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능가경

[스크랩] 입능가경 18. 총품(總品) - 끝

수선님 2018. 4. 8. 13:03

입능가경 18. 총품(總品) - 끝
   
  그 때 세존께서는 이 수다라(修多羅)의 깊은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느 여름날 새·짐승은 아지랑이를
  미혹한 마음에서 물로 본다.
  새 짐승은 물로 여겨 애착하지만
  저 물은 사실이 아니었네.
  
  이와 같은 식(識)의 종자로서
  모든 경계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니,
  어리석은 중생에겐
  눈이 흐려 보는 것과 같네.
  
  사유(思惟)로서 사유할 바와
  능히 사유함을 떠나고,
  실제(實諦)를 보아 분별하면
  능히 해탈 알아 얻으리.
  
  
  모든 법이란 견고함이 아니요,
  허망한 분별에서 난 것이다.
  허망한 분별은 공(空)한 것인데,
  저 공(空)에 의하여 분별함이네.
  
  5음(陰)과 식(識) 등의 법은
  물 속의 나무 그림과 같고,
  환상과 꿈을 보는 것 같으니,
  식(識)으로부터 분별하지 말지어다.
  
  요술로 시체(屍體)를 일으키는 기관이며
  항상 꿈·번개·구름과 같으니,
  셋의 상속하는 법을 끊으면
  중생이 해탈을 얻으리.
  
  삿된 생각의 법에 의하여
  식(識)이 생하니,
  8·9 여러 가지 식(識)은
  물 속의 파도와 같네.
  
  훈습의 종자법에 의하여
  항상 몸을 굳게 묶으며,
  마음이 경계에 유전하는 것은
  철(鐵)이 자석에 끌리는 것과 같네.
  
  의지함인 모든 중생이여,
  진성(眞性)이란 모든 각(覺)을 떠났으며,
  모든 짓는 일과 알음과
  아는 바 법도 멀리 떠났다네.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수행하여
  10지(地)의 행을 벗어나리.
  그대는 심왕(心王)법을 관찰하라.
  마음·경계·식(識)의 모습을 떠났네.
  
  그 때 항상 마음이 유전함을 알고서
  항상 변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고
  연꽃 궁전에 머무르니,
  환상과 같은 경계의 모양이었네.
  
  저 수승한 곳에 머무르고서
  모든 자재행(自在行)을 얻으며
  마니주(摩尼珠)가 색상을 드러내듯이
  중생 제도의 사업을 지어주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도 없으며
  모든 분별심이 없어졌네.
  어리석은 이는 지혜 없이 취하기에
  석녀 아이의 꿈과 같다네.
  
  고요함과 무생(無生)이며
  5음(陰)과 인(人)과 상속(相續)과
  인연과 모든 경계와
  공(空)과 유(有)와 비유(非有)를
  
  나는 모든 방편으로 말함이요,
  이와 같은 실상(實相)이 없는데,
  어리석은 이 실제 있음으로 취(取)하나
  능상(能相), 가상(可相)이 모두 없네.
  
  
  나는 일체법(一切法)을 깨달았으나
  일체를 깨달음도 아니며,
  내게 일체지(一切智)가 있으나
  일체지가 없네.
  
  범부는 어리석게 분별하여
  스스로 세상에서 지자(智者)라 말하나
  나는 일찍이 깨닫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중생을 깨닫게도 아니하네.
  
  일체법은 마음 뿐이요
  모든 음(陰)도 털 바퀴 같다.
  털 바퀴 모양은 필경 없으니
  어느 곳에 분별함이 있으랴.
  
  본래 없고 처음 생긴 물건이란
  모든 인연에도 또한 없으며,
  석녀와 허공 꽃이니,
  만약 유위(有爲)라고 본다면
  
  그 때엔 볼 바[可見]를 볼 것이요,
  미(迷)한 것을 보면 법이 곧 머무르며,
  나도 열반에 들지 않으리니,
  상(相)과 업을 멸하지 않는 것이리.
  
  분별식(分別識)만을 멸하는 것이
  바로 나의 열반이요,
  법상(法相)을 멸함은 아닌데,
  어리석은 사람이 허망하게 분별하네.
  
 
  거칠게 흐르는 물이 다하면
  그 때엔 파도가 일지 않듯이,
  여러 가지 식(識)이 없어지면
  없어지고는 다시 나질 않으리.
  
  공(空)함이요, 식(識)의 모양이 없어서
  환상과 같아 본래 나지 않음이요.
  유무(有無)이면서 유무를 떠났으니
  이 모든 법이 꿈과 같은 것이네.
  
  내가 말한 하나인 실법(實法)은
  모든 각관(覺觀)을 떠났으며,
  성인의 묘한 경계라서
  두 법의 체상(體相)을 떠났다네.
  
  반딧불 모양을 보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진실한 것 없으니,
  세간에서 4대(大)와 여러 가지를
  보는 것 또한 이와 같네.
  
  풀·나무·돌에 의지하여
  환상의 모양을 보임과 같으니,
  저 환상은 이러한 모양이 없듯이
  모든 법체(法體)도 이와 같다네.
  
  취착(取着)함과 취착할 바도 없으며
  해탈도 속박도 없고
  환상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으며
  꿈과 눈[眼] 속의 티와 같다.
  
 
  만약 이와 같이 실답게 보고
  모든 분별의 때[垢]를 떠나면
  곧 여실한 정(定)에 머무르리니,
  그가 나를 보는데 의심이 없으리라.
  
  이 가운데에는 심식(心識)이 없고
  허공과 아지랑이와 같으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안다고 하지만
  그러나 한 법도 알지 못하리.
  
  유무(有無)의 모든 반연 떠났기에
  그러므로 모든 법을 생(生)함이 아니며,
  삼계(三界)도 마음이 미혹한 것이니
  그러므로 여러 가지가 보인 것이네.
  
  꿈과 세간의 법인
  이 두 법은 평등하니,
  보여질 바와 살림살이와
  모든 촉감과 또한 양(量)이며
  
  몸과 무상(無常)과 세간과
  여러 가지 색(色) 또한 그러하네.
  세간에서 높으신 이의 말씀은
  이와 같이 짓는 바 일이라네.
  
  마음은 삼계(三界)의 종자(種子)로서
  미혹으로 현재와 미래를 보지만,
  세간의 분별을 알면
  이와 같은 실법(實法)은 없으리.
  
 
  세간을 이와 같이 본다면
  능히 생사(生死)를 떠나리니,
  생(生)과 불생(不生)은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본 것이네.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은
  지혜를 닦는 이가 본다.
  아가니(阿迦尼 : 有頂天)의 묘한 경계는 
  모든 악행(惡行)을 떠난 곳이네.
  
  항상 분별이 없는 행과
  모든 심수(心數)를 떠난 법으로
  역통(力通)이 자재(自在)함을 얻고
  삼매에 도달하는 곳에서
  
  정각(正覺) 이루었으니
  화불(化佛)이 그 가운데서 이루셨네.
  모든 법은 생멸(生滅)이 아니라
  모든 법은 이와 같은 체(體)라네.
  
  응화(應化)의 한량없는 억(億)의 수가
  그 체(體) 속에서 출세하시어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법에 들게 하는데
  메아리와 같아 사의(思議)할 수 없네.
  
  처음·중간·끝을 멀리 떠났으며
  유무(有無)의 법까지 떠나서
  두루 움직이지 않고 청정하여
  모든 모양이 없는 데서 모양을 드러낸다.
  
 
  식성(識性)이 법신(法身)을 가리워
  일체 몸 가운데에 있으니
  미혹은 이 환(幻)으로 있는 것이요,
  환은 미혹의 인(因)이 아니라네.
  
  마음에는 미혹의 법이 없으며
  또한 조금 있지 않음도 아니다.
  마음이 두 법의 속박에 의하여
  아리야식(阿梨耶識)이 일어난 것이네.
  
  다만 마음이 이와 같이 본 것이요,
  아(我)와 법은 거칠게 흐르는 물과 같으니,
  세간을 이와 같이 관찰하면
  그 때엔 모든 마음을 굴리리라.
  
  이는 나의 참 제자로서
  진실한 법행(法行)을 성취하리.
  뜨거움·젖음·굳음·움직임을 
  어리석은 이는 모든 법이라 분별하여
  
  사실 아닌 것을 있다고 생각하나
  능상(能相)과 가상(可相)은 없으리라.
  여덟 가지 물건으로 한 몸과
  형상과 모든 근(根)이었네.
  
  어리석은 이는 모든 형색 분별하여
  미혹의 몸이 그물에 얽히고,
  여러 인연이 화합하므로
  어리석은 분별이 난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을 알지 못했기에
  삼계(三界)에서 유전한다.
  모든 법과 언어는
  이 중생의 분별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없는 것으로
  화(化)함과 꿈 같은 것이니,
  모든 법이 이와 같은 것으로 관찰하여
  세간과 열반에 머무르지 아니하리.
  
  마음의 여러 가지 종자로서
  마음의 경계를 나타내 보인 것이니,
  볼 바인 분별이 생기기에
  어리석은 이는 두 법을 좋아하네.
  
  무지(無智)와 애착과 업은
  심(心)과 심법(心法)의 인(因)이니,
  다른 힘인 법에 의해 생겼으므로
  타력(他力)의 법이라 말하네.
  
  법에 의하여 분별하는 일들은
  마음이 경계에 미혹함이니,
  그러므로 분별이 될 수 없어
  미혹한 삿된 분별이라네.
  
  마음이 인연에 묶임에 의하여
  그러므로 모든 몸이 생하였으니,
  만약 모든 인연을 떠난다면
  나는 '법을 보지 않음'이라 말하리.
  
 
  모든 인연법을 떠나며
  모든 법상(法相)을 떠나서
  모든 법 가운데에 머물지 않으면,
  나는 '경계를 보지 않음'이라 말하리.
  
  왕(王)과 장자(長者)들이
  여러 가지 새와 짐승을
  집과 들에 모아두고
  여러 아들에게 보이듯이,
  
  나도 이와 같은 모든 상(相)과
  여러 가지 거울 모양인 법을
  속 몸 지혜로 아들 삼아서
  실제(實際) 법을 말한다.
  
  큰 바다의 물결은
  바람의 인연으로 생기어
  능히 일어 날뛰고 현전(現前)하여
  끊어질 사이가 없듯이
  
  아리야식도 항상
  바람인 경계에 의해 일어나며,
  여러 가지 물결인 식(識)이
  능히 날뛰고 생겨 끊어지질 않네.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의 모양을
  중생은 이와 같이 보지만,
  가견(可見)은 모든 상(相)이 없는데
  모도(毛道)는 이와 같이 본다네.

  아리야인 근본식[本識]과
  의(意)와 의식(意識)은
  가취(可取)와 능취(能取)를 떠난 것이니,
  나는 '이와 같은 모양'이라 말한다.
  
  5음(陰)엔 아(我)도 없으며
  인(人)과 중생도 없다.
  생(生)은 여러 식(識)이 생(生)함이요
  멸(滅)은 곧 여러 식이 멸함이네.
  
  그림 속의 높고 낮음과 같아서
  보이지만 이와 같은 것이 없으니,
  이와 같은 모든 물체는
  보이지만 이와 같은 모양이 없다네.
  
  건달바(乾闥婆)의 성(城)과 같으며
  새와 짐승이 물을 갈애(渴愛)하듯이
  이와 같은 보여지는 것을 보지만
  지혜로 관찰함엔 이러한 것이 없으리라.
  
  헤아림과 생각함을 떠났으며
  인(因)도 아니며 과(果)도 아니요,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떠났고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을 떠났다네.
  
  음(陰)과 인연에 의해 깨달을 것이니
  인견(人見)과 가견(可見)이 없으리라.
  만약 가견(可見)을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법을 닦으랴.
  
 
  인연과 인(因)과 비유와
  뜻 세움[立意]과 인연이며,
  꿈과 건달바와 털바퀴와
  아지랑이와 해와 달과
  빛과 불꽃과 환(幻) 등인 비유로
  나는 '모든 법이 생함'을 막노라.
  
  꿈과 환(幻)같은 미혹으로서
  허망하게 중생을 분별함이니,
  삼계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안과 밖에도 또한 모두 없어,
  '모든 유(有)가 생(生)하지 않음'을 본다면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리.
  
  환과 같은 삼매[如幻三昧]와
  뜻과 같은 몸[如意身]과
  모든 신통과 자재함과
  힘과 마음인 여러 가지 법을 얻으리라.
  
  모든 법은 본래 생함이 아니며
  공하여 법체상도 없지만,
  저 사람은 미(迷)하고 깨닫지 못하여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하니,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 같아서
  마음에서 자심(自心)을 본 것이며
  바깥 여러 가지 모양을 본 것이요,
  실로 보여질 법은 없는 것이다.
  
  
  골상(骨相)과 불상(佛像)과
  모든 4대(大)가 흩어짐을 보며
  잘 살피는 마음으로 능히 아는 것이
  세간상(世間相)을 주지(住持)함이라네.
  
  몸과 주지함과 살림살이여,
  가취(可取)인 세 가지 경계로다.
  식(識)은 식(識)의 경계를 취하고
  의식(意識)은 셋을 분별하니,
  
  분별함과 가분별(可分別)이
  있는 바 명자(名字)의 경계로서
  능히 진실법을 보지 못함이니,
  그의 각(覺)은 미(迷)하여 보지 못함이네.
  
  모든 법의 자체가 없는 것을
  지혜 있는 자는 능히 깨달으니,
  수행자가 그렇게 생각을 쉬고서
  상(相)이 없는 곳에 머무르리.
  
  만약 먹으로 닭을 그리면
  어리석은 이는 나의 닭이라고 하니,
  어리석은 범부의 취(取)함과 같아서
  3승(乘)이 모두 한 가지라네.
  
  성문(聲聞)인 사람도 없으며
  또한 벽지불(辟支佛)도 없지만,
  보는 바 성문의 색(色)과
  여래를 보는 것은
  

  보살의 큰 자비로서
  화신(化身)을 보인 것이네.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두 가지 체상(體相)을 떠났으니,
  여러 상을 전변(轉變)하면
  그가 곧 진여(眞如)라네.
  
  법과 인(人)의 행상(行相)과
  해와 달의 빛나는 것이며
  큰 마니의 보배로서
  분별 없이 일을 지으니,
  제불(諸佛)의 법은 이와 같지만
  눈병에서 털 바퀴를 취함이라네.
  
  이와 같이 법을 분별하여
  어리석고 허망하게 취착하네.
  생(生)·주(住)·멸(滅)을 떠났으며
  상(常)과 무상(無常)도 떠났도다.
  
  보여진 염정(染淨)의 법이란
  공중의 털 바퀴 같으며,
  이아리풀[莨菪]에 중독된 사람이
  여러 모양인 대지(大地)를 보는 것과 같다.
  
  일체가 금빛과 같이 보이나
  저것에는 일찍이 금이 있지 않았으니,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끝없는 심법(心法)을 더럽힌 것이다.
  

  환상과 아지랑이가 생기면
  어리석은 이는 사실로서 본다.
  
  한 종자와 종자가 없음이여,
  큰 바다도 한 종자인 것이며
  또한 한량없는 종자이니,
  그대는 마음의 종자를 관찰하라.
  한 종자가 청정하면
  한량없는 종자를 굴리리라.
  
  평등하여 분별이 없으나
  일으키면 곧 생사(生死)로서
  능히 여러 가지 종자를 내니,
  그러므로 종자를 말한다.
  
  인연은 불생(不生)의 법이며
  인연은 불멸(不滅)의 법이다.
  생(生)하는 법은 오직 인연인데
  마음이 이와 같이 분별함이여.
  
  삼계(三界)가 오직 거짓이름[假名]이요
  실로 사법(事法)의 체(體)가 없는데
  망각(妄覺)하는 이가 이를 분별하여
  거짓이름을 취(取)하여 사실로 여기네.
  
  모든 법의 실체를 관찰하면
  나는 '미혹했다'라고 말하지 않으리.
  실체(實體)의 불생(不生)법을
  관찰하면 해탈을 얻으리라.
  
 
  나는 '환(幻)과 없는 것'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니,
  뒤바뀜과 신속함이 번개와 같아
  그러므로 '환과 같다'라고 말한다.
  
  본래 생김과 처음 생김도 아니요,
  모든 인연에 체(體)가 없고
  있는 곳과 자체도 없어서
  오직 말만이 있을 뿐이네.
  
  인연이 생멸함인 것을 막지 않으며
  인연이 화합함인 것을 막지 않고,
  모든 어리석은 견해로
  '인연으로 생긴다'라고 분별함을 막노라.
  
  실로 식(識)의 자체 법이 없으며
  사법과 근본식도 없거늘,
  어리석은 이 분별을 내니
  시체(屍體)와 같은 악각(惡覺)이다.
  
  삼계(三界)가 다만 마음임을 
  모든 불자(佛子)가 능히 본다면,
  곧 종류인 몸[種類身]을 얻을 것이요,
  지음과 유위(有爲)법을 떠날 것이다.
  
  힘과 신통과 자재와
  함께 하는 상응(相應)법을 얻고
  일체 색(色)을 나타내리니,
  심법(心法)은 이와 같이 생한다.
  
 
  심(心)과 색(色)이 없는데도
  끝없이 마음을 미혹했으니,
  그 때엔 수행하는 이
  무상(無相)을 얻어 보고,
  
  지혜로 관찰하여
  모든 중생들의
  상(相)과 법과 거짓이름과
  뜻으로 움직인 법의 취함을 보지 않으리.
  
  나의 모든 제자가 이를 지나서
  분별함이 없이 수행해야 하리.
  건달바성과 환상과
  털 바퀴와 아지랑이를
  실로 없음에도 사실로 보지만
  모든 법의 체(體)는 이와 같다.
  
  마음대로 모든 법을 본 것이요,
  이와 같은 체상(體相)은 없는 것이다.
  일체법은 생(生)함이 아니지만
  다만 미혹한 법을 본 것이니,
  모도(毛道)의 미혹한 분별은
  두 법에 머무르기 때문이네.
  
  처음 식(識)이 분별을 내고서
  여러 가지로 종자를 훈습하네.
  식은 폭수(瀑水)가 일어남과 같으니
  그를 끊으면 불생(不生)이네.
  
  
  여러 가지 염관(念觀)인 법이
  만약 심중(心中)에서 생긴다면
  허공의 벽(壁)과 같으니
  무슨 까닭으로 생함이 아니랴.
  
  만약 소상(少相)의 관(觀)이 있으면
  마음이 인연을 따라 나리라.
  만약 인연으로부터 난다면
  유심(唯心)이라 말하지 못하리라.
  
  마음이 자심(自心)을 취하여
  법도 없고 인(因)에 따라 생함도 없다.
  심법(心法)의 체(體)는 청정하여
  허공이라 훈습이 없네.
  
  허망하게 자심을 취하기에
  그러므로 마음이 나타나 생한다.
  외법(外法)은 보여짐도 없으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본식(本識)은 다만 마음이며
  뜻은 능히 경계를 생각하여
  능히 모든 경계를 취하니,
  그러므로 나는 '유심'이라 말한다.
  
  심(心)은 항상 무기(無記)인 법이며
  의(意)는 2변(邊)으로 모양을 취하네.
  현재의 법을 취함은 식(識)이니
  그는 선(善)과 불선(不善)이라네.
  
 
  두 가지 식의 모양을 떠난 것이
  제일의문(第一義門)이네.
  3승(乘)의 차별을 말하였으나
  고요함은 이러한 모양이 없다네.
  
  만약 마음이 고요함에 머무르고
  부처님의 땅에서 행하는 것이라면
  이는 과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요,
  현재와 미래도 또한 이와 같다네.
  
  처음 7지(地)는 마음의 땅이며
  고요함은 제8지(地)라네.
  2지(地)는 행처(行處)요,
  그밖에 지위는 아(我)의 법이라네.
  
  스스로 안의 몸이 청정한 것은
  아(我)가 자재한 자리이다.
  자재하고 구경(究竟)인 곳의
  아가니타(阿迦尼吒)천에서 나타난다네.
  
  여러 불꽃들이
  광명을 내는 것과 같아서
  여러 가지 마음으로 좋아하기에
  변화로 삼계를 지었도다.
  
  혹 중생을 교화할 수 있으면
  변화로 3유(有)를 지어내고,
  그 곳에서 모든 법을 말하니
  나의 자재(自在)한 자리이네.
  
 
  모든 지위엔 시절도 없으며
  국토의 전변(轉變)함 또한 그러하여
  심지법(心地法)을 초과하였으니,
  고요한 과(果)에 머무름이네.
  
