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반야심경은 어떤 경전인가(上) / 종범 스님

수선님 2017. 10. 29. 15:10

반야심경은 어떤 경전인가(上)

 

 

종범 스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 때에 오온이 다 공한 것을 체험하시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최대의 기쁨을 이루시었습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입니다. 수상행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제법의 공한 형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줄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이런 까닭에 공에는 색이 없으며, 수상행식이 없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공에는)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 없으며, (공에는)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생각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모든 존재(法境)가 없습니다.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無眼界乃至 無意識界

안식계에서부터 의식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없는 것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이 없으며, 무명이 다 없어진 것도 없으며, 그뿐 아니라 노사가 없으며 노사가 없으며 노사가 다 없어진 것도 또한 없습니다.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고, 집, 멸, 도가 없습니다.

 

무지역무득

無智亦無得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습니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괘애 무괘애고 무유공포 원리전 도몽상 구경열반

以無所得故 菩提薩타 依般若波羅蜜多 苦心無쾌碍 無쾌碍故 無有恐怖 遠離顚 到夢想 究竟涅槃

존재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집착을 다 버리고 가장 높은 열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 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 羅三먁三菩提

삼세 제불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셨기 때문에 최고의 정각을 이루시었습니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이며, 대명주이며, 무상주이며, 무등등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합니다. 진실하여 헛됨이 없습니다.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 娑婆訶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합니다. 곧 주문을 설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우리나라의 불교 행사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 중 하나가 바로 『반야심경(般若心經)』입니다. 『반야심경』은 불교를 처음 접하거나 사찰을 처음 찾았을 때 가장 처음 읽게 되는 경전이며, 신행생활을 하는 동안 늘 독송하고 그 뜻을 음미하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이 불자들의 신행 생활 근간을 이루는 이유는 위대한 지혜로 저 언덕(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해 주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반야 중도(中道) 해탈’의 세계를 말씀하신 『반야심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대장경에 보면, 『반야심경』은 일곱 가지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봉독되는 경은 현장 스님의 번역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것을 가장 많이 독송해 왔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현장 스님의 번역본을 가지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경의 제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본래 현장 역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이었습니다만 중간에 봉독되면서 경 제목의 처음에 ‘마하’ 두 자를 더 붙여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열 자의 제목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부터 설명하겠습니다.

 

 

(1) 마하

 

마하(Maha-, 摩訶)는 범어로 크다(大)는 뜻입니다. 마하의 크다는 뜻은 그냥 단순히 크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한 의미로서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적인 의미로서 크다는 것이며, 영원한 의미로서 큰 실상이 바로 ‘마하’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의미를 마하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2) 반야

 

반야(prajna-)는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속적인 지혜가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야를 최상의 지혜(最上智)라 하며 가장 완전한 지혜라고도 합니다.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진리를 체험한 진실한 지혜를 반야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야는 ‘해탈’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지혜입니다. 그리하여 반야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은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 반야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반야는 그대로 생명의 실상을 체험한 지혜이며,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야의 광명이 나타났을 때 인간의 온갖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뇌는 이 반야가 완전히 구현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리하여 반야에 대해서는 그 가치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3) 바라밀다

 

바라밀다(paramita-, 波羅蜜多)는 피안의 세계에 간다(到彼岸)는 뜻입니다. 해탈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말이며 극락의 세계에 친히 도달한다는 뜻이 바라밀입니다. 이것을 조금 깊이 해석하면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며 무엇이든지 새롭게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심경(心經)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줄여서 말할 때 『반야심경』이라 하고 더 간단히 말하면 ‘심경’이라 합니다. 여기에 쓰인 ‘심(心)’자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심장(心臟)의 뜻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의 핵심(核心)적인 경전이 『반야심경』’이라는 것입니다.

 

경(經)이란 범어의 수트라(sutra)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다 경이라 합니다.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이란 열 자의 제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야’입니다. 다른 말은 다 반야를 수식하는 말이고 반야의 역할과 공덕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반야이고 마하와 바라밀다(여기서 ‘다’는 의미에 해당, 보통 어미의 ‘다’를 생략하고 ‘바라밀’로만 쓰는 경우가 많음)는 반야에 대한 서술어입니다.

