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대념처경

수선님 2018. 4. 29. 12:40

대승 공부하신 분들은

대념처경 처음 이신분들도 많이 있죠

잘보세요 어떻게 수행하나 보시면 됩니다

 

 

대 념 처 경

글 의 순 서

 

 

첫 번째 마당 - 들어가는 글

1) 대념처경이 지니는 위치

 

두 번째 마당 - 주제들의 모음부분

1)대념처경에 대한 찬탄

2) 알아차림의 갈래

3)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방법

 

세 번째마당 - 자세하게 펼침

1)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에 대한 자세한 해설

2) 알아차리는 공부의 목적 - 탐욕과 성냄을 없앰

3) 바르지 못한 알아차리는 공부 - 생각을 막는 것

4) 마음이 생각을 하는 모습

5) 거룩한 진리의 사라짐

 

네 번째 마당 -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방법

1) 오늘날 호흡수행을 하는 모습

2) 일상생활속의 호흡

3)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공부

4) 숨은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다섯 번째마당 - 공부를 마치며

 

 

 

 

첫 째 마당 - 들어가는 글

 

1)대념처경이 지니는 위치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네 개의 경을 공부하기로 했었죠.

앞에서 세 개의 경을 공부했고, 이제 마지막 경을 공부하도록 하죠.

이 경의 이름은대념처경입니다.

이 경은중부니까야에 들어있는데, 주석서는 이 경을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큰 도시에서 설했다고 합니다.

이 경을 공부하기에 앞서 먼저 이 경의 지닌 위치를 좀 살펴보죠.

많은 불교도들이 이 경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는 절 이름이나 선원 이름으로도 심심찮게 쓰고 있습니다.

또한대념처경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지요. 미얀마가 독립을 한 뒤부터 이대념처경은 널리 퍼졌고, 외진 마을에서도 이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불교도들이 수행에 힘쓴다고 할 때 이대념처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념처경의 가르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죠.

대념처경을 바탕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 수행이 굉장히 좋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 좋지 않다고 하기도 합니다. 드물지만 아주 안 좋은 경우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추리면 많은 불교도들이 이대념처경을 바탕으로 수행을 하고, 또한 이 수행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가장 중요한 네 가지 경전을 공부하기 했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은 이론에 관한 경 두 가지와 수행에 관한 경 하나였고, 이 경은 수행에 관해 공부해야 할 마지막 경입니다.

지금부터 이대념처경을 함께 공부해볼까요?

이 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수행에 관한 네 가지 주제들을 간략하게 펼쳤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네 가지 주제들을 다시 자세하게 펼쳤습니다.

 

 

둘 째 마당 - 주제들의 모음부분

 

1) 대념처경에 대한 찬탄

 

첫 번째 간략하게 펼친 부분은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정말 짧고 간결합니다.

첫 째 갈래는 이 알아차리는(sati)공부를 해서 얻는 이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경에 대한 찬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알아차리는 공부의 종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간략하게 펼친 부분에는 이 세 가지뿐이죠.

처음에 나오는 경에 대한 찬탄에서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으면 얻게 될 이익을 보여줍니다.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깨끗하게 하고, 근심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몸과 마음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오직 하나 뿐인 길이니...,”

 

 

알아차리는 공부는 첫째, 사람을 올바르게 합니다.

둘째, 근심과 비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셋째,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넷째, 지혜를 얻게 합니다.

다섯째, 모든 갈애가 사라진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이 수행을 통해 얻는 다섯 가지 이익에 대해서는 그리 특별하게 설명할 말은 없습니다. 단지 이 수행을 하면 이러한 다섯 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붓다 스스로 천명했으니 이 다섯 가지 이익이 필요한 사람들은 이 수행을 할 뿐이죠.

 

2)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

 

두 번째로 붓다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네 갈래로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네 갈래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신념처(kāyānūpassanā satipatthāna)

둘째 수념처(vedanānūpassanā satipatthāna)

셋째 심념처(cittānūpassanā satipatthāna)

넷째 법념처(dhammānūpassanā satipatthāna)

신념처는 몸을 계속 살피면서 알아차리는 공부이고, 수념처는 느낌을 대상으로, 심념처는 마음을 대상으로, 법념처는 법을 대상으로 살피면서 알아차리는 공부입니다.

 

3)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방법

 

세 번째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방법입니다.

satipatthāna(사띠빳타나)는 알아차림을 앞세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말로 하면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것이죠.

사띠 빠타나(satipatthāna)의 뜻

 

미얀마에 있는 한국 수행자들은 빨리어 원어를 그대로 사용해

사띠를 챙긴다고 표현하고 있죠.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띠 빳타나(satipatthāna)가 지니고 있는 뜻입니다.

사띠 빳타나는 satipatthāna가 합해져 생긴 말입니다.

사띠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빳타나의 뜻입니다. 보통 아비담마에서는 이 빳타나의 뜻을 두 가지로 옮기는데 하나는출발, 시작, 개시, 근원이라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돌봄, 시중듦, 확립의 뜻입니다.

그러나 보통 빳타나의 뜻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장소, 확립하다, 앞장서다가 그것이죠.