  실로 없는 데 사실이라 하여
  여러 가지를 보지만,
  어리석은 이의 전도된 취(取)함이며
  여러 가지의 전도(顚倒)라네.
  
  만약 분별이 없다면
  일이 있어도 상응(相應)하지 않으리.
  심(心)은 모든 색(色)이 아니니,
  그러므로 분별이 없으리라.
  
  모든 선(禪)과 무량(無量)과
  무색(無色)의 삼매여,
  모든 상(相)은 필경 멸하고
  그러므로 마음속엔 없으리라.
  
  수다원과(須陀洹果)의 법과
  왕래(往來)·불환(不還)과
  또한 아라한과(阿羅漢果)들이여,
  모두 마음이 미(迷)했다네.
  
  공(空)과 무상(無常)과 찰나를
  어리석은 이는 유위(有爲)라 분별하네.
  강물과 종자의 비유로서
  찰나의 뜻을 분별하니,

  찰나는 분별이 없어서
  모든 짓는 바 법을 떠났다.
  일체법이 생기지 않기에
  나는 찰나의(刹那義)라고 말한다.
  
  유(有)와 무(無)를 생김이라 말함은
  승구(僧佉) 등의 허망한 말이요,
  일체법이 무기(無記)라 함도
  또한 그이들의 말이었네.
  
  네 가지 기법(記法)이 있으니
  일왕답(一往答)과 반문(反問)과
  분별차별답(分別差別答)과 묵답(默答)인데,
  그것은 외도를 막으려고 함이네.
  
  세제(世諦)는 일체 유(有)이고
  제일의제(第一義諦)는 무(無)이다.
  실체(實體)는 모양이 없으니
  이것이 제일의제라네.
  
  허망한 법임을 보았기에
  그러므로 세제(世諦)를 말하였다.
  언어(言語)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이와 같은 실체가 없다네.
  
  일이 없는데 언어만이 있으니,
  세제(世諦)속에는 참으로 없구나.
  바로 전도(顚倒)된 일로서
  보는 바 또한 없다네.
  

  만약 일이 전도되어 있다면
  적정(寂靜)은 필경 없으리라.
  전도된 일에 의하여
  모든 법의 생함을 본 것이네.
  
  필경 결정코 없으니
  곧 체상(體相)이란 없음이다.
  보는 바 여러 가지 법은 
  훈습인 번뇌로 생긴 것이네.
  
  마음이 바깥 경계에 미혹하여
  전경(前境)을 취(取)하니,
  분별에 분별이 없어
  공(空)이며 실상(實相)법이네.
  
  환상의 여러 모양과 같고
  나뭇잎을 금빛이라 함과 같아
  볼 수 있음을 사람이 보지만
  마음의 무명(無明)으로 훈습함이다.
  
  성인은 미(迷)를 보지 않으며
  중간에 진실도 보지 않아,
  미혹이 곧 진실이고
  진실은 곧 중간이다.
  
  모든 미혹을 멀리 떠나고서
  만약 능히 모든 상(相)을 낸다면,
  바로 그 미혹이니
  눈병 같아 깨끗함이 아니네.
  
 
  눈병으로 털 바퀴 보듯이
  미혹에 의해 모든 법을 취하여,
  모든 경계에서
  어리석어 법을 취(取)하네.
  
  모든 법이 털 바퀴 같으며
  아지랑이를 물로 미혹함이고
  삼계(三界)도 꿈과 환상 같으니,
  수행하여 해탈을 얻어야 하리.
  
  분별과 가분별(可分別)이
  능히 분별을 내며
  박(縛)과 가박(可縛)과 인(因)이
  여섯 가지 해탈의 인(因)이라네.
  
  지위와 모든 제(諦 : 진실)도 없으며
  국토 및 화불(化佛)도 없고
  불(佛)과 벽지(辟支)와 성문은
  오직 마음에서 분별함이라네.
  
  인체(人體)와 5음(陰)은
  모든 인연과 미진(微塵)과
  훌륭한 사람이 자재(自在)로 지었다 함은
  오직 이 마음의 분별이라네.
  
  마음은 모든 곳에 두루 했으니
  모든 곳이 다 마음이다.
  마음을 잘 관찰하지 못한 탓이요,
  심성(心性)에는 모든 상(相)이 없네.
  
 
  5음(陰)에는 아(我)가 없고
  아(我)에는 5음이 없다.
  이 법을 없다고 분별하지만
  저 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과 같이
  일체법이 있다고 하여
  이와 같이 실로 있다고 보아
  일체가 진실임을 마땅히 보리라.
  
  일체법이 만약 없다면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리.
  어리석은 이는 이와 같이 보지만
  저 법은 이와 같지 않다.
  
  미혹으로 분별하는 상(相)은
  타력(他力)의 분별이니,
  저 상(相)의 있는 바 이름이란
  분별상(分別相)이라 이름한다.
  
  명상(名相)은 분별이니
  인연의 일들이 화합한 것이다.
  만약 저 마음을 내지 않으면
  제일의(第一義)인 모양이라네.
  
  보신불(報身佛)과 실체불(實體佛)과
  변화한 바 부처님의 모양과
  중생과 또한 보살과
  아울러 시방의 국토며
  
 
  습기(習氣)와 법신과 화신불과
  또한 화신불로 짓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국토로부터 나온 것이라네.
  
  응화(應化)의 설법하신 바와
  보불(報佛)의 설법함은
  수다라(修多羅)에서 널리 말했으니
  그대는 마땅히 비밀인 뜻임을 알리.
  
  있는바 불자의 설법과
  또한 여러 여래께서는
  이 모두 화불의 말씀인 것이요,
  순숙(淳熟)한 이의 말씀이 아니라네.
  
  이 모든 법은 생함이 아니며
  저 법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건달바 성(城)과 환상이며
  꿈과 변화인 것과 같은 것이라네.
  
  여러 가지 마음이 따라 구르니
  유심(惟心)이요, 다른 법이 아니다.
  마음이 생(生)하면 여러 가지가 생하며
  마음이 멸(滅)하면 여러 가지가 멸한다.
  
  중생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물건이 없는데 물건을 보지만
  없는 뜻은 오직 마음인 것이요,
  분별이 없으면 해탈을 얻으리라.
  
 
  끝없는 세상에의 희론(戱論)은
  번뇌에 의지했으니
  모든 분별로 훈습하였기에
  그러므로 사견(邪見)이 난다.
  
  식(識)은 분별이 없는 뜻이요
  진여(眞如)는 지혜의 경계니,
  저를 굴리면 고요함이라.
  이것이 성인의 경계라네.
  
  뜻을 관찰하는 사유(思惟)는
  모든 범부의 사유함이요,
  진여를 생각하는 사유는
  부처님의 깨끗한 사유라네.
  
  모든 법체를 분별하니
  일체법은 생김이 아니다.
  타력(他力)의 인연에 의하여
  중생은 미혹으로 분별한다.
  
  타력(他力)이 만약 청정하면
  분별과 상응(相應)하는 것을 떠나리라.
  저를 굴리면 바로 진여요,
  분별을 떠나면 진여의 행(行)이다.
  
  결코 분별하지 말 것이니
  분별에는 실(實)이 없다.
  미혹의 법을 분별함으로
  취(取)와 가취(可取)는 다하지 않으리라.
  
 
  바깥 분별인 경계를 보고
  실체(實體)라고 분별하여
  마음을 분별하고 분별한다면
  저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리라.
  
  사견(邪見)으로 바깥 의(義)를 본 것이니
  의(義)는 없고 다만 마음인 것이다.
  양(量)을 관찰하여 상응하면
  능히 취와 가취를 멸하리라.
  
  바깥 경계는 없는 것이지만
  어리석은 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훈습으로 마음을 증장하기에
  모든 법이 생한 듯 함과 같다.
  
  두 가지 분별을 멸하면
  진여 지혜의 경계이니,
  법 없는 모양에서 생함이란
  부사의(不思議)인 성인의 경계라네.
  
  명상(名相)과 분별과
  실체와 두 가지 모양과
  바른 지혜와 진여는
  이 실체를 성취함이다.
  
  부모에 의하여 화합되며
  아리야(阿梨耶)와 의(意)가 합하는 것은
  타락[酥]과 병(甁) 들과 쥐와 같아서
  함께 적(赤)·백(白)이 증장하네.
  
 
  벽시(辟尸)와 두터운 포창(泡瘡)인
  부정(不淨)함이 관절[節]에 의하여 다하는데
  업풍(業風)이 4대(大)를 자라게 하는 것이
  과일이 성숙함과 같다네.
  
  다섯과 다섯 곱하기 다섯에서
  또한 아홉 가지 구멍이 있고,
  털과 껍질이 두루 덮어서
  이와 같이 증장(增長)하여 태어나네.
  
  태어남은 똥 속의 벌레와 같고
  사람이 잠자다가 깨어남과 같으며,
  눈으로 색(色)을 보고 생각을 일으켜
  증장하여 분별을 낸다.
  
  분별과 또한 전념(專念)이
  이(齒)와 입술이 화합한 것을 끊고서,
  입으로 비로소 말하는 것이
  앵무새가 소리를 희롱함과 같다.
  
  모든 외도는 결정[定]을 말하나
  대승(大乘)에는 결정이 아닌 것이다.
  중생의 마음에 의한 결정이며
  사견(邪見)으로 능히 가까이 할 수 없네.
  
  나의 법은 안으로 증득한 지혜이니
  허망한 각(覺)은 그 경계가 아니다.
  여래께서 세상에서 입멸한 후에는
  누가 간직하여 나를 위해 말하겠는가.
  

  여래께서 멸도한 후에는
  미래에 마땅히 사람이 있으리니,
  대혜여, 그대는 잘 들어라
  나의 법을 지닐 사람은 있으리라.
  
  남쪽의 큰 나라에
  대덕(大德) 비구가 있으리니,
  이름은 용수(龍樹) 보살 일 것이요
  유무(有無)의 견해를 능히 깨트리고,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법인
  대승의 위없는 법을 말할 것이며,
  환희지(歡喜地)를 증득하고서
  안락국(安樂國)에 왕생(往生)하리라.
  
  지혜로 법을 관찰함에는
  진실한 법체(法體)를 볼 수 없으니,
  그러므로 말할 수 없으며
  말함도 또한 체(體)가 없느니라.
  
  만약 인연으로 생겨진 법이라면
  있음과 없음을 말하지 못하리.
  인연에는 사물이 있다고 하여
  어리석은 이, 있고 없음을 분별하네.
  
  사견(邪見)인 두 삿된 견해이니,
  나는 아(我)·법(法)을 떠남을 알았노라.
  일체법의 명자(名字)를
  한량없는 겁(劫) 동안 항상 배웠노라.
  
 
  배우고 또한 다시 배우고서
  번갈아 서로 분별하니,
  만약 명자를 말하지 않으면
  세간 사람이 미혹하리니,
  
  그러므로 명자를 지은 것은
  미혹의 법을 없애기 위함이다.
  세 가지 분별에 의하여
  어리석은 이 법을 분별하네.
  
  명자에 의해 미혹한 분별을 하여
  인연으로 능히 생겼다고 하나,
  법은 멸함도 생김도 아니요
  자성(自性)이 허공과 같다.
  
  법은 체(體)가 없는 것이 바로 체(體)요,
  분별하는 상(相)도 곧 체(體)이니,
  그림자와 환상과
  아지랑이와 꿈과 메아리이며,
  
  불 바퀴[火輪]와 건달바(乾闥婆)로서
  모든 법이 이와 같이 나니,
  둘이 아닌 진여(眞如)·공(空)은
  실제(實際)이며 법체(法體)이다.
  
  내가 말한 분별 없음이
  저 법상(法相)을 성취하였네.
  입과 마음의 경계는 허망함이니
  진실과 허망을 세운 그것이네.

  마음이 2변(邊)에 떨어지기에
  그러므로 분별이 성립함이다.
  유(有)와 무(無)는 2변에 떨어진 것이니
  마음의 경계에 있기 때문인 것이네.
  
  모든 경계를 멀리 떠나서
  그 때엔 바로 마음을 멸하고,
  취(取)하는 경계를 떠나면
  저 멸(滅)은 유무(有無)가 아니네.
  
  성인의 경계와 같아서
  어리석은 사람은 능히 알지 못하리.
  멸(滅)하여 진여에 머무름이란
  지혜 있는 자만이 능히 보리라.
  
  저 법과 같이 머무른다면
  지혜 있는 자만 보리니,
  법체가 이와 같지 않음은
  모든 법에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쇠를 보고
  분별하여 금이라고 하여
  금이 아닌 것을 금으로 보듯이,
  외도의 법을 취함도 그와 같다.
  
  본래 없음[本無]인데 처음 생하였다고 하고
  처음 생긴 후 또한 멸하며,
  인연 따라 있음과 없음이라 하는
  말은 나의 교법이 아니다.
  
 
  처음과 종말이 없는 법으로
  이와 같은 모양에 머무름이 없으니,
  세간의 머무른 모양이란
  삿된 깨달음을 알지 못한 때문이네.
  
  과거의 법도 있는 것이요
  미래의 법도 없는 것 아니며
  현재의 법도 또한 있으니,
  마땅히 법이 생한다고 말하지 못하리.
  
  전변(轉)하는 시간과 행상(行相)과
  모든 대(大)와 여러 감관[根]으로
  허망하게 중음(中陰)을 취하니,
  만약 각자(覺者)가 아니면
  일체 불(佛)·세존께서
  '인연으로 생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리.
  
  인연이 곧 세간인 것이니
  건달바의 성(城)과 같은 것이라네.
  다만 법과 인연이 화합하여
  이 법에 의해 법이 생기니,
  모든 화합인 법을 떠나면
  멸도 아니고 또한 생(生)도 아니라네.
  
  거울과 물 속에서와
  눈(眼)과 그릇과 마니(摩尼)에서
  모든 비추인 모양이 보이지만
  모든 영상(影像)이란 없는 것이네.
  
  
  짐승이 헛된 물에 애착하듯이
  여러 가지 색(色)을 보고서
  여러 가지 있는 것과 같으나
  꿈과 석녀(石女)와 같다네.
  
  나의 법은 대승도 아니고
  소리도 명자(名字)도 아니며
  제(諦)도 해탈도 아니요
  고요한 경계도 아니라네.
  
  그러나 나의 법은 대승이며
  모든 삼매로서 자재하고
  뜻과 같은 여러 가지 몸이
  자재롭게 꽃으로 장엄하였네.
  
  일체(一體)와 별체(別體)이면서
  인연에는 없는 법이지만
  줄여 말하면 모든 법이 생(生)함이고
  널리 말하면 모든 법이 멸함이네.
  
  불생공(不生空)이 하나[一]이며
  생공(生空)이 둘[二]이다.
  불생공은 수승함이요
  생멸(生滅)은 바로 공(空)이네.
  
  진여와 공과 실제(實際)와
  열반과 법계(法界)와
  몸과 뜻인 여러 가지를
  나는 '다른 이름인 법이다'라고 말하였네.
  
 
  경(經)과 비니(毘尼)와 비담(毘曇)에서
  아(我)가 청정함을 분별하였으니,
  명자에 의지하고 뜻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는 무아(無我)를 알지 못하리.
  
  외도도 부처도 아니며
  아(我)도 다른 것도 또한 아니요,
  인연 따라 법이 있음이니
  어찌 '모든 법이 없다'라고 하랴.
  
  어떤 사람이 유(有)를 성취하고
  인연 따라 무(無)를 말하는가?
  설법함에 사견(邪見)을 내고서
  유무(有無)로 허망하게 분별함이네.
  
  만약 사람이 불생(不生)을 보고
  또한 법의 불멸(不滅)을 본다면,
  그 사람은 유무를 떠나서
  세간의 고요함을 보리라.
  
  중생의 분별인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은 토끼 뿔 같으니,
  분별이란 미혹으로
  새가 아지랑이를 애착함과 같네.
  
  허망하게 법을 분별하고
  그에 의해서 분별하는 견해이네.
  인연과 분별은 없는 것이니
  인(因)이 없기에 마땅히 분별하지 않으리.
  
 
  물이 없는 데서 물을 취하는
  짐승과 같이 허망하게 애착을 내니,
  어리석은 이는 이와 같이 보거니와
  성인은 이러한 것이 없다네.
  
  성인은 견(見)이 청정하여
  3해탈을 내었기에
  생사(生死)의 법을 떠나고서
  고요한 곳에서 수행한다.
  
  깊고 묘한 방편으로
  국토의 기묘한 일을 알고서
  나의 모든 제자를 위해 말함이나
  소승(小乘)을 위함은 아니라네.
  
  3유(有)는 무상(無常)한 것이니
  공(空)·무아(無我)·아(我)를 떠났으니,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인 것을 
  나는 성문(聲聞)을 위해 말했노라.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고
  세간을 떠나 홀로 행하면,
  나는 연각의 과(果)라 말하니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다.
  
  바깥의 실체(實體)를 분별함은
  타력(他力)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자신(自身)의 미혹을 본다면
  그 때엔 모든 마음을 굴리리라.
  
 
  10지(地)가 곧 초지이며
  초지(初地)가 곧 8지(地)요,
  9지(地)가 곧 7지(地)이고
  7지가 곧 8지이며,
  
  2지(地)가 곧 3지이고
  4지(地)가 곧 5지(地)이며,
  3지(地)가 곧 6지(地)이어서
  고요함엔 자체가 없느니라.
  
  모든 법은 항상 고요하며
  수행자에게도 법이 없으니,
  유무(有無)법이 평등하면
  그 때엔 성과(聖果)를 얻으리라.
  
  모든 법에는 체상(體相)이 없거니
  어찌하여 없는 법에서
  능히 평등을 짓고
  고요하여 분별이 없겠는가.
  
  만약 모든 마음과 안팎의
  움직이는 법을 보지 않으면,
  그 때 모든 법을 멸하고서
  평등한 마음을 보리라.
  
  어리석은 이 끝없이 유전(流轉)하면서
  법을 취함이 품에 안음과 같고
  범부를 속이며 유전함은
  쐐기로서 쐐기를 빼내는 것과 같아서
  
 
  저 인(因)과 관찰에 의하여
  의(意)와 함께 경계를 취하며
  식(識)의 종자에 의하여
  능히 마음의 인(因)을 짓느니라.
  
  닦아 얻음과 주지(住持)함과
  종류인 몸을 따라 얻음과
  꿈 가운데에 얻은 바인
  신통 네 가지가 있다네.
  
  꿈에 얻은 바 신통과
  여러 부처님의 인(因)에서
  종류의 몸을 취하여 얻은
  저 신통은 진실한 신통이 아니다.
  
  훈습한 종자로 마음을 훈습하여
  법이 생겨서 구르는 것과 같으나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기에
  그를 위하여 '모든 법이 생긴다'고 말한다.
  
  바깥 물건을 분별하여
  모든 법상을 성취하기에
  그 때엔 마음이 민몰(悶沒)하여
  자기 미혹을 보지 못한다.
  
  무슨 까닭으로 생(生)을 말하며
  무슨 까닭으로 무견(無見)을 말하며
  볼 수 없는 데서 보는 것인지
  원컨대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떠한 사람을 위하여
  어떠한 법이 있다고 말하며
  어떠한 사람 위해서는
  어떠한 법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마음 자체는 스스로 청정하건만
  의(意)가 일어나서 함께 혼탁했으니
  의(意)와 일체 식(識)이
  능히 훈습하는 종자를 지었느니라.
  
  아리야(阿梨耶)가 몸을 내었고
  의(意)는 나가서 모든 법을 구하며
  의식은 경계를 취(取)하고
  미혹의 견해는 탐하며 취한다.
  
  자심(自心)에서 보는 바 법인
  외법(外法)은 외법이 없으니,
  이와 같이 미혹을 관찰하고
  항상 진여를 생각하리.
  
  선(禪)을 닦는 자의 경계와
  업(業)과 부처님의 위대한 일인
  이 세 가지는 사의(思議)할 수 없고
  지혜 있는 자의 경계라네.
  
  과거·현재·미래와
  열반과 허공을
  나는 세제(世諦)에 의해 말함이나
  진체(眞諦)는 명자가 없느니라.
  

  2승(乘)과 외도들은
  사견(邪見)에 집착하여
  마음속이 미몰(迷沒)하면서
  바깥 법을 분별하네.
  
  연각(緣覺)과 불(佛)과 보살(菩薩)과
  나한(羅漢)은 부처님을 보는데,
  보리(菩提)의 굳은 종자를
  꿈속에서 성취하네.
  
  어떤 곳이 어떤 것 되며
  어찌하여 어떤 인(因)이 되고
  하는 바는 무슨 뜻이 됩니까?
  원컨대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환(幻)의 마음에서 고요함을 버리고
  있다 없다는 붕당의 말이 있네.
  마음속의 미혹이 견고하여
  환이 있다 없다고 말하네.
  
