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어떻게 닦나?

수선님 2018. 5. 27. 13:20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어떻게 닦나?


보리 행을 닦아 나가는데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어떻게 닦나? 그것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잘 나와 있다.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時)에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할 때에 조견(照見)오온개공(五蘊皆空)하고,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하였다라고 나온다.  


관자재보살, 보살도 보리 수행을 닦는 주인공이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무엇을 했나? 그것은 조견을 했다. 즉, 밝게 보았다. 무엇을 밝게 보았나? 오온(五蘊)은 우리 몸이다. 오온의 공(空)함을 밝게 보았는데 그게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은 조견[밝게 본다]는 것이다. 또, 반야바라밀을 관조(觀照)[본다] 즉, 보면 되는데, 보는 게 반야(般若)다.

 

이 세상에 보지 못하는 것은 늘 두렵다. 중생(衆生)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왜 두려운가 그것은 못 보기 때문에 두렵다. 죽음이 무엇인지 환히 보면 두렵지 않다. 이 생명이 무엇인지 환히 보면 시비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못 보는데서 황상 문제가 생긴다. 낮이나 밤이나 똑 같은데, 왜 밤이 무서운가? 그것은 밤에는 못 보니까 그렇다. 훤히 보이는 것이라면 겁내라 해도 무서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않보이면 무서워 한다. [무서워하지 마라] 고 말해도 무서워한다. 문제는 조견을 하는 것, 밝게 보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경전의 경문에는 [이 몸이 다 공함을 밝게 보고,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일체고액으로부터 벗어났다], [일체고액을 건넜다] 라고 되어 있다.

 

 

이 몸이 공하다고 했는데, 공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법공상(諸法空相), 제법은 오온(五蘊)인데, 이 몸이 공한 상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증(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했다. 이것이 공(空)이다.

 

 

   공(空)이라고 하는 것의 그 의미는 불생불멸의 [공], 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닌], 부증불감 [불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 몸 그대로가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닌 그 어떤 것을 밝게 보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밝게 보고 나니까. 모든 고통에서 그대로 벗어났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다. 이 몸이 불생불멸이고, 부증불감을 모르고, 보지 못한 것에서부터 온갖 집착과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몸을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니까. 공포심(恐怖心)이 생기고, 공포심이 생기니까. 악업(惡業)을 짓게 된다. 악업을 지으니까. 고통(苦痛)이 생긴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바짝 말라서 껍질이 벗겨진 고목나무를 보았는데, 그것을 귀신으로 잘못 보았다. 귀신으로 잘못 보니까. 무서워서 도망갑니다. 어두운데 도망가다가 보니까. 넘어지고, 자빠지고, 깨지고, 다칩니다. 이것이 중생심(衆生心)이다.

 

고목나무를 고목나무로 바로 보면 그것이 반야(般若)인데, 귀신으로 잘못 보니까. 이것이 망견(妄見)이다. 정견(正見)을 해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허망(虛妄)하게 잘못 보았다. 이것을 사견(邪見), 망견(妄見), 번뇌(煩惱)라고 한다. 그것이 착각(錯覺)이다.

 

 

그래서 중생의 허물은 착각, 망견, 사견, 여기에 있다. 귀신으로 잘못 보고. 망견을 가지므로 인해 공포심이 생기니까. 도망을 가게 된다. 이것이 업(業)이다. 이것이 미혹(迷惑)한데서부터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을 지으니까. 고통이 생기게 된다. 천천히 가고, 조심조심해서 간다면, 어두운 밤이라도 다치지 않을 탠데, 급하게 가니까. 넘어지고, 넘어지니까. 다치는 것이다.

 

 

이것을 혹업고(惑業苦)라 한다. 미혹(迷惑)하고, 악업(惡業)을 짓고 나서 고통(苦痛)을 받는다. 잘못 보는 원인에서부터 모든 중생의 문제가 시작하고 모두 다 끝장난다. 잘 보면 잘못될 일이 없다. 잘못 보니까. 잘못된 일이 생긴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도 어떤 때 속상하면, [내가 너의 아버지 잘못 맞나서 평생 고생했다]고 한다. 그럴 때 마다 아버지 편을 들 수도 없고, 어머니 편을 들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따라왔을까?