이 세 가지 뜻에 따라 사띠빳타나를 옮겨 보면

첫째는사띠를 두는 네 가지 장소, 둘째는사띠의 확립으로, 셋째는사띠가 앞장서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첫 번째장소의 뜻을 취해念處를 사띠를 두는 네 가지 장소로 옮기고 있죠.

두 번째 사띠의 확립이라는 것은, , , 이라는 네 가지 사띠의 대상에 강하게 밀착한다는 뜻에서확립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빳타나는 마지막 세 번째 뜻인앞장서다로 보는 것이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앞장선다는 것은 뒤따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겠죠?

이것은 뒤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방법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바른 힘씀과 지혜가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앞장선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뒤에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 다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앞으로는사띠빳타나의 뜻을사띠가 앞장서다라는 뜻

으로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이 경을 공부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주의 깊게 알아차린다.’는 말에서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을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했죠.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비구는 몸에서 몸을 계속해서 지켜보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지혜를 갖추고 알아차림을 구족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과 분노를 없애면서 살아간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할 때 꼭 주의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에서 몸을 계속 지켜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힘씀과 지혜, 알아차림으로 없애는 것입니다.

신념처는 빨리어 kāyānūpassanā satipatthāna(까야누빠사나 사띠빳타나)옮긴 말입니다. 여기서 kāyānūpassanā(까야누빠사나)는 몸을 계속 지켜본다는 뜻이고 satipatthāna(사띠빳타나)는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아차려야 하는 까닭입니다.

왜 알아차려야 할까요?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분노를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신념처는 몸을 계속 살피면서 몸에 대해서 일어나는 욕심과 분노를 없애기 위해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수념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계속 살피면서 그 느낌에 대해서 일어나는 욕심과 분노를 없애기 위하여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를 쓰면서 닦는 것이죠.

심념처와 법념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낱말들이 있습니다. 바로 욕심과 성냄, 그리고 세상이라는 낱말이죠.

먼저 욕심과 성냄이 지닌 뜻을 알아볼까요?

욕심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마음으로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는 상태로 말할 수 있죠. ‘성냄이라는 것은 와 같은 뜻으로 마음으로 만족스럽지 않거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결국 욕심과 성냄은 마음이 간절히 바라는 것과 싫어하고 화를 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욕심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소유한 대상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고 성냄은 그것을 파괴하거나 없애고 싶은 마음입니다.

욕심과 성냄은 사람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이로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없애야 할 것들이겠죠?

알아차리는 공부는 이 욕심과 성냄을 없애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하나로는 그 욕심과 성냄을 없앨 수 없습니다.

알아차림과 더불어 힘씀과 지혜가 뒤따라야 하죠.

그렇다면 알아차림의 뒤를 따르는 힘씀과 지혜는 어떤 일을 할까요?

없애는 일을 하겠죠. 욕심과 성냄이라고 하는 마음이 갈망하고 화를 내는 것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욕심과 성냄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바로 세상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입니다.

그럼 여기서 세상이라는 낱말이 지닌 바른 뜻을 살펴볼까요?

세상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상은 빨리어 Loka(로까)를 옮긴 말인데 보통 생겨났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Loka라고 정의합니다.

붓다가 말하는 세상은 단순히 바깥에 있는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에 물든 무더기, 곧 오취온을 뜻합니다.(근거 자료 좀 있나요?)

오취온이 어디에서 생길까요?

, 느낌, 마음, 이 네 군데 중 어느 한 곳에서 생기겠죠.

그래서

더러움에 물든 몸을 몸의 세상,

더러움에 물든 느낌을 느낌의 세상,

더러움에 물든 마음을 마음의 세상,

더러움에 물든 법을 법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아리아에서의 뜻은?)

몸의 세상이라고 하는 더러움에 물든 몸이 어떤 것인가 한 번 살펴볼까요?

이라는 것은 몸을 이루는 각 부분들과 그 각 부분들의 움직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죠.

오취온에 해당하는 더러움에 물든 몸과 오취온에 해당하지 않는 몸입니다.

오취온에 해당하는 몸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기에 관한 가르침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십이연기에는 몸과 관련된 갈래가 여러 개(명색에서 색, 육입?)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취온에 해당하는 몸입니다.

오취온에 해당하는 몸과 마찬가지로 오취온에 해당하는 느낌과 마음, 법도 십이연기와 관련된 느낌, 마음, 법으로 알아야 하겠죠.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에서 몸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몸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느낌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마음에서 마음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에서 법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법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를 삶속에서 닦는 방법입니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할 때 알아차리는 대상인 , , , 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에 대한 일관성 검토)

 

앞서 오온에 대해서 공부했었죠? 이것을 네 가지

알아차림의 대상과 연결 지어 복습해 보도록 하죠.

테라와다 불교

오온 (五蘊)

옮긴 말

사념처

28가지 물질

색온 (色蘊)

(물질)

()

52가지 심소

수온 (受蘊)

느낌

정신의 중요한

네 가지 기능

(느낌)

상온 (想蘊)

기억

(?)

