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사상(中觀思想)
1. 中觀思想이란?
湯田豊 {인도사상사}에서
나가르주나(Naagaarjuna,ca.150-250), 즉 龍樹의 대표적인 저술인 {中論(Madhyamika sastra)}에 나타난 사상을 宣揚한 일군의 학파인 中觀派(Madhyamika)의 사상을 말한다. 이 중관파는 唯識派와 더불어 대승불교철학의 2대 지주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관파는 용수이후 그의 직제자인 아리야데바(Aryadeva)를 비롯하여 라후라바드라(Raahula bhadra), 바바비베카(Bhavaviveka), 찬드라키르티(Candrakiirti), 갸나가르바(JNYana garbha), 샨타라크시타(saantaraksita)등으로 이어져 인도 대승불교사상의 큰 흐름을 형성시켜간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시대적인 추이와 함께 고찰하여 오늘날 학자들은 중관파를 초기·중기·후기의 중관파로 구분한다. 곧 용수를 비롯한 직제자인 아리야데바 등을 초기중관파로 구분하며, 용수의 {중론}에 주석을 가한 일군의 사상가를 중기중관파, 그리고 유식파를 비롯한 타학파와의 대립 가운데 중관의 입장에서 사상체계를 펼쳐나간 사상가들이 후기중관파이다.
이와 같이 중관파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 출발이 된 것이 다름 아닌 용수의 {중론}으로, 용수는 이 {중론} 외에도 10종이상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영향은 대승불교사상사에서 [8宗의 祖師 또는 제2의 佛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足跡을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큰 영향을 남긴 용수의 사상을 그의 주저인 {중론}을 통해 살펴보고, 아울러 그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중관파의 역사적 전개에 대하여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용수의 {중론}은 기본적으로 二諦說에 근거한 中道思想으로서 緣起·空의 도리를 설하고 있다. 즉, 勝義諦(Paramartha-satya)와 世俗諦(samvriti-satya)의 이제설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근본입장인 중도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 중도의 입장을 연기·공의 용어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용수는 이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부처님은 二諦에 의거해 법을 설하시는데,
첫째는 世俗諦이고, 둘째는 第一義諦이다.(중론, 24-8)
二諦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 깊고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24-9)
世俗諦에 의하지 않으면 第一義諦는 설해지지 않고
第一義諦에 의하지 않으면 涅槃을 얻을 수 없다.(24-10)
이와 같이 용수는 세속제와 제일의제 즉 승의제를 설해, 이 둘의 구별을 모르면 부처님의 깊고 진실한 뜻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제의 올바른 구별은 {중론}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근본 전제로서, 따라서 용수 이후 중관파의 사상가들은 이 이제의 올바른 구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승의제란 궁극적으로 [言說을 떠나 戱論(prapanyca)이 寂滅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후기중관파의 갸나가르바는 유마거사의 침묵이야말로 진정한 승의제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승의제는 궁극적으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바바비베카와 같은 주석가는 언설을 통해 승의제가 간접적으로도 표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용수에 있어서 구체적인 이제의 설명은 그다지 자세히는 나타나지 않지만, 열반을 證得한 근거가 되는 승의제는 세속제를 통하여 표현되어진다고 명확히 언급되고 있다. 이 세속제란 世間에서 인정되어지는 言說이나 慣習등으로, 곧 세간 일반에서 승인되어지는 까닭에 진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언설의 세간 진리로서 용수가 {중론}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緣起·空의 용어이며, 이 연기와 공의 용어를 사용해 용수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와 공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개념임을 용수는 三諦偈로 일컬어지는 제24장 18게에서 말하고 있다. 곧 다음과 같다.
緣起하고 있는 것, 그것을 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으로 施設된 것이며, 곧 그것은 中道이다.
