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공상(諸法空相)>
‘제법공상(諸法空相)’이란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법(사물)은 모두 인연으로 생긴 것이므로 어느 것이고 그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공상이라 한다. 따라서 제법공상이란 모든 법은 비어서 아무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비임이란 비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이 너무 있는 모양에 집착하니까 참으로의 진리란 “있는 것은 비어지고 비어진 곳에서 다시 형성 되는”, 그래서 비어 있는 것을 중심으로 한 성질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공상(空相)이란 제법개공(諸法皆空)의 모양을 말한다. 결국 삼라만상이 모두 공한 성품이라는 말이 제법공상이다.
제법이 공상(空相)이라고 할 때 상(相)은 모습, 특징 등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한 모습, 공한 특징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공한 모습이라는 모습, 공한 특징이라는 특징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공하다는 것은 특정의 모습이나 특정의 특징이 없다는 뜻j이다. 이 말은 무(無)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고정 불변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삼라만상이 자성이 있는 실체라면 세상은 변화할 수가 없다. 윤회도 없고, 누구도 지옥에 가지도 않고, 또 천상에 날 수도 없다. 깨달은 이도 없겠고, 늘 중생 그대로이겠다. 그러나 자성이 없고 실체가 아니므로 인과 연에 따라 법들이 변해가니 이를 연기(緣起)라고 한다.
제법이 공상인 데에는 까닭이 없다. 법이 본래 그러한 것[法爾]이다. 제법이라는 것은 형상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공상이라는 것은 상이 없는 그 제법의 본질인 근본을 말한다.
공상은 성품의 몸[體]을 말하며, 이것의 활동 즉 작용은 다만 인연을 따라 일어나므로 이것이 연기인데, 그 연기로 인해 나타남이 곧 제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이 작용해 나타나니 이것이 묘용이므로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고 이것이 중도(中道)이며 만법의 참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깨달았다고 선언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비유하자면, 공한 성품은 곧 바다와 같고, 그 활동 즉 출렁임인 파도는 곧 제법과 같다. 바다를 떠나 파도가 따로 있지 않음과 같이, 공한 성품은 모든 현상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부처님의 처소가 따로 있지 않고 일체만법이 곧 부처님의 처소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중아함경].
모든 상이 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금강경].”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연기를 보는 자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곧 여래를 본다.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 여래이며 여래라는 뜻은 본래 오고 가는 바가 없다는 뜻이므로 어디로 갈 수가 없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 법계에 상즉상입(相卽相入)해 본래 우리를 떠나있지 않아 늘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범부중생은 다만 무명에 덮여 볼 수 없을 뿐, 불교를 수행해서 깨달으면 처처가 불신(佛身)임을 비로소 친견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관(觀)이란 마음의 눈으로 자유롭게 관찰해보는 지혜의 힘을 말한다. 물질이 공이고 공이 물질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물질과 에너지의 상관관계의 정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법공상이라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거나 주는 것도 아니다. ‘색즉시공’이란 질량불변의 원리인 것이다. 공상(空相)이란 에너지의 원천으로 이것이 바로 존재하는 실상인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존재를 공상이라 말했지만 이 공상이 실상이므로 <법화경>에서는 존재를 실상이라 말했다. 실상과 공상은 에너지와 물질의 관계로 결국은 같은 것으로 변화에 의한 생멸의 울림이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에서 처음에는 오온이 모두 다 공함을 조견했고(조견오온개공), 그 다음에는 오온과 공의 관계를 설명했고(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그 후부터는 모든 법의 공한 모습에 대해서 설명이 시작된다. 공(空)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바로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다.
제법(諸法)이란 인과 연의 화합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 삼라만상을 의미한다.
공(空)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가 아니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은 있되, 그 색ㆍ수ㆍ상ㆍ행ㆍ식에 내재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空) 하다고 했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모두 다 인연화합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은 모조리 다 매순간마다 변하는 것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相)이란 모습을 뜻한다. 땅은 평평하고, 산은 울퉁불퉁하고, 축구공의 모습은 둥글고, 오이는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게 다 모습이고, 그 모습, 곧 형태를 상(相)이라 한다. 그렇다면 공하다는 것에 과연 상이 있을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마치 허공에 그 어떤 모습도 없는 것처럼 공한 것엔 상이 없다.