행온 (行蘊)

생각

89가지 마음

식온 (識薀)

(마음)

 

 

그 알아차리는 대상과 관련이 있는 욕심과 성냄을 없애기 위해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알아야 하겠죠.

첫 번째 알아차림은 그 욕심과 성냄이 일어날 때 그것에 주위를 기울이고 알아차리는 일을 합니다. 욕심과 성냄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죠.

두 번째 힘씀은 그것을 없애는 일을 합니다.

세 번째 지혜 바름과 그름을 구분하는 일도 하고 다시 욕심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도 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가 하는 일입니다.

잠깐힘씀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검토해 주세요)

힘씀은위리야(viriya)’를 옮긴 것인데 앞서 공부한 것과 같이

이것은 다음 네 가지 말고는 없습니다.

이미 생긴 잘못은 고치도록 합니다.

아직 생기지 않은 잘못은 계속 생기지 않게 합니다.

아직 생기지 않은 바름은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 생긴 바름은 더욱 튼튼하게 해야 압니다.

 

 

알아차림세상이라고 표현하는 더러움에 물든 무더기, 곧 오취온에서 생기는 욕심과 성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것의 전체적인 상태를 알아차리는 일을 합니다.

알아차림이 그것을 알아차리면 힘씀이 그 욕심과 성냄을 없애는데 힘을 쏟아 붓는 것이죠.

비록 욕심과 성냄이 없어졌지만 뿌리 채 뽑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지혜가 자세히 살펴 이 욕심과 성냄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합니다.

전쟁을 하는 군대로 보기를 든다면 알아차림은 초병이나 정찰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씀은 전투병이라 할 수 있죠. 지혜는 장군입니다.

그들은 욕심과 성냄이라고 하는 적군을 공격합니다. 이렇게 공격할 때 정찰병이 맨 선두에서 적진의 상황을 살피는 것처럼 알아차림이 앞장서기 때문에 싸띠빳타나라고 하는 것이죠.

대념처경에서 첫 번째 간략하게 펼친 부분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로까에 대한 정확한 뜻을 담고 있는

중요한 경이 있습니다. 잠시 살펴볼까요?

 

LOKA (세 상)

비구들이여! 세간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말하리라.

이것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세간의 일어남이란 무엇인가?

눈과 대상()을 기대어 보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것이 부딪침()이다.

부딪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이라는 조건 때문에 목마름(갈애)이 생기고,

목마름(갈애)이라는 조건 때문에 붙잡음(취착)이 생기고,

붙잡음(취착)이라는 조건 때문에

(다시 새로운 어리석은) 행위()가 생기고.

행위라는 조건 때문에 태어남이 생긴다.

태어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늙음과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불쾌감, 절망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것의 세간의 일어남이다.

 

귀와 소리를()을 기대어 듣는 마음이,

코와 냄새()를 기대어 냄새 맡는 마음(비식),

혀와 맛을 기대어 맛을 아는 마음이,

몸과 촉감을 기대어 촉감을 아는 마음이,

마음과 생각꺼리()를 기대어 생각하는 마음(의식)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것이 부딪침()이다.

부딪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이라는 조건 때문에 목마름(갈애)가 생기고,

목마름(갈애)이라는 조건 때문에 붙잡음(취착)이 생기고,

붙잡음(취착)이라는 조건 때문에

(다시 새로운 어리석은) 행위()가 생기고.

행위라는 조건 때문에 태어남이 생긴다.

태어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늙음과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불쾌감, 절망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것의 세간의 일어남이다.

 

비구들이여!

세간의 사라짐이란 무엇인가?

눈과 대상()을 기대어 보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것이 부딪침()이다.

부딪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이라는 조건 때문에 목마름(갈애)이 생겨난다,

목마름(갈애)이 남김없이 없어져 사라지기 때문에

붙잡음(취착)이 사라지고,

붙잡음(취착)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어리석은) 행위()가 사라지고.

행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사라진다.

태어남이 사라지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불쾌감, 절망이 사라진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의 세간의 사라짐이다.

 

귀와 소리를()을 기대어 듣는 마음이,

코와 냄새()를 기대어 냄새 맡는 마음(비식),

혀와 맛을 기대어 맛을 아는 마음이,

몸과 촉감을 기대어 촉감을 아는 마음이,

마음과 생각꺼리()를 기대어 생각하는 마음(의식)이 생겨난다.

 

부딪침()이라는 조건 때문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이라는 조건 때문에 목마름(갈애)이 생겨난다,

목마름(갈애)이 남김없이 없어져 사라지기 때문에

붙잡음(취착)이 사라지고,

붙잡음(취착)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어리석은) 행위()가 사라지고.

행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사라진다.

태어남이 사라지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불쾌감, 절망이 사라진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의 세간의 사라짐이다.

