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너무나 놀라운 빠알리 니까야의 완전성

수선님 2018. 4. 29. 12:39

 

 

 

 

니까야는 완전한가?

 

 

2600년 전 부처님과 같은 시대 소크라테스 노자 공자 등의 전기나 가르침이 원형의 손상이 거의 없이 지금까지 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호멧의 꾸란 역시 원형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지요.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도 지금까지 원형의 손상없이 그대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경이나 대승경전을 읽고 보던 사람들은 그 알음알이로 근본경전인 니까야를 깍아내리려고 생때를 쓰기도 합니다. 탄소연대측정을 하자. 과학적으로 증명해라. 역사적으로 증명해라 등으로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기 전까지는 절대 믿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변질된 것이라는 억지를 부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그럴듯한 정황증거들을 보여줘도 또 다른 소리를 늘어놓지요.

불멸 후 약 200년 아쇼카대왕시대 그의 아들 마힌다장로를 위시한 장로들이 경과 율을 들고 스리랑카로 건너간 다음 조용한 섬나라 안에서 경전은 일점일획의 변형 없이 잘 보존됩니다. 그러나 전 47~32년 사이 만 14년동안 '브라하마나 띳사의 기근'이라고 이름 붙여진 유래없는 기근으로 승려의 절반이상이 굶어죽는 뒤 약 700명의 대사파 비구들은 인도로 건너가고 남은 60명의 비구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경율을 암송하며 견뎠습니다.

12년 후 기근이 끝나자 인도대륙으로 대피했던 비구들이 다시 돌아와 60명의 비구들과 자신들이 암송한 떼삐따까를 대조해 보았더니 상호간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모음과 자음까지도 완전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글로 적어서 기록하는 것은 경솔하지만 이번 같은 기근이 다시 온다면 정법이 단절될 수 있음을 절감하고, 경전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협의하고, 그들은 밧따가마니왕 시절인 전 35~32년사이 알루비하라에서 패엽에 경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문자결집이라고 합니다.

이 알루비하라 경은 우선 3질로 간행하여 전국 중요 사찰에 보관하였고 이후 계속 간행하여 미얀마 등에 공급하였는데, 1800년대 영국군의 방화로 알루비하라의 패엽경이 불타 없어진 이후에는 다시 미얀마의 본을 기반으로 암송한 경을 대조하가면서 다시 패엽경을 편찬했던 것이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았는 것이고, 이런 역사적 사실은 마하방사 디빠방사 니까야상그라하 등 수십편의 역사서에서 완벽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서들을 통해서 스리랑카의 각 왕조들과 왕들의 절대적인 신앙과 불교보호정책 등이 니까야의 완전한 전승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시대 승려들의 정법을 보호하기 위해 목슴바쳐 투쟁한 생생한 역사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인데도 기독경이나 대승경전들의 허구적인 형성의 역사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시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점일획 변질없이 영구히 전하기 위해 수지독송하고 기록한 승단의 노력을 모르고 자기 알음알이만 격하게 내세웁니다.

물론 경이 아닌 율장에서는 극히 일부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재상황에 맞게 조정한 측면이 발견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장에서는 그 어떤 부분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유럽의 비판적인 불교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래는 작년 도법스님의 종교평화선언과 불교에 신은 있는가 등의 논란 때 불교언론 답글에 적었던 글입니다.

 

 

아래의 글은 불교닷컴 허정스님의 글 [신은 2600년 전에도 없다고 했다]라는 글의 답글에서 토론 중 주시자님이 "니까야는 변질된 것이고 초기불교는 지극히 어렵다"는데 대한 답으로 쓴 글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빠알리 니까야의 완전성

원불사 단현

 

 

1. 수천 년 세월 속에 경전의 변질은 필연적인 것인가?

 

대체적으로 사람은 아는 만큼 느끼고 그 범주 안에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나 다른 종교를 접한 분들은 모두 그런 말을 합니다.

