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담론 품
Sākaccha-vagga
자양분 경(S46:51)
Āhār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
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의 자양분과 자양분이 아닌 것을 설하리라. 그것을 잘 들어라.그것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여라. 이제 설하겠다.”
"잘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ⅰ) 장애의 자양분(Āhāro nīvaraṇānaṁ)
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아름다운 표상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주의를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성냄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성냄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적의를 일으키는 표상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성냄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성냄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해태와 혼침)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권태로움, 나른함, 무기력함, 식곤증, 정신적 태만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들뜸(산만함)이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들뜸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들뜸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들뜸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의심스러운 것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ⅱ)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자양분(Āhāro bojjhaṅgānaṁ)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비난할 것이 없는 것과 비난받아 마땅한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 고상한 것과 천박한 법들, 흑백으로 상반되는 갖가지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세 하는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일곱 가지 법들이 있어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1) 탐구함 (2) 토대를 깨끗이 함 (3) 기능(五根)을 조화롭게 닦음 (4) 지혜 없는 사람을 피함 (5) 지혜로운 사람을 친근함 (6) 심오한 지혜로 행해야 할 것에 대해 반조함 (7) 이것을 확신함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있어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1)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함 (2)이점을 봄 (3)가야할 길의 과정을 반조함 (4)탁발한 음식을 공경함 (5)[정법의]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함 (6)스승의 위대함을 반조함 (7)태생의 위대함을 반조함 (8)동료수행자들의 위대함을 반조함 (9)게으른 사람을 멀리함 (10)부지런히 정진하는 자를 친근함 (11)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1)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 (2)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 (3)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4)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 (5) 관대함을 계속해서 생각함(捨隨念) (6)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天隨念) (7)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止息隨念) (8) 거친 자를 멀리 함 (9) 인자한 자를 섬김 (10) 신심을 일으키는 경들을 반조함 (11)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일곱가지 법이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1) 좋은 음식을 수용함 (2) 안락한 기후에 삶 (3) 편안한 자세를 취함 (4) 적절한 노력 (5) 포악한 사람을 멀리함 (6) 몸이 고요한 사람을 친근함 (7)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사마타의 표상과 산란함이 없는 표상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있어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1) 토대를 깨끗하게 함 (2) 모든 기능들을 고르게 조절함 (3) 표상에 대한 능숙함 (4) 적당한 때에 마음을 분발함 (5) 적당한 때에 마음을 절제함 (6) 적당한 때에 격려함 (7) 적당한 때에 평온하게 함 (8) 삼매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멀리함 (9) 삼매에 든 사람을 친근함 (10) 禪과 해탈을 반조함 (11)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다섯 가지 법이 있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1) 중생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2) 상카라(行)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3) 중생과 상카라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사람을 멀리함 (4) 중생과 상카라에 대해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친근함 (5)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ⅲ) 장애의 자양분이 아닌 것(Anāhāro nīvaraṇānaṁ)
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부정한 표상[不淨相]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註) “나아가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나니 그것은 (1) 부정한 표상을 지님(배움) (2) 부정함을 닦기에 전념함 (3) 감각의 문들을 잘 단속함 (4) 음식에서 적당함을 앎 (5) 훌륭한 도반(선지식)을 만남 (6) 적절한 대화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성냄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성냄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성냄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성냄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註) “나아가서 악의를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나니 그것은 (1) 자애의 표상을 지님(배움) (2) 자애를 닦기에 전념함 (3) 자기 자신이 바로 업의 주인이며, 상속자임을 명심함 (4) 이에 관해 거듭해서 숙고함 (5) 훌륭한 도반 (6) 적절한 대화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해태와 혼침)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혼침과 졸음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혼침과 졸음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註) “나아가서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1) 과식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2) 자세를 바꿈 (3) 광명상(光明相)을 마음에 잡도리함 (4) 옥외에 머묾 (5) 훌륭한 도반 (6) 적절한 대화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들뜸(산만함)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들뜸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고요한 것에 대해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들뜸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들뜸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註) “나아가서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1) [경을] 많이 배움 (2) [경을] 탐구함 (3) 계율을 숙지함 (4)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분들을 친근함 (5) 훌륭한 도반 (6) 적절한 대화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비난받을 것이 없는 없는 것과 비난받아야 마땅한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 고상한 것과 천박한 법들, 흑배으로 상반되는 갖가지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익히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註) “나아가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1) [경을] 많이 배움 (2) [경을] 탐구함 (3) 계율을 숙지함 (4)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짐 (5) 훌륭한 도반 (6) 적절한 대화이다.
