湯田豊
용수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中論』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으며, 그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廻諍論』『空七十論』『六十頌如理論』『廣破論』『寶行王正論』『勸誡王頌』『因緣心論』『菩提資糧論 』『大智度論』『十住毘婆沙論』『十二門論』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중론』으로, 이것은『중론』에 대한 주석서가 다수 제작되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용수 在世時에 제자로서 용수 사상을 선양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聖提婆(AAryadeva, ca.170-270)와 羅侯羅跋陀羅(Raahulabhadra, ca.200-300)이다. 성제바는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특히 外敎의 사상을 심하게 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그 격렬한 비판으로 인해 論敵에게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제바는『四百論』『百論』『百字論』등을 남기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백론』은 용수의 『중론』『십이문론』과 더불어 중국에서 三論宗의 기본 전적으로 중요시 되었다. 라후라발다라는 용수와 성제바의 제자로서, 이미『중론』에 대한 주석서를 지었다고도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고, 그의 현존하는 저술로는『般若波羅蜜多讚』『法華讚』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성제바와 라후라발다라는 용수와 함께 초기중관파로 분류되어지며,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중관사상의 기틀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용수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선양하여 중관파를 형성시키고 아울러 중관사상을 완성시키는데 기여한 사람들이 소위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이다. 그리고 이들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모두 용수의 『중론』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觀誓(Avalokitavrata,『般若燈論廣釋』의 저자)에 의하면『중론』의 주석가는 모두 8인으로, 용수 자신의 주석외에 붓다팔리타, 찬드라키르티, 데바샤르만, 구나슈리, 구나마티, 스티라마티, 바바비베카등이 주석서를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물론 한역으로만 전해지는 것으로 靑目釋의 『중론』과 無著의『順中論』등이 있지만, 실제 중기중관파로서 중관사상의 역사적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붓다팔리타, 바바비베카, 찬드라키르티이다. 이들의 생몰연대와『중론』에 대한 주석서는 다음과 같다.
佛護(Buddhapaalita, ca.470-540) 『根本中論註』
淸弁(Bhaavaviveka, ca.500-570) 『般若燈論』(PrajNYaapradiipa)
月稱(Candrakiirti, ca.600-650) 『明句論』(Prasannapadaa)
이 불호, 청변, 월칭의 각견해는 후에 중관파를 두개의 학파로 구분할 정도로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사상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곧 그러한 사상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월칭의『명구론』제1장 觀緣品으로, 월칭은 그의 저술 속에서 불호를 비판하는 청변의 견해를 다시 비판하여 불호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다. 즉『명구론』에 의하면 청변은 불호가 證因(hetu)이나 喩例(dRstaanta)등 논리식의 전개를 등한히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월칭은 중관파가 스스로 자립적 논증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청변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월칭은 청변의 緣起에 대한 이해와 또 청변이 주장명제에 「勝義에 있어서」라는 한정어를 붙이는 것등에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명구론』에 보이는 이러한 비판은 근본적으로 용수의 이제설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변과 월칭의 승의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하기위해 먼저 청변의 견해를 보기로 한다. 청변은 승의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勝義는 2종이다.
첫째는 現行없이 일어나며, 출세간적이고, 無漏, 無戱論인 것 이다.
둘째는 현행을 동반해 일어나 福德과 智의 資糧에 수순하고 淸淨世間智 라 일컬어지며, 희론을 갖는 것이다.(中觀心註 思擇焰)
이와같이 청변은 승의를 두종류로 나누며, 특히 청정세간지로서 일컬어지는 智를「聞思修로 얻어진 般若 智慧」라 부르며 그러한 반야지는「올바른 세속에 대한 簡擇」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세속에 대한 바른 이해는 승의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청변은 「眞實의 樓閣에 오르는 것은 올바른 세속이란 사다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中觀心論頌 3-12)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변에게 있어서 세속에 대한 바른 분별력은 승의의 반야지를 얻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따라서 그러한 구체적인 수단으로서 논리식이 중시되어졌던 것이다. 이에반해 월칭은 승의제란 모든 言說과 境界를 떠난 「無戱論의 勝義」만이 있을 뿐으로, 그것은 곧 正見의 境界라고 말하고 있다. 월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법은 正見과 虛妄見에 의해 법이 성취되어지는 2종류를 취해야 한다. 정견의 경계는 진실(=승의제)이고 허망견은 세속제라고 설하셨다.(입중론 제6-23)
즉 월칭에 의하면 승의제는 부처님 정견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언표가능한 것이란 오직 세속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월칭은 세속을 眞實世俗(tathya-saMvRti)과 非眞實世俗(atathya-saMvRti)의 2종으로 나누며, 세간에서 일반인이 진실로 인정하는 진실세속은 聖者의 입장에서는 단지 唯世俗(saMvRtimatra)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세간적인 언표에 의해 승의가 표현되어진다고 하는 청변의 입장과 언표불가능이라고하는 월칭의 입장이 상호대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중기중관파의 역사적 전개로서, 이러한 차이는 월칭의『명구론』에서 청변에 대한 비판을 통해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후대 티베트에서는 청변 계통을 自立論證派(Svatantrika), 불호·월칭 계통을 歸謬論證派(PrasaNGgika)로 命名해 분류하여 중관의 2학파로서 간주하고 있다.
