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어떤 경전인가(上)
종범 스님
불교 경전이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 45년간 사람들에게 베푸신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엮은 것을 말합니다.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소질과 성향에 맞게 불교의 진리를 설해주는 것입니다. 경전은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의 부처님 제자의 설법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금강경』
『금강경(金剛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줄여서 표현한 말입니다. 『금강경』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수지 독송한다는 점입니다. 『화엄경』이나 『법구경』보다 많이 읽는데, 그러면서도 경전 내용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즉 『금강경』은 한국불교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어려워하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많은 경전이 우리나라로 유입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은 우리나라의 삼대 경전입니다. 흔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화엄경』이 대략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고, 또 『법화경』 역시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실천에 옮기기 어려워서 그렇지 경전 내용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경우는 드물죠. 그런데 『금강경』은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금강경』은 무엇일까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고, 생각하는 사람마다 달라서, 경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화엄경』이나 『법화경』보다 『금강경』을 더 즐겨 읽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수행하는 데 『금강경』이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마음을 닦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달마 선종, 즉 선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수행의 원전인 『금강경』이 수행의 지침서로서 독송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이 수행의 방편으로 독송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공덕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금강경』을 읽으면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금강경』의 「사구게」만 독송을 해도 그 영험과 효험이 한량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덕을 위한 방편으로 독송을 많이 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도재를 지낼 때 의식 독송으로도 많이 활용됩니다. 의식을 봉행할 때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극락세계를 기원하면서도 경을 읽을 때는 『금강경』을 읽습니다. 바로 천도의식 독송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은 업장소멸은 물론이고 소원성취를 위한 공덕독송, 천도의식을 위한 의식독송, 마음을 닦아 가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을 막상 이해하려고 하면 무슨 뜻인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살펴보면, 『금강경』의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불설 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 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卽非般若波羅蜜是名般若波羅蜜)”
이 말은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즉 반야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뜻이죠.
그런가 하면 “여래설 세계 비세계 시명세계(如來說世界非世界是名世界)”라고 합니다. 즉 “여래는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라 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거든요. ○○이 곧 ○○이 아니고 이름이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니라는 말은 무엇이고, 이름이라는 말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따라서 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의 대표 격이 바로 『금강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해석 자체가 어려운 아주 특이한 경전이지만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알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매력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금강경』의 두 가지 해석방법
『금강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는, 인도식으로 이해하는 방법과 중국식으로 이해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인도식으로 『금강경』을 해석할 때 세친 보살과 무착 보살이 지어 놓은 금강경 논(論)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 세친론과 무착론을 가지고 중국의 주공정밀 선사라는 분이 그 두 가지 논의 요점을 엮어서 해석한 『금강경 찬요』를 지었습니다. 이 세 가지 주석서가 인도식으로 『금강경』을 살펴보기 위한 원본입니다. 즉 『금강경』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질 때 세친 보살의 『금강반야론』, 무착 보살의 『금강반야론』, 주공 스님의 『금강경 찬요』를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한편 중국의 많은 스님들이 『금강경』을 해석했는데, 중국식으로 『금강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육조 스님의 『금강경 육조의 해(解)』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조 때 한글로 번역했는데 국문학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외 많은 분들이 『금강경』 주석을 달았어요. 우리나라 스님인 야부도천 선사가 게송으로서 『금강경』을 해석한 것이 있는데, 후대의 것으로 전형적인 중국식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중국사람들은 논리보다 직관을 중요시합니다. 한눈에 척 보고 알아서 생활 속에 응용하는 방식이 발달해 있어요. 하나하나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흥미가 없기 때문에 중국 풍토에서는 논리가 발달하기 어렵습니다. 불교학 중에 논리적인 생각에 의해서 모든 것이 펼쳐진다고 하는 유식학이 있는데, 중국 당나라 때 잠시 번역이 되고 성행했을 뿐 끝까지 발달하지 않고 결국 선(禪)으로 돌아갔어요. 즉 논리적 성격보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시적(게송)인 표현을 즐겨해 온 것이 전형적인 중국식입니다.
그렇게 시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금강경』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금강경』의 의미를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반야라고 하는 것이 『금강경』의 핵심인데 반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인도식이라고 한다면 중국식은 반야를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묘미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을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번뇌를 줄여 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번뇌가 줄어들면 청정심이 드러나는데, 이 청정심으로 자유자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인도식은 번뇌를 줄이는 데 집중되어 있고, 중국식은 청정심으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인도에서는 번뇌를 소멸하고 청정한 생각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으로 『금강경』은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무애라든지 자재라는 말이 발달해 있습니다. 무애하고 자재하게 되려면 번뇌망상을 소멸해야 가능하겠죠. 따라서 번뇌망상의 성격, 생기는 원인, 없애는 방법과 과정을 쭉 설명하는 것이 인도식에 가깝고, 번뇌망상이 없는 청정심이 어떤 성격이고, 그래서 청정심이 활동하는 자재로운 모습, 걸림이 없는 모습, 이런 것을 얘기하면 중국식이 되는 것이죠.
중국에서 발달한 것이 게송인데 게송은 주로 아름다운 얘기를 시로 읊지 복잡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게송으로 잘 읊지 않잖아요. 따라서 중국식은 반야의 무애하고 자재함을 주로 게송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반대로 번뇌망상에서 무애 자재함으로 가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은 인도식 표현입니다.