이와 같이 연기와 空性은 동일하며 더욱이 그것은 임으로 시설된 것(prajnyapti, 언어에 의한 표시, 假名)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곧 중도(madhyama pratipad)인 것이다. 따라서 이 연기로서의 중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해 가는 것이 {중론}의 전체적인 내용이지만, 그러면 왜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일까? 그것은 용수 在世시대의 사상적 동향과 관련하는 것으로, 이러한 동향은 그의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중론}에서는 반대자의 견해를 먼저 든 뒤 용수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저술인 {廻諍論}에서는 인도 제학파 가운데 실재론자로서 니야야(Nyaya)학파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같은 불교내의 說一切有部(Sarvaastivaadin)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有部에 대한 비판은 {중론}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성으로서 [法有]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自性(svabha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이 자성이란 연기·공의 개념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용수는 이 자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自性이 緣과 因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성이 연과 인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15-1)
그런데 어찌하여 자성이 실로 만들어진 것이 될까.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 까닭이다.(15-2)
이처럼 자성이란 因緣에 의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용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 {중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 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모든 사물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공인 까닭에 緣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 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아울러 사물이 연기, 空性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 {중론}의 근본 의도이었던 것이다. 이 연기에 대하여 {중론} 歸敬偈에서는 유명한 八不의 부정사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緣起는 不滅·不生·不斷·不常·不來·不去·不異·不一하며,
戱論이 寂滅한 것이며, 吉祥한 것임을 가르쳐 주신
正等覺者, 說法者 가운데 최고인 그분에게 나는 歸依합니다.
곧 이 귀경게는 연기의 理法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생겨난 것이 아님을 여덟 가지 부정으로서 보여주는 유명한 八不의 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따라서 용수는 이 귀경게에 이어 제1장 觀緣品에서 일체는 생겨남이 없다는 불생(anutpada)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곧 일체는 스스로든, 다른 것으로부터이든, 무엇인가 실체적인 존재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일체는 다름 아닌 연기의 도리에 의거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이 가능한 것은 연기의 삶인 까닭이며, 이 연기의 삶인 까닭에 일체의 삶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릇 이 緣起를 보는 자야말로, 실로 苦·集·滅·道를 본다(24-40)]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용수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볼 때 우리들의 근본 번뇌인 고통도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고통에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삶을 연기의 도리가 아니라, 자성의 개념 등으로서 잘못 보는데 기인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것은 곧 자성의 허구를 아는 것이며, 곧 그것은 無自性·空의 이치를 아는 것으로서 中道의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중론}에서의 연기는 공·무자성·중도와 동일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言說에 의한 言表의 세계, 즉 世俗諦에 의거하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세속의 언설인 연기의 용어를 빌려 무자성·공성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연기라는 용어는 비록 세간의 언설로 표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연기의 이치는 佛陀 覺證의 세계에서 획득된 진리로서, 곧 勝義의 진리가 언설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각증의 세계를 체득한 뒤 그러한 상태에서 보여진 진실된 세계의 모습이 언설에 의지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이 연기·공인 것이다. 따라서 연기·공으로 표현된 세속제에는 승의의 진리가 간접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용수는 고통으로 가득찬 윤회의 세계도 실은 연기의 세계로서 열반과 다르지 않다(25-19)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용수의 {중론}은 이상과 같이 세속제에 의거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용어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고 일체세계가 연기의 이법에 따르고 있음을 논증한 저술이다. 