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
붓다가 남긴 마지막 발자취
이 대반열반경은 붓다가 라자가하 영취산에서 머물고 있을 때 아자따삿뚜가 밧지족을 공격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벨루와가마에서의 마지막 안거, 대장장이 춘다의 마지막 공양, 그리고 구시나가라에서 입멸과 그 뒤의 사리분배까지 대략 2년간의 마지막 발자취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제 마지막 강의는 붓다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은 이 경으로 하고자 합니다.
워낙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다루도록 하죠.
첫 번째는 밧지족을 그 실례로 들어 승가공동체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른 생활규칙을 잘 지키는 삶과 잘 지키지 않는 삶이 가져오는 결과에 관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권과 "자등명 자귀위 법등명 법귀의" 에 관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붓다의 가르침을 가름하는 두 가지 잣대 법과 율에 관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마지막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위에서 살펴보기로 한 여섯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옮긴 이 경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반열반경
1) 공동체가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
한 때 부처님은 라자가하 영취산에 머무셨다.
그 때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는 밧지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밧지가 이처럼 크게 번창하고 이처럼 큰 힘을 가졌지만 나는 밧지를 멸망시키고 밧지를 없애고야 말겠다."
마가다의 왕 아자짜삿뚜는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을 불러서 말하였다.
"이리 오시오. 바라문이여.
그대는 부처님께 가시오.
가서는 '세존이시여, 마가다의 왕 아자따쌋뚜는 부처님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병이 없으시고 어려움도 없으시며 가볍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무시는지 문안을 여쭙니다.'라고 내 이름으로 부처님의 발에 안부를 묻고 이렇게 말씀드리시오.
"부처님이시여!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는 밧지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밧지가 이처럼 번창하고 이처럼 큰 힘을 가졌지만 나는 밧지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대에게 하는 말을 잘 듣고 나에게 보고하라.
부처님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네."
그러자 왓사까라 바라문은 왕에게 그렇게 하리라고 대답을 한 뒤 부처님에게 와서 이와 같이 여쭈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 뒤에서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는데,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1) 아난다여! 밧지들은 정기적으로 모이고 자주 모이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2) 아난다여! 밧지들은 화합하여 모이고, 화합한 뒤 흩어지며, 밧지족들이 해야 할 일들 을 화합해서 하고 있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3) 아난다여! 밧지들은 (과거에) 제정하지 않았던 것들은 (지금 새삼스럽게) 제정하지 않고, (과거에) 제정했던 것을 없애지 않고 있고, 제정해 놓은 오랜 전통을 잘 따르고 있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4) 아난다여! 밧지들은 나이가 든 어른들을 잘 받들고 잘 섬기고 잘 모시면서 그들의 말을 잘 따르고 있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5) 아난다여! 밧지들은 나이가 많건 적건 여인들들 강제로 끌고 와 데리고 살지 않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6) 아난다여! 밧지들은 성의 안에나 밖에 있는 탐묘들을 잘 받들고 잘 섬기고 잘 모시면서, 예전부터 받치고, 예를 갖추었던 격식에 알맞게 봉헌물을 허술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7) 아난다여! 밧지의 땅으로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들은 올 수 있도록, 이미 와있는 아라한들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밧지들은 아라한들에게 법에 걸맞게 살피고 보호하면서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가?
그대는 어떻게 들었는가?
아난다여! 이렇게 하는 한 밧지들은 발전할 뿐 퇴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승가를 모두 모이게 한 뒤 일곱 가지 퇴보하지 않는 법을 설하였다.
1)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자주 모이는 한 그대들은 더욱 발전할 뿐 퇴보는 없을 것이다.
2)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화합하여 모이고, 화합한 뒤 흩어져 승가의 일을 화합하여 한다면 그대들은 더욱 발전할 뿐 질 뿐 퇴보는 없을 것이다.
3)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붓다가) 제정하는 않은 것을 (새로) 제정하지 않고, 제정한 것을 없애지 않고 제정한 모든 학습계목을 잘 지키고 닦는 한 그대들은 더욱 발전할 뿐 퇴보는 없을 것이다.
4)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안거횟수가 많고, 비구법랍도 많고, 승가를 앞에서 이끌어 가는 장로들을 잘 받들고 잘 섬기고 잘 모시면서 그들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대들은 더욱 발전할 뿐 퇴보는 없을 것이다.