(ⅱ)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자양분이 아닌 것(Anāhāro bojjhaṅgānaṁ)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나무랄 데 없는 것과 나무라야 마땅한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 고상한 것과 천박한 법들, 흑백으로 상반되는 갖가지 법들이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구성된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사마타의 표상과 산란함이 없는 표상이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는데 이것을 자주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성취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방법 경(S46:52)
Pariyāy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사왓티로 걸식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2. “벗이여(친애하는 이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제거하고, 통찰지(지혜)로써 마음의 오염원(번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3. 이와 같은 외도 유행승들의 질문에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우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비구들은 사왓티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사왓티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습니다. 한 곁에 앉은 저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라고.
이와 같은 외도 유행승들의 질문에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저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4.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와 같이 되물어야 한다.
‘벗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열 가지가 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열네 가지가 되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되물으면 외도 유행승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들의 한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신의 세상에서, 혹은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인간의 세상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으로 마음을 흡족하게 할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나 혹은 여래나 여래의 제자로부터 그것을 들은 자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다.”
(ⅰ) 다섯이 열이 되는 방법(Pañca dasa honti)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장애가 열 가지가 되는 방법인가?
비구들이여, 내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는 무엇이든지 장애이고 외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도 무엇이든지 장애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성냄은 무엇이든지 장애이고 외적인 성냄도 무엇이든지 장애이다. 그러므로 성냄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되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혼침과 졸음(해태와 혼침)은 무엇이든지 장애이고 외적인 혼침과 졸음도 무엇이든지 장애이다. 그러므로 혼침과 졸음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들뜸(산란함)은 무엇이든지 장애이고 외적인 들뜸도 무엇이든지 장애이다. 그러므로 들뜸이라는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은 무엇이든지 장애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도 무엇이든지 장애이다. 그러므로 의심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장애가 열 가지가 되는 방법이다.”
註) “‘내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란 자신의 오온에 대해서 생긴 욕탐을 말하고, ‘외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란 남들의 오온과 [무정물 등]에 대한 욕탐이다.”
“‘내적인 성냄’이란 자신의 손이나 발 등에 대해서 생긴 적의를 말하고, ‘외적인 성냄’이란 남들의 것들에 대해서 생긴 적의를 말한다.”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해태와 혼침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나태함이 해태이고, 무기력함이 혼침이다. 분발심이 없어 무기력하고 활기가 없어 피로하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서 해태는 분발이 없는 특징을 가진다. 정진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처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혼침은 일에 적합하지 못한 특징을 가진다. [마음의 문을]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게으름으로 나타난다. 혹은 졸음과 수면으로 나타난다. 권태, 하품 등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기울임이 이 둘의 가까운 원인이다.”
“들뜬 상태가 들뜸이다. 그것의 특징은 바람결에 출렁이는 물처럼 고요하지 않음이다. 마치 바람에 부딪혀 흔들리는 깃발처럼 동요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돌에 맞아 흩어지는 재처럼 산란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마음이 동요할 때 그것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잡도리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마음의 산만함이라고 알아야 한다.”
“악한 것을 행하였음이 악행을 했음이다. 그것의 상태가 후회이다. 나중에 속을 태우는 특징을 가진다. [좋은 일을] 행하지 않은 것과 [나쁜 일을] 행한 것을 슬퍼하는 역할을 한다. 뉘우침으로 나타난다. 행함과 행하지 아니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노예의 근성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 청정도론 -
“내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이란 [‘나는 누구인가?’하는 등의] 자신의 오온에 대해 혼란함을 말하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이란 여덟 가지 외적인 경우에 대한 큰 의심을 말한다. 여덟 가지 큰 의심이란 불, 법, 승, 계,
과거, 현재, 미래, 연기를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ⅱ) 일곱이 열넷이 되는 방법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열네 가지가 되는 방법인가?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마음 챙김은 무엇이든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마음 챙김도 무엇이든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해서 통찰지로 꿰뚫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관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해서 통찰지로 꿰뚫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관찰하는 것도 무엇이든지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육체적인 정진도 무엇이든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정신적인 정진도 무엇이든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일으킨 생각(거친 사유)과 지속적인 고찰(미세한 사유)이 있는 희열(기쁨)도 무엇이든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일으킨 생각이 없고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희열도 무엇이든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고요함)은 무엇이든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마음의 편안함도 무엇이든지 펴난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 삼매도 무엇이든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일으킨 생각이 없고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삼매도 무엇이든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평정도 무엇이든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평정도 무엇이든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열네 가지가 되는 방법이다.”