 

 

않따라 왔으면 괜찮을 탠데, [내가 누구한테 속았다]고 말하는데, 그럼 왜 속았을까? 라고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망견이요,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허망하게 보지 않으면 이런 일이 없다. 조견(照見), 정견(正見), 진견(眞見)으로 참되게 보면 그런 일이 않생긴다. 아무 일이 없다.

 

 

사견, 망견 이렇게 보니까. 이것이 일이 발생한다. 고목나무를 고목나무로 바로 보면 아무 일이 없는데, 이것을 귀신으로 보니까. 온갖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菩薩)과 부처님은 정견, 반야바라밀, 보리(菩提), 깨달음에 의지해서 사시는 분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보면 보리살타(菩提薩埵)는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密多故)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 보살(菩提)은 다른데 의지하지 않는다. 그 지혜(智慧)에 의지한다. 지혜를 등지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지혜로 돌아가면 문제가 없다.

 

 

세계의 어떤 문제도 지혜로 돌아가면 다 해결된다. 이것을 망견(妄見)과 집착(執着)으로 해결하려니까. 않된다.

 

 

보리살타는 무엇을 하는 분인가? 반야 바라밀다를 의지하는 분이다.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심무가애(心無罣碍),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취사(取捨), 취하고 버리는 것이다.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이라는 것을 밝게 보니까. 애증취사(愛憎取捨),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다. 이것이 사량계교(思量計巧), 번뇌업장(煩惱業障)인데, 중생의 모든 병은 잘못 보는것과 애증취사(愛憎取捨)하는 것에서 일어난다.

 

중생의 모든 병은 애증과 취사가 일어난다. 이것이 병이고, 이것이 고통이다. 어떤 것이 나란히 있는데,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한다든지,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취한다든지, 이것이 병이다.

 

 

모든 일에는 애증취사 이것이 있어서 번뇌와 망상에 생기는 것이다. 무가애(無罣愛)라는 것은 애증심(愛憎心), 취사심(取捨心)이 없다는 것이다. 무가애, 무가애는 그 애증과 취사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포(恐怖)가 없다는 것이다.

 

 

무유공포(無有恐怖), 두려움이란 취사심이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으면 공포심이 없다. 삶을 취하고 죽음을 버리고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꽃이 왜 두려움이 없는가? 꽃은 그냥 떨어질 뿐이다. 않떨어 질려고 억지를 쓰지 않는다. 그러니 피는 꽃도 꽃이고, 지는 꽃도 꽃이다. 그래서 하나의 봄이 될 뿐이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반야바라밀이요, 죽는 것도 반야바라밀이다. 이것이 해탈(解脫)이다.

 

 

그런데 중생은 그것을 잘못 보고, 애증심, 취사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하나를 취하고 나면, 하나를 버린다. 그런 취사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된다. 그리고 버리는 것이 않 버려지면 그냥 두려워진다.

 

 

그런데 이것이 다 없어진다. 어떻게 없어지는가? 밝게 보는데서 없어진다. 바로 무가애가 된다. 무가애 고로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다. 뒤바뀌고 꿈같은 세상과 그런 생각들이 다 멀리 멀리 달아나 버린다.

 

 

그게 무엇인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을 찾는 생각, 이것이 몽상(夢想)이다. 꿈을 꾸면 자기 집에 누워 있는데, 자기 집이 어딘지 모르고, 자기 집을 찾는다고 고생을 한다. 그것이 몽상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로 보면 일체중생이 다 해탈되어 있는데, 중생이 스스로 그것을 잘못 보고 해탈을 자꾸 찾으려 한다.

 

 

반야바라밀로 보면 일체중생이 다 행복한데, 그것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또 행복을 찾는다. 이것이 전도몽상이다. 봄을 아는 사람에게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전부 봄인데, 봄을 모르는 사람은 꽃은 여기 있는데, [봄은 어디 있는가?] 라고 생각하고 계속 꽃 속에서 봄을 찾는다.