 

반야는 크고 깊고 영원하고 빛나고 우렁찬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는 바로 진리요, 지혜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예로부터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라 했습니다.

 

반야는 근본 마음, 밝은 마음, 항상스러운 마음,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는 마음입니다. 반야는 곧 청정심(淸淨心)이고 해탈심(解脫心)이고 본래심(本來心)입니다. 이러한 반야는 모든 공덕을 성취해 나가고 일체의 일을 다 이루어 가고 있으며 중생을 기쁘게 하고 부처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이렇게 한없는 공덕을 쌓아 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라밀이라 합니다. 바라밀이란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장소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어두운 자기 자신이 밝아지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이리하여 달라지고 변하고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다 바라밀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없이 크고 밝은 마음으로 해탈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의 지혜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는 늘 새로운 정신입니다. 반야는 창조의 정신입니다. ‘새로운’이란 창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갈 때 진정한 바라밀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될 때 대승불교의 최상의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창조적 행위가 없는 해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정신에 의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기 위하여 『반야심경』을 깊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강술

 

 

(1)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 때에 오온이 다 공한 것을 체험하시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최대의 기쁨을 이루시었습니다.

 

 

『반야심경』의 일곱 가지 번역 중에는 간략한 번역이 있는가 하면 앞뒤의 체제를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된 번역도 있습니다. 간략한 『반야심경』을 약본(略本)이라 하고, 구체적으로 된 『반야심경』을 광본(廣本)이라 합니다. 그런데 광본에는 서론, 본론, 결론이 다 갖추어졌으나 약본은 서론과 결론이 생략되고 본론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반야심경』은 약본입니다. 그러므로 서론이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이십니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심경』의 설법주(說法主)이십니다. 설법주란 『반야심경』이 관세음보살에 의해서 설해졌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하신 경전입니다. 대승경전은 이러한 격식으로 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에 의한 바라밀행을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자비행입니다. 자비는 반야에서 나옵니다. 반야의 힘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본 실상을 확실히 보았을 때 자비의 실행이 왕성하게 실천됩니다. 자비가 없는 반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반야심경』의 관세음보살에게서도 확연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실행하실 때에 인간의 근본을 확실히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견 오온개공’입니다. 반야는 조견의 능력이 있습니다. 조견하는 능력에 따라 참된 것과 헛된 것을 구별합니다. 이에 따라서 창조적 보살행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조견은 인식입니다. 반야는 참다운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확실한 인식에 의하여 용기와 행위가 일어납니다. 인식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은 알고 있으나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반야는 아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지식이 과거적이라면 인식은 현재적입니다. 인식의 모체가 되는 반야는 항상 현재 속에 있습니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보고 현재 속에서 미래를 판단합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반야는 삼세(과거, 현재, 미래)를 통괄하는 인식입니다.

 

이러한 인식에는 미심쩍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이에 망설임이 없고 주저함이 없습니다. 반야에는 일절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란 모르는 데서 생겨나는 망상(妄想)입니다. 이 공포의 망상은 인간의 힘을 여지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바보가 됩니다.

 

그러나 반야로서 사실 존재에 대하여 철저히 인식하면 용기 있는 실천으로 일관됩니다. 바로 부처님이 그러하시며, 관세음보살이 그러합니다.

 

이에 『반야심경』에는 ‘인식’의 문제를 ‘오온개공’으로 체험했고, ‘실천’의 문제를 ‘도일체고액’으로 전개합니다.

 

오온(五蘊)이란 인간을 말하는 것이며 개공(皆空)은 우주의 정대 평등을 의미합니다. 이 평등의 세계를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야의 체험에 의하여 끝없는 자비행이 전개됩니다. 이것이 모든 고통을 없애는 일입니다(度一切苦厄). 반야의 확실한 인식에 의하여 자신의 고통은 일시에 없어졌으며, 모든 중생의 고통을 자기화시켜서 노력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러한 분이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러한 보살이십니다.

