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해탈

수선님 2018. 5. 27. 13:12

무아와 해탈

 

금강경에 보면, 3십 2분 가운데 제 2십 9분에서 -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를 보고, 약래 약거, 약좌, 약와, 온다고 하거나 간다고 하거나 앉는다고 하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시인불해 아소설의, 이 사람은 여래가 말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이고, 왜냐하면 여래자, 여래라고 하는 분은, 무소종래 역무소거 [무소종래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오는 곳이 없다], [역무소거라고 하는 것은 또 어디로 가는 데가 없다] 고명여래,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

 

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제 3 분 대승정종분에서는 응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하되 실무중생득멸도자니라, 무량무수무변중생, 한량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였으되, 실무중생득별도자, 중요한 말씀인데, 진실로 중생이 제도를 얻은 중생은 없다. 이것이 아주 핵심이다. 무량무수무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는데, 제도를 얻은 중생은 없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보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중생을 다 제도를 했는데, 제도 받은 중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다. 무아는 무생, 태어남이 없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무생이라는 것이다. 태어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 무아, 무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체, 본체가 없다. 본성이 없다. 이것이 무아다. 무체요, 무성이요, 무생이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면, 무형이요, 무상이다. 형도 없고, 상도 없는 그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이 무아 하나를 몰라서 그 고생을 한다. 꿈꾸는 사람이 꿈하나 못깨 가지고 꿈 속에서 그 고생을 하고, 술 취한 사람이 술 하나 그것을 마셔 가지고 그 고생을 한다.

 

술 않마시면 일없고, 꿈 않꾸면 일없다. 이 무생, 무체, 무형, 무상, 무아 이것 하나를 몰라서 아(我)에 딱 걸려 가지고 낚시밥이 된 것이다. 그 아(我)에 걸려 가지고 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인연법인데, 인연법은 바로 무아법이다. 무아는 인연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중생을 다 제도했는데, 제도받는 중생이 없으며, 어떻게 해서 부처님을 보고 온다고 하거나 간다고 하거나 앉는다고 하거나 눕는다고 하거나 하면 여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인가?

 

그 이유는 부처님은 어디서 온 것이 없고 가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는 말씀이다. 이것에 대해 결론을 이야기하면 무아법이고, 무생법이다. 태어남이 없는 법이고, 자아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왜 무아며, 왜 무생인가?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함경 중에서 별역잡아함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다. 그 열 두 번 째, 제 12 권에 보면, 중요한 문답이 게송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아주 중요한 법문이 있다.

 

석실 비구니 수행자하고 마왕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송이 있다. 마왕이 하는 심보는 뻔하다. 나를 주장해서, 나에 근거해서 향락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그것이 마(魔)가 하는 일이다. ‘마’라고 하는 것은 나(我)가 없으면 ‘마’가 않되는 것이다. 무아를 주장하는 마는 없다.

 

그래서 제일 자기를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전부 마(魔)다. 자기를 내세우게 되면 권력을 주장하고, 자연히 향락을 주장하게 되어 있다. 내가 없는 향락 없고 내가 없는 권력은 없다.

 

마왕이 다가와 게송으로 질문을 한다.

 

중생시수조 - 중생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중생조작수 - 중생을 만든것은 누구입니까?

운하명중생 - 어째서 중생이라고 이름합니까?

중생하소취 - 중생은 어느 곳으로 갑니까? 라고 하였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태어난 생명체다. 그런데 이 중생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중생을 만든자는 누구며, 왜 중생이라고 하며, 중생은 어디로 모두 가느냐? 많이 질문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석실 비구니 수행자가 게송으로 대답하기를,

 

[중마는 생사견이라] - 많은 마군들은 사견을 낸다. 이 사견이 무엇인가? 나를 보는 견해가 바로 사견이다. 무아를 보는 견해 그것이 정견이다. 따라서 무아를 보는 그것이 정견이고, 자아를 보면 그것은 사견이다.

 

그러면 누가 마(魔)인가? 우리 모두가 마(魔)다. 그 자아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탐애심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탐심과 애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저 물건을 탐하고 물건을 좋아해도 그것은 자기라고 하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저 물건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탐할 때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를 위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탐심과 애착은 전부 그것이 아상(我想)이다. 나없는 아상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믿겠습니까? 나(我)라는 것이 사라지면 탐애가 사라진다. 탐애의 뿌리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 탐애심이 않 이루어지면 분노가 생겨난다. 그리고 화가 난다. 그래서 종종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것이 전부 나(我)다. 그것뿐이다. 그래서 세 가지다.

