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께서 꾸시나가라(Kusinagara)의
숲속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고 입멸(入滅)하려 할 때였다.
비통에 잠긴 제자들 중에서
아난다(Ānanda, 阿難)가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이렇게도
빨리 열반에 드시려 합니까? 지금까지 저희들은
세존만을 의지해서 살아 왔는데,
앞으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울먹였다.
이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의 입멸을 슬퍼하지 말라.
무릇 육신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라.
그러나 내 비록 육신은 멸한다고 하더라도
내 법신(法身)은 멸하지 않느니라.
법신이란 내가 일생동안 설한 법(法)과 율(律) 중에
빛나고 있는 무상(無上)의 정각(正覺) 바로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입멸한 후에 너희들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아 살아가도록 할지니라.”
이러한 붓다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렇다. 세존과 같이 위대한 인격은 결코 그대로 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남기신 법신이야말로 인생의 무명을 밝혀주는
진리의 등불이 아닌가. 우리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과 율을
잘 받들어 그 속에서 불타의 불멸의 빛을 우러러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마음속에서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한편 쿠시나가라에서 제자들이 비탄에 빠져 있을 때,
교단 제일의 장로 마하깟싸빠(Mahakassapa, 大迦葉)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른 지방을 교화하면서 순회 중이었다.
어느 날 붓다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꾸시나가라로 급히 돌아가던 중, 꾸시나가라 쪽에서 오고 있던 한 바라문을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바라문으로부터 세존께서 일주일전에 입멸하셨다는 말을 듣었다.
마하깟싸빠를 비롯하여 제자들 전원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탄에 빠졌다.
그러나 그때 수밧다(Subadda)라는 늦게 출가한 제자가 앞에 나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째서 그렇게 비통해 하오. 우리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소.
세존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 저래서는 안 된다’고
우리들을 속박하였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터이니 얼마나 좋소.”
이런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 마하깟싸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결심했다.
“교단이 건전하게 통일된 줄 알았는데 이 어인 일인가?
이런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머지않아 정법(正法), 정율(正律)은
자취를 감추고 점차 사곡(邪曲)의 옆길로 떨어져 비법(非法),
비율(非律)이 유행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런 싹이 트고 있다.
빨리 정법, 정율을 제정하여 확고한 불설(佛說)의 통일을 기해야겠다.”
그는 꾸시나가라에 도착하자마자 비구들을 지휘하여
다비(茶毘)를 끝내고는 중의(衆議)를 물어 불설의 편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붓다의 입멸을 지켜본 다른 제자들도 그것을 공감하고 있던
차라 마하깟싸빠의 제의는 교단 전체의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붓다는 성도 후 입멸할 때까지의 45년간을 줄곧 설교를 통한
교화생활로 일관했다. 그런데 그러한 붓다의 설법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하여 설법을 듣는 자의
근기(根機, 지적 수준)에 따라 각각 달랐다.
또한 대부분의 설법은 질문에 답한 대화록이었으며,
그 내용도 경우에 따라서는 각각 달랐다.
그리고 붓다의 설법을 누군가가 문자화했거나
정리해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붓다의 설법에 대한
각자의 다른 견해[異見]가 있을 수도 있었다.
붓다의 설법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일정한
조직을 세우고 순서에 따라 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붓다의 입멸 후에 그 제자들이 붓다의
육신(肉身)을 대신하여 의존할 법과 율을 정리하고
편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멸(佛滅) 직후 제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했던 것이 불설의 편찬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결집(結集, sangiti, 合誦)이라고 한다.
여기서 불교의 경전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집은 인도불교사상 몇 차례 행하여졌으므로
불멸직후의 결집을 제1회 결집이라고 하게 된다.
제1회 결집은 불멸 직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거행되었다.
교단 제일의 장로인 마하깟싸빠를 상수(上首)로 하고
500명의 장로 비구가 모여 편찬회의를 하였다.
먼저 우빨리(Upali, 優波離)가 율(律)을,
다음에 아난다(Ānanda, 阿難)가 법(法)을 외웠다.
그런 다음 대중이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협의하여
불설이라고 승인하였다.
이 제1회 결집을 ‘왕사성 결집’ 또는
‘오백결집(五百結集)’이라고도 부르는데,
7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제1회 결집에서 회중(會中)은 붓다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구의 앞에서, 어떠한 설법을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어떠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정을 상의하여 이것을 붓다께서
설법한 형식으로 전승하였다.
그래서 경전에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어느 곳에서, 누구와 몇 사람 앞에서.
” 운운하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예배하고 돌아갔다고 하는 문구로서 끝맺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립된 불교경전은
제1회 결집과 제2회 결집 때에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회의에 모인 제자들이 붓다로부터 직접 들었던 것을
기억나는 대로 암송하여 이것을 일정한 공인의
형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곧 편찬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경전을 그들은 각각 암송하였다가
제자에서 그 다음 제자로 구전(口傳)하는 이야기
경전이었던 것이다. 제1결집의 법과 율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현재 남아있는 경장과 율장으로 발전했는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여하튼 초기불교의 말기에는 교법이 정리되어
경장(經藏, sutta-pitaka)이 되고,
율은 율장(律藏, vinaya-pitaka)이 되었을 것이다.
제2회 결집은 불멸후 약 100년경에 행해졌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불교가 성행하던
베살리(Vesali, 毘舍離城) 내의 비구들이
계율에 대한 관념이 매우 관용적이었으므로
그것을 목도한 계율 엄격주의자인 야사(Yasa)가
그 폐해를 교정코자 각처에 사람을 보내어
여러 장로 비구들에게 붓다의 유계(遺戒)를
바로 잡기 위한 회합을 해달라고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베살리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700명의 비구가
결집을 하게 된 것이다. 밧지족의 비구들이
제기한 열 가지 문제[十事]는 비법(非法)이라고 판정되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십사(十事)를 비법(非法)으로 결정한 데
대하여 불만을 품은 비구들은 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고,
별도의 회의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교단은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로 갈라졌다.
이것을 근본분열(根本分列)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