따라서 {중론} 저술의 의도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나타내 보임으로서 일반 중생을 승의의 열반세계로 이끌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즉 언설로서 연기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지만, 실은 승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 것이 {중론}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용수는 佛陀의 중도사상을 二諦說에 의거해 재정립하고, 세속제의 연기로서 승의의 세계를 밝히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수에서 출발하는 중관사상은 불타가 설한 중도의 이치를 二諦說을 통해 재조명하고, 자성을 주장한 유부 등과 관련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연기의 이치를 재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 용수의 사상에 의해 출발점이 된 중관사상은 대승불교사상의 체계를 공고히 하고, 또 그 내용을 深遠化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 중관사상의 역사적 배경
龍樹의 중관사상은 앞 절에서 보았듯 二諦說에 기초한 中道사상으로, 世俗諦로서 勝義諦인 覺證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곧 각증의 세계에서 체득된 이치가 言說로 나타난 것이 緣起·空으로, 이 연기·공의 개념과 배치되는 外道나 有部의 自性등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이 용수의 {中論} 및 그의 다른 저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용수의 중관사상은 佛滅後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불교 역사상 부파불교의 전개와 대승불전의 발생과 같은 역사적 정황을 전제로 나타나지만, 이미 {중론}에서도 밝히고 있듯 용수는 그의 사상적 근본이 불교의 개조인 불타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앞 절에서 본 {중론}의 귀경게에서도 용수의 입장을 볼 수 있지만, {중론}의 마지막 게송에서도 그가 불타에게 사상적 출발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체의 [잘못된] 견해를 끊기 위하여, 愍心에 가득 차,
正法을 설하신 그 고타마 붓다에게 나는 귀의합니다.(중론, 27-30)
이처럼 용수는 그의 사상적 출발점이 불타에게 비롯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면 용수는 어떠한 면에서 불타를 그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먼저 필자는 正覺을 얻은 고타마 싯타르타, 곧 불타가 설법하기를 주저한 소위 [梵天의 勸請] 장면은 중관사상의 근간인 이제설의 출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타는 6년간의 수행을 통해 고행에 의한 수행 방법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지 않음을 깨닫고, 피팔라(Pippala) 나무 아래에서 禪定에 들게 된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고 그 깨달음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지만, 막상 그 심오한 깨달음의 내용을 타인에게 설하고자 하였을 때, 불타는 도리어 다음과 같은 염려를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얻은 이 법은 너무나 깊어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지극히 미묘하고, 最上으로, 賢聖은 아는 바이지만, 愚者는 배우는 바가 아니다. 중생은 異見·異忍·異欲·異命으로, 異見에 의지하여 巢窟을 즐긴다. 중생은 이 소굴을 즐기는 까닭에, 緣起의 법이 깊고 깊은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 모든 욕망이 멸하여 愛가 다한 涅槃인 이곳을 또 한 보기 어려운 까닭에, 내가 지금 설법하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곧 내가 오히려 피로하고 괴로울 뿐이다.(四分律, 32권)
이것은 불타가 正覺의 내용이 너무도 미묘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부분으로, 소위 [범천의 권청]으로 알려진 대목이다. 이 범천이 불타에게 [세간에는 번뇌가 적고 총명하여 쉽게 제도할 수 있는 자가 있다]라고 청하여 불타는 법을 설할 것을 결심하지만, 이처럼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각증의 세계가 곧 二諦 가운데 勝義諦의 연원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甚深微妙한 각증의 세계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初轉法輪을 통해 언설로 표현되고, 따라서 그 언설에 의한 설법은 붓다의 입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불타가 최초로 설법한 초전법륜에 의하면, 2邊의 양극단을 떠나는 中道의 이치가 설해지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四諦에 대한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다. 이 최초의 설법에 나타나는 중도의 이치는 불타 사상의 근본으로, 이 중도사상이 불교의 근본사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타가 각증의 세계에서 체득한 이치란 무엇일까? 그것의 앞의 사분율에서도 나타나듯 구체적으로는 緣起(pratityasamutpada)로 표현되는 이치이다. 곧 각증의 체험 그 자체는 언표되기 어렵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연기라는 말에 함축되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연기의 구체적인 세계를 자각한 불타가 최초로 언표한 것이 중도의 원리이고, 사제의 원리이었던 것으로, 곧 그러한 원리는 연기에 대한 확신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타가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은 당시의 사상적 분위기와 어떠한 관련을 갖는 것일까? 