 

나(我)라고 하는 집착하는 그 아견과 그 나를 위해서 자꾸 탐하고 애착하는 탐애와 그 탐애가 않 이루어지면 화가 나고 분노가 나는 그것이 중생이다. 이것이 탐진치다. 그러니까 핵심은 아상이다. 내가 있다 라고 보는 생각 그것이 바로 아상이고 그것을 사견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도나 수행을 얼마만큼 했다는 사람도 이 아상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몇 년 수행했다. 몇 년 공부했다. 박사됐다고 떠들어 봤자, 조금만 약올리거나 부회(府會)지르면 그냥 본 모습이 막 나온다. 이것을 본지풍광이라고 한다.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상이다. 전부 아상이다.

 

아상을 떠나서는 없다. 전부 아상이라고 하는 쓸데없는 허울을 덮어 쓰고 돌아 다니는 것이다.

 

[ㅇㅇ 이다.] 라고 하면서 가는 사람마다 명암을 턱턱 주고 있다. 누가 명암을 달라고 했나? 그게 전부 아상이다. [ㅇㅇ 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꼴은 보기 싫다. 딱 보기 싫다. 아상 그것을 내세워 가지고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인데, 그것을 조금도 못 고친다. 불교를 50년 60년 했다는 사람이 명암을 더 주고 있다.

 

가만히 보면 그 명암을 가지고 어디다 쓸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생사해탈을 할 것인가? 열반락을 얻을 것인가? 아무짝에도 못쓰는데 순전희(純全) 그 아상, ‘나‘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 짓을 한다. 자기를 위한 탐애심이 않 채워지고 반대로 나올때는 분노가 막 폭발을 해서 완전히 빠져서 속아 사는 것이다.

 

탐심에 속아 살고, 분노에 속아 사는 것이다. 수행을 웬만큼 한다는 사람도 여기에 다 속아 넘어 간다. 그게 전부 마(魔)다. 이 마구니가 신장 속에도 들어 있고, 골수 속에도 들어 있고, 혈관 속에도 들어 있고 그래서 그냥 숨어서 재주를 부리는데, 이것을 항복시킨다는게 정말 어렵다.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무아라고 떠드는 것도 그게 아상이다.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무아를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마구니가 설법을 하면 전부 마소리가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상을 가지고 설법을 하면 법 자체가 전부 자기를 내세우는 수단 밖에 않된다. 법문이라는 것은 아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법문이지, 아상을 자꾸 둔갑시켜서 더 윤회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항상 아상에 속는 것이다.

 

[중마는 생사견] - 모든 마구니들은 삿된 견해를 내어서

[무유 중생상이라] - 중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가공이취회라] - 나라고 하는 것은 거짓 가, 빌 공, 거짓이란 말은 일시적으로, 공이란 아주 부실하게 불안정하게 모일 취, 모일 회, 모여 있는 것 뿐이다.

 

[도무유중생이라] - 도무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비여이인중연], [화합유거용이라]

비유해서 말하면, 여러 가지 인연으로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수레라고 하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

 

수레에다 비유한 것이다. 나는 바로 수레다. 자동차에다 비유하면, 자동차라고 하는 것도 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부품으로 만들어 진다. 중연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여러 가지 부품으로 자동차가 된 것이지, 자동차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부품이 자동차냐? 저 부품이 자동차냐?

 

아니다. 그런데 중연으로 화합해서,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해 가지고, 유거용이라, 수레라고 하는 작용이 있다. 우리 몸 덩어리가 이 수레와 같다는 것이다. 온갖것이 자동차 부품처럼 모인 것이다. 이것이 중연화합이다.

 

그러니까 이런 작용이 있지만 사실은 그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것이 마치 가공이라, 거짓으로 부실하게 모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모인 것인가?

[응개입이역이하야] - 오온, 십팔계, 육입(안이비설신의)이 모인 것이 자동차와 같다.

 

[인연화합유라]] - 이게 중요하다. 인연으로 화합해서 이 ‘나’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부실하게 있는 것 뿐이지, 인연화합으로 떠나서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연화합으로 있는 것이다. 

 

[업연고로 취하고] - 이 ‘나’를 자꾸 만들어 가는 업의 인연으로 이 몸이 모이고, 생기고,

[업연고로 산멸이라] - ‘나’를 지속 시키지 않는 업이 일어날 때는 이 몸은 사라진다.