  생멸상(生滅相)이 상응(相應)하여
  상(相)과 가상(可相)이 있고 없는 것이네.
  분별은 오직 의(意)인데
  다섯 가지 식(識)과 함께 한다네.
  
  거울 모양과 물의 파도인 것들은
  마음의 종자로부터 생기니
  만약 심(心)과 의(意)와
  모든 색(色)이 나지 않는다면,
  
 
  그 때엔 뜻과 같은 몸을 얻고
  부처의 땅에 도달하리라.
  모든 연(緣)과 음(陰)과 계(界)는 
  법의 자체상이네.
  
  거짓 이름과 사람의 마음은
  꿈과 같고 털 바퀴와 같다네.
  세간을 환과 꿈과 같이 보아서
  진실을 얻어 의지하리.
  
  모든 상(相)이 실상(實相)과 합하여
  침량(斟量)의 인(因)을 떠나고
  성인이 안으로 얻는 경계이니
  항상 묘행(妙行)을 관찰하리.
  
  미혹하여 침량하는 인(因)으로
  세간을 진실로 여기게 하니
  일체 희론은 떠나야 하며
  지혜로서 미혹에 머무르질 않으리.
  
  모든 법은 체상이 없으니
  공(空)과 상(常)과 무상(無常)이다.
  마음이 어리석음에 머물러서
  미혹했기에 분별한다.
  
  모든 법을 말하는 자여
  무생(無生)을 말함이 아니다.
  하나와 둘과 또 둘에서
  홀연(忽然)과 자재(自在)와 유(有)와

  때(時)와 훌륭함과 미진(微塵)과
  연(緣)에 의하여 세간을 분별하니,
  세간과 종자는 식(識)으로
  저 인(因)에 의지해서 생기니라.
  
  벽에 의지한 그림 모양과 같아서
  사실을 알면 바로 없어지리니,
  사람이 환상을 보는 것과 같아
  생사(生死)를 본 것 또한 그러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둠에서
  속박과 해탈이란 생각을 일으키니,
  안과 밖의 여러 가지와
  모든 법과 인연이네.
  
  이와 같이 관찰하고 수행하여
  고요한 곳에 머무르고
  훈습(薰習)에서 무심(無心)하면
  마음이 훈습과 함께 하지 않는다.
  
  마음은 차별상(差別相)이 없는데
  훈습이 마음에 얽힌 것이니,
  때[垢]와 같은 훈습으로
  의(意)는 식(識)을 따라 난 것이네.
  
  비단[帛]과 같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여
  훈습에 의하여 나타나지 않으니,
  물건과 같고 물건 없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허공과 같다'고 말한다.
  
 
  아리야(阿梨耶)의 몸에는
  물건이 있고 없음을 떠났으니,
  의식(意識)이 전멸(轉滅)하면
  마음이 혼탁한 법을 떠날 것이다.
  
  일체법을 깨달았기에
  나는 심불(心佛)이라 말한다.
  3세(世)를 끊었으며
  유무(有無)법을 떠났네.
  
  세상 법은 넷이 상응(相應)하며
  모든 유(有)는 모두 환(幻)과 같으니,
  이 두 법의 체상(體相)이요,
  7지(地)는 마음에서 난다네.
  
  다른 지위도 또한 성취(成就)이고
  2지(地)와 부처님의 지위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와
  욕계(欲界)와 열반이여,
  
  일체가 마음의 경계요
  몸 가운데를 떠나지 않았다.
  만약 모든 법의 생김을 본다면
  이는 미혹인 법을 낸 것이리.
  
  자심(自心)에 미혹임을 깨달으면
  이는 모든 법의 생(生)함이 아니다.
  무생(無生)은 법의 체상이요
  생(生)은 곧 세간에 집착함이네.
  
 
  모든 상을 환(幻)과 같이 볼 것이니,
  법의 체상은 이와 같다.
  자심(自心)에서 허망하게 취함이니
  모든 법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이를 위하여
  3승(乘)과 일승을 말했으며,
  또한 무승(無乘)을 말했으니,
  모든 성인이란 고요함이라네.
  
  나의 법엔 두 가지 있으니
  상법(相法)과 증득함이다
  네 가지의 침량(斟量)하는 상(相)으로서
  양(量)과 상응(相應)법을 세웠노라.
  
  형체와 모양과 수승함과 종자로서
  미혹함을 보게 되어
  명자(名字)와 행처(行處)를 분별하지만
  성행(聖行)은 실로 청정하다네.
  
  분별과 분별에 의하여
  그러므로 분별상이 있으니,
  분별과 분별을 떠나면
  실체이고, 성인의 경계라네.
  
  떳떳하고 진실하고 변함이 아니어서
  자성(自性)의 사법(事法)이며 실체(實體)이다.
  진여(眞如)는 심법(心法)을 떠났으며
  분별을 멀리 떠났다네.
  

  만약 청정한 법이 없으면
  또한 더러움도 없으리니,
  청정한 마음이 있으므로
  더러운 법이 있음을 본다.
  
  청정함은 성인의 경계이기에
  그러므로 진실인 사법도 없으니,
  이 모든 법의 체상(體相)이
  성인의 경계라네.
  
  인연으로부터 세간이 생겼으니
  모든 분별을 떠나서
  환과 꿈과 같다고 하면
  법을 보고 해탈을 얻으리라.
  
  번뇌의 훈습 여러 가지가
  마음과 함께 상응하여 나기에,
  중생은 바깥 경계만을 보고
  심법(心法)의 체성을 보지 못한다.
  
  심법은 항상 청정하여
  미혹으로 생김이 아니다.
  미혹은 번뇌로부터 일어나니
  그러므로 마음을 보지 못하네.
  
  미혹이 곧 진실이니
  다른 곳이란 얻을 수도 없다.
  음(陰)도 아니요 다른 곳도 아니니,
  음과 행(行)을 여실(如實)로서 관찰하리.
  

  견(見)과 능견상(能見相)을 떠나서
  만약 유위(有爲)법을 보고
  자심(自心)과 세간을 본다면,
  저 사람은 능히 상(相)을 떠날 것이다.
  
  유심(唯心)법을 보지 말며
  외의(外義)를 분별하지 말고
  진여관(眞如觀)에 머물러서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야 하리.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고는
  모든 고요함도 멀리 떠나서
  수행하여 고요함에 머무르면
  수행자의 고요함에 머무름이리라.
  
  마하연(摩訶衍; 大乘)을 보지 아니해도
  저절로 고요하리니
  모든 원(願)이 청정함에 의하여
  지(智)와 무아(無我)도 고요하리라.
  
  마땅히 마음의 경계를 관찰하며
  또한 지혜의 경계도 관찰하고
  지혜로서 경계를 관찰하여
  상(相)에 미(迷)하지 아니하리.
  
  마음의 경계는 고제(苦諦)이고
  지혜의 경계는 집(集)이며
  2제(諦)와 불지(佛地)는
  반야(般若)의 경계라네.
  

  과(果)의 얻음과 열반과
  또한 8성도(聖道 : 8正道)로
  일체법을 깨달아서
  청정한 불지(佛智)를 얻으리.
  
  눈(眼)과 색(色)과 밝음과
  허공과 심(心)과 의(意)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식(識)이 아리야(阿梨耶)로부터 난다네.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와 수(受)는
  이름도 사법(事法)도 없는 것이니,
  인(因)이 없이 분별하는 자여,
  비각(非覺)을 취하는 것과 같다.
  
  뜻[義]에도 이름[名]이 없으며
  이름 속에 뜻도 그러하여
  인(因)과 무인(無因)이 생기니,
  분별하고 분별하지 말지어다.
  
  일체법은 진실함이 없고
  언어도 또한 그러하며
  공(空)과 불공(不空)의 뜻도 그러한데
  어리석은 이 법을 보고 옳게 여겨
  
  '진실에 머무른다'고 허망하게 생각하여
  사견(邪見)으로 거짓이름을 말하네.
  한 법이 다섯 가지로 되니
  여실히 멀리 떠나야 하네.
  
 
  다섯 가지는 마(魔)의 법이니
  초월하여 유무(有無)를 벗어나야 하네.
  이는 수행의 경계가 아니요
  외도의 법이다.
  
  유(有)와 삿된 법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상(相)·견(見)·아(我)도 없어야 하리.
  짓는 것 스스로 떳떳한 법이라 함은
  오직 말로서만 난 것이네.
  
  실제(實諦)는 말할 수도 없는데
  적멸(寂滅)로서 법을 나타내니,
  아리야식(識)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이 능히 굴러나네.
  
  의지함이란 심의(心意)에 의지함이니
  능히 전식(轉識)을 낸다.
  의지하는 곳은 허망하게 이루어졌으나
  진여(眞如)는 심법(心法)이라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능히 심성(心性)의 자체를 알리라.
  
  항상됨과 무상(無常)함과
  의상(意相)과 사법이며
  생(生)과 불생(不生)을 분별함을
  행자(行者)는 마땅히 취하지 않으리.
  두 법을 분별하지 말 것이니
  식(識)은 아리야(阿梨耶)로부터 나온다.
  
 
  한 뜻[一義]에서 두 마음[二心]이 생함은
  이와 같이 생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둘의 법을 취하니,
  이는 범부의 경계라네.
  
  말하는 이와 말함이 없고
  불공(不空)으로 마음을 보지만,
  자심(自心)에서 보지 못하였기에
  그러므로 견(見)의 그물이 생한다.
  
  모든 인연은 불생(不生)이며
  모든 감관(根)도 이와 같으니,
  계(界)와 5음(陰)도 없으며
  탐(貪)도 유위(有爲)도 없다네.
  
  본래 업을 짓는 것도 없고
  지음도 유위(有爲)도 아니며,
  제(除)함도 없고 속박도 없고
  속박도 해탈도 없다네.
  
  무기(無記)도 물건도 없고
  법도 비법(非法)도 없으며
  시간도 열반도 없고
  법체도 또한 없다네.
  
  부처도 실제(實諦)도 없으며
  인(因)도 과(果) 또한 없고
  전도(顚倒)와 멸(滅)도 없으며
  멸(滅)도 생(生) 또한 없네.
  
 
  12지(支)도 또한 없고
  변(邊)과 무변(無邊)도 또한 그러하여
  모든 사견(邪見)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번뇌와 업과 몸이며
  짓는 자와 과보(果報)여
  꿈과 아지랑이와
  건달바 성(城)들과 같다네.
  
  심법(心法)에 머물러
  그리하여 모든 법상(法相)을 내고,
  심법에 머무르므로
  단(斷)과 상(常)을 본다.
  
  열반에는 음(陰)도 없고
  아(我)도 상(相)도 또한 없으며
  능히 유심(唯心)에 들어가서
  해탈하여 상을 취하질 않는다네.
  
  자리[地]를 보임이 무슨 허물이겠는가.
  중생은 바깥을 보기 때문이다.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훈습 때문에 나타나질 아니하네.
  
  때[垢]에는 흰 것이 보이지 않고
  흰 것엔 때가 보이지 않으니,
  구름이 허공을 덮은 것 같아서
  그러므로 마음이 나타나질 않네. 
  
  마음은 능히 모든 업을 짓고
  지(智)는 그 속에서 분별하며
  혜(慧)는 능히 고요함을 관찰하여
  크고 묘한 법체(法體)를 얻는다네.
  
  마음은 경계에 의해 얽매이고
  지(智)는 각관(覺觀)에 의해 나며,
  고요함인 수승한 경계는
  혜(慧)가 그 속에서 행한다.
  
  심(心)과 의(意)와 의식이
  상(相)에서 분별하니
  분별 없는 체(體)를 얻어야 하리.
  2승(乘)은 참 제자(弟子)가 아니라네.
  
  고요하고 수승한 사람에겐
  부처님의 지혜가 청정하네.
  능히 승의(勝義)를 내고서
  이미 모든 행상(行相)을 떠났네.
  
  법체가 있다고 분별하며
  타력(他力)의 법은 없다고 하여
  미혹에서 분별함을 취하니
  타력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모든 대(大)에 색(色)이 있는 것 아니며
  색이 있는 것은 모든 대가 아니요,
  꿈과 환과 건달바이며
  짐승이 물이 아닌 것을 갈애(渴愛)함이다.

 

  나에게 세 가지 지혜가 있어서
  얻어 의지했음에 성인이란 이름이었네.
  마음은 법에 생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마음은 보이지 않네.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을
  중생은 훈습에 의해 보지만,
  저 분별하는 상(相)에 의하여
  모든 법을 말하였노라.
  
  2승과 상응(相應)함을 떠났고
  혜(慧)는 법상(法相)이 나타냄을 떠났는데,
  허망하게 법을 취하므로
  성문(聲聞)은 법을 본다네.
  
  능히 유심(唯心)에 들어가면
  여래 지혜가 청정하리.
  진실과 진실 아닌 것이여,
  인연으로부터 생긴 법이네.
  
  1과 2는 사견(邪見)으로
  필경 능히 취(取)하리라.
  여러 가지 인연은
  환과 같아 실이 없다네.
  
  이와 같은 모양인 여러 가지는
  능히 분별을 이루지 못하고,
  번뇌상(煩惱相)에 의지하여
  모든 속박이 마음으로부터 나네.
  

  분별법(分別法)을 알지 못하면
  타력(他力)도 분별일 것이니,
  있는 바 분별인 체성은
  곧 타력인 법이다.
  
  여러 가지 분별의 견(見)이
  타력에서 분별한다.
  세제(世諦)와 제일의(第一義)와
  제3인(因) 없이 생함인 것이다.
  
  분별은 상속(相續)이라 말하고
  그를 끊으면 곧 성인의 경계라네.
  수행자는 하나인 일이건만
  오직 마음이 여러 가지로 본 것이라네.
  
  저 곳에는 마음의 체성이 없으니,
  이와 같은 분별상은
  사람의 눈(眼)속에 눈병 같아서
  여러 가지 색(色)을 분별하네.
  
  눈병은 색(色)과 비색(非色)이 아니며
  어리석게 타력을 봄도 그러하여
  금이 진구(塵垢)를 떠남과 같고
  물이 진흙을 떠남 같다.
  허공이 구름을 떠남과 같이
  이와 같이 분별을 깨끗이 하리.
  
  성문이 세 가지 있으니
  응화(應化)함과 원으로 태어남[願生]과 
  탐(貪)·진(嗔)·치(痴)의 때를 떠난 것이니,
  성문은 법으로부터 태어나네.
  
  보살도 또한 세 가지이다.
  여래께서는 상(相)이 없지만
  중생심(衆生心)의 마음속에서
  불·여래의 형상을 보인 것이니,
  분별하면 이와 같은 것이 없고
  타력(他力)인 법체로 있으리라.
  
  유무(有無)인 2변(邊)을 보지만
  이를 봄으로 분별을 보게 된다.
  만약 분별 법이 없으면
  타력이 어찌 있으랴.
  
  법체가 있는 것을 멀리 떠난들
  실로 법체는 생함이 있으니,
  분별에 의지하여
  타력으로 본 것이라네.
  
  명(名)과 상(相)이 화합함에 의하여
  분별을 내니,
  항상 성취한 바가 없고
  타력으로 분별이 생한다.
  
  그 때 알음이 청정하면
  제일의(第一義)인 실체(實體)일 것이다.
  분별에는 열 가지가 있고
  타력에는 여섯 가지가 있느니라. 
 
  진여(眞如)는 이 속 몸이니
  그러므로 다른 모양이 없다.
  5법은 진실인 법이요
  또는 세 가지의 실상(實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진여법을 무너트리지 않으리니,
  별과 구름의 형상이요
  해와 달의 형체와 같으리.
  
  중생의 보는 마음은
  보여질 훈습으로 생김이라네.
  모든 대(大)에는 자체가 없으니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이 아니었네.
  
  만약 색(色)이 대로부터 생겼다면
  모든 대(大)가 모든 대를 생하겠지만,
  이와 같이 대를 생한 것이 아니기에
  대 가운데엔 4대(大)가 없느니라.
  
  만약 참으로 4대라면
  땅과 물들에 인한 것이리니,
  진실과 거짓 이름인 색(色)과
  환으로 생기고 지음도 그러함이네.
  
  꿈과 건달바와
  짐승의 물로 애착함이 제5이다.
  일천제(一闡提)도 다섯 가지이며,
  모든 성(性)도 또한 이와 같네. 
 
  5승(乘)과 비승(非乘)이며
  열반도 여섯 가지요,
  음(陰)은 24가 있으며
  색(色)은 또한 여덟 가지가 있네
  
  부처는 24가 있으며
  불자도 두 가지가 있고
  도문(度門)은 백 가지요
  성문은 세 가지가 있느니라.
  
  제불(諸佛)의 국토는 하나이고
  불(佛)도 또한 하나 있다네.
  해탈은 세 가지 있고
  심려(心慮)는 네 가지 있다네.
  
  아(我)와 무아(無我)는 여섯 가지요
  가지(可知)의 경계는 네 가지라네.
  모든 인연을 여의고
  또한 사견의 허물도 떠나리.
  
  속몸을 알고 때(垢)를 여의면
  대승의 위없는 법일 것이다.
  생(生)과 불생(不生)이
  여덟 가지와 아홉 가지 있으니,
  
  일시로 증득함과 차제로 함이나
  법을 세움은 오직 하나라네.
  무색(無色)은 여덟 가지가 있으며
  선(禪)의 차별도 여섯 가지라네. 

 
  연각과 불자의
  능취(能取)함이 일곱 가지가 있다.
  3세(世)의 법이 없는 것이요
  항상됨과 무상(無常)도 또한 그렇다네.
  
  짓는 것과 업과(業果)는
  꿈속에 짓는 일과 같다네.
  불(佛)은 종래로 불생(不生)이며
  성문과 불자도 또한 그러하네.
  
  마음은 가견(可見)을 떠났었고
  또한 항상 환의 법과 같건만
  출태(出胎)하여 법륜(法輪)을 굴리며
  출가하거나 도솔(兜率)에서 생하리.
  
  모든 국토에 머무르면서
  보였지만 생함이 아니니,
  감과 행(行)과 중생과
  설법함과 열반인 것이다.
  
  실제(實諦)와 국토와 각(覺)은
  인연으로부터 생긴 법이다.
  세간의 모든 나무숲이며
  무아(無我)와 외도행이라네.
  
  선승(禪乘)과 아리야(阿梨耶)와
  과(果)를 증득함과 부사의(不思議)며
  달과 별의 종류와
  모든 왕(王)과 아수라(阿修羅)이며,
  
  야차와 건달바 등은
  업으로 인하여 발생한다
  불가사의변(不可思議變)은
  물러나서 훈습의 연(緣)에 의지한다.
  
  변역(變易)을 끊으면
  그 때 번뇌의 죄는 소멸하리라.
  일체 모든 보살의
  여실히 수행하는 자라면,
  
  재물과 보물과
  금·은과 말과 코끼리와
  소와 염소와 종들(奴婢)과
  미곡(米穀)과 전택(田宅)을 저축하지 아니하리.
  
  뚫어진 구멍인 평상에 눕지 않고
  진흙으로 땅을 바르지 않으며,
  금·은과 적백(赤白)인 구리(銅)와
  발우와 모든 그릇을
  
  청정한 행을 닦는 자는
  일체를 저축하지 아니하네.
  제사야(諦奢耶)의 명주 의복은
  일체 입지 아니하네.
  
  흠바라(欽婆羅 :모직옷)인 가사를
  소똥과 풀의 열매와 잎과
  푸르고 붉은 진흙물로
  흰색을 물들여 무너뜨려야 하네. 

 
  돌과 진흙과 쇠와
  흰 마노(瑪瑙)와 유리(琉璃)인
  이러한 발우를 두도록 하니
  마타량(摩陀量)에 만족함이었네.
  
  옷을 베고 끊기 위하여
  네 치[4寸]의 칼을 두도록 하니,
  칼날은 반달 같이 굽고,
  그 기술은 배우지 말아야 하네.
  
  여실히 수행하는 사람은
  사고 팔고 하지 아니하고,
  필요한 일은 백의(白衣)와
  우바새(優婆塞)에게 청한다네.
  
  항상 모든 감관을 두호하며
  여실한 뜻을 알고
  수다라(修多羅)를 독송하며
  비니(毘尼)를 배울 것이다.
  
  백의(白衣)와 더불어 섞이지 않을 것이니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조용한 곳이나 무덤 사이와
  굴속과 나무숲 아래에서
  
  시타림(屍陀林)의 풀 속에서
  내지 한 데[露地]에서
  여실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곳에 머물러야 하네. 
 
