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 25偈
[문] 세간에서는 눈으로 이미 간 것[已去]ㆍ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ㆍ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의 3시(時)의 지음[作]이 있음을 본다. 지음이 있으니 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 이미 간 것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네. (1)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이미 갔기 때문이다. 만일 감[去]이 없이 감[去業]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란 반은 이미 간 것이고 반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동작이 있는 곳에 감이 있네. 이것에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없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네. (2)
[문]거동[作業]이 있는 곳마다 감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거동이 있음을 눈으로 본다. 이미 간 것에는 거동이 이미 사라져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거동이 아직 없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 지금 가고 있는 것에 어떻게 감이 있겠는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3)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과실이 있네.
지금 가고 있는 것만에 감이 있기 때문이네. (4)
또 만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과실이 있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게 되네.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네. (5)
또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감이 있다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두 가지 감이란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다.
[문]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되네.
가는 이 없이 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6)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 왜 그러한가? 감이 있어야 가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두 감이 있고 그래서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감이 없다.
[문] 가는 이 없이 감이 있지 않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이제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
[답] 가는 이 없이 감이 있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감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가는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7)
가는 이가 없다면 감을 얻을 수 없다. 이제 감이 없는데 어떻게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말하는가?
가는 이는 가지 않네.
가지 않은 이도 가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네. (8)
또 가는 이는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가는 이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가는 이 또는 가지 않는 이이다. 이 둘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다.
[문] 만일 가는 이가 간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 가는 이는 얻을 수 없는데. (9)
만일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이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가 없는데 감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가는 이가 따로 있어서 가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을 것이니
하나는 가는 이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의 감이네. (10)
또 만일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과실이 있다. 가는 이는 하나인데 두 가지 감이 있게 된다. 하나는 가는 이에게 성립하고 있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에 성립하고 있는 가는 이이다. 가는 이가 성립하고 난 후에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 이것은 옳지 않다.
만일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네.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네. (1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먼저 가는 이가 있고 후에 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 그러므로 3시(時)에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만일 확실하게 결정되어 감이 존재하고 가는 이가 존재한다면 최초의 시작[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3시에서 시작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미 간 것에는 시작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시작이 없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는 시작이 없네. 어느 곳에서 시작이 있겠는가? (12)
왜 그러한가? 3시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고 이미 간 것도 없네.
이 둘에 시작이 있을 것이니,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13)
이미 간 것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없네.
모든 것에 시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분별하는가? (14)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으며 이미 간 것도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나 이미 간 것 두 곳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면, 둘 모두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았을 때는 아직 시작이 있지 않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시작이 없으니 감이 없고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 만약 감이 있지 않고 가는 이가 있지 않을지라도 마땅히 머묾과 머무는 이는 있을 것이다.
[답] 가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에 어찌 제3자가 머무는 일이 있겠는가? (15)
만일 머묾이 있고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가 머물거나 가지 않는 이가 머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마땅히 제3자가 머무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가고 있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감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감의 특징[去相]과 모순되는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감이 소멸했을 때 머묾이 있는 것인데 감이 있지 않다면 아예 머묾이 있지 않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머무는 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제3의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나 가지 않는 이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할 수 없다.
가는 이가 머문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는데. (16)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에게 감의 특징이 있는데 어찌 머묾이 있겠는가? 감과 머묾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미 간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머묾이 있지 않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머묾이 있지 않네.
행(行)과 지(止)의 법도 모두 감의 이치와 동일하네. (17)
또 만일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거나 이미 간 것이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있으면서 머무는 것이리라. 세 곳 모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감과 머묾이 타파되었듯이 행(行)과 지(止)도 타파될 것이다. 행(行)이란 이를테면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相續)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지(止)란 곡식의 씨가 소멸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상속되기에 행(行)이라 이름하고 단절되기에 지(止)라 이름한다. 또 이를테면 무명을 연(緣)해서 모든 행(行)이 있고 나아가 발생을 연해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을 행(行)이라 하고, 무명이 멸하기에 모든 행(行)이 멸하고 하는 따위를 지(止)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그대가 갖가지 문(門)을 세워서 감과 가는 이, 머묾과 머무는 이를 타파하긴 했지만 감과 머묾의 있음이 눈에 보인다.
[답]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만일 감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하나의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두 가지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옳지 않네.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18)
만일 감이 가는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다르다고 해도 옳지 않다.
[문]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감이 곧 가는 이라고 한다면
행위자와 행위 이것들이 하나가 될 것이네. (19)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가는 이 없이 감이 있고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는 것이네. (20)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착란(錯亂)된 것이니 인(因)과 연(緣)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를 의존해서 감이 있다. 또 감을 법(法)이라 이름하고 가는 이를 인(人)이라 한다. 인(人)은 상주하는 것이고 법(法)은 무상한 것이다. 만일 같다면, 두 가지 모두가 상주하는 것이 되거나 두 가지 모두가 무상한 것이 된다. 같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만일 다르다면, 서로 배척하는 것이 된다. 감이 아직 있지 않아도 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가는 이가 아직 있지 않아도 감이 있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으니 하나의 법이 멸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르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감과 가는 이 이 둘이 만일 같은 법으로 성립한다거나 다른 법으로 성립한다고 한다면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립하는 일이 있겠는가? (21)
또 만일 가는 이와 감이 같은 법으로나 다른 법으로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제3의 법이 성립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감과 가는 이가 없는 인연을 말하는 셈이 된다.
이제 다시 말한다.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네.
이전에 감이 있는 것이 아니니 가는 이와 감이 있지 않네. (22)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감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가는 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 가고 있는 것ㆍ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과 성읍(城邑)이 먼저 있고 그리고 나서 사람이 성읍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감과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는 이는 감에 의존해서 성립하고 감은 가는 이에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네.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네. (23)
또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도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24)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그러니 감이나 가는 이, 갈 곳이 모두 없네. (25)
‘실재하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는[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한다는[本實有]것으로 감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감’이란 몸의 움직임[身動]이다. ‘세 가지의 감’이란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이미 간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존재할 것이고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지 않는[不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本實無]것을 의미한다. 감에 의존할 때 가는 이라 할 수 있는데, 감이 없으니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는 것인데, 이전에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다.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가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겠는가?
감도 가는 이의 경우와 같다. 만일 이전에 가는 이 없이 감이 실재한다면, 가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이렇게 사유(思惟)하고 관찰(觀察)해 보건대 감ㆍ가는 이ㆍ갈 곳 이 법들은 모두 서로 의존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에 의존해서 감이 있다. 이 두 법에 의존해서 갈 곳이 있는 것이니, 실재한다고 말해서 안 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법(法)은 허망(虛妄)하고 공(空)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어서 환영과 같고 변화(變化)와 같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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