경전이라는 것이 그 오랜 세월 유통과정을 거치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감비아의 고향 마을을 찾아서 놀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기의 7대조 쿤타 킨테가 노예로 끌려간지 수백년이나 흘렀는데, 마을의 어른들이 쿤타 킨테의 조상부터 가족 부모 그리고 쿤타 킨테와 그 시대상황을 운율을 넣은 구전으로 암송하는 내용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와 완벽히 일치하고 몰랐던 옛날 까마득한 시조부터의 역사를 상세히 들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예전 100여 개 외우던 전화번호를 지금은 서너 개도 못 외우고 있습니다.

비상한 기억력은 시대적 요구와 훈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에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면 승려가 될 수 없고, 남방불교에 삼장을 통달하신 분이 제법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니까야 아함경이 구전되어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 등 경전들 역시 그 시대 모두 외워서 대를 내려온 것이었고, 아함경과 거의 같은 시대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철학적이고 고도의 논리적인 교의서와 제의서들 모두 그 방대한 량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브라만교의 유신교적인 본질에 따라 중간중간 수많은 가감첨삭이 가능한 종교였기 때문에 이후 신비적이고 전설적인 내용과 제의 의례의식 해설 노래 찬가들이 많이 첨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경은 근동의 전설과 자기들의 역사를 짬뽕해서 만든 것이고, 기독경 역시 로마에 멸망 당해 서러운 유대 유민들이 구세주를 기다리며 실존인물이 아니던 예수에 대해 문학적인 활동으로 작성한 수천 권의 복음서와 편지글 설교문 예언서 중에서 27권을 가려뽑아 신약성경으로 확정시켰고,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에 예수를 증거할 내용이 없으니 유대경전 24권에 15권을 더 집어넣어 39권의 구약성경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요즘 같은 소설이나 에세이 등 문학 출판이 없던 시절 유일한 문학활동이었습니다.

 

아함경은 모든 부파가 공히 암송해 전해 오다가 인도에서 불교가 쇠약해진 다음 많은 내용을 잃어버린 후 나중에 설일체유부 법장부 대중부에 대승불교의 영향까지 더해져 니까야보다 훨씬 늦게 편찬되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 원형을 잃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후 편찬된 대승불교경전들은 힌두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으면서 모두 각기 발전하고 따로 기록되면서 한 부파나 개인의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상이나 주장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선불교 중국불교 역시 도교의 절대적인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학자나 스님 재가자 모두가 이런 시각으로 각 종교의 경전과 발전의 역사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니까야를 대하는 시각 역시 그 기준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니까야는 그런 시각을 완전히 벗어나야 그 실체를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기독경이나 대승경전 힌두경전을 보는 시각이 아니라 <니까야를 보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부파불교의 폐단과 더욱 견고해진 니까야의 권위

 

전 인도를 불교승단에 보시했다는 아쇼카 대왕의 마우리아 왕조부터, 전 국가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절 바깥을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환경(사찰 내 호화로운 음식이 가득한 식당과 최고급 대우)이 조성된 후 할일 없는 승려들은 들어앉아, 말장난불교, 의식(생각)불교, 의미불교, 철학불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 각자 이론을 달리하고 분파가 생기고, 자기 사상에 맞는 스승을 따라 부파가 생기고 해서, 각 부파마다 논장이 생겼고, 결국 부파를 만들어 왕초노릇 하는 것이 한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후대지만 그 문화의 한 단면을 보면 서로 다른 부파를 말이나 문자로 공격하는데, 예를 들자면 법화경 등에 "소승하는 자들은 개돼지~ 문둥병 환자~ 음욕이 강해서 금수도 그냥두지 않는다~~~" "논사 누구는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붙어먹은 자로서~~~" 등으로 다른 부파를 지극히 미워하는 히얀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늙은 부모를 위해 밥을 지어 공양할 생각은 않고 부모를 어떻게 모시는 것이 이론에 맞고 철학적 의미가 어떠하며, 밥의 영양소는 어떠하고 성분을 분석하면 어쩌고 공양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경전의 본래적인 가르침과 실천을 떠나 불교에 걸맞는 철학적 옷을 만들어 입히는, 말장난으로 하 세월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진리를 향한 식자들의 욕구에 의해 아비담마상가하 위수디막가 아비달마구사론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논장들과 무수한 주석들에 어려운 철학적인 불교용어들을 양산해 내며, 각기 다르게 기록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고, 한없이 어렵고 서로 극히 다른 관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논쟁의 중심에는 <절대불변의 한 기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빠알리 니까야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상좌부 대중부 막론하고 그 어느 부파들도 결코 니까야라는 <토씨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텍스트로 두고 그 속에서 참고서(논장)만 자기 입맛에 맞도록 연구하고 발전시켜나갔던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성경을 일점일획의 무오류라고 주장하면서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수천 개가 넘는 많은 이단부파들이 발생되었으나 그 어느 부파들도 성경의 토시 하나 건드릴 수 없이 1700년을 전해내려 왔듯이, 그 시대 초기불교는 니까야를 추호도 수정 변질 없이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고, 누구나 단 한 줄이라도 잘못 인용하거나 해석하면 강하게 질타 당하는 것은 물론 그 부파 전체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부정되어 망할 수 있는 것이 불교문화였기 때문입니다.