5)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분명하게 일어나는, 다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만드는 갈애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그대들은 더욱 발전 할 뿐 퇴보는 없다.
6)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숲속의 거처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한 그대들은 발전할 뿐 퇴보는 없다.
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아직 오지 않는, 바른 생활을 하는 동료들을 오게 하고, 이미 와서 함께 하는, 바른 생활을 하는 동료들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 주의깊게 마음을 챙기는 한 그대들은 오직 발전할 뿐 퇴보는 없다.
2) 바른 생활규칙을 잘 지키는 삶과 잘 지키지 않는 삶이 가져오는 결과에 관한 이야기(빠탈리에서)
그곳에서 부처님은 그 청신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였다.
청신자들이여! 바른 생활 규칙을 깨뜨리는 이에게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바른 생활 규칙을 깨뜨리는 자는 제멋대로 방탕하게 지내기 때문에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계를 범했기 때문에 생기는) 첫 번째 허물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깨뜨리는 자는 좋지 않은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허물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깨뜨리는 자는 그 어떤 무리에 들어가든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며 들어간다.
이것이 세 번째 허물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깨뜨리는 자는 (과거에 저지른 악행 때문에) 후회하며 혼란스러운 채 죽어야 한다.
이것이 네 번째 허물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깨뜨리는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행복을 만들 수 없고, 좋지 않은 것만이 오며,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복이 없는 곳에 떨어진다.
청신자들이여! 바른 생활 규칙을 잘 지키는 이는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바른 생활 규칙을 잘 지키는 이는 제멋대로 방탕하게 지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재산을 얻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이로움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잘 지키는 이는 좋은 소문이 널리 퍼진다.
이것이 두 번째 이로움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잘 지키는 이는 그 어떤 무리에 들어가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간다.
이것이 세 번째 이로움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잘 지키는 이는 후회도 혼란스러움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네 번째 이로움이다.
바른 생활 규칙을 잘 지키는 이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인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이로움이다.
법문을 마치고 부처님은 다시 그곳을 떠나 꼬띠가마로, 다시 나디까로, 다시 베살리 암바빨리 숲으로, 다시 벨루와가마로 가셨다.
3) 사권과 "자등명 자귀위 법등명 법귀의"에 관한 이야기
그 때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베쌀리 부근에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안거를 지내라.
나는 이 벨루와가마에서 안거할 것이다.
"붓다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붓다에게 말씀드린 뒤에 베쌀리 부근에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안거를 하였다.
붓다도 이곳 벨루가나까에서 안거에 드셨다.
그 후 안거에 들었을 때 붓다는 아주 심한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아주 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그때 붓다는 주의깊게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괴롭다고 생각지 않고 견디셨다.
그때 붓다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자에게 말도 하지 않고, 비구승가에도 알리지 않고 반열반에 드는 것은 알맞지 않다.
나는 이 병을 정진력으로 떨쳐내고 생명력을 굳세게 하리라."
그 뒤 붓다는 정진력으로 병을 떨쳐내고 생명력을 굳세게 하였다.
그러자 붓다의 병은 가라앉았다.
그 뒤 붓다는 병에서 회복하여 얼마 지나 승원에서 나와 승원의 그늘에 마련한 자리에 않으셨다.
그 때 아난다존자는 붓다께 가까이 다가가 절을 올리고 한 곳에 앉아 붓다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붓다이시여! 저는 붓다가 (병에서 회복해) 행복해하는 것을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붓다가 다시 건강해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붓다이시여! 붓다가 아프셨을 때 저의 몸도 무거워지고 굳은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방향감각도 잃어버렸습니다.
아직 제겐 법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붓다이시여! 그렇지만 '붓다는 비구승가와 관련해서 어떤 말씀도 하지 않는 채 그대로 반열반에 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아난다여! 비구승가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아난다여! 나는 안팎을 두지 않고 법을 설하였다.
아난다여! 나는 나의 가르침에 대해 다른 스승들처럼 손에 꽉 움켜진 것은 없다.
아난다여! "나만이 비구승가를 이끌 것이다.
비구승가는 나만을 의지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비구승가에 대해 무엇인가를 당부할 것이다.
아난다여! 붓다는 "나만이 비구승가를 이끌 것이다.
비구승가는 나만을 의지해야 한다."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바라지 않는데 붓다가 비구승가에 대해 무엇을 당부하겠느냐?