 

 

이것이 전도몽상이기 때문에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또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이 바라밀다고로, 삼세제불은 반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득아욕다라삼약삼보리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혜의 완성이 보리(菩提)다. 보리가 바로 지혜고, 지혜가 보리다.

 


이것이 반야바라바라밀이고, 이것이 바로 보리다. 금강경에서는 [삼세제불급(三世諸佛及) 제불(諸佛)아욕다라삼약삼보리법이 제경차경출(諸經此徑出)이라] 다 이 반야바라바라밀법에서 나왔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지혜인데, 이런 지혜를 이루려면 그 지혜를 돕는 행위가 필요하다.

 

 

사람으로 말하면 건강한 것이 최고인데, 건강을 하기 위해서는 밥도 먹어야 되고, 옷도 입어야 되고, 쉬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행(利行), 이로운 행위이라 한다. 반야바라밀에 이로움을 주는 행위다. 조행(助行)이라 할 수 있다.

 

 

돕는 행위 그것이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지혜 바라밀이다. 보시를 하면 그 반야바라밀을 이롭게 한다. 다 나를 돕는 것이다. 일반 세속적으로 주고받는 것은 도와준다.

 

 

수행(修行)에 있어서는, 남을 돕는 것이 없다. 전부가 자리(自利)이다 이게 바라밀이다. 나의 바라밀을 닦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바라밀을 닦는 것이 아니다. 바라밀은 번뇌(煩惱)를 지혜로 바꾸는 것, 중생을 부처로 바꾸는 것, 중생도 부처도 없는 자리로 가는 그것이 바라밀이다.

 

 

처음에는 중생에서 부처로 가고, 그 다음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는 필경 무불급중생으로 간다. 병난사람이 처음에는 병원으로 가는데, 나중에는 병도 병원도 없는 세계로 가야 된다. 그것이 건강한 사람이다. 병은 고쳤는데, 아직까지 약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병원에서 퇴원을 하지 못했다면 덜된 것이다.

 

 

또 성불(成佛)을 하기는 했는데, 아직까지 부처의 틀 속에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성불은 아니다. 필경 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이라고 서원(誓願)을 한다.

 

 

마지막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는 세계를 이루어야 된다. 서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진짜 건강한 사람은 약도 모른다. 몸이 항상 아픈 사람이 약을 많이 알고 있다. 어디에 무엇이 좋고 어디에는 무엇이 좋은지, 아주 골치 아픈 사람들이다. 건강치 못하다는 증거다.

 

 

약(藥)을 많이 아는 사람은 약도 모르고, 병(病)도 몰라야 된다. 약도 없는 세계 그것이 진짜 건강한 세계이다. 부처도 중생도 없는 세계, 필경 무불급중생 그곳에 가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인데, 그것을 돕는 것이 있다. 그 중에는 보시바라밀도 반야바라밀을 돕는 것이고 전부 자기를 이롭게 하는 행위이다.

 

 

지계(持戒), 계법(戒法)을 지키는 것이 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계(戒)를 지키면 내가 좋은 것이지, 딴사람이 좋은 것 아니다. 인욕, 참는 것, 참으면 나쁜 일이 없다. 모든 일이 참지 않는데서 생긴다. 참으면 나쁜 일이 없고, 참으면 다 이길 수 있다. 참지 않으면 다 진다. 이것이 인욕바라밀이다.

 

 

한번 참으면 오래 오래 편안하다. 이것이 진짜 법문이다. 능음경에서는 참는 것을 아주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다. 참는 것이 무엇인가? 비위에 상한 음식이 지금 입에 들어와 있는데, 음식을 확 뱉어도 참는 게 아니고, 급하게 삼켜도 참는 게 아니고, 가만히 딱 물고 있는 것, 그것을 참는 것이라고 했다.