  세 옷[三衣]1)은 항상 품에 지니고
  가외 돈과 재물은 저축하지 않으며
  몸이 의복을 필요할 때엔
  타인이 스스로 주면 받아주리.
  
  걸식하려고 출행할 적엔
  좌우를 돌아보지 말고
  앞의 6척(尺)의 땅만 보고
  태연스럽게 바로 나아가리.
  
  벌이 꽃을 채취함과 같이
  걸식도 또한 이와 같네.
  비구와 비구니가
  뭇 사람 속에서 혼잡하다면
  
  내가 불자에게 말하기를
  '이는 나쁜 생활이다'라고 하니,
  여실히 수행하는 자는
  이러한 곳에선 걸식하지 아니하네.
  
  왕과 소왕(小王)과 왕자(王子)와
  대신(大臣)과 장자(長者)에게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일체 가지 아니하리. 
 
1) 승가(僧伽)에서 소유를 허락한 세 가지의 옷으로, 대의(大衣)·칠조의(七條衣)·오조의(五條衣)를 말한다.  

  죽은 집이나 생가(生家)에서와
  친가와 사랑하는 집에서와
  비구가 혼잡한 속에서는
  수행자는 걸식하지 아니하리.
  
  절 집에서 연기[烟]가 끊일 새 없이
  항상 여러 가지 음식을 짓지만,
  일부러 사람을 위해 지은 것은
  수행자는 마땅히 먹지 않으리.
  
  유무(有無)인 붕당(朋黨)이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인 속박을 떠날 것이니,
  수행자는 세간을 관찰하여
  생멸(生滅)의 법을 떠나고서,
  
  삼매의 힘이 상응(相應)하고
  모든 신통 자재 하리니,
  만약 분별함을 내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진여법을 얻으리라.
  
  미진(微塵)과 뛰어난 사람으로부터
  인연에도 분별 말 것이니,
  모든 인연이 화합함인 것을
  수행자는 분별하지 아니하리.
  
  세간을 분별하는
  여러 가지가 훈습으로부터 생겼으니
  수행자는 여실히 관찰하기를,
  3유(有)가 환과 꿈 같다고 하리.

 

  3유와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인 것을 분별하지 아니하며
  유무(有無)의 비방을 떠나고
  또한 유무의 견(見)도 떠나리.
  
  음식은 약을 먹음과 같으니
  몸과 마음은 항상 정직하여
  한 마음으로 전일(專一)하게
  불·보살을 공경하리.
  
  여실히 수행하는 자는
  마땅히 모든 율(律)의 모양과
  『수다라경(修多羅經)』을 알고
  모든 법상(法相)을 간택(簡擇)하리라.
  
  5법의 체성과 마음으로
  아상(我相)이 없음을 수행하여
  안의 법신과 여러 지위와
  불지(佛地)를 청정하게 한다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큰 연꽃이 머무를 것이요,
  부처님께서 큰 자비에서
  뜻과 같은 손으로 그 이마를 만져주시리.
  
  6도(道)에서 가고 오는
  모든 유(有)엔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여실한 행(行)을 일으켜
  시타림(屍陀林) 속에 들어가네. 
  
  해와 달의 형체와
  꽃과 바다의 모양과
  허공과 불(火)과 여러 가지를
  수행자는 보는 법이라 하여
  
  이와 같은 여러 모양을 본다면
  외도 법을 취(取)한 것이요,
  또는 성문의 도(道)와
  연각의 경계에 떨어지리라.
  
  이와 같은 것들을 멀리 여의고
  고요한 자리에 머무르면
  그 때엔 부처님의 묘한 광명이
  모든 국토를 지나가서
  
  저 보살의 이마를 만져 주시리니,
  이마를 만져주신 묘한 모양은
  진여법을 수순함이니
  그 때엔 묘한 몸 얻으리라.
  
  인(因)이 없는 법체가 있다하며
  단(斷)·상(常)의 법을 떠났다고 하면
  유무법을 비방함이며
  이는 중도(中進)를 분별함이다.
  
  인(因)이 없다고 분별하니
  인이 없는 것은 단견(斷見)이다.
  여러 가지 바깥 법을 보지만
  이 사람은 중도(中道)를 멸함이다. 
   
  모든 법상을 버리지 아니하고
  단절(斷絶)상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유무(有無)는 법을 비방함이라 하여
  이와 같이 중도(中道)를 말하네.
  
  깨달음이란 다만 속마음이요
  외법(外法)을 멸함은 아니니,
  허망한 분별만 굴리면
  곧 중도(中道)의 법이다.
  
  오직 마음이요 가견(可見)은 없으니
  마음을 떠나면 경계는 나지 않으리,
  이것이 곧 중도의 법이라고
  나와 여러 부처님께서 말한다.
  
  생(生)과 불생(不生)과
  유물(有物)과 무물(無物)을 공했으며,
  모든 법에는 자체가 없으니
  두 법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이 유(有)법을 분별하여
  어리석은 이 해탈이라 분별하며,
  마음의 분별을 느끼지 않으면
  2취상(取相)을 떠났다고 하네.
  
  자심(自心)의 견을 깨달으면
  그 때엔 두 견(見)을 떠나서
  여실히 멀리 떠남을 아니
  분별상을 없앤 것은 아니다. 

  가견(可見)인 마음을 여실히 알면
  그 때엔 분별이 남을 알리니,
  모든 분별이 나지 않으면
  이는 진여(眞如)의 마음을 떠난 것이네.
  
  모든 외도의 허물 떠나고서
  만약 모든 법이 생김 본다면,
  그는 지자(智者)로서 마땅히 
  열반과 불멸(不滅)을 취하네.
  
  이 법을 알면 부처일 것이니
  나와 다른 부처님께서 말한다.
  만약 모든 법을 달리 본다면
  이는 외도의 일을 말함이다.
  
  불생(不生)에서 생(生)을 나타내며
  불퇴(不退)에서 항상 퇴함을 나타내고,
  동시에 물 속의 달과 같이
  만억 국토를 보게 하네.
  
  한 몸과 또한 한량없는 몸에서
  불에 타고 비가 퍼붓지만
  마음과 심체(心體)는 다름이 아니니,
  그러므로 다만 이 마음이라 말한다.
  
  심중(心中)엔 다만 이 마음이요
  마음은 마음 없이 나니
  여러 가지 색(色)과 형상을 
  보는 바도 오직 이 마음이라네. 
 
  부처님과 성문의 몸과
  벽지불의 몸들과
  또한 여러 가지 색신(色身)을
  다만 내심(內心)이라 말하네.
  
  무색계(無色界)의 무색(無色)과
  색계(色界)와 그리고 지옥에서
  색(色)을 나타냄은 중생을 위함이니,
  다만 이 마음의 인연이었네.
  
  환과 같은 삼매의 법과
  몸이 뜻과 같이 태어남과
  10지(地)의 마음이 자재함이여,
  보살은 전의(轉依)로 그를 얻었다네.
  
  자심에서 명자를 분별함과
  희론으로서 흔들리며,
  보고 들음에서 지각(覺)이 나니
  어리석은 이는 상(相)에 의해 지각하네.
  
  상(相)은 이 타력(他力)인 체성이요
  그는 명자에 의해 분별함이니,
  분별은 이 모든 상(相)이어서
  타력의 법에서 나느니라.
  
  지혜로 모든 법을 관찰하면
  타력도 상(相)도 없고
  필경 성취함도 없으리니,
  지(智)가 어디에 의해서 분별하랴. 
 
  만약 성취한 법이 있다면
  유무(有無)법을 떠난 것이다.
  유무의 체성을 떠났거니
  두 체성이 어찌 있으랴.
  
  두 가지 체성을 분별하면
  두 가지 체성은 마땅히 있으리니,
  분별의 견(見)인 여러 가지가
  청정하면 성인의 경계라네.
  
  분별은 이 여러 가지이고
  분별은 이 타력인 것이다.
  만약 달리 분별한다면
  이는 외도의 말에 떨어짐이라네.
  
  분별을 분별하면
  인(因)의 체상(體相)을 볼 것이요,
  분별로서 분별을 말하면
  인상(因相)이 생기는 것을 볼 것이다.  

 

  두 분별을 떠나면
  곧 법을 성취함이다.
  국토와 불(佛)의 화신(化身)과
  일승(乘)과 또한 3승과
  열반과 일체는 공(空)하여
  일체 생함을 떠났느니라.
  
  불(佛)은 30 차별이요
  다른 차별도 또한 열 가지가 있네.
  
 
  일체 국토와 기세계(器世界)는
  중생의 마음에 의함이니,
  법상을 분별함과 같이
  여러 가지 법을 나타내 보이었네.
  
  저 법은 여러 가지가 없으며
  법신불과 세간도 그러하네.
  법신불(法身佛)은 참 부처[眞佛]요
  나머지는 저에 의한 화현이네.
  
  중생은 자기의 종자로
  일체 부처 모양을 보지만,
  미혹이 얽힌 마음에 의하여
  능히 분별을 내느니라.
  
  진(眞)은 분별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또한 상(相)에도 떠나지 않아,
  실체(實體)와 낙(樂)을 받는 것이며
  화신이 또한 화신을 짓는다.
  
  불(佛)의 덕이 36이니
  이는 불의 실체(實體)라네.
  푸르고 붉은 소금과
  흰 마노와 젖과 석밀(石蜜)과
  
  잎과 과일과 꽃들과
  달과 같은 광명이
  같음도 다름도 아니어서
  물 속의 파도와 같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식(識)이
  마음과 함께 화합하여
  큰 바다가 굴러 변함과 같다.
  그러므로 파도인 여러 가지라네.
  
  아리야(阿梨耶)도 또한 그러하며
  명식(名識)도 또한 이와 같다네.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은
  외상의(外相義)를 분별함이었네.
  
  8식(識)은 차별상이 없어
  능견(能見)과 가견(可見) 아닌 것이
  큰 바다의 물과 파도 같아서
  차별상이 있지 아니하네.
  
  모든 식(識)은 마음 가운데에
  전변(轉變)함을 얻을 수 없으니,
  심(心)은 능히 모든 업(業)을 지으며
  의(意)는 능히 분별한다네.
  
  의식은 능히 법을 알며
  5식(識)은 허망하게 보지만,
  푸르고 붉고 흰 여러 가지는
  중생의 식(識)이 나타나 보인 것이네.
  
  물과 파도의 상대적인 법을
  모니(牟尼)께서는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푸르고 붉고 흰 여러 가지는
  물과 파도 속엔 이것이 없나이다.
  
 
  어리석어 모든 상을 보기에
  마음에 구른다고 말함이니,
  마음엔 이런 체성이 없으므로
  마음을 떠나면 바깥 견(見)도 없으리라.
  
  만약 가취(可取)가 있을진대
  마땅히 능취(能取)도 있으리라.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인 것이며
  물과 파도가 서로 같음이라 말하네.
  
  중생의 식(識)이 나타나 보인 것은
  물과 파도가 서로 같음이니,
  큰 바다에 물과 파도가 이는 것이
  춤추듯이 구르며 나타나네.
  
  근본식[本識]도 이와 같이 구르는데
  무슨 까닭으로 알아 취하지 못하는가.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기에 
  근본식이 바다 물결과 같다 하여,
  물과 파도가 구르는 상대로서
  이런 까닭과 비유를 말했노라.
  
  해가 세상에 떠오르면
  평등하게 중생을 비추는 것과 같다네.
  이와 같은 세존의 등불은
  어리석은 이를 위해 설법하지 않았고
  진여법에 머무르니,
  무슨 까닭으로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랴.
  
 
  만약 실법(實法)을 말하면
  심중(心中)에 실법이 없으리니,
  바다의 물과 파도와 같으며
  거울과 꿈과 같다.
  
  만약 자심의 경계라면
  평등히 보고 앞뒤가 없거니와
  일시(一時)인 경계가 없으니
  그러므로 차제로 나느니라.
  
  식(識)은 능히 모든 법을 알며
  의(意)는 또한 능히 분별하고
  5식(識)은 법을 나타내거니와
  고요함은 차제가 없으리라.
  
  세간의 그림장이[畵師]와
  그림장이의 제자와 같이
  나는 묘한 법에 머물러서
  진실한 수행자를 위해 말한다.
  
  분별과 분별을 떠났고
  이 속 몸의 진실한 지혜니,
  내가 모든 불자에게 말함이요
  어리석은 사람을 위함은 아니네.
  
  또한 환의 여러 가지와 같아서
  보여진 것 이와 같음 없듯이,
  여러 가지를 말함도 또한 그러하며
  말함과 말하지 않음도 또 그러하네.

  한 사람을 위해 설법함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설법하지 않음이니,
  사람의 병이 같지 않으므로
  의사(醫師)의 약 처방이 다르듯이
  
  부처님의 중생을 위함도
  마음 따라 모든 법 말하고
  외법(外法)인 종자에 의하여
  현법(現法)을 분별하여 말한다네.
  
  마음이 타력(他力)법에 의하기에
  가취(可取)는 분별이니,
  마음 종자에 의지하여
  바깥 경계를 관찰하고 취한다.
  
  두 가지로 미혹을 굴리는 것이요
  다시 제 3의 인(因)이 없으니
  미혹이 나지 않기 때문에
  어느 법에 의해 나지 않음이다.
  
  60·18법이기에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자심에서 바깥 법을 보고
  저를 보고서 아(我)를 떠나네.
  
  만약 마음의 분별에 들어가면
  능히 모든 법상(法相)을 떠나리라.
  아리야(阿梨耶)에 의하여
  능히 모든 식(識)을 낸다.
  
 
  어리석은 이 내신(內身)에 드는 것을
  마음이 밖에 드는 것을 보인 것이라 하고
  별과 털 바퀴를 취하여
  꿈속에서 보는 색(色)과 같다하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떳떳하다고
  분별함에는 이러한 것이 없으니
  건달바성과 환상과
  새와 짐승이 물에 애착함과 같다.
  
  이와 같이 보는 것 있지 않으니
  타력(他力) 법도 또한 그러하네.
  아(我)와 모든 감관과 형상을 
  나는 세 가지 마음이라 말한다.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이
  자체상(自體相)을 떠났으며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이
  타체상(他體相)도 떠났다네.
  
  심과 의와 의식은
  아(我)도 없고 2체(體)도 없다.
  5법의 자체상은
  부처님의 경계라네.
  
  성취하는 상에는 세 가지가 있지만
  한 훈습의 인(因)에 의하니,
  채색(彩色)은 한 가지이지만
  벽 위에 여러 가지가 보이는 것과 같네.
  
 
  두 가지 무아(無我)인 마음과
  의(意)와 모든 식의 모양과
  다섯 가지 법의 체상인
  아성(我性 : 佛性)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네.
  
  모든 심상(心相)과 식(識)을 떠났고
  의(意)의 모양도 떠나서
  모든 법체가 이와 같으니
  이는 나의 경계라네.
  
  모든 법체를 떠난 것은
  이 여래의 체성이다.
  몸과 입과 의업(意業)이여
  그는 백법(白法)을 짓지 못하네.
  
  여래의 체성은 청정하여
  모든 수행함을 떠났으니,
  자재하고 청정한 모든 신통과
  삼매의 힘으로 장엄하였네.
  
  여러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이여,
  이는 청정한 여래 성(性)이라네.
  속 몸의 지혜는 때[垢]를 떠나고
  모든 인상(因相)도 떠났다네.
  
  8지(地)와 불지(佛地)는
  이 여래의 성(性)이며
  원행지(遠行地)와 선혜지(善彗地)와
  법운지(法雲地)와 불지(佛地)여,
  
 
  이는 부처의 체성이요,
  다른 지위는 3승과 섞임이라네.
  중생 몸의 차별에 의하고
  또는 어리석은 모양을 위함이었으니,
  
  일곱 가지 지위를 말하였고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심지(心地)를 말씀하셨네.
  입과 몸과 마음의 모든 장애는
  7지(地)에는 이것이 없느니라.
  
  8지(地)의 묘한 몸은
  꿈에 폭포수 모양인 것과 같다네.
  8지와 5지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네.
  
  일체 여러 불자(佛子)는
  3유(有) 가운데에 왕(王)이 되는데,
  생(生)과 불생(不生)과
  공(空)과 불공(不空)을 분별하지 아니하네.
  
  실(實)과 불실(不實)이여,
  심중(心中)에는 이러한 것이 없으니
  이는 실(實)이며 이는 실이 아니라고
  이런 일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연각과 성문은
  불자(佛子)가 아니라고 말하네.
  유(有)와 무(無)는 진실이 아니요
  또한 공한 모양도 없다네.
  
 
  거짓 이름과 진실법은
  마음 가운데엔 일체 없다네.
  세제(世諦)에 의해 법이 있고
  제일의(第一義)에는 모두 없다네.
  
  진실법과 미혹은 없으니
  이는 모두 세제(世諦)법이네.
  일체법과 무법(無法)을
  나는 거짓이름이라 말하네.
  
  언어와 수용(受用)을
  어리석은 이는 진실로 보지만,
  언어의 법으로부터
  경계가 실로 있다는 것이네.
  
  언어로부터 생긴 법이요
  법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없느니라.
  벽을 떠나서 그림이 없는 것과 같고
  또한 그림자의 본형을 떠남과 같네.
  
  본래 깨끗한 식(識)도 또한 그러한데
  물의 파도이기에 나타나지 않네.
  환과 같은 마음도 또한 그러하며
  의(意)는 교활한 자와 같다네.
  
  식(識)이 다섯 가지와 함께 하여
  분별하는 견(見)은 채색함과 같네.
  이는 참 법의 훈습이라 하나
  있는 바 모여 변화로 되었네.
  
  
  이는 제불(諸佛)의 근본이요
  나머지는 응화불(應化佛)이라네.
  마음이 가견(可見)에 어리석으니
  가견은 마음속에 없는 것이네.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은
  바로 아리야(阿梨耶)에서 나타난 것이네.
  심(心)과 의(意)와 의식과
  실체와 다섯 가지 법이며
  두 가지 무아(無我)가 청정함은
  불·여래의 말씀한 것이네.
  
  허망한 각(覺)의 경계도 아니요
  성문도 또한 그러하네
  이는 속 몸의 경계이니
  불·여래께서는 그를 말하네.
  
  길고 짧은 것들이 상대하여
  피차가 서로 의지하여 나기에
  유(有)는 능히 무(無)를 이루고
  무는 능히 유를 이루며
  또는 미진(微塵)을 분별하나
  색(色)의 자체는 분별하지 아니하네.
  
  다만 이 마음이라 말하여도
  사견(邪見)은 능히 깨끗하지 못하리.
  이 가운데엔 분별이 공했고
  불공(不空)도 또한 이와 같다네.
  
 
  유무(有無)는 다만 분별인 것이니
  말할 법엔 이와 같은 것이 없다네.
  공덕이 미진(微塵)과 합했다 하여
  어리석은 이는 색(色)으로 분별하네.
  
  낱낱 미진(微塵)은 없으니
  그러므로 뜻이 없는 것이네.
  자심에서 형상을 보고
  중생은 밖에 있다고 보네.
  
  밖에는 가견(可見)의 법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러한 뜻이 없느니라.
  마음은 털 바퀴와 환상과
  꿈과 건달바성과 같네.
  
  불 바퀴와 새 짐승이 물에 애착함은
  실로 없는데도 사람은 보지만,
  상(常)과 무상(無常)과 1과
  2와 또한 2 아닌 것을
  끝없는 허물에 묶인 바로서
  어리석은 이는 미혹해서 분별하네.
  
  나는 3승을 말하지 않고
  다만 일승을 말한 것은
  중생을 포섭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일승을 말했노라.
  
  해탈에는 세 가지가 있거니와
  또한 법무아(法無我)도 말했노라.
  
 
  평등한 지혜와 번뇌는
  해탈에 의해서 분별함이네.
  
  또한 물 속의 나무가
  물결에 표류(漂流)함과 같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성문은
  모든 상(相)에 표탕(漂蕩)하기에,
  그는 구경처(究竟處)가 없으며
  또한 환생(還生)하질 아니하네.
  
  적멸(寂滅) 삼매를 얻어서
  한량없는 겁(劫) 동안 깨어나지 못하니,
  이는 성문의 정(定)이요
  나와 보살의 정(定)은 아니다.
  
  모든 수번뇌(隨煩惱)는 떠났지만
  훈습 번뇌에 속박하여
  삼매락(樂)의 경계에 취(醉)해서
  저 무루계(無漏界)에 머무르네.
  
  세간에 술 취(醉)한 사람이
  술기운이 없어진 후에 깨어나듯이
  저 사람도 그러한 후에
  나의 불법신체(佛法身體)를 얻으리.
  