『금강경』 이야기 - 인도식 접근법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알려지고 근간이 된 것은 『금강경』의 어떤 모습일까요? 당연히 중국식 표현입니다. 그래서 방법이 잘못된 셈입니다. 인도식 표현을 철저하게 공부한 후에 그것을 응용해서 중국식으로 넘어와야 하는데, 처음부터 중국식으로 접근하면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금강경』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인도식으로 금강경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강경』에서 금강은 비유죠. 다이아몬드, 즉 반야를 비유한 말입니다. 반야는 곧 지혜이고, 반야바라밀경은 지혜로 활동하는, 지혜를 드러내는, 지혜로 생활하는 그런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삶입니다. 반야바라밀, 즉 지혜를 완전히 이루었을 때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 깨달음을 『금강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표현합니다. 『금강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그것은 훌륭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은 반야(般若)이고, 그 반야를 깨달았으니 보리인 것입니다. 지혜의 삶을 사는 것, 즉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반야바라밀이요, 자기 원력과 공덕을 통해 반야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래부터 갖고 있는 반야를 왜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번뇌망상 때문이겠죠. 『금강경』에서는 이 번뇌망상을 없애는 방편을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기심은 중심생인데, 그 중생의 마음이 번뇌망상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번뇌망상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표현합니다. 중생의 가장 큰 번뇌가 아상(我相)이죠. 나라는 생각입니다. 나라는 것은 탐욕의 원천입니다. 중생은 무한한 탐욕을 갖고 있는데 소유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특히 남자의 경우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고 합니다. 선거철이면 자신을 찍어 달라고 하는데 결국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죠. 이처럼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이에요. 아주 어린 꼬마에게도 최고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어리석고 유치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큰 욕구입니다.
한편 상대방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도 크죠. 어떤 사람이 어릴 때 어머니가 결핵을 앓아서 감염될까봐 고개를 돌리고 젖을 먹였답니다.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어머니가 자기가 싫어서 외면하는 줄 알고 커서도 사람을 불신했다고 합니다. 누구를 봐도 믿지 못하는 거죠. 번뇌 역시 맹목적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번뇌망상은 항복해야 할 대상이지 인간이 위대하다고 해서 번뇌 자체를 위대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야, 그 지혜의 삶 자체를 칭송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번뇌는 항복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이것이 인도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그 첫째가 아상(我相)으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죠. 나 없는 탐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탐욕은 나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나와 관련 없는 일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인상(人相)은 화내는 마음입니다. 화내는 마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자기는 아무리 잘못했어도 잘했다고 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자기 맘에 들면 상대방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맘에 안 들면 상대방도 싫다고 합니다. 우리말에 ‘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에 “놈이 하니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놈은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죠. 그런데 오늘날 놈은 욕으로 쓰이잖아요. 언젠가 한번은 고등학교 시험문제에 “누구를 님이라 하고 누구를 놈이라 합니까?”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내 맘에 드는 사람은 님,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놈”이라고 답을 적었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바로 그 차이거든요. 남에게는 화를 내지만 자기에게는 관대합니다. 이처럼 인상은 내 맘에 안 드니까 화를 내는 것으로, 자신한테 화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는 것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나한테 적용하는 규칙과 남에게 적용하는 규칙이 달라요. 수자상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오래 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좋은 일도 그치면 미련이 없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죠. 오래 하면 할수록 더 하려고 하는 애착의 마음이 바로 수자상입니다. 이처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말하는 탐진치애는 모두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것, 즉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발심수행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발심, 수행, 항복기심
『금강경』은 발심에 대해서 묻고, 수행에 대해서 묻고, 항복기심에 대해서 묻습니다. 『금강경』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第二)」을 보면 세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먼저 운하주(云何住), 여기서 주는 머문다는 뜻으로 내가 어떤 마음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야 하는데, 그 마음을 내는 것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입니다. 여기서 발(發)은 마음을 일으킨다는 의미죠. 번뇌망상에 찌들어 있는 마음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 공덕이 되는 마음, 자애로운 마음을 뜻합니다.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고, 줄여서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즉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중생 스스로가 번뇌망상 속에서 한평생을 마칠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 같이 살다가 죽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발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의 반대가 중생심이죠. 중생심은 탐진치 삼독심을 의미합니다. 즉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뜻하는 중생심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보리심입니다.
그렇다면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을 『금강경』에서 묻고 있습니다. 즉 운하주 -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운하수(云何修) - 어떻게 닦아야 하며, 항복기심 - 중생의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켜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금강경』 자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항복기심이죠. 중생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겁니다. 흔히 항복이라고 하면 상대편을 무찔러 없애는 것이죠. 그런데 중생심을 항복시킨다는 것은 없애는 것은 똑같은데 마음이라는 건 형태가 없기 때문에 무찌를 것도, 버릴 것도 없어요. 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휴망상(休妄想)이라고 합니다. 망상을 쉬는 것이 곧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항복기심입니다. 다시 말해 쓸데없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화를 내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중생심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불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바로 성불이니까 너무 쉽죠. 그래서 불교가 오묘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중생의 업습(業習)이 있어서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중생심을 일으키던 습관 때문에 아무리 일으키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뿐이지 곧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심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좀처럼 힘든 경우에는 반대로 청정심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발심(發心)입니다. 번뇌가 계속해서 일어나니까 그 번뇌를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공덕을 닦는 것, 이것이 곧 발심수행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항복기심이 곧 발심수행인 것입니다.
-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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