그 시대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불타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인도 사상의 전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의 고대사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베다(Veda)로 대표되는 聖典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베다는 고대인도 아리야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신에 대한 찬가 및 각종 제사의식 등을 모은 것으로 고대 인도인의 사상 및 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이 베다에 대한 연구는 종교학, 언어학 등의 학문을 태동시키는 바탕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고대인의 정신적 발달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즉 상히타(Samhita), 브라흐마나(Brahmana), 아란야카(Aranyaka)·우파니샤드(UpaniSad)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베다는 시대적으로 인간의 사색단계가 깊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대 인도의 종교형태는 제사와 의례가 주된 것이지만, 의례를 담당한 제관에 의해 각종 찬가가 신에게 바쳐지고 있으며, 그러한 신에 대한 찬가도 시대에 따라 보다 근원적인 神格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프라쟈파티(Prajnyapati), 비슈바카르만(Visvakarman)등으로써, 리그베다 상히타에서는 궁극의 존재를 단지 [一者(Tad ekam)]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는 베다의 네 부분에서 각기 나타나는 것으로, 특히 그 궁극적 존재에 대한 탐구는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極致(Veda-anta)라는 의미에서 베다의 結晶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인도 정통의 베단타 철학으로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우파니샤드는 불타 탄생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에서 베다의 사상적 전통은 기원전 1500년 정도부터 최초 우파니샤드의 발생시기인 기원전 600여 년까지 무려 천여 년에 걸친 사상적 단계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랜 전통을 갖는 베다의 사상은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하고, 그 사상적 정점에서 등장한 것이 아트만(Atman, 我)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즉 궁극의 존재로서 아트만에 대한 知가 절대적으로 추구된 것이 우파니샤드의 전체적인 분위기였고, 아울러 아트만에 대한 정의는 우주의 궁극적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과 함께 당시 사상가의 뇌리를 사로잡았던 중요한 테마이었던 것이다.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인 야즈냐발캬(Yajnyavalkya)는 브리하드 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로 일체는 그 일체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아트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체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실로 마이트레이여,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실로 그 아트만이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에 의해 일체는 알려진다.(BAU.2·4·5)
이처럼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궁극적 존재로서 아트만에 대해 아트만이 모든 만물의 근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각 기능도 아트만에 의해 작용하는 것이라고까지 이론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 존재로서 아트만에 대한 탐구는 불타 탄생이전에 이미 인도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불타도 또한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에 불타의 최초 교설이 담겨있는 {阿含經}에는 이러한 궁극적인 문제와 그 당시의 다양한 견해 등이 상세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타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十四無記], [十難無記] 등은 잘 알려진 것이며, 또한 불타는 당시의 견해를 宿命論·尊祐論·無因無緣論 등으로 종합해 비판하고 있으며(중아함, {度經}), 또 당시의 여러 사상을 62見으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다(장아함, {梵動經}).
이러한 비판은 불타시대에 이미 다양한 사상이 난립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며, 특히 無我說로서 아트만을 비판한 것은 전통적인 베다의 사상을 거부하는 강렬한 메시지이었던 것이다. 이 비판이 불교의 三法印 중의 하나인 諸法無我의 법인으로, 불타는 이미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이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어떠한 고통을 수반하는지를 냉철히 파악하고 있었다. 불타는 그 아트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때 세존은 여러 비구에게 말했다.
色은 我가 아니다. 만약 색이 아라면
마땅히 색에서 病苦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색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고자 하거나
이와 같이 하고자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색에는 아가 없는 까닭에, 색에는 병이 있고 고가 생긴다.