  코끼리가 깊은 진흙에 빠져서
  몸이 동서(東西)로 동요하듯이
  이와 같이 삼매에 취(醉)한
  성문이 빠진 것도 그와 같다네.

  제불(諸佛)의 주지하시는
  원력(願力)의 청정함에 의하여
  직위를 받음[受職]과 삼매와
  공덕과 또한 10지(地)와
  
  허공과 토끼 뿔과
  또는 석녀의 아이이니,
  분별하는 법은 이와 같아서
  없는데 명자(名字)를 말함이네.
  
  인훈습종(因熏習種)인 세간의
  있지도 없지도 않는 곳에서
  능히 보고 해탈을 얻으면
  법무아(法無我)를 알리라.
  
  실체(實體)는 명자를 분별함이요
  타체(他體 : 依他起性)는 인연으로부터 나니,
  나는 성취(成就; 圓成實性)라고 말하니
  여러 경에서도 항상 이를 말했노라.
  
  자(字)·구(句)·명신(名身) 등의
  명신의 수승한 법에서
  어리석은 사람의 분별함은
  코끼리가 깊은 진흙에 빠짐과 같네.
  
  천승(天乘)과 범승(梵乘)
  또한 성문승(聲聞乘)과
  여래와 연각인
  나는 이러한 승(乘)을 말하였노라.
  
  모든 승(乘)은 다할 수 없으니
  마음이 이와 같이 생(生)함이네.
  마음이 전멸(轉滅)한다면
  승(乘)과 승자(乘者)도 없으리라.
  
  심(心)과 분별과 식(識)과
  의(意)와 또한 의식(意識)이여,
  아리야(阿梨耶)가 셋이 있는데
  사유심(思惟心)은 다른 이름이었네.
  
  명(命)과 따뜻함과 식(識)에서
  아리야(阿梨耶)는 명근(命根)이었고,
  의(意)와 그리고 의식(意識)은
  분별의 다른 이름이었네.
  
  심(心)은 몸을 주지하고
  의(意)는 항상 모든 법 지각하며,
  
 
  식(識)은 자심(自心)의 경계로서
  모든 식(識)과 함께 분별하네.
  
  나[我]의 애착[愛]은 어머니요
  무명(無名)은 아버지라 말하니,
  모든 경계를 알아 깨달으면
  그러므로 부처라 말한다.
  
  모든 사(使)는 원가(怨家)이며
  뭇 화합은 음(陰)이니,
  상속(相續)하는 자체가 없어서
  그를 끊으면 무간(無間)이라 이름하네.
  
  두 아(我)의 번뇌 없어짐과
  두 가지 무아(無我)와
  불가사의(不可思議) 변화와
  생사(生死)가 없으면 부처라 이름하네.
  
  의(意)는 상응하는 법체이며
  아법(我法)은 속 몸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보면
  그는 망각(妄覺)을 따르지 않으리라.
  
  실로 모든 법은 없는데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은
  허망한 법에 의지한 것이니,
  어찌 해탈을 얻으랴.
  
  생멸이 화합한 속박으로
  유위(有爲) 법을 본 것이니,
  2견(見)을 증장하였기에
  인연법을 잃지 아니하네.
  
  파초와 꿈과 환(幻) 등으로
  이 세간은 이와 같다네.
  오직 한 법만이 진실함이니
  열반은 의식(意識)을 떠났다네.
  
  탐심과 진심(嗔心)이 있으며
  어리석음과 인(人)이 있고
  애착으로부터 음(陰)이 생겼으니,
  음(陰)과 유(有)는 또한 꿈과 같다.
  
  어느 밤에 법을 증득했고
  어느 밤엔 멸(滅)에 들겠다는
  이 두 중간에
  나는 한 자(字)도 말 아니하였네.
  
  속 몸으로 법을 증득했다는
  나는 이와 같은 말에 의지하니,
  저 부처님과 나의 몸은
  수승한 법을 말한 것 없노라.
  
  실로 신아(神我)인 물건 있다고 하지만
  5음(陰)은 저의 모양을 떠났네.
  음(陰)의 체(體)가 실로 있다지만
  저 음에는 아(我)가 없네.
  
 
  각각 자기 견(見)의 분별로
  수번뇌(隨煩惱)와 사(使)가 있으니,
  세간의 자심(自心)을 얻으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으리라.
  
  모든 인(因)과 인연으로
  세간이 이와 같이 생겼으니,
  이 네 법이 상승함이라
  그는 나의 교법에 머무르지 아니하네.
  
  유(有)와 무(無)도 생법(生法)도 아니요
  유무(有無)를 떠나면 불생(不生)이니,
  어리석은 이는 어찌하여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겼다 분별하랴.
  
  유무(有無)의 4구(句)를 떠나고서
  만약 능히 세간을 본다면,
  그 때엔 심식(心識)을 굴리고
  곧 무아(無我)법을 얻으리라.
  
  모든 법은 본래 생(生)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모든 연(緣)이 곧 과(果)이니
  과(果) 가운데에 유(有)가 생하였네.
  
  과 가운데에 두 가지가 생겼기에
  과 가운데엔 마땅히 둘이 있으리라.
  그러나 둘 가운데에 과가 없으며
  과 가운데에도 물건을 보지 못하네.
  

  관(觀)과 가관(可觀)을 떠나서
  만약 유위(有爲)법을 본다면
  마음을 떠나 오직 이 마음이니,
  그러므로 나는 유심(惟心)이라 말하네.
  
  양(量)은 실체와 형상이
  연(緣)을 떠난 실체로서
  구경(究竟)이며 제일 청정함이니,
  나는 이와 같은 양(量)을 말한다.
  
  만약 거짓 이름을 나[我]로 여긴다면
  실법(實法)을 가히 보지 못하리니,
  이와 같은 음(陰)과 음의 체(體)는
  거짓 이름이요 진실이 아니네.
  
  평등은 네 가지가 있으니
  상(相)과 인(因)과 생(生)이며
  무아(無我)도 또한 평등함이며
  이 넷은 수행자의 법이다.
  
  모든 견(見)을 전환(轉)한
  분별과 가분별(可分別)은
  견(見)도 아니며 생(生)도 아니기에,
  그러므로 나는 유심(惟心)이라 말한다.
  
  법이 없고 또한 없는 것 아니어서
  유무(有無)의 체성을 떠났으니,
  진여는 마음을 떠났기에
  그러므로 나는 유심(惟心)이라 말한다.
  
  진여와 공(空)과 실제(實際)와
  열반과 법계(法界)는
  뜻대로 나는 몸과 마음이기에,
  그러므로 나는 유심이라 말한다.
  
  분별이 훈습에 의하여
  여러 가지가 여러 가지를 내며,
  중생은 마음이 바깥을 보기에
  그러므로 나는 유심이라 말한다.
  
  가견은 외물(外物)이 없고
  마음의 여러 가지 견(見)과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을 본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유심이라 말한다.
  
  성문의 극진한 지혜에서
  불·여래께서는 낳을 것이다.
  일체 벽지불은
  화합함이 없이 생(生)한다.
  
  바깥 색상(色相)은 없는 것이요
  자심에서 바깥 법을 본 것이니,
  자심을 깨달아야 하는데
  어리석은 이는 유위(有爲)를 분별하네.
  
  어리석은 이는 외법(外法)임을 알지 못하고
  자심에서 여러 가지를 보지만,
  비유로서 어리석은 사람을 막아 말하기를
  네 가지 법에 집착했다고 한다.
  
 
  인(因)도 없고 분별도 없음과
  비유와 다섯 가지 논(論)과
  자심의 체성과 형상을
  능히 알면 슬기로운 것이리.
  
  분별과 가분별(可分別)에 의하면
  이는 분별의 상(相)이니,
  분별에 의지하여
  분별이 거기서 나타나네.
  
  낱낱의 분별이 화합함은
  이 한 종자의 인(因)이라.
  객(客)이 둘이요, 법도 둘이니,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나지 않는다네.
  
  분별의 심(心)과 심법(心法)은
  삼계에 머물러서
  모든 법을 나타냄이니,
  저 자체는 허망함이라.
  
  인(因)이 나타나는 화합에 의하여
  그러므로 12입(入)이 있으니,
  인(因)에 의해서 화합을 관찰하는
  나는 이러한 법을 말하지 아니하네.
  
  거울 속에 물상을 보며
  눈병으로 털 바퀴를 보듯이,
  이와 같이 훈습하는 마음에 의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마음에서 본 것이네.
  

  분별과 가분별(可分別)이 함께 하여
  분별을 내었으니
  외도의 분별함과 같은
  이러한 바깥 모양은 없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노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뱀이라고 하듯이
  자심의 의(義)를 알지 못하고
  바깥 법을 분별한 것이라네.
  
  노끈은 노끈의 자체에서
  1과 2의 자체를 떠났지만,
  노끈을 분별하기 때문이니
  이는 자심(自心)의 과실이네.
  
  어떤 법이 어떤 체(體)에 의지하랴.
  분별로는 능히 보지 못하리.
  저(彼)를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모든 법체(法體)는 이와 같음이네.
  
  유(有)에 의하므로 무(無)를 말하고
  무에 의하므로 유를 말함이니,
  그러므로 무를 말할 수 없고
  또한 유를 말할 수도 없느니라.
  
  곧 분별과 분별이여
  이는 저 법체가 아니다.
  어찌하여 견(見)은 체(體)가 없는가?
  분별을 내었기 때문이네. 
   
  

 

 

 

 

 

 

 

 

 

 

 

 

 

 

 

 

 

 


  색(色)의 체(體)는 색의 몸[色身]이 없으니,
  병(甁)과 모직[氈] 등과 같다.
  보여진 것은 없는 법이니
  어찌 분별함이 있으랴.
  
  만약 분별이 미혹이라면
  유위(有爲)법의 끝없는 데에서이다.
  어느 법이 중생을 미(迷)하게 하였는지
  모니(牟尼)께서는 저희 위해 말씀해 주소서.
  
  모든 법은 법체(法體)가 없고
  오직 이 마음이라 말하니,
  자심을 보지 못하고서
  분별을 일으킨 것이라네.
  
  만약 분별이 없다면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인
  저 법은 다른 체(體)가 없을 것인데,
  그러나 지혜로는 능히 깨닫지 못하네.
  
  만약 성인에게 저 법이 있다면
  범부의 허망한 저 법이 아닐 것이니,
  만약 성인에게 허망한 저것 있다면
  성인과 어리석은 이 다름없으리.
  
  성인은 미혹이 없으니
  마음의 청정함을 얻었기 때문이네.
  어리석은 사람은 신심(信心)이 없기에
  그러므로 분별하며 분별하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말하기를
  허공에서 과일을 가지고 오리니,
  너는 과일을 가지고 울지 말라 하거든
  아이가 그 여러 가지 과일을 가지듯이
  
  나는 모든 중생에게
  여러 가지 과일을 분별하여
  탐내도록 여러 가지로 말하였으나
  유무(有無)의 붕당(朋黨)을 떠났노라.
  
  만약 본래 법체가 없을진대
  인(因)도 인을 따름도 아니요,
  본래 생함이 아니면서 처음 생함이나
  또한 그 자체는 없는 것이라네.
  
  몸도 없고 또한 생(生)함도 아니며
  인연을 떠난 곳도 없으니,
  생멸의 모든 법체는
  인연을 떠난 곳[處]이 없네.
  
  대략 이와 같이 관찰하여
  유무(有無)는 다른 곳이 아니라고 하리.
  인연으로부터 생긴 법이니
  지혜 있는 자는 분별하지 말지어다.
  
  1체(體) 2체라 말함은
  외도의 어리석은 말이다.
  세간은 환과 꿈 같고
  인연으로부터 생함도 아니다.
  
  언어(言語)의 경계에 의하여
  대승의 위없는 법을 
  나는 요의(了義)에 말했건만
  어리석은 이는 깨닫지 못하네.
  
  성문과 외도는
  질투로서 설법하기에
  뜻(義)엔 서로 합하질 못하니
  망각(妄覺)에 의해 말한 때문이네.
  
  상(相)·체(體)·형상(形相)·명(名)을
  네 가지 법이라 하니,
  이와 같은 법을 보고
  분별을 내느니라.
  
  1과 2와 많음[多]을 분별함이여,
  그는 범천(梵天)의 속박에 따름이니,
  해와 달과 모든 하늘이라 하는
  이러한 견(見)은 나의 제자가 아니네.
  
  성인은 정법(正法)을 보고
  여실한 수행으로써
  능히 허망한 상(相)을 굴리고
  또한 거래(去來)를 떠났네.
  
  이는 해탈의 인(印)이며
  내가 제자에게 가르침이니
  유무법을 떠났고
  또한 거래상(相)을 떠났네.
  
  여러 가지 색(色)과 식(識)을 굴리고
  만약 모든 업을 멸한다면,
  마땅히 상(常)과 무상(無常)이 아닐 것이요
  세간의 생하는 법은 없으리라.
  
  굴릴 때에 만약 업이 멸하여
  색(色)이 저 곳을 떠난다면
  유무(有無)의 과실(過失)은 떠났으나
  업(業)은 아리야(阿梨耶)에 머무르네.
  
  색(色)은 멸하는 체상(體相)이요
  식(識) 가운데에 유(有)도 또한 그러하니
  색과 식이 함께 화합하여
  모든 업(業)은 읽지 아니하네.
  
  만약 저와 함께 화합하였다면
  중생이 모든 업을 잃으리.
  만약 화합한 업을 없애면
  속박도 열반도 없으리라.
  
  만약 저와 함께 없어진다면
  세간 가운데에 나서
  색(色)도 함께 화합하여
  차별 없는 것도 마땅히 있으리라.
  
  차별 있다 또 차별 없다 함은
  다만 이 마음의 분별이다.
  모든 법의 생멸(生滅)없는 체(體)는
  유무의 붕당을 떠났다네.
  
  거짓 이름과 인연법은
  번갈아 서로 차별이 없으니,
  색(色) 가운데의 무상(無常)이
  번갈아 서로 모든 법을 낸다네.
  
  피차(彼此)의 상(相)을 떠남이란
  분별로서 알지 못하리라.
  있는 것 없는 것, 무엇이 성립하랴.
  색(色)의 무상(無常)과 같다.
  
  만약 분별을 잘 본다면
  곧 타력(他力)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요,
  이는 타력(他力)의 법에서
  또한 분별 일으키지 않으리라.
  
  만약 분별을 없앤다면
  이는 나의 법을 없앤 것이요,
  나의 법 가운데에서
  또한 유무(有無)를 비방한 것이다.
  
  이 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 있든지
  나의 법륜(法輪)을 없애니
  그와 함께 말하지 말지어다.
  
  지혜 있는 자는 함께 말하지 않을 것이니
  비구(比丘) 법과 같지는 아니하네.
  이미 분별을 없앴다 하고
  허망하게 유무를 떠났다고 하네.
  
 
  견(見)은 털 바퀴와 환상과 같고
  꿈과 건달바 같으며
  또한 견은 아지랑이 같으니
  이는 유무를 본 것이다.
  
  저 사람은 불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니
  만약 그를 포섭하려는 사람 있다면,
  그 사람은 2변(邊)에 떨어질 것이요
  또한 다른 사람까지 무너트리리라.
  
  만약 고요한 법을 알면
  이는 여실한 수행자요
  유무 법을 떠나리니
  마땅히 그 사람을 포섭하리.
  
  세간의 어느 곳에서는
  금과 은의 모든 보배를 내듯이
  여러 가지로 만드는 업은 없건만
  중생은 수용하네.
  
  중생의 진여인 체(體)는
  업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요,
  견(見)이 아니므로 업(業)이 없으며
  또한 짓는 업으로 생김도 아니네.
  
  모든 법이 법체(法體)가 없음은
  성인의 분별함인 것이요,
  모든 법이 있다 함은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이네.
  
  만약 법이 이와 같음이 없고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과 같다면,
  일체법은 없으리니
  중생도 또한 더러움이 없어야 하리.
  
  모든 법은 마음에 의해 있으며
  번뇌도 또한 이와 같아서
  태어남과 죽음과 모든 세간이
  모든 감관(根)을 따라 구르네.
  
  무명(無明)과 애착이 화합하여
  그리고 몸을 내었으니,
  다른 사람의 항상 법이 없다 함은
  어리석은 이의 분별인 것이네.
  
  만약 인(人)과 법(法)이 생함이 아니라면
  수행자는 감관(根)을 보지 않으리,
  만약 모든 법이 없고도
  능히 세간의 인(生死의 因)을 짓는다면
  
  어리석은 사람도 짓는 것을 떠나고서
  저절로 해탈을 얻으리라.
  범부와 성인의 차별이 없으니
  유무(有無)가 어찌 성립하랴.
  
  성인은 법체가 없으니
  3해탈을 닦았기 때문이네.
  5음과 인(人)과 법에는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 있도다.
  
  모든 인연과 감관을
  나는 성문을 위해 말했노라.
  인연은 없고 오직 마음뿐이며
  묘한 일과 모든 지위와
  속몸의 진여 청정함을
  불자를 위해 말하였노라.
  
  미래 세상에서는
  나의 법륜(法輪)을 비방하면서
  몸에는 가사를 입고
  유무(有無)의 모든 법을 말하리라.
  법의 인연이 없는 것이
  이 성인의 경계라네.
  
  법체가 없다고 분별함은
  망각자(妄覺者)의 분별인 것이네.
  미래 세상에 사람 있으되
  찌끼[糠]먹은 어리석은 종류들이
  인(因)이 없다는 사견(邪見)으로
  세간 사람을 파괴하리라.
  
  미진(微塵)으로부터 세간이 생겼으나
  그러나 미진은 인(因)이 없고
  아홉 가지 물건은 항상됨이라 하여
  사견(邪見)으로 이와 같이 말하네.
  
  물건으로부터 물건이 생기고
  공덕이 공덕을 내는데,
  이 법은 법과 다르고
  
  분별하는 이것 자체가 옳은 것이다.
  만약 본래 없다가 처음 생겼다면
  세간은 마땅히 근본이 있으리라 한다.
  
  나는 말하기를 세간에는
  본제(本際)가 있지 않다 한다.
  삼계의 모든 중생은
  본래 없고 처음 생겼다면
  개와 낙타와 나귀는 뿔이 없으나
  반드시 뿔이 나는 것은 틀림없으리라.
  
  눈(眼)은 본래 없다가 처음 생겼으며
  색(色)과 식(識)도 또한 그러하네.
  자리[席]와 갓[冠]과 흰 모직 등도
  진흙 덩이 속에도 마땅히 나리라.
  
  모직[氎]에는 병(甁)이 없고
  부들[蒲]에도 또한 모직 없다.
  1은 1 가운데에 진실함이니
  무슨 까닭으로 인(因)이 나지 않음이랴.
  
  목숨이 바로 몸이니
  이는 본래 없다가 처음 생김이라 하네.
  이것은 그의 설법이요
  나는 모든 법이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인연법을 알고서
  그런 후에 저들의 법 막았노라.
  저 사견을 막고서
  
  그런 후에야 자법(自法)을 말한다.
  그러므로 외도의 법을 알고서
  그런 후에야 정법(正法)을 말한다.
  
  제자들이 미혹할까 두려워하여
  유무(有無) 법을 세웠노라.
  훌륭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이 생겼다 함은
  가비라(迦毘羅 : 외도 가운데 하나)의 나쁜 뜻이었네.
  
  그는 모든 제자를 위하여 말하기를,
  모든 공덕은 전변(轉變)하여
  실(實)도 아니며 비실(非實)도 아니요
  연(緣)도 아니고 연이 아닌 것도 아니니,
  모든 인연이 없기 때문이며
  실법(實法)의 불생(不生)도 없다하네.
  
  유무 법을 떠났으며
  인(因)도 연(緣)을 떠나고
  생멸(生滅)법을 떠나서
  자체의 법이 보여짐도 떠났도다.
  
  세간은 환과 꿈 같아서
  모든 인연 법을 떠났으니,
  인연이라는 견해를 세우기에
  그러므로 분별 내느니라.
  
  새와 짐승이 아지랑이를 물로 애착함이
  건달바와 털 바퀴와 같아서
  유무 법을 떠났으며
  인(因)과 연(緣)을 떠났다네.
  
  3유가 인(因)이 없음을 보고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도 보리라.
  어떤 사람에게 사법[事]이 없으리요,
  다만 내심(內心)만 있을 뿐이다.
  
  마음의 사법을 멀리 떠난다면
  유심(唯心)이라고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바깥의 사법을 관찰한다면
  중생은 마음을 일으키리라.
  