註) 몸의 고요함이란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의] 세 가지 무더기들의 둔감함을 가라앉힘을 말하고 마음의 고요함이란 의식의 무더기의 둔감함을 가라앉힘을 말한다.
불[火] 경(S46:53)
Agg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사왓티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2.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3. 이와 같은 외도 유행승들의 질문에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우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비구들은 사왓티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사왓티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습니다. 한 곁에 앉은 저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통찰지로써 마음의 오염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라고.
이와 같은 외도 유행승들의 질문에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저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4.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와 같이 되물어야 한다.
‘벗들이여, 그런데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에는 어떤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어떤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입니까?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어떤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어떤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되물으면 외도 유행승들은 아무 대답들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들의 한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신의 세상에서, 혹은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인간의 세상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으로 마음을 흡족하게 할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 혹은 여래나 여래의 제자로부터 그것을 들은 자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다.”
(ⅰ) 때가 아닌 때(Akāla)
5.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에는 편안함(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해이해져 있는 마음을 적극적인 마음으로 일으켜 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작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하자. 만일 그가 그 불에다가 젖은 풀을 던져 놓고 젖은 쇠똥을 던져 놓고 젖은 장작을 던져 놓고 물을 끼얹고 흙을 뿌린다면 그 사람은 작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에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해이해져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ⅱ) 올바른 때(Kāla)
6.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에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해이해져 있는 마음을 적극적인 마음으로 일으켜 세우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작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하자. 만일 그가 그 불에다가 마른 풀을 던져 놓고 마른 쇠똥을 던져 놓고 마른 장작을 던져 놓고 입으로 바람을 불고 흙을 뿌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작을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산만해져 있을 때에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해이해져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가 쉽기 때문이다.”
(ⅲ) 때가 아닌 때
7. “비구들이여,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들떠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고요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큰 불무더기를 끄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하자. 만일 그가 그 불에다가 마른 풀을 던져 놓고 마른 쇠똥을 던져 놓고 마른 장작을 던져 넣고 입으로 바람을 불며 흙을 뿌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큰 불무더기를 끌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때 아닌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들떠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고요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ⅳ) 올바른 때
8. “비구들이여,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들떠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큰 불무더기를 끄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하자. 만일 그가 그 불에다가 젖은 풀은 던져 놓고 젖은 쇠똥을 던져 놓고 젖은 장작을 던져 놓고 물을 끼얹고 흙을 뿌린다면 그 사름은 큰 불무더기를 끌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들떠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마음 챙김은 항상 유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자애가 함께 함 경(S46:54)
Mettāsahagat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꼴리야에서 할릿다와사나라는 꼴리야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을 위하여 할릿다와사나로 들어갔다.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할릿다와사나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2.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연민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연민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평정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평정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3. 이와 같은 외도 유행승들의 질문에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우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비구들은 할릿다와사나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을 위하여 할릿다와사나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할릿다와사나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습니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연민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연민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
평정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평정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물러라.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성냄 없고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물러라.’라고 법을 설합니다.
벗들이여, 그러면 법을 설하는 것과 교훈을 주는 것에 관한 한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라고.
이와 같은 외도 유행승들의 질문에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공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못한 채로 ‘저희는 세존의 곁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여쭈어서 정확하게 알아보리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4.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와 같이 되물어야 한다.
‘벗들이여, 그런데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의 목적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입니까?
벗들이여, 그런데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의 목적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입니까?
벗들이여, 그런데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의 목적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입니까?
벗들이여, 그런데 평정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되물으면 외도 유행승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들의 한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신들의 세상에서, 혹은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인간의 세상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으로 마음을 흡족하게 할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나 혹은 여래나 여래의 제자로부터 그것을 들은 자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런 통찰지를 가진 비구가 여기서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을 때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깨끗함이 그 정점이라고 나는 말한다.”
註)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중생에 대한 혐오스럽지 않음과 형성된 것에 대한 혐오스럽지 않음이다. 여기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란 원하는 데상을 뜻한다.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라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머무는가? 부정상(不淨相)으로 충만하거나 무상이라고 마음을 기울인다.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자애를 가득 펴거나 혹은 요소(界)일 뿐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둔다. 이렇게 혐오스런 대상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지고 머문다.