여기서 잠시 살펴 볼 것이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의 관계입니다. 이 세가지는 서로 따로

떨어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받쳐주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앞장서지만 그것은 지혜가 받쳐줍니다. 힘씀은 알아차림의 뒤를 따르지만 그것은 다시 지혜를 키워가는 힘이 됩니다. 따라서 이 세가지는 서로 받쳐주고 도와주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힘씀(viriya)

로까(세상) 욕심

더러움에 물든 알아차림(sati)

몸과 마음 성냄

지혜(paññā)

 

 

 

 

셋째마당 - 자세하게 펼침

 

1)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대념처경에서 알아차리는 공부를 자세히 해설한 부분에서는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에 대해 하나씩 자세하게 갈래를 펼쳐 놓았습니다.

몸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신념처)는 열네 갈래로,

느낌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수념처)는 아홉 갈래로,

마음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심념처)는 열여섯 갈래로,

법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법념처)는 다섯 갈래로 자세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기존의대념처경에서는 44가지 명상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갈래들이 모두 붓다가 직접 말한 것이라

할 수 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러움에 물든 몸과 마음인

오취온과 관련이 없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디가니까야를 참고 하십시오!

 

 

네 가지 해체

명상주제

(, ka̅ya)

- 14가지

1) 들숨, 날숨

2) 네 가지 자세

3) 네 가지 분명하게 알아차림

4) 32가지 몸의 형태

5) 사대를 분석함

6)~ 14)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느낌(,

vedana̅)

- 9가지

1) 즐거운 느낌 2) 괴로운 느낌

3)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4)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 5)세속적인 괴로운 느낌

6)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7) 세속을 여읜 즐거운 느낌 8) 세속을 여읜 괴로운 느낌

9) 세속을 여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마음

(, citta)

- 16가지

1) 탐욕이 있는 마음 2) 탐욕이 없는 마음

3) 성냄이 있는 마음 4) 성냄이 없는 마음

5) 미혹이 있는 마음 6) 미혹이 없는 마음

7) 위축된 마음 8)산란한 마음

9) 고귀한 마음 10) 괴귀하지 않은 마음

11) 위가 남아있는 마음 12) 위가 없는 마음

13) 삼매에 든 마음 14)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

15) 해탈한 마음 16) 해탈하지 않은 마음

(,

dhamma)

- 5가지

1) 장애를 파악함

2) 무더기()를 파악함

3) 감각장소()를 파악함

4) 깨달음의 구성요소(覺支)를 파악함

5) 진리()를 파악함

 

 

몸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에서 열네 갈래는 호흡, 몸의 자세, 몸의 동작, 근본물질, 몸의 서른 두 부위, 아홉 가지 시체입니다.

느낌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에서 아홉 갈래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 않은 느낌과 그 밖의 다른 느낌들입니다.

마음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에서 열여섯 갈래는 탐욕이 있는 마음, 없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없는 마음을 비롯한 다른 마음들입니다.

법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에서 다섯 가지는 다섯 가지 장애, 다섯 가지 무더기, 열두 가지 조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 네 가지 거룩한 진리입니다.

2) 알아차리는 공부의 목적 - 탐욕과 성냄을 없앰

 

현재 남아있는대념처경에서는 이와 같이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에 대해 자세하게 펼쳐놓았습니다.

이것이 붓다가 설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정확하게 살펴본 뒤에 판단해야겠죠. 어떻게 살펴봐야 할까요?

붓다가 말한 중심내용과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견주어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대념처경과 관련해서 잘못된 견해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의 가장 큰 원인은 알아차리는 공부의 핵심을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알아차리는 공부를 마음이 관찰하는 대상인 몸, 느낌, 마음, 법에 묶어 두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그 관찰대상에 집중하면 알아차리는 공부를 잘 완성시킬 수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알아차리는 대상 네 가지가 그저 마음을 묶어두는 말뚝이라고 생각을 하고 다른 큰 뜻은 없다고 생각을 하죠.

미얀마에서 알아차리는 공부를 가르치는 큰 스님들이 수행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수행자들은 수행초기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왜 관찰해야 합니까?”

늘 숨이 들어오고 나가니 관찰하는 것이죠.”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을 하면 배가 불러오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관찰하고 꺼지기 때문에 사라진다고 관찰한다고 하죠.

그러니 들숨과 날숨,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해서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는 것밖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그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관찰 대상을 마음을 묶어두는 말뚝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관찰대상을 마음을 달아나지 않은 정도로만 이용을 하죠.

오늘날 불교도들은대념처경과 관련해서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 잘 모르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다가 잘못 전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알아차리는 공부는 마음을 한 대상에 묶어두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또한 주의 깊게 알아야 합니다.

관찰대상인 오취온은 , 내 것, 내 자신이라고 할 수 없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쓸모없는 것을 , 내 것, 내 자신이라고 붙잡는다면 분명 괴로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까닭은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 내 것, 내 자신인 아닌 오취온에 대해 , 내 것, 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 그래서 오취온을 기대어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을 없애기 위하여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를 두고 계속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취온인 , 느낌, 마음, 은 비록 나를 기대어 일어났지만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며, 바깥에서 들어온 쓸모없는 것일 뿐이며, 사람을 평화롭거나 행복하게 하지도 않고 오직 괴로움만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바깥에서 들어온 쓸모없는 것인 오취온과 관련된, 느낌, 마음, 법들은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 오취온인 몸, 느낌, 마음, 법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그것을 기대어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을 없애기 위해 알아차림을 앞세워 힘씀과 지혜가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바른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욕과 성냄도 고요히 가라앉고 오취온인 몸, 느낌, 마음, 법들도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것은 그저 앉아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3) 바르지 못한 알아차리는 공부 - 생각을 막는 것

 

청정도론을 쓴 상좌부불교 최고의 논사 붓다고사는 선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과 심소를 잘 두기 때문에 선정이라고 한다.”

