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중관사상 - 5. 空의 哲理

수선님 2018. 5. 13. 13:35

   5. 空의 哲理

    湯田豊『인도사상사』에서  

     

    『능가경』(sagaatha, 167)에 의하면 “인식(buddhi)에 의해 식별되는 사물에는 자성이 확정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언어로써 표현이 불가능하고, 자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서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나가르주나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나가르주나는 이성 혹은 사고에 의한 사물의 이해를 단념했다. 왜 그는 이와같은 이해를 방기한 것일까. 그는 사물을 <불생>으로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겨나지 않는 사물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고, 그것들을 인식에 의해 확인하려고 하는 정신의 작업은 무익한 열정이다. 더욱이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나가르주나가 <타트바>라 부르는 진실된 존재는 생기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이 타트바는 실로 불생인 까닭에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는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 『중론』 서두의 문구로서 유명한 귀경게는 대담하게 八不을 선언한다.

     

    팔불이란 사물의 <소멸>, <생기>, <단절>, <영속>, <동일성>, <부동성>, <도래>, <퇴거>에 대한 부정이다. 사물은 결코 어느곳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확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결코 어느 곳에 있어서도 사물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것으로부터, 그 양쪽으로부터, 또 원인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1-1)”라고 선언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성질이다. 사물 그 자체는 “환영과 같으며, 꿈과 같으며, 건달바성과 같다. 생기도 그와 같고, 지속도 그와 같으며, 붕괴도 그와 같다고 예증된다(7-34) ”고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자성의 생기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자성은 왜 생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다른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15-2).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사도 혹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는 상대적인 것으로, 독립의 존재는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시간을 부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이후·동시라고 하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데 생, 노 및 사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들은 산만히 논할 수 있겠는가.(11-6)

     

    결국 자성에 있어서는 세계는 생겨나는 일도 없으며, 멸하는 일도 없고, 정지되어 있으며, 갖가지 상태로부터 자유롭다(24-38). 『중론』에 대한 주석인 『프라산나파다』에서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존재자가 자성으로서 존재할 때에는 자성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까닭에 또 그것은 사라지는 것도 아닌 까닭에 이 세계는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 도 않을 것이다.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된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중관의 체계에서는 현상계에서 자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세계는 자성을 결하고 있다. 사물의 성질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18-7)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공이다.

     

    그러면 공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상태가 공이다. 따라서 공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라산나파다』)”라고 말한다.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타트바)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성을 결하고 있다(24-38). 따라서 사물이 자성을 결하고 있는 것이 곧 공이다. 그리고 이 공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을 설명하는 원리 즉 연기인 것이다. 사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 <연기>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asmin satiidaM bhavati)”라고 하는 연기의 법칙은 공을 뒷받침하는 공식으로 이해된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우리들은 연기를 공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비유적인 명칭이다. 그것이 곧 중도이다(24-18)”라고 말한다. 공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본래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의 철리는 이와같이 이중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염화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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