 

이 이야기를 별역잡아함경에서 하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 ‘아’가 바로 ‘무아‘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이게 또한 연기법이기도 하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우리 몸은 그대로 무아이고, 무아는 그대로 무생이다. 생긴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어째서 이 몸이 무아요, 무생인가?  

 

백설인형에다가 한 번 비유를 해보면, 흰 눈으로 인형, 즉 사람을 만들었다. 흰 눈으로 잘 뭉쳐서 사람 인형을 만들어 놓으면 그 순간에는 영판사람같이 보인다. 그런데 사람같이 보이는데, 사람이 아니다. 눈(백설)일 뿐이다. 그 백설인형은 분명히 사람형상(인형)인데, 사람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중연이라고 한다. 많은 인연이라고 한다. 분명히 형상은 사람형상인데, 사람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눈이다. 그리고 눈동자 박힌 것은 전구같은 것으로 했을 것이다. 사람은 없는 것이다. 눈과 거기에 부품으로 쓴 부속품일 뿐이다. 

 

그러니까 인형이 나타났지만 인형은 생긴것이 없다. 눈과 부품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무생이라고 한다. 그 자체가 없다. 그것을 무아라고 한다. 그게 가공이고 거짓이고, 아주 부실한 것이다. 사람이 아닌데 사람처럼 그렇게 해 놓았으니 일시적이고, 거짓이다. 

 

부실하다는 것은  눈 그 자체도 언제 녹을지 모른다. 햇빛만 조금 따뜻하면 그대로 녹아 버린다. 우리 몸도 잠시 업연으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백설인형이다. 이 몸이 생겼지만 이 몸은 이 몸 아닌 것으로 다 이루어져 있다. 몸이라고 하는 자체가 없고 몸은 몸 아닌 요소로 다 이루어져 있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몸 아닌 요소가 무엇인가? 이 몸에는 몸이라는 자체요소는 하나도 없고 전부 뼈, 골수, 물, 피, 체온인데, 지, 수, 화, 풍 빼면 몸 자체가 있나? 그래서 몸이 생겼지만 몸 자체가 없으니까 생긴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무생이라고 한다.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그런데 이 형상이 있는 것하고 그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 생각도 생각 아닌 것으로 다 이루어져 있다. 생각 속에 그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전부 어디서 본 것 일어나고 들은 것 일어나고 만져본 것 일어나고 모두 밖에서 경험했던 것이 그냥 일어나지 그것 빼면 아무것도 없다. 

 

생각은 생각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은 사람 아닌 것으로 다 이루어져 있다. 눈사람은 눈사람 아닌 것으로 다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것을 무성이라고 한다. 자체의 성격이 없다. 무성은 무생이고 무생은 무아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그 형상에 속아서 거기다가 탐심과 애착을 일으키고 그 탐심과 애착으로 분노가 폭발해서 그 탐애와 분노의 감옥에서 못나오니까 그것을 윤회라고 한다.

 

윤회는 탐애와 분노다. 이게 끝임없이 계속된다. 아무것도 애착을 느낄것이 없는데, 애착을 느끼고, 아무것도 분노를 느낄것이 없는데, 분노를 느끼다. 그래서 이 윤회라고 하는 것은 [취사(取捨)], 취하고 버리는 것인데, 버리는 것은 분노고, 취하는 것은 탐애다. 그러니까 버리는 것은 싫어 한다. 화내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다. 탐애는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탐하고 애착을 느낀다.

 

이게 전부가 중생의 생사다. 생사는 계속 되풀이 되니까 그것을 윤회라 한다. 그래서 무아 하나 그것을 몰라 가지고 그 고생을 한다. 꿈꾸는 사람이 꿈에서 못 깨어나 가지고 그 고생을 한다. 전부가 알고 보면 중생이라는 것이 전부 자기를 위한 탐애 그 뿐이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참 보살 마하살이 되는 것이다. 큰 사람이 되고, 보살이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무엇이 지혜냐? 무아를 깨달은 지혜가 그게 지혜다. 무아를 못깨달으면 전부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못쓴다. 둔해 빠져 가지고 그렇게 된다. 이게 아주 명백하고 간단한데, 만날 속는게 자기다. 이 마(魔)가 않 박힌데가 없다. 그런데 마라고 하면 싫어 한다. 좋은 소리만 들을 바에야 그게 무슨 가르침인가?