아난다여! 나는 너무 늙어버렸다.
나이는 너무 많아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다.
내 나이 80이 되었다.
아난다여!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 (부서지지 않고) 견디듯이 그렇게 붓다의 몸도 가죽 끈에 묶여 견디어 간다.
아난다여! 붓다는 모든 대상들의 표상을 마음에 새기지 않거나,
어떤 느낌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상카라의 표상을 마음에 새기지 않은 삼매에 들어 지낸다.
아난다여! 붓다의 몸은 그럴 때 더욱 편안해진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너희들은 자신만을 섬으로 삼고 자신만을 의지처로 삼지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마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지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마라.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만을 섬으로 삼고 자신만을 의지처로 삼지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아 지내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지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아 지내지 않겠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비구는
몸에서 몸을 계속 지켜보면서
마음 챙기고[정념] 분명하게 알아차리며[정지(正知)] 열심히 힘써[정정진]
세상에 대한 탐욕[탐(貪)]]과 분노[진(瞋)]를 버리며 살아간다.
느낌에서 느낌을 계속 지켜보면서 마음 챙기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열심히 힘써 세상에 대한 탐욕과 분노를 버리며 살아간다.
마음에서 마음을 계속 지켜보면서 마음 챙기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열심히 힘써 세상에 대한 탐욕과 분노를 버리며 살아간다.
법에서 법을 계속 지켜보면서 마음 챙기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열심히 힘써 세상에 대한 탐욕과 분노를 버리며 살아간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만을 섬으로 삼고, 자신만을 의지처로 삼지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법만을 섬으로 삼고 법만을 의지처로 삼지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은 뒤에나 자신만을 섬으로 삼고 자신만을 의지처로 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않으며, 법만을 섬으로 삼고 법만을 의지처로 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않는다면 공부하기를 원하는 비구들 가운데 으뜸에 이르리라.
4) 붓다의 가르침을 가름하는 두 가지 잣대 경과 율에 관한 이야기
부처님은 보가나 아난다탑묘에 머무셨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큰 원칙을 설하리라.
이것을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이제 설할 것이다."
비구들은 대답하였다.
"부처님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을 부처님에게 직접 듣고 받아 들였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한다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부정하지도 말라.
받아들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그 단어와 문장을 잘 잘 새긴 뒤
경에 견주어 보고 율에 맞추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경에 견주어 보고 율에 맞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율에 맞지 않는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이것은 그 비구가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라고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판단하고 그 말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경에 견주어 보고 율에 맞추어 보아서 경과 율에 맞는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비구는 바르게 받아 들였다.'라고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큰 원칙이다.
5) 마지막 유훈에 관한 이야기
그 때 붓다는 아난다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아난다여! '스승의 가르침은 끝났고, 이제 우리의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고 그대들은 생각할 수도 있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라.
아난다여! 내가 설하고 제정한 법과 율이 내가 가고 난 뒤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비구들은 지금 서로 "도반(아우소)"라는 호칭으로 부르지만 내가 간 뒤에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라.
아난다여! 오래된 비구는 어린 비구를 이름이나 성이나 도반이라는 말로 부르고, 어린 비구는 오래된 비구를 "존자"나 "장로"로 불러야 한다.
아난다여! 승가는 내가 간 뒤에 아주 작은 계율들을 없애기를 원한다면 없애도 좋다.
아난다여! 내가 간 뒤에는 찬나비구에게 최고의 벌을 주어야 한다.
붓다이시여! 최고의 벌이 무엇입니까?
아난다여! 찬나비구가 하고싶은 말을 하더라도 비구들은 그에게 말을 하지도 말고, 꾸짖지도 말고, (그의 말을) 막지도 말아라.
이것이 최고의 벌이니라.
그리고 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부처나 법이나 승가나 도나 닦음에 대하여 어느 한 비구라도 의심이 일어난다면 지금 나에게 물어라.
'붓다가 우리 앞에 분명하게 계셨는데도 우리는 붓다에게 제대로 여쭈지 못했구나!'라고 너희들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였지만 그 비구들은 조용히 있었다.
붓다는 두 번 세 번에 걸쳐 비구들에게 다시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부처나 법이나 승가나 도나 닦음에 대하여 어느 한 비구라도 의심이 일어난다면 지금 나에게 물어라.