 

 

3. 변질되는 불교와 힌두대승불교의 흥기

 

그러나 범국가적인 지원에 등 따시고 배 불러 세월가는 줄 모르던 승려들은 오래지 않아 닥친 숭가왕조 깜바왕조 등의 불교탄압 힌두교숭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분열하고 부파를 만들어 싸우기나 하지, 재가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사찰 바깥을 나가보지 않고 들어앉아 탁상공론하고 있던 그들에게, 거지의 삶을 살아가던 수행자로서의 성스러운 모습이나, 무상 무아 욕심과 악의에서 떠난 성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이미 권력자나 장자 지성인 무지랭이 백성 모두의 존경과 보시를 잃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탄압하고 재가자들의 시주마저 끊켰는데, 탁발이 무엇인지 모르던 그들은 본래 무상 무아를 체득한 자들이, 거지의 삶으로서 욕심과 악의를 버린 수행자의 모습으로 재가자의 스승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에도 없이, 어떻게 하면 가만히 들어앉아 공양과 보시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 그 시대 귀족들만의 종교였던 브라만교가 쇠퇴하면서 개개인이 누구나 신을 만들어 섬기고 복을 구할 수 있는 힌두교를 주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나 자기 직업에 따라 혹은 개인적인 필요나 욕구에 따라 만들기 시작한 각종 신들과 제관들에게 지성으로 섬기고 보시하는 모습을 본 승려들은, 그 중에 제법 괜찮아 보이는 신들을 영입해 와서 부처님의 화신이라면서, 너희들이 섬기고 있는 신들이 부처님께 귀의했으니 힌두신전에서 빌고 복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불교사원에 와서 빌고 복을 얻어라고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 보살인 것입니다.

 

아발로키테스바라는 관세음보살로 개명해서 들여오고, 크시티가바는 지장보살로, 이란의 태양신 미뜨라는 미륵보살(기독교에는 재림예수)로, 인드라는 제석천, 쉬바는 대자재천, 야마는 염라대왕으로.. 저작권 무시하고 무상으로 이름 바꾸고 포장 좀 해서...

 

나중 그 보살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관음경 화엄경 지장경 무량수경 등 각종 경전들이 편찬되기 시작했고, 그리고 무아라고 하면 보시 받기 어려우니 마치 영혼 비슷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보살을 믿기만 하면 복을 받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극락에서 영원이 살 수 있다고 해야 좀 더 보시를 쉽게 받을 수 있겠다 싶어, 힌두교리를 차용해서 영혼사상을 만들어 넣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유식이고 여래장이고 불성으로 진화한 것이며, 그에 따라 알맞는 경전을 편찬하기 시작한 것이 대승불교경전들인 것입니다.

 

 

4. 탁발문화와 함께 사라진 인도에서의 불교

 

이후 힌두신전과 불교사원을 오락가락하던 재가자들은 불교사원에 가봤자 교리타령이나 하는 거만한 승려들보다 힌두신전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어 차츰 인도에서 불교는 소멸되어 갔던 것입니다.