지금 모두 그가 정의한 그대로 이해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선정에 대한 이 설명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색계선정과 무색계선정에서 말하는 선정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본다면 색계선정과 무색계선정은 참 잘못된 것입니다. 거룩한 진리가 지닌 바른 뜻을 잘 못 받아들이게 합니다.

붓다고사는 팔정도에 들어있는 선정을 색계선정, 무색계선정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잘못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대념처경을 주석하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공부에서 관찰대상에 사띠를 두는 것을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잘 머물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관찰대상을 그렇게 자세하게 나누어서 말할 필요가 없죠.

모든 대상이라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소를 멀리 달아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말뚝을 그냥 말뚝이라고 하면 되지 금말뚝, 은말뚝, 동말뚝, 나무말뚝 등으로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지도 않죠. 말뚝에 소를 묶어두는 것은 소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면 여러 가지로 대상을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그저 하나의 대상이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대념처경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관찰대상에서 마음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내용에 대한 자세한 근거는

말뚝 비유품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관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정상적으로 생각을 하지 못하게만 됩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은 결국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공부일 뿐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이익도 있고 손해도 있겠죠.

그렇다고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사람은 평화롭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바를 알아야만 하겠죠?

이것을 알기 위해서 바른 것은 무엇인지 바르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만 바름과 그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름과 그름을 알아야 하지 말아야 것은 피하고 해야 할 바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유와 평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있습니다.

생각이 지나쳐 실제 없는 것인데도 있는 것처럼,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생각을 한다면 착각이나 환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좋지 않은 것이죠.

그렇지만 이렇게 좋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해서 생각 전부를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팔이 조금 불편하고, 다리가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자른다면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죠.

인생의 행복은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겠죠.

그러니 생각이 지닌 허물을 보고, 그것이 지닌 좋은 점을 외면하고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멈추도록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 분명합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닙바나의 전형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닙바나는 정신과 물질의 소멸이다. 닙바나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건전한 정신 현상과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뿌리한 불건전한 정신현상 둘 다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생로병사를 야기하기 때문이다.”(근거)

그들은 둑카를 세간의 모든 마음, 모든 심소, 그리고 28가지 모든

물질로 보기 때문에 닙바나 또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닙바나가 꼭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정상정인생각이 없다면 사람은 사람노릇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팔정도를 닦는 것도바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올바르게 닦아나갈 수 없습니다.

 

 

 

4) 마음이 생각을 하는 모습

마음이 지닌 가장 큰 힘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로 사람이 직접 갈 수는 없습니다.

생각은 미칠 수 없는 과거와 미래까지도 이르게 합니다.

과거로 생각이 미칠 수 없다면 현재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부모를 비롯하여 잊어버려서도 안 되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겠죠.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 뜻도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미래도 마찬가지죠. 미래로 생각이 미칠 수 없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간은 물체와 물체의 변화를 기대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체와 물체의 변화 없이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홀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을 하며 공전을 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기고 계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일초, 일분, 한 시간, 한 달, 한 해를 나누어 놓은 것이죠.

좋음, 나쁨, 이익, 손해를 알기 위해서 시간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부분인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생각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또한 사람이 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알 수 있듯이 갈 수 없는 공간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안과 밖, 가깝고 먼 것은 공간을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사람이 안에 있지만 밖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오직 생각뿐입니다.

생각으로만 바깥에 있으면서 안을, 멀리 있으면서 가까운 곳을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것도 어느 한 공간에 있는 것을 기대어 다른 공간에 있는 것과 견주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좋고 나쁨 등을 알고 평화와 행복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죠.

공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공간은 시간과 물체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공간을 모아 알 수 없으면 대상에 대해 그 어떤 뜻도 알 수 없습니다.(?)

이 공간을 아는 것도 생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공간도 없는 것이 되겠죠.

상태(payoga)도 이와 마찬가지죠.

하찮음, 고귀함, 거침, 부드러움이것들을 아는 것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떨어져도 알 수 없죠.

그것은 더욱 좋은 상태와 비교해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더 좋은 것을 마음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고귀함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하찮음을 알아야만 고귀함이 더욱 좋다는 것을 알고 나아갈 수 있겠죠.

거침부드러움도 이와 마찬가지죠.

어떤 한 상태에 이르면 그 상태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 이르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이러한 앎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알지 못하고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와 행복을 위해 생각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뚜렷해집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고 큰 허물을 짓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대념처경을 바탕으로 알아차리는 공부와 관련해서 잘못된 견해를 벗어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알아차리는 공부가 사람을 평화와 행복으로 이끄는 대신에 감옥에 쳐 넣은 것이 되 버립니다.