또한 색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고자 하거나
이와 같이 하고자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受·想·行·識도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No.33)
곧 불타는 현상의 사물, 즉 色 가운데 아트만이 있다면, 변하거나 바뀜이 없이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지만, 실은 그러한 아트만이 없는 까닭에 변화와 고통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변화되고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곧 우리의 五蘊으로, 따라서 오온인 이 신체에는 아트만이 없는 것이다. 이 오온에 아트만이 없다는 것은, 일체는 불타가 覺證의 세계에서 체득한 연기의 도리로 이루어져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곧 연기의 이치로 일체가 이루어졌음에도 아트만의 실체에 의해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타가 아트만을 안아트만(anatman) 즉 無我로서 부정하는 것은, 그 근저에 일체는 연기의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곧 일체는 서로 因緣生起로서 결과를 갖는 것이지, 고정적인 실체가 원인·결과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타는 연기를 설함으로서 당시의 주된 사상적 과제인 아트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불멸후 불교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아트만과 같은 근본실체에 대한 문제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이르러 [自性(svabhava)의 실재]에 대한 문제로 바뀌었으며, 또한 이 실체적인 자성에 대한 반발이 초기대승불전 가운데 공사상의 闡明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불타가 설한 연기의 이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성의 개념을 불교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용수의 중관사상은 불타의 각증의 세계와 언표의 세계에 대한 분립을 이제설의 명확한 제시를 통해 통합시키고, 아울러 불타의 연기설을 재천명함으로서 불타의 본래면목을 밝히고자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중관사상의 역사적 전개
용수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中論} 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으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廻諍論}, {空七十論}, {六十頌如理論}, {廣破論}, {寶行王正論}, {勸誡王頌}, {因緣心論}, {菩提資糧論}, {大智度論}, {十住毘婆沙論}, {十二門論}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중론}으로, 이것은 {중론}에 대한 주석서가 다수 제작되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용수 在世時에 제자로서 용수 사상을 선양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聖提婆(Aryadeva, ca.170-270)와 羅侯羅跋陀羅(Rahulabhadra, ca.200-300)이다. 성제바는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특히 外敎의 사상을 심하게 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그 격렬한 비판으로 인해 論敵에게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제바는 {四百論}, {百論}, {百字論} 등을 남기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백론}은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과 더불어 중국에서 三論宗의 기본 전적으로 중요시되었다. 라후라발다라는 용수와 성제바의 제자로서, 이미 {중론}에 대한 주석서를 지었다고도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고, 그의 현존하는 저술로는 {般若波羅蜜多讚}, {法華讚}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성제바와 라후라발다라는 용수와 함께 초기중관파로 분류되어지며,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중관사상의 기틀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용수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선양하여 중관파를 형성시키고 아울러 중관사상을 완성시키는데 기여한 사람들이 소위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이다. 그리고 이들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모두 용수의 {중론}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觀誓(Avalokitavrata, {般若燈論廣釋}의 저자)에 의하면 {중론}의 주석가는 모두 8인으로, 용수 자신의 주석 외에 붓다팔리타, 찬드라키르티, 데바샤르만, 구나슈리, 구나마티, 스티라마티, 바바비베카 등이 주석서를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물론 한역으로만 전해지는 것으로 靑目釋의 {중론}과 無著의 {順中論} 등이 있지만, 실제 중기중관파로서 중관사상의 역사적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붓다팔리타, 바바비베카, 찬드라키르티이다. 이들의 생몰 연대와 {중론}에 대한 주석서는 다음과 같다.
佛護(Buddhapalita, ca.470-540) {根本中論註}
淸弁(Bhavaviveka, ca.500-570) {般若燈論}(Prajnyapradipa)
月稱(Candrakiirti, ca.600-650) {明句論}(Prasannapada)
이 불호, 청변, 월칭 등 각각의 견해는 후에 중관파를 두개의 학파로 구분할 정도로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사상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곧 그러한 사상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월칭의 {명구론} 제1장 [觀緣品]으로, 월칭은 그의 저술 속에서 불호를 비판하는 청변의 견해를 다시 비판하여 불호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다. 즉 {명구론}에 의하면 청변은 불호가 證因(hetu)이나 喩例(drstanta)등 논리식의 전개를 등한히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월칭은 중관파가 스스로 자립적 논증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청변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월칭은 청변의 緣起에 대한 이해와 또 청변이 주장명제에 [勝義에 있어서]라는 한정어를 붙이는 것 등에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명구론}에 보이는 이러한 비판은 근본적으로 용수의 이제설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변과 월칭의 승의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청변의 견해를 보기로 한다. 청변은 승의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勝義는 2종이다.