 

왜 마라고 하는가? 그것을 반성을 해서 깨달아야 될텐데, 내가 왜 마(魔)냐고 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아상이다. 전부 이 모양이다. 이 나(我)한테 속는다. 그래서 이게 하루 이틀에 된것도 아니고 해서 아주 심각하다.

 

의상대사 제자들이 스님에게 물었다.

 

[이 몸 있는 그 상태로 법신을 그대로 볼 수 있을려면 어떻하면 됩니까? 이 몸 그대로 비로자나 법신불을 볼려면 어떻게 하면 봅니까?]

 

아주 심각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의상스님이 게송으로 대답하시기를,

 

[제연은 근본아하고, 일체는 법원심이로다]

[어언은 대요종이요, 진실은 선지식이로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인데, 이 말씀이 어디 있느냐 하면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隨錄)이라는 책이 있는데, 의상스님이 그 화엄일승법계도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다가 시를 짓고 그 시에 대한 설명을 붙인 저술이 있다.

 

그런데 그 저술을 제자들이 나름대로 나름대로 다 해석을 했다. 그 해석된 책을 한 군데 모아 놓은 것이다. 기가막힌 법문이다.

 

‘나’, ‘나’라고 하는데 ‘나’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나‘라고 하느냐? 흔히 가슴을 가리키는데 그 가슴 뚫어봐야 뭐가 있나? [제연은 근본아다.]

 

의상스님 법문이다. 법성게 외에는 시로써 남긴 법문이 잘 없다.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다.] 이런 말씀이 없다. ’나’라고 할 때 ‘나’는 무엇이 몸 속에 어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처럼 하는 이것은 순전히 사견이다.

 

그런데 의상스님은 제연, 모든 인연이 근본‘나’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 몸, ‘나’라고 하는 것은 ‘나’아닌 모든 요소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 탁 들으면 바로 무아를 깨달을 수 있는 법문이다.

 

바로 믿으면 된다. 희미하게 듣는다든지, 듣고 나서 무엇이 그냥 들은둥 마는둥 하면 이게 고생하게 되어 있다.

 

 [제연은 근본아다] - 모든 인연은 근본'나'다. 제연을 떠나서 내가 없다. 제연은 무엇인가? 물도 제연이고, 하늘도 제연이고, 흙도 제연이고, 공기도 제연이고 제연은 ‘나‘아닌 모든 요소를 말한다.

 

제연은 ‘나‘아닌 모든 요소를 말한다. 근본 ’나‘는 ’나‘아닌 모든 요소로 된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있는 것이고, 부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릇도 그렇다. 그릇이라는 무엇인가? 모든 요소로 된 것이다.

 

흙이라든지, 물이라든지 가운데 여러 가지 않들어 가고 다 빼고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릇은 모든 인연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연은 그릇이다] 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중생은 이것을 모른다.

 

[일체는 법원심이라] - 일체 모든 것은 법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다.

마음이라고 하니까 어디 머리 속에 들었다. 심장 속에 들었다고 하는데 이게 순전히 마구니 견해고 사견이다.

 

의상스님의 말씀은 [일체는 법원심이라.]

- 모든 것은 마음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는 마음이 없다. 마음은 마음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연기법이고, 무아법이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어언은 대요종이라] - 말씀언자, 이 말은 큰 바탕이 된다. 요종, 중요한 기본이 된다. 서로가 깨우침을 받고 깨우침을 주고 하는 [어언]이 그렇게 중요하다.

 

[진실은 선지식이니라] - 선지식, 선지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진실한 것, 진실이 그게 선지식이니라.

 

이렇게 해놓고 마지막으로 의상스님이 한 말씀하셨다. 

 

[여등은 선용심이니라] - 너희들은 마음을 잘 쓸지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용심을 잘하는 것이다. 용심을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상을 일으키지 않는 그게 용심이고, 또 자기 무아의 세계로 돌아 가고자 노력하는 그게 용심 잘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공경이요, 공양이요, 보시요, 회향이다.

 

이게 무아의 실상으로 돌아가는 수행이다. 그런데 아상에 잡히면 아만이 가득차 가지고 공경을 못한다.

 

- 모든 죄악은 아상에서 나온다.

그래서 공경하고, 공양하고, 보시하고, 회향하는 것은 본래 내(我)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 가는 것이다.

