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동자는 보안장자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선지식은 나를 거두어주고 보호하며 보리심에서 물러가지 않도록 해주신다”고 생각하였다.
가르침대로 남쪽으로 가서 다라당성에 이르러 무염족왕(無厭足王)이 있는 데를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왕은 지금 정전(正殿)에서 사자좌에 앉아 나랏일을 보고 있다. 법으로 교화하여 중생들을 조복시키는데, 교화해서 구제하기도 하고, 죄 있는 이는 벌 주고 소송을 판결하며, 외롭고 힘없는 이는 위로하고 보살펴 주어서 모두 열 가지의 악업을 여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왕은 아름답게 장엄된 정전에서 위엄을 떨치며 있었는데, 일만의 대신(大臣)과 십만의 강건한 군졸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의 앞에는 나쁜 일을 저지른 한량없는 중생들이 오랏줄에 묶이어 끌려와서는 죄에 따라서 형벌을 받고 있었다. 손과 발을 끊기도 하고 귀와 코를 베기도 하고, 눈도 뽑고 머리도 자르며, 살가죽을 벗기고 몸을 오리며, 끓는 물에 삶고 타는 불에 지지기도 하는 등 무량한 고통을 주니 소리높여 울부짖는 광경들이 커다란 지옥처럼 보였다.
이것을 보면서 선재동자는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보살행을 구하고 보살도를 닦는데, 이 왕은 선한 법은 하나도 없고 큰 죄업을 짓고 있다. 여기에서 무슨 법을 구하겠는가.”
이때 공중에서 어떤 천신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마땅히 보안장자 선지식께서 가르쳐 주신 말을 생각하라. 그대는 선지식의 말을 떠나지 말라. 선지식은 그대를 인도하여 험난하지 않고 편안한 곳에 이르게 해준다. 선남자여, 보살의 교묘한 방편지혜·중생을 생각하는 지혜·중생을 성숙하게 하는 지혜·중생을 수호하는 지혜·중생을 해탈케 하는 지혜·중생을 조복시키는 지혜를 헤아릴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선재동자는 왕의 처소에 나아가 예배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왕은 선재동자의 손을 잡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화려하게 장엄된 궁전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만일 참으로 악한 업을 짓는다면 이런 과보와 이런 육신과 이런 권속과 이런 부귀와 이런 자유자재함을 어떻게 얻었겠는가.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환술과 같은 해탈[如幻解脫]을 얻었노라. 선남자여, 나의 국토에 있는 중생들이 살생하고 훔치고, 내지 삿된 소견 가진 이가 많아서 다른 방편으로는 그들의 나쁜 업을 버리게 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나는 저런 중생을 조복시키기 위하여, 나쁜 사람으로 화하여 여러 가지 죄악을 짓고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이니 저 나쁜 짓을 하는 중생들이 보고서 무서운 마음을 내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겁나는 마음을 내어 그들이 짓던 모든 나쁜 업을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다.
선남자여, 나는 이렇게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열 가지 나쁜 업을 버리고 열 가지 착한 도를 행하여 끝까지 즐겁고 편안하고 마침내 온갖 지혜의 지위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선남자여, 나의 몸이나 말이나 뜻으로 짓는 일이 지금까지 한 중생도 해친 일이 없다. 선남자여, 내 마음에는 차라리 오는 세상에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을지언정 잠깐만이라도 모기 한 마리나 개미 한 마리를 괴롭게 하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사람일까보냐. 사람은 복밭[福田]이라서 모든 선한 법을 능히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나는 다만 이 환술과 같은 해탈[如幻解脫]을 얻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무염족왕이 설하고 있는 보살의 ‘여환해탈(如幻解脫)’의 법문은 지혜로운 방편으로써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법을 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의 명칭이 무염족인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 어디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서 싫어함이나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주하고 있는 성의 이름이 다라당(多羅幢)인 것은 ‘다라’가 ‘밝고 깨끗하다[明淨]’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출세간의 밝고 깨끗한 지혜로 세간을 잘 들어가서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근기를 잘 알아서 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교화할 수 있는 적절한 모습을 지어서[化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염족왕이 악업을 지은 중생들에게 가혹하게 형벌을 가하는 것도 그들에게 악업을 끊고 보리심을 내게 하려는 방편으로써 행하여지는 것이다. 중생을 위한 자비행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들을 이롭게 하고 만족케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혜롭게 헤아려서 필요에 따라서는 힘들고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도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비행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식을 위한다면 필요한 경우에는 사랑의 매도 들어야 하지 않는가. 보살행을 실천하는 데에는 지혜방편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권탄준/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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