 

 

불토불탐(不吐不嗿), 토하지도 않고 삼키지도 않는다. 아주 역한 비위에 상한 음식을 입에 물었다면, 그러면 금방 물마시거나 삼키면 참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다닥 뱉어내도 참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물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물고 있으면 녹아서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이게 뒤탈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고 후다닥 삼켜도 잘못하면 탈이 나고, 뱉어도 치우려면 일이 많다. 불토 불탐으로 딱 넉넉잡고 약 삼십 분정도 있으면 그냥 녹아 버린다. 이것이 인욕이고, 전부 바라밀이다.

 

 

정진(精進)바라밀, 아무리 좋은 선행이라도 오래 오래 끊임없이 해야지, 하다 말다 그러면 않된다. 그리고 선정을 잘 닦아서 나쁜 일은 멀리하고, 좋은 일은 집중한다. 나쁜 일을 멀리 여이지 않으면 삼만하고 좋은 일을 집중하지 않으면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나쁜 일은 멀리 여위어 버리고 좋은 일은 집중해서 잘하면 선정이 생겨서 반야바라밀이 다 돕는다. 그래서 육바라밀 중에서는 [선정, 지혜], 이 두 가지 정혜가 최고다. 이것을 화엄경 보살문명품에서는 육바라밀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정(禪定)과 지혜(知慧) 즉, 정혜(定慧)가 왕궁으로 말하면 [임금님] 이고, 왕궁은 있어봐야 소용없다. 왕이 최고다. 그래서 선정, 지혜가 [왕] 이다. 인욕, 정진이 궁성이고, 보시, 지계가 궁을 세우는 궁터라는 것이다.

 

 

보시, 지계가 없으면 궁터가 없기 때문에 왕궁이 않 이루어진다. 또 인욕과 정진이 없으면 왕성이 없기 때문에 왕궁을 보호할 수가 없다. 궁터만 있고, 임금없는 도성이 어떻게 도성인가?. 정혜가 갖추어지면 왕이 왕좌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십바라밀, 지바라밀, 역바라밀 등이 있는데, 이것은 그 왕이 선정을 자꾸 베풀어서 온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 이후에 나타나는 네 가지 바라밀 이것이 십바라밀인데, 전부가 보리행이다. 반야바라밀도 보리행이고, 선정바라밀도 보리행이다.

 

 

전부 이게 하나의 깬 마음, 밝은 마음이 일어나면 이렇게 무진장 바라밀행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하나의 깨지 못한 마음, 잘못 보는 마음,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면 무진장 악행, 악업이 일어나서 중생을 똘똘 뭉쳐서 괴롭게 할 수가 있다.

 

 

불교는 이런 것이다. 보리심을 닦아 가는 것이 불교이지, 다른게 아니다. 그 보리심을 닦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뿐이다. 그 핵심은 보리심이다.

 

 

선문염송이라고 우리나라 보조스님의 제자 혜심스님이 편집한 것이 있는데, 30 권이다. 그 30 권중에 제일 첫 번째 나오는 항목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세존이 미리 이가왕궁의 미출 모태 도이필 하셨도다. 나무 아미타불”]

 

 

이것이 바로 반야다. 선(禪)에는 인도선(印度禪)도 있고, 동아시아 선도 있는데, 동아시아 선은 반야선(般若禪)이다. 선종에서 인도선은 선정종이다. 동남아 아시아 쪽에 있는 선은 전부 선정을 중심으로 하는 선이다.

그런데 달마선 쪽에서는 전부 반야를 중심으로 하는 반야종이다. 이게 아주 근본이 다르다. 그리고 전통적인 이 달마선 개통에서는 그 근본 경전이 화엄경이고, 동남아시아 쪽에서 닦는 선의 근본은 아함경이다. 근본이 다르다.

 

 

반야이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을 반야학자라 하고, 화두학자라 하고, 도학자라 한다. 선정학자라 하지 않는다. 반야학, 화두학, 도학이라 한다. 화두, 반야, 도 이것은 전부 지혜다. 이 지혜의 눈을 뜨신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세존이 미리 도솔천에서 옮기기도 아니 했을 적에, 이가왕궁하고, 이미 왕궁에 강림하셨는데, 이것이 반야이다.