 

나그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바로 우리가 수행으로 권장하는 공덕이다. 그게 용심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법문을 했다.

 

그런데 이 법문을 듣고 표훈스님이 다섯 가지 관법을 지어 가지고 의상스님께 받쳤다. 이것을 [오관석 五觀釋]이라고 한다.

 

오관이 무엇인가? 실상관, 무주관, 성지관, 연기관, 인연관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전부 실상이요, 머뭄이 없고, 연기요, 심성이 일어남이요, 인연이다] 라고 해석을 해서 의상스님에게 드렸다.

 

그러니까 의상스님이,

 

- 옳다.

 

라고 했다. 이런 회상이 어디 있나? 기가막힌 회상이다.

 

[我是諸緣 所成法 아시제연 소성법]

[我緣以我 得成緣 아연이아 득성연], - ‘나’라는 것은 모든 인연으로 이루어진 법이다.

[제연은 이하득성연이라] - 모든 인연은 나로써 인연을 또 이룸을 얻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물을 마시면 그 물은 몸에서 피가 된다. 그래서 그 물이 피로써 인연을 또 이룬다는 뜻이다. 이렇게 전부가 인연이다. 흙은 나를 인연으로 만들고 나는 흙을 인연으로 만든다. 서로 서로 인연관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생겨도 않생긴 것이다. 무생법이다.

 

그리고 연기관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以緣成我하니 我無體요, 이연성아 아무체] - 인연으로써 나를 이루었으니, ‘나’라고 하는 본체는 없다.

 

인연으로 내가 되었으니까. ‘나’라고 하는 본체가 없다. 전부 인연뿐이다. 우리 몸에서 물 다 빼고, 체온 다 뻬고, 딱딱한 뼈부분 다 빼면 없다. 우리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도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면 없다. 이것이 오온 개공이라는 것이다.

 

[이연성아하니 아무체]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온이 다 공함을 보았다는 그 말이다. 인연으로써 나를 이루었으니까. 나라고 하는 본체가 없다.

 

[以我成緣 緣無性 이아성연 연무성]이라.

- ‘나’로써 인연을 이루었으니, 인연은 또 본성이 없다.

 

[諸法有無가 元來一 제법유무 원래일]이니, 모든 법은 있다 없다가 원래 하나다.

 

그러니까. 없어지는 것도 인연으로 없어지고, 있는 것도 인연으로 생기니,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인연으로 볼 때는 다 같은 인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없는 인연 다르고 있는 인연 다른 것이 아닌데, 중생들은 그 자아형상에 속아서 있는 것에만 그저 탐애를 하고,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전부 사견이고 마구니 견해다.

 

그래서 [有無諸法이 本無二 유무제법 본무이] - 있다 없다는 모든 제법이 본래 둘이 없다.

 

이렇게 의상스님 법문을 듣고 관법으로 풀어 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표훈스님이 보통스님이 아니다. 이런 것을 성지관이라고 한다.

 

[有時에 非有還同無요, 유시 비유환동무] - 있을 때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없는 거와 같다 - 다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無時에 非無還同有라, 무시 비무환동유] - 없을 때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있는 거와 같다.

이것을 무주관이라 한다. 유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도 인연이 아니면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없는 것도 인연이 아니면 없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유무가 전부 인연 소성법이니까.

 

있는 것이 없는 인연하고 다른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있는 인연하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게 무주관이다. 이런 것이 관법이다.

 

[諸法이 本來不移動이니, 제법 본래불이동] - 모든 법은 본래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인연 뿐이다. 무엇이 여기에서 저기 가고, 저기서 여기 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能觀之心도 亦不起라, 능관지심 역불기] - 능이 보는 마음도 또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부 인연뿐이지, 그게 마음이 어디서 일어나고 마음이 어디서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오관석 五觀釋]이라 한다.

 

상원 원년이면, 674년인데, 경주의 황복사에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전부 무아, 무생, 연기법을 여기서 말씀하셨다. 연기법이 무아법이고, 무아법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이것이 항상 ‘나’에 걸려서

 

-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

라고 고민하는데, 무아를 확실이 보기 전에는 늘상 죽음의 문제,

 

-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느냐?

이런 두려움의 문제를 떠날 수 없다. 그것은 아상을 제대로 보지 못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눈에 무엇이 가려 있으면 침침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침침한 것을 없앨려면 눈에 가린 것을 벗겨내야 한다. 그게 깨달음이다.

