湯田豊『인도사상사』에서
이중의 진리에 관하여 나가르주나는 “두가지 진리, 즉 세속적인 덮힌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에 기초하여 모든 붓다는 법을 설했다”(24-8)라고 말하고 있다. 최고의 진리(Paramaartha, Paramaartha-satya, 眞諦, 勝義諦)란 사물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식이다. 그것은 사고 내지 인식의 어떠한 작용도 미치지 않는 사고작용의 영역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에 대하여 덮힌 진리(saMvRti, saMvRti-satya, 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만약 우리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진리는 열반이며, 덮힌 진리는 윤회이다. 최고의 진리에 입각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늙어서 죽는 것도 없다.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마침내 죽는 것은 최고의 진리에 관한 한 <덮힘(saMvRti)>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덮힘>을 제거하면 일체의 사물은 불생, 불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한 이 <덮힘>은 현실이다.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포함해 일체의 사물을 공이라고 간주했지만, 현상상태로서 그것들의 실재를 결코 논박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관한 한 나가르주나는 머리칼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꿈이나 환영과 유사하다. 눈을 뜨기까지 그것들은 가슴을 괴롭게 할만큼 현실이다.
그러나 일단 눈을 떠버리면 꿈은 아침에 생긴 이슬과 같은 것이다. 더 이상 꿈속에는 한 조각의 진리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는 연기의 법칙이 지배한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을 필요로 하며, 다른 것과의 관련에 있어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상태가 <덮힌> 것이다. <덮힘>이란 연기에 속하며, 본질적으로 다른 것에 제약을 받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며,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상생활을 중관파는 <관습(saMketa)>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일상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그것은 세간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잠정적인 약속이다. 그것을 우리들은 세간의 말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덮힘>에 대해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덮힘이란 모든 면으로부터 덮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ajNYaana)는 모든 면으로부터 모든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덮어 숨기는 까닭에 <덮힘>이라 말하는 것이다. 혹은 <덮힘>은 상대성으로서 상호의존을 의미한다.
혹은 또 <덮힘>은 결정(기호) 혹은 세간적인 관습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명칭과 명칭의 대상, 인식과 인식의 대상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프라산나파다』p.492) 중관파의 체계에 관한한 <최고의 진리>와 <덮힌 진리>의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가는 무의미하다. <덮힌 진리>도 또한 진리이다. <덮힘>을 제거만 하면 최고의 진리는 자연히 드러난다. 만약 지성 내지 사고라고 하는 형식을 통하여 관찰하면 최고의 진리는 덮혀져 버리고 연기의 세계로 된다.
그러나 일체의 사고작용을 정지시켜 버리면 덮힌 세계도 그대로 최고의 진리, 혹은 열반으로 된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윤회와 열반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라고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윤회와 열반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회와 열반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열반과 윤회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열반의 극한은 윤회의 극한이다.
그 둘 사이에는 조금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25-19∼20) <덮힘>이 없으면 덮혀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드러낼 방법도 없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덮힘>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덮힘>은 수단이며, <최고의 진리>는 목표이다. 일상생활을 손상시킴없이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중관파의 가르침이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일상적인 관습에 의존하지 않고 최고의 진리는 표현되지 않는다.(vyavahaaram anaa$ritya paramaartho na de$yate; 24-10)”라고 선언했다.(2000. 12.26; 자료갱신 2001.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