-삼매)」이다.
사마타(奢摩他, śamatha)는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의 정(定)에 해당하며, 지관(止觀)에서 지(止)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定)이나 지(止)는 사마타를 한역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마타는 집중명상이다. 집중명상은 주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집중이 깊어지면 사마디 상태(삼매)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대상에 고도로 몰입돼 무심의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디가니까야(長部)의 <다숫따라경(Dasuttara sutta)>에는 “수행해야만 할 두 가지 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했다. 그리고 상응부의 <고요경(samatho sutta)>에도 “비구들이여, 열반으로 이끄는 도(道, magga)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했다.
이들 경전의 내용으로 볼 때, 사마타 위빠사나는 닦아야만 할 두 가지 수행방법이며,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다.
사마타는 의역을 해 지(止), 적정(寂靜), 능멸(能滅)이라 하고, 집중명상을 말한다. 단 하나의 대상을 주제로 마음을 집중시키고 고정하는 방법이다. 즉, 어떤 대상에 고도로 몰입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집중명상은 다른 종교에도 행한다. 수행자가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는 동안 마음이 순화된다. 깊은 행복감, 기쁨, 고요함 등을 이룬다. 드물게 이런 상태에서 초능력이 개발될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마타란 모든 분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허망함을 깨달아서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이 적정(寂靜)한 상태를 유지함을 말한다. 즉,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남을 막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이다. 쉽게 말하면, 정신집중을 위해 어떤 한 대상을 정해 거기에 몰입하면, 그 몰입의 상태가 심화돼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무심의 상태에 들어가면 온갖 번뇌 망상이 그치므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이에 유사어가 적정(寂靜)이다.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는 지관(止觀)에서 한층 깊이 선정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삼매(三昧)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마타+위빠사나=⇛사마디(Samādhi-삼매)」라고 했다.
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깊은 마음집중(samādhi)이 전제가 돼야 한다. 마음집중이 있어야 지혜가 생겨난다. 마음집중은 지속적이며 세심한 마음챙김(sati)이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지니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노력 즉 정진(viriya)이 있어야 한다. 정진을 하기 위해서는 불ㆍ법ㆍ승 삼보와 수행법에 대한 강하고 확고한 믿음(saddha)이 있어야한다.
이처럼 믿음을 바탕으로 노력이 있고, 노력을 바탕으로 마음챙김이 있으며,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마음집중이 있고, 마음집중이 있을 때, 위빠사나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삼매(三昧)는 사마디(Samādhi)를 음사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일심불난(一心不亂)으로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간화선 하는 사람이 깊은 선정에 든 것을 삼매라 하며,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태종에서는 지(止)는 정(定)으로서 주체의 확립, 관(觀)은 혜(慧)로서 주체의 확립에서 모든 현상을 전체적 ‧ 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유로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으로, 지(止)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觀)은 자신의 본래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된다. 지와 관은 서로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으며, 지계(持戒) 등과 함께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이 돼, 초기불교 이래 여러 불경에 실려 있다.
다음은 미얀마의 파욱 명상센터, 거기 사야도께서 사마디를 설명하는 내용을 옮긴 것이다. 종래 동아시아에서 ‘지와 관’에 대해 생각하던 전통적인 관념과는 다른 일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수행자들이 사마디를 개발하는 방법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한 대상에 오랫동안 집중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요함을 얻을 수 있지만 또한 너무 진중해서 가벼움이 없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필요한 것은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된 마음이다.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이면 충분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본삼매(jhāna)는 필요치 않으며, 깊은 몰입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전에 본삼매를 증득한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먼저 본삼매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본삼매에서는 일시적으로 오염원을 통제할 수 있다. 본삼매에서는 거친 오염원은 일어나지 않으며 다섯 가지 장애(五障碍)가 억압된다.
그러나 본삼매에서는 감각적 욕망(kāma-chanda)만을 억압할 수 있으며 다른 욕망들, 즉 존재에 대한 욕망(bhava-tanhā)은 억압할 수 없다. 사마디는 세 가지 요소가 함께할 때 완전하다.
즉, 바른 마음챙김(sammā-sati), 바른 노력(sammā-vāyāma), 바른 삼매(sammā-samādhi)이다. 바른 마음가짐과 바른 생각으로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있을 때, 사마디가 자연적으로 개발된다.
역주 : 사마디(삼매, samādhi)는 일반적인 의미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는 안정되고 고요한 마음이다. 특별한 의미는 깊은 몰입 상태인 본삼매(jhāna)를 말한다. 아비담마에서는 사마디와 자나(jhāna)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자나에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요처, 비비상처가 있다.
깊은 몰입 상태에 들어가는 본삼매(자나/jhāna)를 성취하려면 오랫동안 앉아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최소한 한두 시간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어야 초선에 들어갈 수 있다. 아주 깊은 몰입 상태에서는 외부의 감각이 끊어진다. 이런 깊은 삼매에서는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무상을 느낄 수 없으며, 무아도 체험할 수 없다. 따라서 지혜의 개발(통찰지)이 일어날 수 없다. 통찰지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도과(道果)를 증득할 수도 없다.
즉,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야도께서는 본삼매가 깨달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야도가 요구하는 사마디(삼매)는 그런 깊은 몰입상태인 본삼매(자나)가 아니고 안정되고 고요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다면 충분한 사마디를 말한다. 본삼매에서는 오염원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억압된다. 본삼매에서 나오면 오염원이 다시 일어난다. 오염원은 위빠사나 지혜(통찰지)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 무념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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