 

그런데 경전 구성상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반야심경』의 설법주는 관세음보살이신데 어찌하여 관세음보살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반야심경』을 관세음보살이 말씀했다면 관세음보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관세음보살의 말씀이 아닙니다. ‘관자재보살’로부터 ‘도일체고액’까지의 경문은 아난(阿難) 존자께서 관세음보살에 대하여 소개한 말씀입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사리불(舍利弗)을 향하여 『반야심경』을 설하고자 하실 때에 아난 존자는 관세음보살을 위와 같이 소개한 것입니다. 사리자에서부터는 관세음보살의 설법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반야공이언등(般若共利言等)』의 번역본에 의하여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입니다. 수상행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색이란 인간의 육체를 뜻합니다. 색이 바로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색은 인간의 육체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물질입니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사대(四大)라 했습니다. 즉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입니다. 이것이 어디든지 다 있다 하여 4대라 했습니다. 여기서 허공을 포함해서 5대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색이란, 색깔과 부피와 무게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는 감정의 느낌이며, 상은 상상(想像), 공상(空想)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행은 행동(行動), 동작(動作)입니다. 그리고 식은 종합적인 인식(認識)을 말합니다. 이에 수, 상, 행, 식은 모두 정신 작용입니다. 그리하여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은 육체와 정신을 통칭하는 것으로 인간을 의미합니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5온으로 본 것입니다. 보통 영혼이니 생각이니 말합니다만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수상행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수상행식의 작용은 항상 복잡하고 민활하게 돌아갑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사고자 하는 물건을 고르다 보면 ‘좋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동시에 상상을 합니다. 이것을 사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다음에는 직접 돈을 치르고 물건을 삽니다. 이것이 행입니다. 이에 식이란 이 물건에 대하여 세밀히 관찰하고 구상하고 용도에 알맞게 배치하는 것입니다. 이 수상행식의 작용은 항상 이렇게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설사 육체가 잠이 든다 하더라도 행식의 작용은 꿈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몸이 죽는다 하더라도 행식의 작용은 계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輪廻)입니다.

 

다음은 공에 대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공(空)이란 범어의 슈냐타(su-nyata)로서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입니다. 공이란 어떤 단순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현상과 없는 형상을 모두 포함했으면서도 이러한 유와 무의 세계를 초월한 내용이 ‘공’입니다. 공이란 절대로 단순한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완전한 허무(虛無)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실존(實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무와 실존은 중생의 수상행식의 착각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는 오직 ‘공’ 그것일 뿐입니다.

 

공에는 ‘있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에는 ‘없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무를 초월한 그 공의 실상(實相)의 존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 점은 『반야심경』의 다음 구절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공이며 공이 색이다. 수상행식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수상행식과 다르지 않다. 수상행식이 공이며, 공이 수상행식이다.”

이러한 말씀은 바로 공의 본질(空性)을 천명한 것입니다. 공의 본질은 바로 5온(색수상행식)이요, 5온의 본질은 공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의 본질은 공입니다. 우리 몸의 본질은 공입니다. 모든 물질의 본질은 공입니다. 감정의 본질은 공입니다. 상상의 본질. 행동의 본질. 인식의 본질은 공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본질은 공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존재도 본질에 있어서는 다 공입니다.

 

그러면 공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공의 본질은 색입니다. 공의 본질은 우리의 육체입니다. 공의 본질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입니다. 공의 본질은 수상행식입니다. 공의 본질은 우리의 정신입니다. 공의 본질은 이 세상의 모든 사상 체계입니다.

 

세상은 그대로 공이요, 공은 그대로 세상입니다. 모든 존재는 바로 ‘공’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밝히고 있는 공의 본질입니다.