첫째는 現行없이 일어나며,
출세간적이고, 無漏, 無戱論인 것이다.
둘째는 현행을 동반해 일어나 福德과 智의 資糧에 수순하고
淸淨世間智라 일컬어지며, 희론을 갖는 것이다.(中觀心註 思擇焰)
이와 같이 청변은 승의를 두 종류로 나누며, 특히 청정세간지로서 일컬어지는 智를 [聞思修로 얻어진 般若 智慧]라 부르며 그러한 반야지는 [올바른 세속에 대한 簡擇]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세속에 대한 바른 이해는 승의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청변은 [眞實의 樓閣에 오르는 것은 올바른 세속이란 사다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中觀心論頌 3-12)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변에게 있어서 세속에 대한 바른 분별력은 승의의 반야지를 얻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따라서 그러한 구체적인 수단으로서 논리식이 중시되어졌던 것이다. 이에 반해 월칭은 승의제란 모든 言說과 境界를 떠난 [無戱論의 勝義]만이 있을 뿐으로, 그것은 곧 正見의 境界라고 말하고 있다. 월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법은 正見과 虛妄見에 의해
법이 성취되어지는 2종류를 취해야 한다.
정견의 경계는 진실(=승의제)이고
허망견은 세속제라고 설하셨다.(입중론 제6-23)
즉 월칭에 의하면 승의제는 부처님 정견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언표 가능한 것이란 오직 세속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월칭은 세속을 眞實世俗(tathya-samvrti)과 非眞實世俗(atathya-samvrti)의 2종으로 나누며, 세간에서 일반인이 진실로 인정하는 진실세속은 聖者의 입장에서는 단지 唯世俗(sam vrti-matra)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세간적인 언표에 의해 승의가 표현되어진다고 하는 청변의 입장과 언표 불가능이라고 하는 월칭의 입장이 상호대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중기중관파의 역사적 전개로서, 이러한 차이는 월칭의 {명구론}에서 청변에 대한 비판을 통해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후대 티베트에서는 청변 계통을 自立論證派(Svatantrika), 불호와 월칭 계통을 歸謬論證派(Prasanggika)로 命名해 분류하여 중관의 2학파로서 간주하고 있다. 중기 중관파에서 이와 같이 사상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二諦說은 후기중관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관의 중심 개념으로서 이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후기중관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갸나가르바(Jnyanagarbha, ca.700-760)로서, 그는 {二諦分別論}이라는 저술을 지어 이제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곧 {이제분별론}을 저술하는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二諦가 이미 구별되어 있음에도
大論師들 조차 어리석은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설에 어떠한 목적이 있겠는가?
그 까닭에 나는 이제를 구별한다.(제1송)
이처럼 갸나가르바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역설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그는 {이제분별론}은 저술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이제분별론}의 저술에는 후기중관파에 이르기까지 같은 불교 내에서 서로 대립되었던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적 대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그러한 사상적 대립은 청변과 월칭의 유식 비판에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청변에 의한 유식비판에는 중관의 이제설과 유식의 三性說이 명확하게 대립되어 나타나지만, 이러한 중관과 유식의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이제설에 대한 재정립이 중관파에게 요청되어졌으며, 그러한 사명을 수행한 사람들이 곧 후기중관파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갸나가르바는 {이제분별론}을 저술해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설을 통해 사상적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고자 한 사람이 후기대승불교의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샨타라크시다(Santara-ksita,ca.725-783)이다. 그는 이미 {攝眞實論}(Tattvasamgraha)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지어 인도의 모든 사상을 불교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며, 아울러 주저인 {中觀莊嚴論}을 저술해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중관장엄론}은 전체 97게송과 자신의 주석으로 이루어진 저술로, 곧 샨타라크시타 자신의 이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저서이다. 그에 의하면 승의제란 구체적으로 [戱論이 寂滅]된 상태를 가리키지만, 승의제가 나타나는 言表의 형식은 승의에 있어 무자성에 대한 논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체법 무자성을 논증하기 위해 샨타라크시타는 불교이외의 모든 사상을 비판하며 또한 불교내의 사상에 대해서도 有部·經量部·唯識思想의 순서로 비판하여 일체법이 無自性·無我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중관장엄론} 제1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自派와 他派가 설하는 일체의 존재는 진실에 있어서는 無自性이다.