 

5) 잃어버린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그릇된 곳으로 이끈다고 한다면 듣기에 거북할 것입니다.

듣기 거북할지 모르지만 거룩한 진리가 아닌 해체의 진리를 바탕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그릇된 곳으로 이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도 잘못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도 잘못된 것이 되어버릴 밖에요.

이것은 붓다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뒷날 제자들이 잘못 해설하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고사의 진리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붓다고사는 잘 아는 것처럼청정도론을 지은 사람입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붓다고사의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그를 추앙하고 있고, 그가 지은청정도론은 그들 말대로남방불교의 부동의 준거가 되고 있습니다.

붓다고사는 불교의 진리를 말할 때 불교에는 진제와 속제만 있고 세 번째 진리를 없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대로 불교의 진리를 말할 때 진속 이제 만을 생각하죠. 그들이 말하는 성제는 진제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제가 진제로 환원된 것이죠. 행위 중심의

성제는 사라졌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문헌 근거좀 찾아주세요.)

 

붓다는 행위를 바탕으로 한 거룩한 진리를 드러냈습니다.

주석서를 쓴 사람들이 거룩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해체의 진리를 바탕으로 받아들이고 해설한 것이죠.

뿌리가 되는 견해가 다르고, 그것을 바탕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해설했다면 붓다의 뜻이 왜곡되고 그 가르침을 해설한 이의 견해만이 드러나게 되겠죠.

해체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견해는 모든 것을 이루는 가장 근본이 되는 근본요소로 환원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정말 실재하는 것은 이 근본요소들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근본요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그 어떤 것도 정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죠. 그저 개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실재하지 않는데 마치 정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마술사가 만들어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죠.

근본요소가 모여 이루어진 생명체가 정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나아지거나 나빠지게 하는 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 갖다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겠죠.

근본요소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들은 나름의 모습을 갖고 활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때 괴로움도 겪고 힘들기도 하겠죠. 생명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런 것은 좋지 않겠죠.(의미 원문대조)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근본요소로 이루어진 생명체를 생명체로 보지 않도록 마음을 꽁꽁 묶어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조절하면 마음은 어떤 형상이나 모습을 만들지 못합니다.

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없으니 그 생명체들의 어떤 활동도 있을 수 없겠죠.

그러니 어떤 괴로움인들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해체의 진리를 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이 정상적인 인식과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이니, 그 사람의 행위와 그 모든 것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망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을 해탈이나 열반으로 해체주의자들은 받아들입니다.

해탈했다는 것은 분명히 옳은 말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니 말이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해탈하는 것이 지닌 뜻을 한번 설명해볼까요?

좋다라는 것은 말입니다. 문법으로 따진다면 좋다는 말은 주어가 없는 동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이 정확한 뜻을 지니려면 동사뿐만이 아니라 주어도 있어야 합니다.

행위의 주체가 없이 동작과 상태를 설명하는 동사만 있다면 그 말은 제대로 완성된 말이 아니죠.

행위의 주체를 뺀 채 그저 좋다라는 동사만 있다면 그 말은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해체주의자들은 그런 해탈을 붙잡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탈을 성취했다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그 해탈이 주체인 사람이 없다면 누가해탈했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디로부터 해탈한 것입니까?

해탈이라는 것도 어떤 것이 있어야만 거기에서 해탈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말한 해탈은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어떤 것에서 해탈했다는 것이 그저 아무 것도 없는 것일 뿐이죠.

해탈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해탈이라는 것이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이 해탈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겠죠.

직접 그런 심오한 경지를 체험하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말뿐이라거나 그저 말로는 당할 수 가 없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바른 것이라면 말로도 옳고 바르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언어로조차 옳고 바르게 드러낼 수 없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그러니 언어로조차 옳고 바르게 드러내지도 못하고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어리석은 착각이고 환상일 뿐입니다.

마음으로 만든 착각을 실재인양 잘 못 아는 사람들은 어느 누가 말하더라도 그들은 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스스로가 정말 옳다고 굳게 믿어버리죠.

생각을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이렇게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심오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붓다가대념처경을 설할 때 이런 것을 위해서 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르지 못한 알아차리는 공부를 멀리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자세하게 공부한 것입니다.

 

넷째 마당 -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방법

 

1) 오늘날 호흡수행을 하는 모습

 

붓다는 몸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가운데 먼저 들숨과 날숨이라고 하는 호흡을 대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공부이고, 모든 깨달은 자가 했던 수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쉬면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쉬면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들숨의 모든 과정을 분명하게 알면서 들이쉬리라고 닦는다.

날숨의 모든 과정을 분명하게 알면서 내쉬리라고 닦는다.

거친 들숨을 고요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고 닦는다.

거친 날숨을 고요하게 하면서 내쉬리라고 닦는다.

이와 같이 자신의 몸에서 몸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살아간다.

 

 

여기에서 조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과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까닭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은 오늘날 호흡수행을 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방법을 살펴볼까요?

일단 한적한 장소를 골라, 허리를 곧게 펴고 앉습니다.

