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반야의 실천

수선님 2018. 5. 27. 13:22

반야의 실천

 

* 행복은 마음에 있다. 좋은 마음을 실천할 때, 그 자리에 행복이 생긴다. 그 마음이란 반야이다. 반야를 실천하면 그 반야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기쁨이 있다.

 

그러면 반야는 어떻게 실천하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무주행(無住行)과 무상행(無相行)이다. 이 두 가지가 반야의 큰 흐름이 되는 이유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살펴보면 보이는 형상에 묶여서 불행해진다.

 

모든 고통이 이러한 분상으로부터 나온다. 상을 떠나서는 두려움도 없고, 고통도 없다. 무상행을 닦는 것은 바로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실천한다.

 

첫 째, 무주행(無住行)은 왜 필요한가? 중생의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그것은 바라는 것에서부터 온다. 바라는 것은 [머문다]고 한다. 머문다는 것은 애정이라고 한다. 머문다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한다고 한다. 애정이 없으면 불행이 없다.

 

모든 어려운 일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에서 생겨난다. 무주행(無住行)을 닦으면 그 순간 행복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무상행(無相行)은 어떻게 닦는가? 금강경에서 제상이 비상이라는 것을 알면 여래를 본다.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본다고 하였다.(諸相非相 卽見如來)

 

중생이 접하는 것은 전부 분상(分相)이다. 분상(分相)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 제상은 비상(諸相非相)이다. 여러 가지가 모여서 된것이 연기법이다.

 

사람은 사람이 아닌 여러 가지가 모여서 사람이 되었다. 인연으로 생긴 연기법이 무상(無相)이다. 그러면 무상(無相)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중하고 통찰해야 한다.

 

집중이란 몸과 생각이 같다고 한다. 그리고 집중을 하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을 넓게 만드는 실천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실천이다.

 

다음 통찰이란 무엇인가? 통찰은 관조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에서 무상행(無相行)을 보는 지혜란 무엇인가? 금강경에서는 여섯 가지 비유로 보라고 한다.

 

모든 형상은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인데, 그것을 일체유의법(一切有爲法)라고 한다. 인연으로 생긴 것은 전부 일체유의법라고 한다.

 

일체유의법을 여섯 가지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몽관(如夢觀), 꿈같이 보고,

2, 여환관(如幻觀), 허수아비처럼 보고,

3, 여포관(如泡觀), 물거품같이 보고,

4, 여영관(如影觀), 그림자처럼 보고,

5, 여로관(如露觀), 이슬같이 보고,

6, 여전관(如電觀), 번개처럼 보라.

 

고 한다. 이것이 무상행(無相行)이고, 관(觀)이다. 무상행(無相行)이 되지 않고 관(觀)이 않되면 통찰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하였다. 우리 몸안에는 우주가 다 들어 있다. 그리고 공(空)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이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무상행(無相行)이며, 반야행이다.

“목마른 사슴이 저 멀리 아지랑이를 보고 쫒아가 보지만 물이 없다. 이렇게 매일 멀리 있는 아리랑이만 찾아다니다가 죽는 것과 같다.”

 

나의 지혜는 안에서 닦아야 행복한데, 행복이 마음 밖에 있는 줄 알고 밖에서 구한다. 하지만 지혜는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생은 끊임없이 구하다 죽는 것이 큰 문제이다.

 

“원숭이가 연못 속에서 달을 건지는 것과 같다” 지혜는 실천해야 행복하다. 그리고 공덕은 짓거나 베풀되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않된다.

 

불수복덕(不受福德) 불퇴정진(精進不退) 이것이 무주행(無住行)이다. 선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 지계, 인욕을 통해서 열반에 머물지 않고 선정, 정진을 통해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실천인 바라밀이다.

 

행복이란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실천하는데 있다.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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