'붓다가 우리 앞에 분명하게 계셨는데도 우리는 붓다에게 제대로 여쭈지 못했구나!'라고 너희들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였지만 세 번 째에도 비구들은 조용히 있었다.
그때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붓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묻지 않았다면 비구도반에게 (자신이 의심하는 바를) 말해주어 묻게 하여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였지만 비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난다존자가 붓다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붓다이여! 참으로 놀랍고 드문 일입니다.
붓다이시여! 이 비구승가에는 '어느 한 비구도 붓다나 법이나 승가나 도나 닦음에 대해 의심이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난다여! 너는 정말 그렇게 믿고 말을 하는구나!
아난다여! 이 비구승가에 어느 한 비구도 붓다나 법이나 승가나 도나 닦음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난다여! 이 500명의 비구 가운데 가장 낮은 단계의 비구조차도 악처로 떨어지지 않고, 나머지 윗 세 단계만이 남아있는 수다원이니라.
그리고 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와같이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모든 하지 말아야 할 짓들은 그 자체가 쓸모없고 망가진 것이니 제멋대로 방탕하게 지내지 말고 (팔정도를) 힘써 닦아라.
이것이 붓다가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다.
1) 공동체가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
먼저 이 대반열반경은 다른 경들과 달리 어는 한 곳에서 설한 법문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10개월이라는 긴 여정을 통해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한 법문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마치 한 편의 긴 소설을 읽은 듯한 묘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의 마지막 긴 여정을 연대기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단순하게 누군가가 붓다의 설법을 외워서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틀을 갖고 편집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만큼 붓다의 마지막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어떤 경보다 편집과정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견해가 곳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죠.
자 그럼 공동체가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죠.
당시 인도는 군소부족이 뭉치면서 수많은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가 생겨나면서 치열하게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밧지과 말라와 같은 조그만 국가는 공화정(연합정권)이고 마가다를 비롯한 상대적으로 크고 힘이 센 국가는 왕정(군주제)이였다고 합니다.
강대국들은 그 세력을 넓히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인근국가를 공격하곤 했습니다.
마가다국의 왕 아자따쌋투는 불교를 옹호하는 왕으로서 밧지를 공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든가 신하를 보내 붓다의 의중을 슬쩍 떠 봅니다.
붓다는 아난다에게 밧지족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자주 모이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부터 일곱 가지 질문을 던져 밧지족은 더욱 발전하지 퇴보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침략하지 말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모든 비구를 불러 승단이 발전하고 퇴보하지 않는 법을 설하죠.
밧지족은 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이었고, 붓다가 속했던 석가족도 마찬가지로 공화정이었습니다.
당시 공화정이 어느 정도로 민주적이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를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정기적으로 모이고, 자주 모이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민주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올바른 해결책을 이끌어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힘겨운 일이지만 또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화는 말을 나누는 것이고, 말을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만나야 합니다.
2) 화합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모아, 그 의견에 따라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것은 생각을 나누고 말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이 같고, 말이 같다면 만날 필요가 없겠죠.
화합은 그저 말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생각을 나누고 말을 나누어 갖은 것입니다.
함께 살며 귀찮다고 아무 말 없이 따르는 것은 화합이 아닙니다.
생각을 감추고, 말을 감춘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입니다.
우리에겐 붓다가 남긴 법과 율이 있습니다.
그 법과 율에 견준다면 서로 다른 생각을 바르게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을 모았다면 또한 제 자리로 돌아가 맡은 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비구 공동체는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지혜롭고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진리"를 배우고 닦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널리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가공동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3) 제정하는 않은 것을 (새로) 제정하지 않고, 제정한 것을 없애지 않고 제정한 모든 학습계목을 잘 지키고 닦는 한 그대들은 더욱 발전할 뿐 퇴보는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네요.
얼핏 보면 전통에 대한 존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기득권을 지닌 집단이 시대적 요구를 묵살하는 유용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경전결집을 주도했던 대가섭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잘 알다시피 가섭은 브라흐만 출신으로 숲속에 머무르며 두타행만을 고집했던 분이었습니다.
가섭은 부처님이 가신 뒤 승단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그의 주도하에 경전결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경전결집에 관한 큰 방향을 그가 세웠다는 것을 뜻합니다.