 

 

미출 모태, 어머니 모태에서 아직 나오지 아니 했을 때, 도(度) 이필이라, 사람들을 이미 제도해서 다 마쳤다. 이것이 지혜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듣지, 모기나 개구리나 이렇게 태어났으면 어떻게 듣을 수 있는가? 못 듣는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듣고, 사람으로 태어 났어도 절에 와야 듣고, 절에 와서도 법회에 참가해야 듣지, 어떻게 듣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절에 와도 너무 바쁘면 법문을 못듣고 그냥 가게 된다. 그리고 법문을 들어도 근심걱정가 너무 많으면 않들린다.

 

 

이 지혜의 눈이 한번 떠지면 일체의 나쁜 일이 없다. 도솔천에서 떠나기 전에 왕궁에 오셨고, 어머니 태에서 나오기 전에 중생제도해서 마쳤다. 이것이 지혜다. 내가 미혹하고, 내가 무지해서 나쁜 일이 많은 것이지, 실제는 나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럼 일이 없으면 무엇을 하는가?

 

 

원력을 새워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일 그게 자비희사이다. 부처님 사업이다. 부처님은 지혜하나로 자기 문제는 다 해결했고, 그 다음에 할 일은 중생에게 기쁨 주는 일만 남았다.

 

 

그게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인데, 자심(慈心)이 무량하고, 비심(悲心)이 한량없고, 희심(喜心)이 끝이 없다. 또 어떠한 일을 하여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하여도 다 버린다. 남겨놓으면 그것은 덜된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즉시 그 공덕까지도 다 주어야 한다. 그 공덕을 내가 붙잡고 있으면, 다 짐이 되고 성인이 않된다.

 

 

가끔 드라마 보면 재미 있는데, 실제 그렇게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들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고 말한다. 그러나 키웠으면 그냥 보내 버려야 한다. 붙잡고 있지 않아야 한다.

 


 시경에 보면 [자식은 쑥과 같다. 쑥이 어릴 때는 좋은데, 쉬어 빠지면 못쓴다. 쉰 쑥은 먹으면 쓰기만하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 다 고인들의 지혜다. [자식은 쑥이다] 쑥이란, 어릴 때는 좋지만 그냥 자꾸 크면 못쓴다.

 

 

그것 먹으려고 했다가는 입만 쓰지 않된다. 자식도 다 키웠으면 보내야 한다. 키우기는 키웠는데, 보내지를 못해서 병을 얻거나 자식 키우고 나서 병든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까 사무량심 중에 마지막이 버릴 사(捨)다. 자비희(慈悲喜)는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마음이다.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주는 마음이 비심이다. 희심은 중생이 잘되는 것은 내가 잘되는 것과 똑같이 기뻐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어떤 마음이든지 자기가 소유하지 않고, 다 버린다. 하나도 자기가 갖는 것이 없다. 일체중생에게 기쁨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되, 남겨놓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 다 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런 마음이 건강한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도인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삶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여러 가지 보리행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으로 살면 항상 불생불멸을 환히 볼 수 있다. 그게 조견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선에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이 육조단경인데, 육조단경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무사 대열반이 원명상적조로다, 나무아미타불, 겁화소해저하고 풍고산산격이라도 진사적멸락은 열반원상 여시로다, 나무아미타불”]

 

 

반야바라밀로서 보면, 몸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 세간 온갖 만법이 그대로 무상 다 열반이다. 높고 높은 대열반의 세계다. 대열반 그것이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지금 우리가 무상 대열반 속에 있다.

 

 

그런데 스스로 이것을 잘못 보고,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것으로만 본다. 열반을 생사로 보는 것이다.

 

 

[무상대열반 속에서 우리가 잠자고 숨 쉬고 있구나] 이걸 믿는 것이 신심이다. 그 육조단경이 거짓말 했거나 반야심경이 거짓말 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남았겠는가? 그것 못살아 남는다. 벌써 없어 졌다. 그리고 무상대열반(無常大涅槃),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 끝이 없다는 것이다.