  어찌하여 마음에 인(因)이 없으리요,
  유심(惟心)이라 말할 수도 없으리.
  진여(眞如)와 유심(唯心)만 있다면
  어느 사람인들 성법(聖法)이 없으랴.
  
  유(有)와 비유(非有)라 함이여
  그는 나의 법을 알지 못함이네.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의 법으로서
  만약 마음이 이와 같이 난다면
  이는 세간의 마음이니,
  마땅히 유심(唯心)이라 말하지 못하리.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이
  만약 꿈속에 생(生)함 같다면
  마땅히 두 가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두 모양이 없느니라.

  칼이 스스로 베이지 못하며
  손가락이 또한 스스로 가리키지 못하듯이,
  마음이 스스로 보지 못함도
  그 일이 또한 이와 같다네.
  
  다른 것도 인연도 아닌데
  분별함과 분별하는 사법이며
  5법과 두 마음이나
  고요함은 이와 같은 것이 없다네.
  
  능생(能生)과 생(生)이며
  또는 두 가지 법상(法相)에
  나의 뜻에는 능생(能生)이 없고
  설법에도 자상(自相)이 없다.
  
  여러 가지 형상 자체에서
  만약 분별을 낸다면
  허공과 토끼 뿔인
  저 체(體)가 없음이 마땅히 생할 것이다.
  
  만약 모든 법상이 있다면
  마땅히 바깥 사법도 있으리라.
  바깥 분별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떠나면 다시 법은 없으리.
  
  끝없는 세간에서
  바깥 모든 법은 없느니라.
  마음에 생인(生因)이 없으나
  바깥 의(義)를 본다.
  
  만약 인(因)이 없이 생장(生長)한다면
  토끼 뿔도 또한 마땅히 나리라.
  증장하는 인(因)이 없으니
  어찌하여 분별을 내랴.
  
  현재에 법이 없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본래도 또한 없네.
  자체가 화합한 체성도 없으니
  어찌하여 마음이 능히 생하랴.
  
  진여와 공(空)과 실제(實際)와
  열반과 법계(法界)와
  일체법의 생(生)함 아닌 것이
  이 제일의(第一義)의 법이네.
  
  범부는 유무에 떨어져서
  인과 연을 분별하니
  인(因)은 없어 본래 생함이 아니지만
  3유(有)를 알지 못하도다.
  
  마음에서 가견(可見)을 본 것은
  무시(無始)로 달리 본 것이다.
  시초도 없고 또한 법도 없으니
  어찌하여 견(見)의 다름이 있으랴.
  
  만약 물건이 없이 능히 생(生)한다면
  가난한 사람도 마땅히 재물이 많으리라.
  어찌하여 물건이 없는데도 마음이 생하는지
  모니(牟尼)께서는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이 일체가 무심(無心)이지만
  모든 법이 없지 않으며
  건달바와 꿈과 환이어서
  모든 법은 인(因)이 있지 아니하네.
  
  생함이 없고 체상(體相)이 없는
  공(空)한 법을 저희 위해 말씀하소서.
  화합한 법을 떠난 것이여,
  이는 모든 법을 보지 않음이다.
  
  그 때엔 공(空)이며 무생(無生)이니
  나는 법상(法相)이 없다고 말하네.
  꿈과 털 바퀴와 환과
  건달바와 물로 애착함이네.
  
  인(因)이 없는데 견(見)이 있으니
  세간법도 또한 그러하네.
  이와 같이 하나[一]에 화합하여
  가견(可見)을 떠나면 없는 것이다.
  
  외도의 견(見)이 아니니
  화합함도 이와 같음이 없도다.
  의(依)가 무인(無因)임을 항복 받으면
  무생(無生)을 성취하리라.
  
  만약 능히 무생(無生)을 이루면
  나의 법륜(法輪)이 멸하지 않으리,
  인(因)이 없는 모양을 말하면
  외도는 두려워함을 내느니라.
  
 
  어찌하여 어떤 사람 위하랴.
  어느 곳에서 모든 법이 나왔는가.
  어느 곳에서 법이 생겼는가.
  인(因)이 없이 법이 생겼도다.
  
  인 없는 가운데에 나서
  두 인(因)이 없으니,
  만약 능히 지혜 있는 자의 견(見)있다면
  그 때엔 사견(邪見)을 굴리리라.
  
  생(生)을 말하여 일체법이라 하고
  무생(無生)을 물건이 없음이라 하니,
  모든 인연을 관찰하면
  그 때엔 사견(邪見)을 굴리리라.
  
  법이 있으므로 이름(名)이 있고
  법이 없으므로 이름이 없으며
  법이 없으면 생(生)함이 아니요
  또한 인연을 기다림도 아니네.
  
  이름은 법에 의(依)함이 아니요
  이름은 체(體)가 없음이 아니네.
  성문과 벽지불과
  외도는 그 경계가 아니네.
  
  7지(地)에 머무르는 보살이여,
  그는 생(生)하는 상이 없으니
  인연 법을 굴리기에
  인(因)의 뜻을 막았느니라.
  
  오직 마음에 의함을 말하니
  그러므로 나는 무생(無生)을 말한다.
  인 없이 모든 법 생하였기에
  분별과 분별을 떠났다네.
  
  유(有)와 무(無)의 세움을 떠났기에
  그러므로 나는 무생을 말한다.
  마음은 가견(可見)을 떠났으며
  또한 두 체(體)를 떠났다네.
  
  의지(依止)의 법을 굴리기에
  그러므로 나는 무생(無生)을 말한다.
  바깥 법체를 잃지 않으며
  또한 내심(內心)을 취하지 않네.
  
  일체 사견(邪見)을 떠났으니
  이것이 무생(無生)의 모양이었네.
  이와 같은 공(空)과 무상(無相)의
  일체를 마땅히 관찰하리.
  
  생함이 아니요, 공(空)하고 공한 법이니
  본래 불생(不生)이 공(空)인 것이다.
  모든 인연이 화합하여
  생(生)과 멸(滅)이라네.
  
  화합한 법을 떠나면
  생도 아니며 멸(滅)도 아니다.
  만약 화합법을 떠났다면
  또한 실법체(實法體)도 없으리라.
  
 
  같은 체(體)와 다른 체는
  외도의 분별함이네.
  유무(有無)가 생(生)하지 않는 법은
  실(實)도 생(生)도 불생(不生)도 아니네.
  
  모든 인연을 떠났으니
  생(生)과 불생(不生)은
  오직 이 명자로서
  피차 번갈아 서로 묶임[鎖]이었네.
  
  가생(可生)인 체성은 필경 없으며
  차별 인연으로 묶임이었네.
  가생(可生)을 떠나서 생(生)함이 없으니
  이는 외도를 떠난 것이었네.
  
  나는 오직 이 묶임[鎖]이라고 말하나
  그러나 범부는 알지 못하네.
  그러나 가생(可生)인 법체는
  묶임을 떠나면 다시 차별 없네.
  
  저 사람은 인(因)을 말함 없고
  모든 묶임을 파멸하여 없애니,
  등불이 모든 물건을 비추어 요달하듯이
  묶임도 또한 마땅히 비추어 요달하리.
  
  만약 다시 다른 법이 있다면
  묶임의 체(體)를 떠나리.
  체(體)도 없고 또한 불생(不生)으로
  자성이 허공과 같네.
  
  묶임의 법을 떠났건만
  어리석은 이는 달리 분별하니,
  이는 생함이 아닌
  성인의 얻은바 법과 다른 것이네.
  
  저 법은 생(生)이면서 불생(不生)이니
  불생(不生)이 무생(無生)인 것이다.
  만약 모든 세간이
  곧 이 인연의 묶임임을 본다면
  
  세간이 무슨 묶임이랴.
  그 때엔 마음이 정(定)을 얻으리니,
  무명(無明)과 애착과 업 등은
  이는 안의 묶임의 법이다.
  
  깃발과 진흙덩이와 바퀴 등으로
  4대(大)가 바깥 법임을 요달하니,
  다른 법체(法體)에 의하여
  이는 인연으로부터 생(生)함이라 하네.
  
  묶임의 체성 뿐만 아니라
  양(量)과 아함(阿含)에도 머물지 않네.
  만약 생하는 법이 없다면
  지혜는 무슨 법으로 인(因)이 되었으랴.
  
  저 법이 번갈아 서로 나니
  이 모든 인연도 아니다.
  뜨거움·젖음·움직임·굳음을
  어리석은 이는 법으로 분별하네.
  
  이 묶임은 법이 없으니
  그러므로 체상(體相)이 없다네.
  의사[醫]가 병에 의하여
  병 다스림의 말함이 차별되듯이
  
  병의 논함은 차별이 없으련만
  병에 따라서 차별하니
  나는 중생의 몸에 의하여
  번뇌탁(煩惱濁)을 말해 주네.
  
  모든 근기와 힘을 알고서
  나는 어리석은 이를 위해 말한다.
  번뇌와 근기는 차별하나
  나의 교법은 차별이 없느니라.
  
  나에게 오직 일승(一乘)이 있으니
  시원하게 성도(聖道)에 드는 것이었네.
  병(甁)과 모직과 갓과 뿔이여,
  토끼 뿔은 인(因)이 없네.
  
  인(因)이 없는데 저에 의해 생겼으니
  저 인(因)의 법은 없는 것이었네.
  저는 인(因)이 없는 법이니
  그대는 무(無)를 취하지 말지어다.
  
  인이 있음에 인에 의하므로 없음이요
  무(無)에 의하여 상응(相應)이 아니네.
  유법(有法)은 무(無)에 상대함이니
  이는 함께 상대인 법이라네.

  만약 조금 있는 법에 의한다면
  조금 있는 법을 본 것이다.
  인(因)없이 소법(少法)을 봄이니
  소법은 이 인이 없는 것이네.
  
  만약 그것이 다른 법에 의함이라면
  피차가 번갈아 서로 보리니,
  이와 같이 무궁(無窮)한 허물일 것이며
  소(少)도 또한 소(少)의 체(體)가 없으리라.
  
  색(色)과 나무 등에 의하여
  환상과 같은 가견(可見)의 법이 있으니,
  이와 같이 일에 의지하여
  사람의 보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네.
  
  요술쟁이는 색(色) 등이 아니요
  나무도 아니고 또한 돌도 아니다.
  어리석은 이는 환 같은 것을 보지만
  환인 몸에 의지함인 것이다.
  
  사실에 의하여
  만약 작은 일이라도 본다면,
  견(見)은 두 법이 없으니
  어찌하여 작은 일을 보랴.
  
  분별은 분별이 없으나
  분별 없는 것 아니니,
  만약 분별이 없는 법이라면
  속박도 해탈도 없으리라.

  분별은 없는 법이기에
  그러므로 분별을 내지 않으리니,
  만약 분별을 내지 않는다면
  유심(唯心)이라 말하지 못하리라.
  
  여러 가지 마음이 차별함이요
  법 가운데엔 진실한 법이 없으니,
  진실한 법이 없기 때문에
  해탈도 세간도 없느니라.
  
  외물(外物)은 가히 볼 것이 없는데
  어리석은 이가 허망하게 분별하네.
  거울 모양에 나타남과 같은 마음에서
  훈습으로 마음이 미몰(迷沒)함이네.
  
  일체법은 생함 아니요
  있는 것 아니면서 생함 있는 것 같으니,
  이는 일체가 유심(唯心)인 것이라
  모든 분별을 떠났었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을 말함에
  인연을 따르기에 지자(智者)가 아니다.
  실체는 마음을 떠난 것이요
  성인의 마음은 청정함이라네. 
   

 

 

 

 

 

 

 

 

 

 

 

 

 

 

 

 

 

 

 


  승구(僧佉)와 비세사(毘世師)와
  나체(裸體)인 바라문과
  또한 자재천(自在天)은
  진실이 없어 사견(邪見)에 떨어지네.

  체(體)도 생(生)함도 없고
  공(空)과 환 같아 때[垢]가 없네.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였으며
  부처님께서 어느 사람을 위해 말씀한 것인가?
  
  수행이 청정한 사람은
  사견의 각관(覺觀)을 떠났다네.
  여러 부처님께서 법대로 말씀하시며
  나의 말함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일체가 유심(唯心)이라면
  세간은 어느 곳에 머무르고
  가고 오는 것은 어떤 법에 의하며
  어찌하여 지위를 보는가?
  
  새가 허공에서
  바람을 의지하여 가는데
  머무르지 않고 관찰하지 않고
  땅 위에서 가듯이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은
  분별의 바람이 움직임에 의하여
  자심(自心) 가운데에서 가고 오는 것이
  공중에 나는 새와 같네.
  
  몸과 살림살이와 그릇[器]을 보는 것이
  부처의 마음은 이와 같다 말하네.
  어떤 원인으로 현재 보는 것이
  유심(唯心)인지 저희 위해 말씀해 주소서.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을
  현재 보는 것은 훈습에서 난 것이니,
  수행이 없는 중생은
  현재 보고 분별을 낸다네.
  
  경계의 체(體)를 분별하여
  마음은 경계에 의해 난 것이니,
  가견(可見)의 마음을 알면
  다시 분별을 내지 않으리라.
  
  만약 능히 분별을 보고
  각(覺)과 소각(所覺)을 떠나면,
  명(名)과 명(名)이 서로 합하지 않으리니
  이는 유위(有爲) 법이라 말하리.
  
  이는 오직 이 가각(可覺)이요
  명(名)과 명이 서로 혼합하지 않음이니,
  만약 사람이 각지(覺知)와 달리한다면
  자각(自覺)과 타각(他覺)이 아니리라.
  
  5법의 실법체(實法體)와
  여덟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는
  대승에 포섭되는 것이네.
  
  만약 지(知)와 가지(可知)를 보아서
  고요히 세간을 본다면,
  명(名)과 명 가운데의 분별이
  그 때엔 다시 나지 않으리라.
 
  명자의 분별을 짓는 것이
  저를 보면 다시 나지 않으리.
  자심을 보지 못했기에
  그러므로 분별이 나니라.
  
  4음(陰)은 모든 상(相)없으니
  그것은 수(數)가 없는 법이다.
  어찌하여 색(色)이 여러 가지이며
  4대(大)가 각각 다른 모양인가?
  
  모든 상(相)의 법을 버리면
  모든 대(大)와 대는 없으리라.
  만약 다른 색상이 있다면
  모든 음(陰)·입(入)을 보지 못하리.
  
  경계와 근(根)과 식(識)에 의하여
  그러므로 여덟 가지 식(識)이 났다.
  상에 의하면 세 가지 있거니와
  고요함은 이와 같음 없다네.
  
  아리야(阿梨耶)와 의(意)와 아(我)와
  아소(我所)와 지혜에는
  두 법 취함으로 인한 것이니,
  그를 알면 법이 곧 법이리.
  
  피차의 법을 떠나서
  만약 서로 떠나지 않음 보면
  세간은 오직 마음의 분별일 것이다.
  세존께서는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또한 다시 둘인 아(我)와
  아소(我所)를 분별하지 아니하고
  분별을 증장하지 않으면
  또한 의식(意識)의 인(因)도 없으리라.
  
  인(因)과 연(緣)을 떠났으며
  물건도 아니고 또 생함도 아니다.
  분별은 다만 이 마음인 것을
  세존께서는 저희 위해 말씀하소서.
  
  모든 인연을 떠났으며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을 떠났으니,
  자심(自心)의 여러 가지를 본다면
  허망한 분별임을 가히 보리라.
  
  자심의 견(見)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과 다른 뜻임을 깨닫지 못하여
  견(見)없이 사견인 성립하고,
  만약 지혜에서 보지 못한다면
  저것은 무슨 까닭으로 있지 않는가?
  저 사람은 마음에 유(有)를 취함이었네.
  
  유무(有無)가 아니라고 분별하여
  그러므로 유(有)의 마음 내지 않으며
  유심(惟心)의 견(見)임을 알지 못하기에
  그러므로 분별을 내는 것이라네.
  
  분별과 분별이 없음이여,
  이는 인(因)이 없다함을 멸한 것이다.
 
  네 가지 붕당을 막고서
  만약 모든 법에 인(因)이 있다면
  이는 명자상(名字相)과 다름이라.
  그 사람은 짓는 것을 이루지 못하리라.
  
  그는 마땅히 다름이 스스로 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인(因)이 날 것이다.
  인연이 마땅히 화합한 것이리니
  인연으로 생긴 법을 막으리라.
  
  나는 항상된다는 허물을 막으니
  만약 모든 인연이 무상(無常)하다면,
  이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어리석은 이의 무상(無常)한 견(見)일 것이다.
  
  멸상(滅相)인 법은 법이 없는 것이니
  인(因)을 짓는 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이 유(有)를 냄을
  어찌 사람이 보지 못하랴.
  
  나는 중생을 포섭하는데
  계(戒) 지닌 것으로 항복 받으며
  지혜로 사견(邪見)을 없애고
  해탈에 의하여 증장(增長)하네.
  
  일체 세속에서의
  외도는 허망한 말을 하고
  인과(因果)의 사견에 의하니
  자법(自法)이 능히 성립하지 못하네.
  
  다만 스스로 세우는 법만 이루고
  인연과 과(果)를 떠나서
  모든 제자들에겐
  세속 법을 떠났다 말하네.
  
  유심(惟心)이요, 가견(可見)은 없으니
  마음이 두 가지를 나타낸다.
  가취(可取)와 능취(能取)를 떠났으며
  또한 단(斷)과 상(常)을 떠났네.
  
  다만 마음이 움직이고 구르는 것은
  모두 세속 법인 것이다.
  다시 일으키고 굴러 나지 않으면
  세간이 자심임을 보리라.
  
  오는 것은 이 일이 생함이요
  가는 것은 이 일이 멸함이다.
  여실히 거래(去來)를 알면
  다시 분별을 내지 않으리라.
  
  항상됨과 무상함과 짓는 것들은
  또한 피차를 짓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일체는 
  이 모두 세속의 법이라네.
  
  하늘·사람·아수라·
  축생·아귀(餓鬼)·야마(夜摩)에
  중생이 저 곳으로 가기에
  나는 6도(道)를 말했노라.

  상·중·하의 업인(業因)은
  능히 저 곳에서 나오니,
  모든 착한 법을 잘 두호하면
  수승한 곳의 해탈을 얻으리.
  
  부처님께서 생각 생각이 생멸(生滅)하여
  나고 죽고 또 물러가는 것 말하여
  비구(比丘) 대중을 위해 말씀하신 것인데
  무슨 뜻으로 저희 위해 말씀하십니까?
  
  마음이 제 2에 이르지 않으면
  멸하고 무너져서 계속되지 않으니,
  나는 제자를 위하여
  생각이 전전(展轉)히 생멸한다 말했노라.
  
  색(色)과 색을 분별로서 있다하여
  생함과 멸함이 바로 이루어지니,
  분별하면 곧 인(人)이요
  분별을 떠나면 인(人)이 없느니라.
  
  내가 염법(念法)을 말함은
  저에 의한 것으로 나의 말함을 마쳤으니,
  색상(色相)의 취함을 떠나면
  생도 멸도 아니라네.
  
  인연은 연(緣)으로부터 생겼으며
  무명(無明)과 진여(眞如) 등은
  두 법에 의해 생긴 것이나
  진여에는 이러한 체(體)가 없느니라.

  인연이 연(緣)으로부터 생겼으니
  만약 그렇다면 다른 법은 없을 것이요,
  항상됨으로부터 과(果)가 생기고
  과(果)는 곧 이 인연일 것이다.
  
  외도와 다름없고
  인과가 서로 혼잡하리니
  부처님과 여러 부처님의 말과
  큰 모니(牟尼)도 다름없다네.
  
  이 한 길[一尋]의 몸에서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나는 여러 제자를 위해 말했노라.
  
  셋을 취하여 진실로 여김은
  취(取)와 가취(可取)의 사견(邪見)이니,
  세간법과 출세법을
  범부들은 분별하네.
  
  나는 다른 법을 알았기에
  3법을 말하여
  저 사견(邪見)을 막기 위함이니,
  실체(實體)라 분별하지 말지어다.
  
  말해 본들 고정된 법 없고
  또한 다시 마음의 생(生)함이 없다.
  진실도 또한 2취(取)가 아니니
  진여(眞如)엔 두 가지가 없는 것이네.
 
  무명(無明)과 애착과 업(業)과
  식(識) 등이 사견으로부터 나오니,
  무궁한 허물을 짓지 않으면
  짓는 가운데에도 유(有)는 생하지 않으리.
  
  모든 법이 네 가지로 멸한다 함은
  지혜 없는 이의 말한 바요,
  두 가지로 생(生)한다 분별함은
  물질 있는 것과 물질 없는 것이네.
  