 

혹자는 인도에서의 불교소멸의 이유로 이슬람교나 왕조의 불교탄압을 거론하지만, 사실 근본 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상 무아의 삶을 실천하는데 게으르고 불교를 힌두화했기 때문, 아니 힌두교로 전환되어버린 것입니다.

 

아울러 탁발했던 데와닷다의 교단은 1500년 이상을 유지했고, 힌두교 자이나교는 인도에서 아직도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탁발 청식하는 그 수행자들은 인도인의 존경과 귀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특히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의 스님들이 아직도 탁발하고 무소유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탁발을 하는 이상 니까야는 변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불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5. 추호도 수정 변질 없이 완벽히 전해진 빠알리 니까야 경전

 

불교는 내가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것, 모든 중생이 이익 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그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과 악의를 버리고 떠나는 삶에 있습니다. 그 시대 스님이나 이 시대 법정스님 성철스님처럼 스님은 이기심을 버린 무소유한 삶을 사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일 때 비로소 재가자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51년의 탁발로 표현하셨고, 그 제자들 역시 탁발하면서, 모든 재가자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귀의하고 공양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재가자들이 스스로 욕심 없고 악의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가르침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욕심과 악의를 버리고 떠난 성자의 모습을 가장 지극히 표현한 것이, 부처님이 불교의 계율로서 세우신 탁발문화이고 거지문화이며, 이 거지문화를 교리적으로 표현한 것이 니까야이고, 그것은 무상 고 무아이며 열반에 이르는 길이며 사제 팔정도 12연기 37보리분법 4념처 등으로 표현된 교학인 것입니다.

 

이 교학은 완벽한 교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초기불교인 부파불교의 모든 교단에서나, 분열되지 않고 전통의 법맥을 그대로 이어온 상좌부에서, 그것을 수정하고 변질시킨다는 것은 조금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부처님 멸 후 200여 년, 겨우 대중부가 발호하던 당시로 아직 부파불교가 생기기 이전의 니까야는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었고, 계맥과 계율과 탁발문화와 무소유하고 무상 무아적 수행의 사상이 살아있는 아쇼카 대왕 시절에, 전통 보수 상좌부불교의 삼장이 그 원형 그대로 스리랑카로 전래되어, 사방이 바다로 막혀 인도의 신진 사조가 쉽게 들어 올 수 없는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불교는 원형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따금 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대승불교의 여파를 철저히 막아냈고, 전쟁과 기근 속에서도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결사적으로 니까야 특히 4부 니까야를 원형 그대로 보존했고 지금 그 원형이 완벽히 전해져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4부 니까야 : 상윳다 디가 맛지마 앙굿다라 니까야, 그러나 후대 재가자를 위한 교육용으로 5부 니까야인 쿳다까 니까야에 자따까 등을 넣기도 했음)

 

물론 스리랑카로 전해지기 전 200년 사이에 변질되지 않았느냐고 의문할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 니까야의 편집된 내용이라든지 교리체계가 추호도 흐트러지거나 불합리하거나 상충되는 점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그런 의문은 충분히 해소될 것입니다.

 

 

마무리

 

힌두경전 기독교경전 대승경전을 보는 시각을 버리고 니까야를 보는 법으로 불교를 본다면 비로소 위대한 부처님과 그 가르침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재가자 주제에, 니까야 한 번 읽지 않고 그 핵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범부에게 무슨 논장이겠습니까?

그런 것은 시간이 남아돌아 연구하고 싶은 스님이나, 그런 것으로 논문 쓰서 먹고 사는 불교학자의 몫입니다.

 

이제 불교의 교리체계는 너무 쉬운 것이라 했고 어려운 논장 또한 해결됐으니 더 이상 초기불교 공부를 망설일 필요 없을 것입니다.

불교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참다운 스님만 쳐다보며 욕심과 악의를 조금 줄이고 내 가족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서 작은 것이나마 나누고 사는 불자이면 부처님 보시기 착하고 기쁜 제자일 것입니다_()_

 

 

근본불교대학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너무나 놀라운 빠알리 니까야의 완전성

출처 : 원불사(源佛寺)
글쓴이 : 단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