 

명자는 항상 밝은 것이다. 늘상 밝아서 상적조라, 언제나 찾아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늘 비추고 있다. 이게 적조(寂照), 이것이 마음이다.

 

 

요즘에 기가 막히는 말들이 많은데, 뇌 과학을 하면 불교를 안다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뇌라는 것도 우리 몸이기 때문에 손, 발, 눈과 같은 물질이다. 소도 뇌를 잘 고치면 건강할 수 있고, 소도 뇌가 있고 사람과 똑 같다.

 

 

그러나 반야는 그런 물질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공공 적적이라 한다. 반야의 첫째 특징은 공공 적적하다. 두 번째 특징은 소소영영하다. 밝고 신령스럽다. 이것을 원명이라 하고, 적조, 지혜라고 한다.

 

 

그래서 물질로 관찰이 되고, 실험으로 관측되는 것은 몸과 똑같다. 몸의 체세포나 뇌세포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뇌 과학하면 다 도통하는 줄 아는데, 이것이 미혹망견이다. 부처님이 그것을 깨달았다. 무상대열반이란, 원명상적조라, 둥글고 밝아 항상 고요하면서 밝게 비춘다.

 

 

겁화(劫火)라는 것은 이 지구가 마지막으로 없질 때, 일어나는 불인데, 바다 밑을 다 태우고, 바람이 불어서 산이 서로 부딪치더라도, 진상적멸락은 원명상적조한 무상 대열반에 참되고 항상 하는 적멸낙이라, 생멸없는 적멸락은 열반상여시라. [열반상은 항상 다름이 없다] 바다 밑이 불에 타고, 산과 산이 부딧쳐도, 무상대열반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이 반야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이 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망상을 가지고 이 생각 저 생각해서 그것이 불교인 줄 알고 그것을 도인 줄 알면 어림도 없다. 그것은 순전히 번뇌업이고 생사업이다. 번뇌만 자꾸 키우고 생사만 연장할 뿐이다.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애증취사심을 버리고, 공포심을 버리는 것이다.

 

 

공포심, 애증심, 취사심 이런 것 다 버리고 오직 도를 믿고 실천하면 그것이 보리심이고, 그것이 보리행이다. 그래서 도를 깨치고 나면, 서산스님의 법문이 있는데, 그 법문 중에 [주야는 천개 합이요(주야 낮과 밤은 하늘이 열렸다 다쳤다), 밤과 낮은 하늘이 열고 닫고 하는 것이다. 춘추는 지사 생이라(봄과 가을은 땅이 죽고 나고 하는 것) 봄은 땅이 나는 것이고, 가을은 땅이 죽는 것이다] 상당 대광명,(항상 비추고 있다) 이것이 깨친 분의 법문입니다.

 

 

[상당 대광명이라], 잠잘 때도 광명을 비추고 있고, 밥을 먹을 때도 광명을 비추고 있고, 갈 때나 올 때나 상당대광명 [여하시 대광명], 어떤 것이 대광명입니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도인이 말씀하시기를, [목전(目前)에 무이초(無異草)], 눈앞에 다른 풀이 없다고 하셧다.

 

 

눈앞에 다른 풀이 없다. 그래 이런 법문 한번 들으면, 오래오래 보시를 닦고, 지계를 닦고, 인욕 선정을 잘 딱은 사람은 바로 깨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다. 그래 이런 반야바라밀을 잘 닦는 것이 그게 내가 나를 찾는 길이고,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절을 지극히 해도, 전부 다 그 길이다. 전부 보리로 가는 길이지, 딴 길이 없다.

 

 

[가가문전에 통장안이라]. 집집마다 전부 서울로 가는 길이 있다는 말이다. 그 경전만 잘 읽어도, 바로 이렇게 보리를 이룰 수가 있고, 기도만 잘 하셔도 되고, 하여튼 신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잘 닦으시면 그냥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다.

 







수보리님의 블로그에서 http://blog.daum.net/haha723/14000382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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