  네 가지 법을 떠나고
  또한 네 가지 견해를 떠나면
  두 가지 분별이 나는 견해도
  다시 나질 않으리라.
  
  모든 법은 본래 생(生)함 아닌
  지혜의 차별에서 일어나서
  현재 모든 법이 나고 있으나
  평등하게 모두 분별하지 말지어다.
  
  원컨대 큰 모니(牟尼) 어른이시여,
  저와 모두를 위하시어
  법에 상응(相應)함과 같이
  두 가지인 두 견해 떠남을 말씀해 주소서.
  
  저희는 사견을 떠났으며
  다른 여러 보살들도
  항상 유무(有無)를 보지 않으니,
  저 법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도와 화합하여 섞임을 떠났고
  성문과 연각도 떠나서
  부처님께서 성인의 법을 증득하시고
  저희 위해 말함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나이다.
  
  전도(顚倒)의 인(因)과 연(緣)의 인(因),
  무생(無生)과 일체,
  다른 이름인 모든 미혹을
  지자(智者)는 멀리 떠날 바이네.
  
  비유컨대 구름·비·누각(樓)과
  궁각(宮閣)과 무지개와
  아지랑이와 털 바퀴와 환상의
  유무(有無)는 마음 따라나네.
  
  모든 외도는 분별하여
  세간이 자인(自因)으로 생겼다 하나
  불생(不生)인 진여법과
  실제(實際)와 공(空)이라 하는
  
  이 모든 다른 법의 이름을
  없는 물건이라 분별하지 말 것이요,
  색(色) 위에서의 여러 가지에도
  없는 법이라 분별하지 말지어다.
  
  세간의 손과 손톱으로
  자재롭게 능히 물건을 부수듯이
  이와 같은 일체법을
  없는 법이라 분별 말지어다.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않음을 떠나서
  또한 생기는 법체도 없느니라.
  없다 다르다 분별하지 않을 것이니
  분별하면 사견에 집착하리라.
  
  분별과 가분별(可分別)은
  모든 사상(事相)을 취하는 것이요,
  길고 짧고 모나고 둥근 것들은
  분별하는 상(相)에 포섭된 것이라네.
  
  분별은 심(心)의 법이요
  가분별(可分別)은 의(意)이니,
  만약 능히 법과 같이 안다면
  능상(能相)과 가상(可相)을 떠날 것이다.
  
  외도는 불생(不生)을 말하며
  아(我)와 법(法)을 취하여
  이와 같은 상(相)을 분별하나
  이 두 견(見)은 차별이 없다네.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했느냐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저 사람은 양(量)에 들어가서
  능히 나의 설법 알으리라.
  
  견(見)을 인함은 침몰(沈沒)하는 것이요
  무생(無生)은 의지함이 아니니,
  이 두 가지 뜻을 알았기에
  그러므로 나는 무생(無生)을 말한다.
 
  모든 법이 생김이 없는 것을
  모니(牟尼)는 저희를 위해 말씀하소서.
  인(因)이 없어 서로 상대함이 아니요
  법이 섞임도 있지 않으니
  
  인(因)도 생김도 없어서
  인(因)의 견(見)인 외도와 다르며
  유무(有無)를 떠나 법 없으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하였네.
  
  생(生)과 불생(不生)에서 
  법을 떠나면 사견(邪見)이요,
  인(因)없고 생김이 없다 말 한데서
  유(有)를 말하면 인(因)에 집착함이네.
  
  자연(自然)이요 짓는 자가 없으니
  짓는 것이라면 사견이네.
  방편과 모든 원(願) 등의
  이러한 견(見)을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만약 모든 법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3세(世)를 낸 것이며,
  가취(可取)와 능취(能取)를 떠나서
  생함도 멸함도 아니다면
  
  물건으로부터 다른 물건 보며
  저 법에 의해서 마음 나고
  모든 법이 변화를 내지 않는다고
  어찌하여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실로 있는 데도 알지 못하기에
  그러므로 나는 설법한다 하여
  모니(牟尼)의 여러 법에서
  앞 뒤 말이 상위(相違) 하나이다.
  
  외도의 모든 허물을 떠났고
  전도(顚倒)의 인(因)도 떠났는데,
  생(生)과 불생(不生)을
  큰 스승은 저희 위해 말씀하소서.
  
  유(有)와 무(無)를 떠나고
  인과(因果)를 잃지도 않으며
  지위와 차제를
  하나의 무상(無相)이라 말씀하셨나이다.
  
  세간이 2변(邊)에 떨어진 것은
  모든 견(見)의 미혹 때문이니,
  생(生)과 무생(無生) 등이라 하여
  적멸(寂滅)의 인(因)을 알지 못하였네.
  
  나는 3세(世)의 법도 없으며
  나는 또한 설법도 아니한다.
  둘이 있으면 다 허물이 있으니
  제불(諸佛)은 둘이 청정하네.
  
  모든 법은 공(空)이요 찰나(刹那)며
  체(體)가 없으며 생함이 아니다.
  삿된 법이 마음을 가리웠다 말하니
  분별하면 여래 아니라네.

  생(生)과 불생(不生)을
  원컨대 저희 위해 말씀하소서
  어찌하여 어떠한 법들이
  경계를 떠나서 나리요
  색(色)이 구족하여 화합함은
  희론으로부터 모인 것이었네.
  
  바깥 색상(色相)을 취하여
  분별함으로부터 났으니,
  저 법을 아는 자라면
  이는 여실히 아는 것이네.
  
  성인(聖)의 성(性)을 수순하여
  마음이 다시 나지 않으며,
  일체 대(大)를 떠나서
  생법(生法)이 상응(相應)하지 않으리.
  
  마음의 허망으로 대(大)를 본 것이니
  이와 같이 무생(無生)임을 관찰하여
  분별과 가별(可別) 아니할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분별 아니하네.
  
  분별에서 분별하는
  이 둘은 열반이 없다네
  무생(無生)법에 서서[立]
  환과 같은 법을 보지 않으리.
  
  환 등의 인(因)으로부터 생겨서
  건립한 바 모든 법은 무너지네.

  견(見)의 마음은 거울 모양 같고
  끝없는 훈습의 인(因)이어서
  의(義) 같으면서 의(義)가 없으니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함으로 관찰하라.
  
  거울의 색상(色像)은
  1·2의 모양을 떠났듯이
  가견(可見)인 무(無)와 비무(非無)의
  모든 상(相)도 또한 이와 같다네.
  
  건달바와 환(幻) 등을
  인연에 의해 관찰할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체성은
  생(生)이요, 불생(不生)아닌 법이라네.
  
  분별함이 아(我)법과 같아서
  두 가지 모양이 나타나네.
  아(我)와 법을 말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네.
  
  상위(相違)와 무인(無因)과
  성문인 나한과
  스스로 이룬 이와 부처님의 힘이
  다섯 가지의 성문이라네.
  
  시간의 간격과 멸하는 것과
  제일(第一)과 제일을 떠난 것이
  이 네 가지 무상(無常)이니,
  어리석은 이는 지혜 없이 분별하네.

  어리석은 이는 2변(邊)인
  공덕과 미진(微塵)에 떨어져서
  해탈의 인(因)을 알지 못하고
  유무(有無)법에 집착하네.
  
  비유컨대 어리석은 사람이
  손가락을 달이라고 하듯이,
  이와 같이 명자(名字)를 좋아하고
  나의 설법을 알지 못하네.
  
  모든 대(大)는 각각 다른 모양이고
  색(色)의 체(體)가 서로 나는 것이 없다네.
  그리고 모든 대(大)는 화합하여
  대(大)도 없고 대에 의지함도 없네.
  
  불은 능히 모든 색(色)을 태우며
  물은 능히 모든 물건을 뭉크러지게 하고
  바람은 능히 모든 색을 움직이거니
  어찌 대(大)의 모양이 나리요.
  
  색음(色陰)과 또한 식(識)이여,
  이 법은 둘이요 다섯이 아니니,
  이 모든 음(陰)의 다른 이름은
  나는 제석(帝釋)과 같다고 말한다.
  
  심(心)과 심수(心數)가 차별하여
  현재 구르므로 모든 법이 생기니,
  4대(大)는 피차가 다르나
  색(色)과 심(心)은 그로부터 의지함이 아니네.
 
  푸른 것들에 의해 흰 것이 있으며
  흰 것에 의해 푸른 것들이 있으며
  인과(因果)에 의하여
  공(空)과 유(有)와 무(無)가 생긴다네.
  
  능작(能作)과 가작(可作)이 짓는 것과
  차고 뜨거운 견(見)들인 견(見)이여,
  이와 같은 것들의 일체는
  허망한 각(覺)으로는 능히 성립하지 못하리.
  
  심(心)과 의(意)와 기외 여섯인
  모든 식(識)이 함께 화합하여
  같음·다름의 체(體)를 떠났는데,
  나고 죽음이 허망하게 난다네.
  
  승구(僧佉)와 비세사(毘世師)와
  나체(裸形)인 외도는 자재천(自在天)이라고 하여
  유무(有無)의 붕당에 떨어지고
  고요한 뜻을 떠난 것이라네.
  
  형상과 용모가 수승하게 나는 것과
  4대(大)로 나는 것 아니라고 함은
  이 외도의 나는 것을 말하는
  4대와 4진(塵)이었네.
  
  그밖에는 날 곳 없는데서
  외도는 인(因)이라 분별하고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여
  유무의 붕당에 의지하네.
 
  생(生)이란 공심(共心)과 상응(相應)하고
  사(死)는 불공(不共)과 상응하며
  청정한 실상(實相)의 법은
  지혜와 함께 상응하여 머무르네.
  
  업(業)과 색상(色相)엔
  5음(陰) 경계의 인(因)이요,
  중생은 인(因)의 체(體)가 없기에
  무색계(無色界)에는 머무르지 아니하네.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무아(法無我)여,
  무색(無色)은 외도와 같을 것이다.
  무아(無我)를 말함은 이 단(斷)이니
  식(識)이 또한 마땅히 나지 않으리.
  
  마음은 네 가지 머무름이 있는데
  무색(無色)엔 어떻게 머무르랴.
  안과 밖에서 모든 법상(法相)은
  식(識)이 능히 행하지 못하네.
  
  허망하게 각(覺)하는 이는 유(有)라 계교하여
  중음(中陰)에 5음(陰)이 있다 하고
  이와 같이 무색(無色)에 나며
  유(有)이면서 무색(無色)이라고 하네.
  
  자연히 마땅히 해탈할 것이요
  중생과 식(識)이 없다 하니,
  이는 외도임이 틀림없는데도
  허망한 각(覺)은 능히 알지 못하네.
 
  만약 저 곳이 무색(無色)이라면
  그러므로 무색을 볼 것이니,
  저 무색은 법을 세운 것이 아니며
  승(乘)과 무승자(無乘者)도 아니네.
  
  식(識)은 종지로부터 나서
  모든 근(根)과 함께 화합하였으니,
  여덟 가지와 색(色)의 일분(一分)은
  생각의 시간에도 취하질 못하리.
  
  색(色)이 시간에 머무르지 않으며
  근(根)도 근(根)과 함께 머무름이 아니니,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말하여
  모든 근(根)이 생각과 머무르지 않는다 한다.
  
  만약 색의 체(體)를 보지 못한다면
  식(識)이 어떻게 분별하리요,
  만약 지(智)가 나지 않았다면
  어찌 세간을 내었으랴.
  
  곧 생길 때에 곧 멸한다고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지 아니하였네.
  일시도 또한 생각함이 아니건만
  허망한 분별로 취한 것이었네.
  
  모든 근(根)과 경계여,
  어리석음이요 지자(智者) 아니네.
  어리석은 이는 이름 듣고 취하지만
  성인은 여실히 아느니라.
 
  제 6은 의지함이 없으니
  인(因)을 가히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我)를 잘 알지 못하고서
  법의 허물 있는 것 떠나려고 하네.
  
  유무(有無) 법엔 두려워하지만
  깨달은 이는 실지(實智)도 떠난다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아(我)를
  어리석은 이는 능히 알지 못하네.
  
  하나[一]에도 시설한 법이 있으며
  다름[異]에도 또한 이와 같네.
  한가지의 마음 가운데 일체(一體)임을
  의식(意識)은 능히 아네.
  
  만약 시설이 마음이라면
  심수(心數)는 명자(名字)일 것이다.
  어찌하여 능취(能取)를 떠나랴
  일(一)과 이(異)를 분별함인 것이네.
  
  같은 인(共因)이 견(見)에 의지하여
  업(業)과 생(生)과 작업(作業)등이라 하며,
  불과 같고 이와 같다는 말은
  비슷하고 비슷한 법이라네.
  
  불은 일시의 순간에도
  가소(可燒)와 능소(能燒)가 다르듯이,
  이와 같은 아(我)도 인(因)에 의지하거니
  망각(妄覺)인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생(生)과 또한 불생(不生)이여,
  마음은 항상 청정하네.
  망각(妄覺)한 이의 아(我)를 세우는데
  무슨 까닭으로 비유를 말하지 아니하랴.
  
  식(識)의 주림(稠林)에 미혹하고
  진실 법을 떠나서
  망각(妄覺)에서 동서(東西)로 헤매니
  신아(神我)를 찾는 것 또한 그러하네.
  
  속 몸으로 진실한 행 닦는
  아(我)는 청정한 모양이라네.
  여래장(如來藏)은 부처님의 경계요
  망각(妄覺)은 그 경계가 아니라네.
  
  가취와 능취(可取能取)와
  차별인 5음(陰)·아(我)를
  만약 능히 이 모양 알면
  그 때엔 참 지혜가 생하리.
  
  외도는 말하기를
  의식(意識)과 아리야장(阿梨耶藏)의 체(體)는
  아(我)와 함께 상응한다고 하나
  나의 설법은 그렇지 아니하네.
  
  만약 여실히 법을 알면
  실체(實諦)에서 해탈 얻으며
  수행하여 도(道)를 보면
  번뇌 끊어 청정하리라.
 
  마음의 자성은 청정하니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이라네.
  이 법은 중생에 의함이니
  변(邊)과 무변(無邊)을 떠났다네.
  
  금과 또한 금빛과
  돌의 성질과 진금(眞金)을
  도야(陶冶)하는 사람이 능히 나타내니
  중생도 음(陰)에서 또한 그러하네.
  
  사람도 또 음(陰)도 아니요
  불(佛)은 무루(無漏)의 지혜니,
  무루이며 항상됨인 세존이기에
  그러므로 나는 귀의함이네.
  
  마음의 자성[心自性]은 청정한데
  번뇌와 뜻으로 짓는 것이
  5음과 함께 상응(相應)하는 것을
  부처님[說中勝者]은 말씀하소서.
  
  마음의 자성은 청정한 것이요
  의(意) 등은 이 인연이다.
  그가 능히 모든 법을 지으니
  그러므로 저 두 가지 염(染)이라네.
  
  의(意) 등의 객진(客塵)과 번뇌 법과
  아(我)의 청정한 그것이
  번뇌의 염(染)에 의지했으니
  때[垢]가 청정한데에 의지함 같네.
 
  옷이 때[垢]를 벗어남과 같아서
  있으나 가히 볼 수 없으니
  나의 허물 떠남도 또한 그러하네.
  
  거문고와 소라와 북의
  여러 가지 미묘한 소리와 같이
  음(陰) 가운데에 아(我)도 또한 그러한데
  어리석은 이는 일(一)·이(異)로서 찾으려 하네.
  
  땅속의 모든 보장(寶藏)과
  청정한 물과 같아서
  음(陰) 가운데에 아(我)도 또 그러하여
  실로 있지만 가히 볼 수 없다네.
  
  심(心)과 심수(心數) 법과 공덕이
  음(陰)과 화합하였듯이
  음 가운데에 아(我)도 또 그러하여
  지혜 없는 이는 능히 보지 못하네.
   
  여인(女人)의 태장(胎藏)과 같아서
  비록 있으나 보이지 않듯이
  아(我)는 5음(陰)에서
  지혜가 없으므로 보이지 아니하네.
  
  향기로운 약과 무거운 짐과
  불과 섶과 같아서
  음(陰) 가운데에 아(我)도 또한 그러하건만
  지혜 없이 능히 보이지 아니하네.
 
  일체 모든 법에서 
  무상(無常)과 공(空)이듯이
  음(陰)에서 아(我)도 또한 그러하건만
  지혜가 없어 보이지 않음이 있네.
   
  모든 지위와 자재함과
  신통과 지위 받음과
  위없는 묘한 여러 법과
  다른 모든 삼매와
  
  또는 모든 수승한 경계여,
  만약 음(陰) 가운데에 아(我) 없다면
  이 모든 법들은
  모두 또한 없어야 하리.
  
  어떤 사람이 쳐부수어 말하기를
  만약 아(我)를 마땅히 보일 수 있다 하면
  지자(智者)는 마땅히 답해 말하기를
  너의 마음을 마땅히 나에게 보여라 하리.
  
  진여(眞如)에 아(我)가 없다고 말함은
  오직 이 허망한 말이니,
  비구 업을 짓는 자라면
  마땅히 함께 화합하지 말지어다.
   
  이 사람은 유무(有無)를 세우고
  두 붕당(朋黨)에 떨어져서
  불법을 파괴함이니
  그는 나의 법에 머무르지 아니 하리라.
 
  외도의 허물을 떠나며
  무아견(無我見)을 불태우고
  나로 하여금 치연(熾然)한 것을 보는 것이
  겁(劫)이 다할 때 불꽃과 같게 하리.
  
  석밀(石蜜)과 포도와
  젖과 타락(酪)과 우유·기름 등의
  저 곳에 있는 맛은
  맛보지 않는 이는 알지 못하듯이
  
  다섯 가지 가운데에서
  5음(陰)의 아(我)를 취함도 또 그러하네.
  어리석은 이는 보지 못하니
  지혜로 보아야 해탈 얻으리.
  
  밝음의 모든 비유로는
  심법(心法)을 볼 수 없으니,
  어느 곳 무슨 인연으로도
  화합한 것을 볼 수 없네.
  
  모든 법의 다른 체상(體相)을
  일심(一心)으론 능히 취하지 못하네.
  인(因)도 없고 또 생(生)도 없으니
  허망각자(虛妄覺者)의 허물이다.
  
  진실로 수행하는 이는 마음을 볼 것이니
  마음 가운데엔 마음을 보지 못하네.
  가견(可見)은 견(見)으로부터 나거니와
  능견(能見)은 무슨 인(因)으로 나는 것이랴.
 
  나의 성(姓)은 가전연(迦旃延)인데
  수타회(首陀會)의 하늘에서 나서
  중생 위하여 설법하고
  열반 성(城)에 나아갔노라.
  
  이는 과거의 행하던 길이요,
  나와 여러 부처님께서
  3천 수다라(修多羅)에서
  열반의 법을 말했노라.
  
  욕계(欲界)와 무색계(無色界),
  부처님께서 그곳에서 성불 아니 하시고
  색계(色界)의 맨 위의 하늘인
  욕계 떠난 데서 보리(菩提)를 이루셨네.
  
  경계는 속박의 인(因)이 아니요
  경계를 따르는 것이 속박이다.
  지혜는 번뇌를 끊으니
  수행자의 날카로운 칼이라네.
  
  아(我)도 환상도 있으나
  법의 유무(有無)는 어떠한가?
  어리석은 이는 이와 같음을 보지 않으니
  어찌하여 아(我) 있고 없는 것이랴.
  
  지음과 짓지 않음이 있기에
  인(因) 없이 굴러서 나네
  일체법은 생김이 아닌 것을
  어리석은 이는 깨닫지 못하네.

  모든 인(因)은 능히 생김 아니며
  모든 연(緣)도 또한 짓는 것이 아니고,
  저 둘은 능히 생기지 못하니
  어찌 연(緣)이라고 분별하랴.
  
  선후(先後)와 일시(一時)를
  망각자(妄覺者)는 인(因)이라 말하며,
  허공과 병(甁)과 제자(弟子)의
  일체 물질이 난다고 하네.
  
  부처님께서 유위(有爲)로 된 것 아니니
  모든 상호(相好)로 장엄한 것은
  이는 전륜왕(轉輪王)의 공덕이요,
  부처님의 얻어진 이름 아니네.
  
  부처님께서 이 지혜의 모양이어서
  사견(邪見)의 허물 떠났으며
  속 몸인 이 지혜의 견(見)이요
  일체 허물을 떠났도다.
  
  귀 먹고 눈멀고 벙어리와
  늙고 젊은 악(惡)을 지닌 사람이여,
  이들 일체 사람들을
  범행(梵行)이 없는 자라 이름하리.
  
  광대하고 승묘(勝妙)한 몸은
  전륜왕(轉輪王)의 모양이네.
  출가한 이는 혹 하나·둘이고
  그 외는 방일(放逸)하는 자라네.
 