여기서 굳이 공상(空相)이란 용어를 쓴 것은 중생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다면 공상(空相), 즉 공한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 바로 모습 없는 모습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공(空)을 깨달으려고 한다면, 절대로 어떤 모습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만약 어떤 모습이 있다면 공일 수 없다. 마치 하늘(허공)은 텅 빈 게 하늘이지, 뭐가 있다면 그건 허공이라고 불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의 본래 마음의 모습이 이렇듯이 무한하게 텅 비어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그저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 생멸하는 마음을 "나"로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고정불변의 영원한 "나ㆍ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다. "나"라는 게 고통의 뿌리이다.
그래서 성인들께서는 그 "나"를 버리신 것이다. "나"를 위해서 성인이 된 분은 없다. 만약 내 마음속에 정말 "나"라는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는 걸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집착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야 고통에서 벗어나므로,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마음의 본질이 바로 공(空)이다. 하늘처럼 텅 비어 맑고 깨끗하다. 이런 게 본래 우리 마음의 모습이다. 모습이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공(空)을 깨달았다고 해도, 역시 그 공에 집착하면 안 된다.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
공을 깨닫고 나서 그 공에 집착하면 그것이 바로 무명(어리석음)이다.
공을 깨닫고 나서 그 공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법의 공한 모습을 설명한 것이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그 외에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으며 흩어지지도 않으며 등의 여러 설명이 가능하다.
이 제법(諸法) 그대로가 공(空)의 상(相)인지라 생(生)하는 것도 아니며, 멸(滅)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垢) 것도 아니고, 깨끗한(淨) 것도 아니며, 증가(增)하는 것도 아니고, 감소(減)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이미 2000여 년 전 <반야심경>이 형성될 무렵에 우주의 실상을 낱낱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생겼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가? 본래 그 자리인 것이다. 멸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없던 것이 생겼다고 지구의 무게가 늘어나는 일도 없고, 죽어 재만 남겨도 우주의 질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그러므로 생겨도 생긴 것이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더러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디서 왔겠으며,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본디 그것이니 불구부정(不垢不淨)이다.
굳이 하나 더 말하면, 가도 간 것이 아니고 와도 온 것이 아니니 불거불래(不去不來)라 한다. 사람들이 호들갑 떨며 식구하나 불었다고 좋아하다가, 누구 하나가 죽게 되면 돌아가셨다고 슬퍼한다. 그러나 온 것은 무엇이며 없어진 것은 무엇인가? 시절과 인연이 만나 잠시 형체를 이루었다가, 또 시절인연을 어기지 않고 본디 왔던 자리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여기서는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저 쪽에서는 온 것과 생긴 것이 될 것이고, 그 쪽에서 흩어질 때는 멸했다고 하고 돌아갔다고 하나, 이쪽에선 다시 온 것이 된다. 미혹하면 서로 간에 울 일만 있고, 알고 나면 시시하다. 그러므로 깨끗하다 더럽다 할 것도 도무지 없으며, 늘지도 않지만 줄지도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 셈에 너무 야박할 것도 없다.
대승불교의 바탕은 공사상이다. <반야심경>에서 보듯 제법공상(諸法空相)이다. 그러나 이 공을 평면적인 공, 무자성(無自性)만의 공으로 이해하면 큰 오해를 한다. 따라서 종내는 허무주의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대승에서 공(空)을 말하면 그에는 항상 불공(不空)이 전제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텅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무량한 공덕으로서의 불공이다. 즉, 무량무변한 에너지로서의 불공이다. 밖으로 공을 깨닫지 못하면 번뇌 망상이 생기고, 안으로 불공을 깨닫지 못하면 무명이 깊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空)과 불공(不空)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 도리를 떠나서는 결코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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