경전과 주석서에서는 다음 승단을 이끌 유력한 분임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작고 하찮은 계율(소소계)에 대해 승가가 원한다면 없애도 좋다는 말씀을 남겼지만 가섭은 어떠한 작은 계율도 함부로 없앨 수 없다고 주장을 하며 결국 승가가 그대로 따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아마 그의 주장이 반영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바라면서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행위를 먼저 깨끗하고 바르게 하는 것을 강조하셨던 그 분이 남긴 법과 율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 상황에 가장 알맞은 규칙을 대화를 통해서 새롭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바뀔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만들어 놓은 “법”과 “율”이 지향하는 정신이지 책에 적혀있는 생명력이 다한 계율조문 그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래 스님들은 밥을 지어 먹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시대에는 탁발을 통해 음식을 얻어먹었기 때문이죠.
남방 불교 국가 말고는 탁발전통이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직도 탁발이 행해지는 미얀마에서 탁발하기를 귀찮아하는 어느 스님에게 농담처럼 들었던 말인데 계율을 어기지 않고 불을 피워 밥을 해먹는 법을 설명한 계율 책도 있다고 하더군요.
정말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계율조문에 너무 얽매이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계율을 잘 지키지 않는 것 보다 위험해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
4) 장로들을 잘 받들고 그들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장로는 법랍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법랍만큼이나 계정혜를 갖춘 스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죠.
어느 공동체든 원로들을 존중하고, 그 분들의 말을 따르는 것은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무조건 장로들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원칙으로 살아가는 원로를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더 나아가면 따라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른 원칙이 아닐까 합니다.
언젠가는 밑에 있는 분들도 장로가 될 것인데 계정혜를 갖춘 장로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른 원칙을 따르지 않는 장로라면 사실 장로라고 할 수 없거니와 그런 분들이 아무리 법랍과 힘을 갖추고 있더라도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죠.
5) 다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만드는 갈애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지닌 욕구는 참으로 많고, 그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지 않고, 충분히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쾌락만을 위한 행위는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애는 필요한 부분을 원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가 넘치는 것만을 갈애라고 합니다.
늘 자신을 경계하지 않으면 쉽게 갈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조건만 주어지면 분명코 다시 일어나는 숨은 갈애를 없애는 것이 바로 갈애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6)숲속의 거처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당신을 가르침을 널리 전하라는 말로 전도를 선언하였던 분이고, 평생을 유행하며 당신의 가르침을 널리 전한 분입니다.
어찌 보면 숲속의 거치를 바라는 마음은 법을 널리 전하라는 말과 어긋나는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인도에서 숲이라는 말은 마을은 아니지만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 곳을 말합니다.
탁발을 하며 지내는 스님들은 마을을 떠나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마을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입히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치 벌이 꽃에서 꿀을 얻어가네 꽃을 다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법을 전하는 데 아주 알맞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공간이지 우리가 생각하듯 깊은 산중은 아닙니다.
숲속이란 몸을 멀리하는 외적 공간이 아니라 온갖 번뇌를 멀리 한 내적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구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만드는 더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몸과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7) 바른 생활을 하고자 하는 동료들을 오게 하고, 함께 하고 있는 바른 생활을 하는 동료들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 주의 깊게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한 이상적인 공동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체가 진화하듯이 좀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만이 있습니다.
그렇게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비판정신입니다.
비판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은 구성원의 행복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안팎의 대상을 향한 따스한 관심입니다.
자신을 향한 관심은 먼저 늘 자신을 살펴 바른 관계를 망치는, 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려는 탐욕과 그것을 방해하는 대상에 대한 무차별적인 분노를 꿰뚫어 보아 없애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주의 깊게 마음을 챙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따스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잘 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도 따스한 관심이지만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꾸짖는 것도 따스한 관심입니다.
감정을 지닌 사람인지라 자신이 비록 잘못된 길을 걷는다는 것을 알더라도 누군가에게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마음과는 달리 일부러 어긋나게 나가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사람이라는 동물입니다.
그렇기에 남을 향한 관심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힘에 겨운 일인 것이죠.
바른 관계를 망치는 데 가장 힘을 발휘하는 탐욕과 분노를 없애기 위해 늘 자신의 몸과 마음에 깨어 살펴보는 것이 바로 주의 깊게 마음을 챙기는 것(사띠, 정념)입니다.