그리고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오랜 시간을 앉아서 들숨과 날숨을 관찰합니다. 짧게는 30분이나 1시간에서 길게는 4시간이나 5시간을 앉아서 호흡수행을 하죠.

그리 많지는 않지만 가끔 누워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멈추어서거나 걸으면서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없죠.

그리곤 오직 들숨과 날숨을 관찰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호흡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호흡수행하는 것은 붓다가 말한 들숨과 날숨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날 호흡수행은 의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게끔 만들기 때문입니다.

호흡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의도적으로 자기가 호흡을 조절하며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흡입니다.

호흡수행을 할 때 자신이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호흡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흡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죠.

 

이 호흡 수행은 불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힌두 6파 철학가운데 요가학파의 이론은 해체의 진리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이들의 주장과 많은 부분이 맞닿아 있습니다. 요가의 기원은 인도의 문명이 성립될 때부터 존재하지만, 6파 철학에서의 요가는 파탄잘리(Patañjali)가 지은요가 수뜨라에 근거한 요가를 말합니다. 요가라는 말은결합하다, 묶다, 제어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요가 수뜨라에서는 요가를마음의 활동이 지멸(止滅)된 것(citta-vṛtti-nirodha)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번뇌를 정화하여 마음작용을 그치고 없애는 방법으로 여덟 가지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행 법

내 용

제계(制戒, yama)

소극적으로 나쁜 행위를 금하는 규칙

- 不殺生, 眞實語, 不偸盜, 不邪淫, 無所有

내제(內制, niyama)

적극적으로 선행을 권하는 규칙

- 청정, 만족, 고행, 학습, 신에 대한 전념

좌법(坐法, āsana)

안정된 안락한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이 있도록 하는 신체동작이나 자세

조식(調息, prānāyāma)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조절하여 마음을 제어하는 것

제감(制感, pratyāhāra)

모든 감각기관을 외적 대상의 자극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응념(凝念, dhārana)

어떠한 동요나 교란 없이 마음이 단전, 심장, 코끝, 미간 등과 같이 하나의 대상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

선정(禪定, dhyāna)

인위적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대상에 집중하는 것

삼매(三昧, samādhi)

선정이 성숙한 단계로서 관조하는 주관과 관조하는 대상이 하나가 된 상태

 

이것을 살펴보면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불교(진제)라고 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번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하는 호흡가운데 오취온과 관련이 있는 들숨과 날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용한 장소를 골라 앉아서만 관찰하는 호흡에는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은 없습니다.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에서 쉬는 들숨과 날숨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들숨과 날숨이 모두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은 아닙니다.

오취온과 관련이 없는 들숨과 날숨은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취온과 관련이 있는 들숨과 날숨만이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공부를 해야 할 대상입니다.

2) 일상생활속의 호흡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하는 호흡가운데 지나친 행위 때문에 영향을 받는 들숨과 날숨이 있습니다.

지나친 행위 때문에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럽게 고요하지 않게 됩니다.

지나친 행위는 살인, 도둑질, 바르지 못한 말이나 지나친 괘락의 추구 등, 사람과 서로 관계를 맺을 때 평화를 해치는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짓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지나친 행위가 호흡을 자연스럽지 않고 거칠게 만듭니다.

탐욕으로 반응을 하거나, 성냄으로 반응을 하거나, 어리석음으로 반응을 할 때 거기에 따라서 호흡도 여러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나친 행위는 보통 하는 행위보다 신경을 더 많이 쓰고 힘도 더 듭니다.

사람은 일종의 기계라고 할 수 있죠.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로 생명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체가 빨리 움직인다면, 또는 무거운 물건을 옮겨야 한다면 힘을 많이 써야 합니다. 다른 생명체나 기계도 마찬가지죠.

지나친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한다면 있는 힘을 더 꺼내 써야 합니다.

그렇게 힘을 쓸 때 생명체는 더 활발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밖에 있는 공기도 더 많이 받아들여야죠.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호흡을 하지 않고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필요치 않으면 필요하지 않은 만큼 빠르거나 느리게, 길거나 짧게 호흡을 합니다.

무명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지나친 행위가 여러 가지니 호흡도 길거나 짧은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겠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발자국 소리를 내지만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 누가 걷는 소린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도 주의 깊게 살피면 자기가 하는 지나친 행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호흡과 하나의 호흡이 지나친 행위가 변화는 것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죠.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바로 신념처, 곧 몸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입니다.

들숨과 날숨은 지나친 행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일어나는 들숨과 날숨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쉬면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쉬면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고 한 것이죠.

지나친 행위 때문에 변하는 들숨과 날숨을 그대로 아는 것이죠.

들숨과 날숨을 계속 살피는 것은 한 자리에 고요히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며 오가는 일상생활에서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것이죠.

 

3)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공부

 

호흡수행을 한다고 다른 일을 하지 못하거나, 시간을 따로 내어서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 짐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죠.

이렇게 짐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정도면 됩니다.

그렇게 그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그것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오가며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만 필요할 뿐이죠.