‘깨끗함을 통한 해탈’은 여덟 가지 해탈 가운데 세 번째이다. 『무애해도』에서도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아서 이것을 얻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색깔의 까시나들을 닦아서 이것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애에 머무는 자에게는 중생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그때 혐오감이 없는 것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혐오감이 없는 청정한 푸른 색깔 등에 대해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자애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을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끗함이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 청정도론 -
※ 주석에 의하면 이 가르침은 자애를 통한 禪을 기초로 한 뒤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여 아라한됨을 증득할 수 없는 자를 위해서 설하신 것이라고 한다. 같은 방법은 아래의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정을 통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의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연민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장애)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허공에 걸림이 없는 공무변처에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공무변처를 궁극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런 통찰지를 가진 비구는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註) “연민에 머무는 자가 몽둥이로 때리는 등 물질로 인한 중생의 고통을 관찰할 때 연민이 일어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위험을 잘 알게 된다. 그가 물질에 대한 위험을 잘 알기 때문에 땅의 까시나 등 가운데서[그가 명상했던] 어떤 까시나를 제거하여 물질로부터 벗어남인 허공에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연민은 공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 청정도론 Ⅸ.121 -
7. “비구들이여, 그러면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더불어 기뻐함을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라고 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식무변처를 궁극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런 통찰지를 가진 비구는 여기서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註)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가 갖가지 기쁨을 가져올 원인으로 인해 기쁨이 일어난 중생의 의식을 관찰해 더불어 기뻐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의식을 이해하는데 친숙해져 있다. 그가 순서에 따라 얻은 공무변처를 초월한 뒤 허공의 표상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는 의식으로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더불어 기뻐함은 식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였다. - 청정도론 Ⅸ.122 -
8. “비구들이여, 그러면 평정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무엇이 그것의 목적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궁극적 경지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실이고 무엇이 그것의 귀결점인가?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평정이 함께하고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평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무소유처를 궁극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런 통찰지를 가진 비구는 여기서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註) “평정에 머무는 자는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고통으로 벗어나기를, 이미 얻은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기를.’이라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행복(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구경법의 순서에 따라 얻은 식무변처를 초월한 뒤 구경법인 의식의 부재 – 이 부재에는 고유성질이 없다. - 에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평정은 무소유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소유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 청정도론 Ⅸ.123 -
상가와라 경(S46:55)
Sāṅgarav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상가라와 바라문이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2. “고따마 존자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조차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하지만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집니까? 하물며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註)만트라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신성한 말(구절·단어·음절).
큰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만 부르면서 일정시간 계속 반복하기도 하고 한번에 끝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진언은 말 자체에는 의미가 없으나 심오한 의미가 내재한다고 생각되며 영적인 지혜의 정수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특정 주문을 반복 암송하거나 명상한다면 탈아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며 높은 차원의 정신적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정신적 깨달음 외에도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목적, 예를 들어 사악한 영들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여러 종류의 진언을 사용한다.
힌두교에서 가장 강력하면서 널리 쓰이는 진언은 성스러운 음절인 '옴'(om)이다. 불교에서 중요한 진언은 '옴 마니 반메 훔'(om maṇi padme hūṃ)이다. 진언은 인도 종교의식과 가정 예식에서 여전히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힌두교의 많은 종파 입문식에서 구루(정신적 스승)는 입문자의 귀에 비밀스러운 진언을 속삭여준다. 진언은 구루나 그밖의 영적인 스승에게서 구두로 전해받았을 때만 진정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ⅰ)
3. “바라문이여,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붉은 랙이나 노란 심황이나 남색의 쪽이나 심홍색의 꼭두서니가 섞여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註) 주석서는 다섯 가지 장애의 각각에 대해서 세 가지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① 禪을 통해서 억압하여 벗어남 ② 위빳사나를 통해서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벗어남 ③ 도를 통해서 근절하여 벗어남이다.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는 부정(不淨)함에 의한 초선을 통해서 억압하여 벗어나고, 아라한도를 통해서 근절하여 벗어난다.(여기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는 단지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에 대한 욕망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2) 성냄은 자애에 의한 초선을 통해서 억압하고, 불환도를 통해서 근절한다.