 

경봉 노스님 비문에 보면,

 

[四大分時(사대분시) 向三摩處去(향삼마처거)] - 이 몸이 다 해체되었을때 어느 곳으로 갑니까? 

 

이런 내용이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시등이가니라] - 시내에 신발값이 올랐다. 

 

라고 했다. 언어구조는 다르지만 똑 같다.

 

의상스님은 - 이 몸 그대로 법신을 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 [제연은 근본아(諸緣 根本我)요] -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요.

- [일체는 법원심(一切 法源心)요] - 일체는 법의 마음이요.

- [어언은 대요종(語言 大要宗)이요] - 말은 큰 근본이요, 진실은 선지식(眞實 善知識)이니라.

 

라는 사구계(四句偈)로 답했다. 그리고

 

- [너희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한다] 고 하셨다.

 

그런데 경봉 노스님은

 

- 이 몸이 다 분리되어 가지고 흩어져서 죽을 때 어디 곳으로 돌아 갑니까? 라고 하는 질문에

 

- 시내의 신발 값이 올랐다.

 

라고 했다. 어디로 간다는 소리인가? 이게 큰 스님들의 가르침이다. 해탈을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상에 매이지 않는 것이 해탈이다. 그 윤회와 생사 속박은 무엇인가? 아상에 매이는 그것이 윤회요, 그게 속박이고, 그것이 생사다.

 

인연 뿐인데, 인연으로 보지 못하고 아상으로 본다. 그게 생기는 것도 인연이고 사라지는 것도 인연이고, 모든 게 인연이고, 유도 인연이고 무도 인연이고, 큰 것도 인연이고 작은 것도 인연이고, 이렇게 인연 뿐이다. 늙은 것도 인연이고, 젋은 것도 인연 뿐인데, 젋으면 승진한 것처럼 좋아하고 늙으면 무슨 죄인처럼 주눅 드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미쳤나?

 

젊은 게 별거인가? 그게 인연이다. 늙은 게 별거인가? 그게 인연이다. 사는 게 별거인가? 그게 인연이고, 죽는 게 별거인가? 그게 인연이다. 이것은 인연관이라 한다. 이것을 실상관이라 한다. 남자라는 게 별거인가? 그게 인연이고, 남자 떠나서 인연이 있나? 여자라는 게 별거인가? 그게 인연이다. 다 인연 떠나서는 없다.

 

그러니까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 제연 뿐이다. 취하는 생각, 버리는 생각 그게 생사이고, 그게 윤회이고, 그게 고통이다. 그래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취하고 버리는 생각 않이르키는 것 그게 수행이다. 그런데 업장이 많이 두터워 가지고 옛날 버릇이 나온다. 그러니까. 공경하고, 보시하고, 공양하고, 회향한다면 본래 자리로 빨리 돌아 간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금강경, 장엄정토분 제 10 분, 거기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면,

 

- [不應住色生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이란,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라. -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 성향미촉법, 소리, 냄새, 맛, 느낌, 생각 이런 곳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

- 머문다는 것은 집착인데,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애증이다.

 

애증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생사이다. 태어나는 것도 인연이고 죽는 것도 인연이니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 것이 없는 것인데, 스스로 그 아상에 걸려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니까. 그게 집착이고 그게 머무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애증심을 일으키지 말고, 들리는 것에 애증심을 일으켜서는 않된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데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그 마음을 내야 한다. 마음을 낸다는 것은 그냥 인연 따라 내는 것이다.

 

마음 낸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그것이 응무소주이고, 보는 그것이 이생기심이다. 그러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다고 않보나? 다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무엇을 본다고 할 때, 보는 그것이 이생기심이고, 그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좋아 한다든지, 싫어 한다든지를 하지 않는 것이 머물지 않는 것이고, 응무소주다. 머무는바 없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없이 오고, 가고, 앉고, 눕고 하면, 그것이 수행이다.

 

전부 오고, 가고, 앉고, 눕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탐애와 분노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탐애와 분노가 뚝 떨어지면 어디를 간들 아무문제가 없다.

 

그것을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 곳에 따라서 주체성을 갖고 전력을 다하면 진실된 것을 느낄 수 있다(臨濟錄) 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 꽁꽁 묶이느냐?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에 묶이고, 스스로 싫어하는 마음에 묶여서 양명한 대낮에 꼼짝 못하고 그것에 헤메고 다닌다. 그러니까 그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엉뚱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돌아 가는 그것이 수행이다.