중기 중관파에서 이와같이 사상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二諦說은 후기중관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관의 중심 개념으로서 이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후기중관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즈냐나가르바(JNYaanagarbha, ca.700-760)로서, 그는『二諦分別論』이라는 저술을 지어 이제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곧 『이제분별론』을 저술하는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二諦가 이미 구별되어 있음에도 大論師들 조차 어리석은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설에 어떠한 목적이 있겠는가. 그 까닭에 나는 이제를 구별한다.(제1송)
이처럼 즈냐나가르바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역설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그는『이제분별론』은 저술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이제분별론』의 저술에는 후기중관파에 이르기까지 같은 불교내에서 서로 대립되었던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적 대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그러한 사상적 대립은 청변과 월칭의 유식 비판에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청변에 의한 유식비판에는 중관의 이제설과 유식의 三性說이 명확하게 대립되어 나타나지만, 이러한 중관과 유식의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이제설에 대한 재정립이 중관파에게 요청되어졌으며, 그러한 사명을 수행한 사람들이 곧 후기중관파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즈냐나가르바는 『이제분별론』을 저술해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설을 통해 사상적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고자 한 사람이 후기대승불교의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샨타라크시다(Santara- ksita,ca.725-783)이다.
그는 이미『攝眞實論』(Tattvasamgraha)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지어 인도의 모든 사상을 불교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며, 아울러 주저인『中觀莊嚴論』을 저술해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중관장엄론』은 전체 97게송과 자신의 주석으로 이루어진 저술로, 곧 샨타라크시타 자신의 이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저서이다. 그에 의하면 승의제란 구체적으로「戱論이 寂滅」된 상태를 가리키지만, 승의제가 나타나는 言表의 형식은 승의에 있어 무자성에 대한 논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체법 무자성을 논증하기 위해 샨타라크시타는 불교이외의 모든 사상을 비판하며 또한 불교내의 사상에 대해서도 有部·經量部·唯識思想의 순서로 비판하여 일체법이 無自性·無我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중관장엄론』제1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自派와 他派가 설하는 일체의 존재는 진실에 있어서는 無自性이다.
一과 多의 자성을 떠나있는 까닭이다. 影像과 같이.
이것이 유명한「離一多性의 證因」으로 샨타라크시타는 이 증인을 사용해 승의에 있어 일체법 무자성을 논증해 가며, 그리고 그러한 무자성이란 결국 무아라고 말하고 있다(92게). 즉 샨타라크시타에 이르러서도 무아, 무자성의 논증은 절대적으로 중시되며, 아울러 그러한 논증의 사상적 흐름은 붓다, 용수의 근본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적 영향은 그의 제자인 카말라실라를 비롯해 하리바드라, 캄발라, 지타리, 아티샤등으로 이어져 후기중관파로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특히 샨타라크시타, 카말라실라, 아티샤등은 티베트 불교 교단의 확립에 중요한 공헌을 하는 까닭에 이 후기중관파의 사상은 불교가 인도에서 쇠망한 뒤에도 티베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인도의 중관사상은 7세기 후반 인도를 여행한 義淨(635-713)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 용수의 사상에 대해서는 西域의 鳩摩羅什(344-413)이 용수의 저술을 번역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 성제바의 『백론』은 삼론으로 중시되어 후에 三論宗으로 발전하게 되며, 특히 隋나라 吉藏(549-623)에 이르러 삼론종은 대성하게 된다. 길장은 앞의 세 논서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전 26부에 달하는 저술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중관의 기본 개념인 이제에 대해『 二諦章』을 저술해 자신의 이제에 대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길장에 의해 대성한 삼론종은 당의 현장(602-664)이 전한 유식계통의 法相宗이 성행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삼론교학에 대한 연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삼론에 대해 고구려의 實法師·印法師·慧灌등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혜관은 일본에 삼론종을 전달해 일본 삼론종의 初祖로서 추앙받게 된다. 신라에서도 元曉에 의해 『二諦章』『 三論宗要』『中觀論宗要』등과 같은 중요한 중관 계통의 저술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