(3) 해태와 혼침은 광명상(즉 태양이나 보름달의 원반 같은 밝은 빛을 가시화하는 것을 뜻함)을 통해서 억압하고, 아라한도를 통해서 근절한다.
(4) 들뜸과 후회는 사마타를 통해서 억압한다. 들뜸은 아라한도를 통해서 후회는 불환도들 통해서 근절한다.
(5) 의심은 법의 구분을 통해서 억압하여 벗어나고, 예류도를 통해서 근절한다.
4.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타오르는 불 위에 놓아서 물이 끓고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5.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이끼와 수초로 덮여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영상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6.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들뜸에 사로잡히고 들뜸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움직이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치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7.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흐리고 혼탁하고 진흙투성이고 어둠속에 놓여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8. “바라문이여, 이런 원인과 이런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하지 않다. 하물며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9. “바라문이여, 그러나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붉은 렉이나 노란 심황이나 남색의 쪽이나 심홍색의 꼭두서니와 섞여 있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0.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성냄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기 그릇을 불 위에 놓지 않아서 물이 끓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악의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악의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악의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1.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이끼와 수초로 덮여 있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2.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들뜸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들뜸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소용돌이 치지도 않고 물결치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3.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의심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흐리지도 않고 혼탁하지 않고 진흙투성이가 아니고 어둠속에 놓여 있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의심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4. “바라문이여, 이런 원인과 이런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나니, 하물며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5. “바라문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의 결실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무엇이 일곱인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편안함(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바라문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요 장애가 아니며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니 이를 닦고 많이 익히면면 그것은 명지와 해탈의 결실을 실현함으로 인도한다.”
16. 이렇게 말씀하시자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아바야 경(S46:56)
Abhay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바야 왕자가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바야 왕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註) 아바야 왕자는 라자가하의 빔비사라 왕과 웃제니의 미인이었던 빠두마와띠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으며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이 된 아자따삿뚜와는 이복형제였다. 율장에 의하면 그는 부처님의 주치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와까 꼬마라밧짜가 갓난아기로 버려진 것을 주워서 기른 사람이기도 하다. 맛지마 니까야 ‘아바야 왕자 경’에 의하면 그는 니간타 나따뿟따의 신도였는데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라는 니간타 나따뿟따의 말에 따라 세존을 논파하러 갔지만 오히려 세존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의 재가신도가 되었다. 그는 훗날 아버지가 시해되자 마음이 심란하여 출가하였으며 아라한이 되었다.
2. “세존이시여, 뿌라나 깟사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에는 어떤 원이도 어떤 조건도 없다. 어떤 원인도 어떤 조건도 없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알고 보는 것에는 어떤 원인도 어떤 조건도 없다. 어떤 원인도 어떤 조건도 없이 알고 본다.’라고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왕자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에는 원이도 있고 조건도 있다.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알고 보는 것에는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다.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3.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원인과 어떤 조건 때문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어떻게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왕자여,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면, 이러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다시 왕자여,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고 마음이 성냄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면, 이러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다시 왕자여,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면, 이러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다시 왕자여, 들뜸에 사로잡히고 마음이 들뜸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면, 이러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다시 왕자여, 의심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면,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4. “세존이시여, 그러면 이 법문은 무엇이라 부릅니까?”
“왕자여, ‘장애’라 부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이것이 장애입니다. 선서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이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세존이시여, 각각 하나씩의 장애에만 압도되어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것이고 보지 못할 것인데 다섯 가지 장애들 모두에 압도되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5.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원인과 어떤 조건 때문에 알고 봅니까? 어떻게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봅니까?”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그는 마음 챙김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다시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법의 간택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그는 법의 간택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다시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그는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다시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그는 희멸의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다시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편안함(고요함)의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그는 고요함의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다시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그는 삼매의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다시 왕자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사라짐을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그는 평정의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왕자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는 알고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원인과 조건과 더불어 알고 본다.”
6. “세존이시여, 그러면 이 법문은 무엇이라 부릅니까?”
“왕자여 ‘깨달음의 요소’라 부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요소입니다. 선서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요소입니다.
세존이시여, 각각 하나씩의 깨달음의 요소만 갖추어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인데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 모두를 갖추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독수리봉산에 올라오느라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했는데 이제 다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법을 관통했습니다.”
제6장 담론 품이 끝났다. 여섯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자양분 ② 방법 ③ 불 ④ 자애가 함께함 ⑤ 상가라와 ⑥ 아바야 – 이러한 여섯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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