一과 多의 자성을 떠나있는 까닭이다. 影像과 같이.
이것이 유명한 [離一多性의 證因]으로 샨타라크시타는 이 증인을 사용해 승의에 있어 일체법 무자성을 논증해 가며, 그리고 그러한 無自性이란 결국 無我라고 말하고 있다(92게). 즉 샨타라크시타에 이르러서도 무아, 무자성의 논증은 절대적으로 중시되며, 아울러 그러한 논증의 사상적 흐름은 붓다, 용수의 근본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적 영향은 그의 제자인 카말라실라를 비롯해 하리바드라, 캄발라, 지타리, 아티샤 등으로 이어져 후기중관파로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특히 샨타라크시타, 카말라실라, 아티샤 등은 티베트 불교 교단의 확립에 중요한 공헌을 하는 까닭에 이 후기중관파의 사상은 불교가 인도에서 쇠망한 뒤에도 티베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인도의 중관사상은 7세기 후반 인도를 여행한 義淨(635-713)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 용수의 사상에 대해서는 西域의 鳩摩羅什(344-413)이 용수의 저술을 번역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 성제바의 {백론}은 삼론으로 중시되어 후에 三論宗으로 발전하게 되며, 특히 隋나라 吉藏(549-623)에 이르러 삼론종은 대성하게 된다. 길장은 앞의 세 논서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전 26부에 달하는 저술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중관의 기본 개념인 이제에 대해 {二諦章}을 저술해 자신의 이제에 대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길장에 의해 대성한 삼론종은 당의 현장(602-664)이 전한 유식계통의 法相宗이 성행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삼론교학에 대한 연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삼론에 대해 고구려의 實法師·印法師·慧灌 등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혜관은 일본에 삼론종을 전달해 일본 삼론종의 初祖로서 추앙받게 된다. 신라에서도 元曉에 의해 {二諦章}, {三論宗要}, {中觀論宗要} 등과 같은 중요한 중관 계통의 저술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4. 중관의 체계
1) 나가르주나의 변증법
모든 사고나 견해는 한쪽에 치우친 것으로 필연적으로 내면적인 모순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사고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남김없이 배척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가르주나는 생각했다. 나가르주나의 변증법이란 모든 견해나 주장이 내면적인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상대적인 것, 타에 의존하는 제약된 존재가 논리적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그는 폭로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사고를 초월하고 있는 까닭에 마침내 그것은 불확정적인 것으로서 이해하는 이외에 달리 길이 없다라고 나가르주나는 생각했다. 나가르주나의 변증법 속에 우리들은 이성에 대한 그의 조소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인간의 이성 혹은 사고에 대하여 그는 철저한 불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사물이 독립의 존재이기 위하여는 자성(svabhava)을 가지지 않으면 않된다. 그리고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물에 의존하고 있는 한 사물은 독립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로서 우리들의 인생에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사물에는 자성이 결해 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tattva)은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여 조금도 다른 사물에 좌우되지 않는다. 타트바에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 적정인 것,
산만한 논의(=희론)에 의해 부연되지 않는 것,
망상을 떠나 있는 것, 일의적인 것,
이것이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의 특징이다.({중론} 18-9)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 자신만으로 존재한다. 이 존재를 이성 내지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일체의 사물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의 관련에 있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상태를 나가르주나는 <연기(pratiityasamutpada)>라 이름하였다. 전세계가 <관계의 그물> 속에 던져져 있어 본질적으로 연기이며, 따라서 비실재인 것을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연기)을
우리들은 空性(Sunyata)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비유적인 명칭이다.