들숨과 날숨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멈추지 않는 들숨과 날숨을 그저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기 때문에 일생생활에 지장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오가며 일상생활 속에서 주의 깊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붓다가 살아 계실 때 그의 제자들마다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 비구나 제자들이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기위해 모여 집중수행을 했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두 상수제자를 비롯한 대 제자들이 집중수행에 들어온 스님들에게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를 지도했다는 것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붓다가 살아 계실 때 알아차리는 공부를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늘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공부를 한 것이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은 마음이 망상을 피우지 못하게 하도록 집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탐욕과 욕심을 제거하기 위해 행위 하나하나씩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으로 보기를 든다면 영수증을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영수증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 영수증을 모아 서로 견주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류를 해서 정리를 하겠죠.(비유고민)

마찬가지로 지혜도 알고 기억한 것을 모두 견주고 정리를 합니다.

이렇게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을 때 안의 몸밖의 몸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이것은 바깥에서 들어온 것, 쓸모없는 것, 적들이야! 이것들이 나를 지배하고 괴롭히지!’ 이렇게 알아차림이 생기는 것이죠.

힘씀도 함께 따릅니다.

이것을 버려야만 하고, 없애야 해!’ 하고 이것이 생기지 않도록 힘을 기울입니다.

지혜도 함께 일을 합니다.

지혜는 이렇게 오취온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들숨 날숨을 비롯한 몸에 대해서 , 내 것, 내 자신이라고 붙잡고 반응을 하는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이러한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에 대해 숨은 번뇌의 형태로 잠재된 탐욕과 성냄은 없애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4) 숨은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숨은 번뇌의 형태로 잠재되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나친 행위를 한 뒤 그 행위의 결과로 새로운 몸과 마음이 만들어집니다.

그때 그것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거나, 그 탐욕과 반대가 되는 성냄이 일어납니다. 그런 번뇌들은 잘 들어나지 않고 숨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없애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숨은 번뇌를 없애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이것을 없애기 위해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을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느낌과 마음과 법을 살피며 공부하는 것도 이렇게 하는 것이죠.

지나친 행위를 한 뒤 자연스럽게 스며든 번뇌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이 숨은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에서 일어나는 들숨과 날숨을 계속 살피며 자신에게 잠재된 숨은 번뇌를 들추어내어 없애는 모든 과정에 대한 앎이 충분히 생겼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까요?

새로운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전에 있었던 번뇌를 없애도록 오취온과 관련된 들숨과 날숨을 주의 깊게 살피며 그것에 대해 이것이 자연스러운 호흡인가, 바깥에서 들어온 번뇌가 시켜서 일어나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리는 공부의 목적이죠.

그러므로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 마음이 도망가지 않도록 대상이라고 하는 말뚝에 묶어 두기 위한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는 없애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는 단순히 들숨과 날숨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알아차림을 집을 지키는 문지기로 비유를 듭니다. 문지기가 집을 지키는 이유는 그 집에 도둑놈이 들어오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손님이 찾아오면 안으로 맞아들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렇게 바깥에서 오는 사람은 보지도 않고 집만을 보고 지키고 있다면 문지기를 둘 까닭이 따로 없는 것이죠.

붓다가 알아차리는 공부를 할 때 들숨과 날숨을 주의 깊게 살피며 탐욕과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도록 시켰는데 지금 수행자들은 들숨과 날숨만을 쳐다보고 있는 꼴입니다.

알아차림을 하는 것은 해야 할 바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해 호흡수행을 하는 사람도 할 말이 있겠죠.

자신이 마음을 어디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 저지르게 되는 많은 허물을 짓지 않게 된다고 말이죠.

이것은 감옥에 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니 편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 마당 - 공부를 마치며

 

대념처경에서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를 해설한 곳에서 들숨과 날숨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가 지닌 바른 뜻을 공부했으니 다른 부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몸을 계속 살피며 알아차리는 공부에서는 들숨과 날숨에 이어 몸의 자세와 동작을 알아차리는 공부가 이어집니다.

이것도 더러움에 물든 몸과 마음, 곧 오취온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바르게 눕고 않고 멈추고 가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아닌 번뇌가 시켜서 눕고 않고 멈추고 가는 것인가를 구분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번뇌가 시켜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계속 살피며 그것에 대해 , 내 것, 내 자신이라고 하는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알아차림, 힘씀, 지혜를 주의 깊게 챙겨야 합니다.

움직이는 몸의 동작에 대해서나,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에 대해 집착으로 반응을 한다면 잘 살펴 집착을 없애야 합니다.

느낌과 마음, 법을 살피며 알아차리는 것도 마찬가지죠.

이 느낌, 마음, 법들이 오취온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지나친 행위 때문에 생긴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오취온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부라는 것은 , 내 것, 나 자신이라고 집착하지 않고, , 내 것, 내 자신인 것처럼 흉내 내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도록 알아차림을 앞장세워 힘씀과 지혜가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 오취온과 관련이 있는 몸과 느낌, 마음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알아차리는 공부를 해서 모든 갈애가 사라지면 도와 과가 일어납니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데 있어 실제 닦는 것과 성취하는 그 사이에 허튼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리는 공부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출처 : 붓다의 뗏목
글쓴이 : 중2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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