공동체구성원 하나하나가 주의 깊게 마음을 챙길 때만이 함께 하는 구성원들의 행복과 평화는 더욱 커지고, 그 공동체와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가지는 비록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제도나 장치는 아닐지라도 민주주의 정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자등명 자귀위 법등명 법귀의"에 관한 이야기
안거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
이 법문은 부처님이 웨살리의 웰루하나에서 마지막 안거를 지내면서 했던 말씀입니다.
안거(안거)란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인 우기에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모여 함께 지내는 제도를 말합니다.
본래 안거는 불교교단에는 없었던 제도인데, 우기기간에도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스님들을 많은 백성과 다른 교단이 비난을 하자 안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비난을 했던 이유는 우기에는 많은 생명들, 이를테면 아주 작은 곤충에서부터 식물들이 자라기 시작하는데 그 때 돌아다니다가 자기도 모르게 생명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흐만전통에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큰 생명에서 갈라져 나왔고, 그 생명체들도 윤회의 길고 긴 과정 속에서 부모나 부부든 어떤 식으로도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우기에 돌아다니다가 실수로 생명체를 밟아 죽이는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비구스님들이 우기에 돌아다니는 것을 많은 백성과 다른 교단이 비난을 하게 되자 쓸데없는 비난을 막고자 불교승단도 안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전통이 동북아로 넘어오면서 너무 덥거나 추워서 활동하기 불편한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안거를 하게 되고, 나중엔 깨달음을 목적으로 한 특별한 정진기간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죠.
이젠 그것마저 형식화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현대는 워낙 기술문명이 발달해서 삶 자체가 계절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안거제도의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해서 현대인들의 삶의 리듬에 맞게 바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난다의 걱정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부처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아난다존자는 부처님이 큰 병을 앓자 쓰러지자 한 가지 큰 걱정에 휩싸이지만 다른 한 가지 생각에 조금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한 가지 큰 걱정은 자기에게 법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비구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아라한을 성취했지만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 모셨던 아난다는 그때까지 아직 아라한을 성취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시고 나면 영영 아라한을 성취하지 못할까 큰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비록 수다원을 성취하였지만 아직 아라한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자기에게 법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표현을 한 것이죠.
한편으로 부처님이 그대로 반열반에 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부처님이 승단의 후계자에 관한 문제를 말하지 않고 가실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을 경에는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제겐 법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붓다이시여! 그렇지만 '붓다는 비구승가와 관련해서 어떤 말씀도 하지 않는 채 그대로 반열반에 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아난다의 걱정을 풀어주는 부처님
아난다는 병을 앓고 계시는 부처님이 그대로 죽으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이 아직 감추고 있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죠.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붓다는 다른 스승들처럼 제자들 몰래 손에 꽉 쥐고 있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없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남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했다는 뜻이겠죠.
붓다는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한 점 남김없이 다 드러내서 모든 제자들에게 다 전하신 분입니다.
누구는 똑똑하기 때문에, 또 누구는 개인적으로 친해서 더 많은 전해주고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전해주는 그런 분이 아니죠.
스승과 제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전했다는 것은 다른 교단에 있었던 전통이죠.
이런 전통은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어느 새 그런 전통도 불교 안에 들어와 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난다의 게으름을 준엄하게 꾸짖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수단원을 성취하였지만 아라한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수다원에 이르는 깨달음은 선지식이라고 하는 존재가 참으로 필요하지만 아라한에 이르는 과정은 스승의 가르침보다 본인의 노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정도면 아난다에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 아난다가 걱정하는 것은 부처님이 세상을 뜨신 뒤 그 뒤를 이어 승단을 이끌 후계자에 관한 것입니다.
붓다는 어쩌면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니 현재에도 어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민주적이고,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너무나도 인간적이며, 모든 권위를 완벽하게 던져버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몸과 마음, 그리고 뼈에 새기지 않는다면 결코 이 삶속에 구현할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가진 능력 이를 테면 지적 능력, 육체적 능력, 경제적 능력, 인간적 매력과 같은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그를 따른 무리들이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고, 그 자신을 향해 몸과 마음을 기울이게 합니다.
큰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나, 한 가족을 책임지는 어른이든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의 끝은 자신을 기대고 의지하게 하고, 자신을 따르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붓다가 남긴 마지막 말씀을 들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다시는 그 분을 볼 수 도 없고, 그 분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도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 함께한 제자들이 느껴야 하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마지막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기도 합니다.
귀 기울여 함께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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