그것은 곧 중도(中道)이다.({중론}24-8)
중관파의 논리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운 자성에 있어 공이다. 사물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기한다. 그런 까닭에 <연기>가 바로 공의 의미이다. 그러나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 <비존재>, <그 둘> 및 <그 둘 모두 아닌 것>이라는 네 가지 논점(catuhkoti, 四句分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이것들 네 개의 논점이라고 하는 네 개의 극단 즉 인간의 견해(drsti)를 떠나 있다. 네 가지 논점이라는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일체의 사고 범주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여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자하는 논리적 조작이 곧 중관체계의 변증법이다. 나가르주나 자신은 인간의 모든 사상, 견해를 비판하고, 논적의 주장이 일면적인 것으로 더욱이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철저히 논박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어떠한 견해도 갖지 않고 어떠한 입장도 지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긍정적 주장에는 근거가 없으며, 일체 인간의 사고가 모순에 빠져있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견해가 공이다({중론} 13-8)"라고 하는 것을 명쾌히 논증했다. 그리고 동일한 것이지만 '모든 견해의 방기({중론} 27-30)'를 강조했다. 이 목적을 위해 나가르주나가 사용한 이론적 무기가 그 독자의 변증법이다.
2) 空의 哲理
{능가경}(sagatha, 167)에 의하면 "인식(buddhi)에 의해 식별되는 사물에는 자성이 확정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언어로써 표현이 불가능하고, 자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서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나가르주나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나가르주나는 이성 혹은 사고에 의한 사물의 이해를 단념했다. 왜 그는 이와 같은 이해를 방기한 것일까? 그는 사물을 [不生]으로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겨나지 않는 사물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고, 그것들을 인식에 의해 확인하려고 하는 정신의 작업은 무익한 열정이다. 더욱이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나가르주나가 [타트바(眞如)]라 부르는 진실된 존재는 생기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이 타트바는 실로 불생인 까닭에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는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
{중론} 서두의 문구로서 유명한 귀경게는 대담하게 八不을 선언한다. 팔불이란 사물의 [소멸, 생기, 단절, 영속, 동일성, 부동성, 도래, 퇴거]에 대한 부정이다. 사물은 결코 어느 곳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확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결코 어느 곳에 있어서도 사물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것으로부터, 그 양쪽으로부터, 또 원인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1-1)"라고 선언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성질이다. 사물 그 자체는 "환영과 같으며, 꿈과 같으며, 건달바성과 같다. 생기도 그와 같고, 지속도 그와 같으며, 붕괴도 그와 같다고 예증된다(7-34)"고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자성의 생기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자성은 왜 생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다른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15-2).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사도 혹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는 상대적인 것으로, 독립의 존재는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시간을 부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이후·동시라고 하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데,
생, 노 및 사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들은 산만히 논할 수 있겠는가?(11-6)
결국 自性에 있어서는 세계는 생겨나는 일도 없으며,
멸하는 일도 없고, 정지되어 있으며, 갖가지 상태로부터 자유롭다(24-38).
{중론}에 대한 주석인 {프라산나파다}에서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존재자가 자성으로서 존재할 때에는
자성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까닭에
또 그것은 사라지는 것도 아닌 까닭에
이 세계는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된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중관의 체계에서는 현상계에서 자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세계는 자성을 결하고 있다. 사물의 성질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18-7)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空이다. 그러면 공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상태가 공이다. 따라서 공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라산나파다})"라고 말한다.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타트바)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성을 결하고 있다(24-38). 따라서 사물이 자성을 결하고 있는 것이 곧 공이다. 그리고 이 공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을 설명하는 원리 즉 연기인 것이다. 사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 [緣起]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asmin sati idam bhavati)"라고 하는 연기의 법칙은 공을 뒷받침하는 공식으로 이해된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우리들은 緣起를 空性이라 부른다. 그것은 비유적인 명칭이다. 그것이 곧 中道이다(24-18)"라고 말한다. 공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본래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의 철리는 이와 같이 이중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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