 

무엇을 싫어할 것이 있으며, 무엇을 좋아할 것이 있는가? 없다. 내가 싫어하는 것도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기는 것도 인연이요, 사라지는 것도 인연이니까. 어떤 인연을 좋아하고 어떤 인연을 싫어할 것인가? 하는 판단은 그 중생의 사견이다. 그것을 마(魔)라고 한다. 그 아상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전부 마구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 마구니요 !] 라고 하면 아상이 탁 일어나 가지고 막 화를 낸다면 그것을 [속았다 !] 라고 하는 것이다. 나도 평상시에 잘 속는다. 그냥 속게 된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중생은 자주 닦아야 하고, 자꾸 공경해야 한다. 이 공경을 자꾸 닦으면 그 분노심이 잘 않일어 난다. 공경심을 잘 않닦으니까. 예사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닦는게 바로 속지 않을려고 닦는 것이다.

 

[어르신] 하는 것이나 다른 말로 [00]라고 하는 것이나 아무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신에게 속는 것이다. 어떤 시골 어르신이 [촌놈 !]이라고 한다고 해서 화가 나서 짐싸들고 갔다고 한다. 그러면 [시아버님 !] 하는 것이나 [촌놈 !]하는 것이나 다 연기법인데, 자기라고 하는 생각 뚝 떼어놓고 들으면 걸릴것이 없다. 그게 [응무소주]다.

 

그래서 금강경의 수행은 인욕선인이 자기 몸이 갈래 갈래 부서지고, 찢어지고, 흩어져도 화를 않냈다. 그게 응무소주다. 그것이 금강경의 수행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그게 왜냐하면 생기는 것도 인연이고 흩어지는 것도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잘 될까?

 

그러나 여기서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인욕선인이 아픔이나 고통을 못 느낀것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은 뼈속까지 아프다. 단, 원망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감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원망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불에 들어 가는데 몸이 왜 떨리는가?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않된다.

 

감각은 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생기심이다. 응무소주라고 하는 것은 아프기는 해도 어떤 한탄을 한다든지, 분노를 느낀다든지, 원망한다든지,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잘 않된다. 않되니까 닦는다.

 

그래서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 지금처럼 법당을 지어 놓고, 참회도 하고 법문도 듣고, 공부도 하고, 좌선도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되면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깊이 깊이 잘 믿으면 화엄경을 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처음 발심할 때 바로 깨닫는다.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한다.

 

생사열반은 무엇인가? 그 몸이 생사다. 그러면 열반을 무엇인가? 그 몸이 열반이다. 그게 함께 하는 것이다. 그 말로만 해석해도 그렇게 된다.

 

이 몸을 떠나서는 열반이 없다. 이 몸 떠나서는 생사가 없다. 그것을 바로 보는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게 수행이다. 그러면 왜 이 몸이 열반인가? 이 몸이 전부 인연법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 없다.

 

그래서 불생불멸이 열반이다.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생멸한다. 그러니까 이 몸 그대로가 생멸이요, 이 몸 그대로가 불생불멸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의상스님에게,

 

- 어떤 것이 생사고,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의상스님이 답하시길,

 

- 내 몸이 생사고, 내 몸이 열반이다.

 

라고 하셨다.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대로 열반 속에 있는데, 아상으로 탐심과 분노를 계속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그 생사없는 열반에서 스스로가 계속 생사를 만들어서 생사를 받는다.

 

그것을 이름하여 그냥 중생이라고 하고, 그걸 아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누가 일부러 무아라고 하는게 아니고 그대로 연기법이기 때문에 아무리 눈으로 사람을 만들어도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대로가 무아요, 그대로가 열반이고, 그대로가 해탈인데, 다만 중생이 아상이라고 하는 생각을 항상 일으켜서 그 아상에 속아서 욕심을 일으키고, 욕심대로 않되니까. 화를 일으켜 가지고 그 탐애와 분노가 계속 되니까 그것이 고통이요, 그것이 속박이고, 그것이 생사의 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잘 믿고 자꾸 닦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런데 그것을 신심으로 자꾸 접근해야지, 자기 생각을 그냥 계속 가지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되는 일이 없다.

 

신심으로 자꾸 닦아서 자기 삿된 마음을 자기가 자꾸 청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져서 차츰차츰 높은 경지에 올라 간다. 그 무아를 그런 실천을 통해서 자꾸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 종범스님 -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371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