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한적한 곳에 감 품
Rahogata-vagga
한적한 곳에 감 경(S36:11)
Rahogat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2. “세존이시여,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 있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존께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또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고 설하셨다.’라고.
세존이시여, 여기서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장하고 장하구나, 비구여. 비구여, 나는 세 가지 느낌을 가르쳤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 셋을 나는 가르쳤다.
또 한편으로 비구여, 나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 뒤의 말은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의 무상함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기 때문이다.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니라.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소멸하고, 성냄[瞋]이 소멸하고, 어리석음[癡]이 소멸한다.
비구여, 다시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가라앉는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는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가라앉는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가라앉는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가라앉고, 성냄[瞋]이 가라앉고, 어리석음[癡]이 가라앉는다.”
3. “비구여,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고요해진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고요해진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고요해진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고요해진다. 상수멸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고요해지고, 성냄[瞋]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癡]이 고요해진다.”
허공 경1(S36:12)
Ākās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허공에는 갖가지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에서 불어오는 바람,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 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이 몸속에서도 갖가지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3.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게송으로 설하셨다.
“저 위의 허공에는 온갖 바람들이 불고 있어
동에서 오는가 하면 서에서도 오고,
북에서 오는가 하면 또 남에서도 불어온다.
먼지 섞인 바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찬 바람인가 하면 더운 것도 있으며
거센 바람인가 하면 부드러운 바람도 불고
가지가지로 바람이 불고 있다.
그와 같이 여기 이 몸속에서도
가지가지로 느낌이 일어나나니,
즐거운 느낌들, 괴로운 느낌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다.
그러나 비구가 열의를 가지고 분명히 살피어
다시 태어남의 기반을 허물기에 수행정진하면
마침내 모든 느낌을 철저하게 아는
현자(賢者)가 된다.
그는 느낌을 두루 통찰함으로써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멸진하여,
몸이 무너질 때엔 법에 확고히 머물며
헤아림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지혜의 달인이다.”
허공 경2(S36:13)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허공에는 가지각색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 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가지각색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객사(客舍) 경(S36:14)
Āgār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객사에는 동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고, 서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북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고, 남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한다. 끄샤뜨리야 사람들이 와서 묵기도 하고, 바라문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와이샤(평민)들이 와서 묵기도 하고, 수드라들이 와서 묵기도 한다.”
3.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이 몸에도 여러 종류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비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비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비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난다 경1(S36:15)
Ānand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2.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느낌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일어남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며 위험함이며 벗어남입니까?”
아난다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아난다여,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가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아난다여, 느낌으로 인해서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의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3. “아난다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거친 사유)과 지속적인 고찰(미세한 사유)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소멸하고, 성냄[瞋]이 소멸하고, 어리석음[癡]이 소멸한다.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가라앉는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는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가라앉는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가라앉는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가라앉고, 성냄[瞋]이 가라앉고, 어리석음[癡]이 가라앉는다.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고요해짐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고요해진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고요해진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고요해진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고요해진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고요해지고, 성냄[瞋]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癡]이 고요해진다.”
아난다 경2(S36:16)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 “아난다여, 어떤 것이 느낌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일어남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며 위험함이며 벗어남인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거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 방금 말씀하신 이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잘 호지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이제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3.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아난다여,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팔정도]가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아난다여, 느낌으로 인해서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의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4. “아난다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소멸하고, 성냄[瞋]이 소멸하고, 어리석음[癡]이 소멸한다.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가라앉는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는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가라앉는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가라앉는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가라앉고, 성냄[瞋]이 가라앉고, 어리석음[癡]이 가라앉는다.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고요해짐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고요해진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고요해진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고요해진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고요해진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고요해지고, 성냄[瞋]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癡]이 고요해진다.”
많은 비구 경(36:17)
Sambahulabhikkhu-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느낌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일어남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며 위험함이며 벗어남입니까?”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팔정도]가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느낌으로 인해서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의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2. “비구들이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소멸하고, 성냄[瞋]이 소멸하고, 어리석음[癡]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가라앉는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는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가라앉는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가라앉는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가라앉고, 성냄[瞋]이 가라앉고, 어리석음[癡]이 가라앉는다.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고요해짐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고요해진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고요해진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고요해진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고요해진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고요해지고, 성냄[瞋]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癡]이 고요해진다.”
많은 비구 경2(S36:18)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느낌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일어남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인가? 어떤 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며 위험함이며 벗어남인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거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 방금 말씀하신 이 뜻을 직접 밝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잘 호지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의 의해 이끌어 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이제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3.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팔정도]가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느낌으로 인해서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의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4. “비구들이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소멸하고, 성냄[瞋]이 소멸하고, 어리석음[癡]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가라앉는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는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가라앉는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가라앉는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가라앉고, 성냄[瞋]이 가라앉고, 어리석음[癡]이 가라앉는다.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형성된 것들이 차례로 고요해짐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고요해진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고요해진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고요해진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고요해진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고요해진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고요해지고, 성냄[瞋]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癡]이 고요해진다.”
빤짜깡가 경(S36:19)
Pañcakaṅg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2.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빤짜깡가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화롭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화롭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빤짜깡가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화롭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를 설복시킬 수가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우다이 존자를 설복시킬 수가 없었다.
3.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빤짜깡가 목수의 주장 또한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논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고 언쟁하면서 입의 칼로 서로를 찌르면서 머물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화합하고 정중하며 논쟁하지 않고 물과 우유가 섞인 것 같고 우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머물 것이다.”
4. “아난다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들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의지하여 일어나는[緣而生]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이라 부른다.”
5.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으로부터 생겨난 희열[喜.기쁨]과 행복[樂.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6.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나는 원하기만 하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7.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희열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행복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8.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행복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희열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9.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지각)을 완전히 초월하고 장애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0.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1.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원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2.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인식(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3.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인식과 느낌의 소멸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4. “그런데 아난다여,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십니다.’라고.”
비구 경(S36:20)
Bhikkhu-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세 가지로도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논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고 언쟁하면서 입의 칼로 서로를 찌르면서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화합하고 정중하며 논쟁하지 않고 물과 우유가 섞인 것 같고 우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머물 것이다.”
3. “비구들이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들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매혹적인(환락을 야기하는)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의지하여 일어나는[緣而生]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이라 부른다.”
4.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으로부터 생겨난 희열[喜.기쁨]과 행복[樂.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6.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행복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7.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희열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8.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지각)을 완전히 초월하고 장애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9.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0.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원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1.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인식(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2.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인식(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3. “그런데 비구들이여,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십니다.’라고.”
제2장 한적한 곳에 감 품이 끝났다. 두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한적한 곳에 감 ② ~ ③ 허공 ④ 객사(客舍) ⑤ ~ ⑥ 아난다 ⑦ ~ ⑧ 많은 비구 ⑨ 빤짜깡가
⑩ 비구다.
실론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0837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