 

 

(3)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제법의 공한 형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대목은 공의 형태(空相)를 밝히는 구절입니다. 앞의 문절에서는 공의 본질을 천명한 데 이어 지금의 대목에 와서는 공의 형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은 어떠한 모양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제법이 공이라면 공은 생김새가 어떠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제법이란 색수상행식 오온을 말합니다. 5온이 다 공한 모양에 대해서는 『반야심경』에서 6상(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불생상 ② 불멸상입니다. 공의 형태는 불생불멸의 형태입니다. 공에는 태어나는 본질이 없고 없어지는 본질이 없습니다. 공에는 있는 본질도 없고, 없는 본질도 없습니다. 유와 무를 초월했습니다. 오로지 불생불멸의 중도상(中道相)일 뿐입니다. 공은 유무를 초월한 진실상(眞實相)일 뿐입니다. 진실상이기에 공에는 공상이 없습니다. 공상이 없기에 불생상입니다. 공에는 없지만 없는 모습이 없습니다. 이것이 불멸상입니다. 있는 본질도 없고 없는 본질도 없습니다. 없지 않은 본질도 또한 없습니다. 그대로 불생불멸상일 따름입니다(無相無空無不空 卽是如來眞實相).

 

③ 불구상 ④ 부정상이 공상입니다. 공의 얼굴에는 더러운 모습이 없고, 깨끗한 모습도 없습니다. 더러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더러운 것으로 잘못 보았을 뿐입니다. 깨끗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깨끗한 것으로 잘못 보았을 뿐입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생의 수상행식의 착각에 의해서만 더럽고 깨끗한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⑤ 부증상 ⑥ 불감상입니다. 불어나는 것과 줄어드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증불감일 따름입니다. 커지는 듯하다 작아지며, 작아지는 듯 보이다 커지는 현상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의 허망한 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큰 것에 큰 본질이 없고 작은 것에 작은 본질이 없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증불감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공상입니다. 공상은 생사를 초월했고 유무를 초월했습니다. 시비(是非)와 애증(愛憎)을 다 초월했고 유무를 초월했습니다. 진리(正法) 그 자체로서 진실상 중도상일 뿐입니다. 공상을 감정적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상은 생각되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보여지는 내용입니다. 반야에 의해서 공상은 보여집니다.

 

반야는 공상 그 자체입니다(實相般若). 그러므로 제석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제법이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평등하고 진리가 불생불멸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불생불멸이라 했습니다. 공은 중도(中道)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도 중도입니다. 이에 중생의 망상은 공연한 망상일 뿐입니다. 공의 중도상은 망상에 의해서 인식되어지지 않습니다.

 

‘공’은 망상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오직 반야의 정관(正觀)에 의해서만 공이 보입니다. 반야는 곧 공입니다. 수상행식이 반야의 눈을 뜰 때 반야는 곧 공입니다. 그대로 불생불멸의 광명입니다.

 

 

(4) 시고공중무색(是故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이런 까닭에 공에는 색이 없으며, 수상행식이 없습니다.

 

 

공중(空中)에는 5온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온은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공이란 뜻입니다. 공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재는 불생불멸의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의 ‘5온개공과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은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입니다. 5온의 본질은 공입니다. 공상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리하여 공중에는 색수상행식이 없습니다. 자아(自我)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론입니다.

 

그러나 공의 본질은 곧 색입니다(空卽是色). 공의 본질로서의 수상행식은 동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소멸되어도 행식의 동작은 중지되지 않습니다. 행은 곧 업(동작, 활동)입니다. 그리하여 행식은 업식(業識)이란 말로 많이 표현합니다. 공의 본질로서의 업식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육체가 소멸되어도 또 다른 육체를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론(輪廻論)입니다.

 

이리하여 불교는 무아론과 윤회론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이런 까닭에 불교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러한 것뿐입니다. 공은 불생불멸이기에 분명히 무아이나 업식의 작용은 또한 계속되어서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론과 윤회론인 것입니다. 분명히 무아(無我)이고 분명히 윤회(輪廻)입니다. 틀림없이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입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이면서 능생능멸(能生能滅)인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불생불멸이면 어째서 능생능멸이며, 무아이면 어째서 윤회가 있단 말입니까. 중생의 업식(業識)작용이 계속되니까 불생불멸 속에서 생멸이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실상에는 무아요 불생불멸이란 것입니다.

 

 

-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문화 -

출처 : 행불
글쓴이 : 무진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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