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涅槃)의 참뜻 - 오형근(동국대교수)
열반(Nirvana)이라는 말은 본래 마음을 혼란케하고 불안하게 하는 번뇌가 모두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반은 번뇌의 반대말이다. 학설에 의하면 번뇌가 열반을 장애하는 것을 번뇌장(煩腦障)이라고 한다. 번뇌장이라는 번뇌가 있는 한 열반의 경지가 나타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선과 염불을 해서 번뇌를 정화해야 하며 번뇌가 정화되면 곧 열반이 실현되게 된다. 이러한 열반의 경지를 멸(滅) 또는 적멸(寂滅), 그리고 원적(圓寂), 무위(無爲), 무작(無作), 무생(無生), 멸도(滅度) 등으로 풀이한다. 이 말들은 모두 번뇌가 없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고 즐거움만 나타나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몇 가지 예로 풀이해 보기로 한다.
1. 원적(圓寂)은, 우리 마음에는 번뇌로 말미암아 고통과 불안 등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번뇌가 원만하게 정화되고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뜻이다.
2. 적멸(寂滅)은, 마음에서 야여 소멸시키고 고요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3. 무위(無爲)는, 번뇌에 의하여 조작되어지는 생멸의 상태가 완전히 없어지고 조작이 없고 변함이 없는 본성에 도달한 경지를 뜻한다.
4. 무작(無作)은, 번뇌에 의하여 선(善)과 악(惡)이 조작되는 것이지만 번뇌가 없는 열반에는 조작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5. 무생(無生)은, 중생은 번뇌라는 무지 때문에 악업과 선업을 지어서 생(生)과 사(死)의 윤회를 하게 되는데 열반에는 번뇌가 없으므로 생(生)과 사(死)의 윤회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6. 멸도(滅度)는 육바라밀(六波羅密)등의 수행을 통하여 번뇌로운 마음을 정화하고 진여(眞如)와 불성(佛性)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열반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번뇌장(煩惱障)과 그리고 지혜(知慧)의 활용을 장애하고 무지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정화하고 단멸한 경지를 의미한다. 열반을 취멸(吹滅)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이러한 번뇌를 정화했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열반의 경지를 정하는 사상이 있으며 이는 보통 대승불교에서 유래된 열반관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 가운데 사열반관(四涅槃觀)이 가장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열반관이란
1.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
2.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3.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4.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등을 말한다. 이들 내용을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한다.
1. 자성청정열반(子城淸淨涅槃)은,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여성(眞如性)과 불성(佛性)이 항상 청정하기 때문에 열반의 의미를 본래부터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2.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은, 여의(餘依)는 번뇌가 마음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번뇌가 마음에 의존하고 있지만 보살의 수행으로 많은 번뇌가 정화되고 약간의 번뇌가 아직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마음이 정화되었기 때문에 지혜가 활발하게 나타나서 진리를 잘 관찰하고 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리롭게 수용하게 되며 여기에 열반의 경지가 구현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처에 안락국이라는 말과 같이 청정한 지혜와 불심(佛心)을 가지고 생활하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지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대승불교에서는 유심주의적(唯心主義的)인 열반사상을 말하고 있다. 번뇌가 있으면 열반이 실현되지 못하고 번뇌가 완전히 정화되면 곧 열반이 실현된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열반관이다.
그러나 열반이란 뜻을 소승불교에서는 업력으로 출생한 육체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정하게 된 전통이 있어 왔다고 한다. 소승불교는 업력사상을 중요시하고 또 윤회사상을 중시하여 왔다. 이러한 업력사상에 입각하여 볼 때 인간의 몸은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출생한 것이기 때문에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대해서도 소승불교에서는 여의(餘依)를 대승불교와 같이 번뇌로 보지 않고 육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육체가 생존해 있으면 아무리 마음이 정화되어 번뇌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 유여의열반(裕餘依涅槃)이라 하였다. 그리고 번뇌도 정화되고 육체도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경우를 완전한 열반으로 간주하여 이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열반에 대한 해석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간에 많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불교에서 사람이 죽은 것을 열반이라고 표현한 것은 소승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12월8일 보리수 아래에서 모든 번뇌를 끊고 성불(成佛)한 것을 열반이라고도 칭하는데 이는 대승불교적인 열반관에서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타는 45년간의 중생교화를 마치고 2월15일에 사라수(沙羅樹)라는 나무 사이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는 소승불교적인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불타의 팔상(八相)을 말할 때 열반상(涅槃相)이라고 한 것도 2월15일의 열반을 상징한 말인 것이다.
이제 우리 불자들은 2월15일을 열반일로 이해하고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사찰에 찾아가서 불공을 드리는 일이 상식화 되어 있다. 이는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사(佛事)가운데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열반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불타의 열반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한다.
불타는 중인도(中印度)의 구시나가라 라는 성(城)밖에 있는 발제하(跋提河)라는 언덕에서 쉬고 계셨다. 그 언덕에는 사라(sala)라는 나무가 네 쌍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쌍팔쌍(四雙八雙)의 사라수가 있었는데 그 나무 사이에서 쉬고 계시다가 열반하셨다. 불타의 몸은 본래 학(鶴)의 색(色)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진상(眞常), 진락(眞樂), 진아(眞我), 진정(眞淨)에 비유하기도 한다. 진상은 변함이 없는 것을 뜻하고, 진락은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하며, 진아는 참된 자아를 뜻하고, 진정은 진실하게 청정한 것을 뜻한다.
이 때 불타의 수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기사굴산이라는 곳에서 선정(禪定)을 닦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와 달의 빛이 없어졌으며 동시에 새와 짐승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가섭존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것은 세존께서 몸이 쇄약해져서 입적(入寂)을 알리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가섭은 바로 신통력으로 곧 달려가고 싶었으나 경망스럽게 행동을 할 수가 없어 7일간을 걸어서 발제하에 도착하였다. 가섭존자는 곧 널을 돌면서 널앞에 경례를 드리고 말하기를 '이제 부처님을 대하니 어떤 면으로 보아도 열반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데 제가 경례를 드린 것에 대한 표시를 하여 주소서.'라고 발원을 하였다. 그 때 부처님의 두 발이 널 밖으로 나왔다. 그 발에서는 천개의 해가 환하게 조명한 것과 같이 밝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두 발이 곽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러한 부사의한 경지르 곽시쌍부(槨示雙趺)라 하고 이에 대하여 선문염송(禪門念誦)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영혼의 근원은 본래 담적(湛寂)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고 현재도 없다. 마음의 묘체(妙諦)는 신령스럽고 밝은 것인데 어찌 생(生)과 사(死)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 발제하의 언덕에서 부처님이 널밖으로 두발을 보이실 수 있었느니라.'
이와 같이 선문염송에서는 불타의 열반을 찬탄하고 마음의 근원은 생사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고 있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염송(念誦)의 글은 관음시식(觀音施食)이라는 천도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생에 애착을 가진 영혼을 달래고 위안하며 진여심(眞如心)의 본성(本性)은 생과 사가 없고 윤회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설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禪師)인 단제선사(斷際禪師)도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죽으려 할 때 오온(五蘊)이 공(空)한 것이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四大)로 된 몸도 내가 아니라고 관하라. 그리고 진심(眞心)은 모습이 없는 것이고 가고 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출생할 때 성품이 온 것이 아니고 사망할 때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잠연하고 원만하여 고요한 마음에는 경계가 동일한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것을 깨달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구속됨이 없을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출세인(出世人)이락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열반관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열반관을 증득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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