  비야사가나(毘耶娑迦那)와
  또는 이사바(梨沙婆)와
  가비라석가(迦毘羅釋迦)는
  내가 열반에 든 후 미래 세상에
  마땅히 이들이 출세하리라.
  
  내가 멸도(滅度)한 후 100년에는
  비야사위타(毘耶娑圍陀)와
  반다바(般茶婆)와
  구라바실라(鳩羅婆失羅)가 있어 날 것이요,
  그러한 후에는
  또 다시 모리(毛釐) 등이 있으리라.
  
  다음에는 모리굴다(毛釐掘多)요
  다음엔 무도왕(無道王)이 있을 것이며
  다음에 도검(刀釰)의 난(亂)이 있고
  다음은 도검(刀釰)의 말세일 것이다.
  
  다음 말세의 세상에는
  법도 없고 수행함도 없으리니,
  이러한 말세(末世)가 지나면
  세간에 바퀴 구르듯이
  
  해와 불이 함께 화합하여
  욕계(欲界)를 불태우고서
  다시 좋은 세계 이루고
  기세간(器世間)이 생기리라.
  
  4성(姓)과 국왕과
  모든 선인(仙人)과 법에서의
  큰 모임에서 공양 보시하면
  그 때엔 법이 도로 본래와 같으리라.
  
  설법은 본래 이와 같으니
  장행(長行)과 자주(子注)와
  자주(子注)에 또한 중작(重作 : 해석)이
  여러 가지로 한량없이 말하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것이
  세상에서 묻히고 없어지므로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하리니
  어떤 것이 시비(是非)이랴.
  
  옷을 법대로 염색하기를,
  다듬이질하고 다림질하여 깨끗이 하고
  진흙과 소똥 등으로
  괴색(壞色)하여 수용하리.
  
  몸을 바르는 모든 향과 옷으로
  외도의 모양을 떠난 것은
  나의 법륜(法輪)을 유통함이니
  이는 여래의 모양이었네.
  
  거른 물 아니면 마시지 않고
  허리띠와 속옷으로
  때[時]를 따라서 걸식(乞食)하지만
  하천(下賤)한 집은 떠나리.

  묘한 하늘과 인간의
  수승한 곳에 태어나서
  보배로운 모양 성취하여
  천인(天人) 가운데에서 자재하리.
  
  법에 의해 수행하는 자는
  하늘과 4천하(天下)에 태어나는데,
  많은 시간을 수용하다가
  탐심 많음에서 도로 없어지리라.
  
  바른 시대(正時)와 3재(灾)와
  또한 두 악한 세상이며
  나와 다른 바른 시대와
  석가의 말세인 시대엔
  
  석종(釋種), 실달타(悉達他)와
  8비(臂)와 자재(自在),
  이와 같은 외도들은
  내가 멸도(滅)하면 세상에 나오리라.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것들은
  석가 사자(師子)의 말함이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있었고
  비야사(毘耶娑)도 이를 말한다.
  
  여덟 팔[八臂]인 나라연(羅羅延)과
  마혜수라(摩醢首羅)도
  이와 같은 말을 하기를,
  나의 변화로 세간을 만들었다고 하리.

  나의 어머니 이름은 선재(善才)며
  아버지 이름 범천왕(梵天王)이요
  나의 성(姓)은 가전연(迦旃延)인데
  모든 번뇌를 떠났노라 하리.
  
  섬바(贍婆) 성(城)에 태어나고
  나의 아버지와 조부이신
  아버지 이름은 월호(月護)이시니
  달 종족(種)으로부터 태어났다 하리.
  
  출가하여 진실 행을 닦았고
  천 가지 구절[句]을 말하며
  열반에 든다고 수기하고
  대혜에게 전륜의 굴림이 부족하네.
  
  대혜(大慧)는 법승(法勝)에게 주며
  법승은 미구리(彌佉梨)에게 주고
  미구리는 제자가 없어서
  그 다음 때엔 법이 없어지리라 하리.
  
  가섭(迦葉)과 구류손(拘留孫)과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와 나는
  모든 번뇌 떠났으니
  일체 바른 시대라 이름하네.
  
  저 정법(正法)을 지난 후에는
  부처님께서 있어 여의(如意)라 이름하리니,
  거기에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사람을 위해 5법을 설하리라.
 
  2·3재(災)가 없는 가운데에는
  과거와 미래 세상도 또한 그러하여
  여러 부처님께서 출세 아니 하시고
  바른 시기에 세상에 출현하시네.
  
  상(相)이 있음을 박탈할 사람 없고,
  옷을 나누고 자르지 아니 하고
  납의(衲衣)를 찢고 모아서 만들어
  공작(孔雀) 그림의 색과 같네.
  
  두 치[寸]와 혹은 세 치로서
  얼기설기 납의(衲衣)를 깁을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아니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에게 탐내고 빼앗기리라.
  
  항상 탐욕의 불을 끄고
  지혜의 물로 항상 씻고 목욕하며,
  밤 낮 6시(時)에
  여실히 법을 수행하라.
  
  쏘는 화살과 돌과 나무는
  힘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지니
  하나를 쏘면 다시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선(善)과 불선(不善)도 또한 그러하네.
  
  하나 가운데엔 많은 종류가 없으니
  상(相)은 이와 같음이 없기 때문이네.
  바람이 일체에 불어감과 같으며
  전지(田地)가 불에 타는 것과 같네.

  만약 하나가 능히 많음을 짓는다면
  일체는 짓는 것 없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일체를 잃음이니
  이는 망각자(妄覺者)의 법이리라.
  
  등불과 종자가 같은데
  어찌 많음이 비슷하리요,
  하나가 능히 많음을 내었다면
  이는 망각자(妄覺者)의 법이리라.
  
  호마[麻]엔 팥이 나지 않고
  나락에는 큰 보리가 나지 않으며
  작은 보리들의 종자가 나지 않으리니
  어찌 하나가 많음을 내리요.
  
  파니(波尼)가 성론(聲論)을 내었고
  아차파(阿叉波)의 태백(太白)이며
  말세에 범장(梵藏)이 있어서
  세속론(世俗論)을 말하리.
  
  가전연(迦旃延)이 경(經)을 지으며
  야바가(夜婆伽)도 또한 그러하네.
  부주가(浮稠迦)의 천문(天文)이여,
  이는 다음 말세의 논이라네.
  
  바리(婆梨)가 세복(世福)을 말하기에
  세상 사람이 복덕에 의지하여
  능히 모든 법을 두호하고
  왕 바리(婆離)는 땅을 보시하리라.
 
  미가마수라(彌迦摩修羅)와
  아서라(阿舒羅) 등은
  미혹과 왕론(王論)을 말하고
  말세엔 여러 신선 나타나리라.
  
  싯달타(悉達他)는 석종(釋種)이요
  부단타(浮單陀)는 5각(角)인 자라네.
  구력(口力)과 힐혜(黠慧)는
  내가 멸도한 후 출세하리라.
  
  아시나(阿示那) 삼굴(三掘)과
  미구라(彌佉羅) 조관(澡罐)이었네.
  내가 아란야(阿蘭若)에 있을 적
  범천(梵天)이 나에게 보시하였네.
  
  그대는 당래(當來) 세상에
  큰 이진구(離塵垢)라 이름할 것이요,
  능히 참 해탈을 말하리니
  이는 모니(牟尼)의 모양이라네.
  
  범천(梵天)이 범중(梵衆)과 함께
  모든 하늘 대중과 더불어
  녹피(鹿皮) 등을 나에게 보시하고
  도로 자재천(自在天)으로 사라졌네.
  
  여러 얼기설기 섞인 옷이며
  걸식하는 발우를 만들어
  제석과 사천왕(四天王)은
  조용한 곳에서 나에게 보시하였네.
 
  무생(無生)과 또한 인(因)과
  생(生)과 불생(不生)을 말하고서
  불생(不生)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다만 언어를 말함이네.
  
  만약 무명(無明) 등의 인(因)이
  능히 모든 마음을 내었다면
  색(色)이 나지 못했을 때엔
  중간이 어디에 머무르랴.
  
  즉시 마음에서 멸하고
  다시 다른 마음을 낸다면
  색(色)은 한 생각도 머무름이 아니니,
  무슨 법이 능히 생김을 관찰하랴.
  
  무슨 인연에 의지하는가?
  마음은 이 전도(顚倒)의 인(因)이다.
  그는 능히 법을 이루지 못하리니,
  어찌 생멸(生滅)을 알 것인가?
  
  수행자가 정(定)에 합하면
  금안사나(金安闍那)의 체(體)일 것이니
  광음천(光音天) 궁전에는
  세간법이 무너지지 않네.
  
  증득할 바 법에 머무름은
  이는 일체 부처님과
  여래 등의 지혜이니,
  비구는 그 법을 증득해야 하리.
 
  나머지 증득한 바 법이란
  그 법은 항상 무너지지 않네.
  
  어찌하여 허망하게 볼 것인가?
  모든 법은 생각에도 머무르질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는가?
  건달바와 환(幻)의 색(色)이다.
  모든 색(色)은 4대(大)가 없거니,
  모든 대(大)는 무슨 소위(所爲)이랴.
  
  무명(無明)으로 있는 마음과
  끝없는 세계에의 훈습으로
  생멸(生滅)에 의한 화합(和合)이니,
  망각자(妄覺者)의 분별이었네.
  
  승구(僧佉)가 두 가지 있으니
  훌륭함과 전변(轉變)이다.
  훌륭함 속에 과(果)가 있으니
  과(果)가 또다시 과를 성취하네.
  
  훌륭함은 대(大)의 체상(體相)이니
  공덕의 차별을 말하는
  인과(因果) 두 가지 법은
  전변 가운데엔 없다네.
  
  수경(水鏡)은 청정하여
  진토(塵土)가 더럽히지 못하듯이
  진여(眞如)는 이와 같이 청정하여
  중생이 의지하였다네.
 
  흥거(興渠)와 파(葱)와
  여인(女人)의 회태장(懷胎藏)과
  소금과 소금 가운데 맛과 같아
  종자(種子)가 어찌 없으랴.
  
  이체(異體)와 불이체(不異體)라고 하는
  2체(體)의 두 법을 떠났고
  유(有) 법과 인연 없음의
  유위(有爲)에 없는 것이 아니라네.
  
  말(馬) 가운데엔 소(牛)가 없듯이
  음(陰) 가운데 아(我)도 그러하여
  유위(有爲)·무위(無爲)라 말하는
  이 법은 말할 수 없다네.
  
  악견(惡見)의 양(量)과 아함(阿含)은
  삿된 각(覺)의 구염(垢染)에 의함이네.
  깨닫지 못하고 아(我)있다 말함이니
  인(因)도 인을 떠남도 아니었네.
  
  5음엔 아(我)가 없으니
  아(我)를 취함은 허물이다.
  같음과 다름에서
  망각자(妄覺者)는 깨닫지 못하네.
  
  수경(水鏡)과 눈(眼)에서
  거울 속의 모양을 보는 것과 같아서
  일(一)과 이(異)를 멀리 떠났으니,
  음(陰) 가운데 아(我)도 또 그러하네.
 
  가관(可觀)과 능관(能觀)과
  선도(禪道)로 중생 보는 것인
  이 세 법을 관찰하여
  사견(邪見) 법을 떠나야 하리.
  
  곧 지견(知見)을 곧 없애면
  구멍 속에 허공 보는 것 같으리라.
  모든 법의 전변(轉變)하는 상(相)을
  어리석은 사람은 허망하게 분별하네.
  
  열반은 유무를 떠났으니
  여실(如實)한 견(見)의 자리에 머물러서
  생멸법을 멀리 떠나고
  또 유무(有無)의 체(體)도 떠나리.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을 떠나며
  전변하는 법을 관찰하고
  외도의 말을 떠나며
  명상(名相)과 형체(形體)를 떠나리.
  
  속 몸의 사견(邪見)에 의하여
  전변하는 법을 관찰하면
  모든 하늘과 지옥과
  촉감과 핍박과 고뇌라네.
  
  중음(中陰)의 법은 있지 않으니
  어찌 식(識)에 의하여 나리요.
  태(胎)·난(卵)·습(濕)·화(化) 등은
  중음(中陰) 가운데에 난다.
 
  중생의 몸 여러 가지에서
  마땅히 가고 오는 것을 관찰하여
  양(量)과 아함(阿含)이
  능히 번뇌 종자 내는 것을 떠나리.
  
  모든 외도의 헛된 말을
  지혜 있는 자는 취하지 말 것이요,
  먼저 아(我)를 관찰하고
  다음에 인연을 관찰하라.
  
  유(有)를 알지 못하고 유를 말하니
  그러므로 석녀의 아이[石女兒]가 수승하리.
  반야(般若)는 육안(肉眼)을 떠났으니
  묘한 눈으로 중생을 보라.
  
  유위(有爲)와 음(陰)을 떠나면
  묘한 신체의 중생일 것이다.
  좋고 나쁜 색(色)에 머물러서
  속박을 벗어나 해탈하라.
  
  유위(有爲)에 머무름을 묘하게 증득하면
  능히 묘한 법신(法身)을 보리라.
  6취(趣)에 있어서는
  망각(妄覺)이요, 그 경계가 아니다.
  
  아(我)는 인도(人道)를 벗어났고
  다른 망각자(妄覺者)는 아니며,
  그리고 아(我)의 마음 생김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나는 것인가?

  강물과 등불과 종자가 같다고
  어찌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느냐?
  식(識)이 나지 않을 때에는
  무명(無明) 등도 있지 아니하네.
  무명을 떠나면 식(識)이 없으니
  어찌 상속하여 생기겠는가?
  
  3세(世)와 또한 무세(無世)와
  제5는 가히 말할 수 없네.
  이는 부처님의 경계요,
  망각자(妄覺者)가 관찰하는
  행(行)에서는 말할 수 없음이니,
  지혜와 행(行)의 속을 떠났기 때문이네.
  
  모든 행을 취하는 가운데
  지혜는 행의 법을 떠났다네.
  이 법에 의하여 이것이 생겼으니
  현재 보인 것에는 인(因)이 없다네.
  
  모든 인연은 볼 수 없어서
  지음 없는 것도 떠났네.
  바람과 불에 의해 능히 태우니,
  바람이 움직임으로 능히 나며
  바람이 불을 불어 움직이게 하고
  바람이 다시 불을 능히 없애리.
  
  어리석은 이는 분별하지 못하니,
  어찌하여 중생이 생긴 것인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말하나
  의(依)와 소의(所依)를 떠났네.
  
  어찌하여 저 법이 성립함인가?
  바람과 불을 어리석은 이가 분별하니,
  피차(彼此)의 증장(增長)하는 힘이다.
  피차의 법은 미치지도 못하네.
  
  어찌하여 불이 생김인가?
  말 뿐이요, 뜻(義)은 없는 것이네.
  중생은 이 누구의 조작이냐고
  그를 분별함은 불과 같다.
  
  능히 음입(陰入)의 몸을 지은 것은
  의(意) 등의 인연으로 생김이네.
  항상됨과 무아(無我)의 뜻(義)이
  마음과 함께 항상 굴러 생한다.
  
  두 법은 항상 청정하여
  모든 인과(因果)를 떠났으며,
  불이 능히 그를 이루지 못하고
  망각자(妄覺者)는 알지 못하네.
  
  마음과 중생과 열반은
  자성이 항상 청정하다.
  끝없는 허물과 더럽힘이
  허공과 같아 차별 없네.
  
  외도의 사견(邪見)인 때(垢)는
  백상(白象)의 장성함과 같다.
  
  의(意)와 의식(意識)이 덮임에 의함이니
  대(大)들도 능히 청정하네.
  
  저 사람은 여실(如實)을 보니
  보고서 번뇌를 깨트리고
  비유 주림(稠林)을 버리며
  저 사람은 성인의 경지를 취한다.
  
  지(知)와 능지(能知)의 차별을
  그는 다른 체[異體]로 분별하네.
  어둡고 둔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또한 다시 말할 수 없다고 말하네.
  
  비유컨대 전단(旃檀)과 북(鼓)을
  어리석은 사람이 다른 말함과 같으니,
  전단(旃檀)과 침수(沈水)와 같아서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그러하네.
  
  어리석은 사람이 깨닫지 못함은
  허망한 견해에 의한 때문이다.
  오후에는 받아먹지 않으며
  발우를 가지고 양(量)에 의해 취하리.
  
  입[口] 등의 모든 허물 떠나서
  청정한 먹을 것을 먹으니,
  이것이 법과 같은 행(行)인데도
  능히 상응(相應)함을 알지 못한다.
  
  법에 의하여 능히 믿으며
  삿된 행(行)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세간의 물건에 집착하지 말고
  능히 정의(正義)를 취할지어다.
  
  저 사람은 진금(眞金)을 취함이요
  능히 법의 등불 켜는 것이니,
  유무(有無)의 인연과
  사견(邪見)의 그물과 분별을 떠날 것이다.
  
  일체 번뇌의 때[垢]의
  탐심과 진애(嗔恚)를 떠나면
  그 때엔 다시 나지 않으니
  일체 염(染)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손을 펴시고
  부처님의 지위를 주시리라.
  외도는 인과(因果)에 미혹되고
  나머지는 인연에 미혹되네.
  
  인(因)이 없고 물건이 있다는 것과
  단견(斷見)은 성인(聖)에겐 없다네.
  수(受)는 과(果)에서 전변(轉變)함이니
  식(識)과 의식(意識)이네.
  
  의(意)는 본식(本識)을 따라 나고
  식(識)은 의(意)를 떠나 생하네.
  일체 식(識)이 근본 식(識)으로부터 
  능히 나는 것은 바다 물결 같네.

  일체 훈습의 인(因)으로부터
  인연을 따라 난다네.
  생각의 차별인 묶임[鎖]은
  자심을 속박하여 경계를 취하네.
  
  형체 모양이 같아서
  의(意)와 눈(眼) 등의 식(識)이 나니,
  끝없는 예로부터 허물과 속박으로
  훈습으로 생겨서 경계를 취하네.
  
  밖으로 나타난 심(心)과 모든 법인
  외도의 견해 막았네.
  저에 의해 또한 다른 것 생기며
  또한 저에 의하여 관(觀)이 생기네.
  
  그러므로 삿된 견해와
  세간과 나고 죽음이 생기네.
  모든 법은 꿈과 환(幻)이며
  건달바의 성과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과 같으니
  이는 자심(自心)임을 관찰하리라.
  
  행(行)의 차별인 진여(眞如)와
  바른 지혜와 환(幻)과 같은 삼매는
  수능엄(首楞嚴)의 정(定)과
  다른 여러 삼매에 의지하네.
  
  초지(初地)에 들어가서는
  모든 신통과 삼매와

  지혜와 뜻 같은 몸을 얻고
  지위를 받아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네.
  
  그 때엔 마음이 생(生)하질 않고
  세상의 허망함을 보기 때문에
  환희지(歡喜地)와 다른 지위를 얻으며
  또한 부처님의 지위 얻는다네.
  
  의지(依止)인 몸을 전변(轉)함이
  여러 색(色)의 마니(摩尼)와 같고,
  또한 물 속의 달과 같아
  중생의 사업 지어주네.
  
  유무(有無)의 붕당(朋黨)을 떠나며
  2와 불이(不二)를 떠나고
  2승지(乘地)를 벗어나며
  제 7지(地)도 뛰어나네.
  
  속 몸에서 모든 법을 보고
  지위마다 청정하여
  외도와 바깥 물건을 떠나
  그 때엔 대승(大乘)을 말하네.
  
  분별식(分別識)을 굴리고
  변역(變易)과 생멸(生滅)을 떠나서
  토끼 뿔과 마니(摩尼) 같다고
  해탈을 얻은 이는 말하네.
  
  결박에 의해 상응(相應)하듯이
  법에 의함도 또한 이와 같네.
  상응에 의해서 상응하고
  다른 것을 분별 말 것이다.
  
  안식(眼識)과 업과 수(受)와
  무명(無明)과 바른 견해와
  눈과 색(色)과 의(意)와
  의식(意識)의 염(染)은 이와 같네.
  
  부처님께서 이 묘한 경을 말씀하시니
  거룩한 대혜보살과
  보살마하살들과
  
  라바나(羅婆那) 대왕과
  숙가(叔迦) 바라나(婆羅那)와
  옹이(甕耳) 등인 나찰(羅刹)과
  천룡(天龍), 야차(夜叉)들과
  건달바(乾闥婆)와 아수라(阿修羅)와
  모든 하늘과 비구·스님은
  크게 기뻐서 받들어 행하였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해탈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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